갈라디아서

2006 갈라디아서 11강

아빠와 함께 2023. 5. 18. 14:07

갈라디아서 제 11강 (이근호목사, 2006년 12월 08일(1), 서울의존교회)

지난시간의 강의한 것을 잠깐 정리합니다. 이 세상에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특수한 사람들이 생겨났어요. 예수님 때문에 특수한 사람들이 나타난 겁니다. 이들은 육체로 태어난 사람이 아니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특별히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육체로 태어난 보통 육체의 사람이 있고, 예수님에 의해서 생겨난 사람이 있습니다.

둘 중에서 어느 쪽이 완벽할까요? 육체에 의해서 생겨난 사람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에 의해서 생겨난 사람이 완벽할까요? 예수님에 의해서 생겨난 사람이 완벽합니다. 그 완벽함이 어느 정도일까요? 그 사람이 어떤 실수를 하고 어떤 죄를 지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완벽해 버립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학교에 어떤 어린이가 있는데 교장선생님의 아들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런 소원을 가지고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으려고 애를 썼는데 아무리 해도 교장선생님의 아들로는 합당치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장 선생님께서 “너는 이제 내 아들이야”라고 이야기를 한 순간부터 그 사람이 아무리 어설프게 행동하고  실수가 많고 잘못한 것이 있더라도, 한번 교장선생님의 아들이 되었으면 계속해서 교장 선생님의 아들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에 의해서 생겨난 사람은 앞으로 살면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손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고 완전한 사람입니다. 완벽하고 완전한 사람이니까 스스로 자기에게 손대려고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제가 전에 ‘미스터 빈’ 이라는 아주 우스운 코미디영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 ‘미스터 빈’ 이라는 사람이 약 100억원 정도의 값이 나가는 유명한 명화, 완벽한 명화를 소장하고 있는데 거기에다가 알콜을 발라서 작품을 다 버려 놨어요.

예수님이 완벽하다고 만들어준 성도를 우리가, ‘이것은 모자라. 이것은 수정해야 돼. 이것은 뜯어 고쳐야 돼. 성격 바꿔야 돼’, 하는 식으로 우리 자신을 뜯어 고치려고 애를 씁니까? 그러면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지요. 앙드레 김이라는 유명한 디자이너가 있습니다. 그분이 드레스를 삼백만원 들여서 잘 만들어 놓았어요. 그 드레스를 어떤 분에게 선물했습니다. 그런데 그 선물을 받은 사람이 ‘이것은 소매를 더 잘라야 돼’ 하면서 가위로 소매를 자르고, ‘여기는 빨간 물감을 들여야 돼’ 하면서 물을 들여 놓았어요.

나중에 앙드레 김이 그 집에 놀러 와서,

“내가 전에 준 그 드레스 한번 봅시다”
“---”
“헉! 이것은 엉망진창? 이런 어설프기 짝이 없는 엉터리 같은 드레스는 누구 겁니까?”
“그게 앙드레김 선생님이 선물로 준 드레스인데요.”
“누가 이렇게 망쳐 놓았나요?”
“망쳐 놓은 것이 아니고 잘해 보려고 이런 저런 것(칠하고, 자르고)을 해 놓은 겁니다.”
“이런! 내가 처음부터 줄 때 손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준 것을”

예수님이 처음부터 줄 때 완벽하게 선물로 준 것을 자기가 보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것 고치고, 그러면 안 됩니다. 성도(聖徒)라는 것, 글자 그대로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가 추가적으로 손댈 필요조차 없습니다. 이것을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과 성도를 비교도 하지 마세요. ‘교회 안다니지만 재산이 한 백억이 된다. 나는 교회 다니지만 재산이 100만원뿐이다. 하나님은 뭐하시나? 나에게 돈 안주시고 뭐하시나’ 이렇게 비교를 하지 마세요.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천억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돈이 없더라도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가치를 비교할 수 없어요. 금은방에 가 보면 금으로 만든 메달을 팔아요. 그 메달이 귀할까요, 아니면 유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고생고생 해서 딴 올림픽 금메달이 귀할까요?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이 메달은 돈 주고도 못 사잖아요. 귀하잖아요. 우리가 예수님의 사람이 된 것은 우리가 손대서 돈 주고 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만들어 놓은 작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거기에다가 ‘에이! 맘에 안 들어. 손 좀 봐야 돼. 뜯어 고쳐야 돼. 성격도 바꾸고, 말씨도 바꾸고, 다 바꿔야 돼.’ 이런 식으로 자꾸 거기에 손을 대는 것은 주인님이 누구 신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예수님의 성도가 되었으면 족히 뭐하지 말라? 세상 사람과 비교하지 마세요. 세상 사람과 비교가 안 됩니다. 그 정도로 고귀한 거예요. 너무 완벽해서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것이 오늘날 성도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있어요. 그 복은 이삭이라는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아브라함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복을 받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은 ‘어떻게 내 몸에서 저런 자식이 나왔느냐’ 는 겁니다. 그 이삭은 복을 받았기에 주어진 것이지 자기가 생산해 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냥 주신 것이다’ 라는 것을 인정한 것을 가지고 ‘믿음’ 이라고 한 겁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나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이, 웬 은혜인지 웬 사건인지, 내 속에 이미 주어져 있다’ 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자신이 생산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따로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주신 복은 아닙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은 이삭이라는 아들만 복이지 이스마엘이라는 인간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자고 하는 것은, ‘이스마엘은 아니요, 이삭은 맞습니다’ 라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그게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사람이란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한 종류는 육체의 사람이 있고, 또 한 종류는 예수님으로 만 생겨난 사람입니다.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은, ‘육체로 난 사람은 흠이 많고 부족한 것이 많지만, 예수님으로 난 사람은 따로 더 손을 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고 했습니다. 이 둘 사이에 가치를 비교할 수가 없어요. 그 정도로 예수님에게 난 것은 완벽합니다.

예수님으로 난 사람은 완벽하다는 말을 오늘 강의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번 반복하고 싶어요. 왜 그러냐 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예수님의 성도라 하면서도 자기가 자기를 맘에 안 들어 해요. ‘나는 왜 자꾸 방구를 뀌는가?’ 방구는 천 번을 뀌어도 괜찮아요. 주님 보시기에 흠이 없으면 되지 왜 그것 가지고 관심을 두느냐 말이죠. ‘나는 왜 그렇게 눈이 나빠?’ 눈이 나빠도 괜찮습니다. 그것이 흠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완벽합니다. ‘나는 왜 머리가 나빠?’ 그거 흠이 아닙니다. 머리 나쁜 채로 완벽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맘에 안 들면 자꾸 마귀의 시험에 들어요. 이것은 외모뿐만이 아니고 자기 과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죠. ‘과거 어느 때 차를 몰고 가다가 사람을 다치게 했는데 그 과거만 아니면 나의 과거는 참 깨끗한 과거인데 그때 과속으로 몰다가 사람을 다치게 한 그 일로 인해서 나의 과거에 흠집이 남았다’ 는 그런 생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사람을 다치게 한 정도가 아니라 사람 열을 죽였어도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님으로 난 사람은 완벽합니다.

주님이 완벽하다고 새로 만들어 놓았는데 왜 거기에다가 침을 뱉고, 손가락질을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기고 자꾸 토를 달고 불만스러워 하면 되겠어요?  아브라함의 복이 뭐라고요? 이삭이죠. 아브라함의 믿음은 뭐지요? ‘이삭이 복이고 이스마엘은 아니올시다’ 라고 구분할 수 있을 때 그것이 믿음입니다. 왜 ‘이스마엘은 아니올시다’ 입니까? 이스마엘은 내가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어야 그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노력하지도 않고, 착하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고 만들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원하는 복이라는 사실, 이스마엘과 차별되게 구별해서 이삭이 복임을 아는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안 믿었어요. 왜냐하면 자기자신을 믿게 되면 계속해서 제 2, 제 3의 이스마엘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계속 이스마엘 같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만일에 아브라함이 이스마엘 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은, 이스마엘 같은 것을 낳고 싶어 한다는 것은 ‘이삭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하고, 이삭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는 것이고 ‘이삭으로 완료되었고 완전하다’ 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경우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그런 경우에 해당이 안 됩니다만.

지난 강의에서 언급한 “아브라함의 자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다” 는 이 말은 “당신들 자신들로 말미암아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라는 뜻입니다. 제가 여기 있는 이 모과차를 마시고 있는데, 이 모과차를 만드는데 제가 보태준   것도 없고 일체 도움을 준 것이 없어요. 그냥 마시기만 했습니다. 감사하죠. 그런데 만약에 이 모과차가 맛있다고 해서 내가 따로 만들어 버리면 그 모과차에 대해서 감사할 것이 없지요. 왜냐하면 내가 애써서 모과차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이 지상에서 내가 만든 것은 일체 하나님께서 인정치 아니한다는 것, 그런 것을 죄라고 규정해서 밀쳐 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대구 우리 교회 게시판에 보니까 서울의존교회에서 함께 이 강의를 들으면서 공부하시는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제가 입은 이 셔츠가 저를 30대로 젊어보이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만 보니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는데 아무리 추워도 이 셔츠를 입고 와야 될 판국입니다.

고개를 숙이면 50대임이 보이기에 고개를 들어야 하고요. 고개도 들어야 하고 30대로 보이는 일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영하 20도가 되어도 줄무늬 티를 입고 와야 됩니다. 이 셔츠는 제가 고른 것이 아니라 제 딸, 진주가 골라 준 겁니다. 제 아내는 이런 안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만든 옷을 우리에게 입히고 “아! 보기 되게 좋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자기가 애쓴 것을 우리에게 안겨놓고 우리 보고 예쁘다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계속해서 이스마엘같은 것을 나름대로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이 좋다는 것에 대해서 동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나에게 만족할 때까지 계속 만들어 내고자 하는 거예요. ‘나는 여자를 보고도 음욕을 품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백화점의 물건을 보고도 탐내지 않아야 되고, 10년이 지나는 동안도 거짓말 한번도 안 해야 되고, 부모한테 꼭꼭 전화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형제에게 미움도 없어야 그래야 나는 만족한다’ 고.

이것은 자기가 성경을 보면서 스스로 자기가 만족할 만한 우수하고 질 좋은 자아를 만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애쓰는 모습이지만, 그런 행동을 한다는 자체, ‘나도 의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고 하는 그 자체가 예수님이 주신 복과 대립된다는 점에서 그게 죄가 된다는 겁니다. 완벽한 게 없으면 죄라는 것이 성립이 안돼요.

‘십계명 지키려고 참 어지간히 애를 쓰는 구나. 잘해 봐. 훌륭한 사람 될 거야 아마. 너는 그런 자질이 있어’ 라고 스스로 격려할지 모르겠지만 이미 주님 보시기에 손댈 필요도 없을 정도로 완벽한 ‘나’ 가 있어서 그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남들과 비교할 필요도 없는데, 현재 내 모습에 불만을 품고 또 거기에 무엇을 추가해서 뭔가 거룩의 티를 낸다든지 해버리면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이삭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스마엘을 이삭으로 바꾸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그게 가당키나 합니까? 울산 성경공부때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백화점 쇼윈도에 예쁜 드레스를 진열해 놓았습니다. 교회 다니는 어떤 주부가 그걸 보고 입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다른 옷이 집에 있지만 새로운 스타일의 옷을 보고 입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서 내부에서 싸움이 일어나요. “아! 저 드레스가 나를 시험케 하는 구나.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 로다.”

이런 식으로 마구 스스로 되지도 않는 싸움을 하는 겁니다. 이미 봐 놓고는 벌써 기억해서 뇌리에 박혔는데 그걸 이제는 안 보겠다는 식으로 애를 쓴다고요. “주여! 승리케 하옵소서.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 주기도문을 억지로 외우면서 한번 이겼어요. 그 다음날 또 지나갑니다. “사탄아! 네가 나를 넘어지게 하는 구나” 또 안쳐다 본다고 하면서 두 번 이겼어요. 열두 번을 지나갔습니다. 열세 번째 사버립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하나님이여! 그래도 3백만 원 짜리는 안 샀습니다.” 스스로 자기 변명을 해야 돼요. “이 옷감 다 입는 옷감이고 값도 150만원 밖에 안 하는데 뭐. 다른 사람들은 3백만 원 짜리 다 사 입고 다니는데, 그래도 나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해서 비싼 것 탐내지 않고 150만원 짜리는 샀으니까, 주여 부족한 것 좀 있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그래 놓고는 3년 뒤에 3백만 원 짜리 사는데, 그것도 열서너 번 ‘시험 드네, 마네’ 하다가 사버립니다. 그래 놓고는 또 “주여! 500만원 짜리는 안 샀잖아요.

여전히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겁니다. 그래서 나에게 믿음이 없으면 내가 불만이라는 것. 제가 적어 보겠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말인지. ‘나에게 믿음이 없으면 안 돼. 나는 믿음이 있는 자라야 돼’ 라고 생각하는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에게 불만족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이야기 할게요. 예수님 보시기에 이미 완벽한데, 내가 나 보기에 믿음이 부족한 것이 못마땅한 겁니다.

그래서 믿음을 더 키우기 위해서 나무뿌리를 뽑든지 기도원에 가서 40일 연속기도를 하든지 간에 내가 흡족할 때 까지 내 믿음을 키우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방해하는 것이 150만원짜리 드레스고, 길가는 예쁜 아가씨고, 호화주택에 사는 옆집 아저씨고, 자기보다 수입이 더 몇백만원씩 더 받는 이웃집 아저씨라는 겁니다. 자기 생각에는 ‘그걸 이겨야 내 마음에 흡족하게 제대로 된 거룩한 성도답다’ 고 자기 스스로 기준을 정해 놓은 겁니다.

그래서 힘들게 싸우는 겁니다. 힘들게 싸우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서 얼마나 좁게 생각하는지요. 이 세상의 구조라는 것은 공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동서남북으로 맘대로 이동할 수 있는 자유가 없어요. 이 세상은 어느 정도로 꽉 차 있느냐 하면, 남이 떠밀면 떠밀리고 싶지 않아도 떠밀리도록 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내가 원해서 갈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누군가 떠밀리면서 나를 떠밀게 되어 있습니다. 

도미노 게임을 아십니까? 이 세상에 어떤 경제적 요인이 있고 정치적 상황이 벌어지면 그 상황이 여파로 퍼지면 저 강원도나 섬에 사는 사람들에게 까지 다 퍼지게 되어 있어요. 이 세상은 혼자서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강남이 아파트 값이 오르면 다른 곳도 자연스럽게 오르게 되어 있어요. 은행대출 이자가 높아지면 자연스레 부동산 투기가 약화되기 마련입니다. 혼자 사는 세계가 아닙니다.

아무리 혼자서 ‘성령의 감화 감동 어쩌고’ 하다가도, 갑자기 퇴근한 남편이 와서 화를 내면 그동안 하루 종일 유지했던 성령의 감동이고 감화고 뭐고 한순간에 다 날아가 버립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적절한 이야기를 했어요. “사람의 행동이라는 것은 아침의 화장실에 달려있다. 아침에 변 잘 보면 누가 뭐래도 ‘굿 모닝’ 하고 기분 좋다가, 아침에 변비가 되어 버리면 누가 와도 인상을 찌푸리고 기분 나빠서 회사일도 잘 안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이웃사랑이니 성화니 뭐니 한다? 세상에! 화장실에서 결정될 문제이고 몸의 컨디션 문제인데.”

‘세상을 넓게 보지 못하고 자기 변명조로만 세상을 보느냐’ 이 말 입니다. 우리 어린이들은 잘 모르지만 커서 사회에 나가보면 이 자본주의라는 사회는 생산과 소비가 균형이 유지되는 쪽으로 움직이거든요. 이 말은 ‘무엇이 옳다 무엇이 참되다’ 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소비자가 무엇을 찾느냐’ 를 따져서 생산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딴에는 아무리 좋은 상품, 보람 있는 것을 만들어 내도 소비자가 찾지 않는 상품은 그 상품가치가 이미 깨어진 겁니다. 기술조차 쓸데없는 기술이 되어 버립니다.

사회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저쪽에서 원하면 내가 원치 않아도 그대로 따라 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산속에 들어가든지 아예 자살해야 합니다. 겨울이라 추워서 한강에서 자살하는 사람도 별로 없어요. 물이 따듯해야 되는데 겨울에는 춥잖아요.

아브라함이 복을 믿었다는 말은 예상치도 못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셔도 내가 할 수 있는 그 경계선 너머(도저히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에서 일을 다 해서 내가 두 번 다시 그것을 흉내 내지 못할 정도로, 두 번 다시 그걸 따라하지 못할 정도로 완제품을 만들어서 그냥 줘버리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날 구원하는 방식은 비록 내가 알았다 할지라도 두 번 다시 그것을 내가 흉내를 못 냅니다. 그대로 만들어 내지를 못해요. 내가 십자가 백번 진다고 해서 새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단번에 진 십자가가 완제품을 만들었다면 그것으로 손댈 필요조차 없도록 완전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줄때까지 얼마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개인적인 믿음을 믿음이 아니라고 얼마나 쳤습니까?

“믿음 아니야. 그것은 믿음도 아니야” 라고 계속 치는 거예요. 결국은 믿음조차도 나에게서 나오는 믿음은 믿음이라고 인정을 하지 않는 겁니다. 자, 이제부터 갈라디아서 4장에 들어가는데 제가 이렇게 서론을 길게 하는 이유는 갈라디아서 4장이 무척 어려워서 그래요. 갈라디아서 4장이 무척 어렵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  믿음으로 절대로 구원 못 받는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4장입니다.

내 믿음으로는 구원 못 받아요. 그러면 누구의 믿음인가? 예수님의 믿음이 우리 속에 들어와 줘야 그 믿음이 복입니다. 그 믿음이 이삭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만 준 것이 아니고, 이삭과 더불어서 이삭을 믿을만한 믿음까지 아브라함에게 준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증명한 것이 뭡니까? 이삭을 도로 회수할 때 아브라함의 믿음도 하나님의 주신 믿음이기에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순종할 수 있었던 겁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믿음으로 이삭을 바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매일 믿음을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그 믿음은 헛방입니다.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고 찢어 버립니다.  내가 생각한 믿음을 잠시 찢어 보세요. 그러면 여러분에게 뭔가 남은 것이 있습니까? ‘나는 믿는다. 나는 예수를 잘 믿고 있다.’ 그것을 한번 찢어 보세요. 찢고 난 뒤에 뭔가 남은 것이 있습니까? 남은 것이 있어야 돼요. 내가 믿는 믿음은 찢어져도 주께서 주신 믿음에 의해서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기 믿음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아까 설명한 것 같이 자기 맘에 들 때까지 자기 믿음을 수정하게 돼요. 수정하다가 그것도 만만치 않으면 그 때마다 화풀이를 하나님께 하게 됩니다. ‘ 는 믿고자 하는데 하나님이 안도와 줬기 때문에 내가 믿음이 없습니다’ 라는 식으로 모든 책임전가를 하나님께 해버립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기껏해야 이스마엘밖에 안 나옵니다.

이스마엘은 복이 아닙니다. 자기가 예상한 일종의 기대치였고 목표였을 뿐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두 번 다시 욕심내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 라는 이 ‘나’ 라는 인간과 예수님이 거듭나게 하신 ‘나’ 하고 어느 것이 가치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주신 ‘나’ 가 가치 있는 ‘나’ 잖아요. 이것이 가치 있으면 왜 자꾸 ‘내가 앞으로 두 번 다시 욕심내지 않겠다’ 는 이런 것을 왜 따로 만들어서 예수님이 주신 진짜 ‘나’ 의 가치를 훼손시키냐는 말입니다.

그 점을 그림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여기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죄가 있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예수님 본인의 죄가 없지요? 그러면 십자가에서 저주받는 죄는 누구 때문입니까? 예수님이 앞으로 구원해 낼 사람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졌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누가 있어야 합니까? 구원받아야 될 사람들이 있지요.

구원받아야 될 이 사람이 구원받지 않겠다고 도망을 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여기 있는 비타 500의 죄를 위해서 제가(예수님이라고 치고) 십자가를 진다고 칩시다. 이 비타 500이 자기는 독립적으로 살겠다고 자꾸 도망을 치려고 해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 비타 500이 도망치도록 그냥 놓아 주고 포기하겠습니까? 포기 못합니다. 왜? 비타 500이 있어야 십자가가 의미가 생기니까요. “네가 가버리면 나는 누구 때문에 십자가 죄짐을 졌나?” 그 말입니다.

그래서 마귀에게 빼앗길 수도 없고, 이것을 놓아주지도 않습니다. 끝까지 끝까지 붙들어 놓아야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에 이삭이 와야 되는 이유가 뭡니까? 아브라함이 자기 본토 집을 떠나는 것부터 전부 다 자기 뜻은 하나도 없어요. 맨 날 아브라함은 도망치는 것 밖에 않 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놓지를 않는 거예요. 주께서 나를 놓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믿습니다’ 가 믿음이 아니라, ‘주께서 절대로 놓지 않았다’ 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도망치고 싶고, 심지어 하나님을 저주하고서라도 도망치고 싶어도 하나님의 허락이 나지를 않아요. 알고 보니 십자가를 질 때 이미 나의 죄를 지기 위한 십자가이기에 나를 놓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믿음이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거예요. 주님이 하신 일을 믿죠. 아브라함이 무슨 짓을 해도 아브라함은 구원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뭡니까? 이삭을 위해서 아브라함은 구원받게 되어 있어요. 이삭에게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나와야 되니까요. 다윗도 무슨 짓을 해도 구원받게 되어 있고, 사울은 무슨 짓을 해도 저주 받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십자가에서 죄를 씻어줄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열두제자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여한 제자가 몇 명쯤 될까요? 한명뿐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가룟유다입니다.

가룟유다만이 예수님 십자가 지시는 일에 관여했고 나머지 11제자는 예수님께서 병고치고, 이적을 베풀 때 열심히 따라다녔어도 막상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는 다 도망가고 숨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 가룟유다에 대해서 “내가 열둘을 선택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다”(요 6:70) 라고 했어요. 마귀는 십자가밖에 몰라요. 참 이 말이 은혜롭습니다. 마귀는 십자가밖에 모릅니다.

나머지 열한 제자는 상대도 하지 않았어요. 마귀가 노린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효화 시키는 겁니다. 베드로가 “제가 죽기 까지 따라 가겠다”고 고백하면서 아무리 애를 써도 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요 13:1)는데 가룟유다는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가룟유다가 자기 스승을 팔았다는 것을 뉘우쳤습니다. 그러면 가룟유다가 구원받았습니까?

가룟유다와 베드로의 차이점은 가룟유다가 베드로의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룟유다는 버려야 되고 베드로는 아무리 예수님을 저주하더라도 끝까지 사랑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그래서 베드로가 구원받은 겁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이것을 알아야 돼요. 예수님께서 나에게 손을 댔다면 그 자체로 나는 완벽하고 완전해서 더 이상 수정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계명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요 15:12).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만 관계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법적인 조치를 해달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소위 법정적칭의라는 말을 합니다. 주님께서는 법적으로 우리와 관계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면 구원받는 거예요. 무슨 ‘법적인 신분을 보장하라’는 이런 식은 없어요.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을 보장받아서 뭐할 겁니까? 이스마엘을 만들어 내려고요? 십자가라는 것은 구원받는 사람이 있어야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예수 믿는 사람이 더불어 죽는데, 그때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는 믿음의 관계가 있습니다. 지금 제가 설명하는 것은 ‘우리 믿음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예수님이 주신 믿음으로 구원된다’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고 할때 확성기를 들고 “이 앉은뱅이야! 일어나라! 일어나라!” 이렇게 고함을 질렀습니까? 천번 만번 외쳤습니까? 아무리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의 귀에다 대고 고함치듯이 이야기를 해도 예수님이 주신 믿음이 그 사람에게 임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믿음이 생길 때는 (소곤소곤) “앉은뱅이님! 일어나세요.”, 또는 경상도 말로 “일어나 봐라 카이” 하든지, 전라도 말로 “일어나 보랑깨” 하든지, 충청도 말로 “일어나유” 하든지 관계없이 주님이 주신 믿음이 그 사람을 낫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낫게 했다고 난리를 피웁니다.

그때 베드로가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경건과 권능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행 3:12, 16)고 하면서 “우리는 목격자에 불과하다”(행 3:15)고 합니다.

다시 정리해 봅니다. 성도는 추후에 따로 자기를 손대고 관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 어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성도를 성도되게 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라면 우리 믿음을 관리하든지 해야 될 것인데, 우리 믿음은 아예 인정하지도 않고 주님이 주신 믿음이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신 믿음이란, 주님이 죽으신 십자가에 우리도 함께 죽었던 그 십자가의 내용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십자가의 내용은 우리가 취소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도망치려고 해도 십자가가 우리를 놓지를 않습니다. 왜? 우리를 붙들어 놓아야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가 말이 되거든요. 1번부터 100번까지 문제를 다 풀어 놓아야 그것이 100점인데, 1번만 풀고 백점이라고 하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택한 백성은 구원에 대해서 완전히 해결점을 봐야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택한 백성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 택한 백성에 대해서는 택한 백성 본인도 자신에 대해서 손 댈 필요가 없다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택한 백성 본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못마땅할 필요가 아예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못마땅할 필요가 없다면 뭘 해야 됩니까? ‘왜 나에게서 난 것은 아닌가’ 를 알아 가면 되지요.

왜 주님이 주신 것은 성도로서 완벽하고, 내가 낳은 거룩, 내가 낳은 성실, 내가 낳은 열심, 나의 선한 착함, 심지어 나의 악함까지 왜 주님께서 그것들은 보지도 않고 아예 밀치는가? 놀라운 사실은 주님께서 나의 선함도 안 보고, 나의 악함도 안 본다는 겁니다. 그것을 알아 감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예수님이 주셨다’ 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 그림을 봅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모든 것을 다 이루는데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는 믿음이 생겼어요. 이 예수님의 믿음은 고난 받는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번지점프 하듯이 뛰어 내리는 겁니다. 다만 예수님의 번지점프는 발목에 건 밧줄도 없어요. 아버지의 뜻에 창공에 몸을 던지듯이 그냥 몸을 날려 버립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그겁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냥 아버지의 뜻에다가 모든 것을 다 던져 버린 겁니다. 그래서 과연 죽게 되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흘만에 부활하게 되잖아요. 그렇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십자가 지실 때 까지 예수님은 누구와 더불어서 함께 있는 삶을 살았습니까? 자기가 구원해야 될 사람들과 함께 있는 셈이 되죠. 이 말이 어린이들에게는 참 어려운데요. 예수님이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은 아시죠?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누구와 함께 계셨습니까? 1) 열두제자 2) 70명 제자 3) 택한 모든 백성. 답이 몇 번 입니까? 3번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도 않았잖아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이야기하죠.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사도바울은 그 현장에 없었지요. 없었는데 사도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고 했지요. 이 말이 맞다면 예수님의 생애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 겁니까? 이미 예수님 자신이 구원할 사람들의 운명과 함께 하지요. 예수님은 죄가 없어요. 죄가 없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골인해야 될 이유가 뭡니까? 자기와 함께 사람들의 죄 때문에 골인 하잖아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이미 우리의 죄를 담당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담당했던 그 사람들 리스트에 2000년도에 살아갈 내가 있었다는 것을, 차후에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통보해 주죠. 통보를 받게 되면 ‘예수님은 처음부터 홀몸이 아니었고 자기가 택한 백성과 이미 함께 있었다’ 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한글자로 표현하는 겁니다. ‘몸’ 입니다. 이 ‘몸’ 이라는 것이 참 어려운 개념입니다.

두 육체는 두 몸 입니까, 한 몸 입니까? 두 몸이 되지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한 몸이라고 합니다. 문제 나갑니다. 교인들 80명 모아 놓으면 80개의 몸입니까, 한 몸 입니까? 그러면 14만 4천명 모아 놓으면 한 몸 입니까, 14만 4천 몸입니까? 수학에서는 다 모인 숫자를 세어서 말하는데 성경에서는 그것을 한 몸이라고 본다는 겁니다. 이것이 참 어렵습니다.

처음에 아담이 여자와 함께 있을 때는 비록 우리가 두 육체지만 한 몸이라고 했는데, 죄짓고 나서는 얼굴이 싹 변하면서 “저 여자가 ---.” 이런 식으로 나오죠. 이것은 한 몸이 아니고 이미 두 몸으로 따로 따로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는 거죠. 한 몸이 되려면 백 명이 되었든 천명이 되었든 한 몸 되는 원리가 똑 같이 적용되면, 숫자가 천명이든 만 명이든 관계없이 다 똑같이 한 몸이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을 몸 되게 하는 그 한 몸의 원리가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성령을 통해서 적용되면, 어떤 사람이 필리핀에 있든 이라크에 있든 미국에 있든 아무리 멀리 어디에 떨어져 있더라도 우리는 한 몸, 한 지체가 되는 겁니다. 성경을 만만히 보면 안 됩니다. 참 어려워요. 설명하는 저도 참 어렵습니다. 어려서 어려운 것이 아니고 너무나 깊이가 있기 때문에 어려운 겁니다.

계속해서 믿음 이야기를 합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다른 사람 보기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 혼자 부활한 것처럼 보이지만, 나중에 성령이 와서 알려준 바에 의하면 그 십자가를 질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면서 까불거리던 사도 바울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할 때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말이죠. 이것을 인간의 공장에서 생산해 낼 수 있습니까? 이런 몸을 부부 관계에서 생산해 낼 수 있습니까?

안되지요? 만들어 내면 이스마엘 밖에는 안 되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하고 하나님하고 창세전에 맹세한 그 약속에 의해서 우리 인간들에게 일체 묻지도 않고 그냥 약속이 주어진 겁니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묻지도 않은 채 이삭이라는 약속의 자식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이삭의 출생을 예고해 줘도 피식 비웃었습니다. 그래서 웃었다고 해서 이름이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복입니다. 자기가 상상도 못한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보잘것없고, 별로 돈도 못 모으고, 좋은 집에서도 못사는데, 이삭처럼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약속에 의해서 거룩한 백성이라고 성도라고 합니다. 웬 떡인지 그냥 성도래요. 우리보고.

“제가 어떻게 해서 성도가 되었습니까?” “네가 한 것은 없어. 네가 한일은 이스마엘 밖에 없어.” 성경보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그런 것은 다 이스마엘인데 그런 것은 하나도 인정 못 받습니다. 백날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그런 것은 아예 보지도 않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했거든요.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한지, 기도한대로 응답이 하나도 안 되는 그런 축복을 주시고, 기도 안 한 것만 골라서 응답주시는 축복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인 것을 고백하도록 하는 쪽으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응답받을 만한 것들은 하나도 응답이 안 되고, 놓친 것에 대해서는 고스란히 응답되게 하셔서 받는 우리 쪽에서는 “주여 내가 나 된 것은 그냥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도록 만들어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기도 안 해도 되겠네요.” 우리가 기도를 안 할 인간입니까? 답답하고 급한데 기도를 안 할 인간이에요? 눈만 뜨면 기도하는게 우리입니다. ‘오늘도 좋은 일만 있기를.’ 눈만 뜨면 그 생각을 하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단독적으로 가졌던 그 믿음이, 어떻게 해서 오늘날 우리 믿음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뭡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그 죄 속에 이스마엘을 만들어 내는 그 죄도 들어 있습니다. 그 죄마저 주께서 다 용서하시고, 부활하신 뒤에 예수님의 그 믿음이 예수님의 믿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부터 확정지어서 처음부터 택한 백성의 믿음으로까지 선물로 주어져서 그 주어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 되는 겁니다.

‘의’라는 것은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행위를 가지고 ‘의’라고 하는 겁니다. 그 결과가 의롭다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시는 그 자체가 의로운 행위입니다. 왜? 우리 행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우리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무조건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행위가 다 의가 됩니까? 그 증거를 대세요.” 그 증거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했기에 부활했고,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다 의가 되는 겁니다.

그 의로 용서하는 행위가 우리에게 넘칠 때 그 행위 자체로 의속에 포함된 의인이 됩니다. 예수님의 용서하심이 계속 이루어지는 그러한 대상이 된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의인이 되는 겁니다. ‘법정적 의, 칭의적 의’ 같은 것 필요 없어요. 예수님이 계속해서 용서를 베풀고 있는 이상 누가 뭐래도 그게 의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번지점프 하듯이 하나님께 순종한 그 믿음은, 자기 자신을 몽땅 다 하나님께 바치는 겁니다.

예수님이 자기 몸을 바치는 믿음 안에는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인데 “절대로 내 뜻대로는 마옵소서” 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을 받아 놓고서는 왜 우리는 ‘내 뜻대로 안 된다’ 고 데모를 하는 겁니까? “왜 내가 간곡히 기도를 했건만 응답을 해 주시지 않습니까?” 라고 자꾸 자기 기도를 고집하는 겁니다.

그러다가도 주님의 믿음이 갑자기 한 2.5초 쯤 생각이 나게 되면, “아! 지금 내가 된 것도 주의 뜻대로 된 것인데 내가 무슨 욕심을 또 부리겠습니까? 주여! 제가 그저 드리기만 하겠습니다.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몽땅 가져가셔서 사용 하십시오” 하고 그냥 번지점프 하듯이 몸을 던지는 순간들이 와요. 24시간 가운데 한 2초 혹은 3초쯤. 어떤 사람은 5초에. 어떤 사람은 한 달에 한 2초.

맡기면 될 것을 왜 계획을 하느냐는 말이죠. 예수님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라고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몽땅 아버지의 뜻대로 마음대로 하옵소서” 하고 죽어 버렸단 말이죠. 왜 우리는
따로 우리 계획을 세웁니까? 여기 목사님들이 계신데요. 목사님들이 설교하기 전이 제일 힘듭니다.

어떤 것이 힘드냐 하면, 토요일까지 설교준비를 하잖아요. 그렇게 준비를 해놓고는 설교에서 대박을 터뜨리겠다고 벼르지요. ‘이 설교를 듣고는 은혜를 안 받으면 진짜 그놈이 나쁜 놈’이라고 할 정도로 은혜롭게 설교를 준비했으니까 어깨에 막 힘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막상 예배가 시작되어서는 예상치 못한 일을 만나게 됩니다. 대구 우리 교회 같으면 찬송 부른 뒤에 장로님이 설교 전에 광고부터 하는데 재정보고를 합니다.

“11월 재정은 이월금 얼마에서 얼마 쓰고 나머지는 마이너스 얼마입니다”라고 재정보고를 하게 되면 그 뒤에 바로 이어서 설교를 해야 될 텐데, 교인들이 마이너스 재정 소리를 듣고는 인상들이 안 좋아져 있어요. 거기다가 무슨 설교를 합니까? 토요일까지 설교준비 하면서 그런 일은 예상치도 못했지요. 그럴 경우에 목사가 설교를 하게 되면 헌금이 나올 수 있는 방향으로 설교의 방향을 약간이라도 틀게 되고 그리 되면 설교가 설교답겠습니까?

본인도 어설프고 교인들도 나름대로 눈치 다 채버리고요. 요새 교인들이 도사 아닙니까? “빙빙 돌리지 말고 ’돈 내라’ 고 바로 이야기 하라” 고 합니다. 그럴 때 목사는 준비한 설교를 찢어 버리고 “주여!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그냥 맡겨야 됩니다. 한 40분이나 50분의 설교를 그냥 맡겨야 됩니다. “마이너스 백만원이든 천만원이든, 이 교회가 주님의 교회지 내교회인가?” 하고 맡겨야 됩니다.

주께서 관여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도 아닙니다. 목사 자신부터 맡겨야 되지요. 맡기면 그 맡기는 가운데서 예상치도 못하게 목사 본인이 은혜를 받게 되면, 교인들도 저절로 은혜를 받고 교회의 재정적자 같은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닌 것이 됩니다. 그것은 시시한 겁니다. 하늘나라가 있는데 그게 뭐가 문제입니까?

예수님의 믿음이란 창공에 전적으로 몸을 던지듯이 그냥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고 맡기는 겁니다. 그 믿음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주어지게 되면, 우리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과 내가 만들어 낸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를 알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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