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006 갈라디아서 12강

아빠와 함께 2023. 5. 18. 14:08

갈라디아서 제 12강 (이근호목사, 2006년 12월 08일(2), 서울의존교회)

갈라디아서 3장 29절, 4장 1절에 유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아브라함의 유업은 이스마엘 쪽이 아니고 이삭 쪽입니다. 이것이 어려우니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아브라함에서 복이 나온다. 그런데 이 아브라함의 복이 어느 쪽으로 갈것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먼저 낳았습니다. 이삭은 나중이고 처음에 이스마엘이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은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고자 약속하신 유업, 혹은 복, 혹은 상속은 나에게서 나온 자식인 이스마엘에게로 나올 것’이라고 예상을 했었는데, 그 예상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예상한 것은 이스마엘인데, 하나님이 이스마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현재 아브라함의 생각 전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에서 이스마엘이 나왔는데 그 이스마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브라함의 생각 전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생각에 의해서 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복이 떨어지면 이 복은 아브라함을 공격하고, 이스마엘을 주어지는 식으로 복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 복이 바로 이삭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 준다는 이야기를 해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기 본색을 드러나도록 해 놓는 방식으로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을 부정해 버리고 아브라함의 복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이삭에게 복이 가도록(유업을 잇도록) 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한 것은, ‘사람이 구원받아서 천국에 가겠다는 이 사고방식 전체를 하나님께서 거부해 버린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인간적인 생각이기에 하나님은 이것을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좋은데 가겠다는 생각을 거부해 버립니다. 인간의 구원을 저지하지 않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막는 분입니다. 구원되는 것을 기어이 막아요. 생명나무 오는 길을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막듯이 생명으로 오지 못하도록 저지합니다. 천국에 오지 말라고 강력하게 밀어붙여요.

어느 인간치고 죽어서 좋은데 가고 싶지 않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다 죽어도 좋은데 가고 싶어요. 왜? 산다는 게 너무 고생스러우니까 죽어서라도 편한데 가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갖는 것조차 주님께서는 옳은 생각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떤 인간도 ‘구원되고 싶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될 자격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겠다고 한 그 전체가 다 부정당하게 되는 겁니다.

부정당할 때 누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저지당한다는 것을 압니까? 이삭이 등장해야 합니다. 이삭이 등장해야 ‘아하! 하나님의 복은 이삭과 연결되는 것이지, ‘아브라함 - 이스마엘’의 통로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오늘날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천국가고 싶다는 것을 하나님이 저지한다’는 것을 누가 등장해야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등장해야 ‘사람들이 구원받아서 천국가고 싶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천국은 뭡니까? 구원받고자 원하는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예수님이 원하는 자만 골라서 천국에 보내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불공평하고, 하나님의 횡포이며, 깡패같은 무자비한 짓입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자만을 살리십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 5:21)

창세전부터 예정된 사람만 살리는 이유는, 인간은 이미 범죄 한 것으로 인하여 인간이 원할 수 있는 모든 권리는 다 끝이 났어요. 조상 아담이 범죄 함으로 인하여 대대로 선악과를 본인이 직접 따먹지 않았더라도 범죄 한 것이 되는 원리가 무슨 원리라고 했습니까? ‘몸’ 의 원리라고 했잖아요. 몸은 육체와 다릅니다. 두 육체가 한 몸 될 수 있고 세 육체가 한 몸 될 수 있어요. 인류가 65억이라도 모두 다 어디에 속한다? 아담에 속합니다.

예수님 에 속한 사람은 아무리 숫자가 많더라도 모두가 예수님의 한 몸에 속하는 겁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는 그 이유는 너무 어렵기 때문에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두 육체는 두 몸이 될 수 없으며 왜 한 몸으로 규정을 짓는가’ 는 좀 있다가 이야기 하겠습니다. 범죄 한 아담은 곧바로 죽는 것이 아니고 할 일이 있습니다. 범죄 한 아담의 역할은, ‘어떤 인간도 구원될 자격이 없고,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추방 시킨 하나님의 일은 정당했다. 참 바르게 내린 판결이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임무가 아담에게는 있습니다.

그것은 아담 뿐만이 아니고 그 후의 모든 아담의 후손에게 다 포함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이 이렇게 고생하게 하고 결국에 지옥에 보내는 것은 참으로 합당한 조치였다’ 는 그것을 온 우주에 드러내는 역할을 해야 되는 거죠. ‘인간이 지옥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며, 지옥을 만드신 것도 참 합당하다. 정말 지옥을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하다.’ 그러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범죄 한 아담과 후손들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것으로 끝났어요. 자기 주제파악을 해야지. 하나님께서 쫓아내고 다시 들어 올 수 있는 어떤 길을 열어 준 것이 아닙니다. 아예 들어올까 싶어서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생명나무가 있는 곳으로 들어오는 에덴의 동쪽을 차단시켜 놓았어요. 이것은 ‘인간들이 자력으로 아무리 기어 올라가도 하나님께서 일체 저지 한다’ 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의 후손이 다 같은 운명이라면 아담에게는 그 후손과 함께 지옥 뿐이고 천국은 없겠네요?”

하나님은 새로운 아담을 준비 했잖아요. 육체로 오신 성자께서 육체를 입으심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아담이 되시고 말았습니다. 새로운 아담이 된 이상은 옛날 아담은 자연적으로 은퇴해야 되지요. 새로운 아담의 등장으로 옛날 아담들은 입을 막고 “참, 그렇군요. 우리는 구원되고 싶어도 그럴 자격이 못되는 군요” 하고 양보를 해야 됩니다. “구원되고 안 되고는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의 권한대로 하시는 일이기에 우리가 요구할 입장이 못 되는군요. 원하는 대로 하시 옵소서” 라고 주님께 모든 권한을 일임해야 됩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중풍병자가 나오는데 우리가 놓치기 쉬운 대목이 나옵니다. 마태복음9장 6절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지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죄를 사하고 안 사하고의 권한은 누구의 일방적인 권한입니까? 예수님 일방적이지 누가 압력을 넣는다 든지, 죄를 용서하도록 유인한다 든지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죄를 용서하고 안 하고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에 창세전에 이미 끝난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누가 중보기도를 한다 든지, 힘을 쓴다고 해도 명단이 바뀌는 일은 없습니다. 확정된 것을 그냥 실행에 옮길 뿐이지 다른 힘이 개입해서 자리가 바뀐다든지, 탈락하거나 붙여주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 입장이란 ‘우리는 구원될 수 없는 입장임을 보여주는 것’ 으로서 역할을 다 한 거예요.

‘아하! 자력으로 구원될 수 없는 것이 분명 하구나. 그리고 구원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요청해서가 아니라 어떤 분의 자유로운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될 뿐이고 천국문은 사람의 간절한 소원에 의해서 열릴 문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 한 것을 구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이 여호와인데 여호와의 특징이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와 독대 할 때 이야기 하신 겁니다. 그 이야기가 모세 이야기를 거론하면서 로마서 9장부터 그 취지를 담아서 죽 이어져 나옵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 이니라”(롬 9:15,16)

‘주님은 은혜 줄자에게만 은혜가 돌아가도록 하는 주님임을 왜 모르느냐’ 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 원래 예수님이죠. 언제부터 인가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되고 말았어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와 예수님의 차이점이 뭔지 알아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아무에게나 다 선물을 줘요. 울지만 않는다면(♬울면 안 돼!). 울다가 도 그치기만 하면 선물을 다 줘요.

예수님은 자기가 택한 자에게만 선물을 줘요. 둘 중에 어느 분이 환영을 받겠습니까? 당연히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환영 받지요. 사람들은 진짜 예수님은 핍박하는데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등장시키고 부각시켜서 핍박해 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희석시키는 크리스마스가 된 겁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가짜 예수가 범람을 해요. 산타클로스식의 예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정말 이런 말이 나오려면, 어린이 여러분은 크리스마스날에 양말을 가져다가 놓는다든지 하지 마시고 그냥 주무세요. 양말 가져다 놓고 선물을 기대하는 경우라면 이것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말을 못해요. 울고 못된 짓 마음대로 하고, 나쁜 짓 다 하고 말 안 듣고, 성적 내려가고, 그렇게 해도 그 다음날 큼직한 선물이 왔을 때, ‘나같이 성적 내려가고, 성질 더럽고, 못된 아이에게 이런 선물을 주시니 그야 말로 은혜중에 은혜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게” 하는가? 은혜라는 것이 죄인이 요청해서 준 것이 아니고, 죄는 죄대로 가되 은혜는 은혜대로 인간이 죄짓는 것에 영향을 받지 아니하고 그것과 무관하게 주어진다는 겁니다. 지독한 죄를 짓더라도 은혜 주는데 지장 없이, 아무리 큰 죄를 짓더라도 은혜 받는데 방해됨이 없이, 은혜 주고자 하는 주님 뜻에 의해서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지 받는 쪽에서 더 착하다든지, 혹은 덜 악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원리는 바로 아브라함의 원리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9절에 하나님에게 유업을 이을 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그 분만이 유업을 받을 자입니다. 다른 사람은 유업을 받을 자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한 몸을 이루어서 그 몸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예수 이름으로 복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 된 자만. 그것이 바로 유업을 이룰 자가 종이 아니고 아들이라는 말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갈에게서 나온 종이 있었고 그가 이스마엘입니다. 진짜 아들은 정실부인인 사라에게서 나온 아들이죠. 갈 4:24절에 보면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고 나옵니다. 두 언약을 나란히 다 보여주는 것은, “네가 구원받는 것은 너의 일거수일투족과 전혀 무관하게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의논한 것이기 때문” 이라는 겁니다. “네가 착하다든지 혹은 모종의 압력을 넣었다든지 하는 그런 사항에 의해서 조금도 변동이 있을 수 없다” 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일을 했다고 해서 주님의 일이 취소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부터는 약간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만들 때,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는 이렇게 지상에 있다면 그냥 성령을 주셔서 “얘야! 이제 성령 받았으니 거룩하게 살고 착하게 살아라.” 이렇게 성령만 주시면 아들 될 거라고 여기죠. 그런데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고, “아들의 영으로써 와야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어려운 말입니다.

“이미 아들인데 성령이 모자라는 구나. 성령을 더 보태 줄게.” 이렇게 해서 아들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아들이 아니고 아들은 따로 있습니다. 그 아들의 영이 와야 우리가 아들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왜 우리가 아들이 될 수 없느냐?’ 입니다. 우리는 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4장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댐(다목적댐)으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여기에 댐이 있고 그 댐 아래쪽에는 마을도 있고 집도 있습니다. 댐에는 물이 차 있습니다. 지금 댐 밑에 있는 사람들은 위에 있는 댐을 믿고 천국에 간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자기는 복을 받고 있다’ 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댐이 무너지게 합니다. 무너지게 하면 이 댐에 갇혀 있던 물이 아래로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그 아래는 다 죽음이 오게 됩니다.

댐이 무너지면 물로써 죽이게 되지만 성경에서는 물로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으로 죽입니다. 율법이란 말이 어려우니까 ‘법’ 이라고 합시다. 법으로 죽입니다. 여기서 죽는 다는 것은 그냥 목숨이 끊어지는 정도가 아니고 영원히 저주받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서 그들은 행복을 누리고 있다가 막상 법이 넘쳐서 오니까 자신들은 저주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이 댐이 예수님 덕분에 안 무너진다고 여기는데 이것은 자신이 만든 가짜 예수 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예수님이 죽었지요? 왜 죽었습니까? 자기 죄 때문에 죽었습니까, 백성들 죄 때문에 죽은 겁니까? 택한 백성들 때문에 죽은 거지요. 어쨌든 예수님에게는 택한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진 그 죄가 있잖아요. 그 예수님을 죽일 때 무엇으로 죽입니까? 하나님의 율법으로 죽이죠. 그것을 가지고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속해서(속했다는 말은, 예수님은 율법에 속한 분이 아닌데 우리를 위해서 잠시 속했어요), 법 때문에 생겨난 온갖 저주(우리가 당할 것은 저주 밖에 없지요)를, 예수님이 우리를 함께 끌어안고(남들 보기에는 예수님 혼자 이지만 예수님이 자기 품 안에 자기 지체들을 함께 끌어 안고)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울면서 저주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 저주는 어디서 쏘는 죄입니까? 하나님의 율법(법, 하나님의 말씀 다 마찬가지입니다)의 저주에 의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잖아요.

그런데 그 소식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십일조 하니까 복주시고, 예배 참석 잘 하니까 복을 주는 구나. 역시 내 기도 발은 끝내 줘. 나는 이번에 전도 왕이 될 거야. 이번에도 열 명이나 전도했거든. 아마 냉장고 하나 받을 걸.” 그런 식으로 자기 자랑을 하다가, 댐이 터지고 율법이 쏟아지니까 이 율법은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갈 3:10)받게 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있지요? “누구든지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아래 있나니.” 누구든지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언제나 저주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아래 있다는 말은 이미 저주 받았다는 말과 같은 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안에는 저주가 들어 있습니다.

흔히들 십자가를 무슨 십자가라고 합니까? ‘사랑의 십자가’ 라고 하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무슨 십자가? 우리를 저주하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얻어맞아야 돼요. 사람들 피 빨아 먹는 드라큐라만 맞으면 안 되고 우리도 맞아야 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저주하는 십자가입니다. ‘진작에 죽어야 할 것을 왜 살자고 여기 있는 거냐?’ 사람이 아무리 죄 안 짓고 싶어도 살고자 하는 이상은 죄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사는 방법을 계속 연구하기 때문에 그게 자연적으로 죄가 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어떤 착한 일을 해도 마지막은 ‘그러니까 나는 살아남아야 돼’ 가 됩니다. 이게 죄가 될 수밖에 없지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 죽고자 해서 하는 일은 뭘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데, 설교를 하든, 강의를 하든 그것이 살고자 해서 하는 일일 때는 그것이 뭘 해도 죄가 되는 거예요.

 이 십자가속에 있던 율법의 저주를 후대의 택한 백성들은 맞아 본적이 없어요. 그런데 댐이 터지고 물이 와르르 쏟아지면서 이들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저주를 받을 때 그들이 무엇을 알게 됩니까? ‘율법 아래 있는 자는 결코 어떤 경우에도 아들이 아니었구나.’ 어떤 경우에도 아들이 아니고 저주 받을 종에 불과한 겁니다. 어떤 인간도 아들 자격으로 구원될 수 없어요. 구원 되고자 할 입장도 못되는 건데 자기들은 예수 믿는다고 착각하고 아들이라고 착각을 한 겁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율법의 저주가 오고 난 뒤 부터는 ‘율법 아래 있는 모든 것이 아들이 될수 없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고 예수님은  죄가 없기에 저주를 받을 이유가 없지만, 예수님이 끌어안고 있는 이 사람들은 십자가 앞에 서니까 당연히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아는 거죠. 이것이 합해서 십자가죠. 십자가 가는 곳마다 우리는 뭘 느낍니까? ‘저주 받을 수밖에 없구나.’ 그렇게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십자가를 터뜨리고 퍼지게 하는데, 이 십자가에 담긴 것이 물이라고 한다면 그 물이 바로 성경입니다. 신약성경전체입니다. 사도바울의 명령법, 디모데전후서, 히브리서, 베드로전후서, 야고보서 전부 다 뭡니까? “이 말씀에 의하면 너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져야만 될 만큼 너는 죄인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엄청난 수량의 이 물 같은 것입니다.

디모데전서에 보면,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8)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들은 ‘아! 이제 예수 믿고 바르게 살라는 모양이구나. 그런데 어떻게 살까?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자.’ 하루에 세끼 먹는 것을 두 끼로 줄이면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게 될까요? 인도 사람은 하루에 한끼만 먹는데요. 안되잖아요.

갈라디아서에 5장에 보면 성령의 열매라고 하면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를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열매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방탕함과 또 그 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 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갈 5:19-21)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필리핀의 선교사가 선교 잘한다고 칭찬도 받고 후원금도 많이 받고 있었는데, 주일 어느 날 어떤 선교사가 와서 “아프리카 오지에 들어가서 선교 하겠다” 고 하니까 갑자기 기분이 상하면서 “자기가 뭔데 나보다 더 어렵고 힘든 오지에 들어가서 선교하느냐” 고 화가 난 겁니다. 어떤 교회의 며느리가 있는데 그 며느리가 얼마나 착한지 온 교인들이 다 칭찬을 합니다. “요즘 세상에 저런 며느리가 또 없다. 너무 착하다.”

그 다음 주에 새로 등록한 교인이 있는데 보니까 세상에 병든 시어머니를 수레에 싣고 교회에 왔을 때 전에 교회에서 칭찬받던 며느리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내 명예를 누가 가져  갔느냐?”고 하면서 시기와 질투와 탐욕이 막 나오는 거예요. 그 다음 주에 보니까 이번에는 아예 수레도 아니고 땅바닥에 기다시피 하면서 시어미를 모셔온 새로운 며느리가 나타납니다. 시기와 질투라는 것이 인간이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욕망이 인간을 다스립니다.

욕망은 어디로 안가요. 여기 누르면 저쪽으로 튀어 나오고, 저기 누르면 다른 쪽으로 튀어 나오게 되어 있어요. 로마서 7장에 의해서, 욕망이 주인이지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 6:10)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 우리 속에 “하나님이여! 나는 돈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라는 변명거리가 생기는 겁니다.

지금 이 댐 밑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에 의해서 이미 저주 받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말씀만 주면 지키겠다’ 고 우기는 거예요. 성경 말씀 바울의 명령법이든 뭐든 주면 다 지키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라는 말씀을 듣고 난 뒤부터는 ‘돈을 사랑 안 했던 것만 놔두고 돈을 사랑 했던 것은 잊자’ 고 감추기 바빠요.

돈을 사랑했던 그 숱한 경우들은 전부 숨겨버리고, 돈을 사랑하지 않았던 얼마 되지도 않는 경우들을 전면으로 끄집어내서 “주님! 제가 이렇게 착하게 삽니다. 주의 말씀 지킨다고 제가 애를 먹습니다. 하지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 로다’ 하고 싸워 가면서 삽니다.” 이런 식으로 가는 겁니다. 얼마나 위선자입니까?

어떤 목사님은 설교하는데 이렇게 해요. “에베소서에 보면, ‘분을 품되 해지도록 품지 말라’ 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분을 품지 말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님은 분을 품되 해 지도록 품지 않으면서 사신다는 것인데 어떻게 그렇게 하셨습니까?” 묻고 싶어요. “나는 이렇게 해서 분을 품지 않게 되었습니다” 라는 그런 사례라도 이야기를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본인도 못 지키는 것을 가지고.

로마서 2장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뭔가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너희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하느냐” 라고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롬 2:21-23)

예를 들어서 남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 고 하려면 “내가 이렇게 했더니만 거짓말을 안 하게 되더라” 는 그 비법을 이야기해 줘야 할 것이 아닙니까? “목사님! 그 비법이 뭡니까?” “성령 받아서 그렇다” 고 합니다. “본인이 성령 받을 때 어떤 현상이 있었으며, 본인에게 성령이 뭐라고 이야기 하던가요?” 답변을 못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가 소설을 써야 되기 때문이죠.

성령을 받아서 거짓말을 안 했더라면, 평소에 거짓말을 했을 경우에는 성령이 빠졌다는 말이 되지 않습니까? ‘성령이 없는 상태에서 성령이 있는 상태로 옮길 때에 어떤 방법으로 성령을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느냐’ 는 겁니다. 그리고 요청을 할 때 그 중에서 몇 번이나 응답을 받게 되느냐는 겁니다. “주여! 지금 성령이 없어서 거짓말을 하고 싶어서 근질근질 한데 지금 빨리 5분 안에 퀵 서비스처럼 성령을 보내 주세요.” 그런 시도를 열 번 했다면 몇 번이나 성사되느냐 이 말입니다.

그런 경우가 있습니까? 성령을 받고 성도가 되면 우리가 더 이상 자신을 손댈 필요가 없어요. 손댈 필요가 없는 것을 왜 자꾸 손을 대냐 이 말이죠. 주님께서 이미 이삭 되게 한 것을 왜 자꾸 이스마엘로 바꾸려고 애를 쓰는 겁니까? 못나면 못난 것 그 자체로 완성품입니다. 주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끄집어내는 것이 착하고 훌륭해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주어지는 것이 십자가에 의한 사랑이 주어집니다. 계속해서 주어지는 십자가의 용서입니다. 사랑(용서)가 주어지면 그 사랑의 능력에 의해서 새사람 됩니다. 새사람 된 자라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의 성경지킴으로 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사랑으로만 구원 되었습니다” 라는 고백을 할 수 있을 때에 한해서만 성도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자기에게 손을 대지 않죠.

주님의 사랑으로 완벽하게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내 자신에게 ‘이것은 못났고 수정해서 바꿔야 될 점’ 이라는 식으로 절대로 손을 안 댄다는 말이죠. 손을 댄다는 말은 ‘주께서 사랑으로 건진 것에 대해서 영 만족스럽지 않다’ 는 것 밖에 더 되겠어요? 누군가 저에게 주님의 사랑이 뭐냐고 단적으로 묻는다면 이렇게 답합니다. 마귀가 내 행동에 고소를 해도, 그 고소가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마귀가 낮 12시에 했던 행동, 새벽 세시 네 시에 했던 행동, 혼자서 안방에서 상상했던 행동, 심지어 꿈속에서 있었던 해괴망칙한 일들을 다 끄집어내서 “성도 된 네가 그런 행동을 해서야 되겠느냐?” 라는 어떤 고소라도 주께서 그 고소를 거부합니다. 그 이유는 주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 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 8:33-39)

사랑이 법보다 높습니다. 사랑 앞에서 법을 자꾸 이야기하면 맞아야 되겠지요? 교회에다가 회초리를 가져다 놔야 합니다. 법을 이야기하면 안돼요. 에베서소에 있는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엡 4:26)는 말씀은 그 밑에 십자가가 바탕이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저 사람이 용서를 청할 때 몇 번까지 해주면 될까요?”라고 했을 때 “일흔번씩 일곱 번을 용서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491번째는 용서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예수님의 말씀은 490번까지니까 491번째에는 주께서 허락한 시점이기에 마음 놓고 그동안 억눌린 모든 분노를 다 폭발시켜도 되겠네요. 그게 아닙니다. 법으로 하는 인간들에게는 아무리 이야기를 해봐야 법의 범주를 못 벗어납니다. 법은 저주아래 있는 겁니다. 491번째도 용서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게 됩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는 이 말씀 속에는 그 밑바탕에 무엇이 있다고 했습니까?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것은 저주받아야 되며, 주님의 자비만 사랑입니다. 그 자비가 가만히 있는 자비가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게 할 수 있는 자비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오늘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거야?” “주님의 사랑이지 뭐.” 그게 바로 성도가 보여줄 사랑이잖아요. 그게 마지막 계명인 사랑 아닙니까?

“당신은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데 왜 그런 짓을 하지?” “주님의 사랑이지 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이것을 자력으로 아무리 시도해 보세요. 법밖에 안되지요. 제가 시비거는 것은, 주께서 성도를 위하여 일하고 있는데 왜 우리가 나서서 일을 하려고 하느냐 이 말이죠. 수상하기 짝이 없죠.

주님이 일을 안 한다고 믿기 때문에 나라도 나서야 되겠다고 자기 믿음의 종교적 열심을 내는 것 밖에 안돼요. 정말 주님의 십자가의 성령이 임하면 그 성령이 어디 갑니까? 그 성령이 보증으로 오셨기에 그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이 말씀을 사랑으로 이루어지게 우리 몸을 사용하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나는 저주 받아야 마땅하다’는 식으로 고백하게 하면서 주께서는 이 말씀을 다 이루시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하는 말이 “제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가져다 바쳐도 마땅하고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치라는데 바쳐야죠” 라고 사랑하는 독자마저 아낌없이 바치게 하면서 주께서 일은 일대로 하시는 겁니다. “나는 죄인중의 괴수로다” 는 고백을 한다는 말은, 그만큼 주께서 나에게 일을 하고 있다는 다른 표현입니다.

로마서 9장에 보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주께서 그렇게 사용하신다면 사용하는 그 자체가 ‘의’ 고 구원이기에 끊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구원의 자신감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정리하면, ‘왜 우리에게 십자가지신 아들의 영이 와야 되는가?’ 그분이 댐안에 십자가를 가두어 놓고 있는데, 우리는 철없이 나 잘났다고 자랑하는데 그분이 댐을 터뜨려 버리니까 ‘우리는 율법아래서 저주 받아야 마땅한 인간이었고, 지금부터 일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으로 일하시더라. 따라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 주님의 공로지 나의 애씀이 아닙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완벽한 사람이 된 거예요. 완벽한 사람이라고 하니까 “당신은 죄 안 짓나?” 이렇게 하는데 맨 날 죄만 짓는데도 완벽하죠. 한 번도 죄 안 짓는 경우가 없어요. 우리는 본성상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우리 보고 “어이, 이 근호! 너는 죽었어.”“예.” “대답은 잘 한다. 너는 죽었단 말이야.” “그런데 살고 싶어요.” 우리가 이럽니다. ‘죽었다’ 는데 ‘왜 살고 싶은가’ 말이죠.

우리가 부족합니까? 모자랍니까? 다른 불신자와 비교도 안 되는 성도만의 특권입니다. 못났고 죄인인데 구원받았다고 우기기는 얼마나 우기는지,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천하 죄인 중에 괴수면서 천당은 자기 나라라고 우기는 것. 우기는 게 아니라 진리이고 사실이죠. 그게 바로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신 일이 내 안에서 이루어진다’ 는 것을 믿는 믿음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장 9절입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여기서 초등학문이 뭡니까? 초등학문은 우리로 하여금 아들 되지 못하게 하고, 종으로 삼게 되는 학문이 초등학문이겠지요. 우리를 대할 때 종 대하듯이 대할 수밖에 없는 학문이 초등학문입니다.

그것이 ‘율법 중심의 신학’이고, ‘행함 중심의 신학’이죠. 왜? 행함이라는 것은 계속 지시하고 명령하는 거니까요. 근데 아들은 뭡니까? ‘자유’잖아요. 내가 아들 되고 싶어서 아들 되는 것이 아니고, 아들 되게 하셨기에 아들 되었기 때문에 내가 아들 되고 말고는 내 책임소관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내가 아무개집 아들이다.”
“이 나쁜 놈아.”
“내가 아들 되고 싶어서 되었나? 태어나고 보니까 아들인데 왜 나보고 나쁜 놈이래?”

아들은 자유입니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천국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 가게 했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밖에 없고, 율법에서 벗어난 것도 주께서 벗어나게 해서 벗어 난 것이고, 주께서 사용하는 것도 사용권자가 사용하기 때문에 사용당하는 것이고요. 왜 우리가 거기에 나서서 책임추궁을 당해야 합니까? 일체의 책임추궁은 주께서 대신 다 담당했기에 우리 자신에게 책임 추궁을 할 필요가 없어요.

사람이 뭔가 완벽하려고 하고 잘해 보려고 한다면 자기가 자신에게 심판주가 됩니다. 심판주가 주님인데 그런 것은 보지도 않고 내가 나를 못살게 굴어요. 사람이 자기의 원수가 누군지 압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내가 내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아서 나를 못살게 굴어요. 남들이 못살게 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못살게 굴어요.

예를 들면, 남편이 술을 먹고 집에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고 밥상을 차버리고 아내를 구타를 합니다. 대처 방법이 뭡니까? 정답 : 경찰에 고발한다. 간단한 문제 아닙니까? 근데 그렇게 하지를 못해요. 왜? 지금까지 남편과 살아오면서 천사아내라는 상표가 붙었는데, 경찰에 남편을 고발해 버리면 이 천사라는 상표가 변해서 악녀로 바뀌지요. 내가 악녀 되는 것이 스스로 용납이 안돼요. 그러니까 얻어맞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해서 고귀한 천사로서 순교하고 싶지 악녀 노릇은 하기 싫은 거예요.
거의 정신병자 수준입니다. 이게 내가 만드는 ‘자기의’ 라는 겁니다. 초등학문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종노릇을 하게 하는 겁니다. “지금 모자란단 말이야. 지금 70점인데 약간만 더 하면 80점 올라갈 수 있어. 더 열심내면 90점도 되거든.” 자꾸 자꾸 율법의 종으로 삼게 만드는 것이 초등학문입니다.

진짜 예수님이 주시는 학문은 “너는 이미 자유다. 어느 누구도 너에게 책임을 물을 필요가 없어. 너의 책임은 이미 내가 십자가에서 채찍 맞을 때 해결 다 되었어. 왜 그분이 대신 돌아갔겠어? 그분이 대신 다 가져갔어. 더 이상 책임을 물을 것이 없어. 지금 죽어도 그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아.” 이처럼 우리의 자유됨을 더욱더 드러나게 하는 것, 종이 아님을 누누이 이야기해주는 것, 그것이 참된 학문이죠.

그래서 초등학문 쪽으로 상담을 한다면 “목사님! 이혼을 할까요, 말까요?” “하나님이 짝지워 준 것을 나누지 말라고 했는데 헤어지면 안 되고 참아야 됩니다. 헤어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웁니다.” 이게 초등학문 상담이죠. 자유케 하는 학문상담은, “남편 있는 채 사나, 없이 사나 이미 완벽한 사람으로 아들이 되었는데 ‘이혼 할까요, 말까요?’ 하는 그것이 무슨 고민거리가 됩니까? 누가 당신에게 이혼문제를 가지고 괴롭게 하던가요? 스스로 자기를 정죄하지 마시고 저주하지 마세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그 말은 듣기는 좋은데 이혼을 할까요, 말까요?” 하나님께서 짝지워 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는데, 사람이 못 나누는 것을 하나님이 나누면 나눠져야죠. 이것이 아주 궤변중의 궤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이 나누면 나눠져야지 왜 인간이 되어가지고 자기가 나서서 고민하느냐 말이죠. “하나님이 짝 지워주었다”는 것은 절대로 헤어질수가 없는 거예요. 헤어졌다는 말은 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이 물병하고 뚜껑하고 짝지워 준겁니다. 하나님이 짝 지워준 것을 사람이 틀지 못한다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목사님! 상담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틀어야 됩니까? 아니면 말까요?” “틀어지지 않을 건데요” “틀어 버릴까요, 말까요?” “안틀어 집니다. 그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j“제가 틀어 버리면 틀어집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짝으로 안 채워진 상태죠. 인간의 힘으로 틀어진다면 처음부터 그것은 짝이 아닙니다. 이제 감이 오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못 지킴을 드러내는 쪽으로 주께서 지켜 버립니다. ‘주께서 지켜 놓고 우리에게 들이대면 우리는 못 지키는 죄인으로 남고, 사랑으로써 주께서 대신 졌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에 보면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라고 했지요.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악한 세대에서 자기 몸을 드려서 우리를 구원 한다”면 우리는 “악한세대”가 뭔지를 알고 있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냥 구원받는 것만 아는 식으로 하지 말고, ‘왜 악한세대이며 내가 얼마나 악한 세대이면 주께서 자기 몸을 드려야만 구원이 되는지를 알아야 될 것이 아니냐?’ 하는 겁니다. 그것을 알려면 세상의 악의 구조를 알아야죠. 자본주의를 알아야 되고,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이 왜 악인지를 알아야 되고요.

“그러면 그것을 알아서 고쳐야 될 것이 아닙니까?” 고쳐지지 않습니다. 고쳐지지 않아요. 안 고쳐지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거예요.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가 마지막 때에 강도짓을 그만하고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강도짓 하다가 잡혀서 십자가에 달렸잖아요. 제발 좀 고칠 생각 하지 마시고 주님의 사랑은 내가 뭔가를 고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증거 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내가 고치는 것보다 주의 용서가 더 위대하다.’

9절에 초등학문이 나오고 10절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지키니.” 세상에 ‘지킴’과 무관한 말씀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떤 말씀도 다 ‘지킴’과 관계있어요. 초등학문은 맨 날 “지켜야 된다. 지켜야 된다. 지켜라. 지켜라.” 우리는 “주께서 지키십니다. 주께서 지키십니다.” 증거를 대 봐라. “온유하잖아요.” 온유를 지켜서 온유한 것이 아니고, 내가 온유하지 못한 것을 알 때 온유가 발생되더라는 겁니다.

때려 죽여도 내 아내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남들 보기에는 “와! 아내 되게 사랑하시네.” 이렇게 나오더라 이 말이죠. “지켜라”가 아니고 “주께서 지키십니다.” “나는 못 지킨다”는 말이죠.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어떻게 지킵니까? 주일을 어떻게 지켜요? 24시간이 전부 다 주의 날입니까, 아닙니까? 어떻게 지킵니까? 중요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지키려고 하는 겁니다. 안 지켜도 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안 들리기 때문에, “할 수 있나? 지키는 것으로 최선을 다 하면 복 주겠지” 하면서 나서는 겁니다.

지키려고 나서는 것은 안 지켜도 되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지키는 쪽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안 지킵니까?” 마지막 결론에서 대 반전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말씀대로 지킵니다. 이것은 앞의 강의를 다 엎어 치는 것과 같은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못 지킵니다. 못 지키면서도 매일 같이 뭔가를 지키려고 하는 겁니다. 참 재미있지요? 우리는 법칙, 규칙 없이는 한시도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사고는 원리, 원칙, 규칙을 다 동원합니다. 그것 없이 정신병자처럼 “주께서 지킨다. 나 잡아가라” 는 그런 사람은 없어요. 반드시 자기정당화, 자기합리화, 자기의를 평생이 다 가도록 만들어 내려고 시도합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나를 먹여 살리기 때문입니다. ‘나는 살고 싶다. 그런데 살아야 될 이유가 있다. 왜? 나는 가치 있으니까. 나는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없으면 복음을 못 전하기 때문에. 내가 없으면 교회가 안 되기 때문에. 나는 당회장이기에. 다른 사람은 죽어도 나는 살아남아야 돼.’
이것이 저주받은 인간의 본색입니다. 이것이 평생 갑니다. 남편이 아내를 때려놓고서 하는 말이 “나니까 너하고 살아주지 나 아니면 누가 너하고 살아주겠나” 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는 행동을 또 다른 규칙들을 동원해서 자신이 얼마나 착하고 대단한 존재인가를 입증하고 싶어서 날마다 성경말씀을 아는 대로 다 끄집어 당겨요. 그러니까 성경공부를 하면 할수록 변명거리가 더욱 더 많아지죠. 포장지가 더 두꺼워져요.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깨닫도록 하는 것은, 성령님의 활동이지, 성령 받은 나의 깨달음이 나로 하여금 성령을 깨닫게 하도록 하지를 못해요. 성령께서 직접 놀랍게 기적적으로 십자가를 깨닫게 하고 내가 저주 받을 인간이라고 깨닫게 하지 않으면, 사람은 날마다 자기 정당화로 돌아섭니다. 그래서 성령 받고 난 뒤에 “맞아 나는 죄인이야”라고 하면서 돌아서면서 하는 말이 “이렇게 나처럼 자기가 죄인된 것을 깨닫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 보라고 해. 그러니까 나는 복 받을 만하지.”
금방 깨달은 그 죄를 또다시 포장을 해서 나만의 괜찮은 의로 곱게 소유하는 것을 또 시도하는 겁니다. 이 구약성경의 사람들처럼. 그래서 성령께서는 ‘처음도 십자가고 마지막도 역시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되지, 그동안 내가 착실하게 산 것으로 구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며, 여러분은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원리도 알고, 원칙도 알고, 진리도 알고 다 알지만 돌아서면 역시 챙길 것은 나밖에 없고, 귀한 것은 내 몸뚱아리고, 가장 소중한 것은 내 자존심이고, 주님보다 더 아까운 것은 내 육체인 것을 즐거워하면서 느낍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부러운 것이 아니고 큰 교회 당회장과 비싼 고급차가 부럽고, 넓은 아파트가 부러운 것은 숨길 수 없는 저희들의 본심인 것을 저희들이 고백합니다. 이런 저런 사정을 다 아시고 이미 십자가에서 모든 일을 다 해결하셨으니, 그 십자가가 점점 더 크게 느껴지고 우리의 모든 앞길을 다 가로 막아선 십자가만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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