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006 갈라디아서 14강

아빠와 함께 2023. 5. 18. 14:10

갈라디아서 제 14강 (이근호목사, 2007년 2월 9일(2), 서울의존교회)

전 시간에 강의한 내용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초등학문에 관한 것입니다. 전 시간에는 간단하게 했는데 이번시간에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서 좀 더 더 깊이 있게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모든 이름으로 예수님에게 무릎을 꿇고 예수님이 일하신 예수님의 희생의 공로를 높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 나오죠.

모든 이름, 지옥에 간 사람이나 천국 간 사람이나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들이(코끼리같은 동물들까지도) 예수님 일하신 공로를 찬양하고 굴복하고 그분의 이름을 드높일 때,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드높일 때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율법(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것이 다 율법에 속하거든요)의 목적은 역시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진 겁니다.

인간에게 왜 율법이 왔는가? 율법이 인간에게 오지 아니하면 인간은 예수님의 공로를 높일수가 없어요. 왜 그런가? 예수님의 공로는 죄인인 사람을 의인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들어가 버리면 어떤 죄인도 의인되는 겁니다. 이것을 드높이는 것이 온 피조물의 존재목적입니다. 죄인이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의인되었다. 온 피조물, 심지어 지옥간 자들도 여기에 대해서 찬양을 해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의 노력 없이는 지옥도 못 간다는 글을 썼습니다. 함부로 자기 혼자 지옥도 못가요. 하나님이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지옥도 가는 거예요. 죄인을 의인되게 해서 예수님의 공로를 높여서 의인되게 하려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죄인이라는 것이 성립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 의인이 성립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삼종세트입니다. 죄인 되어야 돼요. 죄인의 괴수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지금 하는 말에 대해서 인간의 목적으로 한다면(인간의 목적 자체가 죄인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니까 자기는 그렇게 하는 것이 죄인인줄을 모르죠), ‘죄인되게 한 것을 의인되게 했다’고 하니까 자기가 스스로 죄인 되어 보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시도하게 됩니다. 점잖은 사람이 술을 마신다든지, 일부러 사창가에 간다든지, 십일조를 안내는 식으로 한다든지, 예배 참석 안하고 놀러 간다는 식으로 합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으니까, “이 근호 목사님이 가르칠 때 죄인이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했다” 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더욱 더 죄인 되어서 더욱 더 영광을 돌리려고 한다” 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것이 로마서 3장에 나오고, 로마서 6장에 나옵니다. “사도 바울아 네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더욱 더 죄를 지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네?” 이런 논조로 사도 바울을 반대하는 쪽에서 공격을 해 댑니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롬 3:7-8)

혹시 복음을 전할 때 듣는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시거든 여러분이 스스로 복음을 잘 전했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복음을 잘 전한 경우에 반드시 복음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러한 반응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반응이 안 나타나거든 뭔가 복음에 대해서 약간은 양보를 했다는 생각을 하시고요.

죄가 더한 곳에 무엇이 넘친다고 했습니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롬 5:20)고 사도 바울이 이야기를 하니까 “그러면 은혜가 더욱더 넘치도록 유발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더욱 더 죄를 더 지으면 되겠네” 라는 반응을 그 당시 사도 바울을 반대하는 쪽에서 제시 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복음을 잘 전했는지를 측정하는 방법(완벽한 측정법은 아닙니다만 간접적인 방법이고 대략 측정하는 방법입니다만)은 상대방이 그렇게 나올 때, “잘 전했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죄인은 누가 하는가? 우리가 합니다. 의인은 누가 하는가? 우리가 합니다. 예수님 공로는 예수님이 합니다. 우리는 불신자에게 약을 올리는 셈이 됩니다. “나, 죄인이다.” 그 다음에 이것을 타넘어서 “예수 안에서 나, 의인이다” 하면서 의인 되려고 애쓰는 사람에게는 “나, 그거 안 해도 의인이다” 라고 약을 올리시고,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그것보다 더 큰 죄인이다” 라고 이야기 해 주시면 되는 겁니다.

이 두 몫 ‘죄인, 의인’ 은 우리가 해야 되고, 그럴 경우에만 예수님의 공로가 외부로 증거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이 놀랍게도 이 공식을 나에게 끄집어 내려와서 나를 구원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어요. 이것, 죄입니다. 방금 이 공식을 그대로 가져와서 나를 천국에 집어넣으려고 애 쓸 때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복음을 가리우는 겁니다.

‘죄인’ 이라고 할 때,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죄인이라는 뜻을 품고 있어요. 그래서 이 원리대로 이야기를 할 때 오해를 많이 받습니다. 이 대목을 이야기할 때 사람이 뭘 해도 죄가 된다는 것, 헌금을 해도 죄고, 설교를 해도 죄고, 전도를 해도 죄라는 것을 많이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 대목을 근거로 제가 욕을 많이 얻어먹습니다. 물론 하도 듣다 보니 욕으로 들리지도 않고 감사함으로 듣습니다.

죄라는 것을 죄인은 몰라요. 이게 문제입니다. 죄를 모르기 때문에 ‘죄를 더 지으면 되겠네’ 라는 철없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가만있어도 죄인데 구태여 죄를 안 짓고 있어도 이미 죄인인데 왜 구태여 죄를 더 지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쓸데없는 짓들을 합니까?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이 죄입니까, 죄 아닙니까? 성경을 우리 입장에서 보지 마시고 멸망당하는 입장에서 한번 보세요.

아람군대 수십만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었잖아요. 그 아람군대의 수십만 군대 중에서 처자식이 있는 사람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있지요. 아람군대의 아내들이 자식들을 낳았을 것입니다. 애기 낳는 것이 죄입니까, 죄가 아닙니까? 죄가 되는 겁니다. 왜 죄입니까? 죄가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식을 낳도록 한 거예요. 세상 전체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내가 자식 낳은 것이 잘한 일이다’ 라고 나의 목적을 위해서 세상이 있고 굴러가고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좀 비정하게 들리십니까? 참 냉정하게 들리지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전 세계 모든 피조물의 존재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높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제가 처음에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 상당히 동의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애를 낳는다는 것이 죄라고 하니까 영 동의를 할 수 없다는 눈치인 것 같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유 없이 죄가 무엇인가를 알리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야 하는 겁니다. 심지어 성도조차도 죄가 무엇인지를 알리기 위해서 태어나야 되는 겁니다. 왜 그래야 됩니까? 그 죄가 있어야만 그 죄를 통해서 예수님의 공로가 부각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죄인 되게 하신 우리를 주님의 공로만 들어와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기에 천국에 가서 면류관도 벗어 버리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찬양하기 위해서 우리는 피조물로 태어나서 죄인이라는 입장에서 의인되어서 천국에 들어가야 되는 아주 고착된 팔자를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참 냉정하고 냉혹합니다. 어떤 위대하고 큰 목적이 있으면 그 아래 있는 것들은 전부 다 무시당하는 거예요. 유명한 드라마 ‘주몽’에 보면, 소서노가 주몽하고 결혼할 때 예소야가 아이를 안고 울지요. 주몽하고 소서노하고 결혼식을 할 때, 예소야가 “주몽 이놈! 이 아이는 네 자식이다.” 이렇게 혈기 부리는 식으로 나가버리면 내부 분열이 일어나서 다물군이 고구려를 수립할 수 없습니다.

예소야는 자기 남편이 결혼해도 눈물을 훔치고 뒤돌아 서면서 자신은 그 현장에서 서서히 물러가 없어져야 되는 겁니다. 왜? 큰 이념을 위해서 자기는 희생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든 피조물은 무릎을 꿇게 하고, 모든 피조물의 이름은 오직 예수 이름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할 이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은 뭡니까? “내 아들의 이름만 높인다면 그것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영광이다” 라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 창세기부터 나오는 이 모든 프로젝트를 위해서 우리는 죄인인 채로 이 세상에 태어 나야만 하는 겁니다. 죄인인 채로 태어난다는 말은 저주받아 마땅한 채로 태어나야만 한다는 겁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 믿지 않고 지옥에 간다 할지라도 주님께 영광 돌려야만 되는 그런 피조물입니다.

여러분! 지옥 가는 사람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줄 압니까? 아닙니다. 지옥을 확정하고 난 뒤에는, 자신을 지옥에 집어넣은 주님에 대해서 찬양하는 집단이 지옥 간 집단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이 나를 지옥에 보내다니. 분하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영원토록 중얼거리고 짜증내는 곳이 아니라, 확정된 상태에서는 결국 땅 아래 있는 자나, 땅에 있는 자나, 하늘에 있는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주가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런 조치, 이런 배치를 취하신 겁니다.

그래서 천국은 무슨 나라입니까? 아들의 나라입니다. 골로새서에 나오죠.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달성된 나라입니다. 천국이 예수님의 나라라는 말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 구원받기 위해서 나름대로 생각한 그 천국, 그 것조차도 죄가 된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고 천국을 그냥 하늘나라로 생각해 버리면, 그 하늘나라에 누가 들어가게 됩니까? 내가 들어가죠. 그러면 그 천국은 누구 중심입니까? 나 좋으라고 있는 나라가 되어 버려요.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천국이 아닙니다. 이것은 극락사상이고 모든 종교에 있는 ‘영혼불멸설’ 입니다. 죽기 좋아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죽어서라도 내가 계속 존속해야만 한다는 그런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것 때문에 종교가 있는 거예요. 종교란 소멸이 아니라 영원토록 뭔가 존재한다는 것을 제공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있는 소멸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종교라는 것이 있는 겁니다.

일본은 종교가 15만가지나 됩니다. 골라잡으면 되는 것이 많습니다. 이것들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번 태어난 인간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영원히 소멸되지 아니한다’ 는 겁니다. 그것은 천국에 가도 자기 세계입니다. 아들의 세계, 예수님의 세계가 아니라 자기 세계입니다. 예수님의 세계가 되려면 ‘나’ 가 생각나지 않아야 됩니다. 그 대목이 고린도후서에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절부터 보면,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한사람을 안다고 했어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하죠.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지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 12:1,2)

결국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누구라는 말입니까? 사도 바울 자신입니다. 그런데 셋째하늘 안에 있을 때는 셋째하늘 안에 있는 내가 나라는 생각조차 허용된 적이 없다는 말이죠. 지금 14년 전의 이야기를 할 때는 “그 사람을 내가 안다. 그 사람이 나다” 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 올라갔을 그 당시에서는 ‘내가 누구냐’ 에 대해서 더 이상 관심 둘 이유도 없고 관심 두는 것이 허용된 적이 없는 세계에 올라간 거예요.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 합니다. 그리고는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라고 이어집니다. ‘모른다’ 고 해놓고 ‘안다’ 고 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나’ 라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지금 ‘나, 나, 나’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이 현재의 세계에서는 ‘나’ 라는 것을 버릴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림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초등학생들에게는 약간 어려울 수 있지만 나중에 엄마 아빠에게 다시 들어 보세요. 배가 고프다고 합시다. 혼자 있을 경우에 ‘아 배가 고프구나’ 할 때 여기에 뭐가 필요 없습니까? ‘나’ 가 빠져도 괜찮아요. 배고픈 사람은 혼자 뿐이기에 ‘나’ 가 필요 없어요. 그런데 여러 사람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뭘 집어넣어야 합니까? ‘내가 배가 고프다’ 라고 집어넣어야 됩니다.

이것은 ‘내가’ 라는 쓸데없는 것을 집어넣는 거예요. 배고프다고 이야기 할 때, 이야기한 그 사람의 배가 고프다는 것이 되는데도, 굳이 ‘나’ 라는 것을 집어넣는 거예요. ‘나’ 라는 것을 쓰지 않더라도 내가 느끼는 것을 다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목마르다. 아프다.’ 다 ‘나’ 에요. 그런데 여기에 ‘나’ 라는 것을 반드시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너’ 가 아니고 ‘나’ 라는 것을 따로 구축할 필요가 있는 거예요.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 세상은 ‘나’ 라는 것을 따로 딱 잡지 아니하면, 의사소통도 안 되고, 사회관계도 안 되는 그런 세계입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나’ 라는 것을 집어넣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신다” 고 합니다. 하나님만 아시면 되었지 왜 우리가 남을 의식해야 됩니까? 여러분! 그런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왜 우리가 남을 설득해야 합니까? “선생님! 저는 시험 볼 때 컨닝 안하고 공정하게 시험 쳤습니다. 정직하게 해서 이 점수가 나왔습니다.” 이럴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것이 천국이에요.

왜 그렇습니까? 주께서 구원했지 내가 노력해서 구원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내가 노력했다면 “하나님! 저 사람이 왜 왔습니까? 들어오려면 ‘나’ 나 들어와야지 왜 쟤가 옵니까? 저는 지상에서 이런 일을 했고 저 사람은 이런 일을 안 했으니까 천국은 ‘나’ 만 해당되어야 합니다.” 이 사람은 천국을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나를 내세우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아시는 분을 데려가면 그게 천국입니다.

따라서 천국의 주님에게 매여 있으면 더 이상 ‘나’ 라는 말이 필요치 않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나’ 라는 것을 구태여 안 나타내도 되는 그런 생활을 해야 돼요. 사람이 내가 발생되면 그 다음부터 힘이 듭니다. ‘나’ 를 세우려면 ‘나’ 를 지켜야 되고 간수해야 되고 잘 살아야 되고 남에게 주눅 들지 않아야 되고요. ‘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내가 골칫거리 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나’ 를 괴롭히는 것이 ‘나’ 입니다.

‘나’ 를 생각하니까 거기서 ‘나’ 의 근심이 따라 나오고 ‘나’ 의 비극이 나오고 내 팔자가 나옵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아이고, 나의 인생아! 아이고, 내 자식아! 아이고, 내 마누라야!” 내가 있으니까 자꾸 따라 나오는 거예요. “내가 응원하는 프로야구팀, 내가 응원하는 한국축구가 잘해야 할 텐데.” 다 내가 있으니까 다 따라 나오는 거예요. “왜 내 나라는 기름이 안 나오느냐? 왜 우리 민족은 남북이 갈라졌는가?” 이런 식으로요.

그래서 천국을 모르는 교단에서는 남북통일을 위해서 기도하잖아요. 남북통일을 위해서 하는 기도가 응답이 되겠습니까? 응답이 안 되죠. 왜? 남북통일 하겠다는 말에 무엇이 들어갑니까? ‘나’ 가 들어가잖아요. 그래서 복음을 모르는 교회들은 ‘우리 교회 부흥시켜 달라’ 고 기도해요. ‘우리’ 라고 하니까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천국에서는 ‘나’ 혹은 ‘우리’ 가 해당이 안 됩니다.

천국에는 교회만 있지 우리 교회가 없어요. 천국에는 중심이 없습니다. 어떤 특정 교회가 중심이고 특정인물이 중심이 되는 그런 것이 없어요. 예수이름으로만 구원되고, 예수님이 알아서 건져오기 때문에 “주여! 주여!” 손든다고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알아서 데려가는 세계이기 때문에, 점차 점차 “‘나’ 라는 것은 쓸데없는 대명사가 붙는구나” 라고 이해하시면 되는 겁니다.

‘나’ 라는 것 때문에 괴로워요. 이것은 내 땅, 이것은 내 것, 전부 다 ‘나’ 가 들어가잖아요. ‘내 인생은 이래야 되는데 왜 이 모양이냐? 나는 의대를 들어가야 되는데 왜 의대를 또 떨어졌느냐. 에라, 죽어버리자.’ 자기에게 집착을 하니까 자기가 알아서 ‘나’ 라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와 더불어 폭발하는 식으로 자살하잖아요. ‘나’ 를 지키기 위해서. ‘나’ 라는 것이 없는데. 그래서 ‘칸트’ 는 말하기를, “‘나’ 라는 것은 귀찮은 것이다” 라고 했어요.

제가 <현대철학의 단초>(단초라는 말은 단추가 아니고 기초라는 말입니다)라고 해서 헤겔과 하이데거 철학에 대해서 십자가마을에 글을 올려놓았지요. ‘칸트’ 는 말하기를 “‘나’ 라는 것 때문에 고민인데 없어지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모르겠다” 는 말이거든요. “모르겠다” 고 할 때, ‘헤겔’ 은 말하기를 “‘나’ 라고 집어넣는 것은 반성하라고 준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 라고 집어넣은 것은 줘놓고 ‘버리라’ 고 하기 위해서 ‘나’ 라고 집어넣었다.” 이것이 ‘헤겔’ 의 철학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하이데거’ 의 철학은 “‘나’? 그것은 없어질 것이다. ‘나’ 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 를 만든 그 밑바닥 ‘신’ 이 더 중요하다” 고 합니다. 요즘 시시한 신학자들은 그 사람들에게 다 배운 겁니다. ‘하이데거’ 에서 나온 것이 ‘불트만’ 이고 그 뒤의 신학자들이 다 거기서 배웠어요. 헤겔은 너무 어려워서 제대로 못 배웠어요. 헤겔에서 십자가신학까지 나오니까. 헤겔은 하나님의 절대적 부정성을 말해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스스로 자기를 비우고 부정해서 우리를 구원했다. 부정된 자기를 가지고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구원해 냈다.” 이것이 헤겔의 철학입니다.

성경구절 하나 안 들추고도 철학적으로 다 해명해 버렸어요. 이미 헤겔이나 하이데거는 신학을 다 한 사람들입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요지를 다시 정리해 봅시다. 그림으로 하면 쉽습니다. 현재 ‘나’ 가 여기 있잖아요. 현재 있는 ‘나’ 를 자꾸 밀어서 미래의 ‘나’ 를 만들어 가는 거예요. 지금 이 노력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죄가 되는 겁니다. 왜 죄가 되느냐? 주님이 하시면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되도록 되어 있어요.

미래의 ‘나’ 는 무엇이 없습니까? 미래의 ‘나’ 는 ‘나’ 가 없지요. 미래의 천국에서는 ‘나’ 가 없어지고 그리스도가 아시는 사람이 되었잖아요. 그래서 따로 ‘나’ 가 누구냐고 할 것 없이 이미 주께서 다 아십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이사야의 특징이 뭡니까?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것이 특징이었어요. “나를 위해서 누가 갈꼬?” “제가 여기 있나이다.”(사 6:8) 그래서 이사야가 순교를 해도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주께서 다 아시는데요.

여러분!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에 사람을 원망했습니까? 원망 안했지요?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이렇게 했지요? 왜 그렇게 했습니까? 주께서 아시고 ‘나’ 라는 것을 버리기 위해서 주께서 알아서 일을 벌이신 것이기 때문에 내 목적을 꺾어버리고 주의 목적을 그냥 받아들이니까 스데반 집사가 순교한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신앙생활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언제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느끼냐 하면, ‘나’ 라는 것이 생각나지 않을 때, 그때 천국의 묵시가 여러분 속에 작용하고 있다고 믿으셔도 좋습니다. ‘나’ 라는 것이 생각이 안나요. 그러니까 내가 걱정할 것도 없지요. 내가 있어야 어떤 걱정을 하고, 내가 있어야 어떤 결정을 하겠는데, 내가 없어지니까 결정할 것도 없어지지요. 결정할 것이 없어지니까 ‘잘했다, 못했다’ 가 어떻게 됩니까? 그것도 없지요. 만약 내 결정이 있다면 그 결정한 것에 대해서 ‘잘되었다, 못되었다’ 가 되는데, ‘나’ 가 없으니까 ‘나’ 의 결정도 없어지고, 결정이 없어지니까 ‘잘했다, 못했다’ 도 없어지는 거예요.

‘잘했다, 못했다’ 가 없어지니까 자신을 자책하지 않고 그냥 감사가 나오지요. 이것이 한 2초 갑니다. 2초 가면 다시 원상태로 되어서 또 내가 결정합니다. ‘오늘은 뭘 해야 되겠다’ 고 결정합니다. 그렇게 결정하고 저녁이 되면, ‘오늘 아침에 이렇게 결정했는데 그것이 몇 개는 되고 몇 개는 안 되었다. 내가 왜 이 모양일까?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렇구나. 내가 왜 이렇게 게으르지? 이래 가지고 내가 하나님의 복을 받겠어? 나는 나쁜 놈이야’ 하고 ‘잘했다, 못했다’ 하는 거예요.

‘잘했다, 못했다’ 하는 그 자체가 사실은 건방을 떠는 겁니다. 다 못했는데 뭘 잘한 것이 있습니까? 그저 감사할 뿐이죠. 스스로 자책하면서 ‘하나님! 두 번 다시 이런 짓은 안 하겠습니다.’ 이렇게 수정합니다. 수정한다는 그 자체가 아직도 ‘나’ 를 버리지 못하겠다는 말이죠. 이것은 현재의 ‘나’ 를 억지로 미래로 밀어붙이겠다는 거예요. 힘만 들죠. 여러분! 젊을 때는 자기의 소원대로 됩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고 온몸이 쑤시게 되면 만사가 귀찮습니다.

여고생의 소원중의 하나는, 자기는 병원에 입원해서 하얀 침대에 누워 있고 선생님과 친구들이 꽃다발 가지고 문병 와서 위로의 노래도 불러줄 때 “선생님! 오셨습니까?”(힘없는 소리로) 하면 선생님이 “수연아! 어서 나아서 공부 열심히 해야지” 하고 친구들이 “수연아! 보고 싶었다. 너의 빈자리가 그렇게 클 줄 몰랐다” 는 이런 소리 듣기를 원하고 상상하잖아요. 그런데 막상 아파보세요. 사람들 오는 것도 귀찮아요. 다 귀찮아요.

아프다가 좀 낫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이제 나았으니까 놀아줄 사람이 필요하죠. ‘이것들이 내가 아픈데 오지도 않아?’ 그런 식으로 나옵니다. 진짜 아프면 만사가 다 귀찮아요. 무슨 말입니까? 자기가 결정할 것이 없으면 ‘옳다, 그르다’ 도 날아가 버립니다. 지금 내가 생생하게 살아 있으니까 ‘옳다, 그르다’ 하지만, 만약에 90살이 되어서 하는 일 마다 엎어지고 자빠지고 죽을 때가 다 되었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이 “할머니! 육교로 가셔야지 왜 도로를 무단으로 횡단하십니까?” 해도 그런 소리가 아무 소용없습니다. “내 맘이다. 왜? 너도 늙어봐라. 육교로 갈수 있는가? 못 간다.” 자기 맘대로 입니다. 북핵문제? “난 몰라! 김정일이고 뭐고 난 몰라! 만사 귀찮아.” 드라마 보는 것도 아직 볼만 하니까 보지요. 진짜 나이 들면 드라마 보는 시간이 자는 시간입니다. 내용이고 뭐고 아무것도 관심이 없어요.

점차 ‘나’ 가 사그라지는 순간, ‘나’ 가 소멸되는 순간, 그 순간이 원래 하나님이 의도했던 죽어 마땅한 죄인의 진면목입니다. 우리는 죽어 마땅하고, 죽어서도 지옥가도 마땅한데 웬 은혜인지. 웬 사랑인지 주님의 십자가가 있어서 지옥 가지도 못하게 만들고, 죽은 우리를 하늘의 영광으로 다시 돌변하게 해 주겠다는데 내가 요청한 적이 있습니까, 돈을 써서 뇌물을 먹인 적이 있습니까? 주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에게 거저 주겠다는데 그냥 받는 거지요. 그냥 받을 뿐입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받을 뿐이지 뭘 거기에 생색을 내면서 “착하게 살겠습니다. 바르게 살겠습니다. 앞으로 성경 두 장 읽겠습니다” 합니까? 그런 쓸데없는 오기는 부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남자가 여섯 명이나 되었어요. 요한복음 4장 시절에 여섯 명이지 예수님 십자가에 부활하고 난 뒤에 몇 명이 더 붙었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 버릇 어디 가겠습니까? 제가 예상하기는 아마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 만난 뒤에 열댓 명 더 만났을 것 같아요.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 만나는 그 전까지의 관심사가 뭐였습니까? “내가 목마른데 어떻게 하면 생수를 얻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귀찮게 물 길러 오지 않아도 될 수 있습니까? 관심사가 전부다 ”내가 어떻게 편하게 삽니까? 내가 어떻게 자기 정당성을 가질 수 있습니까? 내가 남자가 여섯이나 된다고 해도 너무 심하게 닦달 내지 마세요” 라는 자기변호와 자기 사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지난 과거가 어떠하든지 물동이를 버려 버리고 “심봤다!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 는 그 소리 밖에 안 했습니다. 아마 물동이를 버리고 왔기 때문에 시어머니에게 많이 당했을 거예요. 더 착해진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요한복음 8장을 가지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간음한 여인이 예수 믿고 난 뒤에 다시 간음을 했겠나, 안 했겠나?” 이렇게 물으니까 답변이 “그것은 그 여자 맘대로다” 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정답은 “주님 맘대로 입니다.” 왜 처음부터 주님 맘대로 였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창세전부터 그 여자는 자기 맘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내가 언제쯤 태어나게 됩니까?”라고 물을 수도 없어요. 왜? 창세전부터 택한 사람은 어느 시점, 어느 마을에 태어나는 것도 이미 창세전부터 확정되어서 태어나서 사랑받기로 되어 있고, 그 사랑이 와서 그 이후로 주께서 자아가 없어지는 방향으로 인도하셔서 오직 “주께서 구원하셨습니다” 소리만 하면서 천국에 합류할 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킨다” 는 말은, 하나님의 목적은 외면하고 나름대로 또 자기 세계를 정립하려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짓이 되는 겁니다. 그런 것을 안 지키는 법칙을 사수하는 그것도 또 문제가 됩니다. 안지 킨다는 그것이 또 새로운 지킴이 되니까.

“그러면 목사님! 우리보고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주께서 알아서 여러분을 자아가 별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닫는 식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항상 ‘나’ 라는 것이 안 깨지기 때문에 ‘나’ 라는 것을 내세우시고 내세운 그 ‘나’ 는 항상 깨질 만반의 준비를 하시면 되는 겁니다. ‘나는 지금부터 성경 다섯장을 읽겠다’ 고 마음먹으면 처음에는 약간 진지하게 읽어요. 그런데 이것이 한 두번 하게 되면 마치 과업을 이룬 것처럼 됩니다.

처음에는 성경 다섯 장을 읽는데 보통 진지하게 읽으면 1시간 정도 걸립니다. 그런데 그것. 이 숙달이 되면 1분만에 다 읽어 버립니다. 다 아는 내용인데요, 뭐. ‘다 읽었다. 숙제 끝!’ 뭐든지 그래요. 복음을 아는 교회 와서 어떤 사람은 울어요. “세상에 평생에 이런 말씀을 언제 들어 봤는가! 주여, 이 교회에 보내주셔서 복음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런 마음이 딱 한달 갑니다. 처음에 예배에 올 때 11시 예배 같으면 10시 30분에 옵니다. 30분 전부터 와서 “주여 감사합니다. 이런 교회 보내 주셔서” 하고 기도합니다. 그분이 두 달 지나면 11시 10분에 옵니다. “차가 밀려서---.” 그런데 그분이 자기 신상에 사건이 터져서 어떤 일이 생기게 되면 또 일찍 와요.

그래서 제가 박사교회에 있을 때 하루도 안 빠지고 늘 새벽기도회를 인도했는데, 새벽기도회에 늘 오던 사람 말고 평소에 안 하다가 갑자기 오는 사람이 등장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뭔 일이 터졌구나. 그런데 몇 주 가겠는가?’ 딱 1주 나오고 그 다음부터 안 나옵니다. ‘아, 문제가 해결 되었구나.’ 자아를 버려야 하는데 자아를 버리지 못하고 자기 목적을 위해서 자꾸 하나님을 도용하는 식입니다.

자아를 없애 버리면 나머지는 두 가지 노선밖에 없습니다. 이 강의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니 바짝 정신을 차려 주시기 바랍니다. 자아가 없는 상태에서는 예수님의 목적을 위해서 마지막에는 한쪽은 천국으로 한쪽은 지옥 가야 되지요? 그래서 “나는 어느 쪽으로 넣어 주세요” 라고 할 수 없고 일방적으로 예수님께서 언약에 속한 사람, 하나님의 약속에 속한 부류와 율법에 속한 부류로 두 종류로 나눠 버렸어요. 모든 인류를 청군 백군 나누듯이 쫙 나누어 버렸습니다.

한쪽은 천국 가기로 작정된 사람이고, 한쪽은 지옥가기로 작정된 사람으로 처음 태어날 때부터 쫙 갈라져 나옵니다. 여기서 자아가 있는 사람은 저에게 대들어요. “목사님은 하이퍼(초) 칼빈주의입니다. 말은 맞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사상이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다는 것이 말은 되는데 너무 심하십니다. 너무 극단이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잖아요. 이 목사, 당신 말대로 한쪽은 천국가기로 한쪽은 지옥가기로 이미 확정되었다면 그것만 달랑 남기고 성경에 나오는 많은 명령들과 많은 지시들(무엇을 하라)은 다 매직으로 그어야 되고, 찢어서 없애 버려야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대들거든요?

그렇게 대드는 이유는 아직도 무엇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까? ‘나’ 가 있어서 일단 ‘나’ 는 확보하고 ‘내가 천국에 갈까? 아니야. 지옥도 한번 구경 해야지. 아니야. 천국에 가야지.’ 이렇게 ‘내가 결정하도록 좀 하나님께서 자유라는 영역을 좀 허용을 해 주시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 아니냐.’ 이래 나와요.

이것이 ‘칸트’ 의 윤리에 나옵니다. 칸트의 윤리관입니다. “무한한 신은 알 수 없다. 다만 신이 준 것은 판단력 뿐이다. 신은 우리가 접근 할 수 없다. 왜? 너무나 위대하고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있는데 그것은 무조건적으로 윤리 도덕을 행해야 한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알려면 선과 악이 성립되고 마지막 심판이 심판답게 되려면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여지를 줘야 나중에 잘못에 대해서 책임을 물을 수 있지, 억지로 강제로 로봇처럼 다루었다면 마지막에 시행하는 심판자체가 의미가 없다” 는 겁니다. 이것이 칸트의 주장입니다.

심판을 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불러다가 개인적으로 책임을 묻는 겁니다.

“어이!”
“예!”
“너는 내가 준 자유를 가지고 이따위로 썼기 때문에 너는 지옥이야.”
“아이고! 그때 내가 제대로 자유를 사용할 것을 함부로 방탕했구나. 아이고! 할 수 없지.”
“어이! 너는 이리 와. 내가 준 자유를 가지고 제대로 사용했구나. 너는 천국에 가라.”
“주님 주신 자유를 가지고 와! 천국 가는구나. 역시 그때 자유를 날 위해 쓰지 않고 주님 위해 쓴 것이 참 잘했어” 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에는 무엇이 전제되어 있습니까? ‘나’ 가 있고 내가 있으니까 ‘나’ 에게 허용된 자유라는 것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닙니까? ‘나’ 는 포기 못한 채 먼저 내고 있고 난 뒤에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의 나름대로의 자유가 있어야 하고, 그 자유가 있다면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도 부여해야 된다는 거죠.

이것이 평등의 원리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못 할지언정 행할 수 있는 기회는 부여하자는 기회균등의 원칙이라는 것이 민주주의에 나오죠. 머리가 안 따르고 실력이 모자라서 못하는 것은 자기 잘못이지만 애초부터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위배되기에 기회를 주는 자유를 허용하자는 것이죠.

그것을 그대로 하나님나라에 적용시킵니다. 하나님도 처음부터 지옥 갈 사람을 확정하는 식으로 하지 말라는 이야기죠. 아무리 사랑, 사랑, 십자가 이야기를 해도 본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서 나는 그것을 거부한다고 했을 때 “그래 이놈아 이제 혼 좀 나봐라. 네가 지금 헛다리를 짚었다. 네가 큰 실수 한 거야. 내가 그때에는 두 팔을 벌리고 환영하면서 오라고 했지만 이제는 네가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해도 너는, ‘이럴 수가 있습니까’ 라는 핑계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앞뒤가 맞다고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봅시다. 방금 한 그들의 주장이 맞는 것인지요? 피조물이 존재하는 이유가 내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것을 알기만 하면 방금 이야기한 그러한 반발이 일어날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 밖에 없지, 따지고 들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으면 그 자유를 가지고 잘했으면 복을 주셔야죠” 하는 식으로 대들지 않는다는 말이죠.

마태복음 25장 36, 37절에 보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할 때 천국 가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라고 의아해 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자유를 주셨으니까 주께서 어려울 때 돌보고 주께서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겠습니다,. 주의 형제에게 한 것이 주께 한 것이 되니까 제가 예수 믿는 형제에게 제가 이런 식으로 하겠습니다” 라고 했다면 “얘야! 네가 목마를 때 마시게 해주었고 내가 벗었을 때 입혔느니라” 할 때 “예! 제가 진작에 알고 그렇게 했지요” 이렇게 나올 겁니다. 그런데 천국 가는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오히려 반문을 하지요. 뭐라고 반문 합니까? “제가 언제요?” 경상도 말로 “어데예?” 전라도 말로 “무엇이 라고라고라고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마 25:37-39)

의인은 그냥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냥 살아간 그 모든 행동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데 사용하게끔 하신 것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결국 마지막 심판때 까지 주님은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공로를 덧입혀서 그들을 구원하는 겁니다. 그 공로를 버린 사람은 말하기를, “주여!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본인이 알아서 주님을 위해서 일했다면 “아아! 그때 고아원에 기부금 보내준 것 그것을 주님께서 아셨구나” 이래 될 텐데 그게 아닙니다.

“아아! 그때 안 입고 묵혀 두었던 옷을 베트남에 보내주었는데 그것이 주님을 위해서 옷 입힌 것이구나”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처음부터 계속해서 마지막까지 그냥 살았는데 그 모든 주님의 공로가 그런 식으로 영광을 돌리도록 조작했다는 겁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지옥 가는 사람들은 더 억울하죠. “제가 언제 악한 감정 품고 예수님께 악 쓰면서 대든 적이 있습니까? 그런 적이 없습니다” 라고 하죠.

“내가 주릴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마 25:42-44)

그런데 이 반발에 대해서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5)고 합니다. 결국은 “무엇을 입혔고, 먹였고” 하는 거기에 무엇이 들어가면 안 됩니까? “내가 입혔고, 내가 먹였고, 내가 마실 것을 주었습니다” 라는 것이 천국에서는 용납이 안 된다는 겁니다.

“주께서 입히게 하셨습니다.” 딩동댕! 그것이 맞는 말입니다. “주께서 주의 형제에게 먹이게 하셨습니다.” 딩동댕! 그것이 맞는 말이에요. “주께서 나를 가지고 옥에 갇혀 있는 주의 형제를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믿어지고 느껴질 때 바라기는 우리 의존교회와 여기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그것이 바로 천국 가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나’가 없어지는 겁니다. 있는 나를 없애려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깨어져야 되죠. 바라기는 우리 의존교회와 여기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매일 같이 깨어지는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뭔가를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대신 죽으심으로써, 대신 피 흘리심으로써 거저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영접하는 순간, “내가 무엇을 했다”는 것이 의미 없이 깨어져 버립니다. 그것이 한 2초 갑니다. 돌아서면 내가 또 툭 튀어 나옵니다. “주여! 주님께서 대신 죽으심을 제가 알았습니다. 제가! 저, 참 기특하죠. 내가 그것을 눈치 챘잖아요.” 또 내가 튀어 나와요.

“내가 알았으니까 이제 내가 안 것을 가지고 복음을 열심히 전하겠습니다.” 그래 놓고는 목사 같으면 ‘이제 심방을 두 번 다녀왔으니 다음 주에 나오겠지’하는데 다음 주에도 안 나옵니다. ‘아하! 주의 성도였지 내 성도가 아니었구나’ 하게 됩니다. “내가 심방을 하지 않았더라면 심방한 효과를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인데 ‘내가 심방했다’ 는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부터 은연중에 심방 한 값을 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했구나. 와! 이 나쁜 놈! 내가 나쁜 놈입니다.”

그러면 그때 왜 심방했을까? 아아! 주께서 시키셨구나. 내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나’ 라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그리고 그 ‘나’ 는 늘 깨어져야 할 대상이기에. 깨어져도 괜찮기 때문에 깨어지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약속에 속한 자와 율법에 속한 자를 나누는데 율법에 속한 자는 지켜야 하기 때문에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엇을 먼저 설정해야 됩니까?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다면 구원받는 당사자가 설정되어야 합니다. 누구입니까?

‘나’ 가 있어야 되고, 약속에 속한 사람은 무엇이 없어져야 됩니까? ‘나’ 가 필요치 않지요. 왜? 약속을 이룬 분은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냥 약속을 받는 하나님이지, ‘나’ 는 약속을 만들어 내는 사람도 아니고, 지키는 사람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약속이 와서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이삭의 자손이 따로 있고 이스마엘의 자손이 따로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이 만들어 낸 사람과 내가 나를 지키는 사람, 이 두 종류로 죽 나눠집니다. 그래서 약속에 속한 사람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 고백해서 ‘나’ 를 버리게 되고, 율법에 속한 사람은 ‘내가 이만큼 충실하게 교회 잘 다니고 예수를 믿었는데 설마 나를 버릴까?’ 라고 자기 자신을 더욱더 공고히 합니다. 그렇게 ‘나’ 를 공고히 하게 되면 ‘나’ 앞의 누구와 경쟁상대가 됩니까?

‘나’ 앞에는 ‘너’ 가 있지요. ‘나’ 혼자 있으면 ‘내가 배고프다’ 는 소리를 안 하잖아요. 자기 혼자 있으면 “어이! 나! 나, 배고파.” 이런 사람은 없잖아요. 그냥 “아이고! 배가 고파” 하지요. 그런데 그 소리를 듣고는 외부에서 “누가?” 할 때는 “내가 배고파. 내가” 라고 하는 겁니다. 약속에 속한 상태에서는 ‘나’ 라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요. 왜? 주께서 만드신 작품이 ‘나’ 이기 때문에 구태여 나를 끄집어 낼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속한 사람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기 때문에 기어이 ‘나’ 를 설정해야 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가’ 비교해서 경쟁해야 합니다. 제가 지난주에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만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타인이 나를 힘들게 해요.” 나만 혼자 살면 편하고 집에 혼자 있을 경우에 파자마 바람으로 있어도 상관없는데, 갑자기 외부에서 손님(타인)이 오면 갑자기 옷을 갖춰서 입어야 돼요. 나를 힘들게 해요.

여자들이 집에 있으면 화장을 안 합니다. 밖에 나갈 때는 화장을 하지요. 집안사람은 다 자기식구지만 밖에 나가면 전부 남의 식구 아닙니까? 흉보잖아요. 나를 지켜야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어요. “타인보다 더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과거의 ‘나’ 와 미래의 ‘나’ 사이에서 실망하는 ‘나’ 가 자기를 힘들게 한다” 고 했습니다.

‘과거에 내가 이렇게 살지를 않았는데 내가 왜 이 모양인가? 앞으로 내가 이렇게 되고자 했는데 왜 나는 그렇게 못되는가?’ 자기가 자기를 힘들게 해요. 자기가 자기 목적을 만들어서 힘들게 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내가 어떤 법을 지키면 내가 원하는 법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라고 나설 수 있죠. 이게 율법에 속한 사람입니다. 끝까지 ‘나’ 를 포기 안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약속에 속한 사람은 약속이 날아와서 된 통으로 ‘나’ 를 깨어 버립니다.

“네가 너를 지키지 않더라도 내가 너를 이미 지킨다.” 끝! 끝난 거예요. ‘너를 지키는 사람은 너 아니더라도 따로 있다’ 는 말이죠. 꼭 우리가 운전해야 안심됩니까? 내 대신 운전하시는 분이 있으면 옆에서 안심하고 푹 주무시면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믿지 못하고 수시로 잠 깨어 일어나서,

“김 기사! 이리 가면 안 되는데---. 어? 저리 가면 안 되는데. 저리가면 망하는데.”
“사모님! 가만히 계세요. 제가 다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목적, 그것만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을 때까지 작게 콩나물 키우듯이 우리의 목적을 매일 같이 만들어 냅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인 되었음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허용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하나님의 목적이라고 해 놓고는(교회 와서 설교 들을 때는 ‘아!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 이라고 감탄해 놓고는) 문만 열고 밖에 나가면 그 다음부터는 내 목적이 있어요.

‘여기서 콜택시를 불러? 아니면 그냥 버스를 타나?’ 또 내 목적이 있어요. ‘나’ 를 살리기 위해서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러다가 회사에 늦게 되면 ‘그때 버스 타는 건데 괜히 택시를 타가지고---.’ 이렇게 또 자책을 하죠. 자책한다는 것은 그 자책이 반성이 아닙니다. 서글픈 거예요. 그것은 할 필요도 없는 자책입니다. 해도 또 일이 생깁니다. ‘버스 안 탔다’고 자책하는데 그때 만약에 버스 탔으면 더 큰 탈났어요. 그걸 몰라서 그래요.

우리는 그냥 우리 식대로 매일 같이 자기목적을 만드세요. 제가 만들라고 명령 안 해도 계속 만드니까 만드시 되 제가 꼭 당부하고 싶은 것은 늘 십자가 생각하시면서 그게 의미 없음을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 없이도 이미 대신 죽음을 통해서 구원이 확정되었음을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왕 한평생 사는 것 내 욕망이 요구하고, 내 천성이 요구하는 대로 멋들어지게 남부럽지 않게 보란 듯이 떵떵거리면서 살고 싶습니다. 이것을 허용하심은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인 줄 압니다. 평생가도 지워지지 않는 이 버릇 주께서 아시오니 십자가만 바라볼 수 있는 저희들 심령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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