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3/26오전설교 핵심

아빠와 함께 2023. 3. 29. 07:43

대전-오전설교 핵심 20230327

어제 낮 설교 가운데서 좀 어렵다는 그 대목만 할게요. 전체는 못하고요. 어떤 점이 어려우냐 하면, 중간이란 게 있어요. 중간이, 새로운 신적 질서 이건 천국입니다. 새로운 신적 질서라 하는 것은 무엇을 대변하느냐? 인간에 의해서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진 질서, 인민의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질서, 이 질서와 대비 관계에 있지요.

우리는 어디에 익숙하냐 하면 인간질서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들의 눈치를 봐야 되고, 그들이 딸기 안 좋아하면 딸기농사 못 짓지요. 전부 다 우리가 하는 것은 내가 갇혀있는 이 세계에서 반사되어 나온 거예요. 튕기면 다시 나한테 돌아오는 거예요. 손해나지 않는 상태에서 더 노골적으로 이윤을 남기는 상태에서 내가 투자한 그것이 이윤을 얻고 나한테 다시 돌아오는 식으로, 이렇게 노동을 하면서 인간은 살아갑니다.

이걸 뭐라 하느냐? 생존했다 하잖아요. 생명이 아니고 생존입니다. 여기에 누가 들어왔느냐 하면 신적 질서 속에 계신 분이 들어와 버렸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게 성경이란 이야기가 여기서 대충돌이 일어나는 거죠. 부처나 이슬람이나 또는 철학 같은 것, 공자, 맹자는 괜찮은 인간이 도 닦아서 동의를 구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 세상 잘 되기 위해서 제 의견 어떻습니까?” “아이고, 좋은 의견이네요. 지혜롭네요.” 이렇게 되잖아요.

다른 세계가 끼어들지 않아요. 뭐 하나님에 대해서 깨달았다, 이건 되지만 다른 세계가 끼어든 것은 복음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생존이 우선이기 때문에 너무 튀지도 말고 너무 후하지도 말고 통계적으로 말해서 중간에 올라가서 배불뚝이 되는 거예요. y=-x² 그래프거든요. 거꾸로 중간이 제일 불룩하고 밑은 소수. 이걸 보통 중산층이라 하잖아요. 상류층, 하류층. 중간에다 모여 있습니다.

이걸 광주강의에서 제가 언급하기를 평균, 평균이 가능해요. 어느 질서에서? 인간 질서에서. 그래서 이 평균이 인간세계에서 사는 하나의 모델이 되는 거예요. 살다가 항상 너무 튀지도 말고 너무 뒤떨어지지도 말라. 중간쯤만 해라. 이걸 뭐라 하느냐? 사람이 사람답게 하는 것, 중간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튀어도 너무 튀어버렸어. 중간이 없습니다. 신적 질서가 들어왔을 때에.

그러면 우리가 사는 것은 평균적으로 살고, 신적 질서가 요구하는 것은 중간을 거부하고. 그러면 평균질서, 인간 질서에 온몸으로 젖어있는 우리가 딸기농사 이야기하고 치과 이야기하는 우리가 어떻게 하늘나라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그것을 마태복음 4장 19절에 나오듯이 베드로 보고 예수님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 했지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려면 베드로가 낚을 생각하지 말고 지가 어떤 식으로 낚이나를 경험을 해야 돼요.

내가 어떤 식으로 낚이는가? 자기가 낚이는 전체를 반복하는 것이 낚는 거예요, 나중에. 베드로는 자기의 경험에 의하면 인간 질서대로 살다가 결국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너무 극단적이니까. 양 끝밖에 없어요. 평균대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 인간세계에서 신적 질서가 된다는 것은 딱 두 가지밖에 없어요. 낚이느냐, 버려지느냐? 딱 두 개에요. 낚이는 걸 1이라 하면 버려짐은 0가 돼버리죠. 중간은 없습니다. 98점, 95점 없습니다.

기존 교회에 어떤 장로란 분이 복음 이야기하니까 이런 소리 한다는 거예요. 뭐라 하느냐 하면, “그저 말씀대로 최선을 다해 살면 되지 않겠느냐?” 그럼 열심히 산다는 것은 100점이 아니면 0점이 아니라, 98점, 97점도 얼추 괜찮다는 이야기거든요. 이거는 인간들의 질서체제를 그대로 하늘나라 체제까지 끌어가겠다는 거예요. 망상이죠, 망상. 최선을 다하란 이야기가 아닙니다.

장로님이 그런 소리하는 게 이해는 돼요. 왜냐하면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 건 알겠는데 성경에는 그것만 있는 게 아니고 여러 가지 잔소리들이 많지 않습니까. 서로 사랑하라, 형제를 돌보라, 네가 용서받았으면 용서하라, 뭐 여러 가지 있으니까 그 하나하나를 다 하려하니까 자기 직장생활에 지장이 있단 말이죠. 가정생활이나.

그때는 방법은 뭡니까? 최선의 노력하여 역량대로 해보는 거예요. 뛰어난 사람 같으면 목사하고, 자기는 장로니까 자기 전문분야 기업체 있고 뭐 있으니까 자기 열심히 하면 되지 않겠느냐, 이런 식으로 자기에 대해서 정당화를 시도하죠. 그런 안목을 어제 낮 설교에서 무슨 안목이라 했습니까? 그게 ‘가라지’에요. 성경에는 가라지로 돼 있지요. 우리 인간들이 주고받는 말에 아주 적합한 말이, ‘버러지’에요. “이 버러지만도 못한 인간아.”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죠. 가라지.

가라지가 발생된 이유에 대해서 주님은 설명했습니다. 누가 뿌렸어요. 하나님의 원수가 뿌렸어요. 마귀가 뿌렸기 때문에, 마귀가 뿌릴 수 있어요. 밭은 인간들은 마귀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뿌릴 수가 있어요. 뿌린 쪽이 마귀기 때문에 인간 힘으로 뽑아낼 수가 없습니다. 뿌린 자가 마귀기 때문에.

마귀를 다루는 것은 주의 지시를 받은 천사가 뽑아내지 다른 것은 못 뽑아냅니다. 이 말은 어느 누구도 가라지 아니다,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끝까지 가야 되지요. 지퍼로 된 옷을 벗을 때는 중간 쯤 내리면 안 돼요. 끝까지 가야 돼요, 끝까지.

가라지에게 기다리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저주고 심판이죠. 그 저주와 심판을 미리 받아버린 사람이 바로 아군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코스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셨던, 마귀한테 속해서 마귀의 지배 아래 속해서 갔던 그 코스, 주님이 그런 코스 갈 이유 없는데 자기 백성을 대신하기 위해서 밟았던 그 코스의 마지막은 십자가고, 십자가는 저주였어요. 죄에 대한 저주, 지퍼를 끝까지 내리는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를 벗어나게 되면 그건 뭐냐 하면 그다음부터는 알곡 되시는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부여받게 되지요. 그걸 오후설교 때 예수님의 몸은 죽어도 뭐는 안 죽는다? 성령님은 안 죽지요. 우리의 육신은 죽어도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는 취소되지 않습니다. 이게 얼마나 반가워요. 전적으로 내 몸에다 모든 걸 의존한다면 인간 죽으면 말짱 소용이 없게 돼요.

그래서 성도는 믿을만한 것과 믿지 않아야 될 것을 살아생전에 둘 다 함께 공유된 자가 성도에요. 불신자는 이게 없어요. 불신자는 믿을 게 자기 몸뚱이 밖에 없어요. 늙어 죽어가면서 의지하는 이유가 달리 믿을 데가 없는 거예요. 늙어 죽는 몸 외에는. 그래놓고는 갈 때까지 가보자는 거예요. 끝까지 가본 적이 없어요.

그러나 성령은 반드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를 안고 우리에게 찾아왔기 때문에 이미 끝까지 가본 거예요. 끝까지 가봤으니까 가라지인 것을 알지요. 그리고 누구를 아느냐? 예수님이 그렇게 알게 했기 때문에 알곡도 알지요.

그러니까 성도는 뭐냐 하면 내가 구원받고 안 받고가 아니라 성도 안에 가라지, 알곡 둘 다 있다는 마태복음 13장 말씀 자체를 증명하기 위해서 쓰여지는 몸, 그 몸이 바로 성도라는 겁니다. 그래서 중간은 없습니다. 우리가 결정할 중간은 없고 주님의 몸이냐, 아니면 버린 몸이냐? 1이냐, 0이냐 둘 중에 하나밖에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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