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15강) 마22:44(죽음을 향한 기도) 20230227b
(강의:이근호 목사)
[십자가를 아십니까] 십자가와 기도, 몇 페이지냐 하면 51페이지에요. 기도하는 데 있어서 십자가와 관련된 이유는 한 마디로 말해서 너는 모른다.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가 기도를 통해서 더욱더 뚜렷해지게 만들었어요.
인간이 기도하는 것. 인간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뭘 고려했느냐 하면 이방 신에게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자들이 있지요. 이방민족이죠. 기도하는 데 몸이 모든 신체성을 바닥까지 신에게 다 갖다 바치지요. 이걸 구약에서 음란하게 섬긴다. 자기 신체의 모든 것을 다 갖다 바치듯이 이방 신에게 열정적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담에서 나온 현상이다. 죄를 지은 아담의 후손들이 하는 작당들이다.
창세기 4장에 보면 2절에,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해놓고 3절에,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그다음에 뭡니까? 여호와께 드렸다고 돼 있죠. 여호와께 드렸는데 여호와께서 받으셨다는 내용은 여기 없지요. 그냥 드린 거예요.
이게 이방종교입니다. 받든 안 받든 관계없어요. 왜냐하면 신은 인간이 만들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에서는 주면 뭐든지 먹어라 이 말이에요. 우리가 주면 그냥 처먹어라 이 말입니다. 우리 가 주는데 선악과 따먹은 내가 신이니까 신이 만든 신, 내 신임을 내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모조품으로 또는 장난감으로 만든 게 신이잖아요. 그게 우상이란 말이죠. 애완견, 또는 인공지능로봇 개 이런 거요. 내가 주었으면 고맙게 받아먹어라 이 말이죠.
그리고 신이 할 일은 우리에게 복 주는 것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주가 되고 신은 보조가 되는 겁니다. 신은 인간의 명령을 따를 책임과 의무가 있고 인간은 신에게 명령할 권한이 있는 것, 그게 아담 안에 들어있는 아담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신과 대화하는 것, 그걸 기도라 하지요.
대화한다는 말은 제가 고상하게 대화한다 했지만 기독교에서 통하는 단어는 뭐냐? 호흡한다. 기도는 신들의 호흡이다. 기도를 멈추면 호흡이 끊어진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해야 사람이 성도로서 살아갈 수 있다. 하면서 호흡이란 단어를 쓴 겁니다. 기도원에 가면 문구로 써놨어요. 기도는 호흡이다. 쉬지 않고 숨을 쉬듯이 쉬지 않고 기도해야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
기도응답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기도하는 본인이 응답이기 때문에. 본인이 달라지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응답은 간단합니다. 뭐냐 하면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에요. 이 응답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로마서 8장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선 응답을 다 미리 쥐고 계셨어요. 얼마 전에도 이 구절을 어디서 언급한 기억이 나요.
로마서 8장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그다음에 뭡니까? 알지 못하죠. 너는 모른다. 아무것도 몰라 알지 못해요. 그러면 성령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는 알지 못하는 상태가 쭉 계속 가지요. 성령이 오지 않았으니까. 그럼 성령이 오지 않을 경우에 기도합니까, 안 합니까? 오늘 결정적 질문입니다. 호흡하듯이 계속 쉬지 않고 기도하지요. 어떤 상태에서? 무지한 상태에서 알지 못한 상태에서 계속 기도합니다.
그런데 무엇까지 무지하냐 하면 응답까지 무지해요. 응답을 지가 조작해내요. 왜 응답을 조작하느냐 하면 안 그러면 무릎이 너무 아파요. 빨리 집에 가서 살림을 해야 되는데 응답 없이 그냥 가게 되면 그동안 차타고 온 기름 값 계산해보세요. 1540원 계산해보세요. 기도원까지 차 운전해서 왔는데 기름 값이 안 빠져. 기름 값 빠지고 남한테 응답 받았다고 자랑질 하려면 응답을 자기가 문제 내고 자기가 채점하고 백점 맞고. 백점은 너무하다. 한 80점, 지가 조정해서 가는 거예요. 그걸 입시부정이라 하는 거예요. 쉬지 않고 사기 치고 있는 거예요.
(아이고, 잘 되네. 생활의 팁이다. 이것 구매하세요, 간접광고. 다 쓰거든 한 장 떼면 됩니다.) 이런 팁, 휴지로 하면 잘 돼, 이런 건 알면서도 기도 응답하는 건 자기 방어용이거든요. 힘들 게 하면 자기 에너지가 소비되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것에 대해서 자기 방어에 대해서는 그 방어에 국한돼 있기 때문에 백날 응답해봐야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해버리는 겁니다.
사실과 해석, 이것이 자기 내부에서 계속 뺑뺑이 도는 겁니다. 자기 고려장 묻혀있는 그 안에서 계속 기도 응답하고 있는 거예요. 고려장에서 기도하는 데 천정에 반사되어 도로 지 기도가 지한테 메아리쳐서 오니까 자기가 곧 신이고 자기가 신을 만드는 사람이고 신의 응답도 자기가 소설 쓰듯이 다 써버리고, 그렇게 되지요.
그러면 하나님 보시기에 뭘 모른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신다, 되잖아요. 우리는 모르는데 하나님은 아시는 게 뭐냐 하면 너는 죽는다. 이게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독생자가 이 땅에 왔잖아요. 이미 예수님의 일정은 확정됐습니다. “그 동네 가면 너는 죽는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 동네 가면 죽는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응답입니다. 어떻게 안 죽을 수 없습니까? 아니 죽어야 돼. 그것도 자기 백성의 죄를 안고 죽어야 돼요. 이게 응답이에요. 이 응답은 확정되었어요. 응답이 확정되었으니까 응답을 안다가 됩니다. 안다가 됐으니까 세상 돌아가는 것, 운영되는 것, 또 예수님 활동중심 이건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나를 죄인으로 죽이는 쪽으로 세상은, 팽이가 중심을 잡고 돌아가듯이 세상은 나를 죽이는 쪽으로 돌아갑니다. 이게 기도 응답이에요.
그러면 성도의 기도는 이미 해답이 나왔습니다. 할 수 있거든 내가 안 죽고 살 수 없겠습니까? 아니다. 그러면 이 잔을 제게 넘겨주옵소서. 그 응답이죠. 어떻게 내가 좀 더 살아서……, 안 된다고요? 알았어요. 죽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응답을 알면 그다음부터 기도할 맛이 난다, 안 난다? 이미 확정돼버렸어요. 기도해도 죽고 안 해도 죽는데 굳이 기도까지 해가면서 죽을 이유 없지 않습니까. 죽는 게 확정돼버렸으니까요.
그래서 인간은 엉뚱한 김새는 기도를 자꾸 해요. 진짜 기도를 훼방 놓는 기도를 계속하는 겁니다. 이미 응답은 왔는데 어떻게 요령 부려서 꼼수 써서 오래 좀 버텨볼까 하는 응답을 받는 용도로 엉뚱한 기도를 자꾸 하게 되지요.
그런데 주께선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성령 안에서 기도해버려요.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나를 방어하고 내가 지키는 것이 없을 경우에 성도의 존재 이유, 그것 때문에 성령께서 기도하게 하셔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증인하는 거예요. 죽기는 죽는데 이게 내가 죽고 싶다고 해서 죽는 게 아니고 죽을 때도 주께 정해져있으니까 죽을 때까지 예수님이 나한테 다해준 일의 내막, 내용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펼쳐낼 수 있도록 기도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시편에 나오는 다윗의 기도들입니다.
시편에 나오는 다윗의 기도는 자기 자신이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산 제물로써 드리는 내용, 이게 다윗의 기도입니다. 기도를 제물로써 제단에 불판, 그러니까 해물철판구이 할 때 쉐프들 까분다고 불 쇼하는 그 판에 다윗의 인생이 누워 있다고 보세요. 그러니까 샌드위치 안에 소시지가 길게 누워 있지요. 샌드위치가 오늘 우리의 스타 모십니다, 해서 소시지를 보여주잖아요.
결혼식장에 보면 긴 연도가 있고 패션 쇼하는 그런 길 같은 거기에 하객들이 보고 신랑, 신부도 지나가고 처음에는 누가 지나가느냐 하면 시어머니와 장모가 친하지도 않으면서 친한 척하면서 한복 입고 지나가고 화촉을 밝힌다 하고 촛불을 아무나 할 걸 왜 그 사람이 하는지 몰라. 그래서 한 번 인사하고 그다음에 신랑 들어오고 신부 들어오고 하지요.
제가 간 결혼식엔 신부 아버지가 결국은 신부를 못 데리고 갔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왜? 자기 딸 할 때 눈물이 너무 나기 때문에 안 데려가겠다고. 자기 딸 시집가는 게 그렇게 눈물이 나서 자기 딸 남자친구 구박을 하면서 내 딸 못 데려간다고 버티는 뚱뚱한 개그맨 있어요. 이용식이. 여기서 연예가중계까진 할 필요 없고요.
소시지가 누워있는 것처럼 그 제단에 아예 다윗이 누워 있는 게 다윗의 기도에요. 다윗의 기도장소가 앞자리도 아니고 그냥 이미 주님이 드러누워 있는 자리, 무덤 자리에 그냥 겹치기로 다윗이 누워 있으면 그게 거기서 나온 이야기가 기도가 되고, 다윗의 일대기가 되고 일생이 되고 우리 일생이 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있는 자리, 땅에서 이미 죽었고, 이미 죽는데 남아 있는 문제는 왜 죽는지를 우리가 알아야 돼요. 죽는다는 건 확정됐기 때문에 왜 나 같이 괜찮은 존재가 죽어야 되는지, 젊은 나이에. 나이 팔십 되도 젊은 나이에요. 팔십 된 사람 늙었다 하면 기분 나빠해요. 아직도 나는 팔팔해, 이러고 있다고. 그러다 엎어지고 다치고 하지만. 항상 나이 구십 되도 자기가 젊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미지가 그래요.
두뇌 속에 있는 이미지가 자기가 항상 절정의 순간을 이미지로 꼽아서 꿈에도 막 나오고, 그것을 자기 방어체제 때문에 나이 늙은 자기 얼굴을 자기내부에서 핍박을 해요. 남이 핍박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핍박을 해요. 못 생기고 늙어빠진 내가 나에게 쫓아내지요. 어떤 개를 입양했다. 적이 누굽니까? 이미 터 잡은, 그것도 선배 티낸다고 신빠이를 그렇게 괴롭히잖아요.
인간은 자기가 마음에 드는 절정의 이미지를 자기가 확보하게 되면 그 가치를 방어하는 방어체제에 돌입하게 됩니다. 그래서 병들고 아프고 돈 없는 날마다 갈수록 변화되는 이 변화를 싫어하고 괜찮은 영웅적 모습, 이미지를 고정화시켜버려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지요. 가짜 자기를 자꾸, 남들이 일러줘야 지가 가짜인 줄 알지 본인이 자기가 가짜인지 어느 정도 인물인지 몰라요.
그래서 연세 많은 사람은 진짜 자기가 들킬까 싶어서 거울도 잘 안 보고 사진도 안 찍고 그래요. 혹시 자칫하면 진짜 내가 알까봐. 진짜 내가 알면 안 되잖아요. 항상 난 가짜이고 싶어라, 이걸 유지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아상을 특히 기도할 때 보면 자기 자아상을, 영상을 띄웁니다. 내가 기도하는 모습을 자기 안에 투영을 해서 투영된 멋진 이상적인 아름다운 모습의 자태, 인간이 기도하는 그 기도에서 인간이 기도한다면 뭐가 나올까를 지금 자기 입으로 내뱉고 있는 거예요. 철저한 자기기만, 자기연출, 자기조작 그래놓고 오늘 기도 잘했다고, 지가 지하고 놀아놓고 기도했대요. 기도는 인간이 한 전형적인 속임수입니다.
여기 51페이지에 3강 십자가와 기도, 첫 번째 나오는 게 [모든 인간은 기도할 줄 안다.] 아까 한 것 봅시다. 기도는 이방종교가 기도하지요. 그다음에 봅시다. 51페이지 중간에 [인간에게 기도가 성립되려면 기도를 받는 그 신을 지상에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기술이 구비되어야 한다. 전적으로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신을 하나 키우려면 그 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호감이 있는 파악해야 한다. 마치 개를 부리려면 먼저 그 개가 좋아하는 먹이를 주어서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훈련시키는 것이 필요한 것과 같다.] 이렇게 돼 있지요.
그러면 인간의 기도 응답이 잘 되는 신은 뭘 좋아할까요? ①피자, ②참외, ③강냉이 튀긴 것, 안 그러면 ④구기자 넣은 대추차. 자, 내가 원하는 신에게 어떤 뇌물을 바치면 신에게 즉각 빠른 응답이 주어지겠습니까? 정답을 내가 이야기하겠어요. 돈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세계에서 돈이 들어가서 해결 안 되는 게 없어요. 돈만 주면 다 해결돼요.
인간은 자기 이상형이 신이 되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와 기도하기 전에 먼저 흥정하고 거래에 나섭니다. “하나님이여, 우리 집안에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내가 새마을금고에 돈 좀 넣은 게 있는데 새마을금고 사고 터졌습니다. 돈을 놔둘까요, 빼서 다른 데 넣을까요? 응답해주시옵소서.”
여러분 그런 경험 없어요? 은행에 돈을 맡겼는데 은행이 파산 직전이다. 옛날에 대구의 대동은행에 그런 일 있었어요. 완전히 돈 다 날렸어요. 거기에 돈 낸 사람들. 주식을 팔아야 됩니까, 오를 때까지 놔둬야 됩니까? 어느 쪽입니까, 라고 할 때 뭘 하느냐 하면 그 전제가 뭐냐 하면 돈 없이는 나도 없다. 이게 원칙이에요.
“그 돈 없이는 나도 더 안 살 거야. 죽어버릴 거야.” 이게 고백한단 말이 아니고 입에 담기 전에 먼저 마음이 지가 먼저 알아서 턱하니 안방 아랫목에 지가 자릴 잡고 있어요. 돈 없으면 너도 없는 거야. 이것 부정하지 마, 이런 식으로 자릴 잡고 있으니까 우리는 나의 이미지, 우리가 종이잖아요. 노예란 말이죠. 내가 나의 노예거든요. 그런데 나는 이미 돈 없이는 나도 없다가 전제돼 있단 말이죠.
돈 없이는 인격도 있을 수 없고요, 품위유지도 안 되고요. 돈 없으면 친구도 물론 없고요. 몸의 건강 돈 있어야 되고. 이거는 돈 있으면 어느 나라라도 천국이고, 돈 없으면 미국 가도 지옥이에요. 이민 괜히 왔다는 사람, 돈 없어서 그래요. 돈 있어 보세요. 이민 잘 왔지요. 그러니까 내가 돈을 버는 게 아니고 이미 나는 돈이 나 보고 돈 벌어보라고 돈이 지시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과 재물을 하나님 앞에 우상으로서의 대상, 하나님의 대항체로서 이미 주님께서 설정해놨어요. 재물로 설정해놨습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의 기도는 뭐냐 하면 내가 이익이 되도록 기도한다는 말을 그렇게 둘러서 이야기하지만 딱 깨놓고 뭐냐 하면 “하나님, 내가 살기 위해서는 돈을 주셔야 됩니다.” 이런 기도지요.
그렇다면 주님의 응답, 진짜 하나님의 응답은 뭡니까? 이참에 죽어라. 잘 됐네. 이참에 네가 죽어 있음을 깨달으라, 이런 식으로. “네가 나한테 매여 있어야 되지 왜 돈에 매여 있느냐. 네 주제파악을 이참에 새롭게 파악하라,” 이게 주의 응답이에요. 돈에서부터 벗어나라. 돈에 얽매일 필요 없다. 이 말은 네가 네 목숨에 얽매일 필요 없다는 뜻이에요. “이참에 네가 네 목숨에 매여 있지 않는 그런 자유를 만끽하라!” 이게 주님이 주신 응답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더 좋은 응답을 준비해놓으셨어요.
우리가 돈 없이 못 산다는 말은 굶어죽는다는 말이 있지만 살아 있으면서 품위를 유지하고 나다움의 품위, 나답다는 것은 이미지가 굉장히 괜찮은 나로 이미지로 확정했기 때문에 괜찮은 나의 이미지를 유지하고 보수하고 그걸 지켜낼 수 있는데 뭐가 필요하다? 비용이 필요한 거예요. 돈이 필요한 거예요. 그게 나 안의 구성요소에요. 꽉 들어차 있어요. 그것 말고 없어요.
오직 나라고 한다면 괜찮은 나를 지켜주는 보조적인 구성요소들, 전부 다 돈 드는 거예요. 일 년에 두 번 씩은 해외여행 가야 된다는 이런 것들 전부 다 돈 드는 이야기에요. 철마다 백화점은 거쳐야 된다. 백화점 쇼핑 양쪽에 다섯 개씩 균형 맞혀 나오는 거. 그렇게 될 때 살맛이 엔돌핀 확 돌잖아요. 왜? 이상적인 나다운 거예요.
나이 칠팔십에 미니는 왜 사요? 그러니까 지 다리가 괜찮은 다리인 줄 아는, 이십 대에 다리 예뻤다는 게 팔십 되도 유지가 되는 겁니다. 내 다리가 얼마나 예쁜 줄 모르지. 그래놓고 맨날 바지 입고 돌아다니고. 혹시 들킬까봐. 그것이 전부 다 기도로 다 나오는 겁니다.
자, 그러면 칭찬받는 기도를 해봐야죠. 목사님은 부정적인 것만 한다는 데 긍정적인 것 해줄게요. 열왕기상 3장 5절,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솔로몬이 기도가 일천 번제를 드렸지만 기도를 한 게 아니에요.
기도하라는 명령은 어느 쪽입니까? 솔로몬 쪽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먼저 나타났습니다. 하니까 여기 솔로몬의 기도가 뭐냐 하면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의 자리가 주님이 주신 자리인 것을 인정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이 일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고 이 자리에 계시는 하나님이 이 직을 수행케 하셔야 됩니다. 나는 주님이 직접 수행하는 자리 제공자일 뿐입니다. 저는 그 자리가 시키는 대로 할 용의가 돼 있다는 기도에요.
뭐가 없어요? 돈 달라는 기도가 성립 안 되지요. 만약에 돈을 달라, 돈을 줘버리면 뭐가 계속해서 강화되느냐 하면 나는 내 자리가 돼버려요. 나를 위한 자리가 돼버린다고요. 여러분에게 돈 안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보니까 돈 별로 없어. 돈 있으면 넓은 데 이사 가지. 돈 있으면 이 동네 재개발 안 되나.
오히려 이 자리를 주께서 빼앗아 가버려요. 니 자리가 아니다. 빼앗아 가버리면 뭐도 뺏기느냐 하면 괜찮은 나 이미지도 같이 주님께 빼앗기는 응답을 받습니다. 내가 나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원수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내가 나 지키고 싶은 게 본능인 건 알겠지만 그것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걸로 인하여 방해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겁니다. 차라리 주님께서 내 것을 가져갔으면 좋겠어요. 그것도 택배로 가져가서 새벽에 천국에 도착했으면, 그걸 새벽배송이라 하는데, 새벽에 천국 문까지 배송됐으면 좋겠어요.
정리해봅시다. 주님의 기도는 또는 가르치시는 기도, 주기도문이죠. 주기도문은 나의 것을 다 빼앗는 기도에요. “네가 네 것 관리한다고 욕본다, 애쓴다, 스트레스 많이 받지. 내가 몽땅 다 가져갈게.” 이런 집중이 있어요, 요새. 이런 집중을 다섯 자로, 유류품정리. 돌아가신 분 마지막 쓰레기 같은 유류품 우리가 알아서 다 정리하겠습니다. 티비는 고물로 넘기고 장롱 이런 것은 다 알아서 버려주겠습니다. 돌아가신 분의 유품정리.
정리는 누가 하신다고요? 우리 주님께서 하게 하신 거예요. 내놔라 하는 것이 주의 기도입니다. 내가 가져갈 테니까 너는 나한테 넘겨주면 된다. 이걸 성경에서 의탁한다, 또는 하나님께 의지한다, 의존한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힘들 때 그만 가져 가이소, 이게 기도에요. 우리는 기도를 어쩔 수 없이 기도 안 해도 기도하는 방법은 뭐냐?
“잠잘 때 하나님께서 오늘밤에 푹 자게 해주시고 이참에 또 마음이 뜻이 있거든 아예 데려가주소서. 내일 아침 눈뜨지 못하게 하옵소서.” 이러면 “그건 욕심이야, 네가. 아직도 주의 증인할 게 남았는데 네가 네 마음대로 벌써 올라올라고? 제대 날짜 아직 멀었어. 좀 기다려 봐. 내가 데려갈게.” 이렇게 나오거든요. 하여튼 기도라 하는 것은 데려가시는 기도에요. 그걸 신약적으로 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 마지막에 뭘 붙입니까? 주의 이름 붙이지요. 주님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를 증거하시고 마지막 겟세마네 기도를 통하여 기도의 응답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다시 합류가 재회가 되는 만남이 되는 그게 바로 기도입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3장에서 아까 자리 문제거든요. 왕의 자리. 여기 열왕기상 3장에서 솔로몬이 어떻게 기도하는가 보세요.
7절에,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이렇게 돼 있지요.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다윗은 그냥 다윗이 아니고 뭘 받았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다윗입니다. 언약 받았으니까 하나님께서 마중 나오는 내용이 다윗에게 미리 주어졌다고 보면 다 이루신 내용이 다윗을 기다리고 있거든요. 다윗에게 미리 일부분을 준 거예요.
“다윗을 대신하여” 다윗의 자리죠. 그렇다면 솔로몬은 본인의 자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본인의 자리가 없어요. 그래서 잠언도 그렇고 전도서도 그렇고 자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를 다윗의 아들이라 하지요. 말해놓고 맞는지 모르겠다. 맞네. 잠언서 1장, 다윗의 아들. 누구의 자녀라는. 다윗의 자리에 여전히 속해 있다는 것이지 내 자리가 따로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것은 뭐냐? 아버지의 자리로 보면 안 되고 아버지가 준 언약의 자리가 언약을 스스로 자기의 자손을 남기는 능력에 의해서 내가 차기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언약의 실현 태로써 실현된 상태로서 내가 아들 되었습니다. 여디디야잖아요. 자기 형이 세 명이나 있어요. 있지만 네 번째인 솔로몬이 뭐가 됐습니까? 왕이 된 것은 다윗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예요. 자리의 특수성, 이거는 유일무이한 둘이 아니고 오직 하나밖에 없는 특수한 자리.
전도서에도 마찬가지에요.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그렇게 되면 우리가 기도할 때 누구 이름으로 기도한다 했어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요. 그러면 우리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고 누구 자립니까? 황공스럽게도 예수님의 자리에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광주강의 때 뭐라 했습니까? 밥을 먹어도 주님이 밥을 먹고, 잠을 자도 주님이 잠을 자고, 운동해도 주님이 운동하고, 티비 봐도 주님이 티비 보고 그렇게 하고 주님이 안 계시면 나 홀로 티비 보고 나 홀로 영화를 보고 지 혼자 울고불고 하는 나중에 우울증 걸리거든요. 자기밖에 없으니까 언약이 없으니까. 맨날 내 팔자야, 내 팔자야 하면서 자기는 이상적인 괜찮은 시절의 이미지에서 이미지의 종이 되는 거예요.
그럼 그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뭐가 필요하다? 돈이 필요하거든요. 돈은 없지 이미지는 있지 그 간격이 찢어지겠지요. 찢어지니까 이게 암 걸리고 스트레스 받는 거예요. 맨날 찢어진 만큼 인간은 그 탓을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한테 노예가 돼 있는 마귀지요. 자기한테 노예가 된 인간들이 특징은, 사는 방법은 첫째, 매일같이 적을 만들고, 두 번째, 그 적을 씹고, 세 번째, 잠시 속시원해하면서 산다. 매일같이 적을 만들어야 돼요.
특히 연세 많은 노인네들 매일같이 적을 만들어요. 경상도 쪽에선 매일같이 이재명 씹고, 전라도 쪽은 매일같이 윤석열 부적 만들어 눈알 꽂기, 촛불집회하면서. 적을 만들어야 나의 허전함을 허술함을 메울 수 있어요. 잠시나마 내가 어떤 패자가 승자 되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창세기 3장에 이것 때문에 그래요. 수치심.
수치심은 왜냐하면 자기 내부 균열 때문에 생겨요. 하나님이 만든 인간이 있는데 이미 선악과 따먹고 균열됐어요. 균열됐으니까 벌어졌잖아요. 칸이 노출된 뭐로도 메울 수 없는 빈칸이 노출될 때 그 허무함과 허전함이 자기를 힘들게 하는 거예요. 자기가 부끄러운 거예요. 그래서 치마를 만들어서 나 멀쩡합니다, 수치 없다고 가리는 용도가 옷이에요. 옷을 입는다는 것은 내가 정상이 아닙니다. 환자입니다, 란 뜻이에요. 정신병 환자란 표시에요. 그런데 벗고 있으면 더 환자니까…….
로마서 1장에 보면 이 점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 나는 복음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세상 자본주의사회에서 부끄럽지 않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것은 이상적인 나로 지켜내기 위해서는 비용이 들고 그게 돈이 되거든요. 그래서 돈 있는 자는 계속 자기가 늙어가면서도 자기는 괜찮아, 괜찮아, 나는 괜찮은 존재야 그걸 남한테 과시할 수 있기 때문에 돈이 뒷받침해주거든요. 실탄이니까. 실탄이 뒷받침해주니까 자기는 계속해서 젊을 때 환상이 확정되고 고정돼버린 겁니다.
17살 먹은 소녀 둘이 친구였는데 십년 이상 지났습니다. 나중에 만났어요. 헤어진 지 십년 만에 둘이 만났어요. 만나서 자신이 평소에 하던 행동이 우연히 단짝 친구한테 들켰습니다. 들키고 난 뒤에 이런 말을 했어요. “너는 내가 창피스럽냐?” 그 뒤에 말이 있어요. “너는 죽었다 깨나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몰라.” 그런 말 했답니다.
십년 전에 단짝 친구기 때문에 까르르 만나면 웃고, 뭐 좋은 것, 맛있는 것 나누고 했는데 둘이 헤어져서 십년 뒤에 만났을 때 한쪽 인생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걸 우연히 단짝 친구한테 들켜버린 거예요. 그런데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 만나니까 친구가 깜짝 놀란 거예요. 어떻게 저렇게 망가질 수가, 했을 때 망가진 친구가 그걸 미리 간파해서 너는 내가 창피스럽지, 라는 말이 뭐냐 하면 그걸 한 마디로 수습하면, “그래, 나 돈 없어.” 하고 똑같은 소리에요. 이 사회에서 나 돈 없어.
여고동창생 40년 만에 만났다 합시다. 육십 넘어서. 만나자마자 단짝 친구가 눈물을 주르륵 흘릴 때 눈물 흘린 친구가, “이제 만나보니까 내가 창피스럽지. 그래 네가 예상한 대로 나 돈 없어. 남자 잘못 만나서 이놈의 팔자가 이렇게 더럽다. 그런데 날 욕하지 마. 너는 죽었다 깨나도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흉내도 못내.” 그걸로 지 자존심은 챙기죠. “너는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서 잘 살지. 나는 개판되고 엉망진창 다 깨졌어. 그러니까 나 보고 함부로 욕하지 마. 나 너무 힘들게 살았어.” 드라마 대사에 나올 법하죠. 실제로 그런 일이 많이 있잖아요.
결국 이 두 친구의 대화 내용의 핵심은 뭡니까? 나 돈 없다. 나 망했어. 초라하지 이 모습이 그지? 그래서 어느 강의에서 했잖아요. 돈 없으면 사는 게 뭐라 했습니까? 추잡스럽다. 돈 없는 것도 추잡스럽고요, 돈 없다는 티 안 내기 위해서 허세 떠는 그 모습이 더욱더 추잡스럽고. 돈도 개뿔도 없으면서 돈 없는 주제에 혹시 허접한 내 인생 들킬까 싶어서 주머니에 아무것도 없으면서 “돈 내가 낼게. 어? 지갑을 놔두고 왔네.” 이런 쓸데없는 추가적 폼을 낼 필요 없거든요.
인간의 겸손? 돈 있는 사람이 겸손해요. 그리고 인간의 착함, 덕목 다 돈이 받침 해줘야 덕목이 되죠. 돈 없는 인간이 겸손 떨면 돈 없는 티에요. 겸손한 게 아니고. 주책 떨고 있다. 저 돈 없는 티 봐라. 이렇게 되지 절대로 그걸 겸손으로 해석 안 합니다. 결국 모든 해석은 뭐로 결정한다? 돈. 이 세상의 모든 해석은 하나로 결정됐습니다. 돈. 그런데 주님은 개뿔도 돈 없이 왔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싫어버린바 된 이유를 알겠지요.
주님의 기도 응답은 뭐냐 하면 인간들이 뭐를 질주하고 그쪽으로 막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다 꿰뚫어보세요. 다 알고 계셔요. 그래서 절대로 주님 쪽으로 자진해서 방향 틀기를 못하게 만드는 쪽으로 오십니다. 자, 방금 한 그림이 이렇게 되겠지요. 넓은 길, 좁은 길인데 이 세상 전체가 마귀가 진두지휘해서 달려갑니다. 인간답게 살아라. 다시 말해서 돈 벌어라, 이 말이거든요. 돈 벌려면 어떻게 한다? 마귀한테 이 세상 권력에 고개 숙이면 되지요.
자기 자신에게 고개 숙이면 돈이 되는 거예요. 자기 자신만 지키면 돈이 되는 겁니다. 남 생각하지 말고 우르르 다 몰려가죠. 주님께서 이쪽에 와서 따라 붙이지요. 이쪽에 따라 붙이니까 다 따라 붙이는데 못 따라 붙이는 낙오자들 있지요. 낙오자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창기와 욕 되게 먹는 세리와 그런 사람들, 고상한 사람들은 앞에 가고 장애자들, 가난한 사람들, 구걸하는 사람들, 과부나 고아들 그런 사람들은 떨어지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이쪽을 통해서 주님에게 갑니다. 이 사람들은 주님을 어떻게 해요? “나 그쪽에 안 갈래.” 거부하지요. 그래서 주님의 기도라는 것은 이 고려장 같은 죽음의 세계에 와서 왜 이 세계가 필히 ‘보편적 저주’란 말 했는데 어제, 보편적으로 저주받아 마땅한 걸 증명하는 그것을 주님의 기도의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 심판의 정당성이죠. 어떤 단 한 사람도 심판에서 면제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고. 그 누구도 없다는 걸 증명하는 겁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은 인간이 좋아하는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했던 그 돈 자리에 뭘 집어넣는 거예요? 예수님의 자기 자리를 거기다가 바꿔치기해서 집어넣는 그걸 대신 죽으심, 대신하심이에요. “이제는 네 자리는 끝났다. 내가 내 이름으로 접수하마. 네 자리는 내 자리로 이미 접수가 끝났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아까도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그 자리에서 성도가 할 원칙은 뭐냐? 똑같은 원칙이에요. 우리는 거기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뭘 합니까? 죄인으로 살면 되지요. 자, 죄인은 뭘 추구한다? 돈 추구한다. 따라서 돈 벌면 되잖아요. 공식 간단하지요. 성도와 성도 아닌 사람은, 성도 아닌 사람도 돈 벌고 성도인 사람도 돈 버는데 차이점은 뭐냐?
“엄마 나 돈 벌었어.” 이거는 성도 아닌 사람이고, “엄마 나 주께 시험 들 것 또 들어왔어.” “한 달에 또 이천만원 넣어줬어. 시험 들어 죽겠어. 못 살겠어. 이천만원, 이천만원 신사임당 어째, 어쩌면 좋아 이거?” 전라도 말로 뭐라 하지요? “어쨌을까, 이천만원. 또 죄인 되네.” 똑같이 달라질 건 없어요.
하지만 내가 주의 이름에 있어서는 주께서 뭐 때문에 돌아가셨는지를 무엇 때문에 어느 인간도 스스로 구원 될 수 없는가를 돈 버는 행위와 작업을 통해서 그것을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바로 제단 위에 누워 있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이 자체가 기도의 응답이에요. 그래서 기도할 때는 고자질하면 돼요.
“오늘도 어디 가서 일을 했는데 어떤 사람은 예쁘다고 보너스 200프로 줬습니다. 도대체 제가 언제까지 이런 수모를 당해야 됩니까? 그런데 고맙게도 새마을금고에서 파산한다 해서 3억 넣어놓은 것 다 날리게 되었습니다. 주여 이걸 통해서 내가 돈이 아니라 주님 위해 살아간다는 걸 깨닫게 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히히히 웃으면서 눈물은 왜 나는지 이 모순성, 분명히 정답은 알고 있는데 몸은 나도 인간답게 한 번 살아보면 좋겠다. 돈이 뭔지를 진짜 백화점 원 없이 사보고 죽고 싶다는 이 욕망을 계속 살아나고. 하나님이여 이 돈 내가 다 쓸라 하는 게 아니고 십일조로 교회 교육관 짓는데 쓰고요, 자식들 어려운데 도와주면 역시 예수 믿는 엄마는 복을 받아 좋아, 해서 걔가 예수 믿을 수 있는 기회를 또 제공해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하나님 좋고 나도 좋고 다 좋은 것 아닙니까. 이런 되도 않은 변명하다 끝났어.
그러니까 결국은 뭐냐? 제가 처음에 이야기하듯이 너는 모른다. 뭘 모르느냐? 앞으로 무슨 일이 들이닥칠지 너를 더욱더 죄인을 깊이 깨닫게 되는 상황은 네가 아직도 몰라. 내가 친히 만들어준 상황은 너한테 찾아갈 거야. 내가 돈에 미치고 환장하고 괜찮은 이미지에 노예가 됐다는 사실을 계속 줄 때마다 우리는 이미 이 자리가 주의 자리기 때문에 십자가 자리기 때문에 그냥 덜렁 누워서 내게 일어난 것을 고자질하시면 그게 매일 우리의 기도의 삶입니다.
그래서 제단 위에 누우란 말이 있어요. 우리가 산 제물 된,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우리가 하나님 제단 위에 있는 그래서 주께서 의도적으로 유발케 한 사태를 통해서 이미 구원되었음을 그리고 나는 이미 죄인으로서 뭐가 죄인인 줄 알아가는 그런 삶,
강의시간에 휴대폰 묵음으로 하면 좋다는 걸 잊어버리고 또 잊어버리고. 그걸 또 아주 노골적으로 이건 꼭 받아야 돼요, 그런 것도 광주강의 때처럼 그렇게 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항상 우리가 주께서 왜 뒤따라 왔는지 왜 주의 이름으로 우리를 납치했는지, 납치해서 구원하시는 은혜를 잊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어야 되는데 죽기로 확정되었지만 곱게 죽이지 않고 우리가 뭘 평소에 좋아했고 무슨 말을 귀 기울였고 남한테 지지 않기 위해서 어떤 투쟁을 하고 있는 죄를 짓는지를 계속해서 깨달을 수 있는 주만 증거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