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14강) 시편51:17(새장) 20221226b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해봅시다.
[십자가를 아십니까] 45페이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상한 심령’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는 이미 종결됐다고 생각하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예배에 참석할 때 상한 심령의 자리에 참석하라는 거예요. 이 차이가 뭐냐 하면 내가 예배드린다, 이것 아니고 나를 배제하면 남는 자리가 예배처소다. 이런 이야기에요. 내가 예배드리는 게 아니고 나를 배제하면 그 위치가 생기는 데 그 위치가 상한 심령이 있는 위치가 되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할당을 해주신다는 그 예배를 말합니다.
내가 예배하면 왜 안 되느냐? 그럼 내가 예배의 주체가 돼요. 이렇게 되면 내가 주체로서 예배드리면 주께서 영광 받고 내가 잠을 잔다든지 딴 일하면 영광을 못 받고 이렇게 돼버려요. 하나님은 신약에 와서 단일 처소를 만듭니다. 하나의 유일적인 오직 하나밖에 없는 단일 처소. 하나의 장소지요. 단일 장소는 옛 세대의 시공간 처소가 아니고 새 시대의 장소를 말합니다. 단일 장소에서 여길 가야 비로소 뭐가 보이느냐? 아버지가 보여요.
이 장소가 뭐냐? 예수님 홀로 이루신 거예요. 예수님 홀로 이루신 단일 장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계신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창조했던 시간과 공간, 대자연이죠. 인간의 입장에서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대자연은 없지요. 하지만 성경에서는 누굴 위한 대자연이냐 하면 주님을 위한 예수님을 위한 대자연으로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나를 위함이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예수님께서 다 빨아 당겨요. 시간과 공간을 빨아 당기면 마치 방주에 누가 달려갑니까? 방주에 뱀과 코끼리와 기린을 주께서 알아서 빨려 들어가도록 하지요. 방주 속으로. 다는 안 받아주고. 거룩한 것은 일곱 쌍, 보통 것은 한 쌍 해서 받아서 들어가게 하는 겁니다. 그냥 대표자만 들어가게 하듯이. 주께서 새 시대에 예수님이 방주기 때문에 모든 시공간이 거기에 빨려 들게 돼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은 이 세대에서 살았어요, 죽었어요? 죽었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빨아 당긴 모든 시공간에 있는 동물들은 불속에서 타죽어야 마땅하죠. 예수님의 운명과 같이 이뤄져야 모든 이 세상 자연세계 속속들이 예수님 자신을 닮은, 형상을 말합니다. 형상이 거기에 전부 다 담아지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서울강의에서 했지요. 이 세상이 불탄다는 이야기, 강의할 때 예수님에게서 뭐가 올라온다 했습니까? 불이 올라오지요. 왜냐? 심판주기 때문에 당연한 거고요. 그런데 그 심판주가 불세례 받은 상태에서 불이 올라오게 돼 있어요. 그래야 예수님 있는 처소가 유일한 공간이 되기 때문에. 빅뱅이 압축이 되거든요. 예수님께 일어났던 일이 앞으로의 모든 우주의 모습이 된다, 그겁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당연히 불 심판돼야 되고, 베드로후서 3장 뒤쪽에 보면 성도는 무슨 하늘? 새 하늘. 무슨 땅? 새 땅을 바라본다고 돼 있어요. 새 하늘과 새 땅. 그거는 예수님께서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청소해서 새로운 아담으로 새로 시작을 하는 거예요. 창조자 되시는 분이 친히 이 세대에서 창조되신 분으로 마리아 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창조자가 창조되신 분으로 출발을 하는 겁니다.
그럴 때 피조세계가 예수님의 나라에 합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거예요. 동질에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는 겁니다. 바로 언약에 있어서 지난 여름수련회 때는 소금산 출렁다리라 했는데 가장 낮은 곳에 와요.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율법이 걸쳐오지요. 율법이 위에서 내려와서 점점 아래로 내려갑니다.
자, 율법이 가는 곳은 전부 다 뭐밖에 없어요? 죄밖에 없지요. 죄가 있는 곳에 저주와 심판밖에 없습니다. 비행기가 에어쇼 하듯이 땅에 지나가면 여기는 마땅히 저주받아야 된다는 것을 삐라 형식으로 날려버리는 거죠. 선지자나 성도들이 그 일을 해요. 호외요, 옛날에는 호외 있었잖아요. 삐라 뿌리듯이 다 뿌리는 거예요. 호외 주워보면 ‘박정희 대통령 서거하다’ 나오듯이. 위에서부터 뿌려서 소식을 전하는 겁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죽였다는 소식.
사람이 하나님을 죽였다는 소식의 취지가 뭐냐 하면 하나님마저 죽음을 접수했다. 인간은 죽음 안에 갇혀 있습니다. 새가 새장 안에 갇혀 있지요. 그러면 새를 어떻게 하느냐? 새장 통째로 새 주인을 만나면 되겠지요. 누가 코로나 걸렸다, 감기 걸렸다? 그러면 우리는 기침 안 하면 감기 안 걸린 사람 되고 싶지요. 감기 걸린 채로 천당 갑니다. 기침하면서 천당 갑니다.
이게 주님 안목과 우리 안목의 차이점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모든 걸 다 겪었으니까. 죽음, 아픔, 고통 전부 다 겪었으니까. 울음까지, 불행까지, 비극까지. 그걸 새장 안에 집어넣어 새장 통째를 가져가는 거예요. 두 번째 시간은 새장. 통째로 들고 가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 오실 때 유대인들 난리 났지요. 예배드려야 우리가 살 수 있다. 로마의 압제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는 데 예배를 드릴 때 인간들의 아이디어를 그거였습니다. 구약을 보는 거예요. 그때는 구약이 아니고 유일한 성경이니까. 성경 보니까 옛날 우리 조상들이 매 맞았던 경우를 생각해서 그 짓을 다시는 안 하면 우리에게 복이 오겠지, 그게 인간들 아이디어의 한계입니다.
전체 취지를 몰라요. 다 바꾸는 걸 모르고 조금만 수리하면 새 차 되겠지 하는 인식밖에 없어요. 내가 인간성 좋으면 구원 받겠지,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통째로 바꾸는 걸 모르고 자꾸 자기한테 손대는 거예요. 얼굴 견적내서 올리고 양악수술하고 눈썹 그리고. 코를 고치니까 균형이 안 맞아서 눈 고치고, 눈 고치니까 안 맞아. 나중엔 본인이 누군지 거울보고 누구세요? 인도 본인이 누군지 모르는 거예요. 남들도 모르고. 뜯어고쳐서. 약물해서 선풍기 아줌마 돼버리고 완전히 접시 얼굴 돼버린 거예요.
성형은 본래 본질에 자신에 맞게 해야 돼요. 우리의 본질이 뭐냐? 늙어 썩어문드러지는 게 본질인 거예요. 가만있어도 주께서 알아서 성형수술 다해줘요. 조금씩, 조금씩 늙어가는 데 자식이 애먹이면 속도가 좀 빨라지고, 며느리 들어오면 약간 빨라지지요. 손자 맡아 키울 때는 더 빨라집니다. 애 없을 땐 약간 다행이다 행복한 순간이라 보시면…….
새 하늘과 새 땅을 하면서 예배를 드릴 때 자기가 나아지기 위해서 예배를 드립니다. 이건 뭐냐 하면 예배하는 사람이 두 사람이 돼버려요. 두 가지가 돼요. 하나는 예수님이 드리는 예배, 예수님을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 그건 예수님 홀로 할 수 있어요. 그게 예수님의 상한 심령입니다. 시편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세 번 기도했어요. 할 수만 있거든 지나가게 해 달라. 그게 뭐냐 하면 굳이 죄 없는 내가 상할 이유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라는 것. 인간 쪽에서 주님께 다가서는 데 세 번 기도가 아니라 주님이 상한 심령 쪽에 다가서는 데 주께선 세 번이나 기도했는데 그 기도 응답이 되었을까요, 아니 되었을까요? 되었다, 아니 되었다? 주님에 응답이 되어버렸어요.
그렇게 되면 주님의 예배가 확장되어서 그 예배에 같이 참여된 자가 구원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예배하는 자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예배했기 때문에 성령의 동일한 효과가 예수님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남은 모든 사역도,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드린 예배만이 예배라는 그것을 노골화시키는 데 성령께서 자기 일을 해요. 성령이 우리 요구대로 하는 게 아니고 성령은 지금 자기 일하고 있다니까요. 우리를 구원하는 게 우리 일이 아니고 성령의 일이고 주님 자신의 일이에요. 그게 성령을 통해서 믿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삭제되지요. 캐나다 폭포 앞에서는 그 쏟아지는 빗줄기에서 본인이 사진 찍으면 사진발 보이질 않아요. 흐릿해요.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사진 찍으면 내 얼굴이 안 나와요. 물줄기가 다 가로막아서. 매일같이 주님의 주님 자신의 일로 인하여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또렷하지 않아요. 희미하면 할수록 우리는 감사해요. 고마워요. 내가 흐리멍덩한 것 때문에 기뻐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비유하는 대표적인 노래에 옛날 노래인데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나는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바보처럼 살았군요>(김도향, 1980) 이거는 노래가 찌질 해. 동정을 유발하고 슬픔을 짜내고 해서 듣기 싫어요.
어느 날 난 낙엽 지는 소리에
갑자기 텅 빈 내 마음을 보았죠
그냥 덧없이 흘러버린
그런 세월을 느낀 거죠
저 떨어지는 낙엽처럼
그렇게 살아버린 내 인생을
저 흐르는 강물처럼
멋없이 멋없이 살았죠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늦어 버린 것이 아닐까
흘러버린 세월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을까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바보처럼 바보처럼 바보처럼
그런데 딕 훼밀리라는 밴드가 불렀던 <나는 못난이>(1991)라는 노래는 아주 신이 나요. 해도 잠든 밤하늘에~ 노래 들으면 너무너무 신나요. 빠른 템포에요. 작은 별들이~ 가사 보면 못나서 신나. 못나서 신바람 났어.
해도 잠든 밤하늘에 작은 별들이
소근 대는 너와 나를 흉보는가봐
설레며 말 못하는 나의 마음을
용기 없는 못난이라 놀리는가봐
라-
미소 짓는 그 입술이 하도 예뻐서
입 맞추고 싶지만은 자신이 없어
누군가가 요놈하며 나설 것 같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나는 못난이
라~
미소 짓는 그 입술이 하도 예뻐서
입 맞추고 싶지만은 자신이 없어
누군가가 요놈하며 나설 것 같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나는 못난이
자신이 배제되고 삭제되고 못난 것이 딕 훼밀리가 불렀던 그 노래처럼 신바람 나야 돼요. 내가 못난이. 그러면 내가 소멸된다는 것은 내 자리는 과거로부터 내가 노력해서 올라온 누적된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니라 이건 할당된 자리죠. 그게 뭐냐 하면 위치에요. 상한 심령의 위치. 저는 상한 심령입니다, 이거 가짜입니다. 어떻게 내가 이 자리가 좋아졌지, 어떻게 내가 못난 자리라고 규정지어준 자리에 내가 어떻게 여기에 도달했지?
그래서 시편에 보면 찬양하리로다, 감사하다. 이 자리에 있다는 인식을 저에게서 떠나지 마옵소서. 내가 못난이라는 자체를 내가 잊어버리지 않게 해 달라. 그게 뭔가 문신을 새기든 새겨야 돼요. 문신을 새길 필요 없어요. 성령께서 문신을 우리에게 아예 할례 자체가 문신이에요. 일종의 문신인데 이제는 성령의 문신을 새기는 거예요. 그게 성령세례에요.
내가 마음대로 하고 싶어도 문신이 우리보다 우세해요. 현실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알아서 우리를 못난이 만들어줍니다. 우리 속에 있는 인공지능이에요. 인공지능의 특징은 우리말을 듣지 않아요. 때릴 수가 없어요, 인공지능은. “지니야, 구 번 틀어줘.”하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습니다.” 끝나요.
설교 생중계할 때 깜빡하고 녹화를 안 누를 경우가 있거든요. 제 아내가 녹화시작, 하고 별표를 해서 붙여놨어요. 그런데 그것마저 잊어버릴 가능성이 있어요. 그래서 치매가 진행된다 싶으면 온 냉장고 앞에 메모가 붙어있어요. 가스 잠그는 것 확인하기, 그것도 잊어버려. 그래서 가스 잠근다는 것 확인하기 딱지를 확인하기 또 하나 붙여.
우리가 잊어버리는 것을 또한 감사해야 돼요. 왜냐하면 상한 심령이 내 식으로 상한 심령이 되는 것과 주께서 상한 심령 되는 것과 차이 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하는 상한 심령은 겸손 떠는 거예요. 일부러 나는 참 바보같이 살았군요, 어쩌라고? 자랑이다, 그것도. 지 겸손한 것, 지가 죄인인 것 자랑하는 그거는 안 쳐줍니다. 인정하지 않아요.
항상 이렇게 보면 돼요. 나는 참 바보같이 산 것을 내 앞에서 부정시키고 내쫓는 그것이 나는 못난이. 하나는 빠른 템포의 기쁨으로 나는 못난이가 찡그려가면서 나는 죄인입니다, 이걸 쫓아내는 거예요. 어디서 연기하지 말란 말이죠, 연기 피우지 말란 말이죠. 사실은 인생 자체가 우리는 상한 심령입니다. 좋은 의미가 아니고 나쁜 의미로 상한 심령이에요. 왜냐하면 항상 찡그리며 살기 때문에.
웃어도 남에게 분노할 타이밍을 찾는 식으로 웃어요. 누구만 만나면 분통 터뜨리는 계기로 삼아서 까톡, 통화를 시작합니다. 잘 걸렸다. 오늘 두 시간하자. 서로가 갖고 있는 반발, 분노. 그건 하나님에 대한 반발이죠. “내 인생 왜 책임 안 지십니까? 내 원대로 안 되십니까? 왜 남편이 한 달에 이천삼백오십 만원 안 줍니까?” 이런 식이죠.
내 속에 있는 반발을 그냥 갖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요양병원 가야 돼요. 정신병원 가야 돼요. 정신병은 약물효과는 그때뿐이에요. 근원적으로 뭐냐 하면 왜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느냐는 거예요. 그러니까 꼭 정신병원 안 가고 부부가 같이 살아도 아내를 자기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로 간주해서 모든 분풀이를 아내한테 터뜨려요.
“내가 밥에 콩 넣지 말라 했지.”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정신병자거든요. 지가 끄집어내면 되는 거예요. 그때 “예, 서방님 안 넣겠어요.” 이러면 정신병을 빨리 키워서 빨리 뒈지라는 거예요. “예, 서방님. 다시는 안 넣겠습니다.” 그건 남편 정신병을 점점 키워서 자기는 천사였고 남편은 정신병자였다고 확정짓는 방법이 되거든요.
그러면 이러면 되잖아요. “넣는 건 내 마음이다. 네가 골라내면 되지.” 이러면 되거든요. 그렇지 않습니까, 두 분들 보니. “넣는 건 내 마음이고 골라내는 건 니 마음이지. 니는 니 니대로 하고 나는 내대로 하면 되는 기야.” 그러면 남편이, “니가 그렇게 살아도 내가 콩 싫어하는 것 몰라?” 그때는 아내가, “나는 못난이~ 그래 내가 못났다잖아. 나는 못난이야.” 그게 상한 심령이에요. 그러니까 한 순간 예배 안 드릴 때가 없어요. 전부 다 예배가 돼요. 왜? 기뻐하고 감사하니까, 범사에. 그게 성경의 율법이니까. 꼭 예배당 찾아서 예배 안 드려도 늘 성령 안에서 기뻐하니까요. 날마다 부흥회지요.
그러면 이 상한 심령의 처소가 실제적으로 또는 실질적으로 또는 실재적으로 작용은 뭐냐 하면 빛으로 작용합니다. 빛의 특징은 본인이 매체이면서도 실체로 작용하거든요. 이게 어려운 말인데 뭔 뜻이냐 하면 물결의 실체가 뭡니까? 물이죠. 물결 자체는 뭐가 됩니까? 실체가 아니에요. 움직임을 보여주는 거죠. 그걸 매체라 합니다. 물이 있든지 공기가 있든지 파동은 매체가 따로 있고 파동 자체는 실체가 아니에요. 움직였는데 옆으로, 옆으로 전달되거든요.
빛은 뭐냐 하면 파동이에요. 매질을 통해서 오거든요. 그 대표적인 것이 숟가락을 집어넣으면 빛이 똑바로 가지 않고 빛 속에서 구부러져요. 그런데 빛은 또 입자에요. 실체가 있어요. 희한해요. 쉽게 말해서 빛은 뭐냐 하면 빛이 없는 공간이 없다가 돼요. 빛이 없는 공간이 없는데 모든 공간에 빛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게 빛입니다.
빛이 없는 어두움일 수 있는데 빛이 없는 공간은 없어요. 그러니까 어둠이라고 규정되는 것은 빛에 의해서 결정되는 거예요. 내가 갈 수 있는데 안 가서 어두움이란 뜻이에요. 요한복음 1장에 나와요. 벌써 요한복음 시작했나?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빛과 어두움은 인간이 설정하거나 규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애초부터 어두움에 속하기 때문에.
어두움은 본인을 어두움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두움이 되려면 총체, 전체성을 다 갖고 있어야 이게 빛이다, 어두움이다 규정할 수 있거든요. 빛이 바로 전체에요. 빛이 전체기 때문에 어두움이란 것은 본인이 어디에도 갈 수 있고 해석할 수 있지만 본인이 알아서 안 가는 곳이 있어요. 이걸 강남강의에서는 전체와 비-전체로 구분해서 했는데 이걸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남성 네들은 이 세상을 자신의 세계로 봐요. 여자는 가정에서 살고 남자는 가정 밖에서 활동한다, 이게 전통적으로 역사에서 주로 해왔던 겁니다. 여자가 집에 있는 것은 이거는 상당히 귀한 고귀한 가정주부가 되고, 남자가 집에 있는 것은 집구석에 있는 거예요. 지 자리가 백수거나 아프거나 둘 중에 하나에요. 빨리 치워버려야 돼. 돈을 벌어오든 말든지 놀아도 밖에 나가서 놀아라. 이천 원 주고 도시락 사먹든지 니가 알아서 해지거든 집에 들어와라. 교회 카페 가면 커피 한 잔에 사백 원 주면 마실 수 있어요. 교회가 그런 것 때문에 있는 거예요.
남자의 세계에요. 남자의 세계기 때문에 여자에게 남자의 세계에 남성 형으로 들어오라 하는 거예요. 들어올 때 여자로 들어오면 안 되고 남자에게 길들여지는 대상으로서의 여성은 용납해주겠다. 이걸 가정주부라 해요. 이게 배필자, 가정주부라고 남성 세계에서 그렇게 해요. 그런데 여성은 비-전체거든요. 용어가 어려워요.
“내가 남성 세계에서 살게. 사는데 너는 나를 전부 지배할 수 없다.” 이게 여성이에요. 이걸 비-전체라 해요. 전체가 아닌 비-전체. 남자는 평생 동안 자기 아내를 지배했다고 착각했지요. 자기 남편이 오십 년 동안 고생시킨 걸 손자와 탄 차에 사람 써서 죽이려고 했지요. 재벌 집 거기서. 그래서 외국으로 보내버리죠. 호시탐탐이죠.
그러니까 이 여성을 남자에게 자진해서 복종하면서도 네가 내 인생을 책임져야 된다는, 복종하면서도 책임지는 조건만은 남성한테 안 빼앗긴 거예요. “너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는 이것마저 가져가지 마. 내가 간직할 거야.” 사실은 일치될 수 없어요.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아담 자체가 악마한테 유혹당한 이상 여성이나 남성이나 의자 들고 벌서기에요.
왜 그렇게 하는가? 빨리 이 세상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라는 거예요. 벗어날 수도 없지만.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란 겁니다. 개미와 베짱이에서 미래에 대해서 미리 알고 있는 되라. 베짱이는 미래를 몰라요. 가능성, 확률을 따지지만 성도는 이미 미래를 확정됐어요. 이미 죽은 자로, 오는 세대에는 살았지만 골로새서 3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지만 지금 땅에 육신이 있기 때문에 없어질 세계에 그냥 꼬리만 긴 꼬리 있잖아요. 꼬리만 이 세상에 하나 걸치다가 누가 죽여주면 후딱 빠지면 되는 거예요. 제가 어제 주일학교 설교할 때 사도 바울 했거든요. 사도 바울은 이미 죽었어요. 죽었는데 천사와 같이 시키는 대로 하는데 사도 바울의 소원은 뭐냐 하면 빨리 자기 복무기간 제대하는 날이에요.
지금 몸체는 하늘에 있고 하체만 로마에 또는 터기에 그리스에 전도한다고 고생 되게 하고 있으니까 이게 무슨 고생이냐. 사도 바울이 그런 생각 안 했겠지만 목은 이게 어느 세계냐, 삼층천에 올라가 있고 밑에는 지하실에 가 있는. 사도 바울 몸체 자체가 계시의 지층 대에요. 고생대부터 신생대까지 지질 대를 형성하고 있어요. 빙하기도 있고 캄브리아기도 있고 중생대 주라기 공원도 있고.
성령 받은 성도는 예수님의 아담의 몸, 그러니까 마리아에게 태어난 육신과 동질의 육신이기 때문에 성령이 예수님 육신에게 관여했다는 말은 똑같이 성령을 예수님 몸이라 생각하고 우리한테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 자체가 오늘날 방주고 계시다, 말씀이다 보면 돼요. 그래서 바르게 살란 말이 아니고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요.
이게 윤리적으로 옳으냐, 그르냐는 주제넘은 짓이에요. 그런 것은 우리가 따지면 안 되고 그렇게 시키더냐? 하라 했더냐? 이게 관건이에요. 하라 하면 감사가 나오고 이게 억지로 착각하게 되면 억지가 되죠. 뭐든지 억지가 돼요. 그럼 감사, 기쁨 다 날아갑니다. 현장에서.
그다음에 봅시다. 빛 이야기 마무리하고. 빛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빛은 인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전체에요. 이런 게 정말 어려운데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이런 말씀 있어요. 너희들은 나의 제자라 했거든요. 나의 제자면 스승은 누구란 말입니까? 스승이 있어줘야 제자 있을 것 아닙니까.
우리가 잃어버린 양이 된다는 것은 구원 받고자 하는 게 아니고 목자가 목자 되기 위한 조건을 충족할 때 잃어버린 양이 되는 거예요. 잃어버린 양의 특징은 우리 목자가 이 세상에서 잃어버린 목자란 것을 인식하게 만들어요. 우리 목자가 개나 소나 목자가 아니라 이 땅에 와서 죽음당한 목자인 것을 아는 자가 본인이 잃어버린 양이에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양은 목자에 종속돼 있지 목자 덕분에, 란 말을 쓰면 안 돼요. 목자 덕분에 양이 구원 받는 게 아니에요. 양은 어디까지나 목자를 나타내기 위한 양이지 양 본인으로선 의미가 마감되는 양은 없어요. 불쌍한 양입니다. 양의 청춘 돌려 주이소, 이런 것은 안 돼요. 목자로서 그걸로 충족하면 됩니다.
시편 23편에 나오지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뭡니까? 수능 칠까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다음에 빈칸에 들어가는 것은? ①내 청춘 돌려줘. ②내 인생 왜 망가지게 했습니까. ③우리 자식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④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몇 번입니까? 시킨 대로 하면 돼요.
널 만나서 결혼생활 조졌다, 그런 소리하지 말고. 그것도 누가 시킨 대로? 주께서 시킨 대로. 내가 양이 아니었음을, 악마의 양이었음을 내가 들키는 행운을 누리기 위해서. 너 같은 인간 만났다고 배우자에게 이야기하지 마세요. 그 사람 못 알아듣습니다. 내가 잘했단 말이야, 못했단 말이야, 이렇게 되니까. 그건 해석이 이 시대 해석과 오는 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개돼지한테 복음 전하면 안 돼요. 그렇게 할 에너지를 쏟을 필요 없습니다.
전도는 우리가 하는 게 아닌데 우리는 쉬지 않고 전도하게 하시죠. 이게 비-전체에요. 우리가 전도하면 안 돼요. 전도는 주님 소관이기 때문에. 주님이 전도하는 데 우리는 쉬지 않고 전도하게끔 되게 돼 있어요. 이게 비-전체에요. 주님이 나라는 전체에 절대로 다 잠식당하지 않는다는 것. 주님의 범주가 더 크니까. 그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그러면 되는 거예요.
그게 빛의 성질입니다. 양자물리학에서 빛을 보고 물리학자들이 어떻게 손을 못 댔어요. 저게 뭐냐 말이죠. 파동이면 파동이든지, 파동의 반대가 입자거든요. 반대가 반대와 함께 있다는 이게 도대체 똑똑하고 이성적인 물리학자들이 감당을 못했던 겁니다.
You only live once. 당신만이 한 때 살았습니다. 이게 예배에요. 철저하게 우리 자체를 배제하는 거예요. You only live once의 두문자어 YOLO, 무슨 족입니까? 욜로족, 혼자 사는. 요새는 욜로족 말고 유행하는 게 뭐냐? 반대적인 요소가 불족이죠. 불같은 족속. 불 FIRE, Financial Independence(경제적 독립)와 Retire Early(조기 은퇴)의 줄임말.
그러니까 불족은 개미, 욜로는 베짱이. 누가 지혜롭고 누가 선합니까? 이 세대에서 둘 다 엉터리죠. 그럼 뭐가 정답이냐? 나는 못난이. 그것도 신나게. 마음 같아선 틀어주고 싶다. 그 노래 아십니까? 나는 하도 유명한 노래라서.
45페이지 계속 하겠습니다. 그런 상한 심령을 하게 되면 여기서 이러한 해석, 이러한 주장에 약점이 있을 수 있어요. 약점이 뭔가? 이것 찾아내면 보통 사람 아닌데. 상한 심령의 약점이 뭐냐 하면 자기 위주라는 거예요. 더 나가면 자기 구원 위주. 죽든 말든 나만 천당 가면 끝났다, 난 챙길 것 다 챙겼다. 이렇게 돼버리죠.
그런데 성경에 보면 구원 받은 사람이 다수라 했잖아요. 한 사람이 아니고 정해진 다수에요. 다수가 어디에 묶여있는가? 일자에 묶여있어요. 한 사람, 오직 당신만이 한 때 했던 일 속에 전부 다 묶여있거든요. 한 때니까 시간도 주님한테 흡수당해서 주님의 때가 한 때로 끝났어요. 한 때가 이 세상에서는 몇 천 년이 돼버려요. 하루가 천 년 같이 폭이 넓은 치마처럼 확 퍼질 수가 있어요. 그걸 다시 모으면 오직 당신, 오직 한 때 다 이루었다, 에 전부 다 거기에 응집이 돼버립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렇게 했잖아요. 그걸 인간이 흉내 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흉내 내버리면 자기 구원이잖아요. 자기 구원을 빼버리면 자기 위주지요. 이건 성경 어디에 어긋나느냐?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어긋나요. 그런데 여러분 생각할 거예요. 내가 돈 번다고 바빠서 신앙생활 제대로 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될 때에 고린도후서 5장 보시고 점검하시면 돼요. 15절에 보면 그 기준이 나와 있거든요.
사도 바울의 계시가 아니고 예수님의 계시입니다. 예수님이 사도 바울에게 전해준 계시, 고린도후서 5장 15절, 차번호 외우는 것보다 쉬워요. 5, 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왜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까? 자기가 시체기 때문에 그래요. 한 사람이 아까 욜로 아닙니까? 주님에게 일어난 한 때 일어난 사건이 모든 인간을 규정해버렸어요.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시체들이에요. 에스겔 37장의 골짜기에 있는 해골처럼. 그래서 죽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에게 있던 성령이 이제는 예수님의 영이 되어 우리에게 찾아와서 예수님이 부활했기 때문에 부활의 효과를 그냥 줘버리면 죽었는데 산 자가 된 겁니다.
일반인들은 지가 죽은 것도 모르고, 죽은 것도 모르니까 뭐도 몰라요? 지가 살아난 것도 모르고. 성도는 죽었다 살았다는 것을 자기의 신체적인 감각적인 세포로 아는 게 아니고 뭐로 아느냐? 십자가의 영으로 아는 거예요. 그러니 십자가의 영을 모르면 육에 속하고 십자가의 영을 아는 사람, 영에 속한 사람들은 내가 죽었다, 안 죽었다를 내 해석이 아니라 주님의 해석에 입각해서 그게 다가오는 겁니다. 아아, 죽었는데 살았구나.
그럼 내가 죽었다. 적어볼게요. 중요하니까. “내가 죽었다. 내가 살았다.” 이것 틀린 이야기거든요. “내가 죽었다. 내 안에 주님이 살았다.” 이것도 충분하지 않아요. “내가 죽었다. 주님이 살았다.” 이게 더 단출하지요. 괜히 또 나를 죽었다에 집어넣으면 되지 살았다는 나를 집어넣으면 나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 죽은 걸로 이렇게 되기 때문에 안 되거든요. “나는 죽었다. 주님 살았다.”
더 나가면, “주님 살기 위해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말씀(31절). 그러면 더 줄여버리면 주만 움직인다, 주만 일하신다. 껍데기는 나, 지금도 늙어가고 있는 나, 지금도 자식들에게 성질내고 있는 나. 성질내든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어쨌든 뭡니까? 주님이 사신 거예요. 어제 낮에 인간이 자기를 쥐고 못 놓는 열세 가지, 자기를 왜 못 놓느냐?
그중에 하나가 햇빛, 바람, 습도, 눈발, 그리고 차가운 북극의 냉기 이런 것들이 육신이 있으니까 생체, 육체에 뭘 주느냐? 리듬을 줘요. 오늘 집에 있을까, 말까? 리듬을 준다고요. 그러니까 나의 의지란 게 없어요. 니체라는 철학자가 뭐라 했느냐 하면 인간에겐 자유의지가 없다고 했어요. 자유의지가 없는데 무슨 의지가 있느냐? 나보다 강한 의지와 약한 의지밖에 없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서열 없는 건 없다. 그런 것은 생각도 하지 마라. 모든 게 계급화 돼 있고 지 딴에 잘했다 하지만 높은 사람, 돈 많은 사람한테는 내 의지 알아서 반납해요. 자기가 많은 월급 받고 재벌들이 시키는 대로 다 했다.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재벌들이 문제가 있으면 그 책임을 누가 진다? 고급 월급쟁이, 많은 월급 받은 임원진이 떠안고 교도소 간다, 라는 것이 거기에 함의돼 있어요.
그게 <재벌집 막내아들> 보면 나와요. 비자금 마련했는데 불러다가 “이제 네가 책임질 타이밍이지. 네가 교도소 가라.” “우리 사장님 아무것도 몰라요. 사장님이 저한테 일임했기 때문에 제가 다 알아서 했습니다.” 그것 하라고 월급 많이 준 거예요. 큰 교회 목사들 월급 줄 때 장로들이 그냥 준 게 아닙니다. 교회 모든 책임은 네가 알아서 지라고, 교인 적게 오고 헌금 적게 나오면 네가 책임지라고 그래서 월급 주는 거예요. 가만있는 것 보니까 다들 그렇게 사는 모양이다.
그래서 제일 속 편한 것이 사십 되기 전에 한 몫 모아놓고 보란 듯이 사직서 사장 앞에 던지면서 나는 너 없이도 내 힘으로 골프 치고 산다. 그게 젊은 아들의 욜로, FIRE! 희망사항이 그겁니다. 이 회사 오래 다니고, 직장생활 오래할 생각 없습니다. 제발 이 년만 버텨줘. 어떻게 될 줄 몰라요. 빨리 채우고 내가 카페 차릴 거야. 맨날 이러고 있다고요. 빨리 육십 넘어서 퇴직해서 나도 카페할 거야. 그땐 체력이 안 돼. 꾸벅꾸벅 졸고 있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나는 못난이 노래 부르면 되니까.
이게 개인의 구원을 위한 예배가 되면 안 되지요. 그래서 예배 장소에서 뭘 찾아야 되는가?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못난이를 같이 만나게 해주신 주께 감사하라고 예배드리는 거예요. 예배는 되는데 예배의 현실이라는 모여야 돼요. 갈빗집에서 모이든 20평짜리 아파트에서 모이든 개와 같이 모이든 간에 자꾸 모여야 돼요. 형편상 못 모이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될 수 있는 한 모이기를 힘쓰라, 히브리서에 나오는 말씀인데, 단지 모이란 뜻이 아니고 주께서 형편 주는 대로 모이란 뜻이에요.
모이는 것을 억지가 아니라 기뻐하고 좋아해라. 어떻게 나 같은 쪼다가 성령께서 저런 쪼다와 만나게 했느냐 말이죠. 그게 여러분들이 신기하게 느껴져야 돼요. 교회 가면 교인들이 많잖아요. 전혀 신기하지 않아요. 위선자들이니까. 그러나 그 큰 교회도 성도 하나 있으면 성도가 다닐지 모르겠습니다만 굉장히 신기한 거예요.
제가 얼마 전에 집사라는 설교를 주일에 했지요. 집사의 본분이 뭐라 했습니까? 집사의 본분의 핵심이 뭐냐 하면 집사가 되었으면 구원은 복음으로 되지 교회 제도나 조직으로 되는 게 아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일곱 집사가 그런 사람이에요.
복음 위주로 조직이란 틀을 넘어설 수 있어야 집사 된다, 라고 설교했더니만 만나는 분들이 집사님, 하니까 저 잡삽니다. 갑자기 얼마나 기쁜지. 이게 못난이 컨셉으로 다 돌아섰어. 얼마나 감사한지. 참 바보처럼 살았구나, 그건 짜증나요. 나는 바보같이 살았네, 이 노래 부르지 말고 나는 못난이를 빠른 템포로 가야 돼요.
그래서 47페이지에 보면, “하나님 즉 성령이 계신 곳은 예배당이라는 처소가 아니라 성도의 몸이다.”라고 돼 있지요. 여기 몸이라 할 때 또 오해를 해서 담배 피우면 안 된다, 예배당 연기 채우면 안 된다, 술 먹으면 안 된다. 자꾸 몸을 육신으로 생각하는데 여기선 육체가 아니고 몸입니다.
참 이것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에요. 몸 따로 육체 따로에요. 몸은 언약에서 말할 때 몸이 되고 내가 거울보고 비추는 것은 신체지 몸이 아니에요. 육체지. 물론 성경에서 이걸 육이라 해요. 이 몸을 성경에서 영이라 하는 거예요. 몸이 아니고 영이에요. 영과 영이 만나야 된다는 거예요. 육체와 육체가 만나는 게 아니고 몸과 몸이 만나야 돼요. 그러면 육체는 버릴까? 버릴 수 없지요. 육체는 주께서 살려주시는 대로 살아야 되지요.
그럼 육체+영. 성령을 통해서 이게 몸이 된 채 만나야 되지요. 교회가 예배란 혼자 하는 게 아니고 만남에서 이뤄지니까. 왜 만남이냐? 주님이 그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그래요. 마태복음 18장 봅시다. 마태복음 18장 보면서 사람들이 어려워도 그냥 막 넘어가요. 허들게임 같아. 뭔 뜻인지 몰라서. 18장 19절과 20절 누가 읽어보세요.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아멘. 여기서 사람은 모여 봤자 하늘과 연결 안 된다는 강조에요.
그러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숫자가 문제가 아니고 누가 여기에 오라 했던가를 알아야 돼요. 시체 같은 내 인생을 시체니까 내가 살아 있는 건 아니고 누가 내 안에 살아 계신 데, 주님이죠. 주님이 살아 있었다는 이야기로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으로 모을 때 그들 가운데 누가 있다? 주님 내가 있잖아. 그럼 기도 응답은 누가 하느냐? 주님을 통해서 주의 이름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면 평소에는 기도하지 말란 말인가? 아니죠. 평소에 집에서 할 때 유명한 골방 기도할 때 역시 두 사람이잖아요. 주님하고 나하고. 그런데 자칫하면 그게 개인구원 위주가 되죠. 나는 구원 받았다, 됐다. 챙길 것 다 챙겼으니까. 그렇게 될 수가 있어요. 그렇게 돼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오실 때 타인으로 와요. 내가 먹을 걸 주었다. 여섯 가지라 했지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5,36) 이렇게 할 때 그들에게 한 것이 곧 누구에게 한 것이다? 주님 나한테 한 것이에요.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님 잡아 죽였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도록 넘겼습니까? 믿는 사람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해석하느냐 하면 네가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라 했거든요. 그 원칙을 유지해야 돼요. 그 원칙이 유지된 자리가 상한 심령이에요. 상한 심령은 나 위주가 되면 안 되죠.
상한 딸기 몇 개다 그게 뭐가 중요해요. 나는 상했기 때문에 괜찮다 이거는 아까 노래 중에서 나는 못난이가 아니고 뭐가 됩니까? 나는 참 바보처럼, 자기 못난 것을 즐기는 이런 것 아니에요. 내가 못난이란 것을 알려주는 그 기쁨으로 이렇게 모일 때마다 늘 모이란 말이 아니고, 모일 때마다 주께서 또 다시 내 못남을 확인하기 위해서 이런 자리를 마련하셨구나, 그게 예배처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시체 같은 활용해주셔서 예수님을 증거 해야만 성령 받은 사람인 것을 또 다시 인정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할 일은 성령 주신 것은 땅 끝까지 주님 증거 하라는 이 사실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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