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신명기(9강) 신5:6(되살아나는 언약) 20230227a
(강의:이근호 목사)
되살적어볼게요. 애굽 땅과 이스라엘이 분리됐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분리된 게 아니고 파생돼 있어요. 애굽을 크게 쓰면 엿가락처럼 애굽의 요소가 일부 빠져나왔다, 이렇게 보시면 이게 이스라엘이에요.
애굽의 내부에 있던 속성이, 겉으로는 애굽에서 빠져나왔어요. 그런데 애굽은 겉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부 속성도 있잖아요. 애굽의 속성이 파생되었다. 파생이란 것은 원본이 있고, 원본이 늘어난 거예요. 원본을 쭉 잡아당기면 늘어난 거예요. 애굽에서 겉은 빠져나왔는데 속은 엿가락처럼 쭉 늘어나서 제대로 끊어질 때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이 모르는 자기 속성을 누가 대신해서 보여주는가? 이스라엘이 대신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인간은 애굽 사람이 자기 속성을 모르듯이 이스라엘도 자기 속성을 몰라요. 애굽 사람은 그냥 모르는 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애굽에서 빠져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동행함으로써 비로소 자기의 속성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노출하는 그러한 혜택을 입게 되는 겁니다. 들키는 겁니다.
인간이 있으면 인간은 늘 자기가 자기를 평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타인에게 들키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요. 이게 뭐냐 하면 방어지요, 방어. 사람이 구원 받는다는 것은 더 이상 방어할 게 없을 때 구원 받은 거예요. 내가 나를 방어할 게 없을 때. 만약에 방어할 게 있어버리면 그 사람은 자기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입니다. 지킬 게 있는데 뭘 빠져나와요.
하나님이 율법을 줬을 때 이스라엘이 방어한다면 그건 이스라엘이 아직도 구원이란 걸 모르는 거죠. 방어를 안 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주일학교 설교할 때 기생 라합이에요. 실은 기생 라합은 반역자입니다. 왜냐하면 스파이를 숨겨줬으니 이런 반역자가 어디 있어요. 국정원에 걸리면 혼나요. 자기 조국을 반역했잖아요. 멸망하라고 결정적 기여를 한 사람입니다. 그건 배신자지요. 반역자고.
이것은 곧 기생 라합이 자기의 본바탕을 본인이 반역한 거예요. 자기 출생지를 자기가 반역한 겁니다. 그 기생 라합을 신앙인이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신앙인이란 뭐냐? 더 이상 내게 방어할 나의 것이 사라진 것, 이게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그걸 골로새서 3장에선 뭐냐? 땅에 있는 나는 죽고 하늘의 나는 따로 있다. 골로새서 3장 3절과 4절에서 나를 사도 바울이 두 종류로 나눠서 본다는 게 정말 이거는 특이한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신약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자기 죽음을 넘어선 사람만 만날 수 있는 세계가 복음의 세계에요. 그래서 나는 구원 받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라고 할 때 이미 나를 안 넘어섰잖아요. 나를 넘어서지 않은 사람은 복음의 세계를 모릅니다. 쭉쭉 늘어날 뿐이죠. 절에 갔다가 교회 갔다가 성당에 갔다가 또는 뭐 말씀을 지켰다가.
말씀을 지켜도 나를 방어하는 방식 중에 하나가 말씀 지키는 거예요. 나를 지키는 수단 중에 하나가 말씀 지키고 교회 다니기 때문에 이거는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본인이 정말 복음 아는지 궁금하잖아요. 정말 내가 구원 받은 사람인지 궁금하지요. 그때는 성경에서 아주 친절하게 누굴 소개하느냐? 바리새인을 소개해줍니다. 바리새인 넘어서면 구원 받은 사람이에요.
그럼 오늘날 바리새인 같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 있어요. 개혁주의신학을 한 사람이 바리새인이에요. 한국교회를 온통 지배하고 있는 사상, 이게 개혁주의신앙이에요. 개혁주의를 한 마디로 뭐냐 하면 믿음으로 예수 믿어서 자기 마음을 더욱더 낮춰서 예수님을 본받는 삶이 구원 받은 삶이다. 이게 현대판 바리새인이에요. 다시 할게요.
믿음으로 예수님 받아들여서, 믿음이란 결정이죠. 진짜 믿음 아니고요. 내가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정합니다. 인정하고 나머지 여분의 인생을 마음을 낮춰서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아서 ‘믿음+성화’로 천국 가는 그게 바로 오늘날 바리새인이거든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납득이 돼요.
저런 식으로 내가 여기서도 나는 지키지만 하늘나라 주님 심판 앞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멋진 아이디어라고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게 납득이 되고 그걸 아끼고 거기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다 나를 위한 이야기거든요. 다 나를 위한 일이잖아요. 철저한 자기 방어가 되죠.
그걸 저런 이단이, 이렇게 넘어설 수 있는 사람, 방금 이야기한대로 완벽에 완벽을 갖춘 진리체제처럼 느껴지잖아요. 믿음으로 구원 받고, 성화의 삶, 거룩한 삶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기쁘게 하면서 자기는 주님의 형상을 듬뿍 닮아가고 젖어 들어서 고상하고 거룩한 경건한 삶을 사는 것, 이게 성경에서 특히 사도 바울 편지에서 이야기한 복음 그 자체라고 이야기할 때 그게 충분히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지요. 그것도 어려운 것도 없이 그냥 술술 돼요. 도 닦는 거니까. 도 닦으면 내가 더욱더 속성이 성질이 우수해지니 그걸 왜 마다해요. 내가 훌륭해지는 데 왜 그걸 마다합니까?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것, 안목. 훌륭하다는 것이 나의 죽음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 내가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그걸 쓰레기에 집어넣는 데 점점 더 힘들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바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직접 만난 사람이 가능하겠지요. 초라하고 행색이 보잘 것 없는 주님에 의해서 왜 그렇게 하찮게 오셨는지 너나 할 것 없이 다 개무시할 만한 대상으로 오셨는지를 그걸 아는 거예요.
현대판 바리새인, 개혁주의신학이죠. 이 개혁주의신학은 계속 나를 고상한 나, 건전한 나로 계속 앞장세우게 돼요. 그 노선 말고 다른 쪽에서 오는 하늘나라에서 오는 쪽은 모든 인간이 싫어한바 된 모습으로 와요. 그 둘의 차이를 발견한 사람 같으면 그 사람은 장담컨대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그 두 개의 차이점. 내가 평소에 하고 싶은 노선. 영화나 드라마에 그런 게 참 많이 있어요.
어떤 애가 있는데 엄마를 고대하고 있었는데 부잣집 마나님 해서 옷도 밍크로 완전히 전신을 덮은 밍크 히잡? 위에서 끝까지 밍크로 포장하고 고급차 타고 와서, “네 재능이 아깝다. 내가 니 엄마다(속여서). 내가 미안하다, 이제 찾아와서…….” 하고 데려갈 때 시청자들은, “저거 진짜 엄마 아닌데. 가짠데 저거는 사기꾼인데. 재가 갖고 있던 엄청난 재산을 노리고 사기치고 있는데…….”
그런데 드라마 전개에 보면 가짜 엄마가 개를 데리고 간 뒤에 꼭 한 50미터 뒤에, 한 20초 뒤에 진짜 엄마가 수소문해서 우리 애가 있다고 드디어 상봉할라 했는데 이쪽 노선 애 데리고 갔는데 뒤늦게 엄마가 와서, “이제야 만나는구나. 이게 몇 년 만이야? 30년 만이야.” 했는데 자기 딸이 없다. 그게 길이 어긋나지요.
개혁주의신학 우리를 다 거기에 홀라당 빠져서 데려가는 데 예수님은 허름한 행색으로 오시는 거예요. “네가 할 것 없다. 내가 다 했다.” 이렇게 오실 때에, “그러니까 너는 네 방어할 것 없어. 방어하지 마. 일체 네 것을 필요 없어.” 이렇게 왔을 때에 그 두 엄마를 다 같이 관람석에 앉아서 양쪽을 다 봐야 돼요. 그 차이점을 알아야 돼요.
그래서 그걸 다시 파생된 이스라엘, 여기에 뭐냐 하면 십계명이 7절부터 나옵니다. 2절부터 보면,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라고 돼 있지요. 언약을 세웠다 할 때는 뭘 생각했느냐 하면 노아가 홍수 직전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 만들라 하면서 언약을 세웠다 하는 거예요.
그럼 배후에 뭐가 있단 말입니까? 곧 홍수가 나요. 인물이나 인격, 품위 일체 고려하지 않고 다 물 속에 잠깁니다. 인간의 일체 개성이라든지 재능, 어떤 사람은 피아노를 잘 친다든지 꽃꽂이를 잘 한다 이런 것 묻지 않습니다. 그냥 물에 잠겨요. 먹고 마시든지 사고팔든지 시집가든지 총각이든 처녀든 관계없이 그냥 물에 잠깁니다. 허리가 아픈지 다리가 어떤지 관계없이 멀쩡하든 상관없습니다. 모조리 다 물에 갑니다.
중요한 것은 언약이죠. 그거는 물에 잠기는 걸 딱 깔아요. 하나님께서 해놓고 건질 자에게는 언약을 제시해요. 그러니까 2절엘 보면, 하나님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웠다는 말은 이미 그 뒷부분에 일어날 일은 언약이 감당하지 우리가 감당할 게 못 된다는 뜻이에요. 언약을 왜 했겠어요? 언약이…….
아까 두 개의 어긋난 노선 해봅시다. 애굽에서 파생됐지요. 이스라엘 속성이. 딱딱한 사탕 안에 물컹물컹한 액체가 쏟아져 나오듯이 내부가 쏟아져 나온 거예요. 호박 있으면 호박 속을 긁어내듯이 호박 속에서 긁어낸 애굽이 이스라엘입니다. 이게 역사적 노선이죠. 또 노선이 하나 있지요. 뭐냐 하면 노아에게 언약을 세우듯이 호렙 산에서 언약을 세웠지요. 그럼 이게 언약이겠습니까? 모세언약이죠.
모세언약이란 말은 뭐냐 하면 노아언약은 노아와 언약해서 노아 인생을 통해서 언약의 내용을 보여주는 게 노아언약이라면, 모세언약은 언약을 맺어놓고 모세의 일대기를 통해서 그 내용을 보여주는 게 모세언약이에요. 다윗언약을 뭐겠어요? 다윗에게 언약을 줘놓고 다윗의 일대기.
잘 알다시피 밧세바, 우리아 장군, 그리고 왕이 되는 것, 나중에 솔로몬 낳는 것, 그리고 사무엘하 22장에 장차 구름 타고 오실 인자를 미리 예언한 것, 그리고 시편 1편부터 줄줄이 나오는 모든 선지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목자라는 개념, 양이라는 개념 전부 다 다윗에게서 막 쏟아져 나오고, 특히 다윗에게는 솔로몬의 성전 개념이 중요해요. 솔로몬 언약, 아주 언약이 홍수를 이루는 게 다윗부터입니다.
다윗언약이란 다윗에게 언약을 줘서 다윗의 입에서 나오는 예언부터 다윗 일생을 보이면서 그걸 다윗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그럼 노아언약, 모세언약, 다윗언약을 중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있으나 생략하고요. 다윗언약을 거쳐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분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22장 41절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먼저 묻는 게 처음입니다. 처음이자 끝입니다. 그전까진 바리새인들이 시비 걸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물었는데 시비 걸지도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먼저 시비 걸고 이야기한 것이 이게 처음이고 끝입니다. 이 말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노선이 다르다는 거예요. 너는 가짜 아버지, 가짜 엄마 찾아가고 있는 거예요. 자기를 방어하면서.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의가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은, 바리새인이 얼마나 자기 의 관리를 철두철미하게 해오고 있다는 그 노선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이 하는 그 행위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거부감이 없어요. 왜냐? 바리새인이 하는 것이 우리도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바리새인이 신학적으로 학문적으로 체계 잡혀서 그걸 실현해내고 있으니까 부러운 거죠. 나도 언제 저렇게 모든 직업 때려치우고 말씀 연구해서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 되느냐, 그걸 아주 선망의 대상으로 보는 거죠.
그 바리새인이 뭐냐 하면 너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그러니까 바리새인이 하는 말이, 그리스도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라 했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딱 걸렸어, 너희들.”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하느냐 답변하라.” 주님께서 바리새인에게 시비를 이렇게 건 겁니다. 어떻게 자손이 주가 되느냐? 오늘 강의에 이런 게 참 어려워요.
우리가 모세언약하기 전에 이것 정리를 해야 돼요. 적어볼게요. 이제는 부재하는/존재하지 않는,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사라진 세계. 인간의 약점이에요. 인간은 옛날 일어난 것을 사라졌다고 봐요. 그걸 부재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1960년대의 성향이 우리는 2020년대니까 사라졌겠지요. 그러면 강냉이 튀기는 건 뭐예요? 60년대 향수 아닙니까.
인간들은 모세 이후의 옛날 언약을 사라진 걸로 보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 역사가 따로 있으니까요. 언약의 역사가 자기보다 앞선 역사란 사실을 이스라엘은 몰랐던 겁니다. 앞질러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거예요. 옛날 노아언약이 사라지고 모세언약이 사라졌다고 생각하잖아요. 다윗언약 때. 사라진 게 아니고 노아언약이 완성체로 그들을 팔짱 끼고 기다리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아, 그래. 노아 때는 물로써 홍수로 다 죽었어. 그런데 하나님께서 용서해줬대. 무지개 띄워서 용서해줬대. 다시 물로서는 심판이 없대. 다 우리 옛날이야기야. 잊어버려, 잊어버려. 우리는 그 덕으로 잘 삽니다, 하고 그냥 찬미하고 감사하면 그만이야.” 그게 아닌데요? 물보다 더 센 게 뭐죠? 불. 불이 오는 방식이 물에 다 빠뜨리는 방식을 불 속에다 집어넣어 물을 불로 바꿔서 다 똑같이 그렇게 싸질러버리는 데요?
주님은 인간이 사라졌음과 싸우십니다. 인간이 사라졌다는 거예요. 주님 안에서는 사라지는 게 없어요. 완성을 보지요. 애굽에서 빠져나왔다, 애굽은 빠이빠이다? 아니에요. 애굽의 알맹이가 알갱이가 이스라엘이에요. 애굽 사람들 자기가 뭘 모른다 했어요? 본인을 몰라요. 그런데 애굽 살던 그 이스라엘을 통해서 애굽 사람이든 이스라엘 사람이든 인간이 뭐냐를 하나님과 기적적인 만남에서 그들은 비로소 발견하게 됩니다.
그 하나님과의 만남은 반드시 꼭 언약의 만남이에요. 하나님과 만난다 할 때는 눈으로 만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은 언약을 앞장세우기 때문에 언약과 만나는 것이 하나님과 만나는 거예요. 인간들은 자기한테 미쳐서 자기 도 닦는 데 여념 없을 때 예수님은 십자가 언약으로 내 살과 내 피라는 언약으로 오셨잖아요.
노선이 두 개라 했지요. 처음부터 다시 하게 되면 노선이 두 갭니다. 한쪽 노선은 인간들의 시간의식을 유지하면서 옵니다. 시간의식을 유지한다는 것은, 지나간 것은 지나간 사라진 거예요. 잊어버리자. 잊어버리고 우리는 날마다 현재만 살아가는 거야. 이게 인간이 시간의식을 지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과거는 기억이고, 미래는 소망이고, 중간은 현재고. 그게 인간의 한계지요.
그런데 또 다른 노선이 있지요. 과거의 원칙이 완성을 통해서 미래에서 팔짱 끼고, 이제 왔어, 허허거리면서 팔짱 끼고 기다리는 것은 언약의 노선이죠. 하나님과 만남은 어떻게 만남이다? 언약의 만남이죠. 그 최종 언약이 뭡니까? 내 살과 내 피를 받아야 돼. 이것과 만나야 하나님과 만나는 거예요.
그러면 묻겠지요. 예수님을 만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피와 만납니까? 내 언약 가운데 요소가, 네가 꼭 죽어야 된다는 사실이 포함됐기 때문에 이게 피가 된 거죠. 왜냐하면 피라는 것은 죄가 있어야 죗값으로 피 흘린다는 모세언약의 완성이 있기 때문에. 새 언약 안에는 모든 지나온 언약이 여기 단층을 이뤄서 누적돼 있어요. 새 언약 안에 저 밑바닥에 노아언약부터 해서 모든 언약을 층층이 포개져 있는 입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새 언약 밑을 단면도로 칼로 중간을 잘라버리면 색색의 케이크처럼 색깔 별로 전부 다 언약들이 구분돼 있지요. 그러면 성경 해석은 간단하지요. 제일 위에 있는 완성된 언약, 다 이루었다는 것부터 빨대를 꽂든지 안 그러면 석유 시추할 때 파이프를 꽂으면 그 파이프에 흙이 동그랗게 꽂히겠지요. 석유 시추할 때 그렇게 하잖아요. 그러면 그걸 뽑아내면 층층이 딱 나오지요.
주님의 피 안에서 모든 인간이 고려장처럼 마땅히 멸망돼야 되는데 멸망되는 그 인간들의 작당들, 멸망되기 위해서 환장한 작당들 있잖아요. 그게 한 눈에 다 보이는 겁니다. 과학, 예술, 문학, 스포츠, 정치, 외교, 전쟁 이 모든 것이 뭐냐 하면 감옥 안에서 이뤄지는 거예요. 갇힌 공간 안에서 발작들을 일으키는 거예요. 벽을 치기도 하고, 안 그러면 잠잘 때 이빨 갈기도 하고 뽀뽀해주기도 하고. 전부 다 그 짓을 해도 못 빠져나오는 건 마찬가지에요.
이빨 갈든 예쁘다고 뽀뽀를 해주든 그 자체 전체가 한계 지어짐입니다. 안에 갇혀있는 데서 몸부림치는 거예요. 과학도 마찬가지고, 로켓을 달에 보내는 것도 전부 다 몸부림치는 거예요. 인공지능에다 챗GPT 전부 다 하는 게 몸부림치는 거예요.
지금 하버드에 있는 한국인 어떤 박사 팀이 연구한 데 뭐냐 하면 시험했는데 쌍둥이로 나온 쥐에서 DNA를 조작하니까 한쪽은 더 젊어졌고 한쪽은 그냥 늙은 쥐가 되는 그걸 성공을 했어요. 세포 내의 두 가지 양상이 있는데, 하나는 하드웨어 DNA 부분과 후생단백질에 관한 게 소프트웨어인데 후생단백질을 조작해보니까 노화가 방지되는 스톱되는 정도가 아니고 도로 젊어지는 데 성공했답니다.
이란 과학논문집에 실렸는데 그게 발작인 거예요. 그게 지금 오늘밤에 주님과 함께 낙원 가고 있는 강도를 밑에서 발목 잡아서 “너 국가적으로 네 죄 용서받았다. 너 빨리 더 살아.” 하고 잡아당겨요. 이 세상에 왜 옵니까? 마리아 오빠가 살아났잖아요. 살아난 나사로가 결국 또 죽어요.
히스기야가 15년 더 살았지요. 히스기야가 살면서 보여준 것은 살아 있을 때 보여주지 못한 본인의 죄를 15년 더 살면서 마자 다 보여주면서 결국 죽었어요. 나라 엉망으로 만들어놨어요. 결국 바벨론 사절 왔을 때 곳간에 있는 무가 다 보여줘서 몽땅 다 바벨론에 사로잡히게 한 겁니다. 그냥 죽었으면 될 걸 괜히 살려 달라 해서 나라꼴이 지 하나 때문에 유다나라 망쳐버렸잖아요.
그러니까 이제는 부재하는 세계라는 것이 여기서 이젠 아니야. 다시 마태복음 22장 돌아가 봅시다. 주님께서 질문한 게 우리 보고 질문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후손이 주가 되느냐는 질문을 했어요.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또는 그 당시 사람에게 어떻게 후손이 주가 되느냐, 답변하라.
그러니까 46절에,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라고 돼 있어요. 왜 답변을 못했지? 누가 답변 못했다고요? 바리새인, 그리고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자도 여기 대해선 답변 못하지요. 내가 보기엔 이단인데, 이단이에요. 왜 답변을 못하느냐 하면 방향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점점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 하니까 언약과는 점점 반대로 가는 거예요. 가짜 엄마는 애 데리고 왼쪽으로 빠졌다면, 진짜 엄마는 오른쪽에서 등장하거든. 무대 오른쪽에서. 방향이 달라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피 흘리기 위해서 오셨잖아요. 이 땅에서 피가 언약이기 때문에. 그러면 피 흘리는 앞에서 누가 있어야 돼요? 내가 있으면 안 돼요. 내가 뭐로 바뀌어야 되느냐 하면 내가 죄인으로 바뀌어져 있어야 돼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너를 부르러 왔다, 이런 것 없어요. 의인이고자 하는 죄인, 날마다 나아지고자 하는 것이 그게 죄라는 것을 알게 된 그 죄인, 내가 바르게 살아서 구원 받는 것이 이게 마귀의 술책인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그 죄인, 그 죄인은 인간의 능력으로 안 되지요.
주께서 오시게 되면 주님이 오실 때 여기 아우라가 있지요. 그 아우라가 성령입니다. 성령을 몰아세워서 천사를 바람 같이 다루듯이 성령이 오게 되면, 나를 베드로라 합시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베드로는 시몬입니다. 시몬이 베드로가 됐어요. 그 말은 시몬은 시몬인데 시몬에게 예수님이 들어가니까 이름이 베드로가 돼버린 거예요. 반석이 된 거예요. 너 말고 네 위에 교회를 세울게. 시몬 너 말고, 베드로 네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 이 말은 내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 또는 내 이름으로 교회를 세운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면 나는 왜 안 됩니까? 너는 죄인이기 때문에 마귀의 권세를 이기질 못하지요. 그걸 증명하듯이 그렇게 하고 난 뒤에 돌아서서 예수님 고난 받는다 하니까 “예수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하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대번에 하잖아요. 방금 이야기한 것을 뽑아낸 거예요. 주께서 언약적으로 선언한 것을 베드로를 통해서 쪽쪽 뽑아낸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하나의 주스라면 주님께서 빨대 꽂은 거예요. 베드로가 사슴이라면 빨대 꽂아서 사슴 피 뽑아서 혈기왕성하게 된 것처럼 그렇게.
그래서 어제 낮 설교에 주님께서 우리를 안 놓쳐요. 끝까지 따라오지요. 내 다리 내놓으라고. 네가 도망가면 안 돼. 네가 왜 그냥 도망 가? 사채업자도 그런 사채업자가 없어요. 정 안 되면 그냥 묻어버려야지. 내가 준 것 정말 안 꺼낼 거야, 하고 묻어버려요. 끝까지. 그러니 구원은 주님의 숙제 내 숙제가 아니거든요.
우린 자꾸 길이 어긋나요. 가짜만 좋아하는, 납득이 되는 것만 좋아해요. 내가 우수한 존재가 되는 것에 우리는 환장한 사람이거든요. 마귀적인 속성 때문에 그런데, 그래서 종교란 게 교회란 게 운영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당신을 구원시켜주겠다는 그 콘셉트로 밀어붙이면 교회가 장사가 되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구원됐다는 걸 뭐로 아느냐? 바리새인을 넘어서면 돼요. 바리새인을 넘어서면 뭘 집어넣느냐? 거기에 다 이루었다, 십자가를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이미 십자가가 우릴 접수하고 점령해버렸어요. 십자가가 점령했다면 나는 이미 죽었다는 사실, 사라지지 않는 이 사실이 나를 지배하게 돼요. 내가 어떤 조치가 없어요. 나 살았어, 그래도 소용없어요.
사람이 실재가 느낄 때는 실제야, 또는 실재야. 같은 말인데 또는 사실 그대로야, 이게 뭔 뜻인지 알지요. 다른 말로 실증적이야. 전부 비슷한 말이에요. 있는 그대로, 이거는 적어도 꿈일 수 없고 꿈이 아니야. 제대로 있는 것, 있음 그 자체야. 이게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나의 것을 기반으로 해서 발생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오십 년 교회 다녀도 주의 성령을 못 받고 주의 언약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은 남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믿었어, 내가. 내가 신앙 생활했어. 내가 교회 다녔어.” 왜? 실제니까, 나의 것이 있으니까 나의 것만 있는 거예요. 다른 게 없으니까. 그래서 나의 것은 있고 거기에다가 뭘 했느냐 하면 예수님의 믿음, 십자가 피, 언약 이건 전부 다 치매 걸린 할머니 집에다가 쓰레기 한껏 모으듯이 주변에다 쓰레기만 모은 거예요. 교회 다닌 쓰레기 있잖아요.
천주교에서 성호 긋는 이런 것들 하여튼 행위, 모든 것을 납득이 된다는 말은 나의 것을 잃어버리지 않는 데 유효했다 그런 뜻이에요. 내 것을 내 방어에 더욱더 철저하게 되는 데 필요했다, 나한테 소용 있다 그런 것들만 남아있는 겁니다. 그러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요. 내가 쓸데없다, 로 바뀌면 돼요.
그러면 깔끔하게 구원 받는 방법은 뭐냐? 내가 간직한 나의 것이 이게 아무짝도 소용없는 걸 알면 되죠. 방법은 뭐냐? 방법은 이거에요. 어쩔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는, 뭐야 이거? 내 방어체제에 구멍이 뚫린 거예요. 나는 모든 방어체계는 오직 어디에 정신이 팔렸느냐 하면 나한테 유리할까, 불리할까만 생각했는데 그걸 뒤통수 맞은 거예요.
SSG 간만에 써먹는다. 쓱배송 있잖아요. 그냥 쓱 들어와 버린, 그러니까 미처 방어할 태세도 안 됐는데 맞아버렸어. 주 앞에 얻어맞아 천국은 침노하는, 그냥 일방적으로 비겁하게 주께서 너무 비겁해요. 선전포고도 없이 그냥 쓱 들어와 버렸어요. 우발성이죠. 그걸 사건이라 합니다. 내 안에 사건이 터져버린 거예요.
자, 그러면 오늘 여기에 마태복음 22장 44절 봅시다. 참 이 말씀이 굉장히 얼마나 어려운지 보세요. 예수님 말씀이니까요. 일부러 지어내서 어려운 게 아닙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그다음에 뭐라고 돼 있습니까?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은 내가 아무리 친절하게 설명해도 모른다. 왜? 너희들 자체가 내 원수기 때문에 그래요. 본인은 본인이 하나님 원수인지 몰라요. 그걸 죄인이라 하거든요. 본인은 하나님께 원수 될 정도로 죄인이란 생각을 감히 못해요. 하나님과 친절하고 사귀고, 하나님과 좋게 지내고, 아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하나님과 좋은 화해의 관계에 있다고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생각했어요.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그렇게 생각해서 그들은 입만 떼면 하나님 은혜로 먹고 삽니다. 얼마나 듣는 사람이 은혜로운지. 보세요. 하나님의 은혜로 먹고 삽니다. 모든 것이 내 주의 뜻대로, 인샬라, 이슬람에서 하잖아요. 모든 것이 알라 신의 뜻입니다, 하는 것에 문제점이 뭐예요? 뭐가 빠진 거예요? 아까 강의 내내 했어요. 십자가가 빠졌어요.
그렇게 고백하는 게 누구한테 유리하다? 나를 지키는 방어체제의 일환이 돼버린 거예요. 설마 이렇게 하나님께 다 드렸는데 하나님이 나를 칠까? 이렇고 있다고요. 하나님 생각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마지막에 나한테 돌아오잖아요. 악마는 자립적이고 독립적이에요. 악마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따로 자기를 인정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어떤 일을 해도 그 최종적인 결과물과 결실물이 자기 것이 따로 자기 앞에 있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악과에서 심판 받으니까 심판 받는 기준 자체를 어떻게 악마 편에 가져오면 악마는 성공하겠지요. 인간 보고 부추겨서 따먹어버려라. 하나님 편의 선악과를 누구 편에 가져온다? 인간 편에 가져오는 것, 십계명 제일 마지막에 집어넣었어요. 탐심.
십계명 제일 마지막에 집어넣고 야고보에 가면 뭐냐 하면 바로 탐심이 죄를 낳는다, 이렇게 돼버려요. 십계명 마지막 계명 십계명 최초의 계명으로 작동해버려요. 신약에 와서 거꾸로 뒤집기해서. 인간이 입만 벌리면 뭐가 나온다? 탐심이 나오는 거예요. 자기 방어체제가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되 그 믿은 것을 최종적으로 내 결과로 내 앞에서 내 것으로 전환되고 싶다는 거예요.
그런데 로마서 4장에 어제 말씀드렸듯이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것 가운데 바랐다 이랬잖아요. 바랄 수 없는 것 아브라함이 미리 바랐습니까? 그 말 자체가 맞지요. 바랄 수 없는 것은 바랄 수 없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바란 적이 없지요. 바랄 수 없는데 자기가 바랄 수 없는 걸 그럼 안 바라면 되는데 왜 바랍니까? 주께서 쓱 들어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들 낳은 것도 어쩔 수 없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믿어야 생기는 일이 아닙니다. 믿든 말든 생겨야 될 일이 덮쳐버린 거예요. 그 말은 왜 자기 아내 사라가 애 낳는데 하등 쓸데없는 여인인 것을 비로소 발견한 겁니다. 왜 내 아내는 아기를 못 낳는가? 그거는 바랄 수 없는 것이 쳐들어오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방어에 나서선 안 되기 때문에 우리 아내는 아기를 못 낳아야 돼요. 아기 없는, 잉태치 못한 자가 될 때 비로소 새로운 잉태가 생기는 겁니다.
이걸 새롭게 성립되는 그다음에 부재의 세계, 없는 세계. 이미 아브라함언약 가운데서 여기서 나오고 있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뭐냐? 딱 그대로에요. 새롭게 성립되는 없는 세계. 없는 세계가 바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이 된 거예요. 주님께서 거기서 기다리겠다는 겁니다. 다윗이 뭘 기다려요. 뭘 기다리느냐? 바랄 수 없는 것을 기다립니다.
바랄 수 없는 것을 기다리기 위해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율법으로 재판하는 위치에 있다가 졸지에 뭐냐? 상한 심령이 돼버려요. 우리가 드리는 제사와 번제 노선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노선이에요. 나를 소급해서 상한 심령으로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최종 마련되는 그 세계, 그 세계를 기다려요.
쉽게 이야기하면 주님이 다윗에게 올 때 나는 너를 이토록 철저하게 너는 나의 죄인이고 원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근거를 내가 나중에 꼭 마련해줄게, 약속해. 나 너 박살낼 수 있는 너는 구원될 자격도 없는 그 이유를 내가 꼭 너를 위해서 마련해줄게. 이게 바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가 하는 겁니다. 왜냐? 그분 하는 일이 원수를 지 발 앞에 두는데 그 원수에 속하지 않은 인물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바리새인은 자기가 하나님 원수면서도 모르면서 주님이 준 질문에 답변을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선 해답을 줬습니까, 주지 않았습니까? 마태복음 22장에서 안 줬습니다. “답변하라.” “잘 모르겠는 데요.” “끝났다. 너는 영구나 돼라.” 끝났어요. “너는 몰라야 돼.” 개혁주의신학을 하는 사람은 복음을 몰라야 돼요.
그들은 복음 대신 그 개혁주의신학을 붙드는 거예요. 왜? 자기 방어체제니까. 이렇게 해서 훌륭한 신앙인이다. “나 너희들이 이야기하는 십자가, 복음 다 알고 피 다 가르쳐.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낮아져야 되고 겸손해야 된다고 다 가르쳐.” 그러니까 이단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서 에베소서 5장 어쩌고저쩌고, 서로 사랑하라 온갖 것 다 외워. 그래서 이단인 거예요. 입만 떼면 이단이에요.
“내가 이런 걸 알거든요. 이런 것 다 아는데 그래서 저 죄인입니다.” 이 소리를 왜 못 붙이느냐, 끝에다가. “내가 개혁주의신학 정말 좋아하고 그대로 진리인 줄 알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기였습니다.” 뒤에 그 말 왜 못 붙이느냐 말이죠. 이유는 단 한 가지 성령이 안 와서 그래요. 십자가 영이 안 와서 십자가를 집어넣지를 못하는 거예요. 중간에다 집어넣어요. 십자가를 딛고 부활의 새 생명, 막 나가. 성령의 은사, 이쪽으로 막 나가. 교회 서로 섬기기, 막 나갔어요.
그러니까 아까 뭐라 했어요? 이제는 부재하는 세계, 이것과 누구와 싸운다고요? 주님과 싸우는 거예요. 사사기 2장 10절을 봅시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지나간 것은 지난 것으로 끝인 거예요. 주님께서 지난 것의 완성으로 앞에서 미래에서 기다린다는 걸 모르고 우리는 우리 시대의 것만 알면 되지, 그래서 사사기에 보면 사사들이 그 시대의 이방나라의 풍습과 종교, 바알문화를 받아들인 거예요. 우리도 이왕 존재하는 것 잘 먹고 잘 살아보자. 저 나라처럼 강대국이 돼보자. 그쪽으로 나간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지나간 모든 언약을 그들은 다 지나간 걸로 취급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하지요. 한때 복음 같은 것 관심 있었어, 이러고 있다고. 복음이 자기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거예요. 복음 앞에 자기가 죽는 게 아니고 어떻게 살아도 복음은 끝까지 살아도 너는 나의 원수라는 것, 로마서 5장에 나오는 말씀이죠. 하나님이 원수 된 자를 위해서 피를 흘렸다는.
피와 주님이 원수의 만남, 그 근거 마련해서 그것이 계속해서 작동, 작용을 해야 되는데 옛날에 한 번 알았데. 뭐야 이거는? 본인은 그걸 아주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자칫하면 십자가 믿을 뻔했다는 이런 소리, 결국 문장으로 하면 이런 것밖에 안 돼요. 내가 천국 갈 뻔했다, 그걸 식겁했다. 내가 천당 갈 뻔했다, 이런 소리밖에 안 돼요, 결국은. 논리상. 십자가 몸담고 있다가 얼른 발을 뺐다는 이것밖에 안 되거든요.
그런 사람 굉장히 많아요. 십자가 복음 듣고 좀 좋아하다가 그다음에 발 빼고 다시 개혁주의로 돌아간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목사님들이 복음을 얼마나 철저하게 전해야 되는지 알겠지요. 두 가지를 다 전해야 되고. 복음적인 것과 아닌 것 두 가지를 같이 전해야 돼요. 늘 현장성이에요. 그 현장에서 본인이 분명히 자기 정체를 밝히도록 너 어느 노선이야. 분명히 해야 됩니다.
동독에 있는 사람이 그때는 소련이죠. 소련에 있는 사람에게 소련 형편을 잘 모르고, 친구 둘이 있었는데 한쪽이 소련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동독에 있는 사람이 소련 소식이 궁금해서 “나한테 편지해라. 네가 빨간 잉크로 편지를 쓰면 내가 반대로 들을게. 파란 잉크로 하게 되면 네 말 고대로 들을게.” 이렇게 약속을 했어요.
그리고 편지가 왔는데 파란 글씨로 왔어요. “소련은 너무 살기 좋고 소련은 너무 행복하고 사람들이 자기 원하는 건 다 얻을 수 있고 물자도 풍부하고 꼭 천국 같아. 그런데 딴 건 다 있는데 한 가지가 없어. 빨간 잉크가 없어서…….”
그게 뭐냐 하면 십자가에요. 예수 믿고 바르게 살고 형제 교제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복음 전하고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고 다 이야기하는데 결국 뭘 빠지느냐? 십자가 빠져버리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언약, 다시 원수를 발췌하는 복음적 기능에 말려든 사람이에요. 가짜인 것을 들춰내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2절, 나는 너희가 십자가 외에는, 그러니까 빨간 잉크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않기를 원한다는. 왜? 그 빨간 잉크가 다 이뤘기 때문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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