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19 - 만나
22,12,19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없는 것의 등장, '만나' !!
오늘은 교재 85페이지부터 하겠는데, 여기에 보면 '만나'가 나온다는 겁니다. 이 만나는 인간 세상에는 없는 것인데, 생소하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있는 것, 즉 "나는 누구인가? 태양은 무엇인가? 달은 무엇인가?" 라는 것을 규정하려고 하면, 그것은 없는 것에서 와서 평가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있는 것끼리의 평가는 무효라는 것인데, 없는 것과 평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같은 인간들끼리, "누가 누가 더 잘났나?" 라는 것은, 주님께서 전혀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들 속에 없는 것이 도래해야, 비로소 그 있는 것이 자기 평가의 범주를 확장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있는 것들끼리의 자기 평가는 갇혀있는, 즉 폐쇄구조 속에서 평가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 인간들끼리 평가하는 것은 절대적 객관성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없는 것에서 와야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회사감사를 할 때는 어디서 해야합니까? 외부에서 감사를 해야하는데, 내부감사는 전부 한 통속이 되어서 하나마나하다는 것이죠.
우리 인간은 폐쇄구조인데, 그러니 외부에서 등장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외부구조라는 것은 내부에 들어있지 않다는 것인데, 그래서 그 없는 것이 우리의 있는 것 속에 와서 섞이게 될 때, 비로소 여기에서 새로움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죠. 새로움이 말이죠.
그렇게 기존 이론으로는 전혀 먹혀들지 않는, 그런 전혀 다른 외부적인 요소가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범주와 경계는 확장이 된다는 겁니다. 어디까지 말입니까? 그 들어온 것, 즉 없는 것이 있었던 곳까지 확장이 된다는 말이죠.
* 사람의 세계와 말씀의 세계 !!
여기서 있는 것을 사람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사람의 세계에 없는 것이 쏙 들어올 때, 그것을 말씀의 세계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의 세계가 클까요? 말씀의 세계가 클까요? 당연히 말씀의 세계가 큰데, 그게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데, 즉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 이것은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의 세계인데, 그 세계가 인간을 압박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평소에 인간들끼리 "내가 너보다 더 잘났잖아?" 라고 하는 평가가 아닌 낯선 평가, 그것이 말씀으로부터 주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게 말씀으로 들어옵니까? 그게 아니고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겁니다. 즉 하나의 사람으로 오게 된다는 것이죠.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의 세계에서는 종교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있는데, 인간세계에서는 종교를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우상이라고 하는데, 이 종교는 절대 신으로 되어있다는 말이죠. 인간을 넘어선 절대 신, 즉 무한의 존재이고, 무한의 세계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평가하기를, 무한이 아니라 유한이라고 본다는 말이죠. "1, 2, 3, 4, 5", 그렇게 끝나면 유한인데, 그런데 그게 아니고 "1, 2, 3, 4, 5, …" 라고, 그렇게 된다면 그것을 무한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추가되는 것을 무한, 혹은 가무한(假無限)이라고, 수학에서는 그렇게 부른다는 말이죠.
* 가무한(假無限)과 실무한(實無限) !!
그러한 무한은 인간이 다룰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계속해서 커나간다는 겁니다. 우주가 계속 팽창을 하듯이 말이죠. 그래서 가무한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 인간이 다루도록 위해서 무엇을 만들었는고 하니, 실무한(實無限)을 만들어내었다는 말이죠.
그러나 이 실무한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수학에서는 실무한이 등장하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갇혀있는 유한을 계속해서 파내면 무한으로 파낼 수가 있다고 한다는 말이죠. 즉 유한 안에 갇혀있는 무한, 그것이 실무한이라는 겁니다.
아무튼 인간세계에서는 유한인데, 그렇게 유한이니 무한을 인간은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죠. "1, 2, 3, 4, 5", 그렇게 끝나버리면 뭔가 섭섭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을 상정하게 되는데, 그렇게 신이 있고, 그 신의 세계는 인간세계와는 달리 무한의 세계라는 말이죠. 불교에선 그게 보살의 세계인데, 즉 모든 것을 다 지켜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들이 아이디어로 끄집어내는데, 무한세계를 말이죠.
* 일개 인간으로 온 무한 !!
그런데 놀랍게도 말씀의 세계가 육신이 되었는데, 즉 일개의 인간으로, 하나의 인간으로 오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가 있는데, "유한이 큰가? 무한이 큰가?" 라고 말이죠. 유한이 큰데, 왜냐하면 일개의 인간으로 왔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인간의 아이디어를 완벽하게 뒤집어놓는 것인데, 인간들은 절대적인 신을 찾았는데, 이스라엘도 그렇고 이방인들도 그렇고 말이죠. 그런데 그 절대 신이 "내가 너희들과 같은 일개 인간으로 가겠다" 라고 하는 순간, 그러면 인간들이 생각했던 모든 신은 그만 우상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의 종교인데, 즉 우상이라는 말이죠.
그게 요한복음 1장 외에도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나오는데, 사울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할 때, 그때 누가 등장합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울에게 나타나는데, 그러면서 뭐라고 하십니까? "사울아, 사울아, 너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행 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행 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행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 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런데 정작 사울의 입장에서는 예수를 핍박한 적이 전혀 없는데, 왜냐하면 그 예수는 이미 돌아가신 분이기 때문에 말이죠. 다만 자기는 죽은 예수를 부활했다고 믿는 자들을 핍박했다는 겁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믿는 자인데, 즉 절대 신을 믿는 자라는 것이죠.
그러니 그 절대 신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반기를 들던지 모독을 한다고 하면, 자기는 그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서, 자기는 도저히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자들을 붙잡아서 감옥에 가두고 죽이고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당사자인 예수님이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고 하니,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는가?"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사울은 일개 인간을 핍박했는데, 즉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사울에게 묻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쉽게 말해서, "인간과 신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큰가?" 라는 것인데, 즉 "인간과 신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라는 겁니다. 사울은 여호와를 믿으니 당연히 인간보다는 신이 더욱 중요한데,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네가 믿는 여호와보다도 그 예수를 믿는 인간이 더욱 더 중요하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 사울이 믿는 그 신은 허상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 여호와보다 일개 인간인 예수가 더 중요해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여호와라는 절대 신보다 일개 인간인 예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무한, 즉 인간 쪽에서 절대 신이라고 하는 쪽으로 가는 길이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그런 길은 없다는 것인데, 그런데 일개 인간인 예수님을 통하게 되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예수님을 통하게 되면 비로소 발견되지 않던 여호와 하나님, 즉 예수님의 아버지를 발견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그게 가능하다는 말이죠.
요한복음 5장에서 그런 내용을 많이 강조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나는 공경한 자만이 아버지를 공경하느니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어떻다는 겁니까? 예수님을 공경하지도 않으면서 곧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니, 그것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고 악마라는 말이죠.즉 그들은 악마를 섬기고 있다는 것이죠.
(요 5: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그러니 순서를 지키라는 것인데,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순서를 지키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할지 몰라도, 그렇게 순서를 지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합니까? 순서를 지키면 예수님을 먼저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을 포기해야 합니까? 인간 세계에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 라는 것을 스스로 우상으로 간주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서 나온 신이 우상임을 자기가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게 안 된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고 하니, 우리 인간들은 기존의 신도 믿고 거기에 하나 더 추가해서 예수님을 믿으면 된다고 여기는데, 마치 식당에서 국밥에 공기밥을 하나 더 추가하듯이 말이죠.
* 신은 인간을 닮았다 !!
무슨 말인고 하니,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생각하기를 "우리가 믿고 있는 기존의 여호와 하나님도 하나님이고, 그리고 우리가 미처 하나님의 아들을 몰랐다고 하면, 그러면 거기서 그 아들을 하나 추가하게 되면, 이제 드디어 완전체가 된다" 라고, 그들은 그렇게 여겼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도 마찬가지이고 말이죠.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에게는 통하지 않는데, 예수님은 그게 잘못임을 지적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해서 알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예수님을 통해야만 하는데, 그렇게 예수님을 통하게 되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고 하니, "나는 신을 안다" 라고 하는 것이 조작된 가짜임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신은 없다" 라는 것이 아니라, "신은 우리 인간 집단이 전통적으로 만들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신인데, 그래서 신은 인간을 닮아있다는 말이죠. 즉 신은 인간은 생산해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의 모든 속성은 인간의 속성과 닮아있다는 것이죠.
* 만나에 대한 오해 !!
그런데 그런 인간과 전혀 닮지 않은 등장하는데, 다시 해보겠습니다. 인간 세계에서 자기 규정은 폐쇄적인데, 그런데 여기에 없는 것이 주어지는데, 그게 곧 '만나' 라는 겁니다. 이 만나는 인간 세계에는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당시에 만나를 받았던 자들은 만나가 주어져도, 그 만나에 대해서 오해를 했다는 겁니다. 또한 우리와 같이 만나가 주어졌다는 성경말씀을 보는 자들도 마찬가지이고 말이죠.
그게 여기 교재 85페이지에 나오는데, 즉 "만나는 굶어죽기 직전에 비상식량으로 제공한 것이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게 바로 오해라는 겁니다. 만나는 건빵과 같은 비상식량이 아니라는 말이죠. 즉 "네가 있고, 그 너에게 만나를 주어서 생존토록 하겠다" 라는 것이 만나가 아니고, "너는 없어지고 만나만 있어야 한다"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 세계에 속해있지만, 신명기 8장에 보면 만나는 말씀에 속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 세계는 없어지고 그 자리에 말씀의 세계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만나' 라는 겁니다. 만나는 닳아서 없어지는데, 만나의 수명은 단 하루라는 말이죠. 먹든지 말든지 하루가 지나면 썩어서 사라지고 만다는 겁니다.
(신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은 만나가 인간을 닮아있음을 보여주는데, 달리 말해서 "만나의 운명이 곧 인간의 운명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이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만나를 먹고 생존하거라" 라고 하는 게 아니고, "너도 이 만나처럼 소모가 되어라"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 마치 주운 장갑처럼 !!
예를 들어서, 여기에 장갑이 하나 있는데, 이게 상표도 여기에 표시가 되어있는데, 제법 고급 장갑이라는 말이죠. 이것을 제가 급행 1번을 타고 가다가 주운 것인데, 이런 장갑은 기사에게 줘봐야 주인에게 돌아가지도 않고, 더욱이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이런 것은 다 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그래도 지갑이라면 주인을 찾아주어야 하겠지만 말이죠.
그래서 버리기가 아까워서 제가 주워서 지금은 잘 사용하고 있는데, 하지만 저도 이것을 사용하다가 결국에는 잃어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실제로 장갑이나 머플러와 같은 것을 제법 많이 잃어버리곤 했는데, 심지어는 안경도 잃어버릴 뻔했다는 것이죠(ㅋㅋ).
하지만 잃어버려도 괜찮은데, 왜냐하면 그냥 주운 것이니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나' 라는 것은 하나님이 그냥 그저 주신 것인데, 그러니까 "써다가 버려도 된다" 라는 겁니다. 이 만나처럼 말이죠. 지금 우리 인간의 고민과 걱정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몸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하니, 그래서 인생이 고달프고 힘이 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더라도, 마치 이 주운 장갑을 사용하는 것처럼 여기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뭔가 문제가 생겨도, "참 그것은 내가 버스 안에서 주운 것이지" 라고 여기면 된다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러한데, 그야말로 덤으로 주어졌다는 말이죠.
이것은 없는 세계에서 새로운 계시가 주어지면 알게 되는데, 하지만 인간들끼리의 폐쇄적인 세계에서는 오직 자기만을 위해서 살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실제로는 소모품이라서 버려지면서도 자기가 자기를 억지로 붙잡으려고 하니, 살아가는 그 인생살이가 그야말로 고달프기가 짝이 없다는 겁니다.
* 사는 것이 곧 '억지' !!
이것을 간단하게 두 글자로 '억지' 라고 할 수 있는데, 사는 것이 억지라는 말이죠. 저는 억지스럽지 않은 인생을 본 적이 없는데, 전부가 다 억지라는 겁니다. 전화가 오면 "보험을 드세요" 라고 하는데, 왜 보험을 들라는 합니까? 인간은 자기를 지키는데 있어서 혼신의 노력을 다하기 때문에, 그래서 보험회사에서 전화를 걸어서 바람을 넣는다는 말이죠.
공짜로 주어진 것이니 그냥 쓰다가 버리면 되는데, 그렇게 마치 주운 장갑과 같은 존재가 우리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처음부터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그러니 내가 열심히 만들어서 살아가야지" 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래서 계속해서 붙잡으려고 한다는 말이죠.
주님은 방을 빼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계속 빼지 않고 버티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자기 자신의 삶과 자기의 욕망이 서로 맞지 않으니, 살아가는 것이 당연히 고단하고 힘이 들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죠.
요즘 날이 추운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를 하면 됩니까? 얼어서 죽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어죽지 않으려고 내복을 두 개씩이나 끼어 입으면서 살려고 하니, 그래서 매우 힘이 든다는 것이죠. 우리는 지금 당장 얼어죽어도 손해를 볼 것이 없는 인생인데 말이죠.
이것을 '실패한 주체' 라고 하는데, 그게 우리의 모습이란 겁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실패한 주체인데, 그렇게 인간은 실패한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을 점유해서 소유를 하려고 하는데, 그런데 마지막 때에 이 땅의 원래 주인께서 방문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인데, 그런데 그분이 하나의 인간, 즉 개인으로 오신다는 말이죠.
* 일개 인간으로 이 세상을 방문하신 예수님 !!
이것이 압권인데, 전지전능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시고 심판하시고 구원하신 분, 그분이 일개 개인으로 오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신보다 인간이 더 중요하다" 라는 공식이 나오는데, 즉 "무한보다 유한이 더 크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큰 것보다 작은 것이 더 큰데, 그 작은 것 안에 더 큰 것이 압축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모든 하늘의 비밀이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을 '비밀'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보기는 보아도 알지를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비밀로 오셨다는 말이죠.
(막 4:12)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 예수님에게 까인 베드로 !!
어제 오후시간에 "구원은 좌석제다" 라고 했는데, 그러면서 베드로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했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가 따라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강제로 밀치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예수님의 입장이 아닌 베드로의 입장이 되어보자는 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어떤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기 나름대로는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믿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만 예수님에게 밀침을 당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 베드로의 심정은 어떠했겠느냐는 것이죠.
그러면 여기서 과연 어느 쪽이 잘못했을까요? 베드로를 야멸치게 내치는 예수님이 잘못한 것입니까? 그게 아니라면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한 베드로가 잘못한 것입니까?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 아닌데, 그렇지요? 누구처럼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베드로는 끝까지 주님을 따르려고 했는데, 심지어 자기의 목숨까지 바쳐서 말이죠. 그러니 나름대로 베드로는 최선을 다했는데, 자기의 정성과 성의를 다했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 세계에서는 이 정상과 성의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데, 즉 베드로는 진심이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베드로가 누구에게 차였다는 겁니까? 자기가 그렇게 믿고 따르던 예수님으로부터 그만 차이고 까였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러니 베드로나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예수님의 잘못인데, 하지만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다는 겁니까? 우리의 입장과는 달리 베드로의 잘못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 베드로가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고 하면, 우리가 스스로 자기 잘못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베드로나 우리가 "아하, 내가 잘못했구나" 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없는데, 그게 바로 우리 인간인데, 자기가 몰랐던 자기의 진짜 모습이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나는 나의 한계를 죽었다가 깨어나도 알지 못하는 존재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베드로이고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믿고, 또한 예수님까지 믿겠다고 하는데, 이게 무엇이 잘못이냐?"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 주님의 군화발 !!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이 베드로를 내치지 않았다고 하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면 아마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지 싶은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에 내 자리가 있구나" 라고, 그렇게 나왔을 것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마치 오늘날 교인들처럼 말이죠.
왜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는 밀쳤다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런 장면이 왜 있어야 하느냐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에 대해서 오해를 하면서도 정작 오해하는 줄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바로 그것을 베드로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50년을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천국에서 말하는 그 영광스러운 미래는 이제 나의 몫이고 나의 운명이다" 라고 하면서 기뻐하고 있는 게 우리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여러분은 주님에게 차여보았습니까? 주님의 그 군화발에 까여본 적이 있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에게 까여본 경험이 있어야, 자기의 그런 생각이 얼마나 안일했는가를 알 수 있다는 말이죠.
* 다시 정리하면 !!
제가 여러분에게 다시 물어보겠는데, 여기에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는데, 이들이 광야에 갔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먹을 것이 없는데, 그런데 어느 날부터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왔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귀한 양식인 만나를 주셨구나" 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틀렸다는 겁니다. 그들은 분명히 만나를 먹었는데, 그렇지요? 그것이 요한복음 6장에 분명히 나오는데, 그들이 분명 만나를 먹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깨닫지를 못했다는 말이죠.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들은 만나는 먹었지만, 그러나 무엇이 바뀌지 않았는고 하니, "하나님이 우리를 먹여 살렸다" 라고 하는 생각 속에서, "나에게 문제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즉 "하나님이 나를 먹여 살려야 한다" 라고 하는 생각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 그것을 만나를 먹은 그들이 깨닫지 못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만나의 입장에서 생각한 것이 아니고 자기의 입장에서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정말로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라고 나오는데,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고 하니, 자기는 죽고 만나로 옮겨 타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만나는 말씀이기 때문인데, 그러니 자기의 세계에서 말씀의 세계로 옮겨 타야만 한다는 말이죠. 처음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들의 세계는 폐쇄구조인데, 그런데 그런 인간들의 세계에게 없는 만나가 왔을 때, 그러면 그 범주가 넓어지는데, 그 범주가 곧 말씀의 세계라는 겁니다.
* 조금 더 쉽게 해보면 !!
조금 더 쉽게 해보겠는데, 이러한 세계에 대해서 인간이 더 잘 압니까? 아니면 악마가 더 잘 압니까? 당연히 악마인데, 아담 이후에 악마가 더 잘 안다는 말이죠. 그러면 악마가 더 잘 압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더 잘 압니까? 당연히 예수님인데, 그러면 이 두 개를 합치면 어떻게 됩니까?
인간은 악마보다도 약하고, 또한 악마는 예수님보다도 더 약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바로 구원자이고 심판주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예수님이 하나의 인간이 되셨는데, 즉 일개의 개인으로서 인간세계에 오셔서 그만 섞여버렸다는 겁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무엇을 믿지 않았는고 하니, "인간은 악마보다도 더 약하고, 악마는 예수님보다도 더 약하다" 라고 하는 절차,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말이죠. 특히 "인간은 악마보다도 약하다" 라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 전혀 놓치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 곁에 예수님이 있으니까, 그 예수님을 붙들면 된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비롯한 우리 인간들은 건방지게 어떻게 나옵니까? 예수님에게 일대 일로 달려들어서, "믿습니다" 라고 하고 있는데, 그 절차의 중간에 인간보다도 더욱 더 강한 것이 개입되어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말이죠.
* 너는 나를 따라올 수 없다 !!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가 성의를 다해서 주님을 믿으면 된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정성을 다해서, 진심으로, 순수하게, 나의 목숨까지 바쳐서", 그런 식으로 해서 예수님을 붙들면 된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하지만 주님은 베드로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만 내쳐버렸는데, 즉 "너는 나를 따라올 수 없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먼저 악마를 상대하시고 난 다음에 인간에게 다가가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악마는 상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모든 인간을 다 상대한 것이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악마의 발 아래에 놓여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인간들이 "나는 천국에 가고 싶어. 나는 영생을 얻고 싶어" 라고 하는 주장을 주님이 과연 받아줄까요? 받아주지 않는데, 이런 것은 악마의 요구사항인데, 악마는 "하나님은 너희 편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절차를 모르기 때문에, 그게 악마가 아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여긴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 인간은 "나는 여기에 있고 하나님은 저기에 있고, 그래서 내가 그 하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무엇이 빠졌다는 겁니까? 악마가 인간을 통솔하고 있다는 부분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믿고 또한 예수님을 믿어서 천국에 가야지" 라는 것이 악마의 음성임을 우리 인간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 좌석제가 난감한 인간 !!
그러니 좌석제로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 인간은 그야말로 난감하다는 말이죠. 좌석제가 무엇인고 하니, 좌석을 인간 쪽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이 정원을 만들어서 채우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처소를 누가 만듭니까? 베드로가 만듭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이 만드시는데, 그러면 거기에 우리 인간의 의견이 개진될 수 있을까요? 전혀 없다는 말이죠.
이게 참 중요한 것인데, 즉 "인간의 자기 의견이 '팽' 당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너는 입을 다물어. 너의 의견을 이야기하지마"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저는 이런 것을 원합니다" 라고 해도, 주님은 "아무런 말도 하지마"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 인간의 의견은 '팽' 당해 !!
그렇게 인간의 자기 의견이 팽을 당하게 될 때, 그러면 인간의 자기 의견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자기 소원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 소원이 바로, "비록 이 땅에서는 고생을 했지만, 죽어서는 천국에 가서 행복하게 잘 살자" 라고 하는 것, 바로 그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의 의견이 팽을 당했다는 것은, 주님께서 "나의 너의 의견을 인정할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이란 말이죠. 예수님은 악마를 먼저 다루시고 인간을 찾아오시는데, 그런데 인간은 그 악마를 빼버리고, 그런 과정을 생략한 채로 예수님을 믿어서 천국에 가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베드로가 했던 일이고, 그 일을 주님은 차단시킨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성도는 과연 무엇을 해야할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악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지?" 라고 하는, 그것부터 알면 된다는 겁니다. 간단한데, 즉 "나와 예수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지?" 라는 것을 따지지 말고, 예수님과 악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말이죠.
* 만나처럼 말씀의 쪼가리로 살아라 !!
그래서 예수님께서 활동하시기 이전에, 먼저 성령께서는 광야에서 예수님과 악마를 만나게 하셨다는 겁니다. 성령께서 악마를 호출해서 예수님과 광야에서 맞붙게 하셨다는 말이죠. 그 장소가 광야인데, 제가 강의를 시작하면서 이 광야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고 했습니까?
이 인간세계에 없는 것이 왔는데, 그것이 바로 만나라는 겁니다. 이 만나가 왔을 때 인간은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그대로 드러내었는데, "우리가 굶어죽기 직전에 사랑의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주셨다" 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것이 아닌데, "만나처럼 말씀의 쪼가리로 살아라" 라는 겁니다.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있는 말씀의 쪼가리, 그렇게 살면 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소멸을 함으로서 자기 기능을 다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임무라는 겁니다. 마치 여기에 있는 이 장갑처럼 말이죠. 제가 얼마나 신나가 잘 사용하고 있는지 모르는데, 만약에 비싼 돈을 주고 구입했다고 하면 이렇게 잘 사용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잃어버리고 싶어도 잃어버려지지도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주인이 와서 절도범으로 고발하면 그게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ㅋㅋ).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인가?" 라고 하는, 바로 그것을 위해서 연결된 자들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는 자기 자신의 인생은 없고 예수님이 가신 길, 그 예수님의 인생을 답습해야하는, 즉 예수님에게 종속된 존재들이라는 겁니다.
* 사울을 직접 찾아오신 예수님 !!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이라는 자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체포하니, 그들이 사울에게 "당신이 뭔데 우리를 핍박하느냐?" 라고 하면서 달려든 것이 아니고, 사울에게 누가 직접 찾아왔습니까? 사라졌던 예수님이 사울을 찾아오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행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 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울은 예수님을 핍박한 적은 없고 다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을 핍박했는데, 그런데 주님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으로 보았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가 주인이 아니고, 그런 자는 예수님의 종속된 지체가 된다는 말이죠.
* 고정된 지형 !!
그래서 한 덩어리가 여러 구역에, 그리고 여러 시대에 출몰을 한다는 겁니다. 이 시대는 이 시대에, 그리고 다음 시대에는 다음 시대에 성령을 받은 자들이 나타난다는 말이죠. 그렇게 어떤 시대든, 또한 어떤 공간이든 출몰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시간과 공간이 주님이 보시기에는 고정된 지형이 된다는 말이죠.
인간세계에서는 시간은 지나가면 사라지는데, 여러분에게 여고시절의 모습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정말로 그 모습으로 나타나면 곤란해진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그 시절의 가난에 찌든 '나'와, 지금 재벌이 된 '나', 그렇게 만나면 놀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게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이야기인데, 14회 마지막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게 만났을 때, "너는 누구야?" 라고 하기가 곤란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만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세계에서는 고정된 동일한 판이 아닌데, 하나가 사라져야 나타나는 판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의 세계는 어떻다는 겁니까? 개인적으론 지난날의 '나' 라는 것은 없는데, 그런데 주님의 세계에서는 지난날이란 것 자체가 없다는 겁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모두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이죠. 이것이 인간세계에서의 시간과 공간의 차이점이라는 겁니다. 모두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죠. 거기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데,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는 겁니다.
(벧후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그러니 "어제, 오늘, 내일" 이라는 것이 없는데, 온전한 오늘뿐이라는 말이죠. 2,000년 전도 오늘이고, 2,000년 후도 오늘이라는 겁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그 현장에 누가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시간으로 보면, 그 옆에 아담의 새끼들인 우리도 같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선악과를 따먹은 죄에 대해서 우리도 동일한 죄인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단 하나의 세계인데, 그런데 우리 인간은 개인인 그 개인을 위해서 새로운 지형이 찾고 있다는 말이죠. 인간들은 지금 동시대의 '나'를 위해서, 즉 개인 '나'를 위해서, 이것을 긍정하고 또한 정당화하기 위해서 새로운 지형을 찾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지형의 종류에는 경제, 정치, 종교가 있는데, 그렇게 새로운 지형을, 즉 빌미를 찾고 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자기가 지금 이 시대에 살아야할 이유를, 2022년 12월 19일, 지금 이 순간에 살아야할 그 환경을 찾는 것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라는 겁니다. 과연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까? 예수님이 아니라, '나' 라는 개인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 지금의 '나'를 위한 현실은 하늘나라에는 없어 !!
그런데 이게 땅의 주인이 오게 되면 그만 가짜가 되고 마는데, 왜냐하면 이 시대의 '나'를 위한 현실은 하늘나라에는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베드로를 위한 세계가 베드로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는 말이죠. 베드로의 세계는 예수님을 위한 세계인데, 베드로만을 위한 세계를 주님께서 허락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이고 말이죠.
이 땅의 진짜 주인은 우리 인간이 아니고 예수님인데, 따라서 우리는 주인공이 되는 것에 대해서 실패한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실패한 자들이 현실 속에서 그 실패를 감추고 기어이 성공을 하려고 하니, 그러니 인생자체가 억지스럽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자기를 위해서 살고 싶어하는 그 '나'는 어떻게 될까요? 주님은 친절하게도 그 '나'를 없애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를 주님께서 없애주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아무런 대책도 없이 사라지면 허망한데, "이 땅에서 살다가 죽었다. 그것으로 너는 끝이다" 라고, 그렇게 되면 너무나 허무하다는 겁니다. 물론 그것으로 끝나도 우리는 할 말이 없지만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처소를 마련해놓고 베드로를 죽이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요한복음 21장을 보겠는데, 이것은 강남강의에서 한 것이지만 다시 한번 간단하게 요약을 해보겠습니다. 18절과 19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 베드로는 주님을 위한 소모품 !!
여기 19절에서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라고 하는데, 베드로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까? 재벌이 되어서 영광을 돌리는 게 아니고, 베드로를 죽이신다는 말이죠. 이것은 베드로가 소모품이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이 베드로 자신을 위한 소모품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소모품이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한 소모품의 기능을 하는 것이 곧 예수님 안에서 하나의 만나가 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만나는 소모품이니까 그러한데, 즉 만나는 없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만나와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성도의 모습이고, 또한 이스라엘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없는 것에서 생긴 것은, 다시 없어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기 위해서, 그래서 그냥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소모가 되면서 없어지는 것인데, 이것은 이미 베드로 이전에 예수님이 먼저 이 땅에서 시범을 보인 적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시범을 따라서 베드로가 간다는 말이죠.
* 베드로는 타인에게 이끌려서 !!
그리고 18절에 보면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라고 하는데, 베드로가 자기가 알아서 가는 것이 아니라, 남이 베드로를 데리고 간다는 겁니다. 베드로 자신보다 더욱 더 센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타인이고, 그 타인이 강제로 베드로를 잡아다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쪽으로 몰아세운다는 말이죠. 그것이 예수님의 원대하고 멋진 계획이라는 겁니다.
이 계획을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미리 말씀을 하시면서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 것만 같은데, "베드로야, 너는 이 계획에 대해서 이의가 있어?" 라고 말이죠. 그러면 아마도 베드로는 "주님, 너무 섭섭합니다. 제가 주님에게 무슨 잘못을 그렇게 했다고 인생파탄을 내십니까?" 라고 나오지 싶다는 겁니다. 아닌가요?
거기에 대해서 성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오는데, 계속해서 20절에서 22절을 보겠습니다.
(요 21: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요 21: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요 21: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 선생님, 제는 요?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베드로가 그런 섭섭한 마음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고, 그때 옆에 제가가 한 명 있었는데, 그게 요한이라는 말이죠. 이것은 마치 무엇과도 같은고 하니, 선생님이 학생에게 벌을 주는데, 그런데 벌을 받는 그 학생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선생님, 제는 요?" 라고 하는데, 그것과도 같다는 겁니다. 자기 혼자 벌을 받는 것이 억울하다는 말이죠.
베드로의 경우에, 자기가 그렇게 소모품이 되어서 사라지는 것이 억울한데, 그래서 "저기 요한도 저와 똑같이 그렇게 당합니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똑같이 당한다고 해서 마음에 위로가 되는 것도 아닌데, 아무튼 베드로가 그렇게 묻는다는 말이죠.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너무나도 섭섭하게 나오시는데, 그게 22절에 나오는데, 즉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왜? 내가 요한을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살려준다고 하면 너는 기분이 나쁘겠어?" 라고, 그렇게 나오신다는 것이죠.
* 너는 너 자신에 대해서 상관하지 말라 !!
그러시면서 주님께서 "너는 나를 따르라" 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너는 너 자신에 대해서 상관하지 말라" 라는 겁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수제자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러니 수제자는 무엇인고 하니, "나는 나의 일에 상관할 것이 없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수제자이고 수제자의 고백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그야말로 상상도 할 수가 없는 고백인데,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 생각을 하는 것이 우리 인간으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한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야말로 충격적이라는 것이죠.
* 다시 정리하면 !!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보면, 만나는 어떤 환경입니까? 첫 번째가 환경인데, 그것은 바로 광야라는 겁니다. 광야는 그야말로 생존여건이 전무한 곳인데, 그러면 여기에서 나오는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바로 이것인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만나를 광야에서 주셨는고 하니, 그것은 신약 때에 오면 비로소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들은 바로 하나님께 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무엇을 거쳐야 하는데, 인간은 악마를 거쳐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인간은 악마를 거쳐서 하나님께 가는 것이 아니고, 우상에게 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신은 우상으로부터, 그것이 바로 악마인데, 그렇게 우상으로부터 시작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신에게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러니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인간을 대표해서, 인간이 미처 몰랐던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종교니 하나님이니 하는 것은 여력이 있을 때나 하는 이야기이고, 진짜로 밑바닥에 도달하게 되면 딱 하나만 남게 되는데, 그것은 "제발 살려주세요" 라는 것이란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는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모르는데, 그래도 자기는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데, 그런데도 인간은 자기는 살아야 한다고 나온다는 것이죠.
여기서 교재 86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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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종교도 아니었고, 복음도 아니었다. 심지어 하나님도 아니었고, 메시야도 아니었으며, 자기를 기다리는 화려한 미래의 나라도 아니었다. 체계적으로 심오한 기독교 교리도 아니며, 제자 훈련도 아니고, 경건한 찬양 예배도 물론 아니다. 그들은 그저 밥이 먹고 싶었고, 물을 먹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것뿐이었다. 그저 살고자 했을 따름이었다. 정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최소한의 생존조건마저 박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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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살아야만 한다 !!
그들에게 미래라는 것은 없었는데, 왜냐하면 지금 당장 굶어 죽을 판이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교재에 보면 "그것뿐이었다. 그저 살고자 했을 따름이었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렇다면 여기에서 "당신들이 왜 살아야 하는데?"" 라고 물으면, 그들은 과연 제대로 된 답변을 할 수가 있을까요?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인데, 그러니 인간은 살아도 그 이유가 없이 산다는 말이죠. 자기가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자기는 행복해야 한다고 하는데, 하지만 정작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죠. 무조건 행복해야 한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은 최소한의 생존조건마저 박탈했다" 라고 하는데, 즉 "우리 갈 때까지 가보자. 끝까지 가보자"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십니까? "너희들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한 번 보자" 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 속에 무엇이 없었습니까? 인간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이 없었는데, 그들에게 말씀이 없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만나를 주신다는 겁니다. 이 만나가 어떤 때는 내려오고, 어떤 때는 내려오지 않는데, 그것은 바로 만나가 말씀의 조종을 받고 있음을 알려준다는 것이죠.
그러면 만나가 내려오는 때, 즉 나타나는 날은 어떤 날입니까? 안식일이 아닌 경우에는 만나가 나타나지만, 안식일에는 만나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은 안식일이라는 말씀체제에 의해서 놀아나는 존재라는 말이죠. 그런 피조물, 그게 바로 인간의 진짜 본래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 말씀의 엑기스, 예수 그리스도 !!
그런데 인간은 그 말씀을 떼어내고 "나는 살아야겠습니다" 라고 나오는데, 그러자 주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나는 살아야겠습니다" 라는 것을 떼어내고, 거기에 말씀을 집어넣는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게 사랑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말씀이 엑기스로 굳은 분이 누구인고 하니,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떼어내고, 예수님을 위해서, 혹은 하나님을 위해서 장렬하게 소모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으로서, 그것을 사도요한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수제자의 모습인데, 참된 사도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 인간은 선물이었다 !!
이것을 "인간은 선물이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인간은 은사였다는 말이죠.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겁니다. 우리는 굳이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아도 되는데, 주민등록번호가 없어도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태어난 것만 기억한다는 것인데, 죽고 난 다음에는 전혀 그런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기가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는지, 그런 것을 전혀 기억할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태어나고 예수님 안에서 죽는다는 말이죠. 우리는 그것만을 기억하면 되는데, 그래야 그게 주님께 영광이 된다는 겁니다.
굳이 베드로처럼 설치지 않아도,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영광이 되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사나 죽으나 이게 단일한 지평, 즉 '예수 그리스도 안' 이라는 단일한 지평 안에서 말씀이 말씀대로 되어지는 것인데, 그렇게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굴곡진 인생을 살게 하신다는 말이죠.
이것을 "종은 책임을 지지 않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직원은 회사의 그 모든 일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인생에 대해서 자기가 책임을 지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죠. 물론 자기 인생도 아닌데, 우리는 전혀 주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만 해도 인생을 억지로 사는 게 아닌 것이 된다는 말이죠.
여기에 있는 이 장갑, 이것을 잃어버리든지 줍든지 간에, 거기에 대해서 전혀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이 폐기물, 여기에 대해서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흔히 여자들이 "너 같은 남자를 만나서 내 인생을 조졌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나오지 말라는 겁니다. 그 시대에는 그렇게 만나게 되어있는데, 그게 두 번이든 세 번이든 간에 말이죠.
왜냐하면 그때는 그런 시건(철)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결혼하고 나서 5년 뒤에 생긴 시건은, 그것은 결혼하지 전에는 결코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겪어야하니 말이죠. "네가 이런 남자인 줄 미처 몰랐다" 라는 것은 실제로 살아봐야 아는 것인데, 그런 미래를 미리 앞당겨서 "너는 탈락이야" 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살아봐야지 비로소 알 수 있는 존재인데, 따라서 이미 살아본 자체가 바로 '나' 라는 말이죠. 그것이 곧 지금의 '나' 라는 겁니다. 자기 자신과 남들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을 하든지 간에, 이미 살아봤다는 것, 그렇게 경험했다는 것을 토대로 해서 나온 결론이기 때문에, 이미 경험하게 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책임질 이유는 전혀 없다는 말이죠.
* 경제, 종교, 정치 !!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와 만나서 이야기했던 경제적 요소라는 겁니다. 성령에 의해서 악마가 예수님에게 테스트를 이 한 가지로 끝낸 것이 아닌데, 3가지라는 말이죠. 두 번째가 '종교시험' 이라고 할 수 있고, 그리고 세 번째는 '정치시험' 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교재 88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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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나의 규칙이란, 첫째 실제로 만나를 광야에서 주는 자나 장막에 있는 자나 할 것 없이 다 같은 양이 될 것, 둘째로 절대로 저장한다든지 축적하지 말 것, 셋째로 안식일에는 절대로 거두러 나가지 말 것, 이상 세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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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나의 규칙 3가지 !!
여기에 만나의 규칙 3가지가 나오는데, 먼저 모두가 동일한 양이 되어야하고, 그리고 두 번째가 저장이나 축적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렇게 되면 소유권을 주장하게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저장을 하면 자기 수고가 거기에 담기게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노력과 수고가 모이면 소유권 행사를 하게 된다는 말이죠.
제가 여기 이 장갑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 장갑에는 제가 고생해서 번 돈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다른 분에게 얼마든지 드릴 수도 있는데, 물론 더러워서 받지도 않겠지만 말이죠(ㅋㅋ). 그렇게 인간의 소유권이라는 것은 자기의 수고와 노력과 희생과 땀과 눈물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게 너무나도 아깝다는 겁니다. 하지만 만나는 일체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리고 두 번째가 무엇인고 하니, "저장하거나 축적하지 말라" 라는 겁니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아껴두었다가 내일 먹어야지" 라는 것이 안 된다는 말이죠. 이 세상의 자본주의의 특징은 저축에 있는데, 저축을 해서 그냥 소비하는 것이 아니고, 저축을 하게 되면 거기에 이윤이 붙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윤이 자본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나중에 이윤을 많이 모은, 즉 자본을 많이 모은 자가 상대방의 노동력을 헐값에 구입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런 차이에서 오는 이윤을 나중에 더 많이 얻어낼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시스템의 반복이 바로 자본주의라는 말이죠.
* 마르크스의 '자본론' !!
무슨 말인고 하니, 자본주의는 자기가 아끼고 절약한 것이 많이 있게 되면 이것이 자본으로 굳히게 되고, 이런 자본이 있음으로 인해서 그 자본을 가지고 자본이 없는 사람의 노동력을 시가보다도 낮게 책정해서 활용하게 되는데, 그렇게 시가보다 낮게 하면 그 차이만큼이 또 다시 자기의 자본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자본이 또 커지는데, 그러면 그 크진 자본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이전보다도 더 저렴한 값으로 구입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마르크스는 이것을 착취라고 했는데, 그런 잉여이익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노동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노동 값을 제대로 쳐주지 않아서 생긴 것이 자기의 수익으로 잡히게 되는데, 그러면 그게 자기의 재산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것을 반복하게 되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가난한 자는 더욱 더 가난하게 되고, 부자는 더욱 더 부자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계급이 둘로 나누어지는데,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으로 말이죠. 그러면 결국 두 계급이 대판 싸우게 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자본론' 이라는 말이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이렇게 생각했는데, 이게 과연 맞습니까? 참 근사해 보이는데, 실제로 그 당시 영국에서 상황이 그러하기도 했다는 겁니다. 사실 현실적으로는 마르크스가 생각한 것보다 더욱 심각하다는 말이죠. 물론 마르크도 언급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보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 나보다 강한 '돈' !!
그게 무엇인고 하니, 소유한 자본이 늘어나게 되면, 마르크스는 생각하기를, "'나는 부자다' 라는 행복과 만족감과 향유를 가진다" 라고, 그렇게 보았다는 말이죠. 자본주의가 그런 폐해를 준다고 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르크스가 빠른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본을 모으게 되면 돈과 자기 사이에 있어서, "돈이 나보다 강해진다" 라는 것을 간과했다는 말이죠.
그 시작은 '나'를 위한 돈이었는데, 그런데 나중에는 돈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게 되는데, 즉 자기가 그만 날아가 버린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 욕망을 우습게 보았다는 것인데, 욕망이 어느 선에 가면 멈출 줄 알았다는 말이죠. 어느 정도의 고급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게 되면 그것으로 만족할 줄 알았는데, 인간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상대적인데, 그래서 만족함이란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가진 자가 더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정신병에 걸리고,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라는 겁니다. 아예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배 째라. 나라에서 다 알아서들 해주겠지" 라고 나오는데, 하지만 있는 사람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말이죠.
* 제발 한 달에 200만원만 !!
있는 사람은 일주일 52시간 노동이 말이 안 되는데, 그래서 자영업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여기 아래 편의점을 보면, 주인이 새벽 4시에도 나와서는 담배를 피우면서 가게를 지키고 있다는 겁니다. 도대체 하루에 근무를 몇 시간을 하는지 모르는데, 하루에 16시간도 넘게 하지 싶은데 말이죠.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가게에 투자한 돈도 있고, 그리고 한 달에 최저 생계비 200만원을 뽑아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죠. 망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겨야 한다는 겁니다. 그럭저럭 가게가 운영이 된다고 하면 한 달에 200만원인데, 그리고 근무시간은 회사에 다닐 때와는 비교도 안 된다는 말이죠.
이게 자본주의의 톱니바퀴에 휘말려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악마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는데, 악마는 인간에게 행복을 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행복을 추구하도록 하는데, 결단코 만족함을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더 큰 만족이 있다고 하면서, 그렇게 약을 올린다는 말이죠. 그리고 바로 그 시험을 예수님이 받으셨다는 겁니다.
* 안식일, 먹을 것이 없이도 살아보는 시간 !!
그 세 번째가 무엇인고 하니까, 여기 교재에 보면 "안식일에는 절대로 거두러 나가지 말 것" 이라고 되어있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만족함' 이라는 것인데, 그것으로 끝이라는 겁니다. 안식일이라는 것은 만나가 없이도 살아보는, 즉 먹을 것이 없이도 살아보는 시간, 그게 바로 안식일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먹을 것이 없이도 살아보는 시간, 그것은 무슨 시간인고 하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살려지는 것인데, 즉 자기가 알아서 만나를 줍는 것이 아니고, 만나를 줍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살려주고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시간, 그게 바로 안식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안식일은 어디에 속합니까? 율법에 속하는데, 그렇다면 율법은 어디에 속합니까? 말씀에 속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말씀에 속한 그 안식일은 무엇인고 하니, 천지창조를 완성한 안식일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시간이 새로 시작된다는 것이죠.
* 다시 창조가 완성된 시간으로 !!
오늘 어려운 것을 많이 하는데, 이렇게 "1, 2, 3, 4, 5, 6"이 있다고 하면, 이것은 방향성이 있는데, 1은 2에게, 2는 3에게, 3은 4에게, 4는 5에게, 5는 6에게, 그리고 6은 7에게,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 세상이라고 하면 이게 "8, 9, 10", 그렇게 계속해서 있어야 하는데, 그러나 안식일은 그게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7은 없고 제로, 즉 0이 되는데, 그러면 0으로 시작해서 다시 1로 가고, 1은 2로 간다는 말이죠. 그렇게 주기적으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늘나라의 시간은 잠시 이 세상을 맛보고 나서, 다시 원래 안식의 시간, 즉 창조가 완성된 시간으로 다시 되돌아간다는 말이죠.
이것이 인류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일의 모든 진행과정으로서, 이것을 '시퀀스' 라고 하는데, 즉 연이어 계속되는 과정의 배열이라는 겁니다. 일종의 프로세스이고 알고리즘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이미 이 세상은 확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1, 2, 3, 4, 5, 6"으로 갔다가 다시 '0'으로 되돌아온다는 말이죠. 이렇게 되면 "1, 2, 3, 4, 5, 6" 이라는 것이 다 무효가 된다는 겁니다.
* 자아의 죽음 !!
그래서 이런 말이 있는데, 즉 "퇴직하면 경력은 사라진다" 라고 말이죠. 자기가 제 아무리 40년 동안 대기업의 임원을 했더라도 퇴직을 하고 나면 그 경력을 인정해주지 않는데, 그것은 곧 자아의 죽음이라는 겁니다. 즉 자기 과거는 사라지고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공장에 취직을 하려고 하면 "용접을 할 줄 압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기술을 가르쳐주는 폴리텍 대학에 가서 용접하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격증을 따서 조수로 3년 동안 일을 하고 나면, 그때 이력서를 내서 나이 60이 넘어도 취직을 할 수가 있는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체력이 딸려서 쩔쩔매고 일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하지만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죽이시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는데, 그래서 시편에 보면 성도가 죽는 것을 복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그만 하면 되었다. 그동안 수고 많이 했다. 이제 안식의 때로 가야지. 그동안 재산을 관리한다고 고생했다. 이제 내가 너의 재산을 다 없애줄 테니, 편히 쉬어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시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그렇게 우리가 죽는 순간에 모든 경력을 다 사라지고 마는데, 자기가 했던 모든 것은 다 무효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만나가 품고 있는 의미라는 말이죠. 이 만나가 오늘날 성도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사라지는 소모품이라는 겁니다.
* 만나와 예수님의 발자취 !!
그런데 이 만나, 즉 말씀이 우리의 인간 세상에 섞일 때는 말씀이 육신이 되는데, 즉 만나가 예수님이 되어서 우리 속에 들어온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자신의 발자취를 남기면서 사셨다고 하는, 것, 그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안식을 향해서, 즉 안식을 소개하는 만나, 안식 안에서 사라지는 만나, 그리고 이 만나는 나중에 약속에 땅에 가면 내리지 않는데, 즉 최후의 지점에 도착했음을 알려주는 것이 만나라고 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만나는 그렇게 방향성이 있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셨던 그 삶의 발자취, 그 걸음걸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여기가 천국이야" 라고, 그렇게 예수님께서 몸소 천국에 가는 길을 시범적으로 보여주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 자신이 곧 길이라는 겁니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러면 제가 여기서 묻겠는데, 베드로는 그런 예수님을 보고 어떻게 나왔습니까? 예수님이 가신 길을 어떻게 보았느냐는 말이죠. 제가 아까 요한복음 21장을 보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베드로는 자기의 죽음으로서, 그렇게 끝까지 사도의 길을 가면서 천국으로 갔다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서 천국에 갔고, 사도바울은 로마에 갔다가 천국에 갔다는 말이죠.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가롯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12제자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그것을 일일이 다 보여주는 지도가 저에게 있는데, 물론 정확히 그 장소를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렇게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12제자는 흩어져서 각자가 그 자리에서 죽었는데, 즉 소모품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만나가 가는 것이 곧 예수님이 가신 길이 되고, 이렇게 예수님이 만나가 되는데, 그런데 여기 교재 89페이지에 보면 무슨 내용이 나오는고 하니, 잠시 교재를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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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이 만나라는 양식은 백성들의 원망 뒤에 나타난 양식이라는 점에서 만나 속에는 백성들의 원망과 원성과 불신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만나는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대들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물이 된다. 왜 이 범죄 증거물이 필요한가? 이점을 알기 위해 이 만나가 든 항아리가 나중에 어디에 보관된 지를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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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애굽기 16장 34절에 보면 아론이 그 만나가 든 항아리를 '증거판' 앞에 둔다. 그리고 이 만나는 백성의 범죄로 인해서 깨어진 증거판과, 백성들이 아론 제사장에게 대들었던 증거물인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함께 법궤라는 상자 속에 안치되는데 그 상자의 뚜껑은 유명한 속죄소이다. 즉 백성의 피를 씻어 내는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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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6:33)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출 16:34)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 만나가 피를 만남으로서 !!
여기에 만나를 담는 항아리가 나오는데, 그 항아리를 증거판 앞에 둔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증거판은 법궤 자체가 아니고 그 뚜껑을 의미하는데, 그렇다면 왜 뚜껑을 강조하는고 하니까, 뚜껑의 안 쪽에는 만나를 넣은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리고 깨진 돌판을 대신해서 만든 가짜 돌판, 그것들이 상자 속에 놓여지게 된다는 겁니다.
(* 녹취 구 - 목사님, 여기서 이야기하는 증거판은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앉는 법궤의 뚜껑인 속죄소(시은좌)가 아니고, 깨어진 돌판을 대신한 돌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리고 그 상자의 뚜껑에는 무엇이 묻혀지는고 하니까, 일년에 한 번씩 7월 10일의 대속죄일에 희생 동물의 피, 즉 염소나 소의 뿌려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안에 들어있는 만나가 무엇으로 변하는고 하니, 그 만나가 희생의 피를 만나서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말이죠.
만나가 되신 예수님께서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셔라" 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그렇게 만나를 먹음으로서 이 만나는, 만나라는 물질에서 실제적인 인물로 전환이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심으로서 영광의 나라의 주님이 되셨다는 말이죠.
이제 이것만 하고 마치겠는데,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까, 우리 인간들이 이렇게 있고, 그 옆에는 말씀이 있어서, 우리 인간들은 이 말씀을 봄으로서 천국도 상상하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 방향이 우리가 성경을 봄으로서 천국을 언급하는 것이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니고, 천국에서 말씀이 되신 분이 이 세상에 육신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오셔서 인간들 속에 개인으로 섞였다가 다시 아버지의 나라에 갈 때 그냥 가신 것이 아니고 피를 흘리셨는데, 즉 만나로서 피를 만나고 영광의 나라로 가셨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분이 심판주이고 구원주가 되신다는 겁니다.
* 신이 아닌, 피 흘리신 예수님 !!
그렇다고 하면, 이러한 전체의 틀이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인간이 신을 믿을 것인지, 피를 흘린 예수님을 믿을 것인지, 둘 중에서 하나를 골라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어느 쪽이 진짜 노선이냐는 것인데, 신이 아니고 피를 흘리신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알고 있던 신이 아니라는 말이죠.
일개 개인 안에 모든 말씀이 다 응축이 되어있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이 끄집어낼 수 있는, 즉 "엄청나고 절대적이고 무한한" 라고 하는, 그런 신들은 모두 다 우상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신을 향해서 "인간보다 더 위대하고, 인간보다 더 많이 알고" 라고 하면, 그러면 엄청난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여긴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실 우리 인간이 죽을 이유도 없는데, 즉 베드로가 죽음을 통해서 영광을 돌릴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냥 그런 분으로 알고 있으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게 아니고, 예수님은 피 흘리는 십자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실제로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제대로 된 노선인데, 그리고 우리 인간은 소모품이라는 겁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가 말씀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친히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곧 십자가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 우리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사람이 되셔서 우리에게 오셨는데, 그런데 왜 그것을 우리는 평소에 살아가면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까? 그러니 말씀을 통해서 이곳이 우리 인간들만의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새롭게 다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3,1,28 오후 1시에 마침.
만나와 함께 사라지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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