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18 - 새로운 차원
22,12,09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구약의 전쟁과 신약의 전쟁 !!
이제 시작을 하겠는데, 오늘은 교재 82페이지입니다. 제목이 '6, 신약에서의 주의 전쟁' 이라고 되어있는데, 이제는 신약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사람이 전쟁이 아니고, 주의 전쟁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이것이 바로 최후의 전쟁인데, 즉 마지막 전쟁이라는 겁니다.
구약에서의 전쟁은 그 형식이 '사람 대 사람' 인데, 즉 이쪽 사람은 이스라엘, 저쪽 사람은 이방민족,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신약의 경우에는 이게 주의 전쟁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분과 보이지 않는 악한 영과의 전쟁이라는 겁니다. 그런 차이점이 있다는 말이죠.
주님의 전쟁은 보이지 않는 분, 즉 주님인데, 이 주님께서 보이지 않는 악한 영과 전쟁을 벌이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와 절이 서로 싸움을 하는 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게 신약에서의 전쟁의 외형적 형식이라는 겁니다.
* 부귀, 장수, 번창 !!
그러면 두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이것이 더 중요한데, 전쟁할 때의 원칙이 무엇이냐는 말이죠. 다른 말로 하면 명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전쟁을 하려고 하면 나름대로의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무엇을 이야기하기 위한 전쟁인가?" 라는 것이죠.
구약에서의 전쟁은 사람 대 사람의 전쟁인데, 그러면 그 사람들이 원하는 바가 있다는 겁니다. 그게 잠언서에 나오는데, 3장 16절에 보면 "그의 오른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의 왼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라고 한다는 말이죠. 장수와 부귀, 즉 잘 먹고 오래 사는 것, 구약에서는 바로 그것을 위해서 전쟁을 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각 개인이 원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말이죠.
(잠 3:16) 그의 오른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의 왼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러면 오래 살면 여기서 무엇이 나옵니까? 그래서 잘 먹고 오래 살고, 그리고 자손들이 번창하는 것, 바로 그것을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원했다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전쟁의 당사자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은 은근히 그런 것을 원하면서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를 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전쟁에서 승리한 자들은 "부귀, 장수, 번창", 바로 이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공받기를 원했다는 겁니다. 반면에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일찍 죽고, 가난해지고, 대가 끊어지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구약시대라는 겁니다.
* 이 땅의 복을 맛보고 싶어요 !!
그렇다고 하면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왜 이런 것을 원했을까요? 구약은 땅인데, 그렇게 땅에서의 생활, 즉 지상생활을 함에 있어서는, 이 땅이란 것이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래서 그들은 이 땅 위에서 복을 맛보고 싶어했다는 겁니다.
여기서 조금 더 어렵게 해보면, 땅은 공간이고, 그리고 이 공간에 흐르는 것이 시간인데, 다른 말로 하면 역사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땅, 즉 공간인데, 그 땅이 계속해서 변화되는 것을 시간, 즉 역사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땅(공간)과 시간(역사)" 라는 말이죠.
* 이웃보다 더 잘 살기 !!
이것을 구약에 집어넣어 보면, 구약은 사람 대 사람의 전쟁인데, 즉 이스라엘과 이방민족과의 전쟁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날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스라엘이라면, 그러면 이방민족은 우리의 이웃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전쟁은 어떻게 될까요? '이웃보다 더욱 잘 살기'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앞집보다 더 잘 살기, 앞집보다 더 오래 살기, 앞집보다 자식이 더 잘 되기",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모두가 다 땅을 가지고 있는 공간인데, 거기서 앞집보다 더 잘 살고 오래 살게 되면, 그 내용을 모아보면 역사가 되고, 그것이 바로 '나의 역사' 라는 것이죠. 그러니 구약에서 전쟁하는 양식을, 오늘날 이방민족인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평소에 우리가 간절히 원했던 바램이라는 겁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이죠.
그렇게 보면 구약의 시편에 나오는 기도의 경우에, "아브라함에게 소가 많아지고 양이 많아지고 하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는데, 방금 이야기한 이것 전체를 두고 '종교'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도우심으로 자기가 잘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죠.
* 종교 넘어서기 !!
그런데 신약을 보게 되면, 이것은 사람 대 사람의 전쟁이 아니라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분과 보이지 않는 악한 영과의 싸움이라는 말이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종교 넘어서기' 라는 겁니다. 그러니 신약에서는 종교마저도 그만 초월해버린다는 것이죠.
방금 종교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 종교마저도 초월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이 지상의 땅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인데, 땅이 없으면 시간이라는 것, 즉 역사도 의미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약에서의 전쟁은 무슨 전쟁이고 하니, 그게 마지막이고 최종적인 전쟁인데, 이것은 "여기에서 살지 않고 다른 곳에서 살기" 라는, 그런 전쟁이라는 말이죠. 이 땅 위에서 "잘 먹고, 오래 살고, 자식 번창하기"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 땅에서 탈출하기"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 뉴 출애굽 !!
그러니 신약에서의 전쟁의 명분은 무엇인고 하니, 그게 '출애굽기' 라는 것인데, 즉 "신약적 안목에서의 새로운 출애굽기"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구약에서는 애굽이 하나의 나라였지만, 신약에서는 세상 전체를 의미하고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신약은 마지막인데, 그래서 마지막 전쟁을 하게 되면, 이 세상 전체가 애굽이 된다는 말이죠. 그게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온다는 것이죠.
(계 11:8)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다시 말해서, 이 세상 전체가 애굽인데, 종교단체가 있는 곳이 애굽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여러분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곧 애굽인데, 그러니 아파트에서 살다가 죽으면 해골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 땅에서의 '나의 역사' 라고 하는 것, 즉 "나는 어느 곳에서 살았다. 어떤 집안이다" 라는 것, 이런 것이 신약에 오게 되면 의미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종교마저도 초월해야하기 때문에, 그런 설교는 종교단체를 잘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설교가 아니고,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은 신약에서의 최후의 전쟁의 명분이 되는, 새 언약을 전파하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겨울에 그런 설교를 전하려고 하면 춥기 때문에, 그래서 벽돌로 담을 세우고 지붕을 만들었는데, 그게 예배당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중요한 것은 새 언약이고 복음인데, 추위나 바람을 피하기 위해서 잠시 세운 가건물과 같은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교회를 지키는 것이 원칙이 될 수 없다는 것인데, 그러니 교인수가 얼마나 되는지, 그런 것은 전혀 원칙이 될 수 없다는 말이죠.
* 이것은 내 몸이고, 내 살이다 !!
그러면 새 언약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새 언약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세운 언약인데, 예수님께서는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여기에 떡과 포도주가 있다. 그러니 먹고 마셔라" 라고 하시지 않고, "이것은 내 몸이다. 먹어라. 그리고 이것은 내 피다. 마셔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마 26: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마 26: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여기서 '나' 라는 것은 일반 사람들이 아닌데, 목사나 장로가 집사가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이죠. 오직 예수님만 들어가시는데, 사람들은 빠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새 언약에는 인간의 행함이 들어가지 않는데, 인간들의 충성과 봉사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다는 말이죠. 인격적으로 어떻고 저떻고 하는 것들이 들어가지 않는데, 오직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새 언약을 세우시고,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 되어서 새 언약을 위한 전쟁을 벌리시는데, 그게 신약에서의 전쟁인데, 최종적 전쟁이고 말이죠. 보이지 않는 분이 다 이루었다는 것인데,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와 계약을 맺은 것인데, 그 새 언약에 의해서 진짜 하나님이 밝혀지게 된다는 겁니다.
* 인간들은 말씀에 전혀 관여한 적이 없기 때문에 !!
이게 중요한데, 인간이 자기들의 의견을 하나님의 예언의 내용에 개진한 게 아닌데, 그렇게 인간들은 말씀에 전혀 관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인간들의 말을 다 사기라는 것이죠. 그것은 말씀이 아니기에 말이죠. 하지만 이 세상은 인간들의 의견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말씀대로만 되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그 말씀을 쓰거나 지어낸 적이 없기 때문에, 인간들의 말은 다 사기고 거짓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내 살이고 내 피다" 라는 것만이 전쟁의 명분이 되는데, 그분이 보이지 않는 분으로서 전쟁을 하실 때, 여기서 무엇이 중요한고 하니, 보이는 '나'의 의견, 이게 구약적인 것인데, 그것은 조금 전에 "이 땅에서 잘 먹고, 오래 살고, 자식 번창하기" 라고 했는데 말이죠.
그것이 인간의 찬란한 역사인데, 하지만 그것은 새 언약에 전혀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새 언약에서는 그런 것들을 빼버리는데, 왜냐하면 그런 것들로 인해서 예수님의 살과 피가 가려지니 말이죠. 그런데 기독교 방송과 같은 곳에 나오는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그들은 뺍니까? 아니면 더합니까? 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하고 있다는 말이죠.
원칙은 이미 확립이 되어있는데, 그런데 빼는 것이 아니고 더한다고 하면, 그것은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악한 영들에게서 온 것인데, 즉 마귀에게서 왔다는 말이죠. 그래서 원칙은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인데, 우리 인간들이 무엇을 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무엇을 하지 않아서 감사하게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했다고 하면, "앞으로 얼마나 더 해야합니까? 기도를 얼마나 더하고 헌금을 얼마나 더해야 합니까?"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런데 우리의 그런 보탬이 아니고, 전적으로 주님이 다 이루셨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가 더하거나 보탤 것이 없다는 말이죠.
* 인간이 분노하는 이유는?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사람이 분노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다 이룬 것이 없기 때문인데, 즉 늘 미진한 것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마저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화를 내게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완벽함이 있다고 하면, 상대방이 무슨 소리를 해도 그 완벽함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데, 그냥 "네가 모르는 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 라고 하면 끝나는 문제라는 것이죠.
그런데 화를 낸다고 하는 것은, 자기 자체도 불완전하다고 하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을 들키게 되니 화를 내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화를 내면 그 화는 사회적으로 범죄가 된다는 말이죠. 범죄를 저지르는데 있어서 화를 내지 않으면서 하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모든 범죄는 분노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죠.
"이 세상이 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거야" 라고 하면서 술을 마시게 되는데, 그렇게 술에 취하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범죄가 된다는 겁니다. 담배를 피우는 것도 그 자체가 이미 허세인데, 그리고 꽁초를 어디에 버립니까? 길거리에 버리는데, 그것이 바로 범죄라는 말이죠.
그런 하나의 범죄가 연쇄적으로 범죄를 낳게 되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그것이 한 개인에게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만나면 그 사람에게 그만 풀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타인에게 풀게 됨으로서 그게 사회적 범죄로 이어지게 된다는 말이죠.
바꾸어서 말하면, 인간은 자기가 만들지 않은 말씀에 의해서, 그렇게 이 세상에서 완성이 되어진 것에 인해서, 이미 악마와 결탁이 된 인간은 어떻게 나옵니까? 만약에 그렇게 되면 인간은 자기가 절대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에게 그 분노를 퍼붓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악마의 사주를 받은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그렇다고 하면 지금부터는 하나님께서 그 원칙을 어떻게 세우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겠는데, 여기에서 교재 82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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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하늘 쪽에서도 방관만 한 게 아니다. 천사를 보내서 예수님의 가족을 애굽으로 피신시켰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다 보이지 않는 전쟁이 벌써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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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굽에서 애굽으로 !!
여기에서 "천사를 보내서 예수님의 가족을 애굽으로 피신시켰다" 라고 하는데, 예수님 가족, 그것을 '성 패밀리' 라고 하는데, 실제로 스페인에 가면 '성가족 성당(사그라다 파밀라아, Sagrada Familia)' 이라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가우디라는 유명한 건축가가 심혈을 기울여 지은 것인데 말이죠.
아무튼 "애굽으로 피신시켰다" 라고 하는데, "애굽에서 피신시켰다" 라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마태복음 2장 14절에 나오는데, 그런데 호세아서 11장 1절에 보면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런 것이 성경해석에서 어려운 점인데, 분명 애굽으로 피신을 시켰는데, 그런데 그 의미는 "애굽에서 불러내었다" 라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애굽에서 애굽으로 피신시켰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마 2: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마 2: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마 2: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호 11: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그러면 호세아서 11장에서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라고 하는 것은, "이젠 더 이상 애굽에서 살지마" 라는 의미인데, 분명히 그렇지요? 그런데 이것은 구약 호세아서의 내용이고, 그것을 마태복음 24장에서는 어떻게 해석을 하는고 하니, 현재 예수님이 출생한 곳이 베들레헴이라는 겁니다. 그 베들레헴에 천사가 가는데, 이 천사는 말씀대로, 즉 하나님의 지시대로 움직인다는 것이죠. 그 말씀이 바로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천사가 한 행동이 무엇인고 하니,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예수님의 가족을 애굽으로 피신을 시켰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 인간들의 논리적 구조와는 맞지 않는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정반대라는 말이죠.
호세아서의 말씀대로 하면 애굽에서 이스라엘로 데리고 와야하는데, 그런데 천사가 와서 실제로 그 말씀을 어떻게 실현시키는고 하니,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예수님의 가족을 애굽으로 데리고 가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반대로 된 것인데, 그런데 그것이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라고 하는 말씀을 완성시킨 것이 된다는 것이죠.
* 신약은, 구약 뒤집기 !!
우리가 성탄절이 다가오면 이 성경구절을 자주 접하게 되는데, 그런데 이게 오히려 정반대의 구조로 되어있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는 겁니다. 신약은 구약 뒤집기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신약은 구약의 뒷면이라는 말이죠. 그게 신약과 구약이라는 것이죠.
사람들은 구약을 보면서 자기가 땅의 존재임을 인식하게 되는데, 그래서 땅 위에서 잘 먹고 살 잘고 오래 살고, 그래서 땅과 함께 영원하기를 소망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여, 도와주세요" 라고 하는데, 그게 인간의 본능이고, 그것을 종교라고 한다는 말이죠. 제가 강의를 시작하면서 이것을 여러 번 강조했는데, 그것을 일명 '하나님의 뒤통수치기' 라고 한다는 겁니다(ㅋㅋ).
* 악마는 우리 안에 생생하게 !!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악마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인데, 보이지 않는 악한 영이 따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저기 음습한 곳에 마귀가 사는 게 아니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추구하는 우리 안에 생생하게 마귀가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일곱 귀신이 들어있다고 했고, 또한 바리새인들을 보고 "너희는 악마의 새끼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재구성해야 하는데,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천국에 갈까? 지옥에 갈까?" 라는 것을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데, 악마와 동거하면서 무슨 그런 생각을 하느냐는 것이죠.
"나는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갈 거야" 라고 한다면,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권한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과거에는 절에 다녔는데, 이제는 교회에 다녀서 천국에 갈 겁니다" 라고 한다면, 그런 것은 하나님이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종교이라는 말이죠.
그러나 그런 종교마저도 어떻게 해야한다는 겁니까? '종교마저 초과하기', 즉 '나마저 초과하기', 그게 성경말씀이라는 겁니다. 3대째 모태신앙이 어쩌고 하는데, 제발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게 바로 역사인데, 그런 시간과 공간을 초과해야 한다는 겁니다.
* 차원이 다른 삶 !!
여기서 그림을 하나 보여드리겠는데, 아침에 제가 직접 그렸는데 말이죠(ㅋㅋ). 여기에 보면 커다란 건물에 벌레와 같은 것이 하나 붙어있다는 말이죠. 사실은 이게 벌레가 아니고 사람인데, 높은 빌딩의 벽면을 사람이 낑낑거리면서 기어서 올라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굉장히 힘드는데, 중력을 이기고 올라가야 하니 말이죠.
그런데 차원이 달라지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3차원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힘이 들지만, 4차원이 되면 이게 평지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그냥 걸어가면 된다는 말이죠. 전혀 힘이 들지 않는데, 이게 바로 '차원이 다른 삶'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구약에서는 3차원의 모형으로 말씀을 주셨는데, 그런데 신약에서는 그 차원을 그만 초과해버린다는 것이죠. 구약에서는 종교생활을 하기 위해서 낑낑거리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잘못하면 저주를 받고, 그렇게 저주를 받으면 부귀와 장수와 자식번창이 모두 끊어지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웃에게 패배자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데, 그러면 자존심이 상하고 만다는 것이죠.
구약에서는 그렇게 낑낑거리면서 사는데, 그런데 신약에서 오면 어떻게 됩니까? 신약에서는 전쟁이 주의 전쟁이고 최종 전쟁이라는 겁니다. 마지막 전쟁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다 마감한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여기서 마지막이고 하는 것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언약이 있는데, 그것이 곧 새 언약이라는 겁니다.
그 새 언약이 바로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라는 것인데, 즉 "계약은 이미 끝났다" 라는 겁니다. 즉 "예수님께서 모두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쪽 차원에서 저쪽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은 이미 끝이 났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평면이 되었다고 하면,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냥 걸어가면 된다는 겁니다.
* 현실중첩 !!
그래서 차원을 달리 했을 때 일어나는 변화가 어떤 것이 있는지, 거기에 대해서 제가 6가지 정도로 정리를 해보았는데 말이죠. 이것을 골로새서 3장에 의하면 '현실중첩' 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는데, 즉 윗동네인 'A' 라는 현실과 아랫동네인 'B' 라는 현실이 같이 있다는 겁니다.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 3: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 전혀 예상치 못한 연락 !!
그렇게 같이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즉 위쪽 동네인 'A' 라는 현실에서 연락이 오면, 인간 동네인 'B' 라는 낮은 차원의 현실에서는 그것을 전혀 예상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도에게 일어나는 일의 특징은 예상을 못한다는 겁니다. 한국에 사는 줄 알았는데 미국에서 연락이 오고, 그러니 "이제는 연락이 와야 하는데?" 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제가 국민학교를 졸업할 당시에는 전화를 하나 놓기가 그렇게 힘이 들었는데, 아파트에 당첨이 되는 것보다 더 힘이 들었다는 겁니다. 그때는 전화번호에 당첨이 되어야지 전화를 놓을 수가 있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전화기가 있는 집은, 그 전화기 앞에서 자식의 대학합격을 기다리곤 했다는 것이죠.
* 새로움, 그것이 곧 경건생할 !!
그런데 성도에게는 전혀 예상을 못하는 식으로 연락이 와야하는데, 이것을 '새로움' 이라고 하고, 신약성경에서는 '경건생활'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성도라고 하면 이 새로움이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는데, 숨이 막혀서 말이죠. 그냥 짜증이 마구 나고 한다는 것이죠.
교회에서 장로가 대표기도를 하면 잠이 오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물론 기도내용이 긴 것도 있지만, 기도에 새로움이 전혀 없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물론 목사의 설교도 마찬가지인데, 그 진행이 되어지는 내용이, 그것이 매뉴얼대로 이미 정해져서 진행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장모가 권사인 경우에는 사위가 오면 기도하는 것이 있는데,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게 하시고", 그렇게 정해져 있다는 겁니다. '살림남' 이라는 TV프로에 그런 것이 나오는데, 그렇게 기도를 하고 나서는 일을 다 시킨다는 말이죠. 고구마도 캐게 하고, 땅콩도 따게 하는데, 그래서 사위는 코피가 나고 한다는 겁니다(ㅋㅋ).
그렇게 매뉴얼대로 한다는 것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짜증이 나게 하는데, 그러면서도 그 교회에 다니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원하는 부귀, 장수, 자식번창, 그게 바로 종교인데, 그 종교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말이죠. "어휴, 짜증나. 하지만 참아야 나중에 천국에 가지"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아니고 아직 미완성인데, 열심히 해야 천국에 갈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복음은 새로움인데, 전혀 예상치 못한 연락이 와야한다는 겁니다. "내가 이런 연락을 받을 줄은 몰랐다" 라는 것인데, 이게 현실중첩이라는 것이죠.
* 현실중첩의 6가지 !!
여러분은 올라가기 위해서 낑낑거리면서 살고 싶습니까? 그게 아니면 걸어다니면서 살고 싶습니까? 낑낑거리면서 사는 것은 이제 멈추어야만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면 멈출 수가 있을까요? 여기서 제가 정리한 현실중첩의 6가지를 적어보겠습니다.
* (1) 나를 위해서 살기 → 주님을 위해서 살기
이제 새로운 차원에서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아갈 이유가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의 살과 피가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의 살과 피는 받지 않는다는 말이죠. 경건은 연락이 오는 것인데, 그래서 이것을 선물이라고 하고, 또한 은혜라고 한다는 겁니다. 어제의 은혜가 아니고,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은혜가 온다는 것이죠.
* (2) 바르게살기 → 자기 부인하기
그러니 "나는 못났다" 라고 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겁니다. 전에는 바르게살기 위해서 낑낑거렸는데, 그런데 새로운 차원에서는 전혀 그럴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 (3) 아파 죽기 → 편히 쉬기
과거에는 "내가 아파 죽겠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이제는 주 안에서 편히 쉰다는 겁니다. 죽겠다고 하지 말고 죽으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게 새로운 차원에서는 편히 쉬는 것이란 말이죠.
* (4) 악마 무서워 → 악마는 주님의 종
과거에는 악마가 무서웠는데, 그런데 이제는 악마는 주님이 부리는 종이라는 겁니다. 집에 인테리어 공사를 하기 위해서 사람이 왔다고 하면, 그 사람이 무서운가요?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일을 하세요. 그리고 일이 끝나면 가시면 됩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렇게 악마는 주님이 부리는 일군이라는 겁니다. 이미 다 이루었는데 무엇이 무서우냐는 말이죠.
* (5) 시도하기(행하기) → 확인하기(답사하기)
그러니 성도는 자기가 왜 구원을 받았는지, 왜 천국에 가게 되었는지, 그것만 확인하고 답사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하, 나는 죄인이 맞구나. 그래서 나의 살과 피는 소용이 없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과거처럼 시도를 하게 되면, 여기서 "내가 꼭 성공해야 할텐데"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안해지고 초조해지고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내가 올해는 김장을 백포기는 해야하는데" 라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게 새로운 차원에는, "김장을 백포기나 하는 것과 천국에 가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구나. 내 몸만 피곤할 뿐이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ㅋㅋ). 물론 김장을 많이 하면 자식들은 좋아하겠지만 말이죠.
* (6) 죽기 → 문을 통해서, 다른 공간으로 옮겨지기
이 땅에서의 죽음은, 새로운 차원에서는 다른 공간으로 옮겨지는 거인데,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문은 생명의 문인데, 즉 좁은 길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곧 길인데, 그리고 예수님이 곧 문이라는 것이죠. 그것이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나오는데, 이번 수련회에서 할 예정인데 말이죠.
(요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오직 예수님만이 양의 게이트인데, 양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차원인데, 인간들의 종교자체를 그만 초월해버린다는 말이죠. 그래서 악마의 사주를 받고 있는 목사들이 무엇을 지우는고 하니, 새로운 차원을 그만 교회에서 모두 없애버린다는 겁니다. 물론 악마도 주님의 일군이지만 말이죠.
* 새로운 차원을 교회에서 지우는 목사들 !!
그래서 목사들은 주님을 위해서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충성하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 부인을 없애버리고, "바르게 살면 복을 받습니다" 라고 하고 말이죠. 아프면 그냥 죽으면 되는데,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기도하면 병이 낫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죽어도 괜찮은 것이 아니고, 뭔가 열심히 시도하면 된다는 것인데, 그러니 이것은 확인하기가 아니라는 말이죠. "성경을 보면 악마가 물러갑니다" 라고 하는 것은, "악마를 계속해서 무서워하세요" 라는 차원이라는 겁니다. "나중에 죽으면 천국에 갑니다" 라고 하는 것은 미완료라는 것이죠.
그러니 새로운 차원은 공간이 다르다는 것인데, 그것이 골로새서 3장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목사에게 속은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에게 속았다는 말이죠. 자기가 구약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예수님께서 누구를 보내는고 하니까, 마귀의 종들을 계속해서 보내신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자에게는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죠.
* 이는 너희가 죽었고 !!
그래서 골로새서 3장 3절에서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미 죽었다는 겁니다. 이게 중첩된 현실인데, 즉 "이쪽 현실에서는 죽었고, 저쪽 현실에서는 살아있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따라서 아무리 날씨가 춥고 하더라도 강원도 철원에 가도 전혀 괜찮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답사하기라는 말이죠. 이미 망가진 땅인데, 이미 끝장이 났다는 말이죠. 그러면 철원에 답사를 하러 가서는, "여기 지옥은 참으로 춥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 예수님이 계신 곳이 곧 새로운 현실 !!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족에게 일어난 일인데,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예수님의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천사가 와서 베들레헴에서 애굽으로 빼돌렸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말씀에 어떻게 적용을 시키시는고 하니, 베들레헴이 있는 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보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애굽에 예수님의 가족이 있다는 말이죠.
이것은 애굽이 천국이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과 그 가족이 계신 곳이 바로 새로운 현실, 즉 중첩된 현실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을 더 높은 차원의 새로운 공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리고 그것을 사도바울은 '예수 안' 이라고 했다는 말이죠.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이 원칙이고 명분인데, 그것이 바로 '출애굽 정신' 이라는 겁니다. 또한 그것이 신약에서의 주님의 전쟁의 취지라는 말이죠. 그러니 애굽이라는 이 세상에서 자기 백성들을 빼돌리는 일에 대해서, 주님은 아주 열심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일에 전혀 실수가 없으시는 말이죠.
그렇게 빼돌리는 일을 일부라도 주님은 전혀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셨는데, 즉 "주님은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능력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일은 주님은 벌이셨는데, 그리고 주님 자신의 살과 피로 다 이루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우리 인생을 책임지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 내 인생을 책임질 권한은 나에게 없어 !!
이것을 적어보면 "나는 왜 나의 인생을 책임지려고 하는가?"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일은 주님이 벌이셨는데, 그런데 왜 건방지게 책임을 자기가 지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이것이 불신앙인데, 그러면 신앙은 무엇입니까? 자기에게 그 어떤 일이 생긴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주님이 벌이신 일이고, 즉 언약대로 되어진 일이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일이라는 것이죠.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프면 죽으면 되는데, 그러니 "아파서 죽는다" 라는 것은 편히 쉬는 것이란 말이죠. "해마다 김장을 백포기나 하고, 이제 고생을 그만 해라" 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것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생각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연락이 외서 일어나는 현상인데, 우리가 똑똑해서 그런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주님에게 연락이 오니 이게 새로움이 되는데, 즉 자기가 생각했던 새로움을 능가하는 새로움이라는 겁니다. 전혀 예상을 하지 못한 것이란 말이죠. 이것이 성경책 안에 들어있는데, 이것을 우리가 모른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지금도 악마는 우는 사자와 같이, 택한 백성들에게 복음을 가리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마귀를 탓하면 곤란한데, 왜냐하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마귀가 설쳐주어야지 확인이 된다는 겁니다. "나는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마귀를 만나기 전에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인생을 조져놓았네" 라고 하면, 그것은 엉터리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악마를 다루시는 방법이 어떠한고 하니까, 그것은 가짜가 천국에 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용도라는 말이죠. 악마와 같은 편이면서도 자꾸만 천국에 오려고 한다면, 그러면 주님은 "저리 가라. 너는 아니야. 너는 택함을 받지 못했어" 라고 하시면서 밀쳐내신다는 겁니다.
그런 자들의 특징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사울이란 자도 거기에 포함이 되어있었다는 겁니다. 자기는 예수를 믿는 자들을 잡아죽이는 것이 하나님에게 대한 충성이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전혀 예상치도 못한 연락이 주님에게서 왔다는 말이죠.
* 주님이 먼저 사울에게 다가오심으로서 !!
주님이 먼저 사울에게 다가오셨는데, 그래서 그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사울아, 네가 참으로 고생이 많네. 헛된 짓을 한다고 수고가 많아"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자 사울이 놀라서 "누구십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자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행 9: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행 9: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지금 사울은 누구를 핍박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데, 그러나 신약에서는 사람 대 사람의 싸움이 아니라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분과 보이지 않는 악령과의 싸움인데, 그래서 사람에 대해서는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새로운 연락이 와야 한다는 겁니다.
전 세계에서 월드컵을 보는 인구가 15억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그런데 전후반이 모두 다 끝난 시간에, 손흥민이 드리블을 해서 수비수 다리 사리로 패스해서 황희찬이 골을 넣을 줄, 그것을 누가 알았겠느냐는 말이죠. 그게 바로 새로움인데, 그래서 그 장면을 보던 사람들이 환호를 한다는 겁니다.
* 오늘은 오늘의 새로움을 !!
성도의 삶은 어제를 예상한 오늘의 삶이 아닌데, 오늘의 새로움을 또 다시 주님이 준비를 해주신다는 말이죠. 그것을 우리가 미리 예상을 한다면, 그게 그 예상대로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상한 새로움은 새로움이 아니기에 탈락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예상치 못한 새로움을 주님이 주시는데, 김장을 했는데 너무 짜다든지,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ㅋㅋ). 그러니 자기에게 좋고 나쁜 것이 아니고 새롭다는 것인데, 이것은 자기에게 이익이나 손해를 주는 것이 아니고, 전혀 예상치 못한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죠.
그것이 다리가 아플 수도 있고, 그렇게 해서 자기 인생을 자기가 다루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아하, 주님의 전쟁에 있어서, 그것을 확인하라고 주님께서 아직도 나를 살려두고 있구나" 라고 말이죠. 그러니 여러분이 목사에게 속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에게 속지 말라는 겁니다.
계속해서 진도를 나겠는데, 교재 84페이지를 보겠습니다. 이제 명분까지 이야기했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나서 바로 공생애에 들어가신 게 아니라는 말이죠. 곧 바로 아버지의 일을 하신 것이 아니고, 어떤 공간이 가셨는데, 그곳이 과연 어디일까요?
* 예수님이 가신 '광야' 라는 공간 !!
그것이 바로 '광야' 라는 공간인데, 예수님은 세례를 받고 나서 광야로 나가셨다는 겁니다. 구약 때의 광야는 이스라엘이 기존의 민족과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지, 그것을 하나님의 원칙과 명분이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 집어넣는 시절인데, 그것이 광야시절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이 광야시절은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원칙을 제공해준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광야에서 예수님이 누구를 만나는고 하니, 제가 처음에 신약의 전쟁은 사람과 사람의 전쟁이 아니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광야에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물론 아말렉 민족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튼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주고 받을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광야는 모든 것이 애굽에서 경험하지 못한 새로움인데, 그게 좋든 나쁘든 간에 말이죠. 그렇게 새로움인데, 그런 예상하지 못한 힘듬, 그런 새로움 속에서만 기쁨이 나오고 감사가 나온다는 겁니다. 기존의 감사는 별로 감사하지 않은 감사인데, 왜냐하면 이미 예상했던 감사라는 말이죠.
인터넷을 바꾸면 서비스로 대형 TV를 한 대 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것들은 별로 고맙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다 예상한 것이기에 말이죠. 그리고 그게 다 인터넷 요금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런 것은 다 어느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광야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기쁨과 감사가 있는데, 그런데 그것은 평소에 우리가 별로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인데, 그런 것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물이고, 또한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이죠. 즉 '물 있음', '양식 있음' 이라는 것인데, 이것을 우리가 평소에 다 누리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가지고 새로운 기쁨과 감사가 되게 하시는 것은,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새로운 환경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새로운 환경만이 아니고 ■새로운 원칙도 여기 광야에서 깨달아야 하는데, 그 원칙이 무엇인고 하니, 원망을 통해서 주님께 기쁨과 감사가 나오게 하신다는 겁니다.
* 원망, 그리고 기쁨과 감사 !!
그러니 "나는 믿음이 좋아서 주님께 원망하지 않아" 라고 나오면 정말로 곤란한데,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원망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죠. 즉 "나는 열심히 잘 하는데, 그런데 왜 우리 집안에 이런 재앙이 오게 하십니까? 나는 삐쳐서 이제는 교회에 가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도록, 그런 환경을 주님이 조성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광야에서의 새로운 원칙인데, 즉 그게 기쁨과 감사라는 말이죠. 그래서 "아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선물이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갈까요? 내일이 되면 식상하게 되는데, 그러니 오늘의 기쁨이 내일의 기쁨이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내일은 내일의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야 현실중첩이 되는데, 즉 나란히 간다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않는데, 우리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도 같이 우리의 삶에 관여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과 함께 간다는 말이죠. 어제치는 어제로 끝났고, 오늘치는 오늘 살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힘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의 기억 때문이라는 겁니다. 지금은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대표자로서 !!
여기 광야라고 하는 새로운 환경의 원칙에 있어서, 여기서 예수님이 대표자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이 광야는 구약으로 하면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는 모든 언약이 종결되는 마지막이고 최종적인 전쟁인데, 그래서 하나님의 택한 민족인 이스라엘의 대변자가 바로 광야에서의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성공하게 되면 그것은 곧 이스라엘이 성공한 것이 되는데, 예수님이 악마를 이기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악마를 이긴 나라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매우 중요한 시점에 왔는데, "이스라엘이 망하는가? 이스라엘은 영원히 망하지 않는가?" 라고 말이죠. 대표자끼리 붙어서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구약의 유명한 블레셋 장군의 이름이 골리앗인데, 이스라엘의 장군은 다윗이고 말이죠. 그것은 누가 봐도 일대일의 싸움인데, 그런데 거기서 다윗이 이기고 난 다음에 블레셋에서 다른 장군이 나온 게 아니고, 그들은 그것으로 물러났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두머리끼리의 싸움이고 그 효과인데, 옛날에는 전투를 그런 식으로 했다는 말이죠. 일대일, 그렇게 우두머리끼리 붙어서 진 쪽은 쿨하게 패배를 선언한다는 겁니다.
마지막 전쟁은 그야말로 화끈한데, 자기가 나설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전혀 나설 이유가 없는데, 그것을 두고 "나는 내 인생에 나설 필요가 없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게 기쁘지 않습니까? 물론 그것은 오늘의 기쁨이고, 내일은 내일 또 다시 새로운 기쁨이 터져 나온다는 말이죠.
*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 !!
자기 인생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은,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하, 나 자신은 전혀 믿을 구석이 없구나" 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래서 새로운 차원에서는 자기 긍정이 아니고 자기 부인이 된다는 말이죠.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자기 자신이 아니고 주님만을 따라가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따라가는 자기 자신이 아니고, 앞서 가시는 그분을 믿으면 된다는 말이죠.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게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기쁜 일인데, 어렵고 쉽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자들은 "이것을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어렵도다" 라고 하겠지만 말이죠. 그러나 이것은 "이것을 믿어라!"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되어진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예수님이 이기면 이스라엘이 이긴 것이 되고, 그러니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더 이상 더하고 빼고 할 게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내 살과 내 피로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그 원리라는 겁니다.
* 예수님에게 선빵을 날린 악마 !!
그러면 성령께서 이 광야에 예수님과 한 바탕 싸움을 벌이도록 누구를 불러내는고 하니, 이제 악마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 악마가 예수님에게 선빵을 날렸다는 말이죠. 그리고 예수님의 주변에는 예수님 혼자 일을 하시도록 천사들이 지키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일을 다 마치니 그 천사들이 나와서 예수님에게 음식을 가지고 수종을 들었다는 말이죠.
성령께서 주선해서 예수님과 악마가 붙게 되는데, 그런데 이게 일종의 리턴매치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에게 진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먼저 악마에게 졌다는 겁니다. 첫 번째 아담은 졌는데, 그래서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이 악마와 다시 붙는다는 말이죠.
* 경제적 제안, 종교적 제안, 정치적 제안 !!
그러면 그렇게 리턴매치를 하게 되는데, 그때 악마는 무엇을 무기로 가지고 왔습니까? 그것을 여기 교재에 보면 "(1)경제적 제안, (2)종교적 제안, (3)정치적 제안", 그렇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말이죠.
그 첫 번째가 '경제적 제안' 이란 것인데, 이것을 악마가 제시한 것이지 주님이 제시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이 현실의 중첩인데, 오히려 주님은 "이 땅을 포기하고 떠나거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주님께서 그런 것을 제안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두 번째가 무엇인고 하니, 사람은 일단 배가 부르면 신비를 추구하는데, 즉 종교적 탐험이란 겁니다. 그런데 새로운 차원은 어떠하다고 했습니까? 새로운 차원은 이 종교를 초과한다는 말이죠. 종교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내가 곧 신이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종교라는 것이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정치적 제안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실증적으로, 혹은 실제적으로 이 세상을 자기의 모든 힘으로 지배하고 싶은 욕구인데, 그것이 바로 정치적 제안이라는 말이죠. 자기의 힘으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싶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광야라는 것은 잊어버리고, 그리고 예수님도 천사도 악마도 다 빼버리고, 그러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이 세 가지 이외에 더 있느냐는 말이죠. 성경말씀은 없다고 여기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것 외에 달리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더 무엇이 있느냐는 겁니다.
이 세 가지는 그야말로 실질적인데, 꿈이나 환타지가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의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인데, 그래서 이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이것은 맞다. 옳다" 라고 할 수밖에는 없다는 겁니다. 그 누구라도 여기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가 없는데, 그것이 바로 이 세 가지 안에 모두 다 들어있다는 것이죠.
* 너는 한 달 수입이 얼마야?
그러니 우리가 무슨 수로 마귀를 이기느냐는 겁니다. 마귀는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즉 "경제적 제안, 종교적 제안, 정치적 제안", 이것이 우리 안간의 내부에서 스스로에게 독촉하고 있다는 말이죠. "너는 요즘 연금을 얼마나 타지? 한 달 수입이 얼마야? 그러고도 인생을 잘 살았다고 할 수가 있어?" 라고, 그것은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에게 추궁을 한다는 겁니다.
"남들이 다 간다는 지중해 크루즈 여행도 한 번 가보지 못하고, 이게 뭐야? 그리고 20만원짜리 연말 호텔뷔페 티켓도 없어? 그냥 차라리 죽어버려라" 라고, 그렇게 자기가 자기에게 닦달을 내고 책망을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는 그렇게 해서 낙담을 하게 만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미 다른 차원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래, 마음껏 해라. 또 해라"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자기의 확정된 운명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욕망이기에 말이죠. 그래서 그런 욕망이 자기에서 나오면, 우리는 그냥 관람이나 하면 된다는 겁니다. "아하, 내 마음이 바로 이 마음이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죠.
"내 마음은 호수요" 라는 말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요동치고 있는데, 그래서 "아하, 이것이 내가 포기한 나 자신이구나"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러한 마음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겁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즐기면 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고, "나는 새 사람이 되어야지" 라고 한다면, 그러면 마귀에게 속아넘어간다는 말이죠.
그런 마음을 또 끄집어내면, 그게 종교적 제안인데, 즉 "내가 기도한대로 응답되기"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곧 악마의 제안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자기가 예상한 대로 이 세상이 돌아감으로서, 그러면 "내가 곧 신이다" 라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우리 자신이 전쟁의 주역이 아닌데, 물론 언약의 주체도 전혀 아니고 말이죠. 하나님이 우리와 언약을 맺은 것이 아닌데, 그런데 우리는 눈치도 없이 끼어 든다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은 결코 우리 인생이 아니고, 주님이 만든 인생인데, 그런데 거기에 끼어 들어서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하지만 그렇게 자기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관리하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내 가정, 내 새끼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하는데, 그런데 당신이 왜?" 라고 나오는데, 그래서 남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알고 나서 이 세상을 보면 이 세상이 다 보인다는 겁니다. 지금의 이 세상의 모습이 그 얼마나 악마적이고 또한 지옥에 갈 자들의 외침인지가 말이죠. 그런 것들이 눈에 훤하게 다 보인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지옥의 아우성이라는 것이죠.
* 그게 뭐라고?
요즘 월드컵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남자들이 많은데, 굳이 축구경기를 보지 않아도 이겼는지 졌는지 알 수가 있다는 겁니다. 환호성이 들리면 이긴 것이고, 그냥 조용하면 졌다는 말이죠(ㅋㅋ). 황희찬이 포르투갈과의 게임에서 마지막에 한 골을 넣었을 때, 온 나라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는 겁니다. 이제 브라질과의 16강 경기가 남아있는데, 그런데 만약에 이겨서 8강에 진출했다고 해보자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그게 뭐라고? 그래서 왜?" 라고 하면 그만 할 말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갑자기 허무가 몰려오는데, 왜 그런고 하니, "그것보다 더 짜릿한 것은 없어?" 라고 하면서 또 무엇인가를 찾게 된다는 말이죠. 한 번 쾌감을 맛보게 되면, 이제는 그것보다 강도가 더 세야 하는데, 그게 아니면 쾌감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 늪에 자기가 빠진 꼴이라는 말이죠.
* 일용할 양식 !!
아까 광야에서의 기쁨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마실 물이 있고 먹을 양식이 있으면 된다는 것인데, 그것도 하루치의 양식이라는 겁니다. 그게 광야생활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마태복음 6장의 주기도문에 나오는데,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이틀도 아닌 하루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내일 염려는 내일에 맡겨라" 라고, 즉 "내일 염려를 너에게 넘긴 적이 없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그러니 우리는 일회용인데, 그냥 하루 하루 사용이 되어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겁니다. 내일이 되면 또 다시 내일의 새로운 양식이 주어지는데, 그런데 신명기 8장에 보면, "그 만나는 곧 주의 말씀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일용한 양식이 준비가 되면, 하늘에서 연락이 온다는 겁니다.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 믿음은,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것 !!
Q.T를 한다고 연락이 오는 것이 아니고 그냥 연락이 온다는 말이죠. 얼마나 신기한지 모르는데, 택한 백성은 그렇게 주님의 지시로 하루 하루 살아가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럴 때 확인이 되는데, "내가 구원을 받았구나" 라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은 주님에 의해서 끝장이 났구나" 라는 것이 확인된다는 말이죠.
바로 그렇게 자기 자신을 믿지 않을 때, 그것을 두고 '믿음'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주님에 의해서 모든 것이 운영되어진다는 것이 자기의 기쁨이 될 때, 그게 곧 믿음이고 또한 감사가 된다는 말이죠. 자기의 소원대로 되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너무나 감사하게 된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하신 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것을 두고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나그네' 라고 하는데, 우리의 본향은 이 땅에 없다는 겁니다. 하늘에 본향이 있는데, 그러니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죠.
(히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 영광과 고난이 중첩되어있어 !!
어제 낮 설교시간에 로마서 8장을 언급했는데, 18절에 보면,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중첩이 되어있다는 것인데, 영광이 위에 있고, 그래서 지금 이 땅에서의 삶을 고난으로 본다는 말이죠.
(롬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것을 좀 더 설명해보면, 성경을 해석하면서 "고난 뒤에 영광이 온다" 라고 하면 안 되고, 이 세상을 고난으로 볼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영광이 같이 하늘에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위에 있는 것을 영광으로 보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아무리 뷔페에 가서 맛있는 것을 먹어도 고난이라는 말이죠.
* 성도에게는, 이 땅의 삶 자체가 고난의 삶 !!
골프는 치는 고난, 벤츠를 타는 고난, 그렇게 성도에게는 이 땅의 삶이 모두 다 고난이라는 겁니다. 월드컵 16강에 올라가는 것도 고난이고 말이죠. 이 세상에서 고난이 아닌 것이 없는데, 주님이 만든 길이 고난의 길이기 때문에, 성도는 그 고난의 길에 동참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가 100평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고난인데, 물론 고생은 아니고 말이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그 모습인데, 찔찔 짜면서 지지리 궁상으로 사는 것이 고난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상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곧 고난의 생활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고난의 삶을 산다고 하면서 기도원으로 가서 금식을 하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초밥과 같은 것을 사들고 가라는 말이죠. 그래서 맛있게 먹으면서 기도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금식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까? 먹어가면서 기도하는 것이 금식기도라는 말이죠.
* 매뉴얼은 식상해 !!
기존 교회에서 고난주간을 만들어서 굶으라고 하는데, 물론 그런 말을 따라하는 사람들도 문제지만, 그것이 왜 문제인고 하니, 그게 새롭지가 않다는 겁니다. 식상한 것인데, 종교단체의 매뉴얼이라는 말이죠. 일종의 프로그램인데, 그래서 처음에 할 때는 재미가 있지만, 자꾸 하다가 보면 재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몰래 짜장면을 시켜먹고 하는데, 고난주간에 살이 찐 교인들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것이죠. 특히 부교역자들이 더욱 더 그렇다는 말이죠(ㅋㅋ). 어떤 교회에서는 고난주간에 아꼈던 쌀을 교회로 가지고 오라고 하는데, 그렇게 가지고 와서는 6.25를 기억하자고 하면서 주먹밥을 만들어서 먹는다는 겁니다.
* 오늘도 낑낑거리면서 !!
그런데 이런 것이 먹혀든다는 것은, 인간들이 낑낑거리면서 벽을 타고 올라가는 것, 그것이 그립다는 말이죠. 자기가 고생한 만큼 자기가 더욱 더 의로워졌다고 하는 것, 그게 바로 악마적 보람인데, 그게 그립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인간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주님의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좋은 게 아니고, 자기의 의로움, 그게 더 좋다는 겁니다. 낑낑거리면서 힘이 들어도, 자기 능력과 자기 역량이 어느 정도로 대단한지, 그것이 보고 싶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두 번째인 종교적인 욕망인데, 자기는 그것을 버리기가 싫다는 겁니다. 위에서 뛰어내리면 천사가 와서 바쳐주는 것,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고 쾌감이 넘친다는 말이죠.
톰 크루즈의 '미션 임파서블'에 보면, 손가락 하나로 등산을 한다는 겁니다. 그냥 헬기를 타고 가면 되는데, 굳이 왜 기어올라가느냐는 말이죠. 그런 영화가 왜 흥행에 성공하는고 하니, 사람들은 자기가 영웅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부인이 아니고 자기 긍정의 극한인데, 그것은 악마가 이미 그런 마음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광야에서 들통나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러한 경제적 제안, 종교적 제안, 정치적 제안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좀 더 자세하게 하겠는데 말이죠.
* 새로움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
그렇다면 오늘 강의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이것만 하고 마치겠는데, 중첩된 상태에서는 시간이 무의미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시간이 흐른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래서 그 시간에 따라서 더욱 더 괜찮아지는 자기 모습을 자기가 보고싶어한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위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도 결코 변하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는 변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변해봤자 그 변한 자기 자신이 그만 우상이 되어버리고 마는데, 그것을 어떻게 변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느냐는 말이죠.
아무리 "나는 부족합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를 부인해도, 그것이 우상이 되고 마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는 자기는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에게서는 새로움이 나오지 않는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새로움은 어디서 나옵니까? 오직 주님에게서만 나온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새로운 차원 속에 있음을 날마다 확인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남들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자기 속에 들어있는 악마에게 속아왔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렇게 속게 하신 것도 주님의 뜻인 줄 알고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2,12,15 오전 9시에 마침.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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