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16 - 신체와 자아
22,11,07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
이제 시작을 하겠습니다. 먼저 요한일서 2장 27절을 보면, 여기에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면서 다른 누구의 눈치도 아닌, 주님의 눈치를 봐야한다는 겁니다.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그러니 성경을 이렇게 주님께로 돌려서 봐야하는데, 즉 주님께서 무지목매한 우리에게 성경을 가르친다는 말이죠. 그러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그런 것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성경은 주님이 쓰신 것인데, 우리 인간이 쓴 소설책이 전혀 아니란 것이죠. 이게 베드로후서 1장에 나오는데, 오직 성령은 자들이 하나님께 받아서 말한 것이 성경말씀이라는 겁니다.
(벧후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을 이렇게 주님께로 돌려서 보면 어떤 효과가 있는고 하니, 오직 주님만 의식하기 때문에, 남들을 의식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나이가 70이 되고 80이 되어도, 그렇게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남의 눈치를 본다고 하면 사람이 되지 않는데, 그러니 그러한 노선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죠.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을 아담의 노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에서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아담의 노선에서 튕겨나왔고, 우리는 튕겨나온 그분을 믿는다는 말이죠. 그것을 성경에서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새로운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시편 118편에 나오고, 예수님께서 인용을 하셨고, 성령을 받은 베드로도 인용을 했다는 말이죠.
(시 118:22)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마 21: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행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 질문 - 목사님, 질문이 좀 외람되기는 한데, 성경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하면, 그렇다면 우리가 집에서 성경을 보면 되는데, 지금 이렇게 모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히브리서 10장에서 "모이기를 힘써라" 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데, 왜냐하면 주님이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나'와 '너'가 아니고, '우리' 라고 하는 집단을 구원하신다는 말이죠. 그 집단은 주님이 모집한 집단인데, 각자의 취미가 들어맞아서 모인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 교회는 '여분의 것' !!
주님께서 발생시킨 것인데, 그러니 우리가 보면 '우연히' 라는 말이죠. 그 중에는 세리도 있고 창기도 있고 강도도 있는데,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자들도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들은 놀랍게도 자신도 모르는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자들이라는 말이죠. 이것을 '여분의 것'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성령께서 모집을 해놓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모임에 가게 되면 성령께서 각자에게 이야기한 것이 있는데, 그래서 그들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도 모두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성령에 의해서 파헤쳐진 그들의 잘못과 죄가, 자기도 역시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나올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을 섬기되 혼자 섬기는 것이 아니고,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교제하면서 섬기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로마서나 에베소서에 보면 '서로' 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그것을 두고 '교회' 라고 한다는 겁니다. '나' 라는 개인이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우리' 라는 집단이 구원을 받는데, 즉 교회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죠.
* 모두가 동일한 처지에 !!
이것을 울산강의에서 "언약궤 앞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한 처지에 놓여있다" 라고 했는데, 여기 언약궤 앞을 신약에서는 십자가 앞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러면 동일한 처지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상호 경쟁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즉 서로가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들끼리 누가 누가 더 잘났는지, 누가 더 우세한지, 그렇게 서로 비교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람을 의식한다는 것은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인데, 또한 그렇게 남들과 비교해서 꼴지가 되면 그야말로 부끄럽고 곤란해진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경말씀을 보더라도,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보는 게 아니라, 자기 앞으로 당겨서 자기가 말씀을 보려고 한다는 겁니다.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는 너와 경쟁하기 싫다" 라는 것인데, 왜 그렇습니까? 구원은 주님이 하는 것이지, 자기가 경쟁에서 이겨서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 약속은 오직 예수님이 홀로 !!
이제 오늘 강의에서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이 나오는데, 즉 "약속은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라, 약속은 주님이 홀로 이루어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 라는 겁니다. 약속은 우리가 말씀을 제대로 실천해서 이룬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약속은 오직 예수님이 홀로 이루셨다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처지에 놓여있는데, 우리 가운데 말씀을 지킨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누구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는데, 남편, 아내, 손자,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의 눈치도 보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자기도 역시 약속을 이룬 적이 없기 때문에 말이죠.
그런데도 놀랍게 천국에 가는데, 그러니 사람을 의식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의 체면과 위신, 그런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바라보던지 간에, 그런 것에 얽매일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죠.
* 질문 - 그러면 '공동사회' 라는 것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만이 아시는데, 우리는 모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저 사람을 신자다" 라고 해서, 그렇게 해서 100명이 모였다는 말이죠. 그런데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면 90명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겁니다. "저 사람은 분명하다" 라는 것을 보장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약속은 주님만이 이루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이 100명은 신자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는 겁니다.
* 질문 - 그러면 우리는 일상적인 생활은 할 수가 없는데, 그러니 사이코가 아닙니까?
방금 사이코라고 하셨는데, 물론 우리는 그러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약속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았다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사이코가 맞기는 맞는데, 그런데 그 사이코가 이상한 말을 한다는 것이죠. "주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었습니다" 라고 말이죠.
그런데 이런 여분의 것이 나온다면, 그것은 성령이 찾아오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이 구조를 지켜주시기에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지키지 못했고 예수님은 지켰다" 라는 것인데, 이게 가장 기본인 것이고 정말로 중요한 문제라는 겁니다.
* 사두개파, 바리새파, 열심당원, 쿰란 공동체 !!
예수님 당시에 4개의 분파가 있었는데, 즉 사두개인파, 바리새인파, 열심당원파, 그리고 쿰란 공동체가 있었다는 말이죠. 이들 4개의 파는 각자가 "우리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합당하다" 라고 주장했는데, 물론 그래서 파가 나누어졌겠지만 말이죠.
먼저 사두개인파는 무엇인고 하니, "성전은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성전중심으로 살아야한다" 라는 겁니다. 굳이 요즘 말로 하면 교회중심인데, 즉 예배당 중심이라는 말이죠. 신앙생활을 집에서 각자가 알아서 하면 안 되고, 교회에 모이고 하면서 해야한다는 겁니다. 이게 사두개파라는 것이죠.
두 번째로 바리새인파는 무엇인고 하니, "말씀은 듣기만 하면 안 되고 반드시 실천을 해야한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실천을 해야 말씀의 능력이 나오고, 그 능력이 구원을 한다는 것인데, 즉 그렇게 실천에 옮겨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와 거룩을 이룰 수 있다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 다음에 열심당원파는 무엇인고 하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에만 모여서 자기들끼리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으로서 적극적으로 이 사회를 개혁시키고 변혁시켜 가야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국가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힘써 투쟁을 해야한다는 말이죠.
시위나 데모를 하든지 해서, 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 복음이 미치도록 사회변혁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바로 열심당원들이란 말이죠.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 하에 있었는데, 그래서 겁도 없이 로마에게 직접 덤벼드는 일을 실제로 그들은 실행에 옮겼다는 겁니다.
'본회퍼' 라는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가 있는데, 2차대전 당시에 히틀러 암살작전에 가담해서 사형을 당했다는 말이죠. 나라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기에, 그 나라의 통수권자를 제거하는 일에 실제로 참여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열심당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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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회퍼(Bonhoeffer, Dietrich)(1906년~1945년) - 독일의 목사, 신학자.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나서 튀빙겐, 베를린 등의 대학의 신학부에서 공부했다. 1927년에 학위청구논문으로서 쓴 『성도의 교류』라는 교회론에서 일찍이 천재적인 통찰력을 나타냈는데, 30년부터 미국으로 건너가, R. 니버 밑에서 공부했다. 31년 바이마르 체제 말기의 독일로 돌아가 베를린 대학 사강상 취임. 나치즘이 점차로 대두하는 정세 중에서 세계교회운동을 위해서 활약했는데, 33년 히틀러가 제국재상의 자리에 앉아서 절대적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일찍이 그 악마적 성격을 간파하고, 결국 나치정권의 교회간섭과 그에 대항하는 교회의 저항운동의 진전 중에서, <독일교회투쟁>의 일원으로서 활약. 35년에는 <고백교회>가 창설한 핀켄바르데에서의 비합법목사연수소의 책임자로서 젊은 목사의 양성에 임하였는데, 그것도 결국 폐쇄되었다. 그 이후 한때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제2차 세계대전 개시직전에 귀국. 점차로 직접적인 정치적 저항운동에 접근해서 43년에 게슈타포에 의해서 체포되었으며 2년간의 옥중생활 후 45년 4월, 나치스 붕괴 직전에 옥사. 그는 현대의 순교자로서의 생애를 보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제기한 신학적 문제는 전후 세계교회에 대한 큰 자극과 문제가 되었다.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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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 남은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세상은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더럽고 추잡하다. 그러니 따로 기도원에 가서 우리끼리 기도하고 노동을 하면서, 늘 채식과 금식을 하면서 메시야가 오는 것을 고대하면서 사는 것이 옳다" 라고 하면서 따로 떨어져서 생활한 자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쿰란 공동체라는 말이죠.
이 쿰란 공동체가 유명해진 것은, 1947년에 사해 사본과 함께 그들이 생활했던 거주지가 발견되었기 때문인데, 그게 사해바다 근처에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해바다는 그 크기가 동서 20km, 남북으로는 70km 정도가 되는데, 그곳을 제가 직접 찍어서 우리교회 사이트에 올려놓았다는 것이죠(ㅋㅋ).
그들은 비록 힘이 들고 넉넉하지는 않겠지만, 자체적으로 생산해서 동등하게 분배를 하면서, 이상적인 천국생활을 해보겠다고, 그렇게 시범적으로 실시를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세상과 격리가 되었으니 어떻다는 겁니까? 그러면 이제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정치와 문화, 즉 음악이나 예술활동과 같은 것들을 모두 다 그만 두고, 여기 광야에서 거룩한 영혼을 가진 우리들끼리 거룩한 생활을 하면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그렇게 나왔다는 겁니다.
* 인간의 모든 가능성에서 벗어나신 예수님 !!
그렇다면 이들 중에서 예수님의 본질과 맞아떨어진 계파는 과연 어디이겠습니까? 사두개파, 바리새파, 열심당원, 쿰란 공동체, 이들 중에서는 없었다는 겁니다. 이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보았는데, 즉 인간이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끄집어내었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라고 하셨는데, 하지만 그들은 괜찮은 신앙적인 것을 자기의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그것이 자기들의 믿음을 더해줄 것이라고 여겼다는 것이죠.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모든 가능성에서 벗어나시느냐는 겁니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 하시느냐는 말이죠.
여기서 요한복음 13장 36절을 보겠는데, 누가 읽어보세요.
(요 13: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여기에 보면 시몬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하는데, 우리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주님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에서 떠나고 마는데, 왜냐하면 창세기 3장에 보면, 이미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추방을 당한 대상이라는 말이죠.
우리는 추방을 당한 대상인데, 그래서 베드로가 아무리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해도,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들과 합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나는 너희들이 갈 수 없는 곳에 간다" 라는 것인데, 이것과 같은 말이 "거기는 너희들이 올 수 없는 곳이다" 라는 겁니다.
* 갈 수 없는 곳, 올 수 없는 곳 !!
가는 것과 오는 것이 반대말 같은데, 그런데 여기서는 같은 의미로 쓰인다는 말이죠. "갈 수 없는 곳, 올 수 없는 곳",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교회에는 갈 수 있고 올 수 있는데, 등록을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나 주님이 가신 곳에는 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갈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는 것을 교회에 와서 알아야 하는데, 그게 바로 교회라는 말이죠. 우리가 교회에 왔으면 "아하, 나는 천국에 갈 수가 없구나" 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목사가 "여러분을 천국에 보내드립니다" 라고 나오면 어떻게 되느냐는 말이죠.
예수님은 분명히 갈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러니 교회에 왔다고 해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나온다고 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겁니다. 머리에 물을 뿌려서 세례식을 하고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으면서 말이죠. 그런 것을 왜 합니까? 그런 형식을 왜 취하느냐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장례식장에서 장례의식을 왜 합니까? 죽은 자는 이미 죽었는데, 그런데 장례의식을 행함으로서 사람들에게 어떤 환상을 심어주는고 하니, 죽어서 좋은 곳에 갈 수 있는 것처럼 환경을 조작한다는 말이죠. 이미 그 사람은 죽어서 게임이 끝났는데, 뒷풀이를 한다고 해서 좋은 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무리 보람상조에서 "좋은 곳에 보내드립니다" 라고 해도, 검은 양복을 입고 깍듯이 인사를 한다고 해서, 최고급 리무진을 태워준다고 해서, 그 사람을 예수님이 가신 곳에 과연 보낼 줄 수가 있느냐는 말이죠. 전혀 없는데, 그러면 그것을 교회에서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아무리 세례식을 하고 성찬을 해도,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집사가 되어도, 그런 것은 아무런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말이죠. 50년을 교회에 다녔고, 십일조를 한 번도 빠트리지 않아도, 새벽기도를 한 번도 빠지지 않아도, 그런 것은 전혀 소용이 없는 짓이라는 겁니다. 선교나 전도도 소용이 없고 말이죠.
* 내가 올게 !!
그러면 주님은 왜 이렇게 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올게" 라는 것인데, 이게 정답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전혀 갈 수도 없고 올 수도 없는데, 그래서 주님은 자기가 오겠다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게 바로 요한일서 2장 27절이라는 겁니다. 아직까지는 이 말씀이 기억나지요?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기름부음이, 즉 성령이 직접 너희에게 와서 너희를 가르칠 것이다" 라는 것인데, 무엇을 전제로 해서 그렇게 된다는 겁니까? "너희는 올 수 없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기름부음이, 즉 성령이 직접 너희를 찾아와서 너희를 가르칠 것이다" 라는 것인데, 무엇을 전제로 해서 말입니까? "너희는 갈 수도 올 수도 없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했다는 겁니다. 사두개파, 바리새파, 열심당원, 쿰란 공동체,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서만 떠난 것이 아니고, 자기가 택한 제자들로부터도 떠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야말로 닭 쫓던 개꼴이 난 것인데,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제자랍시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른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는 것은 이미 따놓은 당상이고, 이제 남은 것은 그 천국에서 누가 높은지, 거기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이 그런 자기들을 버리고 떠나버릴 줄은, 그들은 그야말로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 우리를 배신하고 어디로 떠나십니까?" 라는 뜻인데,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주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너희들이 지금까지 내가 가르친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제자들아, 너희 인간들과 나는 전혀 달라. 그것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어?" 라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즉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40년 50년을 하고도, 아직도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까?" 라고 하는, 바로 그런 이야기라는 겁니다.
* 현실 속의 현실 !!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짧은 문장으로 이야기하면, '현실 속의 현실'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여기에 현실이 2개가 나왔다는 말이죠. 그러면 앞의 현실을 '현실A', 뒤의 현실을 '현실B' 라고 하면, 인간은 여기서 '현실A'에 속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매일 삶은 '현실의 절박함'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에 거기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는 말이죠.
이 현실의 절박함으로 인해서 우리 인간은 현실을 결코 부정할 수가 없는데, 즉 코로나 바이러스를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코로나에 걸리지가 않으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이야기인데, 그런데 막상 걸려서 입맛이 없고 목이 따갑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전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자기 이야기라는 말이죠.
우리가 이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자신이 그 현실을 구성하는 일부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인간을 떠나신다는 말이죠. 주님은 '현실B' 인데, 그런데 인간은 '현실A' 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현실A'를 차버릴 수가 없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아이가 잠을 자다가 이불을 차버릴 수 있는데, 그런데 이불은 이불이고 아이는 아이라는 겁니다. 아이를 보고 이불이라고 하면 곤란하다는 말이죠. 아이가 자기 위해서 이불을 덮으면, 아이가 이불 속으로 폭 들어가서 헤어지지 않을 것 같지만, 새벽 2시 45분에 아이가 이불을 발로 차버린다는 겁니다(ㅋㅋ). 그러면 아이는 "아이, 추워라" 라고 하는데, 이불과 아이는 분리가 가능하다는 말이죠.
* 예, 곧 내려가겠습니다 !!
하지만 인간은 현실 환경의 일부이기 때문에 분리가 되지 않는데, 그래서 '현실B'로 들어설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산 속에 가서 기도를 해도 휴대폰은 터지는데, 그래서 "여보세요? 예, 곧 내려가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전화를 받는다는 말이죠. 2달 동안 산 속에서 기도를 하면서 도를 닦으려고 하는데, 장모님이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온다는 것이죠.
그러니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된다고 여기는 생각자체가 잘못인데, 이 세상은 세상대로 돌아가는데, 그래서 자기가 거기에 맞추어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억지로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분리를 시키는데, 교회에 나와서 말이죠. 술과 담배를 하지 않음으로서 스스로 분리를 시키는데, 즉 "나는 신자이기 때문에 이런 것을 하지 않는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것은 자기 조작인데, 즉 현실 속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하면서, 그 현실 속에서 자기만의 현실을 따로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 헛된 짓거리라는 말이죠. '현실A'에서 '현실B'로 갈 수가 없는데, 그래서 우리는 사실상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물을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죠.
* 찾아오는 '현실B' !!
그래서 주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현실B'가 '현실A'에게로 찾아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무엇이 생기게 됩니까? 우리는 이 '현실A'를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는데, 제 아무리 주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자기 자식보다는 더 사랑하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리고 아무리 십자가를 안다고 해도, 우리는 돈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다음에 믿을 게요" 라고 하는데, 반면에 현찰 앞에서는 "지금 주세요" 라고 하고 말이죠(ㅋㅋ). 그 정도로 우리는 현실의 절박함에 깊이 빠져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현실B'에서는 죄인이라고 하는데, 어디서 많이 들어보았지요? 여기에서 말하는 죄인은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죄인이 아니고, 어미의 뱃속에 있는 때부터, 그러니 죄 가운데서, 즉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인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시커먼 숯검댕이로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인데, 나이가 80이 되고 90이 되어도 그대로인데, 그것이 인간이라는 말이죠. 다만 아닌 척을 하면서 위장을 하고 또한 변신을 할 뿐인데,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 것은 전혀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 인간의 진짜 모습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이것은 자기가 특별히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자체가 그런 식으로 힘을 가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저는 지금 종교가 아닌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과연 어느 인간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는 겁니다.
* 균모닝 하지말고 굿모닝 !!
어떤 광고문구를 보니, 그게 구강청결제를 선전하는 것인데, "균모닝 하지말고 굿모닝"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제법 특이한데, 좋은 아침이니 균으로 인사를 하지 말라는 겁니다(ㅋㅋ). 그렇게 우리 인간은 아침마다 좋은 세상이기를 꿈꾸고 있지만, 그러나 아침마다 이 세상은 똑같다는 것이죠.
우리 인간은 "똑같은 세상에 똑같은 나", 그렇게 전혀 달라진 것이 없이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데 여기서 주님은 '+알파'를 주신다는 겁니다. 즉 '여분의 것' 이라는 말이죠.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여분의 것, 바로 이것을 '약속'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언약' 이라고 하고 말이죠.
* 여분의 것이 찾아왔음 !!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여분의 것을 주시는데, 이미 '현실B'에 속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현실B'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만 여분의 것이 '찾아왔음' 이라는 것인데, 자기가 천국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이 찾아왔다는 말이죠. 성령을 통해서 여분의 것이 찾아왔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분의 것이 찾아와서 자기가 어떻게 달리 바뀐다는 것이 아니고, 자기는 여전히 그대로 인데 찾아왔다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왔다" 라고 하는 예수님의 그 말씀이 튀어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의 달린 한 쪽의 강도는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 저를 기억해주세요" 라고 했는데, 그게 여분의 것이라는 말이죠. 이것은 사람에게서 도저히 나올 수가 없는 것인데, 다만 주님이 그 사람을 선택했기 때문에 여분의 것이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니가 감히 어디서?" 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눅 23: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 독자적이 아닌, '함께(WITH)' !!
그래서 이 여분의 것이 있는 사람에게는 '함께' 라는 것이 가능한데, 이것은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어제 오후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어떤 사람이 교회에 와서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더라는 것이죠. 성경말씀을 보고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래서 "당신은 왜 교회에 와서 컴퓨터 게임을 합니까?"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뭐라고 대답을 하면 됩니까? 바로 이 '함께' 라는 것을 언급하면 되는데, 즉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그러면 당신은 왜 컴퓨터 게임을 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 "저는 믿음이 좋아서 그렇습니다" 라고 하면 안 되고, "주께서 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우리는 자기의 잘잘못을 감히 주님 앞에서 이야기할 수 없는데,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는 것, "제가 잘했습니다" 라는 것, 이게 둘 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와 상대를 하지 않기 때문에 말이죠. 우리는 이미 버린 몸인데, 왜냐하면 이 세상 자체가 버린 세상이기 때문에, 거기 출신인 우리도 역시 다 엉망진창이라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약속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인데, 어제 오후시간에는 거룩이 드러나야 한다고 했는데 말이죠. 그 거룩은 우리가 만든 거룩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만든 거룩으로 인해서 튕겨져 나온 거룩이라는 겁니다. 주님의 계약이 성사된 것, 그것을 거룩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히브리서 10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라고 하는데, 우리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하는 짓거리고, 우리는 거룩을 선물로 받았다는 말이죠. 즉 찾아왔는데, 왜냐하면 그곳은 우리가 찾아갈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히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 '나' 라는 것은 망상 !!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이상합니까? 이것은 종교 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실생활이라는 말이죠.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좀 알아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나' 라는 것은 망상인데, '나' 라는 것은 없고, 있는 것은 신체라는 말이죠. 즉 몸이 있다는 것이죠.
'나' 라는 것은 망상인데, 그런데 그 '나'는 '나'를 항상 좋게 보고 지키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즉 "내가 나를 변호하는데 열중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즉 보디가드인데, 그런데 신체는 어떻습니까? "아파요, 슬퍼요, 좌절해요, 기뻐요, 좋아요, 신나요"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나'가 그런 신체를 감당할 수 있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이빨이 아파서 밤에 한 숨도 잠을 자지 못했는데, 거기에서 무슨 자비와 온유와 형제우애가 나올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렇게 신체가 아프면 그 신체의 본색이 나오는데, 즉 "왜 나를 괴롭힙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신체가 아픈데 '나' 라는 것이 대신해서 나서서 항변한다는 것이죠. "신이시여, 왜 나를 힘들게 합니까?" 라고 말이죠.
* 그 아픈 몸이 누구의 몸이냐?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나' 라는 것은 망상인데, '나' 라는 것은 없고 신체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무엇인고 하니, "그 아픈 몸이 누구의 몸이냐?"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 몸이 누구의 것입니까?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데, 즉 주의 몸이라는 겁니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그러니 우리 몸이 사는 것만 주님의 뜻이 아니고, 죽이는 것도 역시 주님이 알아서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인도 아니면서 "어이구, 나 죽겠네" 라고 하면서, 거기서 '나' 라는 것이 왜 튀오나오느냐는 말이죠. "니가 거기서 왜 나와?" 라고 할 수 있는데(ㅋㅋ), '나' 라는 귀신이 언제까지 계속해서 붙어있겠느냐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체를 주셨는데, 이 신체에 누가 달라붙었는고 하니, 어둠의 세력인 악마가 '나'를 앞장세워서 이 신체에 평생 들어붙어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이 신체를 누구에게 인계하는 겁니까? '나'에게 속한 신체를 예수님에게 속한 신체로, 그렇게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주고자 주님이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 다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
여기서 요한복음 13장 36절을 다시 적어보겠는데,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했는데, 여기서 빠진 것을 채워 넣는다고 하면, "주여, 나를 내버려두고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즉 "이 귀하고 귀한 나를 떠나서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요 13: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자기 신체 !!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자기 자신의 신체였는데, 예수님의 자아가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는 자기가 자아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도 역시 자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주님은 정작 자아가 아니라 자기의 신체를 보여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신체는 어떤 신체입니까? 죽은 신체가 사흘만에 부활했는데, 여기에는 아버지의 성령께서 관여했다는 말이죠.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의 그 죽은 신체를 영광스러운 신체로 부활을 시켜놓았다는 겁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는데, 그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는 말이죠.
그게 로마서 8장 11절에 나오는데, 즉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면 죽은 예수를 살림같이 너희도 살릴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나'의 신체를 예수님의 그 영광스러운 부활의 신체로 만들어주신다는 말이죠.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신체를 포기하는 방법 !!
그러면 그 이전에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고 하니, 그 신체의 주인으로서의 자격을 포기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부터 포기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겠는데, 신체에게 처음부터 자아가 있었던 게 아니고, 이것을 미분화된 상태라고 하는데, 어머니에게서 말이죠.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나오자말자, "어머니, 저를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합니까? '엄마' 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무엇을 전제로 하는고 하니, "나는 이렇게 있고, 그 바깥에 '엄마라는 당신이 계십니다'" 라고, 그렇게 구분이 가능해야 '엄마'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언어가 가능해진다는 말이죠.
그렇게 갓난아이는 엄마와 아직 분화가 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래서 누군가가 엄마를 때리면 자기가 우는데, 왜냐하면 엄마 몸이 자기 몸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말이죠. 신체상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인데, 아이의 두뇌세포가 아직 그러하다는 겁니다.
* 자아는, 기억의 덩어리 !!
보통 1년 6개월에서 3년 사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1년 6개월이 지나면 아이에게서 자아가 발생한다고 하는데 말이죠. 쉽게 말해서, 그 기간이 지나면 엄마가 시장에 가도 자기는 집에 있어도 된다고 여기게 된다는 겁니다. 즉 엄마와 분리가 된다는 말이죠. 바로 여기에서 인간에게 생기는 것이 기억인데, 그 기억이 바로 우리가 그렇게 궁금하게 여겼던 '자아' 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기억의 덩어리가 곧 자아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 자아를 쪼개보면 "내가 7살 때 무엇을 했고, 10살 때 무엇을 했고, 20살 때 무엇을 했고" 라고 하는 것들이 가득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자기를 때렸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만약의 지금 자기 나이가 40이라고 하면, 1년 6개월에서 40살까지 모아놓은, 그 기억을 때린 것이 된다는 말이죠.
자기가 40살까지 잘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오늘아침도 KBS에서 "인간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라고 하면서 방송을 하던데, 이태원 참사를 보도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무엇이 귀하다는 겁니까? 인간 각자의 자아가 귀하다는 것인데, 그게 인간인데, 우리는 자기 자신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겁니다.
* 이 귀한 '나'를 왜 주님은 떠나려고 하십니까?
그러면 여기서 요한복음 13장 36절을 다시 생각해보면, 베드로가 "주여, 나를 내버려두고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베드로의 기억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고, 이제 우리는 천국에 간다" 라는 것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귀한 겁니까? 그 기억을 담고 있는 자기가 귀한 겁니까? 자기가 귀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귀한 '나'를 지금 주님이 떠나려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그동안 베드로가 주님에 대해서 단단히 착각했음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물론 신체의 경우에도, 신체가 늙어간다는 것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데, 왜냐하면 이 신체가 만약에 우리 자신 것이라고 하면, 우리는 20대의 그 싱싱한 상태로 계속해서 유지하고 싶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늙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는 말이죠.
연예인들이 성형수술을 왜 자꾸만 합니까? 좋았던 시절, 거기에 그대로 멈추고 싶다는 것인데,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성형을 하면 1년만 지나면 다시 흘러내리는데, 그래서 또 다시 성형을 한다는 겁니다. 그 극단적인 경우가 선풍기 아줌마인데, 결국은 얼마 전에 쓸쓸하게 돌아가셨는데 말이죠.
* 신체는, 죽음의 운반체 !!
그러니 신체는 죽음이 관리하는데, 자아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세월이 지나가면 죽도록, 그렇게 주님이 관리를 하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 신체는 죽음의 운반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죽을 때까지, 그렇게 죽음을 실어 나르는 도구가 우리의 신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은,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는,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철칙인데, 그것이 창세기 2장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에게 자아가 있다고 여기고 어떻게 했습니까? 여기에 도발해서, 감히 하나님의 철칙을 벗어나려고 시도했다는 말이죠.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 신체가 아닌 자아를 지켜라 !!
그러니까 누군가가 자기를 때린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그 좋은 기억을 한꺼번에 모독한 것이 되고 마는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무엇을 지켜야 하는데, 신체가 아니라 자아를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아를 지키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복수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때리는 자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라고 하면, 즉 "하나님이 나를 때린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라는 겁니다. 그냥 가만히 있을까요? 하나님에 대해서도 복수를 할까요? 역시 복수를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아 자체가 신체에 있는 여분의 것이기 때문인데, 수상한 여분의 것, 악한 여분의 것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귀신이 들린 자아인데, 즉 악마가 배후에 있기 때문에, 그 악마가 노리는 것은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대드는 것이란 말이죠. 그게 욥기 1장에 나오는데, "하나님이여, 욥을 치소서. 욥의 신체를 치면, 반드시 욥의 자아는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어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욥 1: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 너희는 중보자가 필요해 !!
광야로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은 자기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약속의 땅으로 가는데, 그런데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어디로 데리고 갑니까? 일부러 물이 없는 곳으로 갔는데, 그러자 원망이 터져 나온다는 말이죠. 하나님께 대한 원망, 왜 주님은 자기 백성들을 이렇게 인도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대속물, 희생물, 즉 중보자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올 수가 없지만, 중보자가 되시는 분이 모든 것을 다 이루어서, 그분이 너희와 '함께' 있으면, 너희는 갈 수 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광야에서 보여주시는데, 그렇게 희생물을 만드는 작업은, 그들의 원망을 들추어내는, 그런 환경을 통해서 진행이 된다는 겁니다.
그 환경은 바로 현실인데, 그 현실을 우리가 벗어날 수 있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제 아무리 산 속에 가서 기도해도 안 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현실의 일부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디에 놀러가서 힘이 든 것은 경치가 나빠서 그렇습니까? 자기 성질이 더러워서 그렇습니까? 자기의 성질이 더럽기 때문인데, 그것은 제주도에 가나 북유럽에 가나, 다 마찬가지라는 말이죠.
여행을 가서 망치는 것은 '나' 때문이고 '너' 때문인데, 자동차를 렌트해서 휘파람을 불면서 운전을 하는데, 그런데 옆에서 마누라가 "운전이나 똑바로 해" 라고 하면, 그러면 그 좋은 경치를 그 잔소리가 다 망치고 만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때 부터 싸우기 시작해서 돌아올 때까지 싸우는데, 물론 쉴 때는 싸우는 것도 쉬지만 말이죠(ㅋㅋ).
* 악바리로 성경을 보고, 악바리로 기도를 하고 !!
그러니 기억이라는 것은, 소위 모태신앙이라고 하는 것, 유아세례를 다 받고, 성가대도 하고, 주일학교 교사도 하고, 그런 모든 것이 다 자기에게 들어있는데,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이 치신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여분의 것, 즉 수상하고 더러운 영이 하나님께 반항하는데, 그게 바로 성화라는 겁니다. 즉 거룩한 생활인데, 바로 이것을 바리새인들이 보여주었다는 것이죠.
자기의 악마적인 본색을 감추고, "신이 어떤 잔소리를 해도, 제가 하나님에게 이만큼 헌신했습니다" 라고 하는, 즉 낮추고 또 낮추었다고 하는 자기의 신앙적인 성과를 가지고서 신의 입도 막을 정도로, 그렇게 해서 자기의 의로움과 노동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그래서 악바리로 성경을 보고, 악바리로 기도를 한다는 겁니다.
기도원이 왜 있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오기인데, 즉 "나의 기도와 그 열심으로 신이라도 잔소리를 못하게 하겠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것이 자기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이는데, 그래서 어제 낮 시간에 이렇게 쌓이는 것을 뭐라고 했는고 하니, 자기 호신용 권총에 총알을 장전해서, 자기에게 대해서 흠집을 내는 놈이 있다고 하면, 바로 발사를 하겠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어디 네가 감히 나의 의로움이 시비를 걸어?" 라는 것인데, 그렇게 '탕' 총소리가 날 때 여기에 마태복음 5장의 산상설교가 동원된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선 "형제를 보고 미워하는 자는 살인죄를 지은 것이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살인죄를 짓지 않은 자가 있으면 나와보라는 겁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이죠.
(마 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우리는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율법이란 율법은 모조리 다 위반하고 있다는 겁니다. 즉 "주님의 말씀을 위반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나의 나다움은 지키고 싶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이것이 우리의 기억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어떻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천국에 넣어주십니까? 주님의 기억을 우리 자신의 기억으로 바꾸어주신다는 말이죠. 지금 별로 놀라지 않는 표정들인데, 무척 놀라셨어요? (ㅋㅋ) 강도짓을 하다가 붙잡혀서 십자가에 달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현실 속에 있는 자라면, 누가 봐도 그 사람은 강도짓을 한 강도라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강도를 구원하시면서 어떻게 하십니까? 강도의 행위를 누구의 행위로 바꾸어버렸는고 하니, 주님 자신이 시킨 일로 바꾸어버렸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의 기억 속에는 스스로 희생물이란, 즉 죄인을 구원을 하기 위한 희생물이라는 기억이 있다는 말이죠. 죄인을 구원을 하기 위한 희생물, 그것이 바로 주님의 기억이고, 그 기억이 언약이라는 것이죠.
* 기억의 교체 !!
아브라함에게 주님이 찾아오셨는데, 그러면 주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곧 구원입니까? 구원이 아닙니까? 주님이 찾아온 것이 곧 구원은 아닌데,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믿음의 관계를 유지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믿음인지 믿음이 아닌지에 대해서, 그것이 창세기 22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지시를 내리는데, 즉 "너 자신을 위해서 재물을 바치는데, 네 사랑하는 독자를 바쳐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는데, 그렇게 아들을 바치면 그게 믿음인가요? 아닌데,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것은, 재물의 교체가 일어나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들이 숫양으로 교체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기억의 교체라는 것이죠.
(창 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나를 받지 않고 예수님을 받는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스스로 우리 자신의 기억을 주님 자신의 기억 속에 넣게 되면, 그러면 주님의 자아가 계속해서 우리 자신의 삶을 만들어내는 것이 된다는 말이죠.
지구과학에서, 지구가 이렇게 있으면 지표면의 깊이가 25km정도 된다고 하는데, 그것을 지각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 지각에는 대륙지각과 해양지각이 있는데, 대륙지각은 낮고 해양지각은 더 깊숙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해양지각이 밀도가 더 크기 때문에 대륙지각의 밑으로 해양지각이 들어가는데, 이것을 섭입이라고 하는데, 그게 지진이라는 겁니다. 한 쪽이 밑으로 파고 들어간다는 것이죠.
* 주님 자신의 프로젝트 !!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주님의 기억은 어디까지 뻗어져있는고 하니, 그것이 창세 전부터 시작이 된다는 겁니다. 상당히 길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 인생의 기억은 기껏해야, 송해가 96세에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의 기억 밑으로 우리 기억이 섭입이 되는데, 즉 개입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몽땅 누구의 기억이 되는고 하니, 주님 자신의 프로젝트가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모든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 !!
여기서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라고 하는데, 하늘에서 보이는 것은 해와 달과 별들이고, 또한 땅에서 보이는 것은 인간을 비롯해서 여러 동식물들이라는 말이죠. 그 다음에 "보이지 않는 것들과" 라고 하는데, 영적인 것들이란 겁니다. 또한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라고 하는데, 정치꾼들과 그 정치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마귀들인데, 천사들도 포함이 되고 말이죠.
그리고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라고 하는데, 여기서 '그' 라고 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았고, 바로 그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모든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가 되었다는 말이죠.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주님께서 보약을 먹게 하셨다 !!
그러니 우리의 주인이 우리 신체에 대해서 주인 노릇을 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귀에게서 속아서 "내 신체는 내 것이라" 라고 하는데, 그래서 "오래 살아야지. 보약을 먹어야지"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은 "내 신체니 내가 관리하겠다" 라는 차원이란 겁니다. 보약을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보약을 먹되 '함께' 라는 것, 즉 "주님께서 보약을 먹게 하셨다"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참 쉽죠? 여기에 대해서 "보약을 먹는 것은 이기주의가 아닙니까?" 라고 너무 골치 아프게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보약을 먹는 것도 주님의 기억 속에 있다는 말이죠. 주님은 의인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는데,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 갈수록 우리가 모르는 죄가 계속해서 나온다는 것이죠.
지금은 아니더라도 앞으로 우리가 나이가 더 들어서 가치매 상태에 들어가면, "내가 죽거든 오동나무 관으로 해라" 라고, 그렇게 망발이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제가 잘 몰라서 묻는데, 오동나무로 만든 관이 좋은 관이 맞지요? 그러니 "내가 너희들을 다 키웠으니, 내가 죽으면 오동나무로 관을 만들어라" 라고 할 때는 어떻다는 겁니까?
그 사람은 한 살부터 90세까지의 기억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자기만이 알고 있는, 그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좋은 기억, 즉 대단하고 훌륭하고 뛰어나고 자랑스러운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 아닌데, 그만 잘난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 그래도 오동나무로 !!
그러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야야, 내가 너희들에게 유산을 제대로 물려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큰아들에게는 집 두 채밖에 줄 수 없고, 둘째 아들에게는 땅 10만평밖에 주지 못하고, 셋째 아들에게는 현금 20억밖에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계속해서 말하기를, "하지만 내가 너희들에게 진짜로 물려줄 유산은 무엇인고 하니까, 나는 평생 죄인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죄인을 위해서 주님이 스스로 희생물이 되셨다는 것, 대속물이 되셨다는 것, 그 하나 내가 유산으로 남긴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덧불일 것은, "그래도 생각해보니, 내가 죽어서 들어갈 관이 싸구려 베니어 합판으로 된 것은 좀 곤란하고, 그래도 오동나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니? 그렇지?"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러니 같은 오동나무 관을 이야기해도 복음과 더불어서 전하면 괜찮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내가 너희들을 다 키웠다. 나는 그 정도의 대우는 받을 자격이 있다" 라고 해서 오동나무 관을 요구하게 되면, 그것은 치매현상이라는 말이죠. 물론 "나는 죄인이지만, 그래도 오동나무로 좀 해라" 라고 하는 것도 말이 앞뒤가 맞지 않은 것 같은데, 그래도 그냥 거죽에 둘둘 말아서 버리는 것은 좀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ㅋㅋ).
그러면 자식은 다음과 같이 나오면 되는데, "아버님, 아무런 걱정을 하지 마세요. 주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라고 말이죠. 주님의 뜻, 바로 '함께' 라는 것인데, 즉 "아버지를 이렇게 모시면 남들이 얼마나 착하다고 하겠노?" 라고 하는 자기 기억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남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여분의 것, 그게 곧 '+알파' 인데 말이죠. "성령께서 무엇이라고 지시를 하든지 간에, 그대로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서로 주고 받을 때는, 헤어지든지 만나든지 간에, 그것은 교회가 되는데, 그러면 아버지와 자식이 교회가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히브리서 12장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22절에서 24절을 보겠습니다.
(히 12: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히 12: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히 12: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 언약의 피 !!
여기 24절에 '피' 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그것이 곧 언약이고 약속이라는 말이죠. 어느 누구의 피도 필요가 없는데, 이 언약의 피는 하나님이 따로 정하신 분인데, 그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 세상이 주님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그래서 주님께서 이 세상을 친히 만드셨다는 것이죠. 자기 피를 증거하기 위해서, 자기 피를 찬양하기 위해서, 코끼리부터 악어까지 다 만드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종교가 아닌데, 그렇지요? 교리가 아니고 '현실B' 라는 말이죠. '현실A'에 속한 사람들이 모르는 '현실B' 라는 겁니다. 이러한 '현실B'가 우리에게 덮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만 잘먹고 자기 자존심만을 생각하는 자의 입술에서 이상한 여분의 것이 나오는데, 무슨 소리가 나옵니까?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언약의 피를 앞장세워서 찾아오셨습니다" 라고, 정말 희한한 고백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두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성령을 받았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찾아오심으로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9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죠.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주의 이름' !!
여기 교재 78페이지를 보면, 그 제목이 '에스겔에게 나타난 주의 이름' 이라고 되어있는데, 이 '주의 이름' 이라는 것이 하면 할수록 정말로 어렵다는 겁니다. 이 주의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인데, 그게 바로 주의 이름이라는 말이죠.
그 뛰어난 이름이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기름부음' 인데, 그것을 메시야라고 한다는 겁니다. 특정 사람에게 기름을 부었는데, 이스라엘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었다는 말이죠. 즉 "너희들과 같이 있을 부류가 아니다" 라는 것인데, 뛰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은 죄인에 속하는데, 그런데 주의 이름은 그런 죄인들 중에서 자기 백성을 건지기 위해서 희생을 하실 분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 희생이 성립하려고 하면, 우리의 이름이 그 희생에 끼어들 수 있습니까? 끼어들어지 말아야 하는데, 그래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는 것이 성립하게 된다는 겁니다.
* 주의 일에 끼어들지 마세요 !!
이게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인데, 주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는 것이죠. 주님께서 알아서 다 알아서 챙겨주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주님 자신의 신체가 있기 때문에 말이죠. 주님은 우리의 자아에 끼어들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조작된 망상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신체가 있는데, 이 신체는 누구의 것입니까? 주님의 것인데, 그러니 주님이 자기 것을 달라고 하니, 우리가 막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이 신체에 필요한 죄를, 여기에서 주의 이름이 신체가 된다는 겁니다. 신체가 있다는 것은 이름이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 뛰어난 주의 이름을 찬양해야 하는데, 그런데 이것이 되지 않는 이유는, 이름과 이름끼리 서로 단합을 한다는 겁니다. 그게 교회에서의 단합대회인데, "성령으로 하나가 됩시다" 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것은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으로서, '우리끼리' 라고, 그렇게 편을 먹는다는 겁니다.
* 하늘나라에 있는 분들의 총집합 !!
하지만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은 그게 아니고, 방금 본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모임' 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총회' 라는 말이죠. 즉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모임보다는 총회가 더 적합한데, 여기에는 인간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천군 천사들도 함께 있다는 말이죠. 즉 "하늘나라에 있는 분들의 총집합",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의 주변에 포진이 되어있는데, 왜냐하면 희생하신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기 때문에 말이죠. 천사들과 장자들이 둘러써서 주의 이름만을 쳐다본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보좌의 모형이 나오는데, 천사들과 12장로들, 그렇게 모두가 쳐다보고 있다는 말이죠.
(계 7: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성전에 지성소라는 중심이 있듯이, 그 핵심부분이 있다는 겁니다. 이 지성소가 확장이 되어서 천국이 되는데, 그렇게 주의 이름을 중심으로 해서 모인다는 말이죠. 그렇게 지상에서 주의 이름으로 모이면 되는데, 그런데 인간들끼리 모여서 단합대회를 한다는 겁니다. 물론 그 배후에는 마귀가 있어서 그러한데 말이죠.
* 그 중에 그대를 만나 ♬
여기서 제가 노래가사를 하나 소개시켜드리겠는데, 이 가사가 얼마나 세상적인지를, 우리에게 평소에 얼마나 익숙하게 들렸는지를 살펴보라는 겁니다. 그게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 중에 그대를 만나, 꿈을 꾸듯 서롤 알아보고 주는 것만으로 벅찼던 내가 또 사랑을 받고 그 모든 건 기적이었음을" 라는 것인데, 이게 이선희의 '그 중에 그대를 만나' 라는 곡인데 말이죠.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우리 둘이 사랑하는 것이 놀라운 기적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굉장히 은혜롭고 감격스러운 내용처럼 들리는데,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것은 누구의 이름을 높이는 겁니까? 자기가 원했던 것을 이루었다는 것에 대해서 고마워하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 부정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 역쉬 내 이름 !!
다시 말해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역시 나는 챙겨줄 만해서 주님께서 챙겨주신다" 라는 것인데, 즉 "내가 교회에서 봉사를 워낙 많이 하니까, 역시 하나님께서 나를 챙겨주신다" 라고 하는, 그런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주의 이름이 빛나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을 보면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의 이름이 인간의 자기 이름에 의해서 가려지고 만다는 것이죠. 그렇지요? 그러면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그런 인간을 그냥 가만 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이 교재 38페이지에 나오는데, 여기에 보면 에스겔서 5장 4절의 말씀이 있고, 그리고 요엘서 1장 19절과 20절이 있다는 말이죠.
(겔 5:4) 또 그 가운데에서 얼마를 불에 던져 사르라 그 속에서 불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로 나오리라
(욜 1:19)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불이 목장의 풀을 살랐고 불꽃이 들의 모든 나무를 살랐음이니이다
(욜 1:20)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음이니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하기에 앞서서, 교재의 그 중간이 있는 에스겔서 36장 22절에서 32절 말씀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겔 36: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
(겔 36:3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로 말미암아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지어다
여기 22절에 보면,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라고 하는데, 즉 '나의 거룩한 이름', 곧 '주의 이름' 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주의 이름은 심판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는 말이죠.
그러니 나쁜 짓을 해서 심판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위반했다는 이유 때문에 심판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의 이름은 오직 약속만을 생각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어제 낮 시간의 설교내용이었는데 말이죠. 거룩은 주님의 계약이 성취될 때 나오는데, 그 당사자는 주님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계약을 성취해서 의와 거룩을 이루신다는 말이죠.
*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
그러니 주님이 선물로 주신 것이 거룩이라는 겁니다. 우리 자신의 오기로 만든 자기 거룩이 아니고, 우리는 다만 감사할 뿐이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선물로 주어졌으니 말이죠.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거룩함을 입었다는 겁니다. 그것을 히브리서 10장에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에게서는 감사 외에는 달리 나올 것이 없다는 것이죠.
(히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그런데 교회에서는 무엇을 주장합니까? 소위 '성화(聖化)' 라고 하는 것, 즉 "갈수록 인간이 더욱 더 거룩해진다" 라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기 발전을 내다보게 되어있는데, 그러니 이것은 자기 기억의 덩어리인 자아라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이것을 죄라고 보고, 주님 자신의 언약적 기억으로 이것을 바꿔치기를 하신다는 겁니다.
* 성화의 삶 !!
그런데 그게 아니고 성화를 주장하게 되면, 즉 자기 발전을 이루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자기 부정이 아니고, 자기가 더욱 긍정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점점 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집착을 하게 되는데, 즉 자기를 지키려고 하는, 그런 악바리 근성밖에 남지 않는다는 겁니다.
소위 "하면 된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기도를 하더라도 어떻게 해야한다는 겁니까? 그냥 서서 하든지 하면 안 되고 반드시 꿇어앉아서 해야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 좋아하는 먹는 것도 참고 굶어가면서 기도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가 자기 자신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 열심히 열심히 !!
전에 설교를 하면서 그런 예를 든 적이 있는데, "다음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자기를 낮춘 것입니까?" 라고 말이죠. "1번, 문둥병자의 손을 만진다. 2번, 문둥병자의 발을 씻긴 물을 마신다. 3번, 자기가 문둥병이 걸린다. 4번,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 라는 것인데, 이 중에서 몇 번입니까?
1번, 2번, 3번은 천주교의 신부들과 수녀들이 하는 것인데,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웃사랑의 극치를 보여준다는 말이죠. "나 하나 헌신해서 당신을 살릴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그것은 자기 부정이 아니고 자기 긍정이라는 겁니다.
자기 부정을 통한 자기 긍정, 중들이 이런 짓거리를 많이 하는데, 땡땡이중들이 아닌 학승들, 즉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하는 중들이 그렇게 한다는 것이죠. 자기를 낮추고 낮추는데, 무소유가 어떻고 하면서 말이죠. 그게 법정스님인데, 제법 잘 생겨서 인기가 더욱 좋다는 겁니다. 하버드 대학출신의 미국인 중을 보면 참 잘생겼는데, 그러니 일단 잘 생기고 봐야한다는 말이죠(ㅋㅋ).
이것이 곧 인간들이 내세울 수 있는, 즉 바리새파, 사두개파, 열심당원, 그리고 쿰란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데,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인간은 악마의 하수인으로, 그렇게 낯짝을 쳐들고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성화론이라는 겁니다.
* 약속은 오직 주님만이 !!
오직 주님께서 약속을 다 지켰다는 것인데, 그러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의 자아라고 하는 것, 그런 기억의 덩어리가 다 엉터리라고 하는 것을, 마귀가 그렇게 이끌었다고 하는 것을 알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죽어도 자기 가치를 버릴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어떻게 나오는고 하니, "봉사를 얼마나 더 할까요? 헌금을 얼마나 더 할까요? 교회에 얼마나 더 출석을 할까요?" 라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일주일에 52시간을 교회에 있다는 겁니다. 물론 돈도 받지 않으면서 말이죠.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성령께서 시켜서 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자기 부정은 언제 되느냐는 겁니다.
물론 헌신을 하고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하는 것은 좋은데, '함께' 하면 된다는 말이죠. 주께서 죄인을 더욱 더 죄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 피아노 반주를 하게 하셨고, 꽃꽂이를 하게 하셨고, 또한 강단에서 설교를 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직 주의 이름만이 뛰어나야 하는데, 왜냐하면 주님만이 희생자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런 주님의 희생에 우리 인간의 그 어떤 선행도 끼어들면 안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직 주의 이름만 높이게 하옵소서. 우리가 마귀가 시키는 대로 자아라는 것을 따로 만들어서, 이 몸을 자기 몸이라고 평생을 우기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의 기억이 주님의 기억으로 바뀌어서, 주님이 평생동안 죄인으로 이끌어왔음을 감사하면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2,11,21 오후 8시에 마침.
녹매교회를 아몰랑 교회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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