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20 - 예수님의 앵콜곡
23,02,06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종교적 제안 !!
오늘은 교재 90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종교적 제안' 이라고 나오는데, 이런 제안을 누가 했는고 하니, 마귀가 했다는 겁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했을 때, 마귀는 민중들이 종교적인 영웅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서, 그것을 부추겼다는 말이죠.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그것이 3가지였는데, 첫 번째가 경제, 두 번째가 종교, 그리고 세 번째는 정치였다는 겁니다. 정치는 권력이라고 할 수 있고 말이죠. 예수님의 일대기를 보면 이러한 순서를 밟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아픈 자를 고치고 배가 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셨다는 말이죠. 그게 오병이어인데, 즉 경제적 문제였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이 맞닥뜨린 것은 바리새인들인데, 그 결정적인 것이 성전 문제라는 말이죠. 바리새인들이 마지막에 가서 도저히 예수님을 용서하지 못하게 된 사건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예수님이 성전에 가서 그들의 종교행위를 방해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강대상의 마이크를 빼앗는 것과 똑같다는 말이죠.
(마 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마 21: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백성들이 제물을 바치기 위해서 양을 멀리서 데리고 오지는 못하는데, 그러면 양을 어디서 구입해야 합니까? 현지조달을 해야 하는데, 그래서 돈을 주고 양을 서서 그 양을 희생제물로 바치면 유대교가 성립된다는 겁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데 있어서 그 전문가를 제사장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양을 바치면 제사장 업무의 정당성은 보장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제사장이 있다는 것은, 그 종교행위가 정당화된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들은 그것을 어디서 했는고 하니, 그게 예루살렘이라는 겁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서 했고, 유대인들은 그게 예루살렘이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의 공통적인 생각이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가 드린 제사를 여호와 하나님이 받으신다" 라고 것인데,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는 겁니다.
그러한 근거가 바로 모세의 율법, 즉 모세의 제사법인데, 즉 "모세의 제사법대로 우리가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흔쾌히 받으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메시야를 보내신다" 라고 그들은 여겼는데, 그것이 예수님 당시에 종교로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말이죠.
* 유대인들이나 마귀나 !!
그러면 이 유대인들 종교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메시야는 말씀대로 오시는 분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시편 91편에 보면 "메시야가 오실 때는, 메시야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더라도 그의 발을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즉시 천사부대를 동원시킨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유대인들은 어떻게 됩니까? 진짜 메시야를 만났다고 하는 종교적인 해방감을 맛보게 된다는 것이죠.
(시 91:11)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시 91:12)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그러면 마귀가 예수님을 데리고 성전 꼭대기, 그렇게 높은 곳으로 올라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시편 91편 12절에서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라고 했기 때문에, 예수가 진짜 메시야라고 한다면, 메시야는 말씀대로 오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래서 시편 92편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면 메시야가 맞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 하늘에서 오신 분,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렇다면 그분이 맞는지 아닌지, 그게 무엇으로 측정이 가능하다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미리 주신 그 말씀을 가지고 메시야가 맞는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다고, 그 당시유대인들은 그렇게 보았다는 말이죠.
만약에 지금 우리가 유대회당에서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유대교 신자라고 한다면,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기독교 신자라고 하는데, 이것을 잠시 바꾸어보자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가 유대교 신자라고 하면 메시야를 기다리는데, 그런데 자칭 메시야로 하는 자들이 한 두 명이 아니기 때문에, 측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유대교 회당에 있는 랍비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대로 오면 메시야가 맞고, 그렇지 않으면 메시야가 아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메시야를 측정하는 그들의 방법인데, 그런데 바로 그 이야기를 누가 합니까?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종교적인 실체가 과연 마귀를 이길 수 있을까요? 전혀 없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만든 종교가 마귀를 결코 이길 수가 없다는 말이죠. 과연 기독교가 마귀를 이길 수 없는데, 교회가 마귀를 이길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종교가 왜 있습니까?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치가 바로 이 종교이라는 말이죠.
* 인간은 하나님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아서 !!
여기 교재에 보면 "인간은 하나님을 관찰과 실험의 대상으로 삼는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메시야가 맞느냐? 아니냐? 그것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겠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가 자기를 스스로 메시야라고 했으니,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보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알 수가 있다고,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죠.
중력에 의해서 낙하속도가 발생하고, 갈릴레오가 그것을 측정해보니 가속도가 붙어서 1초에 9.8미터가 떨어지더라는 겁니다. 그러면 돌은 땅에 있는데, 그러면 재빨리 천사편대가 와서 예수님의 발을 스톱시키면, 그러면 마귀가 "당신을 메시야로 인정해주겠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마귀의 안목과 일반 대중들의 안목이 어떻다는 겁니까? 그야말로 서로가 같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마귀는 이 세상의 신인데, 즉 인간들의 마음 속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자손이라는 말이죠.
우리가 이번 수련회에서 요한복음을 했지만, 성경을 한 번 살펴보라는 겁니다. 지금 과학이 발달해서 우주선을 화성에 보내서 탐사도 하고 하는데, 그러면 그런 인간의 능력으로 과연 메시야를 알아볼 수 있느냐는 겁니다. 메시야를 관찰한다고 해서 알아볼 수가 있느냐는 것이죠.
* 왜 성령이 오셔야만 했는가?
전혀 알 수가 없는데, 그러니 성령이 오셔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성령이 오셔야 비로소 알게 되는데, 바로 그것 때문에 악령이 박혀있는 그 가운데 성령을 보내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정작 인간은 자기 속에 악령이 박혀있음을 모른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가 밥을 하고 빨래를 하는 그 모든 것들이 악령의 지시에 의해서 한다는 것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어떻게 나옵니까? "나에게는 악령도 없고 성령도 없다. 그러니 나의 지식을 동원해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면 되지 않는가?"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인간 속에는 이미 악령이 들어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성령과 악령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자기가 악령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를 안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성령이 오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자는 어떻게 나온다는 겁니까? "내가 이 따위의 주장을 했구나. 메시야를 눈으로 보고 믿겠다고 하는 것, 그것이 나의 주장이 아니고 마귀의 주장이었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결국에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 종교적으로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그들이 처음에는 예수님을 그냥 놔두는데, "저렇게 하다가 망하겠지"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그만 예수님께서 성전에 오셔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돈을 교환하는 것을 엎어버린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은 이런 식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시면서 말이죠.
(요 2: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요 2: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요 2: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요 2: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그렇게 종교를 건드리니 종교인들이 예수님을 체포는 했지만, 그러나 죽이지는 못한다는 겁니다. 죽이려고 하면 경제단계, 그리고 종교단계에서 어디로 넘어가야 하는고 하니, 정치단계, 즉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권력의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본디로 빌라도에게 간다는 겁니다. 사형은 종교단계가 아니고 권력단계라는 것이죠.
이것을 피라미드로 그려보면, 최고의 정점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최상위에는 권력이 있고, 그 밑에는 종교가 있고, 그 밑에는 일반 백성들이 살아가는 일상생활, 즉 경제가 있다는 겁니다. 먹고 살려고 하면 농사를 짓고 고기도 잡고 해야한다는 말이죠.
* 모든 것은 '공포' 때문이야 !!
여기서 예수님은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데, 그러면 예수님은 점점 더 죽음에 가까워지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들이 이 3가지를 통과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공포' 라는 겁니다. 인간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곧 공포인데, 그래서 종교를 만들었다는 말이죠.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무서워서 그렇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하고 찬양을 하는데, 그런데 그 내부에는 두려움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자기를 공격하는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무섭다는 겁니다. 만약에 우락부락한 사람이 이웃에 이사를 왔다고 하면, 그러면 그것은 다시 이사를 가주던지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웃에 그런 사람이 오던 말던 간에, 그것과 상관없는 두려움이 있다는 겁니다.
* 며느리는 무서워 !!
예를 들어서, 자식을 낳아서 키워서 결혼시키려고 하면 그것이 부모에게는 모두가 공포인데, 사돈을 만나는 상견례부터 시작해서 말이죠. "여자가 하나 잘못 들어오면 집안이 망한다" 라는 말이 있는데, 모든 시어머니들에게는 그런 공포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헤어졌으면 좋겠는데, 병원에 가서 사진 한 장을 찍어와서는 협박을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할 수 없는 허락을 하기는 해주었는데, 그러면 조용히 잘 살면 좋겠는데,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겁니다. 얼마든지 자기 아들을 굶기면서 구박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 특정한 나쁜 여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공포로 말려온다는 겁니다. 자기를 처참하게 망가트릴 가능성이 넘쳐나는 바다와 같은 이 세상, 그 자체가 곧 우리에게는 공포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 대안이 무엇인고 하니,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수밖에 없는데, 종교를 원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돈으로 해결이 되기도 하지만, 그게 안 되면 종교로 해야한다는 말이죠. 며느리가 대대로 불치병의 유전인자를 남길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자 쪽에서는 여자 집안 쪽에 암으로 죽은 사람은 없는지, 그런 것을 살펴보고 한다는 것이죠. 안젤리나 졸리처럼 그런 것을 예상해서 미리 수술을 받는 경우도 있고 말이죠.
* 나만의 비밀 아지트 !!
요즘은 특히 유투브 때문에 그야말로 지식이 폭발적인 증가를 하고 있는데, 그렇게 여기 저기서 들은 것들이 있어서 공포가 마구 넘쳐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땅에서 숨을 쉬기는 하지만, 그야말로 공포 속에서 숨을 쉰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서 인간들이 취한 방식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만의 아지트를 만든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숨길 수 있는 곳을 비밀공간을 말이죠.
그런데 그런 비밀공간을 만들려고 하면, 그것이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비용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돈을 번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이 경제적인 활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중간의 것은 다 생략하고 마지막 단계만 보면, "인간은 공포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돈을 번다" 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돈을 계속해서 버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덜 무섭다는 말이죠. 그래서 통장에 돈이 없으면 공포가 마구 엄습하게 되는데,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없습니까? 사기를 당하면 무서움이 찾아온다는 겁니다. 차라지 죽으면 되는데, 그런데 죽지도 않고 공포가 몰려오는데, 그러면 자기는 어떻게 살아야할지, 그 대책이 없다는 것이죠.
* 공포, 공포, 공포 !!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정미애' 라는 여자가 가수가 있다는 겁니다. 혀에 암이 걸려서 혀를 3분의 1이나 잘라내었다는 말이죠. 아이도 무려 4명이나 되는데, 그래서 병원에 있으면서 제일 걱정이 되었던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죽는 것이 아니고 아이들의 장래라는 겁니다. 결국은 이것이 공포인데, 물론 아이가 없어도 공포이지만 말이죠.
그러니 우리 인간은 도저히 공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방금 돈이 많으면 덜 공포스럽다고 했는데, 하지만 돈이 많게 되면, 물론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ㅋㅋ), 돈 때문에 공포가 떨어져나가는 일은 없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 공포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인데,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겁니다.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이 히브리서 2장 15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주님은 바로 이러한 공포에서 해방시켜주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죠. 우리 인간을 평생동안 붙잡고 있는 그 무시무한 공포에서 말이죠. 즉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이런 공포에서 자유를 얻기 위해서 우리 인간이 하는 짓은 무엇인고 하니, 그게 경제적 단계에서는 돈이 있으면 된다는 말이죠. 특히 미국에서는 돈과 함께 총이 있어야 하는데, 미국의 중산층들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다른 나라에도 이것이 확산되고 있는데, 물론 우리나라는 총을 소지하지 못하게 되어있지만 말이죠.
* 공포에서 벗어나는 방법 !!
그러면 이 공포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그 문제를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제가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드리겠는데 말이죠. 성경에 의하면 사실이 거짓을 공격하는데, 그러면서 그 공포 속에서 자기가 그 공포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사실로부터 자기가 공격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공포를 하나님은 어떻게 규정하시는고 하니, 거짓된 세상이라고 보신다는 말이죠. 성경은 이 거짓된 세상을 '이 세대' 라고 하는데, 즉 악하고 음란한 이 세대라는 겁니다. 사실, 진실, 그러한 진리가 거짓된 이 세상에 포함되어있는 우리 자신을 공격하게 될 때,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반겨야 합니까? 움츠려야 합니까? 반겨야 한다는 말이죠.
(눅 11:29)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눅 11: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 기생 라합 !!
그것이 바로 여리고 성에 살고 있었던 기생 라합인데, 이 기생 라합은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기존의 나라에 아주 이상한 나라인 이스라엘이 출현하게 되는데, 그러면 이 이상한 나라의 특징이 무엇이라는 겁니까? 보통 나라에는 인간들만 살고 있는데, 그런데 이 나라는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여호와 하나님이란 분이 움직여나간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정작 자기들은 움직이기 싫은데, 그런데 함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 엔진역할을 해서 그들을 가만히 두지 않고 계속해서 마구 밀어 부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다림질을 하면 어떻습니까? 다림질을 하기 전에는 옷이 구겨져 있는데, 그런데 다림질을 하면 편평하게 펴진다는 겁니다. 남자들은 잘 모르지 싶은데 말이죠(ㅋㅋ).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이 거짓으로 볼록볼록해진 이 세상을 진리로서 밀어 부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진리가 무엇인고 하니, 그게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란 말이죠. 그 율법이 있는 곳은 선하고 거룩한데, 즉 편평한데, 반면에 율법이 없는 곳은 거짓되고 굴곡진, 즉 울퉁불퉁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종교적인 신학의 논리가 아니고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 이게 바로 팩트, 즉 사실이라는 말이죠.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거룩이 진짜로 있고, 우리는 그 앞에서 속되고 더럽고 거짓되다는 겁니다
* 주님에 의한 다림질화 !!
그러면 깨끗하고 거룩한 진리가 와서 다림질을 하게 되면, 우리가 여기에서 도망을 쳐야합니까? 과연 어떻게 해야합니까? 사실은 어떻게 도망을 칠 수도 없는데, 그래서 우리는 받아들이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받아들이면 공포가 그만 날아가게 된다는 말이죠.
이렇게 "내가 하는 모든 일은 거짓되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참되다" 라고 한다면,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그것은 "주님에 의해서 다림질화가 되었다" 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다림질을 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그리고 난 다음에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이 세상은 현상적으로 3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거짓된 것의 표현인데, 그러면 인간은 그 거짓된 것은 숨기기 마련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인간은 자기 존엄성 때문에 '거짓되다' 라는 것을 싫어하는데, 자신의 가치, 즉 자기 의를 챙기려고 한다는 말이죠.
* 예술, 학문, 정치 !!
이런 거짓으로 인해서 표현된 것이 3가지인데, 그게 "예술, 학문, 정치" 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학문 속에 종교를 집어넣어도 되는데, 오늘날은 그 학문의 대표적인 것이 과학이란 것이죠. 인문학도 그게 합리적 사고방식을 추구하기 때문에 과학이라고 보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예술과 학문과 정치, 그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공포인데, 그러니 이 예술과 학문과 정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포, 그 두려움의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이야기는 그 안에 공포가 들어있다는 말이죠.
* 개 대통령 !!
요즘 대표적으로 뜨는 것 중에서 두 가지를 꼽게 되면, 하나는 오은영 박사의 상담인데, 그 안에는 공포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강형욱의 개 대통령인데, 왜 개를 반려견으로서 키웁니까? 자기는 외로우면 안 된다는 것인데, 역시 그 안에는 공포가 들어있다는 말이죠. 자기와 말할 대상이 없으면 겁이 난다는 것인데, 그러면 사는 것이 너무 삭막하다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보여주는 것은 산다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공포스럽고 섬뜩하다는 것인데, 즉 무의미하다는 말이죠. 그러면 개를 키우면 의미가 생기게 되는데, 그런데 그 개가 사납다든지 아프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개 대통령이 등장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윤석열 대통령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사람들이 왜 대통령을 키우려고 합니까? 말을 하고 하니 좀 이상한데(ㅋㅋ), 아무튼 무섭고 두렵다는 말이죠. 이것들이 모두 다 공포의 표현인데, 인간은 이러한 표현이 만들어낸 공간 안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주님으로부터 다림질이 되지 않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들은 다 거짓이라는 겁니다.
* 광야에서 마귀와 만난 예수님, 왜?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누구를 만났습니까? 지금 우리가 교재 90페이지를 하고 있는데 말이죠.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를 만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평소에 마귀를 만날 마음이 없는데, 그런데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마귀와 만나게 하셨다는 것이죠.
하지만 인간들은 마귀에게 속해있기 때문에 마귀를 만나고 싶어하지도 아니하고, 또한 그것은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다만 우리 인간은 공포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게 되는데, 그것이 하나의 표현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어디 코로나 치료제가 없을까?" 라고 자기는 무심코 하는 말인데, 그것을 두 글자로 줄이면 '공포' 라는 겁니다. "물가가 너무 높다" 라는 것을 두 글자로 하면, 역시 '공포' 라는 말이죠. "내 자식은 공부를 잘해야 할텐데" 라고 하는 것, 그리고 "내 딸이 35살인데 아직 시집을 가지 않았구나" 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것이 부모의 공포의 표현이 된다는 말이죠.
*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마세요 !!
그런데 개를 키워도 개가 말을 하지 않으니 교회에 가서 하나님에게 묻는데, 그러니 종교 자체가 곧 공포의 표현이라는 겁니다. 무서워 떨면서 교회에 간다는 것이죠. 어제 낮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마세요" 라고 말이죠. 왜냐하면 공포 속에서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받아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지킵니까? 물론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데, 다만 자기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모든 말씀을 다 지키는 상황이 되어버린다는 말이죠. 그래서 빌립보서 4장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자기가 부하게 되나 가난하게 되나, 그 어떠한 상황에 처해도 어떻다는 겁니까?
여기 13절에 보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라고 하면서, 그 다음에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할 수 있다" 라는 순간이 언제인고 하니, 자기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흔쾌히 받아들이는 순간이라는 말이죠.
(빌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 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나는 무의미하다 !!
그렇다면 우리가 왜 무의미합니까? 사실에 입각하면, 그 사실은 율법이란 겁니다. 그 율법은 거룩하고 완전하고 순수한데, 그 앞에서 '나' 라는 존재는 불결하고 더럽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나' 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무의미해진다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이 곧 십자가인데, 그러니 그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의미로부터 해방을 얻는다는 말이죠. 굳이 개를 키우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서 해방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짓거리도 다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게 착한 짓이든 나쁜 짓이든 간에 다 할 수가 있는데, 왜냐하면 둘 다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자기가 아이를 잘 키우나 못 키우나 의미가 없는데, "나는 불행하게 살았다" 라는 것은 공포에서 나왔다는 말이죠. 그 자체는 의미가 없고, 다만 "주님이 나로 하여금 이런 인생을 살게 하셨다" 라는 것만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 인생은 하나님의 주신 선물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우리 인생은 선물이고 여분의 것 !!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것이 그야말로 하나의 선물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을 하면, 이 선물에는 '여분의 것'이 들어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플러스 알파(+α)' 라는 것인데, 즉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주님께서 덤으로 주셨다는 겁니다.
재래시장의 경우에는 끝나는 시간에 가면 "오늘은 떨이다" 라고 하면서 더 얹어주는데, 물론 그것을 이용해서 장사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죠. 아무튼 그 파장시간에 가서 콩나물 3,000원어치를 사면, 파는 아줌마가 더 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선물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인데, 그러니 우리 인생은 선물이고 여분의 것이라는 말이죠.
* 내가 하는 일이 주의 일임을 알게 하옵소서 !!
어제 낮 시간에 기도를 하신 분이 너무나 감동적으로 하셨는데, "내가 하는 일이 주의 일임을 알게 하옵소서"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압축해서 표현하면, "나는 주님의 몸의 확장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좀 더 현대적으로 말하면, "나는 주님의 로봇 팔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 "내가 하는 일이 주님의 일입니다" 라는 것은 같이 붙어있다는 것인데, 놀랍게도 그런 기도를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다른 분이 또 "그러면 내 기도는 기도도 아니란 말인가?" 라고 할지 모르겠는데(ㅋㅋ), 그런 뜻이 아니고 성도의 기도는 모두 다 선물이라는 말이죠. 인생 자체가 덩치가 큰 누군가에게 붙어있다고 하면, 자기는 의미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죠.
* 감당할 수 없는 일곱 귀신 !!
그런데 그게 아니고 그 덩치와 떨어져 있다고 하면, 그러면 단독적으로 무엇을 챙겨야 합니까? 의미를 챙겨야 하는데, 그러면 공포가 밀려든다는 겁니다. '나' 라는 의미를 지키려고 하니, 주위에 있는 일곱 공포가, 즉 일곱 귀신이 다 몰려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일곱 귀신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여행을 가도 귀신이 있을 것이고, 식구들이 가면 갈 때부터 시작해서 올 때까지 싸우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귀신이 같은 동네의 귀신이라는 겁니다. 서로 싸우는 관계라는 것을 평소에는 몰랐다가 바깥에 나가서, "아하, 우리 둘은 이런 식으로 차이가 나는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ㅋㅋ).
예를 들어서, 멀리 진해까지 놀러갔는데, 그런데 남자는 해물탕을 먹자고 하는데 여자는 해물찜을 먹자고 하면서, 그렇게 서로 싸운다는 겁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삐쳐있다는 것이죠. 진해에 가지 않았으면 그런 차이가 있는 줄 몰랐을 것인데 말이죠.
* 진해 공포, 진도 공포, 며느리 공포 !!
그러니 우리에게 닥쳐오는 여러 가지 사태는 무엇을 보여줍니까? 우리가 얼마나 '나의 의미'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는지, 그것을 발견하게 해준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의미집착은 어디서 비롯되는고 하니, 자기가 알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다가보니, 자기 아지트라도 건져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항상 긴장상태로 있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 아들이 며느리 감을 데리고 왔는데, 그런데 자기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이죠. 아들은 마음에 든다고 하는데, 그래서 소개를 시켜주려고 데리고 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보기에는 아들이 무엇이 홀렸는지 모르지만 영 아니라는 말이죠.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그것은 부모가 평소에 "우리 집안은 이런 집안이다" 라고 하면서, 자기 의미에 집착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아무튼 선물로 오면 여기에 감사가 주어지는데, 그런데 감사가 아닌 자기 의미로 하게 되면, 여기에는 집을 나갔던 일곱 공포가 다 달려든다는 말이죠. 지난번은 진해로 놀러갔는데, 이번에는 진도로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운전을 하면서 가는데, 이때는 "이번 진도에 가서 먹는 저녁은 맛있어야 할텐데" 라는 것이 공포로 다가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진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걱정이 앞서게 되는데, 그런데 자기 의미가 아닌 선물로 여기에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이 준비해주신 선물은 무엇일까?" 라고 하게 되면, 저녁을 먹기 이전부터 이미 고마움이 밀려온다는 겁니다. '나' 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만 주변이 밝아진다는 것이죠.
* 당신, 정말 고마워 !!
그래서 "여보, 그동안 나 같은 남자와 같이 산다고 고생을 참 많이도 했다. 당신, 정말 고마워" 라고, 그렇게 한마디의 말만 해주어도 집안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겁니다. 물론 반찬도 완전히 달라지고 말이죠(ㅋㅋ). 비싼 돈을 들여서 인테리어를 새로 한다고 해서 집안 분위기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내가 "여보, 사랑한다고 해보세요" 라고 하면, 남자는 "그래도 내가 경상도인데, 그런 소리는 없다" 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나옵니까? 자기가 아내를 보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동안 자기가 구축해온 의미체계가 다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죠. 그러면 무너지면 되는데, 왜 무너지지 않으려고 합니까? 자기 아지트가 없다고 하는 것이 공포로 다가오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 내 인생은 주님의 앵콜곡 !!
우리 집사님이 기도하신 것처럼 로봇 팔이 되면 되는데, 그러면 덤으로 붙어있는 것이 된다는 말이죠. 즉 플러스 알파인데, 그러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자기 인생이 아니고, 덤으로 주어진 인생이라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싶은데, "내 인생은 주님의 앵콜곡이다" 라고 말이죠. 어떻게 표현이 멋있지 않습니까? (ㅋㅋ)
가수가 준비된 노래를 다 했는데, 그러면 관객들이 아쉬워서 "앵콜, 앵콜, 앵콜", 그렇게 소리를 친다는 겁니다. 그러면 가수는 기분이 좋아서 다시 노래를 부른다는 말이죠. 피아니스트도 마찬가지인데, 그런 경우에는 '커튼콜' 이라고 하는데, 커튼 바깥으로 다시 나와서 연주를 해달라는 겁니다. 또 다시 노래를 불러주지 않아도, 피아노를 쳐주지 않아도 되는데, 그런데 앵콜로서 다시 해준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우리가 굳이 이렇게 태어나지 않아도 되는데, 그런데 주님의 앵콜곡으로 인해서 주어진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라는 겁니까? 우리가 무엇을 한다기보다는, 주님께서 이 악마의 세상에 천국의 백성을 선물로 집어넣어서 그 선물을 다시 회수하는데, 그렇게 해서 자기 백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주님의 작업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악마를 이기는데, 물론 우리 인간은 이기지 못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의 몸은 이겼는데, 죽었다가 부활하셨다는 말이죠. 그 부활하신 능력이 성령의 능력인데, 그래서 경제를 뚫고, 종교를 뚫고, 정치권력까지 뚫어버린다는 겁니다. 주님이 왜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는 이 세상의 알 수 없는 무서움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런 경제와 종교와 정치는 이 무서움을 커버하기 위해서 애썼던 표현들에 불과했다는 말이죠.
여기 교재 90페이지에서 "인간들은 하나님을 실험과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게 왜 그런고 하니, 그것은 공포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들이 메시야를 실험과 관찰의 대상으로 삼아서, 그들이 내린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 "이것은 아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 탑 오브 탑, '유대교' !!
여기에서 무엇이 중요한고 하니, 인간이 만든 종교 중의 최고의 종교는 신약 때에 나타나는데, 그게 곧 '유대교' 라는 겁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마태복음 5장 22절에서 직접 언급하셨는데, 즉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다시 말해서, 인간들 중에서 천국에 가장 근접한 자들이 바리새인들이란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든 유대교가 그야말로 '탑 오브 탑' 이라는 말이죠. 이 유대교를 이끌었던 자들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사두개인들이라는 것이죠. 또한 장로들도 있었고 말이죠.
이 유대교가 왜 종교 중의 종교로서 평가를 받는고 하니, 이들에게는 모세의 율법이 있었다는 말이죠.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이 모세의 율법은 선하고 거룩한데,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인간들이 이 모세의 율법을 지켜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자기가 신던 신발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너희들이 할 일은 이 신발을 빛나게 닦는 것이다. 내가 신을 정도로 제대로 닦아봐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런 조건으로 주셨는데, 그런데 그렇게 빛나게 닦을 인간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겁니다.
*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
그러면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이 성경에 어떻게 나오는지 살펴보겠는데, 마태복음 22장 34절에 보면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라고 한다는 것이죠. 여기에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등장하는데, 이제 여러분은 그들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어느 정도 감을 잡았지 싶은데 말이죠.
(마 22: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앞서서 예수님께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라고 하신 것은, "너희들이 천국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있는데, 그런데 너희들은 전부 다 실패했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실패를 했습니까? 그것은 거짓이기 때문인데, 거짓은 주님께서 받아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진짜로 천국은 있는데, 그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그러면 그 사실이 거짓을 공격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다림질인데,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의 사실, 즉 거룩이 자기를 짓밟고 다림질을 할 수 있도록 받아들이면 된다는 겁니다. 물론 성령이 와야 가능하지만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유대인들의 종교가 최고인 이유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제가 방금 그것을 신발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그 율법을 신고, 그 율법을 완성하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메시야가 그런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22장 44절에서 40절을 보겠습니다.
(마 22: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마 22: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마 22: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마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했는가?
한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큽니까?" 라고 했는데, 그러자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것이 37절에서 44절에 나오는데, 여기에 대해서 그들은 동의를 했습니까? 여러분의 답변이 궁금한데 말이죠. 예수님은 율법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그들이 동의를 했을까요? "1번) 동의를 했다. 2번) 하지 않았다" 라는 것인데, 여기서 몇 번입니까? 물론 둘 중에서 하나인데, 그것이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1절에서 3절을 보겠습니다.
(마 23: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마 23: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마 23: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 율법을 알아도, 공포 때문에 !!
예수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3절에 보면,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서 동의를 하기는 하는데, 하지만 지키지는 못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들이 왜 지키지 못할까요? 그것은 공포 때문인데, 즉 자기에게서 나오는 게 의미가 있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아까 빌립보서 4장을 하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에게 의미를 두지 않는 자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닐 경우에만 주님의 로봇 팔이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주님의 몸의 확장인데, 즉 주님에게 붙어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신체에서 돋아난 혹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혹은 너무 크고 뽀드락지라는 말이죠. 사실 그것도 너무 큰데, 춥든지 하면 생기는 일종의 닭살과 같다는 겁니다. 흔히 소름이 돋는다고 하는데, 우리가 그러하다는 것이죠.
그게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데, 그래서 눈이 손을 보고 쓸데없다고 하지 못하고, 머리가 발을 보고 쓸데없다고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전체에 붙어있는 하나의 일부이기 때문에, 부분과 부분끼리 서로 대조해서 싸우고 하지 말라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독자적인 자기 아지트와 같이 자기의 것은 의미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오로지 사실만이 의미가 있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는 무의미로서 붙어있다는 말이죠. 즉 "내가 이렇게 이렇게 살았다" 라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고전 12: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
(고전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그러니 율법의 완성은 누가 한다는 겁니까?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즉 사두개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이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만이 하시는데, 그것을 그들은 몰랐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알면서도,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맞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디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겁니까? 그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 천국 문을 가로막는 인간의 심보 !!
그런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고, 마태복음 23장 13절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도대체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이냐는 겁니다.
(마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그것은 기본이고, 그런데 그들이 그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고, 그들은 자기들만 천국에 들어간다" 라고 주장을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오늘 강의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에 도달했는데 말이죠.
다시 말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즉 우리 인간 속에 들어있는 악마로 인해서 나오는 표현, 그 마음가짐이 어떤 것이었냐는 겁니다. 그들은 첫 번째로 "나는 천국에 들어간다" 라고 하고, 두 번째로는 "그렇게 함으로서 천국에 들어갈 사람을 천국의 문 앞에서 가로막는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당신은 죽어야만 해 !!
얼마 전에 뉴스를 보니, 건물주가 카페의 입구를 그만 교묘하게 가로막아 놓았다는 겁니다. 카페 주인이 월세가 너무 비싸다고 항의를 하니까 말이죠. 이게 마태복음 23장 13절인데, 그러니 예수님이 카페에 들어가면 건물주가 그만 죽여버린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십자가 사건은 이 세상이 얼마나 거짓된 세상인지, 그것을 노출시키는 사건이라는 겁니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면서, 정작 천국에 가야될 자들을 어떻게 하는고 하니, 천국 문 앞에서 그들을 가로막고 있다는 말이죠.
천국 문의 존재는 율법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마태복음 22장에 의하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자기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자에게는 천국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런 자에게 천국 문은 열린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러한 율법의 내용을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몰랐습니까? 그들도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자기들은 행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들에게 그런 재주가 없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악마가 이미 깔아놓은 공포 때문이라는 겁니다.
* 과연 내가 말씀을 제대로 지켰을까?
제가 어제 낮 설교시간에 "말씀을 지키지 마세요" 라고 한 것은, 말씀을 지키게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공포가 수반하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즉 "내가 말씀을 제대로 지켰을까? 지키지 못했으면 저주가 내려서 내 자식들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무슨 행동을 하나 하게 되면, 우리 인간은 알지 말아야 하는 선과 악을 알았기 때문에, 그래서 "이 율법을 지키면 나에게 어떤 이익이 올까? 혹은 손해가 올까?" 라고 하는 것을 계산하면서, 그것을 자기 인생에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그래서 더욱 더 미친 듯이 착한 일을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착한 일을 하면서도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내가 이번에 제대로 했을까? 아직도 미진한 것이 남아있지는 않을까?"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말씀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계속해서 자기에는 미흡한 것이 남아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계속해서 완벽하고 완전하게 하려고 하는데, 그런 것이 자꾸만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 구제, 그것이 궁금하다 !!
혹시 여러분 중에서 구제를 한 경험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교회에서 하는 것말고 개인적으로 말이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데, "혹시 내가 생색을 내지는 않았을까? 내가 하는 이것이 나의 뜻일까? 성령의 뜻일까? 그리고 그쪽에서 계속해서 도와달라고 하는데 내 형편이 어려워지면 어떻게 하지? 그러면 그때 그들이 나를 원망하지는 않을까?" 라고,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자기가 행동을 하나 할 때마다 온갖 생각이 다 드는데, 그것이 바로 선악체제라는 말이죠. "잘했는가? 못했는가?" 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결과가 자기에게 상으로 돌아오는지, 아니면 벌로 돌아오는지, 그런 것이 자기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는데, 그런데 착한 일에 의미를 두고, 또 나쁜 일에 의미를 둔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의미를 둔다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기 자신, 그 자체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말씀에 근접해서 지키고 싶어하는 사람이고자 한다는 말이죠.
*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마귀의 로봇 팔 !!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보고 "너희가 마귀의 자식이다" 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마귀가 만들어낸, 즉 마귀의 확장이고 마귀의 로봇 팔이라는 겁니다. 아버지 마귀가 인간 자식들을 그렇게 낳았다는 것이죠. "내가 했으니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세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천국은 그런 인간을 위한 동네가 아니라는 겁니다.
어제 낮 시간 설교초반에 "내가 나에게 필요한 존재인가? 주님에게 필요한 존재인가?" 라고 했는데, 인간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자기를 집어넣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도 전혀 모르고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는데, 하나님만 크게 보인다고 한다는 겁니다.
무슨 미국영공에 떠있는 중국풍선도 아니고, 그렇게 인간은 자기를 처리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를 빼내지를 못하니 우리는 기껏 노력해도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수준을 넘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 범위 안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말이죠.
* 무서워, 무서워 !!
그러면 우리가 왜 몸부림을 칩니까? 그것은 알 수 없는 공포 때문에 그러한데, 그냥 사는 것이 무섭다는 겁니다. 왜 무서우냐고 물어도, 어떻게 대답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아무리 기쁜 일이 있어도 무섭고, 풍요하게 살아도 무섭다는 겁니다. 물론 그때는 좋아하겠지만, 돌아서면 무섭다는 말이죠.
그렇게 무섭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해야하는데, 하나님을 믿든지 부처님을 믿든지 해야한다는 겁니다. 열심히 돈을 벌든지 말이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우리의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라는 말이죠.
주님의 뜻은 이것인데, 즉 "나를 죽이면 천국 문이 비로소 보인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전혀 본의 아니게 거기에 충실했던 자가 바로 사울이고, 또한 바울이라는 말이죠. 그 사울이 예수님을 언제 만났습니까?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만났다는 겁니다.
* 예수를 믿는 자는 예수님의 로봇 팔 !!
그런데 예수를 믿는 자는 예수님의 로봇 팔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를 믿는 자를 건드리면, 그것은 곧 몸체를 건드리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사울이 예수를 믿는 자를 체포할 때, 그가 예수님을 체포한 것이 아닌데, 그 당시에 예수님은 없었다는 겁니다.
사울은 예수를 믿는 자를 건드렸는데, 그런데 그 당사자, 즉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뭐라고 합니까? "그들을 건드린 것이 곧 나를 건드린 것이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냥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고, 자기 똘마니들과 함께 더불어 나타나신다는 겁니다.
그게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데, 즉 "네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은 자기만 달랑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눈에 보이는 성도를 깔아놓고는, 예수님 자신은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부활하셔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 성도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어 !!
그러니 성도가 얼마나 귀한지 모르는데, 자기를 파괴하는 조건 아래에서 말이죠. 자기 의미를 자기가 깨는 이상, 주님의 귀한 존재가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아무리 착한 일을 하고 교회에 다니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바로 이것을 안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예배를 드려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헌금을 해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의미가 없는데, 다만 주님이 하라고 해서 했다는 겁니다. 자기는 의미가 없는데, 그래서 주님을 가리우지 않으니 귀한 존재라는 말이죠. 그런데 자기가 하면 그것은 주님을 가린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제 날 설교시간에 주님이 원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했는데, 그 리스트를 적어보면, "1) 교회, 2) 가정, 3) 국가, 4) 기독교, 5) 나",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5번이 제일 중요한데, 즉 "주님은 나를 원하지 않는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
그러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에베소서 1장 10절의 말씀인데, 즉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하는, 바로 그것이라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의 착함, 정의로움, 그런 것을 일체 받지 않는다는 말이죠. 예수 그리스도를 받지 우리 자신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엡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의미가 없어도 괜찮은데, 왜냐하면 '나' 자체가 선물이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우리는 하나님이 덤으로 주신 선물이라는 겁니다. 자기 존재를 가볍게 하면 되는데, 괜히 무게를 잡다가는 온 동네의 마귀들이 다 달려든다는 말이죠. "네가 이 정도의 가치로 만족해? 더 가치가 있어야지?" 라고 하면서 자꾸만 부추긴다는 겁니다.
"참 착하네. 앞으로 더 착해야지. 헌금을 많이 하네. 앞으로 더 많이해라" 라고 하는데, "이번에 전도를 7명을 했어? 그런데 그것으로 전혀 만족스럽지 않지? 그러면 77명을 해라" 라고 하고, "이번에 네 자식놈이 잘 되었다면서? 앞으로 더 잘 되어야지" 라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점점 더 코너로 몰아넣는다는 말이죠.
* '선물'에 대해서 !!
그렇다면 '선물'에 대해서 잠시 해보겠는데, 그것이 욥기에 나온다는 겁니다. 욥기 1장 21절에 보면,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라고 하는데, 이것은 불교나 이슬람교 사람들도 다들 안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들도 "부처가 주시고 알라가 주신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다음이 무엇인고 하니, 주시고 나서 가져가시는 분도 역시 누구라는 겁니까? 취하신 분도 역시 여호와 하나님인데, 그래서 주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빼앗기지 않으면 주신 분이 따로 있다는 것을 모르는데, 빼앗길 때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헤어질 때 사랑을 안다" 라는 말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말이죠(ㅋㅋ).
(욥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왜냐하면 우리는 무엇을 받게 되면 거기에 의미를 두게 되는데, 그래서 의미에서 무의미로 가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나는 의미가 있는 존재구나" 라고 하면서 우기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만 우리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가져가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맞아, 나는 의미가 없지. 잠시 내가 폼을 잡았네. 까불었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나는 늘 건강해야하고, 평안해야하고, 행복해야한다" 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데, 그것은 전혀 주님의 뜻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23장을 계속해서 해보겠는데,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보고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는 종교가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종교 중의 종교인 '유대교' 라는 겁니다. 오늘날은 이게 교회이고 기독교가 되어버렸다는 것이죠.
(마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 주님은 뽑는 분 !!
그러면 주님의 방식은 무엇인고 하니, 그게 마태복음 15장에 나오는데, 방금 한 욥기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해보면, 그게 마태복음 15장 13절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마 15: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마 15: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마태복음 13장에도 가리지와 알곡 비유가 나오는데,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심는 분이 아니고 뽑는 분이라는 겁니다. 주님은 자기가 심지 않은 것은 그야말로 기가 막히게 모두 다 뽑아내신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우리를 선물로 이 땅에 심어놓았는데, 그런데 마귀에게 그만 속아서, 독자적으로 "이것은 내 것이다" 라고 우긴다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욥에게 주시고 나서 다 빼앗아 가신다는 겁니다. 그것을 욥이 나중에 알게 되는데, "아, 이 모든 것을 주님이 주셨구나" 라는 것을 말이죠. 그래서 욥기 마지막인 2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전보다 더 곱빼기로 심어버린다는 겁니다.
(욥 42:12)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욥 42: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 계속해서 이어지는 감사 !!
그러니 머리카락이 빠진다고 안타깝게 여기지 말고(ㅋㅋ), 하나님께서 홀라당 모두 뽑아버리고 다시 한 올 한 올 심어주실 때, 우리는 머리카락 하나 하나가 선물임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머리카락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눈동자도 그렇고, 코도 입도 모두 다 선물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공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공짜로 받은 것이기에 감사가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자체가 곧 감사 덩어리인데, 즉 예수님의 로봇 팔로서 확장된 감사라는 말이죠. 계속해서 이어지고 이어지는 감사인데,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그러하다는 것이죠.
* ^.^, ㅎㅎ !!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감사로 이어지면, 그러면 우리는 "주님, 왜 저를 죽이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서, 그것을 "^.^", 혹은 "ㅎㅎ" 라고 표현할 수가 있는데, 그러니 하루하루가 신이 난다는 겁니다. 선물이기 때문에 말이죠. 자기에게는 하루를 더 살아도 의미가 없고, 또한 오늘 죽어도 의미가 없는데, 그저 감사만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이 맡기신 모든 일들을 불평이 없이 다 해낼 수 있는데, 직장생활을 하던 자영업을 하던 아이를 키우던 살림을 살던, 그리고 고아원을 방문해서 봉사를 하던, 그 모든 것을 다 말이죠. 그것이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이유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격함으로서 자기가 무의하다는 것이 까발려지게 되는데,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마귀에게 시달리지 않고 속지 않게 된다는 말이죠. 즉 "나=거짓" 이라는 것인데, 바로 이것은 사실, 즉 진리가 자기를 덮쳐서 일어난 일인데, 이렇게 되면 자기가 산다는 것이 환상이고 망상이고 거짓이고 무의하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시편 127편을 보겠는데, 1절입니다.
(시 127:1) [솔로몬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아까 했던 것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인간은 메시야를 실험과 관찰로서 알 수 없다고 했는데, 만약에 메시야를 실험과 관찰의 대상으로 여겨서 알 수 있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주님이 주시는 그 공격 앞에서 무너져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여기 시편 127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이 세우시지 않는 집은 다 무너진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주님을 알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기 자신이 바로 그 심판의 대상임을 알았다는 겁니다.
* 그리스 역사가, '헤카타이오스' !!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헤카타이오스' 라는 그리스의 역사가가 있는데, 별로 유명하지는 않는데 말이죠. 제가 왜 이 사람을 언급하는고 하니, 이 사람이 역사책을 쓰기 전에 그 당시에 '헤라클레스' 라는 영웅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에 삼손이 있다면 그리스는 헤라클레스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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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카타이오스(Hekataios)(BC 550? ~ BC 475?) 밀레토스 출생. 이집트와 서남아시아 등을 여행하여 그 견문으로 《세계안내기(世界案內記)》를 저술하고, 세계지도를 제작하여 각지의 지지와 풍속을 기록하였다. 《계보(系譜)》에서는 구가(舊家)의 전설상의 조상인 신화 속의 영웅들에 대하여 비판적 검토를 시도하였다. 두 저작 모두 직접 전하지는 않으며, 뒤에 헤로도토스에게 비판되었으나 그것이 끼친 영향은 크다. BC 500년 이오니아 반란 때, 페르시아의 강대함을 알기 때문에 반란의 무모함을 지적하고 반대하였다는 이야기도 헤로도투스는 전한다. - 두산백과 두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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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헤라클레스 영웅의 전설에 의하면, "테나로 케이프에 가면 죽은 자들이 있는 곳, 즉 음부로 가는 길이 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런 것이 당시 그리스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말이죠. 테나로 케이프는 실제로 있는 곳인데, 그래서 아주 이성적인 헤카타이오스가 그곳을 탐방을 해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살펴보니 그런 비밀통로가 없더라는 말이죠.
* 과학의 시작 !!
이게 BC 5세기 경인데, 이 헤카타이오스가 주장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신들의 세계로 이 세상의 비밀을 풀어낼 수 없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곧 과학의 시작이라는 말이죠. 신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이 세상의 비밀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자기가 직접 그곳에 가서 음부로 가는 길이 있는지 살펴보았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이라면 이성을 가지고, 나 스스로 내가 살 동네를 내가 개척해야한다" 라는 것인데, 그게 가장 인간답다는 말이죠. 신화와 전설이 사람들을 지배하던 BC 5세기 경에 헤카타이오스가 그런 주장을 했다는 겁니다.
* 기우제 !!
조선시대에 가뭄이 들든지 뭔가 나라에 이상한 일이 발생하면, 누가 제사장 복장을 하고 제사를 드립니까? 왕이 했는데, 하지만 이것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기우제를 드릴 때, 그들은 해와 달과 별과 대기가 같이 붙어있는 줄 알았다는 겁니다. 바람 동네와 별의 동네가 옆 동네인 줄로 알았다는 말이죠.
하지만 전혀 가깝지가 않은데, 로켓을 타고 가도 한 참을 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해와 달과 별의 자리이동으로 인해서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조선이 1392년에 개국을 했으니까, 이게 지금부터 불과 600년 전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물론 요즘도 어떤 군수는 기우제를 드린다고 하면서 폼을 잡기도 하는데 말이죠.
하지만 날씨와 온도는 대류와 해류에 의해서 결정이 되는데, 그래서 같은 육지라도 높낮이가 있으면 이쪽에 눈에 와도 다른 쪽에는 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늘의 별자리가 날씨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는 것이죠. 사실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데 말이죠.
* 이것이 과학의 힘, 그러나 !!
그러면 이런 것을 알아낸 것이 무슨 힘이죠? 과학의 힘이라는 겁니다. 이 과학의 힘이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신화, 즉 미신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제가 묻겠는데, "과연 공포에서도 벗어났는가?" 라는 겁니다. 과학이 발달하면 알 수 없는 공포에서도 해방이 되느냐는 말이죠.
요즘 한국에서 젊은 사람들이 자꾸만 우울증에 걸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과학이 덜 발달해서 그런가요? 왜 자꾸만 개를 키우고 해서 우울증에서 벗어나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사람이 그립다. 이야기할 대상이 있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하느냐는 것이죠. 발달된 과학이 있고 돈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하지만 그런 것이 외로운 자기를 달래주지 못한다는 것인데, 아무리 골프를 치고 노래방에 가고 해도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도대체 그 원인이 무엇이냐는 말이죠. 오늘 강의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는데, 마지막으로 이것이 정리가 되어야 강의를 끝낼 수 있다는 겁니다.
* 십자가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거래 !!
그것은 바로 "산 자는 죽은 자와 관계가 되어야 비로소 공포로부터 벗어난다" 라는 것인데, 여기에서 산 자는 우리 인간이고, 죽은 자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엇이라는 겁니까? 산 자와 죽은 자의 거래, 그것이 십자가라는 겁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고 말았는데, 즉 공포에서 벗어났다는 말이죠. 공포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그 공포 속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러니 '나' 자신이 공포스럽다는 겁니다. 살아있으면 죽으면 되는데, 그런데 기어이 살아있으려고 하니 공포가 더욱 더 옥죄인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죄사함의 원리, 즉 죄사함은 산 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게 아니고, 죽은 자가 제시하는, 즉 예수님의 피와 살, 그것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죽은 자로부터 오는 살과 피, 그것은 너희가 살아있는 게 아니고, 진짜로 부활하신 예수님, 즉 보이지 않는 분의 보이는 손과 발이 바로 너희들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울이라는 자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체포하니 누가 나섭니까? 어른이 나서는데, "내 새끼들을 왜 건드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나서서 "그들을 핍박하는 것은 곧 나를 핍박하는 것이다" 라고, 사울을 직접 찾아오셔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말이죠.
* 죽은 자를 모시고 !!
그러니 산 자가 아닌 죽은 자를 어른으로 모시고, 죽은 자를 자기의 주로 모시고 살았던, 그것이 바로 초대교회였다는 겁니다. 참으로 독특한 현상이었다는 말이죠. 이제 강의를 마치면서 감히 바라옵기는, 이런 초대교회 못지 않은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힘이 아니라 이미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생명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자로서, 언제나 주님을 보여주는 증거물로서, 항상 감사하면서 신나게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3,2,17 오후 1시에 마침.
죽은 자와 함께, 고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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