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타인의 마을(2023겨울수련회 교재)

아빠와 함께 2022. 11. 13. 08:41

[타인의 마을] 교재

- 요한복음 속의 그리스도-


Ⅰ. 서론

1. 국가라는 공동체

1776년, 7월 4일, 13개의 식민지 대표들이 아메리카 땅 필라델피아에 모여서 공식적으로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발표한다.

“우리는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창조주에게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같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수여받았다. 이러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정부는 피지배자들의 의견을 수렴할 줄 아는 이들로 구성되어야 하며, 만약 정부가 이러한 권리를 침해하게 된다면, 이러한 정부를 추방하거나 변화시키거나, 혹은 시민의 권리를 존중하고 개인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인간의 권리다.”

이 독립선언문에 보면, 인간들의 본성이 나타난다. 이상적(理想的)인 국가를 만들어 그 안에서 이상적인 생활을 하고 싶어 한다. 하나님은 핑계다. 본심은 ‘나를 위한 나의 국가(세계)를 갖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 국가라는 것을 조직하려는 자들은 일단 가족으로부터 출발한다. 개인에게 가족은 자신이 배타적인 개체성을 포기하고 타인과 하나가 되면서도 그를 통해 더욱더 완전해진 자아를 되찾는 공동체적 삶의 생생한 체험장이다.

가족을 통해 개인은 타인에게 헌신함으로써 오히려 더 깊어지고 충만해진 자기 존재를 발견하는 경험을 한다. 가족 속에서 개인은 같은 가족 식구끼리의 두터운 연대 의식과 일체감을 지니면서 공동체가 뭔지를 안다.

그런데 국가를 이루는 시민사회는 이런 가족의 자연발생적 통일이 해체되면서 성립하는 부정적인 ‘차이의 단계’이다. 시민사회, 즉 가족의 일원과 타 가족의 일원끼리 만나서 새로운 조직 안으로 들어가는 동기는 보다 나의 것을 많이 가지려는 의도 때문이다. 더 큰 권력, 더 큰 권위, 더 큰 재물, 더 큰 발언권, 더 큰 독립성. 곧 내 소유의 확장이다.

소유권의 법적 근거와 정당성은 당연히 자기 노동의 투여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 노동이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과 사물의 관계에서 자신의 자유를 사물적 형태로 실현하려는 의지의 표상이다. 이 의지 표상과 타인의 의지 표상이 만나는 장(場)이 사회생활이다. 그래서 사회생활에서는 ‘상호주관성’ 혹은 ‘상호 승인성’이라는 원칙으로 공평성을 지켜내려고 한다.

‘상호 승인성’이란 “하나의 인격자가 되어라. 그리고 타인을 인격자로서 존중하여라”이다. 인간은 자기를 남들이 인정해주면 무슨 짓이라도,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 버티려고 하는 자들이다.

자신의 생명을 걸고서 타인에게 자신의 절대적 자유를 사수하려는 행위는 공연한 허세가 아니라 타인의 존재에 의해 침해받을 경우 자기 확신을 곧바로 회복하기 위한 불가피한 일이다. 이는 단순한 자기 보존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승인받으면서 자기를 보존하려는 일이다. 자기의식은 이처럼 상대적으로 자신을 알아주는 타자 안에서 자기 정체성이 통일되기 때문이다.

즉 내가 나를 인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내가 인정받게 되면 나는 개별성과 보편성까지 확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나가 되고 나는 우리의 일부’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이 발아한 바탕에는 소유성이 자리 잡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점검하는 가운데 나는 나다운 존재의 맛을 보는 것이다.

국가? 그것은 나의 것이다. 나의 것 일부가 들어가 있으니까. 국가가 나이고 내가 국가 일부다. 그런데 국가의 이름으로 나의 소유성을 건드리면 어떻게 될까? 이상적인 국가 생활이 가능할까? 여기서 인간의 개인적 도덕성은 국가가 지향하는 도덕성에 굴복해야 하는 한계가 드러난다.

2. 사회생활에 대한 국가의 간섭

사회생활은 나름대로 독자적인 영역으로 존립할 수 있도록 용인되지만, 노동과 욕망 충족에서의 의존성과 상호성 속에서 주관적 이기심은 어느덧 모든 타인의 욕구 충족을 위해 기여하게 되는데 그리하여 이제는 누구나 자기를 위해서 벌어들이고 생산하고 향유하면서 바로 이를 통해 또한 다른 이들의 향유를 위해 생산하고 벌어들이게 되는 것이다.

자기 소유를 지켜내면서 자신의 쾌락과 이익을 배타적으로 추구하는 구체적인 욕망 덩어리로서 행세하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은 본질적으로 특수한 임무에 의해서 지배되기에 분명과 대립의 장이고, 그 안에서 온갖 탐욕, 사치, 낭비, 빈곤, 퇴폐와 노동의 기계화, 사물화, 비인간적 소외, 불평등의 참상이 펼쳐진다.

이런 부정성을 이론상으로 절대적 인간성 실현을 이념으로 하는 국가는 방치하지 않는다. 사정없이 법적으로 ‘제압’한다. 사회생활을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실체로서 국가가 개입한다. 그래서 국가 전체 도덕적 이념에 사적인 도덕이 굴복하기를 강제한다.

3. 도덕의 한계

도덕성은 의지의 내면에 머물기 때문에 현실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존재와 대립한 한낱 당위에 그치고 만다. 도덕성은 실현되어야만 하면서도 동시에 실현될 수 없고, 실현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실현되는 순간 더는 의지의 내면에 순수하게 존립하는 도덕성이 아니고 영구적으로 마땅하여지리라는 자기 모순적 요청에 귀착되기 때문이다.

또한, 도덕성은 의지의 순수한 자기규정이라는 형식을 그 원리로 삼는다. 바로 그런 공허한 형식주의적 특성 때문에 도덕성은 그 내용 측면에서 오히려 주관의 자의적 결단과 동요, 그리고 외부로부터 주어진 경험의 소재의 특수성과 우연성에 종속된다.

도덕적 양심은 선만이 아니라 악의 뿌리이기도 하다. 악 역시 선 못지않게 주체적 자유와 자기 확신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도덕의 이름 아래 나름의 확신하고 자행되는 무자비한 폭력과 인종 학살에까지 이르는 만행을 인류는 역사를 통해 충분히 경험했고 지금도 그 참담한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이러한 주관성의 권리로서 도덕성은 아직 ‘객관적인 권리’와 대립해 있다.

도덕성이 주관의 특수성을 지양하여 내용의 측면에서도 보편성을 획득하고 사회적 연관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될 때 인류적 가치로 이행한다. 개인의 도덕적 양심은 사회 공동체의 생동하는 정기(精氣)인 인류 감각을 전제로 해서만 진정한 선이 무엇인지에 대한 내실 있고 확고한 인식과 왜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를 해야 하느냐는 동기에 대한 정서적 확신을 획득할 수 있다.

자신의 의지와 신념에 따른 판단과 결정만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려는 개인의 주관적 자유는 근대적 의미의 도덕성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바로 그래서 개인의 주관적 자유는 관습적인 덕, 그리고 개인의 권리에 앞서 주어진 사회적 역할과 책무를 근간으로 삼았던 전통적 인류성에는 파괴와 분열의 계기로 작용한다.

각 시대와 각 민족은 각기 너무나 독특한 환경과 개별적인 상태에 놓여 있으므로 모든 것은 그 시대와 민족 안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결정되어야 하고 또 그와 같이 결정될 수밖에 없다. 세상사의 번잡함 속에서 어떤 일반적인 원칙이나 과거에 있었던 어떤 유사한 관계를 회상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퇴색해버린 추억과 같은 것은 현재의 거센 풍파 속에서는 아무런 위력도 가지지 못하며 또한 현재가 지니는 활력과 자유에 대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는 ‘실용적 역사관’이 대세로 붙잡는다. ‘실용적 역사관’은 무의미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함이다. 자연의 진행은 ‘반복’되는 반면에 역사의 진행은 ‘발전’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단지 고통받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함 때문에 괴로워한다. 의미는 열정 없이 생겨나지 않는다. 역사는 그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개개의 사람들, 그들의 주관적인 의지와 욕망과 이해, 관심에 의해 만들어진 사건들로 구성된다. 개인의 열정은 보편적 행적의 유발자이자 작용자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위대한 일도 열정 없이는 달성된 적이 없다.

민족정신이란 문화적· 법률적· 정치적 통일체인 국가를 이룩하는 만드는 민족의 자기의식인 것이다. 이 정신은 보편화한 세계사를 꿈꾸며 스스로를 형태화한다. 이것이 국가다. 이 민족정신은 세계를 의미 있게 생각하는 최고 등급의 형태를 추구하는 것이다. 모든 것들을 다 흡수하여 보편에 이를 때까지 이 민족 정신·국가 정신은 멈추지 않고 전진해 나갈 것이다.

자기를 포함하는 총체화, 자신을 파악하기 위한 총체성, 이것이 국가 형태로 나타나기를 원하게 된다. 이 국가 안에서 개인은 비로소 세계사적 의미를 획득한다. 인간이 원하는 자유가 이런 것인가?

이 모든 것이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자아의 절대성을 갖추려는 시도이다. 타인마저 자기를 위한 타인이고자 하는 것이다. 과연 이런 자가 중심의 세계에 타인이 낄 여지가 있을까?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하는 전체주의적인 사고방식을 인간 스스로 벗어날 수 있을까?

4. 타인이란

타인과의 관계 배후에는 상실된 전체성이 자리 잡고 있다. 상실된 전체성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비로소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궁극적인 지향점은 출발점에서 잃어버리고 도착점에서 되찾아야 하는 ‘전체성’이다. 그렇다면 전체에 매개되는 한에서만 타인은 타인으로서 내 앞에 등장한다. 전체성에 부합하는지를 척도 삼아 타인은 평가된다. 예를 들면 우월한 인종이나 우월한 성, 곧 남성같은 것이 타인 평가의 기준으로 성립한다.

타인 이론으로 인해 ‘세계’라는 것이 구성된다. 세계란 ‘공통성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다. 타인과 나는 동일한 조건 속에서 서로 만날 수 있다고 간주한다. 이 동일한 조건이란 서로가 인정하는 진리이다. 이 진리 논쟁을 통해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다.

문제는 타인의 개입으로 인해 의식이 자신에게 회귀하여 자기의식을 이루지 못하는 데서 이 ‘사로잡힘’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무엇에 사로잡히는가? 물론 타인과의 관계에 사로잡히고 지배받는다. 타인과 마주침은 주체가 자신의 의향과 상관없이 자기성을 잃고 수동적으로 비난받을 수 있는(기소당하는) 자리에 놓이게 된다. 사로잡힘은 바로 이렇게 자기의식을 통해 제어하지 못하고 자아가 타자와의 관계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정황을 표현한다. 자기의식의 종말이다. 타자라는 귀신이 개입된 사건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나는 늘 세상에 의해 조롱받는 처지에 노출되어 있다.

내가 타인과의 관계에 수동적으로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는 것은 즉 스스로에게 회귀해 자기성을 지켜낼 수 없음을 말하고, 이는 타자와의 관계가 ‘비대칭적’이고 역전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껏 조정하는 것이 말이 통하는 자들만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이 통하지 않는 자들은 공통성 바깥으로 배제되게 된다. 세상적인 상식이나 지식이나 감정이나 감성적으로 나와 동류가 되지 않는 자들과도 과연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

여기에 공동체가 수용한 공통적인 진리 말고 다른 공통성이 있다. 그것은 시간을 넘어서 묵시적 동일가치성이다. 이성적인 공통성은 실은 ‘그 시대의 시간적 공동체’를 구성한다. 이것은 성경에서 ‘이 세대’라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이 세대’에 속한다.

세대란 ‘지금’에 대한 공통된 이해를 뜻한다. 하지만 오는 세대는 시간 밖에서 온다. 시간층이 다르다. 개인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이 세대 속의 ‘나’와 오는 세대 속의 ‘나’가 다르다.

‘나’가 다르면 타인도 다르다. ‘나’가 사라지면 타인도 사라지고 ‘나’가 두 종류가 되면 타인도 두 종류가 된다.

5. 신체

타인과 나 사이에 직접적 관계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신체 때문이다. 신체가 가로막고 있다. 신체는 단순한 사물로서 인지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변화하는 것을 자꾸만 동일한 것으로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타인의 신체를 본다는 것은 타인을 일단 죽여놓고 보는 것이다. 마치 일식 횟집에서 칼질하는 요리사가 도마 위에 놓여 있는 횟감을 노려보듯이 정지된 사물로 여기게 된다. 과학이라는 칼, 종교의 칼로, 철학의 칼, 정치(권력)의 칼, 이런 시선을 타인에게 보낸다.

최초의 인간은 깨어진 계란 껍질에서 나온 액체처럼 이리저리 흘러 다닌다. 그러다 이 흘러 다니는 액체 인간은 인간 가죽 표면이 눈, 코, 입, 귀 등의 구멍을 중심으로 고착된다. 이 구멍들은 인간의 감각을 이루는 것들이다. 곧 충동들이다.

네 개의 구멍에 해당하는 네 충동, 즉 시각적 충동, 후각적 충동, 구강 충동, 청각적 충동. 이 충동들은 그 충동의 대상들을 지닌다. 시각적 충동의 대상인 시선, 후각적 충동의 대상인 배설물, 구강 충동의 대상인 유두, 청각적 충동의 대상인 목소리가 그것이다. 중요한 것은 충동들은 주체가 형성되기 이전의 것이므로 충동의 대상들 역시 주체와 독립해 있는 주체의 대응항으로서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객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으므로 충동의 대상은 일상적인 주객 관계에서와 달리 충동 자체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인간은 이런 충동으로 자기 신체에 거주한다. ‘거주한다.’라는 것은 기하학적인 공간 안에 도형이 들어 있는 것처럼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 살고, 세계 안에서 무엇인가를 향해 있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아늑한 기분이 들 정도로 방이 크다’라는 말을 통해 가늠되는 크기는 그 공간과 얽혀 거주하는 자가 측정하는 방의 크기이지 객관적이고 기하학적인 공간의 크기가 아니다. ‘너무 즐겁게 노는 동안 해가 지는 줄도 몰랐다’라는 말에서 드러나는 시간은 시간과 얽혀 거주하는 자가 측정하는 시간이지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시간의 특성이 아니다. 이런 거주하는 자의 시간과 공간에 비하면 기하학적 공간과 물리적인 시간은 2차적· 반성적인 차원에 속한다. 즉 다시 나의 것으로 간주했을 때, 의미를 찾아보는 것이다.

이 세계 안에 거주하는 의식은 뭔가 ‘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즉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뭔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세계는 나의 행함과 타인의 행함 사이에서 분할 불가능한 공통적인 세계가 형성된다.

추상적인 생각에 의해서 시도되는 행위들을 내어놓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손수건을 꺼내 코를 풀거나 깜깜하게 어두운 데서 성냥으로 불을 밝히거나 하는 일들은 신체를 사용해 정확한 지점을 찾아 자연스럽게 민첩하게 수행한다. 행위는 추상적 사유보다 신체라는 자기 환경에서 비롯된다.

모기에 물린 환자는 물린 지점을 찾을 필요도 없이 단번에 그곳에 발견한다. 긁는 능력으로서의 손과 긁는 지점으로서의 물린 지점 사이에서 체험된 관계는 고유한 신체의 자연적 체계에서 주어지기 때문이다.

상호 양립할 수 없는 행위들이 공통적인 세계 안에서 서로 표현하고 내놓는다. 나를 위하여 상대가 행위가 멈춰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와 신체들이 양립하는 공간이 형성되는 것이다.

나의 눈 아래 펼쳐진, 나 개인에 속하는 초원의 초록은 나만이 초록이 아니다. 나의 신체는 초록색을 불현듯 보게 된다. 볼 수 있는 까닭은 나만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요, 타인만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본다’라는 것은 양자가 다 신체에 귀속되었기 때문이다.

‘본다.’라는 나의 경험과 타인의 경험은 그 경험들 배후에 있는 하나의 동일한 신체의 두 측면이다. 따라서 나라는 자아가 본 것과 타인이라는 또 다른 자아가 본 것이 어떻게 서로 일치할 수 있는가를 조율해야 하는 문제는 애초에 발생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여기에 타인의 문제는 없다. 보는 일은 자아나 타인의 개별성이 아니라 양자에게 공통적인 신체의 시각에 뿌리를 둔다. 아울러 당연하게도 이 공통의 신체의 시각에 들어온 세계 역시 나와 타인에게 공통된 것이다.

타인은 우리가 그렇듯, 그를 세계로 연결하는 회로 가운데 들어 있으며 또한 그 점에 의해 그를 우리에게 연결하는 회로 가운데에도 들어 있다. 그리고 이 세계는 우리에게 공통적인 세계며, 상호 세계이다.

자기원인으로서의 개별적 의식은 그 고립성으로 인하여 초월을 통해 다른 의식, 타자의 의식에게로 가서 공동체를 확보하려 하지만 실은 그럴 필요가 없다. 의식의 배후에 이미 공통의 익명적 존재, 신체가 있는 까닭이다.

타인을 따라 사고한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혼자만의 내면에 고립되어 있지 않고 공동체라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인간의 신체 세계는 국가와 다투게 된다. 자기만을 위한 신체의 본질이 없다는 것은 구원해야 할 목적이 없다는 뜻이다. 굳이 사회적으로 귀속될 필요가 없는 신체라서 나의 신체만을 위한 목적이 없기에 이 임의적 연대는 나 의식과 타인의 의식으로 인식하는 국가주의에 위협이 된다.

국가는 통치를 위해서만 존재하며, 국가 안에 들어오지 않는 타자를 자기 안으로 귀속시키고자 한다. 따라서 국가 밖에 있는 집단의 정체성을 국가가 주적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집단은 정체성이 따로 없다. 따로 정치적 목적 같은 것도 없다. 따라서 국가로서는 가장 위험한 집단이 이 임의적 집단이다.

타인의 부재는 사물들에 대한 나의 지각을 조직화해주는 배경이 파괴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나의 지각은 사물들에 대한 인식에 가닿지 못하고 세계는 암흑으로 덮인다. 타인이 있기에 바로 우리가 볼 수 없는 변두리, 잠재적인 영역이 보증되는 것이다. 그 영역은 타인들에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무서워하는 얼굴은 우리가 직접 그 무서움을 지각하지 못하는 공간의 존재에 대해 알려준다. 타인을 통해 우리가 직접적 지각 너머의 공간이 확장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공간이란 빈약하기 짝이 없다.

결국 ‘나의 신체’는 없다. 그냥 ‘신체’다. 어느 것 하나 ‘내 것’은 없다. 다 주의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죽음으로 접수한 자기 것이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Ⅱ. 본론

요한복음은 인간의 실체와 현주소를 육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본 모습은 인간 세상에서 파악될 수 없고 영 되시는 분이 오심으로 알게 된다.

인간이 육(3:5-6)이라는 말은 단순히 인간의 현 모습만 나타내는 표현이 아니라 인간은 아무리 해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이런 사실 또한 영 되는 분이 오심으로 파악된다.

인간에게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고유영역을 지니고 있다. 그 자체가 외부와 차단되며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도 인지할 수 없는 죽음 그 자체이다. 그 안에서 나름의 법칙이 있고 규범이 있지만(5:16), 인간은 그 규범조차 통제 못 하고 오히려 규범의 노예가 된 상태로 살아간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볼 때 1:4에 나오는 ‘생명’이라는 것은 인간이 현재 부지하고 있는 목숨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그런 목숨은 이미 언급했듯이 육이다. 소실되고 허약하고 후패하고 무의미하다. 그것은 죽음이다.

요한복음 초반에서 생명 이야기를 끄집어낸 것은 바로 인간이 부활(영생)하신 분을 전에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에 대한 태도가 어떠했느냐로 알리기 위함이다. 부활이라는 영생을 제대로 이해 못 하고 수용 못 하고 배척으로 일관했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그분과 그분의 아버지인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은 완전히 단절된 존재임이 확연해지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육과 정반대 편에 있는 세계를 영이라고 한다. 사도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는 예수님이야말로 진실로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임이 수난과 부활로 분명해진 분위기가 교회 내에서 형성된 시기이다. 문제는 그 예수님에게 발생한 사건이 어떻게 특정인이 아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즉 그 사건들이 그 이후인 오늘날 무슨 의미가 있으며 어떻게 지금에 와서는 영생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유대인들만 상대하다 유대인들만 정죄하고 그 가운데 특정 유대인들만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면(17:18) 어떻게 유대인들만 상대한 일이 전 인류에 공통적으로 적용이 되는가? 처음 대목에 “만물”이라는 말이 나온다.

예수님은 우주 전부를 지으셨다(1:1-3). 그러나 유대인들은 창조를 순전히 하나님 단독 사역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알고 있는 그들이 유독 예수님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이렇게 설명한다. 즉 지으심 그 자체로서 생명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이란 창조 사역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말씀(율법)과의 관계에 관한 문제였다(1:4).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만 율법을 주었다(1:11). 그 율법들은 진정한 생명을 내다보고 그분이 왔을 때 영접할 만한, “아 저분이야말로 율법의 인격화 되어 나타났구나!”라고 하는 안목을 가지기 위함이다(1: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들은 영접지 아니하였다. 또한,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따라서 원래부터 그들에게 말씀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생명이 없었다는 것으로 단정 짓게 되는데 이것을 빛이 없는 어두움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1:5).

그런데 이 사실을 유대인에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보편화시키는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에 유대인들만 개입된 것이 아니라 이방 총독도 관여되어 있기 때문으로 본다(18:35-36/ 19:10-11/ 17:14). 여기에 또한 첨부될 사실은 세례요한도 영이 아니라 육이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아무리 믿게 하려고 해도 못 하고 세례요한의 세례 또한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세례요한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를 비교한다(1:33). 따라서 세례요한은 도중하차하지만(3:30/ 1:8) 성령은 영원하시다(16:7/ 14:23/26/ 20:22).

이제 사도 요한은 본문을 통해서 유대인의 육 됨이 실제로 어떤 사고방식과 표현과 행동 양식을 역사 속에 남기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또 그 점이 예수님을 어떻게 죽음으로까지 끌고 갔느냐를 설명하면서 예수님 부활 이후 세상 사람 모두에게 이 유대인이 지닌 육의 요소가 담겨 있음을 알려 주려고 이 복음서를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이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그들에게 심판 아니면 구원의 이유가 된 것 같이 이 사도가 쓴 요한복음 자체가 예수님 생애 이후 사람들에게 심판 아니면 영생 둘 중의 하나가 주어지는 방편이 되는 것이다.

육의 대명사인 유대인들은 그들이 받은 율법에다 자신의 더러운 육 된 종교성을 가미하여 구원의 길을 터 보려고 했다. 그것 자체가 바로 종교 바벨탑이다. 그들은 인격보다 조직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그들은 믿음이라는 것이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나지 않음을 도외시했다. 그들은 그들의 자력과 지혜와 종교적 기술로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했다. 그래서 질서와 안녕을 위하여 예수님을 그들 눈앞에서 제거했다(11:50).

그들은 사랑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몰랐다(21:15-16). 그들은 무엇보다도 법 체제와 조직이 무너지는 것을 제일 무서워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자기가 만든 것이고 거기에는 서로의 영광들이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5:44). 결국 예수님을 죽이게 된 결정적인 것은 바로 종교 때문이다.

예수님이 아시는 하나님과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 사이에서 영생과 사망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종교가 육이 됨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이 영이라고 여기고 있다(4:23-24). 왜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는 것인지 몰랐다. 제자들도 단순한 성전 청결로만 여겼다가 부활 이후에야 성전 청결이 아니라 아예 성전이 더 이상 필요 없음을 알게 된다(2:13-22).

예수님은 새로운 성전을 의도하신 것이다. 그 열심이 아버지의 집을(나를) 엄습한 것이다(2:17).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의 태동이며 저쪽 모세 언약이 허물어진 그 자체가 새 언약을 다 이룬 셈이다(19:30). 이처럼 요한은 육을 허무는 것 그 자체를 영으로 천명한다(3:3/ 1:13/ 6:63).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된 것과 독생자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말씀은 이미 자체로서 인격적이다. 그 인격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 독생자가 나타낼 영광과 상관있다. 육신이 되지 못한다면 독생자의 영광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생자의 영광이란 아들로서 만의 유일한 영광이다. 이것은 모세가 율법을 건네받을 때의 그 영광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 영광은 절정의 때가 따로 있다는 말이다. 아들의 육신 되심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영광이 말씀 영광의 절정이다.

그 영광은 또한 은혜와 진리를 충만히 드러낼 때를 가장 영광스러움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희생은 결코 자신의 영광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영광다움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한다. 즉 모세 때의 영광과 아들 때의 영광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부활을 통해 주의 자리 즉 하나님의 자리에 있음이 인정되었다면 그분의 영광은 인간세계에 어떤 모습으로 드러내고 가셨는가를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견딜만하다는 사실은 다른 영광을 지니고 오셨기 때문이다. 은혜와 진리로 드러나는 영광이다.

이로써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게는 하나님다운 영광이 없다는 주장을 충분히 반박한다. 은혜의 영광은 비천한 영광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그것은 인간들만을 위해 쓰이는 육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제공하는 데 개입된 육신이다(1:16).

인간들의 충실한 종교성과 선과 하나님을 추구하는 그 깨끗한 양심의 결실을 왜 하나님은 외면해 버리는 것인가? 그것은 말씀 자체가 요구하는 수준의 낮아짐을 인간들은 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낮아짐은 희생양을 두고 말한다.

세례요한은 말씀의 은혜 됨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말한다(1:29). 세례요한은 자기의 세례를 여기에 맞추어서 자신이 베푸는 세례가 어떻게 하면 그분의 사역을 부각하는가에 온 관심을 다 쏟습니다(1:20-27). 그래서 요한의 세례는 죄를 씻어내는 세례가 아니라 죄를 죄 되게 공개하는 세례인 것이다. 그래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그분의 가치와 고귀성과 결합하는 세례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육신성은 또한 성령이 이 세상에 내려오시게 되는 통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요한복음에 있어 성령의 역할은 요한의 세례와는 달리 이 세상의 죄와 함께 죽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의 죄로부터 이탈시키는 작용을 한다(1:33/ 20:22-23). 따라서 열두 제자의 선택은 세례요한의 시절에서 벗어나서 율법 전달자가 아니라 성령의 전달자로 사용되기 위함이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새로운 법칙 안에서 새 이스라엘의 기초가 된다(21:15-16).

그들에게만 인자의 영광이 보인다(1:51). 그 인자로서의 영광이 표적으로서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보이기 시작하는데 사실 그 표적들은 인간들의 오해와 무지 때문에 주어진 것으로(2:4) 반대자로 하여금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으로 모는 구실을 제공한 셈이 된다.

표적이 그들의 오해를 해소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더욱더 그들의 무지성을 폭로하는 계기가 된다. 그 예가 성전 청결 사건에서 발생하였는데 여기서 예수님은 철저하게 현 건축구조물을 성전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내 아버지의 집이란 곧 자신의 육체를 가리킨다고 하신다(2:22).

그렇다면 성전 청결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시편 69:9에 비추어 해석하면 새로운 성전을 사모하다가 결국 예수님이 훼방 즉 십자가 죽음으로 가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분을 절제하지 못해 나온 행위가 아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내기를 제시하시는데 꼭 같이 헐어서 사흘 만에 다시 세워지는 것이 참된 성전이라면 어느 것이 성전이겠냐고 하신다.

46년 동안 짓고 있는 저 성전은 애초부터 성전이 아니었다. 여기에 인간의 한계성이 보인다. 이것이 육이다(3:6). 앞으로 예수님에게 들이닥치는 모든 부정적 요소들은 다 육에서 나온 소산들이다. 사마리아 여인이 생수의 의미를 모르는 것(4:15), 예루살렘이나 혹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겠다는 것(4:21), 제자들이 예수님의 양식을 오해한 것(4:33), 왕의 신하가 죽기 전에 고쳐 달라는 것(4:29), 안식일 날 병자를 낫게 했다고 시비 거는 것(5:10), 예수님이 떡 주시는 분으로 오해하여 왕으로 삼으려고 하는 일(6:15), 형제들이 예수님을 부추겨 세상에 드러내기를 요청하는 일(7:14), 안식일 날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고 책잡는 일(9:16), 예수님이 옆에 안 계셔서 나사로가 죽었다고 한스러워하는 일(11:32), 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쏟아부었다고 비난하는 일(12:5), 주를 위하여 끝까지 목숨을 걸고 따라나서겠다는 베드로의 열심(13:37), 모든 권세가 나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빌라도 총독(19:10),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는 도마(20:25), 이상의 모든 기록은 인간의 육 된 요소가 예수님을 죽임에 넘겼으며 예수님이 제공하는 영생에는 제자들뿐 아니라 인간의 어떤 도움도 개입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영이라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의 인자(人子) 되심과(3:13) 성령의 오심에 기인한 것이다(15:26). 영이란 바로 철저히 인간의 죄성이 육 됨을 고발하는 그 현장에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님의 오심은 영생의 열매를 심는 것과 동시에 거두기 위하여 오셨다(4:36). 또 자기가 원하는 자를(5:21)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놓기 위해 오셨다(5:24). 또 썩을 양식이 아니라 영생의 양식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6:27). 또 믿는 자에게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처럼 성령이 터져 나오기 위해 오셨다(7:38-39). 또 믿는 자에게는 율법의 노예 생활에 자유함을 주려 오셨다 (8:32). 또 눈을 뜨고 빛을 보게 하려고 오셨다(9:5/39). 또 예수님이 오신 것은 자기 양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다(11:25). 또 예수님은 자기가 선택한 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여(13:1) 하나님의 처소로 삼아 영원히 함께 있게 하려고 오셨다(14:2/23). 또 예수님은 아버지가 원하시는 열매를 맺어 드리기 위하여 오셨다(15:5).

이 모두를 한마디로 말하면 영생이다(17:3/20:31). 이 영생이야말로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것이고 아들도 이를 인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17:5). 이상의 여러 가지 일 때문에 공생애 초기부터 아들의 영광됨과 인간의 육의 절정이요 가장 육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종교적 바벨탑인 헤롯 성전에 대한 청결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Ⅲ 결론

“저는 저를 최종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구하시는 고백이었다. 베드로는 이 말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 21:15).”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너 거기 있으면 안 된다.” 하지만 제자들을 비롯한 인간들은 자신이 출생한 세상 외에는 아는 바가 없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예수님에게 질의한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요 13:36)?”

세상은 모두가 예수님께서 죽은 줄로 안다.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지금 살아 계심을 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을 산 자로 여기는 세상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다. 비로소 성도는 예수님의 증인이다(요 2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