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사람
마태복음 2:19-23
2: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2:20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니라
2: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23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인류의 문명이란 인간들 스스로 평가해도 놀랄 정도로 대단합니다. 인간들의 능력이 무한할 수 있나 하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인간에게 이런 평가를 내리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 보십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점에 대해 합당한 저주를 내릴 준비를 다 해놓으셨습니다. 성경, 지금 우리가 펼치고 있는 마태복음은 이런 하나님의 관점으로 돌아오기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보는 그 관점이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성령을 받은 예수님의 사도들은 전혀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 사람입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을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이사야 53:1-3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은 전혀 '흠모할 만한 것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 자신들은 사실상 엉뚱한 메시야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메시야는 철저하게 배척하고 미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로 하여금 세상을 전혀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게 했습니다. 마태복음도 그렇게해서 쓰여졌습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을 우리가 오늘 볼 때도 변화된 예수님의 제자들의 안목으로 봐야 합니다. 그렇게 볼 때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예상치도 않는 변화를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분명 유대지방 사람입니다. 애굽으로 잠시 피신했던 예수님 가족은 자기 고향으로 돌아와서 사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어떤 공포스러운 세력을 느꼈습니다. 헤롯 왕의 아들이 또 그 지역의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예수님 가족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은 꿈에 지시를 내려 예수님의 가족이 갈릴리 지방에서 살도록 했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유대 사람이 아니라 졸지에 나사렛 사람이 되는 겁니다. 나사렛이라는 동리는 갈릴리라는 큰 지역 안에 있는 한 동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렛 사람이 되는 것하고, 우리들의 안목이 바뀌어야 되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자기 고향에 못살고 딴 동네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갈릴리라는 지역이 유대 사람들이 보기에 참으로 특수한 동네라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 땅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옛날 솔로몬 왕 때, 솔로몬이 하나님을 버림으로 이스라엘 나라가 둘로 짜개어졌습니다. 그 때 북쪽 나라를 이스라엘이라고 하고, 남쪽 나라는 유다지파가 주도했다고해서 유대나라라고 불리워졌습니다. 그런데 북쪽 이스라엘 나라는 앗수르라는 강대국의 침략을 받고 함락당합니다. 그때 앗수르 왕은, 자기 본토 민족 사람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옮겨 살게 하고 이스라엘에 살던 사람들을 자기 땅에 살게하는 이민 정책을 강제적으로 시행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북쪽 이스라엘 거민은 사실상 이스라엘 족보에서 이탈한 것이 됩니다. 이 모습을 보고 남쪽 나라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언약적 정통성을 더욱 부각시켰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유다나라만 진짜 택한 선민으로 간주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메시야가 오더라도 우리 순수한 유대민족만을 살리기 위한 메시야로 오신다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갈릴리 지방에 사는 혼혈아들은 결코 하나님의 택한 민족이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남쪽 유대인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보고, 어두움의 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시당한 그 갈릴리 사람들으로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이 자처해서 나선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4::15-16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즉 큰 빛이 어디에 임한다고요? 바로 사망의 땅, 어두움의 땅에서 등장한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되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오늘 본문 23절에 보면 나옵니다.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여기에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나사렛 동네와 선지자와 관련있는 것은 이사야 9장 뿐입니다. 이사야 8장에 보면, 자칭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유대나라에서 도리어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8:16에서 하나님은 아예 율법을 봉해버려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축복은 어디서 나타나는 겁니까? 이사야 9장에 보면, 흑암의 땅, 사망의 땅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새롭게 개시된다는 겁니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 흑암이 없으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달성을 위해 예수님의 가족은 비록 유대지방 출신이지만 고향이 갈릴리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마태복음 28:7에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을 찾는 무리에게 "빨리 갈릴리로 가라"고 지시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8:16절에서는 11제자가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옵습니다. 하나님은 메시야를 그토록 무시당하는 갈릴리를 통해서 오히려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남쪽 유대나라를 공격하시는 겁니다. 그 교만과 무지를 말입니다. 소위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잘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 의해 철저하게 배척당하고 버림받는 자 속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 만들기에 나서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만 새삼스럽게 죄인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죄인이었습니다. 처음부터 흑암이었고 처음부터 사망의 그늘 아래서 살던 자들입니다. 다른 인간의 본질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란 이처럼 죽음 위에 생명을 얹으시는 방식으로 구원하십니다.
유대인들은 개인적으로 자기 솜씨를 보이기를 원합니다. 고귀한 말을 하는 입술이기를 원하고, 늘 높이 들며 기도하는 팔이기를 원하고, 늘 선한 양심을 품은 마음이기를 원하고, 늘 옳은 길로만 가는 발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갈릴리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을 아예 몽땅 비닐 봉지에 담고 그 자체로서 죄인됨을 인정합니다. 10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병을 고쳐달라고 했을 때, 고침받고 난 뒤 도로 돌아와 감사한 것은 오직 사마리인인 밖에 없었습니다.
구원이란 이처럼 혈통이나 가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이 죄라는 점을 항상 인정하고서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성경상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들은 그 열매인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사람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이미 죽은 자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은 순전히 예수님의 생명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따라서 예수님만이 빛인 것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