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비유
2008년 6월 8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4:1-9
(막 4: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더라』
(막 4: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막 4: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막 4: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막 4: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막 4: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막 4: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막 4: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막 4: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농부가 씨 뿌려서 결국 열매 맺는 이야기는 어린애들도 다 이해가 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너무나도 쉬운 말씀을 하시면서도 뭐라도 단서를 붙이시느냐 하며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고 하시는 겁니다. 즉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본심을 곡해한다는 말입니다.
즉 ‘들을 귀 없는 사람’의 해석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들을 귀 있는 사람’들이 내리게 되는 이 비유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12절에 보면 나옵니다.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즉 사람들로 하여금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남기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씨뿌리는 해석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구원을 막으시는데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고 말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 씨뿌리는 비유에는 어디에 관심을 두게 되느냐 하면 30배, 60배, 100배라는 결실에 둡니다. 이 결론을 바로 자신의 입장에다 적용시켜 보면, 인간들은 각자 자신이 매진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더욱더 번창하기를 원하는 인간의 본성과 합치될 것입니다.
교회가 잘되고 벌려놓은 사업이 잘되고 번창하기를 원하는데 있어 이 씨뿌리는 비유는 복음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씨뿌리는 비유는 바로 이런 의식이 죄라고 규정하시는 겁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천국에 오는 것을 거부하는 이유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씨를 뿌리시는 이유는, 밭이 품고 있는 그 숨겨지고 감추어진 속성으로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마치 고요한 연못을 곁에 볼 때에 물 속에 아무 것도 없어 보이지만 막상 닭고기 살점을 던져주니 갑자기 물 속에서 악어떼들이 긴 주둥이들 쳐들고 졸지에 연못은 흙탕물이 되어 버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말씀을 주시기 전까지 다들 훌륭하고 하나님 잘 섬기고 점잖은 사람들이라 여겨졌는데 막상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하는 식으로 말씀을 하니 갑자기 세상은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북새통을 이룹니다.
실은 우리 안에 악어가 살고 있었습니다. 복음의 말씀이 들어올 때까지는 천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씨를 밭을 찾아갑니다. 자신에게 맞는 밭이 있고, 밭은 오직 자기에게 맞는 씨를 고대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씨가 자기에게 맞는 밭을 찾는 와중에서 무엇이 맞는 밭이 아닌가를 말해서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다들 예수님 좋아하고 예수님 사랑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막상 복음이 주어지니 열매는커녕 맹렬히 반발하는 반응을 나타내 보입니다. 길에 떨어진 씨는 악마가 와서 주워먹었고, 돌밭에 떨어진 씨는 처음에는 복음에 기뻐하다가 환란이 오니 복음을 포기해버리고,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돈의 유혹이 들어오자 복음을 내버려두고 돈 따라 가버립니다.
정말이지 씨가 안 떨졌으면 모두들 훌륭한 밭으로 자부했을 것입니다. 결국 네 종류의 밭을 두 종류로 압축하면, 열매없는 밭과 열매 있는 밭으로 나뉘어집니다. 열매란 무엇일까요? 열매란 ‘죄사함’입니다. 혹은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좋은 밭은 어떤 사람을 말하기에 ‘죄사함’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로잡힌 자들의 특징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시는대로 삽니다. 사실 이것이 편한 삶입니다. 이 선지자들은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씨를 뿌리는 것도 새삼 세상을 변화시켜 보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그대로 실시하는 일입니다.
모세도 그러한 사람입니다. 외부적으로 봐서 모세는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약속의 땅으로 데려간 사람으로 보이지만 실은 모세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죽음과 생명의 실상을 드러내는 일을 한 사람입니다. 즉 단순하게 자기 백성을 지역으로 이동시킨 자가 아니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동시킨 사람입니다.
출애굽기 12:29에 보면,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것을 다 치시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좀 이상한 사실이 나옵니다. 모세와 직접 대결했던 바로왕의 장자가 죽는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가는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 죽었다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요?
왜 애매하게도 관련되지 않는 사람의 맏이까지 하나님께서 죽이느냐 말입니다. 중립 지역에 있는 장자까지 왜 죽이느냐 말입니다. 모세의 일은 단순히 특정 종족으로 빼내어 자기네들 까리의 나라를 세우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죽음과생명의 정체를 드러내는데 있는 겁니다.
모세에게 이 일을 시키신 분은 거룩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게 있어 생명이란 하나님만큼 거룩한 상태를 말합니다. 거룩하지 않는 자는 다 저주받을 자입니다. 전 애굽나라의 옥에 갇힌 자들의 맏이까지 죽은 것은 그 와중에서 졸지에 생명을 얻은 자가 따로 있다고 하는 그 생명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즉 히브리인들이 하나님 앞에서조차 생명을 얻은 것은 그들이 얻을 만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흠없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를 발랐기에 생겨버린 결과입니다. 따라서 생명이란 오직 이런 원천을 통해서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런 토대가 없는 사람들은 그 때에 (이스라엘인들이 생명을 얻을 때에) 다 죽어주어야 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땡처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아무리 고급 원단과 디자이너의 예술성이 가미되어도 재고된 물품은 고유의 가치를 묻지도 않고 무게 달라서 팔려버립니다. 개인적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각가가 대단한 존재라고 뽐내고 싶어도 하나님의 거룩을 품지 않는 자는 땡처리되어 영원히 저주의 죽음 세계로 한데 몰려가고 있는 처지가 됩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계속 거룩한 나라로서 주변의 더러운 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무기가 발달해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제사장들이 더러운 것을 거룩한 것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지속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제사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꾸는 것은 ‘흠없는 제물’의 피흘림 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제사장으로 혹은 제물로서 이것을 완수해서 자기 백성을 영원히 거룩한 백성으로 고정시키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완전한 거룩은 인간이 개별적인 조심성과 열성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막으십니다. 어설픈 거룩은 거룩이 아니라 도리어 화를 불러내기 때문입니다.
밭의 세 가지 경우처럼 인간이 자기 밭을 좋은 밭으로 바꿀 수가 없습니다. 밭은 그 본성으로 씨를 대우할 뿐입니다. 씨는 밭을 찾아가고 밭은 씨를 기다립니다. 우리는 죄인이라고 오직 거룩한 피의 용서만을 고대하는 자들이 좋은 죄사함이라는 열매를 맺는 좋은 밭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를 부각시키며 살지 말게 하시고, 예수님의 가치 속에다 자기가 녹아버리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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