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주인
2008년 4월 27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2:23-28
(막 2: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막 2: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막 2: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막 2: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막 2:27)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막 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27. And he said unto them, The sabbath was made for man, and not man for the sabbath:
28. Therefore the Son of man is Lord also of the sabbath.(KJV)
27. And He was saying to them, "The Sabbath was made for man, and not man for the Sabbath.
28. "Consequently, the Son of Man is Lord even of the Sabbath."(NASB)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길을 갔습니다. 이게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는 하등 안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현대인은 자기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안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릅니다. 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일이 오늘날 자신들을 영원히 살리는 일인 것을 말입니다. 사도행전 24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 ‘이단의 괴수’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그가 전한 복음은 ‘이단의 도’라고 평가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즐겨 이단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이런 소리를 듣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소리만 해대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수용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하늘에서 살던 분인데 잠시 지상에 내려왔다든지, 그 분은 산 자와 심지어 죽은 자까지 다시 살려내어 심판해버리시는 심판주가 되신다든지,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옥을 가게 되고, 자신의 말을 믿어주었다는 이유로 천국에 간다든지, 혹은 구원받는 자는 창세 전에 이미 예정되어 있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수용하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이런 주장들은 인간의 천성과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하는 자들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천성은 법으로 설명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지상에 있는 인간에게 법을 주셔서 그 법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국이, 그 법을 못지키는 자에게는 지옥이, 바로 이런 방법이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법이란 것은 그것을 지키느냐 아니 지키느냐의 여부에 따라 본인이 의인이나 아니면 죄인이냐가 결정나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혼자 열심히 하면 됩니다. 그 누구와 동행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바로 이 법적인 구원을 옹호했습니다. 안식법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지키기만 해도 의인이 된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불가능이 아니라 모든 것이 인간의 행함으로 가능한 것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법을 사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안식법을 어기다는 것은 곧 이단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안식일날 금지했던 행위인, 밀을 자르는 일에 대해서 죄라고 지적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답변은 참으로 엉뚱합니다. 인간이 안식법을 어떻게 지켜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인간이 거룩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느냐를 가지고 설명합니다. 즉 안식일법이란 시간을 지키는 법이 아니라 핍절되어 있는 인간을 어떻게 살려내느냐 하는 것이 안식일의 완성이라는 겁니다. 즉 인간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으로 안식일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를 든 다윗 이야기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사울왕에서 쫓겨다니는 다윗과 그 일행이 어느 마을에서 이르러 매우 배가 고팠습니다. 먹을 것을 구하다가 그 동네 대제사장에서 부탁했습니다. 그 때 대제사장은 일반인들이 절대로 먹어서는 안되는 제물의 떡을 주었습니다. 이 떡으로 인하여 다윗과 그 일행은 허기를 채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법의 완성이라는 겁니다. 즉 안식일의 완성은 배고픈 인간의 배부르게 할 수 있는 요소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는 의미가 이런 뜻입니다. 사람은 안식일법이 없었으면 영원히 결핍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었던 떡은 거룩한 떡입니다. 보통 사람이 먹지 못합니다. 오로지 거룩한 대제사장과 하나님만이 먹을 수 있는 떡입니다. 그런데 경계선이 안식일법의 완성으로 인하여 철폐되어 깨어졌다는 것이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얼마나 배고파하느냐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중국집 주방장과 같습니다. 홀로 요리를 만들어서 손님들의 입맛을 즐겁게 해줍니다. 마찬가지로 안식일법이란 인간들의 지키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시는 예수님과의 동행의 의미를 알려주는 것에 핵심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20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과의 동행이란 곧 예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행함으로 안식법이나 기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과 전혀 상관없는 삶의 태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6:54-58에 보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자기 것’이 있으면 ‘주님의 것’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나의 것이 있으면 주님의 것이 안보이기 마련입니다. 법이란 것은 ‘자기 것’을 철저하기 지키기 위함으로 붙잡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로움이나 자신의 가치를 유지할 때는 반드시 ‘나는 이러이러한 법을 위반하지는 않았다’하는 식으로 나옵니다. 이런 자기 의로움을 지탱하고자 한다는 주님의 동행의 가치가 그 사람에게서 사라집니다.
이렇게 볼 때, 육적으로 안식일법을 지키는 것과 영적으로 예수님과 동행하게 되는 사실 사이에는 절대로 연결이 될 수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영생을 주시는 겁니까? 육과 영 사이에 어떤 분이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행함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고 도리어 죄인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자신의 것’을 해체시키기 위함입니다. 뭘해도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영생에 대해서 시장기를 느끼고 핍절하게 만들고, 허기지게 하십니다. 절대로 사람은 홀로 살아서는 아니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십니다. 소위 나의 것이라는 것은 무너져야 합니다.
골로새서 2:12-17에서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기에, 즉 몸이 그리스도의 것이기에 더 이상 그림자 같은 법을 따를 수는 없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밖에 모르는 우리들에게 우리 자신이 얼마나 죽어 마땅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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