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포도주와 낡은 부대
2008년 4월 20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2:18-22
(막 2: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니까』
(막 2:19)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막 2: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막 2: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막 2: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전라도에 있었던 조류 독감처럼 병원균이 의정부까지 확산되듯이 인간 세계에는 죄가 전염되고 오염됩니다. 이것은 모두다 거짓이라는 바탕 위에서 대충 살아야 괜찮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옆 사람과 비슷하게 살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기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넓은 길로 가지말고 좁은 길로 가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좁은 길로 가려면 ■우리 능력으로 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부터 죄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군가 우리 인생에 개입해야 하고 관여해야 합니다. 대충 남들 사는 식으로 사는 것이 거짓된 삶이다 는 것을 알려주는 그런 분의 개입이 있어야 합니다.
하늘 나라에 어떤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있고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 되시는 분이 하늘에 그냥 사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자신은 원래 하늘에 사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제대로 이 세상 형편을 알려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겁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마치 짧은 사다리처럼 세상 전부를 모릅니다. 열심히 살아도 80세가 너머가면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 위에 사시는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분이 이 세상의 처음과 끝을 다 알려주셨습니다. 이렇게 시작해서 저렇게 끝난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교회오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의 말을 안 듣기 위해서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살면 실제 이 세상에서의 문제거리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문제의 해결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예수님 앞에서 문제라는 것이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보통 문제거리라는 것은 인간이 자신을 쳐다보니 생겨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분은 자신만 쳐다보라는 겁니다. 그게 신앙생활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문제거리가 될 것이 아예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아들의 말 듣기’를 빼버리면 모든 것이 문제거리로 등장하고, ‘하나님 아들의 말 듣기’로 나오면 전혀 문제될 게 없는 것이 됩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 각자의 인생이 관여하고 개입하기를 바랍니다.
자 예수님은 어떤 식으로 관여하실까요? 오늘 본문에 보니, 인간들의 오염된 세계에는 법이 존재합니다. 죄라는 것은 그냥 죄로 오염되는 것이 아니라 법이라는 이름으로 오염됩니다. 그당시 바리새인들은 금식 기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이 법을 어기느냐 라고 하면서 시비걸고 나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답변은 이것입니다. 장차 세상 끝날 때나 등장될 하늘 나라를 미리 알려주기 위해서 자신이 활동한다는 겁니다. 즉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지 헌 부대에 담지를 못하고 담았다가는 다 쓸데없는 것으로 쏟아져 버린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세상 끝에 오는 천국을 미리 당겨서 여기에 이루어지도록 예수님께서 일하고 계시는 겁니다.
쉽게 예를 들면, 치마의 끝단을 잡고 위로 올리게 되면 치마의 첫 단에 겹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두 개의 층이 겹치게 되면 분명 아직 세상 끝이 되지도 않으면서 세상 끝에 영원히 살 사람들이 미리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지금 인간 세상에서 법으로 나옵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천국이란 법으로 담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법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쁨이요 사랑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신랑을 맞이한 신부의 기쁨과 사랑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신랑과 신부 사이에는 법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랑의 사랑으로 맺어집니다. 에베소서 5:25에 보면,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법으로 자신을 고정시킬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유동적입니다. 인간들은 어느 한 시점을 가지고 영원한 자신이라고 규정할 수가 없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변동됩니다. 자신을 변동시키는 그 계기가 악마가 제공하는 거짓된 매력과 유혹들입니다. 사람들이 기쁨이란 끊임없이 내부에서 솟아올라오는 자신의 욕망의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자극적인 것을 찾아다니는 식으로 보충합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외부의 유혹과 자극과 흥분에 맞추어 그때그때마다 자신을 재조립되면서 살아갑니다. 즉 계속해서 재미거리와 흥밋거리를 찾아 헤매면서 살아갑니다. 자신을 흥분시키는 매력거리가 없으면 발길을 끊어버립니다. 이러한 자신의 욕망을 감추며 변명하기 위해 법을 동원시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옛부대 방식입니다. 새로운 부대는 새로운 포도주가 만들어냅니다. 신랑이 붓는 새포도주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만족하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신랑의 사랑이 영원히 들어있기에 그 기쁨에 빠져 살아가게 됩니다. 원래 신부란 신부 자신을 드러내는 재미가 아니라 ‘내 신랑은 이러하다’는 식으로 신랑만을 사랑하고 신랑이 준 사랑을 고이 간직하고 싶은 즐거움에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관계가 바로 신랑과 신부 사이입니다. 신랑이 주는 매력이 빠진다면 세상에 그 어떤 매력에 더 이상 춤추거나 놀아날 하등의 이유가 없어지는 법입니다. 문제는 이 세상에 자진해서 예수님을 신랑 삼겠다는 나오는 신부가 없다는 점입니다. 왜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부가 되지 않으려고 할까요?
그것은 누구누구의 신부가 되어버리면 더 이상 자신에 대한 주도권은 전혀 남지 않는 겁니다. 즉 신부는 자진해서 신랑이 너무 고맙고 귀해서 신랑에게 자신의 장래와 자신의 위신이나 명예마자 다 넘겨주고 그 넘겨준 그 신랑에 푹 빠져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신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들은 기껏 자신의 사는 즐거움을 자기 내부에서 찾았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내부는 결코 본인 것이 아니라 악마의 놀이터입니다. 악마가 자극적이고 흥밋거리와 재미거리를 집어넣기만 하면 앞뒤 안 가리고 거기에 푹 빠질 수밖에 없고 악마가 유인하는 대로 농락 당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인간들 자기네들끼리 조류독감처럼 죄로 뒤범벅인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다들 오류와 거짓의 바탕 위에서 살고 있습니다. 신랑은 없고 오직 자신들만이 신랑이라고 우리는 이 세상, 이 세상이 바로 새포도주를 모독하는 멸망받고 찢어질 옛부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늘의 가족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말만 쳐다보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