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계속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5장 25, 26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저희가 그 열조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지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앗수르 왕 불의 마음을 일으키시며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의 마음을 일으키시매 곧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사로잡아 할라와 하볼과 하라와 고산 하숫가에 옮긴지라 저희가 오늘날까지 거기 있으니라“
오늘날, 이게 역대기가 써진 그날들, 그 시대의 오늘날이에요. B.C.400~450년 경 그쯤 돼요. 역대기가 써진 게. 그래서 ‘오늘날’이란 것을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미 결정된 과거를 다시 결정하는 것. 이게 이스라엘 역사를 성경에서 기록될 때 특히 역대상 같은 경우에는 어떤 시대로 기록하느냐 하면 fast forward, 빨리 감기하는 것. 녹음기 같은 것 빨리 감기하지요. 역대상 1장에 보면 족보를 빨리 감기해요. 쑥 들어가요.
역대상 1장을 보게 되면 1장 1절부터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뒤에 순서가 없어 그냥 쫙쫙 나갑니다. 빨리 감기하는데 아담에서 보면 forward 앞으로 빨리 감기. 그런데 오늘날 역대기가 써진 그날에 비하면 뒤로 빨리 감기하는 거예요. 이 역대기를 오늘날 백성들에게 보여주시면서 하나님께서 쓰시는 이유가, 빨리 감기를 통해서 뭘 말씀하시려고 후딱 지나가는가?
과거라 하는 것은 오늘날을 위하여 과거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결정된 과거를 다시 결정하는 것, 이 이야기가 쉽게 말씀하면 이렇습니다. 3월 2일, 이걸 오늘날로 보면 3월 2일에 생각하는 것은 3월 1일까지 생각하는 것을 3월 2일에 생각하잖아요. 3월 3일을 생각 못해요. 아직 오질 않았으니까. 그런데 오늘 3월 4일이잖아요. 3월 4일이 되면 3월 2일에 생각한 것, 3월 3일에 생각한 것을 여기서 다시 결정하는 겁니다. 다시 해석하는 겁니다.
옛날 흘러간 노래를 1년에 한 번 듣고 가끔 들으면 그냥 흘러간 노래에요. 그런데 흘러간 노래를 매일 들으면 흘러간 노래가 아니고 오늘의 노래가 되는 겁니다. <번지 없는 주막> 이런 것, <대전블루스> 이걸 매일 열 번 들으면 과거 노래가 아니고 지금 내 노래가 돼요. 그래서 인간은 이미 결정된 과거를 다시 결정하는 겁니다. 모든 게. 그렇게 되면 오늘날이 자꾸 이동하겠지요, 3월 2일 오늘날, 3월 4일 오늘날, 3월 6일이 되면 오늘날 또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과거에 그렇게 지루했던 과거는 fast forward 빨리 되감기가 되는 거예요. 후딱 지나가는 겁니다. 남자들 군에 갈 때 3년, 우리 할 때는 3년이었습니다. 혜택 받아서 34개월, 혜택 못 받으면 36개월. 3년 했는데 그때는 이러다 인생 끝날 것 같아. 너무 시간이 안 가요. 그런데 지나보면 군대 이야기는 빨리 감기가 되어 후딱후딱 지나가는 겁니다. 이 원리가 신앙의 기본 원리에요. 정말 이거는 죽더라도 잊어버리면 안 돼요. 정말 중요한 건데 다 오셨으니까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여기 있는데 내가 언제 태어났다. 태어났으니까 실선, 아직 안 죽었으니까 이건 점선, 내가 언젠가는 죽을 거다. 죽었으니까 시체라 봅시다. 이만큼 남았다고 보거든요. 이게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보는데 성경해석은 이렇게 보는 게 아니에요. 내 쪽에서 이쪽으로 다가가잖아요, 죽는 날. 현재 살아 있고 다가가는데 성경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 죽는 날이 다가와요. 반대로. 그러면 오늘이 3월 4일이잖아요. 그러면 3월 4일에서 3월 5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왜냐하면 3월 4일 오늘이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 안 하면 성경해석 못합니다. 할 수가 없어요. 마지막 날, 마지막 때의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성경말씀을 준 게 아니고 성경말씀의 완성을 우리에게 주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말씀이란, 특수한 죽음 안에 네가 놓여 있느냐? 이걸 묻는 겁니다. 그냥 죽음이 아니에요. 보통 인간이 가는 죽음 아닙니다. 몇 해 전에 돌아가신 시어머니 그것 말고요. 일반인들이 죽는 죽음 말고 특수한 죽음이 있어요.
이 특수한 죽음은 우리 쪽에 다가와서 늘 특수한 죽음이 우리 쪽에 대기돼 있습니다. 이 특수한 죽음은 이게 무슨 죽음이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이 특수한 죽음이거든요. 특수한 죽은 지금 예수님이 죽어 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지금 살아 있는 거예요. 왜? 부활했으니까요. 그러면 예수님이 살아 있다와 나 살아 있다가 날마다 경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인간들은 살아 있기 때문에 아직 죽을 날은 한참 멀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지금 나이가 얼만데 죽음을 생각해요. 아들 장가도 안 갔는데,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내가 살아 있으니까 죽을 날이 한참 멀었다고 생각하는데 이 특수한 죽음은 네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제대로 살아 있는 것은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경쟁에서 예수님은 뭐냐? 너는 내 앞에서 살아 있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꾸 내가 살아 있다 하니까 과거 생각하고 미래 앞으로 잘하면 되지, 이런 식으로 성경해석하고 소위 신앙생활이란 걸 하고 있는 거예요. 그건 엉터리에요. 그건 기본이 뭐냐? 지금 내가 살아 있다고 우기니까 앞으로 잘하면 되지, 이런 생각이 드는데 내가 살아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린 특수한 죽음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이미 죽은 거예요.
풍선의 입구 있잖아요. 풍선에 보면 바람 넣는 입구가 있지요. 입구를 생각 안 하고 풍선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자기가 너도 살았고 나도 살았고 서로 이야기한단 말이죠. 풍선 안에, 갇혀 있는 채로. 하지만 그 풍선 안에 있는 것이 나올 때는 죽음으로 나온다고 합시다. 살아 있는 것이 풍선의 좁은 구멍 앞에서는 그냥 산 채로는 못 나오고 죽어서 나온다고 칩시다.
그 풍선 구멍 안에서 먼저 우리에게 들어와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풍선 안에 같이 합류가 돼버리면 우리는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채로 이미 죽은 자가 되고, 왜? 죽었다가 안 살아났으니까 죽은 게 되는 거예요.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진짜 살아 있는 거라면 우리는 아직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이유 때문에 우린 아직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제대로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지금 죽어가고 있는 죽음이다 이 말입니다. 죽어가는 곧 시체 된다 이 말이죠.
살아서 예수 믿어서 구원받아야지, 이거는 지금 예수님을 완전히 모독하는 거예요. 내가 살아 있지만 잘해서 죽고 난 뒤에 또 살아야지, 할 때 내가 지금 살아 있는데 죽어서 또 살아야지 할 때 산다는 개념이 두 개의 개념이 동일하다고 우리는 오해를 하고 있어요. 그러나 여기 살아 있는 것은 죽음을 모르기 때문에 이건 살아 있는 게 아니에요. 진짜 살아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죽었다가 살아나야 살아 있는 거예요. 그걸 성경에서는 생명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교회 다니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이것 다 죽은 짓이에요. 헌금하고 예배드리고 다 죽은 짓이에요. 성경 공부하는 것 죽은 짓이에요. 죽은 놈 뭐 만져봐야 깨어나지 않듯이 죽은 자가 무슨 짓을 해도 그거는 살지 못해요. 사람들이 교회 다니고 헌금하고 기도하고 참석하는 게 이걸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본인이 살아 있다는 그걸 전제로 해서 모든 것을 내가 일방적으로 해석을 하니까 그런 오류가 등장하는 겁니다.
맨날 교회에서 생각하는 게 뭐냐? “주님, 잠깐만 기다리세요.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해서 주님 나라에 합류할게요.” 이러고 있단 말이죠. 주님이, “지금 뭐하니? 니가 너를 살리려고 해.” 니가 왜 너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말이죠. 그거는 언어도단이거든요. 죽은 자는 그냥 죽어 있을 뿐이지 죽은 자가 설친다고 이게 산 자 안 돼요. 그래서 나는 살아도 죽은 거다, 라고 생각이 드신다면 여러분 살아 있는 겁니다. 여러분, 살아 있는 성령이 함께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인생은 뭐냐? 인생은 내가 살아도 이게 왜 죽은 것이 되는가? 그걸 체험하고 경험하라고 우리에게 인생이란 시간이 허락된 겁니다. 아무리 살려고 해도 나는 죽음의 공포에 휩쓸리는가? 왜 죽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가? 이건 제대로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스라엘 구약 역사는 하나님 보시기에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그거는 살아도 저주스럽게 살아 있는 거예요. 구약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그러면 이스라엘은 그들이 율법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뭐라고 기도하느냐 하면, 살려주세요, 이렇게 나온 거예요. 율법이고 뭐고 다 치우고 평소에 더 살고자 하는 욕구와 욕망이 너무 강렬해서 눈앞에 주의 말씀이고 율법이고 그런 것은 귀찮고 다 번거롭고 그냥 살려만 주신다면 살려주신 하나님께서 제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억지로 꾸역꾸역 이어갔는데 나중에 망합니다. 나중에는 하나님도 한 고집하시잖아요. 그것 다 망해버려요. 아무리 살려고 발버둥 쳐도 그들은 왜 내가 율법을 못 지키는지 왜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그냥 죽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성경은 해석을 하는 거예요. 죽일 자를 죽이면서도 이미 결정된 과거는 내가 하나님의 선지자, 하나님의 추가적인 계시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다시 결정하는 거예요. 네가 결정한 것 따로, 네가 죽어가는 결정 따로, 내가 다시 죽어가는 너에다가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을 하는 결정 따로, 그것이 이스라엘은 죽지만 이스라엘은 산다, 이런 새로운 의미 층이 발생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중층결정이라 합니다. 밑에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은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해도 주께서는 죽어줘, 제발 죽어줘 죽여 버려요. 하나님이 죽이시는데, 그래 우리는 죽어 마땅해, 라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어겨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어 마땅해, 라는 자가 등장하는데 그걸 빨강 걸로 해볼게요.
모든 사람은 그저 본능이에요. 안 죽고 싶어요. 사는 게 본능이에요. 오늘날 우리들처럼. 죽고 싶은 사람 누가 있어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안 죽어야 된다는 거잖아요. 그것 노동하고 일하지 않습니까. 죽을 것 같으면 뭐 하러 일합니까. 살려고 일하지요. 자식을 왜 낳습니까? 더 살려고 하는 거예요. 나 죽더라도 너는 잘 살아라, 그것 때문에 살잖아요.
모든 인간이 죽음으로 가고 있는데 여기에 그래 죽어 마땅해, 라는 사람이 소수지만 빨간 사람들이 등장하는 거예요. 이 사람의 근본은 바탕은 뭐냐? 하나님께 있어요. 하나님께 뿌리가 있는 사람과 하나님께 뿌리가 없는 사람이 뒤섞여있을 때 이게 중층결정이고 이 둘 사이에 뭐가 있느냐 하면 고난이 발생되는 거예요. 고난 또는 핍박이라는 게 성립되는 겁니다.
그리고 장차오실 메시아는 이 고난 받는 이 사람들의 계통에 연결되어서 메시아가 오게 돼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시되 이스라엘을 다 버리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면서 진짜 이스라엘을 만들어내는 그런 작업방식을 사용하신 거예요.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지요. 교회 왜 오십니까, 물으면 간단해요. 교회 와서 하나님 믿고 예수 믿고 땅에서 복 받고 나중에 죽어선 천국 가고, 그것 때문에 교회 옵니다. 누가 그런 소리하던가요? 교회 목사들이 그런 소리 다 했고 목사만 아니라 그 밑에 장로들도 그런 이야기하고, 우리 목사만 그런 줄 알았더니 다른 목사, 헌신예배 온 목사들 다 그런 이야기하고. 원래 신학교에서 성경 가르칠 때 그게 정답이라고 그렇게 다들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아마추어 입장에서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전문가들이 다 그런 소리하니까 다 맞는 줄 알았습니다, 라고 궁색한 답변을 내놓지요.
그럴 때 제가, “성경에 성령이 왔다는데 성령은 여러분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던가요?” “성령, 들은 바 없습니다. 성령이 온다는 것은 아는 바 없습니다. 내가 알아서 잘하면 되지 굳이 성령이 올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알아서 할 것 같으면 내 결정이 내 미래를 확정해요. 그런데 성령이 왔다는 말은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거든요.
나만 살아 있는 줄 알았더니만 예수님이 살아 계셔서 푹 하고 예수님 자신의 칩 있잖아요. 주님 자신의 다 이루심 믿음, 소망, 사랑이 몽땅 다 이루심을 완성된 것을 우리 안에 부속품처럼 칩을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으면 그때부터는 째깍째깍 우리가 움직이는 시계 같아. 주님에 의해서 작동되는 시계, 시간 정확합니다.
뭔가 나는 내가 살기 위해서만 결정하고 싶고, 내 결정을 자율성이라 하는데, 내가 자율적으로 하나님 잘 섬기고 섬길 때 섬기고 선택하고 싶은데 뭔가 내 속에 내가 다룰 수 없는 내가 관리대상이 안 되는 나보다 더 세게 내 안에서 내 내장에서 째깍째깍 시계 돌아가는 소리, 저는 이걸 예수님이 심장박동소리, 예수님의 심장소리가 우리 안에서 째깍째깍하면서 작동하는 거예요.
너는 죽었고 네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그 말씀 아닙니까. 나는 이미 죽었고 인간으로 죽었고 주님의 시계로, 시계는 부속품이 중요하거든요. 부속품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성령이 주신 주님의 공로가 나의 부속품으로 들어와서 이제는 껍데기만 나지 알맹이는 몽땅 다 주님, 예수님이 되는 거예요. 다 이루었다는 것.
적어볼게요. 째깍째깍, 이걸 다섯 자로 바꾸겠습니다. 다 이루었다. 째깍째깍할 때마다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이것이 계속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너는 좀 죽어줘. 네가 자꾸 살았다고 우기니까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행함의 어떤 성과나 결과를 눈으로 목격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기도했으면 응답받고 싶은 겁니다. 내가 헌금했으면 복 받고 싶어요. 내가 살아 있으니까. 나는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데 괜찮게 잘나게 살아 있다는 것을 잘난 결과를 통해서 비교하고 싶은 겁니다.
그렇게 했던 사람들 중에 누구냐 하면 오늘 본문 역대상 5장 25, 26절에 나오는 르우벤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 5장 18절에 보면, “르우벤 자손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가 이들이 25절에 보면, “저희가 그 열조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지라” 이렇게 돼 있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단도리는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가 약속의 땅에선 그게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네가 네 열심히 살겠다는 건 알겠는데 나는, 하나님 나는, 내 말은, 내 취지는? 네가 너에게 충성을 다하고 너에게 신명을 바쳐버리면 하나님의 말씀은 거기에 대해서 네가 신경 썼냐? 안 썼잖아, 봐. 너는 네 살 궁리만 했지 하나님이 이런 분이란 걸 드러내는데 네가 신경 썼어, 안 썼어? 안 썼지요. 범죄 했으니까, 우상을 섬겼으니까. 그 땅의 백성들의 신들을 간음하여 섬겼으니까. 여호와를 섬긴 게 아니고 그 땅의 백성들의 신들을 간음하여 섬긴 거예요. 르우벤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가. 초장에 떨어져나갑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강의 잘 이해했는지 이 하나로 잘 파악이 됩니다. 이 사람이 갓 자손, 르우벤 자손, 므낫세 이분의 일 지파라 합시다. 이 사람들은 지중해 있고 갈릴리 호수 있고, 그리고 밑에 요단 강 있고, 사해 있는데 이쪽이 서쪽이거든요. 현재 이스라엘. 이쪽 동쪽에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 이렇게 돼 있어요. 지금의 요르단입니다. 그 위에 시리아 있고, 위에 레바논 있고, 밑에는 이스라엘 있고, 팔레스타인 자치지구가 있어요.
이쪽 나라, 요단 이쪽 동쪽에 있는 나라가 제일 먼저 날아갑니다. 이쪽은 약속의 땅에 하나님이 제비 뽑아 주지 않은 땅이었어요. 자기들이 그 땅 보기에 좋아서, 자기들 보기에 좋은 거예요. 자기들 살기에 유리하다고 생각해서 자기들이 결정한 겁니다. 아브라함과 조카가 처음에 약속의 땅에 있을 때 창세기 18장 이전에 보게 되면 아브라함과 둘 다 복을 받아서 양들이 많았거든요.
그럴 때 아브라함이 조카에게 조카 이름이 롯인데 롯에게 네가 좋은 땅 어느 땅 할래? 네가 좌하면 내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 좌하겠다고 했어요. 그것은 롯이 선택한 땅은 인간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비옥한 땅이었어요. 그런데 그 땅은 본인도 좋아한 땅이었지만 다른 신을 섬기는 민족들도 같이 좋아한 땅이에요.
여러분들이 울산에 사는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무조건 오백 평을 준다 할 때 울산바닥에서 어느 땅을 오백 평 달라하겠습니까? 언양 골짜기 경주 가는 산 쪽을 달라하겠습니까, 아니면 울산 롯데백화점 있는 거기 고속터미널 그 땅 오백 평 하겠습니까? 가격 차이가 엄청나지요. 요지의 땅을 달라하겠지요. 내가 좋으면 남도 좋아요.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그것을 롯은 복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남들도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도 되지 않는 자들이 같이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롯은 잊어버린 겁니다. 그 땅을 선택했더니만 롯이 그 땅에 노리는 사람이 왜 그리 많은지. 롯이 있던 땅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였어요. 너무 살기 좋았어요. 마치 에덴동산 같았다고 했거든요. 그 당시에. 여기 사해고 동쪽 이쪽이거든요. 너나나나 다 달려드네. 그 좋은 땅을. 전쟁이 벌어졌어요. 이거는 그 땅에 살아도 산 게 아니에요.
결국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그 전쟁에서 외세를 받아서 포로 잡혀 갑니다. 그때 삼촌 아브라함이 와서 롯을 적들의 손에서 건진다고 애먹었어요.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그것으로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에서 빼내주는 걸 구원이라 해요. 그 구원과 같은 개념이 기도 개념인데 기도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박탈시키는 주님의 행위를 기도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박탈 내는 다 못하게 만드는 것, 그게 기도에요.
그래서 기도는 내 이름으로 하지 않습니다. 기도 누구 이름으로 하게요? 누구 이름으로 하시죠, 기도를? 예수 이름으로 하지 말고 내 이름으로 하지 않는다고 하세요. 그게 더 의미가 깊어요. 기도는 기도하는 당사자의 명예와 자존심과 노동, 애씀 이것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노동과 이걸 주여 박살내주시옵소서.
기도한다는 것은 답답하다는 뜻이거든요. 내 답답함을, 답답하게 느끼는 그것을 이게 답답한 게 아니고 이게 사랑이고 은혜고 긍휼하심이라는 걸 깨닫게 하옵소서. 그게 바로 기도에요. 내가 갖고 있는 것이 내 것이 아닌 것을 알게 하옵소서. 그래서 기도라 하는 것은 주님이 은혜 주신 것에 대해서 그때그때 반응을 나타내는 게 기도지요.
그래서 기도는 쉴 수가 없어요. 맨날 주니까. 맨날 주니까 고맙습니다, 하고 반응을 나타나니까 이건 밤이나 새벽이나 새벽을 일부러 깨울 필요 없어요. 밤이나 낮이나 새벽이나 항상 주셨으니까 기도로서 반응을 나타내지요. 여러분들도 아침에 일어나면 다 오늘 하루를 이렇게 눈 뜨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를 다들 하지요↗ 말꼬리 올라갔어요.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말은 전체가 은혜덩어리란 뜻이에요. 내 자신이. 그러면 기도내용은 뭡니까, 물으면 기도내용은 아까 했어요. 어제까지의 해석 작살내고 오늘 해석 다시 하는 것, 오늘의 나에 대해서 해석을 다시 하는 그게 기도의 내용입니다. 어제의 기도는 어제까지에 대한 감사, 오늘 기도는 오늘까지의 감사하는 거예요. 그럼 내일은? 오늘로 죽어버렸는데 무슨 내일이 있어요. 내일은 내일 가서 하세요.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요.
주님께서는 네가 십 년 더 살라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올라오라는 거예요, 주의 뜻은. 그러면 저를 오늘로 인생 끝내게 해달라고 한다면, “가만있어봐 너 성질 왜 그리 급해. 네 할 일이 있어.” 계속 또 사는 거예요. 주님이 필요해서 사는 거예요. 내가 필요해서 사는 게 아니고. 딸 시집가는 것 보고,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누구 맘대로? 시집을 가야 가는 것이지 요새 남자 만나는 게 힘든데 무슨 시집을 가.
시집가는 건 부모의 소원이고 본인은 시집 안 가고 혼자 살겠다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그것도 주의 마음인데요. 너 시집 안 가면 눈 안 감는다. 그건 고집이지요. 그럼 막 기도한다고. 우리 딸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게 하옵소서. 이 세상에 좋은 남자가 어디 있어요? 지 딸도 좋지 않은데 여자 자체가 안 좋은데 무슨 욕심에 좋은 남자를 구합니까?
“주여, 내 딸이 잘못을 잘 지적할 수 있는 그런 남자를 만나게 하옵소서.” 이래 돼야지요. 그런 남자 있습니까? 있지요. 누구야? 예수님. 예수님은 그것에 도사에요. 우리가 얼마나 엉망진창인지를 예수님만한 신랑은 없습니다. 그런 것을 딸내미한테 하면 딸내미가 예수님과 결혼하겠다고 나서면 수녀도 아니고 갑자기 위기가 확 다가오지요. 입 싹 다물어야지요. 그래도 보내야지 우야겠어요, 입 다물고. 그저 예수님 같은 남자만 만나면....
예수님 같은 남자 만나는 방법은, 자기 딸이 죄인인 것을 알게 되면요 결혼에 아무 문제가 없어요. 문제는 지가 의인이라고 해석한 부부에 문제가 있지 나는 그저 밥이나 먹여줘도 나 같은 인간에게 웬 은혜입니까, 이런 딸내미라면 어떤 남자라도 잘 살아요. 지금 딸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자신들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 역대상에서 주제가 들어있는데 5장 18절 보겠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의 나가 싸울만한 용사 곧 능히 방패와 칼을 들며 활을 당기어 싸움에 익숙한 자가 사만 사천 칠백 륙십인이라” 이렇게 돼 있지요. 자, 이것은 중층결정이니까 아까 이야기한 B.C.400~450년 그때 오늘날 해서 뒤돌아볼 때 테이프를 뒤돌아보게 되면 그때 르우벤 자손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는, 이스라엘은 전쟁하는 기계였다.
지금 오늘날 신약은 무슨 전쟁이냐? 영적 전쟁이에요. 영적 전쟁을 이 지상에 있는 눈에 보이는 인간들이 한 그 전쟁이 옛날 구약 때 한 전쟁이에요. 지금은 구약처럼 그런 전쟁은 의미 없습니다. 지금은 영적 전쟁이니까요. 전에는 뭐냐 하면 언약적 전쟁, 지상에 실제 인간들과 전투를 벌이는 그 전쟁. 어쨌든 간에 전쟁하는 기계입니다. 인간이라 하면 안 됩니다. 전쟁하는 기계에요.
왜 기계냐 하면 이스라엘에서 인간이란 것, 이름을 가진 분이 여기 이스라엘에 유일하게 들어오시는데 그분이 누구 이름이냐? 바로 여호와의 이름이에요.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들고 이름을 아담이라 지었잖아요. 그러니까 이름이 있다는 것은 특정 개별자, 인간이란 인격이 있다는 뜻이에요.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여호와의 이름, 여호와께서 인격적으로 개입했다, 섞여 들어왔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까 몇 명이라 했습니까? 사만 사천 칠백 육십 명이죠. 사만 사천 칠백 육십 명이 있고 그들 가운데 또 누가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섞여서 같은 인간적인 속성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겁니다. 여러분 이것 신기하게 보면 안 됩니다. 신약 때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잖아요. 사람이 되셔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식사하시고 삼년 동안 같이 계셨지요. 하나님이 인간 속에 섞여 들어온 거예요. 구약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면 여러분 보기에 아까 사만 사천 칠백 육십 명 이들이 전쟁할 때 이들이 모여서 서로 의논했습니까, 합의했습니까? 우리 전쟁할까, 말까? 결정을 그들이 내렸습니까? 아니죠. 사만 사천 칠백 육십 명 가운데 전쟁하자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그럼 전쟁을 누가 일으켰는가? 이스라엘은 전쟁하는 기계인데 전쟁은 누가 일으킨 거예요? 바로 그들 속에 있는 여호와의 이름이 일으킨 거예요.
그럼 여호와의 이름 되시는 분은 실제적으로 어떤 모양을 하고 그들에 섞여 있느냐? 그 한 분이란 분이. 이름은 각각 한 사람 당 해당 이름을 주기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은 여호와 한 분의 자격으로 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럼 여호와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냐 하면 바로 이 모습이에요. 제사장의 모습입니다. 제사장 중에서도 그냥 제사장이 아니고 대제사장의 모습이에요.
여러분 물어보겠습니다. 제사장이 전쟁할 때 전쟁의 현장에 참여합니까, 안 합니까? 제사장이 칼 들고 활 들고 합니까, 안 합니까? 안 해요. 제사장은 뭐만 붙들고 있어요? 뭐만 지키고 있어요? 언약궤만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근데 그게 전쟁이 돼요. 광야 때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통과하는데 뒤에 아말렉 민족이 비겁하게 뒤에서 덮쳤어요. 뒤에 낙오자 있는데 덮쳤거든요.
그때 칼 들고 설친 것이 모세입니까, 여호수아입니까? 여호수아가 칼 들고 설쳤지요. 산 밑에서. 그럼 모세는 뭐했습니까? 모세는 그냥 지팡이 들고 있었지요. 그럼 전쟁의 승패는 여호수아에서 승패 납니까, 아니면 산 위에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에서 승패가 난 거예요? 지팡이에서 승패가 난 거예요. 이게 바로 이스라엘의 전쟁 방식이에요.
기존의 세상 모든 전쟁은 한 인간 당 그 인간이 갖고 있는 인간의 이름, 인간은 살아 있다고 자부하니까. 살아 있다고 여기는 인간들이 들고 있는 칼이나, 활이나, 타고 있는 말, 그들이 타고 있는 전차, 인간 힘이 인간의 더 센 힘으로 무찌를 때 승리를 낚아챈다는 것이 이방민족, 모든 인간 사이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들고 있는 칼은 칼로 승리에 보탬이 된다면 나라는 존재는 전쟁에서 의미 있게 전쟁의 성과에 끼어들 수가 있어요. 왜? 내가 설쳤으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의 전쟁은 기드온의 삼백 명 군사들이 있는데 그들 가운데 칼 가진 사람 손들어보세요. 아무도 없지요. 창 가진 사람? 아무도 없지요. 삼백 명 중에서 사람 죽인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칼은 미디안 자기들이 자기들 칼로 같은 동지와 전우를 죽인 거예요.
우크라이나 삼백 명 군인들이 나머진 다 피난 가고 남아서 그 삼백 명이 나팔과 항아리와 항아리 속에 횃불 감추고 있었고, 러시아는 십팔 만의 대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는데 나중에 전쟁이 끝났는데 러시아 군인 다 죽었다. 죽은 것 보니까 자기가 자기편끼리 총 쏘고 대포 쏘고 탱크로 밀어서 다 죽었다. 지금 이런 판이에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그런 전쟁 눈으로 봤으면 믿음이 팍 생기겠지요. 죄송합니다만 그런 전쟁은 구약으로 끝났어요. 신약은 영적 전쟁입니다. 혈과 육은 우리는 육과 육의 싸움이 아니에요. 영적 전쟁입니다. 사람과 전쟁하는 게 아니에요.
너희 집 돈 많나? 우리 집 돈 있다. 너희 아파트 몇 평이냐? 나 몇 평이다. 너희 남편 뭐하노? 장관이냐? 동서기다. 이런 전쟁하지 않아요. 너희 교회 교인 수 몇 명이야, 헌금 얼마 나와, 너희 목사 어느 대학 나왔어? 이런 전쟁하지 않습니다. 너 일 년에 몇 명 전도했어? 이런 전쟁하지 않습니다. 새벽기도 몇 번 나갔어, 성경 쓰기 몇 번 베껴 썼어? 이런 전쟁하지 않아요. 선교회비 얼마 냈어? 이런 전쟁하지 않습니다. 예배 몇 번 참석했어? 이런 전쟁하지 않아요. 물걸레 들고 청소 몇 번 했어? 이런 전쟁하지 않습니다.
무슨 전쟁? 째깍째깍 다 이루었다, 그 전쟁이에요. ‘다 이루었다’의 전쟁. 내가 하지도 않았는데 주께서 이미 죽었다가 사신 분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나를 매일같이 너는 나 아니었으면 진즉 죽었어, 라고 늘 되풀이해서 알려주고 통보해주는 그 통보의 전쟁, 너는 네 이름으로 산 적이 없어. 발걸음 하나, 머리카락 하나 임의로 만들어진 적이 없어. 다 내가 필요해서 내가 영적 전쟁의 군인이 되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찾아간 거야, 라는 그 통보와 그 알려주심 그 전쟁이에요.
그러니까 성령이 없는 사람은 뭡니까? 맨날 교회 가서 기도해야 돼. 맨날 봉사해야 되고 맨날 목사 섬겨야 되고 맨날 십일조하고 헌금해야 돼. 왜? 그것 안 하면 내 밥 먹고 사는데 하나님께서 벌 내리고 지장이 많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일 년에 두 차례씩 기도원에 가서 수련해야 되고 맨날 내 단도리 내가 해야 돼요. 왜? 내가 아직도 나한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아직도 살아 있는 나를 내가 챙겨야 되기 때문에. 내가 챙기지 않으면 나는 못 살기 때문에.
내가 여기서 만약에 신앙생활 소홀히 하게 되면 이십오 년 동안 신앙생활 했는데 지옥 가는 수가 있기 때문에 내가 신앙생활 실패로 끝나는 그 아찔한 순간을 내가 못 견뎌요. 그래서 내가 부지런히 나를 재촉해야 되고 채찍질해야 되고 나를 패든지 해서 나로 하여금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도록 내가 나를 때려야 돼요. 훈육해야 되고. 그 짓하고 있다고, 그 짓. 왜? 자기 안에 자기밖에 없으니까. 내가 나를 살려야지 아무도 나를 안 살리기 때문에.
그게 바로 이스라엘은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 자체가 얼마나 자기 행함 중심인 것을 들춰낸다. 그렇게 전쟁해서 여기 5장 20절에 보면, 도우심을 입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부르짖었는데 하면 뭐합니까? 5장 26절에서 오늘날 그때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지요. 그때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었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26절 마지막에, “오늘날까지 거기 있으니라” 오늘날에 그들은 뭐했습니까? 여호와께 범죄 해서 그들은 사로잡혀갔는데요. 앗수르에 사로잡혀갔어요. 이스라엘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졌을 때 북쪽은 앗수르에 722년에 멸망당하고, 남쪽은 586년에 망했거든요. 빼기하면 어떻게 됩니까? 136년 후에 남쪽의 유다나라는 바벨론에게 망해요. 그래서 포로 잡혀가는 것이 북쪽이 아니고 남쪽 유다나라가 잡혀가요. 그래서 그게 오늘날이에요.
그래서 오늘날은 누구 중심이냐 하면 아까 처음에 했지요. 이스라엘 망하면서 이스라엘 만든다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역대상이 무슨 중심이냐? 유다 지파 중심이에요. 열두 지파 가운데 유다 지파 중심입니다. 그러면 제사장들은? 제사장들은 다 날아갔어요. 제사장들도 전부 다 율법 어길 때 히마리 없이 다 날아갔어요.
제사장도 없고 율법을 지키던 그 시절이 끝나고 특정한 왕에게 모든 책임을 다 일임해서 왕이 이스라엘을 다시 살려내라는 그 직무를 유다 지파한테 받았고 유다 지파 안에서도 다윗 자손에게 이 이스라엘을 살려내는 임무를 맡긴 겁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에 와서 해석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전에 있던 결정된 과거를 지금 오늘날, 그러니까 유다 지파 다윗 계통 중심으로 일한다는 다윗 계통에서 결정을 다시 내린 거예요.
그래서 이걸 뭐냐? 모세언약에서 다윗언약으로 전환되었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언약으로 일하다가 그 다음 아브라함언약으로 일하다가 그 다음 이삭언약으로 일하다가 그 다음 야곱언약으로 일하다가 그 다음에는 무슨 언약? 모세언약으로 일하다가 모세언약 말고 그 다음에 다윗언약으로 일하는 거예요.
이 언약이 바뀔 때마다 하나님께선 다시 과거에 대해서 과거를 새로운 재료로 사용해서 과거에 인간아 실패했지, 실패했지, 실패했지. 실패했으니까 너희는 실패하지 마. 하나님은 성공하고 말리라. 그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실패가 우리가 오늘날 성도 인생은 매일 실패하라고 하루를 살게 하시는 거예요. 계속 실패하라고. 우리가 실패 안 하게 되면 째깍째깍 떠오르질 않아요. 실패하고 실패했을 때 다 이루었다가 새로운 감사와 은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제가 월요일 대전 강의할 때 두 번째 시간에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성령이 와서 성도에게 하는 것은 딱 이거다. 뭘 하느냐 하면 손가락으로 이마를 모독하듯이 쑤시면서 너, 실패자야. 너는 널 몰랐지. 내가 알려주마. 너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실패자야.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성도에게.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다 날아가요. 지가 성공할 수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에 마귀가 짊어준 무거운 짐을 감당도 못하면서 낑낑거리면서 교회생활하게 했던 겁니다.
그런데 너는 아무리 해도 네 자신을 몰라. 왜? 너는 자꾸 성공하려는 의도가 있어. 그게 잘못이야. 너는 애초부터 성공이 안 되는 실패자야. 실패자를 내가 네 속에 들어와서 너를 구원에 성공케 하고 하나님 백성 만들었어. 이 한 마디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한꺼번에 다 날리게 만들어요. 다 날려버린 거예요. 실패자가 뭐가 무섭고 어차피 실패했는데 못할 게 뭐가 있습니까.
제사? 그것 왜 드리는데? 할 필요 없어요. 실패인데 뭐요. 나에 대해서 투자할 이유 없어요. 나에 대해서 희망 가질 이유가 없어요. 그냥 주님이 주신 것 주님의 거저주신 껍데기지만 껍데기로 만족하는 것, 이것이 바로 간음한 여인에게 찾아와 하신 말씀, 네가 오늘부터 자유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그 자유는 아무도 누구한테 빼앗기지 마세요.
10분 쉽시다.
20220304b 울산강의-역대기상(8강) 4장 10절 : 야베스의 기도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등록된 사람들입니다. 등록이란 것은 그 자체적으로 나중에 계보와 족보를 이뤄요. 주님이 등록시켰기 때문에 빼도 박도 못해요. 그것도 혈통적으로 등록한 겁니다. 이거는 본인의 아버지를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아버지가 결정되면 자식도 결정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역대상은 족보에 관한 건데 족보에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단면족보와 선형족보가 있는데, 선형족보(계보)라는 것은 깊이 있게 선을 얇게 그어서 이런 뜻이에요. 결국은 이 사람이 나타나고야 말았다. 마지막에 특정 인물을 보여주기 위해서 선형족보가 이렇게 있고 그 다음에 단면족보가 있는데 단면족보(계보)라는 것은 같이 있는 파생돼 있는 그 족보와 이질적인 것이 막 끼어들어서 그 족보에 있는 등록된 사람과 끼어든 사람과의 관계를 설명할 때 이걸 단면족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선으로 된 선형족보에 있어서는 결국 이 사람은 나타나야 한다, 라는 이야기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노아의 아들 같으면 셈과 야벳과 창세기에선 함으로 돼 있지만 여기선 뭐냐 하면 셈을 제일 마지막에 둬요. 함과 야벳과 셈. 앞에 있는 것은 날아가고 마지막에 결국 셈은 이렇게 등장해야 된다는 거죠.
그럼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는 이삭과 이스마엘이지만 이삭을 나중에 둠으로서 이스마엘과 대비시켜서 앞에 있는 이스마엘과 뒤에 나오는 진짜 중요한 인물과 비교해봐라. 앞에 있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선형은 등록시키기 위해서 계속 잘라내는 작업을 병행해서 이뤄지는 겁니다.
등록하는 것,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섬에 놀러가서 함부로 조개 캐고 하면 안 되지요. 갯벌에 서해안에 가서 어민으로 등록된 사람만 아빠들이 조개 캘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원 생활한다고 촌에 가서 텃밭 가꾼다고 농업인 아니에요. 농업인 되려면 등록이 돼야 되고 평수가 돼야지 텃밭 가꾼다고 농업인 되는 것 아닙니다. 등록이 돼야 법적으로 나라에서 보호를 받게 돼 있어요.
심지어 어떤 직업을 해도 전부 다 등록해야 돼요. 등록하고 회비내고 해야 됩니다. 트롯 가수해도 우리나라 가수협회 등록하고 회비내고 앨범내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등록한다는 것은 법적으로 보장을 받는 동시에 책무도 다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리도 등록하게 되면 아까 계보가 형성되고.
그러면 등록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보여주는 것은 세상과의 차이점입니다. 자, 세상은 보편성에서 나와서 개별성이 돼요. 인간의 개별적인 속성은 모든 아담의 속성에서 삐져나온 게 하나의 분여된다, 할당받는다. 인간은 고만고만하고 별다른 인간 없는 이유가 모두 다 아담이란 보편성에서 그렇고 그런 인간들 중 하나에요. DNA가 유전자가 비슷비슷하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특별한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세계에선 용납이 안 돼요. 성령 받은 사람을 국가에선 뭐냐 하면 성령 받았다 하지 않습니다. 종교인이라고 이야기하죠. 종교 취미를 갖고 있는 사람, 다른 사람은 종교에 취미가 없는 사람, 그렇게 되지 성령 받고 성령 안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 관점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은 성경에 나와 있는 거예요. 세상에서는 그런 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누구 죽어봤나, 누구 천국 가봤나? 이런 식이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그걸 인정해주지 않아요.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의 기본 특징은 뭐냐?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을 수가 없지요. 세상 가는 길이 다른데, 그건 넓은 길이고 멸망으로 가는 길인데 멸망으로 가는 사람한테 내가 왜 인정받아야 돼요?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여자가 시집가게 되면 제일 먼저 신경 쓰는 게 뭐냐? 시집에서 내가 며느리로서 인정받는가, 그게 제일 신경 쓰여요. 모든 행동은 다 그렇게 처녀 때 행동, 친정에서 살았던 행동 다 고쳐지는 겁니다. 그게 뭐냐 보편성이 뭘 만든다? 그 집안의 개별성을 낳는 거예요.
스무 살 때까지 군에 갔다 오기 전까지 지 마음대로 살다가 회사 딱 취직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새벽 여섯 시까지 일어나야 돼요. 왜? 여덟 시까지 출근해야 되니까. 이거는 취직 안 할 때는 상상도 못한 겁니다. 취직 안 할 때는 새벽 두 시에 자고 아침 열 시에 일어나잖아요. 그런데 취직하고부터는 입기 싫은 양복 입어야 되고 구두 닦아야 되고 출근해야 되고. 취직 안 할 때 꼰대라고 욕하다가 꼰대가 나중에 자기 과장인데 꼰대 말 안 들으면 잘리는 수가 있는데 월급 날아가고 서울서 혼자 못 사는 데요? 월세도 못 내는데. 안 되겠지요.
인간은 누가 만드느냐? 인간은 사회가 만들어요. 가정에서 만드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잖아요. 군에 가면 인간 되겠다. 왜 군에 가면 인간 되느냐 하면 군에는 개인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보편성만 인정해줘요. 전에는 인간을 학교에서 했잖아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학교에서 인간 만듭니까? 학교에선 지 자랑하기 바빠서 지 개성 발휘하는 장소가 됐지 보편성은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보편성 하면 학생들 인권문제 들고 나와요.
아직도 인권문제가 그다지 심하지 않은 데가 군대입니다. 군대는 아직 좋아요. 그리고 직장생활. 직장, 사람 새로 개조합니다. 딱딱 시간 지켜야 되고 아침에 출근하기도 싫은데 컴퓨터 모니터로 하루일과가 쫙 메일로 다 보내지고 하나하나 체크하다보면 자진해서 퇴근시간 반납하고 야근까지 해야 돼요. 안 그러면 그 다음날 되면 지시사항이 또 내려오니까 집에 가서 하든지 밤샘하든지 해야 돼요.
그것 못하면 회사에서 무능력자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발적으로 퇴직을 강요한 셈이 되지요. 나가야지요. 너, 회사 왜 나왔냐? 나하고 안 맞더라. 자기하고 왜 맞아요. 자기는 어딜 가도 보편성 속에 사는 부속품인데 어떻게 조직이 자기를 맞춰야 돼, 자기가 조직에 맞춰야지. 그렇잖아요.
인간은 신이 되기 위해서 태어났지만 그 신은 더 센 신한테 호되게 평생을 시달리다가 결국은 죽습니다. 속마음은 신이 되고 싶은데 사회는 나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지요. 그 사회가 요구하는 내가 돼야 돼요. 그래서 이 세상은 뭐냐?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자를 뭐라고 하느냐? 이걸 출세라고 이야기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게 출세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보편성에서 개별성이 있는 게 아니고 아까 이스라엘 속에 특수한 개별성이 있어요. 역대상에서는 역대하도 마찬가지지만 이 특수한 개별성을 뭐로 봤냐 하면 이게 바로 유다 지파고 그중에서도 다윗의 자손을 특수한 개별자로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 이걸 꽂아 넣습니다.
역대상 1장 1절부터 2장 2절까지는 아담과 이스라엘 전체를 다 이야기하고요. 이것 찾아봅시다. 역대상 9장 3절 누가 읽어볼까요. 오늘 강의 이것만 찾아볼게요.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과 에브라임과 므낫세 자손 중에서 예루살렘에 거한 자는” 그렇게 돼 있지요. 여기에 아까 봤던 5장 26절에 오늘날에는 북쪽 나라가 다 날아가 버려요.
그럼 남아있는 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에 다윗의 등불이 남아있는 것은 북쪽 나라는 히마리 없고 남쪽의 유다 지파만 남아있어요. 그러면 사람들은 이스라엘 다 죽었잖아. 아니에요. 역대상에 보면 북쪽에 있는 지파들이 신앙생활 제대로 하겠다고 북쪽에 살지 않고 남쪽으로 이주를 해요. 이사를 한다고요. 그중에 많이 이사한 쪽이 뭐냐? 레위 지파에요.
레위 지파가 이사해서 “그래, 우리 북쪽은 잘라졌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희망,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희망은 역시 남쪽의 유다나라야.” 그래서 오는 겁니다. 그 프로가 무슨 프로냐 하면, <이만갑>이에요. 이제는 만나고 싶습니다.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들 모인 프로 있지요. 티비조선에서 하는. 북한 이야기해서 예능프로를 이어가잖아요. 북쪽에 있는 북한 사람들이 남쪽 좋다고 넘어온 거예요.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반갑습니다, 노래 불러가면서 재롱을 떨고 있어요. 북한에 궁금한 것 이야기하고 프로가 진행되는데....
북쪽에 있는 것이 남쪽에 흡수됐다는 말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보편성이 어디로 굳혀지느냐 하면 한 지파로 굳어지는 겁니다. 고 배치, 고 등록된 계보의 배치를 그렇게 한 거예요. 1장 1절에서 2장 2절까지는 아담에서 이스라엘까지 다 하고요. 그 다음에 2장 3절에서 55절까지는 유다a, 그 다음에 유다a 중에서도 핵심부분 3장 1절부터 24절까지는 다윗. 다윗은 유다 지파에 속합니다.
유다 지파 가운데서 부각되는 것, 핵심 되는 부분을 또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족보. 족보라고 같은 족보가 아니란 말이죠. 어떤 특수성에 둘러싸인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평면으로 보면 편평하게 돼 있지만 옆에서 보면 이스라엘 제일 중심에 다윗 계보가 있고, 다윗 계보에 가장 근접해서 유다 지파가 있고, 그 다음에 유다 지파와 함께 베냐민 지파, 시므온 지파가 가까이 있거든요. 남쪽. 그 다음에 북쪽, 제일 마지막에 아까 요단 강 그쪽에 동쪽. 그러니까 족보이야기는 동쪽부터 시작해서 제일 중요한 것을 마지막에 이야기하듯이 동쪽부터해서 그 다음에 남쪽, 북쪽 하고 유다와 다윗을 그 중간에다 집어넣어요.
그래서 2장 2절에서 55절까지 유다 지파a, 3장 24절까지는 다윗 계보, 4장 1절부터 23절까지 다시 유다 지파, 그 다음에 유다 바로 밑에 시므온 영토, 그 다음에 5장에 보면 동쪽 지파. 우리가 5장하고 있는데 르우벤, 갓 그 다음에 끝나면 요단 서편 동쪽 므낫세. 그 다음 7장에서는 잇사갈, 잇사갈은 북쪽에 있어요. 잇사갈, 납달리.
이스라엘 북쪽에 보면 갈릴리 있고 사해 있고 요단 강 있는데 여기 아셀 지파, 스블론, 잇사갈, 막대처럼 기다란 건 납달리, 이쪽은 동쪽 므낫세, 요쪽이 서쪽 므낫세, 이 밑에 에브라임, 요 밑에 베냐민, 그 밑에 유다, 옆에 시므온, 이쪽 옆에는 단 지파. 이렇게 돼 있는 거예요. 동쪽에서는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동쪽 므낫세 지파. 이래서 열두 지파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레위 지파는 어디 있느냐? 레위 지파는 다 섞여있어요. 여섯 개의 도피성 중심으로 돼 있는데 여섯 개의 도피성이 각각 삼십 킬로미터 간격으로 띄워져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할 때 결국 마지막에 메시아가 진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실 분은 다윗의 자손부터 나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과거 해석을 다시 결정하는 거예요. 예수님에 의해서.
지금 평소에 우리가 3월 2일에 행동한 걸 내가 평가하잖아요. 3월 3일 되면 내가 평가하고 3월 4일 되면 내가 평가하는데 사실은 주님 보시기는 평가가 소용없습니다. 내가 주인공 같으면 내가 평가하겠는데 나는 잘했다, 못했다 하겠는데 잘했다/못했다 자체가 선악체제에요. 이건 버려야 돼요. 왜? 못한 것밖에 없는데 뭘 잘한 게 있어요.
선악과 따먹는 자체가 우리에게 죽음을 유발했고, 그건 주님 뜻대로 죽어 마땅하지 거기에 뭐 기도했으니까 잘한 것이다. 기도 안 했으면 나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신앙생활을 일기장에 점수 매기는 사람 있습니다. 오늘은 75점, 오늘은 70점. 그 일기장 불속에 들어갑니다. 사람이 얼마나 위선자인지요. 사람이 점수를 매길 때도 자기 몸이 멀쩡하고 건강할 때는 점수 매길 수 있어요.
이가 아프다, 온 몸이 아프다, 췌장암 걸렸다. 그러면 이게 점수가 됩니까? 사람이 아프면 짜증나게 돼 있고 짜증나게 되면 성령의 열매,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 아픈데 형제우애 됩니까? 지 아픈 사이에 형제들이 아버지 유산 다 저희끼리 n분의 1 갈라버리면 그게 형제우애가 됩니까? 안 되지요. 아파서 회사 잘렸는데 그게 양선이 되고, 온화함이 됩니까?
인간은 지 성질이 얼마나 더러운지를 몰라요. 잠시 몸 아픈데 없고, 아픈데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해요. 아픈데 없고 습도가 47%에다가 온도가 14.2도 해보세요. 거기다가 산들바람 불어보세요. 갑자기 온화해지지요. 인간은 육체적인 존재에요. 모든 감정도 육체의 감각과 관련돼 있다고요.
새벽 기도한다고 은혜 막 하려고 하는데 목사가 지 퇴근한다고 난로 검댕이 날아오고 기침해보세요. 기도가 됩니까? 욕이 막 나오지요. 사람은 진짜 산들바람 불듯이 따뜻한 봄날, 그리고 옷차림도 거기에 맞춰서 바깥 온도 25도인데 지는 외투 입어보세요. 이게 온화합니까? 짜증나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모든 감정은 조작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 시절에 조작한 거예요.
수요일에 제가 그런 설교했습니다만 자기를 속이는 자가 누구냐 하면 본인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는데 쉬지 말라고 속이고 있어요. 계속 자기 자신을 속입니다. 자기가 믿음이 있는 것처럼 조작해요, 인간은.
주님께서 특수한 개별자에게 모든 것을 일임해버렸어요. 이걸 무슨 언약? 다윗언약. 하나님이 율법에게 맡긴 것은 모세언약, 이제 율법이 아니고 다윗에게 맡긴 것은 다윗언약. 그럼 율법은 어디 가냐? 율법의 모든 뜻을 다윗이 인수인계 받는 거예요. 회사 합병한 겁니다. 사원들은 그냥 다니면 돼요. 사장만 바뀐 거예요. 사장만. 전에 있던 회사 다 인수인계 받아서 그냥 운영하게 되면 사원은 안에서 그냥 누리면 되는 겁니다. 사장, 회장님이 운영만 잘하면 월급은 따박따박 다 받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뜻이에요. 이 뜻이. 주 예수 이름 부른다고 지가 앵무새처럼 이런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님이 하신 공로로 구원받는 게 주 예수 이름이에요. 그래서 예수님 안에 등록되는 겁니다. 성령으로 등록되게 되면 우리는 나의 개별자, 나의 개체는 모든 가치와 의미는 우리는 챙기지 못합니다. 왜? 다 가져가니까. 특수한 개별자가 몽땅 나를 다 빼앗아가요. 다 강탈해가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보지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보면서 예수님께서 병자들 고칠 때 귀신 쫓아낼 때 그때 고침을 받은 사람들 공통점을 살펴보세요. 고침 받은 그들은 고침 받기 전처럼 자기 개인으로 돌아가던가요, 아니면 예수님께 복속되던가요, 어느 쪽입니까? 자유다, 내 인생 살면 된다, 이런 식으로 돌아가던가요, 아니면 이제는 주님 없이는 못 살아요 이렇게 되던가요, 어떻게 됩니까? 주님 안의 나에요. 예수 안의 나라고요.
예수님 회사에 취직한 거예요. 전에는 백수처럼 놀다가 주께서 주님 회사에 취직시켜주니까 이제는 먹든지 마시든지 죽든지 살든지 다 주님의 소유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뭐라 하느냐 하면 개별자의 순수성이 다수로 연속된다, 이래 돼요. 개별자, 다윗의 자손 예수님의 순수성이 이제는 다수에게 분배되는 겁니다.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선물을 주셨다. 성령을 선물로 준 거예요.
이거는 내가 노력해서 얻은 선물이 아니고 주께서 다 이루심에서 오는 선물을 주는 거예요. 산 위에 저수지가 있는데 여기에 열두 개의 농가가 있다고 칩시다. 그럼 농사지으려 하면 물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저수지는 하나에요. 하나에서 농가로 내려가는 관로, 물이 흘러오는 거예요. 이 물은 본인의 물이 저수지에 있던 공통의 물이 이 안으로 흘러들어온 거예요.
그럼 공통의 물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소망이 있고 예수님의 믿음이 있고 예수님의 사랑이 있는 거예요. 그걸 성령을 통해서 주니까 각자 받은 농가 속에는 내 믿음이 아니고 주님의 믿음이고 내 소망이 아니고 주님이 소망이고 내 사랑이 아니고 주님의 주신 사랑으로 있다 이 말이죠. 이래서 그들은 아무리 여럿이 되어서 아무리 숫자가 많아요. 주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 받은 사람이냐, 안 받은 사람이냐 어떻게 우리가 분간할 수 있는가? 이거는 저수지 물 내려오면 되잖아요. 내 행함 말고 주님이 거저주신 것 있잖아요. 주님이 거저주신 것 내놓으면 될 것 아닙니까. 교인들이 서로 이야기하고 성도들이 이야기하면 주님이 주신 거저주심을 되는 거예요. 거저주신 내용이 뭐냐? 별로 주님께 받은 게 없는데 지금까지 내 힘으로 월급 받고 내 힘으로 냉장고도 다 샀는데 주님께서 준 게 있어야 내놓지.
사람들은 충분히 그렇게 차마 말은 못하지만 속으론 그런 말하고 싶어서 가만있질 못하지요. 이론은 맞는데 받은 게 있어야 내놓지. 아무것도 없는데 내 자식도 내가 키웠고 심지어 백 하나도 내 돈 주고 내가 샀는데 그걸 주님 주신 것이라고 하면 남들이 나보고 믿음 좋다고 이야기하겠지. 하지만 남들이 믿음 좋다고 하지만 내가 그게 진심이 아닌데 그게 무슨 소용 있어요.
그때는 주께 주신 게 뭐냐 하면 전쟁입니다. 영적 전쟁은 세계 간의 충돌이에요.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쪽 세계는 이렇게 살아가더라가 나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지옥 갈 세상에서는 이런 식으로 살아가더라, 라고 거침없이 내놓으면 그 사람은 이쪽 세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왜? 전쟁 중에 있었기에. 그걸 세계 간의 충돌이라 이렇게.
그러면 이쪽 세계, 지옥 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게 되면 너는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그러면 당신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날 위해서 나밖에 모르는 사람, 돈밖에 모르는 사람, 그저 자기만 출세하면 다 행복인줄 아는 그런 사람에서 당신은 어떻게 빠져나왔어요, 라는 말을 분명히 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때는 뭐냐? 나도 모르지, 주께서 하셨는데, 내가 했냐? 주께서 선물로 줬는데 어떻게 빠져나온 나는 모르지. 기도해서 빠져나온 것도 아니고 헌금, 십일조해서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주셨지, 그냥.
등록의 차이거든요. 이쪽은 이미 등록됐잖아요. 어민으로, 농부로 등록됐는데 이 등록은 인간으로 할 수 있는 등록이에요. 왜? 지옥 가는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이쪽 등록은 내가 하고 싶어서 등록하는 게 아니에요. 교회 등록한다고 세례식, 성만찬 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이 점에 대해서 이쪽 세상 세계에 대해서 저들은 저렇게 살아가더라, 라는 것을 둘 다를 알지요. 이쪽 세계, 그리스도 세계도 알고 세상 세계도 알지요. 왜냐하면 그쪽에서 살다가 왔기 때문에. 그쪽에서 마음껏 내 실력과 세상 사람으로부터 어떻게 내가 진짜 괜찮은 인간이라고 인정받기 위해서 평생을 수고했던 그 수고, 그게 얼마나 나를 지옥 가게 만드는 악마의 수법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기에 이제는 세상의 인정 같은 건 개나 줘버려라 하고 이쪽 세계로 옮겨진 상태.
그 상태에 대해서 여기 역대상에서는 뭐라고 하는지 예가 나와 있습니다. 역대상 4장 9절에서 10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이 대목입니다. 이게 역대상 4장에 나오거든요. 사람들이 역대상 4장을 잘 안 봐요. 그런데 한 이십 년 전부터 이 대목이 갑자기 확 떴어요. 유명했어요. 왜냐하면 그 당시에 우리나라 부동산투기가 아주 번졌거든요. 그러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부동사투기해서 돈 벌 수 있는 구절 없는지 찾아낸 것이 야베스의 기도라는 겁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여러분들이 보셨으니까 거기에 어떤 대목 나옵니까?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부동산 아닙니까. 그냥 복을 주는 게 아니라, “복에 복” 더블 복, 복을 더블로 주게 하옵소서. 야베스의 기도하면 복을 받아서 부동산값을 대박 난다는 그것으로 그렇게 하는데 누가 부동산을 못 누려서 환장을 했느냐 하면 하나님 자신이, 야 교회 다니는 인간들아, 내가 야베스 기도하면 다 부동산 완전히 대박 나도록 해준다는 데 왜 너희는 야베스 기도 못했느냐, 추궁하는 것처럼 느낀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래서 내가 부자 못 되고 가난하게 된 것은 야베스의 기도를 못해서 그렇구나, 해서 야베스의 기도가 유명하게 된 거예요. 역대상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는데 갑자기 역대상이 붕 뜬 거예요. 유행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야베스의 기도에 대해서 목사님 해석이 무엇입니까, 물을 필요도 없어요. 본인이 해석 다했는데 새삼스럽게 목사가 엉뚱한 소리하면 산통 다 깨잖아요. 물을 필요 없어요. 목사님 이야기하지 마세요. 이건 내가 알아서 딱 내 이야기입니다, 이런 식으로 믿고 야베스의 기도를 하는 거죠. 야베스가 누군지 몰랐는데 이때부터 야베스가 유명인사가 됐어요.
야베스가 역대상 4장입니다. 4장은 어디 있느냐 하면 역대상에서 바로 유다b에 속하는 거예요. 유다 지파에 나오는 유다b에요. 그러니까 다윗이 아니고 유다에요. 유다 지파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말은 뭐냐 하면 단면계보에 속합니다. 아까 선행계보가 아니고 직통해서 다윗에게 솔로몬에게 꽂히는 게 아니라 단면계보, 유다 지파인데 서로 이러한 유다 지파에 인물들이 끼어서 그들이 어떤 관계를 갖추느냐를 그 면까지 다 보여주는 계보, 족보, 그게 단면계보에요.
그렇다면 오늘날, 여기서 오늘날 하면 2022년을 말하는 게 아니고 그 당시 역대상을 기록했던 오늘날에 있어서 야베스의 땅을 넓힌다는 건 뭔 뜻인가? 이거는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릴게요. 다시 돌아와 이 땅 줄게. 왜냐하면 야베스가 어디 속하느냐 하면 유다 지파에 속하거든요. 원래 야곱은 한 명이잖아요. 야곱이 자식을 몇 개 낳아요? 열두 명이죠. 아까 이야기한 한 개별자가 열두 명의 자식을 낳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복은 어딜 거치느냐? 아브라함의 복이 어디에 오고? 이삭에게 오고. 이삭에서 어디로 갑니까? 야곱에게 오지요. 야곱에서 열두 지파에게 흘러들어갑니다. 아브라함에서 이삭, 이삭에서 야곱, 야곱에서 열두 지파 할 때 이렇게 내려오면서 어떤 게 있느냐 하면 반전드라마가 이뤄져요. 언약 하나가 다음 언약할 때는 반전드라마, 거꾸로 뒤집는 드라마가 나옵니다.
어떤 식으로 반전이냐 하면 출생의 비밀에서 어떤 부잣집에 어렵게 사는 여인네가 쌍둥이 딸을 낳았는데 한 딸은 부잣집에 양자로 맡겨놓고 한쪽은 어떤 집안에 양자로 맡겨놨는데 A라는 부잣집은 계속 부자 되어 재벌 되었고 한쪽 집안은 너무 가난하고 착하기만 한 흥부 같은 집안에서 점점 못 살아서 겨우 시장에서 떡볶이 장사나 하면서 먹고 사는 그 딸이 있더란 말이죠.
서로 형제간인지 모르고 둘이 헤어졌는데 B에 있는 이 딸은 못 살지만 마음씨 착해요. 그래서 재벌 회사에 말단 사원으로 취직을 합니다. 언니는 상속자 딸로 돼 있고 동생은 이 집안에 인턴사원으로 취직을 하는데 취직한 첫 날에 재벌 아들 만나서 서류 들고 가다가 커피를 쏟아버려요. 멀쩡하게 생긴 키 크고 인물 좋고 돈 많은 재벌 아들에게 옷을 할 때에 역시 재벌 아들은 주인공은 멋있잖아요. 괜찮아요. 다친 데 없느냐고 오히려 넘어진 그 딸이 얼굴을 드는 순간 빠지직 갑자기 둘이 반해버린 거예요. 안 그러면 계단에 넘어지려고 할 때 손을 딱 잡아준다든지. 이런 드라마가 한둘이 아닙니다. 아침 막장드라마 나오고요.
문제는 양자된 언니가 동생인 줄 모르고 굉장히 구박을 해요. 나중에 보니까 지금 말이 꼬여버렸는데 쌍둥이가 아니고 사실은 옆집 아이인데 유전자조사를 해보니까 진짜 재벌의 아들은 못 사는 딸이 진짜고 가짜가 끼어들어왔다. 내용이야 원래 아침드라마는 지 마음대로 바꾸니까 갑자기 무당 됐다 빛이 났다 이러니까.
반전이란 말은, 모든 인간은 창세기 32장에서 영생이란 꿈도 꾸지 못하고 우리는 마귀의 종으로서 죽어 마땅하고 지옥 가야 됩니다. 그게 인간이에요. 그런데 선악과 따먹고 선악지식을 아니까 내가 악에서 선하게 살면 마치 죽어서 선한 사람들이 가는 천국에 갈 것처럼 매일 우리의 행동과 일상과 마음가짐이 착하게 살면 하나님께선 양심도 있고 눈이 있기 때문에 뭐라도 나에게 복이 될 것이라는 그런 막연한 기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인간은 소위 양심이란 게 있어서.
동양철학이 다 그런 것 아닙니까. 나는 종교가 없다 해도 그 사람 속에는 양심이 내 종교라 하잖아요. 바르게 살게 되면 복 받더라. 내 주위에서 한두 명 본 게 아니다. 그러니까 양심대로 살아서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잖아요. 그래놓고 기독교라는 걸 만들었어요. 교회를 만들고. 양심대로 살 사람 다 모여라. 그래서 교회에 다 모아놓고 교회 다 지옥 가잖아요.
왜 양심은 뭘 해도 썩은 양심이란 걸 복음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발견해야지요. 너, 실패자야. 그러한 기쁜 소식을 지금 제가 이야기해도 안 들어요. 내가 얼마나 잘난 존재인데. 맨날 이렇고 있다고요. 남들이 날 좀 인정해주면 좋겠다. 같은 교인들이 인정해주면 좋겠다. 내가 얼마나 착실하게 살아가는지. 내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윤동주의 시처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혹시 내 잘못인가해서 나는 벌벌 떨었노라, 이런 식이라. 아주 섬세하게 선과 악에 대해서 아주 예민한 감각을 가지 어떻게 하든지 악을 저지르지 않고 착함만 추구하는 것, 지옥이나 가라.
반전을 몰라요. 모든 언약에 반전이 있다는 것.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에 서기로 했지만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자기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삭은 꿈도 못 꿨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서 이스마엘이 후계자 아님을 보여주시고 더 나아가서 이삭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이삭을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께 어떻게 하라? 네가 바쳐버려라. 죽어버려라.
그래서 우리는 뭐냐 하면 죽음이란 것, 나의 죽음을 섞어서 이야기하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언약에 등록된 사람이에요. 나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아까 했지요. 첫 번째 먼저 닥쳐오는 거예요. 나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해서 내가 사는 게 오히려 신기하고 신비롭고 왜 내가 아직도 살아 있지, 그 덩어리 자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에요. 이것은 매일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과를 간섭해야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이삭도 마찬가지에요. 이삭도 당연히 자기 맏이에게 복을 주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첫 번째로 태어나게 해서 야곱에게 복이 있게 하시는 게 아니고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쌍둥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게 했어요. 인간적으론 첫째가 장자고 둘째는 차자다, 이게 마땅한데 마땅함을 먼저 주고 마땅함을 뒤집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맏이가 아버지 마음에 쏙 들어요. 이삭은 사냥하는 아들을 더 좋아해요. 바깥에 돌아다니는 것을. 야곱은 곱상하게 있으면서 음흉한 인간이에요. 아버지는 야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치고 싶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사랑하고 이삭이 좋아하는 그 맏이를 미워하셨습니다.
야곱이 이 사실을 알고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면면을 다 보여주시고 의도적으로 뒤바꾼다는 사실을 깨닫고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했을 때는 자리를 바꾸는 게 아니고 야곱이 자기 손을 크로스해요. 뭘 이야기하려고 합니까? 이게 인간들의 생각이고 크로스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니까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이 누구도 메시아인 줄 못 알아보도록 오신 거예요. 아무도 자력으로 자기 힘으로 예수님을 못 알아보게 하신 거예요.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어도 마땅한 천하의 죄인입니다. 그런데 지금 후대에 와서는 예수님을 사대성자로 막 높여요. 특히 천주교 이런 데 막 높인다고. 으샤으쌰 해서 얼마나 훌륭하냐 죄인을 위해서 자기 몸 바치다니, 그렇게 아부하면 천당 보낼 줄 알고.
그런 식으로 주께서 구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완전히 망가져야 되고 완전히 실패자란 사실, 세리와 창기보다 더 못한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에서 비로소 발견하는 나는 하나님 앞에서 할 수도 없고 한 게 없고 앞으로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하는 그 순간을 그렇게 뒤집어버리는 만들어버리는 주님이 찾아온 순간입니다. 유도에서 씨름에서 뒤집기라 하지요. 주께선 뒤집는 식으로 우리에게 신앙을 주십니다. 다른 방식은 기대하지 마세요.
이건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야곱도 열두 아들에게 전해줄 때에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땅에서 누이 디나를 강간했다고 힘으로 다 죽이는데 강간한 그 인간만 죽인 게 아니에요. 그 땅 남자들 다 죽여 버렸어요. 심지어 재산까지 빼앗아버렸으니까. 그때 야곱이 둘로 나눠집니다. 성질부리던 야곱, 이게 열두 아들이에요. 야곱이 성질부리다가 하나님과 싸웠던 그 못 돼먹은 야곱은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어요.
그래서 열두 아들을 이스라엘로 바꾸는 작업이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육적인 야곱을 하나님과 직접 만나고 난 뒤의 이스라엘. 육적인 야곱은 멀쩡한 야곱이지만 하나님 만난 야곱은 뭐냐? 자기 힘의 바탕인 넓적다리가 완전히 절어버렸어요. 말이 절은 것이지 사실은 죽은 거예요. 야곱이 죽어서 이스라엘된 겁니다. 예수님 죽어서 예수님 부활하듯이 죽음은 육으로 오셔서 영으로 부활하시잖아요.
그러니 창세기 3장 24절 육 자체가 이미 하나님께 버림받은 거예요. 하나님께 버림받은 우리를 버림받은 자의 행함이나 성과나 선물이나 이런 것 일체 받지 않고 어떻게 일방적으로 버림받은 자를 자기 백성 만드는 그 과정, 그 과정에는 점점 더 하나의 특수한 개별자로 모든 방향이 모든 역사가 집중하게 돼 있어요. 그 집중한 것이 유다 지파였고 유다 지파에서 나온 것이 다윗 자손이고 다윗 자손에서 마지막에 오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을 누구라 해요? 다윗의 자손이여, 예수 그리스도에요. 예수님 안에는 뭐가 있느냐? 역대상이 다 들어있는 겁니다.
그러면 야베스는 뭐냐? 야베스는 유다 지파와 관련된 인물이에요. 한 사람의 공로로 결국은 야베스 족속이 다시 약속의 땅에 있거든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아닙니까. 북쪽에 바벨론 있거든요. 현재 이란을 바벨론이라 해요. 그쪽으로 포로 잡혀 갔습니다. 가고 난 뒤에 바벨론이 칠십 년 만에 망하고 그 다음에 바사나라가 돼요. 지금의 이란, 페르시아, 페르시아 만 있지요.
그 나라에 고레스 왕이 있는데 고레스 왕을 두어서 다시 본토로 포로 잡힌 자를 데려오게 만들어요. 그래서 이 빈 땅을 다윗 자손, 이스라엘 땅으로 만드는 이 기도를 야베스가 한 겁니다. 그러면 지금 사는 이스라엘은 야베스 후손들이냐? 야베스 후손들 아니에요. 야베스의 땅은 구약으로 끝났습니다. 왜냐하면 땅 자체가 땅이 언약이었는데 신약에 오면 예수님 자체가 언약이기 때문에 예수님 자체가 이 땅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을 하게 돼요. 승천이 중요해요.
승천을 하게 되면 옛 땅과 옛 하늘은 이제는 불로써 다 태워버립니다. 왜? 주님께서 곳이 딴 데로 이동했기 때문에. 땅에 있는 것 말고 하늘에 있는 영역, 영토가 새로 만들어져요. 땅의 어느 곳이 중심이냐가 아니에요. 중심은 어느 지역이 중심이 아니고 중심은 예수님이 이 세상의 중심입니다. 서울의 중심은 뭡니까? 강남이죠. 울산의 중심은 롯데백화점 거기 무슨 동네입니까? 그 동네가 중심이고 대구는 동성로가 중심이잖아요.
사람들은 자꾸 고향을 찾아가는데 우린 이 땅에 고향은 하늘나라가 고향이지 다른 덴 고향이 없어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나오거든요. 우리가 돌아갈 고향은 하나님이 따로 만든 본향입니다. 이 땅은 본향이 없어요. 그런데 인간들의 과거 기억에서는 어릴 때 살던 동네 있잖아요. 그 동네로 돌아가고 싶어요. 물장구 치고 다람쥐 잡고 하던 그때 그 시절이 영원한 고향처럼 우리의 기억 속에 박혀있습니다. 그때 옛날에 함께 어릴 때 같이 컸던 순이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지금 순이는 할머니 다 됐는데, 깜짝 놀라지요. 요샌 마스크까지 써서 알아보지도 못해요.
인간은 과거의 고향으로 자꾸 회귀하려고 합니다. 성도는 회귀할 곳이 없어요. 죽은 시체가 무슨 과거가 있어요. 죽어서 올라오라 이 말이죠. 늙어죽겠습니다, 하지 마세요. 지금이라도 이미 죽었으니까 아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올라오라는 거예요. 성도는 갈 곳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살 필요 없어요.
다시 한 번 정리할게요. 자꾸 열두 지파를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의 집약된 중심축이 있어요, 우리는. 여러분 놀이동산에 보면 빙빙 도는 회전의자 있지요. 공중에 매달려서 좋아서 고함지르잖아요. 예수님 중심으로 해서 우리는 예수님에 관련된 그런 이스라엘로 성령을 받아서 붕붕 도는 겁니다. 이 말은 내가 중심이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세상은 예수님을 인정 안 해요. 안 알아줘요. 그러면 우리도 세상으로부터 인정 못 받는 것을 영광인 줄 알아야 돼요. 네가 내 제자라면 세상이 너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나를 미워함이라.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 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필히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내 말과 내 의로 핍박을 받으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선지자들도 그와 같은 환난을 다 받았다. 그런 팔자가 된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이거거든요.
말씀을 마치겠습니다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말씀을 통해서 보세요.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왜 이스라엘이 자꾸 세상 쪽으로 세상에 근접하고 그것과 손잡고 여호와 버리고 왜 그쪽 신으로 자꾸 쏠리는지 보세요. 그거는 뭐냐? 주님의 개별성보다 나의 개별성이 앞섰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나를 위하여 예수를 믿는 그런 오류를 범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를 위한 예수 아니고 예수님을 위한 나로 우리는 부름을 받은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이 이처럼 일관되게 주어졌는데 우리는 그것을 외면하지 않게 하여 주시고 내 안에 주님 하신 일이 역시 일관성 있게 다 이루어지고 진행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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