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20527a 누가복음12장 2절(사라질 성전)-이 근호 목사
오늘은 성전에 대해서 한번 정리를 해봅시다. p.220에 맨 위에 보면 “성전은 예배하는 집” 예배 받으시는 분이 계시고 예배해야 되는 자가 들어오는 장소, 그게 성전이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성전은 눈에 보이는 것이 되고 말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전 개념을 눈에 보이는 곳부터 시작해서 눈에 보이는 곳에 시간 요소를 집어넣어버리면 이게 눈에 보이는 곳이 아니고 눈에 안 보이는 성전이 되는 겁니다. 안 보이는 성전. 시간 요소를 집어넣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것이 시작이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 끝이 되겠죠. 여기서 시간 요소가 들어가는 것을 구약이라 합니다. 구약의 시간은 인간과 하나님이 공유하는 것이 구약의 시간입니다. 신약의 시간이 되면 신약의 시간에서 인간은 탈락해요. 탈락하고 하나님이 사용하는 하나님의 시간이 신약의 시간입니다.
이걸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이건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색깔로 해볼게요. 신약입니다. ‘내 문제는 없고 다 주님의 자기 문제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깔끔하게 정리가 다 돼요. 성전? 이건 네 문제 아니야. 너의 문제 아니야. 내 문제야. 주님이 성전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주님이 스스로 성전을 만들어내면서 구약의 인간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성전을 허락을 했죠. 허락을 했는데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눈에 보이는 성전이 불에 타버립니다. 이게 없어집니다. 성전이 없어져요. 성전이 없어지는 동시에 시간을 인간이 공유하고 다룰 수 있다는 이 사실도 같이 제거가 돼버려요.
그래서 내 문제가 아니고 주님의 문제이니까 이걸 다시 한번 더 간추려보면 ‘시간은 주님의 공간’ 이렇게 됩니다. 시간에서 사람을 쫓아내버립니다. 너 없어져라. 나이가 사십이다, 오십이다 하지만 시간 지나면 그 인간은 없어지죠. 그게 시간이 해야 될 일입니다.
인간을 그걸 오해해서 내가 늙어간다고 하는데 내가 늙어가는 게 아니고 시간이 나를 없애죠. 우리 인간은 내 중심이기 때문에 내가 몇 년 남았다, 몇십 년 더 산다, 이렇게 되지만 시간이 들으면 같잖습니다. 나는 너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야. 주님께 봉사하는 거야. 네가 더 살기 위해서 시간이 있는 게 아니고 너를 위한 시간이 애초부터 아니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를 제거해버립니다.
그러면 ‘내가 없는데 시간이 무슨 의미 있느냐?’ 그렇게 반발할 건데 내가 없어도 신약에 보면 시간은 누굴 위한 시간입니까?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드러내는 데에 필요했던 환경, 그게 바로 시간이 되죠.
그래서 주님이 시간을 창조했습니다. 나의 나됨을 온전하게 드러낼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런 거죠. 시간도 일종의 피조물이 되죠. 시간도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그럼 에덴동산에서의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시간이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시간이 필요치 않습니다. 시간과 무관하게 공간적으로 고정이 되죠. 고정이 됩니다.
성전은 눈에 보이는 데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으로 시간이 흘러가죠. 시간이 흘러간다면 이 성전에서 예배해야 될 사람도 같이 시간 따라서 전부다 날라가 버립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생각한 생명나무는 고정이 되겠죠. 애초부터 생명나무는 고정이 돼요. 생명나무에서 쫓아내었으니까 고정이 되죠. 그럼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은 똑같이 고정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하게 되면 보이지 않는 성전은 애초부터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들한테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고 인간들은 그것을 몰랐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시간을 집어넣어서 애초부터 성전은 거기에 계셨다.
구약에서 성전은 곳, 공간적으로 어디에 있는 곳이 되지만 신약에서는 보이지 않는 성전이 되잖아요. 이 보이지 않는 성전이 신약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되는 겁니다. 성전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 되죠. 본인이 기도하는 집이 되죠.
그래서 신약에서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건 너무 성급하고요. ‘믿습니다’ 하려면 눈에 보이는 성전부터 인간의 요소부터 시작해서 ‘아, 그렇구나. 예수님이 성전이구나.’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앞에 있는 초급단계 안 거치고 ‘뭐 성경에 나오네. 성령이 있는 곳이 성전이라면 난 믿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인간 본인이 없어져야 된다는 절차 자체를 회피한 셈이 되죠. 붕 띄워버리죠.
내가 없어져가는 과정을 통해서 서서히 주님이 성전이라는 것이 드러나야 이게 정상인데 ‘내가 보이지 않는 성전을 꼭 보고 말리라!’ 이렇게 버티면 본인은 지금 멀쩡하게 되는 거예요. 인간을 삭제해서 주님을 성전으로 드러내는데 인간은 본인은 삭제될 생각하지 않고 ‘말씀 하옵소서. 믿을 준비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돼버리면 이것은 주님의 절차하고는 부합되지 않습니다.
내가 소멸한다는 말은 늙어죽는 것도 포함하지만 아까 성전이 있는 문제, 구원의 문제, 하나님을 예배, 경배하는 모든 문제는 이것이 내 문제가 아니고 누구의 문제입니까? 주님 자신의 문제죠. 영원히 내 백성과 함께 있겠다는 그 함께 있다는 것이 주님 자기 일이에요. 우리 일이 아니고! 네가 노력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네가 책임지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다만 주님의 자기 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하나, 둘씩 가위표 쳐져서 없애버리고 사라지게 하는 이 작업이 필수적이다 이 말이죠. 기쁘지 않습니까? 내가 사라진다는 것은 내 책임도 같이 묻지 않는다는 뜻이거든요. 사라질 인간에서 무슨 책임을 묻겠어요?
군에 간 남자들은 압니다만 군 제대하기 전에 예비군복을 한 3~4일 전에 미리 받아요. 제대할 때 그거 입고 나가라고. 그런데 예비군복 입고 있는데 군대생활 빡세게 시키는 하사관이나 장교는 없어요. 3년 동안 고생했으면 사흘 정도는 쉬어도 된다 해가지고 잠시 외출 갔다 올래? 이 정도는 하거든요. 그게 얼마나 가볍습니까? 임 장로님, 기쁘지 않습니까?
제가 오늘 성전과 누가복음 전체와 연관을 시킬 겁니다. 누가복음 6장 23절부터 맛보기로 봅시다. 6장 23절, 제가 읽어볼게요. “그 날에”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끝!
자,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사람이 언제 기쁘고 기쁨을 주체 못해서 펄쩍펄쩍 뛰는 경우가 언제입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여기 보면 “기뻐하고 뛰놀라”. 어떤 경우에 사람이 기뻐하고 뛰놉니까?
제가 또 객관식으로 예를 들어드릴까요? 1번- 내가 시도한 일이 성공을 했다. 2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닥쳤다. 몇 번이겠습니까? 2번이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 이것에 기뻐하고 뛰노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상을 해버리면, 그때 내가 저 일이 되었을 때 얼마나 기뻐하겠는지 미리 연습을 하게 되면, 기쁨이 삭감돼요. 그런데 생각도 못했는데...... 생각도 못했다는 것은 내가 기획하지 않은 일. 나의 일에 포함되지 않는 일. 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손도 안 쓰고 생각도 안했는데 어떤 주님의 일로 내 외부의 일로 나에게 결과물이 그대로 덮쳐졌을 때. 이것은 너무 좋아서 미칠 지경이죠. 너무 기쁜 거예요.
군에 제대할 때 제대한다고 미리 몇 달 전부터 광고하지 않고 제대하는 날 그냥 “어머니 잘 계셨습니까? 이제 다녀왔습니다.” 하면 그 부모가 얼마나 기뻐하겠어요. 예상도 못했는데. “나 갈 테니까 닭 잡고 뭐 잡고...” 그러면 기쁨이 전혀 생기지 않아요.
그래서 기뻐하고 뛰놀라는 말은 모든 일은 네가 한 게 아무것도 ‘없게 하겠다.’ 네가 한 게 ‘없다’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주님께서 네가 한 괜찮은 결과는 내가 삭제시키고 그걸 내가 없애버리겠다. 왜? 실제로 누가 하셨습니까? 주님 자신이 다 이루었기 때문에 “기뻐하고 뛰놀라” 그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지금 성전에 대해서 장소 문제가 p.220에 쭉 나옵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면 이 차이점이죠. 영원히 고정된 것. 그런데 이 특징이 뭐냐 하면 숨겨졌다는 거예요. 우리로 하여금 기뻐하고 뛰놀게 하기 위해서. 이런 일은 네가 꿈도 못 꿨지, 그렇지? 영원히 고정된 것.
그 반대말이 늘 변화하고 바뀌어지는 것. 이것은 누구 담당이냐 하면 인간 담당이에요. 인간들의 담당이에요. 자기 마음을 자기가 붙잡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외부환경이 내 소관 아니거든요. 외부환경이 나의 소관이 아니에요. 점잖게 있고 싶어요. 하지만 외부환경이 나를 가만 두지 않아요. 그렇다면 늘 변화하고 바뀌는 것은 내가 알고 있고 내가 느끼고 있고 그러니까 내가 짐작도 가능하고 그러니까 이건 나타난 거예요, 나타난 것.
숨겨진 것과 나타난 것을 구약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이걸 나란히 계속 하나님께서 가게 하신 거예요. 아주 쉽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있겠다.’ 거기에 대해서 다윗의 반응은 ‘제가 집을 지어드리겠습니다’. 탁 나오잖아요. 인간들이 그렇게 경우 없는 인간들이 아니거든요. 인간들이 전부다 성의나 예의를 표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에요. 자기가 괜찮은 존재라고 자부하기 때문에.
그래서 p.221에 보면 제일 위에 “다윗은 자신이 백향목 궁전에 사는 것을, 법궤가 있는 공간보다 더 월등하게 호사스럽고 우수한 환경이라고 여겼다.” 이게 지금 인간 다윗이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는 백향목 궁전에, 백향목 궁전이니까 요새 말하면 캐나다산 수입 편백나무 집에 사는데 법궤가 있는 공간은 천막 가운데 있으니까 자기가 좀 미안하잖아요. 미안하니까 자기가 천막 살았습니까? 어떻게 됩니까?
주님이 계신 곳을 자기 레벨만큼으로 돌림으로써 “백향목 궁전에 들어있는 자신과 천막 안에 들어있는 법궤 상자를 상호 비교될 수 있는” 그다음 뭡니까? “동등한 주체” “동등한 주체라고 여겼는데, 이런 발상이 외부적인 것을 동일성 차원에서 다루는 주체자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이름과 인간 사이에 동일성으로 맺어지는 관계라고 오해한 거예요. 하나님도 뭐 우리하고 다르지 않게 인격적이겠지, 이렇게 가볍게 연결시킨 거예요.
늘 변화하고 바뀌는 인간과 늘 고정적인 하나님을 같이 본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 인간 자신의 의식에다가 강제로 영원히 고정된 여호와 하나님을 여기다 합류시키려는 시도를 하게 돼요, 합류.
여러분께 한번 물어봅니다. 바알이냐, 여호와냐? 하나, 둘, 셋, 선택해보세요. 바알이다, 여호와다. 여호와죠. 예수와 예수. 선택해보세요. 하나, 둘, 셋. 지금 인간들은 예수와 예수, 하나님과 하나님이 동일하다고 본 거예요. 예수라는 이름과 예수라는 이름이 동일하다고 본 여기에 무엇이 개재되어 있습니까? 내가 예수라고 인식하는 나는 시간이 달라져도 한결같다는 그것을 전제로 했을 때 예수와 예수가 동일하다는 주장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 성령을 보내가지고 인간들이 아는 예수와 성령에 의해 아는 예수를 틀어지게 만들어리는 거예요. 틀어지게. 한쪽은 나타난 것이고 한쪽은 감추어진 것이고. 이게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건데...... 보이는 것에 시간이 가미되어 버리면 이건 뭐가 된다고 했습니까? 보이지 않는 것이 되어버려요. 보이지 않는 것.
시간은 어디에 봉사하느냐 하면 우리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은 주님을 위해 봉사하기 때문에 시간이 주님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을 뭐로 편입시키느냐 하면, 편입생 알죠? 편입시키는 것, 자기 일에 자기 백성을 일방적으로 편입시켜버려요. 편입시키면 하나님의 백성은 비로소 알아요. 내 일은 나한테 없다.
내 일은 나한테 없다, 가 되어버리면 성도만이 알고 있는 희한한 인생입니다. 나와 나, 어느 것 할래? 하나, 둘, 셋. 이 ‘나’와 ‘나’가 일치되지 않는 겁니다. 희한한 공식이 만들어져요. 내가 나가 아닌 거예요. 내가 생각한 나 따로 있고 주님이 생각한 내가 따로 있는데 주님이 생각하는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내가 제거되어지고 delete, 삭제되고 없어지고 엷어지고 제거되면서 비로소 삭제된 현장에 기뻐하고 뛰놀면서 새롭게, 신상이라 신상, 새로운 작품으로서 주님의 작품으로서 흠잡을 데 없이 우리에게 제공되는 그 나로 인하여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돼요.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실망하고 낙담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거든요. 열왕기상 19장 12절에 보면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났는데 열왕기상 19장 11절부터 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그러니까 엘리야가 여호와를 만나기 위해서 지시에 따라 산에 섰어요. 거기에 대해서 어렵거나 뭐 기대할 만한 게 없어요. 그냥 산에 섰으니까.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자, 이게 이상한 거예요, 이게. 엘리야는 하나님이 지금 자신을 만나라고 해서 있는 자리에 여호와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다운 방식으로 현현(顯現)할 것이라고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과연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뒤의 말을 보세요.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야,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한다. 이게 뭐냐 하면 여호와께서 이미 엘리야의 예상을 미리 체크하고 계신 거예요. 이럴 줄 알았지? 내가 이렇게 나타날 줄 알았지? 크고 강한 바람이 부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바위를 부숴 버렸어요. 그러면 여기에 분명히 놀랍고 신비로운 존재 여호와께서 여기 계신 것이 확신되는데, 여기 계시다, 여기 함께 있다고 확신되는데 실제로는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지 아니한다. 여호와의 부재.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지 않는 거예요. 바람은 불었고 바위는 깨졌는데 정작 여호와는 계시지 않는 거예요.
그다음에 또 바람 후에 지진이 일어났어요. 야, 이 지진은 뭐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일으켰다.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 계시겠지. 어? 거기도 하나님 계시지 않습니다.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요. 나타나면 나타나지, 왜 이런 여러 가지의 신비로운 현현을 이야기하시느냐? 엘리야로 하여금 엘리야가 예상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을, 엘리야의 비위에 의도적으로 맞춰줄 생각이 없습니다. 왜? 우리가 예상하고 있기 때문에. 예상해버리면 기뻐하고 뛰놀 것이 사전에 다 사라지죠. 기뻐하고 뛰논다는 것은 너무 예상도 못해서 기쁨에 뛰노는 거잖아요.
그다음에 또 12절에 지진 가운데도 안 계셨죠.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이 일어났으니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했겠죠. 그런데 불 가운데도 계십니까, 안 계십니까? 여호와께서 부재하시죠. 그러면 폭풍은 뭐며 바람은 뭐며 지진은 뭐며 불은 무슨 용도냐? 이게 무슨 용도냐 이 말입니다.
정답은 이겁니다. 엘리야를 부르기 전에 엘리야 있는 곳에 여호와가 함께 계셨습니다. 여호와도 함께 계셨어요. 엘리야+여호와께서 함께 계신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엘리야의 일이 이게 누구 일이냐? 엘리야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엘리야가 있는 그 현존에 이미 주님이 계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고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하고 엘리사가 막 옷 벗어던지고 할 게 아니라 자꾸 우리 조건, 나는 달라지지 않아, 하고 자기 조건을 먼저 구축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나 있는 곳에 오셔서 좀 도와달라는 식의 이런 사고방식은...... 바로 이게 아무리 하나님이 도와주게 되면 하나님의 일이 됩니까, 내 일이 돼요? 나의 일이 되죠. 그럼 나는 삭제되면 안 된다는 강한 반발이 일어나게 되죠. 반발을 결국 우리가 표현하는 것밖에 안돼요. 하나님도 중요하지만 내가 더 중요해요, 이런 식으로 자기 본심을 드러낸 게 된다고요.
‘주여, 저 없애주면 안돼요?’ 왜 이런 말을 못해요? 주님이여, 제가 얼마나 주의 일에 거추장스럽겠습니까? 뭐 다리 아프면 다리 아프다고 찡찡찡찡. 배 아프면 배 아프다고 찡찡찡찡. 하나님, 뭐 하십니까? 내가 이렇게 주의 일 하면서 배가 아픈데 무슨 소화제를 먹어라, 이렇게 해야 되는데 폭풍 가운데도 안 계시고 지진 가운데도 안 계시고 불 가운데도 안 계시고 나중에 어디에 계시는가?
불 후에 어떤 소리가 났습니까?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소리라는 것은 함께 있을 때 함께 있다는 증거로서의 대화입니다. 선지자가 계시를 받는다는 것은 네가 있는 곳에 내가 벌써부터 함께 있었다는 뜻이에요. 함께 있었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세례 요한이 이야기하듯이 “너는 뭐냐?” 하니까 자기 존재를 언급하지 않고 “나는 예수님의 외치는 소리, voice, 예수님의 음성, 예수님의 톤이다. 예수님의 무늬다.” 그러니까 더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이 원단이라면 세례 요한은 그 원단에 염색된 문양 같은 것. 원단이 바람에 펄럭이면 문양도 본의 아니게 들썩들썩해야 되겠죠.
그래서 세례 요한은 마태나 누가복음,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등장하고 난 뒤에 일찍 자기 할 일은 다 했습니다. 사라져야 돼요. 그것도 아주 비참하게 사라져야 됩니다. 아이고, 세례 요한이 너무 일찍 죽었다. 좀더 살지. 이런 식으로 세례 요한 편을 들지 마세요. 인간은 제거 대상입니다.
소멸하는 것으로 자기 일 충분히 다 했어요. 소멸하는 식으로 자기 일을. 일종의 예수님의 소리이니까. 예수님의 액세서리 또는 주연을 보좌해주는 엑스트라이니까요. 전쟁 영화하는데 총 맞은 엑스트라가 총 맞아서 쓰러지고 해야 되는데 갑자기 손가락 펴서 잘 있냐? 하고 자기 아들 찾고 이러면 안 되죠. 그냥 죽는 역할에서는 장렬하게 과감하게 죽어줘야 영화가 살잖아요, 영화가. 영화 주인공이 내가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지금까지 한 것을 한 문장으로 이야기하면 주님 앞에서 나의 일은 없다. 주님 앞에서 나의 일은 없어요. 내가 책임질 일은 없고 내가 걱정할 일도 없고 내가 고민해야 될 일도 1도 없습니다. 0도 없어요. 내가 걱정, 고민할 일은 없습니다. 그냥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하고 그렇게 하면 돼요.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지질히 못 살아가지고 부잣집 친구가 늘 도시락 소시지 주고 해서 일종의 가스라이팅으로 길들여진, 물론 둘다 여자이지만, 길들여진 친구 사이가 나중에 나이 오십이 돼가지고도 아직도 자기 시다바리로 간주한다는 것을 술 먹고 자기 친구한테 자랑하기 위해서 제주도에 가있는 이정은한테 전화해서 엄정화가 친구 앞에서 ‘내 시다바리가 어떤 대단한 시다바리인지 한번 보여줄게.’ 이래가지고. ‘나 지금 이혼 세 번해서 죽으려고 한다.’ 오라 소리도 안했어요. 드라마 이야기를 갑자기... ‘우리들의 블루스’인가.
오라 소리도 안했는데 이정은이 제주도에서 비행기타고 서울까지 와가지고 ‘힘내야 돼. 용기내야 돼. 죽으면 안 돼.’ 하고 문 여니까 막 갑자기 빰빠바밤~ 거봐. 얘는 나한테 이런 존재야. 할 때 이정은이 한 유명한 말, ‘네가 가라하면 가고 네가 오라하면 오나이까?’ 그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게 무슨 블루스입니까? 우리들의 블루스. 인기 있는 드라마인데 난 거의 보지도 않았어요. 백부장도 그런 백부장이 없죠.
여기서 이제 화를 내는 거예요. 옛날에 도움 받은 건 맞지만 지금 나는 자립했다 이거거든요. 그러니까 부재하지 않았잖아요. 제거되지 않았던 거예요. ‘예수님을 잘 믿으려고 애쓰는 이 장한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이런 것은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애초부터 우리 일은 하지 않고 제거하는 겁니다. 제거하지 않으면 뭐가 안 되느냐 하면 성전이 안돼요, 성전이.
그래서 제가 성전을 설명하기 위해서 p.220 설명하기 위해서 누가복음을 제가 동원시킬 겁니다. 누가복음 1장을 한번 봅시다. 1장 46절~56절에 보면 마리아가 6개월 먼저 임신한 엘리사벳을 찾아가요. 세례 요한하고 예수님이 친척관계에요. 친척관계에 속한 두 여자가, 한쪽은 성령의 계시에 의해서 한쪽은 성령에 의해서, 마리아는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을 임신했고 엘리사벳은 성령의 지시에 의해서 임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다 동네에 마리아가 가서, 천사가 시켰겠죠, 갔는데 46절부터 보면 마리아가 찬양을 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그다음에 51절부터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생각해야 될 게 뭐냐 하면 이 마리아의 몸에서 출산하는 어떤 분이 있는데 복된 분이 있는데 그 분이 뭘 하시느냐 하면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이렇게 되어있죠.
이 본문을 딱 가지고 그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미리 상상을 해보세요. 그 상상한 것과 실제로 누가복음 2장, 3장, 4장,..., 누가복음 24장까지 쭉 가면서 그 상상이 맞을까요, 틀릴까요? 제가 묻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태어나서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을 우리는 들었잖아요, 미리 마리아의 찬송을 통해서. 그걸 토대로 우리가 상상할 게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 상상하고 예수님이 실제로 활동하신 것하고 같을까요, 다를까요?
여기 누가복음 1장 68절의 찬송은 누가 하느냐 하면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입이 열려서 찬송하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68절,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지금 누가복음에서 이런 이야기들만 잔뜩 늘어놓으면서 실제로 예수님의 활동은 계속해서 뒤로 미뤄지죠. 그렇다면 67절 사가랴의 예언을 듣고 우리가 뭔가 상상할 게 있을 게 아니냔 말이죠. 2장, 3장 안 봤다 치고. 그러면 그 상상한 것과 뒤에 예수님의 활동이 일치될까요, 일치되지 않을까요?
일치하지 않습니다. 전혀 일치하지 않아요. 만약 일치한다고 기대했다가는 큰 낭패와 실망을 느끼는데 그들이 누구냐? 열두 제자였습니다. 열두 제자. 그것을 누가복음에서는 누누이 중간중간 언급해요. 감추어진 것. 항상 이걸 이야기한다고요. 감추어진 것. 너희들이 어떤 생각을 하든 간에 주님의 일은 너희들의 예상과 일치되지 않도록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일하시는 거예요. 의도적으로. 일치되지 않도록.
이것을 오늘날 우리 인생에 적용시켜 봅시다. 우리 인생은 항상 예상해요. 예상할 때 그 자료가 뭐냐?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모아서 예상하죠. 지난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강남강의 제목이 뭐였냐 하면 <무지에서 나오는 자유>였잖아요. 무지(無知)하면 아무 문제도 없을 인생을 무지(無知)가 아니고 자기가 안다고 하니까 들은 풍월이 있으니까 이것가지고 자기 문제를 해결 지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럼 이것은 주의 일이겠습니까, 나의 일이 되겠습니까? 어떤 결과를 낳아도 이것은 나의 일이 돼버려요. 주의 일이 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주의 일은 뭘 한다고 했습니까? 나를 삭제시킨다. 이 똑똑하고 현명한 나를 삭제시키는 게 주의 일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뭐냐 하면 나도 똑똑하고 주님도 똑똑하고. 그런 식으로 주와 나와 함께하는 그것이 성전이다. 지금 이런 구상을 다윗이 했던 거예요, 다윗이. 아휴, 나는 이렇게 백향목 집에서 잘 사는데 주님은 저렇게 내버려두면 내가 가슴 아프다. 더 좋은 집을 지어드려야지. 이게 성전에 대한 엄청난 오해입니다.
그래서 p.221 위에서 6번째 줄에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는 성전”.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설쳐대고 인간들이 시도하는 의도를 얼마나 제대로 간파했으면 성전은 성전인데 앞에 뭐가 붙죠.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는 성전’.
그러니까 그전에 성전 말고 성소 만들고 성막 만들 때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가담했죠. 브살렐과 오홀리압, 성신 받은 두 사람이 모든 공예품들을 다 제작했잖아요, 지혜를 줘서. 그러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용하시는구나. 그것도 비중 있게 의미 있게. 브살렐과 오홀리압 그들의 솜씨를, 신약적으로 하면 그들의 달란트를 재능을 주께서는 무시하지 않고 활용하는구나. 그러니까 이 교회라는 것, 교회 예배당 짓고 교회의 모든 조직을 운영하는 법을 제정하는 것, 그런 것을 비록 우리가 하지만 이건 하나님께서 원해서 하는 것이니까 의미 있게 하나님의 일에 관여될 수 있다.’ 라고 주장하는 것. 그럼 그 뒤에 나오는 말이 뭐겠어요? ‘만약에 내가 하는 일을 비난하면 너희들 저주받는다.’ 이거겠죠.
이러한 기존의 교회 역사 속에 있는 이 사고방식은 그들이 뭘 몰라서 그러느냐 하면 근대국가에 들어와서, 근대시대입니다, 왕조시대가 아니고요, 근대국가시대에서 세계는 인간이 조작 또는 조성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몰라서 그래요. 현재 이 세상은 이 현실은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인간들이 만들어낸 겁니다.
인간의 자기 입법(立法). 입법 알죠? 법을 세우는 것. 인간이 자기 법을 만들고, 입법 기능 있잖아요, 의회 있잖아요, 의회. 그 법을 세우고 그 법을 누가 지킨다? 내가 만들고 그 법을 내가 지킨다. 개인도 마찬가지에요. 개인이 모여서 국가가 되니까. 개인적으로 내가 법을 입법하고 내가 그 법을 지키는 것, 이걸 가지고 자율성이라 해요. 이걸 자율성이라 하는 겁니다. 내 법 내가 지킨다는 거예요.
지난 수요일에 제가 이야기한 문장이 있는데 그 문장을 한번 적어볼게요. ‘마음이 괴로운 것은 편치 않은 것은 힘든 것은 아픈 것은 괴로운 것은 내가 독하게 나를 지적 또는 고발하기 때문이다. 나를 심문하고 거기에 대해서 내가 끝까지 반론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제가 분명히 그런 이야기했죠.
사람이 마음이 불편하고 힘든 것은 내가 독하게 나를 심문하고 내가 나의 정당성을 끝까지 지키고자 나의 반론을 제시하게 되면 이것이 나를 위한 논쟁의 장(場)이 되는 거예요. 자기 손가락가지고 자기 눈을 늘 찌르는 것이 현대인들의 살아가는 방식이에요. 자기 눈을 자기가 찌르는 거예요. 내가 뭐 잘못되었는데? 그런데 잘못되었다고 누가 이야기해요? 본인이. 혹시 내가 잘못된 게 없을까? 본인이 연구하고 아니야, 나는 정당했어. 본인이 독하게 심문하고 심문보다 더 적나라한 말은 고문하죠. 본인이 본인을 고문해요. 고문하고 자기가 끝까지 자기의 반론을 제시하면서 자기의 정당성을 뭔가 챙기겠다는 이것이 결국 나를 위한 논쟁의 장이 되죠.
그런데 수요일에 제가 초반에 이야기했어요. 이미 제목이 뭡니까? <논쟁의 끝>. 논쟁의 끝은 뭐죠?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끝난 문제에요. 이것은 끝난 문제에요. 이게 주의 일입니다. 주의 일인데 인간들은 이게 누구의 일입니까? 주의 일 아니고 자기 일이에요, 자기 일. 자기 일을 못 버리니까 마음이 불편한 거예요. 힘든 거예요. 자기 일 되어버렸어요. 주의 일이 아니고.
아까 나온 다윗의 고민과 똑같은 거예요. 잘 살아도 불편해요. 저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슬 맞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찬 바람 맞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안쓰러워요. 그러니까 인간 대 인간으로 하나님을 동등한 주체로 내가 생각해도 된다고 여기는 그것이 엄청난 오산이었습니다.
그러면 누가복음은 신약이죠. 신약에 와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이런 모든 것이 감추어진 것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지 딴에 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런 사단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신약에 와서 성전은 짓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것이다. 첫 번째 태어난 것이 누구였어요? 누구겠습니까? 성령으로 태어나신 분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이죠. 그래서 이것을 기뻐하고 뛰놀라. 두 자로 하면 이게 ‘복음’ 아닙니까.
우리는 성전을 지어드려야 되는 것처럼 그래서 그 속에서 우리가 예배드려야 되는 것처럼 여겼던 그것이 성전 지어드리는 것을 제거하는 것과 연동해서 태어나는 것이다. 성전은 태어나는 것이지, 지어드리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성전은 건물이 아니고 부동산도 아니고 태어나는 거니까 출산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태어나시고 그다음 차례는 누구죠? 오늘날 우리 성도들. 성도들도 바로 태어나는 겁니다. 어떻게? 없는 데서 있음으로. 없는 데서 있음으로, 그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니까 한번 보겠습니다. 15장 32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이유가 뭐냐? 죽음이 있어야 즐겁고요. 잃음이 있어야 즐겁고 기뻐해요. 그러면 동생이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즐거워하고 기뻐한다는 것은 결국 이 동생으로 하여금 잃어버린 동생, 죽은 동생으로 간주하도록 누가 유도했다는 말입니까, 결국은? 아버지한테 재산 달라고 했을 때 주신 분은 누구입니까? 아버지죠. 네가 이 재산 떠안고 사라질 때 너도 같이 죽어버려라, 인간아. 돈 없을 때 너도 그 순간 죽는 거야.
그래서 둘째 아들이 돈 없어지니까 뭐가 없어졌어요? 나는 더는 아들이 아님을 알게 되죠. 그래서 본인이 ‘나는 아들 말고요. 종으로 어떻게 취직하면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전에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했던 이 나가 날라가고 삭제되어버렸죠.
그럼 묻습니다. 나, 나, 어느 나? 나와 나 사이에 어느 나? 다시 해볼까요, 이거 재미있는데. 바알과 여호와, 하나, 둘, 셋. 어느 쪽? 여호와. 그럼 나와 나, 어느 쪽? 두 번째 나. 나1 말고 나2. 나1과 나2 사이에는 주의 일이 개입되는 거예요.
나는 나를 잃어버릴 수 없어요. 나는 나를 죽은 자로 간주하지를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되어있죠. 그러나 그것을 천 번을 보고 만 번을 봐도 절대로 보고 있는 나는 그 순간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내 눈으로 지금 본문을 보고 내 생각으로 지금 그것을 듣고 있잖아요. 보고 있는 당사자, 생각하는 당사자가 죽을 리가 있습니까?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그게 논리적으로 수용됩니까? 안 되죠.
내 쪽에서 주님의 아들로 건너갈 수 있느냐를 제가 묻는 겁니다. 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죠. 만약에 내 쪽에서 주의 성도가 된다면 기뻐하고 뛰놀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왜? 고생을 해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내가 이거 얻으려고 이 고생을 했나? 이게 뭐 기쁘고 즐거워. 내가 기뻐하고 즐거워할 게 없어요. 왜냐하면 내 일의 연장선 속에 그 끝에 내가 원했던 결과가 주어졌기 때문에 이미 예상 속에 있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 동질성을 끊어버립니다. 내가 나가 될 수 없게 만들어요. 그럼 내가 될 수 없으면 우리는 뭘 하면 되느냐? 우리는 구약의 바알과 여호와라 되어 있죠. 엘리야가 ‘네가 바알을 섬길 것인가, 여호와를 섬길 것인가?’ 했잖아요.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멜산 사건에서 여호와를 섬긴다 했잖아요. 생각하겠죠. 이 여호와가 뭐로 변합니까, 나중에 시간 지나면? 이게 바알로 변해요. ‘절에 갈래, 교회 와서 예수 믿을래?’ 할 때 교회 다니는 사람은 뭘 선택했습니까? ‘나는 구원 받기로 오직 예수 이외에는 다른 구세주가 없어요.’ 예수 믿죠. 이 예수가 뭐로 변합니까? 부처로 변하는 거예요. 예수가 부처로 변해요.
우리의 어떤 선택도 우리의 구원에 전혀 보탬이 되지 못합니다. 십자가 마을에 누가 질문 답변 게시판에 올린 글 보셨죠? 100점짜리 고백해놨죠. 제가 댓글 달았잖아요. 이러한 고백도 실제로 십자가 피 앞에서는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내 구원에 소용없음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20527b 누가복음12장 2절(사라질 성전)-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아까 쉬는 시간에 장로님께서 질문하셨어요. 시간이 뭐냐? 정의를 내려달라. 그것이 p.221 거의 중간에 보면 “이는 ‘사람의 손으로 지을 수 있는 성전’에 대한 부정(否定)을 내포한 성전개념으로서, 지상의 인간들이 염두에 둔 성전과 결합된다. 이처럼 성전의 의미란, ‘하나님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의 상호작용의 대립적인 틈을 통해 발생적으로 드러난다.” 대립의 틈에서 그다음에 ‘발생적’. 그래서 2번 제목이 p.219에 <발생적 성전관과 주체>라고 되어 있는 거예요. 발생적 성전관.
그러면 시간에 대해서 발생의 반대말은 존재에요. 그냥 있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기어 올라오는 게 아니고 감추어진 데서 만들어낸 게 아니고 한번 있는 게 계속 있음, 있음, 있음, 있음, 비록 늙어가더라도. 계속 있음은 존재다 이 말이죠.
인간 존재에서의 시간은 그냥 의식입니다. 시간이나 공간은 환경에 대한 의식. 자기가 존재하는 환경에 대한 의식 또는 의식을 위한 형식. 이걸 임마누엘 칸트가 정립한 거예요. 시간이라는 것은 인간을 둘러싼 환경의 구조, 형식이다. 그걸 보통 성경 창세기 1장에서 시간이란 달과 별과 해의 변화, 그 위치 바뀜이다. 같은 이야기에요, 칸트가 이야기한 것과. 인간들이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맞네, 맞아. 동의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럼 복음적으로는 뭐냐? 시간은 발생될 분의 활동환경이 되는 거죠. 발생이니까. 어떻게 발생? 하나님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의 틈 사이에서 나올, 틈 사이에서 새롭게 삐져나오는 거예요. 양갱 쥐면 양갱이 위로 삐져나오잖아요. 약간 젤 형식이니까 움직이죠, 올라오듯이. 틈 사이에서 마그마가 나오듯이 삐져나오는 거예요. 주님의 현존과 나의 현존이 마주치면서 삐져나오는 것이 내가 생각하지 않는 나.
‘나는 살았다.’가 주님 보시기에는 뭐냐? ‘너는 죽었고’. ‘주님은 죽었습니다.’ ‘아니야. 주님은 살았어.’ 이것이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씀이 말씀되게 발생되는 거예요. 어디를 재료로 삼아서? 지금 우리가 까불고 살고 있는 이게 재료가 되어가지고 예상도 못한 새로운 나가 발생되는 겁니다. 성전이 발생되는 거예요.
누가복음 12장 2절, 하도 누가복음을 오늘 많이 찾기 때문에 시간 관계상 제가 후딱 읽어보겠습니다. 12장 2절에 보면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그럴 때 이게 복음이 된다는 겁니다.
같은 12장 51절~53절에 보면, 감추인 것이 나타나게 되면 이렇게 돼요. 51절,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화평의 반대말이 뭐죠? 분쟁이죠.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분쟁케 하는 겁니다.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그리고 56절에 보면 “너희는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모를 수밖에 없죠. 주님의 등장과 동시에 감추어진 게 드러나는 식으로 알려지기 때문에 주님이 등장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죠. 누가복음 전체가 그 이야기에요. 감추인 것이 기존에 나타난 것을 부정하고 공격하는 식입니다.
13장 4절에 실로암의 망대 무너진 이야기. 사람들은 이걸 뭐라고 하느냐? 망대 무너져 죽은 사람은 전생의 죄가 있든지 죄를 많이 지어서 이런 벌을 받는다 생각하잖아요. 예수님께서는 그 사건을 일으켜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는 그렇게 알아왔었지? 그 안 지식의, 어려운 말로 담지자라 하는데요, 담지자, 지식을 함유한 존재가 너였잖아. 지식을 품고 있는 것, 담지자가 너였잖아. 망대 무너져서 난리 나 죽은 사람 같으면 분명히 네가 잘못한 죄를 지은 것이 있다. 상대적으로 말해서 그런 사건에서 구사일생으로 망대 옆에 있다가 24분 전에 거기서 나왔던 사람한테는 뭔가 같이 죽어서는 안 되는 어떤 착함이, 아까운 착함, 의로움이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는 없는 게 너였잖아.
그게 아니라 깔려죽은 사람이나 거기서 빠져나온 사람이나 똑같다 이 말이죠. 뭐가 똑같아요? 예수님이 누군지를 모른다는 점에서 똑같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모르면서 자기가 더 가치적으로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에요.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나오는데 7장 22절 보기 전에 아까 한 걸 다시 해봅시다. 누가복음 1장에서 마리아가 찬양할 때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고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혜택을 준다 할 때 누가 봐도 이건 혁명적이죠. 쿠데타 아닙니까? 아까 다들 보셨잖아요. 완전히 사회 자체를 뒤엎는 것으로 되어 있잖아요.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이건 누가 봐도 가난한 사람에게 높은 자리를 주고 그 권세 있는 자를 미천하게 완전히 자리바꿈 하는 거요.
캄보디아에 크메르 루즈 있잖아요. 공산주의 혁명. 자기 국민을 50만 명 죽인 사람. 모든 안경 낀 사람, 영어할 줄 아는 사람, 프랑스어 할 줄 아는 사람, 대학 물먹은 사람은 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시켰어요. 손 조사해서 손에 농민들처럼 굳은 살 없는 사람은 잡아 죽였습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 50만 명이에요. 크메르 루즈.
지금 누가복음 1장에서 힘이 없는 사람은 높이고 힘이 있는 사람은 낮추고 주리는 자는 좋은 것으로 배불리고 부자는 공수로 보내고. 부자가 품고 있는 모든 부를 누구한테 나눠준다? 가난한 자에게 다 나눠줘서 부자 되게 만들고 부자는 완전히 쫄딱 거지 만들고. 이 본문을 그대로 보면 누구나 이걸 연상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이 말입니다. 누가복음 진행을 보면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누가복음 7장 19절을 보면 세례 요한이 하는 말이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세례 요한이 하도 의심이 들어 물어요.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또 기다려야 됩니까?” 이 말을 비추어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인물 보고 메시아라는 것을 알지 않았다는 거예요, 인물 보고. 세례 요한은 급격한 심판을 이야기했거든요. 그러면 세례 요한 자신이 선지자라면 자기 뒤에 오실 분도 자기와 똑같은 이론을 펼쳐야 되죠. 뭐라고? 급작스러운 대사회적 격동, 소위 말하면 혁명이 일어나야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아까 제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근대국가는 인간들이 조작한다 했지만 다른 말로 하면 인간들이 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1789년에 프랑스 혁명 때부터를 근대국가로 보는데 그때 왕의 목을 쳐요. 왕의 목을 쳤어요. 이제 왕 같은 건 필요 없다. 이제부터 인간들이 제작에 나섰죠. 인간들이 제작을 하는데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 과학+수학입니다, 과학과 수학을 통해서 자연을 정복하고 그 정복된 전리품을 세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세상. 자연은 인간 세상에 잡아먹힐 대상이 된 거예요. 옛날 조선시대나 중세 때하고 완전 달라요. 우리가 보는 세상이 옛날부터 그런 세상이라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다른 사상이 들어옴으로써 개조된, 새롭게 제작된 현실관이에요.
그리고 난 뒤에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누가 혁명가냐 하면 기업가가 혁명가입니다. 왕의 목을 쳤기 때문에 권력은 따로 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시민들 사이에 생산되는 것이 권력이에요. 시민들 사이에 생산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투표 벌써 했습니까? 각자가 투표를 하고... 그걸 민주주의 제도라 하거든요. 투표를 해서 선출된 사람으로 하여금 잘하나 못하나 한번 지켜볼 거야, 두고 볼 거야, 라고 하는 정치제도. 권력은 어디 있습니까? 모든 권력은 어디서 나온다?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게 헌법 제1조 아닙니까, 1조. 그게 제작된 세상이에요, 제작된 세상.
그런데 누가복음 뒷부분에 보면 므나 비유가 나와요. 한 므나, 두 므나 할 때 므나 비유. 누가복음 19장 27절 봅시다. 19장 27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이걸 누가 이야기하느냐 하면 주인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주인이 주님이에요. “내가 왕으로 왔는데 나의 왕 됨을 인정하지 않아? 이 원수야, 내가 너희를 죽여 버리리라.”라는 이야기를 예수님이 하시는 거예요, 므나 비유. 만약에 충실한 종 같으면 이들에게는 열 고을을 주고 다섯 고을을 줘요. 그러니까 이건 왕정시대에요. 왕정시대로 돌아간 거예요.
누가복음에서의 신앙이라는 것. 여러분, 신앙이라는 것을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신앙이라는 것을 성도라면 다 생각해요. 신앙에 대해서 생각 안할 수가 없어요. 안하면 이상한데...... 뭐냐면 믿음이거든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하는데 사람들 걱정이 뭐냐 하면 과연 나한테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내가 천국 가느냐 지옥 가느냐의 관건이 되니까 수시로 자기 마음을 들춰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자꾸 점검하고 싶어 해요. 하면서 생각하는 게 뭐냐? 나 안 믿는 거 같아. 아무리 봐도 나는 나를 믿는 거 같아. 나는 나 말고 차선적으로 주님을 믿는지 모르겠지만 우선적으로서는 나를 믿는 것 같아. 나를 믿으면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성경에 보면 이게 믿음이 아니거든요. 자기 우상화잖아요. 믿을 사람은 나밖에 없다, 이게 어떻게 신앙이 되겠어요.
그런데 문제는 걱정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없는 믿음을 만들어낼 수 없고 남은 속여도 본인은 속일 수가 없거든요.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그래서 뭔가 일이 잘 풀리더라도 믿음에 관한 문제가 딱 생각나면 걱정이 늘어지는 거예요.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믿음 없는 것을 본인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믿음에 대해서 누가복음에서는 믿음이란 우리가 아는 믿음이 아니에요. 하여튼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모조리 100% 다 엉터리에요. 믿음이 뭐냐 하면 순종하는 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순종하는 거예요. 순종이라는 말은 나는 순종할 사람이고 나에게 지시를 내릴 사람은 따로 있잖아요.
그러니까 아까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나의 일은 나의 일이 아니죠. 그럼 나의 구원 일은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죠. 내가 믿음이 있든 없든 거기서 내가 걱정할 입장이 아니죠. 내가 그럴 권리가 없죠. 현재 주어진 환경이 어떤 환경이든지 그걸 그냥 순응하면 되는 거예요. 이 관계가 믿음 관계라 이 말이죠.
본인이 믿음 있는 걸 자꾸 끄집어내려 그래요. 내가 지갑에 돈 넣어놨는데... 자꾸 본인이 믿음을 끄집어내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끄집어낼 수 있는 믿음을 주신 적이 없어요. 믿음을 왜 내가 관리합니까? 그 관계를 말하거든요.
히브리서 10장 16절 한번 봅시다. 오늘 참 성경 어지간히 많이 찾는다. 할 수 없어요. 10장 16절,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뭡니까? “기록하리라” 하죠.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의 노트죠. 빈 노트. 빈 노트에~ 무엇을 채워야 할까. 우리는 그냥 노트에요, 노트. 쓰여진 대로 주께서 쓰시는 대로 사용되고 쓰여질 뿐이에요.
노트가 글씨에 대해서 걱정하지 맙시다. 뭐를 새기든지 뭐를 집어넣든지 그건 우리가 걱정할 입장이 안 됩니다. 그걸 바로 수동적 자율성이라 해요. 시키는 대로 어딜 가든지 우리는 하면 되니까요. 그날 이후에 하나님의 법이 뭐냐? 아예 그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생각 속에 주님께서, 지킬 필요도 없어요, 아예 주님의 완성된 법을 거기다가 새겨버렸다 이 말이죠.
새겨버렸으니까 내가 나를 지킨다는 것, 내 법을 지킨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그 선을 우리가 넘어서버리죠. 내가 내 법을 지키는 게 아니고 주님이 이미 완성된 법을 위해서 우리를 갖고 노시는 거예요. 활용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17절에 보면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치 아니하리라” 이 말씀이 사실 어려워요. 한번 들어보세요.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기억치 아니하리라는 이 말씀 있잖아요. 말씀을 우리 안에서 계속 생산하고 발생하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죄와 우리 불법을 기억하게 할까요, 안 하게 할까요? 하게 하잖아요.
기억을 하게 하시고 그다음 18절, “이것을 사하였은즉” 다 용서했다. 그러니까 용서를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와 불법을 늘 기억도 하게 하시고 기억 안 된 것은 더 살아서 경험케도 하시고. 위대한 용서의 승리를 위하여.
강남 강의에서 제가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옛날 최민수 나오는 드라마 제목을 이야기했죠. <여명의 눈동자>. 그러니까 우리 마음을 눈동자라 보는 거예요. 강남강의 할 때 누가복음 그대로 나와요. 우리 마음의 빛이 눈으로 들어온다고 되어 있어요. 그 눈동자가 이렇게 있는데 그걸 살포시 떠보는 거예요. 뜬 만큼 여명의 면적이 넓어지는 거예요, 뜬 만큼. 뜬 만큼 빛이 들어온 만큼 우리의 눈이 떠지는 거예요. 내가 구원 받았다,가 아니라 빛이 들어온다는 겁니다. 빛아, 이리 들어왔어요? 할 필요 없어요. 여명의 눈동자 뜬 만큼 빛이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들어오게 되면 내 속은 완전히 어둡고 무의미하고 썩었다는 사실이 들통 나죠. 어찌 기뻐하고 뛰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 인생에 대해서 누가 관여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에요. 내 인생이 내가 다룰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 내가 나에게서 손을 놔야 된다는 겁니다.
대구강의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대구강의 마지막에. 누가 너를 정죄하느냐? 아무도 없나이다. 누가 너를 정죄하느냐? 아무도 없나이다. 아무도 없어요. 스가랴 3장에서 여호수아의 옷에 대해 여호와 보는 면전에서 여호와께서 법을 주죠. 저 옷 벗겨라! 그리고 그다음에 뭡니까? 저 옷 입혀라! ‘벗겨라, 입혀라’ 하는 그 법이 현재 우리 성도의 마음에 스가랴 3장으로 들어와 있는 거예요, 이게. 그러니까 우리가 책임질 수 있는 어떤 것도 없는 거죠.
그런데 이러한 감추어진 주님의 복음이 등장하면서 어떤 자들이 등장하느냐 하면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려고 하는 자들이 어떤 결과와 어떤 파탄이 나는지 누가복음 17장 32절에 보면 나옵니다.
저는 옛날부터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여자는 남자보다 더 착하다는 그런 편견을 갖고 있어요. 이 편견을 없앨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 편애가 있는데 누가복음 17장 32절에 보니까 그 편견이 좀 바뀌어져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롯의 처를 생각하라”
그다음 롯의 처가 뭐가 문제냐 하면 33절에, 정말 이건 참, 다 같이 하고 싶은데 나 혼자 하겠어요. 롯의 처가 뭐가 문제냐.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되어있죠.
자, 롯의 처가 왜 소금기둥 되어서 죽었습니까? 롯의 처는 무엇의 대변자냐 하면 자기 목숨을 보존하는 자의 대변자였고 그것이 감추어졌다가 발생된 성전, 숨겨진 하나님의 뜻의 복음에 의하면 잃어버리는 대표자로서 모델로서 롯의 처가 등장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걸 보고 우리 마음밭에 ‘롯의 처를 생각하라.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봅시다. 롯의 처가 평소에 자기 목숨 보존하겠다고 길길이 뛰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죠. 그냥 가정주부였어요. 제 편견에 의하면 그냥 착하디 착한 보통 여성들 중 하나입니다. 제 편견에 의하면. 제 잘못된 견해에 의하면. 그런데 천사를 보내어가지고 갑자기 잘 살던 자기 전셋집 빼라 하는 식으로. 그 집 사는데... 롯의 집 사는데 얼마나 애 많이 썼겠습니까? 영끌, 영혼까지 끌어다가 대출 받고 했겠습니까? 그리고 패물 같은 거, 결혼할 때 패물. 얼마든지 그것에 대해서는 신빙성 있게 상상할 수 있어요. 하나의 가정주부이니까. 가정주부의 할 일이 뭐예요? 가정을 건사하는 일 아닙니까? 대대로 내려왔던 이 가정의 모든 재산과 가족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 자기 할 일이잖아요.
그런데 천사가 와서 하는 이야기가 뭐에요? 천사가 남편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더니만 남편이 전하는 말은 뭡니까? “집 비워라.” 집 비우라는 이야기잖아요. 미쳤어요? 그걸 왜 비워요? 아니, 이 집을 왜 비워? 좀 이따가 여기 불바다 된대. 롯의 처가 그래도 처음에 따라 나온 것도요. 믿음이 좋아 따라 나온 게 아니고 남편 가니까 남편이 나중에 밥 먹이겠지, 이래가지고 남편따라 따라 나오다가 기어이 뒤돌아봤잖아요.
아니, 뒤돌아볼 수도 있죠. 있는데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고 미리 주께서 그런 법을 주신 것은 롯의 처를 롯에게 분리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빈틈없는 각본입니다. 네가 붙을 자리가 아니다. 네가 따라가서 천국 갈 게 아닌데 네가 거기 왜 붙어있어? 떼어내기 위한 하나님의 철저함의 표현이에요.
그 뒤에 17장 34절 한번 봅시다. 떼어내는 것이 그때뿐만이 아니죠.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왜 방 하나에 두 사람이 잡니까? 혼자 자도 되잖아요. 혼자 살게 되면 뭐가 드러나지 않아요? 데려감과 남겨둠, 떼어짐이 안 드러나잖아요. 그 떼어짐을 드러내기 위해서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을 같이 한 방에 잠을 자게 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남자만 그렇게 한 게 아니에요. 35절,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잡초를 뽑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참 조(組)가 무섭네, 조가. 언제까지 같은 조라고 장담을 못하겠죠?
왜 자꾸 이렇게 주께서 말씀하시느냐 하면 바로 감추인 것이 드디어 이 세상에 드러날 때 이미 나타난 것을 죄로 정죄해서 없애버리는 작업을 동반해야 감추인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성전도 마찬가지에요.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는 성전이 드러날 때는 기존의 사람들이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성전을 짓고 그 성전에 본인이 노력했다는 의미를 거기다가 듬뿍 담게 돼요.
인간은 도구를 사용해서 노동을 추가함으로써 국가가 생긴다는 이야기를 헤겔이란 철학자가 그 논리로 쭉 얘기했거든요. 국가는 인간 노동의 결집이다 그렇게 본 거예요. 마르크스도 그렇게 이야기했고요. 헤겔의 제자 마르크스도 그런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성경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죠. 인간으로부터 자기의 의미를 키우면서 그걸 떼어내는 거예요. 방향이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떼내는 그 작업을 주님께서는 새로운 성전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그래서 p.221 밑에서 8번째 줄, 성전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지는지를 제가 말씀드립니다. p.221 밑에서 8번째 줄에 성전은 어떤 신에 의해서 만들어집니까? ‘전쟁하는 신’. 아, 이거 진짜 할 이야기가 엄청 있겠죠. 전쟁한다는 것. 전쟁하는 신이죠.
‘우리가 상상한대로 세상은 흘러간다.’ 이건 우리 생각이죠. 그런데 여기서 세상이 흘러간다는 이 말은 흘러간다, 안 흘러간다 이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여기에 ‘우리’라는 것이 과연 우리가 믿을만한 우리냐, 하는 겁니다.
이 우리에다가 주께서는 시비를 거시는 거예요. 이 우리대신 다른 우리를 하나님께서 출생시킵니다. 이걸 수요 설교에서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스라엘과 후(後)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남은 자, 짜투리라고 여기는데 그건 아니고 새로운 이스라엘.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몇 명입니까? 열두 명이에요, 열두 명. 기존의 이스라엘을 대체할 이스라엘.
기존의 이스라엘에서 그들은 왕도 인정하지 않고 선지자도 인정하지 않았죠. 그런데 후 이스라엘은 뭐냐? 왕이 다 해요. 그걸 다윗 언약이라 합니다. 다윗 언약은 중보자의 기능을 말해요. 다윗 언약이라는 것은 왕이고 선지자고 제사장이고. 제사장도 믿을 수 없고 선지자도 믿을 수 없고 왕도 믿을 수 없는데 주님께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홀로 다 하시는 거예요.
제사장 되시고 또 심지어 어디까지 되시느냐 하면 스스로 제물 되시고. 그다음에 또 스스로 성령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아서 주께서 성령을 받아서 성령의 사람이 되시고 그다음 승천하시고 난 뒤 자기 성과의 확장을 위해서 성령을 또 우리에게 친히 주시고자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북 치고 장구 치고 홀로 다 하시는 겁니다. 할 때 그 근거가 뭐냐? 주님 자신이 새롭게 발생되는 그 절차를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을 시킴으로서 우리는 동일한 공간, 성전에 함께 계심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한 세상과 우리가 생각하지 않은 세상의 전쟁의 끝은 누가복음 23장 30절에 나와 있습니다. 누가복음 아직 안 끝났어요. 누가복음 23장 30절, 이건 제가 읽겠습니다.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이렇게 되어있죠.
인간이 염두에 두었고 생각했던 모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그동안 우리가 예상 못한 다른 것에 의해서 같이 무너지고 함몰되어야 되는, 롯의 처(아내)처럼 전부다 파묻혀버려야 될, 우리를 없애 제거해야 될 그러한 일을 누가 벌이신다? 주님이 일관되게 일을 벌이고 지금 우리한테 오고 있어요. 그래서 국민의 힘하고 민주당 싸우면 나중에 땅에 파묻혀서 벙커 안에서 서로 싸우라 하세요. 어차피 다 파묻혀요. 오늘 제목을 ‘파묻힌다’고 보시면 돼요. 깜깜하지 않습니까? 주의 일은 우리를 파묻어버리는 거예요. 조폭도 아니고...... 파묻는 이유는 빚 안 갚았기 때문에 파묻는 거죠.
아까도 언급했지만 인간들이 그동안 얼마나 이 세상을 자기 위주로 인간 위주로 살려고 애썼습니까? 옛날 중세 때는 장날이 있었는데 이게 시장으로 바뀝니다. 시장으로 바뀌면서 시장에서 교환의 가치가 있는 것들만 남고 교환의 가치가 없는 것들은 도태되도록 시장 자체가 진화하고 진보, 더 발달하게 만들었어요. 발전은 아니고 발달하게 만들었어요, 시장 자체를. 시장의 경제적 바탕에 의해서 세상 현실이라는 것이 구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이나 아까 봤던 누가복음을 보면 이것이 자연과 함께 전부다 함몰되고 파묻히고 하나의 거대한 무덤이 되는 거죠.
자,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봅시다. 정리해보면 숨어있는데 고정되어 있는 것이 서서히 등장하게 되면 모든 변화는 다 거기서 제거대상이 된다고 이야기했고요. 그 점에 대해서는 성전도 예외가 아니라 했죠. 다윗이 성전에 대해서 걱정하고 주의 일 걱정하는 것처럼 ‘집을 지어드리겠습니다.’ 하는 것이 성전에 대한 최초의 의견 제시에요. 하나님께서 그 인간적인 면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성전을 허락했고 그래서 만든 것이 솔로몬 성전이에요. 솔로몬 성전 다음에 역사적으로 나타난 것은 헤롯 성전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에 보면 성전을 측량하는 천사가 나오죠. 그 천사가 생각하는 성전은 인간 세계에는 감추어진 것이라서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수련회 때 저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첫째 시간에는 성전을 측량할 때 측량하는 그 측도 있잖아요. 그걸 그대로 첫째 시간에 한번 그려보는 거예요, 전체를. 천사가 되어가지고 쫙- 천사가 움직이는 그 노선 따라서 같이 그려보는 거예요. 그려보고 그다음에 그것을 먹물로 하든지 쭉쭉 찢든지 해서 그걸 새카맣게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천사가 만든 성전은 인간의 눈에 절대로 띄지 않습니다. 없습니다. 안 보이니까 없는 거죠.
그러면 이제 드디어 헤롯 성전만 찾게 되겠죠. 그러니 헤롯 성전이 등장한다는 말은 인간이 이제는 죽을라고 환장했다 이 말이죠. 헤롯 성전만 등장합니까? 오늘날 예배당은 어때요? 마찬가지 취지죠. 성당이나 마찬가지 취지잖아요. 인간의 본성은 달라진 게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예배당 지었고 우리 힘으로 성당 지었다. 먹을 거 안 먹고 아껴가면서 예배당 지었다. 이런 부동산 남겼다. 그런 태도, 그 태도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전쟁을 합니다.
자, p.221 이제 봅시다. 누가복음은 이제 그만 봐도 되지 싶어요. 파묻어버렸으니까. 성전도 망해버렸어요. 성전은 망합니다. 모든 성전은 다 망합니다. 거기 보면 p.221 밑에서 4번째 줄에 제가 읽어봅니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출애굽기 15장 17~18절. 이것은 언제 이런 성소가 차려지느냐? 전쟁하지 아니하면 이런 성전이 나타나질 않습니다. 그럼 전쟁의 끝은 언제까지냐? 인간의 이름이 용납되지 않을 때까지 전쟁은 멈추지 않죠. 인간의 이름.
“이름이 뭡니까?”라고 물으면 이름은 내가 여기 엄연히 존재한다는 표시가 이름이에요. 존재하지 않는데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이건 반칙이죠. 예를 들어서 네모난 원. 네모난 원이 있을 수 있습니까? 명제하고 그 서술이 안 맞죠. 그런 것은 전부다 논리학에서 추방시키잖아요. 이걸 논리 실증주의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말 안 되는 이야기 좀 하지 말자. 그걸 빼다보니까 윤리, 도덕, 종교 다 빠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이건 말이 안 되죠. 하나님이 안 보이니까. 안 보이잖아요. 천지는 보이죠. 보이는 것에 보이지 않는 것을 연결시키는 것은 논리에 안 맞죠. 논리에 안 맞는다는 말은 ‘우리들의 합리적 이성을 괴롭히면 가만 안 두겠어!’ 이거에요. 인간들 생각이에요. 대학교수들, 박사들의 특징이 뭐냐? 우리들의 합리적 이성에 안 맞으면 박사 학위 없는 줄 알아, 이겁니다. 신학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신학 대학에 무슨 믿음이 있어요?
진짜 ‘계룡산 무당들 계시 받은 이야기 할래?’ 이런 식으로 현장에서 막 저보고 대놓고 욕했잖아요. 그들은 뒤에 것 읽어보지도 않았어요. 뭐보고 그들은 분노했느냐? 분노의 이유를 내가 모를 리 있겠습니까. 알죠. p.209 봅시다. p.209에 “전통적인 신학과 해석 방법은” 벌써 수상하잖아요. 전통적인 해석 방법이 뭡니까? 개혁주의 신학 방법은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류 없는 해석력이 당연히 갖추어져 있는 것처럼 전제하고 성경에 접근을 시도한 것이었다.” 그다음 구절이에요. “설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을 주시면서 오류를 유발하는 의도로 주실 리가 없다고 여기는 태도”.
그러니까 전통 신학에서 우리는 죄인이라는 말은 완전히 거짓말이죠. 귀신을 속여라, 인간아. 그들은 자기를 절대로 죄인으로 보지 않아요. 왜? 합리적 이성이 있으니까. 자신이 거짓이라는 생각을 못 하는 거예요. 자기 아비가 악마라는 생각을 하질 못해요. 그런데 주님의 뜻은 뭡니까? 처음부터 “너희 아비는 악마다.”부터 시작하잖아요, 모든 주님의 말씀이.
그리고 보면 “인간 이해력 자체가” 그 뒷말은 더 화나게 만들죠. “진리를 훼방하는 계기로 작용한다면?” 지금 작용하고 있다면 어쩔 건데? 이런 뜻이죠. “본인들부터가 늘 신앙심을 가장해야 하고 하나님을 조작하고픈(제작하고픈) 의식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하는, 이런 문제와 결부된 말씀 해석이 되려면, 인간의 주체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한 거예요. 그래서 시간 가더라도 이건 내가 다 읽었어요. 시간 가더라도 다 읽었어요. 허리띠 안 끌고 나온 것만 해도 다행이죠. 인간이 자기에게 욕해도 욕한 줄도 몰라요. 어느 대목에서 욕한 줄도 몰라요.
인간의 이름은 인간이 존재한다는 조건 하에 있는 거예요. 그럼 인간의 이름을 제거한다, 지워버린다는 말은 뭐냐 하면 너 없이도 너 따위 것 없어도 주의 일은 차질이 있다, 없다? 전혀 차질 없죠. 왜? 인간 자리에 누가 오면 되니까? 예수님 본인이 하나님 본인이 사람이 되면 되니까요. 간단하죠. 어차피 인간은 방해만 할뿐 열두 제자도 하나 도움이 안돼요. 사람 없으면 하나님 자신이 사람 되면 되잖아요. 그리고 그 사람이 모든 율법을 언약을 다 이루면 되잖아요. 이제 그다음에 남은 것은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었다.’ 그걸 믿도록 주님께서 준비해놓은 성령을 은사로 선물로 주면 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진짜 신앙이 있는 사람은 내가 존재하는 것은 바로 누가 존재케 했기 때문에 존재했다. 내 존재 말고 나보다 선행된 존재가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있다. 그게 바로 순종이고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서 반갑고 기뻐하고 뛰놀면서 그냥 고분고분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아, 주께서 의도적으로 이 일을 유발했구나. 일으켰구나. 뭐 하라고? 끽- 내 이름을 지우기 위해서. 우리를 산에다 묻어버리려고 하는 거예요. 그 전쟁.
p.222 봅시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한 강의를 조목조목 따지면 할 이야기가 많이 있어요. 여기 위에서 5번째 줄 보면 아모스 9장 6절이 언급되어 있죠. “그의 전을” 어디에 세웁니까? “하늘에 세우시며 그 궁창의 기초를 땅에 두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니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라” 앞서 있던 노아 홍수부터 해서 모든 것이 이미 하늘에 성전이 고정되어 있는 거예요. 다만 인간에게는 감추어졌을 뿐이에요. 감추어졌는데 이미 그것은 확정되고 고정되었어요.
그럼 시간은 어디에 필요합니까? 하늘에서 시간이 내려와서 지상의 것을 묻어버리고 삭제하고 없애버리고 시간을 도로 딱 하늘에 갖다 붙여버리면 시간의 용도는 다 끝나고 공간의 용도도 다 끝나버리면 하나님의 성전은 하늘 나라에 보좌가 거기에 완성체로 있다. 그 작업을 시간 따라 누가 오셨습니까? 주의 이름이 따라왔고 그 주의 이름이 인격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고. 주님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도로 올라가는 그 절차. 절차에 따라 새롭게 발생된 사람들이 성도. 그러니까 성도는 주의 성전이 되죠. 성령이 있으니까 주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그 뒤에 봅시다. “즉 본래의 성전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성전을 중심으로 한 인간이, 인간의 그 더러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보조를 맞추어서 이루어진다.”고 되어 있거든요. 더러운 모습. 인간은 자기의 더러운 모습을 알아요,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인간은 죄가 뭔지 몰라요. 더러운 것도 몰라요. 선악 인식 자체에 갇혀있기 때문에 잘못된 인식 자체에 갇혀있는 그 자체가 더럽다, 안 더럽다를 판정할 수 없습니다. 그 안에 갇혀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걸 판정하려면 바깥으로 나온 사람만 판정을 할 수 있죠.
수요일에 한 것을 다시 한번 설명하겠습니다. 죄 안 짓는 것도 죄다. 죄 안 짓는 것도 죄인 이유가 뭐냐? 인간의 판정이 삭제되지 않는 상태라면 그 모두가 죄가 돼요. 인간의 판정은 선악지식에서 나왔거든요. 선악지식을 따먹은 자체가 죄라는 것을 모르면 그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것은 죄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죄 안 짓겠다, 죄 짓겠다 판정 내리는 이것도 죄가 된다 이 말이죠. 그냥 순종하면 되는데 믿겠다, 안 믿겠다, 난 믿는다, 안 믿는다 이것도 죄가 돼버리죠. 왜냐하면 주의 일은 그걸 판정내리는 내 이름을 지우는 것이 주의 일인데 자꾸 뺀질이처럼 요령 부려가지고 안 지워지려고 하는 거예요.
수요일에 한 예를 들면 “어제 만든 계란말이 왜 남겼어?” 이걸 묻는데 “엄마, 오늘 수학 100점 맞아왔어.” 하는 거예요. 자기가 할 수 있는, 자기 손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괜찮은 것을 가지고 주의 뜻을 대체하려고 시도하는 그게 바로 바리새인들이 한 짓이고 그게 바로 오만이고 교만이고 죄가 되죠.
그냥 주께서 사라지라고 환경을 만들어내면 기뻐하고 뛰놀면서 사라져주면 되는 거예요. 드라마나 특히 연극하는 데 그런 게 있잖아요. 오페라 같은 것에서 대본에 보면 ‘노래 부르면서 뒤쪽으로 퇴장한다.’ 그런 대목 있잖아요. 즐겁게 노래 부르면서,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니까, 노래하면서 손 흔들어가면서 퇴장하면 되잖아요. 인간의 이름은 주의 이름과 부딪혀서 박치기당해서 없어져야 될 이름으로서 주의 이름을 드높이는 기능, 이게 바로 우리의 존재 이유입니다.
p.222 위에서 10번째 줄 보면 “성전은, 애초부터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 우호적인 격려와 협력 속에서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인간대로,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각기 성전 의미를 고수함으로서 발생되는 영적 충돌 속에서 드러난다.” 영적 충돌, 이게 바로 십자가에요. 십자가. 성전의 의미가 너와 나에게 달랐다는 것을 그대로 까발려 보여주는 사건이 십자가죠.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십자가를 자기 안에 법으로 새겼으니까 십자가가 자기 마음에 새겨졌으니까, 십자가 영이 이끄는 대로 내게 능력주신 자 안에서 모든 것을 그냥 순종하고 따라가면 돼요.
끝으로 이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럼 목사님, 순종을 어떻게 합니까?” 순종을 어떻게 합니까? 빛이 우리의 눈동자를 여명의 눈동자로 떼게 만들어요. 주의 말씀은 우리보다 힘이 더 세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보다 힘 세거든요. 눈 감고 있는 걸 잡아당겨서 기어이 우리 속에 성령의 빛이 들어오게 하시는 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이 왜 기쁜 소식인지를 이제 알았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인이며 엉뚱한 것만 찾았던 그런 우리를 우리가 스스로를 제거할 수 없는 이 슬픈 소식에 대해서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지워주시니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없는 줄을 저희들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