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20624a 이사야6장 5절(거룩의 공격)-이 근호 목사
p.221 밑에서 8번째 줄에, “성전은, ‘전쟁하시는 신’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기념 공간이기에” 간단한 말이지만, 전쟁이 없었으면 성전도 없다. 성전은 생기지 않는다. 전쟁하는 신이 성전을 만들어요. 그럼 누구하고 전쟁하는가?
전쟁하는 이유가 그래야 성전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생겨나기 위해서. 그럼 누구하고? 이게 상당히 난해합니다. 하나님이 전쟁을 벌여야만 성전이 생긴다면 누구하고 전쟁하느냐에 대해서 인간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 자체는 속박되어 있습니다.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 자체가 자기가 속박되어 있고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전혀 몰라요.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밖에 없어요. 인간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눈에 보이는 인간으로 마감됩니다. 속박되었다? 그런 것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께서 전쟁하시면서 너희들은 속박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전쟁을 시작해야 되겠죠. 인간은 속박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방법이 ‘거룩’입니다. 거룩은 인간에게 제일 위험한 것이에요. 거룩이 가장 위험한 겁니다.
흔히 사람들 중에 이런 객기를 부리는 사람이 있어요. “내가 하나님 안 믿으면 어쩔 건데? 하나님이 날 공격하려면 공격하라 그래. 뭐 하나님한테 당하지.” 이렇게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의외로 굉장히 많거든요. 특히 불신자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잖아요.
예를 들어서 “내 목숨을 죽인다면 나를 죽인다면 죽지 뭐. 내가 아프면 아파서 죽으면 그만이지 뭐.” 그렇게 하는데 인간에게 무서운 것이란 흔히 말하는 건강하지 않은 것, 가난한 것 또는 가족이 불행한 것, 주로 이런 쪽으로 인간들은 미리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런 걸 예상해요.
그러면 이런 것을 예상했다는 말은 자기 각오도 비장한 각오를 갖고 있겠죠. 가족이 불행해도 ‘뭐 어떻게 인간이 참아야지.’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의 대비책을 갖는데 여기서 인간이 뭘 모르느냐 하면 이 거룩함, 거룩함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어느 인간도 상상을 못합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가 하나님의 성전에 있었을 때에 갑자기 그 성전에 하나님의 거룩이 들이닥쳤어요. 천사 가운데 날개 여섯이 있고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면서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3)
5절에 보면,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사야 선지자는 알았어요.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거룩이다. 거룩은 다른 세계인데 거룩을 표방한 다른 세계가 등장해요.
이렇게 되면 여기서 ‘내가 아프면 되지 뭐. 내가 가난하더라도 굶어죽으면 되지 뭐. 내 가족이라도 내 몸이 아니니까.’ 이렇게 할 때는 나 개인적인 문제거든요. 개인에게 개인이 대처하면 된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이사야가 알았던 그 거룩은, 이사야가 속했던 전체가 더러운 세계였다는 겁니다. 거룩의 가장 극단적인 반대 개념, 더러운 세계인 거예요.
이 더러운 세계의 특징은 이 더러움이 바깥에 나와도 이게 더럽다는 사실이에요. 까만 개가 밖에 돌아다녀도 까만 개잖아요. 이 달라질 수 없는 운명, 영원히 저주받은 운명이니까 여기서 희망이라는 것 그리고 개선, 발전 이것이 전혀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 세계에서는. 해당되는 게 없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뭐냐? 본인이 그냥 감당하는 식으로 ‘내가 아파서 죽으면 되지.’ 할 때 죽음이 도피처거든요. ‘여기 있다가 죽음 세계 가면 되고 가난하면 가난해서 죽으면 그만이지.’ 이렇게 죽음이 어떤 희망처럼 작용하는데 이 세계 안에서 살든 죽든 상관없이 전혀 달라질 운명이 아니에요.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것이 있다면 그건, 확정된 본질. 어떻게 확정되었느냐? 죽든 살든 어떻게 됐든 저주받는 게 아니고 그 자체가 저주임을 알게 되었을 때, 이것이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겁니다. 개선의 여지가 없어요. 희망, 개선의 여지가 없다니까요. 노력한 만큼 뭔가 달라진 게 있을 때 숨이라도 쉬잖아요. 그런데 인간의 본질은 그게 되지를 않아요. 또 거기다 인간에게 더욱더 무서운 것은 왜 자신이 이렇게 되었는지를 알 길이 없습니다, 인간은.
그걸 누가 알았다 했습니까? 이사야 6장에서 누가 알았어요? 이사야가 안 거예요. 화로다 망한 백성 중에 있다. 이러한 확정된 저주받은 운명이라는 것은 무엇이 접근했을 때 무엇이 다가왔을 때 이렇게 되었습니까? 거룩이 다가왔을 때 바로 자기의 본모습이 드러난 거예요.
제대로 된 선지자입니다. 선지자가 뭐 말이나 잘해가지고 사람들 전도한다는 그런 생각하지 말고 자기 자신부터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확실히 아는 것이 선지자의 시작이죠. 내 자신부터. 내 자신부터 알고 있는 사람 같으면 선지자 하지 말래도 말려도 안돼요. 선지자하게 마련입니다. 견딜 수가 없고 참을 수가 없어요. 자기 자신을 알아버렸으니까.
내 자신을 이렇게 더럽고 저주받은 운명이다, 그것도 확정된 것이다,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이 확정된 것은 변하지 않는 운명이라는 이것이 바로 이 땅에 온 거룩의 효과입니다. 이 땅의 거룩한 효과에요.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이 기쁜 소식을 여기 안 적을 수 없겠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 자체가 곧 저주이다. 저주를 표현할 때 나라는 인간을 통해서 저주를 표현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구나. 하나님의 저주라는 것을 하나님이 스스로 표현하기 위해서 나를 만들고 인간을 만드셨구나. 그런 하나님의 취지를 누가 말립니까? 아 그러시면 안 됩니다,하고 누가 반대해요? 존재자체가 저주인데요. 존재자체가 저주기 때문에 이것은 단정적입니다. 확정된 거예요. 개선의 여지가 전혀 없죠.
그래서 “화로다 나여” 했으니까 나 안에 무엇이 들어왔습니까? 내 안에 하나님의 저주가 들어왔죠. 이것을 거룩의 효과라 했습니다. 나 안에 저주가 들어왔잖아요. 그러면 나는 곧 저주가 되며 이것이 아까 한 것을 그대로 쓰면, 거룩의 효과. 또 달리하면 거룩의 작용. 이것이 곧 하나님의 활동성. 뭐 선지자는 땡 잡았죠. 선지자는 일회적인 자기 계획을 더 추가할 여지가 아예 없는 나라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쉽게 예를 들면 선생님이 애 뺨을 탁 때렸는데 뺨에 벌겋게 커다란 손자국이 새겨졌다 합시다, 벌겋게. 그러면 이 손자국이 있는 한 그 아이는 선생님께 맞아도 싼 아이로 이미 규정이 된 거예요. 그럼 걔는 ‘나는’ 이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선생님의 활동 효과가 그대로 새겨진 존재가 되는 겁니다.
불교에서 천주교에서 또는 다른 종교에서 자기를 낮추기 위해 그렇게 예를 써도 안 되는 일, 뺨때기 한방 맞으니까 더는 나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죠. 이것을 신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자유라 이야기해요. 자유란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하면 속박과 예속을 전제로 할 때 자유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게 자유죠. 그 자유를 다른 말로 하면 구출, 또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이 되는 거예요. 출(出)애굽이니까요. 그런데 구원이, 자유를 얻을 경우에만 내가 예속되어있었고 전에 속박되어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보면, 인간세계는 저주에 속박되었다. 저주에 속박되었는데 이 저주에 속박된 대상자가 인간뿐만 아니었어요. 악마가 저주받도록 되어있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이야기하면 옳죠. 악마가 저주받는데 인간이 악마한테 꼬드김 당해서 같이 합류된 상황이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악마한테는 지상에 이름이 없죠. 지상에 이름이 없습니다. 이름이 없으니까 악마는 자기의 이름을 누구의 이름으로 대응합니까? 인간의 이름으로 대응했죠. 모든 인간들의 뒷배니까요. 뒤에서 봐주고 있거든요, 인간을. 그런데 하나님은 이름이 있어요. 왜?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으니까요. 하나님이 사람이 안 되면 하나님의 이름이 없어요.
육적인 피조세계에만 이름이 있습니다. 아담이 강아지고 소이고 간에 이름을 붙이듯이. 그런데 인간이 악마의 이름을 붙입니까? 아니죠. 천사의 이름을 누가 붙입니까? 하나님이 붙이죠. 가브리엘, 이건 하나님이 붙인 거예요. 그것은 각 천사마다 고유의 해야 될 업무가 있기 때문이에요. 총무부에 있는 사람에게 ‘어이, 김 총무.’ 이런 거랑 똑같아요. 자재과에 있는 사람보고 ‘어이, 최 자재.’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자기의 할 일을 가지고 이름을 붙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름은 이미 어디에 넘어갔느냐? 악마한테 넘어가버렸어요. 그래서 인간은 악마의 역할을 하거든요. 그러니 이름이 기능이라면 악마의 이름이 인간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에 보면 나와 있죠, 인간이 속박되었다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다 아시지만 여러분 연세가 많으니까 다 알고 있지만 행여나 또 모를 수가 있죠. 히브리서 2장 14절, “자녀들은 혈육(하나님의 백성)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주님께서 육으로 오심은, 그런 뜻이죠. 그다음에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누구입니까? 마귀, 악마죠. 이거 설명이 필요해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사망을 원수로 봐요. 히브리서 덮지 마시고요. 고린도전서 15장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최후의 원수를 사망으로 봅니다.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인간이 왜 썩고 왜 죽느냐? 인간의 육이 육의 마음대로 자율성이 없고 어디 예속되어 있는 겁니다.
여기 고린도전서 15장에 의하면 사망에 예속되었다는 거예요, 사망에.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악마는 눈에 안 보이거든요. 악마는 눈에 안 보이지만 악마의 기능은 현상적으로 인간의 모든 몸마다 현상이 나타나고 드러나고 발현되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왜 사도 바울은 그렇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예수님은 안 보입니다. 예수님의 기능이 인간의 몸을 통해서 발현된 것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이 되는 거예요. 부활의 반대 개념이 뭡니까? 사망이죠. 그런데 사망은 보편적이에요. 부활은 특수적이고. 따라서 보편적인 모든 인간은 어디에 예속되어있다? 사망에 예속되어있다. 악마가 인간의 몸에 작용하는 그 기능에 모든 인간이 예속되어있고 속박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이, 출애굽할 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서 유월절 날 왜 죽음을 야기시켰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은 인간세계에서 보편적이거든요. 보편적이라는 말을 달리하겠습니다. 죽음은 인간 존재의 바닥입니다.
인간이 쭉 세월 따라 죽는 것, 이게 아니고 인간의 죽음이라는 보드를 타고 다녀요, 보드를. 써핑하는 거예요. 죽음을 타고 가다가 어떤 사람은 96세에 보드 안에서 소멸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94세 하얀 눈썹 조순, 96세는 송해. 죽음의 보드를 타는 거예요.
인간은 보드 위에 올라타 있죠. 그러면 인간이 하는 모든 문화 가운데 제일 멋있게 보이는 문화가 뭐냐 하면 종교입니다. 인간에게 종교는 문화생활의 일종이에요. 교사들 수련회 갔을 때 다 기도하고 밥 먹는 거. 권사 아닌 사람 별로 없는 거. 이거 문화거든요. 종교. 신을 찾고 예수 찾고 교회 활동하는 게 문화 활동이라는 거예요.
문화 활동을 하지만 해본들 뭐합니까? 그건 누가 시킨 거예요? 활동하다가 죽는다는 게 아니라 그 문화 활동을 누가 시킨 거예요? 사망이 시킨 거예요. 악마가 시킨 거예요, 그 문화 활동을.
인간의 종교가 인간을 구원할 거 같으면 예수님께서 굳이 이 땅에 올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럼 예수님이 왔다는 말은 종교를 버리라 이 말입니다. 간단하죠. 되게 간단하잖아요. 네 문화생활을 놔버려라.
문화생활을 놔버리란 말은 교회 다니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참 마귀가 시켜서 이 짓 하고 있구나.’ 이걸 알라 이 말입니다. 이것저것 다 놔버리면 재미없어서 못 살잖아요. 그렇다고 문화생활 한다고 카레이서하고 골프 치라고 할까요? 골프 치나 교회가나 똑같은 건데요. 죽음에 합류하는 그 지연된 시간동안 심심해서 어떻게 살 건데요? 바둑을 두던지 뭐라도 해야 되지 않습니까? 교회 다니니까 그걸 아는 거예요. 교회 다니기가 자유가 아니라니까요.
다시 한번 할게요. 자유란 저주로 확정된 운명인 것을 발견하는 게 자유입니다. 이미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이 몸이 저주받기로 확정된 몸인 것을 아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듣고 걱정이 늘어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겁니다. 자유 받았으면 구원 받은 건데... 구원 받았다는 게 축복으로 확정될 것 같으면 이해하겠는데 저주로 확정된 이 몸이라니, 그럼 이 몸 가지고 지옥 가야 되는데 구원 받았다고 이야기해놓고 내 몸은 지옥가고... 이게 모순되지 않느냐, 앞뒤가 안 맞지 않느냐 하는데...
오늘 p.221에 성전은 전쟁하는 신에 의해 만들어지죠. 성전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에요. 임마누엘. 그 성전은 전쟁하지 아니하면 생겨나지 않는다고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전쟁이 없으면 성전이 없어요. 그럼 전쟁의 적이 누구냐? 적이 누구냐 이 말입니다. 전쟁할 때는 적이 있는데 그 적이 누구냐?
인간은 아니에요. 인간은 예속을 모른다니까요. 인간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예요. 살아있으면 살아있는 거고 죽으면 죽는 거지, 이게 인간의 생각이에요. 사망이 왕 노릇 한다는 그런 것은 인간은 아예 믿지를 않고 믿지 않는 이유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도대체. 앞뒤가 뭔지 몰라요. 바닥이 뭔지 몰라요. 이렇게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 기껏 인간은 그것밖에 몰라요. 성경에 대해서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적은 전쟁하면서 발굴되는 겁니다. “너 나와!”하고 주님께서 전쟁을 치르면서 꼬깃꼬깃 인간 뒤에 숨어서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그 적이 전쟁하면서 고개를 내밀게 되어있어요. 고개를 내밀 때 그 악마는 어떻게 고개를 내미느냐? 사람의 이름을 앞장세우면서 고개를 내밉니다. 자기는 뒤에 숨고요. 그럼 전쟁의 외형적 양상은 하나님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 또는 하나님의 이름과 애굽의 이름 또는 하나님의 이름과 바벨론의 이름, 느부갓네살의 이름, 그 이름들을 앞장세우는 거예요.
그럼 사람의 이름은 전쟁하면서 신을 도입하는데 이 신을 하나님의 이름 쪽에서 뭐라고 부르느냐? 이 신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우상을 믿는 게 아니고 인간은 우상과 떨어진 적이 없어요. 인간의 신이 악마거든요. 인간의 주인은 이미 악마입니다.
이걸 아까 고린도전서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고린도전서 15장을 다시 읽어보게 되면 54절,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 사망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는 거예요.
그다음 55절에 누구를 부릅니까?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지금 사망이, 보이지 않는 악마가 현재 누구를 이기고 있다고 보는 겁니까? 악마가 인간을 체포, 예속했으니까 인간 입장에서 누가 이긴다? 항상 사망이 이기는 거예요.
일단 이렇게 해놓고요. 아까 히브리서 다시 보겠습니다. 우리가 이걸 전제로 되어야 돼요. 히브리서 2장 14절에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마귀라는 것은 이 인간 세계에 마귀는 없어요. 왜? 육체적 존재가 없기 때문에 언어를 붙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성경은 성령으로 된 책이기 때문에 마귀를 실존 존재로 거론할 수가 있는 겁니다. 단어를 붙이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 세계에서는 악마는 없어요. 그냥 현상만, 인간들이 내리 죽어가는, 죽고 또 죽고 죽어가는 현상만 일어날 뿐이죠.
그다음 15절에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끝났죠. 죽기를 무서워했다는 말은 이미 인간들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무서워한다는 것은 뒷배가 따로 있고 주인이 따로 있는 거예요. 아무리 인간이 까불고 자기주장 강하고 객기를 부려도 죽음 앞에서는 사망 앞에서는 발발 떠는 이것으로 이미 확정된 거예요. 이거는 날 때부터, 나기 전부터 이미 정해진 거예요.
그래서 나오잖아요, 종이라고.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 종이 그냥 가난의 종, 돈의 종, 건강의 종 같으면 나중에 건강하면 그만이고 부자 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그러나 사망의 종이 됐다는 말은 평생에 종에서 풀려날 기미는 인간에게 그럴 가능성은 전무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또다시 강조합니다만 신자, 다른 말로 성도죠, 성도의 특징은 항상 내가 하지 못하는 것, 불가능성이 나와야 한다. 성도는 항상 불가능성이 나와야 돼요, 불가능성. 제가 지난 수요일에 기도할 때 기도제목이 이거였습니다. 내가 하지 않는 것을 찾아보라고. 내가 하지 않는 것을. 내가 노력하지 않았는데 주어진 것을 생각해보라고.
똑같은 취지입니다. 내가 애착하지도 않고 내가 가지지도 않았는데 어떤 가능성이 나에게 튀어나올 때 그게 바로 신자입니다. 예를 듭니다.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 나왔죠. 이사야가 나쁜 짓을 많이 해서 “내가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이렇게 된 겁니까? 아니면 거룩 앞에서 졸지에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입니까? 사적으로 나쁜 짓한 게 아니고 내가 속해있는 그 세계 자체가 거룩의 공격의 대상이 된다는, 저주의 공격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안 거예요.
그거 알았다고 해서 이사야가 구원받는 거 아닙니다. 그냥 그렇다는 거예요. 나는 저주 안에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천사 중 하나가, 스랍이죠, 천사 중 하나가 뭔가 나풀나풀 날아왔는지 뭘 했는지 성전에 있는 숯불을 가지고 이사야의 입을 지집니다. 입에 딱 닿을 때 이사야는 속죄함을 얻은 거예요. 속죄함.
그러면 이사야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나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거룩과 영원한 저주, 그 사이의 차이가 있음을 그 차이 위에 선(線)상의 존재로서 이제는 마음껏 양쪽 세계를 그냥 외치면 되는 거예요.
차이의 반대말은 뭐냐? 이건 좀 어렵습니다. 어렵지만 여러분 수준 같으면 알아야 됩니다. 차이의 반대말은 동질성입니다. 항상 인간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개념위주이기 때문에 동질성으로 일반화시키는 경향이 있어요. A, B의 차이, 이걸 극복하고 이걸 종합해서 하나의 개념으로 묶으려고 그렇게 시도합니다.
그런데 이 동질성이라는 것은 환상이에요. 동질적 개념이라는 게 없습니다. 사과라는 어떤 개념은 있지만 어떤 사과를 사과라고 하느냐에 대해서는 어떤 인간도 대표적으로 내세울 사과는 없어요.
시간이 지나면 시간과 더불어서 모든 것이 변화합니다. 어떻게 변화하는가?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사랑을 예로 들어 현재 사랑한다면, 어제도 사랑했다 칩시다. 어제 사랑을 A₁이라 하고 지금 사랑을 A₂라 하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는 그때, 그 사랑 개념이 왜 달라지는가? 어제 했던 기억이 침투한 사랑개념이에요. 지금의 사랑이란 어제 했던 사랑을 전제로 해서 그 차이남이 추가적으로 보태져있는 겁니다.
그럼 내일 돼서 만약에, 사랑한다 A₃가 돼버리면 이건 A₁이전에 있던 기억부터 밑으로 계속 들어와요. A₃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 이걸 종합하는 게 아니고요. 종합하는 게 아니고 이전에 밑으로 들어왔던 기억들 중에 어떤 계기가 있어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그 사랑 안에는 밑에 잠재되어 있는 지나간 모든 사랑개념을 억압하면서 억누르면서 지금 필요한, 지금 효용 있다고 쓸모 있다고 여기는 그 개념만 따로 추렸지, 사실은 그걸 따로 추리기 위해서는 열 가지 사랑 개념 중에서 아홉 가지는 누르고 한 가지를 그때 그 순간 이용할 뿐이에요.
그런데 A₄들어가서 그때 A₃때 필요한 사랑 말고 지난 A₁이 필요할 때는 여기 또 다른 A₄의 사랑개념이 나오죠.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할 때 사랑개념이 달라지면 사랑개념을 고백하는 나도 다르고 너도 그때 너가 아닌 거예요. 이 세상에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 동질성이라는 것은 하나의 개념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해요. 환상에 불과합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하면 주님께선 “네가 언제 주님이고 네가 아는 믿음의 종류 중에서 한 이만오천 오백다섯 가지 되는 것 중에 어느 믿음이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이란 없죠. 악마가 사망의 힘으로 묶어놓은 그 가운데서 악마가 허락한 그 순간, 그 사람은 나라고 우기는 거예요. 너는 너라고 우기고.
이 세상에는 차이밖에 없어요. 쉽게 말해서 정답도 없고 진리도 없습니다. 그때그때 달라요. 그런데 성경은 모든 것을 하나로 동일성으로 만들어버려요. 왜 그러느냐 하면 세상을 규정하는, 그 전쟁하시는 주의 이름이 동일하기 때문에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도 다 동일해야 돼요. 어떤 차이가 있든 관계없이 동일한 개념으로 다 묶어버려야 돼요.
악마는 인간들을 각자 개인적 자아로서 전부다 풀어놨지만 주님께서 최종적인 자아로 오셔가지고 예수님께서 모든 걸 묶어버렸죠. 자아가 있으니까 이름이 있죠. 주님의 이름 앞에 모든 인간 이름이 대비적 이름을 갖습니다.
그래서 p.221에 ‘전쟁하는 신’이라고 한다면 외형적으로서는 주의 이름이 인간의 이름과 싸우신다. 주의 이름이, 이름이 있어야 되니까요, 악마는 이름이 없잖아요, 주의 이름이 인간의 이름과 싸우는 전쟁을 하는 겁니다.
인간의 이름은 몇 개냐? 인간의 이름은 하나밖에 없죠. 그냥 계속해서 변형될 뿐이죠. 인간의 이름은 계속 변형돼요. 마치 엘리야가 나와도 주의 이름이고 엘리사가 나와도 주의 이름인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 편에서 다양한 선지자가 등장해도 그들의 공통점이 한결 같이 주의 이름으로 일하는 거예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낫게 할 때 뭐라 했습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행3:6) 명령입니다.
하나의 명령이 주어졌을 때 그 명령은 예수님께서 이미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을 이겼기 때문에 아무리 악한 악마가 앉은뱅이를 쥐고 있어도 말씀 한 마디에 거기서 풀려나올 수 있어요.
마르다, 마리아 오빠가 무덤에 죽은 지 나흘이 됐다 이 말이죠. 죽은 지 나흘이 아니고 일주일 됐으면 어떻게 됩니까? 살아나오기에 약간 뻑뻑거리고 좀 힘들겠습니까, 안 그러면 똑같겠습니까? 일주일 됐다면? 똑같죠.
지금 이사야가 똑같아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는 그 구역, 그 영역 자체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똑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확정됐어요. 사망에 매여 있다, 못 빠져나간다, 예속되어있다. 여기 히브리서 말씀처럼 우리는 사망의 종이 되어있다. 우리가 아무리 대통령 되고 뭘 한다 할지라도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나는 이미 사망된 자 또는 사망에 예속된 그 모양새만 보여줄 뿐이에요. 인간이 어떤 솜씨를 부리든 간에.
손 흥민이 한 골 더 넣든 간에...... 임 윤찬, 이 열여덟 살 먹은 애가 세계적인 피아노대회에서 천재적으로 우승했잖아요. 이게 무슨 모습입니까? 이게 무슨 모습이에요? 사망의 모습이라니까요. 전혀 어렵지 않아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누구의 눈에 어렵지 않습니까? 이 피아노 1등한 것이 사망의 모습이라는 것이 누구 눈에는 어렵지 않느냐 하면 이사야의 안목에서는 전혀 이게 난해한 문제가 아니에요. 왜? 한통속이니까요.
그런데 열여덟 살 먹은 애가 성령을 받아가지고 속죄함을 받았다면,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을 피아노 잘 치는 나가 아니라 죄인인 나를 걔가 만약에 발견한다면 그 순간 걔가 피아노를 치든 다른 걸 하든 관계없이 걔는 차이성, 경계선에 있는 사람이에요. 이 저주와 생명의 세계의 경계선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 경계선이 바로 성전이에요. 자, 성전의 특징은 땅에도 있고 하늘에 걸쳐 있다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인간의 이름을 만나는 그것이 바로 성전이잖아요. 성막도 그렇죠.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 회막,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함께 있는 곳.
땅에도 있고 하늘에 걸쳐서 있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 성도의 몸을 뭐라고 합니까? 성전이죠. 거룩과 저주가 함께 공존하는 곳. 이걸 가지고 이스라엘 전쟁 역사에서 획득물이라 합니다. 전쟁할 때 전리물, 이것이 희생물이에요. 하나님의 흠 없는 희생물 역할을 하는 겁니다. 이게 이스라엘 되겠죠. 신약에 보면 하나님의 피로 또는 그의 피로 값 주고 얻었다, 획득물. 주님이 얻은 거예요. 우리가 얻은 게 아니고 주님이 구원을 얻은 거예요. 획득물을 얻은 거예요.
모든 전쟁은 주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주님으로 마감되기 때문에 우리는 피동적입니다. 얻어걸린 거예요, 얻어걸린 것. 내가 구원을 시도한 게 아니고 구원을 예상해서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까?’가 아니라 그냥 성도는 극히 피동적인 존재일 뿐이에요.
그래서 로마서 6장에서는 우리 성도를 의의 종이라 해요. 의의 종. 댕~~~하고 우리를 치면 의~~~하고, 의의의의의의의의~~~ 또 댕~치면 또 의~가 부산물로 나오죠. 우리는 저주받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 속에서 의가 나오는 것이 주의 이름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이에요. 죄인 안에 주의 이름이 있고 그 주의 이름이 하는 성과, 거룩의 효과가 의~~~ 하는 식으로 등장합니다.
이걸 아까 얘기한 자유라 합니다. 자유죠. 이 세상의 구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 속죄, 제단에서 나온 불로 이사야의 입을 지져야 그것이 나오는 것처럼. 지진다는 말은 제단에서 나온 불이잖아요. 그 제단 불은 위의 제물을 살짝 구웠다, 웰던이었다, 어떻게 됩니까? 완전히 다 태워버렸어요. 완전히 다 태워버렸다 이 말이죠. 연기화시켰다, 연기화.
제물의 몸체가 연기로 전환되고 그 연기가 주님이 받으시는 음식이 되는 거예요. 제물이 된단 말이죠. 그 작업을, 이 세상을 제단으로 여기고 우리를 제단 위에 있는 하나의 희생물로 여겨서 육체가 죽는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우리 자체가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고 하나님의 향기가 되고 양식이 되게 하는 그 작업을 주께서 제단을 통해서 해내십니다.
이러한 작업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시도하셔서 부활에 이르게 했죠. 아까 고린도전서 구절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천 번을 읽어도 뭐 괜찮을 거 같아요. 여기 보면 성도만이 외칠 수 있는 건데요. “사망아” 그다음에 ‘너’죠. 사망을 하나의 대상체로 보는 거예요.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하면서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는 거예요, 사망아. 기분 더럽게 만드는 거예요. 요기 이마 같은 데를 콕콕 밀면서. 코를 밀어도 괜찮아요.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네가 큰소리 칠 잽이 되나, 이 사망아! 죽여라, 죽여! 이 사망아.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율법을 통해서 외부에서, 하늘나라에서 주어진 그 율법,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이죠, 그 언약으로 하여금 인간들이 전혀 모르는 인간세계가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거예요. 죄가 왕노릇 하고 있다는 사실을, 율법을 통해서 철저하게 모든 인간들 속에 규정한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성경말씀 보면 볼수록 내가 내 힘으로 나의 일로 성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날마다 느끼죠, 날마다. 도둑질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십계명에 나오잖아요. 그걸 지키라,가 아니라 나의 일의 한계 너머로서, 내 실력으로 될 수 없음을 말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율법 주시고 우리를 죄인 되게 하시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니고 누구의 일에 속합니까? 이건 주님 자신의 거룩의 효과죠.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주의 일이 작용하는 바로 그곳이 뭐냐? 성전이고 그게 성도의 일상생활 아닙니까. 주의 일이 작용하는 거예요, 주의 일이.
내가 지켜서 넘어서는 건 없어요. 그냥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게 주의 일인 겁니다. 내가 거기에 추가해서 내 일 보탤 게 아무것도 남아있질 않죠. 그래서 요 근래 제가 자주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 행위를 쳐다보지 마라.
자기 행위를 쳐다보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아까도 개념 이야기했지만 환상적인 개념, 환상, 망상이거든요. 자아는 이미지이고 이미지는 차이에서 순간적으로 포착할 때 그게 이미지가 돼요. 자아라 하는 것은 이미지의 일종이라서 자아에 대해서 볼 이유가 없어요.
그냥 여러 가지 벌어지는 일들 속에서 이건 내가 했다, 하는 순간에 자아가 등장하니까요. 환상이니까 실체가 없는 거죠. 그 차이를 볼 필요가 없죠. 자기 자신의 행한 것, 볼 필요 없습니다. 내가 행한 게 아니고 그때 그렇게 행해졌어야 했을 뿐입니다.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20624b 이사야6장 5절(거룩의 공격)-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입니다. 불가능성, 불가능성을 내놓으면 되는데요.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성도의 특징은 자기 불가능성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불가능한 일이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음을 부정하는 거예요. 이건 불가능한 거예요. 오죽 했으면 내가 생각한다, 고로 여기 있다고 하겠습니까.
내가 여기 있음을 부정하는 이것이 인간이 제일 해내지 못하는 겁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뭐가 어려우냐? 내가 나를 무너뜨리는 것. 남이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무너뜨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죽이라 했죠. 제물로 드리라 할 때. 그게 신앙이냐, 아니냐의 마지막 경계선이 바로 그겁니다. 네가 네 자신을 무너뜨릴 수 있느냐. 그러면 아브라함보고 자살하라 하면 되는데 이삭을 왜 잡으라 했느냐? 인간이 자살하게 되면 자기가 무너진 게 아니고 여전히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본인이 예상하면서, 내 손으로 나를 죽였다는 그 사실을 예상하면서 죽음 이후에 자기 자아를 존속하리라고 기대하게 되어 있어요.
이삭은 육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약속에서 나왔죠. 이 말은 약속 받아야 될 인간에게 약속 자체를 없애버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약속 받아야 될 이쪽 인간세계에서는 자살을 하든 무슨 수를 쓰든 내가 나를 무너뜨리고 내가 부정하는 일은 인간에게는 성사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망에서 인간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악마가 자기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인간은 자기를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계속해서 아무리 복음을 듣고 해도 계속해서 자신에 대해 신경을 씁니다. 아무리 부자가 되고 아무리 몸이 안 아프고 건강하더라도 여기 한국 살다가 미국 가든 어딜 가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신경을 인간이라면 안 쓰는 자가 없습니다. 의식이 있는 한.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신경 쓰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이게 나중에 정신병이 되거든요. 그래서 정신병 환자를 고치는 프로이트나 라캉이라는 정신분석학에서는 의식을 무의식으로 돌려버립니다. ‘이것은 네가 한 게 아니고 네 무의식이 하는 거다. 네 책임 아니다. 그러니까 네 자신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마.’ 라고 이렇게 피할 길을 주거든요.
그런데 무의식이라는 게 의식에서 떨어져나간 게 아니고 대기상태에 있어요. 항상 의식으로 올라올, 지하차고 같은 곳입니다. 이게 떨어져나간 게 아니에요. 인간은 자기에게서 떨어져나가지 않는 한 사망에 매여 있는 죽을 병에서 치료될 수가 없습니다.
의식에서 확장해서 비밀창고 같은 무의식세계를 만든다 해서 이게 고쳐지는 게 아니에요. 다만 고쳐졌다고 착각할 뿐이죠. 마귀가 그런 식으로 해서 프로이트한테 질 것 같으면 그건 마귀도 아니죠.
그래서 인간은 어쨌든 간에 자기에 대해서 신경 쓴다는 것이 보통 큰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에요. 큰 쇠뭉치를 짊어지고 가니까 인간들은 진리를 찾기 위해서 점, 영(0)점 또는 같은 말로 무한소(無限小)라는 아이디어를 끄집어냅니다.
이게 바로 데카르트의 좌표라는 겁니다. y축과 x축이 만나는 점에 0이 있죠. 어떤 절대지점을 만드는 거예요. 절대지점을 만들어서 나는 x에 7, y에 5되는 지점에 있다 (7,5). ‘있다’ 라는 것을 자기 스스로 규정함으로 말미암아 이 0점과 (7,5)지점 사이의 관계를 이어서 자기를 확정지으려고 합니다.
자꾸 내가 변화하니까, 동일성이 아니고 자꾸 변화하니까 자기가 힘들잖아요. 심리적으로 안정적이지를 못하죠. 그래서 과학이나 수학이나 모든 철학은 내가 누구냐를 단정 짓고 확정 짓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 만든 게 인간의 학문입니다. 내가 누군지를 알기 위해서.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내가 확정지을 때 규정을 할 때, 자기는 그 순간 ‘나는 무엇이다’라고 규정될 때, 이걸 절대화시키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이런 버릇이 있어가지고 “목사님, 저 구원받았어요, 안 받았어요?” 목사한테 “내 구원받았어요, 안 받았어요? 선택론 믿고 예정론 믿고 십자가 믿는데 구원받았어요, 안 받았어요?” 묻는 겁니다. 누구한테 묻습니까? 그 교회 목사가 절대점이라고 자기가 그렇게 정하고 싶은 거예요.
뭔가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지점이 있어야, 그 지점과의 일정한 좌표를 만들게 되면 그 절대점이 계속 유지되는 한 내 자리도 절대적이라고 안심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게 바로 우상이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신약에 나오는 성도는 아까 불가능성이 나와야 된다 했죠. 신약에서는 이걸 성경적 용어로 하면 영, 신령한 것, 쉽게 말해서 영적 요소가 나와야 돼요, 영적 요소가.
여러분 들어보면 아시지만 막상 생각하면 잘 안 떠오르기 때문에 제가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9절에 보면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자, 몸은 우리 몸입니다. 우리 몸에 뭐가 나타난다고요? 예수의 생명. 그러니까 여분의 것이죠. 영이죠. 신령한 것. 신령한 것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나왔죠. 신령한 자는 신령한 것을 하고 육에 속한 자는 신령한 것을 못하는데 왜냐하면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전2:12~14)
고린도전서 13장 이론에 의하면 은사를 받은 거예요. 믿음 소망 사랑을 받은 사람은 믿음 소망 사랑이 나온다. 그러니까 신약성경의 성도의 특징이 뭐냐? 항상 내가 행하지 않고 내가 만들지도 않는데 이상하게 내 몸을 누군가 이용해서 신령한 것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툭 치면 댕~하고 툭 치면 의~하고 주의 의가 십자가 의가 나오는 것처럼 자꾸 주께서 행한 것이 나올 때 그게 성도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거부하는 거예요? 내가 확정되기 위해서 내가 믿을만한 절대적인 요소를 따로 설정할 이런 경우는 없다는 거예요. 절대적 요소를 따로 설정해버리면 이것은 신령한 것이 나오는 게 아니고 괜찮아진, 괜찮은 내가 돼버려요, 이런 논리에서는.
무한소(無限小)라는 건 쪼개고 쪼개고 쪼개면 결국 이것은 무한히 작은 것, 점이죠, 점. 무한소 곧 점. 점에서 사람들은 무한까지 확장시키는 거예요. 제로(0)에서 무한까지 확장시키는 거예요.
서울에서 내려갔다 할 때 어딜 기준점으로 합니까? 서울을 기준점으로 하죠. 서울로 올라왔다, 역시 서울이 기준점이죠. 사람들의 모든 표현은 거기에 기준점이 있어요. 그 기준점을 가지고 내가 누구냐를 확정지으려는 본인의 시도를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럼 방금 알았으니까 육에서 어떤 기준점을 가지고 내가 누구냐를 확정짓는 육과 아니면 신약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을 내가 짊어짐은 내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나온다는 이것, 죽음과 생명은 반대잖아요, 그런데 죽음은 내 안에 거두고 거두게 되면 생명이 나오는 이것하고 차이점이 뭐냐? 영과 육적인 새로움의 차이점이 뭐냐?
그 차이점은 이렇습니다. 우선 육적인 새로움을 보면 이걸 차밍(charming), 매력이라 할 수 있어요. 인간이 예쁘지는 않은데 굉장히 매력 있다, 다들 그런 소리 듣고 살았잖아요. 내가 너무 실례의 말을...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상하게 얼굴은 예쁘지 않은데 은근히 매력 있네.’ 이거하고 ‘얼굴은 예쁘지 않은데 주의 성령이 나오네.’ 이거하고 차이점이 뭐냐? 매력은 몸에 붙어있는데 몸을 부정하지 않아요, 인간의 매력이란. 몸에서 형성된 것, 아우라처럼 나오는 거예요. 이건 매력입니다. 그런데 영은 어때요? 몸을 인정합니까, 부정합니까? 몸을 부정하죠.
아까 했잖아요, 이사야.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반드시 그것이 전제되어야 돼요. 두 번 다시 내 몸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그러한 의식 자체는 이건 하나님 앞에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내 행위 잘 했잖아요, 내가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잖아요, 이런 데 더 이상 신경 쓰면 안돼요.
그러면 뭐가 죽어버립니까? 예수님의 생명이 죽어버려요. 영이 안 나와요. 영이란 말을 하지만 그 대신 은근히 자기의 매력 포인트를 지금, 매력 점을 과시하고 있는 겁니다. 착한 일 하면서 착한 일한 자기한테 반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악마는 매력 위주로 인간에게 다가옵니다. 이게 시험이죠. 시험하는 거죠. 너의 너 됨을 마음껏 발휘해라. 네 탤런트, 네 재능을 썩히기엔 너무 아깝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너의 매력은 주님의 십자가에 방해된다는 겁니다. “네가 너한테 신경 쓰면 쓸수록 가리워지는 것은 십자가의 복음뿐이다.” 그렇게 이야기하죠.
그럼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말씀을 지켜야 됩니까, 아니면 주께서 그렇게 해주시는 겁니까? 그렇게 해주시는 거예요. 이게 두 번째 시간에 중요한 핵심이 되겠습니다. 그게 p.222에 나옵니다.
주의 이름 외에 딴 이름이 성전에 걸리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주의 이름 말고 다른 이름이 경배 받는 것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하신 일은 이 성전을 악마한테 넘깁니다. 인간의 이름에게 넘겨요.
지금 구약 때 성전이 부동산이거든요. 건물이잖아요, 건물. 구약 때 성전의 특징 중 하나가 실제 건물이라는 거예요. 실제 건물이에요. 건물이니까 인간의 노무와 노동력이 여기에 들어가겠죠. 인간의 노무와 노동 같은 게 들어가고요. 그리고 성전 건물만 그런 게 아니에요. 거기에 있는 법상, 향로, 거기에 법궤 다 누가 제작했습니까? 인간의 손으로 제작했다는 거예요. 인간의 실제 노동력과 금가락지 같은 것 뺀 것, 인간이 갖고 있던 재물로 성전을 짓게 하신 거예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전에 인간 요소를 의도적으로 여기다가 도입시킨 겁니다. 마치 말씀이 육신이 된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남아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환경으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으로 편입되는 거죠. 그러면 인간이 만든 성전이 과연 하나님의 거룩을 감당할 수 있는지 테스트에 들어가는 겁니다.
아까 전쟁은 누구와 누구의 전쟁이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과 사람의 이름이 전쟁을 하죠. 성전 자체에 이미 인간의 요소가 들어갔으니까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공격하는가? 자기 성전을 공격해버려요. 하나님이 자기 성전을 공격합니다.
그런데 이 성전은 인간들의 자기 요소가 들어가기 때문에 성전을 통해 무너질 것도 예상 못하고 성전 안에 주의 이름이 계실 거라고 철석같이 믿게 만들어요, 인간으로 하여금. 이게 인간의 한계죠. 믿을만해서 믿을 것은 다 끄집어내게 만들어요, 하나님께서. 믿을만한 건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어떤 아가씨가 자기는 교회 다니는 남자하고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선을 보는데 “실례지만 교회는 언제부터 다녔습니까?” 하니까 “저 모태신앙입니다.” “아버지는 뭐하세요?” “아버지가 목사입니다. 엄마는 자동적으로 사모가 되고. 우리 집안에 목사가 3명 됩니다. 나는 모태신앙입니다.” 뭐 뒷배가 든든해요, 뒷배가. 3대째 신앙가정입니다.
그걸 제가 뭐라 했습니까? 그건 신앙이 아니고 문화죠, 문화. 이게 문화인데 인간은 이 문화를 어떤 식으로도 하기 마련입니다. 이 문화를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영끌, 다 끌어 모아요. 몽땅 다 끌어 모아서,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 다 가져와. 이걸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실시를 한 거예요. 인간이 종교적으로 율법을 해석하는 그 해석범위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게 만들었습니다.
인간들이 할 수 있는 해석이란 자기설명이에요. 어떤 해석이든. 뭐 달에 로켓 올린다. 그래서? 우리나라 그래서 좋다 이 말이야. 결국 자기해석이에요, 자기해석. 자기해설, 자기설명이에요. 유적지에 해설가 있잖아요. 인간은 평생 자기만 해설하는 자기해설가입니다, 인간들은.
인간에게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만 그 문제점 중 하나가 인간이 말을 한다는 거예요. 입만 열면 자기설명이에요. 입만 열면 어떤 식으로든. 자기설명의 내용이 뭐냐? 자기증명이에요, 자기존재 증명하는 거예요. 말들이 많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디까지 끌어당기느냐 하면 침묵도 말로 간주해버려요. 잠잠해도 문제고 말해도 문제고 이래도 문제고 저래도 문제고.
인간에게는 사망의 몸에서 해방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인간에게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중 하나의 예가 그거에요. 모세가 시내산 올라가서 율법 받을 때 자기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모세의 할 일은 율법을, 자기가 산에서 들었던 것을 전할 뿐이에요. 주의 말씀, 율법을 전하는 게 자기 임무지, 전하는 나는 구원되리라는 것은 거기서 빼야 된다는 사실을 모세가 몰랐던 겁니다.
이 땅에 와서 복음을 전했던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그 사실을 제자들은 몰랐던 거예요. 나중에 성령 받고 난 뒤에 제자들이 주께서 필요한 것은 내 목숨이 아니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복음이라는 사실을, 제자들도 나중에 성령 받고 알았고 특히 사도 바울이 그걸 알았던 겁니다. 아, 내가 필요한 게 아니고 말씀의 필요에 따라서 쓰여 질 뿐이구나. 쓰여 질 뿐이라는 사실, 그게 중요한 거예요.
어떤 깨진 그릇에다가 개밥을 담아주면, 요새는 사료지만 개밥을 담아주면 개가 그 사기그릇에 탐을 냅니까? 핥아먹을 것만 핥아먹고 그거 없으면 끝났죠. 우리 존재가 그릇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자꾸 잊어버려요. 열심히 했으니까 안 잘려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미 잘린 자에게 말씀만 얹어서 주의 증인하게 만든 겁니다. 거기에 자꾸 자기를 덤으로 끼워 넣을 생각을 하면 안돼요. 모세가 그걸 몰랐고 여호수아도 그걸 몰랐죠. 하여튼 구약 사람들은 그걸 잘 몰랐어요.
여호수아 한번 봅시다, 11장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뭘 했는지 이제 주의 전쟁에 본격적으로 들어갑니다. 여호수아 11장 11절, 누가 한번 읽어 보실까요? “그 가운데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고 또 불로 하솔을 살랐으며” 12절, “여호수아가 그 왕들의 모든 성읍과 그 모든 왕을 취하여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여호와의 종 모세의 명한 것과 같이 하였으되”
자, 여기서 질문 하나 들어갑니다.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고 다 죽였는데 그 가운데서 갓난 아이, 막 갓 태어난 갓난 아기가 들어있을까요, 안 들어있을까요? 들어있죠. 갓난 아이까지 다 죽이라 되어있습니다. 아말렉 같은 경우에 갓난 아이 다 죽여야 됩니다. 남자, 여자까지 다 죽여야 돼요.
그러면 인간의 의식 속에서 갓난 아이까지 지은 죄를 찾을 수 있는 인간의 의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의식은 선악의식이기 때문에 죄 지은 것 보고 그 경중에 따라서 처벌하는 그것을 정의는 살아있다 하는 거예요. 비록 지금은 약해도 언젠가 정의는 꽃을 피운다. 참고 인내하면 이 세상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이게 인간세계에 무슨 희망, 종교, 진실처럼 통하고 있습니다. 이거 맞습니까?
아모스 막 거론해요. 강처럼 정의가 흐른다 해가지고. 거기서 나온 단체가 정의실현 사제단. 죽음 속에서 살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망 자체가 사망이기 위하여 필요한 재료들이고 그런 사례들이기 때문에 그래요. 정의는 살아있다는 이런 외침도 이게 저주받을 이유가 되는 외침이에요.
그럼 이게 엉터리이고 잘못됐다는 것은 누가 가르쳐야 됩니까? 누가 실습보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여호수아 11장 11절, 12절 그 뒤에 12장도 많이 나와요. 계속해서 나옵니다. 진멸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쉽게 이렇습니다. 잠시잠깐 눈에 보이게 해놓고 잠시잠깐 사라지게 만드는 거예요. 뭔가 잠깐 있다가 없어져야 이 세상 자체가 엉터리라는 것, 인간 자체가 엉터리 인간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잖아요.
그 일을 하는 자가 이스라엘이거든요. 이스라엘을 통해서 여호수아 같은 경우에. 그러면 이스라엘은 왜 너희들은 안 죽어야 되고 승리해야 되는가? 이스라엘은 지금 누구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어요? 인간의 이름이 아닙니다.
기마전할 때 청군, 백군 깃발 든 사람이 누구입니까? 밑에서 받치고 있는 사람이 안 들죠. 올라탄 사람이 들잖아요. 지금 여호와 이름이 이스라엘 백성을 말처럼 사용해서 올라타고 있는 거예요. 올라탄 그 자리가, 기껏 인간의 눈에 가장 가시적인 한계점에서 보이는 그 물건이 언약궤입니다, 언약궤. 언약궤는 주의 이름이 임재하는 거예요. 기마전할 때 언약궤를 앞장세워서 쳐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사무엘상에 보면 그 언약궤를 빼앗겼잖아요. 작전이었습니다. 양쪽 다 치는 거예요. 블레셋도 치고 양쪽 다 치기 위해서 마치 패배한 것처럼 위장 잠입을 시도한 거예요. 돌아다니면서 다 쳐버렸죠, 돌아다니면서. 이스라엘도 많이 죽었지만 블레셋은 가지지 말아야 될 것, 건들지 말아야 될 것을 건드린 겁니다. 하나님 혼자로도 얼마든지 진멸이 가능해요.
그런데 블레셋 이 사람들이 진멸 받을 때 우리가 염두에 둘 것은 그들이 언약궤를 소지했다는 겁니다. 언약궤를 소지, 소유했기 때문에 그들은 진멸 당했거든요. 언약궤가 돌아다녀가지고.
그러면 이스라엘이 과연 언약궤를 소지할 자격이 됩니까? 그럼 이스라엘은 왜 멀쩡하냐? 사실 멀쩡한 것도 아니죠. 언약궤 만지다가 몇 명 죽고 했잖아요. 그럼 언약궤가 들어왔어도 이스라엘은 멀쩡한 이유가 뭐냐? 이스라엘은 한꺼번에 통으로 잡기 위해서입니다.
언약궤에 주께서 추가 작업을 계속 합니다. 솔로몬 때에 성전을 짓게 만들었어요. 그전에 준비는 다윗이 다 해놓고 짓기는 솔로몬이 지었거든요. 전에 이야기했는데요, p.221에. 지난번에 했죠, 제일 위에. “다윗은 자신이 백향목 궁전에 사는 것을, 법궤가 있는 공간보다 더 월등하게 호사스럽고 우수한 환경이라고 여겼다. 즉 백향목 궁전 안에 들어있는 자신과 천막 안에 들어있는 법궤상자를 상호 비교될 수 있는 동등한 주체라고 여겼는데”
‘주체’라는 어려운 말을 사용했어요. 여러분들이 오늘 공부했으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자, 주체가 뭐냐? ‘나’가 뭐냐? 좌표에서 어떤 절대점을 규정해놓고 그다음에 나라고 자기를 규정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절대점에 대해서, 다윗은 이 절대점이 누구라 했어요? 여호와의 이름, 주님이라 했죠.
이게 다윗이 실수한 거예요. 이게 다윗의 한계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 성전은 없어지기 위해서 지어진다는 사실을 다윗은 몰랐습니다. 여러분은 왜 태어났습니까? 사라지기 위해서 주께서 없애주려고 여러분들을 이 땅에 태어나게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난 지 칠십 년 된 사람도 있어요. 없어지기 위해서 태어난 겁니다.
그러면 내 절대점에 나를 규정하기 위해서 절대점과 연결시키면 안 되겠죠. 예수님 계시면 저는 행복하겠어요, 이런 식으로 연결시키면 안 되겠죠. 연결시키면 안 된단 말이죠. 나를 없애기 위해서 지금껏 죄란 죄는 다 지어야 되는 거예요. 나를 위한 정의는 살아있지 않아요.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우리가 죄인의 입장에서 연결되고 있는 것을 감사히 여겨야 됩니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은 이미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내가 설정한 중심은 이게 가짜라는 사실, 하나의 문화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나의 의식 속에서 나의 나 됨을 위해서 그냥 구차하게 설정되어 있는 것, 내가 믿을만하기 때문에 믿었던 그 예수가 내가 믿을만했기 때문에 그건 100% 가짜라는 사실을 뒤늦게 우리는 그걸 발견하는 기쁨이 있어야 돼요.
십자가 믿어서 구원받는다는 자체가 이게 거짓인 걸 알아야 돼요. 십자가는 십자가 믿는 나를 없애기 위해서 십자가가, 지금 거룩의 효과가 발현되고 있어요. “평생 너는 십자가를 욕 얻어먹게 해라, 이 인간아.” “아멘.” 이러면 끝날 문제에요. 십자가를 욕 얻어 먹이기 위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이게 기쁨으로 확 와야 되죠.
p.222 3번째 줄에, “그 성전이 이제는 무너져야 한단다.” 성전이 무너질 때 이유가 있어야 돼요. 너희들이 내 이름으로 내 이름을 건드렸다는 이유가 성립되어야 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의 이름을 욕되게 한 거예요.
그게 베드로전서에 나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7절,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심판이 어디서부터 시작된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집에서 교회서부터 심판이 되는 거예요. 이것은 당연한 절차입니다. 왜? 구약을 되풀이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수완과 수단을 부려서 구원되는 일은 아예 없게 만들어요. 어떤 수단과 수완을 부려서. 아까도 얘기했지만 모세가 십계명 받을 때 자기가 약속의 땅에 못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모세는 끝까지 희생자가 되어야 돼요, 마치 예수님처럼. 예수님 집의 종이기 때문에. 히브리서 3장에 나오는 거죠. 모세는 종, 하인으로 일했거든요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히3:5). 철저하게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야 돼요.
그러니 사도 바울을 포함해서 열두 제자가 결코 이 땅에서 호강하면서 산 적이 없어요. 일은 잘 됐는데 본인이 세상적으로 현혹될만한 매력을 느낄만한 어떤 인생을 그들에게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21장에서는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러 번 했는데요. 베드로보고 한 얘기, 띠 띄우고 네가 원하지 않는 인생, 원하지 않는 길로 가야 되는 거예요, 원하지 않는 길.
이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아버지한테 “내 원대로 마옵시고”와 똑같은 거예요. 네가 원하지 않는 길. 철저하게 주님께서는 나에게 신경 쓰지 않도록 해버리는 거예요. 어디서 망하든지 객사하든지 굶어죽든지 전혀 네가 신경 쓸 입장이 못 된다. 왜? 너는 원래 망하도록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걸 안다면 너는 이미 네 안에서 예수의 생명이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의 생명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이 땅에서 비교할 어떤 타인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 했듯이 거룩은 굉장한 정도가 아니고 극단적으로 위험합니다. 그 거룩의 위험 앞에서 살아날 자는 아예 없어요. 그게 인간으로서는 당해야 될 당연한 조치입니다. 거룩 앞에서는 누구도 못 삽니다. 그걸 이사야가 봤거든요.
꼭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거룩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 큰소리치는데 이 시대의 거룩은 천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나타나서 십자가의 최종적 거룩, 십자가의 거룩 앞에서 이 나라의 지혜 있는 용감한 임금이나 지도자도 십자가의 지혜, 십자가에서 최종적인 지혜인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똑똑한 사람도 많은 자문기구, 천하의 지혜로운 자들이 왕 앞에 임금 앞에 있었지만 그들은 생각이 똑같았어요. “죽이세요.” 똑같았죠. 오히려 어떤 이방인 백부장이 “잘못 죽였다. 우리는 죽이지 말아야 될 자를 죽였고 건들지 말아야 될 자를 건드렸다.” 그분이 고백했고 다른 사람들은 뭐... 제자들은 도망친다고 바빴고요.
왜 우리는 성경의 이런 사실에 관심이 없느냐 하면 너무나 자기 일에 신경을 많이 써서 그래요. 자기 행함에 대해서 아주 예민하게 굴었고 자기 행동 하나하나를 딱딱 시간표를 잘라가지고 잘했나 못했나를 따지기를 원했고. 자기한테 그렇게 관심사가 많아요.
그건 왜 그러느냐? 차밍, 매력 때문에 그래요. 자기를 부정하지 못할 정도로 매력적인 존재를 하나님 앞에서도 피우고 싶어서 “하나님, 이 정도인데 나를 죽일 있습니까? 이 정도 괜찮은 존재인데.”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 거래에 나서고자 했습니다.
그럼 그 뒤에 봅시다. 한번 적고요. ‘주님은 성도, 이스라엘을 병기로 사용한다.’ 처음에 이스라엘을 병기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내부가 허물어져야 되기 때문에 그다음 병기는 누구냐 하면 선지자죠.
선지자의 특징, 공통점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신이 임했습니다. 심지어 다윗도 마찬가지고요. 하나님의 신이 임할 때만 하나님의 무기가 되죠. 전쟁의 무기가 되는 겁니다. 사사들, 기드온 같은 경우에 사사들, 이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신경 쓰지를 않아요.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기에 타인에게도 신경 쓸 이유가 없죠. 타인에게도. 인간이 자기에게 신경 쓴다는 것은 타인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신경 쓰기 때문에 자기에게 신경 쓰는 겁니다. 있음, 있는 자기이기 때문에 신경 쓰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에 대한 목적은 나를 있게 만듭니까, 없게 만듭니까? 나를 없게 만드는 거라면, 내가 없는 동시에 내 안에 있던 타인의 시선도 없는 동시에 타인들도 같이 날라가버려요, 타인들도. 누구세요?
자기가 점점 더 엷어지면 주변에 있는 타인들도 점점 더 엷어지는 거예요. 그걸 반대로 하게 되면 남이 점점 더 의식된다는 말은 남이 의식되는 게 아니고 나에 대해서 신경을 배나 더 쓰고 있다고 보면 돼요, 나에 대해서. 요새 주름이 좀 끼어들어가는 거 같아. 눈꺼풀 이거 수술해버려?
신경을 많이 쓴다 하는 것은 그만큼 타인들에게 신경을 많이 쓰고 내 안에 있는 타인들에게 신경 거슬리지 않게 만드는 거예요. 내가 나의 눈치보고 살아가는 그런 형편에 놓여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남한테 예속된 게 아니고 누구한테 예속되었습니까? 내가 나한테 예속되었으니까 끝은 자살이죠, 뭐. 내가 나한테 예속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p.222 위에서 4번째 줄, 아모스 9장 6절에 “그의 전을 하늘에 세우시며 그 궁창의 기초를 땅에 두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니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라” 분명히 이게 성전이거든요.
그런데 p.222 밑에서 6번째 줄, 시편 74편 3절에 보면 “영구히 파멸될 곳을 향하여 주의 발을 옮겨 놓으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 가운데에서 떠들며 자기들의 깃발을 세워 표적으로 삼았으니 그들은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자, 역사적으로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서 성전을 불태웠습니까? 하나님의 원수를 통해서 성전을 불태웠죠, 하나님의 원수를 통해서. 도끼 들고 나무 벌목하는 사람처럼 “이제 그들이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그 조각품을 만들라고 누가 지시했습니까? 하나님이 지시했잖아요. 하나님이 지시한 것을 그다음에 “주의 성소에 불사르고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 그렇게 되어있어요.
에스라 9장 11절 한번 봅시다. 에스라 찾기 힘들 건데 724페이지에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전에 주께서 주의 종 선지자들로 명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얻으려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이 가에서 저 가까지 그 더러움으로 채웠음이라”
전에 수요일에 그런 설교했죠. 하나님의 모든 제사가 하나님의 성전을 보호하기 위해서 피를 성막에 뿌리는 거예요. 인간들 때문에, 세상 인간들 때문에 주가 있는 처소가 더러워진 거예요, 처소가. 인간들에 의해서 더러워졌으니까 주님이 알아서 성냥불 그어가지고 주의 처소를 불태우는데 불태우는 당사자가 누구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원수, 이방나라죠.
그러니까 이방나라를 불태움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전부가 하나님의 성소를 불태울만한 이방적 요소에게 접수당하고 점령당했다는 것을, 주께서 성전 세우고 없애시는 것을 통해서 증명해내시는 겁니다. 지금 성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가건물 성전, 없죠. 세상 끝난 거예요. 세상 끝났습니다. 뭐 예배당 지어봐도 소용없고요.
주의 이름이 이 세상에 어떤 곳에서도 모든 인간의 이름으로 인간이 있는 존재에 의해서 다 더럽혀졌다는 것은 이미 증명났기 때문에, 예수님 십자가를 아는 사람이 자신의 지혜로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통해서 이미 모든 사실은 이제는 밝혀질 대로 다 밝혀진 셈이에요.
이게 우리한테는 속 시원~하게 다가와야 됩니다. 막걸리 찾지 마시고 영탁이 막걸리 찾지 마시고 시원한 맥주 한잔 하지 마시고 그냥 인생 모든 게 끝났어요. 아, 나는 잘려야 되는 것이 합당하니이다.
잘리는 것이 합당하니까 이제 우리의 사는 즐거움은 뭐냐? 잘릴 이유를 주께서 어떤 식으로 내 안에 저축을 해놨는지, 차곡차곡 쌓아놨는지 우리는 아주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의 안목으로 그걸 같이 지켜보면 되는 거예요. 살면 더 살수록 내가 보여줄 죄는 더욱더 증가하는데 그것마저도 주께서 하시는 주의 일에 속하는 겁니다.
p.223 봅시다. 밑에서 12번째 줄, 중간 단락에 보면 “이 부정과 긍정이, 성전 파괴가 일어나는 시점에 ‘선지자의 몸=선지자의 신체’를 통해서 역사 한 가운데 등장하게 되는데” 몸이나 신체나 뭐 똑같다고 하는데 사실은 똑같은 게 아닙니다. 몸은 주체에 대해 잉여, 여분의 의미가 들어있는 게 몸이고 신체는 그야말로 정육점 고기처럼 그걸 신체라 하는 겁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이게 어렵단 말이죠. 인간의 자기 몸이라 하면 인간의 세포, 피부세포가 보이잖아요. 이게 어떻게 몸이 되느냐는 거예요, 신체와 몸이 같지 않은데. 주님께서는 신체가 성전이 아니고 몸이 성전이에요. 신체에서 몸이 되어야 신약성경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인간의 신체는, 인간들이 주장하는 몸이라 하는 것은 이게 죽을 몸이기 때문에 근육질이 돼요. 신체가 된다고요. 그런데 여기에 주님의 성령이 와버리면 이 몸은 주님의 일을 하는 활용된 몸이 됩니다. 앉은뱅이나 소경들 같이. 절뚝발이, 귀머거리 그 몸은 감히 주님이 사용하시는 몸이 돼요.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필요한 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소경이 눈을 떴잖아요. 앉은뱅이가 걸으며.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죽은 가운데서 나왔고.
부활했던 사도들의 그 몸, 그것은 신체가 아니고 몸이라고 하는 거예요. 다시, 신체는 그냥 인간들이 몸을 평가할 때 신체가 되고, 과학적으로 보니까. 몸은 주님의 활용도를 봐서 주님의 창조성이 담겨있다 해서 몸이라 보는 거예요. 창조성 또는 주님의 기능성이 있다고 보는 거예요.
끝으로 이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몸에는 주님이 관여하죠. 그러면 주님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창조주가 되고 또 하나는 심판주가 되고, 이 두 가지 기능을 몸을 통해서 증명, 증거하게 만드는 겁니다. 심판받아 마땅히 죽어야 되고 그런데 하나님이 새 창조를 하시는 몸이 되고. 사도 바울의 몸도 마찬가지고요.
사도 바울은 자기가 언제 죽었습니까? 질문을 다시 해야 돼요. 사도 바울은 살아있으면서 언제 죽었습니까? 죽기 전에, 살아있을 때 언제 죽었습니까? 이 질문이 성립이 돼요. 살아있을 때, 부활의 주님 만날 때 그는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십자가에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그러니까 죽은 예수님을 짊어짐은 내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나온다, 가 성사되거든요. 이걸 은혜라 하고 이걸 성령의 역사라 하는 거예요.
참 이게 신기하죠. 그런데 일반인에게는 이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주께서 말씀으로 활동을 하게 되면 여기서 아까 얘기한 불가능성, 주님의 언약의 완성, 다 이루심이 사도의 살아있는 몸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 또는 하나님의 거룩, 다 이루었다는 완성된 거룩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몸을 통해서 삐질삐질 삐져나오는 거예요. 계속해서 발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라.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아내 있어도 없는 자 같이 하고 가져도 다 쓰지 못한 것처럼 하라. 왜? 세상은 끝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자기가 죽는 건 아무것도 아니고 세상 자체가 끝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께서는 스스로 자기 성전을, 파괴된 성전을 통해서 새로운 몸이라는 성전을 알아서 스스로 만들어내시는 데에 자기백성들을 동원시켰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엄연히 있는데 어쭙잖게 우리의 행한 일가지고 그 가치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