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문제 해결책

아빠와 함께 2022. 4. 13. 09:30

20220411a 부산강의 : [시편]47(31:19)-문제해결책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31편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문제 있지요. 다윗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31편은 [다윗의 시] 그렇게 돼 있습니다. 2절에 보면,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보장이 되소서” “건지시고”라는 단어가 나와요.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윗이 가만있지 않고 뭔가 움직임을 보여줘요.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서 우리에게도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 있음이 위험스러운 상황이라고 보는 겁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이게 위험스럽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을 여러분들이 골라보세요. 하나님이 위험한가, 세상이 위험한가, 내가 위험한가? 셋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위험합니까? 만약에 내가 위험하냐면 자기를 처지하면 되지요. 자살하든지 죽으면 문제가 없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나한테는 문제가 없는데 나에게 문제가 일어났다는 그 자체에 대해서 어떤 해결이 없잖아요. 그냥 도망치고 비겁하게 숨고, 그냥 자기를 소멸시키고 그렇게 돼 버리면 나한테 문제 일어났다는 그 문제 자체는 그대로 남아있지 않습니까. 자기가 편하기만 하면 내가 불편함에서 편하다, 편함 이러면 이 세상 아무 문제가 없는 겁니까? 너무나 이거는 개인적이죠.

③번을 답으로 냈다는 것은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지 편한 쪽으로만 생각해서 살아가는지 표가 나고 말았어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환상이라고 해요. 망각. 환상이란 현실의 비현실. 하나님이 주신 현실 속에 살면서 비현실적으로 사는 것, 이게 불신자지요. 자기는 편한테 지옥은 왜 있으며, 왜 만들었으면, 지옥이 꼭 필요한 이유를 모르면서 지옥은 나중 문제고 나만 편하면 그만이다.

이런 마음에 대해서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계속해서 쏟아댑니다. 그게 망상이야, 그게 환상이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환상, 망상은 뭐냐 하면 내가 이미 위험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으로 도피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셋 중에 가장 위험한 분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 가장 위험해요.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는 보호자가 아니거든요.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란 말이죠.

사랑의 하나님 같으면 세상만사가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해줘야 사랑의 하나님이죠.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의 입장은 불편함에서 편함으로 가잖아요. 여러분 아시다시피 창세기 3장에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우리 인생이라 하는 것은, 고단한 인생, 피곤한 인생이 지당한 거예요, 당연한 거예요. 세상을 살면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기 주제파악을 못한 거예요.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 대해서 그냥 눈 질끈 감고 나 편하다, 편하다, 행복하다 이런 헛소리만 늘어놓는 거예요. 환상 속에 빠져있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문제가 생겼어요.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사람입니다. 선지자입니다. 왕이고 선지자고. 나중에 제사장까지 하게 돼요. 이 다윗에게 문제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문제의 유발자에게만 문제가 해결된다.] 이 점을 알려주는 겁니다. 세상이 왜 존재하느냐, 왜 움직이느냐, 왜 변하느냐, 이 모든 세상에 일어나는 쉬지도 않고 달라지는 여러 가지 그 변화의 핵심 또는 정답은 문제 유발자 수준까지 올라가야 문제해결점이 돼요.

그렇지 않고 밑에 있으면 이거는 망상이 된다니까요. 망상은 어리석음이에요. 진리가 아닌 거예요. 진리가 아니면서 나는 편하다. 이거는 같이 쓰레기로 처리되는 겁니다. 근원적인 문제는 해결 안 하면서 나 배부르다? 이거는 어리석은 겁니다. 어리석다는 것은 제가 하는 게 아니고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나오는데, 어떤 부자가 너무 농사가 잘 되어 창고를 지었을 때 나오는 말이, 네가 어리석도다. 네가 편한 건 이해되고 네가 앞으로 떵떵거리면 잘 먹고 잘 사는 건 내가 충분히 이해하는데 문제는 네가 근원적으로 어리석다는 것, 진리를 모른다는 거예요.

“그럼 진리를 알려줘? 알려줄게. 오늘밤 네 목숨, 네 영혼 데려가게 되면 네가 그렇게 넉넉하게 생각하는 창고의 모든 것은 누구 것이 되겠느냐?” 결국 어리석지 않으려면 무엇과 무엇에 대해서 죽음의 진실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 돼요. 오늘밤에 네 영혼 데려가면 누구 것이 되겠느냐? 다시 말해서 어리석은 이유가, 네 죽음이 네 손에 달려있지 않다는 사실을 왜 깜빡깜빡 잊어버리고 사느냐, 이 말입니다.

내일도 살고 모레 살 거라는 자체가 망상이에요. 과거로부터 내려온 그런 습관 같은 거예요. 나도 위험하지만 그러나 세상도 위험해요. 왜냐하면 내가 불편한 나를 편하게 살려할 때 여기에 필요한 재료와 정보, 아이디어 이게 다 어디서 왔느냐 하면 세상에서 왔거든요. 세상, 지는 뭔 안다고? 주위 옆 동에서 왔고, 그냥 친목모임에서 왔고, 심지어 교회에서 교인들끼리 이야기하면서 내가 불편한 나를 편하게 살 수 있는 아이디어를 여기서 얻는다고요. 그런데 이 세상 자체가 진리를 모르고 있거든요.

얘가 커서 세상에 나갔다. 진리를 압니까? 요령만 알지요. 어떻게 나 편하게 사는지 요령만 달달 테크닉만 배우는 곳이 세상입니다. 어떻게 요령부리면 그래도 하루라도 내 목숨 부지할 수 있는 그 기술만 배운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도 뭘 몰라요? 내가 죽는 죽음에 대해서, 내가 30분 후에 죽을 수 있다는 그 진실에 대해서 세상을 가르쳐주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종류가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가장 기본적인 가정, 직장, 동문회라든지 일가친척, 그리고 국가, 그리고 교회, 종교단체 이것이 세상입니다. 일종의 환상 같은 거예요. 다윗이 문제 있었는데 그 동료,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에게 해답을 줬습니까? 안 줬지요. 아이디어를 제공했습니까? 못 줍니다. 그래서 해답으로 나온 것이 시편 31편이에요. 어느 수준까지? 문제 유발자에서 문제가 해결된다는 그 진리를 알려주기 위해서 시편 31편이 다윗이 먼저 우리에게 주어진 거예요.

그래서 어떤 분이 참 좋은 말 하셨어요. 성경을 알게 되면 성경이 우리의 경험으로 다가온다는 것. 이 말은 뭐냐? 우리에서 무엇을 매일같이 잘라낸다? 우리의 환상을 잘라내는 거예요. 우리의 몸은 불편하면 싫어요. 편하면 좋아요. 그런데 이거는 나 위주에요. 나의 욕심이고 나밖에 모르는 사고방식입니다. 이게 환상이거든요. 하나님 수준이 아니고 저 밑바닥의 내 수준이에요. 이 환상을 시편 31편 말씀으로 잘라주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어디로 갑니까? 말씀으로 가는 게 아니고 세상으로 가요. 왜? 세상에는 어릴 때부터 나에게 힘이 있어야 편하게 살 수 있고, 권력이든 돈이든 힘이 있어야 사람 행세께나 하고 대우받는다는 그 아이디어를 세상에서 제공했거든요. 그래서 문제 있다 싶으면 세상으로 가서 해결점을 얻는 거예요. 인터넷이라든지.

인터넷 보면 세상 교회 목사들 설교 얼마나 많습니까? 그 설교의 공통점이 뭐예요? 이렇게 살 수 있다고 하잖아요. 이렇게 하면 살 수 있고 천국 갈 수 있다는 그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나 진실은 내가 죽을 수 있는 존재인 것을 내가 명확하게 인정하는 데 있어요. 그만 살자. 어떤 자이언티라는 사람이 부른 노래,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런 노래 있어요. <양화대교>

제가 만약에 그 노래가사를 쓴다면, 살지 말자 죽음을 알자. 더 살 이유도 없는데 나한테는 이유가 있지만, 그거는 망상이니까. 내가 살 이유는 진리 속에 포함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진리는 내 레벨이 아니고 저 위쪽 레벨에서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나밖에 모르는 인간을 문제 유발자가 하나님이니까 하나님까지 올라가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은혜라고 하는 거예요. 요새 말썽꾸러기 보험금 8억 때문에 남편 죽인 은해 말고.

보험금 8억 때문에 남편 죽이고 도망하는 것은 어디서 배운 거예요? 세상에서 배웠지요. 사람들 욕하지요. 그러나 그 사람 어릴 때부터 세상에서 그런 아이디어를 얻은 거예요. 우리고 그런 형편 되면 그런 아이디어를 은근히 생각할 수도 있어요. 남편한테 8억 있겠다, 남편과 같이 살기 싫으면 빨리 죽어줘.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어요. 그것이 불편한 나를 편하게 살고자 하는 내 욕망이 내 욕심이 요청하는 바거든요. 육신도 내 마음대로 안 되고 육신이 요청하는 바에 따를 수밖에 없어요.

은혜라는 것은 나를 잃어버리는 겁니다. 은혜가 올라가게 되면 나를 잊어버렸잖아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유라고 하는 거예요. 시편 31편은 자유를 이야기합니다. 자유는 나의 업무가 없는 상태에요. 내가 할 업무가 하나도 없는 게 자유 상태에요. 다른 말로 하면 이게 천국입니다. 천국은 나의 업무가 없어요. 내 무거운 업무를 지고 한 이십 년 살래요, 안 그러면 업무 없이 그만 30분 뒤에 죽을래요? 어느 쪽이 낫습니까?

성경에서 천국은, 특히 신약에서 천국은 천국 들어가기 전에 이미 천국의 삶을 살도록 돼 있어요. 그 맛보기를 성령께서 매일같이 꾸준하게 그 삶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나의 업무가 없는 것. 나의 업무가 없다는 말은, 내가 없다가 아니라 나와 문제 유발자와 관련되어서 나의 업무가 떨어져나가는 거예요. 내가 편하게 살기 위해서 내게 필요한 업무가 있었는데 그게 하나님과 은혜로써 연결되다보니까 나의 일은 아예 없고 주님의 일에 포함이 된 내가 돼버립니다.

그 일은 누가 하느냐? 주님이 일하고 나는 주님의 일에 딸려갈 뿐이죠. 마태복음 8장 9절에 나오는 말씀. 이 말씀이 뭐냐 하면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게 아니라 누가 주가 되고 누가 부가 되느냐 하면 주님이 주가 되고 내가 부가 되는 거예요. 주께서 나를 통해서 나의 일을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나를 통해서 주님의 일이 발산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문제 하나 나갑니다. 여러분이 농부입니다, 갑자기 농사 잘 됐어요. 너무 많아서 창고를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어떠한 마음가짐이 돼야 됩니까? 갑자기 문제가 어려워져버렸지요. 아까 분명히 누가복음 예를 들었는데, 내 영혼아 염려하지 마라, 이런 이야기가 어리석은 자 이야기가 막 나올 것 같아요. 그렇지요. 정답은 어리석은 자의 그 고백을 즐겁게 가볍게 하는 거예요.

어리석은 자가 뭐냐 하면 내 영혼아 이제 편하게 먹고 마시며 즐기자, 라고 똑같은 고백을 내놓아야 돼요. 왜? 그 어리석은 자와 동일한 어리석은 육신이기 때문에. 내놓으면서 우리는 슬며시 웃지요. “주여, 이게 바로 어리석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 나를 통해서 말씀으로 일하시는 결과물이 접니다.” 안 어리석은 것이 아니고 어리석은 것에 대해서 용감하게 거기에 뛰어드세요. 그리고 이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외부에 알리면 우리는 말씀 증거자가 되는 거예요.

들어보니 별로 어렵지 않지요. 평소에 어리석은 대로 하던 대로 하면 되는, 새삼스럽게 바뀔 일이 없잖아요. 바꿔도 마찬가지인데요. 누가복음 12장 20절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나는 아나 어리석겠다고 고치게 되면 업무가 돼버려요. 내가 내 구원을 주께 맡기지 않고 내 선에서 구원될 만한 것을 따로 조립해버리면 이거는 하나님의 은혜가 끊어져버린 거예요.

주님이 나의 수준에서 하나님 수준으로 높여주는 데 은혜가 끊어지면, 이 끊어지는 경험을 해보실래요? 공사장에서 인부가 광주터미널 아파트 39층까지 올라가다가 엘리베이터 줄 한 번 끊어져볼래요? 은혜가 끊어지면 다시 곤두박질쳐서 은혜 없던 다시 불신자의 바닥으로 떨어지죠.

불신자가 뭐냐? 자기 업무가 있는 사람이 불신자에요. 자유가 없지요. 자유가 뭐꼬, 이런 식이에요. 자기 업무가 그대로 나와요. 그 업무 중에 회사 다녀야 되고, 얘들 공부해야 되는데 그 업무 중에 하나가 교회에 충성해야 되고 열심히 해서 자기신앙 있다는 것을 하나님한테 내신 성적 받아야 돼. 이게 얼마나 악마적인 일입니까. 주의 일이 아니고 나의 일이 돼버리면 그 자체가 무거운 짐이 돼요.

주께서 분명히 오신 이유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덜어드리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예수 믿고 난 뒤에 율법 지킨다고, 이건 뭐 성경법도 지켜야 되고 교회법도 지켜야 되고 온갖 것 다해야 되고. 위험을 해도 하나님이 위험해야 되지 내 쪽에 위험하면 안 돼요. 위험하다는 말은 그만큼 여기에 문제해결책이 있다는 뜻이에요. 그 해결책이 시편 31편이에요.

다시 보겠습니다. 시편 31편에 보면 다윗에게 문제가 생겼어요. 분명히 문제가 생겼잖아요.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이게 다 문젯거리에요. 다윗은 이런 신앙고백을 하는 이유는, 이 문제는 내가 편하게 살려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 하나님과 연관돼 있는 하나님 됨을 더 깊게 더 많이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죠. 나에게 문제가 생긴 것은, 내가 전에는 하나님을 이만큼 알았는데 하나님을 더 많이 크게 깊게 넓게 더 알게 하기 위해서 나에게 이런 변화가 생긴 거예요.

사도 바울의 기도내용에 이게 나와 있습니다. 에베소서 3장이거든요. 18절에,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내 업무가 아니고 내 노력의 성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에요. 그 사랑의 넓이와 그 사랑의 길이와 그 사랑의 높이와 그 사랑의 깊이가 얼마나 거대한 정도가 아니고 충만했어요.

충만이 뭐냐 하면 목욕탕에 가서 바가지로 물 덮어쓰는 게 충만이 아니고 아예 물 안에 들어가는 거예요. 뜨거우면 안 되지요. 냉탕 안에 깊숙이 잠길 때 그게 충만이에요. 푹 잠겨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충만해서 친구끼리 목욕탕에 왔는데 친구가 안 보여. 지금 물속에 들어가 보이질 않지요. 사랑의 충만이에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내 쪽에서 할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사랑이거든요. 그것을 이렇게 보면 돼요.

갓난아이의 특징은 자기 이름을 모릅니다. 좀 크면 이름을 알겠지요. 이름을 몰라도 괜찮아요. 왜? 자기 주변에는 부모의 사랑이 충만하기 때문에.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몰라도 괜찮아요. 갓난아이의 자기 업무가 뭡니까? 싸는 데로 쌀 뿐이지 무슨 업무가 있어요. 갓난아이가, “엄마 숙제할래요?” 이래요? 그건 귀신이지 인간이겠어요.

네가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은 모든 걸 좀 놔라 이 말이죠. 내가 놔도 주님이 붙잡아주시는 그런 업무 같은 게 있어요. 지시와 명령 같은 게 있다고요. 지시와 명령은 말씀과 관련돼 있지 내가 기대하는 나의 목표는 환상이기 때문에 그걸 삭제시켜버립니다. 예상 못한 주님의 사랑을 위해서 지독한 내 사랑을 환성으로 간주해서 제거해나가는 그 작업을 하나님께서는 신약도 그렇게 구약에서 미리 다윗을 통해서 실현시키는 겁니다.

갓난아이는 부모가 옆에 항상 주시하고 딱 지켜보고 그렇게 하지요. 그렇다면 다시 정리하면, 다윗에게 문제가 생겼다. 이건 다윗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에게 문제 시킨다고 내 문제가 아니에요. 내 문제는 없어요. 그냥 주님이 자신이 누군지를 더 많이 알도록 이런 새로운 환경 창조를 쉬지 않고 해주십니다. 성도한테.

성도한테는 날마다 인테리어를 되풀이하지요. 반복하지요. 날마다 새로운 인테리어를. 인테리어라는 것은 환경문제에요. 새로운 환경을 새롭게 입혀주는 겁니다. 어제의 환경은 다 지나갔고, 오늘은 새로운 환경, 내일 되면 내일 환경을 또 주시고. 전부 다 기록된 말씀대로 이뤄지는 우리에게 경험케 하는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주어진 환경 속에서 다윗은 오늘 본문에 보면 그냥 굴러다닌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환경이 이리 기울어지면 이리로 굴러가고, 이리 가면 기울어지고. 좀 어지럽긴 하지만 어쨌든 자기 업무는 없어요. 우리 성도의 평생이 지나가 보면 이런 식이었어요. 여기 가면 이리 구르고 저기 가면 저리 구르고 어디 가도 우린 항상 어리석은 소리만 해대지요.

지나가 보면 내 불편함을 해소하는 데 급급해서 주의 뜻은 관심도 없고 기도하면서 못 살겠다고 살려달라고 무슨 의도로 왜 살려줘야 되는지 이유도 없이 무조건 살려달라고. 지나가 보면 다 환상을 쫓았던 세상을 닮아갔던 우리의 모습인 걸 알 수 있지요. 굴러가는 거죠. 저는 이걸 사자성어로 ‘충무꿀빵’이라. 충무 지금은 통영.

통영꿀빵의 특징이 뭐냐? 대부분이 앙꼬에요. 앙꼬덩어리에 말똥구리 비슷하게 하도 구르다보니까 내용물이 앙꼬고 껍데기 약간 있고 거기다 꿀 바르고 땅콩 붙은, 한 개 천 원. 세상에 굴러다니면 안에 우리는 말똥구리처럼 세상에서 묻은 인간의 죄란 죄는 죄다 다 뭉쳐져 있어요. 그게 우리의 정체성, 우리의 모습은 그겁니다.

쪼개보면 세상에 세월 산만큼 나이든 만큼 죄는 완전히 눈사람 굴리면 두께 층이 생기는 것처럼 산만큼 온갖 죄가 다 있지요. 그럼 주님께서 거기다가 죄 씻음의 피의 사랑으로 꿀을 발라요. 내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기 위해선 내가 너를 세상에 굴러먹게 했다, 됐냐? 지금 이제껏 살아온 그것이 네 원대로 된 것이 아니고 내 원대로 되었다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내 수준에서 주님 수준으로 올라가는 은혜의 엘리베이터, 은혜에 관련되어서 갑니다. 그냥 못 가지요. 세상이 어떤가를 그걸 알고 통과하는 거죠. 진짜 하나님이 두렵고 위험하다는 말은 그만큼 하나님이 무섭다는 거예요. 해결책은 하나님 쪽에서 해결해야지 중간에 있는 세상 쪽에서 국가, 가정, 교회 이런 데서 직장에서 어떤 해결책이 영원한 영생을 주질 못해요.

갓난아이 자체가 생명이잖아요. 갓난아이처럼 되질 못한단 말이죠. 니고데모가 두 번 다시 갓난아이처럼 될 수 없다는 소릴 들었습니다. 니고데모 입장에선 예수님 말씀이 정말 어렵지요. 정말 뭔가 조금이라도 본인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면 해보겠는 데 근원적으로 차단시켜버립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시켜요.

그럴 때 온전한 건짐이라는 게 나도 조금 보태고 주님 조금 보태서 건지는 게 아니고 온전히 하나님이 문제 해결시키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결과물이 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문제를 유발시키면서 해결책이 뭐냐?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죽음입니다. 오늘 강의의 핵심이 되겠어요. 역시 이것도 세 가지 항을 놓고 질문할 테니 정답을 내보세요.

①하나님의 죽음. ②나의 죽음. ③윙윙거리는 파리의 죽음. 각 죽음의 차이점이 뭐예요? 같은 죽음 아니겠지요? 파리가 저기서 윙윙거릴 때 파리채 어디 있지? 이게 뭔 뜻입니까? 파리 살해의지를 보이지요. 왜냐하면 파리가 윙윙거리면 나는 위험을 느끼지요. 뭐 파리 앉았다고 죽진 않지만 불편하잖아요. 그 불편함의 끝은 죽음이라는 불편함과 관련돼 있기 때문에 지금의 쾌적한 이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파리란 파리는 다 잡아야 되겠지요.

그러면 내 파리채의 폭력에 휘둘린 파리 목숨의 가치는 우린 어떻게 관련돼 있습니까? 자기나라 남부와 우크라이나 관련돼 있다고 해서 러시아가 파리 한 마리 잡듯이 그냥 침범했을 때에 우크라이나 주민들의 그 억울함은 어떻게 풉니까? 그래서 러시아 국민들이 전쟁을 멈추라고 이야기합니까? 안 하지요. 신났지요. 약소국가 괴롭히는 것, 학급에 비실비실한 것 때릴 때 비로소 인간은 강자의 의식에 스스로 희열을 느끼잖아요.

제가 문제를 하나 내겠어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주민들을 학살했습니다. 이거는 나쁩니까, 틀립니까? 요새는 제가 질문을 해도 두 번, 세 번 꼬아서 하기 때문에 답하기가 겁이 나나봅니다. 분명히 나쁘지요. 우크라이나 전 국민이 무엇을 옹호하느냐 하면 동성애를 옹호한다면 어떻게 생각해요? 동성애를 옹호하고 복음을 거부하고 너무나 세속적인 국가라면 러시아 쪽에서 이거는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자기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는 수가 되지요.

자, 윙윙거리는 파리가 주위에 들끓습니다. 파리채 들고 잡았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내가 오늘 파리 몇 마리 죽였어? 이거는 중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거예요. 중이라도 밥 먹을 때 지 밥그릇에 파리가 오게 되면 살생을 금해서 죽이긴 않겠지만, 요샌 중도 그런 것 없지만 가라 하잖아요. 가라 하면 그거는 파리 목숨을 위협하는 짓이에요. 왜? 같이 살자, 이래 나와야 되는데 이건 밥그릇이야, 하고 가져가면 너는 잠재적 파리에 대한 살해자가 돼요.

이 세 가지 죽음의 특징은, 나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내 입장만 생각하게 돼 있어요. 죽기 전에 맛있는 것 잘 먹자, 이런 식으로 내 입장만 생각한다고요. 그러나 하나님의 죽음은 인간이 끼어들 수 없다는 특징을 갖고 있어요. “하나님 죽는데 저도 같이 가담하겠습니다.” 이건 베드로가 이야기했거든요.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갈 때 시건방지게 그렇게 이야기했다고요. 저도 한 희생합니다. 사랑은 희생에서 온다는 걸 저도 압니다. 그러니 저도 끼어주세요. 가! 네가 낄 자리가 아니죠.

왜냐하면 우리도 피조물이잖아요. 피조세계의 모든 문제점은 피조물에 문제는 하나도 없어요, 사실은. 없는데 네 미래는 너 하기 나름이라고 악마가 자꾸 사기를 친 거예요. 그 사기꾼의 앞잡이가 교회 목사들이지만. 네 문제는 네가 해야 된다. 네 장래가 저주받느냐, 복 받느냐는 네 결정하기 나름이다. 그러나 성경은 일체 인간의 문제는 없어요. 주님은 인간과 상대 안 합니다. 악마와 상대하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에요.

문제는 하나님의 죽음만 내 피와 내 살을 먹는 그것만 해결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죽어도 하나님의 죽음에 들어갈 수 없어요. 동참할 수 없어요. 이것은 인간이 죽는다할지라도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에 내가 성큼성큼 자진해서 끼어들 자격이 못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들어갈 수가 없어요.

세상 사람들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무슨 문제 해결하려고 그렇게 바쁜지 모르겠어요. 불편함을 편함으로 만들려고 그 해결하려하고 있어요? 여러분 잊었겠지만 다시 확인시키겠습니다. 자유가 없는 것은 천국이 아닙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 자유 없는 천국은 없어요. 천국 가서 심심해서 못 살겠다는 것은 이건 여전히 자유가 없는 거예요. 넣어주지도 않지요. 자유란 나의 업무가 없는 거예요. 나의 생각, 내 관심사가 없는 거예요.

다윗도 자기 관심사를 자기가 만들려고 한 게 아니고 시편 31편에서 하나님 쪽에서 의도적으로 문제를 일으켜버린 겁니다. 내가 아무리 위험을 피해서 안전한 곳에 한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문제를 일으켜버리면 내가 안전하다고 여기는 그곳이 천하에 위험한 곳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위험하고, 하나님이 가장 위험하다는 것은 근원적인 해결책도 누구만 있다?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거예요. 위험한 것에 슬퍼하지 말고.

나는 이제 고생이다, 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성령이 오고 난 뒤에 사도들 있잖아요. 사도들 가는 곳이 오늘 다윗이 가는 곳과 똑같아요. 선지자 계열이기 때문에 주께서 늘 굴러가도록, 무슨 꿀빵? 충무꿀빵, 통영꿀빵처럼 새로운 환경을 조성해놓고 거기다가 열두 사도를 그냥 보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는 문제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고 이미 문제 해결되었음을 넉넉하고 자기 업무가 아니니까 아주 넉넉한 자유로움 가운데서 마음껏 전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죽음이 해결책이잖아요. 그럼 나의 죽음은 해결책입니까, 해결책 아닙니까? 해결책이 아니지요. 죽어도 상관없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로마서 14장 7절에, 사나죽으나, 내가 죽는 게 나와 무슨 관계있느냐 이런 뜻이에요.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다. 내가 죽는 것이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돼버려요. 이 정도로 자유로워요.

이쯤해서 아까 이야기한 것 잊어버렸지 싶다. 그래서 파리 윙윙거리면 죽여야 됩니까, 아니면 밥을 같이 먹여야 됩니까? 죽여야지요. 가차 없이 죽여 버려야지요. 왜냐하면 내가 죽어 마땅함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파리가 들끓는 환경을 인테리어로 조성해줬기 때문에.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이 광고의 문제점이 뭔지 여러분이 답변해보세요.

미싱사 O명, 인타사 O명, 소매달이 O명, 다이마루 O명, 그 다음에 시다 O명. 자, 이 광고의 문제점은? 지금까지 공부한 것 응용문제입니다. 문제점이 뭡니까? ‘인타사’는 봉제공장에서 박음질처리기술자, 소매달이는 소매만 전문으로 다는, 다이마루는 편직물 다루는 봉제공장에서 필요한데 이 광고의 문제점은?

문제점은 은혜로부터 눈 돌리게 하는 거예요. 이게 문제점이에요. 만약에 나이 들었는데 집안에 돈 나갈 게 많아서 갑자기 남편 병원비용이 많이 든다든지, 자식 사업자금 든다할 때 30년 봉제하던 사람이 그만두려 했는데 돈 벌겠다고 하면 관심사가 어떻게 됩니까? 은혜로부터 관심사가 이리로 돌아가겠지요. 눈총이 돌아가게 되면 하나님 레벨의 수준에서 관심사가 그만큼 희박해지는 거예요. 이제는 열심히 돈 벌어야지.

그렇다면 누가복음 12장 20절에 나오는 어리석은 자가, 우리가 은혜를 알면 어리석음을 알고 어리석다고 이야기하는데 만약에 여기에 빠지게 되면 지나가는 교인이, “요새 집사님 교회에 안 보입니까?” “요새 인타사로 취직했습니다.” 그럼 본인이 이렇게 일하는 것, 말씀에 관심이 없는 걸 어리석다고 여기지 않습니까? “뭐 어리석고 뭐고 먹고 살아야지요.” 갑자기 은혜의 엘리베이터 줄이 끊어져버렸어요. 관심사가 위에 있지 않고 밑에 추락된 거예요.

그런데 은혜를 알고 여기에 취직한 사람은 이 환경이 어떤 환경이냐 하면 주께서, “그만 놀아. 나이 육십도 안 돼서 뭘 자꾸 놀아. 일해야지.” 주께서 통영꿀빵, 새롭게 일하라고 해줬어요. 그런데 교회 목사 만나면, 내가 취직해서 이 나이에 돈 번다고 참 어리석은 짓을 합니다, 하고 7개월 뒤에 갈게요. 7개월 동안 바짝 벌고 갈게요. 이럴 때 본인이 화를 내는 게 아니고 새로운 직장에 있으면서 나의 어리석고 나의 세속적인 것에 대해서 다시 경험케 하는 기회가 되는 거죠. 세상에서 눈만 돌리면 다 이런 거예요.

전부 다 관심을 내가 환상을 쫓고 있는 진짜 어리석고 죄인이라는 것을 알릴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차있기 때문에 문제가 주께서 주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알리기 위해서 주어진 환경이라고 이해하고 아무런 부담 없이 어디든 취직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 미안합니다, 하고 끊어버리고 다시 돌아가 버리면 그거는 자기 업무가 스스로 있으니까 뭘 놓쳐요? 자기의 귀한 자유를 놓쳐버리는 거예요.

놓친 게 아니고 처음부터 들어가지도 않았지요. 자유가 겁이 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천국이 자유라는 데 그럼 내 목숨은, 내 자식은 누가 키우나, 이런 식으로 누가 키우지 말라 했어요? 키우되 내 자식에 몰빵하는 그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라고 충분히 인정하면서 얘 자전거 사주고 열심히 하란 말이죠. 놀러가고.

이것이 다윗에게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물론 다윗에게 미싱사 이런 게 오지요. 그게 이름이 누구냐 하면 사울 왕입니다. 다윗을 사울에게 날 좀 미워하게 해줘. 그래서 내가 은혜 받을게, 라고 수작을 부리지 않았어요. 다윗은 그냥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여기 사울 왕이 등장합니다.

사울 왕이 등장하는 것이 사무엘상 23장 7절,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그일라가 어디쯤 되느냐 하면 여기 갈릴리 있고 사해가 갈릴리보다 열 배 더 커요. 이 중간에 그일라라는 곳이 있어요. 그 당시는 블레셋 땅이에요.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로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

블레셋 지경에 경계선 비슷한데 그 동네에 수배자인 다윗이 신고가 들어왔으니까 이참에 제거가 가능하다, 죽일 수 있다고 달려든 거예요. 13절에 보면,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 도망치는 장면입니다.

14절에, “다윗이 황무지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황무지 산골에도 유하였으므로” 약간 남쪽에 십이라는 황무지 장소가 있습니다. 또 그리고 피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사울이란 이상한 왕이 등장해서 계속 다윗을 지독하게 미워하는 거예요. 자, 다윗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지요. 제가 해결책이 뭐냐? 문제를 일으킬 때는 해결책을 돋보이기 위해서인데 그 해결책이 뭐냐 하면 하나님 자신이 죽는 거예요.

하나님 자신의 죽음에 인간의 죽음은 참여할 수 있다, 없다?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나 선지자는 그 죽음에 유일한 예수님의 죽음엔 참석할 순 없지만 그 여파에 휘말리게 휘둘리게 되는 것, 이게 오늘날 성도의 운명입니다.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다윗 같이 똑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어요. 구체적인 것은 10분 쉬고 합시다.

 

20220411b 부산강의 : [시편]47(31:19)-문제해결책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시간 끝에 사울의 등장인데 사울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나를 위한 환경이 주님을 위한 환경을 가로막는다.]는 겁니다. 왜 사울을 등장시키느냐 하면 죄란 무엇인가에요. 하나님께서 이미 하나님의 해결책은 하나님 자신이 죽는 것이 해결책이에요. 인간들의 죽음은 해결책 아닙니다. 하나님이 죽으면서 뭘 드러내느냐 하면 내가 죽는 것은 세상의 죄 때문에 죽는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죽음을 먼저 던지고 그 이후에 하나님의 죽음에 인간의 죽음이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죽음은 재수 없다고 죽거든요. 재수 오지게도 없다고 죽는다고요. 어떤 자기 죽음의 정당성, 이유를 인간은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의 죽음은 거기에 어떤 목적이 있습니다.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죽는 거예요. 따라서 죽음을 확정짓고 난 뒤에는 그 다음에 죄를 확정 시켜놔야 돼요. 그래야 그 죄와 그 죽음의 관련성이 형성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 죄를 위해 필요한 인물들이지만 저는 이걸 인재들이라고, 엘리트들. 이 세상에서는 잘나고 똑똑하기 때문에 더욱더 죄답지요. 죄란 주님의 단독적인 죽음의 의미를 가리는 그게 죄에요. 예수님 십자가 복음을 가리는 것이 죄에요. 복음이 오지 않으면 또는 믿지 아니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들이 자칭 의인으로 간주했어요.

우리가 왜 죄냐? 우린 죄에 속박되지 않았다, 죄로부터 해방되었다, 우린 죄로부터 자유롭다, 우린 애굽에서 나왔던 그러한 종족이고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요한복음 8장에서 아주 강력하게 예수님 대적하면서 그런 이야기하거든요. 주님의 뜻은 뭐냐 하면 그러니까 죄지, 이렇게 된 거예요. 죄가 아니라고 하기 때문에 죄가 된다는 겁니다.

사울이 등장한 것은 인재들, 영웅들, 잘난 자들, 더 구체적으로 해서 본인의 일에 업무에 의미를 실어보는 자들, 내가 하는 일이 어리석은 일이 아니고 가치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 사울입니다. 인간의 일은 내용 없는 형식들뿐이에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매일같이 주께서 일하기 때문에 인테리어, 환경이 바뀐다고 했지요. 환경이 바뀌면 어제 했던 어리석음 따로 있고요 오늘은 오늘 어리석음 따로 튀어나와요. 내일 되면 내일 어리석음 따로 튀어나와요.

내용은 없으면서 그럴싸한 형식들은 갖추고 있습니다. 금요철야기도하면 처음에는 야무지게 3분내지 5분 간 하다가 좀 하게 되면 본인이 자고 있는지 꿈을 꾸고 있는지 기도하는지 본인도 몰라요. 그러다 깨면 본능적으로 주여, 주여, 주여, 남 뭐하나 다 보고.

그러면서도 어떤 자기 형식의 내용을 다 채우는 것은, “주의 거룩하신 사자님 시키는 대로 금요철야기도 나와 줬잖아요. 그러니까 다음 주에 우리 얘가 시험 치는데 이번 주에 열심을 보이니까 주님도 양심이 있으면 나의 열심을 감안해서 점수라도 좀 더 받게 하옵소서.” 그런 태도를 갖고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나를 위한 환경은 때려죽여도 포기 못하겠다는 이거는 끝까지 나를 위한 환경에 대해선 죽으면 죽었지 포기 못하겠다.

그게 누굽니까? 사울이에요. 그러니 사울의 등장은 반갑다 사울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의 모습이 사울이 그대로 재현해주고 있습니다. 그냥 닮은꼴이에요. 그대로에요. 그런데 그 사울이 일생일대의 목표가 있습니다. 그건 뭐냐? 다윗을 죽이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오는 게 시편 31편이고 31편뿐만 아니고 많은 시편에 나왔고요.

이걸 오늘날로 하면 인간의 자기를 위한 환경을 추구하고 못 버리는 사람의 일생의 목표는 뭐냐? 예수님을 죽이는 겁니다. 그것도 밟아 죽이는 거예요. 어제 낮 설교에 선한 사마리아인할 때 나 같으면 밟는다 하니까 굳이 그렇게 과격하게 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하는데 여러분 그걸 몰라서 그래요.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님을 어떻게 했습니까? 핍박했지요. 그 사울이 구원 받았어요.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일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울을 찾아와 하는 말이, 네가 쓸데없는 내용 없는 형식 한다고 네가 고생이 많다. 네가 그렇게 날 믿는 사람들 잡아 죽인다한들 너만 고생이야. 네가 맨발로 선인장 가시를 밟으면 네 발만 아프다는 식으로 주께서 네가 고생이 많다 부질없는 시도한다고. 그게 뭐냐 하면 주님에 대한 핍박이에요.

하나님의 일은 어떤 외부가 개입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훼손해도 하나님의 일은 훼손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훼손되는 법은 없어요. 인간에 의해 훼손될 것 같으면 하나님 아니지요. 내가 택한 자는 반드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어떤 방해공작이라도 끄떡없이 내 일은 성사되기로 이미 확정이 나버렸습니다.

확정 났다는 것, 이걸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도 안정되는 게 마땅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놓고 불안정한 사람은 이해가 안 돼요. “내가 죄 지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싫어하겠나.” 주의 일은 훼손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낙서한다고 낙서가 쓰이지 않아요. 어떤 짓거리를 해도 주의 일에 요만큼도 흠이 나지 않아요. 확정됐기 때문에.

사울의 등장은 나를 위한 환경이 주님을 위한 환경을 가로막는다고 설쳐대는 거예요. 그래서 사울은 무엇이 문제냐 하면 ‘나’ 이게 문제에요. 다윗은 사울로 인하여 쫓겨 다니지요. 그냥 사울이 다윗을 쫓아내기만 하면 됩니까, 죽이기를 원해요? 사울의 입장에서는 다윗을 죽이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다윗을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고 죽으라고 찾아다니는 거예요.

그러면 사울의 입장, 죄인의 입장을 다윗이 그냥 받아들여야 돼요. 왜냐하면 죽음 안에서만 성도는 죽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죽음 안에서만 성도는 죽지 않는데 누가 죽이는가? 세상 사람들, 불신자들이 나를 너 같은 것은 죽어 마땅해, 라고 우리가 요청하지 않는 죽음을 세상 사람들로부터 부여받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부부 싸움할 때 빈말이라도 하잖아요. “죽어, 죽어, 인간아!” 처음에는 여보~ 나오다가 한 몇 년 살면, “죽어, 죽어, 나가 죽어. 보험금 걸어놓고 죽어, 인간아.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인간.” 낙엽 같은 것 던지면서, CF에 그런 것 있잖아요. “가라, 가란 말이야! 네가 나한테 와서 방해만 된다.” 그건 뭔 뜻이에요? 나를 위한 환경은 그 누구라도 나는 침해받지 않겠다는 야무진 다짐이 있지요. 그게 누구라고요? 사울. 그게 오늘날 모든 인간입니다.

사울이 나를 위한 환경, 이게 놀랍게도 네 자로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을 자기 소유로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사울이 하나님 믿는다는 말은, 내 것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 믿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 교인들과 똑같은 거예요. 내 것 지키기 위해서 내 가정의 행복, 내 인생의 편안함 이것 지키기 위해서 교회 가는 거예요. 그게 사울이에요.

지키고, 지키고 싶었는데 나에게 좋은 조언을 해준 사무엘이 죽고 난 뒤에 그 사무엘을 잊지 못해서 다시 사무엘에게 찾아가는 거예요. 사무엘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 것 지키는 데 사무엘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래서 사울이 누구까지 찾아갑니까? 엔돌에 나오는 여자 무당이죠. 여자 무당 좋아서 찾아가는 게 아니에요. 그 사무엘 좀 살려내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김성수 목사 좀 살려내라 이 말과 똑같은 거예요. 살려내죠, 뭐. 김성수 목사 동영상 틀어놓고 예배드리니까. 그런 사람 없었어요, 노래도 있지만. 이건 뭐 김성수 목사뿐만 아니고 한경직 목사, 손양원 목사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하는 이유가, 나를 위한 환경, 교회에선 이 환경이 뭐냐? 천국 가 있는 나를 위해서 그런 환경을 고수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다윗은 무엇과 관련돼 있느냐 하면, 31편 17절을 봅시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로 부끄럽게 마시고 악인을 부끄럽게 하사”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뭡니까?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 너는 지옥 가서 쭈그려 앉아, 그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너의 출발지가 음부, 죽음의 자리에요.

그 당시 같으면 언약 밖의 자리, 다윗을 해롭게 하면 이것은 언약에 의해서 부정적 존재가 되거든요. 반 언약적 존재가 된단 말이죠. 반 언약적 존재로서 다윗이 뭘 사용했습니까? 음부를 사용했어요. 스올. 이 스올은 뭐냐 하면 일종에 구약으로 말하면 지옥이죠. 너는 지옥에나 가서 쭈그려있어. 영원히 나오지 마, 이런 뜻이란 말이죠.

그렇다면 지옥이란 것은 불신자가 가는 나라 정도가 아니라 시편 31편에 보면 그 지옥으로 가야 될 자들이 해야 될 업무가 있어요. 그거는 뭐냐 하면 소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자기를 위한 환경을 포기하게 만드는 업무에 그들이 동원돼야 됩니다. 사람이 자기를 위한 환경을 지가 알아서 포기할 수 있습니까? 없어요. 그러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기도하실 때에 기도 중에 하나가 뭐냐? 내 뜻대로 마옵시고, 라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죄인을 대신해서 기도하거든요. 그리고 하신 업무가 죄인의 죄를 받아들여서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신 일이 어디에서 어디까지? 내 뜻에서 어디까지? 아버지의 뜻까지에 이동경로와 절차를 보여주는 거예요. 기도 내용이.

그래서 복음 알고 난 뒤에 기도할 게 없어서 안 합니다, 하지 마시고 기도를 하세요. 기도를 해서 그 기도 내용 속에서 여기까지가 내 뜻이고 주의 뜻은 무조건 이미 십자가에서 확정 났어요. 겟세마네 기도에서 확정 났습니다. 내 뜻은 무조건 그게 아무리 좋은 명분이고 취지라도 내 뜻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아프리카를 가던 알라스카를 가던 그거는 자기 뜻이지 주의 뜻이 아닌 거예요. 부산에 그냥 남아있어도 주의 뜻이 아니에요.

관심사의 이동, 이게 뭐냐 하면 시선의 이동에 사울 같은 사울의 세계, 세상 사람이 여기에 유혹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럴싸해 보이고, 건전해 보이고, 대단해 보이고 주의 일에 내가 조금이라도 긍정적 의미로 섞어 넣을 수 있는 그런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삐이익. 이 세상에 인간이 끼어들 주의 일은 남아 있은 적이 없습니다. 일체 없어요.

어제 낮 설교한 것 잠시 해보겠습니다. 레위기 16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스라엘에 칠월 십일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차례만 지성소에 들어가요. 들락날락 자기 집처럼 들어가면 안 돼요. 한 차례만 하나님이 허락하거든요. 지성소에 들어가는 목적은 뭐냐 하면 내 백성의 죄를 일 년에 한 번씩 씻어내기 위해 간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내 백성은 아무리 그 사람이 평소에 주께 영광 돌리고 바르게 살아도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씩 들어가는 이 일로 인하여 그들이 아무리 착하게 바르게 순진하게 살아도 졸지에 뭐가 돼요? 한꺼번에 보편적으로 뭐가 됩니까? 죄인으로 확정 나버린 거예요. 어제 그 이야기를 했어요, 제가. 의인은 없습니다.

무슨 새삼스럽게 죄는 죄지만 그래도 남보다 덜한 죄는 없는가? 선교하는 것, 전도하는 것, 예배당 벽돌 몇 장 나른 것, 그것도 착한 일일거야. 이런 건 없습니다. 그거는 일종에 나를 지키기 위한 내 환경 지키기 위한 아직도 나의 의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 같은 거예요. 물론 우리가 그걸 안 할 순 없지만 아까 첫째 시간에 배운 어떤 원칙이 있지요. 이 어리석은 놈아, 하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돼요.

“아이고, 이 어리석은 자야. 선교한다고 돌아다니는 꼬락서니하고는 쓸데없이.” 이렇게 하면서 하면 되지 뭐. 제사장이란 것은 죄와 관련된 직업입니다. 제사장이 필요 없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영원한 제사장이란 것은 모든 성도든 성도 아니든 이미 죄인으로 확정 나 버렸습니다. 그런데 무슨 업무가 있습니까, 죄인인데요. 죄인인데 업무해서 의인될 수 있는 일이 있습니까? 없어요.

다윗은 사울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어떤 문제가 발생되지요. 괴로움이 발생됩니다. 그런데 사울 배후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스올, 그냥 지옥이라 합시다. 지옥과 관련돼 있어요. 지옥과 관련된 이 존재가 살아서 펄떡인다는 말은, 이 지옥이 다윗 삶의 현장에 끼어들었단 말이죠. 그럼 지옥이 다윗에게 죽어라. 이렇게 돼요. 그럼 다윗은 죽으마. 이러면 돼요.

다윗은 세상에서 말하는 죽음 안에 죄가 지적하는 그 죽음 안에 죽어있음으로서 비로소 인간이 끼어들 수 없는 하나님만이 죽을 수 있는 그 죽음 안에 거기 생명이 있거든요. 그 생명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복의 결정체, 복이 뭐냐에 대해서 5장 10절, 11절에 보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 자신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울에게 핍박은 받은 자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복음을 핍박하는 자, 이게 누구냐 하면 바로 납니다. 내가 복음을 핍박해요. 생명이 모양을 갖춘 자가 누구냐 하면 성도거든요. 복음을 핍박하게 되면 복음의 주인공 되신 예수님이 핍박했다고 말씀으로 마태복음 5장 11절, 12절에 근거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지요. 그러면 생명 되시는 복음, 예수님 생명 되신 몸이 모양을 갖추면 이게 바로 성도에요.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가 납니다, 하는 그게 성도에요. 자신이 재빨리 불신자임을 알아채는 사람이 신자에요. 그게 신자가 되는 거예요. 야아 때려죽여도 말씀 지킬 수 없구나, 라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그걸 알아요. 아까 왜 그러냐 하면 나를 위한 환경을 내가 조건을 스스로 그걸 벗을 의향이 전혀 없어요.

그저 사울처럼, 사울이 이스라엘 왕이라 했지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의미가 뭡니까? 내 소유의 나라가 잘 돼야 될 텐데, 그걸 요청하는 거예요. 그리고 사울이 보기에 인간세계가 너도나도 그러하다고 본 거예요. 수준이 다윗처럼 하나님 수준이 아니고 세상 수준, 나 수준이기 때문에 그걸 정당화하는 겁니다.

옛날 노래인데 지금도 살아 계신 하춘화 그분이 불렀던 노래가 있어요. <잘했군 잘했어> 그게 그 사람 첫 히트곡인데 자기들끼리 죽이 맞아요. 영감~ 왜 불러~ 장에 가서 뭘 바꿨는데, 아내는 볼 것도 없어. 잘했군, 잘했어. 그러니까 내 영감이라지.


<잘했군 잘했어>(하춘화‧고봉산)
영감 왜 불러
뒷뜰에 뛰어놀던
병아리 한 쌍을 보았소 보았지
어쨌소
이 몸이 늙어서
몸 보신 할려고 먹었지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영감이라지
마누라 왜 그래요
외양간 매어 놓은
얼룩이 황소를 보았나 보았죠
어쨌나
친정집 오라비
장가들 밑천에 주었지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마누라지
영감 왜 불러
사랑채 비워 주고
십만원 전세를 받았소 받았지
어쨌소
방앗간 차릴려고
은행에 적금을 들었지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영감이라지
마누라 왜 불러요
복덕방 골영감이
장기를 두자고 왔었나 왔었지요
뭐랬나
장기는 그만두고
태권도 배우러 갔댔지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마누라지


이 세상은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예요. 잘했군, 잘했어. 서로 입이 맞고 서로 죽이 맞으면 그게 만사 오케이에요. 특징이 뭐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특징이 사울에게는 한계가 뭐냐 하면 절대로 내가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이스라엘 왕인데 내가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죽으면 안 된다는 사울을 전쟁이 일어나서 죽여 버렸어요. 자기 아들 세 명과 더불어서. 길보아 산에서 죽입니다.

사울은 자기가 안 죽기 위해서 누굴 죽이려합니까? 다윗을 죽이려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잠시 성경을 멈추고 여러분들이 자꾸 다윗 입장에서 생각하는데 사울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나는 대통령이다, 이 말이죠. 요새로 치면 이스라엘의 대통령이에요. 대통령인데 윤석열이 0.7프로 인기가 더 있었단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벼락이 떨어져서 윤석열 벼락 맞아 죽어버리고 차점자 이재명이 대통령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할 수 있잖아요.

그게 살인죄에요. 생각만 해도 살인죄에요. 자, 그 생각을 왜 합니까? 뭘 지키기 위한 일입니까? 자기를 지키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하는 살인죄, 간음죄, 기도, 금식 이 모든 것은 그 가운데 누가 주인공으로 자리 잡고 있어요? 나 잘되기가 자리 잡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선 나 잘되기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예수님 복음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도하는데 열두 제자 중에서 그 시도에 따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인간이 무슨 주의 일을 합니까? 말이 안 돼요. 자기 엉덩이가 무거워서 꿈쩍도 안 해요. 살아온 게 있는데요. 한 오십 년, 육십 년, 칠십 년 살아보세요. 자기가 고생한 것 얼마나 많습니까. 미싱사 해서 발로 밟고 소매달인가 뭐 해서 그런 험한 현장에서 일하면서 자식 셋 키우고 대학 보내고 맨날 노인정에 모여 하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 아닙니까. 이젠 손자까지 맡아 키운다고. 힘들다하면서도 어떤 보람을 느끼는 거예요.

내 새끼들 봐라. 내 환경은 내가 인테리어 하는 거예요. 주님이 하는 게 아니고 내가 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합니까? 아직은 죽기 싫은 거예요. 그런데 신약성경에는 이미 너는 죽었고 네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그러니까 그 말씀이 이제 우리에게 경험으로 다가온다면 이거는 내가 나 위주로 살면서 다가오는 게 아니고 뭔가 나 위주의 환상을 찢으면서 추방시키면서 그 자리를 차지하겠지요.

그래서 죽음은 네 번째 인칭이라고 볼 수 있어요. 1인칭은 나(I)에요. 2인칭은 너(You), 3인칭은 그것(It), 4인칭은 아무개에요. 1인칭, 2인칭, 3인칭으로 규정할 수 없는 아무개. 이게 바로 우리가 끼어들 수 없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낯선 죽음, 이게 십자가 죽음이에요. 여러분 십자가라는 것은 세 자자잖아요. 두 자로 고치면 그냥 죽음이에요.

독특한 죽음, 다른 말로 하면 언약에 의한 죽음. 이 죽음에 와야 이게 부활이 돼요. 부활과 연관돼 있습니다. 죽고 난 뒤에 부활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부활했기 때문에 부활한 죽음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생명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의 헛되고 나 중심의 모든 것도 생명을 증거하는 재료가 되는 겁니다.

촌에 가면 나뭇조각 태우는 난로 있지요. 그 난로만 사놓으면 불이 붓습니까? 뜨겁습니까? 뭐가 있어야 돼요? 나무 난로가 있으면 거기에 재료가 되는 나뭇조각들이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그걸 넣어야 되잖아요. 그 나뭇조각 때문에 얼마 전에 산불 났어요. 그 재료로 들어간 게 우리의 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죄 짓는 게 잘했다는 게 아니라 나는 잘했다가 없어요. 나 자체가 죄임을 감사해야 되지요.

그 죄 중에 하나가 우리가 불신자에요. 그것도 죄 항목에 들어가요. 교만, 불신, 죄. 이 교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게 겸손하다는 뜻이에요. 교만과 겸손이 동의어에요. 같은 말이에요. 자기를 생각 안 하면 되는데, 나는 겸손할까? 이게 교만이에요. 내가 들어가면 전부 다 교만이에요. 내가 희생해야지, 그게 교만이에요. 내가 들어가면 교만이에요. 희생은 주님이 해야지 니가 왜 하는데, 왜 그걸 흉내 내고 있어요? 뭘 노리고 흉내 내고 있어요? 그래서 내가 복음을 위해서 핍박 받았다는 그 말씀 지가 지키려고?

사울 같은 이런 존재, 세상이 그리고 나도 거기에 한 몫 하는 나 자신이 나에게 왜 필요하냐 하면 자꾸 나뭇조각, 죄라는 나무를 양산해내기 때문에 주께서 자꾸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래도 죄 아니냔 말이죠. 이래도 너만 생각하잖아.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시키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관심사가 죄 안 짓는 나에게 있어야 됩니까, 관심사가 주님의 독특한 유일한 죽음에 있어야 돼요? 관심사가 뭡니까? 십자가의 죽음에 있어야 되겠지요. 시편 31편은 바로 그 십자가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여주는 겁니다.

그 다음에 시편 31편의 전체적인 그림은 이겁니다. 낯선 시공간. 낯선 시공간 하면 어려워 보이지요. 쉬운 말로 이걸 환경이란 말로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이 자꾸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자기 자신이 아무리 말씀 들어도 자기만 주장하는 이유가, 이미 몸 자체가 나를 위한 시공간에 익숙해져서 그래요.

그러니까 인간은 형식만 만드는 게 아니고 그 내용까지 나를 위한 내용을 고스란히 다 만들어요. 만두소 따로 만들고 만두피 있듯이 그 만두소와 만두피가 나한테 적절하게 나를 높이기 위해서 딱 이렇게 만나는 식으로 평생을 인간들은 살아왔습니다. 이게 낯선 시공간인데 낯선 이 아니고 우리는 뭐냐? 익숙한 시공간이죠. 그것을 사람들은 뭐라고 이야기하는 하면 이걸 현실이라고 이야기해요.

현실이란 말은 그 안에 뭐냐 하면 내가 엄연히 살아 있음을 확인해줄 수 있는 것, 이걸 현실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폭탄주를 많이 마셨다. 그러면 기억이 필름이 끊어졌다 하지요. 그런데 아침이 되면 술 깼다 하지요. “어제 저녁에 나 뭐했는지 모르겠어.” 그러면 아침 되면 다시 현실로 돌아왔지요. 현실로 돌아오면 뭐합니까? 또 그날 저녁에 술 먹으면 필름 끊어지듯이 기억이 끊어질 건데요.

인간의 현실은 마지막 보루 같은 거예요. 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냐 하면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주님의 것이 제대로 오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복음을 오십 년, 육십 년 듣고 아무리 해도 다시 어디로 돌아옵니까? 현실로 돌아와요. 잠시 교회 나들이했다. 교회 놀러갔다. 잠시 성경에 발 한 번 담가봤다. 하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현실이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현실은 없다. 이리로 돌아와요.

특히 여기에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목사와 특히 신학교 교수들이에요. 저는 신학교 교수들 중에서 아직은 신자를 본 적이 없어요. 그들은 현실로 돌아와 있습니다. 성경을 가르침에서 삶을 도모하는 것, 이거는 설명할 것도 없이 유일한 현실로 보는 거예요. 성경 가르치면 많은 사람들이 성경 가르침 받아서 하나님께 도움 되겠지요. 그럼 하나님께 도움 주는 그런 건전하고 보람된 일을 하는 나는 현실에서 삶을 누리는 거예요.

신학 교수나 목사 이 사람들이 복음을 위해서 죽을 사람입니까? 미쳤어요. 이 귀한 현실을 스스로 포기한다 이 말입니까? 이 사람들 사울 곁에 있는 거짓 선지자, 제사장들이에요. 세상에 현실의 힘과 권력을 부정 못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속마음입니다. 여기다가 하나 보탠다면 교회 장로들. 현실 똑바로 보란 말이야. 복음은 이론이고 현실을 봐라, 현실을.

그래서 제가 어제 낮 설교에 그런 것 한 기억이 나요. 초반에 이야기했죠. 하나님께 도움을 받았다고요? 오십 년 동안 도움 받은 것으로 손으로 꼽아봐라. 무슨 도움 받았어요? 여러분 힘으로 살아왔어요. 무슨 도움 받았어요? 없지요.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무슨 도움을 받아요. 하나님의 도움은 도움 받으려고 손 내미는 우릴 보고, “제발 좀 죽어줘, 인간아.” 이게 유일한 도움이에요.

그 도움 받으면 내가 죽어야 돼요, 살아야 돼요? 도움 받은 게 아까워서 더 살아야 돼요. 히스기야 왕처럼 십오 년 동안 더. 인간 망쳐버립니다. 못 볼 걸 십오 년 살아서 보지 말아야 될 것을 다 봤어요. 자기 죄의 깊이와 자기 죄의 넓이와 높이를 본 거예요. 사랑의 높이와 넓이를 본 게 아니고.

시편 31편 4절 보겠습니다. “저희가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어 내소서” 자, 이 사울의 특징이 뭐냐 하면 다윗을 노린다는 점에 있지요. 집요합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그 당시 이스라엘이 안고 있던 죄의 대표자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보시면 돼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여러분들이 성도라면 악마는 딴 걸 노리지 않아요. 우리로 하여금 관심사를 자꾸 현실이 최종적이다. 이게 참 중요한데 현실만이 최종적이다. 이 점을 절대로 잊지 말라고 계속해서 우리를 주지시킵니다. 그건 어떤 마음이냐 하면 놀랍게도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주위의 식구들, 신랑이나 아내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꾸 보다보면 누가 누굴 안타까워하느냐? 내가 나를 안타까워해요. “네가 제발 좀 그만 미쳐라. 네가 도움 받은 것도 없어.” 그야말로 복음 앞에 뭘 붙이느냐 하면 내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허황된, 그러니까 이 말은 비실제적이고 비현실적인 허황된 십자가 이야기 그만 해라, 많이 먹었다. 하와이 니가 가라는, 천국 너나 가라는 식으로 전혀 현실성이 결여된 그런 이야기 그만 해라. 사람이라 하는 것은 현실에서 행복하면 그만이다 인간이다, 라고 누가 누굴 설득하느냐 하면 내가 나를 설득해요.

이게 신앙생활 몇 십 년 한다고 설득 안 되지 싶지요. 끊임없이 설득해요. 왜?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내가 정신 차려서 구원 받는 일은 없게 만들기 위해서. 내가 각오에 각오를 다져서 내 의지로 구원 되는 게 없게 하기 위해서. 날마다 구원입니다. “주여, 악인의 그물에서 저를 오늘도 건져주옵소서.” 이걸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이유가 하나님의 해결책이 십자가로 결정 났기 때문에 우리는 넉넉하게 안정적인 가운데서 충분히 시편 31편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 악인의 그물 중에 한 고리가 나 자신이에요. 그래서 나는 무엇과 헤어지는가? 나와 헤어져야 돼요. 날마다 헤어져야 됩니다. 이게 뭐냐? 나의 죽음이에요. 나는 나의 죽음을 주께서는 십자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던 나의 죽음을 우리 안에서 가동시킵니다. 남보다 우리 안에서부터 가동시켜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다는 것을 살아 있는 육신이 죽었다는 나를 설득시켜요. “너 죽은 게 아니야. 내가 살아 있잖아. 쌍둥이 내가 있잖아. 내가 살아 있는데 니 복음 알아 좋겠다. 얘 점심 먹였어, 안 먹였어? 그것 봐. 복음 안다고 라면도 안 먹이고. 아이고, 사는 꼬락서니하고는. 니가 지금 뭔가 단단히 미쳤어. 안타깝게 너한테 이야기하노니 제발 현실로 돌아와.”

그럼 우린 묻지요. 현실이 뭐냐? 현실이 뭡니까? 그게 환상인데. 내가 꽂히는 것은 현실이고요 내가 죽는 것은 진짜 현실이고. 서로가 환상이래. 인간이 사는 것은 현실이고 내가 없는 것을 환상이라고 보는 쪽이 내가 사는 게 환상이고 그리스도와 죽는 이런 묵시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이게 실제라고 내가 내 안에서 투쟁을 벌이고 있어요.

그러니까 목사님들이 설교하다가 복음 전할 때는 은혜 받았지요. 복음 전했는데 다음 주 헌금 얼마 나왔나? 갑자기 현실로 돌아와 버렸어. 이거는 목사만 아니죠. 목사를 언급하는 것은 대표적으로 이야기한 거고 일반인들도 똑같은 삶을 삽니다.

그래서 한 순간도 시편 31편대로 적용시켜주는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말씀 없이는 그리고 사랑의 충만 없이는 우리는 사랑을 비현실로 간주해버리고 내가 주인공 되는 내가 가라 하면 내가 가고 내가 멈추라 하면 내가 멈추는 그것을 유일한 현실로 간주하는 환상 속에 우리가 놓이게 돼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서는 어떤 순간도 구원 되는 것을 주께서는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왜 알아야 되는가? 싱긋이 웃을 수 있도록 그런 여유를 가지는 거예요. “나의 업무는 없어.” 내가 나보고 나무랄 수 있어야 돼요. “그게 바로 육신이야.”

고린도후서 봅시다. 1장 19절에서 20절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사도 바울이 편지에서 뭐라고 하는지 보세요.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이 참 쉽지요. 오케이하면 돼요. 예수님의 해결책 십자가로 오케이 한 거예요. 이미 우리는 죽었기 때문에 우리의 시간은 없는데 내가, “너 앞으로 한 달 뒤에 어떻게 살래?”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가지고 자꾸 설득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 육신이. 그런데 그런 갈등이 있더라도 그거는 주님의 예를 취소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훼손시킬 수가 없어요. 망칠 수가 없습니다. 파리 한 마리 붙는다고 건물이 무너지고 이런 것 없어요.

저는 오늘 이 강의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해방되고 난 뒤에 독립운동 하는 거예요. 이미 구원 되고 난 뒤에 독립투사로 나서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유가 있지요. 독립운동 하던 안 하던 결과가 달라질 건 전혀 없잖아요. 왜냐하면 내 인생이 없기 때문에. 내 인생을 주님 자기 인생에 가로채서 집어넣었기 때문에 나를 위한 내 인생이란 것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주께선 독립운동을 하게 함으로써 뭐만 계속해서 더 크게 하느냐? 이미 자유, 해방. 이미 우리가 죄의 그물에서, 또는 나로부터의 해방되었음을 확인하는 차원해서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망상에 불과한 이 현실 속에서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 갈등하게 만듭니다. 그래야 시편 31편이 살아나니까요.

이미 구원 받았으면 책 볼 것 뭐 있어요. 구원 받았는데 성경 왜 봅니까, 이래 되거든요. 시편 31편을 통해서 나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구원 받고자하는 내가 죽는 게 목적이죠. 나로서는. 구원 받고자하는 나 자체가 죽어버리는 게 나의 목적이고 없어지는 게 나의 목적이고. 그 없어질 때 주님의 일에 합류함으로써 주의 일로서 우리가 벌써부터 천국의 생활을 시작하는 겁니다.

우리가 갓난아이처럼 내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요. 그냥 아버지 품에 주님께서 사랑으로 넓이와 깊이로 지키시는 이끄시는 그대로 가면서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그러니까 이 세상이란 내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그 지독한 합리성과 이성적인 것, 지독한 윤리적인 선악체계, 지독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것으로부터 그게 복음을 가리고 복음에서 관심을 돌리게 만드는 그러한 스올, 음부, 지옥의 유혹이란 사실을 깨달으면서 오케이라는 말하면서 아멘 하게 하죠.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께 뭐가 된다 했습니까? 아까 고린도후서 1장, 하나님께 아멘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했잖아요. 하여튼 영광 돌리려고 몸부림을 쳐. 그냥 모든 게 오케이가 된 상태에서 영광이 되지 새삼스럽게 우리가 끼어든다고 해서 더 영광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다시 시편 31편 11절 봅시다.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이 말씀대로 먼저 당한 분이 누구지요? 예수님이죠. 다윗은 시간적으로 먼저라 하면 안 돼요. 예수님이 먼저에요. 알파요 오메가는 예수님이고 그 다음에 다윗은 나중이에요. 인간 시간과 다릅니다. 시작은 예수님이 시작이에요.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이 당한 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이렇게 당할 것이란 것을 다윗을 통해서 미리 그 시대의 복음으로 나타나게 한 거예요. 오늘날 우리 시대는 우리의 경험으로 복음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터져 나오게 하는 거예요. 복음을 말로 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느껴야 되지 않습니까. 관심을 십자가에 돌린다고 해서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남들부터 얼마나 우리를 매일같이 못 살게 핍박을 합니까.

인간아, 인간아. 길을 잘못 들여서 복음, 십자가 우리를 막 설득하는 거예요. “이 바보야. 성경에는 십자가만 있는 게 아니야. 부활도 있고 성령의 열매도 있어. 왜 너는 뭔데 십자가만 고집해.” 그런 세상에서 들어왔던 모든 것을 심히 지금의 내가 죽었다는 그 사실을 자꾸 그걸 부인하게 만들고, “너 잘할 수 있어. 너 살아 있는 거야.” 오늘밤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무슨… 그때 우리는 싱긋이 그냥 웃지요. 오늘 제목은 그냥 웃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이 처음부터 인간세상이 아님을 마귀가 자꾸 감추고 인간들의 세계, 너의 세계, 너를 위한 현실, 너의 행복을 위한 환경이라고 거짓말하는 거짓말에 우리는 느긋하게 대처하면서 십자가 복음으로 다 이루심만 찬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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