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초월성

아빠와 함께 2022. 2. 16. 08:06

20220214a 부산강의 : [시편]45(29:3)-초월성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29편입니다.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천사를 말합니다. 천사가 있는 곳은 하나님의 보좌, 하나님의 자리가 있는 곳에 천사가 함께 있어요.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찌어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기 3절에 보면, “여호와의 소리가 물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하나님의 보좌에서 실시하게 되면 여기에는 물이 등장하고 이 물에 하나님의 소리가 이 위에 같이 작용을 하신다. 그러면 이 물은 하나님의 계시 작용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보좌에서.

물에 하나님의 계시 작용하게 되면 목표하는 것은 바로 천사와 같이 되는 겁니다. 천사가 어떤 존재냐? 2절에 보면, “거룩한 옷을 입고” 여기 거룩한, 아름다운 존재. 원 뜻은 거룩함이 아름다움 뜻인데 거룩한 아름다움 입은 존재. 하나님의 보좌에서 시작한 일은 다시 하나님께로 가서 하나님과 함께 동거하고 같이 살려면 거룩하고 아름다움을 입은 그런 존재가 될 때 가능하죠.

그러면 하나님의 보좌가 물이 있고 이 물에 하나님의 소리가 작동을 하는데 이 물이라 하는 것은 자연물입니다. 피조된 것. 자연물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기 3절에 보면, 자연물에 하나님의 계시 작용하게 되면 여기서 하늘의 뇌성이 나온다, 시편엔 그렇게 돼 있어요. 그러면 이 사실을 일단 아시고 이 하나님의 보좌 말고 지상의 인간들의 집합체, 인간들의 사회가 있을 거예요.

이 땅에서 인간은 뭐냐 하면 인간이 된다는 것은, 폴리스(시, 사회, 공동체, 시민), 세상에는 사회연합체에 소속되어서 연결되어 있는 존재,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인간이 된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만남과 만남에 의해서 형성된 그 관계망에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이 인간 되는 거예요. 외딴 데 자연인 한다고 산속에 들어가면 그건 인간 아닌 거예요. 따로 독립....

인간이라 하는 것은 그 사회에 소속이 되어서 남들이 같이 연락 취하고 서로 상호 돕고 도와주고 연결돼 있을 때 비로소 이 사회에서는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산속에 혼자 있으면 수염도 안 깎고 있으면 괴물 되는 거죠. 수염을 뭔 뜻이에요? 누굴 만날 때 예의 갖추고 만난다는 뜻이잖아요. 머리 감는다는 말은 냄새 안 나도록 한다는 것은 누굴 만날 용의가 돼 있다, 만날 요량이다. 그렇게 되는 거죠. 그게 바로 사람다움이에요.

그래서 여기 이 땅에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이미 규정이 지어졌습니다. 사람과 만나고 사귀는 가운데 그게 만남이죠. 만남과 만남, 관계망 이 안에서 사람대우 받는데 이렇게 한다고 제가 아까 이야기한 거룩한 아름다움 입은 존재가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야기하는 인간지상의 인간들이 이 정도만 해도 인간이라고 치자는 인간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 점을 먼저 아셔야 돼요.

그러면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기서 종교라는 게 만들어져요. 종교는 사람이 사람답게 서로 친목을 도모하는 거예요. 이걸 종교라 하고 종교는 필히 절대적 신이 나오지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수호신입니다. 수호신이라 하는 것은 뭘 지켜주잖아요. 그러니까 이 신은 무슨 신이냐 하면 폴리스, 사회, 인간사회를 지켜주고 인간단체를 지켜주고, 자기 가정을 지켜주는 그런 범위 내에서 사람이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잘 유지될 수 있도록 신이 지켜줄 때 그것은 어떤 신이냐? 신은 신인데 나를 지켜주는 수호신이 되는 겁니다.

교회에 사람이 모였을 때 이 세상은 교회에서 말하는 여호와든 하나님이든 예수든 명칭은 관계없어요. 그들의 의식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항상 어떤 개념입니까? 수호신의 개념이 있어요. 남 잘 되는 것 눈꼴시어 못 보겠다. 우리가 잘 돼야 돼. 다른 교회 코로나 다 걸려라. 그러나 절대로 우리 교회는 걸리면 안 돼. 이게 수호신 관점이에요. 자, 수호신을 수호신 하기 위해서 여기서 경전 같은 것도 동원되겠지요.

이 경전이 동원되는 방법은 인간이 계시를 포착하는 방법, 인간이 계시를 포착해요. 아, 저 말씀 같으면 우리의 인간이 인간됨에 보탬이 되겠다. 우리 가정이 잘 되는데 저 하나님의 말씀 같으면 우리 가정에 행복을 줄 수 있는, 그러니까 수호신이 수호신답게 모실 수 있는 방법이 되겠다. 인간 쪽에서 계시를 포착하고 잡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시편 29편, 제일 앞에 보면 누구의 시라고 돼 있어요? “다윗의 시”죠. 다윗의 시는 다윗이 포착한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다윗을 포착한 거예요. 다윗이 뭐 애국심이 많아서 골리앗 이겨볼까 하고 힘 겨루고 이런 것 없었어요. 그냥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이기게 했고 사무엘상 17장에서 다윗은 그것을 이것은 내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 전쟁이다. 이건 내가 한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내게 지게 만들었다. 나는 그 현장에 도달했을 뿐이다.

이런 이야기를 이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거기에 골리앗이 배치돼 있고 그 앞에 이스라엘 백성 있고 사울 있다는 이러한 배정과 배치가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활용된 거죠. 인간의 수호신 관점에서는 진짜 하나님을 포착해낼 수 없습니다. 이 수호신을 버려야 되겠지요. 그래서 저는 이건 다 아신다 치고 이건 지웁니다. 지워도 상관없는 것이 이게 동영상으로 촬영돼 있으니까 보시면 돼요.

다윗이 있다면 하나님이 다윗은 뭐냐 하면 초월성을 지닙니다. 초월성이란 아까 수호신 관점에서 벗어나는 데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를 먼저 끄집어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일반인과 달라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했다고 돼 있잖아요.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수호신 삼겠다고 택한 게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쥔 거예요. 이게 초월성이에요.

초월성은 두 가지 방향이 있는데 하나는 직접 현재성, 현재에서 하나님과 관계, 현재에서 항상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는 초월성. 또 하나는 뭐냐 하면 다윗이 인생을 살면서 죽고 난 뒤에 이게 과거라면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이 있을 것 아닙니까.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죽고 난 뒤에 만나는 하나님. 초월성 방향이 두 가지에요. 지금 다윗이 그냥 있어도 하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이게 초월성이고, 다윗이 인생을 다 살고 마치고 이렇게 하나님께로 가도 요 과정 자체도 수평적인 초월성이 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미 초월적이죠. 사울에서 바울 됐잖아요, 초월적이잖아요. 그러면서도 사도 바울이, 내가 소원이 있는데 이 몸을 벗어버리고 주와 함께 영원히 거하는 것이다. 지금 이 초월성에서는 나는 예수 안에 있다, 십자가 안에 있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 이미 초월성이에요. 성령 안에 있다 같은 말입니다. 성령 안에 있고 예수 안에 있고 십자가 안에 초월성이다. 이것도 초월성이고 내가 죽고 난 뒤에 이 몸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있다. 이것도 초월성이란 말이죠. 두 개다. 둘 다.

사울이 하나님을 수호자로 섬겨서 포착한 게 아니에요. 오히려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했습니까, 사울이란 사람은? 핍박했지요. 자기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으로 여기고. 그 당시 사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그 당시의 폴리스, 그 당시의 사회에서 사울은 스스로 생각하고 남들도 그렇게 봐주는 것처럼 자기가 인간다운 인간으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부족함이 없는 거죠. 뭐 아쉬운 게 없어요. 예수 안 믿으면 아쉬운데? 그런 것도 없었어요. 이쯤해서 예수까지 믿어볼까, 인생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보태볼까? 이런 것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니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내린다. 그러니까 이거는 아브라함의 사적인 개인적인 감정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이 초월적으로 아브라함을 장악하다보니까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복이 아브라함이 개인적으로 주는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는 방식이에요.

그럼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은 뭐냐? 아브라함은 비어있는 빈 통, 뭔가 하나님의 복과 저주가 관통하는 터널 같은 존재에요. 분명히 아브라함은 있는데 속은 비어있어요. 그 비어있는 자리는 누구 몫으로 넘겨갑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관통하도록 하는 거예요. 마치 난로 피울 때 통 있잖아요. 연기 통. 애들 그것 보고 장난치고.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파이프처럼 돼 있어요. 그냥 통과하는 거예요. 주의 계시가.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복 받은 사람 누가 있느냐? 아브라함에게 복 받는 것도 아브라함이 선택하거나 그 사람이 선택하는 게 아니에요. 상대방은 여호와께서 자길 선택했다하니까 이 사람도 일반적으로 출발점이 뭐냐? 수호신 개념이에요. 저 여호와 믿으면 나한테 복이 오지 않겠는가, 이렇게 덤벼들다가 진짜 복은 기존의 수호신 이것을 쫓아내버리는 거예요. 쓸어버리는 거예요.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이삭입니다. 이삭은 자기가 하나님의 복을 예상 못했어요. 또 그 다음에 여러분 아시다시피 야곱이에요. 그리고 야곱의 자녀들 가운데 요셉 같은 경우에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열한 명은 요셉이 눈엣가시에요. 우리 야곱이란 가정이란 폴리스에서 요셉은 너무 튀어서 밉상거리입니다. 아버지께서 좋은 옷을 입히고 특별 대우해줄 때 그게 더욱더 밉상이 된 거예요.

아버지가 요셉을 사랑한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 사랑했기 때문에 먼저 죽어야 했던 그 여인의 맏이가 요셉입니다. 라헬의 맏이에요. 다른 자식은 안중에도 없어요. 그 자식을 볼 때마다 날 두고 일찍 죽었던 사랑하는 여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을 빼앗아버리듯이 야곱에게는 누굴 빼앗아버립니까? 그 사랑하는 여인의 아들 요셉을 죽여 버렸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수호신 할 때 이 빈 통, 굴뚝 통을 수호신이 막고 있다는 걸 알고 막을 때 그냥 막고 있는 게 아니고 딴 건 말고 이것만큼을 못 놓겠다는 게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걸 치워버리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믿음이 좋아서 별로 사랑하는 게 없잖아요. 정말 믿음이 좋으면 누굴 치워 달라 하지 말고 나를 치워주세요, 나부터 그만 확 치워버려요. 컬링 할 때 돌들, 스톤 치워버리듯이. 사울이란 사람이 그랬던 사람이에요. 나부터 치워주면 안 됩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초월성을 할 때 인간들은 기존의 수호신으로는 이미 초월성을 받을 자격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에게 하나님이 초월성을 주었을 때 이 다윗을 통해서 계시가 주어지게 되면 인간들은 그 계시를 장악하거나 내 것 만들 자격은 전혀 없고요. 오히려 하늘의 계시가 초월성이 인간의 수호신 의미를 추방시켜버립니다. 내보냅니다.

내보내는 그 현장에 나타나는 게 뭐냐 하면 복된 나라죠. 축복된 나라. 이스라엘은 무슨 나라냐? 선택된 나라,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나라. 이스라엘이 이렇게 등장하는 거예요. 다윗은 무슨 나라의 왕입니까? 이 선택된 나라의 왕이죠. 그렇지요. 다윗이 선택한 이스라엘이 있고, 그 다음에 다윗 이전의 왕이 뭡니까? 사울 왕이 선택한 이스라엘이 있지요. 그러면 사울 왕과 다윗은 좋게 지냈습니까, 싸웠습니까? 싸웠지요.

그래서 여기서 정리할 수 있어요. 하나님은 누구와 싸운다? 인간과 싸운다. 딱 이 공식이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과 싸운다. 하나님은 나랑 싸운다. 인간과 싸우시는 하나님. 자, 성경해석을 성경을 천 독, 만 독한다고 해석하는 게 아니고 성경해석의 기본이 있어요. 성경해석은 어떻게 하든 그것이 딱 나와야 돼요. 그것부터 출발해야 되고 그것으로 되돌아와야 될 핵심 시작점이 있습니다. 내가 객관식 문제 낼 테니 어느 것인지 알아 맞춰보세요.

예수님의 존재성, 그 다음에 인간의 구원, 그리고 인간의 행복, 네 번째 십자가. 인간의 행복 하지 말고 같은 말이니까 하나님 주권. 성경해석이 이 넷 중에서 어느 쪽으로 와야 됩니까? 십자가.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존재성, 이거는 영에 속한 자나 육에 속한 자나 다 인정해요. 예수님 살아 계신다. 우리는 그분을 인정하자.

이순신 장군 반대하는 사람 봤습니까? 이순신 장군 없다는 사람 있습니까? 아니지요. 조선시대가 없는 대한민국 없잖아요. 고려시대가 없는 조선시대가 없잖아요. 그러면 왕건이 없는 이성계가 없잖아요. 고려는 누가 세웠습니까? 최수종(^^) 고려는 왕건이 세운 그걸 알기 위해서 꼭 성령 받아야 됩니까? 그래야 돼요? 예수님 훌륭하다는 것, 나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 나는 희생하지 못하는데 예수님은 남을 위해 희생했잖아요. 그걸 아는데 굳이 양심만 있으면 되고 이성적으로 윤리도덕만 있으면 되지 그걸 꼭 성령 받아야 되겠어요? 아니지요. 제가 너무 일부러 아니어야 하는 것처럼 응원하는데.

인간의 구원, 모든 종교에서 하는 거잖아요. 지옥 갈래, 천당 갈래? 천당 갈래. 불교도 마찬가지고요. 죽고 난 뒤에 천당 가기 싫은 사람, 꼭 영을 받아야 천당 가고 싶어 해요? 나 죽고 난 뒤에 꼭 지옥 가야지. 이런 것은 성령 받고 안 받고 관계지요. 죽어서 좋은 데 가겠다는 데, 자기뿐만 아니고 자기 가족도 좋은 데 가겠다는 데 성령 받을 필요 없잖아요.

하나님의 주권. 이것도 모든 종교+모든 철학이에요. 심지어 과학까지. 보이지 않는 설계자가 있을 수 있고 이 우주의 설계자. 보이지 않는 그분에 의해서 그분이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절대자란 의식이 생겨났다. 인간 속에 절대자란 의식이 생겨났다는 것은 의식이란 자체가 이미 의식에 해당되는 그 상대가 있기 때문에 의식이 생긴다는 거예요.

괴델이라는 20세기 최고의 수학자가 신의 존재를 증명했어요. 방금 이야기한 게 괴델이란 수학자가 한 신의 존재 증명이에요. 모든 좋은 것은 신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좋다는 의식이 있다. 그러면 이미 우리 안에 뭐가 있다? 신에 대한 의식이 있고 신 의식이 있으면 그것은 바로 신이 존재한다고 봐야 된다.

이게 바로 괴델이란 세계 최고의 수학자가 신의 존재를 증명한 거예요. 이게 바로 뭐냐?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까지 전부 다 섭렵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 정통개혁신학까지 포함해서요. 그건 뭐 신학 자체가 철학이니까요. 인간들에게 육적으로 이성에 호소해서 납득시키는 거예요.

그런데 네 번째 십자가는 왜 육에 있는 사람은 모든 게 십자가로 할 수 없느냐 하면 십자가에서는 자기가 소멸하고 자기가 소멸해요. 왜 그러냐 하면 십자가는 걸려 넘어지는 거예요. 십자가에서는 꽈당하고 인간 자체를 넘어지게 만드는 게 십자가거든요.

체크합시다. 하나님, 예수님 존재 인정한다. 하나님의 구원 체크, 하나님의 주권 인정한다. 이 정도 지식 갖췄으면 주님이 재림하든 어떻게 하든 뭔가 천국 갈 가능성이 있겠지, 라는 것이 어디서 깨지는가? 십자가에서 깨져요. 왜냐하면 예수님 십자가에 죽었을 때 죽이라고 둘러 선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유대지도자들이에요. 유대지도자들의 사고방식이 전부 다 이거에요. 그들은 예수님이 아니죠. 메시아 존재지요.

메시아 존재, 인간의 구원, 하나님의 주권, 여호와의 통치, 그게 하늘나라. 그것 하는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서 우우 했는데 비아냥거렸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들이에요. 놀랍지 않습니까? 직접 눈으로 봤어요. 그냥 들은 게 아니에요. 눈으로 봤어요. 그리고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도망쳤던 열한 제자 있지요. 열두 제자 다 도망쳤다 보면 그 열두 제자가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동참했습니까, 도망쳤습니까? 도망쳤지요.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졌지요. 왜? 그들은 인간이고 싶은 거예요. 어디에서? 그 폴리스에서, 그 사회에서, 그 시대에서 남한테 사람이란 소릴 듣고 싶은 거예요. 그게 자기에게 장착된 인간 의식이거든요. 내가 사람이고 싶은 거예요, 남들로부터. 내가 봐도 사람이고 남들에게도 사람 구실한다고 듣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그 사회가 예수님을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을 사형시키기로 결정됐잖아요. 마치 코로나 걸리면 마스크 쓰기로 결정한 것처럼. 그것 안 쓰겠다는 사람은 마스크 안 쓴 게 문제가 아니고 그러면 넌 산속에 너 혼자 살라는 이런 결과만 낳지요. 안 그래도 힘든 인생에 굳이 남한테 욕 얻어먹으면서 살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것 한 번 어느 게 실익인지 계산해보세요.

마스크 쓰기 싫어서 산속에 간다. 그게 내 인생에 편하냐? 마스크 써주고 백신 1, 2, 3차 맞아주고 그냥 해운대 가서 산다. 어느 것이 나한테 이익이에요? 어느 것이 덜 요란스럽고 유난 떨지 않는 행동입니까?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이 뭐예요? 안 쓰고 돌아다니고 침 튀기고 이런 게 평화롭게 사는 거예요?

사람은 왜 하나님의 존재성, 예수님은 훌륭하신 분이고 남을 위해서 희생하신 분이고 우리 죄를 위해서 돌아가신 분이고 이런 고백을 하고, 사랑의 하나님이라서 인간을 위해서 천국을 마련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통치,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주권이 없는 곳이 없다. 이걸 인정하고 싶은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것이 바로 수호신 의식에서 이것들이 충돌되지 않는 거예요.

나를 위한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내용들이 지식으로 추가가 될 뿐이지 나를 전적으로 발로 차고 나를 짓밟는 내용들은 아니잖아요. 이순신 장군 있다고 내가 인간 대우 못 받고 이런 것 아니지요. 이순신 장군은 나를 사람 취급 안 하게 만드는 게 아니고 오히려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게 되면 이순신 장군 후손들에게 칭찬받아요. 그 사람들 칭찬받을 필욘 없지요.

그러나 십자가를 알고부터는 이거는 데살로니가 교회도 그렇게 빌립보 교회도 그렇고, 빌립보 교회는 마게도니아의 수도에요. 로마의 정치적인 수도가 빌립보인데 빌립보 교회도,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보세요. 가면서 가는 곳곳마다 십자가 복음을 전했는데 주위에서 예수님 보고 우우.. 죽이라고 하는 것처럼 동일한 고난을 받았어요. 왜 그러냐 하면 십자가에서는 기존의 인간성, 나, 나로부터 해서 나로 갈 수 있는 게 아니고 여기 나가 죽고 다시 살아난다는 이렇게 불연속성, 단절을 언급하기 때문에 나로부터 끊어짐을 의미 하거든요.

아까 인간의 폴리스에서 사회에서 인간은 뭐냐? 인간은 남들이 나보고 조롱하거나 전면은 아니더라도 뒤 담화하면 여기서 우리는 뭐냐 하면 그러면 내가 굳이 그 모임에 갈 필요 없잖아. 안 갈래. 왜 안 갈래가 되냐 하면 그래야 나의 가치가 연속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굳이 거기 가서 사람 취급받지 못하고 개 취급받는 것을 내가 용납지 못해요. 거기 아니면 다른 모임 없나. 집에서 혼자 하지, 이러고 가버려요.

그런데 십자가는 하늘의 초월성에 의해서 너 말고 예상 못한 다른 너를 내가 구원하겠다, 이렇게 되거든요. 네가 예상하는 너 말고 네가 전혀 예상 못한 너 자신을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구원하겠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에요. 그러면 내가, 이걸 다시 그림을 그리면 이렇습니다. 아까 그린 것 봅시다.

다윗이 하나님과 초월적 관계가 있지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이것 말고 뭡니까? 또 다윗이 수평적으로 죽음을 향하여 가지요. 이것도 초월성이에요. 수평적 초월성은 뭐냐? 다윗으로 하여금 뭘 겪게 하느냐 하면 바로 모친의 죄 중에서 내가 태어났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나의 모든 나됨을 어디서 출발한다는 말이에요?

내가 없었을 때 모친이 있었잖아요. 나 있기 전에 어머니가 먼저 있지요. 그 어머니 죄 속에서 뭐가 태어났습니까? 시편 51편에 보면 내가 태어났잖아요. 죄에서 내가 태어났다면 죄의 일부로서 바깥에 그냥 삐져나왔다면 나의 모든 행동과 모든 태도와 신을 믿는 모든 것이 뭐가 된단 말입니까? 이게 죄가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다윗은 여기서 자기가 잘났다 하는 것은 밧세바라는 여인을 만나면서 실선으로 갔던 다윗이 여기서 갑자기 사라져버려요. 실선은 뭐냐? 나는 이스라엘 왕이다, 잘났다, 내가 구원 안 받으면 누가 구원받으랴, 왜? 난 율법을 너무 잘 아니까. 이런 식으로 가던 그것이 뒤태가 아름다운 여인 하나 누굽니까? 뒤태가 아름다웠지요. 뒤태가 아름답지 않으면 다윗 상대를 안 해요. 뒤태가 아름답기 때문에 상대한 거예요.

밧세바 만나고 난 뒤에 졸지에 멈출 수 없는 욕망에 의해서 이게 끊어져버린 거예요. 나가 연속되지 않고 내가 끊어져버린 거예요. 이게 수평적인 다윗의 초월성이에요. 분명히 하나님이 함께 했지요. 밧세바 만나기 전에 이미 다윗은 누굴 이겼습니까? 골리앗을 이겼잖아요. 하나님 사람 맞아요. 사무엘에 의해서 기름 부어서 왕으로 이미 성령을 받았어요.

하지만 그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혜택은 뭐냐? 너로부터 네가 죽을 인간이란 사실을 깨닫게 하는 이것이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어제 낮 설교에 이야기했지요.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 둘 다를 볼 수 있는 사람, 인간들의 폴리스 세계 있잖아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얼마나 분투노력하는지 그걸 훤히 다 아는 사람.

오직 자신의 가치를 위해서 서로서로 만남을 유지하고 서로 사귀어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너도 인간이지만 나도 인간이라는 그걸 서로서로 인정해주는 그 사회, 심지어 사회는 냉대해도 가족만큼은 나를 사람 대우해주고 자식 대우해주잖아요. 취직 안 하고 놀아도 아들 대우해주고 가족만큼은 인정해준다 이 말이죠. 다른 사회에서 얼굴 못 생겼다고 하지만 남편만큼은 니가 최고고 예쁘고 여왕 같다, 이렇게 부추겨주잖아요. 다 속셈이 있지만.

그 일을 계속 죽을 때까지 하셔야 돼요. 왜냐하면 그래야 무엇이 확인되느냐 하면 내가 생각했던 나는 죄에서 태어났음을 계속 알게 되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 노선, 여기서 노선이 돌로 갈라지지요. 실선의 노선, 그냥 가던 길로 가세요, 하고 가는 이게 우리의 육체, 육신. 그래서 우리 옛 사람은 날마다 후패해서 죽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갈림길이 생겨요. 점선, 초월성이 개입하면서 말씀에 의해서, 이 말을 여러분들이 아셔야 돼요. 말씀에 의해서, 라고 할 때 이걸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언약이 완성된 토대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라는 것은 쪼개보면 모든 말씀은 예수님이 이루시거든요.

아버지와 아들이 언약을 맺었는데 그냥 맺으면 안 되고 그 뒤에 반드시 뭡니까? 완성된 상황이 여기에 다윗에게 미리 와서 있어버리면 다윗은 건널 수 없는 것을 건너서 초월성, 주의 나라로 들어가서 아름다운 옷을 입은 천사와 같은, 부활 때는 성도가 어떻게 돼요? 하늘의 뭐와 같이 돼요? 시편 29편에 나오지요.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골인하는 거예요.

차 운전하시면서 옛날 내비게이션 수정 안 되어 있다가 새로 난 길을 가게 되면 내비게이션이 이상하게 돼버려요. 이 길은 옛날 길이고 지금은 터널 뚫려서 옛날 내비게이션이 공중에 붕 떠서 혼자 가요. 이게 성도의 삶입니다. 성도의 초월성이에요. 붕 떴어요. 본인도 놀래요. 자꾸 본인도 미치는 게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요. 그냥 큰 교회 폴리스 있잖아요. 거기서 남들이 집사님, 장로님, 목사님으로 인정해주는 그게 그리워요. 왜? 그때 내가 그들로부터 사람답다는 인정을 받았으니까.

그런데 주께선 그리로 데려가는 것이 그게 바로 죄였고 그게 하나님을 내 수호신처럼 착각했다 그런 경우고. 지금 경우는 뭐냐 하면 그냥 길도 없는데 데려가는 거예요. 이럴 경우에 너무 당황하지 마시고요. 이게 바로 예수 안이에요. 말씀 안인데 예수 안, 성령 안, 십자가 안이라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 안이라는 게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뭔가 안이 있다는 말은 공간적으로 장소를 점유, 딱 지정돼야 안과 밖이 성립돼요. 만약에 A라는 지점 같으면 이 바깥에 이건 A 바깥이 되고 A 안이라 하면 A 안이 되잖아요. 그런데 십자가라 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의 어떤 공간의 일이 아니고 사건이거든요. 사건 안에 들어있다? 이미 그 사건 끝났는데. 십자가 사건 이천 년 전에 끝났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십자가 안에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사도 바울이 그런 말 할 때는 십자가 안이 초월성적 표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초월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무엇과 대비를 시키느냐? 이게 성령 안에 있는 것과 그리고 육, 우리가 흔히 육적으로 살아왔던 그 안, 그 세계와 이미 각도 상 내비게이션 상 빠이빠이 한 상태인 것을 점점 보게 하는 거예요. 둘 다를 보게 하는 거예요.

아아, 저렇게 살았던 것이 내가 살던 모습이었구나. 그게 하나님을 위하여, 주님의 주권사상, 예수님을 위하여 말은 번지르르하게 했지만 사실은 캐보면 날 못 버리겠다는, 나를 지켜줘야 하나님답고, 내게 복을 줘야 하나님답다는 그 고집 있잖아요. 그 죄성으로 나는 그들과 합류해서 그렇게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드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것은 별로 어려운 게 없어요. 여러분들이 다 그렇게 평소에 살아가시기 때문에 제가 아무 부담 없이 합니다.

문제가 뭐냐 하면 아까 보좌에서 하나님의 자리에서 소리가 나오는데 그 소리가 어디에 있다 했습니까? 물 위에 있다 했어요. “여호와의 소리가 물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위에 계시도다”(3절) 소리가 여기서 들리면 뇌성이 된다는. 번쩍번쩍 번개도 포함돼 있을 때 이게 왜 물이 여기 등장하느냐?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 있다면 십자가 올 때 구약시대는 물의 심판에 근거해서 계시가 주어지는 시대, 여기서부터는(=십자가사건 이후) 물이 아니고 불의 심판의 당위성(당연하다는 뜻)에 근거해서 모든 일이 벌어지는 시기. 십자가를 통해서 이쪽은 물에 근거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차이가 뭐냐 하면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시간을 끌 수 있는 여지를 줘요.

창세기 8장에 보면 내가 다시는 물로서는 심판하지 않겠다. 심판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물로서는 심판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이미 물로써 심판했기 때문에 두 번 다시 물로서는 않겠다. 이쪽은 불로써 다 태우겠다는 거예요. 신약에는. 이게 여러분 아시는 베드로후서 3장에 나오잖아요. 전에는 물로써 심판했지만.

생각해보세요. 물로서 심판했는데 다 심판했다, 남은 자 있었다. 어느 쪽입니까? 물로써 심판할 때는 몽땅 다 죽인 게 아니고 남은 자가 여덟 명 남았지요. 여덟 명 남아서 거기서 꾸역꾸역 일을 꾸밀 여지를 준 게 물이라면 불은 뭐냐 하면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온 지구를 불로써 다 태워버려요.

태울 때 모나리자라는 값으로 측정할 수도 없는 유명한 명화도 포함돼 있고 쇼팽, 베토벤 고상한 음악 있잖아요. 찬송가부터 해서 전부 다 태워지고 심지어 노벨상도 불에 태워집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근거거든요. 바탕이라고 바탕.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노벨상을 걸치고 스케이트에서 금메달 따도 네가 놓여있는 것이 불 위에 놓여있으면 메달도 다 녹아버리고. 금메달, 은메달 관계없어요.

중국 사람들 메달 다 가져가라 해. 다 가져가도 불로 다 녹아질 거예요. 여기서 백 평짜리 아파트 살고 이것도 다 해. 어차피 해운대든 송도든 반송에 살든 전부 다 불 위에 있는 거예요. 이거는 여지가 없어요. 하나도 없이 다 태워버려요. 지구 상 전체가 불로 다 녹아버리니까. 들어보니 깔끔하지 않습니까, 신나지 않아요? 감사한 것은 이게 소설이 아니란 거예요. 이게 소설 같으면 에이 소설일 줄 알았어. 이게 소설이 아니고 실제상황이라는 겁니다.

이게 기뻐야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아까 다윗의 경우에 실선으로 빠질 때 마음껏 빠지라 하세요. 옛날 내비게이션 마음대로 가면 돼요. 어디로 가면 돼요? 불 속으로 가면 돼요. 문제는 공중으로 날 때 이 간격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이게 앗싸, 신바람 나는 거예요. 마치 풍선을 타고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땅 밑과 벌어질 때 이사야에 믿는 자는 독수리처럼 높아간다. 간격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이게 신나는 겁니다.

전에는 이게 굉장히 부러웠어요. 남들이 잘 살고 좋은 주택에 살고 부동산 많이 갖고 사법고시 합격하고 의사 되고 이런 게 되게 부러웠는데 부러워봐야 어디 갑니까?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에 기도할 때 뭐냐? 불 속에 들어가는 것을 위해서 달라고 기도한 거예요. 그것 없다고 아쉬워서 내가 넓은 아파트 없어서 친구한테 사람대접 못 받았는데 나도 사람대접 받도록 복 주시고, 주께서 뭐하십니까,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 능력 많은 것 조금만 주시면 지금이라도 당장 돈 주시면 이런 식으로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걸 좋아해요.

특히 만약에 여러분들 자녀가 지금 베이징에서 스피드스케이트 타는 선수라 해보세요. 기도 뭐하겠습니까? 저 자식이 메달, 그게 불구덩이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옵시고 그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게 하옵시고 그저 몸이나 해서 선수촌에서 밥이나 먹고 집에 돌아오게, 그렇게 하겠어요, 아니면....

우리 집 일 층에 인라인스케이트 한다고 잘 타는데 부모가 새벽 네 시부터 나와서 뒷바라지하고 있어요. 이게 메달을 따야 연금이 된다니까요. 선수들 보이콧하고 오라, 속은 시원한데 연금 타려고 운동하는 부모와 애들한테는 중국 기분 나쁘다고 와버리면 돈은 누가 주는데? 더럽더라도 참아가면서 심판의 학대와 박해를 이겨내면서 타야지요. 뭐 메달을 따야 연금이 나올 것 아니겠습니까. 그 부모들은 그것 때문에 자식에 매진했는데. 하여튼 인간은 지밖에 몰라. 스포츠 하는 사람들 얼마나 애간장 태우는지 몰라요.

그러니 이게 그림은 앗싸 하고 간단한데 성령으로 했다가 복음 말씀 잊어버리면 여기 합세해서 안 돼, 다시 성공해야 돼. 이러한 의식으로 돌아오지요. 그러다만 또 말씀 주시면 내가 또 죄 지었구나 하고. 내가 죄 지었구나가 아니라 내가 죄인이구나, 이래야지요. 내가 죄 지은 게 아니고요. 내가 원래 그런 인간이었구나. 하나님을 나 잘 되는 데 이용했구나, 하고 원래 내 자리로 돌아오면 돼요. 그러면 이 앗싸, 하고 벌어지는 이걸 범사에 감사하는, 항상 기뻐하는 거예요. 이 차이가.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구약 시편 29편 하고 있잖아요. 물로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이 뜻이 무슨 뜻인가? 이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1장 7절에 보면 두 번째 날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라 했지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보좌에서 물이 나오게 하는 것은 이게 나중에 에스겔도 그렇게 요한계시록도 그렇고 하나님이 갖고 있던 보좌의 취지를 위해서 그 건물을 지으시고 그 건물이 인간을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건물을 지으시고 천지창조를 하시고 여기에 뭐도 포함돼 있느냐 하면 바로 생명나무와 선악과도 포함돼 있어요. 생명나무, 선악과는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밀어내고 중심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인간은 생명나무, 선악과 주변에 있어요. 인간이 낙원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주인공은 생명나무와 선악과에요. 이 취지가 합해버리면 예수님 되거든요. 에덴동산의 주인은 예수님이지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했다 하는 것은 잘못된 거예요. 예수님 안에 있는 예수님 갖고 있는 예수님의 속성으로서의 인간을 하나님은 사랑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인간이거든요. 그 인간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 안이에요. 하나님은 예수님이 갖고 있는 인간을 어떻게 자기 아들로 품으로 이렇게 경로 거쳐서 회수하느냐, 다시 데려오느냐? 데려오면서 하나님의 자기 뜻을 이루시는 겁니다.

우리 인간을 사랑할 것 같으면 지옥을 만들 이유가 없지요. 예수님 안에 있는 인간, 예수님 갖고 있는 인간성, 이는 내 사랑하는 기뻐하는 자라 그 인간, 그 물은 어떻게 되느냐? 그건 10분 쉬고 두 번째 시간에 해보겠습니다.

 

20220214b 부산강의 : [시편]45(29:3)-초월성
(강의: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보좌에 물이 있다. 그 물은 자연세계의 일부고요 그 자연세계의 일부에서 물이 어떻게 지상에 쏟아지고 그 물로 인하여 자연현상이 변동하는 자체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된다. 그 이야기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서 계시하는데 창세기 1장 6절에서 7절에 보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이 창조를 인간 살기 좋으라고 한 것이 아니고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려고 세팅된 거예요. 인간 살기 좋으라고 만든 게 아닙니다. 하나님 자기 보좌의 확장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자기 보좌의 인테리어 확장 공사한 겁니다.

하늘의 물이 지상의 물로 내려옵니다. 지상의 물로 내려오면 이걸 강이나 바다라고 이야기하고요. 어차피 강물은 바다로 가니까. 하늘의 이걸 궁창의 물이라 해요. 그러니까 지상의 물, 같은 물로 쓰니까 이해하기 힘든데 이쪽은 액체로서의 물이고요 이거는 뭐냐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액체가 되기 전 예비상태의 물, 기체로서의 물이죠. 이걸 흔히 과학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수증기라 합니다.

라면 끓일 때 나오는 김 있지요. 그거는 액체로서의 물이에요. 수증기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숨 쉴 때 기체가 나오지만 찬 공기 맞게 되면 액체로 변한 그걸 입김이라 해요. 액체로 변한 물이지 기체의 물은 눈에 보이질 않아요. 구름도 마찬가지고요. 지금 하늘의 물(H₂O)과 같은 물이니까 땅에 있는 물과 나눈다 하는데 지금 대충 과학적으로 계산해보니까 하늘의 물이 1이라면 바다의 물은 오십 만이에요. 이건 나눴다고 할 수가 없어요. 요만큼 떼어주고 그게 뭐 나눈 거예요. 생색도 안 나지요. 오십만 분의 일이거든요. 나눈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게 홍수 전에는 나눈 게 맞아요. 왜냐하면 사십 주간을 위에 있는 물이 지상에 쏟아졌어요. 노아 홍수 때. 노아 홍수는 대략 B.C.2500년 경 홍수가 있고 창조된 것은 대략 6000년 전에 창조되었고. 홍수가 일어남을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물이 지상에 쏟아진 거예요. 이거는 뭘 뜻하느냐 하면 단순히 물이 쏟아진 게 아니고 하나님의 보좌의 영향권이 지상까지 파급했다는 겁니다. 하늘의 보좌에 있던 그 영향권, 하나님이 하시고자 한 일이 확장되어서 적용범위가 지상까지 내려온 거예요.

이게 바로 뭐냐? 언약의 실시입니다. 하늘에 있던 언약이 지상을 변화시키는 언약으로 지상에 작동하기 시작한 겁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시편 29편이니까 시편 29편이 다윗의 시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수직적인 초월성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이 이런 초월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 한 구절을 찾아보게 보면 납득이 됩니다. 사무엘 22장 8절에서 18절까지 굉장히 긴데요, 길어도 빠뜨릴 수 없어요. 그래서 제가 읽어볼게요.

“이에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렸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 그 발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 위에 나타나셨도다 저가 흑암 곧 모인 물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둘린 장막을 삼으심이여 그 앞에 있는 광채로 인하여 숯불이 피었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아까 시편 29편에 나왔던)을 발하시며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심이여(소리 나오지요. 계속 반복해요.) 살을 날려 저희를 흩으시며 번개로 파하셨도다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을 인하여 물 밑이 드러나고 땅의 기초가 나타났도다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그러니까 자연현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기를 삼으셔서 아까 이야기한 여호와는 누구와 싸운다? 인간과 싸우는 거예요. 언약적으로 인간과 싸우게 돼 있어요. 왜? 인간은 이미 범죄 했기 때문에. 그냥 가만두질 않습니다. 싸울 때 무기가 뭐냐?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 친 그 물과 그리고 뇌성과 거기서 또 뭐가 나오느냐? 불이 또 나와요.

이것은 하나님 보좌에, 이것도 찾아봐야 되는데, 에스겔 1장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데 그 보좌의 사면으로 천사가 자기의 고유 기능으로 표현돼 있어요. 하나는 사람, 그 다음에 소, 그 다음에 사자, 그 다음에 독수리. 사방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해서 한 치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스가랴나 선지서에 보면 사방, 네 개의 천사가 동서남북으로 다 파견근무하기 때문에 빠진 구석이 없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숨을 곳이 없어요.

동쪽으로 숨으면 낫겠지. 아니에요. 동서남북 다 가니까요. 담당자가 있어요. 담당 천사가 있어서 어디 가도 전부 다 반드시 때려버리니까. 때릴 때, 여러분 지루하더라도 이것은 보셔야 돼요. 요한계시록 4장 5절부터 보게 되면 이게 하나님의 보좌거든요. 이십사 장로가 있었고, 5절에,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그 다음에 뭐지요? “뇌성”이 나오지요. 요한계시록 14장 2절에,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무슨 소리입니까? 물소리 같고, 또 무엇도 있다? 큰 뇌성도 있다.

그러니까 하늘의 물이 어떻게 쓰이는가? 이 땅을 박살내고 심판하는 무기로 사용한다는 거예요. 하늘의 물이. 노아 홍수가 그것 아닙니까. 하늘의 사십 주간 동안 쏟아졌잖아요. 왜? 어떻게 뭐 수영하라고요? 다 죽여 버리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사실은 노아가족도 죽은 거라 하지요. 땅에서 나는 건 다 죽였어요. 노아가족 여덟 식구는 땅에서 피신됐지요. 땅도 아니고 물도 아니고 중간에 있는 방주라는 언약의 안에서, 예수 안이죠. 방주라는 성령 안, 십자가 안, 방주라는 언약 안에서 여덟 식구는 살았던 겁니다.

하나님의 일은 일관성이 있어요. 대충 즉흥적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계획이 다 있어요. 언약 빼놓고 다 죽여 버려요. 십자가 빼놓고는 다 죽여 버리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 나는 십자가로 인하여 세상에 죽었고 세상은 내 십자가 안의 안목으로 볼 때 너희들은 금메달 따든 노벨상을 타든 죽은 자다. 판사, 의사 되든 관계없이 다 죽은 자다. 이렇게 돼요.

교회 다닌다고 산 자가 아니고 복음 안에 안 들어오면 죽은 자에요. 교회 돈 내고 다니면 되잖아요. 그건 누가 못해요. 공간적 점유, 공간적 위치가 돼 있으니까 교회 들어가서 앉아있으면 들어왔다, 그 다음에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그건 누가 못해 애들도 할 수 있는 건데.

그런데 십자가에 안에 들어오면 나갈 수가 없어. 십자가에서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아브라함을 다윗을 주께서 선택해서 채갔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하나님을 챈 게 아니고 계시를 연구해서 구원받은 게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나를 장악했기 때문에 한 번 장악한 것은 그 힘이 너무 강력해서 내 마음대로 몸부림친다고 해서 십자가 바깥으로 못 나가는 겁니다. 나갈 수가 없어요.

나갈 수 없으면 바깥의 세상이 어떻게 멸망으로 가는지 그걸 구경하면 되지요. 거기에 적절한 예가 있습니다.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할까 하는데, 검침원. 검침원이 들어와서 부부 상담해줍니까? 검침원 들어와서 애 영어과외 시켜줘요? 검침원 할 일이 뭡니까? 인생 상담하러 그 집에 옵니까? 검침원이 사자머리 오은영 박사입니까, 애들 상담하게? 아니지요.

검침원은 뭐만 보면 됩니까? 여기 복음 있나, 없나 체크하면 그만이에요. 키가 큰지 작은지 인물이 나이 서른인데 시집 안 갔는지 그런 것 따지지 말고 시집가든 말든 노처녀 하든 말든 간섭하지 말고 검침만 하면 돼, 검침만. 체크만 하면 돼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그것 체크만. 그것도 못해요? 세상에 좋은 직업이, 월급은 얼마 안 되겠지만, 세상에 편한 직업이 이거잖아요.

나중에 도둑으로 몰려서 문제고 문을 안 열어줘서 문제지만. 그것 빼놓고는, 왔다 갔다 하는데 바람 불고 감기 들고 코로나 때문에 걱정이지만 가서 할 일은 주인 비키고 기기만 보면 돼요. 25와트 썼네요, 하고 숫자 적고. 말 걸기 전에 도망쳐야 돼요. 할머니들 혼자 있으면 이것 하나 먹고 가이소, 해서 우리 애가 이번에 서울에 있는데 하면, 딴 집에 가봐야 되니까.

성도는 남 검침하기 전에 매일같이 자기 검침해야 돼요. 내가 몰랐던 내가 얼마나 세속적인지, 그리고 주님과 무관한 나 위주로 산다는 걸 매일같이 검침하면서 그 각도의 벌어짐을 보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 보좌가 독수리, 사자, 소, 그 다음에 인간의 얼굴인데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이것들이 전부 다 우상입니다. 인간 자체가 우상이고, 소는 출애굽 때 아론이 금반지, 금목걸이 해도 소 만들었잖아요. 사자와 독수리는 이게 바로 짐승의 모습이에요. 다니엘 7장에 바다에서 온 짐승의 모습이 그 모습이에요. 그러나 이 짐승은 노아 홍수의 대상입니다. 땅에 있는 것들은 다 죽어 버렸어요. 뭐로? 물을 무기로 삼아서 다 죽여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비가 내려올 때 뇌성도 함께 떨어지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장 15절에 보면,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 자신에 보좌에 계신 분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다면 신약의 보좌 자체에서 물이 있어서 인간과 싸우기 위해서 무기로 사용해서 언약의 확대로 인하여 하늘의 노하심, 거룩하심, 쉽게 말해서 노하신다는 말은 거룩한 노하심이에요. 너무나 깨끗하기 때문에 지저분한 걸 두고 보지 않으시는 그 거룩함이 지상의 썩어빠진 것들을 전부 다 깨끗하게 완전히 멸망시키고 청소하시거든요. 정화시키거든요.

그 작업을 하시는데 요한계시록 1장도 그렇지만 에스겔 1장에 보면 그 이야기하려고 했죠. 보좌가 사면에 있다면 그 안에 하나님 여기 계시고 사면에 소, 사자, 독수리, 인간의 모습이 있고 여기에 뭐가 나오느냐? 불이 나와요. 에스겔 1장도 그렇고 에스겔 10장도 그렇고. 이번 여름수련회에 에스겔을 할 예정이에요. 불꽃이 나온다고요. 그러니 이건 물로써 무기로 삼았던 그 시대가 끝나고 이제는 불로써 다 태워버려요. 몽땅 이 세상을 다 태워버립니다.

그래서 시편 18편 12절, 13절 봅시다. “그 앞에 광채로 인하여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고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보세요. 우박과 숯불, 우박은 수증기고 H₂O 물이고 숯불은 불이잖아요. 물과 불이 함께 내리는 겁니다.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지요. 그리고 야곱의 열두 지파가 이스라엘 됐지요. 그럼 이스라엘 자체가 초월성이죠. 이스라엘 자체가 사무엘상에서 전쟁을 하게 되면 여기 누가 도와줍니까? 여호수아 같은 경우에 누가 도와줍니까? 바로 이스라엘이 초월성 갖고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보좌와 함께 있는 백성이라면 이스라엘의 전쟁무기가 뭐가 되는 거예요? 바로 우박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여호수아 10장에 여호수아가 기도하니까 하늘에서 우박 떨어졌고 심지어 하늘에 잘 가고 있던 태양까지 멈춰버렸잖아요. 가나안 다섯 족속 완전히 작살났지요. 그리고 출애굽기 9장에서 애굽과의 전쟁에서 히브리인들을 괴롭히니까 우박뿐만 아니고 열 가지 재앙을 내려서 애굽 나라를 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세계와 싸우신다. 그 무기는 뭐냐? 물이다. 노아 홍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의사를 충분히 드러내셨어요. 참고로 말해서 이게 지구상에 하늘에 수증기가 있다는 말은 이 지구를 따뜻하게 보호해줘요. 따뜻하게 보호해줄 수 있거든요. 그래서 그 당시에 홍수 전에 사람들의 보통 몇 살 사느냐? 기본 평균해서 구백 살까지 살았어요.

그게 과학적으로는 태양에서 빛이 오는데 빛에 두 가지 빛이 있는데 하나는 보이는 빛이 있어요. 보이는 빛을 가시광선이라 하고, 가시광선 양쪽에 보이지 않는 빛이 있어요. 이쪽에 있는 것을 원적외선, 마이크로선, 이쪽에는 자외선, 이쪽은 엑스선, 이쪽은 감마선 이렇게 와요. 엑스선, 감마선은 보이지 않고 원적외선도 마이크로선도 보이지 않고 보인다 해서 가시광선으로 돼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적색, 빨강색 파장, 원적외선은 파장이 크고 자외선부터는 파장이 짧아요. 자외선부터는 인간의 DNA를 공격합니다. 임산부가 엑스레이를 찍으면 자칫하면 DNA에 변형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이렇게 오니까 이걸 자기장이 커버를 해요. 그리고 수증기가 또 커버해줘요. 인간의 인체에 두뇌의 75%가 물로 돼 있고요 혈액의 90%가 물로 돼 있고, 그리고 뼈의 25%가 물로 돼 있어요. 전체를 합하면 65~70%가 물로 돼 있고 2%만 없어도 갈증 생기고 10%만 없으면 목말라 죽어요.

이것은 인간 내부까지 하나님이 자기 인테리어 하는 거예요. 인간의 육신은 인간을 위한 육신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육신을 갖기 위해서 우리를 미리 앞당긴 모델로 사용한 거예요. “나, 인간처럼 될래.” 이래서. 그 인간 가운데서 고난 받는 자, 핍박받는 자, 고아와 과부 그것이 장차 하나님과 연결되는 인간형입니다.

소위 슬기 있는 자에게는 다 숨기시고 어린아이 같은 자 있잖아요. 아버지에게만 전적 의지하는 것, 아버지의 뜻에 의지하는 어린아이의 특징이 그거에요. 의존적이에요. 그리고 어린아이의 특징은 뭐냐? 선악 지식이 없어요. 누구한테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이게 어린아이한테는 합당치 않은 겁니다.

말 겨우 하는 돌 지난 애가 식사를 받으면서 눈물 뚝뚝 흘리면서, “아버님, 어머님. 이 식사 준비한다고 얼마나 고생 많았습니까? 커서 효도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돼요. 그냥 자식은 얻어먹으라고 하는 거예요. 부모가 있는 것은 자식에게 그냥 주는 기쁨 때문에 자식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가 그런 사이에요. 내 기뻐하는 사랑하는 아들이란 말이 그런 뜻이에요. 아버지의 뜻이 그대로 고스란히 아들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걸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에겐 숨기시고 누구한테 나타났다? 어린아이에게 나타남을 감사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입니다. 내가 찾아온 것은 아버지께서 선택한 그런 자에게만 찾아가는 겁니다. 이렇게 돼 있어요.

이 시대에 자외선, 엑스선 이것은 굉장히 해로운 거예요. 지구의 자기장이 그걸 커버해주고 그 다음에 수증기가 커버했는데 이 수증기가 홍수 때 왕창 다 무너졌거든요. 오십만 분의 일이라니까요. 구름 계산해봐야 바닷물과 비교도 안 돼요. 양이. 이게 무너지니까 해로운 것들이 와서 그때부터 인간의 수명 구백 살까지 살다가 백 년 겨우 넘어가게 됐어요. 완전히 커브 곡선을 처박듯이 직하해서 떨어진 거예요.

그래서 옛날에는 오백 살이 청춘이죠. 사랑은 나이가 백 살이라도 예쁜 거예요. 납득이 안 되죠, 납득이 요새는. 우리는 백 살 같은 개념이 뭡니까? 빗자루 타고 돌아다니는 마귀할머니, 볼 살 양쪽 다 들어간,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급격하게 환경이 나빠졌다는 말은 우리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이미 상상할 수도 없는 그 살기 좋은 적합한 환경이 홍수 전에 이미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언약이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언약은 공격성을 갖고 있으니까 심판을 갖고 있으니까 지상이 물바다 됐다는 말은 아까 여러분들이 공부한 것처럼 하나님의 보좌에 의한 심판 기능을 행사하는 겁니다. 아까 에스겔 1장 다시 설명하게 되면 사자와 독수리와 소와 사람 이런 모습, 형상을 한다는 것은 천사의 형상은 융통성이죠. 자기 기능에 따라서 형상은 그때그때 달라요.

삼손의 아버지한테 왔던 천사와 기드온의 천사와 그때의 상황에 맞추어서 모습이 변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찾아왔을 때 그 모습과 사도 요한이 예수님 부활하신 그 모습과 그리고 예수님이 사울을 찾아갔던 그 모습이나 같은 예수님이라도 누가복음에 글로바와 제자에게 찾아갔던 그 모습이나 다 달라요. 같을 필요가 없어요. 왜? 영체니까, 영광된 육체가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변화산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도 해 같이 빛났어요. 모세와 엘리야가 무슨 화장품을 발라서 그렇게 됐겠습니까. 해 같이 빛난 거예요.

구백 살 살았다고 백날 좋아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결국은 죽잖아요. 죄로 인하여 죽었단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살게 위해서 아니지만 구백 살을 통과해서 구백 살 사는 인간들을 거의 구백에 의해서 백 살 사는 것은 그냥 납작하게 바닥된 거예요. 완전히 압축시킨 거예요. 폭이 안개 같아. 태어나자마자 죽어 버려요. 산 것 아니야, 구백에 비하면. 폭도 구분의 일로 줄어들었잖아요.

주님께서 어디까지 내려가느냐 하면 백 년이 아니에요. 주님께서 삼십삼 지나지고 사흘 만에 부활해버린 거예요. 사흘이란 것은 바로 단절이 일어나요. 이 지상에 육적인 사고방식의 특징이, 같은 말이지만 역사적 사고방식,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인과적 의식, 원인과 결과를 서로 연결시키는 것, 같은 말인데 연속적 사고방식. 다 같은 말이에요. 역사적이나 인과적이나 연속적 이게 과학이고 철학이고 이게 보통 학교에서 배우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했더니만 이게 된다. 기도했더니만 응답받는다, 이런 것 했잖아요. 제가 어제 낮 설교에 했지요. 기도해도 오지게 응답 안 된다고. 갓바위는 세 가지 된다는데 갓바위 밑에 있는 교회는 오지게도 세 가지도 안 돼. 기도응답 되면 뭐가 돼요? 인과성이 유지되잖아요. 인과성이 유지되면 역사성이 나오는데 이게 뭐냐 하면 간증집회 아닙니까. 내가 과거에 이렇게 해서 복 받았다.

그래서 나는 중간에 십자가 끊어짐이 없이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구경만 하고 구원되는 그런 경우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런 경우는 없지요. 왜? 언약 자체가 십자가로 중간을 끊어버리거든요. 이걸 끊어주기 때문에 끊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구원이란 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는 말처럼 내가 살아온 것은 죄인 중의 괴수다. 이렇게 뭔가 끊어짐이 있어야 돼요.

내가 포행자요, 내가 예수를 믿고자 함이 아니요 반대로 예수 믿는 자를 죽이고 스데반 죽을 때 자기가 잘 죽었다고 옷을 지켜준다는 것, 스데반 죽이기 회장 쯤 되는. 그랬던 사울이에요. 그 사울이 사도가 된 겁니다. 뭘 이야기한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대로 사울의 인생에다 초월적으로 담아버린 거예요. 그걸 성령이 임했다 하거든요.

그러면 성령이 임한 모든 사람은 뭐가 되겠어요? 내가 생각했던 육적인 실선의 인생과 실선에서 내비게이션, 이 갈라짐이 있을 때 이게 바로 성령이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게 육이고, 이게 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나는 육에 속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이게 육이고 영인데 둘 다 어디 있다? 둘 다 지금 내 안에 있다 이 말이죠. 이게 로마서 7장.

나는 선을 원하지만 내 안에 악이 있어 사로잡아 가는구나.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건져주랴? 그 다음에 한 구절 바로 붙어서 뭐라 합니까? 주 예수님으로 인해서 감사하리로다. 방금 무슨 소리했는지, 방금 오호라 해놓고 찬양하리로다, 감사하리로다.

주께서 내 몸에 찾아오셔서 이 몸이 버려야 될 포기해야 될 몸인 것을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내 몸의 미래에 대해서 이제는 잊어버려도 괜찮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서른세 살 밖에 살지 않았지만 부활의 영광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김광석은 서른두 살에 죽었어요. 점점 더 멀어져간다는 거예요. 김광석은 점선이 없이 실선으로 가는 거예요. 허무주의에요, 그냥. 염세주의고 허무주의에요.

복음 이야기하니까 사람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당신은 염세주의라 하는 거예요. 니체에 의하면 이 세상에 허무주의 아닌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모든 인간은 허무주의입니다. 니체 같은 사람을 적극적 허무주의라 해요. 허무하니까 원 없이 살자. 이게 적극적 허무주의에요. 허무하니까 구애받지 말고 선악을 초월해 살자. 이게 니체의 철학이거든요.

신을 죽었다. 내가 신인데 누가 또 신이 있어, 이런 식으로 자기의 솔직한 면을 드러낸 겁니다. 그래서 교회 처음 나올 때는 전부 다 개혁주의에 주눅 들어서 성화하려고 몸부림치다가 교회 와서 눈치 보다가 한 십 년만 다니면 전부 다 적극적 허무주의로 다 빠져버려요. 내가 최고네. 복음이고 뭐고 없어요.

가수들이 처음에는 나는 돈 아무리 줘도 세상 노래 안 부른다. 이렇게 장담했던 그 사람들이 목사 돼 있어요. 윤복희 오빠, 장담했거든요. 지금 신나게 부르고 있어요. 돈만 주면 어디든 다 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소향도 마찬가지고. 내 목소리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주께서 주신 목소리이기에 오직 영광 돌리는 데만 하겠습니다. 가스펠송 부르는 데만 하겠습니다. 가스펠송이 불타 없어진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다른 건 다 타도 가스펠송을 없어지지 않는 줄 알고 있어요.

세상의 예술, 과학, 문학, 모든 것은 다 불타 없어지는 겁니다. 그래야 이 연속성이 불연속성이 될 수 있고요. 인과성은 결인성이죠. 결과가 먼저 있고 결과를 여기다 적용시키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이걸 누구한테 적용시키느냐? 요한복음 8장에 아브라함한테 적용시킨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 보기를 원했다가 보고 기뻐했다 했잖아요. 이게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이야기했지요. 창세기 아무리 들여다봐도 아브라함이 이런 이야기했다는 게 안 나옵니다. “딱 보니 예수님이네.” 이렇게 창세기에는 아브라함 시대에 나오질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했다고 한 거예요.

엘리야와 모세 이야기 아무리 봐도 나는 조금 있다가 예수님 변화산에서 만난다, 그런 이야기 안 나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엘리야, 모세를 초청한 거예요. 자기 시대로. 세 사람 다 변화산에서 해 같이 빛났잖아요. 이 모습을 통해서 너희들이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심판적 언약이 너희 속에 들어가게 되면 너희가 심판받아 죽는다는 그 자체가 이미 구원이 되었다는 뜻이에요. 십자가가 나를 부정할 때 그거는 땡 잡은 거예요. 내가 뭘 해도 죄인이구나, 라는 것을 알 때 그게 바로 주께서 허락하신 복이에요.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 사흘이란 갭이 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은 부활의 세계에 갔다 이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오신 거예요. 어디까지 왔나? 제자들은 부활의 세계 건너뛸 수가 없어요. 십자가에 손에 못 자국, 창 자국이 앞에 기다리고 있으니까 벌벌 떨던 제자들이 어디 모이느냐? 십자가로 가는 거예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고 모든 성도도 십자가까지만 와요. 어떤 염치없는 인간이 십자가 구경했다고 지가 막 부활 거론하는 데 이거는 건너갈 길이 없어요.

또 십자가 건너서 부활로 가겠다고 십자가로 갈 때 죽는 게 아니고 죽은 척을 하는 거예요. 눈 찡그려가며 가는 거예요. “죽었다, 죽었다. 주여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마음을 낮추고 또 낮췄습니다.” 하면서, “지금 내 마음 낮춘 것을 주께서 속에 있다는 걸 쳐주겠지.” 자기가 자기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부정이 안 되는 거예요. 왜? 내 부정했다는 것은 제대로 부정한 것인지 아닌지를 지가 검증하기 위해서 내가 따로 만들어져야 돼요.

나는 죄인이다. 그걸 알기 위해서는 죄인이 아닌 내가 또 새로 만들어져서 죄인이 아닌 내가 죄인 되었다는 나를, “그래 내가 판정하니 너는 죄인이야.” 이렇게 판정내리면 처음의 인간은 죄인 되었는데 죄인이라고 판정내린 나는 죄인이 안 되고 제대로 된 판정을 내린 게 되기 때문에 그 인간은 어떻게 죄인 될래요?

첫 번째 자아, 이거는 죄인 되었는데 그걸 죄인이라고 규정한 두 번째 자아는 이 판정이 죄악 된 잘못된 판정이라고 부정돼야 될 판정이라고 하려면 뭘 받아야 됩니까? 세 번째 자아 만들어야 돼요. 세 번째 하려면 네 번째 해야 돼요. 이건 뭐 도 닦는 것도 아니고요 동안거 들어간 거예요? 불교에서 말하는. 점찍고 1개월 동안 점 쳐다보는 도 닦는 겁니까, 뭐예요? 이게 될 수가 없어요. 이 전체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이게 바로 육이라 하는 겁니다. 육의 세계, 자기를 지키는 수호자 신으로서 포기 안 되는 겁니다.

십자가까지 와요. 십자가에 오게 되면 여기 주님께서 부활하셨잖아요. 그러면 성령은 무슨 영이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영이 돼요. 예수님의 영인 동시에 무슨 영이냐? 부활의 영이 되는 겁니다. 부활의 영이 예수님만 건너와요. 다른 사람은 못 건너왔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첫 열매에요. 죽은 마리아 오빠가 살아나도 그거는 소생이지 부활이 아니에요.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님이지 마리아의 오빠가 아닙니다.

예수님만 부활의 열매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성령을 예수님 자기 영을 여기서 기다려요. 보내면 자기 제자들, 택한 백성을 성령이 와서 메가지 쥐고 십자가까지 오게 합니다. 오게 하면 모든 걸 포기하고 죽어 있으면 나를 위한 십자가 오기까지 한 그 영이 예수님의 영이기 때문에 건너가는 그 코스를 할 수 있는 악마의 권세, 죄의 권세부터 모든 권세를 이길 수 있는 능력으로써 주께서 이미 건너왔던 능력이기 때문에 그 능력으로 우리를 죽은 자에서 살리시리라. 로마서 8장 10절에서 11절 그 말씀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아 그것 참 기쁜 일이네요, 라고 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런데 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십자가에 끌려옵니까? 십자가가 예루살렘에 있든지 서울에 있든지 우리교회에 있든지 있어야 가는데 십자가까지 어떻게 갑니까? 여기까지 오게 되면 택배로 옮겨주는 건 예수님의 영이기 때문에 하는데 무슨 노력을 하면 여기까지 도달하겠습니까? 이렇게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면서 온갖 세상 무거운 짐은 다 짊어지고 이렇게 하는 사람 있어요.

시편 29편 봅시다. 5절에 보게 되면, 언약이 수직적 초월성에서 이제 평지적 초월성으로 쫙 발려버립니다. 이스라엘 역사. 왜 그러냐 하면 다윗이 있기 때문에. 다윗이 아브라함 기능이거든요. 다윗의 존재로 말미암아 다윗을 통해서 내려오는 축복과 저주의 기능이 이스라엘 속에 확 퍼져버립니다. 퍼져버리면 5절에,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5.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6.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

자, 내가 어떻게 가느냐가 아니라 주께서 현재 내 자리에 무슨 일을 벌이시는지를 받아들이면 돼요. 내가 하는 것 말고요. 주께서 행하시는 것을 받아들이면 돼요. 요한복음 3장에 보면 21절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이것과 관련되어서 중요합니다.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성령이 오셨다는 말은 뭐냐? 내가 지금 물 마시는 것 모든 것도 주께서 행하신 일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에게 나쁜 짓했다는 자체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주께서 행하신 거예요. 주께서 죄인 되게 해서 행하신 거예요.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것도 주께서 행하신 거예요. 그것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거예요. 다윗이 시편 50편 그걸 다윗이 아는 겁니다. 아하, 내가 근원적으로 모친의 죄에서 태어났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주께서 그렇게 이끄셨구나. 심지어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킨 것도 주께서 처리하시겠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까지 찾아갈 것도 없어요. 십자가에서 당겨주는 데 당겨줄 때 모든 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거예요. 그럼 여기서 뭐가 빠집니까? 내 책임, 내 미안함, 내가 남한테 어떤 죄송한 것, 이런 것 전부 다 뭡니까? 신속하게 탈락시켜야 되죠. 내 인생 조져놓은 것 너 때문이다. 이런 것도 신속하게 탈락돼야 되는 거예요.

나 젊을 때 남자 많았는데 너 만나서 조졌다. 이런 것 있잖아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눈이 삐어서 그랬다고 하는데 눈이 안 삐어도 그 남자 만나게 돼 있어요. 꼭 눈이 삐어져야 됩니까. 늘 인간은 날 때부터 삐어진 상태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이게 주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예정된 거예요. 몇 년 몇 시 어디에서 태어나라고.

이게 전부 다 해석을 하는데 어떻게 해석하느냐? 내가 한 일이 아니고 주께서 행한 일로 해석이 되는 것이 요한복음 3장 21절에 그걸 빛 가운데 있는 사람, 성령 가운데 있는 사람,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덮쳐진 상태로 된 겁니다. 그러면 내가 나를 판정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주님이 행하신 것을 확인하는 셈이 되고, 그렇게 되면 나는 주님의 자기존재 증명용으로 이 땅에 태어났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존재 증명, 내가 이렇게 일하고 이렇게 계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이 땅에서 겸손했습니까, 섬기는 사람입니까, 섬김을 받는 분이었어요? 마음 낮아서 했지요. 백향목이 뭐냐? 교만했거든요. 이스라엘이 교만했어요. 백향목을 꺾는다는 말은 바로 하나님의 본래 보좌의 뜻은 이것인데 너희들은 지금 마귀한테 속아서 교만의 극치를 하는구나. 내가 그걸 꺾어줄 때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꺾어주는 거에요.

내가 겸손해지는 게 아니고 겸손해봤자 겸손했느냐, 안 했느냐 판정하는 또 제2의 나를 만들어요. 그래선 안 되고 어떤 경우라도 우리 교만을 꺾어주는 겁니다. 여러분 이해했는지 물어보겠어요. 여러분, 어떤 때 교만합니까? 항상 주관식은 어려워요. 그땐 객관식으로 합니다, 시간 관계상.

①까불 때 교만하다, ②잘 될 때 교만해진다, ③다 교만하다, 몇 번입니까? 3번. 다 교만해요. 겸손 떨고 있는 교만해요. 어제 낮 설교에 그런 것 했잖아요. 어떤 사람이 선교사 간다 하니까, “선교하는 것이 욕심인 줄 이제 알았어?” 모든 재산 교회 바칩니다. 어떻게 그 욕심을 이제야 나타내느냐. 안에서 밀어내니까 욕심으로 나온 거예요. 전에 성령이 없으면 그걸 뭐로 봅니까? 주의 거룩한 일로 볼 게 아니겠습니까.

성령이 나오니까 다 everything 몽땅 다 교만 아닌 구석이 단 한 군데도 없어요. 이 어찌 즐거운 일이 아닙니까. 왜? 새삼스럽게 겸손 떨 필요가 없어요. 다 교만한데요. 겸손 떠는 것도 교만인데 뭘 또. 가만있으세요. 주의 일입니다. 친구들 밥 먹는데 내가 낼 게, 그러지 마세요. 겸손 아닙니다. 그것도 교만입니다. 그래서 나 돈 안 낸다. 이것도 교만이고. 그냥 내고 싶을 때 내세요. 헌금하는 것도 그냥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고 안 하고 어떤 책임이라든지 그게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성령께서 오실 때 부활로 통해서 왔잖아요. 부활할 때 뭘 거쳤습니까? 반드시 성령은 뭘 앞장세운다? 십자가 앞장세웠죠. 십자가 앞장세울 때 이미 우리 자신은 지 딴에 펄펄 살았다 하지만 십자가를 경유함으로 오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보면 우리는 이미 촐랑대고 펄펄 살았고 겸손합니까, 할 때 이 자체가 죽은 거예요.

죽은 자를 죽은 자로 확인하기 위해서 성령 오신 거예요. 죽은 모습이 너무 팔팔해. 그래도 괜찮아요. 너무 팔팔하고 틈만 있으면 코로나 끝나면 해외여행하려 하고, 기다렸다. 빨리 가야지 누구보다도 먼저. 기다려도 그것도 죽은 자의 모습이에요. 가만있다고 죽은 게 아니고. 그러니까 매일매일 사는 것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 그런데 살아 있다는 이 엄연한 것은 하나님의 자기존재 증명, 자기 하는 일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제부로 죽지 않고 오늘까지 살게 하신 겁니다. 오늘 오후까지는 몰라요. 그거는 내 소관 아니니까.

29편 8절 봅시다. 여기 보면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에 진동하지요. 이스라엘 자체를 초월적인 민족이지요. 갈 때 뭐가 동원된다? 이스라엘 자체가 무기가 돼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치는 무기. 무기가 되니까 그 광야에 갈 때 광야에 있던 많은 주변의 나라들이 이스라엘의 뭘 보고 두려워하겠어요?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두렵게 한 겁니다.

기드온 전쟁할 때 미디안 군대들이 그때 전쟁하기 직전에 밤에 꿈을 꾸었는데 꿈도 완전히 공동 꿈이야. 전부 다 꿈에서 이미 그들은 겁먹어버렸어요. 그래도 그들은 꿈이겠지 했는데 갑자기 횃불이 등장하고요 나팔이 등장하니까 그들은 꿈이 곧 현실이고 현실이 꿈이란 사실을 깨닫고 자기가 자기들 칼을 쥐고 죽였거든요. 그 칼이 무슨 칼인 줄 알아요? 그 칼이 기드온 칼이에요. 기드온은 칼을 쥐지도 못했어요. 기드온 칼은 자기들이 쥐고 있어요.

이 말은 뭐냐? 오늘날 불신자들이 지 성공하겠다고 갖고 있던 재산과 권력 있잖아요. 그게 서로를 찌르는 무기에요. 윤석열은 이재명 찌르고, 이재명은 저거 찌르고, 김건희는 저거 찌르고, 김혜경은 저거 찌르고. 그게 저희끼리 찌른 칼이에요. 남을 찌른 칼이 아니고 자기가 찔릴 수밖에 없는 칼을 자기가 갈고 닦고 공부하고 난리도 아니에요. 영어 배우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게 하나님께서 유발한 진동입니다.

그 다음에 8절에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하시도다” 이 가데스 광야를 누가 지나갑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데스란 남쪽을 말하거든요. 여기 레바논은 북쪽이고요 6절에 시룐 하는 것은 이천삼백 미터의 헐몬 산 있어요. 이스라엘 있으면 여긴 갈릴리 바다, 사해 바다 이쪽에 헐몬 산 있고 이게 레바논 북쪽에 있고요. 가데스 광야 이쪽은 남쪽이고. 남쪽, 북쪽 전체가 진동하고 있어요.

안마기계 진동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들어옴으로써 전부 다 진동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이스라엘의 초월성이고 초월적 왕은 초월적 존재 다윗이고. 다윗의 시니까. 그 다윗이 지상에서는 내가 모친의 죄에서 태어났다. 이게 초월성이에요.

9절에,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낙태했다? 자, 자식을 못 낳는다. 아까 배웠지요. 낙태, 연속성입니까, 불연속성입니까? 불연속성이죠. 유월절에 애굽에 사는 모든 맏이가 죽었다. 연속성입니까, 불연속성입니까? 불연속성.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가 기대하고 예상하는 것을 끊어버리는 거예요.

끊어버릴 때 하나님의 초월성으로 끊어버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기서 하나님의 자기존재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 백성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행하심을 드러내기 위한 빛에 속한 사람이 돼요. 그 사람도 성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거는 재수 없는 거다 달리 믿어볼까? 이렇게 계속해서 자기한테 미련 가져버리면 자꾸 연속성으로 가버리면 성도 같으면 더 심하게 들어와요.

10절에 봅시다.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시29;10)홍수가 단순히 노아 홍수의 세상적인 관점의 기본은 뭐냐? 전 지구적이다. 일부만 홍수 난 게 아니고 전 지구가 다 홍수 난 거예요. 물론 옛날에 홍수 있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인정하지만 그거는 일부만 한 지역만 홍수 났다고 하지만 아니네요. 전 지구가 홍수 난 겁니다. 8명 빼놓고는 다 죽었어요.

그래서 아무리 과학자들이 정보를 얻어도 홍수 전까지 갈 수 없어요. 과학의 모든 증거는 홍수 이후에만 통하는 정보지 홍수 이전에는 증거할 수 없습니다. 우주의 역사가 137억 년이고 지구 역사가 46억 년이다. 이것 다 거짓말이에요. 요 홍수 후에 나오는 원리원칙, 법칙으로 홍수 전까지 다 무리하게 억지로 적용시키려하니까 그들은 시간을 늘리는데 수학적으로 확률로 따져도 단백질 18가지가 아미노산 8가지로 단백질 하나 만들 때 확률이 46억 년으로 모자라요. 안 된다니까요.

세포 하나에 DNA에 집어넣고 미토콘드리아 집어넣고 핵 집어넣을 때 그렇게 정교하게 만들어내는 시간이 46억 년으로 모자라고 137억 년으로 모자라요. 아무리 시간을 늘려도 모자라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렇게 될 수 없어요. 확률적으로. 과학적으로도 사실은 말이 안 됩니다. 그냥 6000년으로 보세요. 성경대로 6세대가 아니고 6일 동안 만들어냈어요.

지금 우리 자체가 이미 죄로 문제 있는데 죄로 문제 있는 이성과 합리성과 그 논리성으로 죄 없는 상태를 상상한다? 이 자체가 논리적 모순이잖아요. 이미 하나님이 죄 지었다 했는데 자기 이성은 멀쩡하다고 우기는 건 말도 안 되지요. 멀쩡하지도 않은 이성으로 지구역사를 멀쩡하게 계산한다? 이거는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10절에 보면 홍수로 가로막았어요. 전 지구적으로 단절시켜놓고 그 다음에 신약에 오면 십자가로써 개개인을 또 단절시키죠. 죽었다가 살게 하는 거예요. 죽은 척하고 사는 게 아니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지금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은 내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고 십자가 부활의 영역에서 찾아오신 성령에 의하면 우리가 여기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합당한 뜻이 있어서 살아가는 거고,

그 뜻은 다른 게 아니고 예수님이 정죄함이 없느니라. 네 의로 구원받지 않고 예수님 십자가 피로 구원받느니라. 그걸 알리기 위해서 허접스럽고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죄인 중의 괴수를 오늘도 주께서 친히 세상 사람에 하나의 무기로서 이스라엘로서 앞장세워서 부산까지 온 거예요.

마지막 봅시다.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다윗은 왕은 아니고 다윗은 통로에 불과하고 왕은 여호와가 왕이고요. 11절에,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자기 백성이 자기 보좌의 인테리어니까 자기 보좌를 지킬 이십사 장로처럼 자기 보좌에 들어올 사람이니까 하나님이 왕으로 책임지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하는 일이 얼마나 도움 되느냐를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주께서 행한 일이 어떤 것이냐를 위하여 우리가 오늘 살게 된 것과 존재하게 된 것을 다시 한 번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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