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14a 부산강의 : [시편]46(30:5)-말씀의 작용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30편.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 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여기 등장하는 주인공이 둘이죠. 여호와 있고, 여기에 나라고 하는 사람, 두 사람입니다. 나와 여호와가 관련성이 있다고 시편 30편에서 이야기하죠. 그러면 내가 살아 있으면 누가 살아 있는 게 되냐 하면 여호와가 살아 계시는 게 돼요. 왜? 관련성이기 때문에.
이것은 내가 일한다가 되면 누구도 일해요? 여호와가 일하게 돼요. 잘 아시네요. 그러면 내가 죽는다면 누구도 죽는 게 돼요? 여호와 하나님도 죽는 게 됩니다. 나 안에서 나와 더불어서 여호와께서 일하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신약에서는 ‘예수 안’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울타리를 둬야 돼요. 예수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그 일이 나를 통해서 재현되는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예수 안에서 그래요.
그런데 예수 안이니까 ‘예수 밖’이 있겠지요. 예수 밖은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세상이 되고, 세속이 되는 거예요. 세속세계 또는 같은 말로 육의 세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밖에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나 또는 주님을 바라볼 때 그들은 하나님과 인간이 같이 연결돼 있다는 것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들은 어떤 사람 모습, 또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일을 드러냈다는 것을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신은 하늘에 있어요. 막연하게 또는 추상적으로 있는 겁니다.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은 어디 안에 있느냐? 그들은 자연 안에 있어요. 자연 안에 있으니까,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지금 말씀드리는 겁니다. 예수 밖입니다.
예수 밖의 있는 사람들의 삶이란 이 전체가 자연이고, 자연 안에서 그들이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 안에서 인간이 살아가다가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되지요? 죽음이 오지요. 그래서 이들은 자연 안에서 바라보는 나는 나이 들고 아파서 요양병원 갔다가 시들시들 앓다 죽으면 이게 그들의 끝이에요. 그들이 아는 게 이거에요.
살아 있을 때 그들은 자연을 통해서 무엇을 발달시키느냐 하면 과학과 기술을 발달시킵니다. 과학과 기술은 무엇에 필요하냐 하면 같은 인간끼리 한 공동체 또는 사회를 이루는데 필요한 것이 과학과 기술이에요. 과학과 기술과 더불어서 또 만들어낸 게 뭐냐 하면 언어(말)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것은 창세기 11장에서 바벨탑 쌓을 때 그들이 의견들을 모으기 위해서 그들이 아는 언어를 주고받고 했잖아요. 예수 밖의 상황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 못할 게 하나도 없지요. 줄곧 이렇게 살아오니까. 언어와 말을 통하고 과학과 기술은 어디에 필요하냐? 이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데 필요해요. 과학과 기술에서 하는 일은 에너지를 개발하고 에너지를 관리 또는 적용하는데 필요한 것이 과학과 기술입니다.
옛날 고대인들은 1인당 12,500킬로칼로리를 하루에 소비했어요. 2020년도에 미국사람이 1인당 소비한 칼로리가 135,000kcal에요. 신라면 하나가 350~400쯤 되지요. 거기다가 김치까지 먹으면 500까지 올라가지요. 짜장면 하나 먹으면 700까지 올라갑니다. 옛날에 12,000킬로칼로리를 자연에서 뽑아내기 위해서 얼마나 힘든 노동을 했는지 몰라요. 지금은 미국사람 135,000 한국도 이 정도 됩니다. 이러면 자연에서 에너지를 얼마나 뽑아내겠어요.
이러한 활동을 그들은 뭐냐? 이걸 삶이라, 살아 있다고 합니다. 삶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공동체 속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이 사회가 가장 큰 규모로 있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국가라고 이야기하고 이 국가를 예수 바깥에서 사회니까 예수 안에서 이걸 뭐라고 보느냐 하면 짐승이라고 봐요. 짐승(악마의 가현체), 악마가 등장하는 모습, 힘으로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을 장악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예수 밖을 알았으니까 예수 밖에 있는 이 안에 누가 들어오겠어요? 마지막 때 예수님이 들어오지요. 예수님이 들어오면 누구와 부딪치겠습니까? 최종적으로 부딪치는 것은 바로 짐승, 악마의 가현체와 부딪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하는 때가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13장 봅시다. 33절. 13장 32절에서 헤롯을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여우, 간사하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33절에 보면,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그러니까 2박3일 사흘 동안 가다가,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뭔가 예수님의 목표지점이 있었지요. 그 지점을 누가복음 13장 33절에서는 어느 지점으로 봤습니까? 예루살렘이에요.
예루살렘은 이 공동체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 언어적으로 종교가 있고 과학과 기술이 합쳐 국가가 되는데 종교와 국가가 다 집대성돼 있는 같이 결합이 되어서 통치가 되는 그 유대 장소가 뭐냐 하면 예루살렘입니다.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곳, 그게 예루살렘이에요.
34절에,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그러니까 예루살렘이 하나님 편에서 온 사람, 선지자들이죠. 선지자를 죽이는 인간 속에 있는 유일한 구멍이 되는 겁니다. 예루살렘이. 그럼 예루살렘 가면 천국 가는 통로가 있느냐? 그거는 지리적으론 통로가 없고요. 예루살렘 백날 성지순례 해봐야 혹시 천국 가는 문 보셨습니까, 해도 가이드 이야기 안 합니다. 막혀있지요.
그런데 여기서 뭐가 일어나느냐 하면 천국 가는 그 길이 사건화 되지요. 사건화 되면서 자연 속에 갇혀 있는, 그리고 인간의 목숨 끊어지는 그걸 죽음으로 이해하는 그걸 죽음으로 보는 그런 인간들의 지적인 한계, 사고방식의 한계, 예수님 밖에 있으니까 예수님 밖에서 자연과 세속적으로 있는 인간들의 그 지식의 한계, 지혜의 한계 거기에서 천국으로 가는 출구가 되려면 이게 사건화 돼야 돼요.
그래서 주님과 그 당시 유대 공동체 만나서 일어났던 십자가 사건을 반복을 하면 할수록 거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반복할 때마다 천국 가는 출구가 열려버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늘에서 오신 진짜 하나님이 되신 분이 유일하게 인간과 매치가 되는 만나는 지점이거든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천국과 지상에서 유일하게 갈 수 있는 복음은 무슨 사건으로 구체화 되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이야기해요.
그렇다면 이래요. 사도 바울이 가는 곳곳마다 무슨 사건이 재현된다? 십자가 사건이 되겠지요. 십자가 사건이 재현되려면 사도 바울은 뭐만 증거해야 돼요? 십자가 복음만 전해야 돼요. 그러나 십자가 복음이란 무슨 사건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죽음 사건이죠. 하나님의 죽음 사건이고 인간이 아는 죽음이란 것은 기껏 인간의 목숨 끊어진 걸 죽음이라 보잖아요.
지금 이쪽은 죽어야 가는데, 이쪽은 죽어야 끝난다고 보는 거예요. 죽음이란 의미 자체가 달라지는 거예요. “죽음? 끝났네, 끝났어.” 그건 세상에서 하는 거고. 이건 “죽었다? 됐네, 됐어. 오케이, 성공이다.” 지금 완전히 견해가 다르잖아요, 견해가. 죽음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달라요. 그래서 자연세계에 있는 짐승, 악마의 가현체, 이 짐승은 본의 아니게 누구의 일을 도와주게 됐냐 하면 주님의 일에 충실한 협력자가 된 겁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 가운데 누굴 선택했습니까? 가룟 유다를 선택했지요. 나쁜 역할을 맡은 사람이 필요한 거예요. 예수님 자신을 천국의 출구, 또는 천국의 열쇠라 할 수 있어요. 천국의 출구로 데려 갈 충실한 끝까지 그 역할을 다할 제자를 하나 거기다가 집어넣을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그 역할 없이는 주의 십자가 일을 완성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역할을 맡았다마는 본인한테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는. 그러나 가룟 유다는 피조물이니까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지요. 개인적 사정 다 못 봐줍니다.
하나님이 가룟 유다를 선택했다는 것은 악마조차도 사탄조차도 주님의 선택 때문에 빼도 박도 못하고 필히 주님의 십자가 일에 협력이 될 수밖에 없어요. 심지어 악마조차도. 그리고 악마에 속한 이 모든 인간도 예수님의, 하나님의 하는 일에 피조물로서 못 빠져나옵니다. 주의 일에 협조하는 울타리에서 빠져나갈 구석을 없습니다. 그래서 방금 제가 사도 바울의 십자가를 사건화 했다 했잖아요. 그것이 하나님이 오셔서 비로소 천국이 막혀있었는데 유일하게 천국의 출입구를 뚫는 그 일을 한다고 말씀 드렸지요.
그럼 이걸 지워봅시다. 성경의 해석, 짐승이란 것도 악마의 가현체, 이것도 지워버리고 남는 것은 12,000킬로칼로리, 135,000킬로칼로리 이것만 남는다고 해봅시다. 자, 이 안에 자연세계 있고, 이쪽 세계 아무것도 지금 성경 내용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들끼리만 삽니다. 그냥 나이 들면 죽고 공동묘지 만들고 그러면 되는 거예요. 여기 무슨 문제 있습니까, 이 세상에? 아무 문제없지요. 그러니까 주님은 복음은 아무 문제없는 걸 문제를 유발시키려 온 거예요. 되게 정상적이고 평화롭습니다. 전쟁하면 협상하면 되고요.
우리나라 19세기말 1890년에서 1906년에 조선말에 서울에 성곽이 있었거든요. 동쪽에 동대문 밑에 광희문이 있는데 시구문이라 돼 있어요. 이 성 안에는 시체를 둘 수 없어서 바깥으로 빼내는 문, 그게 시구문으로 지금도 서울에 있어요. 시구문 나가면 옛날 이 시대에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축소된 이 세상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거죠. 성으로 둘러싸여 있고, 창세기 4장에 가인의 후예가 성 만들어서 도시 구획했잖아요. 그렇게 해서 죽은 자는 성 밖으로 내보내고 그렇게 한 겁니다.
히브리서 13장 11절에 보면,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인간이 살고 있는 그 도성에서 나아가자.
거기 14절에 보면,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어디서 만나자는 거예요? 도시 바깥의 공동묘지, 시체가 빠지는 그쪽에서 만나자. 그쪽은 바로 음부로 내려가는 곳이에요. 오늘 시편 30편의 핵심에 지금 여러분들이 접근하고 있어요. 이게 오늘 말씀과 관련 없는 게 아닙니다. 관련 다 있어요.
특수한 죽음, 인간들이 아는 이 죽음에 예수님의 시체가 같이 섞여서 나가는 거예요. 갈보리 언덕이 어디 있느냐 하면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게 아니에요. 성 바깥에 있어요. 성 바깥에 예수님의 성묘교회라고 지금 비잔틴 시대부터 만들어서 있는데 성 바깥에 십자가를 지고 옛날 채석장이라는 거기서 돌아가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누웠던 반질반질한 검은색 돌이 있고요 그 위에 예수님의 빈 무덤도 있고, 그렇게 지금 돼 있어요.
그러니까 천국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죽음을 통해서 빠져나왔던 주님이 유일하게 뚫어냈던 그 십자가를 사건화 시킬 때마다 거기서 천국의 문은 그때마다 사건을 통해서 열리는 겁니다. 그 십자가 일회적인 사건을 반복적인 사건화 시키는 그 작업은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자기 백성에게 성도에게 찾아오게 되면 십자가 사건 안으로 성도를 집어넣습니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 시작됩니다. 이건 예수 밖의 세계죠. 자연, 언어, 국가, 사회, 대선투표 하는 것 전부 다 포함됩니다. 이걸 지우겠습니다. 이 세상은 이렇게 무탈하게 평화롭게 잘 살고 있다고 그 이야기한 거예요. 이 세상은 복음만 안 전하면 아무 문제없어요. 인간의 대화상대로, “요새 이재명이 뭐하노?” 그런 것 이야기하고, “추미애는 얼마나 불안하겠나.” 복음과 아무 상관없는 그런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하는 것은 바로 예수 안의 세계에요. 예수 안의 세계는 우리가 구약 시편을 하기 때문에 이걸 바꾸겠습니다. 이게 ‘언약 안’이에요. 구체적으로 ‘다윗언약 안’입니다. 언약 안에서 여기 여호와 하나님이 있고요 여기 나가 있어요. 등장인물 두 명입니다. 그런데 이 나는 이 안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해요.
여기 시편 30편에 보면 3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신비롭지 않습니까? 여기의 나는 뭘 하나 경험한 사람이에요. 뭘 경험했느냐 하면 음부,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을 실제로 경험을 한 거예요. 실제로 경험을 했고 그 죽음의 자리에서 스스로 일어난 게 아니고, 자기는 죽음으로 갔고 그 다음에 여호와께서 죽은 나를 음부에서 이끌어내는 거예요.
조금 전에 했던 예수 밖의 세계, 자연세계, 일반적인 세상이란 곳에는 죽으면 그걸로 끝이에요. 이 말은 어떤 인간도 남 죽었을 때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너 죽는데 같이 죽자, 해봤자 그거는 화장터 7번이고, 이쪽은 4번 되어 같이 태워지고 합체해도 소용없는 겁니다.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언약 안에서는 따라잡는 게 가능해요.
언약 안에선 무슨 장치, 무슨 시스템이 가동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죽고 다시 살아날 때 언약 백성도 주님의 죽음 안에 동참해서 같이 살 수 있는 시스템을 여기서 만들어내는 거예요. 언약적으로. 아까 자연세계와 판이하게 완전히 다르죠. 장치가 이거는 죽어도 사는 장치를 만들어놓은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여호와와 나 사이가 단순히 그냥 아는 사이 정도 되면 안 되겠지요. 그래서 이 나에서 인간이 배제됩니다. 인간은 빠지면 이 나 자리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들어가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잖아요. 이 아들 개념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바로 사무엘하 7장 14절에 있는 그 다윗언약에서 비로소 그 아들이 인간세계에서 활동할 수 있는 바탕이 언약적으로 보장이 되게 돼 있어요.
사무엘하 7장 14절에 뭐라고 돼 있느냐?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그렇게 돼 있지요.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이게 가족관계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어요. 왜냐하면 아버지 없이는 아들이 없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지만 아버지는 이 인간세계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누구만 나타나게 돼 있느냐 하면 아들만 나타나게 돼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 시대 말고 다윗 시대에는 이 역할을 누가 하느냐 하면 다윗이 그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이 이렇게 함께 있다는 이것을 다윗 시대에는 무엇으로 나타나느냐 하면 바로 성전으로 나타내요. 그래서 시편 30편에 제목이 나옵니다. 노래제목이 있듯이 여기는 제목이 나오지요. [다윗의 시] 다윗이 시라면 다윗의 노래. 이 노래가 어디에 쓰이냐 하면 [성전 낙성가] 성전을 낙성했을 때 부르는 노래가 이 다윗의 시를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성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배제되니까 사람이 사는 일반적인 공동체, 또는 살림살이하는 살림집이 아니고 하나님이 언약적으로 줬던 하나님의 아들과 아버지가 같이 있는 그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거기에 다윗언약을 통해서 다윗을 통해서 이 이야기가 된다는 말은 접합 점, 인간이 배제되면서, 인간은 배제돼야 돼요. 왜? 인간은 이 언약적 일을 수행을 못해요. 다윗도 실패했어요. 다윗도 성공한 적 없습니다.
다윗은 성공하지 못하지만 그건 있어요. 틀은 있어요. 장차 하나님께서는 언약적으로 이런 것을 원해, 라는 그 틀을 다윗은 일단 부여받은 겁니다. 어떤 드라마나 영화에서 배우에게 디자이너가 옷을 해 입히는데 옷을 그냥 배우한테 주기 전에 혹시 조수 가운데 그 배우와 체형이 비슷한 사람에게 옷을 먼저 입혀보잖아요. 그 먼저 입어보는 역할을 다윗이 한 거예요. 입히고 딱 맞네, 하고 벗겨버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도행전에 보면 다윗의 무덤은 그대로 있으니까요.
일단 시편 30편 말씀대로 음부에서 끌어올리는 것은 예수님의 몫이지 다윗의 몫이 아니에요. 베드로 설교에 그게 나와요. 사도행전 2장 29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다윗의 묘는 그대로 있다 이 말이에요. 근데 그는 어떤 역할이냐? 선지자 역할이에요. 선지자 역할이기 때문에 일단 마네킹 같은 역할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는 31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그렇게 돼 있지요. 하나님이 철저하게 인간들 가운데 자기 백성 될 사람들을 영원히 천국에서 부활의 세계에서 살리기 위해서 빈틈없는 시스템과 메커니즘을 작동시킨 거예요.
모든 인간이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을 본인이 알아서 실천해서 구원받을 수 없는 이유는, 인간세계 자체가 하나님이 오셔서 사람에게(악마의 앞잡이죠) 죽임을 당해야 이게 비로소 출구가 열리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성경강해를 듣잖아요. 지금 내가 여기 있다. 천국은 여기 있다. 그럼 내가 이걸 이해했으니까 들어갈 수 있습니까? 못 들어가요.
왜냐하면 여기서 무슨 사건이 벌어져야 됩니까? 십자가 사건이 벌어져야 돼요. 십자가 사건의 담당자가 누구라 했습니까? 성령이 오셔야.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 보게 되면 33절에,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누구한테 줍니까?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라고 돼 있어요.
성령을 왜 주십니까? 안 주셔도 되는데 왜 주시느냐 말이죠. 주실 때 고맙습니다, 하고 받지 말고 따지세요. 성령을 왜 주십니까? 그거는 우리 능력으로 종교적 힘으로 우리가 실천과 지식으로 지혜로써 천국에 가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이 온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 시편을 보면서 우리가 예상하고 있는 모든 지혜와 지식은 무엇과 충돌을 일으킵니까? 실제로 성령께서 가져다 준 십자가 내용과 이게 어떤 생각을 해도 부합되지 않습니다. 일치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고 어떤 상상을 해도 그 상상한 것이 우리 구원의 능력이 아닌 거예요. 구원의 능력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상은 자유라고 상상은 마음대로 할 수 있거든요. 그러면 성령께서 어떤 작업보다 하느냐 하면 네가 살고 있던 네 고향, 다시 말해서 악마에 속한 자연세계, 예수 밖의 세계의 속성을 우리의 상상력에서 하나하나 끄집어내서 그걸 분석해서 그래서 탈락이고, 그래서 안 되는 거고, 그래서 안 맞는 거야. 성령께서 친절하게도 그걸 다 알려줘요.
제가 방금 친절하다고 이야기했지만, 내 십일조 40년 했는데 이것도 버릴 겁니까? 교회 교육관 지을 때 목돈 냈는데 이것도 버릴 겁니까? 나이지리아 가서 전도 이백 명 했는데 그것도 버릴 겁니까? 온 불만 요소가 다 들어있는 거예요. 성경 공부한다고 짜장면 배달했는데 이것도 버릴 겁니까? 불면 불평이 되지요.
그건 한 마디로 왜 불평이 오느냐 하면 시편에 죽음, 음부, 우리가 살아 있다. 살아 있는 것이 죽음을 경유해서 다시 올 때 이게 오늘강의 제일 어려운 대목이에요. A라는 인간이 죽음을 경유할 때 이미 ⓐA라는 인간은 이미 죽음을 통해서 A는 날아가 버렸어요. 이게 죽음을 경유해서 ⓑ다시 성령을 받아서 부활의 영을 받을 때 A라는 이것은 이 죽음을 통해서 이미 끝났어요. A라는 인간은 자기 이름이 있는데 여기 주님의 성령이 올 때는 이게 성령 주신 분의 이름을 따릅니다.
그게 뭐냐? 주의 이름으로 삽니다. 적어볼게요. 주의 이름으로 삽니다. 내 이름은 이미 죽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요소가 같이 성립이 되는 장소가 뭐냐? 예수 안이에요. 이게 언약 안입니다. 나는 죄인으로 죽었는데 그 죽었다는 것이 예수님이 살아 있음으로 죽은 이름이 주님의 이름을 살리기 위해서 계속 재료로 자원으로 활용되는 이 관계가 뭐냐 하면 제대로 살아 있음이 돼요. 나 죽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거예요. 내 이름이 죽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겁니다.
이게 과학과 철학과 일반사회에서는 성립이 안 돼요.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왜 성립이 안 되느냐? 그들은 죽으면 그걸로 끝이에요. 시구문 통해서 시체 공동묘지에 묻으면 더 이상 그 인간은 아무리 아버지를 사랑하고 엄마를 사랑하지만, 뭐 흔히 마음속에 살아 있습니다, 백날해도 그거는 비유적이고 실제로 그들은 내가 사는 동네에 그분은 없어요.
왜냐하면 살아 있는 내가 살았다는 개념을 살리기 위해서도 죽은 자는 우리 동네에 있으면 안 돼지요. 아버지 죽은 시체를 안방에 모시면 썩은 냄새 나지, 엽기적인 그런 행동은 정신병자 아니면 그런 일이 없지요. 이상하게 그 집에 가면 냄새 나더라, 이러면 석 달 전에 죽었던, 그러면 신고 들어오지요. 그렇게는 못 살지요. 어쨌든 내가 사는 동네에는 나만 살아야 돼요, 나만. 그것도 홀로 나만 있어야 돼요. 누구와 같이 있다는 것은 여고괴담이나 귀신영화에나 있지요.
그래서 이 세상에는 그걸 굉장히 싫어해요. 귀신이 구천에 떠도는 것, 아주 싫어합니다. 이건 도를 아십니까, 해서 천도제 드리든지 절에 가서 제물 바쳐서 귀신을 쫓아내든지 해야지요. 절에 가면 천도제라는 걸 드립니다. 어린아이들 강제시술해서 죽여 놓고 몸은 죽었지만 영혼을 떠도니까 그게 살아 있는 내 신상에 장애요소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쫓아내게 돼 있어요. 그냥 쫓아내면 두고 보자 해서 귀신 들어오기 때문에 그때는 좋게 뇌물 줘서 미안하다, 하고 돌려보내지요.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죽은 자를 내보낸다면 하나님의 세계, 언약의 세계, 시편 30편 이런 세계, 다윗언약의 세계에서는 반대로 산 자를 내보내야 돼요. 산 자를 죽음에다 내보내요. 그걸 아까 인간 배제, 살아 있다는 이유 때문에 죽어서 오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냥 죽어버려. 네가 죽은 척하고 나중에 20일 지나고 깨나서 오란 뜻이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전에 살던 나와 새로 산 나와 그대로 나의 이름이 유지가 돼요. 이건 지식을 하나 얻은 것뿐이지 음부의 세계 구경 한 번 잘했네. 팔도강산 유람하는 겁니까?
단테의 신곡에 보면 내가 지옥을 다녀왔다, 천국을 다녀왔다 하는데 다녀오면 뭐합니까? 멀쩡하니 지가 살아 왔는데요. 이 세계에서 내 이름은 이미 죽은 이름이에요. 죽은 이름은 다시 거론할 필요도 이유도 없어요. 우리는 내 이름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나를 죽였다가 살려준 주님을 위하여(for) 살게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장 15절. 이제 산 자는 주님을 위해서 사는 거예요.
그럼 주님을 위해서 산다는 말은 뭐냐 하면 1.내가 원인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나는 2.그냥 내 존재가 정답이에요. 새삼스럽게 정답을 만들지 말고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내 자체가 주님의 작품이고 결과물이기 때문에 3.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범사에 감사는 것밖에 없어요. “오늘도 코로나 걸려서 감사합니다, 주여.” 이런 것. 모든 일에 감사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4.나한테 너 이것 해, 라고 맡길 수 있는 일은 우리에게 전혀 맡긴 적이 없습니다.
헌금을 하던 전도를 하던 전부 다 어느 안에서 한다? 성령 안에서 하는 거예요. 성령은 누구의 영입니까? 예수님께서 형편을 마련해요. 아까 성령의 일을 다시 한 번 봅시다. 성령의 일은 두 가지거든요. 육을 육이라고 지적하는 거예요. 책망한다, 이건 요한복음 16장 8절.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에게 육에 대해서 책망하는 거예요. 두 번째, 주님을 생각하게 하는 거예요. 이 두 가지뿐이에요.
그래서 영으로 했다가 육으로 돌아설 수 있는 인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단 한 명도 없어요. 왜냐하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으로 마치는 법은 없어요. 그래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으로 마치겠느냐, 라고 묻지요. 다시 말해서 성령에서 육이 되는 것이 이미 인간이 손을 댈 그 능력에서 한계에서 벗어나버린 거예요.
성령에서 육이 되지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주님께서 육의 일을 다 들춰내고 발라내면서 성도로 하여금 뭐만 생각하게 하십니까? 주님만 생각하는 그 통로를 지속시키는 거예요. 어디 가느냐 하면 육으로 들어가서 뭘 생각한다? 주님 생각하는 거예요. 바로 주님 생각하는 것은 육입니다. “주여, 십자가 감사합니다.” 이러다가 누가 와서 뭐라 하면 5초 전에 주님의 십자가만 생각하다가 갑자기 성질 팍 내요. 반드시 육을 통해서.
그래서 성질나는 사람 만나서 한바탕 성질낼 것 다 내고 싸우고 난 뒤에 “주여, 감사합니다.” 방금 저 사람과 한 판 싸웠던 이 죄인을 주님께서 이미 살려내셨으니까 이런 감사가… 이것 6초 내지 8초갑니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이 성령 안에서 없어요. 나는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구원 안에 있는 거예요. 구원받은 게 아니에요. 구원이 소유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냥 이렇게 안에 있는 거예요. 예배당 안에 있지 예배당을 주머니에 갖고 다니는 게 아니잖아요. 시멘트 이게 얼마나 무거워요. 그걸 왜 들고 다녀요. 그 안에서 사는 거예요.
안에서 살기 때문에 성령의 일이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육으로 들어와서 육을 지적하고 주님께 감사하는 이 일, 이게 루틴이 돼요. 계속 되풀이 돼요. 발걸음 하나, 머리카락 하나, 어느 것 하나 주님의 허락 없이는 일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다 주 안에서 이뤄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것을 전체적으로 신약에선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열두 제자 뽑아서 일단 육으로 살게 해서 예수님 배반하고 난리도 아니에요. 도망치고 난리 났지요. 그래, 그래 가, 가. 예수님 혼자 십자가 지셨잖아요. 강도 둘과 지셨단 말이죠. 그리고 난 뒤에 어떻게 했습니까? 주님께서 오셔서 뭘 주셨습니까? 다시 교육시켰습니까? 교육시키는 것 없어요. 성령을 주시는 거예요. 오순절 성령. 성령을 주시니까 그때부터 제자들이 기억하는 것은 자신의 배신과 육에 대해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유감없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원치 않는 주께서 나와 주님 사이에 내가 원하는 게 있었고 주님 원하는 게 있었는데 주님께서 고맙게도 내가 원하는 걸 족족 전부 다 좌절시키시고 내 계획을 다 무산시키시고 나로 하여금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실패로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더 이상 나에 관한 성공은 기대할 필요 없어요. 뭘 해도 나에 관한 것은 실패로 해주시는 그 작업, 그분이 누구냐? 주님의 나라기 때문에 주도권이 주님에게 있기 때문에 이런 조치가 일어나게 해주시는 겁니다.
첫째 시간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나의 끝이 주님의 시작이다.] 주님께서 1.인간 속에 오셔서 인간의 끝을 만들어요. 인간을 끝까지 가게 합니다. 당연히 죄인이기 때문에 2.그 끝까지 가서 주님께서 인간을 음부에 집어넣으시고 그 음부에서 주님이 같이 뛰어들어요. 그 죽음에.
인간 죽음에 하나님이 뛰어들어서 죽고, 3.그 다음에 죽은 자를 일방적으로 끄집어내기 때문에 더 이상 내 이름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구약이니까 주의 이름이라 해도 되는데, 언약의 이름으로 또는 언약의 세계, 천국을 향하여 천국을 위해서 주께서 그렇게 일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4,성도는 자력갱생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사는 게 하나도 없어요. 이것을 실제적으로 그대로 적용시키면 나를 위한 기도는 없습니다. 모든 기도는 뭐냐 하면 주님을 위한 기도기 때문에 기도 마지막에 뭘 붙이라 했습니까? 내 이름으로 해라. 제가 감히 제 이름으로? 아니 네 속에 내가 들어가 있으니까 너의 기도를 통해서 나의 기도를 하겠다는 거예요. 인간, 너의 기도를 통해서 나의 기도를 하겠다는.
그래야 주께서 그 인간을 부려먹을 게 아니겠습니까. 어떤 기도라도 괜찮아요. “이 토마토 좀 맛있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 그럼 주님께서, “맛있어서 네가 뭘 원하는데?” “그래야 주님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지요, 뭐.” 고런 기도. 육으로 들어가서 주님께로 마감이 되는 그런 순환, 루틴이라 하는 순환하는 그런 기도를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해서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가 돼요.
자, 그렇다면 이런 일에 대해서 세상은 그냥 아무 역할이 없는가? 세상, 아까 말한 예수 밖의 세계는 그냥 방치만 하고 있는가? 멀뚱하니 구경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아까 이야기한 자연세계, 인간의 세계에 들어올 때 예수님이 서 있으면 여기서 갑자기 주름이 일어나요. 여러분 주름 알지요? 치마에…
저는 그런 경험해봤는데 와이셔츠 다려봤거든요. 보통 여자들은 다리미질을 반듯하게 하는데 내가 다리미질할 때는 온 주름이 다 모여요. 이것 다리면 다려놓은 것도 같이 쭈글쭈글해지고. 주님이 가는 곳에 모든 관심사가 집중되는 현상을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오늘날 성도가 가는 곳에 뭐가 집중된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성도가 가는 곳에 세상이 악마가 눈치를 채고 갖가지 일에 방해공작이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그것을 다윗도 체험했고 주님도 체험했고 오늘날 우리도 지금 그것을 체험을 해야 됩니다.
20220314b 부산강의 : [시편]46(30:5)-말씀의 작용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모든 상황은 정답에 맞추어 돌아간다.] 인간이 정답을 알거나 할 필요 없이 정답은 이미 확정됐어요. 시편 30편 이 자체가 정답이거든요. 시편 30편대로 모든 상황들이 돌아가는 거예요. 시편 30편 내에 예를 들어서 어떤 내용이 있느냐 하면 5절에,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라고 돼 있지요. 적어 보겠습니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다음에 뭡니까? 뭐가 평생입니까? “그 은총은 평생이다.” 이것을 인간은 자발적으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정답이 아니기 때문에 경험할 수 없고 정답이란 조건 하에 자기 백성을 이런 경험에 접어들도록 만들어요. 그러면 성도는 뭘 경험해야 돼요? 노염이 튀어나오는 경험을 해야 돼요.
하나님이여 내가 바르게 하려고 하는데 감히 나의 착하게 하는 의지를 주님 쪽에 좌절시키면 나는 앞으로 무슨 주의 일을 할 그런 보람을 느끼겠습니까, 라고 자기 딴에 겸손한 체하나 가만 들어보면 주님한테 개기고 대드는 일을 한 거예요. 지금 표정이 웃는 표정이 아닌지 대번 알거든요. 억지로 웃는데 속으론 성질내고 있는 것, 이 경험을 해야 돼요. 시편 30편 5절에 나오잖아요.
그래서 인간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말씀되도록 인간을 말씀세계에다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내가 말씀 지킨 게 하나도 없음을 고백케 하기 위해서 말씀 지킨 당사자는 주님이 지키고 하나님이 지켜요. 왜? 주의 이름이니까요. 그리고 인간을 말씀을 못 지키는 이유는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출제위원이 정답을 알고 있지 문제 푸는 사람은 정답을 몰라요. 왜? 그 취지를 몰라요.
십계명에 거짓말하지 말라고 나오잖아요. 그런데 기생 라합은 거짓말했잖아요. 아브라함이 거짓말 한두 번 했습니까? 십계명에 나오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예를 들어서 예수님께서 거짓말을 하셨다면 예수님처럼 거짓말하지 않는 모든 것이 거짓말이 돼버려요. 못 들었으면 다시 할게요. 예수님께서 거짓말하셨다면 이게 지금 토마토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게 그냥 수박이래.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토마토란 사람은 거짓말쟁이래요. 십계명에 위반되는 거예요.
말씀은 말씀 주신 그분으로 회귀하게 돼 있어요. 돌아오게 돼 있어요. 그런데 말씀은 그냥 돌아오는 게 아니고 진리도 모르면서 진리를 아는 체 인간들은 다 거기에 걸려들게 돼 있어요. 그래서 일종에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끈끈이 같은 겁니다. 옛날에 촌 식당에 가면 파리 많으니까 천정에 끈끈이 걸어놨잖아요. 끈끈이에 파리가 들러붙는 거예요. 그 붙은 파리가 이렇게 해요. 살려달라고 막 빕니다. 그러면 주인이 그 파리를 살려줍니까? 안 살려주지요.
그걸 구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진멸이라 해요. 이방종족은 어린애든 고아든 남자든 종이든 여자든 다 죽여 버려요. 진멸하는 거예요. 이게 율법에 저주의 기능이 있어요. 어제 낮에도 그런 이야기했는데 시편 1편에 보면 시편으로 인하여 악인과 의인이 제대로 구분돼요. 인간이 악인과 의인을 구분하는 건 안 됩니다. 인간은 자기 사기 친 사람을 악인으로 보고 자기 잘해주면 의인이라 보거든요.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인간을 잘해주는 건 누굽니까? 마귀지요. 마귀를 의인이라 보고 자기 죄를 지적하는 성령이나 주님은 귀신들렸다고 했잖아요. 유대인들이 그렇게 했잖아요. 그러니까 율법을 통해서 악인은 악인대로 필히 등장을 해야 돼요. 좋은 게 좋다 이런 건 없어요. 율법이 은혜가 된다는 것은 그건 의인 되는 쪽에서만 하는 이야기에요. 악인들은 아주 분통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구원합니다. 그런데 사랑에는 이유가 없어요. 사랑 받을 조건보고 하면 이미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이란 것은 잘 들으세요. 내 것을 주는 걸 사랑이라 해요. 상대방을 보고 달라고 하는 게 사랑이 아니고 그냥 내 것이니까 가장 사랑하는 게 내 것이잖아요. 내 것을 그냥 줘버리는 게 사랑이에요. 누가 먼저 드려서 갚음이 되는 그런 건 없어요. 그 사랑 안에 소망도 들어있고 믿음도 들어있기 때문에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뭐다? 사랑이다.
사랑을 전체 이름으로 잡고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그 안에 사랑이 파생이 되게 되면 거기서 믿음도 소망도 나오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 이야기를 한 이유는 사랑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사랑 쪽으로 다시 환원되지 않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사랑은 뭐냐 하면 내 것 드리지 않았다는 고백으로 나온 거예요. 제가 뭘 해서 뭘 실천해서 받았습니다, 라는 말을 가장 싫어하는 게 사랑이에요. 사랑이 죽으니까. 사랑이 모독 받으니까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폭격할 때 폭탄이 터지면 그 동네 싹쓸이하는 진공폭탄을 사용했거든요. 사랑만 줬는데 사랑에서 믿음, 소망 다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은사라 하는데. 여기 믿음과 소망은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 말은 우리에게서 나온다, 안 나온다? 일체 그 믿음과 소망은 안 나옵니다.
그런데 인간은 육이니까 노염을 경험해야 되지요. 그럼 인간이 화를 낸다, 분노한다, 그걸 주님의 사랑을 노염으로 이해했다. “하나님, 왜 이렇게 제게 화를 내십니까?” 이걸 분노로 이해한다는 것, 이것은 하나에 주님이 이 땅에 오셨던 과정 중에 하나고 오늘날 우리가 아까 했던 육에서 영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그 과정 속에서 육으로 시작해서 영으로 나오는 그 과정 중에 노염을 경험해서 그 다음에 은총은 평생이다.
그럼 은총은 어느 뒤편에 숨어 있느냐 하면 노염 뒤쪽에 숨어 있는 거예요. 노염을 거치지 아니 한 은총은 이게 또 가짜입니다. 감사라 하는 것은 먼저 분노 뒤에 감사가 이어져야 되지 그냥 감사하는 것은 생색내기에요. 그거는 꼼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편 119편 69절부터 71절까지 보겠습니다. “교만한 자가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를 지키리이다 저희 마음은 살쪄 지방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다. 왜? 고난이 없었으면 뭘 못 배우기 때문에? 율례를 내가 배울 수가 없어요. 그래서 고통이 없는 교훈은 소용이 없다. 어떤 훈계는 고통을 면제하는 게 아니고 고통을 유발해요. 고통 속에서 전에 들었던 그 훈계가 그 교훈이 정말 값지구나. 이게 말 한 마디에 반드시 여기에 뭐가 따라야 되느냐 하면 고통이 따라야 돼요. 불편함이 따라야 돼요.
그리고 화남, 분노, 내게 숨어 있는 잠재돼 있던 육적인 욕구와 욕심 그런 것이 다 들고 나와야 돼요. 그런데 이런 것이 내 속에 있는 더러운 것이 어디에 들어 있느냐 하면 바로 말씀에 들어 있거든요. 사람들은 말씀을 경유 안 하고 자력으로 자기 아픈 것을 자기가 처리하려고 하면 여기에 선악체제가 가미되기 때문에, 선악체제가 가미되는 것은 주의 방식이 아닙니다.
말씀이 가미되어서 말씀이 알아서 모든 치료가 되도록 해야지 지가 의사도 아닌 게 자기가 자기 안에서 마취해서 마취된 상태에서 배 째고 수술하고 내시경 다하고, 그거는 마취된 게 아니죠. 한 눈 뜨고 하는 거죠. 잠언서 6장 16절, 구체적으로 우리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우리가 말씀에 의해서 해부 한 번 받아봅시다. 간짜장 먹기 전에, 간짜장 먹고 해부하면 간짜장 들어 있지요.
잠언 6장 16절,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이 말씀을 성도들이 보면서 이런 말씀에 대해서 후딱 넘어가는 경향이 있어요. 나는 내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이런 더러운 짓거리는 안 한다고. 그거는 성령을 너무 오해하신 거예요. 이게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대로 그대로 돼야 돼요. 우리가 미리 매 안 맞으려고 잘못됐습니다. 뭐가 잘못됐는지도 모르고 그냥 잘못됐습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자꾸 그런 식으로 비겁하게 자기가 자기를 처리하지 마시고요.
육칠 가지인데 보겠습니다. “곧 교만한 눈과” 손가락으로 꼽아도 괜찮아요. 여기 교만한 것 해당 안 되는 사람 손가락 접기? 이게 접을 수가 없어요. 아무리 재산이 많고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어떤 주께서 만든 상황 속에서는 교만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10% 이긴다고? 0.7%. 교만은 항상 어디서나 딱 도사리고 있다가 틈만 나면 튀어나오게 돼 있어요. 왜 20%가 0.7% 됐는가? 그거는 부정선거가 아니면 이럴 수 없다고…
그러니까 자기 교만을 정당화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렇게 함으로써 교만 아니라는 인간들 전부 다 교만덩어리라고 들춰내는 하나님이 멋진 작업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교만한 것, 교만을 누가 싫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싫다는 거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은 뭐냐? 작은 것 하나 감사하면 돼요. 헌금하고 전도하는 그럴 필요 없이 조그만 일에 감사하면 그게 영광인데요, 그게 어렵습니까? 어렵지요.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이 그냥 로또복권 안 사면 감사할 수 있는데 로또복권을 산 이상은 토요일까지 기다리면서 감사할지 안 그럴지 그때를 기다리기 때문에 그 자체가 그 기간이 교만한 기간이에요. 인간의 모든 행동을 교만을 유발한다, 잠자고 있는 내 속성을 교만을 건드렸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그 다음에 뭐냐 하면,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이걸 전부 다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어요. 일곱 가지죠. 그걸 한 마디로 요약하겠습니다. “나는 의롭다”입니다. 이게 로마서에선 딱 한 마디로 이야기했어요. 로마서 10장. 나는 의롭다. 나는 누구한테 흠이나 책잡힐 사람이 아니다. 나 의로운 것을 유지하고 싶다.
그런데 남이 나의 의로움에 방해된다면 일곱 가지 다 튀어나옵니다. “니가 뭔데 내 인생에 끼어들어? 니가 뭔데 내 인생에 태클을 놓느냐? 태클을 걸지 마, 내 인생에.” 이렇게 되지요. 여기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꼭 살인 같은 것 할 필요 없어요. 그냥 미워하는 자체가 나의 잠자는 또 나의 죄성을 깨우는 건데. 그 다음에 나오는 노래가, “ 가 거기서 왜 나와?”교회 다닌다고 하더니 나이트클럽에서 왜 나와, 이런 거죠. 노래가사가 그래요.
“나는 의롭다.” 그 다음에 “제발 날 건드리지 마라.” 이거는 심지어 한 살 아이부터 시작돼요. 여러분 손자, 손녀 키워봤지요. 진짜 걔는 이것 덩어리에요. 날 건드리지 마라 덩어리입니다. 조금만 눈만 봐도 울어버리고, 제발 날 건드리지 마라. 또 교만하기는 얼마나 교만하다고요. 엄마 시장가면 할머니가 본다고 비행기를 태워주면 좋다고 하거든요. 그러면 할머니 다리 힘 빠져 내리면, 또.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우리 비행기, 하면 또. 자기밖에 몰라.
자신의 의로움, 이게 아담한테 물러 받은 죄의 핵심입니다. 나는 의롭다. 그 의롭다에 철저를 기하기 위해서 교회 와서 하나님까지 밀어주잖아요. 이건 뭐 때려죽일 수도 없고 이런 건방짐을 본인이 못 다스려요. 그런데 성령께서 어떻게 다스리는가? 나보다 더 못된 친구 만나서 이러한 죄악의 결과물들을 우리로 하여금 쏟아내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게 분노고, 그리고 그 분노에 대해서 나는 의롭기 때문에 선악체제에서 뭘 받아요? 복을 받아야 되는데 못된 친구 만나서 돈 몇 천만 원 떼이고 하면 그 다음부터는 주여 이것이 주의 노염입니까, 이러고 있다고. 그러니까 이런 상황은 시편 30편 5절 말씀대로 그대로 돼야 돼요. 나는 빼주세요, 그런 것 없어요. 그냥 이 말씀대로 돼야 돼요.
사람이 참는다고 노염이 없는 게 아니고 그냥 참는 거지 억눌린 거예요. 그러니까 범사에 감사하란 말은 꾹 참으란 말이 아니고 고맙습니다, 라는 말로 이게 터져 나와야 되지 지금도 내가 참고 있습니다. 참아야 하느니라. 그거는 감사가 아니지요. 연기하고 지금 연출하고 있는 거예요.
부부 싸움하는 원인이 이거에요. 평소에 조용하게 살다가 갑자기 아침에 성질나있단 말이죠. 부인이. 왜 성질났느냐? 아침에 운동하고 왔는데 집안에 냄새 나서 이것 돼지고기 굽는 냄샌가? 그 한 마디 했는데, 소고기다, 이런다고. 돼지고기든 소고기든 소고기구나, 이러면 되는데 “내가 아침에 힘들어서 반찬 했는데 어디서 이게 평가질이고? 주는 대로 먹지 내가 신경 써서 했는데 내가 반찬 신경 써서 한 것 당신 알아줬어?”
이 말은 이걸 번역하면 뭐냐? 나는 의롭기 때문에 나한테 뭐하지 마라? 책잡지 말라 이 말이에요. 건드리면 터지게 돼 있어요. <봉선화 연정> 손대면 톡 터지게 돼 있어요. 좀 편 하려고 결혼했는데 이거는 지뢰하고 폭탄하고 살아요. 언제까지 조마조마하면서 벌벌 떨면서. 이게 바로 우리 안에 잠복돼 있는 거예요.
이거는 그 사람 잘못이 아니고 잘 터졌다, 잘 나왔다, 잘 터지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러면 되는 거예요. 그것도 고맙다고 할 때 비꼬아서 하지 말고요. 정말 다 같이 둘 다 아담에 속한 사람 아닙니까. 남편이나 아내나 둘 다 아담에 속한다고요. 그러니까 상대방이 그렇게 보인다는 것은 나도 누구로부터 그렇게 보이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서로가 거울처럼 마주보고 사는 거잖아요. 결혼은 그것 때문에 하게 하는 거예요. 집안에 거울 하나 들여놓으라고.
마태복음 15장 보겠습니다. 1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여기 사람의 손 안 씻었다고 더럽게 한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손을 더럽게 하던 깨끗케 하던 진짜 너의 모습은 아무런 변동사항이 없다 이 말입니다. 겉에 씻어봐야 겉이 멀쩡해봐야 그 안에는 더러운 것이 가득 찼다는 말이거든요. 자, 예수님의 이 말씀을 한 마디로 이야기해야 되겠지요.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공격성향을 나타낸다.] 하나님에 대한 공격성향을 어떻게 나타내느냐 하면 놀랍게도 율법대로 살면서 하나님을 공격해요. 이 얼마나 못됐어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마음속에 율법대로 정성을 다하여 살면서 하나님을 공격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사도행전 9장에 나중에 사도가 된 바울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나를 뭐한다 했습니까? 핍박한다고 했어요. 그 당시 사울은 여호와 하나님께 정성과 충성을 다하기 위해서 이단척결 차원에서 체포하러 간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공격성향을 갖고 있어요. 타고났어요. 그 원인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스스로 의롭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의롭기 때문에 내가 추구하는 것은 부자청년 같이 내가 의로운데 어릴 때부터 십계명 다 지켰는데 내가 필요한 것은 영생을 얻을 만큼의 의를 추가하려면 어떤 법을 지키면 추가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부자청년은 뭘 모르느냐 하면 내 쪽에서 어디를 가려 했습니까? 영생, 천국에 들어가려 했던 거예요. 그런데 아까 했어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것을 준 거예요. 내 것을 받는 게 아니고 내 것은 기대하지도 않아요. 더러운 아담의 죄인들인데 뭘 받아요. 그냥 주님 것을 주고 마지막 때에 주님 것을 그대로 회수하면 따라오는 게 구원입니다. 영생이고. 그걸 우리로 지식으로 알게 하시는 게 아니고 실습을 시키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이 부산 땅에서, 여러분 삶을 통해서.
제가 보니까 여러분 전부 다 사십 이상 같아요. 사십 년 동안 살면서 계속 돌아가면서 계속 실습시키는 거예요. 노염은 잠간이고 은총은 평생이다, 영원토록 한다. 은총은 노염을 경유하지 않으면 나오질 않습니다. 미리 성질 급해서 감사한다고 그 감사 안 받아줍니다. 반드시 고난이 없이는, 아까 시편 119편 다시 보겠습니다. 71절처럼,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내가 죄인인 것을 율법 앞에서 비로소 발견하는 그 기쁨이 감사가 있게 된다 이 말이죠.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니까. 맞지요.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에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 율법이 집약된 거잖아요. 그 사랑은 주님이 다 이루셔서 다 이뤄진 그것을 우리 몫으로 우리에게 집어넣는 거예요.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체 그냥 받아버린 겁니다.
첫째 아담의 후손이듯이 우리는 이젠 첫째 아담은 죽음으로 빠이빠이 했고 둘째 아담의 후손이 돼버린 거예요. 첫째 아담은 우리에게 죄라는 것을 전달했지만 둘째 아담은 우리에게 의를 전달했어요. 그렇다면 시편 30편에 봅시다. 그 다음에 11절,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우리는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한다 할 때 춤출 생각하지 마시고 슬픔에 일단 들어가야 돼요. 그래서 슬픔에, 성령께서 말씀대로 하거든요. 그것은 우리가 주님과 무관한 것 아니고 함께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첫 번째 강의했을 때 그림을 다시 그리겠습니다. 여호와 계시고 여기 나가 있었지요. 하나님 계시고 하나님 아들 예수님 계신 그것이 먼저 원형이고요.
구약에서는 여호와 있고 다윗 있는 것, 신약은 주님 계시고 여기에 우리 성도가 있는 겁니다. 여호와 계시고 다윗 있을 때 다윗은 무엇을 예언하느냐 하면 비록 내가 무덤에 가 있을지라도 함께 있다면 여호와께서 죽은 나를 음부에서 건져 올린다는 그 이야기를 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두 자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죽은 상태에서 말씀을 나한테 적용시키게 되면 말씀이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 아직도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나 살기 위해서 살아 있는 게 아니고 말씀이 시편 30편이 살기 위해서 우리는 아직도 이 부산바닥에서 살아야 돼요. 자살하고 하지 마세요. 그냥 살아야 돼. 말씀 때문에.
뭘 경험하라고? 노염을 잠간이고 그냥 주잖아요, 사랑, 은총은 영원히 간다. 누구 좋으라고, 나 좋으라고? 아니에요. 말씀이 스스로 말씀 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11절에 슬픔이 변하여 뭐가 됩니까? 춤이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살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춤부터 먼저 하지 말고, 라틴댄스 그런 것 배우러 가지 마시고 슬픔부터 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누가 필요하냐 하면 세상 사람들이 필요해요. 불신자들이 필요합니다. 환란이 필요해요. 불신자들이 꼭 필요해요. 러시아가 필요하고 우크라이나가 필요하고요 세상 사람들이 다 필요한데 세상 사람들이 왜 우리에게 슬픔을 주느냐 하면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취직을 했는데 신입사원 들어왔다고 그 조직사회에서 오늘은 회식이다, 라고 하면서 신입사원을 사장 옆에 앉히고 나머지는 중소기업 같으면 숫자가 얼마 안 되니까 쭉 앉아서 신입사원 내가 뽑았다. 얼마나 멋있나. 내가 친히 너에게 오늘 술을 주겠다, 라는 것이 신입사원이 성도라면 그게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신입사원이 속으로 뭐하느냐 하면, “이 사장아. 네가 나와 대화가 된다고 생각하느냐?” 속으로, 속으로. 진짜 하면 그날부로 잘리니까. 속으로 “너와 내가 지금 세계관이 같다고 생각해?” 얼마나 그게 슬픈지 몰라요.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어떤 큰 교회가 있는데 오다보니 반송교회라고 있는데 예를 들어 목사님이 반송교회 부목사로 갔다. 그 목사가 장로들 소개하고 뭔가 목회적 지시를 내릴 때 목사님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꼭 내가 이런 짓까지 하면서 밥 먹고 살아야 되나? 청년회 20명 맡겼는데 이번 달 10명 나왔는데 어떻게 된 거야? 다 채워. 안 되면 봉투에 돈 돌려서라도 채워. 장로들이 말이 많아. 당신이 청년회 맡아서 교인들 다 떠난다고. 그리고 지난 수요일 설교 그게 뭐야? 그따위로 설교할래? 신학교 땐 그리했지만 목회는 그게 아니야, 이런 식으로 하면 어때요? 그게 얼마나 슬프겠어요?
그럼 슬플 때 어떻게 해야 돼요? 어이, 더러워서 그만두자. 이게 아니고 누가 이 자리에 꽂아줬느냐, 하는 누구 그 부교역자 자리에 꽂아줬어요? 부교역자 하니까 그럴 나이는 아니다. 그럼 당회장 됐다 합시다. 당회장 됐는데 그 수석장로가 젊은 목사 불러서 이 교회가 사 대째 내려오는 역사가 백 년 된 교회니까 쓸데없이 딴 소리해서 토박이 교인들 상처주지 말고 옛날 선배들 개척교회에서 갑자기 천 명 모아놓은,
돌아가셨지만 그 선배 목사의 그 교훈 그대로 설교스타일 그대로 젊은 목사 까불지 말고 우리 원로목사들이 다 보조해줄 테니까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할 때 만약에 복음을 아는 목사 없지만 있다 치고 그게 얼마나 슬프겠어요. 내가 주의 복음의 이상과 비전을 갖고 왔는데 오자마자 권사님은 일흔다섯 이상 장로님은 팔십 대, 은퇴 안 해요. 자기 아버지 돈 냈는데 무슨 은퇴를 해. 무슨 은퇴가 있어요. 원로장로 은퇴 없어요. 뒷짐 지고 와서 문 열고, “장로님 오셨습니까.”
얼마나 슬프겠어요. 누가 거기에 꽂아줬겠습니까? 주님이 꽂아준 거예요. 복음적은 아니지만 실제로 교회마다 그런 일이 굉장히 많아요.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세운 영락교회, 내가 삼십 대에 영락교회에 임영수 목사란 분이 왔어요. 미국에서 공부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로 설교를 했다 이 말입니다.
장로들부터 못 알아듣지요. 적어도 우리는 공산당을 싫어요, 해서 내려온 이 교회를 빛내야 되는데 설교시간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했다고, 임영수 목사가. 그 사람이 복음 안다는 뜻은 아니고요. 그 역사와 전통, 한국의 대표교회라는 그 자부심, 심지어 예배당에 태극기 꽂아놓는 교회, 얼마나… 결국은 잘렸지요.
이게 스가랴에 나와요. 모든 지구상 영역에 마귀가 아니 계신 곳이 없어요. 누가 이렇게 했습니까? 노염을 위해서 슬픔을 위해서 주님께서 일부러 그걸 악마한테 허락한 거예요. 어느 구석에다 너 혼자 편안히 쉴 곳은 하나님께서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매사에 모든 일에 좋은 직장 없습니다. 좋은 목회지 없습니다. 최고의 아내 없습니다. 최고의 남편, 이건 말할 것도 없고.
영화제목에 이런 것 있어요. <분노유발자> 이 영화 몰라요? 그중에 하나 나도 포함되고.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분노하는 거죠.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죄입니다. 내가 슬퍼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절대로 누구나 다 슬퍼도 나 혼자는 슬퍼하지 않아야 된다는 그 고집, 내 사랑, 나에 대한 집착.
그래서 이 집착, 고집은 나의 목숨 바친다고 이것이 해결이 안 됩니다. 내 목숨 바쳐도 구원 못 받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내 목숨까지 내놓아야 될 상황까지 주께선 이끌어가지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시편 30편 9절, 다 같이 읽어봅시다.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나의 목숨, 나의 피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내가 음부에 내려갈 때에.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한 자로 하면 이거에요. ‘피’ 피로 모든 진리가 다 모이고요 이걸 풀이하게 되면 몸 아니고 피에요. 내 몸에서 주님의 피로. 주님의 피에 비교해서 내 피가 아무짝도 소용없는 그 순간이 올 때 내 피는 아니고 주님의 피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말씀을 치리하고 옮긴다는 이것은 뭐 앞에서 다 튕겨져 나가느냐 하면 네가 죽도록 충성을 안 해봤구나, 라는 그러한 핀잔을 들으면서 다 튕겨져 나가는 거예요.
네가 헌금을 해도 네 목숨 바쳐봤어? 네가 전도해도 네 목숨 바쳐봤어? 네가 충성해도 네 목숨 바쳐봤어? 그럼 제가 선교지에 가서 목숨 바쳐봤습니다. 그 목숨 바쳐 선교한 그것이 아무짝도 유익이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끝까지 가봤는데 끝까지 난 유익이 없었어요. 내 실천력은 내 행함과 순수하고 순결한 나의 의지, 착하지 그지없는 오직 수정 같이 맑은 나의 신앙도 그게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주께선 이 땅에 살면서 경험케 하는 겁니다.
그런 경험을 어디서 비롯되느냐 하면 타인과의 경쟁에서 비롯돼요. 예를 들어서 아까 반송교회 부목사로 갔는데, 그렇다 주께서 꽂아줬다. 그렇다면 목사는 내 말 못 들어도 교인들은 나의 복음적인 정성에 행여나 따를 교인들이 있지 않겠느냐 하고 열심히 해본다고요. 그런데 청년들이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고 성령이 임했는지 복음을 알아듣고 희한한 현상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 우린 뭘 느끼느냐 하면 어떤 작은 소박한 승리감을 얻게 되겠지요. 그런데 주께선 이 승리감마저 잘라내 버리는 일을 벌일 때 우리가 참고 참았던 노염이라든지 분노, 나는 하지 않으리라 던 그렇게 모든 일에 감사만 하리라고 작심에 작심을 했건만 기어이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분통 터트리게 만들어요. “주여, 이럴 순 없습니다. 이거는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슬퍼하고 통곡할 때 그것을 한 마디로 뭐라고 하느냐? 억울함. 사람이 아무리 인내심이 있어도 참다 참다 못하는 건 뭐냐? 억울한 경우에는 못 참습니다. 돌아버립니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덤터기 씌울 때 인간은 참을 수 없고 그야말로 악마적 본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어요. 어디 총 같은 것 없나. 다 쏘아죽이고 싶어요. 그게 아까 이야기한 주께서 싫어하는 바에요.
주께서 끝까지 건드려요. 아주 예민한 것까지. 내가 어디에 예민한지 나도 몰랐는데 찾아냅니다. 찾아내서 기어이 총 들고 사람 죽일 순 없지만 너무 받치면 내가 장렬하게 죽어줄게. 유서 하나 써놓고, 나는 억울하다, 이런 하나 써서 죽잖아요. 그럼 주위 사람들은 우울증 걸려서 죽었다고 그럴 거거든요. 자기는 너무 억울한데. 그게 자연세계 아닙니까, 인간세계.
이 억울함을 통해서 주께서 지적하는 것은 이겁니다. 너 이 세상을 상대하여 승부 걸었지? 누가누가 잘하나, 누가누가 이기나 그런 마음가짐 있으니까 억울함이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닥상태가 안 되는 거예요. 나는 죄인입니다. 이게 말로는 되는데 고통 없는 교훈은 소용없거든요.
말로는 죄인입니다, 창기입니다, 세리입니다 해도 막상 나갈 때는 나는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이런 식으로 나가기 때문에 결국은 그 태도가 계속해서 승부욕을 자극했고, 내가 찍은 후보가 당선될 때 기 살고, 떨어질 때 기 죽어 되는 거예요. 두고 보자, 5년 후를. 이런 식으로. 이게 전부 다 인간은 억울함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래서 남자들 보기에 남자들 오해가 그거에요. 속에는 억울함이 들어있는데 예뻐요, 여자가. 그걸 사람들은 성질 더러운 여자로 보지 않고 뭐로 보느냐 하면 예쁜 여자로 보아요. 매력적인 여성으로 봅니다. 속에는 이게 들어있는데. 남자도 마찬가지지요. 근육질에다 돌싱, 멋있는 남자, 성격 좋고. 세 가지 아닙니까. 성격 좋고 키 크고 돈 있고. 신앙이고 뭐고 다 치우고 성격 좋고 돈 있고 키 크고. 키는 자식들 봐야 되니까, 건강해야 되니까.
그런데 안에는 뭐가 들어있어요? 승부욕이 들어있고 억울함이 들어있고. 너 시집올 때 뭐 해왔노, 이런 식이고. 네가 나 같이 가치 있는 남자를 만나려면 너도 어느 정도 각오해야지. 결혼한 지 2년 만에 그런 소리 나오는 거예요. 연애할 때 승부욕에 자신감이 넘쳐요. 난 자신감 있는 남자가 좋아요 하니까 막 자신감이 넘치는 거예요. 내게 있는 유일한 단점은 하나밖에 없다. 내가 완벽하다는 것, 내가 어떤 하자가 없다는 것, 흠이 없다는 그게 유일한 단점이야, 이런 식으로 연애하고 하지요. 드라마 대사에 그런 게 나와요.
이 모든 것을 주님 쪽에서 한 마디로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너로 인하여 이 우주의 영향력이 없다는 거예요. 네가 잘하든 못하든 해가 바뀌고 해가 빛을 잃고 달의 자리가 바뀌고 달이 떨어지고 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해요. 그렇다면 그건 무조건 가짜에요.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와 예수님의 모든 행하심은 이 우주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시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지금 누구와 게임하고 누굴 상대로 따집니까? 주님 햇빛과 공기 덕분에 살면서 우리가 누굴 따져요? 우크라이나 전쟁하는 티비에 동영상 나오지요. 그 피난민들이 가족들 헤어지고 폴란드 넘어오고 비참하거든요. 그런데 동영상 보면 그런 가운데 하늘에서 눈이 내려와요. 아름다운 눈이 내려요. 주님께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에 아무런 협조를 않는다는 것.
인간세계에서 승부욕, 피해 입은 천하의 희생자, 구약성경에 나오잖아요.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 주께서 지금 안 도와줍니다. 왜 안 도와주느냐? 심령이 가난한 자만 도와줘요. 물질적인 그런 것은 안 도와줘요. 부자 되더라도 심령이 가난한 자. 그러니까 부자 되더라도 자기 것이 아니죠. 주님 것이죠. 문제는 그런 마음자세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돼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곧 무슨 마음이냐? 예수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 속에 들어오면 그게 심령이 가난한 자에요.
마태복음 11장 보겠습니다. 11장을 보기 전에 여기 시편 30편 11절을 보게 되면,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라고 돼 있지요. 마태복음 11장 16절에서 19절에 보게 되면,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이게 왜 그러냐 하면 그 뒤에,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세계에서 말하는 슬픔과 기쁨과 주님이 말하는 슬픔과 기쁨이 너무나 대립돼 있다는 거예요. 대조적이에요. 자꾸 오해하는 겁니다. 그 속에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어서 너는 똑같은 사람이 아님을 이 세상 속에 남은 인생을 살면서 온 몸으로 느끼게 하는 거예요. 똑같은 사람이 아님을. 그들이 생각하는 슬픔과 기쁨의 개념과 성도의 슬픔과 기쁨의 개념이 확연하게 다른 기준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로 깨닫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뭘 해서가 아니라 말씀대로 실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식구가 된 것을 감사하라고 주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 우리 마음대로 안 되는 세상이지만 우리 자신도 만만치 않은 존재인 것을 이 세상과 섞이면서 스스로 인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성령의 은혜, 사람이 아니면 바로 불가능한 구원인 것을 날마다 찬미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