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심판속의 구원

아빠와 함께 2022. 5. 18. 09:52

20220516a 부산강의 : [시편]48(32:1)-심판 속의 구원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32편,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1편에 나오는 복의 개념이 더 심화되었다, 깊어졌다고 볼 수 있지요. 시편 1편에서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여기에 말씀이 있고, 또는 율법이 있고. 말씀을 내가 지키게 되면 여기서 복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복을 받는 게 아니고.

복을 받는다는 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 점을 좀 유념해야 돼요. 사람이 복을 받는 게 아니고요 복이 생긴 거예요. 이걸 복된 환경입니다. 현대인들은 자기 소유가 곧 자아가 되지요. 자아를 이렇게 쪼개보면 그 안에 자기가 끌어 모은 것들이 다 들어있어요. 많이 끌어 모으면 자아가 단단해지고 적게 끌어 모으게 되면 자아가 허술하고 부실하지요. 부실한 자아, 현대인들은 이걸 견디지 못합니다. 반대말이 뭐냐 하면 풍부한 자아가 되는 거죠.

따라서 이런 자아로 교회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 그럼 이 자아는 달라지지 않은 채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부실한 자아에서 풍부한 자아로 바꿔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기도하게 되면 여기서 나오는 것은 어떤 환경이냐 하면, 나만을 위한 환경이 되겠지요. 또는 나 중심의 환경입니다. 이런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나 중심의 환경이란 것은 성경에 있을 수가 없어요.

성경은 복된 환경인데, 복된 환경이라는 것은 내가 내 중심의 환경이 작살나고 복이 피어나오는 공통된 상황, 그게 복된 환경이에요. 네 것 없고 내 것 없고 모두의 공통된 환경으로 누리게 되는 그 상황 속, 그것이 복된 환경이에요. 이걸 신약에서는 예수 안이라고 돼 있습니다. 창세전에 택한 백성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성경에는 우리가 아는 구원개념은 어디에도 없어요. 내가 구원받는 개념은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은 생산인데 뭘 생산하느냐? 예수 안이라는 복된 환경의 생산을 의미하는 겁니다. 창세전부터 이미 예수 안, 예수 안에서 자기 백성을 이미 창세전에 예정하사 정해놨습니다. 이거는 너 구원 받는다, 나 구원 받는다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새로운 환경 속에 같이 놓이게 돼 있느냐? 그 환경은 네가 있는 환경, 내가 있는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한 가운데 계시는 환경이 되는 겁니다.

이걸 성경에서는 천국이라 하는 겁니다. 내가 작살나는 환경, 그걸 천국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있으나마나한 환경, 그걸 천국이라고 하는 겁니다. 근데 인간은 범죄 함으로써 내가 제일 중요하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천국을 간다는 말은 내가 제일 중요한 이 거짓된 환경에서 나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생산된 환경의 변화, 전이, 또는 이동 그게 성경에서 말하는 환경 중심의 구원입니다. 나를 잊어버리고 예수님 가신 곳으로 가는 것.

그런데 이게 성경을 이 세상의 자본주의 입장에서 보면 나 자신 중심으로 보게 되면 나 잘되기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는 영원한 나라, 그걸 천국이라고 이야기하게 되겠지요. 그러니까 동일한 천국, 동일한 하나님 나라를 두고 서로 다른 정도가 아니고 대립되지요. 충돌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불신앙으로 보지 않고 뭔가 그럴싸한 살만 하고 풍부하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어떤 현상을 보이느냐 하면 자기만의 소기의 목적이 얼추 달성됐기 때문에 더 이상 성경이고, 더 이 이상 교회고, 하나님이고 관심 없습니다. 왜? 자기는 얼추 숨 쉴 만 하니까요. 이제부터 자기 계발과 자기 발전만 남아 있지, 나의 가치를 더 확산시키는 것만 관심을 두고 있지 내가 어떻게 이게 천국에 방해된다는 생각을 감히 하겠어요? 못하는 겁니다.

내 것 있고 추가적이고 새로운 것을 얻는 게 아니라 내 것이 진짜로 계신 것을 훼방한다 이 말입니다. 대립되니까요, 충돌되니까요. 말씀이 더 이상 말씀 듣는 게 필요치 않고 말씀 안에 사는 그게 소중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때는 이건 자기세계에 자기가 지금 만끽하는 중인지 아시기 바랍니다. 돈 되지 건강 되지 환경 되지 자식 잘 되지 가정 화목하지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멀어져가요.

무엇과 멀어져가겠어요? 천국과는 멀어져가면서 교회에서는 뭐라고 가짜 위로를 받느냐 하면 참 복되십니다, 라는 부러움과 위로를 받아요. 진자교회는 그냥 환경입니다. 하나의 조직체가 아니고 그냥 환경이에요. 예수 안에 있는 환경이 교회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환경을 누구의 소유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 환경의 특징은 예수님 중심으로 인하여 각자의 중심성은 전부 다 짓밟히게 되는 환경, 개인적으로 자기 의로움과 정당성은 용납이 되지 않는 그런 환경, 여러분 저를 바라보세요, 라고 입을 뗄 수도 없게 만드는 환경 그게 바로 교회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 대신 다른 분이 내 중심자리에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18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8장 19절에 보면,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의 응답받았다 할 때 아아 나라는 가치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데 그게 아니고 그 뒤에 보면, 거기에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새로운 환경의 주인이 개입돼야 돼요.

그게 뭐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내 이름. 내 이름으로 하는 것은 네 이름 아니란 뜻이에요. 이름이란 것은 뭔 뜻이냐 하면 지나온 나의 모든 가치가 소복이 담겨있는 걸 이름이라 합니다. 여러분, 이름은 무엇의 압축이냐 하면 이것의 압축이에요. ‘스토리’에요. 나의 스토리, 지난 나의 이야기. 조덕배의 <나의 옛날이야기>, 아이유도 커버한, 나의 옛날 지난 이야기.

나의 이야기가 누적돼버리면 그게 내 이름이 되어서 내 과거가 있는 한 내 이름을 더럽히는 자는 내가 정의가 이름으로 용납지 아니하겠다. 결혼이라 하는 것은 두 사람의 스토리가 결합되는 거죠. 연애할 때는 서로 좋게 지내다가 어느 날 결혼한 지 21년 6개월 15일 만에 상대 배우자가 내 과거스토리를 건드리는 순간, 친정이라든지 시가 건드리는 순간 파토 나는 거예요. “네가 뭔데 내 스토리를 건드리느냐?” 이 말은 네가 뭔데 내 이름을 건드리느냐, 에요.

이것 작살나지 아니하면 우리는 엉뚱한 환경 속에서 구원 받았다고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내 스토리가 고속철로처럼 있기 때문에 그다음부터 오늘, 내일 계속 해야 될 것은 뭐냐? 내 스토리를 건전하게 건전한 요소로 추가적인 건전함과 잘남과 우수함으로 계속 객차를 연결시키는 그 일만 우리는 이걸 소망이라고 이야기해요. 내 인생의 희망이라고 보는 겁니다. “네가 다 계획이 있구나.” 그 계획이 뭡니까? 내 스토리를 괜찮게 이어서 그 최종적 괜찮음은 야곱의 사다리처럼 하늘나라까지 잇게 만들면 그게 최고라는 겁니다.

지금 무엇이 안 죽었어요? 무엇이 부정당하지 않고 있습니까? 나의 스토리, 내 이름이에요. 나, 나의 이름. 우리가 아니고요 두세 사람 자체가 왜 두세 사람이냐? 교회가 두세 사람이냐? 여기서 내가 삭제되기 때문에 두세 사람이에요.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 받습니까, 주가 함께 계십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은, 내가 해버리면 똑같은 나도 똑같은 다른 사람이 내가 하는 이 짓을 똑같이 하고 있다는 것이 파악이 안 돼요.

교회라는 것은 같이 모임으로서 저 사람이 나의 스토리를 훼방하는 경쟁자인지 아닌지 아니면 나를 위하는 협조자 되는지 보이지 않는 레이저광선 이런 게 경쟁성이 있게 돼 있어요. 그 가운데, “우리 경쟁 자체가 의미 없다.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야.” 이게 뭐냐? 교회에요. 그러니까 인간의 능력으로 기도 열심히 해서 되는 게 아니고 환경 자체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버린다는 그 신기함, 이게 교회입니다.
 
이름의 근원은 뭐냐 하면 있음이에요. 있음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지시하기 위해서 이름이 있거든요. 그러면 주의 이름이 있다는 말은 뭔 뜻일까요? 주님이 내가 여기 있고 내 이름이 여기 있는 것과 똑같이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비록 눈에 보이진 않지만 내가 여기 있는 것처럼 똑같이 계신다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게 되면 어제 오후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예수님이 십자가 죽고 난 뒤에 무덤에 보초를 세웠잖아요. 그 보초가 무엇을 지키기 위함이었던가? 바리새인들이 군인을 보내서 예수님의 무덤을 지켰다 이 말이죠. 이미 죽어버린 분을 지켰어요. 그러니까 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지킨다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무덤을 지킨 게 아니고 자기세계가 붕괴될까봐 자기가 꾸리는 나만을 위한 환경이 이게 무산될까봐 자기를 지키는 자기 경비원을 예수님의 무덤 앞에 세워놓은 거예요. DMZ처럼.

그래서 제가 오후에 그런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이 부활해서 돌문 열고 나오려고하다가 거기에 경비원이 있으니까, “아이고, 지금 나가면 들키겠네. 도로 눕자.” 이런 주님이십니까? 인간의 환경을 개무시해버리죠. 경비원이 두 명이 세 명이 지키든 관계없어요. 똑같은 이야기가 열왕기 1장에 나오지요. 거기에 엘리야 나옵니다.

엘리야 체포하러 가는데 처음에 50명 군사 가지요. 다 죽었습니다. 50명 갔는데 51명 죽었지요. 중대장까지 합쳐서 51명. 그다음에 또 왕이 화나서 51명 보냈습니다. 다 죽었습니다. 세 번째 중대장의 태도를 보세요. 세 번째 엘리야를 체포하러 갑니다. 그런데 그 중대장이 발발 기면서 가요. 왜냐하면 건드리면 누가 죽는다? 내가 죽는다는 것을 자기가 알아요. 다시 말해서 중대장의 스토리, 중대장 입장에서는 나라는 존재보다 이 하나님 보시기에 누구 존재가 우선이다? 엘리야의 존재가 우선인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함유된 의미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어떤 스토리를 가지고 살았는지 관계없이 나의 스토리보다 예수님의 스토리가 우선이고 선행된다는 겁니다. 이게 신앙이잖아요. 이게 신앙 아닙니까. 나는 남들이 나 이야기 듣는 것보다도 지금 함께 계신 주님이 부활하셔서 살아 계셔 일하시는 그 주님이 나에게 지금 무슨 이야기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주님이 살아 계셨다는 말을 아까도 했지만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이 살아 있다는 말은 무엇이 살아 있다는 거냐? 주님의 스토리가 주의 이름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로마서 10장 15절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다른 말로 지금 누구든지 부활하셔서 활동하시는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주님과 공동의 환경 속에 놓여있는 거예요.

그걸 에베소서 1장에서는 예수 안이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예수 안에 들어와서 예수님의 지시와 명령을 따르고 있는 겁니다. 나의 자존심, 나의 명예 그것 찾지 마세요.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네가 내 안에 있는 아니면 내 밖에 있는지는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동원시켜서 그 사람에게 협박과 공갈을 시켜보는 테스트를 하는 거예요. 주의 말씀보다 세상의 말에 더 관심 있고 시선에 평가에 관심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 안에 있다고 보기에 곤란하다 이 말이죠.

“당신, 당신 부서에 있으면서 돈 200억 횡령했지? 특별검찰이 당신을 체포합니다. 언제까지 검찰청에 나오세요.” 그 사람 검찰청에 그때 안 나오고 관악산에 가서 자살하지요. 검찰청에 나올 시간에 관악산에 가서 자살하고 있는 거예요. 왜 그랬습니까? 누가 그 사람 집이 세 끼를 못 먹어서 자살합니까? 어디 딸이 의대 탈락해서 간 거예요, 뭐예요, 왜 죽었어요? 누가 죽으라고 떠밀었습니까? 박원순이 왜 자살했어요, 왜 그렇게 한 거예요? 상대방 여자가 죽으라고 해서 죽었어요?

왜 그런 자살해야 되느냐 이 말입니다. 그거는 자기 고유의 환경이 자기가 자기를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용서할 줄 몰라요. 왜냐하면 내 안에는 용서라는 게 없어요. 용서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용서는 어떻게 되느냐? 용서는 내 대신 누군가 나처럼 망가진 분이 있어야 용서라는 게 실효성이 있습니다. 그게 32장 1절이에요.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1절은 넘어가고 내가 말하는 것은 3절,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예수님과 인간의 차이점이 뭐냐고 단순하게 묻게 답한다면, 예수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우주의 변화와 관련성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백날 행동 해봤자 태양이 내일은 30분 늦게 뜨겠습니다. 이런 것 없거든요. 예수님은 창조주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들에 관여가 가능해요. 그것도 실효성 있게 실효적으로.

실효적이란 말은, 말이 어떻게 됐든 어떤 이론이든 관계없이 지금, 지금 실정, 지금 이 현실이 어떻게 되느냐가 실효성이라 하는 거예요. 일본에서 말하는 다케시마, 독도는 누구 땅이라 해요? 일본에서는 일본 땅이라 하지요. 그러나 한국에선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실효적 지배. 현재 독도의 실효적 지배는 한국정부다. 됐냐?

다케시마의 날이라 정하든 말든 간에 실효적 지배, 지금 우리에 대한 나는 내 인생, 내 스토리 따로 있고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그게 일본의 망언과 동일한 거예요. 그동안 살아오면서 햇볕 안 쬐고 공기 안 마셨습니까? 그동안 살아오면서 모든 심장 뛰는 것, 당뇨 없어지는 이런 모든 것 누가 관여했어요? 발걸음을 누가 셌어요, 머리카락 누가 했습니까? 지금 많이 빠졌습니다만 그것 누가 한 거예요? 누가 실효적으로 내 육신을 관리하셨습니까? 필라테스 원장님이 했습니까, 누가 했어요? 실효적으로? 그걸 우리는 까맣게 몰랐지요.

내가 날 관리했다고 했는데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지금껏 백합과 장미를 주께서 키웠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소급을 해보는 거예요. 소급을 해보면 우리의 출생이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출생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게 예레미야 1장에 나와요. 네가 엄마 태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너를 알았노라. 그때 예레미야가 저도 압니다, 라고 했겠어요? 몰라요.

무지 상태에요. 무지 상태이면서 그 무지 상태를 메워온 것은 인간들의 죄가 지배하는 환경이 나로 하여금 잘못 길로 이끌어간 거예요. 어떤 환경? 나만 잘 되면 그게 행복이고 복이라고, 내가 못 되면 저주라고 가르쳤던 이 환경이 나로 하여금 점점 더 진짜 천국과 멀어지게 만든 겁니다.

그중에 하나가 기존의 교회라는 게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왜? 교회는 손님 없으면 운영이 안 되니까, 돈 없으면 안 되니까. 돈 들고 온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복 달란 말이야, 이러고 온다고. 복 줄게. 그러니까 옛날에 조상 섬기고 칠성당 섬겨서 복 얻으려 한 그 민중들이 이제는 껍데기는 기독교인데 안에는 불교고 천지신명이고 똑같아. 달라진 게 하나도 없지요.

인간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구호처럼 제가 문장 하나를 쓰겠습니다. [내가 달라지면 모든 인간의 운명도 달라진다.] 이게 성경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달라졌어요? 하나님이 육신 됨으로 달라지면 모든 인간의 운명은 거기에 그 판을 따라서 다 재정립되고 뒤바뀌게 되는 거예요. 안 바뀌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복을 얻기 위해서 교회 오세요. 오면서 하나를 추가해야 돼요. 이런 내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습니까? 내가 복을 얻는데 기존에서 복을 더 달라고 하는 나, 그 나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습니까? 주님의 뜻은 내가 새로운 환경이 조성되면 그 환경 안에서 너는 달라질 것이다. 환경문제로 다가가지요. 그걸 예수 안에서 달라질 것이다.

기존 환경은 이렇습니다. 여자가 집에서 놀면서 살림 안 살면 이건 잘못된 것이다. 틀린 것이다. 결혼한 남자가 바깥에서 돈 안 벌어오면 그거는 틀린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부정할 인간은 없지요. 돈 있어야 사니까 부정할 인간은 없지요. 노는 여자가 살림 안 살면 집구석 엉망 되잖아요. 누구나 동의하지요. 바로 이 환경을 주께서 바꿔버립니다.

너무나 이거는 맞는 이야기고 너무나 옳은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것, 그래서 내가 바뀔 생각을 추호도 하질 못하는 식으로 우리는 평생에 자기 스토리, 자기 이야기를 꾸려오고 있었던 거예요. 나 맞는데 나 항상 옳은 것만 생각해. 여기서 시편 32편 1절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습니다. 32편 1절이 뭐냐 하면 이렇게 돼 있어요. “허물의” 그다음에 뭡니까? “사함을” ‘허물’이란 단어가 출현됩니다. 등장해요.

어디서 등장하느냐? 주의 이름에서 등장해요. 허물은 쉽게 말해서 죄거든요. 죄라는 것, 기존의 우리 인간 환경에서 틀렸다는 말은, 이런 것을 죄라고 보고, 남자가 돈 안 벌고 여자가 살림 안 살면 이건 틀렸고 죄고 그 여자, 그 남자의 허물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규정해왔다 이 말이죠. 그게 우리가 용납하는 환경이었어요.

그 환경 말고 진정한 복은 시편 1편에 보면 율법과 관련돼 있습니다. 율법. 율법에 의해서 보면 그동안 허물과 죄, 다시 말해서 잘 들으셔야 돼요.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 있는 육신으로 오는 식으로 달라졌다는 말은 여기서 뭐가 발생된다? 제대로 된 죄가 뭐냐, 의가 뭐냐? 그것이 예수님 홀로 달라짐으로 다른 모든 피조세계가 달라지게 돼 있어요. 그게 뭐냐? 예수님 행동 하나하나가 온 우주의 모든 활동을 관장한다 이 말이죠. 창조주니까, 모든 것이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니까.

인간이 생각하는 달라진다는 것은 죄를 비켜가요. 왜? 워낙 본인이 잘났으니까. 본인들이 어느 정도로 잘나게 살아왔느냐 하면 나쁜 짓이라는 것은 의도적으로 피하고 혹시 실수해서 나쁜 짓하게 되면 보다 많은 착한 일로 상쇄시켜서 더하기, 빼기해서 항상 착한 존재로 자기를 견지하고 유지해오면서 남들 앞에 나갔을 때에 기죽지 않는 것으로 버티면서 평생을 지금 조심스럽게 살아왔잖아요.

그래서 남은 것은 뭐냐? 나 잘남을 증명해주는 그것만 달랑 남아 있지요. 그런데 그동안은 이렇게 윤리적으로 잘 살다가 나중에 나이 한 서른 되어 친구 따로 교회 갔더니만 내가 빠뜨린 게 있네. 뭘 빠뜨렸어요?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는 것 빠뜨렸네요. 그것 뭐 추가되면 되지요. 현재도 잘났는데 거기다가 예수 믿는 하나님 믿는 것 추가해버리면 잘난 내가 더욱더 완벽을 기하게 된 거죠.

완벽한 나는 가만있지 않습니다. 다른 완벽한 경쟁자와 너 나와, 해서 시합 붙지요. 네가 흠집이 적은지 내가 흠집이 적은지 한 번 해봐? 으르렁, 으르렁. 항상 으르렁거리죠. 이거는 타인과의 관계만 아니고 심지어 부부지간에도 으르렁거리고. 그래서 으르렁 부부에요. 심지어 형제들, 자식들, 친척들 가운데서도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자기가 어느 정도 지금 위치에 있고 어느 정도 순위에 올라와있는지 늘 확인하는 그 재비로 하루 온종일 다 보내요. 뉴스 보면서 다 보내요.

“너거 아버지 고위공무원 안 돼도 봐라. 얼마나 착실하나. 저 고위공무원 걸린 인간들 봐라. 국회의원 되어 제명당한 것 봐. 너희 아버지 얼마나 훌륭하노. 그렇게 네 아버지 칭찬하는 나(엄마)는 얼마나 훌륭하나. 그러니까 아빠, 엄마가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그래서 우리는 훌륭한 가족이란 것을 잊지 말고 파이팅!”

이런 식으로 그게 하루일과가 눈에 들어와 보이는 것은 전부 다 내 안에서 편집되어서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자체적인 그게 다인 거예요. 창조주는 바뀌었는데 우리는 안 바뀝니다. 그래놓고 어디를 가요? 주의 나라에 누가 넣어주는데요? 주의 나라 가지 말고 네가 하는 네 나라나 그냥 폭주해. KTX 열차면 네가 기관사해서 나 이 조시로 간다 해서 그냥 달려가요.

이걸 죽음을 향한 폐달, 그냥 폐달 막 밟아. 갈 때까지 가보자~~ 하루하루가 어느 방향인 줄 모르고 갈 때까지 그냥 액셀러레이터 밟는 거예요. 가봤자 낭떠러지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저주의 세계지요. 천국이 아니고 반대 장소, 웰컴 지옥. 여기서부터 지옥입니다, 이런 팻말 보이면서 끝났지요.

누구 탓이야? 목사가 잘못 가르쳐서. 목사가 잘못 가르쳐서 그런 게 아니고 본인이 그걸 선호해서 그래요. 본인의 의지가 결정해서 그래요. 왜? 자기 본성은 바뀐다, 안 바뀐다? 안 바뀐단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바뀌심이 어떤 새로운 환경을 조성하고 이 환경이 우리의 내부로 들어옵니다.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이 화살표는 어디까지나 주님 쪽에서 하는데 모든 과정에 무엇이 관여하느냐? 바로 말씀이 관여해요. 말씀 안 들어도 되는 인생은 없습니다.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방향타, 방향조절을 해줘요. 그쪽 아니야, 그쪽 아니야. “우리 애가 또 1등 했어요.” “그쪽 아니야, 그쪽 아니야.” “뭔가 투자를 했더니만 열 배나 불었습니다.” “그쪽 아니야, 그쪽 아니야.” 그쪽 아니란 게 내용이 어디 나와요? 성경말씀에 다 나와요.

그럼 성경말씀은 누가 썼습니까? 누가 썼느냐가 아니라 성경말씀에 누가 계십니까? 물어야지요. 성경말씀을 누가 기록? 사도 바울이 기록했습니다. 되도 않은 그런 신학적인 것 하지 말고 그 안에 누가 사십니까? 성경말씀은 주께서 타고 다니는 나는 양탄자에요. 주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오는데 그 말씀이 집약돼 있어요.

이미 예수님은 완성됐으니까 말씀이 집약된 채 오시는 그 집약체가 시편 1편에 보면 말씀 지키는 자가 뭐였습니까? 복이 있지요. 그러니까 말씀의 집약체 안에 뭐가 돼요? 복이 있겠지요. 이 집약체 안에 바로 십자가입니다. 마가복음 9장 43~49절 누가 읽어보세요.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9절까지 제가 읽어보면,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그렇게 돼 있지요.

여러분들이 여기 들어야 될 것이 찍어버려라, 빼버려라 자기가 자기를 그냥 용납하지 않는 그 모습이 주께서 용서받은 자의 모습이에요. 나의 구원을 누가 방해한다? 내가 방해하는 거예요. 나의 스토리가 나의 구원을 방해해요. 내 스토리가 주님의 스토리를 방해했던 거예요. 찍어버리는 거예요. 이 못된 놈, 이런 식으로. “이 구더기한테 다 씹힐 인간아.” 누가 누구보고? “영혼은 지옥 불에서 씹힐 인간아.” 누가 누구에게 지금 욕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욕하되 화내고 하지 말고 즐겁게 하시기 바랍니다. 아주 가볍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필요치 않은 쓰레기에 대해서 애착 갖는다는 것은, 그것은 일종의 정신병이죠. 치매 걸린 할머니들 구청에서 가끔 들어가면 1톤짜리 쓰레기 다 나옵니다. 동네에 있는 스티로폼 다 끌어 모았지요. 그러나 할머니한테는 인간의 본성, 인간의 본성은 소유지요. 소유가 많아지면 자아가 풍부하다 하잖아요. 빈 스티로폼은 치매 할머니한테는 쓰레기가 아니고 상당히 소중한 걸로 보는 거예요. 그러나 멀쩡한 재벌들이나 공직자들에겐 스티로폼 안에 현찰 들어있으면 그건 소중한 거지요. 웬 스티로폼을? 전복 드시라고. 전복 열어보니까 오만 원짜리 둘둘 말아서 있단 말이죠.

힘. 도대체 이게 누굴 위한 힘이에요? 나를 어떻게 하려는 힘이냐 말이죠. 성경말씀에 마가복음 9장 43~49절 말씀은 지옥에서 우리를 천국으로 빼내기 위한 힘이 되는 거예요. 그 힘은 나를 키워주는 힘이 아니고 쓰레기통에서 나를 찢어버리고 빼내버리고 아주 박살을 내시는 그 압도적인 힘, 어찌 이것이 즐거운 소식이 아닐 수 있습니까. 즐거운 소식이죠.

우리는 남들이 내 손 하나 건드리는 것도, 그리고 내가 나를 건드리는 것도 불쾌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길 가다가 조금만 머리카락 건드려도 용서하지 않잖아요. 귀한 나의 머리카락을 왜 터치하느냐? 용서하지 않지요. 만약에 남자라면 성추행으로 걸려요. 그 정도로 우리는 아주 민감해요. 아주 예민하고 민감하고.

그러니까 이거는 꼭 정신병동에 안 가도 늘 우리는 예비 우울증 환자로 살고 있습니다. 쓰레기에 대한 집착, 자기라는 쓰레기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가 없어요. 내가 나를 버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나니까. 이게 모순이잖아요. 모순이라 하는 것은 원인도 없이 무조건 옳다고 우기는 그게 모순이잖아요. 나는 버려지면 안 돼. 왜? 나니까.

나는 왜 버려지면 안 되는데? 버려지면 안 되기 때문에 나야. 무슨 뜻인지 무슨 의미인지 몰라요. 그냥 뺑뺑이 도는 나 중심의 순환논리에 빠져버린 거예요. 이게 정신병 아니에요? 그래서 어떤 철학자가 이야기했지요.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라고. 현대 모든 인간은 정신병이에요. 정상적인 사람, 한 사람도 없다 이 말이에요.

안 바꿔서 그래요. 바뀔 생각이 없어서 그래요. 그럼 바뀔 생각도 없는데 바꾸란 말 자체가 이것도 모순되지 않느냐? 그래서 주님께서는 새로운 환경을 조성해버립니다. 새로운 환경을 조성하면 내가 바뀐다, 라는 이 문장이 어떻게 달라지느냐 하면 내 안에서 귀신 나갔다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동안 내 중심으로 살 수밖에 없던 것이 내 잘못이 아니고 악마의 힘, 악마가 스스로 제국을 유지하는 그 힘에 우리가 농락당한 거예요. 악마의 제국에 우리는 제국인 줄 모르고 농락당한 겁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일하기 전에 제일 먼저 어딜 가느냐? 광야에 가서 누굴 만나는가? 광야란 일종의 링이거든요. 아무도 없어요. 일대 일로 최종 매치를 벌이는 거예요. 마지막 결승, 너, 나와. 광야에 아무도 없는데 사람이란 없어요. 오직 누구만 있느냐? 예수님 홀로 있었던 겁니다. 이건 어떤 인간의 눈으로 봐도 2.0, 2.0 눈으로 봐도 그렇게 보이지요.

그런데 인간의 2.0 눈으로 보지 못한 사실이 등장합니다. 거기에 악마가 예수님 만나러 나온 거예요. 악마는 우리 인간을 안 만나줍니다. 어떻게 종이 주인을 함부로 만나요. 안 만나주는데 예수님은 악마가 자진해서 나옵니다. 왜? 예수님의 종이기 때문에, 피조물이기 때문에 만나러 나옵니다.

만나서 악마가 인간세계를 어떠한 이념으로 사상과 정신구조로 그동안 꼼짝 마라는 식으로 다스렸는지를 세 가지 양상으로 알려줬지요. 사람은 떡으로만 못 산다. 사람은 남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못 산다. 사람은 소유의 힘이 없으면, 권세, 자기 것이 없으면 못 산다. 결국 그 세 가지를 종합해보면 사람은 떡 없으면 못 산다. 남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면 자살하거든요. 못 산다. 소유된 힘이 없으면 못 산다.

악마가 이걸 인간세계를 이런 식으로 충분히 다스렸던 이유가 뭐냐 하면 살아야 사는 것이라는 여기에 모든 인간은 묶여버렸던 거예요. 인간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인간이 사는 이유는 그냥 사는 거예요. 어제 낮 설교에서 그걸 최고의 중독은 뭐냐? 그냥 사는 것, 사는 데는 아무런 이유가 필요치 않다. 이거는 수학의 공리 같은 것이라서 따지지 말자. 무조건 받아들이자. 너도 살고 싶잖아. 나도 살고 싶어. 그런데 우리는 살 이유도 없이 살아야 된다는 것, 그러한 공통 환경 속에 악마에 의해서 조성된 환경 속에 우리는 바깥에 뭐가 있는지 모르고 그냥 거기서 살은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그것 봐. 죽어도 살잖아.” 죽어도 살잖아, 이 정도가 아닙니다. 죽어야 산다. 그것도 아니에요. 이런 게 좀 어려운데 우리는 살고 싶은데 악마 때문에 못 산다. 이렇게 되면 질문을 그렇게 해버리면 뭐가 아직 탈락이 안 되고 있어요? 예수고 부처고 간에 살려주면 신으로 인정하겠다는 삶에 대한 애착은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것 남아 있는 이상은 그 예수, 그 하나님, 그 부처는 전부 다 마귀의 또 다른 가면이에요. 마귀가 가면 쓴 거예요.

내가 부처 믿어서 지옥 가는데 그럼 예수 믿으면 천국 갑니까? 이 말 자체가 잘못된 건데 왜냐하면 천국 간다는 그 뒤에 뭔가 생략돼 있지요. 천국 가서 살 수 있습니까? 산다는 이 문제에 대해서 자기가 떨쳐버릴 수가 없어요. 끝까지 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대한 해답은 요한복음 11장에 잘 나와 있어요. 내가 곧 산다. 내가 너를 살려주는 게 아니고 내가 부활이고 내가 생명이다. 내가 산다, 내가 생명이다. 네가 지금 시선을 너한테 보지 말고 나한테 보면 되잖아. 그거거든요.

그래서 요한복음 1장 3절에 보게 되면, 잠시 보고 가겠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돼 있지요. 그러니까 지어진 나의 생명을 보장하세요, 라는 것은 마귀 말이고, 주님이 계신다면 주님이 필요한 것은 주님이 알아서 만들어낼 그러한 권한은 주님에게만 있습니다, 라고 인정해버리면 그게 생명이다 이 말이죠. 왜? 예수님이 생명이고 부활이기 때문에.

그다음에 4절 보세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네가 죽은 것 생각하지 말고 생명의 빛,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오면 이미 너는 살았다. 죽어도 살았고 살아서 나를 인정하는 자 이미 죽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기 것을 자기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이 하신 것을 우리가 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9장에서 우리를 그릇이라고 해요. 뭔가 담는 용기, 그릇.

그래서 그릇이 되게 되면 집에서나 교회 오나 무엇의 이동수단이에요? 예수님의 빛의 이동수단이에요. 새로운 환경, 주님이 주인이 되는 환경 이동 그러니까 교회는 환경입니다. 교회 자체가 환경이어야 돼요. 그 환경을 환경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복음의 말씀밖에 없어요. 복음은 뭐냐? 너희들은 고집스럽게 안 바뀌었지만 주님은 바뀌었다.

어떻게? 죄 없으신 분이 뭐 됐다? 죄인 됐다. 왜 우리는 그렇게 안 바뀝니까? 우리가 죄인 되면 되잖아요. 주님이 하신 것은 그대로 답습하면 되잖아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주님은 죄 없으면서 죄인 됐고 우리는 죄인이면서도 아닌 척하기 때문에 우린 본색을 드러낼 필요 있지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죗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주님의 아주 적절한 복된 조치지요. 우리가 끝이 난다는 게 우리 스토리가 끝이 있다는 게 세상에 희대의 기쁜 소식이에요.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 없습니다.

사람 죽일 때 교도소 가서 사형당하면 되지. 사형당해서 끝나면 이게 나도 사람 죽이고 사형 대신 내가 알아서 자살하면 되겠다 싶지만 이게 성경에는 그런 게 아니에요. 이게 안 죽어요. 지옥 가서 또 살아요. 이게 문제라니까요.

그러니까 아까 마가복음 9장 43절에,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은 결국은 두 영토로 그렇게 종결되거든요. 마지막 웃는 자가 뭐가 됩니까? 승자지요. 마지막이 되면 앞에 있는 것은 마지막 그것만 보고 나머지는 무효화시킵니다. 얼마나 출세하고 성공하고 그것 다 아무 관계없고 내가 어느 공간, 어느 환경 속에 놓여있는가? 그것은 주께서 나에게 이러한 조치로 인하여 제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10분 후에 다시 하겠습니다.

 

20220516b 부산강의 : [시편]48(32:1)-심판 속의 구원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귀신이 나온다는 이야기했지요. 나온다는 말은 그 전에 들어있었단 말이죠. 이 귀신은 위에 오야봉이 있어요. 대장이 있지요. 악마가 있는데 보이지 않는 귀신이 인간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말이죠. 여기서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인간은 귀신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는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고. 그러면서 그 귀신이 이렇게 이야기했고.

그러면 귀신과 인간은 분리되지, 분리 자체를 인간은 생각 못하고 있거든요. 자기는 자기만 있기 때문에 내 안에 귀신 들어있다는 생각을 아무도 못하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둘 사이를 분리시키는 작업을 해요. 나오라, 할 때 나오면서 귀신이 예수님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했어요. 이게 마가복음 1장 24절에 나오는데,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 말은 귀신이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이 귀신이 전에 인간에게 들어있었잖아요. 들어있으니까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과 태도가 예수님과 나와 아무 상관없습니다. 나는 나대로 살겠습니다, 하는 그런 태도로 일관해서 살아온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분리되게 하셨다. 분리되고 보니까 예수 당신은 나와 상관없습니다, 라고 주장하는 그 귀신과 나머지 인간만 덜렁 남아 있지요.

그러니까 그동안 귀신이 이런 사고방식을 다 독차지하고 있었으니까 여기 빠져있는 인간은 뭐가 되느냐 하면, 이걸 죄 사함이 돼버린 거예요. 죄 사함의 특징이 뭐냐? 껍데기만 남아 있는 것. 죄 사함 받고 착한 일하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죄 사함의 요소가 배설물로 나오는 그러한 환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 세상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 세상 대장은 악마고 그 졸개들은 귀신입니다. 그래서 귀신 보고 나가라 할 수가 없어요. 데가볼리에 있는 청년에게서 귀신이 나가니까 귀신이 우주 밖으로 나갔습니까, 어디로 나갔습니까? 그 많던 귀신 어디 갔어요, 우주 밖에 나갔어요? 들어갈 곳을 달라고 했어요, 아예. 자리 이동한 것뿐이에요. 같은 한 카페인데 이쪽 테이블에서 저쪽 테이블로 갔을 뿐이에요.

하늘에서 쫓겨난 귀신은 땅에 와서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요. 그래서 귀신과 같이 동거하는 삶이 돼버린 거예요. 인간과 귀신이 같이 사는 거예요. 귀신이 있다는 것은 인간세계에서 하나의 운명 같은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영적인 존재에요. 영물이에요. 수상한 존재지요. 소제되고 난 뒤에, 이건 누가복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귀신 나가고 난 뒤에 갈 데 없으니까 어디로 갔느냐? 친구 일곱 데리고 깨끗하게 소제된 곳에 들어와 버리죠. 죄 사함 받았으니까 이제부터 착한 일만 남아 있고 죄 짓는 일은 없다. 그거는 우리가 죽기 전에는 그리고 이 세상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죄가 계속해서 변형돼요. 그러면 죄 사함 할 때 이 죄의 안목은 결국 아까 봤지만 귀신의 생각과 일치되지요.

그러면 귀신의 오야봉 악마가 세상에 내려오게 된 이유가, 누구와 한 판 붙었느냐 하면 예수님의 주 되심과 한 판 붙었어요. 귀신은 누구 말 듣느냐 하면 하나님 말 들어요.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고 주의 원수가 귀신입니다. 악마에요.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주의 자리로 옮기려 했고 거기에 대해서 반대한 천사가 악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한테 관심 있어요, 없어요? 우리한테 관심 1도 없어요. 악마의 관심은 우리가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주님에게 관심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베드로가 이미 예수님의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악마는 귀신은 베드로를 공격하게 돼 있는 거예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그 존재 자체 때문에 악마는 뱀은 누굴 유혹하고자 합니까?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고자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바보등신이라니까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요. 똑똑한 것은 악마입니다. 누가 뱀처럼 지혜롭습니까? 아무도 악마보다 지혜로울 수 없어요. 하나님은 이 악마의 활동을 충분히 이용해요. 이용하는 이유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예수님을 심판주로 등극하기 위해서 구원하시는 거예요.

모든 이야기가 우리 아니고 우리 배제하고 예수님이 주로 해서 주가 어떻게 이 땅에 왔고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지 모든 진리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에요. 우리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가 어떤 혜택 받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예수님이 어떻게 주로서 등극하느냐, 주님이 되시는가, 심판주가 되시느냐? 그 이야기뿐이에요.

이스라엘이 광야에 나올 때 거기에 누가 계십니까? 주의 이름이 계시지요. 그럼 이스라엘에게 일어나는 아말렉과의 전쟁, 만나 내림 이 모든 것은 누구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함이에요?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살릴 것 같으면 40년 다 죽일 리가 없잖아요. 누가 계심을? 주의 이름이 너희와 함께 동행, 주의 이름을 증명하기 위해 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가 할 일은 뭐냐? 자기가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을 증거하는 것, 성령이 온 이유가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서 성령이 온다니까. 우리 행복하기 위해 오는 게 아니고요. 우린 자꾸 내 생각만 하고 있는데 그거는 자기 부인이 안 돼서 그래요. 그래서 오늘 시편 32편을 봅시다. 5절에 보면,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솔직하게 자복하지요.

그리고 11절 봅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이게 뭔 뜻이냐 하면 본인이 본인을 판단하는 게 아니고 본인 앞에 어떤 인물이 등장했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손님이 오신 거예요. 인간이 자기가 정직할 필요 없지요. 자기는 의로운데 뭘 정직해요. 나 혼자 있으면 난 항상 정당한데 무슨 정직이란 말 새로 합니까.

누가 나와 차이 나는 어떤 분이 왔을 때 그 차이 남에 의해서 내가 결코 순수하지 않는 나는 허물이 크다는 것을 발각되게 하는 어떤 분이 우리 앞에 왔을 때 그리고 그분의 삶과 우리의 삶이 차이 나도 너무 차이 날 때 우리는 자복이란 말을 하는 거예요. 일종의 회개지요. “그동안 나 위주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남들 다 그렇게 사니까 나도 그렇게 살아도 얼추 살아도 대충 용서받고 천당 가는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 놓고 만날 목사 욕하고 장로 욕하고 집사 욕하고 본인 보곤 욕 안 하고. 왜 기준이 한 결 같지 않아요? 누구 욕하지만 사실은 누굴 욕한다는 말은 자기에게 욕하기 싫어서 그걸 우회로 방향을 돌리는 거지요. 비겁한 짓이죠. 진짜 욕먹을 사람은, 뽑아낼 것은 내 눈이고 찍어낼 것은 내 팔이고 내 손이에요. 내가 주님이 주시는 구원을 방해하니까.

내 구원을 방해하는 게 주님의 생명 되심과 특히 주님의 죄 사함의 업무를 누가 방해해요? 나의 정당함이 훼방질하고 있는 거예요. 나 착한데 죄 용서할 것 없는데 자꾸 십자가를 거론하십니까? 이제는 부활의 새 생명만 있으면 되는데 왜 자꾸 십자가를 거기서 도돌이표 합니까,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은 챙길 건 다 챙겼으니까 이제는 같이 즐깁시다, 이것만 주장하는 거예요.

솔직함이라는데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신앙은 돈도 안 되는데 그냥 버리면 안 돼요?” 이렇게 물었다 칩시다. 신앙생활해도 하늘에서 돈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버리면 안 됩니까, 할 때 “버리세요.” 이게 정답이거든요. 그게 솔직함이에요. “그거 왜 힘들게 부질없는 신앙이란 짓을 왜 했어요? 버리세요.”

내가 버릴 수 있는 신앙이라면 처음부터 그거는 신앙이 아니었더라. 처음부터 신앙이 아니었지요. 선물을 받아본 적도 없어서 이게 약이 올라서 본인이 신앙을 조작해낸 겁니다. 믿씁니다, 믿씁니다, 쌍시옷 해가면서 조작해내는 거예요. 그걸 교회에서 유도해냈고요. 간증집회해서 당신도 믿으면 병 낫습니다, 암 낫습니다. 그렇게 유도했고 저런 실제 유익을 내가 믿기만 하면 된다고 본인이 본인을 믿는 게 이미 확정 났잖아요.

본인이 본인을 믿는데 어떻게 본인을 안 믿을 수 있는 신앙이 나올 수 있습니까, 어떻게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신앙이 나올 수 있어요? 이거는 거짓말이죠. 전부 다 거짓말이에요. 안 되는데 종교적으로 폼을 내면 이게 된다고 위장을 시켜주는 거예요. 거짓을. 왜? 그렇게 안 하면 손님이 안 오니까. 교인이 없으면 교회 운영이 안 되니까요. 목사 지 월급도 안 나오니까. 나한테 이익 없는 짓을 내가 왜 합니까? 미쳤어요.

그러니까 신앙이 들이닥쳤다는 말은 주님이 찾아왔다는 말은, 너는 그동안 네 이익만 계산하고 그걸 이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서, 실제이익, 실익만 계산해서 살아왔다는 것을 그걸 고발하신 분이 앞에 왔을 때 우린 어떻게 하면 됩니까? 앞으로 안 하겠습니다, 하지 말고 자복하면 된다니까요. “내가 가진 역량은 오직 나만 위해 살아온 것 외에는 내가 할 줄 아는 재주가 없습니다.” 이러면 되잖아요. 앞으로 잘하겠다는 그런 거짓말하지 말고 그러면 되잖아요.

주님이 누구시라 했습니까? 세 자로는 ‘심판주’죠. 심판주의 할 일은 뭡니까? 심판이죠. 하시라 하면 되잖아요. 그게 어려워요? 본인의 하실 일을 저 보고 하시면 되잖아요. 우린 피조물이니까. 심판하고 싶으면 마음껏 하시는 것이 주의 주 되심이고 그게 주께 영광이 돼요. 주께 영광이 되는 방법, 참 쉽지용.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그럼 옆에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 지금 누구하고 이야기하나?” “나한테 왔어, 왔어. 그분 왔어.” 이게 신앙이잖아요. 신앙 없는 것은 나 혼자 내가 알아서 나를 조작하지만, 신앙 있는 사람은 나 말고 다른 분이 나한테 말을 거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분이 어떤 분이다? 심판주가 되는 거예요.

이 논리를 보세요. 이 논리가 맞는 논리거든요. 심판주가 계시잖아요. 심판주가 심판주 값을 하려면 여기 누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심판의 대상이 있어야 되겠지요, 맞지요? 심판하시는 분은 의로워야 심판할 수 있잖아요. 그러면 심판 대상은 전적으로 뭐해야 돼요? 죄인이라 하지 말고 말을 바꾸면 돼요. 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의가 없어야 돼요. 하나도 없어야 돼요. 있는 의도 가짜로 드러내게 하는 역할이 뭐냐?

바로 로마서 3장에 무슨 기능이냐? 율법의 기능입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의 입을 틀어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하심이라. 율법이 주어지는 것은 어떤 누구도 의인은 1퍼센트도 의를 가진 자가 하나도 없어요. 율법이 찾아가서 전부 다 그걸 죄로 증명해버립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는 이혼 안 하고 아내와 같이 산다고 나는 간음 안 했다고 할 때 주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드론 띄워버립니다. 율법 싣고 드론 날아갑니다.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한 것이다.

그때 바리새인들이 기도나 구제, 그리고 금식할 때 왜 사람들이 폼을 냈는가? 그들의 구실이 이거였어요. 내가 백성의 지도자니까 내가 모범을 보이면 다른 사람이 나처럼 무지한 백성들도 나를 본받아서 무지에서 앎의 세계로 들어올 수 있는 좋은 목자, 인도자가 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그럴싸한 메시아 믿는 단체가 된다고 그렇게 가르친 거예요.

주님을 뭘 건드립니까? 우두머리를 건드려요. 마태복음 21장에 나오지요. 누가 지도자라 했어요? 바리새인들이 우리가 지도자. 아니야. 지도자는 오직 한 분밖에 없으니 그분이 그리스도고. 누가 너희들의 아비? 우리가 아비. 아비는 누구밖에 없습니까? 하나님 외에는 아비라 하지 마라. 아무도 아비가 없다.

바리새인 보고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종교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체제를 갖추고 그 체제에 직령을 할당해버리면 이게 계급화 돼버려요. 주님께서 사도를 뽑아낸 이유가 뭡니까? 그들로 하여금 지도자 되게 함이 아니에요. 뭘 전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간단하잖아요. 복음이라 하는 것은 사도 본인의 일이다, 주님이 하신 일이다, 어느 쪽입니까? 주님이 하신 일이죠.

본인은 죄인 중의 괴수인데 무슨 할 일이 있어요. 주님이 하신 일이 어떤 일을 한다? 죄 사함이 되기 위해서 거기에 성도들은 뭐가 돼야 된다? 죄인 중의 괴수가 돼야 된다. 죄를 더 짓는다는 말이 아니고 죄가 나오도록 성령께서 계속해서 뽑아내는 거예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고 자기의 향수를 갖다 다 버린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께서 주신 평은 뭐냐? 사함을 받은 자가 그다음에 뭡니까? 더 많이 사랑한다고 그래요.

사랑은 대상만 쳐다보는 게 사랑이에요.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만 쳐다보고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만 쳐다보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구약에선 뭐라고 돼 있습니까? 아름다운 이야기, 아가에 둘 다 벗었으니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창세기 2장의 말씀이 그대로 주께서는 실현시켜버립니다.

내 몸을 가졌으나 내 몸을 숫자에 넣지 않아요. 상대방 몸에 자기 몸을 제로로 가기 때문에 그리스도 우리는 신랑과 신부는 두 몸이 아니고 뭐가 됩니까? 한 몸이 되는 거예요. 왜? 자기를 숫자에 넣지 않아요. 내가 여기 있음에 자기는 관심이 없어요. 내가 여기 숨 쉬고 있다는 것에 관심이 없어요.

누가 살아 있으면 돼요? 나의 존재함에 관심 없고 누가 존재함에? 주님이 주의 이름으로 지금 부활하셔서 활동하시고 존재한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 더는 소망이 없어, 더는 소원이 없는 거예요. 주님이 나를 어떻게 짓밟든 관계없이 신랑이 하시는 그걸로 만족하는 것, 그게 신부의 생각이죠.

그래서 신부의 슬픔은 오직 하나밖에 없어야 돼요. 신랑을 잃어버릴 때 뭘 하라? 그때 금식하라. 혼인잔치에 있어서, 마태복음 9장에 나오고 이게 마가복음에도 나와요. 신랑을 잃어버릴 때 그러니까 자기를 잃어버릴 때 울지 말고, 자기 지갑 잃어버렸다고 울지 말고 지갑 잃어버리게 하신 당사자가 누구시란 말입니까? 우리 신랑이 지갑을 잃어버리게 하셨어요. 남편 직장 도로 갔다고 슬퍼하지 말고 주님께서 복직하게 만들었죠. 아내 입장에선 좋지, 집에 놀고. 오랜만에 숨 쉬고 그렇지요. 이 모든 것이 하나에서 이루기 때문에 한 환경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다음 이야기는 뭐냐 하면 이러한 활동이 어디를 이끄시는가, 하는 문제거든요. 활동은 우리가 우리 자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본인이 태어난 그 자리를 떠나본 적도 없고 떠날 수도 없어요. 영험한 기적, 이거는 기적이 아니고 악마의 유혹입니다. 우리는 죄인에 합당한 환경이 우리한테 최적의 환경입니다.

어디 어떤 환경에 살든 우리가 부자가 되던 가난하게 되던 어떤 환경에 있든 간에 거기서 죄를 뽑아내주시는 고마움이 작동한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환경이고 아가서에 있는 동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여기서 자기가 사는 게 너무 괴로우니까 힘드니까 자기 사는 환경을 자기가 뭔가 이탈해보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종교라는 거예요.

종교에서 자기 능력 안 되니까 하나님께 기도해서 능력 받아서 자기 자리에서 이탈하고 싶은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크게 쓸게요. [현 내 삶이 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라는 일종의 반항기를 발산시키는 거예요. 뭐 어쩌라고? 현재 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언제 네 마음에 들라고 환경 줬나? 니가 왜 거기서 나와? 그래서 뭐 어쩌라고? “좋은 환경으로 바꿔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좋은 환경으로 하려면 주님의 기적이 필요합니다.” 그게 뭐냐? 영험한 기적이라는 거예요.

‘롱기누스의 창’이라는 것 아세요? 이게 뭐냐 하면 긴 창을 말하는 게 아니고 롱기누스라는 로마군인이 십자가의 예수님 찔렀던 그 창이 그다음부터 유럽에 전달되어 이게 신기한 창이라고 해서 비법이 있고, 심지어 막달라 마리아의 생수도 영험하다고 이야기해요. 영험한 것, 물체는 물첸데 거기에 어떤 신적인 능력이 함께 깃들어서 주문만 한다든지 어떤 동일한 동작만 보이면 거기에 일어나는 것.

이 영험함을 성전에다 모셔놓은 것, 이게 천주교의 성찬식이에요. 살과 뼈 이것하면 영험하다는 거예요. 마리아 눈에서 핏물이 나오고 하는 것처럼 모든 병이 완치가 되고. 성배, 토리노의 성의, 예수님이 입었던 옷, 걸쳤던 조끼 같은 옷, 성모 마리아의 출현, 천주교에선 그게 성전으로 돼 있어요. 마리아 상 해놓고 거기에 문지르면 모든 병이 낫는 거예요. 혈우병도 낫고 다 낫는다는 거예요.

옛날에도 기적이 있었고 오늘날도 기적이 있기 때문에 초대교회에도 기적인데 왜 요즘은 중단됐다고 하느냐, 그거는 잘못된 신학해석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누구를 기적인지 도대체 기적이 뭔지를 몰라요. 죄인이 죄 사함 받았으면 됐지 또 무슨 다른 기적을 원한다는 말은, 방금 지웠습니다만 지금 내 삶이 내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 보기에는 딱 맞는데 왜 니가 뭔데 주님 주신 합당한 선을 이루는 환경을 걷어 차. 드라마에 그런 것 나오잖아요. 자기 아들이 자기 마음대로 천하고 천한 여자와 연애해서 부모의 압력에 헤어져라, 하니까 못 헤어집니다. 그럼 내가 직접 그 여자를 다루마. 지금은 카페지만 옛날 다방에 불러서 미리 흰 봉투 하나 준비해서, 헤어져라. 못 헤어집니다. 왜? 임신했습니다. 임신? 이 돈으로 유학가든지 두 번 다시 내 눈에 보이는 일 없도록 해라.

그럴 때 용감한 여자는, 나는 그이를 사랑해요, 하면서 그 자리에서 뭘 찢습니까? 돈 봉투를 확 찢어버려요. 돈 봉투 찢으면 여기서 남자 엄마가 싸대기 날아가죠. 찢어버린다는 건 주께서 주신 그 삶이 마치 주님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 나한테 사전에 좀 의논하고 주시지, 라는 뜻이거든요. 그걸 사정없이 찢어버려요. 인간 쪽에서 악마 쪽에서.

그러면 무슨 말씀에 위배됩니까? 범사에 감사하라, 이 말씀이 찢어져요.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라, 이 말씀 어디서 찾습니까? 골라서 하겠다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 본인이 고르겠다는 거예요. 누가 주님이에요? 누가 주님인지 지금 분간도 못하고 언제 우리가 갑자기 주님 되고 말았어요? 주님을 하인 다루듯이.

여기 오늘 본문 6절 봅시다. 6절 보고 신약성경 히브리서 찾겠습니다.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찌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찌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이미 경건이란 말은, 인간이 본인에게 경건이란 말을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의 가림을 받은 자는 이미 복이 있고, 복은 하나의 환경으로 작용하거든요. 처음에 했잖아요.

환경으로 작용하면 그 환경은 죄 용서를 받고 죄의 가림을 받는 그러한 예상 못한 환경이에요. 내가 한 것도 없이 죄 용서받은 거예요. 회개했다는 근거로 죄 용서받은 게 아니고 그냥 죄 용서가 먼저 있고, 한 번 물을게요. 죄 용서라 하는 것은 그 전에 뭐가 있었다? 죄가 있었다. 죄에 대해서 주님은 무슨 분으로 작용합니까? 심판주로 작용하지요. 죄에 대해서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은 주님한테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이 율법적으로 마땅하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뭐냐? 죄 사함이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심판주의 진행된 결과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구원이 여기서 발생됩니다. 구원이란 것은 그냥 구원 되는 게 아니고 어디 안에서 구원 돼요? 저주와 심판 안에서만 비로소 구원이 나오지 그 외의 장소에선 구원이 안 나와요.

구원이란 말이 오늘 본문 7절에 나오는데,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 여기에 은신처, 그다음에 보호하는 영토 전부 다 뭡니까? 제가 아까 환경이라 했지요. 개인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 공간 속에 들어온 거예요. 거기서 집단 구원이 이뤄지는 겁니다. 나의 구원이 아니고 우리의 구원이 이뤄져요.

예수님의 여성이 몇 명입니까? 나 아니에요. 신랑이 올 때 기름 준비할 그때 신부가 몇 명이었습니까? 총 열 명 중에 다섯 명 탈락하고 다섯 명 남았잖아요. 다수에요, 다수. 그래서 그걸 합쳐서 우리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까지 포함해서 우리가 되는 거예요. 기도할 때 나의 기도가 아니고 무슨 기도? 우리의 기도에요. 나의 기도는 누구만 할 수 있어요? 예수님만 하는 게 나의 기도고 나머지는 전부 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의 기도가 돼요. 우리의 기도하면서 마지막에 뭡니까? 단독 개인적 이름을 붙여요. 이게 주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이야기를 계속 이어보겠습니다. 심판주 안에서 죄 용서가 되게 되면 경건이란 말은 이미 주께서 구원 된 자 쪽에서 앞당겨서 우리를 그렇게 불러주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일이 나의 일이 아니고 일의 시작이 주님의 일에 포함돼 있잖아요. 그러면 진짜 경건한 사람은 누굽니까? 우리 주님밖에 없지요. 주님과 함께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은 뭐냐? 경건하리라는 표현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 과정에 대해서 최종 히브리서 10장 19~20절까지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다음에 뭐라 돼 있어요? “형제들아” 보세요, 형제 없는 구원 없지요. 나만 달랑 구원 받고, 이런 것 없어요. 형제가 있어요. 형제가 있기 때문에 그 형제란 환경 속에서 나의 개인의 고집을 부릴 수 없어요. 다들 죄인인데 무슨 고집을 부립니까.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이 이야기를 쭉 하면서 여러분 단 한 가지만 먼저 전제로 깔고 하게 되면 다 이해돼요. 그게 뭐냐 하면 이 모든 일이 결코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해요. 이건 누가 하신 일이에요? 일방적으로 주님이 우리와 사전에 의논도 없고 사전에 상의한 적도 없고 그냥 해치워버린 거예요, 전부 다.

그래서 이거는 우리가 구원을 받든 용서를 받든 전부 다 누구 일입니까? 내가 은근히 노렸던 나의 일이 아니고, 그건 나의 탐심이 되죠. 구원 받는 것도 탐심이잖아요. 나의 욕망이잖아요. 나의 욕망을 제쳐버리고 밟아버리고 오직 나의 욕망과 상관없이 주님이 일방적으로 다 해주셔서 이 환경 안으로 온전하게 다 채워버렸단 말이요. 그러면 우리는 남은 것은 범사에 감사할 것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예상 안 했으니까 내가 기대하고 내가 목표한 게 아닌 일이 나한테 벌어진 거예요. 나는 나의 일한 실적과 업적만 손으로 계산하는 버릇이 있거든요. 내가 이렇게 기도했더니만 이렇게 응답받았다. 전부 다 내 계산이잖아요. 그런데 전혀 그것과 관계없이 주께서 일방적으로 해버린 겁니다.

그러면 주께서 일방적으로 했다. 주님의 업적이죠. 주님의 업적이 우리에게 신약의 성령으로 주어지게 되면 주님의 업적으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가? 회개 생기죠. 아까 자복 생기죠. 경건하다는 소리 듣지요. 다른 말로 신약적으로 하면 의인 소리 듣지요. 특히 여기 뭐 하나 집어넣느냐? 기도라는 것, 기도하게 하셨다는 게 포함돼요.

기도를 우리 안에서 기도 누가 했어요? 주께서 기도하시기 때문에 우린 껍데기니까 우리 안에서 주의 영이 기도하기 때문에 이걸 뭐냐?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 게 돼요. 실컷 지가 기도해놓고 끝에다가 주의 이름 갖다 붙이면 주의 기도되는가? 아닙니다. 주께서 기도하게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기도의 내용은 무엇이냐? 오늘 본문 시편 32편했기 때문에 32편적으로 이야기하면 이게 뭐냐? 시편 32편의 내용이 기도 안에 담기겠지요. 이게 말씀대로 기도하는 거예요. 시편 32편 내용이 담겨버리면 내가 어떤 식으로 이렇게 죄인이었는데 주의 심판이 오셔서 심판 가운데서 심판 받아 마땅함을 깨닫는 가운데서 나는 자복하게 되었고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구원이라고 규정되었다는 그 시편 32편의 내용을 그대로 기도를 통해서 토해내는 겁니다. 주께서 오늘날 저로 하여금 이러한 모습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기도가 찬양이 되고 그 기도가 뭐가 되냐? 감사의 기도가 될 수밖에 없지요. 그러면 우리는 기도를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지 마세요. 아까 했잖아요. 솔직하게 기도하기 싫은데 기도 안 하면 또 벌 받을지 싶어서 그러한 자기 아끼고 자기 것 자기가 사수하고 지키겠다는 자기 자존심, 자기 의로움을 내 것 지키겠다는 그런 짓을 안 해야 되지요. 주의 일을 방해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기도 영 안 하게 되잖아요. 안 하게 되던 하게 되던 그 스케줄은 주님이 알아서 할 거지 한다, 안 한다를 내가 측정해서 요즘 기도 너무 쉬더라. 내가 이러다 지옥 갈 수 있다. 본인이 본인의 구원을 자기가 걱정하고 있다면 도대체 본인 스케줄은 누가 짠 거예요? 본인이 짠 거지요. 주님 노십니까? 안 노시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주님은 논다고 생각하고 팔짱끼고 있다고 생각하고 본인만 악착같이 본인 구원을 위해서 지가 애쓴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루 종일 하는 생각하는 게 자기 생각밖에 없으니 당연한 거죠. 그래서 기도한 효과, 응답받은 리스트 작성하고요. 그래놓고 하고 난 뒤에 그 결과가 뭐냐? 나로 인하여 흐믓해 하는 내 모습을 그게 바로 우상이에요. 시편 32편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0장에서 제가 언급한 이유는, 시편 32편의 내용이 말로만 아니라 신약에 와서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그걸 실시했다고 해서 그 증거로서 제가 히브리서 10장을 댄 거예요. 주께서 구원하신다 해놓고 말만 하면 안 되잖아요. 휘장이 찢어져서 주께서 거기서 우리의 길은 없어요. 인간의 영토에는 길이란 건 없어요. 갇혀있기 때문에 길은 없는데 길을 유일하게 뚫으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지요.

길은 어느 길인가? 주께서 뚫고 들어온 그게 그 길이에요. 뚫고 들어온 그 문으로 우리를 그 문으로 데려가지요. 그러니까 주께서 1번 타자로 먼저 오셨다가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했잖아요. 그 길이 있잖아요. 의인이 죄인 되는 그 길, 우리는 죄인이면서 그 코스 따라 가면 그게 바로 제대로 방향 잡힌 게 돼요. 방향 잡혀서 그 길로 가는 게 된다 이 말이죠.

길은 없어요. 길은 없는데 주께서 길 자체가 되어 오는 거예요. 인간들이 모여서 주님 계신다고 상정하고 우리가 고난의 길을 가자. 백날 고난을 받아봐야 지옥 가는 길이에요. 내가 고난 받는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십자가 믿는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주께서 지금 나를 다루고 있음을 내가 인정하는 그 자체가 내가 디딜 때마다 길이 되는 거예요.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왜? 내 일이 아니고 껍데기 같은 우리 안에 주께서 일을 만들어내시기 때문에 그게 길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야 모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다음에 뭐로 돼 있습니까? 영광이 되는 방법은 먹든지 마시든지 죽든지 살든지, 로마서 14장 7절에 내가 살든지 죽든지 모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이거는 고린도전서 6장,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 그게 오기가 아니고 실제도 그렇잖아요. 실제로 주께서 이렇게 하게 하셨잖아요.

참석하고 싶어도 오늘 부득이 참석 못한 사람 굉장히 많습니다. 가슴 찢어지고 있어. 지금 내가 너무 오버하고 있나. 지금 참석 안 해서 내가 미쳤지, 이 시간에 다른 소릴 듣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제발 그 사람이 다음에는 참석할게요. 되도 않은 소리 마세요. 참석하고 안 하고는 누구 마음대로입니까? 자기 결심, 오기, 신앙 마음 아니고 누구 마음대로? 내가 허락도 안 했는데 니가 건방지게 참석해. 주님의 뜻이 있어야 돼요.

따라서 여기 참석한다고 잘한 짓이고 참석 안 한다고 못한 짓이 아니고, “내가 오늘 참석 안 하기를 참 잘했어. 왜? 주께서 참석 안 하게 그렇게 했어.” 이러면 그 자리에서 주께 영광 돌리잖아요. 갑자기 문제가 다 풀려버렸지요. 그러니까 어떤 일에 대해서 기준을 내가 거기에 끼어들면 안 된다는 거예요. 먹든지 마시든지 죽는 수가 있다 할지라도 여기 있다가 누구처럼 이근인지 우크라이나 전쟁에 간다 할지라도 그처럼 주께서 하게 하셨다는 것을 본인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주님을 증거하는 주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시편 32편의 사나이가 되는 거예요.

시편 32편 6절 다시 보겠습니다.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찌라” 이게 다윗이거든요. 다윗은 일찍 온 주님이에요. 주님 사적인 문제에요. 보이지 않는 숨겨있는 전체 문제는 사적인 것으로 역사 속에 등장하고 사적인 것이 뭐로 다시 퍼진다? 전체 문제로 퍼진다. 창조주가 모든 걸 창조했잖아요. 창조하신 분이 개인으로 왔다고요. 그 개인은 인간의 개인과 비교가 돼요.

인간의 개인은 제치고 주님의 개인으로 새로운 세계를 확대시키는데 확대시키는 과정이 우리가 보고 있는 시편 32편이에요. 내가 이렇게 하겠다. 너희들이 이렇게 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시편 32편은 율법이에요, 율법 아닙니까? 율법이죠. 율법대로 지킬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성령 받아도 못 지켜요.

왜? 우리는 애초부터 성령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지킬 내용이 아님을 비로소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인정해요. 왜? 이 시편 32편은 우리에게 이뤄지는데 그걸 내가 해서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누가 하셔서? 주께서 시편 32편대로 했기 때문에 우리는 32편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게 나는 잊어버리고 주님만 바라보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 게 남아 있습니까? 없지요. 왜? 우리는 어제부로 죽어도 마땅하니까 도대체 내가 살아서 해야 될 일이 없고 살아 계신 주님이 오늘날 이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권사님, 파마했어요? 파마 누가 하게 하셨어요? 주께서. 사소해 보이는 것까지라도 주께서 파마하게 하신 거예요. 왜 파마하게 하셨는가? 감사한 줄 알아라. 돈 있으면 하는 것이지, 라는 생각을 하지 말란 말이에요. 돈 있다고 파마되는 게 아니고 할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사도행전 3장 보면 앉은뱅이 나오지요. 사람들이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앉은뱅이를 낫게 한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경건해서 했다는 거예요. 거기서 누가 극구 말립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말려요. 이 사람들 왜 이래요. 저 안 했어요. 우린 목격자입니다. 증인입니다. 누가 했단 말이냐? 우리 중에 누가 했어요?

베드로와 요한이 하는 말이, 베드로 당신 속의 주님이 했습니까? 내 속에 있는 주님이 한 게 아니에요. 누가 했어요? 앉은뱅이 속에 있는 주님이 하셨지요. 그러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자기가 명령한 게 아니에요. 누가 명령했는가? 베드로 속에 있는 주님이 내가 주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주님이 명했고 앉은뱅이 속에 있는 주님에 의해서 일어나게 된 겁니다. 그러니 이게 인간의 언어로 제대로 표현이 될 수 없지요. 인간의 이성으로 납득이 돼요, 안 돼요? 이게 진짜 영험한 거예요. 이게 기적이에요.

여기 32편 1절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허물은 죄라 했지요. 죄가 용서를 받는다 했잖아요. 이거 누구 일이고 누구 작품이에요, 누가 하는 일입니까? 주님이죠. 그러니까 죄 용서 해달라고 손들면 안 된다니까요. 그래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시작은 내가 하고 용서는 주님이 하고, 이런 게 없어요.

주께서 너 용서받아야 될 대상이야, 라고 했을 때 우리는 그 대상이라 하는 순간 용서를 받은 상태가 되고 말았어요. 주님의 죄 사함을 위해서 죄 사함을 받을 인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주의 뜻입니다. 주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죄 용서받을 죄인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것도 그 죄인이 알게 되는 일까지 일어나야 되는 것이 주의 일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그 죄의 가림을 받지요. 그 죄의 가림을 받는 것도 누구의 일이다? 주의 일이죠. 보세요. 모든 것이 뭡니까? 주의 일이죠. 주의 일에 내가 간섭하지 마세요. 주여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납득이 안 되니까 이건 너무 무모한 일입니다.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압력 가하지 마세요. 죄 용서도 주의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천국 가는 것도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에요. 그냥 주의 일을 주의 일로 “아아, 그렇군요.” 하고 인정하고 수용하게 되면 그게 바로 주의 사랑이 되는 거예요. 말씀이 말씀대로 그냥 시편 32편을 그대로 우리 안에 집어넣어버렸어요. 우리 안에 집어넣어서 우리가 모르는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시고 자복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죄 사함도 주의 일이거든요.

그러면 그런 성도가 있다고 칩시다. 과연 내가 죄 사함이 주의 일인지 아니면 내가 은근히 죄 용서받아서 천국 가려는 나의 욕심에서 나온 것인지 어떻게 아는가? 주변에 벌떼같이 달려드는 많은 신학자들, 목사들, 같은 교인들, 불신자들이 달려들어 공격합니다. “네가 용서받고 싶어서 용서받았잖아. 네가 예수 이름을 몇 번 불러서 했잖아.” 온갖 것으로 다 공격해요.

그럴 때 본인은 뭐냐? 그냥 멀뚱하게 있지요. “주님, 저 사람들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내가 계획을 했으면 이런 일이 내가 계획을 해서 기도원에 가서 영험한 기도하니까 목사님 안수해서 뭔가 이런 절차를 생각할 텐데 설거지하다가, “맞아. 내가 사는 것도 주의 일이잖아.” 이걸 성령께서 알게 하셨는데 내가 관여하지도 않은 일을 나보고 닦달내고 책임지고....

“너 똑바로 안 하면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처럼 네가 십자가 은혜를 알고 네가 다시 범죄 하게 되면 다시 도로 망해버린다는 히브리서 6장의 말씀을 몰라?” 이런 성경구절 대가면서, 네가 망하든 말든 그거는 내가 알바 아니죠. 왜냐하면 내 스토리가 있으면 내가 망한다는 게 걱정하는데 시작도 내가 시작 안 했는데 망하는 것도 내 소관 아닌데 내가 왜 미리 걱정해야 돼요. 그렇지 않습니까?

시장 찢어져서 길 내는 게 내가 이명박도 아니고 내가 밀어 붙어서 한 거예요? 그동안 지금 우리가 무슨 짓을 해온 거예요, 도대체가? 아무 상관도 없는 자기와 관련된 이야기만 해놓고 주님 보고 억지로 그걸 도장 찍으라고 협박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먹고 마시고 숨 쉬는 것, 장미가 피어나는 것, 참새가 짹짹거리는 것 다 누구 일이에요? 우리가 참새 키웠습니까, 내가 나를 키웠어요?

우리는 그냥 모든 것을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그 나라 그 의만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심지어 감사한 일조차도 주께서 다시 우리로 하여금 내 욕심 챙기고 내 자존심 챙기는 일을 반복시켜서 오직 주께서 감사케 하는 그 순환노선을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 반복시킨다는 것을 잊으면 안 돼요. 이래서 나는 오늘 은혜 받았다하다가 돌아가서 돈과 싸우고 차타고 싸우고.

반복시켜서 시편 32편을 계속 반복시켜서 또 내가 하루치 살았다는 이유 때문에 어제까지 몰랐던 내 죄를 또 끄집어내서 그 죄 때문에 주께서 죄인이 되셨다는 십자가 피 흘렸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시는 감사케 하는 은혜를 주께서 계속 돌린다는 것,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누가 지키겠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기에 말씀 지킨다는 사실조차 엉터리로 지켜온 걸 다시 한 번 자복합니다. 하지만 이 자복이 내일까지 이어지지 않음을 또한 저희들 깨닫게 해주시고 일이 어떻게 되든지 모든 것은 주의 일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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