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3a 부산강의 : [시편]44(28:3)-나와의 이별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28편,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그렇게 시작되지요. 여기서 좀 더 읽어보면 3절, “악인과 행악하는 자와 함께 나를 끌지 마옵소서 저희는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이것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무덤과 무덤의 반대말은 여기 성소로 돼있고, 그 다음에 행악자의 반대말은 뭐냐 하면 여기 성도로 돼있어요. 다윗 같은 성도로 돼있습니다. 행악자, 행악하는 자. 여기서 성소의 반대말이 성소 바깥이 아니고 무덤이라고 이렇게 돼있어요. 그거는 이게 구약, 옛 언약이죠. 옛 언약은 어디서 이뤄지느냐 하면 지평에서 이뤄져요. 수직이 아니고 지평에서 이뤄집니다.
그 이유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이 땅이 어떤 땅이냐? 이스라엘의 거주지에 와요. 사실은 이스라엘의 거주지라 돼있지만 사실은 주의 이름의 거주지에 이스라엘이 합류한 형식입니다. 주의 이름에 이스라엘이 합류했으니까 여기서 주의 이름이 어떤 분이냐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합류했던 이스라엘을 통해서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내부에서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여기 행악이 있어야 되고, 행악자가 등장해야 되고 이스라엘 내부에서 행악자와 그 다음에 행악자의 반대가 뭐라 했습니까? 성도. 성도라는 것이 주의 이름의 작용으로 결과적으로 두 개가 이렇게 나와야 돼요. 이 말은 행악자, 성도를 구분하는 것은, 성도가 구분하는 것이 아니고 행악자가 구분하는 게 아니고 여기에 함께 하시는 주의 이름에 의해서 갈라지는 겁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등장해요. 이웃으로 등장해요. 그래서 무덤, 성소, 행악자, 성도 전부 다 이게 같은 개념들이 모아져서 주님이 어떤 주님인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드러내는 재료가 되는 겁니다.
특히 여기서 무덤이라는 게 왜 나왔느냐 하면 지평에서 이스라엘 거주지 또는 주의 이름의 거주지에서 이게 무덤으로 가버리면 이런 기능을 못해요. 지평에서 사라지면. 무덤이 지하에 있거든요. 밑으로 들어간다고요. 죽은 자의 모임. 죽은 자의 모임이 돼버리면 주의 이름의 기능자에서 탈락하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드러내는데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이게 구약이에요. 구약은 이래요.
신약은 어떠냐? 이 무덤이 지옥으로 변하고 성소는 어디로 갑니까? 이게 천국으로 되거든요.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거주지에서 이렇게 되지만 이스라엘 멸망하고 난 뒤에서는 성소가 위로 올라가요.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이 위로 올라갑니다. 천국 하늘나라까지 올라가버리고, 이쪽에 무덤은 지옥으로 내려가게 돼있어요. 중간에 이 땅은 어떠냐? 땅은 불타버리고 없어지는 거죠. 연극은 끝났으니까. 무대장치는 시효가 끝났으니까 없어져버려요.
지금까지 제가 한 말은 결국은 이스라엘 안에, 우리가 하는 것은 시편 28편 구약이니까 구약 안에서 주의 이름이 이웃으로 온다는 겁니다. 이웃으로 오는데 그러면 이웃에 대해서 잘해주면 되지 않겠느냐? 이웃으로 오셨으니까 이웃으로 오신 주님께 잘해드려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 이웃이 어떤 이웃이냐 하면 낯선 이웃이에요. 우리가 아는 친근한 이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웃은, 왜 하나님이 낯선 이웃으로 나타나느냐 하면, 인간들이 생각한 이웃은 나에게 잘해주는 자, 이걸 우리는 이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나한테 잘해주는 자니까 이게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한테 잘해주는 자를 이웃으로 삼으면 이건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행악한 자에 해당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의 이름이 거주하는 곳에 나도 같이 살고 있으니까 여기서 경쟁이 일어나요. 주님을 위해서 살 것이냐, 아니면 나를 위해서 살 것이냐? 경쟁이 일어나죠.
나를 위해서 산다면 눈에 보이는 눈에 띠는 모든 것이 나한테 잘해주기를 바라는 거죠. 그게 행악자에요. 그러면 성도는 어떠냐? 이게 다 나를 위한 것이라면 성도는 어디 있느냐? 성도는 이게 없어요. 성도가 없습니다. 성도라는 게 존재하지 않아요. 성도는 주님이 이웃으로 와서 행악자한테 심하게 시달릴 때 그때 등장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한 번 물어봅시다.
선악과를 따먹은 자가 누구죠? 이건 쉽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자가 나지요.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야 했는데 따먹은 것이 나라는 당사자기 때문에 나는 이미 주님 보시기에 행악자에 속하는 겁니다. 그러면 선악과 따먹은 그 결과가 뭐냐 하면 나를 위해서, 에요. 나의 어떤 이익을 위해서. 나의 이익 가운데 인간이 노리는 가장 이익은 뭐냐 하면 나를 천국 보내는 이익이에요. 이게 뭐라고? 이게 바로 행악자에요. 나를 천국 보내기 위해서 교회 나오는 것, 이게 바로 행악자입니다.
뭐든지 이용하려고 해요. 누구마저 이용하느냐 하면 하나님마저 이용하려 합니다. 평생 50년, 60년 교회 다녔는데 50년, 60년. 70년 이렇게 교회를 다녔는데 그 교회 다닌 의도가 뭐냐 하면 나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이용해서 나한테 꾸깃꾸깃 다 집어넣는 거예요. 나한테는 뭐냐 하면 캥거루 배처럼 나 자체에 쇼핑백이 있어요. 쇼핑백에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복 있잖아요. 긍휼, 자비, 예수님의 피, 복음, 언약, 십자가 그런 것 다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난 배불뚝이가 되겠지요.
배불뚝이가 되어 이제는 천국 가는데 하자가 없도록, “하나님, 뭐 필요합니까? 이것 드렸습니다. 이것 여기 있습니다.” 온갖 좋은 것, 천국에 합격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집어넣고 멀쩡한 나를 멀쩡하게 만들어서 가겠다는 것, 이게 바로 행악자에요. 성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28편뿐만 아니고 모든 성경말씀은 존재하지 않는 성도를 생산하는데 그 주인공에서 내가 탈락한다는 이야기가 성경이야기에요.
내가 탈락하고, 내가 탈락하면 그 의도 있잖아요. 목적, 내가 천국 가는 그것도 주님께서 사정없이 그걸 밀쳐버리죠. 교회 다니고 종교 생활한다는 것이 스스로 자기 중량을 늘여버린 거예요. 몸무게가 늘어서 가만있어도 지옥으로 빠지게 돼있습니다. 갈수록 본인을 못 버려요. 처음에 교회 삼일 다닐 때, 참 삼일 다닐 리는 없지.
삼주 다닐 때는 까짓 것 뭐 이 교회가 안 받아주면 나는 교회 안 가면 되지, 하고 쉽게 빠질 수 있는데 60년 다녔다? 이것 교회 안 나올 수 있습니까? 신앙생활 포기할 수 있습니까? 그동안 자기한테 쌓은 공덕이 많은데, 불교식으로 이야기해서 자기한테 쌓은 공덕이 많은데 그 공덕을 어떻게 아까워서 버립니까? 교회 갖다 바친 돈이 많은데 그걸 어떻게 버리고 완전히 부정할 수 있어요. 안 되지요.
그래서 우리가 방금 다시 이야기하면 성소의 반대말은 무덤이다. 모든 인간이 무덤가잖아요. 그만큼 무덤가는 그 인간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다는 거예요. 그리고 성소에 가야 되는데 무덤가기 전에 먼저 탈락되지 않고 성도에 합류해야 성소 자체가 천국 갈 때 같이 따라갈 수 있는 겁니다. 이 성소에는 누가 계시느냐? 이스라엘 전체 가운데서 성소가 따로 있습니다. 그게 성전인데요.
성전에 누가 계시느냐? 주의 이름이 계셔요. 그런데 주의 이름이 있는 성전 안에는 뭐냐 하면 모든 율법을 완성한 자리가 되는 거예요. 그 자리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이 이 땅에 오시는 업무가 끝나면 하늘로 올라가는데 거기에 같이 따라 붙어서 올라가게 되면 그 사람이 바로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문제는 주의 이름이 이스라엘 속에 있으면서 내가 하늘에서 온 이웃이라는 걸 그들이 발견해야 되는데 인간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어서 뭐든지 나를 위해서 살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알아보질 못하게 돼있어요. 이게 막히게 돼있습니다. 막히게 돼있는 이것을 어떤 식으로 걷어내느냐 이 이야기를 지금부터 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막혀있는 우리의 나 위주로 살아가는 이걸, 나의 이익 위주로 살아가거든요. 다시 하겠습니다.
선악지식이라 하는 것은 그 선악지식의 활용도가 항상 나의 이익으로 쏠린다는. 내게 이익이 될 때 그걸 선이라 하고, 내게 손해가 되면 그걸 악이라 하는 거예요. 내가 천당 가면 이익이라 보고, 내가 지옥 가면 나한테 손실이라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천국, 지옥도 선악지식을 전제로 해서 이게 구성이 되기 때문에 그 천국, 그 지옥은 하늘나라 안 받아줍니다. 받아주질 않아요.
그러면 그러한 장막에서 벗어나는 방식이 어떤 것이냐? 그 방식을 제가 훅하고 지나가는 식으로 빠른 시간에 해드리겠습니다. 꿈에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 밤에 꾸는 꿈이 있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밤에 잠을 잤으니까 꿈을 꿨잖아요. 그러면 해가 떠오르면 낮이 됩니다. 낮 자체가 꿈이에요. 두 가지 꿈이 되는 겁니다. 둘 다 꿈이라는 걸 알려면 이걸 느끼는 의식하는 세 번째 존재가 있어야 돼요.
세 번째 그걸 보고자 하는 나가 여기 있는 겁니다. 그 나는 꿈이 두 가지인데 둘 다 꿈이라고 판정하는 내가 여기 있다 이 말이죠. 나는 어떤 경우라도 꿈이 아니어야 한다. 나는 판정관이다. 나는 꿈이 아니고 판정관이다,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문제가 되거든요. 이건 꿈이고 세상을 꿈이라고 보지 않고 현실 그대로로 보는 것은 이게 잘못 된 건데, 왜냐하면 꿈에는 무의식이죠. 내가 활동을 안 하고 있으니까 꿈으로 확정되는데 낮에는 내가 설치고 다니까 꿈으로 안 보잖아요. 내가 여기 있으니까 꿈으로 안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라는 것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의식에서 나온 나다. 내가 나를 의식하니까 여기에 ‘나’ 있지요, ‘나를’ 있지요. 나가 몇 개에요? 두 개지요. 근데 거울 보면 내가 한 개거든요. 이게 뭐 잘못 된 거예요. 거울에 비친 내 몸뚱이는 하난데 왜 나는 나를 의식하느냐? 그럼 ‘나’가 두 개가 되는 겁니다. 둘 중에 하나가 꿈이에요. 이게 가짜다 이 말이죠. 그래서 판정하는 나는 가짜일 수 없고, 낮에 설치고 다니는 나는 나한테 가짜가 되니까 이것도 하나의 꿈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이것에서 벗어나야 돼요. 왜냐하면 최후 마지막 궁극적으로 뭐만 남아요? 세상 다 멸망당하고 지옥 가고 천당 가고 뭐든 다 깨져도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뭐만 남습니까? 이 나라는 것만 달랑 남아요. 그러니까 남으니까 나를 위해서 뭘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마지막 남은 게 나니까 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말이죠.
여러분들이 교회 와서 예수님 이야기해보세요. 내가 아는 예수와 네가 아는 예수가 다 달라요. 다를 수밖에 없지요. 열 명이 있다면 열 명의 천국이 다 다르고 열 명의 지옥이 다 달라요. 열 명의 예수가 다 다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누굴 위해 살았기 때문에? 나를 정당화하면 살았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지요.
성경에서는 그게 아니거든요. 성경에서는 나를 깹니다. 나는 깨는 것, 나를 깨는데 깨는 방법이 뭐냐 하면 철저하게 내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를 다 보여주면서 깨어버려요. 철저하게 갈 데까지 가게 하는 거예요. 나라는 것이 갈 데까지 가게 하는 겁니다. 가는 방법을 이제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내가 깨어지는 방법, 그게 의외로 간단해요.
나가 있잖아요. 나의 위기는 뭐냐? 타인과의 만남입니다. 꿈이 좋은 것은 꿈이 나중에 깨어나면 주인공이 나라서 꿈에서 죽든 말든 상관없어요. 왜냐하면 어디까지나 내 안에만 있으니까요. 그런데 낮에 설치게 되면 누굴 만나느냐 하면 남, 남을 만난다고요. 여기서 위기를 느끼는 겁니다. 꿈속에서 천국 갈 수 있어요. 꿈속에서 지옥 안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걸 무효로 돌립니다. 네가 네 안에서 꿈꾸고 있는 천국, 지옥은 인정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지평적, 눈에 보이는 세상, 죽는 세상 말고 아직도 여전히 살아 있는 그 세계에서 남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남을 만나면서 여기서 뭐가 생기는가? 내 의식이 두 동강나면서 의식을 깨는 게 뭐냐? 지금까지 강의했는데 그렇게 궁금했던 것, 나는 어떻게 깨는가? 그거는 욕망입니다. 남들이 갖고 있던 그 욕망, 거기에 대한 나의 탐심과 욕심이 나로 하여금 나에게 불안감을 조성하는 거예요. “아아, 나는 내가 싫어. 지금의 내가 싫어. 난 저 사람처럼 될래.”
여기서 타인을 만나면서 나를 지키는 방법이 첫 번째는 뭐냐 하면 타인을 밀어내는 방법. 밀릴 때 누구도 같이 밀리겠어요? 예수도 같이 밀리겠지요. 그 다음에 타인 속으로 건너가는 방법. 이때는 자기를 부인하죠. 나는 내가 되기 싫어. 저쪽의 뛰어들고 싶어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촌에서 일곱 식구, 옛날엔 그렇게 살았잖아요. 일곱 명 되는데 방은 하나, 지긋지긋하지요.
그래서 다른 형제들은 이렇게 살아도 우리끼리 정 붙이면 괜찮아, 하고 살만했는데 그 중에 네 번째 얘가 친척이 사는 롯데월드타워 시그니엘 레지던스라든지 한남더힐이라든지 그런 데 별로 비싸지도 않아요. 200억밖에 안 돼. 그런 데 슬쩍 친구 따라 갔다 오고 난 뒤에는 지금 내 집구석이 이게 사는 게 아니고 이건 짐승우리보다 더 못한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의 현재 존재에 대해서 현재 상황에 대해서 저주하고 싶은 겁니다. 이게 뭐냐, 이게. 내가 평생 태어나서 이 꼴로 이렇게 죽으란 말인가. “엄마, 나 서울 갈래. 차비만 보태주면 내 알아서 살게.” 보따리 싸서 서울 가고 나머지 형제들은 여기서 농사지면 살자. “농사 지긋지긋해 나 서울 갈 거야.”
그러니까 그냥 있는 데로 살래, 하는 방법과 타인의 욕망 속으로 건너가는 방법.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의 욕망이 인간을 두 조각내는 거예요. 타인 속에 건너가는데 이게 밀어내는 것, 이것 가능합니다. 타인 속에 건너가는 것, 불가능해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욕망이 뭘 하느냐 하면 불가능한 것에 집착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내가 되지도 못하는 그 일에 내가 거기에 하나의 삶의 목표가 돼버린 거예요. 되지도 못한 거예요.
결핍을 느끼고 그 결핍을 느낄 때 나는 쪼개지잖아요. 쪼개지면 내가 아쉽다는 괴로움이 너무 아프잖아요. 아프니까 어떻게 변명하고 정당화하느냐 하면 모든 결핍과 균열을 수시로 봉합하는 공백의 유령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빈자리라는 유령, 귀신에 시달리게 되는 거예요. 결핍에서 나오는 게 이 말이에요. 네 자, 죽은 조용기 목사가 그렇게 자주 했던 믿씁니까, 하는 거예요.
“나의 결핍을 채워주소서, 신이시여.” 믿습니까? 여전히 누굴 위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이고 뭐고 간에 다 동원해서 믿습니다. 기어이 결핍과 균열, 결여, 모자람이죠. 모자람을 계속해서 그때마다 채우려고 유령의 소릴 듣는 겁니다. 나는 내 만족을 위해서 설교를 듣고 복음을 듣고 유령의 소릴 듣는 거예요. 그게 마귀의 소린데 악마의 소린데 자기는 성경대로 하니까 주의 성령의 역사인 줄 알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타인 속으로 건너가려고 노력합니다.
밀어내는 방법은 뭐냐 하면 안 들은 걸로 하는 거예요. 안 들은 것으로 치는 것, 이게 뭐냐 하면 현실을 유지하는 방법이에요. 현실을 유지하는 방법, 성경에선 그걸 악이라고 하는 겁니다. 현실에 안주해서 안 들은 걸로 쳐서 자기 자신의 정당성을 그대로 하는 것, 그게 밀어내는 거예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계속 줘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안주하기 위해서 율법을 안 들은 걸로 치는 겁니다. 그래야 내가 근사하니까 내가 그대로 유지가 되니까요. 끊임없이 변명이 나와요. 뭐 쉬지 않고 변명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건 불가능하고 이건 가능한데 둘 다 실패로 끝나지요.
실패로 안 끝나려면 어떻게 하느냐?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전체가 뭐냐 하면 이게 보는 것, 내가 보는 거예요. 내가 보는 것의 반대말은 뭐냐 하면 누군가에 의해서 내가 보여지는 거예요. 지금껏 우리는 내가 중심이고 내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내가 보는 것 중에서 괜찮은 것, 나한테 이익 되는 것을 선으로 여겨서 전부 다 나한테 캥거루 보따리에 다 집어넣었어요. 내가 보는 것 중에서 괜찮은 것, 안 좋은 것은 버리고 좋은 것만 취하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부잣집에 형제 일곱 이 있는데 그 중에 한 네 번째 얘가 촌에 돼지우리에 친구 따라 놀러갔다. 그러면 얼마나 화들짝 놀래겠습니까. “아이고, 어머니. 못 살겠습니다.” 이렇게 되겠지요. 반대로 말이죠. 우리 집이 최고에요. 그게 악이에요. 그 현실에 안주하는 게 악이란 말이죠. 상당히 보수적이죠.
누군가 나한테 보여지는 것, 이 누군가가 뭐냐 하면 다윗입니다. 다윗은 주의 이름의 활동의 증상이에요. 이 다윗은 여러분 알다시피 언약의 계약자에요. 언약의 상대자에요. 언약의 계약 상대자에요. 하나님의 선택이기 때문에 지가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일부러 다윗에게 찾아와서 기름 부었거든요. 사무엘을 통해서.
계약 상대자기 때문에 이 계약의 완성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입니다. 지금까지 간단한 결론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관건이에요.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봅니까? 죄인으로 보지요. 이게 바로 구원의 자리에요. 이미 구원받은 거예요. 내가 시도하지 않았는데 이미 구원받은 거예요. 주님의 시선이 내 시선을 이겨버린 겁니다.
상스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되지만 주님의 시선이 내 눈알을 그냥 찔러버린 거예요. 그것도 눈이냐? 너무 상스럽게 눈깔이란 이야긴 하지 않겠습니다만 “그것도 눈이냐, 그것도 귀냐? 귀가 달리고 눈이 있으면 뭐하냐?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 성령이 그 일을 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그 일을 해요. 철학을 하고 과학을 하고 공부를 해도 그것도 지혜야, 그것도 지식이냐, 찔러버립니다. 전부 다 너를 위한 거예요. 너를 위한 악행, 악마가 하는 짓이야, 하고 찔러버리죠.
그게 누구냐 하면 세리와 창기 아닙니까. 내 인생 물어줘, 하니까 네 인생도 인생이냐 창기가 되던 세리가 되던 그게 뭐가 대수냐 말이죠. 십이 년 동안 피 흘리고 했다? 혈우병에 있던 여인이 12년 동안 청춘을 허송세월한 것 일체 주님한테 묻지를 않고 그대로 겸손하게 그냥 내 청춘 돌려줘, 하지 않고 감히 옷도 못 만지고 옷자락만 만졌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세상보기였고 예수님이 그 여인과 자기 백성을 볼 때 그런 안목으로 보는 예수님의 안목을 너도 가졌구나. 이걸 믿음관계라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안목을 본인이 갖는 거예요.
지금까지 도달함이 어디까지 왔느냐? 보여지는 거예요. 여기서 투쟁이 벌어집니다. 내가 보는 예수님이라든지 또는 다윗, 구약이니까 예수님은 아직 안 오셨지요. 다윗 속에 예수님이 계시니까요. 내가 보는 다윗과 다윗이 보는 나, 여기서 다윗 중심으로 새로운 집합체가 등장하는데 이게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성소에 들어갈 하나님의 성도들이에요. 이렇게 성도들의 구성되게 되면 나머지 있잖아요. 나머지 배제된 자가 뭐가 되느냐 하면 악행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없는 성도가 다윗을 통해서 만들어내고 생산해내겠다는 것이 시편 28편 내용이에요. 그렇다면 다윗이 보는, 예를 들겠습니다. 사무엘상 18장 21절 누가 읽어보세요. “스스로 이르되 내가 딸을 그에게 주어서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를 치게 하리라 하고 이에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오늘 다시 내 사위가 되리라 하니라”
사울 왕이 다윗에게 고위직을 주는데 그 주는 이유가 적들에 의해서 제거시키기 위해서 고위직을 줘요. 내가 준 업무를 제대로 못할 경우에 너는 완전히 잘린다는 겁니다. 이게 사울 본인이 보는 세상 모습이에요. 사울은 왕이고 다윗은 부하로 의도적으로 채택한 이유가 그 당시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면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게 하신 분은 누구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잖아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는데 사울은 내가 나를 보는 그 시선으로 다윗을 평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백성들이 다윗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신경 쓰고 있다는 말은 평소에 사울의 관심사가 백성들이 나만 주목하기를 바라는 관심사의 연속이에요. 연장이에요. 내가 나를 평소에 생각하는 방식으로 말하게 돼있거든요. 말하고 행동하게 돼있어요.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게 아니고 상대방을 통해서 나를 더욱 더 나답게 이해하는 방식을 상대방에게 전도하는 거예요. 강요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나와 타인 간에 항상 뭐가 생기느냐 하면 오인이 생겨요. 잘못 되게 하는 거예요. 이 오인은 잘못 되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되고 싶은 나와 나 사이에 여기서 오인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나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괜찮은 존재인 줄 알고 있는 거예요. 남은 죽어도 자기는 안 죽어야 되고 남은 아파도 나는 건강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계속 오인이 내 안에 작동하고 있는 거예요.
사무엘상에서 다윗에게 고위직을 주면서 네가 성사하면 내 딸과 결혼시켜 줄게. 이 모든 제안을 하는 것은 사울 본인이 다윗에게 그렇게 하게 되면 다윗은 나라도 붕 뜨겠다. 뭐 되겠다하는 것처럼 다윗도 내가 원하는 세상 권력을 너도 같은 인간인데 너도 원할 게 아니냐? 내가 사람 볼 줄 몰라? 사람은 다 그렇고 그렇지. 그렇게 생각한 거죠.
그런데 제가 아까 했지요. 다윗은 뭐라 했습니까? 무엇의 징조, 무엇의 증상이라 했습니까, 누구의 증상? 하나님의 증상이거든요. 하나님의 일이거든요. 사울은 다윗 안에 하나님이 다윗보다 더 세게 주도적으로 있다는 것을 사울은 지금 상상도 못하는 겁니다. 자기만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다윗은 한 마디로 말해서 그 시대의 비밀이에요. 다윗 존재 자체가 비밀입니다.
다윗이 비밀이라는 말은 어렵게 말해서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드러내는 순간 인간에게 신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예수를 제거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에게 신은 영원한 비밀이어야 하는데 그 하나님이 그 비밀봉투를 찢고 비밀을 공개해버렸거든요. 공개하니까 내가 평소에 생각한 그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 그걸 유지해야 나한테 이익이 되니까 그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 앞에 누굴 제거해야 됩니까? 예수님을 제거할 수밖에 없어요. 그게 바로 십자가 복음입니다. 내가 나를 제거하기 싫어서 예수님을 제거한 거예요. 그게 복음이에요. 그래서 성령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의 하나님 됨을 위해서 날마다 나를 제거하는 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얼마나 우리는 우리 위주에요. 우리 자신밖에 모르기 때문에. 나를 제거하게 되면 뭐도 제거되느냐 하면 평생에 내가 일구어놨던 모든 성과와 실적, 이거는 내 자식이다, 내 가정이다, 내 재산이다 이 모든 것도 누구의 표적이 되느냐 하면 성령님의 표적이 되어 제거대상입니다. 모든 게 제거대상이에요.
거기서 나오는 영어단어가 있다면 이거지요. 간단해요. 여러분 다 아시다시피 why me? “왜 하필이면 납니까, 주여. 왜 하필이면 이런 암에 걸립니까, 왜 하나님이여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왜 납니까?” 그것은 주께서 나와 나를 이별하기 만들기 위해서. 인간은 늘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누굴 만나든 이별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남편도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차하면 갈라서자. 이럴 것 같으면 헤어져.
우리는 이별할 준비가 돼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28편에서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에게는 이별이 없습니다. 뭐 기쁜 소식이라 해도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에겐 이별이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시선과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자기 것을 담기 위해서 했기 때문에 자기가 담아 있는 자기와 이별할 수 없어요. 끝까지 가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한테 성도와 이별이 없음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필히 조건이 뭐냐? 나는 나와 이별해야 돼요.
그래서 여기서 노래 가사 하나 적어드릴 테니까 내가 나와 이별하는 그 순간을 묘사한 가사입니다. 적어볼게요. “어떻게 돌아왔는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아무 생각이 안 납니까? 한 번 불러볼까요? 양수경이 불렀던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거기 보면, “예감할 수 없었던 이별이었기에” 예감할 수 없는 이별, 이게 내 중심의 세계, 이 세상을 내가 바라보는 식으로 구성된 세계에서는 예감할 수 없다는 것은, 그가 헤어진 게 아니고 내가 구성한 내 세계로부터 내가 벗어나야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거예요.
거기에 결정적인 가사가 나옵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했던” 이거는 보통 용기 아니면 이런 가사 못 써요. 나보다 더, 아마 자길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가사를, 실제로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제발 프리즈 너를 잊어라 이 말이죠. “네가 너를 붙들지 않더라도 너를 붙드는 사람 따로 있잖아. 그런데 왜 네가 자꾸 너를 붙들려고 해, 아끼려고 해.”
그래서 나오는 그 다음 가사가, 이런 가사는 아니지만 약간 변경하면, “아직도 내게 내 모습이 남아있나요” 이게 바로 성도의 기도 아닙니까. “주님이여, 아직도 내가 내 것을 아끼고 내 것을 쥐려고 하는 그런 모습이 아직도 육적인 모습이 남아있습니까” 이런 기도에요. 그 다음의 가사, “내 모습이 정말 싫어요. 내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나와 어느 시점에서 나랑 헤어져야 됩니까, 주여.”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이거는 노래 가사기 때문에 노래 가사 세계에서 보면 나와 남과의 이별을 이야기하잖아요. 무슨 이별입니까? 나와 남과의 이야기잖아요. 이별은 이 세상은 아무리 좋은 사람 만나고 부부가 자식을 낳아도 전부 다 이별을 할 준비를 하세요. 그게 주의 뜻이에요. 세상과의 모든 이별을 함으로써 이별되지 않는 분이 따로 계시다는 것, 영원히 이별이 없는 세계, 그것을 위해서 결국 이별할 수밖에 없는 그 세계를 준비해놓은 겁니다. 그게 바로 죽음이에요.
버티다, 버티다 못 버티면 인간은 자기와 이별합니다. 그게 자살이에요. 너무나 고통을 참기 힘들어서. 세상사는 고통에서 이별의 고통에 제일 참기 어려운 게 지옥인데요. 지옥의 고통은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내가 죽어서 자식이나 누군가 타인과 헤어지는 고통, 남이 겪는 고통도 있지만 이거는 지옥 고통 아니에요. 지옥 고통은 뭐냐? 내가 살아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고통, 이게 지옥 바로 고통이에요. 이게 내가 살아 있으면서 뭘 느낀다? 이별의 고통을 그 참담함을 온 몸으로 다 받아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지옥에는 내가 안 죽어요. 안 죽어서 지옥이 고통스러운 거예요. 내가 그냥 죽어 없어지면 그까짓 것 불기둥이든 뭐든 내가 죽으면 그만이죠, 뭐. 죽으면 고통도 없는데 그만하면 살다가 힘들면 지옥 가지, 이러면 되는 문젠데 이게 안 죽으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죽지 않으니까. 그걸 이스라엘은 어디서 경험하는가? 살아 있으면서 경험하는 거예요. 그 경험을 누가 받아주는가? 그게 바로 다윗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통 속에서 이 세상과 이별 속에서 시편 28편을 남기는 거예요.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자기 안에 장차올 메시아가 살아 있어서 이 메시아 되시는 분, 하나님 되시는 분이 인간과 소위 하나님 백성이라는 자들과 어떻게 강제로 이별해야 되는가를 그것을 미리 다윗 시대에 다윗 속에 담겨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목사님 나는 어떻게 삽니까, 라는 질문자체가 성립 안 되고 내 안에 계시는 주님께서 다윗 같은 고통을 우리 함께 고스란히 다 같이 체험하고 재현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28편은 이 말씀덩어리가 현재 우리의 삶에 설계도로서 우리 안에 이미 쳐들어온 거예요. 우리가 시편 28편 말씀대로 살자가 아니라 그건 엉터리고, 이단이고 말씀이 알아서 우리 안에 들어와 버린 거예요. 이게 복음이고 진리에요.
나의 세계 완전히 개 무시당하고 주님의 말씀의 세계가 나를 완전히 장악하고 지배하는 것, 그리고 이끄시는 것. 그럼 이끄시면 저는 구원받습니까, 라고 질문할 건데 구원을 받는 문제가 아니고 무엇이 악인이고 무엇이 성도인가 이 대비되는 이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 예수님처럼 이웃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 말이에요. 사람과의 이웃으로. 무엇이 나한테 이익이냐, 손해냐 하는 그런 질문은 더 이상 우리한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악인과 성도는 우리 안에 다 들어있어요. 내가 악인이고 내가 성도거든요. 이건 뭐냐? 내가 보는 것, 내가 세상 보겠다는 고집, 이건 악인의 역할이고 보여지는 것, 십자가 지신 주님께서 날 어떻게 보는가, 이거는 성도의 시선이고요. 두 개의 시선이 우리 안에 계속 작동하고 있습니다. 작열해요.
그래서 시편 28편은 주님께서 이웃으로 내려오시는 과정, 이것을 다윗의 일과 속에 삶 속에 그대로 집어넣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신앙대로 살았느냐? 아니요. 다윗은 환경대로 살았어요. 가만있어도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서 본인이 원치 않는 길로 계속 시달리고 후달리며 살은 거예요. 골리앗 만나자 골리앗과 싸울까 이런 것도 주께서 그런 환경을 조성하신 겁니다.
우리가 주어진 하루일과가 내가 만들어낸 내가 의도한 게 아니에요. 주께서 의도했는데 무슨 의도? 악인이 누구냐를 네 자신을 통해서 드러내고 거기에 대비가 되는 성도가 누구냐를 네 자신으로 드러내라고 우리에게 지금의 환경을 준 거예요. 나는 착하다, 나는 훌륭하다 지금 이것 자랑질 하라고 주신 환경이 아니고 그냥 세상 속에서 후달리고 시달리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런데 이러한 관계가 우리에게 기쁨과 감사가 되는 거죠. 세상에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에게 주님의 일을 주를 위하여 주의 일을 하도록 이렇게 주께서 택하여줬다는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래서 우리가 시작은 악인의 역할을 하지요. 우리가 이거는 잘해요. 왜? 태생이 주특기가 할 줄 아는 것이 이것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이거는 뭐냐? 가능성, 우리는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가능성은 나 지키는 것, 그게 악이잖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성도 되는 것은 뭐냐? 불가능성이죠. 그러니까 불가능성이 가능성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거예요. 매일 삶 속에서.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새로움이에요. 새로운 체험하겠다고 오늘은 아침이슬 먹고 다음에는 양주 먹고 술 바꾼다고 그게 새로움이 아니라 새로움은 계속 다시 도루묵이라 하죠. 도로 악인이 되는 내가, 내가 보는 나를 지키고 싶은데 주님께서는 그것을 주님 보시기에 너 악인도 하나의 역할이라고 알려줄 때 그것이 덮쳐올 때 비로소 우리 자신으로부터 또 다시 헤어지는 순간입니다. 전에는 이별하면 슬픈데 이제는 이별이 기쁘고 이별하는 재미로 사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20211213b 부산강의 : [시편]44(28:3)-나와의 이별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악인이 뭔가를 알았어요. 주님의 입장이기 때문에 주의 이름의 시선으로 볼 때 악인이 뭐고, 그리고 성도는 뭐냐 알았습니다. 성도는 항상 없어요. 없고 악인에서 생산해내는 겁니다. 악인에서 출발해야 성도가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악인은 방어적입니다. 방어적이란 말은 이 안에서 저항해요. 그래야 이게 인간이지만 그 안에 악이 들어있다는 것이 확인돼요. 악은 하나님에 대해서 저항할 때 악이 돼요. 저항 없는 악은 없습니다. 항상 방어적이고 저항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 우리 몸 안에서 계속 벌어지니까 힘든 지옥의 참상을 우린 미리 삶을 통해서 경험하게 돼요. 그래서 삶을 통해서 경험하면서 악인에서 성도 되는 순간 여기서 뭐냐 하면 찬송이 나옵니다. 찬송이 나오는 순간은 내가 어떻게 되든 나는 잊어버렸습니다가 찬송의 내용이 돼요. 가사 내용이 됩니다.
“주여, 저에 대해서 주께서 저를 잊어버렸듯이 저도 나에 대해서 기억나지 않게 하옵소서. 잊어버리게 하옵소서.”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나의 악을 기억하지 마옵소서.” 다른 말로 하면, “저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같은 말이에요. “나에게 지은 모든 죄가 없어지게 하옵소서.” 그 죄가 뭐냐 하면 내가 뭘 짓는 게 아니라 내 자체가 죄 속에서 태어났기에 내 자체가 죄가 되거든요. 주여, 저를 잊어달라고 하는 그게 기쁨이니까 기쁨에서 나온 찬송이 되는 겁니다.
시편 6편 5절에 보면, 찾는 시간도 아까워서 내가 먼저 이야기해버립니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여기서 주님을 기억한다는 말을 같은 말로 뭐냐 하면,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기억의 내용이 뭐냐? 감사하기 위해서만 이 땅에 주 안에 존재하는 자가 성도다. 감사하기 위해서만. 나 이렇습니다, 라고 지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오직 주께만 감사하기 위해서 나타나는 자가 성도의 모습이에요.
그러면 그 모습이 이 양면에서 드러나려면 출발을 어디서 해야 되는가? 항상 악에서 출발을 해야 돼요. 인간은 자기 방어, 자기 저항하기 때문에 항상 긴장상태기 때문에 감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내 것 건드리기만 해봐라, 이런 식인데 무슨 감사가 돼요. 바짝 졸아있는 데요. 찬송이 되니까 성도가 여기서 나를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영향력과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해서 희생에 대해서 감사를 느끼는 겁니다.
내가 잃어버릴 수 없는 나를 잃어버리게 해줬으니까 홀가분하니까 더 이상 내가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나에게 책임질 필요도 없고 내가 나를 건사할 이유도 없어요. 이게 구약은 이렇게 되는데 신약은 이렇게 돼요. 신약은 아예 찬양덩어리, 찬송덩어리 되기 위해서 우리를 아예 죽은 자로 봐요.
그러니까 신약 성도 입장에서는 안 죽었다 악인, 죽었다 성도, 그런 고백의 대조가 우리 안에서 계속 같이 병행에 들어가는 겁니다. “나는 안 죽었다, 버틸 거야.” 이것과 “나는 죽었잖아, 버틸 것도 없잖아. 버틸 것도 없는데 내가 뭣 때문에 쓸데없이 우울증과 불안과 슬픔과 왜 거기 빠져있지? 뭐 있어야 불안이고 지킬 게 있는데 지키고 자시고 말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되지.” 하고 찬송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입장에서 볼 때 주님의 시선으로 볼 때 찬송이 아니면 이것은 언어가 아니라고 본 거예요.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로 보는 겁니다. 찬송이 아니면. 그러면 인간은 뭐냐? 인간은 방어하기 위해서 뭘 하느냐? 방어하기 위해서 말들을 쏟아내요. 언어는 두 가지로 돼있습니다. 하나는 은유요, 하나는 환유입니다. 벌써 은유, 환유 나오면 골치 아프지요.
은유란 말은, 은유와 환유란 비슷한 말인데요 둘 다 비유거든요. 비유란 말은 꼭 집어서 정확하게 그 대상에 대해서 지시할 내용을 내가 모르겠다는 겁니다. 여기 테이블이 있잖아요. 탁자가 있다면 이게 테이블이다, 또는 탁자라고 할 때 이 탁자란 개념 안에 뭐가 포함되느냐 하면 내가 바라본 탁자의 내용이 들어있어요.
사과가 있다면 쓸 때는 ‘사과’라 쓰지만 이 사과에 대해서 나름대로 지난 추억 같은 게 여기에 담긴 사과에요. 그냥 사과가 아니고. “아이고, 서울 간 내 둘째 아들이 저 사과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저 사과 볼 때마다 둘째 아들 생각난다.” 이거는 본인만 알고 있는 거예요. 사과 파는 장사꾼은 그걸 몰라요. 당신 둘째 아들 위해 사과 사가세요, 이럴 수 없다. 그 말 하고 난 뒤에,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둘째 아들을 위해서 사과 한 상자 사시죠.” 이렇게 되지만 그걸 듣기 전에는 이 사과는 그냥 사과일 뿐이죠.
그런데 어떤 과학자가 사과를 볼 때 이 사과는 뉴턴이 사과 떨어질 때 만유인력을 발견한 계기가 됐다는 그 사과, 나도 그런 법칙을 만들어서 세계적인 노벨상 탔으면 좋겠다. 그런 내용으로 사과를 본다니까요. 또 어떤 목사는 사과를 볼 때마다 내가 설교하니까 교인들이 듣기 싫다고 나한테 사과 집어 던졌다는 그 사과.
꼭 사과에 대해서 어떤 지시를 하거나 말을 내뱉거나 글자를 쓸 때 나를 비껴서 정확하게 그걸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은 인간에겐 없습니다. 다 자신의 선입감을 집어넣어서 모든 걸 표현하게 되었어요. 단어는 동일한 사과지만 그렇게 돼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 세상의 어떤 피조물도 그냥 인간은 가만두지 않아요. 전부 다 내게 의미가 되도록 일방적으로 나한테 차용해서 용어를 갖다 붙이는 겁니다. 태양도 마찬가지고 달도 마찬가지고.
어제 제가 오후에 설교한 것처럼 달, 태양 열심히 연구하고 달의 밀도가 어떻게 가는데 며칠 걸리고 몇 시간 걸리고 다 계산해봤자 원래 달과 해의 주인공은 따로 있거든요. 누구십니까? 우리 주님이잖아요.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예를 잠시 하게 되면, 갈릴리 바다에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배를 타고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모두 다 어디에 갇혀있냐 하면 갑자기 불어오는 풍랑에 갇혔어요.
이 대목에서 제자들은 우리는 풍랑에 갇혔다고 이야기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비유입니다. 이 풍랑이 어떤 풍랑인지 전혀 계산을 못하고 우리는 풍랑에 갇혔다는 거예요. 옛날에 우리가 살던 경험에 의하면 풍랑 만나면 졸지에 배가 침몰하고 우린 다 죽었다. 이렇게 되거든요. 주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뭐냐? 죽으면 어때 주님과 함께 있으면 되지, 이게 주님이 원하는 정답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무섭게 불어오는 풍랑, 우린 죽었어. 죽으면 끝이다. 모든 의미가 나의 죽음으로 끝이나버렸어요. 그 말은 살아생전 내내 누구만 찾았다? 내 살 궁리만 했다는 그게 완전히 뽀록난 거예요. 완전히 폭로된 겁니다. 주님께서 풍랑이 일어날 때 풍랑에 갇혀있다. 다른 말로 하면 풍랑에 갇혀있다는 말은 어디에 갇혀있다? 죽음에 갇혀있다는 걸 저절로 고백한 셈이에요.
이 말은 뭐냐? 죽음 밖에 대해선 우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한 거예요. 죽음 밖에서 불가능하게 되면 죽기 전에 있던 모든 가능성도 실은 가능성이 아니고 오인한 거고 오해한 세상을 잘못 보고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일어나서 풍랑 꾸짖는 게 아니고 먼저 제자부터 꾸짖었어요. 왜 믿음이 없는가? 다른 말로 하면, 왜 혼자 사느냐? 어떻게 세상을 끝까지 너 혼자 사냐? 니가 판단한 대로, 니가 생각한 대로 네 과거의 선입관에 의해서 네가 의미를 주는 그 방식이 아직도 왜 유지되는가?
나는 폼으로 있나, 뭐예요? 그러니까 그 말은 뭐냐? 제자들이 예수를 볼 때 믿습니다,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살기 위해서 당신을 이용하겠습니다, 라는 뜻으로 믿습니다, 란 단어를 사용한 거예요. 그게 악인이에요. 지금 제자들은 슬기로운 지옥생활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이 슬기로운 지옥생활을 뭐로 바꾸느냐? 살기 있는 지옥생활로 바뀐 거예요.
니 지옥은 니가 스스로 자초한 거잖아요. 지옥에 딱 맞는 존재가 되어 있으면서도 지옥이 괴롭다고 외치고 있으니까 이거는 본인이 본인에게 닦달 내는 것과 똑같은 거죠. 지옥은 자기가 형성시켜놓고 어 지옥 있네, 이러고 있다고요. 실컷 살다가 지옥 가니까 어 지옥 여기 있네. 니가 만들었잖아요, 니가. 평소에 니가 만들었잖아.
지옥의 특징은 뭐냐? 나를 위해에요. 천국의 특징은 주를 위하여, 말은 맞는데 그걸 바꾸겠습니다. 나를 위하지 않는 세계. 불가능한 세계에요. 그래서 악인에서 올 때는 불가능함에 도달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말을 해도 자기를 위해서 정확하게 못하니까 그냥 일단 던져보는 거예요. 그걸 의미를 압축시켜보는 겁니다. 내가 내 아들이 좋았던 사과, 너무 길잖아요. 그러니까 ‘사과’ 압축시킵니다.
압축시킬 때 뭐냐 하면 그 압축된 말을 통해서 나를 계속 지켜내는 식으로 방어적이에요. 방어가 연속되면 그게 공격이 되는 거예요. 방어하기 위해서 공격하거든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지키려하니까 무조건 방어적이에요. 방어적인데 그게 극한 환경에선 두 가지 방식이 있어요. 하나는 파괴적이고요. 정 안 되면 죽으면 되니까 파괴적. 나를 파괴해서라도 나를 지키고 싶은 거예요.
예를 들어서 교양 있는 체 평생을 40년 결혼생활 교양 있게 살아왔던 어떤 결정적 순간에 남편 바람피웠다는 소릴 듣고 교양이고 나발이고, 나 교양 지키면 남편이 잘해줄 줄 알았는데 소용없다. 히스테리 발병해서 그릇 다 깨버리고 남편과 찍은 사진 다 찢어버리고 남편이 준 다이아는 비싸니까 챙겨놓고, 너 죽고 나 죽자 발작을 일으키면 남편이, “교양 있게 해.” 교양은 방어적이에요. 자기가 파괴되기 싫어서 교양 있게 하는 게 방어적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 자기를 스스로 방어하는 방법은 자기를 독보적으로 들어내는 방법이 있어요. 옛날에 여자가 자기가 참을 때는 빨간 립스틱을 발랐거든요. 립스틱을 짙게 발랐잖아요, 빨간색으로. 요즘은 뭐냐 하면 빨간 구두, 확 돋보이게 빨간 구두. 자기 딸과 싸워서 회사 회장 되는 최명길 나오는 드라마 100회로 끝나는 거 KBS2에서 하는 <빨강구두> 있거든요. 구두 공장 회장 직 놓고 싸우는 자기 딸인 줄 모르고 두 번 죽으려 한 그런 드라마 있어요. 참 그 드라마 보는 사람들 인내심 대단해요. 진도 나가지도 않는 드라마 100회나 본다고.
빨간 구두란 돋보이는 나 여기 있음, 나 방어할 거야. 제발 빌붙지 마라. 나는 내가 지킨다. 빨간 구두죠. 목사들이 로만컬러 비슷하게 제복 입잖아요. 제복이 바로 그거에요. 제복이란 건들지 마라. 건들면 죽여 버린다는 뜻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 은유거든요. 압축해서 옷의 제복, 빨간 구두 이게 전부 다 은유입니다. 그 안에 강력한 방어체제가 사드 방어체제가 담겨있어요.
어린애는 성질나면 지 방에 들어가 문 잠가버리죠. 옛날에는 자기 방에 문 잠근다는 것이 국민학교 다닌 우리들은 상상도 못했어요. 어떻게 네 방이 다 있어? 방이 하나 아니면 두 개기 때문에 자기 방이 있다는 건 놀라운 거예요. 얘는 다섯씩 낳았지요. 그런데 언제부터 자기 방이 생겼어요. 얘들은 자기방어가 더욱 더 강력해졌지요. 문 잠가버리는 거예요. 도끼 들고 부술 수도 없고요. 달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나중에 버릇 돼서 인간 버릇 드럽게 들여놓은 거예요. 자기방어.
그 다음에 은유가 되다가 새로운 욕망을 만나면 이게 은유가 환유가 돼요. 대체해버려요. 다른 걸로 자꾸 대체해요.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데 욕망거리가 취미생활 자꾸 바뀌듯이 계속 대체해버리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자기합리화요 자기 방어하는 방어술이에요. 어쨌든 간에 나를 건사해야 되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사회라는 거.
사회는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고요 집구석 안 나가도 사회는 사회에 통용되는 말과 언어를 만나는 그게 사회가 됐어요. 인터넷에 만나는 모든 게 사회입니다. 사회는 욕망의 바다에요. 욕망이 춤추는 바다. 그러니까 내 방어를 위한 말을 할 때 그 동일한 말을 타인은 어떻게 사용하느냐? 그 안에 내가 원하고 싶은 욕망이 그 안에 들어 있잖아요. 그러면 같은 단어를 써버리면 우리는 타인의 욕망에 마치 올라탄 것처럼 타인의 욕망에 섞인 것처럼 본인이 착각하게 만들어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회사에서, “오늘 아침에 이 물건을 대리점에 두 시간 내에 다 옮겨.” 이건 뭡니까? 말이죠. 너무나 일상적이죠. 하지만 이게 사회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이 물건을 과장이 시키는 대로 내가 대리가 되어 차를 운전해서 두 시간 내에 멀리 있는 대리점에 갖다 주게 되면 나는 뭐가 되냐? 나는 과장한테 대리로서 인정을 받아요. 인정을 받으면 이게 힘이 되고 힘이 되면 내 방어에 유리하게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사회생활이고 사회입니다.
남들의 욕망에 내가 그 배에 같이 합승하는 거예요. 탐으로써 내 삶의 안정성을 보장해주는 거예요. 이게 말로서 형성되는 사회성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욕망에 형성된 나. 그러면 방금 과장한테 내가 일해서 오늘 다 했습니다. 인정받지요. 인정받는 나와 내가 원하는 나와 이걸 동일시되는 거예요. 이건 자기만의 상상한 겁니다.
그랬는데 대리점에서 연락이 왔어요. “물건 운반 누가 했습니까? 똑바로 해. 물건 하자 생겼습니다.” 갑자기 예상 못한, 과장한테 인정받았는데 여기에 대리점 점장이 쑥 들어왔지요. 그러면 나는 결여, 결핍이 생기면서 나의 동일성에서 깨어져요. 깨어지게 되면, “아이고, 물어줘야지요. 내가 빨리 가서 하자 보수해드리겠습니다.” 할 때 이게 뭐냐 하면 새로운 내가 되어야만 하는 그 아픔을 겪는 겁니다. 이게 방금 한 살기로운 지옥생활이에요. 살기가 넘치는 지옥생활.
언어의 명령과 지시에 타인의 욕망, 그런 것들이 어떤 때는 콱 죽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주께서는 삶의 지평에다 의도적으로 이걸 거기다 보내버립니다. 삶의 지평에다 활동하도록 해버려요. 왜? 우리 속에는 악인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활동을 해줘야 내가 불가능한 찬송이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루 종일 생각하는 것이 남들로부터 인정받아야 되는데 과장한테 인정받지만 어디까지 인정받아야 되는가? 대리점 점주한테 인정받아야 돼요. 그래야 내가 오늘 편히 퇴근할 수 있어요. 안 그러면 퇴근을 못해요. 힘들 때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꼭 이렇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생각이 들지요.
죽는다는 것은 뭐냐 하면 파괴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죽으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죽음에 대해서 주님의 이름이 알려주는 죽음의 개념이 내 개념과 다릅니다. 내 개념은 내 죽음은 그만이지만 난 없어진다 하지만 주님의 이름의 개념은 죽어도 악한 자로 부활돼버려요. 아하, 골치 아픕니다. 한 번 태어난 것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안 돼요. 안 되게 돼있어요.
그럼 여기서 첫째 시간 그렇게 기분 좋다가 둘째 시간하니까 기분 또 흔들리지요. 대안이 있어야 되지요. 대안이 뭐냐? 히브리서 11장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다.” 믿음은 네가 허상임을 알려준다. 여기 믿음은 인격화 되어 누구냐 하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과 나 사이에 예수님은 너를 허상으로 다뤄지니까 이게 증거가 되는 거예요. 주님만 실상이고 너는 허상인 걸 보여주는 증거로서 너는 내 세계에 동원되었다는 겁니다.
그래놓고 여러분 잘 아시죠. 어떤 사람은 거의 줄거리 다 아는 사람 있지요. 제가 이야기해볼까요. 에녹은 죽을 때에 항상 뭡니까? 그러니까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신앙인의 특징은 곧 믿음의 발현되는 시점이에요. 항상 본인이 자살한 순간이 아니고 주님이 본인의 방어선을 없애버리는 그 순간이에요. 다시 말해서 악인과 성도 사이에 주님께서 무슨 자리를 준비했는가? 죽음의 찰나 순간을 마련해놓고 여기서 인간의 방어적 언어가 찬송으로 바뀌는 순간을 타이밍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놓은 거예요.
말로만 하지 말고 히브리서 하나하나 찾아봅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예수님은 실상이요 우리는 허상이란 뜻이거든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예수님이 마련한 현실에 우리는 하나의 증거로 허상이 필요했다는 겁니다. 허상이지만 필요한 거예요. 우리 같으면 허상이니까 그냥 내버려두세요, 라고 되는데 허상이니까 실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실상을 통해서 꼭 필요한 허상으로 우리는 다뤄지는 겁니다.
“선진들이 이로써” 선진들이 이렇게 해서 뭐냐 하면 이 세상 나타난 세계 말고요 나타난 세계를 나타나게 한 보이지 않는 세계, 그 세계가 무슨 세계냐? 말씀의 세계에요. 그 말씀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선 툭툭 던지듯이 푸딩 안에 건포도 있듯이 우리에게 건포도 심어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우리가 허상이기 때문에 실상의 조치지 내가 하는 조치는 아닙니다.
자, 그 다음에 4절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여기 믿음을 뭐로 바꾸라 했습니까?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가인보다 아벨을 더 나은 제사로 수용했습니다. 수용했으니까 아벨은 졸지에 허상이 됐지요. 자기가 자기를 지킬 이유가 없다 이 말이죠. 아까 했잖아요. 죽음의 순간에 자기를 지킬 필요 없어요.
가인은 본인이 허상인 것을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니까 누가 바라봐준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실상인 줄 알고 끝까지 자기를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지키려고 한 결과가 뭐냐? 아벨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아벨 같은 방식으로 일관되게 주께서는 일하신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다는 말은, 주께서 개입하지 않으면 어떤 곳에서 성도, 거룩한 자, 의로운 자, 의인 발생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벨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아벨이 의인이 아니에요.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의인이 될 수 없어요. 의인이 될 수 없었는데 의인이 된 것은 누가 개입해서 그래요. 그래서 개입된 주님과 아벨 사이에 뭐가 형성됐습니까? 믿음이란 것이 형성된 거예요.
그 다음에,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에녹이 하는 역할이 뭐냐 하면 죽음이 다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역할. 그 다음에 노아 봅시다. “믿음으로” 그러니까 믿음이란 말은 예수님께서 노아에게,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방주도 아무것도 아니고 노아도 아무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흔적이 계속 남는 거예요.
다윗 같은 경우에 다윗은 무엇의 징조라 했습니까? 하나님이 일하시는 징조에요, 다윗은. 그러니까 오늘 시편 28편을 통해서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서 인간에게 형성될 수 없었던 악인이란 개념 형성됐지요. 그 다음에 거기서 악인, 행악자 나왔지요. 그리고 살아생전에 찬송이 되고 그 다음에 히브리서 하기 전에 시편 28편 4절을 보겠습니다.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대로 갚으시며” 자, 여기서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 다시 설명 드리면 악함이란 것은 무엇 때문에 악하냐 하면 낯선 이웃을 알아보지 못한 게 악함입니다. 혼자 지가 선악과 조치에 의해서 이건 나쁜 거다, 이건 악한 게 아니에요. 악함이라 하는 것은 제대로 주의 이름이 결정할 문제지 내가 악하다고 결정할 문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의미는 나 잘났다, 나는 정당하다 존재의 방어적인 요소가 개입되기 때문에 제대로 된 해석은 못하고 그냥 나 잘났음을 보여주는 은유요 환유에 불과합니다. 그냥 자기 방어적이에요, 인간은.
5절에 보면,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이 노시는 것이 아니고 부지런히 일하시는데 일하시는 것이 그냥 어떻게 하느냐? 상당히 과격해요.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한다 해서 인간이 나름대로 건설한 것을 꾸준히 평생 동안 건설하고 있다는 것을 여기서 미리 암시하고 있지요. 인간은 가만 놀지 않고 자기 성과와 실적을 계속해서 나 잘났음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삼는 거예요. “나, 인생 이렇게 살았어.” 뭐 이런 것 있잖아요.
그 다음에 나오는 게 6절에 보면,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아까 이야기했지요. 주께서 궁극적으로 인간이 자기 방어적 언어를 다 삭제시켜버리고 주께서 홀로 하셨다는 걸 찬송케 하는 거예요. 다시 히브리서 11장 봅시다.
노아의 여생은 장래 일을 예고하는 거죠. 그러면 첫 번째 아벨의 입장에서는 죽어도 좋아. 그 다음에 나오는 에녹은, 에녹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동행, 하나님과 함께 하심. 그 다음에 노아는 이질적인 것, 그러니까 장래 일에 필요한 것을 자기가 생산해내는 일, 이런 요소가 누적이 되면서 오늘날 성도한테 이 요소가 다 들어있습니다. 노아와 상관없는 게 아니에요. 노아에게 주어진 그 취지가 성도 되게 생산된 성도 안에 다 담겨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숙제 있단 말이 아니고 그냥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해도 주께선 자기 숙제기 때문에 뽑아내는 겁니다. 우리는 한가한데 주님은 바빠요. 되게 바빠요. 항상 이 점이 어렵기 때문에 다시 하겠습니다. 항상 우리는 뭐로부터 시작한다? 악인부터 시작해요. 그리고 성도는 누구 몫입니까? 주님의 솜씨에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성도를 다시 악인으로 돌리는 거예요. 계속 돌리는 가운데서 아벨 요소 튀어나오고 툭 아벨 요소, 툭 에녹 요소, 툭 노아 요소가 계속 돌리면서 나오는 겁니다. 이 전체가 우리로 하여금 찬송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그게 새로움이죠. 내가 장래를 생각한다? 이거는 노아 요소구나. 성도를 통해서 노아 요소에 대해서 늘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동시에 노아 같으면 앞에 있는 에녹과 아벨 요소가 노아에게 또 중첩돼있는 거예요.
그 다음에 봅시다. 아브라함 나오지요. 아브라함은 뭐냐 하면 알지 못하는,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8절) 알아버리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내일 일에 대해서는 몰라야 된다는 겁니다.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인간에게 내일은 없다고. 내일 되면 오늘이 돼버리니까 내일은 영원히 없어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은 시간 속에 있지 시간을 장악할 수 없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겁니다.
오늘 해운대 놀러갈까요? 갈 바를 몰라요. 해운대 가면서 차사고 날지 모르고 해운대를 결정하는 것은 나 잘났음을 자랑질 하면서 해운대 놀만한 자격이 있다는 의미를 담고 해운대라 했는데 해운대 가서 깡패 만나서 얻어터지고. 내가 이렇게 무가치한 존잰가, 그건 아무도 모르지요. 그러나 주께서 까라면 까야지요. 그게 아브라함이에요.
아브라함은 모든 매사에 있어서 어깃장이 난다는 인생을 살아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악인 역할을 충분히 하면서 아브라함의 악보다 주님의 언약이 더 센 것을 보여주는 역할이 바로 아브라함 역할입니다. 그 아브라함 역할을 오늘날 우리가 그대로 받고 있습니다. 평가를 바라보는 자, 주님이 평가하기 때문에 내가 나를 평가하면 안 돼요.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것은 시작점이 악인으로 시작점, 자기 변명하려고 나는 잘해보려고 했습니다, 이게 악인들이 하는 짓거리에요. 잘하는 게 뭔데? 몰라요. 그냥 내 것 안 다쳤으면 좋겠다는 다급함에서 튀어나온 말이에요.
그 다음에 11절에 사라가 단산하였다. 사라가 젊을 때 아기 낳을 수 있었지만 늙어서 결국 아기 못 낳고 단산, 아기를 못 낳는 여자로 끝나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보이는 세계와 나타난 세계 말고 보이지 않는 세계, 보지 못하는 세계는 이 땅에서 불가능으로 나타나요. 단산 됐으니까 아기는 없는 겁니다. 영원히 아기는 없어요. 아브라함 아기는 없습니다. 잉태한 자는 하나님께선 그걸 잉태로 안 쳐주기 때문에. 잉태치 못한 자에서 나와야 이것이 천국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이 복음은요 기존의 인간의 종교라는 것, 기독교라든지 종교 있잖아요. 이걸 아주 우습게 봐요. 그게 장난도 아니고 인간의 모든 불교라든지 천주교라든지 기독교 이것은 항상 중심은 뭐냐 하면 내가 나를 살리는 아이디어들이에요. 여기에 동원되는 모든 교리와 신학은 그냥 언어에요. 자기 방어적 언어, 나를 지키는 언어 이걸 주님께서 일체 인정 안 하지요.
네가 누구냐고 바로 훅 들어오면서 물어요. 너 누구야? 네가 뭔데 천국을 가. 나는 천국 가야 될 자격이 있는지 네가 그 증거를 내놔보란 말이죠. 언젠가 강의하면서 그런 이야기했는데 그 이야기를 여러분한테 써먹겠어요. 어떤 사람이 복음이 뭔지 이야기하거든 이렇게 물어보세요.
좁은 길로 간다는 말이 있는데 좁은 길이 어떤 길인지 상대방으로 설명하도록 해보세요. 무엇이 좁은 길인지. 답변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좁은 길을 설명하려면 어디가 턱 걸리느냐 하면 보편적이면서도 보편적이지 않는 요소를 설명해야 돼요. 뭐냐 하면 영생에 가는 길은 좁은 길이다. 보편적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뭘 집어넣습니까? 찾는 이가 없지요. 찾는 이가 적다, 없다 같은 말이에요.
그러면 좁은 길은 어디에 막혀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에 막혀있는 것이 좁은 길인 거예요. 이것을 어떤 사람이 설명할 때 너는 보편적이냐, 아니냐를 물어봐라. 네가 인간이냐, 괴물이냐 묻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나는 괴물이다, 하면 그 사람은 영생의 길로 가고 있고요 나는 인간이다, 하면 그건 탈락이에요.
왜? 너도 인간, 나도 인간 숫자가 많아지잖아요. 많은 사람이 가는 곳은 필히 어디 갑니까? 많이 사람이 동의하고 진리를 인정한다면 정통개혁신학 인정한다면 그건 어디 갑니까? 지옥 가는 거예요. 왜? 인간들은 그게 납득이 되니까. 정통개혁신학이 납득이 되니까요. 이런 것과 마찬가지에요. 너는 이단 될래, 이단 안 될래? 보편적인 것이 뭡니까? 나는 이단이 아니고 정통이고 싶어, 이러지요.
그러나 태어난 것이 뭐로 태어났습니까? 이단으로 태어나 이단에 누워 이단을 바라본다. 태어나기를 이단으로 태어났는데 이단 안 된다는 말은 그 자체가 이단이죠. 보편적이면서도 진리는 보편적인데 우리가 보편적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보편적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주께서 보편적이 아닌 식으로 보편적인 진리를 이야기한 거예요. 보편적, 몇 개 들어간 거야, 도대체. 모든 사람이 동의하기 때문에 그거는 진리가 아닌 거예요.
좁은 길 설명해보라 하면 그 사람은 버벅거릴 수밖에 없어요. 좁은 길 설명해봐야 영생의 길이 거기 있습니다. 당신은? 그러면 영생의 길 싫다는 말 하는 게 아니고 당신은 찾지 않는 쪽에 가렵니까, 아니면 많은 사람한테 인정받고 싶어요? 그 이야기란 말이죠. 그런데 영생은 저쪽인데 내가 사람한테 무시당하면 그건 싫다는 거예요.
그런데 좁은 길이 어떻게 설명하라 하면 설명하지만 내 행동에 주께서 그걸 물으신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모든 행동에서. 모든 사람이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 쓰는데 이건 보편성이잖아요. 나는 안 쓰고 빨리 죽을래. 마스크 쓰셔도 괜찮아요. 이게 빨리 죽으려고 쓰시면 괜찮다니까요. 살려고 쓰시면 스스로 좁은 길을 부정하는 행동을 보인 겁니다. 갑자기 마스크 써서 성도 아닌 게 돼버렸네. 그런다고 또 이야기 듣고 마스크 벗으면 지옥 간다고.
내가 구원받는 게 문제가 아니고 우리를 그렇게 다루신다는 겁니다. 제 말은. 너 어디 갈래? 이게 아니라 다루시는 거예요. 우리는 내가 천국 갈래, 지옥 갈래 그런 권한 없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내가 구원받을래, 하는 것도 이게 이단적인 사고, 이게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의 사고란 말이죠.
그 다음에 히브리서 11장 14절에 어디로 갑니까? 본향 간다 했지요. 이게 뭐냐 하면 주님의 코스가 언약의 완성코스기 때문에 그 코스에요. 내려왔다 올라갔잖아요. 그러면 이 땅에 올라가신 분이 올라가셨다는 말은 이 땅에는 눈을 씻어 봐도 영원한 본향은 없는 겁니다. 없으니까 우리는 나그네, 이 땅에서 나그네로 지칭 받는 것에 대해서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찬양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노아는 방주 만들었지요. 우리는 뭐하면 됩니까? 아브라함의 취지에 의하면 그냥 나그네로 살면 돼요. 맨날 없다. 여기는 내 고향이 없다. 저 어디에 다른데 새로운 개발지에 땅 좀 돈 남아있는 것 투기할까? 그래도 난 고향이 없어. 땅 투기는 다해놓고 만약에 “고향이 아니야. 이 땅에는 없어.”
그래서 전쟁이 나서 이북이 와서 땅 다 몰수하면, “그렇지, 그렇지 난 내 땅이 없다 했잖아, 평소에.” 돈은 거기다 다 집어넣고 “난 없어, 없어. 이 땅에 내 것은 없어.” 그럼 주님께서, “섭섭해?” “섭섭하기는요.” “인상이 섭섭한 것 같은데?” “아닙니다. 찬양입니다.” 억지로 조작해봐야 소용없지요. 그냥 버리고 할 것도 없이 얼마든지 나그네 삶을 살도록 조치를 합니다. 갑자기 안심이 확 되지요.
그 다음에 이삭 같은 경우에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19절) 이게 우리 자신보고 생각해요. 나는 죽어도 주께서 살려내시는 근거가 뭐냐 하면 주님이 본인이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그런 힘을 갖는다, 그런 희망이 우리의 근거 되면 안 돼요. 이건 지금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나는 죽어도 살 거야. 왜? 말씀대로 믿기 때문에.” 자기 믿음을 근거로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죽을 수가 없는 거예요. 다시 산다는 것은 욕심이지만 어쨌든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사실. 그걸 어디서 찾느냐? 성경에서 찾는 거예요. 말씀의 세계기 때문에. 우린 말씀의 세계의 증거기 때문에 연관성이 있잖아요.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여기 21절에, “야곱이 죽을 때에” 아벨이 죽을 때에, 아브라함이 뭐 할 때에 전부 다 뭡니까? 악인과 성도 사이에 죽음을 당겨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한테는 뭐냐 하면 지금 이미 죽은 거예요. 지금 죽는 그런 축복을 받은 거예요. 헤어지고 나하고 이별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말은 이렇게 쉽게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힘든 것은 내가 죽었음을 살아 있는 내가 매일같이 답습해야 된다는 게 굉장히 섭섭하지요. 얼마나 귀합니까? 내가. 그런데 나에 대한 미련을 갖지 말라고 강제조치를 당하니까 살아 있는 상태에서 나의 죽음을 늘 경험해야 되는 것, 이게 바로 성령의 경험입니다.
어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자기연민, 자기집착 이게 뭐냐 하면 어디서 생기느냐 하면 이게 바로 운다는 것, 내가 운다는 것은 여전히 나는 나를 못 보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나를 보내지 않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운다는 게 생각해서 우는 게 아니고 우선 울음부터 먼저 시작하고 그 의미는 해석은 그 다음에 해요. “내가 왜 울지? 아니야. 웃어야 돼. 그런데 얼굴은 웃는데 눈물은 왜 나지? 이게 눈물이냐, 빗물이냐?” 비도 오지도 않은데 무슨, 비가 와야 빗물이죠.
죽을 때 아들에게 어긋맞게 지팡이에 손 얹고 축복하고요. 그 다음에 요셉은 임종 시에 자기 해골을 가지고 들어가라. 이 말은 약속이 나보다 더 세다는 뜻이에요.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내 실력이 아니라 약속이 강하게 나를 쥐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 다음에 24절에 보면,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첫째 시간에 한 것 그대로 나옵니다. 모세가 움직임으로써 악과 그리고 새로운 의가 모세가 움직임을 보일 때 이게 구분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구원받는 게 목적이 아니고 나를 주께서 다루심으로서 이 세상에 무엇이 지옥 가는 사람이 무엇이 천국 가는 사람인지를 골라내는 작업에 우릴 현장에 투입한 거예요. 우리는 일종에 지게차, 또는 포클레인 같은 거예요. 도로공사에 동원된 기계에요. 기계 주인, 운전사는 누구냐? 주님이 올라타서 우리로 하여금 천국, 지옥을 이 세상을 정리하는데 동원됩니다.
뭐 지옥 가고 싶은 사람 누가 있어요? 그러나 성도가 등장하게 되면 이 소자한테 잘해준 것이 나한테 잘해준 것이라는 그게 양들에게 해당되지만 그 뒤에 말도 성도한테 못해준 것도 곧 나한테 못해준 것이다. 이게 그 이야기할 때 불신자가 어머나 무서워라, 누가 놀라겠습니까? 성도 본인이 놀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말씀은 성도에게 이야기하는 것이지 불신자에 먹히라고 협박공갈용으로 사용한 게 아니에요. “야, 내가 그 정도였어?” 본인도 본인의 가치를 그렇게 대단한 줄 몰랐던 겁니다. 본인이 본인을 너무 함부로 다뤘어요. 내 중심으로 다뤘던 겁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 들으면 돌아서서 나는 대단하다, 이렇게 까불다가 주님한테 얻어맞고 이러지요. 26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그 정도로 하고 다시 시편 28편으로 돌아가 봅시다. 지금 우리는 슬기로운 지옥 생활하고 있는 거예요.
그 다음에 시편 28편 7절에,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방패가 왜 필요합니까? 그냥 조용하니 살면 되지요. 깊은 산속에 자연인으로 살면 되지 방패가 왜 필요합니까? 주께서 악한 세상에 다윗을 그냥 던져버린 거예요. 악한 인간들이 먹잇감 왔다는 식으로 달려들겠지요.
달려들었을 때 다윗이 취할 태도는 자기 방어적이 아니고 뭡니까? 주께서 나를 지금 방패가 아니라 옛적부터 방패란 요소가 내 안에 주의 이름으로 요소로서 담겨있다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방패였다는 거예요. 주님이 방패 되기 위해서 내가 채택된 거예요. 주님은 방패요 반석이시오. 주님이 주의 보좌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신 거예요. 우리는 내 생각에 정신이 팔려서 오늘 점심 뭐 먹을까 그것만 생각해서 자기 배부른 것만 생각하지만 주께서는 말씀대로 시편 28편 7절대로 우리를 움직입니다.
8절 봅시다. “여호와는 저희의 힘이시오 그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산성이시로다” 산성, 힘 이 모든 것은 성소란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치열한 전쟁을 통해서 거기서 드디어 노출되고 있다는 겁니다. 제가 어제 주일 낮 설교하면서 끝부분에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성도는 모자를 벗기운 자라고 이야기했지요. 비슷한 이야기로.
모자를 쓰면 내 머리를 보호하는 폐쇄적이잖아요. 모자를 벗어보세요. 그러면 개방적입니다. 노출됐어요. 더 이상 개방성 속에 내 손가락도 집어넣지 못해요. 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냥 뻥 뚫렸어요. 오늘 제목은 뻥입니다. 뻥하면 거짓말이라 하겠다. 안 되겠다. 딴 게 해야. 그냥 뻥 뚫려서 통해요. 비 오면 비 맞고 눈 오면 눈 맞고 그냥 통해요. 주께서 하시는 일이 막힘없이 그냥 통하는 거예요. 이게 성도에요.
이게 성도인데 이런 말씀 다 잊어버리고 주님이여 나는 어떻게 살아야 구원받습니까? 다시 스스로 모자 쓰고 그 안에서 끙끙 앓는 거예요. 어떻게 이것도 믿고 저것도 믿는데 아직도 모자랍니까, 더 필요한 게 있습니까? 이러고 있다고 혼자 고민하고 있는 거예요. 모자만 벗으면 되는데 모자 벗을 생각을 못하고. 그게 뭐냐? 주님의 일이 마구마구 쏟아지는 그런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9절에,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철저하게 우리로 하여금 수동성, 피동성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피동적으로. 이 피동성에 순수한 찬송과 찬양이 나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의 세계에 들어가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치열한 다툼이 우리 안에서 벌어지게 하시되 그것이 찬송으로 나타나게 하옵소서. 감사로 나타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