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번
열세 번째 강의, 마지막 시간하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전후서를 통해서 베드로가 하고 싶었던 것은 고난이 있는 것이 당연한데 교회가 고난에 대해서 뭔가 두려워하고 이것은 정상적인 사태가 아니야. 라고 느낀다면 그렇게 느끼는 너희들이 뭔가 정확하게 주님의 복음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했는가가 의심스럽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이 교회의 집부터 시작되는데 하나의 예를 들면 현재 우리도 마찬가지거든요.
베드로후서 2장에 보면 방탕 하는 자, 호색하는 자들이 있다. 라고 했을 때 우리가 지난번에 했던 공식을 한번 집어넣어 봅시다. 정말 성도라면 뭣과 뭣 사이의 갈등이라고 했습니까? 선과 악 사이의 갈등을 일으키는 이 자아와 그리고 그것과 상관없이 주님의 속죄 받은 용서받은 그런 자아 사이의 갈등이라고 했지요. 방탕하지 마라는 말이 딱 나왔을 때 왜 하나님 말씀은 방탕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자꾸 방탕 하느냐? 라고 고민한다면 이분은 결국 뭡니까? 전혀 지금 복음을 이해 못한 사람이다 이 말이죠. 여기 방탕하지 말고 이런 자는 호색하지 마라 했는데 왜 자꾸 나는 방탕하고 호색하느냐? 정말 나는 도대체 어떻게 나를 구원해내지. 라고 이렇게 한다면 이것은 이 사실을 모르는 그냥 일반사람들, 선과 악 사이의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에 해당된다 이 말이죠.
소위 교회 내에서 이런 점이 있기 때문에 베드로전서에서 누누이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면 아주 신기한 능력이 오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죄 씻음을 받았다고 계속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능력으로는 이해 안 되는 이야기를 내가 벌이고 있다는 투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만약에 베드로전서에 의하면 어떤 복음을 갖는다든지 어떤 신학체계를 갖는다 할지라도 이것마저 마지막 때에 다같이 지워버릴 수밖에 없는 당위성, 정당성을 이유를 알지 못하면 사람들은 자기 안정성에서 비롯된 새로운 여기서 자기 신학을 구축하게 될 거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러한 구축이 진짜 하나님이 제시하는 몽땅 멸망하는 결국에 가면 이것이 충돌을 일으키는 사태가 벌어지는 겁니다. 제가 하나의 예를 들면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재림하신다 해놓고 멸망하신다고 해놓고 왜 아직 멸망 안합니까? 이것 완전히 사기 아닙니까? 라는 의심이 든다는 자체가 이미 자기 나름대로의 엉뚱한 사고방식에서 안정성을 확보했기 때문에 주님이 재림하시고 멸망한다는 것에서 약간의 의심을 품을 수도 있고 에라이, 이것 교회 사기 아니야, 벌써 온다 하고 몇 천년 지나갔어? 라고 그 어떤 반발이 나올 수 있는 그 근거를 찾아가는 겁니다. 이 안정성, 이 안정성이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저는 베드로후서 3장을 들어가면서 여러분들이 주의해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이 원칙을 항상 제시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선과 악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고 자꾸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은데 나는 왜 못사느냐? 라는 쪽이라면 성도는 그것조차 날아가 버려야 돼요. 아, 주께서 그냥 주시는 거구나. 라는 생각을 내가 선과 악을 싸우든 안 싸우든 상관없이 그냥 주시는 걸로 구원되는구나. 라는 것이 확실하게 있어야 돼요.
3장에 보면 물로써 멸망했다는 이야기를 해요. 이점에 대해서 우리가 한 번 더 해봐야 돼요. 왜 하나님께서는 물로써 그들을 멸망시켰느냐? 시편 119편을 찾아봅시다. 84절인지, 54절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안 나는데. 89절, 시편 119편 89절에 보면, 구약성경892페이지 보시면 제가 읽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할 때 말씀으로 창조했고 말씀으로 창조해 놓고 말씀이 거기서 손떼는 것이 아니라 창조된 그 속에 말씀의 원칙이 말씀이 다 충만하게 담긴다 말이에요. 욕조에 물 채우듯이 욕조만 만든 것이 아니고 거기다 물까지 채워 넣는 욕조를 만들듯이 이 세상은 말씀을 담는 욕조로서의 노릇을 하라고 이 세상을 만드는 겁니다. 말씀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서. 그래서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성경에 응하게 하기 위해서 말씀에 응하게 하는 그런 조건을 유지하라고 다한 겁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베드로후서를 생각해 보세요. 왜 물로써 심판해야 했습니까? 그것은 말씀에 의해서 성경에 노아에 의하면 물로써 심판받는다고 이미 사전에 말로서 했습니다. 했어요. 그게 베드로후서에 나옵니다. 세상은 뭐로 만들어졌습니까? 5절에 누가 한번 읽어볼 랍니까?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때 알지요.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다. 그걸 누가 모릅니까? 그렇게 만들었겠지요. 그게 아니라 말씀으로 만들었을 때까지만 말씀이 아니라 만들지는 그 안에 말씀이 철철 넘치도록 계속 작용한다는 것을 왜 너희들은 모르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물로써 심판하신 것은 말씀에 의해서 그렇게 물로써 심판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물이냐? 그것은 바로 유다서에 보면 나오는데요. 유다서에 보면 노아가 물로써 심판한다 할 때에 유다나 에녹이나 그것은 단지 물로써 심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때에 모든 우주가 다 없어진다는 것을 예고편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앞당겨서 물로써 심판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역사를 볼 때에 압축시켜서 한꺼번에 본 것이지요. 한꺼번에 본 것이라면 우리는 시간이 제한이 있어서 짧은 것, 예를 들어서 짧은 80년, 90년, 짧은 80, 90, 100년, 짧은 1000년 밖에 모르지만 그 말씀에 보면 이게 시간을 영원까지 다 압축시켜서 한꺼번에 다 이야기해주니까 80년, 90년만 사는 인간들이 그것을 짧은 것만 파악하고 나머지는 손을 떼고 모르는 상태에 있죠. 모르는 상태면 모른다고 하면 되는데 아니야, 아니야, 불로써 심판 없어. 안돼. 그렇게 심판하지 않아. 자꾸 이렇게들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중심의 안정성을 그렇게 자기중심으로 반경을 넓혔기 때문에 넓혀 봤자 지. 넓혀 봤자 몇 미터, 몇 년밖에 안돼요.
그런데 베드로후서는 뭐냐 하면은 물 심판을 통해서 너의 반경을 너의 안정성 중심으로 잡지 말고 아예 말씀 속에 들어와 버리란 말이에요. 말씀 속에 들어와 버리면 특징이 뭐냐 하면 거기는 영원이 있어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아요. 말씀 속에 들어와 버리면. 옛날의 이런 이야기는 반드시 다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말이지요. 모든 것이.
말씀에 자기 자리를 잡아야지 말씀의 안정성에다 자기 자리를 잡아야 될 텐데 자기가 살아온 경험이나 경륜이나 여기에다 그걸 자리 잡고 따로 해석하려고 하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은 안 오지, 안 올 거야, 안 올 거야. 2000년 지났는데 이건 완전히 보통 사기가 아니지. 다 가짜야, 원천기술 없어. 다 가짜야. 라고 자기중심적으로 그렇게 곡해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경건이 떨어지면서 경건이 떨어진다는 말은 이제 믿을 것 없다는 이 말이거든요. 아무도 안 믿는다, 주도 안 믿고, 나도 인내할 만큼 인내했는데 더 이상 못 참겠다. 그럼 경건은 떨어지고 자기 나름대로 따로 안정성을 확보하다 보니까 결국 그것이 바로 지구상에 터 잡고 사는 거예요. 대대로 자신하고 세상은 영원부터 자연은 영원토록 함께 있었다. 하는 그런 조로 자기의 논리가 정립되기 시작합니다.
제가 하는 이것이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많은 종교인들, 많은 성직자들, 목사들이 연세가 많아지고 에세이 같은 것을 쓰는 것이 나와요. 에세이 쓴 것을 보면 젊은 때는 오직 복음으로 외치던 목사들이 나중에 80 되고, 90 되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완전히 도사 되었어요. 도사. 완전히 도사되어 가지고 복음도 없고, 전적타락도 없고, 그냥 불교하고 놀고 천주교하고 놀고 아이, 그거 뭐, 지나가 보니까 하나의 오기였고, 착각이었어. 인생을 오래 살아보니까 그것도 아무 구분도 의미 없는 거야. 라는 식으로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뭐냐 하면은 말씀에 자기 안정성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 자리를 자기 안정성으로 자기 주체로 안정성을 찾기 때문에 말씀이 지체된다고, 자꾸 지연된다고 그렇게 여기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과 여기서 하나의 생각이, 목사님, 말씀의 안정성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나 중심의 경험 중심의 안정성이 아니고 말씀 속에 영원히 내 자리를 잡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바로 그 점을 위해서 베드로전서부터 꾸준하게 베드로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십자가와 부활은 바로 말씀의 완성을 미리 맛보기로 다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겁니다.
십자가는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이미 2000년 전에 일어나 두 번 다시 십자가 사건은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이라는 것은 십자가에서 튀어나온 뭐라 했습니까? 혹이라 했지요. 혹. 부분이라 했지요. 여기 십자가 본체 덩어리가 있다면 본체 덩어리에서 튀어나온 혹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부활을 뚝 뗄 수가 없어요. 떼버리면 부활이 아니에요. 이 부활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나온 혹이기 때문에 부활을 가져가면 뒤따라 뭐가 반드시 따라오게 됩니까? 한번 밖에 없었던 십자가의 의미가 내용물, 진짜 본질에 해당되는 내용물로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부활은 부활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담긴 말씀의 완성을 적용시키는 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은 단회성이 아닙니다. 부활은 계속해서 지금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계속 적용하고 있어요. 뭘 하기 위해서, 부활을 알리기 위해서, 아니, 십자가를 알리기 위해서.
그런데 여기서 좀 어렵습니다만 어려워도 참으세요. 내 중심으로 산다면 내 중심으로 된다면 십자가, 부활 이야기한다면 여기에 자기중심이 고소한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하나님? 네 죄를 위해서 죽은 거야. 감사합니다. 그런데 부활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부활은 네 죄가 이젠 씻어졌어. 이젠 너, 내 안에서 영원히 사는 거야.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면 내 중심이 되면 십자가가 있는 것 같으면 십자가는 이제 부활 안에 흡수되어서 십자가는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는 것이 돼버려요. 그렇지요. 십자가는 거론 안 해도 돼요. 부활이 있는데 십자가를 왜 이야기합니까? 부활은 십자가 그 다음 사건인데, 이러한 사건이 있다는 것은 이 안에 사건을 포함했다는 것이고 이것만 챙기면 십자가는 따라오는 거니까 더 이상 십자가 이야기를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이 부활을 받아들이면 나는 말씀의 완성 속에 내 자리 잡은 것이 된다 말이죠. 이게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죠.
그런데 이것이 어떤 점에서 어려운가 하면은 십자가를 내가 안다. 라고 했을 때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게 성립되는데 뭐가 어렵냐 하면은 십자가를 알 수가 없게 되어있다 이 말입니다. 성령님이 오지 아니하면 십자가는 알 수가 없어요. 이걸 베드로전서에서 뭐라 합니까? 마음속에 떠오르는 샛별이 아니면 이것은 영적이 아니면 십자가 자체가 설명이, 인간적인 보편적인 일반적인 인간의 본성으로는 십자가가 파악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보편적인 속성으로 파악되지 않는다는 말은 뭐냐? 부르심 받고, 택하심 받지 아니하면 택하심 받은 자가 아니면 거기서 차단돼 있다 이 말이에요. 아무리 노력해도 부르심 받지 아니하고 택하심 받지 아니하면 그게 차단되게 돼있다 이 말이에요. 보편적인 일반적인 이성을 가지고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이 말입니다.
왜 그러냐? 내 중심이 내가 살기 위해서 십자가를 믿자, 할 때에 이 믿자 라는 의식 자체가 죄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제일 어려운 부분이에요. 내가 영원히 살기 위해서 십자가를 믿어야 돼. 라는 생각은 어떤 생각에서 그렇게 되었냐 하면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는 의식이 있을 때만 가능한 거예요. 내 만약에 죄인이라면 나는 구원을 요청할 입장이 못 된다고 안다면 십자가라는 것은 건방지게 십자가 믿고 구원된다는 그러한 자기 주제에서 능가하는 자기 주제에서 이탈하는 그런 사고방식이 나올 수가 없어요. 그냥 지옥 가야 돼요.
어제 제가 그걸 실현으로 보여 드렸지요. 신학적으로 어떻게 삼위일체적으로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나 구조하나 필요 없이 그냥 일렬로 쭉 서서 아담의 죄로 지금 지옥 가고 있는데 옆에서 어떤 사람이 톡톡, 빠져, 빠져, 빠져. 오 목사님, 빠져, 빠져, 빠져. 다같이 가고 있는데 한 쪽으로 빠지는 거예요. 이쪽도 빠지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왜 빠져 하면서 가고 있는 게 정상이에요. 뭐가 비정상이냐 하면은 너, 빠져. 빠져나온 사람이 비정상이에요.
이것이 바로 그냥 가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시고, 툭툭 치면서 창세전에 예정되었어, 너는 선택됐어. 빠져나와. 빠져나오는 것은 뭡니까? 빠져나오는 것은 사랑이고 그래서 사랑과 공의가 완벽하게 다 완성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빠져나오니까 자꾸 보는 거예요. 안 불러 주는가. 아, 소용없어요. 이거. 그러면 손 탁치고 어딜 죄지은 놈이 손들고. 손 내려. 손 내려. 아이, 안 불러 줘. 그냥 가는 거예요.
나중에 십자가를 알고 보니까 비로소 내가 살기 위해서 십자가를 믿자. 하는 것이 십자가를 알고 보니까 사랑으로 부름 받아 보니까 하아, 이것이 죄였구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불러 줬을까? 이것은 주님은 사랑을 담는 증거인 되라고 한 것이지 내가 내 이기적인 영원히 살기 위한 욕망을 위해서 십자가를 이용하라고 십자가 믿으라고 하는 게 아니었구나. 라는 걸 아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벌써 누구 중심입니까? 나 살기 위한 내 중심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보여주는 속성을 증거하는 증인 노릇이 되는 겁니다. 몇 초? 2초요. 주일날 3초. 일반 2초. 오래 가지는 않아요. 다시 돌아서면 나 십자가로 구원받았다고 자랑하고 돌아다녀요. 또 자기가 돌아와요.
하지만 항상 부활의 성령이 개입하지요. 그것을 십자가에서 제가 두 가지로 해서 하나는 십자가 뜻이 뭐라 했습니까? 한 가지 또 잊어버렸죠. 이번 다섯 번째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뭐라 했습니까? 나는 속죄되어야 될 대상이다. 속죄 대상이다. 이것 십자가 아니면 이해 못합니다. 속죄 대상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뭐 합니까? 자기 윤리적, 도덕적 잘못된 찾고 있어요. 체크하고 있어요. 그것 아니에요. 그것 죄가 아니에요.
뭐가 죄라 했습니까? 선을 원하면서 또 다른 법이 있어서 악을, 선을 안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누가 우세하다고요. 선을 안 하고 싶고 죄를 짓고 싶은 것이 우세한 주체 사이의 분열된 이 분열된 간격이 죄라고 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구원하랴. 선을 알면서도 왜 나는 그 선을 완벽하게 지켜내지 못하고 지킬 마음도 없고 지키고 싶지도 않은가? 왜 나는 이 모양, 이 꼴인가? 이것이 바로 그 자체가 죄지요.
그런데 그 십자가에서 속죄 대상이고, 두 번째가 뭡니까? 속죄 완성, 속죄가 끝. 내가 고함지르니까 얘들이 같이 고함지르네요. 속죄가 끝났다는 말은 더 이상 왜 나는 죄를 짓고 싶지 않는데 죄를 짓느냐? 라는 그런 갈등이라는 것이 그게 구원에 쓸데없는 것이고 소용없는 자기 화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거에요. 내가 자기 죄에 대해서 고민 하냐에 상관없이 구원은 따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아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회개하면서 고생 했는가 상관없이 그것 하든 안하든 상관없이 구원받은 겁니다. 거기 십자가에서 나온 혹, 뿔, 십자가에서 나온 혹에 의해서 부활에 의해서 십자가가 적용 되면서 구원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후서 3장에서 어떤 사람은 더디 온다, 이게 완전히 사기다, 이렇게 천천히 오시면 누가 경건한 자가 남겠느냐? 인간의 인내도 한계가 있지 너무 심하다. 오신다, 오신다 해놓고 벌써 2000년 지연됐으니까 너무 심합니다. 이젠 대충 일 끝내시지요. 라고 여기는 것은 아직도 시간적으로 자기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이러한 속죄의 의미를 모르고 그게 속죄 대상인데 그것도 모르고 자기는 정당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사람의 특징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베드로후서 3장을 보면서 여러분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겁니다. 목사님, 재림하신다고 해놓고 2000년 지나도록 재림 안 하는 걸 보니까 이게 전부 다 사도가 개인적인 의견을 발표한 것이 성경이 된 게 아닙니까? 사도의 개인적인 착각을 후대 사람들이 그냥 무턱대고 영웅주의로 만들어서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게 아닙니까? 라는 생각을, 잘 들어 보세요, 생각을 하면서 이래서는 안 되지. 성경에 보니까 그럴수록 기다리라 했는데 내가 왜 이 모양이야, 왜 나는 그런 잡생각을 갖지. 라고 고민하든 안하든 상관없이 구원됐음을 믿습니까? 안 믿는 모양이지. 어떡할까? 이게 제일 어려운 거예요.
성경에서 여러분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서 하루가 천년 같이 기다리라 하니까 기다리는 그것을 보는 순간 주여, 제가 답답합니다. 분명히 기다리는 것을 제가 알면서도 기다려야 돼. 기다려. 참아야 돼. 곧 멸망해. 알면서도 그건 불과 2초고 2초가 지나면 아니야, 아니야, 베드로 개인적인 견해야. 이거는 견해야. 사람마다 종교성이 다 다른데 베드로가 알고 있는 경험은 그 정도라면 오늘날 과학이 발달한 이 세상은 에너지 체제는 아직도 유지될 수 있어. 뭔가 아직 희망이 있는 거야. 그런 게 아니야. 말씀이 왜 바보같이 ( )냐? 라고 스스로 머리 때리면서 고민하든 안하든 구원 받는 거예요.
그걸 여러분 아셔야 돼요. 그걸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건 왜냐 하면은 내가 가능성,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능가하고 외부에서 신기한 능력이 주입이 돼야 신기한 능력이 와야 그것을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성경 보고 기뻐하라는 책이지, 성경 보고 고민하라는 책이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 기뻐하라고 베드로전서 4장에 나오지요. 기뻐하라 이 말입니다.
전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목회자가 설교준비를 했는데 김 집사, 최 집사 들으라고 딱 준비해가지고 토요일 돼가지고 내일은 대박 터뜨립니다. 김 집사, 최 집사 오기만 해봐라 이런 설교 듣고 회개 안하면 나쁜 놈이다. 그래서 그 다음날 가니까 김 집사, 최 집사 다 빠져버린 거예요. 설교할 재미가 안 나는 거예요. 오늘, 때려 쳐버릴까 녹음하지 말까 화딱지 나서. 이렇게 해서 그만 꾸깃꾸깃 하는 것처럼 분노 가운데 해 버린다면 그것은 환희와 감격과 기쁨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될 그 목회자가 예수님의 복음을 가로막는 사람이 돼버렸어요. 본인이.
이사야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내가 주님의 영광을 보다니 이렇게 생각했는데 목회자는 뭔가 기대감을 갖고 있지요. 왜 기대감을 갖느냐 하면은 교회가 김 집사, 최 집사가 계속 와 줘야 교회가 뭡니까? 안정성을 구축하지요. 안정성 이야기 또 해야 됩니까? 할 필요 없지요? 항상 인간은 목사 되었든 누가 되었든 자기 직장을 안정성을 확보합니다. 그 안정성 때문에 이 지구가 멸망한다는 이 내용을 보고 고민하게 됩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돼요. 고민하는 것은 당신 자유고, 그건 하나의 버릇인데 고민하던 안하던 상관없이 구원받았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 말을 듣고 목사가 되가지고 김 집사, 최 집사가 오든 안 오든 바르게 기쁨으로 해야지. 라고 해도 그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죠. 라는 생각이 문뜩문뜩 떠올라요. 아아, 내가 고민하던 안 그러면 기뻐하던 이것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게 베드로 성경에서 살아계신 부활의 놀라운 능력이라는 것이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이제부터는 그 뒤에 나오는 말씀, 마음껏 박수치면서 환호하면서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면서 외칠 수가 있습니다.
14절 봅시다. 9절부터 보면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얼마나 감사한지. 여기 ‘아무도’라 하는 것은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부르시고 택하신 자는. 인간은 실수하되 하나님은 실수가 없습니다. 같이 세상 멸망 길을 지옥 길을 가고 있는데 주님께서 선택하다가 너 빠지고, 너 빠지고, 하는데 너 빠지고, 어, 아니네. 미안하다. 이런 것 없습니다. 내가 잘못 골랐네. 이런 게 없어요. 빠져나와서 나 따라갈래, 따라갈래. 해도 이미 빠져나왔으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기어이 그 사람에게는 주님의 하는 일에 대해서 공감을 표하고 잘했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아무도 멸망치 않는다. 라는 이것을 여러분들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진짜 부활의 능력으로만 믿을 수가 있습니다. 이걸 논리적으로 잠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런 논리가 여러분들이 필요하니까. 제가 여기 있고 어떤 한 무리가 있습니다. 무리가 있는데 제가 이야기합니다. 잘 한번 들어보세요. 약간 어려운데. 여러분 여섯 명이 있는데 여섯 명, 아무도 멸망치 않고 제가 보기엔 다 구원받습니다. 라는 말을 하기는 쉬워요. 1번, 2번 다 구원받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다 멸망치 않습니다. 하기 쉬운데 나를 여기다 집어넣어 보세요. 나를 집어넣어서, 집어넣고 하는 말이 우리 일곱 명 다 멸망치 않고 구원받습니다. 말을 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이것 때문에 피히테, 쉘링, 칸트 고민 억수로 한 거예요. 나를 하나의 주체자가 객체가 되었을 때 그럼 그 객체를 보는 주체는 어디서 찾느냐 하는 이 문젭니다. 주체자가 뭣을 판단을 해야 되고 뭔가 평가를 해야 되는 주체자가 객체 속에 같이 섞여 버렸을 때 그 객체를 객체로 볼 수 있는 주체자를 또 만들어내야 돼요. 가상의 나를 또 만들어내요. 그래서 일곱 명 몽땅 멸망치 않고 구원받습니다. 라고 생각한다면 제가 뭐라 합니까? 가상의 나보고 야야야, 너는 어떻게 알았어. 나도 멸망치 않거든, 난 구원받거나. 그럼 너도 여기 있지 말고 들어와야지. 여기 들어와 버리면 두 번째 가상체를 또 만들어내야 돼요.
무슨 말이냐 하면은 이런 겁니다. 목사님 저 예정됐고 구원받았거든요. 그럼 제가, 누가 그렇게 이야기하든가요? 성경 보니까 이렇게 하든데. 성경 보니까 구원받았다고 생각 드는 건 인정하는데 누가 그렇게 이야기하든가요? 내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걸 혹 착각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습니까? 그럼 그쪽에서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착각 아닌데요. 착각 아니라는 것을 뭐라고 장담합니까? 어떤 사람도 착각 아니라 해놓고 교회 안 다니는데 당신이라고 예외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럼 그분이 하는 말이 그럼 내가 예수 믿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압니까? 곤란한 질문. 내가 예수 믿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내가 압니까? 그럼 제가 하지요. 내가 어떻게 아는 걸 내가 왜 이야기해야 돼요. 본인은 본인이 알아서 해야지. 제3자인 제가 왜 거기에다 당신 일에 개입을 합니까? 그럼 저는 어떻게 하면 좋아요. 당황스럽습니까? 예. 그러면 불신자네.
성령님이 와서 일방적으로 능력으로 날 구원한다. 라는 이야기를 내가 안 믿으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를 질문해요. 성령님이 와서 나를 거듭나게 해 줘야 내가 중생돼서 구원받습니다. 라는 그 성령님이 오더라도 내가 거부한다면 과연 나는 구원받습니까? 라는 의문이 성립되지요. 이게 무한 소급적으로 계속해서 가상적인 주체를 또 주체에, 주체에 그것을 평가하는 주체를 또 만들고 또 만들고 연쇄 고리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이러한 모든 논리의 허점이 뭡니까? 바로 한번의 사건, 십자가 사건을 도외시하고 그분의 행동과 살아계심을 완전히 빼돌리고 살아있는 우리만 살아있지 내가 뭘까, 내가 믿을까 항상 내가 믿을까 뭘까 항상 살아있는 나를 중심으로 했지 살아계신 주님이 나에게 어떤 행동을 액션을 하느냐? 그것은 고려하지 않은 채 자기만 생각하는 거예요. 백 날 해보세요. 해결되는가? 해답이 안나오지요.
베드로후서 1장 3절에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 이 말입니다. 외부에서 주신 거예요. 내가 따져서 구원받은 게 아니고 외부에서 주신 거예요.
그렇다면 어떤 성경을 해석을 하더라도 마지막 성경해석은 어디로 가야 됩니까? 주께서 은혜로 주셨습니다. 쪽으로 나가야지요. 그럼 다른 사람이, 너는 왜 그렇게 못났냐? 왜 자꾸 외부만 의지하느냐? 나는 죄인이거든요.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압니다. 십자가 사건이 바로 너는 죄인이야. 하는 것을 겨냥하는 지적하는 사건입니다. 거기서 이제 대화는 단절되지요. 십자가에서 단절되는 거예요.
결국 하나님은 택한 백성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한다는 말이 십자가를 믿는, 오직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이제 비로소 이해가 되죠.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아, 이런 경우를 두고 이야기하는구나. 납득이 되죠.
10절에 보면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맨틀, 지구의 지각)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하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이 땅의 안정성이 우리를 구원하는 보장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뿌리가 어딥니까? 라고 묻는 거예요. 당신의 뿌리가 땅입니까 아니면 하늘에 박혀 있습니까? 묻는 겁니다. 제가 어제 강의하면서 뭐라 했습니까? 이스라엘의 특징이 뭐라 했어요. 뭐가 없는 민족이라 했습니까? 뿌리가 없는 민족이죠. 뿌리가 없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멸망한 이유가 뭡니까? 땅에 뿌리를 박으려고 할 때부터 이스라엘은 이방나라, 세속나라가 되어 가지고 그것은 자체 내에서 진짜 뿌리 없는 선지자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핍박받는 그 핍박이 고난이 오늘날 십자가 이후에 누구의 운명이라고 했습니까? 우리의 운명이라고 했지요. 성도의 운명이라 했지요. 그래야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소유된 백성의 값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운명지울 수밖에 없던 것은 예수님 자체가 어떤 돌이라 했어요? 어떤 돌, 지금 복습하고 있습니다. 어떤 돌입니까? 버린 돌이지요. 예수님 자체가 이 땅에서 버린 돌이라면 그것 누가 버렸습니까? 하나님이 버렸지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이 땅에서 버림받는 신세를 하는 버린 돌로 취급해서 동일하게 버림받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집합해서 처음부터 그들은 뿌리 없어도 영원히 산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러한 아주 특이한 이스라엘 집단으로 언약공동체 집단으로 상존케 하는 겁니다. 그리고 나그네 인생을 살게 하고 떠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제가 이 이야기하고 대장정을 마치겠습니다.
아까 이야기한 플라톤 철학하고 차이점이 뭡니까? 그도 나그네요, 뭐 뿌리도 없고, 뭐 떠나고 영원한 하늘나라 했는데 플라톤 철학과 차이점이 뭐예요. 방금 베드로전후서의 차이점이 뭐예요. 예? 지금 정답을 너무 압축해서 말씀해줬는데.
플라톤 철학과의 차이점이 뭐냐 하는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인데요. 왜냐하면 현대 삼위일체에 기초해서 모든 조직신학부터 해서 개신교 조직신학, 천주교 신학 모든 신학이 플라톤 철학과 스토아학파의 윤리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차이점을 모르면 어떤 신학이나 신조에 안정성을 구축해 가지고 정통적인 교회라고 우길 수가 있어요. 이 차이점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그 차이점은, 방금 십자가를 모른다. 이렇게 말씀했습니까? 부활 능력의 우발성을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부활 능력이라고 하지 말고 이제 십자가 능력이라고 합시다. 십자가의 능력의 우발성이 플라톤 철학에는 없습니다.
십자가는 뭐냐? 듣기만 해 보세요. 십자가의 능력이 뭐냐? 이게 제3자입니다. 이게 차이점이에요. 이걸 쉽게 말하면 중보자입니다. 중보자. 플라톤 철학에는 중보자가 없어요. 잘나도 내가 잘났고, 못나도 내가 못났어요. 내 운명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내가 신이 있다는 걸 알고 내 영혼은 깨끗해야 된다는 걸 알고 내가 다 내가 알아요.
그런데 기독교는 복음은 그런 게 아니에요. 나는 그런 성질을 부리더라도 상관없이 제3자가 다 알아서 다 해주는 거예요. 하이카입니다. 차사고가 박았을 때는 현대보험회사에서 와가지고 알아서 다 해주는 거예요. 당신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거기서 알아서 다 해주데요. 알아서 다 해주는 거예요. 그걸 뭐라고 했습니까? 뭐하세? 맡기자! 그걸 맡기자. 베드로전서 4장에 나오죠. 주께 맡겨 버리자. 이 말입니다. 주께 맡길 때 뭣이 영광이다? 하나님께 영광이다 이 말이죠. 얼마나 간단한 방정식입니까? 주께 맡기면 하나님께 영광이에요. 주께 맡기면. 왜냐하면 그걸 주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십자가까지 질 필요 없어요. 말씀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잔소리해도 안 되는 인간입니다. 따라서 주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해서 다 가져가신 겁니다. 물론 택한 백성에게만 해당되지만. 너 나와, 넌 빠져. 그런 사람에게만 해당되지만. 해준 겁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우리는 뭐냐 하면 고민을 하든 왜 나는 성경대로 못사는 거야. 왜 자꾸 나쁜 짓만 하지 말라는 것만 하는 거야. 개가 토한 것을 왜 또 먹는 거야. 돼지가 더러운 곳을 왜 또 가는 거야. 이래서야 구원받겠어. 고민하던 말든 주께 맡기시면 우리의 육체는 쇠퇴하지만 주의 말씀은 영원토록 주의 약속대로 십자가의 공로가 적용되는 사람은 끝까지 적용돼서 반드시 다 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는 뭐가 날아가느냐 하면은 천년을 우리가 따로 계산할 필요가 없어요. 왜 천년인데 안 오냐? 시계 볼 필요 없어요. 그것도 주께 맡겨서 알아서 하시도록 그렇게 하면 되는 겁니다. 몇 초? 2초인데 좀 늘입시다. 3초로 늘입시다. 하루 24시간인데 이런 생각이 3초 정도는 가도록 해야 안 되겠습니까? 돌아서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3초 정도는 그런 게 개입이 있어야 되지요.
15절하고 마치겠습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이것은 베드로전후서가 뭘 안다? 이미 갈라디아서, 로마서를 빠삭하니 꿰뚫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논쟁적으로 하는 거예요. 논쟁적으로. 이래서야 되는가? 적을 알면 나를 아는 건데 적을 아는가? 적도 모르면서 뭘 버리기는 뭘 버렸어. 네가 적일 수도 있잖아. 하는 그런 식으로 논쟁적으로 여러 가지 터지는 사건들을 이슈를 잡아서 이렇게 경우에는 이것이 비 복음이고, 이럴 때는 이렇게 비 복음이고 그때는 참아야 되고 고난 받아야 되고 그냥 어떤 경우라도 모든 일은 이미 말씀대로 완성되었기 때문에 주께 맡겨야 되고 이것이 참된 경건이고 거룩이라는 것이 베드로전후서의 이야기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얼마나 많이 개인적으로 구원 때문에 고민하고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신학적인 안정성, 사회적인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분투노력한다는 것을 주님께서 잘 아실 줄 압니다. 하지만 그런 것 개의치 아니하시고 이미 십자가로서 다 해결했음을 저희에게 통고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잘남과 우리의 놀라움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공의로우심과 사랑을 영원토록 잊지 않는 주님의 그 놀라운 속성을 보여주는 성자하나님의 선지자와 증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