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후서

함평9강

아빠와 함께 2022. 3. 19. 12:22

제9번


자, 아홉 번째 강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아까 보충수업까지 합쳐서 아홉 번째일 거예요.

베드로전서 4장 6절에 보면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라는 말이 나오지요.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 이 말은 그 뉘앙스가 어떤 뉘앙스냐 하면 너희들이 아무리 농땡이 부리고 아무리 너희들은 하나님이 뭐고 예수고 다 귀찮다. 나는 내 마음대로 내 욕대로 내 신체의 욕망대로 살래. 라고 퍼드러지더라도 하나님은 안 노신다 이 말입니다. 아주 바빠요. 이 분은. 휴식 시간도 없고. 성경에 보면 놀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그렇게 지금 이 작업을 쭉 해오고 있어요. 베드로전서 3장이나 4장에 나오는 이 모든 조항들을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심어주면서 봐라, 네가 이렇게 방탕하지 않는 것도 다 주의 은혜잖아. 라는 것을 깨우치는 일에 지금도 쉬지 않고 하십니다. 지금도.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그러니까 나는 방탕 안 하는 인간이야. 라고 붙잡는 순간, 그것은 자기의 의가 드러나고 주님의 공로가 가려져 버리죠. 그것은 자기가 펄펄 살은 상태가 되어 가지고 역시 나는 훌륭해. 역시 나는 말씀도 왜 이렇게 잘 지키는지 몰라. 하여튼 나는 말씀 맨이야. 라고 이렇게 나서 버리면 성경 전체의 십자가 피 뿌림을 또다시 모독하는 게 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이 위대해져 버리고 나 같은 인간은 하나님, 아껴주셔야 됩니다. 이런 식으로 또 고집을 부리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냥 비우세요. 여기 성경에도 나오는데 그냥 비우세요. 마음을 비우시면 채워주시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으로 다 채워주십니다. 못 믿겠다, 하시면 십자가와 부활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스스로 취소한 적이 없습니다. 반드시 자기의 약속대로 다 하십니다. 다시 살리라 하면 살게 돼 있습니다. 그뿐 아니고 이 말씀대로 거룩케 하면 거룩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육체의 남은 때를 여기 4장 2절에 나오는 대로 사람의 정욕대로 살지 않고 땅의 원리대로 살지 않고 하늘의 원리대로 살도록 조치하신다는 겁니다.

예를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자식을 살린다고 자식의 죄를 용서한다고 아비 되는 내가 나한테 채찍을 때려서 자식을 구원했다 합시다. 했는데 자식이 그것에 대해서 모르고 아버지 참 헛수고했습니다. 백날 해봐도 나는 감동 안 받습니다. 하고 자기 맘대로 도망가도록 방치하게 되면 아이, 나만 손해 봤네. 괜히 나를 때렸잖아. 이런 하나님은 아니시거든요. 이미 자기가 자식 채찍 댈 때부터 그 자식에게 심어줄 거룩을 이미 채찍 맞는 내 쪽에서 나간다는 쪽으로 다 확정이 되어 있습니다. 그 점을 여러분들이 믿어야 돼요. 아, 내가 거룩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거룩되게 하시는구나. 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믿어야 됩니다.

그런데 거룩케 하시는데 어떻게 거룩케 하시는가? 그것이 바로 명령을 통해서 거룩케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이 이해하기가 난처한 경우가 있을 거예요.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모르시는 분은 모르죠. 하나님께서는 명령을 통해서 이것을 달성하십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창세기 1장에 보면 빛이 있으라, 명령했잖아요. 빛이 있으라, 명령하니까 빛이 생겼습니다. 너는 이제부터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이라고 명령했으면 그 명령이 아브람에게 도착하면 아브람은 아브라함의 인생을 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야곱이 자기 욕심 채울 때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너는 이제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이라고 이름 바꿀 때에 이것은 야곱이 거역할 수 없는 사로잡힌 인생을 삽니다. 그 뒤에 야곱이 무수히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해도 상관없어요.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입니다. 한 번 이스라엘은 영원한 이스라엘, 한 번 아브라함은 영원한 아브라함, 한 번 구원받은 자는 영원히 구원받도록 책임보장해 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주특기입니다. 너는 거룩한 백성이라 말만 한 것이 아니고 거룩한 백성이니까 거룩하라. 하는 그 명령을 통해서 그 하라는 명령이 우리 속에 도착이 되면 우리는 이러한 그런 현상들이 그야말로 남편보고 주라고 하는 현상들이 예상치도 않은 일들이 꼭 일어나도록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꼭 말을 주라고 안 해도 다른 것이라도 마음을 낮추는 현상들이 반드시 그렇게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이점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잠시 유식의 세계에, 무식에서 벗어나서 유식의 세계로 한 번 넘어가 봅시다. 제가 여기서 들뢰즈의 철학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현대철학자들에서 제일 유명하고 책도 많아 팔리고 그리고 가장 난해한 철학자가 질 들뢰즈란 프랑스 사람인데요. 이 사람 죽을 때 자살해서 죽었어요. 자살한 이유는 더 이상 쓸모없다 싶으면 죽는 것이 났다. 라고 본 거지요.

들뢰즈 이 사람이 지은 것 중에 [유목주의]란 책이 있어요. 이름이 뭐지요? 이름이 갑자기 생각이 안 나는데 하여튼 유목주의라는 책이 있어요. 그 책이 두꺼운 책인데 그것이 합해서 1200페이지 되는 두꺼운 책인데 그 책에 보면 언어를 분석하는데 모든 언어는 다 명령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면 1+1=2다. 수학공식이 있으면, 이것이 명령입니까? 명령이라는 겁니다. 왜 명령이냐면 1+1=2인 줄 알아라. 이놈들아. 명령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3이라 풀면 우리 세계에 넣어주지 않겠다는 겁니다. 강한 지시가 들어 있어요. 모든 이야기들은 서술어를 하든 명령을 하든 전부다 명령으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명령은 말을 하는 사람들의 세계 속에 말 듣는 사람들에게 강제로 자기 사람으로 당기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담겨있는 명령으로 사용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명령을 하는 이유가 뭐냐? 결핍 때문에 주어진다는 거예요. 결핍 때문에 주어지는데 그 결핍에서 뭘 보느냐 하면 잉여, 넉넉함을 노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요. 이렇게 명령으로, 명령으로 하는 이유는 언어의 의미라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활용에 있다, 활용에 있다. 라는 비트켄쉬타인의 이론을 이 사람이 그대로 동의합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의미라 하는 것은 활용에 있다. 활용이라는 것은 그 단어가 왜 거기에서 그렇게 활발하게 쓰이느냐, 쓰이는 쓰임새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진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축구를 할 때 축구 룰이 있잖아요. 그 룰을 보여주기 위해서 축구공의 공이 있습니다. 축구공이 그냥 있을 때는 아무렇게나 차면 되지만 일단 축구공이 게임에 들어가면 이 축구공은 밖에 나갔을 때는 그냥 차면 안돼요. 드로잉을 해야 돼요. 같은 축구공인데 드로잉을 함으로써 거기서 새로운 의미가 발생되면서 드로잉을 하는 사람은 우리 축구동우회에 넣어주고 밖에 나갔을 때 드로잉을 마음대로 밖으로 차 넣으면 축구동우회에 아예 넣어주지도 않는 거예요. 너는 나가 놀아라. 너는 규칙도 모르고 가! 하고 내쫓아버립니다.

이 세상의 모든 언어는 자기들만의 게임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바로 언어인데 의사소통이란 말은 누구나 되는 언어소통이 아니라 자기들 룰을 동의하는 사람끼리만 통하는 의사소통입니다.

이러한 들뢰즈의 모든 이야기는 이것이 어디에 정확하게 해당되느냐 하면 바로 언약공동체 이스라엘 내부에는 이것이 정확하게 꽂히게 되어 있어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스라엘 모세가 하나님 산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저런 인간은 내 생명책에서 지워버리리라는 내용이 나오거든요.

그렇다면 불교 스님한테 스님, 출애굽기에 보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는 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답니다. 그렇다면 스님이 뭐라 하겠습니까? 저는요, 생명책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생명책으로 전도하려고 하다가 그만 어떻게 돼버려요? 스님, 생명책에 기록돼야 되고, 생명책에 기록되려면 예수 믿어야 되고, 이렇게 준비된 이야기가 쭉 펼치려고 하는데 저는 생명책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돼버리면 말문이 탁 막히면서 그 다음에 말할 게 없잖아요. 그런 경우 뭐냐 하면 이런 현상들이 이스라엘 가는 곳마다 다 있습니다.

발람이란 선지자가 원래 이스라엘 선지자가 아니고 모압 선지자인데 모압 왕 이름이 발락입니다. 이름이 비슷하지요. 선지자 이름은 발람, 왕 이름은 발락. 발락이 뇌물, 보물을 줘가지고 저 우리를 쳐 들어오는 이스라엘 나라를 저주해 다오. 신에게 계시 받아서 당신은 점쟁이니까 계시 받아서 한바탕 굿판을 열어서 제물을 받쳐서 저주해다오. 오케이. 그래서 저주하려고 가는데 평소에 말 잘 듣는 당나귀가 갑자기 버티고 서가지고 전진을 하지 않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불교신자나 안 믿는 사람에게 이야기해 보세요. 그들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지금 당나귀가 왜 말하느냐?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여호와 하나님의 저주는 하나님이 축복한 자는 그 누구도 하나님이 축복을 회수하면 몰라도 하나님이 축복한 자는 다른 어떤 신이 저주해도 그 축복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딱 그 안 믿는 사람이 뭐라 하느냐 하면 나, 당나귀가 버티고 서고 갑자기 때리니까 주인님, 저를 왜 때리십니까? 당나귀가 말을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저, 교회 다니는 사람, 저는 당나귀가 말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거든요.

그럼 당나귀가 말하는 것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축구공이 밖에 나갈 때 이렇게 던지지 말고 그냥 퉁 다시 넣는다. 라는 그 주의입니다. 할 때는 축구 게임하는 것처럼 그냥 그 게임에 편입될 수가 없지요. 그런데 성경은 성경말씀에 나오는 그 용어나 게임의 휩쓸리지 않는 사람을 골라내는 작업으로서 성경이 있다는 거예요.

이해 안 됩니까? 당나귀가 왜 이야기합니까? 언어라 하는 것은 인간의 목소리를 가져야 내는데 당나귀를 해부해 볼까요? 거기서 음성이 나오는지. 당나귀는 이성을 가졌습니까? 어떻게 당나귀가 이야기를 해요. 있을 수 없습니다. 홍해바다가 갈라져요? 한일자동펌프 한 번 돌려볼까요? 갈라지는가? 안 갈라지지. 벽이 된다고요. 그것 안 믿습니다. 이렇게 돼 버리면, 그렇습니까? 진짭니까? 진짜 당나귀가 말하는 거 안 믿습니다. 당신이 그 당나귀가 말했는데, 어떤 내용인가 듣기 싫어요. 나는 당나귀가 말하는 그 자체를 인정 못합니다. 진짭니까? 반가워서, 진짭니다. 지옥 갈 사람 또 만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공동체의 할 일이에요.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이유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신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일반 교회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 당신 교회 보내려고 얼마나 밑천 드려가지고 애 공부도 공짜로 가르쳐주고 영어도 가르쳐주고 다 밑천 드려가지고 이쯤하면 꼬시겠지, 이쯤하면 교회 나오겠지. 이렇게 건수 하나 올렸다고 영업사원 건수 올리듯이 건수 올렸는데 나중에 가가지고 아, 안됐습니다. 이래버리면 신이시여, 그동안 드린 밑천이 완전히 손해날 것 같습니다. 완전히 손해 봤습니다. 어쩌면 좋습니까?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그런 것은 일반 교회, 가정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식구들 가운데서 너무너무 자식들한테는 지극정성인데 단 하나 예수 이야기하면 야야, 나는 나 편한대로 살도록 좀 놔둬. 네가 교회 가는 것 안 말렸잖아. 그런데 내가 하나님 안 믿겠다는데 너 자꾸 나한테 압박을 가하면 그것은 엄마, 아빠한테 마음에 부담가니까. 내가 믿고 싶으면 왜 안 믿을까, 내가 안 믿고 싶으니까 안 믿는 거니까 날 좀 괴롭게 하지 마라. 내가 너한테 밥을 안 해 줬나, 공납금을 안 대줬나, 다 해줬잖아. 그런데 네가 왜 자꾸 날 괴롭히나? 어머니, 제가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내가 아는데 내가 어머니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거든요. 십자가 대신 받아 ... 야, 그것 많~이 들었다. 들었으니까 나 이제 두 번 듣기 싫다. 어머니 그 이야기는 이번에 함평에 가보니까 어떤 목사님이 강의하는데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악이 있는데 악은 주의 말씀이 들어오면 그걸 반발하는 심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담에서 나왔고 ... 야야, 그 게임조차도 인정하지 않으니까, 내 앞에서 그런 소리하지 마라.

그런 현상이 바로 베드로전서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내가 돈 못 벌어서, 내가 개척교회 실패해서 고난이 아니라 예수님이 엄연히 살아계시고 다 속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부대끼면서 느끼는 고난이 있을 때 성령이 바로 그렇게 나한테 일부러 시킨 거란 거지요. 왜 분류작업을 하기 위해서 안 믿는 자와 신자와 분류하기 위해서 그 일이 이미 이스라엘에서 계속 해 왔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온 것이에요.

그러니까 성도 여러분이 하나 오해하지 말아야 될 것은 내가 행동을 바르게 했으면 저 사람이 교회에 나올 것인데 내가 교회 나오면서도 행동이 개찬반 같이 행동했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의 신앙을 가로막았다고 그렇게 오버를 하지 마세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행동보고 그 사람 결정한 게 아니에요. 여러분이 행동을 반듯하게 하더라도 심지어 교회를 열 번, 티켓 끊어 가지고 열 번 채워줘도 그 사람은 십 년을 따라다녀도 그 사람은 예수를 거부할 사람이에요.

예수님을 거부한데 대해서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될 것은 왜냐하면 그들이 갔던 그 지옥에서도 예수님은 주시라는 것이 선포되었잖아요. 선포되었기 때문에 주님이 영광 받는 데는 하등에 지장이 없는데 왜 우리가 거기서 짜증을 내느냐? 그것은 자기 노동을 너무 아까워서 내가 드린 공로가 허사로 끝나는 게 너무 허탈해서 그렇게 하시는데 거, 안 믿는 부모님들에게 전도할 때는 항상 부모님이 관심을 드러낼 때가 있던지, 아니면 부모님 친구가 와서 우연히 분위기가 교회 분위기, 복음 분위기로 있던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대그때마다 어떤 기회를 주실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때는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 복음을 전하라는 그렇게 생각하고 들이대야지요. 그냥 들이대 버리면 이것은 내가 예수 안 믿을 자유도 없나, 이렇게 반발이 굉장히 심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이제 여러분 교재로 내 논, 읽어 본 사람이 몇 명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더러 계실 것인데 여기 보면 나와요. 처음 믿을 때는 불가능성으로 믿었다고 해놓고 왜 믿고 난 뒤에는 가능성을 내세우느냐? 이것은 반칙이다. 이렇게 돼있어요. 제가 이 짧은 글의 주제가. 처음에도 불가능적으로 구원을 받았으면 끝까지 내가 이 말씀 지키는 것도 불가능 속에 바탕을 두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야 되지. 처음에 예수 믿는 것은 내가 불가능하게 믿어놓고 그 다음부터 말씀 지키는 것은 내가 가능합니다. 라는 것은 논리가 앞뒤가 안 맞다 이 말입니다. 처음부터 불가능하면 끝까지 불가능으로 가줘야 돼요. 그리고 만약에 부모한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도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불가능했던 것인데 주님이 허락해서 복음이라도 전하게 되었다. 그렇게 항상 불가능 쪽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가 주셔야 된다. 그 이야기를 제가 하고 싶습니다.

그 다음에 이번 시간에 베드로전서를 다하고 밤 시간에 베드로후서를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4장 13절에 보면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또다시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 못 지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항상 여러분이 성경말씀 볼 때에 이것 지켜야지 그렇게 보지 마시고, 이것 또 못 지키는 것 나와 있네. 그런데 언젠가는 주께서 지키게 하실 수 있을 때에 그때 주님께 영광 돌려야지. 하는 그런 마음 자세로 이렇게 해야 돼요.

14절을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또 이것 내가 안 좋아하는 귀절이네. 왜 욕을 얻어먹는 것이 복이 있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이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이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어질 때 영광의 영, 하나님의 영이 내 위에 임했구나. 라고 재차 확인해 주시면 그만 이에요. 평소에 성경을 많이 알아야 돼요. 알아야 아, 이럴 때는 이런 복이구나, 저럴 때는 이런 혜택을 입었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16절을 보면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것도 우리가 못 지킵니다. 왜냐? 우리는 누구 이름이든지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면 우린 부끄러워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인간이에요.

17절에 보면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마지막이 좋네요. 항상 자기 영혼을 하나님 소유로 항상 맡기는 항상 자기를 자기가 책임지지 말고 자기 인생을 자기가 꾸려 나갈 생각하지 말고 항상 맡기면 사건이 툭툭 불거져 나오게 되어 있고 그 사건 하나하나가 그 속에서 주님의 살아계심과 도와주심과 은총주심을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여러분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오해가 너무 많아서 오십 회가 넘어가는 것 같은데 여러분 알아야 할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축복이란 게 딴 게 아니고 재산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 성경말씀은 주님께서 나를 상대로 지키는 거구나. 라는 것을 발견할 때 그것이 축복입니다. 야, 이건 내가 못 지키는 건데 주님께서 이렇게 지키게 하시는구나. 제가 아까 우리가 봤던 것처럼 자기 남편을 보고 주라고 이야기하고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경우, 이것이 현대에서 가당치도 않는 거죠.

서로서로 필요에 따라서 이익을 위해서 결혼해 놓고 자기 목숨을 바쳐요? 어디 목숨 바칠 데가 없어서 그렇게 합니까? 아내에게 목숨 바칩니까? 그게 안 되니까 부르는 노래가, 젖은 손이~~~ 그것 하나 불러서 대충 메우려고 하는. 불효가 안 되니까 꼭 추석 때 묘지 찾아가서 소주뿌리고 불효자는 웁니다. 그렇게 하는 거예요. 어떤 아내 사랑하기를 목숨같이 하라. 사람은 자기 목숨이 우선이지 아내 목숨이 우선이 아니에요. 아내가 백 명 죽어도 자기 목숨 안 잃었으면 성공이에요. 아내가 백 명이 아니구나, 참. 아무리 자기 주변에 몇 사람이 죽어 나가떨어져도 자기 안 죽으면 기분 좋은 거예요.

전라도 눈 왔을 때 경상도 사람들이 신바람 불렀습니다. 더온나. 자기 있는 데는 안 오거든요. 신난다. 김대중 찍었다가 잘됐다. 한번 봐라. 혼나봐라. 이건 뭐 낭설이고 유언비어인줄 여러분 아시죠? 그런데 한나라 ( ) 보세요. 그냥 유언이 아닙니다. 낭설이 아니고 그럴 가능성이 많지요. 강원도에 가서 직장생활하며 설움 받은 사람, 강원도 있다가 부산지역 가가지고 강원도 눈 와 보세요. 그날 싱글벙글 하루 종일. 나를 구박하더니 봐라, 된 통으로 당하는구나. 에이, 눈 더 퍼부어라. 어딜 나를 구박하고.

이처럼 인간은 자기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항상 그 원한 관계가, 한 맺힌 관계가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꼬리는 길어요. 자기 과거는 굉장히 깁니다. 사람이 자기가 키만큼 더 높은 키가 과거의 어두운 키가 이보다 자기의 과거에 이만큼 있어요. 과거를 자를 수 없고 지워버릴 수 없습니다. 자기 몸에 지우개가 있고 매직이 있고 뭐가 있어도 안 지워집니다. 인간은 과거를 지울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오늘 베드로전서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너희가 하나님께 심판받고 영혼은 하나님처럼 산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어디 나오던데. 예, 4장 6절에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겠다" 천국에서 살게 해 준다 이 말이죠.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기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자기 과거의 한 맺힌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누구를 상대해도 만약에 자기 첫사랑과 비슷하게 닮은 사람 같으면 같은 손님이 오더라도 자기 첫사랑과 닮았다 싶으면 잉여, 여분의 사랑을 베풀고, 옛날에 자기를 못살게 굴던 군대 상관 비슷한 인간이 오게 되면 괜히 그 사람이 미운 거예요. 교회의 문제가 그겁니다. 괜히 미운 사람이 있다는 게 문제거든요. 괜히 뭘 해도 밉고. 그것보다 못지않게 또 문제 거리는 뭘 해도 예쁜 사람이 있어요. 이것도 문제에요.

인간은 객관적인 기준으로서 살수가 없습니다. 맡기세요. 세탁소에 세탁물을 맡기듯이 혼자서 얼룩 뺀다고 다 빨아가지고 색깔 다 날리지 마시고 맡기시기 바랍니다. 올해 함평수련회는 간단한 거예요. 맡기세요. 베드로전서 4장 19절 맡기시기 바랍니다. 왜냐? 이미 완성했기 때문에. 맡기고 서서히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완성됨을 맡기는 가운데 새록새록 그걸 재확인이 될 것입니다.

그냥 맡기세요. 뭐 훌륭하면 더 잘하고 그런 것 없어요. 처음부터 언제 훌륭한 적 있습니까? 자기가 아직 팔팔한데. 기대를 걸지 마시고. 인간은 항상 한을 맺혀 사는 인간이기 때문에 아무리 잘해 줘도 사람이 자기 한 맺힌 것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악은 악으로 갚으라고요? 아참, 악은 선으로 갚으라고요? 어디 그게 하나님에게 해당되는 일이지 어디 우리에게 해당되는 일입니까? 지금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데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되는데 거기에다가 뭐 어디 악을 선으로 갚습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악을 악으로 갚기나 하지요. 그런데 그 점을 알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하라. 그걸 또 이 본문 보고 지킨다고 자기한테 원수 된 자에게 당신을 축복합니다. 이것 어떻게 들리겠어요? 비아냥거림으로 들릴 것입니다. 그래, 니가 신앙 좋다 이거지. 베드로전서 지켰다 이거지. 잘났다, 그래. 너나 잘-하-세-요~

인간은 어떤 말씀도 못 지킵니다. 그냥 맡기시면 세탁소에서 다 알아서 지킨 채로 우리한테 주어집니다. 몇 초요? 2초. 2초가 얼마나 짧은지 한번 계산해 봅시다. 24시간 곱하기 3600 ... 계산하지 맙시다. 몇 촌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가운데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맡겨야 되겠다는 생각이 드시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 짧은 순간에 이 말씀이 다 들어오기 때문에 그렇죠.

5장에 봅시다. 자, 5장에는 뭐냐 하면, 5장에 어려운 이야기를 해야 되겠는데. 쉘링이라는 사람 들어봤습니까? 세일러 말고, 뱃사공 말고. 이 사람은 칸트의 제자가 피히테입니다. 피히테보다 늦은 사람이 쉘링이라는 사람입니다. 칸트는 신의 모든 뜻은 인간 속에 내장되어 있기에 인간이 목적의 왕국(천국)을 향하여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바지하는 것으로 보시면 피히테라는 사람은 이것을 더 극단적으로 밀어 붙여서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 하나님이라는 것도 내가 만들어 낸 것이고,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밖에 없다. 신은 어디 있는지 모른다. 다만 내가 신을 유발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실이다. 그것만 사실이다. 이 피히테가 너무 모든 것은 나밖에 없다. 만약에 남편이 있다면 저 사람이 나의 남편이기 때문에 남편이라고 부르지 내가 없다면 어떻게 남편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제가 젊을 때 안암제일교회에 있었는데 장 집사라는 분이 그런 발언을 했어요. 그래서 온 교회가 답변을 못해서 머뭇거린 적이 있는데.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누구냐? 그 사람은 고대 교수인데 안암제일교회가 고대 바로 앞에 있습니다. 그 사람이 정치학과 교수인데 목사님들이 다 있는데서 폭탄선언을 했지요.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지요? 그건 내가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렇다. 그러면 내가 없어지면 하나님도 없잖아요. 누구 답변해 보세요. 이렇게 됐어요. 그건 데카르트에 나오지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걸 그렇게 변형해서 이야기하지요.

온 교인이 은혜 받은 것이 아니고 온 교인이 그만 벙 떠버렸어요. 그렇다. 하나님 믿는다고 우기는 내가 만약에 죽어버리면 내가 죽는 동시에 하나님도 없다. 이것이 피히테 사상이에요. 아내를 사랑해도 내가 죽으면 아내 사랑할 사람 없으니까 아내는 이제는 아내가 없지요. 내가 없다면 아내도 없는 거예요. 내가 없다면 함평도 없는 거예요. 분명 지도에 나와 있어도 내가 없다면 함평은 없는 거예요. 함평이 있는 것은 내가 살아나서 함평이 있다는 걸 확인해보니까 함평이 있는 거예요. 이게 사과다. 사과지만 내가 태어나서 사과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사과가 있지 그렇지 않으면 사과는 없는 거예요. 내가 비로소 이름을 불러줄 때 그는 나에게 다가와서 하나의 의미가 된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 나에게 의미가 되는 거예요. 그 뿐이에요.

중요한 것은 뭐냐 중요한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만 중요하고 나머지는 전부다 부산물이고 내 뒤따라온 나의 어두운 과거에 따라와 달라붙은 하나의 날파리들, 파리 잡는 것 있지요. 쭉 잡아당기면 온갖 것이 걸려오잖아요. 그 청소기나 이런 것 윙윙 하면 걸레 같은 것의 밑에 달라붙잖아요. 현재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온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줄줄줄 내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한테 달라붙은 것들이 모여서 그것만 아는 거예요. 전체를 아는 것이 아니고.

만약에 내가 부산서 살았는데 만약에 부산서 살지 않고 대전서 살았으면 나는 다른 인생관을 가졌을 거란 말이지요. 만약에 북경서 살았으면 북경오리를 때려잡고 또 새로운 인생관이 나온다 이 말이지요. 안 웃네. 마을버스 2-1에서 뛰어내리고. 그건 마을버스 없는 동네에선 의미가 없어요. 모든 게. 모든 것이 내가 밟았던 대전이 됐든, 부산을 찍고, 목포 찍고 어딜 돌아다녔던 거기에서 주워 모은 경험들로 인하여 그래서 나는 요런 하나님이라고 자기가 재구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게 인생이라면 결국은 진리는 뭐냐? 내가 존재한다. 이것만 진리 아니냐. 그 당시 사람들이 할 말을 잃어버렸어요. 형님, 맞습니다. 옳습니다. 당신이 진리이소이다.

그런데 이것에 반발한 사람이 뭐냐 하면 쉘링이에요. 뭐라고 했냐면 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당신은 왜 눈을 뜨고 다니나? 이렇게 해 버렸어요.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나밖에 없다면 눈을 한번 감아보자 이 말이죠. 눈을 감게 되면 눈을 감아도 떠도 나밖에 없어야 돼요. 그런데 눈을 감을 때는 분명히 자기밖에 없어요. 그런데 눈을 뜨니깐 밖에 눈이 와 있어요. 그러면 저 눈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내가 눈이 하나 있어야 되겠는데 눈 한번 만들어 볼까? 눈아, 있구나.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이것은 바로 인간은 나밖에 없는 것이 아니고 쉘링은 말하기를 이 세상은 자연밖에 없다. 나라는 것은 대자연의 일부가 된다. 그러면서 쉘링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뭐냐? 자연이 있으면서 신이라 하는 것은 자연이 자연 속에 있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신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쉘링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매개자가 사라진다. 아주 유명한, 유명하지도 않지만 어려워서 안 유명하지만 매개자는 사라진다. 이것이 뭐냐 하면 내가 자연이고, 자연이 곧 나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고, 나는 나고. 모든 것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거지요. 이 불교가 브라만교에서 나왔거든요. 브라만이라는 것이 범, 모든 것이라는 거고, 그 반대되는 것이 아트만이라고 해서 나. 브라만교는 자연과 내가 일치가 될 때 그게 브라만교고, 거기서 나온 것이 불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승려가 원효대사라는 사람인데 그 사람의 주장은 뭐냐 화쟁의 논리, 화쟁의 이론, 화쟁주의를 주장했는데 화쟁이란 뭐냐 즉 싸우는 것을 전부다 멈추는 것을 진리라 했어요. 이것은 사과다. 아니야 감이야. 사과도 되고 감도 되요. 이것이 바로 화쟁의 논리에요. 저것은 산이야 아니야 물이야. 저것은 산도 되고 물도 되고. 이것이 바로 화쟁의 원리에요. 이게 쉘링이죠. 중보자가 쉘링에서 필요합니까, 필요 안합니까? 더 이상 중보자가 필요 없는 거예요.

이것이 지금 베드로전서 5장을 하면서 시사하는 바입니다. 뭐냐 하면 구약에 이스라엘은 분명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스라엘이라는 그러한 언약공동체, 언약국가가 분명히 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나오는 그 메시아가 중보자되는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 베드로후서를 하겠지만 베드로후서가 되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사상이 마지막 때 퍼진다는 거예요. 옛날부터 산은 산대로 있었고, 물은 물대로 흘렀다. 무슨 그딴 소리, 심판이 있다는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느냐? 아무리 봐도 멸망할 조짐은 안 보이는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사람을 협박, 공갈 해 대느냐? 어떻게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진다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 산은 산대로 그대로 있었고, 물은 그대로 있었다. 이렇게 주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반박하면서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하늘과 땅의 매개자로서, 중보자로서 이 땅에 등장했다 이 말이에요. 유일하게 거룩하고 다른 쪽은 거룩하지 않고. 그렇다면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점은 뭡니까? 불신자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그냥 나만 편하면 돼. 날 버려둬. 건들지 마. 귀찮아. 날 나 사는 대로 건들지 마. 나는 신이고 뭐고 나만 안 건들면 내가 좋은 친구해 줄게. 이게 화쟁의 원리야. 이것이 바로 원효대사나 유명한 철학자가 이런 불신자를 대변해줘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게 보면 교인들 가운데도 보면 그런 연세 많은 가운데도 그런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요. 가만히 있어. 건들지 마. 다 귀찮아. 이게 여자든, 남자든 다 그런 거예요. 얘들은 엄마, 엄마, 빌붙고 뭐하고. 옆방에 강사숙소 옆에 보면 아이들이 울고 막 이렇게 한다고요. 아하, 얘들은 엄마한테 맡겨 논 삶을 사는구나. 그런데 나중에 얘들이 커서 90노인 되면 건드리지 마. 나, 가만 놔둬. 다 귀찮아.

그런데 이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오늘 베드로전서 5장에 보면 목자가 있다는 거예요. 중매자, 매개자가 있다는 거예요. 그 매개자가 누구냐? 눈에 보이지 않는 매개자 누굽니까? 목자, 예수 그리스도가 목자라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큰 겸손이냔 말이죠. 뭐 신자라고 인간 아닙니까? 뭐 신자라고 해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란 그걸 모를 리가 있습니까? 인생 오래 살아보면 다 귀찮은 게 귀찮은 거고, 안 건드리는 게 최고란 걸 다 뻔히 알지요. 뻔히 아는 것이 신자든, 불신자든 공통적인 요소고, 사람이라면 좀 여유 있으면 자기 마음대로 살도록 자유롭게 하는 게 편한데 목자님, 예수 그리스도님, 나의 중보자십니다, 하늘의 매개자십니다. 라고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그게 놀라운 은총이며 기적이며 겸손이냐 이 말이지요. 그 이야기에요.

그렇다면 교회 내에서 그 목자장 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라면 누가 있겠습니까? 그 목자장을 소개하고 그분의 뜻을 전하는 그러한 하청 받은 목자들, 여기 장로들은 양무리의 본이 되라. 나오지요. 목자장은 따로 있고 새끼 목자들, 그런 사람들이 나오지요. 그런데 교회에서 목자 될 수 있는 자격은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이 사람들은 뭐만을 증거해야 됩니까? 오직 하나님의 피만을 증거해야 될 때 그때 목자로서 자격이 됩니다. 그러니까 목자가 자기 신앙자랑 한다든지 놀라운 경험을 자랑하면 그러면 그 사람은 목자로서 탈락이지요. 이것은 목자를 가리는 악마의 종이며 삯군 목자가 되겠지요. 진짜 목자는 목자장께서 다 하셨습니다. 라는 거지요.

그 한 예를 들면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낫게 했지요. 그 누가 봐도 현장에서 MBC, KBS 인터뷰해도 누가 봐도 그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했어요. 앉은뱅이가 내가 돈은 없지만 네게 이르노니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 하니까 앉은뱅이가 일어났어요. 그런데 당사자들은 그게 절대로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너희들은 보이는 대로 평가하는데 그 보이는 대로 평가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지금 보이지 않는 분이 작용했다는 겁니다.

이게 뭐냐? 그림으로 한번 그리겠습니다. 앉은뱅이가 고개 푹 숙이고 앉아 있는데 베드로와 요한은 뭘 봤느냐 하면은 주님께서 앉은뱅이에게 믿음을 주었다는 사실을 이 사람은 목격하게 됩니다. 그냥 눈으로 목격, 시력이 얼만지 그렇게 목격한 게 아니고 그게 어떻게 알게 되었어요. 아니까, 주님으로부터 언어의 매개자로서 이게 어려워요. 이게 교회의 목사가 할 일이에요. 언어의 매개자로서 뭘 하느냐? 아까 들뢰즈의 철학에서 뭘 한다고 했습니까? 모든 언어는 뭐라고요? 명령을 하게 되지요.

그러니까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의 명령을 듣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은 폼만 잡는 변사고,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 가운데 주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이면서 본인이 주님의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목사가, 베드로가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목사가 설교 잘해서 구원받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어요. 다 예수님이 주신 믿음으로 그 믿음으로 구원받지, 주님이 구해야 구원받지, 목사가 구원해야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어떤 누구도 목사가 설교해서 구원받는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가짜들은 목사가 설교해서 구원받았다고 하지요. 그건 가짜들이니까 생각할 필요 없고.

바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목자보다도 모든 성도들을 매개자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쉘링은 뭐가 없다? 매개자가 사라진다. 내가 곧 자연이고, 내가 곧 신이기 때문에. 아니, 내가 신이 아니고, 내가 곧 자연이고 내가 나이기 때문에. 내가 자연과 합일하면 그걸로 그게 진리지, 무슨 매개자는 니가 누구보다 못나서 내가 니 중계를 해야 되냔 말이죠. 내가 잘났는데 내가 왜 니가 필요해. 매개자가 필요 없어요.

그런데 베드로전서 5장에 보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주의할 것은 제일 주의하면서도 제일 어려운 점이 뭐냐 하면은 이 믿는 사람이 내가 질문하기 너무 어렵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질문할게요. 앉은뱅이가 주님의 믿음으로서 나았고,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를 나의 능력으로, 나의 경건으로 나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사람 속에 들어가서 주님께서 낫게 했는데 왜 자꾸 우리 보고 낫게 했다고 우깁니까? 그것은 잘못입니다. 주님께서 낫게 했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에 제가 질문이 뭐냐 하면은 어떤 사람이 예수 믿는다고 할 때에 그 사람이 과연 예수 믿는 사람이냐 이 말이에요. 주님 덕분에 예수 믿었습니다. 할 때에 매개자되는 목사가 그 믿음을 인정해야 됩니까, 안해야 됩니까? 그때는 니 마음대로 하세요. 그것은 어떻게 인정 안할 수도 없고, 할 수도 없어요. 왜냐 하면은 하도 가짜가 많아서. 하도 가짜가 많으니 분명히 진짜로 예수님 믿음으로만 구원된 사람 같으면 목사가 구원하는 식으로 목사한테 매달리지 않을 것이 분명하잖아요. 왜 본인이 그렇게 경험했기 때문에. 목사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고, 목사님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인데 그 말씀이 나한테 목사가 넣은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능력이 나한테 임해서 구원받았단 말이죠.

예를 들면 어느 날 부활절에 설교하는데 목사님이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여러분들은 완전히 구원받았습니다. 라고 했을 때 그 목사의 음성, 바이브레이션으로 그걸로 능히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믿어졌다면 그러면 그 사람은 누구 덕분에 구원받았습니까? 주님 덕분에 구원받은 거지요. 그런데 어떤 가짜들은 아이고, 목사님께서 그런 설교 안했으면 저, 구원 못 받았습니다. 라는 사람은 백발백중 가짜입니다. 또 목사들이 그걸 유도할 수가 있어요. 나 아니었으면 당신들 구원 못 받았어! 라고 유도한다면 그 사람은 가짜 삯군입니다. 이 가운데는 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없다고 할 줄 알았죠. 없기를 바랍니다.

교회 교인이 50명 되면 그 어떤 사람도 목사가 구원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떠나라 하면 떠나야 돼요. 왜, 자기가 한 게 없기 때문에. 저 사람도 내가 건졌고, 저 사람도 내가 성장시켰고, 이렇게 되면 정말 곤란한 거예요. 그럼 떠나면 어딜 가느냐? 그것은 그 목사가 맡겨야죠. 아까 주제가 뭐라 했어요? 맡겨야죠. 맡겨야 됩니다.

또 한 가지. 그 목사님이 진짜 복음을 아는 목사님인데 그 교인 50명인데 50명 몽땅 가짜라, 몽땅 가짜라서 목사님보고 나가라 했다, 그럼 그 목사는 나가야 되나, 안 나가야 됩니까? 또 나가야지요. 그건 나가야 돼요. 왜 주님께 맡기기 때문에. 그런 가짜를 맡긴 것도 주의 우연적인 사건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갔던 머리 둘 곳도 없던 예수님의 행적입니다. 그것이 예수 이름으로 고난 받는 거예요. 그래서 무엇이든 개별화, 자기 소유화시킬 필요 없다 이 말이에요.

이것은 기존의 땅의 원리는 이렇지 않습니다. 땅의 원리는 이런 게 아니고 땅의 원리는 어떤 원리냐 하면 노동의 원리에요. 노동한 자만이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오늘 낮에 한 것 중에서 제가 하나 빠트린 것이 있는데 뭐냐 하면 캘빈주의에 있어서 뭐라고 이야기했냐 하면 그저 돈 많은 사람은 축복을 받은 것인데 그 사람들이 근검절약해서 하나님이 복 줘서 그렇다. 따라서 부자들이여, 상공인들이여, 여러분은 복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부자 되었다고 해서 성경에 어긋나는 게 아닙니다. 마음껏 돈을 버세요. 라고 했을 때 그들은 대환영을 해서 나라 하나 세웠다, 나라를 여러 개 세웠다 했지요.

그런데 19세기에 들어오면 그게 말이 엉터리라는 것이 드러나요. 왜냐하면 19세기에 들어오니까 자본주의가 들어오니까 열심히 일했는데 자신의 노동의 대가보다 현저하게 저임금을 받는 경우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놀아서 가난한 것이 아니고 경제구조 자체가 가난은 계속 가난하게 만드는 경제구조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따라서 그 틀을 뜯어 고치지 아니하면 그야말로 경제정의가 살아나지 않을 때 거기에 기독교 신자들이 단결해서 노조를 형성해서 과연 국가에 대해서 대항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는 그 문제가 거론됩니다. 라우쉔부쉬, 라인홀드 니이버 이런 철학자들이 등장해 가지고 과연 저임금을 받고 억울한 자기의 노동의 대가를 다 강탈해 가는 그 자본가에 대해서 그 자본가가 물론 교회의 장로고, 집사고 다 같은 교인이에요. 같은 교인들끼리 그 사람에게 임금을 더 달라고 말로 안 되니까 노조가 파업을 해서 달라고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그 문제가 거론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책 가운데 [성령 생활, 영적생활]하는 게 있어요. 거기 강해에 보면 노조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노조를 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 노조를 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정답은 맡기세요. 맡기는 게 정답입니다.

맡기게 되면 어떤 현상이 있냐 하면 맡기게 되면 두 가지 경우가 있죠. 맡기게 되면 시위하는 경우도 맡기게 되고, 시위 안 하는 경우도 맡기게 되죠. 관심 없는 것은 둘 다 안 하지만 관심 있다면 시위하도록 시위장에 나가도록 하나님께서 맡기면 나가야 되죠. 또 시위하지 마라 하면 안 나가야 되죠. 그런데 시위 하나, 시위 하지 않나 어떤 경우라도 자기 이익은 생각하지 말아야 되죠. 이게 바로 맡기는 겁니다. 그냥 시위한다면 그 자체로서 하나님 뜻이라고 여기면 그만이지, 역시 시위했다는 것을 하나의 노동에 의해서 내가 이런 결과로서 나왔구나. 라고 그 공로의 노동의 대가를 자기 쪽으로 돌려버리면 이것은 그리스도를 가리는 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시위를 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왜 자기 이익까지 포기하면서 몽땅 맡기느냐, 안 맡기느냐 그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한테 몽땅 드리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이 미덥지 못해요. 주님의 부활이 안 믿어져요.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영 못 믿겠어. 역시 내가 나서야 그게 확실한 현실이지. 주님께 맡겨놔야 일이 되는 일이 없어. 이런 식이 된다고. 그러한 불신앙이 결국은 자기의 노동의 대가를 끝까지 찾겠다는 고집으로 나설 수가 있습니다.

이걸 방금 제가 길게 이야기한 것을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인도하는 대로 가돼, 결과는 하나님의 뜻에 맡기자. 이런 식의 논리는 잠언서도 나오고, 계획하는 것은 우리의 뜻이나 일을 이루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잠언서에 나오죠. 성경 말씀에 나오죠. 아무리 니 계획해 봐라, 되는가? 하는 그런 뜻도 되고, 니 계획하는 자체가 성사하기 위한 계획일 수도 있다는 뜻도 되고, 하여튼 양쪽 간에 어떤 뜻이든 간에 항상 결과에 대해서는 내 노동을 거기다 집어넣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하는 겁니다. 상당히 소극적이지요.

그런데 그럼 적극적으로 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것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적극적으로 하면 4장 8절 봅시다. 정신을 차리고 조심하라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뭐하라는 겁니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할지니라는 말은 뭘 하라는 말입니까? 허다한 죄를 덮어주려고 하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만약에 시위할 때 적극적으로 적용시키면 어떻게 합니까? 임금을 돌려 달라! 악덕업주를 물러가라! 이렇게 시위하지 말고, 악덕업주를 용서하라! 악덕업주를 용서하라! 이렇게 데모하라 이 말이죠. 허다한 죄를 덮는. 데모, 잘 되겠다. 데모에 안 넣어줍니다. 룰에 어긋나기 때문에.

악덕업주를 덮어줘라! 돈 버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 줄, 우리 용서하자. 이런 식으로. 그렇게 미친 짓으로 데모한 사람이 있습니다. 인도의 간디가 그렇게 했어요. 우리의 침략자를 용서하자. 평화롭게 시위하고. 죽어봐야 잃은 것은 목숨이지만 살고자 하는 자는 명예까지 잃는다. 뭐 이런 고상한 용어 써가면서. 그러니까 이러한 제가 방금 한 것은 말도 안 되는 거지요. 말도 안 되는 그런 상황이, 몇 초요? 일어날 수 있을 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베드로전서를 끝내면서 맡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살아봤자 인생에 대해서 안다 해봤자 얼마나 알겠으며 우리가 살아온 경험을 총 집결시켜봤자 어떻게 그것이 진리가 되겠습니까? 모든 것을 역사를 초월해서 아시는 주님께 그 십자가에 다 이루심을 넉넉하게 의지할 수 있고 맡길 수 있는 저희들 삼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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