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번
열한 번째 강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이루신 그 공로를 왜 무상으로 아무 의가 없는 우리에게 그냥 줄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느냐? 그것에 대해서 아까 제가 신과 인간 사이의 거리가 멀다했는데 이것은 시작부터 잘못된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거리가 멀어서 그것을 간격을 줄이기 위해서 중보자가 오신 게 아닙니다. 아니고 새로운 인간을 이미 생각해 놨던 사전에 미리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상해 놨던 생각했던 그 새로운 인간을 이 지상에서 죄 가운데서 사랑으로만 새로 창조하기 위해서 새로운 피조물 만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미 인간이 있고 신이 있는데 그 인간을 불쌍히 여겨서 신의 나라에 넣어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사후적인 조치로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니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원래 만든 인간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이것은 폐기처분 해버리고 창세전에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을 미리 생각을 했어요. 그들은 누구냐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입은 사람들을 이미 창세전부터 예수님은 생각해 놓았습니다. 아버지와 의논해서 생각해 놓은 적이 있어요.
그 택함을 입은 사람들을 어떻게 창조하나 하면 천지창조는 없는데서 흙으로 만들었지만 이 택함을 입은 사람들은 죄 많은 아담의 노선, 아담의 육체의 노선 가운데서 죄 있는 아담의 노선, 죽어가는 아담의 노선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뛰어들어서 이들 가운데서 창세부터 예정된 사람을 뽑아내는 식으로 그들에게 그냥 무상으로 용서하는 식으로 뽑아내는 식으로 이들 가운데서 따로 천국 가는 백성을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선택이라는 의미가 애초부터 살게 돼요. 선택이 나중에 타락하고 난 뒤에 보자~ 누굴 선택하지? 이게 아니라 이미 창세전부터 선택했다는 그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오직 선택된 자를 이 안에서 뽑아가는 식으로 구원이 돼야 되는 겁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구원받고자 하는 열의와 열망을 일체 주님께서는 구원에 반영시키지 않는다는 그런 뜻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주여, 구원하소서. 해도 일체 그 말을 거부하고 나는 창세전부터 예정된 자만 찾으러 왔다, 나는 데리려 왔다. 이렇게 결정하시고 데려가시는 겁니다.
요한복음 17장을 한번 봅시다. 말을 잘 해야 되겠어요. 이제는 신체가 피곤하니까 말 잘못하면 다른 성경을 읽는데. 요한복음 17장 9절을 제가 읽습니다. 기도 대목인데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위하여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 중에서 아버지에 해당되는 아버지께서 예수님한테 붙여준 사람들이 따로 존재하고 있는 것을 아시고 그 자들만 분류시켜 데려가기 위해서 그 자들만 납득이 되는 그들만 이해되는 복음을 가지고만 예수님께서 활동하십니다. 지금도. 이것은 가족단위로 되는 것도 아니고, 교회가 집단적으로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개별적으로 개별적인 상황으로 구원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 인간적인 이성에서는 당연히 반발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죠. 왜 누구는 인삼 뿌리 주고 누구는 왜 무 뿌리 주느냐? 같은 인간인데 왜 차별하는 것이 그게 공평의 하나님의 속성에 부합되는 것이냐, 맞는 것이냐? 거기에 대해서 로마서 9장에 보면 이건 부합된다고 보는 겁니다.
왜냐 하면 어느 누구도 저는 구원받아야 합당합니다. 고 외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구원될 자격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누굴 구원하고, 누굴 구원하지 않고는 순전히 하나님의 자의적인 본연에 속하는 문제지, 구원되지 않았다고 해서 거기에서 반발할 수 있는 권한은 애초부터 너희는 범죄 한 죄인이기 때문에 없다고 부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정의가 정의답게 서게 된다는 겁니다. 그냥 죄인을 죄인의 의견을 반영해 버리면 이것은 죄인 취급한 것이 아니고 아직도 훌륭하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정의로움에 어긋나지요.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판사님이 피고한테 피고는 일어서라, 징역 10년! 해도 되겠나? 이런 게 아니에요. 징역 10년. 탕탕탕. 어이, 보조 판사, 예. 골프 치러 가자. 판사는 골프 치러 가고, 죄수는 수감되고. 그것뿐이에요. 그걸 보고 피고가 손들어 가지고 한 5년 어떻습니까? 우리나라에 안 되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5년 합시다. 어디 죄수 주제에 그런 소리를 하느냐 하고 일소에 붙이지요.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은 판사는 참, 공평한 판결했다. 고 보지요. 참 정확한 판결했다. 이렇게 보지요. 그야말로 죄수를 완벽하게 죄수 취급한 것으로 그 자체만으로 하나님의 공의성은 정의로움은 충분히 사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같이 10년, 사형되어 가야 되는데 어이, 어이, 너는 와. 저를 왜 구원합니까? 내가 너 처음부터 좋아한다 아이가. 내 사랑을 입었느니라. 하고 데려갔다면 이미 그 사람은 나는 구원받을만해. 라는 그런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나는 저주받아야 마땅해. 라고 했는데 거기에다가 거저 용서를 받았기에 사랑은 사랑대로 확-악 피는 겁니다.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보다도 마실까 보다도 그 나라 의, 주님의 의가 나한테는 더 큰 보물로, 내 생명으로 그 사람한테는 가슴에 뿌듯하게 자리 잡겠지요.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요한복음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그 사랑의 실현입니다. 그러면 저는 몇 년형 받아야 됩니까? 사형입니까? 라고 주님한테 묻는다면 주님께선 단호하게 이야기하겠죠. 이 산상설교 대로 살지 않으면 누구든지 저주받는다. 그러면 산상설교가 뭔가 보니까 이것은 도대체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게 만들은 그런 조항들, 산상설교가. 맹세하지 말라 했다, 누가 맹세를 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어요. 산상설교는 그 자체가 도저히 사람으로서는 범접, 흉내도 못내는 겁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누가 하늘에 쌓아 둡니까? 형제를 보고 마음속으로 악심을 품어도 형제를 살인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어떤 인간도 마땅히 사형돼야 될 사람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니까 아까 복잡하게 이야기 안 해도 예수님께서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랑을 펼치기 위해서 자기 임의대로 자기 마음대로 뽑아 세운 것으로 인하여 그 사람은 그 사람에게만 무상으로 예수님의 공로가 그대로 그 사람에게 주어져서 그래서 예수님과 그 사람은 한 통속이 되었다는 이 성경의 이야기가 완전히 다 풀렸잖아요. 오늘 날씨 풀리듯이 다 환히 풀렸어요. 조금도 일 점 의혹 없이. 원천 줄기 세포는 없습니다. 완전히 다 풀렸잖아요. 의혹이 다 풀렸잖아요. 더 이상. 아하, 주님은 너무나 무섭고 그리고 너무나 이처럼 용서받지 못할 자까지 용서하시는 이런 사랑이 땡잡은 사랑이 또 있겠느냐? 하고 구원받은 사람은 좋아서 너무나 감사하지요.
그러니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탈락한 것이 아니고요, 자꾸 그렇게 탈락했다고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탈락한 것이 아니고 제대로 자기 길을 그냥 가는 겁니다. 나란히 행진하고 있는데 그냥 가는 길을 갔을 뿐이에요. 다만 뭐가 특이하고 뭐가, 뭔가 약간 다른 이야기냐 하면은 가는데 불러 세워 너, 빠져. 이게 좀 이상해서 그렇지. 너는 천당 가야 돼. 너는 같이 지옥가면 안돼. 넌 나와. 이게 특이한 현상이지. 그냥 가는 길 가는 게 뭐가 문젠데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특히 목회자들은 예수 믿는 사람을 특이한 사람으로 봐야 됩니다. 의심 또 의심해야 돼요. 아닐 거야. 있을 수 없어. 하나님의 사랑 그렇게 함부로 받냐? 아니지. 분명히 저거 가짜일 수 있어. 몇 번씩 못 먹는 감인지 찔러 보고, 또 진짜 감인지 찔러 보고, 찔러 봐야 됩니다. 그럴 때 만일 진짜 예수님 고백한다면 그건 놀라자빠져야지요. 웬 기적의 슈퍼맨이 등장했구나.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 또 있네. 라고 그분을 위해서 섬겨야 되지요.
이것이 바로 성경 전체를 복잡한 삼위일체 동원하지 않더라고 간단하게 다 해결돼 버렸습니다. 무슨 중심?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결 다 되지요. 삼위일체가 다 한꺼번에 등장해도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결이 다 돼버립니다.
진도 한번 나가봅시다. 그 다음은 좀 쉬운 거니까 쉽게 말씀드립니다. 베드로후서 1장 16절. 이와 같은 방금 제가 이야기하는 예수님의 사랑은 너무나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게임의 룰하고 너무 다르기 때문에 베드로 본인도 사실은 이것은 큰 충격 가운데 얻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영광을 봤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세 사람이 변화산에 올라갑니다. 그냥, 그냥 산이죠. 나중에 변화되었으니까 변화산이지. 보통 산입니다. 그냥 조그만 뒷산이라고 보면 됩니다. 뒷산에 올라갔는데 예수님하고 세 사람이 올라갔는데 예수님과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 이 세 사람이 올라갔어요. 올라갈 때는 그냥 오늘처럼 등산 가는 줄 알고 올라갔는데 여기에서 올라가면서 졸지에 예수님께서 영광을 발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영광인데 예수님은 올라가기 전에 예언을 했지요. 너희들 가운데서 다는 아니지만 몇몇은 천국을 볼 것이다. 천국이 있는 것도 기분 좋은 이야기인데 실제로 천국을 눈으로 본다는 것은 보통 큰 특권이 아닙니다.
이 천국을 베드로가 천국을 봤을 때 이것은 자기만의 특권인 줄 그때는 오해했는데 이 베드로후서를 쓸 때는 이것이 천국을 본 느낌은 나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고 오는 모든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맛보는 그러한 영광인 것을 이제야 베드로후서 1장 16절을 이제야 고백하는 거예요. 그때 내가 예수님의 영광과 천국을 봤는데 나만 볼 것이 아니고 여러분도 봐야 여러분도 성도입니다. 라고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주 이거 세상 사람들 엿 먹이고 약 올리는 완전히 신비주의에서도 이런 신비주의가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너희들끼리 다 짜고 기독교라는 교세를 확대하기 위해서 그런 수법을 한두 번 쓰냐? 교묘하게 지어낸 이야기지. 그런 이야기가 들릴까 싶어서 여기 15절을 한번 봅시다. 16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인간적인 능력으로 믿고자 해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우리는 지금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라는 뜻이에요. 마음속에 샛별 떠오르는 것도 이것은 믿기지 않는 이야기죠.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는데 하품하시면 곤란하지요. 주님의 영광하고 있는데 빨리 끝내고, 햇빛은 그만 거두소서. 짜증납니다. 뭐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예, 신체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여기서 심오한 게 야고보와 요한 왜 세 사람만 데리고 갔느냐? 왜 12명 가운데 세 사람만 데려갔느냐 하면은 제자들은 몰랐는데 예수님께서 이 세 사람에게 보여줄 사람을, 세 사람을 또 보여줍니다. 예수님까지 합해서. 누구냐 하면은 모세와 엘리야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까지 합해서 세 사람이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초막 셋을 짓겠다,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은 현재에 우리가 신체를 지고 있고 우리는 지금 누가 봐도 세포로 구성된 보통 인간에 불과하다 이 말이죠. 그런 인간이 지금 산 위에 올라간 거예요.
그런데 똑같은 보통 인간, 보통 세포로 되어 있는 그러한 인간의 육체를 지닌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 이 세 분이 어떤 특정 영역에 들어가니까 놀랍게도 빛난 모습을 하고 있더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 지상에서 우리가 과학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그러한 원리원칙이 전혀 해당이 안 되는 새로운 영역이 우리 머리 위에 있다고 본 겁니다. 아예 역사 속에 침투해 있다고 헤겔은 그렇게 이야기 했는데. 이 역사 속에 이미 침투해 있는 거예요. 영적인 세력이.
물론 그 자리에 가봤자 지금 관광객들 가봐야 소용없습니다. 가봤자 모세도 없고, 엘리야도 없습니다. 이 한 순간만 공간이나 시간은 우리가 느끼는 시간, 공간 속에 얼마든지 천국은 침투했다가 치고 빠질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삼층천 올라갔다가 다시 빠져나올 수 있듯이 시간, 공간이라는 것은 천국에서는 장애물이 될 수 없어요. 항상 들어왔다가 나올 수 있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닫힌 문을 그냥 들어오시는 거예요. 이 문이라 하는 것은 화학적으로 금속으로 되어 있으면 금속결합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주 분자 간에 원자 간에 그 결합력이 높아요. 거기에 틈새가 우리 육체가 들어갈 틈새가 에너지 장이 좁아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한번 해보세요. 안되지. 안 되잖아요. 밀어붙여도 안 되잖아요. 물론 파장이 짧은 방사선이나 이런 것은 문을 통과합니다만 예수님 같은 경우는 육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통과 안 되잖아요. 안되는데 여기에 도착했더라 말입니다. 요즘 마술사죠. 그게. 그래서 깜짝 놀라죠. 그래서 도마가 안 믿었습니다. 안 믿은 것은 그것은 당연한 거죠.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했는데.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 세 사람이 이 야고보, 요한 세 사람과 대비를 시킵니다. 그럴 때 야고보와 요한,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뭘 잊어버리냐 하면 자아를 잊어버려요. 이것이 천국에서 특징이 뭐냐 하면은 내꺼는요, 내 초막은요. 이런 게 없어요. 내 빌라는. 이런 게 없어요. 그저 우리는 그냥 바라보기만. 그저~ 바라보기만 좋은 사람. 바라보기만 하면 좋은 사람이래요. 바라보기만 하면. 제가 이만하면 유명 가수 문제다. 그냥 바라보기만 하면 좋은 사람이에요. 초막 셋을 짓고, 그것이 천국이다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온전한 천국이 아니에요. 두 사람이 날아가 버립니다. 제거돼 버려요.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은 나중에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도 결국에는 천국 가면 이 모세 자리를 차지하고, 엘리야 자리를 차지할 거예요. 예수님처럼 우리 천사와 같이 변화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 나오니까. 그때는 천사와 같이 변화됩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등장한 것은 바로 세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면 언제든지 항시 침투해서 모세와 엘리야처럼 너희들도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맛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그들을 찾아간 겁니다.
나중에 이 모세와 엘리야는 날아가 버리고 누구만 남는가? 예수님과 그리고 하늘에서 아버지 음성만 느낍니다. 제자가 눈 뜨고 보니까 어, 모세, 엘리야는 없어요. 어디 갔지. 하니까 예수만 남았더라. 그리고 말하기를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예수의 말만 들어라. 라는 이야기가 베드로후서 1장 16절, 17절에 쭉 나옵니다. 너무나 말로 다할 수 없는 지극히 큰 영광을 했고 그 영광 중에 음성이 뭐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중심으로만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의 특징입니다. 삼위일체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으로 일하는 거. 항상 하나님은 예수님을 앞장 세워서 일을 처리합니다. 우리가 오해해서 역시 예수님보다 아버지를 영광 돌려야. 라고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항상 가려버리죠. 예수님을 믿어서 그것이 영광이니까 괜히 예수님 피해가지고 나한테 직접 올 생각 말란 말이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바로 이것을 10절에 보면 힘써 믿고 지켜라 택한 자와 부르신 자에게만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된다는 겁니다. 그때 우리는 깜깜하고 어두운 비친 등불 같아서 이 영광스러움이 변화산처럼 피어나올 때 우리는 이 성경 전체가 비로소 이해가 되는 책이 된다는 겁니다. 이해가 된다는 겁니다. 주께서 신기한 능력으로 이 성경말씀 대로 우리에게 적용을 시키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만약에 우리가 이 영광을 봤다면 자연적으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믿음과 절제와 인내와 덕과 지식 같은 이것이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퍼져 나오겠죠. 봤는데 뭐. 이미 천국을 봤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시시한 것과 비교하거나 경쟁할 할 이유도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봤기 때문에.
어떻게 봅니까가 아니라 누가 봤습니까를 묻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안 보이는 내가 어떤 노력을 시도하면 볼 수 있습니까? 라는 그런 물음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누가 이러한 것을 납득을 했지요? 라고 반대로 도리어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분이 저한테 이런 일이 없는데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목사님, 제가 지금 나이가 서른 살 남잔데, 어떻게 살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이 무슨 질문인지 몰라서 제가 쑤셔보는 겁니다. 지금 사는 동네가 어딥니까? 대구 서문시장 근첩니다. 그래요. 아버지가 그러면 뭐 하십니까? 아버지가 서문시장 2층에 원단장사였습니다. 그래 원단장사면 원단장사하면 되겠네요. 동대문시장이나 중국에 돌아다니면서 원단장사하면 되겠네요. 하면 어떻게 됩니까? 원단장사를 하게 되면 뛰어들면 그 나름대로의 단호한 조합이 구성되어 있어요. 그건 옛날부터 상공업체의 조합이 있는데. 이 조합에서 인지도를 높이고 숙달돼야 되고 숙련을 살아야 되고 거기에 대한 단골도 확보해야 되고 여기서 한 10년 정도 굴러야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죠. 또 봉화에 사는 어떤 분이 와가지고 목사님, 어떻게 살까요? 뭐 하는 것 좋아합니까? 사고팔고 하는 것 좋아합니다. 그러면 문방구 가시면 되겠네요. 문방구 가서 3년 동안 점원 노릇하면 뭔가 볼펜값이 어떻게 이윤이 어떠한지 다 아십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어떻게 할까요에 대한 답변이 그 사람이 전부 납득이 돼지요.
그런데 성경에 대해서는 그렇게 제가 설명을 하지를 못해요. 문방구 직원을 하고, 원단장사를 하고 이것은 그 사람이 큰 장애자가 아닌 이상은 정상적인 보통 정상인 비율에 해당되는 사람은 이것은 얼마든지 자기가 게을러서 안 해서 몰랐지, 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성경말씀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냐 하면은 뭘 봤습니까? 라는 말, 주님에 대해서 믿습니까? 이렇게 되물어 볼 수밖에 없지, 어떻게 하면 그것을, 안되는 걸 할 수 있습니까? 라곤 답변을 제가 못해 드립니다. 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이렇게 되지요. 그럼 질문합시다. 원단장사를 한 5년간 합니다. 5년 동안 하면 조합 내에 뭐가 보이겠습니까? 비리가 보이겠지요. 그러면 자기가 교회 다니는 사람으로 양심의 가책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거란 말이죠. 비리가 있고, 거짓이 있고, 불법이 성하고, 조합이 원래 그러니까 심지어 미용사조합도 그렇고 뭐 어느 조합도 정비소도 마찬가지고, 다 그런 심지어 노회도 마찬가지 다 있는데 이 비리가 없겠습니까? 있지요. 그때 만약에 물어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하면 저는 그때 이 경우는 어떤 직업을 하던 바보 목사는 그런 직업은 아니기 때문에 베드로전서처럼 맡기세요. 그러면 노조할까요? 뭐 하고 싶으면 하고. 하지만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비로소 그때는 성경이야기가 가능해지는 거예요. 그냥 무턱대고 어떻게 살까요? 하면 뭐 하고 싶은 것 뭡니까? 그러면 고등학교는 어디까지 나오시고, 그러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경우는 뭐뭐 준비하시고, 시험은 일년에 두 번 치는가, 한 번 치는가 하고, 경기도는 몇 명 뽑고, 경상도는 몇 명 뽑고, 그런 것 책보고 소개할 수 있단 말이에요. 인터넷 들어가서 소개할 수 있거든요. 이 무슨 신앙과 관계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결혼한 사람이 시집을 갔다. 시집이 불도가 심하다. 불교가 심해서 교회 못 가게 한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럴 땐 충분히 이야기가 되지요. 교회 못나가게 하는 이유가 종교적인 문제 대문에 그렇습니까? 안 그러면 당신에 대한 시집의 위상 때문에 그렇습니까? 안 그러면 남편의 무관심 때문에 그렇습니까? 만약에 시집에서 학대를 한다면 남편하고 상의해서 살림을 따로 나오면 마음대로 교회 갈 수 있겠네요. 돈도 한 푼 안 주면서 살림을 나는 이야기를 할 수 있지요. 그것은 하나의 조언할 수 있는 겁니다.
성경에 대해서 가지고 어떻게 할까 할 때는 질문 자체가 성경에서 가당한 것인가가 매치가 되어야 돼요. 매치되지 않고 어떻게 한다 한다면 그냥 직업소개나 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이지요. 그런 것이 베드로후서에 있어서 강하게 이야기합니다.
2장에 들어가 봅시다. 1절에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으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 하느니라"
이것이 어디 나오냐 하면, 고 앞에 유다서에 보면, 유다서에 나온 내용이 여기 되풀이해서, 저 뒤에 나오네요. 뒤에 397페이지. 유다서에 나오는 내용이 여기에 그대로 나옵니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이런 내용으로 하면 이게 쉽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서 붙잡혀 본 사람과 아예 하나님의 능력이 없으면서 자기의 육체에다 호소한 사람의 차이가 날이 갈수록 이 세상 마지막이 될 수록 그게 분명하게 극명하게 드러나는 쪽으로 주께서는 세상을 운영하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느냐 하면은 저걸 어떻게 고칠까, 바꿀까, 개혁할까? 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 생각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시는 걸 내가 건방지게 여러분,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저들이 가면 갈 길로 가고, 나는 내 갈 길 가고 그렇게 하면 되는 거예요. 특히 이 사람들이 이단들이 뭐가 문제냐 하면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의지하는 데가 없어요. 뭐가 믿는 구석이 없어요. 자기 자신을 믿지 아니하면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습니다.
이걸 유식한 말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근대주의 이후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을 이야기하라면 딱 이 대목과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알려면 모더니즘, 현대주의, 근대주의 여러 가지 있는데 모더니즘을 지난 그 후가 포스트모더니즘이거든요. 그러면 모더니즘이 뭔질 알아야 포스트모더니즘을 알게 아닙니까? 그러면 모더니즘이 뭐냐? 모더니즘에 대해서 외국의 책들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모더니즘을 잘 보여주는 것이 김기림과 이상, 이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뭐냐? 퇴폐주의, 허무주의, 말세주의입니다.
말세주의라는 말이 상당히 경건해 보이고 신앙적으로 보이죠. 이 말세주의라 하는 것은 내가 나를 보호할 보호막이 더 이상 없는 세상을 한탄하면서 부르짖는 것이 말세다 이 말입니다. 나를 보호해줄 어떤 보호막이 없는 거예요. 융이나 프로이드는 주장하기를 인간이라 하는 것은 항상 얘기에서 엄마에서 모태에서 분리되어서 나오기 때문에 얘에서 나오면서 찾는 것이 뭐냐 하면은 그때 자궁 속에서 있을 때 자기를 보호했던 보호막을 찾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이라 하는 것은 강제로, 강제가 아니고 참, 자연적으로 아기와 자궁 속을 분리하기 때문에 그때부터 얘는 커가면서 옛날에 포근히 자기를 자궁처럼 보호했던 그 보응의 대체물을 찾기 시작했던 것이 바로 엄마고, 아빠고, 나중에 크면 친구고, 나중에 애인이 된다는 겁니다.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자기를 용납해 주고, 사랑해 주는 어떤 보호막이 없으면 안에서 자기의 정체성, 자기의 정체가 모호해지기 때문에 여기서 발작을 일으키지요. 발작을 일으키게 되어 있어요. 이 발작을 일으킬 때 이게 정신분열증 등 여러 가지 설명을 합니다만은.
이 모더니즘이라 하는 것은 세상이 진보하고 발전하고 계속 발전한다는 그 희망, 미래의 소망이 그동안 자기를 보호해줬던 어떤 낮처럼, 비전처럼 계산했는데 이게 1차대전과 2차대전을 거치면서 인간의 희망과 발전을 내다보는 그 발전이 아주 흉악한 대파멸로 끝장나는 것을 그들은 현장적으로 경험했어요. 사람이 과학만 발전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도덕도 윤리도 발달된다고 이렇게 낙관적으로 희망적으로 생각했던 그것이 나중에는 잔인한 결말로 봤을 때 다시 한번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걱정을 하게 되고 자기가 누군지를 찾지를 못해서 방황하게 되는 겁니다.
어떤 학자가 그랬습니다만 사람이 사람을 제일 현혹케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상상입니다. 그 상상 중에서 더 현혹케 하는 것이 미래에 대한 소망이에요. 그냥 알 수 없는 소망이 있을 때만 사람은 지금 살아가는 힘을 느낍니다. 그냥 내일 뭐 할지를 모를 경우에는 사람은 항상 지금 사람은 자기 주체를 모르게 돼요. 그런데 이것이 바로 지금 기댈 언덕이 없는 거예요. 주님이 없기 때문에 살아계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자기 보호막을 자기가 스스로 취사선택해서 가려야 된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바쁜 가운데서도 그래서 예를 들어 장터에서 그냥 조그만 난전에서 시금치나 나물을 파는 할아버지, 아줌마조차도 서울 간 자식이 언젠간 성공하리라는 그런 희망을 갖기 때문에 찬바람 영하 10도 되는데서 수건 두르고 콩나물 팔고 이러면서 버티는 힘이 있어요. 버티는 힘이. 언젠가 서울 간 아들이 성공해서 나를 모실거야 라는 그런 희망이 있단 말이지요.
서울 신림동에 고시원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이만 명이라고 해요. 제가 아는 친척 가운데 고시원에 있는 28살 먹은 아가씨가 있는데 제가 자신 있게 이야기합니다. 고시원에 들어간 지 벌써 5년 되었어요. 5년 되었는데 한달 생활비 300만원 씁니다. 좀 사는 집이거든요. 뭐했냐 하면 중국에 된장납품 해가지고 좀 살아요. 이 근처에도 된장공장 있는 모양인데.
그러니까 이 28살 아가씨는 시험 준비하는 핑계 대고 계속 세월만 보내는 백수 아닌 백수로 보내는 거예요. 그런데 아주 호사스런 백수지요. 모처럼 한번 만나면 사법시험 공부한데요. 수준을 낮추지. 그런데 이 아가씨는 수준을 낮추면 안돼요. 낮춰버리면 내가 없어, 내가. 모더니즘에 빠져있어. 지금까지 영대 법대 중퇴하고 졸업도 안했어. 빨리 합격해가지고 영광을 보겠다고. 영광도 변호사의 영광, 모세, 엘리야 영광도 아닙니다. 그냥 영광 보겠다고 2학년 중퇴하고 학교 시시하다고 중퇴하고 서울 가서 고시시험에 뛰어들어가지고 5년째 놀아, 5년째 놀아. 자기는 안 논데. 안 놀지. 300만원 가지고 호사스럽게 사는데 무슨 공부가 됩니까? 걔가, 조카죠. 올 때 뭣 타고 오느냐 하면 비행기 타고 와요. 그래도 수준 안 낮춥니다. 사법고시의 수준 안 낮춰요. 9급 공무원으로 안 갑니다. 절대로. 왜? 그동안 버틴 힘이 바로 사법고시라는 허상이기 때문에. 이런 것이 바로 모더니즘이에요.
이런 것이 뭐냐 하면 퇴폐주의. 장로님이 윤리도덕 이야기했지만, 윤리도덕을 내세우려면 어느 정도 안정된 자기 자리가 마련돼야 거기서 품위라는 것이 생성되지 지금 백수인데 무슨 백수 같으면 추리닝 입고 있어야 되지, 추리닝 입고 있는데 무슨 윤리도덕이 되겠습니까? 안정된 자리만 달라, 윤리도덕 하지 말래도 할게.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 세상 전체가 결국 그래서 왜 진보, 진보를 해서 망했느냐? 이게 인간의 무한한 경쟁심 때문에, 주체 못할 경쟁심 때문에 이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희망이 없을 때 희망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뭐냐? 감각적인 거죠. 이게 바로 베드로후서에 나오는 오늘 본문이에요. 극히 감각적인 것으로 자기의 허한 것을 메우고, 또 메우고, 메우고, 또 메우면서 자꾸 메우는 거예요. 사람은 감동을 원하는 게 아니고 뭘 원한다고 했습니까? 자극을 원한다고 했지요. 계속 자극적인 것, 영화도 더욱더 자극적인 영화가 계속 나오고, 소설도 자극적인 것 계속 나오고, 어지간히 19 동그라미 해가지고 보지도 않아요. 19 동그라미 나오면 초등학생이 그것 시시해서 안 봅니다. 이렇게 나와 버려요. 전 국민의 퇴폐화가 이뤄져요. 전 국민의 퇴폐화. 전 국민이 그렇게 나아가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전 국민이 자기 자리가 없어서 일자리는 적고 도전하는 사람은 많기 때문에 그래요.
전라남도나 광주에서 빈민층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자식교육을 위해서 도시에서 무리한 교육비가 올라가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데 그것이 얼마 전까지는 그게 약간의 성공을 봤는데 지금은 도시 올라간 여기 얘들이 충청도에서 전라도에서 경상도에서 올라간 얘들끼리 경쟁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그 올라간 비용만큼 대도 충분한 희망이 보장받을 수가 없어요. 너도나도, 나는 죽어라고 일할 테니까 너는 공부만 해라. 라는 그런 시절이 지나가 버렸어요. 도로 귀향해서 농사지을 판이에요.
그런데 농사를 짓게 되면 문제가 뭐냐 하면 지금 논 한 마지기에 파를 심었다, 그래서 나중에 추수할 때 나오는 가격이 나이키 신발 하나 신으면 끝나는 문제에요. 돈이 안돼요. 돈이 안돼. 거기에 투여된 노동, 사료값 다 합하면 차라리 못 먹어도 구로공단에 가서 편의점 아르바이트, 구로공단도 공장도 아니고 그 근처 편의점에 파트별 아르바이트해도 이 무안의 양파 값보다 더 나온다니까. 그러니까 얘들이 이 동네에 붙어 있을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냥 그 부모들은 그것도 모르고 돈만 보내주면 성공하는 줄 알고 있지요. 이것도 바로 모더니즘이에요.
그래서 이 모더니즘에서 벗어나면 후기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하는데 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이 뭐냐 하면 (모더니즘은) 경쟁이잖아요, 경쟁해서 파멸을 일으켰잖아요. 여기에 대한 특징이 뭐냐 하면 평등입니다. 어떤 평등이냐 하면 극단적인 평등이죠. 그러니까 이 평등이란 게 뭐냐 하면 너는 니 인생 살아라. 나는 내 인생, 내 멋대로 살게. 그러면서 너와 나는 평등이다. 그 말은 평등이에요. 너는 잘 먹고 잘 살아라. 나는 못 먹고 노숙자로 살게. 하지만 너와 나 사이는 불평등이 아니고 평등이다. 그냥 막연한 평등이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그래서 요새는 방콕주의란 게 있어 가지고 방콕주의가 뭐냐 하면 방에 콕 틀어박혀 가지고 안 나오는 그런 얘들을 방콕 얘들이거든요. 처음 듣습니까? 그런 게 있습니다. 얘들에게, 중소기업이 현재 사람, 인력이 없다고 해도 안 가요. 사람들이. 중소기업에 가가지고 경리 사람들 가가지고 사람 뽑아 가지고 저 경리했는데 신문에 보니까 80만원 준다는데 일하겠습니다. 하면 그 사장이 80만원은 그냥 광고용이고, 요새 공장이 안 돌아가서 50만원밖에 안하는데 50만원 하면 안 올까봐 80만원 한 거고 사실은 50만원인데 나중에 공장 돌아가면 80만원 쳐 줄게. 이렇게 되거든요. 더러워서 안 가거든요. 사실 더러워도 가야 되는데.
사법고시 포기 안하는 그 아가씨처럼 에라이, 못 먹어도 평등인데 내가 뭐 하려고 아쉬운 게 뭐가 있냐? 평등주의를 앞장 세워서 그냥 있는 대로 죽치고 살아가는 거예요. 만인은 드디어 평등사회가 돌아왔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모든 게 평등해요. 머리를 길러도 평등, 옷을 입어도 남방 입어도 평등, 누굴 보고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만은 모든 게 자기 즐거움, 자기 자유주의로 그것을 자기 개성이라고 말하고 그걸로 모든 것은 이미 평등 완료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단편을 통째로 모아보면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의 공로에 기대고 그분의 공로에 참여하는 그런 게 없어요. 없고 역시 내 인생을 내가 알아서 해석한다, 그것만 남는 게 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나오는 모든 광고라든지, 시라든지, 문화라든지, 이것은 주제가 뭐냐 하면 인생은 이래 사나 저래 사나 평등하니까 니 하고 싶은 대로 꼴리는 대로 사세요. 그것이 포스트모더니즘, 모든 예술 경향의 특징입니다. 참, 그걸 보면 지금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불쌍해요. 저는 다 살았습니다만은 앞으로 이 경쟁사회를 살아가야 하니 걱정된다, 걱정돼.
이러한 젊은 세대의 사회상에 기성세대가 따라 가질 못합니다. 따라 갈 수가 없어요. 인간답게 살라는 그것이 더 이상 먹히질 않습니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인간답게 사는 품위 유지할 수 있는 기본적인 소득이 있어야 되는데 그 소득이 없는 사람은 인간답게는 허구가 아니냐? 라고 이야기하고, 연세 많은 사람들은 소득 이전에 인간다움은 기본적으로 갖춰 있는 것인데 그것마저 밟아버리면 정말 니가 짐승된다. 이렇게 충고하고. 그러나 이들에게는 자기의 소망과 비전을 스스로 포기할 마음이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자본주의의 욕망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면서 베드로후서 2장에 나오는 이런 식으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거예요. 자기 원하는 대로 자기가 느끼는 대로 그냥 사는 겁니다.
여기 9절에 보면 "주께서 경건한 자를 시험에서 건지시고" 라고 했을 때에 여기 경건이 뭐냐 하면 바로 롯이나 노아처럼 하나님의 말씀, 약속을 그런 가운데서도 그걸 의지하고 믿을 것은 주의 약속밖에 없고 주의 도움밖에 없다는 것을 끝까지 믿게 되는 그 사람을 경건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외에 믿기는 개코를 믿어, 믿을 것은 나밖에 없다. 아무도 믿지 않고 다 사기꾼들이고 다 이용해 먹으려고 달려든다. 라고 하는 사람들, 특히 다단계. 우리 친척 가운데 친척이 많아서 하여튼 애 먹어요. 암웨이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교회 내에서 어디에서 눈만 뜨면 암웨이를 전도하는데 열났어요. 다이아몬드 되려고. 그런데 다른 회사 같으면 그만큼 했으면 다이아몬드 아니라 플래티넘까지 해서 그 이상으로 했을 것인데 도대체 이 암웨이란 회사는 어떤 회사인지 그만큼 했는데 기어코 다이아몬드를 안 해 주네. 무슨 심보인지. 그래서 지금 저한테 있는 이거 찍찍 뿌리는 것도 어쩔 수 없이 암웨이 제품으로 해가지고 입에 뿌리는 그것도 암웨이 샀고, 집에 있는 정수기부터 해서 화장품, 손에 바르는 것부터 어쩔 수 없이 암웨이를 사지 않으면 친척 간에 결별할 상태에요. 과소비를 부추겨 놓고 안 들여놔도 될 물건까지 사야 되고. 이것이 뭐냐 하면 더 이상 주님의 약속을 믿다가는 큰 코 다치겠다는 거예요. 더 이상 주님을 믿고 살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그분이 권사님이에요.
경건치 않는다는 것은 성경을 볼 이유도 없고 주님께서 어떻게 나를 통해서 이 성경말씀을 펼치는가, 그런 것은 별 관심도 없고 어쨌든 교회 내에서도 돈이 있어야 사람이 인간 취급 받더라, 사람대우 받더라, 승진도 빠르더라, 그것만 생각하는 사람,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 영향 속에 쭉 있는 겁니다. 교회에서도 누구 하나 승진하고, 누구 하나 합격하면 광고 나팔 불어가지고 없는 사람은 기 팍 죽게 만들고 그렇게 하지요.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 무서운 말이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이렇게 되어 있지요. 짐승같다 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권위성에 대해서 완전히 도전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 자체를 없는 걸로 간주하는 그러한 사람이에요.
14절에 보면 탐욕이 가득한 사람이고,
15절에 보면 브올의 아들 발람, 아까 이야기한 발락의 삯을 받고 갔던 당나귀가 말해 가지고 왜 때리십니까? 하고 말하고 주고받던 당나귀하고 말했던 발락 선지자, 이런 사람이 "말 못하는 당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그것은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저주가 미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얼마나 다급하게 당나귀의 진로를 가로 막았나, 천사가 와서 가로 막았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인간들이 아무리 부인해도 이 세상은 말씀대로 운영 중입니다. 그런 것을 믿으세요. 라는 호소지요.
그 다음에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19,20절) 여기서 보면 참, 이런 게 어려워요. 예수님을 안다는 것이 곧 뭐로 이어지냐 하면 이 세상과 결별한 것과 동일하다는 겁니다. 참, 이거, 어떻게 보면 상당히 무리한 요구처럼. 이미 세상과 결별했는데 왜 세상의 풍습을 본받느냐 하는 쪽으로 책망하고 있거든요. 왜 그걸 부러워하느냐 이 말이죠. 세상 사람들의 그 사고방식을 왜 그렇게 부러워하고 그 흉내를 못 냈을 때 안달이냐 이렇게 다그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피 뿌림은 그러면 그 효과가 어디로 날아가 버렸느냐 이런 이야기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못 지킵니다. 못 지키는데 이게 지키는 사태가 일어나고 이런 것이 그대로 동의되고 고개 끄덕이면서 맞습니다. 고 믿어질 때 이것이 바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같은 하나님의 성도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도가 이런 거예요. 성도라 하는 것은 얼마나 완벽하냐가 아니라 누가 그 사람의 운명을 쥐고 있느냐? 예수님이 쥐고 있는 사람 같으면 이런 생활 가운데서도 불현듯이 언뜻언뜻 아아, 이것이 세상적인 풍조고, 사조구나. 주인이 없고 목자가 없고 믿는 주님이 없으니까 결국 남은 것은 자기 보호막을 스스로 챙기는 수밖에 없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보호막이 나왔으니까 이 한 말씀드리고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나머지는 3장은 내일 하도록 합시다.
사람은 자기를 지켜주는 보호막을 그리워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환상이란 겁니다. 왜 환상이냐 하면 이것이 계속 일관되게 우리 뭐 주님, 십자가 몰라도 이게 자꾸 바꿔요. 특히 교회 내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으면서 믿는 척 하는 사람들은 자기 보호막이 자꾸 바뀝니다. 예를 들어서 방언을 한다든지, 병 고치는 기적이 일어났다든지, 어떻게 했더니만 헌금을 5만원 드렸더니만 50만원 나왔다든지, 그럼 50만원 드리면 500만원 나오겠네요. 그럼 완전히 돈 놓고 돈 먹기잖아요. 해보세요. 나오는가. 안 되지.
십자가라는 분명한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대신해서 교회 내에서 어떤 대우받으려는 입장에서 자기 신앙적인 흉내를 자꾸 내려고 해요. 예를 들어서 금식했더니만 15일째 금식 때 주님이 나타났다, 이런 것. 이런 환상을 자기의 자기 자신을 뽐낼 수 있는 어떤 자기를 지켜내는 보호막을 자꾸 가지는데 이게요 나이 서른 살 때, 나이가 들면 자꾸 바뀌니까 이게 믿을 게 못돼요. 이건 단지 허풍에 불과한 거예요.
제가 책을 열 몇 권 썼어요. 책을 열 몇 권 쓰면서 제가 느끼는 것이 뭐냐면 첫 번째 쓴 내용을 못 지켰다는 거예요. 책을 아무리 쏟아내도 그 책 내용대로 내가 살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는 겁니다. 그걸 입으로 고백 안 해도 여러분 다 아시죠?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스물, 백 권을 써 보세요. 책 내용대로 사는가? 그리고 더 웃기는 것은 첫 번째 썼던 내용을 다 잊어버려요. 그것 누가 썼지요? 다 잊어버려요. 신체적인 결함이 문제인데. 책 썼다는 이것이 보호막이 될 수가 없어요. 오히려 책 썼다가 보호막이 돼버리면 나는 잘난 사람이 돼버립니다. 원래 잘난 체 하지만. 잘난 사람이 돼버리는데 십자가가 분명하면 항상 그 앞에서는 우리가 뭐가 됩니까? 우리는 주님의 공로만 구원될 정도로 우리는 강도 같고, 창녀 같고, 죄인일 뿐이라는 것이 확정 되잖아요. 확정됩니다. 십자가는 변동이 없어요.
그러면 내가 교회에서 성과급 같은 것은 항상 이것은 시시때때로 자기를 교양 있게 하기 위해서 자꾸 바뀝니다. 자기 자존심 세우는 쪽으로 자꾸 바꿔요. 그래서 제가 그 28살 아가씨 친척의 부모라면, 제 조카지만, 만약에 내가 친부모라면, 이제는 9급부터 시작해서 능력껏 승진하면 되잖아요. 어떤 사람은 토목 9급 들어가서 행정고시에 합격한 사람이 얼마 전에 있대요. 그러면 된다고. 자기 전공분야에서 또 완전히 도사가 되면 시험 나와도 빠삭하게 아는 거니까 경험 많으니까 시험 치면 승진이 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 아가씨는 9급으로 낮추면 주위에 자기를 지켜보는 많은 눈들이 있잖아요. 눈들이 자기가 우사스럽다, 부끄럽다는 겁니다. 이게 뭡니까? 이게. 뭐가 부끄러워요. 왜 그때는 평등이 아닌고? 눈들이 있다는 거예요. 눈들이. 그런데 이 눈들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 다 환상들입니다. 친구들의 눈, 친척들의 바램, 이런 것은 다 환상들이고 본인이 십자가 앞에서 낮아지면 이런 모든 것은 주시면 그냥 감사하고, 9급 치는 것도 감사, 요새 9급 정도라는 말도 못해요. 9급도 16 대 1, 전부 20 대 1 더 돼요. 아니 100 대 1. 9급도 100 대 1이에요. 지나 개나 다 칩니다. 그것 보면 우 집사님이 얼마나 위대한지.
제발 여기 복음에다가 예수님의 죽으신 십자가를 놓으시고 항상 자기가 죽어 마땅한 죄인이지만 주의 은혜로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을 고백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