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강-롬8장 12-14(육신대로 살기)1307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8장 12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9페이지입니다.
로마서 8:12-14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우리 자신도 모르게 누구한테 빚을 졌다는 겁니다. 누구한테 빚을 졌느냐 하면 예수님한테 빚을 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어 갈 우리를, 지옥 갈 우리를 생명으로 바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한테 빚을 지고 있다는 겁니다. 무엇으로 갚으려도 갚을 수도 없는 빚진 자로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어떤 탈이 나고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 앞에서 대들거나 항의할 수 없는 그런 처지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남한테 빚을 내가 갚아야 되겠다. 빚을 내가 갚고 나도 어엿한 자립적인 존재가 돼야 되겠다. 이렇게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성경에서 이탈된 사람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사람이 대인관계에 있어서 누구한테 빚지고는 못 살거든요. 빚 갚아 줘버리면 그 뒤에 일어나는 현상은 빚 갚기 전에는 저 사람한테 종속되지만 빚 갚아 줘버리면 이제부터 니는 니 볼일 보고 나는 내 볼일 보고, 니는 니고 나는 나다. 이렇게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우리가 예수님한테 빚을 졌다고 하니까 우리는 그것이 언 듯 보기는 상당히 기분 좋은 이야기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그럼 나는? 나만의 인생, 나만의 개성은 누가 살려주지? 가만히 들어보니 기분 나쁜데?’ 그렇게 생각이 들 수가 있거든요. 그런 생각이 우리가 자꾸 들고 ‘그럼 내 인생은? 내가 꿈꾸는 인생은 따로 있는데 그걸 뭉개면 안 되죠. 주님은 나를 영생 보낸다고, 천국 보낸다고 해서 무작정 강탈해 가시면 곤란합니다.’ 라고 그렇게 나오게 되면 그 사람은 지금 뭐를 모르느냐 하면 성경에서, 특히 오늘 본문 성경에서 우리 사람을 보고 인간이라고 하지 않고 일부러 육신이라고 쓰는 그 개념을 사용하는 취지를 몰라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육신으로 본다는 것은요 인간이라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존재로서 나는 인간이고 싶다. 그거는 니 생각이고 그게 바로 육신적인 생각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육신으로 다루고 있지,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 그 인간으로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뭐 간단하게 말해서 ‘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뜻입니다. 니가 자꾸 사람이라고 우기고 자꾸 권리를 주장하는데 니는 애초에 인간이 아니야, 왜 이래? 니 인간 아니야.‘ 가루가 돼야 돼. 가루, 흙으로 가루가 돼야 된다니까. 왜, 인간이 아니고 육신이니까. 나는 너를 육신으로 다루고 있는데 니는 니 혼자 착각해서 니를 인간, 인간, 인간. 나란 인간은 어떻게 살지? 남은여생을 어떻게 아름답고 찬란하지? 자꾸 자립적인 인간으로 우기면 그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너를 살려내겠다는 그 노선에 속하지 않은 사람 돼 버려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때는 그냥 우리가 인간의 자격으로 영생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육신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지는 겁니다.
로마서 8장 5절 또 몇 주 지났다고 다 잊어버렸죠? 할 수 있습니까? 잊어버리는 게 인간의 육신의 본성인데 5절에 보면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그 다음에 6절에 보면 무섭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사망이 보고 싶습니까? 사망을 느끼고 싶습니까? 사망이란 것을 경험하고 싶습니까? 사망은 바로 우리 육신 끝에 달려있는 꼬리 같은 거예요. 새삼스럽게 사망 아닙니다. 새삼스럽게 영생 아니에요. 바로 우리가 육신이 살면 육신으로 다루어지면 그 육신 끝에 동그랗게 등장하는 것이 사망입니다. 육신 없는 사망 없고 사망으로 나가지 않는 육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육신이라고 다루는 것은 기어이 너를 통해서 사망을 내가 성취시키고 말리라. 그런 뜻입니다. 내가 너를 육신으로 다루는 것은 기어이 지옥을 만들어 내고야 말리라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내가 너로 말미암아 기어이 천국을 만들고야 말리라 하는 그런 의의가 담겨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그냥 들러리에요. 우리 독자적인 우리 개성, 우리 영역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재료가 되는데 요리할 때 그 재료가 되거든요. 이걸 어떻게 주님께서 요리하느냐에 따라서 천국이 천국으로 요리되고 하나는 지옥으로 요리되는데 그것은 그 조리하는 재료를 가지고 육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육신이라고 할 때는 그동안 어떤 인간도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육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은 전제로 하고 하는 겁니다. 그게 8장 3절에 보면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라고 돼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뭔 뜻이냐 하면 어떤 인간도 자기를 육신이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육신이라고 보는 것은 하나님 관점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하나님 관점으로 볼 때 이 육신이 육신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 관점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를 하나의 인간으로 독립적인 인간으로 보는 거예요.
이번에 수련회 할 때 강의하겠습니다마는 영화도 예고편이 있는데 미리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나를 내가 여기 있다고 생각하는데 한번 따져 보세요. 우리가 언제부터 내가 나라고 기억하고 있습니까? 6개월 될 때, 1살 때, 그때 나라고 생각 안 해요. 제 말은 내가 나를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내 주변에 다른 존재가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가르쳤기 때문에 또 그 사람들을 모방해서 어느 나이 쯤 되면 ‘이제 나는 나라고 이야기해야지.’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나라는 것이 우선이 아니고 이 육체가 우선이 되는 거예요. 제가 하는 이야기는 ‘이 육체는 내꺼야.’ 라고 하는데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육신 덩어리가 먼저 있고 난 뒤에 추후 적으로 덧붙여진 표현방법이 나라는 거예요. 나라는 것은 이건 육신이 덧붙인 것이지, ‘나‘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시작할 시점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나라는 것이 사라질 시점도 있다 이 말이거든요. 남는 것은 뭐밖에 없느냐 하면 이 육신 덩어리밖에 없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이게 흙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평생 사는 것이 도대체 누굴 위해 산거예요? 허깨비 같은 나라는 존재를 위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헛짓하고 있는 겁니까? 부모는 말합니다. 나는 너를 위해서 열심히 밥 해준다 하는데 자식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나를 위하여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어줬을 뿐입니다. 엄마가 밥 해준다고 엄마한테 몸 바치고 할 나 육신이 아니에요. 나 육신은 오직 나만을 위해서 존재하지, 누가 나한테 잘해준다고 해서 껌벅 넘어가서 그에게 충성한다는 것은 그건 내가 용납하지 않아요. 내가! 내 자신이 용납하지 않죠.
사랑한다는 말은 다 거짓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는 이야깁니다만 새삼스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내가 나만을 사랑할 테니까 동조해 달라는 그런 요청에 불과한 거예요.
인간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습니다. 없고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부터 육신을 만들었지, 인간을 만든 게 아니에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의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서 자기가 남의 육신, 하나님의 육신에다 자기 꺼라고 소유등기 이전하기 위해서 나라고 갖다 붙인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13절에 보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이런 말씀을 해요. 이건 뭐냐 하면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위하여 이렇게 살게 되면 남의 몸인데 내 것으로 전환했기 때문에 이것이 실제 현실과는 부합되지 않은 겁니다.
그러면 죽인다는 것은 소멸시키는 거거든요. 그런데 소멸시켜 가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을 지우개로 지워가면서도 말하기는 그 지우는 이유를 누구 탓으로 돌리느냐 하면 육신 탓으로 돌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만든 이 육신이 과연 사라지고 없는 것인가? 우리가 알기로는 사라진다고 생각하는데, 인간은 흙이니까 가루가 된다고 했는데 과연 하나님께서 육신을 만든 취지 입장에서 볼 때 우리 육신은 사라지는가? 이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거는 세상에서 육신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거고요. 성경에 보면 그게 나오네요.
출애굽기 3장에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모세가 양을 치고 있는데 떨기나무가 있어요. 평소에 늘 봤던 떨기나무였습니다. 그런데 떨기나무에 갑자기 불이 붙었어요. 뭐 119 부를 입장은 안 되고 너무 놀랐죠.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3장 2절에 보면 “불이 붙었는데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고 돼 있습니다. 3절에 보면 모세가 하는 말이 “오! 나무가 왜 타지 아니하는고” 나무가 타지 않는다는 겁니다.
과학으로 따져 버리면 인간의 세포나 나무나 공통점이 있어요. 그거는 뭐냐 전부 다 탄소유기물로 돼 있다는 겁니다. 원자 번호 14번 탄소( C )로 돼 있는 거예요. 탄소( C )는 산소( O )와 만나서 CO₂가 되는 겁니다. 그걸 탄다고 이야기해요. 모든 인간의 세포도 탄소가 있고 탄수화물, 단백질, 이렇게 돼 있고, 이 세상은 공기도 질소와 산소로 돼 있고 이 모든 것은 102가지 원소로 돼 있거든요. 이 모든 것은 산소로 결합되게 되면 다 타게 돼 있어요.
그런데 모세는 말합니다. 모세가 화학을 안 배웠습니다마는 경험상 왜 이 떨기나무가 땔감으로 쓰이는 나무인데 왜 안타느냐 이 말입니다. 왜 안탈까요? 왜 안탈까요? 여기서 우리는 발상의 전환을 가집시다. 안탄다는 것이 옳고 타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떨기나무가 하나님 만난 것은 안탄다는 것이 정상이고 타는 것이 이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제 말은 모세가 육신이란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없고요, 자기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이라 하는 것은 그냥 인간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자신을 이미 인간으로 간주한 이상은 내 주변에 포진이 돼 있고 배치돼 있는 모든 하나님의 일을 전부 다 거꾸로, 거꾸로, 거꾸로 생각하는 그러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거꾸로 돼 있어요.
따라서 오늘 본문에 육신과 인간을 나누면서 육신에 죄를 정한다고 할 때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의 죄 모습으로 말미암아 현재 우리가 내 꺼라고 생각하는 이 육신 자체가 원래 하나님의 뜻과는 정 반대로, 반대로, 반대로, 생각한다는 죄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죄가 만들어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모양을 만든 거예요. 이 인간을 만들고 이 육신을 만든 겁니다. 죄가 만들어지기 위해서!
왜 우리 몸이 죄가 나와야 되느냐 하면 이미 그 앞에 어떤 사건이 있어요.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육신의 죄를 규정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오셨기 때문에, 오야봉 되시는 분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우리는 다 따라서 우리의 육신도 죄가 또 나오고, 또 나오고, 또 나와야 되는 거예요. 그 죄가 나오면서 우리는 육신에서 죄가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 안목이고, 우리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 나라는 인간이 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이거밖에 없어요. ‘주여 저를 죽여주옵소서.’ 그거밖에 할 수가 없어요. ‘주여 죽여주옵소서.’
떨기나무 불붙고 있을 때 떨기나무 불붙는 것이 모세 자신의 모습이거든요. 타지 않는 거예요. 주께서 불붙이면 영원히 타지 않는 거예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함께 있는 육신의 모습이 저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모세야, 신발 벗어라. 이제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를 특별히 너를 통해서 이제 많은 백성에게 보여주리라. 신발 벗어라.’ 신발 벗으란 말은 다른 말로 ‘죽여주옵소서.’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가 잘못해서 ‘죽여주옵소서. 가 아니라 우리 몸 자체가 육신인데 그것도 죄를 보여줄 육신인데 우리는 그걸 정당화 시키고 뭐라고 예쁘게 포장하느냐 하면 ’인간입니다. 착하면 착해질 수 있는 인간이고 나쁜 짓하면 반성하면 착한 사람으로 전환될 수 있는 인간입니다. 아직도 가능성 있습니다.‘ 라고 부르짖는 그런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진짜 주님 앞에서는 ’주여 이런 내 몸이 내꺼라고 이 죄를 용서해 달라고 이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고백이 성령이 임해야 이게 가능합니다. 목사인 저의 입장에서는 바로 이런 사람이 있는가? 찾지 않을 수밖에 없죠. 세상에서. 성경에는 분명히 육신을 좇는 자는 사망에 이르고 성령을 좇는 자는 생명에 이른다 하니까 주님의 말씀이니까 빈틈이 없을 것이고 그러니까 내가 찾을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임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찾고 싶은 거죠. 가까운 데서 찾기도 하지만 드라마나 TV에서 찾기도 하고.
류 현진과 추신수 가운데 누가 성령이 임한 사람인가, 그걸 내가 보거든요. 공 던지면서 ‘주여 죽여주옵소서.’ 그러면 성령이 임한 사람이고. 치면서 ‘주여 죽여주옵소서.’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 봤습니까?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는 거예요. 서로가 입 다물고 있는 거예요. ‘우리 모른 척 하자.’고 입 다물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성령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입을 벌릴 수밖에 없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사망을 성령을 좇는 자는 생명을, 끝, 끝, 더 이상 말하기 없기. 세상에서 어떻게 잘 났니, 그런 거 묻지 않기, 자기가 육신인 것을 아는 사람은 구원받고 자기가 육신인 줄 모르고 인간인 줄 아는 사람은 지옥 가고, 끝.”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육신으로 아는 사람을 찾아다녀야 됩니다.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찾아다녀 버리면 그 사람은 지 자랑 질 합니다.
옛날에 제가 지금도 철이 없지만 철이 없던 시절에 와천에 있던 박사교회에 있으면서 하루는 예배를 드리는데 그때 교인들에게 애착, 미련을 많이 갖고 있을 때에요. 촌사람들 참 순박하기도 했지만, 그때 제 생각을 중요한 거기 때문에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교회라 하는 것은 성령 받은 사람이 모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했었어요. 따라서 교인들은 주일 날, 하나님이 허락하신 날에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자꾸 과거 갖다 붙여서 미안합니다만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교인이기 때문에 성령 받았기 때문에 무여서 예배드린다고 생각을 했었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 예를 드리면 어! 장립집사님이 안 보여요. 장립집사님이 보이지를 않아요. 11시 5분 전이 됐는데 분명히 우리 박사교회는 다 교인이고 다 성령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복음 듣고 하는 줄 알았는데 장립집사님이 참석을 안 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전화를 해봤죠. 5분 전 같으면 와도 예배를 드릴 수 있거든요. 그래서 연락을 해보니까 산에 과수농사를 하는데 과수 가지 꺾고 있다는 거예요. 제가 화가 나지 않았겠습니까?
성령 받은 사람 같으면 예배 참석하고 그것도 다른 교회처럼 일주일 늘 출석하라는 것도 아니고 주일 날 한번인데 참석을 안 하니, 그 이야기를 목사 입장인 내가 설교 앞두고 해야 됩니까? 교인들이 미리 연락해서 ‘집사님이 일이 있어서 못 오십니다.‘ 해서 관심을 둬야 되는데 아무도 관심두지 않고 니야 오든지 내만 참석하면 되지, 이러니까 참석 못하신 그 장립집사님도 짜증나지만 형제라고 여기는 다른 교인들에게도 화가 나서 이거 도대체 나 혼자 해야 되지 싶어서 ’예배를 잠시 중단합니다.‘ 중단하고 그때는 차도 없어서 오토바이 몰고 가니까 나무 꺾는다고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뭐하십니까?‘ 하니까 ’오늘 이거 안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집사님, 참석 안 해서 지금 예배 중단돼 있습니다. 참석 하렵니까? 안 하렵니까?‘ 하니까 ’어이, 내 존재감이 이런 정도인가?‘ 이런 생각 했겠죠. 이 교회에서 나의 비중이. 그래서 가지치기 하는 것을 그만두고 같이 예배드리는데 딱 15분 늦었어요. 15분 늦게 예배하면서 ’여러분, 교회가 이래서 되겠습니까? 모이기를 힘쓰라 했는데 한 형제라고 했는데 말로는 형제라 해놓고 남이야 참석하든 안 하든 나만 참석하면 그만이라 하면 이래서 무슨 교회가 되겠습니까?‘ 라고 그렇게 참 이상적이고 올바른 하나님의 성령 받은 교회라고 생각 했었었었었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
지금은? 그때 왜 제가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까? 성령 받은 것이 어떤 신비적인 요소가 가미돼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신비는 하나도 없고 육신이 육신답게 살 때 그걸로 충분하다는 겁니다. 왜, 예수님께서 현재 죄만 짓는 육신의 몸으로 오셨기 때문에 더 이상 남아있는 신비는 없습니다. 더 이상 환상은 없습니다.
육신이 육신 꼴 갑을 하면 그게 성령의 일 이예요. 지금 예배고 뭐고 과수 가지 꺾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주님께서 예배 참석하지 말고 그걸 하게 하셨던 거예요. 그리고 그 교회에 지금 예배드리려고 하는 인간이나 11시 5분에 과수 농사하는 인간이나 다 같이 로마서 8장 3장에 의해서 육신이라는 사실을 다시 육신의 개념을 다시 한 번 혹독하게 체험을 하면 그게 성령의 역사, 남아있지 않은 신비, 실제 그대로의 우리의 현실입니다.
주님께서 바로 그런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너무나 평범하게 오셨고 어떤 신비도 다 버리고 오신 거예요. 하늘의 영광 버리고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다고 빌립보서 2장 6장-7절에 나와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과 동등하시나 모든 권한을 포기하시고 죄인들과 함께 죄인의 모습으로 섞여 버리니까 인간들이 그걸 모르는 거예요. 그 육신의 생생한 신비를 놔두고 엉뚱한 지가 상상한 신비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인간들이 조작해 낸 신비로움은 마가복음 6장 14절에 보면 헤롯이라는 그 임금님이 이런 이야기해요. 뭐냐 하면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이게 인간들이 기껏 생각하는 영적 세계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아난다.’라는 것을. 헤롯 왕이 세례 요한을 억울하게 죽였잖아요. 그러니까 항상 마음이 찝찝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활동하니까 예수님이라고 보지 않고 누구라고 착각하느냐 하면 ‘내가 전에 목 베어 죽인 그 세례 요한이 다시 귀신이 돼서 이렇게 복수하듯이 설친다.’ 라고 겁을 집어먹고 있는 거예요. 귀신한테 겁먹는 거예요. 여러분, 귀신한테 겁먹지 말고 아침마다 보는 거울 앞에서 여러분 자신을 보고 놀라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육신 이예요. 주님은 그 모습으로 오신 거예요. 주님은 별 다른 모습으로 오신 게 아니고 그 모습으로 오신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육신과 성령, 육신을 따르는 육신도 육신이고 성령을 따르는 육신도 육신이거든요. 지금 성령이 지배하는 육신은 천국 가고, 육신이 육신을 지배해 버리면 지옥 가는데 오늘 사도바울이 분류한 이 분류를 예수님은 이렇게 분류를 했습니다. 뭐냐 하면 그게 산상설교입니다. 마태복음 산상설교에 보면 이런 말씀 있거든요. “니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를 염려하지 마라 그런 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육신의 정체를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는 뭐냐 하면, 이방인들이라고 규정을 하고 이방인들이 너희와 어떤 차이 나는 점을 언급을 해줍니다. 그게 뭐냐,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를 염려하지 마라 그런 것을 기도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것이라고 규정을 했어요. 이방인들이. 그 이방인들이 노리는 것은 뭐냐 살고보자입니다.
원래 육신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사망을 보여주기 위해서, 왜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을 수밖에 없는가를 사망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그런 취지로 이 몸둥아리를 만들어 놨는데 이게 인간이 현실 감각이 없어서 아까 같이 죽으면 어떻게 삽니까? 계속해서 육신을 자기라고 규정하고 자기 자신이 죽어서 좋은 나라 갑니까? 맨날 자기가 어떻게 사느냐? 여기서도 어떻게 복 받고 죽어서도 어떻게 천국에 가느냐? 이걸 자꾸 생각하니까 그런 것들은 바로 이방인들이 조작해 낸 영적 세계입니다. 이거 주의해야 돼요.
주님의 실제로 영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생생하게 살아가는 육신 살아가는 자체가 영적 행위인데 영적 행위를 따로 만들어 내는 거예요. 잘 심감이 안 나시면 예수님이 있었던 이야기를 제가 해드리면 실감이 날 겁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거기에 어리석은 사람이 나와요. 이번 전도서 할 때도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가 분류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나오는데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일단 여러분들이 기억하시고 지금부터 제가 어리석은 사람 이야기할 테니까 여러분들이 어리석은지, 어리석지 않은지 판단해 보세요.
형제간이 있는데 아버지께서 죽고 난 뒤에 유산을 남겼습니다. 형이 장남이라고 하면서 몽땅 가져갔습니다. 동생이 가져갈 몫까지 다 가져갔습니다. 그래서 동생이 너무 억울합니다. 너무 억울해서 아버지의 유산에서 자기에게 돌아올 정당한 몫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지금까지 어리석습니까? 전혀 어리석은 면이 안 보이죠.
예수님께 이야기합니다. ‘형이 내 유산을 가져갔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 몫을 찾을 수 있습니까?‘ 라고 할 때에 그 동생보고 하는 말이 ’이 사람아, 누가 너희 재판장이나 물건을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너라는 인간이 그렇게 신경 쓰는 그 문제에 대해서 왜 나 예수마저 거기다가 자꾸 잡아당겨서 거기 끼어 넣으려고 그런 헛짓을 하느냐.’ 이 말입니다. ‘니가 너에 대해서 생각한다고 그게 옳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이 예수님이 너와 덩달아 같이 옳다고 생각해준다고 니가 왜 그렇게 함부로 생각하느냐, 이 이야기거든요.
하신 말씀이 “모든 탐심을 물리쳐라. 사람의 생명은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면서 그게 어리석다고 규정하시면서 어리석은 이야기를 해줍니다. 어떤 농부가 갑자기 소출이 그 해는 많아졌어요. 평소에는 그만큼 소출이 없었는데 갑자가 소출이 많으니까 감당할 수가 없어서 창고를 더 크게 지었습니다. 크게 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가 자신보고 이야기하기를 ‘내 영혼아, 염려하지 마라. 이제 평생 먹을 것은 넉넉하게 있으니까 이젠 됐다.’ 라고 할 때 “이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 네 영혼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니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어리석은 영혼을 찾으십니다. 어리석은 영혼을 찾을 때 똑똑하다고 찾는 게 아니고 그 어리석음이 주님이 하는 일과 결부가 되도록 그렇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어리석읍시다. 원 없이 어리석읍시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 입장에서는 주님과 연결되거든요. 바로 내가 평소에 밥 먹고 살려는 이 모든 짓거리가 나를 지옥으로 보내는 어리석음의 작동이라고 우리가 그걸 믿읍시다. 바로 이런 육신을 원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한다든지, 길을 간다든지, 가게 되면 주변에 파급효과가 굉장히 많이 일어나는데 전에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아직도 내가 고등학교 때 봤던 홍콩 영화를 보니까 홍콩 영화 처음 나올 때 칼싸움 나왔잖아요. 너무 빠르게 뽑고 치고 칼집에 넣고 하기 때문에 영화에는 손으로 칼을 넣고 빼고 하는 손이 설치는 건 안 보이고 영화에는 뭐가 보이느냐 하면 그 사람이 칼집에 손을 대고 계단으로 막 올라가기만 해도 주변에 죽은 사람이 벼이삭 넘어지듯이 죽 넘어져 있어요. 그 배우가 왕유입니다. 칼을 빼지도 않았는데 다 넘어져 있어요.
주님께서 말씀만 하시고 주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면 주변에 있는 인간들이 그 육신 됨을 드러내요. 귀신도 막 날라 가고 교만하고 자만심을 드러내고 욕하고 퍼붓고 ‘니는 죽어야 돼.’ 원망하고, 예수님 가신 길에 온갖 이런 육신의 육신 됨을 몽땅 전부 다 나타나게 돼 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육신의 죄를 정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심지어 열두 제자도 예수님 옆에 있다가 졸지에 배신자 돼 버렸잖아요.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성령 받은 육신은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죽여주옵소서.’ 또는 사도바울처럼 한다면 ‘주여, 저는 죄인의 괴수입니다.’
너무나 생생한 신비, 이건 너무나 현실성 있는 신비로움입니다. 공부한다고 ‘주여, 죽여주옵소서.’ 이런 생각 안 들거든요. 박사학위 받는다고 해서, 목사가 됐다고 해서, ‘주여 죽여주옵소서.’ 이런 생각이 안 난다고요. 너무나 신기해요. 어떻게? 어떻게 내가 나를 알 수 있게 되었는가 말이죠. 항상 자기 자신이 자기를 변호하고 자기를 방어하고 사수하고 이것이 인간의 자기 역할이거든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면서 하신 이야기 중에 하나가 누가복음 9장 62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제가 천천히 읽어볼 테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님께서 이런 지경까지 이야기했다는 것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이 이야기를 지금 누구에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주님을 안 좇겠다는 게 아니고 주를 좇겠다는데 가족하고 작별인사 정도는 하는 게 인간의 도리가 아닙니까? 하는 그런 사람에 대해서 이 말씀을 하신 거예요. 굉장히 예의바르고 인간의 존엄성을 아는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이 말이죠.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사람은, 그러니까 니가 인간인 것을 잊어라 이 말 이예요. 니가 사람이냐? 니가 사람이었던 시절이 있느냐? 그건 니가 조작한 것이고 그걸 잊어버려라. 이제부터 나는 너를 사람으로 다루지 않고 육신으로 다루겠다는데 왜 자꾸 너는 너 자신을 인간으로 인정해 달라고 자꾸 독촉을 하고 재촉을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 누가복음 9장 요 대목을 저는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얼굴이 돌아간 사람. 목이 휙 돌아간 사람. 가슴팍은 앞에 있는데 코하고 입하고는 뒤 쪽에 박힌 사람. 괴물이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우리가 괴물인 것을, 괴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거, 하늘나라는 원하고 있지만 맨날 뒤돌아 봐서 목 디스크 걸려서 침 맞고 그러잖아요. 요새 스마트 폰 많이 봐서 애들이 목 디스크 있다 하는데 우리는 자꾸 세상을 쳐다본다고 목이고 관절이고 안 아픈 데가 없어요. 다 여기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사가 그래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 하신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렇습니다. ‘참, 인생 잘못 살아왔다. 너희들 날 때부터 인생 잘못 살아왔다.’는 겁니다. 자기가 육신인 것도 모르고 자꾸 자기가 인간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처음부터 육신이었고 육신에 죄를 정한 사람만 천국 가게 돼 있어요.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찾아올 때는 어떻게 오느냐 하면 ‘니가 육신이다. 육신이기 때문에 니 육신의 힘으로 육신을 살릴 수는 없고 성령께서 너를 이끄시면 비로소 너는 영생이 된다.’ 그게 오늘 본문 읽었던 여러분과 같이 보았던 그 내용 이예요. 육신대로 살면 죽을 것이요, 성령에 이끌림 받으면 너는 살 것이다. 그 이야깁니다.
이런 이야기가 굉장히 간단하게 보이지만 그 전에 먼저 우리가 전제로 깔려 있을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우리가 인간이 아니고 육신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이 인정을 해줘야 돼요. 이것은 성령의 몫 이예요.
저는 이렇게 인간의 육신 됨을 여러 군데서 찾고 있습니다마는 TV 잘 안 보는데 잠간 보니까 TV 코미디 프로에 이런 게 있어요. 굉장히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서 제가 이야기 안 할 수가 없는데 기획사 사장님이 가수보고 ‘자 녹음 들어갑시다.’ 하니까 그 가수가 하는 말이 ‘지금 화장을 못해서 못 합니다.’ 라고 하기 전에 그 밑에 가수 화장을 해주는 아가씨 하는 말이 ‘잠시만요.’ 이렇게 이야기해요. 아! 아주 날카롭게 소프라노 톤으로 째려보면서 ‘잠시만요.’ 이렇게 해요. 그걸 보고 느낀 점이 뭐냐 이 세상 모두가 하나의 개별자가 되었구나. 불친절한 직원들한테 얼마나 많이 듣습니까? ‘잠시만요.’ ‘니는 니고 나는 나다.’는 거예요.’ 모든 게 딱딱 끊어졌어요. 전부 다 연결점이 전혀 없어요. 연결점이!
그런데 성경에서 육신이라 하는 것은 니나 내나 전부 다 허구가 돼서 전부 다 육신일 수밖에 없는데 육신을 하나씩 끊어서 ‘니는 니고 나는 나야.’ 하고 아주 딱딱하게 이렇게 나온다고 해서 그 내가 괜찮은 존재도 아니고 훌륭한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뭐냐 ‘잠시만요.’ 이렇게 째려보지 말고 제발 좀 물렁물렁하게 삽시다. 니나 내나, 내나 니나 흐르고, 흐르고 모든 인간은 전부 다 그렇고 그런데 ‘잠간만요.’ 이런 식으로, 손님이 와서 직원한테 귀찮게 하고 이거 어떠냐. 물으면 ‘잠간만요. 지금 바쁜 거 안 보이십니까?’ 이런 식으로 해서 손님 떠보지 말고 너무나 자기 것만 지키는 이게 지금 세상의 모든 것이 전부 다 토막토막 났어요. 다~ 끊어졌어요. 참, 지옥이 딴 거 있습니까? 지밖에 모르는 세상.
그 이유가 뭐냐, 바로 오늘 본문을 몰라서 그래요. 니나 내나 모든 인간은 다 육신인데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특정한 사람 애먹인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은 육신의 죄를 정하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신분이라 하는 것은 너무나 평범해요. 우리가 충분히 무시할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 곁에 와버린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했다면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했을 겁니다. ‘잠간만요. 사람 귀찮게 하네.’ 이런 식으로 ‘당신이 뭔데 날 귀찮게 해.’ 라고 자기 것만 지키는 그 육신적인 버릇을 주께서는 그걸 보고 십자가를 그걸 보면서 그걸 들어가면서 십자가 지신 겁니다.
강도가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강도에게 ‘강도야, 니 오늘 밤에 나와 천국 갈래?’ 하면 강도가 뭐라 했어요? ‘잠간만요.’ 이렇게 했습니까? 오히려 강도가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저를 생각해 달라.’ 주께서는 그걸 하나 품어줬습니다. ‘그래, 니가 육신인 걸 아는구나.’ 강도가 됐든 창기가 됐든 본인이, 본인이 누군지를 하나님 관점에서, 십자가 사건 관점에서, 그것만이 신비거든요. 십자가 말고 신비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생생하게 죽은 피 흘렸다는 그 피 앞에서 다시는 주님 앞에 ‘잠간만요.’ 하지 마시고 ‘주여, 어디 있든지 저를 품어 달라.’고 이렇게 기도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남 흉내 내고 모방한다고 주님의 안목을 잃어버렸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는 까마득히 다 놓쳐 버리고 남 뒤꽁무니 따라간다고 시간과 평생을 허비하고 있는 저희들 불쌍히 여겨주셔서 다시 성경 속의 육신으로 돌아와서 육신의 죄를 정해버리고 그것마저 용서해주신 주님의 그 성령에 따라서 인도함을 받아서 사는 길로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