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8a 부산강의 : [시편]43(27:10)-십자가 소리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27편,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이렇게 시작하지요. 시편 해석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자체적으로 시편 안에서 우리에게 해답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편 27편 10절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거기에 보면,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부모한테 버림받으면 나라는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신약적 용어로 하면 육이거든요. 혈육이죠. 혈육에서 떨어지지 아니하면 시편 해석이 안 된다는 그런 뜻이죠.
나라는 것은 어디에 포함되느냐? 나라는 환경은 먼저 선제된 부모의 육에서 내가 나왔기 때문에 그 안에 포함이 돼있어요. 포함이 돼있으면 나의 존재 경계선은 부모를 버릴 수가 없어요. 부모를 떠날 수가 없어요. 부모 떠난 나는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부모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시편에 나오는 다윗,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 신앙인 전부는 어떤 절차를 밟아야 되는데 이것은 뭐냐 하면 부모로 태어난 나 자체가 제거돼야 되고 해체돼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이 시편이라는 언약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들어설 수 없어요. 언약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면 성경 자체가 해석이 안 되게 돼있어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라고 1절에 그렇게 돼있지요. 이 ‘나’가 누구냐?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할 때 나는 누가 되느냐 하면 여호와의 확장이 됩니다. ‘여호와=나’가 돼요. 그러니까 여호와만 나가 될 수 있지 그 외에는 나가 될 수 없는 거예요. 하나님 자신이 나가 되기 위해서 하늘에 있는 여호와께서 지상에 인간세계에 찾아오게 돼있어요. 그 과정이 시편이고, 시편 27편입니다. 저는 이걸 여호와의 확장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여호와께서 이렇게 확장 돼야 나가 되는 이유는, 여기 시편에 나오는 모든 개념의 의미가 여호와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 장막이라는 것, 전쟁이라는 것, 그리고 초막이라는 것, 그리고 나의 원수 전부 다 우리 인간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육의 인간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더 확실하게 말씀드려서 성경과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너무 잘 지워져서 미안하다. 왜 여기만 이렇게 잘 지워지는지. 원조가 되어 그렇지요. 이 원조, 원형, 기원 그 출발점에 대해서 현재 기존에 부모에 속한 육의 나는 이런 것을 방해해 왔다. 방해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원조, 원형, 기원을 훼방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다윗이 등장함으로써 다윗을 통해서 육과 영의 경계선을 확립하려고 하는 거예요. 확립 또는 확정지으려고 하는 겁니다.
신앙생활 여러분 어떻게 합니까? 신앙생활 제가 하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신앙생활은 뭐냐? 날마다 육과 영의 경계선을 확인하는 게 신앙생활이에요. 육과 영의 경계선. 어디까지가 육의 범위고 어디까지가 영의 범위 넘어온 것인지 날마다 확인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육이라는 것은 어떻게 아느냐? 육이라 것은 영의 세계가 들이닥쳐야 육이 등장하지요. 영의 세계가 안 들이닥치면 나는 나에요. 나는 그냥 나라니까요. 부모님은 그냥 부모님이고.
부모님께 버림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는 거예요. 부모님이, 나가. 니 내 자식 아니라 해도 버림받은 게 아닙니다. 부모라는 의식이 있는 한 그게 버림받은 게 아니에요. 사이가 안 좋은 거지. 사이가 안 좋고 자식 취급하지 않는다는 그 정도 인간적인 감정의 문제지 근원적인 문제, 기원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육에서 끊어져야 되는데 육이란 자체가 우리한테는 받아들이질 않습니다. 나는 인간이지 육이 된 적이 없어요. 나는 그냥 인간이에요.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인간으로 와서 인간으로 태어난 이것을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나를 조롱한 적이 없다.” 이것 평생 갈 겁니다. 우리 인간은 평생 가요. 나는 나를 조롱한 적이 없어요. 남들이 나를 조롱한 적이 있지만 내가 나를 어떤 경우라도 지옥 가더라도 나는 나를 조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로 나는 나를 조롱하지 않는 한 나는 해체되지 않아요. 해체되지 않으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여기서 고집이 발생해요. 내 존재에 대한 강력한 고집, 집념이 생깁니다. 나는 나를 유지하려는 집념이 생겨요. 물어볼게요. 우리가 ‘나’들의 집합, 개인들이 모인 게 이 세상인데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이것보다 중요한 것 이야기해보세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보리건빵 먹고 하는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이게 없어요. 왜냐하면 그것이 어디를 향하느냐 하면 나에게 달려와서 나의 의미를 확립해주기 때문에 내가 중요하기 때문에 내 확립에 도움 되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이거는 우리가 스스로 포기할 수 없어요.
특히 나는 나를 조롱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나를 미워한 적이 없어요. 항상 나는 아무리 이 세상이 나를 버린다할지라도 나만이 나를 변호해줘요. “힘내라, 힘!” 이런 것 있잖아요. “쓰러져도 일어서야지. 달려라, 하니.” 세상이 너를 실망케 해도 나는 나를 실망케 해선 안 된다는 것.
그래서 나는 나를 조롱하지 않는 한 뭐가 살아 있느냐 하면 육과 영의 경계선이 날아가 버려요. 왜냐? 나로 통합된 세계에 있기 때문에 이 세상 눈에 보이는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것은 다 나에게 향하여 달려와서 나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여기서 집약이 되는 재료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내 쪽에서 버릴 수가 없어요. 내 잘 되기 위해서 세상 모든 것은 움직이기 때문에 어떻게 그걸 버립니까? 버릴 수 없지요.
나는 스스로 해체되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파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성경에서는 사무엘상, 시편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선택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겁니다. 누가 사무엘상 16장 1절 읽어봅시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뭐했습니까? 버렸다 하잖아요. 이게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이게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이게 통할까요? 내가 날 안 버렸잖아요. 내가 날 안 버렸는데 감히 누가 나를 버린다는 게 성립이 안 되거든요. 내가 나를 안 버리는 한 남이 날 버린 것은 버림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왜? 내가 날 버리지 않으면 살 권한과 자신감이 유지되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 아까 시편 27편 10절에서 부모가 나를 버렸다고 돼있어요. 부모가 버리든 남이 버리든 이 버림이 제대로 버려지는 경우가 발생된다면 기존의 육에서 영으로 선택된 자에게만 이것이 성립이 돼요. 여러분들 부모가 나를 버리는 경우는 없고요 내가 부모를 버리는 경우는 있어요. 왜냐하면 버림이라는 것, 누굴 버리고 누굴 택하는 것은 그 권한이 누구한테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나 오직 나한테만 그런 자유가 있다고 보는 거예요.
남이 나를 깐다? 이거는 우리는 완전히 무시해버립니다. 내가 까지 않는 한 내가 까인다는 것은 성립이 안 되게 돼있어요. 내가 나를 안 깠는데 니가 뭔데 나를 까? 이래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우리는 시편 27편 들어갈 자격조차 안 된다는 거예요. 이걸 해석할 자격조차 안 돼요. 무엇을 의지하지 않는 한? 선택이란 걸 의식하지 않는 한.
다윗이 아니라 사울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에 대해서 사무엘상 16장 1절에 보니까 사울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 라는 이야기가 성립이 된다면 이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내가 나를 안 버리면 되지 나는 나를 쥐면 되지, 라는 말 자체가 애초부터 성립이 안 되고요 하나님이 사울처럼 나를 버릴 거냐, 유지할 거냐? 이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된 거예요. 하나님이 나에게 더 중요한 문제가 된 겁니다.
내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잘 먹고 잘 사는 이거는 이 상태로서는 내가 하나님께 버림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확인할 길이 없어요.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타고 돌아다니면서 이게 지금 버림받은 짓인지 아닌지 그걸 증명할 수 있는 어떤 근거가 될 수 없어요. 나는 즐기기 위해서 내 인생 여유롭게 살기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다. 이렇게 된 이상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는지 증명이 안 되잖아요.
증명이 안 되면 뭐가 사라지냐 하면 아까도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육이냐 영의 경계선을 찾을 수 없어요. “그 찾는 게 왜 필요하지? 나는 그것 안 찾아도 나는 나 혼자 살 거야.”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교회 안 가도 별로 아픈 것 없는데. 교회 안 가면 집에 혼자 있지, 뭐.” 육과 영의 경계선 자체가 자기한테 생각나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의 선택 의미 지상에 주어져야 여기서 너를 버렸다, 너는 너를 선택했다가 하나님의 선택이 전제가 될 때 이 결과가 성립되는 겁니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것은 리브가에게 계시, 꿈으로 나타나야 비로소 가능한 거예요. 야곱과 에서는 그냥 태어났을 뿐이지 누구의 선택에 의해서 또는 버림받기 위해서 태어났나는 사실은 둘 다 어린애일 때는 모르는 겁니다.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시편 27편을 이렇게 생각하면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인간들을 두고서 자신의 선택의 의미를, 그 다음에 중요합니다. 의미를 생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육의 인간과 영의 인간, 대조되는 인간을 여기서 생산했다. 만들어낸 거예요. 여기서 여러분들이 이것 하나 정리합시다. “진리는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되는 것이다.” 이것 많은 설명이 필요한 문장이에요.
어떤 사람이 교회 왔습니다. 목사님이 설교합니다. 구원은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러면 듣는 사람이, 행함은 별로 안 좋은 거고 믿음은 상대적으로 좋은 것으로 들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할 때 그걸 듣고 이 사람은 뭘 시도하느냐 하면 성경에 나오는 믿음과 나의 행동을 여기서 일치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면 나는 진리대로 구원받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그건 뭐냐 하면 이것은 일치되기를 노력하는 거예요. 성경말씀대로 일치되기를 노력하는 사람이지 생산되는 게 아니에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는 말을 성경에서 봤을 때 나는 이 성경구절대로 꼭 합치돼야지. 누굴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되고, 나는 여호와의 빛이 되고, 난 여호와의 구원이 되어야지, 라고 시도하는 것이 바로 나 중심으로 살아가는 육의 사람의 특징이 되는 거예요.
생산이라는 것은 없는 데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은 나를 생산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생산자가 나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순간 나는 있으나마나 되기 때문에. 이 세계무대에서 좀 꺼져줄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꺼져주려면 나는 나를 조롱해야 됩니다. 어떤 입장에서? 주님의 안목에서 나를 조롱해야 돼요. 나를 미워해야 돼요. 하여튼 니는 주님의 일에 방해물이 돼, 라고 그대로 나를 표현할 수 있어야 그게 바로, 이게 뭐냐? 그게 기원의 문제고, 원조의 문제고, 원형의 문제가 되는 겁니다.
좀 진도 나가볼게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나라고 지칭하는 자를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나를 전부 다 제거해버리고 여호와께서 생산하고자 하는 나의 자리를 그 누군가에 확립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여호와와 나 사이에 시편 27편을 깔아놓은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이 뭐냐? 나는 길이요, 라고 돼있지요. 나는 길이요, 라는 말은 이 세상에 어느 것도 길이란 말이 아니고 길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옛날 신화의 세계라든지 고대 중국에 보면 천국으로 가는 길 나와 있잖아요. 이쪽 밑바닥은 길이 아니에요. 길은 따로 있다, 따로 있음이 골치 아픈 거예요. 아무데나 가는 게 아니고.
기차가 아무데나 가면 기차가 아니지 트랙터지요. 기차는 어느 길로 가야 돼요? 궤도가 있는 곳만 갈 수 있어요. 주님께서 궤도를 따로 깔아놨다는 겁니다. 그 궤도이름이 요한복음 14장에서는 나는 궤도요, 나는 길이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하는 나 있잖아요. 나와 기존에 인간들이 육에서 만들어낸 모든 나와 여기서 비교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한테 묻는 겁니다. 너 어느 쪽 나할래? 어느 나에 네가 머물래? 우리한테 이걸 다그치는 거예요. 요한복음 13장 마지막에서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하나의 길로 전환시키려는 시도를 합니다. 주님 가신 길에 나도 따라가겠습니다, 라고 할 때 주님께서는 베드로 너는 이게 될 수 없어요.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길은 베드로가 아니고 길은 오직 예수님으로 이미 끝났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길이 될 수 없는 거예요. 같이 붙어서 갈 수 없는 거예요.
베드로가 주님의 길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베드로 자기 자신을 조롱해야 됩니다. 조롱해야 돼요. 조롱이란 말보다 더 어려운 말이 뭐냐 하면 ‘피곤’이에요. 피곤이란 나를 응시하는 것을 더 이상 수축할 수 없는 지경. 풀이보다 피곤이 더 쉽지요. 피곤이란 나를 응시하는 것을 더 이상 수축할 수 없는 지경 또는 지점. 내 생각이 안 나는 그 상태, 그게 피곤입니다. 내가 나한테 지쳐버렸어.
여기에 적절한 노래가 있는데 그게 뭐냐? 김종환의 <존재의 의미> 자기 삶에 지쳐서 뻗었어. 자기가 뻗었으니까 자기의 존재 의미도 같이 상실하겠지요. 그러나 그 노래에서는 최후로 자기의 손에 여자 친구의 사진을 쥐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비록 나는 뻗어가고 완전히 피곤에 절었지만 그래도 내가 내일 되면 또 배달 나가고 수고하는 이유들 다 너로 인하여 너 때문에 활동하는 의미가 있다는 게 마지막 사진 쥐고 뻗어버립니다. 피곤에 지쳐서. 쓰리잡한다고 뻗은.
그러니까 이십대 후반, 삼십대, 사십대 남자들의 이 노래를 안 좋아할 수가 없지요. 왜 좋아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 그거에요. 그 가사에도 나와요. 이게 진짜 핵심이에요. 나는 왜 이래 사는 거야. 자기가 자기한테 묻는 겁니다. 나 왜 이래 사는 거야? 절망적이죠, 자기한테 절망. 절망이지만 희망인 것은 너 때문에 내가 비로소 이렇게 힘들지만 살 이유가 있는 것은 다 너 때문이야. 내가 달려갈 거야. 조금만 기다려줘. 내레이션 막 나옵니다. 달려가서 그 여자와 결혼했잖아요. 이게 바로 육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궁극적으로 자기를 부인할 수가 없는 거예요.
<존재의 의미>(김종환)
언젠가는 너와 함께 하겠지 지금은 헤어져 있어도
네가 보고 싶어도 참고 있을 뿐이지 언젠간 다시 만날 테니까
그리 오래 헤어지진 않아 너에게 나는 돌아갈 거야
모든 걸 포기하고 네게 가고 싶지만 조금만 참고 기다려줘
알 수 없는 또 다른 나의 미래가 나를 더욱더 힘들게 하지만
니가 있다는 것이 나를 존재하게 해
니가 있어 나는 살 수 있는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네게 달려갈 테니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니
(내레이션)그래 다시 시작하는 거야 조금 늦는다고 바뀌는 건 없겠지
남자란 때로 그 무엇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릴 때도 있는 거야
넌 이해할 수 있는 거야 넌 이해할 수 있겠지
정말 미안해 널 힘들게 해서
하지만 너무 슬퍼는 하지 마 너의 곁엔 항상 내가 있을 테니까
우리의 미래를 위해 슬퍼도 조금만 참아줘
내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니가 있기 때문이야
널 사랑해
저녁 늦게 나는 잠이 들었지 너를 생각할 시간도 없이
너무나 피곤해서 쓰러져 잠이 들었지 난 왜 이렇게 사는 거야
눈을 뜨면 또 하루가 가고 내 손엔 작은 너의 사진뿐
너를 다시 만나면 꼭 안고 놓지 않으리 헤어져있던 시간만큼
알 수 없는 또 다른 나의 미래가 나를 더욱더 힘들게 하지만
니가 있다는 것이 나를 존재하게 해
니가 있어 나는 살 수 있는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네게 달려갈 테니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니
그래서 시편 27편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 말씀이 자기한테 용기가 되기를 바라서 말씀을 보는 거예요. 이 말씀대로 되게 하옵소서. 지금 그 인간은 육과 영의 경계선 날아가 버렸어요. 오직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로 귀환돼요. 나 좋으라고 성경책 있고 하나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럼 경계선은? 네가 육이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 그 전쟁은? 없지요. 나는 어떤 경우라도 잘 돼야 되기 때문에.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고집이 있어요. 나는 무조건 잘 돼야 돼. 무조건 천국 가야 되고 이건 묻지도 따지고 할 것도 없이 나는 무조건 잘 돼야 돼. 이런 고집 있잖아요, 황소고집. 선택에 의미가 없어요. 왜? 본인이 본인을 선택했기 때문에. 주님의 선택이 오게 되면 나는 그동안 나를 선택했던 내 선택에 손을 놔야 돼요.
놓으면서 시원하게 누굴 조롱하느냐? 내가 나를 조롱하면서 놔야 돼요. “아이고, 인간아. 인간 같지도 않는 것.” 이게 남이 이야기하지 말고 내가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돼. 그렇지 않으면 시편 27편을 들어갈 수가 없어요. 제가 지금 뜸을 들이고 있어요. 이 해석하는데.
경계선이 없다는 말, 육과 영이 경계선이 있어야 된다는 것. 인간들은 경계선 같은 것은 생각지 않고 무조건 자기 자신을 잘 돼야 되는 쪽으로 그냥 가니까. 자기가 길도 아니면서 행세하는 그런 경우를 쉬운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이 두 개의 차이를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내가 밤길을 가는데 달이 계속 따라온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아시겠지요. 모르거든 노사연의 <님 그림자>에 보면 다 나와요. 두 번째, 내가 직접 달에게 간다. 이 차이? 한쪽은 내가 가는데 달이 따라오잖아요. 그런데 이쪽은 뭐냐? 아예 자기가 달에 올라 타. 직접 달에 가는 거예요. ①번이 육이라면, ②번은 영입니다. 내가 달에 합세하는 거예요.
이게 가당치 않지요. 가당합니까? 달이 몇 킬로 떨어졌는데 거기에 갑니까? 달은 천상에 있고 나는 지상에 있는데 어떻게. 따라오는 것은 우리가 지상에서 경험하지만 달에 직접 가는 것은 아폴로에다 돈이 얼마나 들었는데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겠지요. 이 불가능함을 시편 27편에다 담은 거예요.
내가 길을 가는데 따라온다. 이게 육이에요. 그래서 이걸 교회에서 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다. 주님이 나와 함께 있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주인공은 나에요. 나야 나. 내가 주인공이에요. 여기 내가 달에 직접 가면 달이 주인공이에요. 달이 나를 소멸시켜버린 거예요. 달이 내 자리에 찾아와서 그동안 나였던 것을 달이 내 자리를 다 차지하고 만 겁니다. 그래야 여호와와 연결되고 하나님과 연결이 가능해요. 왜? 하나님은 인간과 안 만나주니까.
이 둘 모습을 다 보여주는 것, 우리들이 익히 아는 용어,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언약, 이걸 약속이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언약이라는 것을, 보통 인간들은 언약이 약속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은 아까도 했지만 일치시키려고 합니다. 의도가 뭡니까? 나 언약과 함께 살래, 이거잖아요. 그런데 진짜 언약은 일치를 시키는 게 아니고 언약 자체의 확장, 그리고 생산하는 거예요.
네 육이 낳은 너 말고 하나님이 생산한 너이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러면 예를 들어 야곱이라면 뭐로 바뀝니까? 야곱이라면 나중에 우리가 알다시피 뭐로 바뀝니까? 이스라엘이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야곱은 이스라엘을 예상해본 적 없다는 사실이에요. 야곱은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지 하나님이 친히 생산한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한 거예요.
야곱이 밤중에 천사를 만나서 이스라엘 됐잖아요. 그 상황을 신약에서는 그냥 이렇게 보면 돼요. 십자가 만나서 이스라엘 됐다, 같은 말이 될 수 있어요. 십자가 만나서 십자가 안에는 야곱이 죽은 거예요. 야곱이 죽어야 이스라엘 되니까. 육이 죽어야 영이 되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뭘 아느냐? 육과 영의 경계선이 여기서 발생되는 겁니다.
아브람이 뭐 됐지요? 아브라함 됐지요. 아브라함 될 때 육과 영의 경계선이 발생되는 겁니다. 경계선에 아브라함이 될 수밖에 없는 생산된 어떤 근거가 있을 거예요. 이것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누구라고 지시받느냐 하면 바로 이삭, 바로 자기로 생산될 수 없는 것, 인간이 아브라함이 아무리 애를 써도 아브라함은 불임이에요. 자식 못 낳아요. 아내와 더불어서.
그런데 사라와 아브라함이 불임인데 임신을 했다는 말은, 이것은 뭘 아느냐 하면 우리는 기껏 육에 불과하다는 것, 주께서 원하는 것을 아무것도 내놓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이 와야 비로소 그 경계선이 파악이 되는 겁니다. 일치가 아니고 주께서 새롭게 생산해요.
이것은 뭐냐? 언약의 확장이에요. 걷잡을 수 없는 확장입니다. 확장하면서 육과 영이 경계선이 발생되거든요. 육과 영 할 때 요 앞에 중간에 있는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것. 하나님의 선택은 뭘 공격한다? 내가 나를 선택하는 선택 자율성을 공격하는 거예요. 난 어떤 경우라도 나를 포기하지 않을래, 라는 것을 하나님의 선택이 공격하는 거예요. “제발 너를 조롱하고 너를 미워하고 그만큼 너를 많이 쥐고 살아왔잖아. 이젠 너를 좀 놔줘라.”
너를 놔준다는 것? 나의 고유성을 포기하게 하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 생각에 자기가 포기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되지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포기하면 나를 포기시킨 내가 새로운 괜찮은 나로 등장하기 때문에 이거는 없앨 수가 없어요. 자기를 부인하면 자기를 부인할 때 개입된 나의 의지와 결심이 또 빛이 나게 마련입니다.
이게 범죄 한 인간의 딜레마에요. 아무리 도를 닦아도 구원이 안 돼요. 사람들마다 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정도 노력해도 구원이라 쳐주자. 이렇게 저희끼리 착각들을 벌이고 있어요. 그 작업을 누가 했느냐 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했어요. 이방인들과 우리는 확연히 차이 나잖아. 이방인들과 우리가 다르니까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선택받았고 구원받았다고 치자,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런데 막상 누가 왔습니까? 여호와가 나라고 지칭한 나에게 지상에서 이게 확장되니까 나머지 모든 인간들은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육이 되어서 하나님의 언약적 생산물이 아니었단 말이죠. 언약에 대해 방해물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아까 중요한 것 다시 이야기할게요.
야곱은 이스라엘 되기를 기대하거나 상상하거나 소망하거나 은근히 희망하거나 이게 전혀 없었단 말이죠. 야곱에게 없는 게 나왔어요. 그럼 야곱의 의미는 뭐냐? 야곱이 야곱에게 충실함으로 말미암아 그 충실한 것 말고 여기에 구원이 있는 거예요. 내가 나 구원받기에 충실할수록 그게 구원이 아님을 알리는 도구로써 야곱을 사용한 겁니다. 구원에 대한 집착, 다른 사람 지옥 가도 나는 천국 가야 돼, 라는 집착 그것으로 인하여 구원은 딴 데 있다는 것을 드러나는 하나의 전제가 되는 거예요.
한 가지 방금 이러한 내용이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데요. 여러분 너무 잘 아는 거예요. 요한복음 3장 17절과 18절을 보게 되면 설교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분명히 요한복음 3장 17절에 보면 독생자를 보내신 것은 심판을 하려 하심이 아니라고 분명히 나와 있어요. 그런데 18절에 보면 뭡니까? 벌써 심판을 받았다고 돼있어요. 지금 인간적인 안목에서는 이 두 개가 결합이 안 돼요. 심판 안 한다는 느낌으로 이게 나온다고요.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아아, 심판을 안 해주시는구나.” 안 해주신다고 편안한데 18절에 가니까 벌써 심판을 받았단 말이죠.
그럼 이 두 개의 서로 상반된 내용을 통합하려면 뭐냐 하면 벌써 심판받았기에 새삼스럽게 심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 라는 두 가지 내용을 하나로 통합된 사건이 일어나야 됩니다. 그게 뭐냐?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거예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벌써 심판받아야 됨을 알리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신 겁니다. 이 땅에. 벌써 심판을 받았기에 심판받은 자는 심판을 안 해줄 거야, 라는 기대와 그리고 소망은 여기서는 허용이 안 되지요. 이미 심판됐기 때문에 잘하면 내 구원받을 걸, 라는 그런 헛된 망상은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인간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이해할 때 조금 있으면 잘못하면 심판받는다. 이럴 것 같으면 희망이 있어요. 그래 정신 바짝 차려야 돼. 하나님께서 심판주기 때문에 정신 바짝 차려야 돼. 생전에 어떻게 조치를 해야 돼, 라고 했는데 성경에선 요한복음 3장 18절에 이미 심판이 되었기 때문에 심판을 유지하라 이 말입니다. 너는 심판 대상이 됐기 때문에 거기서 구원의 희망은 갖지 말란 뜻이에요. 구원을 희망은 가져선 안 된단 말이죠.
그러면 심판 안 받고 구원한다는 게 근거는 나에게는 안 나오지요. 그게 뭐냐 하면 사랑은 여기 있나니,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 사랑이란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 심판받은 자에게 예상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네가 심판받아 마땅함을 유지할 때 비로소 그때 느껴지는 게 뭐냐? 사랑이 되는 거예요. 독생자 사랑이 돼요.
그러면 예수님이 중요하느냐, 내가 중요하느냐 할 때 누가 더 중요해요? 나는 심판대상이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아요. 나를 충분히 조롱해도 괜찮아요. 나를 저주해도 괜찮아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사랑이란 그것만 우리를 통해서 발현하면 돼요. 생산하면 돼요. 나타나면 된다고요. 별로 어렵지 않지요. 우리 정신머리가 중요하지, 우리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지 성경말씀 하나님 보시기에 하등 어려운 게 없어요. 내 너한테 이야기했잖아. 그런데 왜 자꾸 구원받으려고 시도 해. 하여튼 너희는 내 말 안 듣는데 도사야. 기어이 내 말 안 들어 하여튼. 심판받았다니까, 벌써. 끝났어.
“그렇다면 하나님, 심판받았는데 어떻게 구원됩니까?” 그것 봐. 말하는 싸가지 봐. 심판받았잖아. 심판받았으면 유지해줘야지. 그런데 무슨 틈새시장을 노리냐 말이죠. 그거는 왜 그러냐 하면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는데 이게 안 돼서 그래요. 피곤하지 않아서 그래요. 아직까지 나한테 응시할 게 있다고 하는 거예요. 응시하고 수축할 게 있다고 보는 거예요. 아직도 나한테 기대할 게 있다고 보니까 성경에서 이미 심판받았다고 하면 심판받은 줄 알면 되는데 은근히 그래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뭔가 조치가 있을 거야. 기다려보자. 자꾸 이런 식으로 되지도 않는 희망을 갖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진리는 일치가 아니고, 일치가 아닙니다. 일치가 되려면 나도 살아 있어야 되고 모범되는 모델도 살아 있어야 되는데, 일치가 아니고 생산이란 말은, 나는 죽어 버렸어요. 나는 죽고 그분을 살아 계셔서 살아 계신 분이 뭘 생산하느냐? 주의 백성을 생산하는 거예요. 언약대로. 누구에게? 선택한 분. 살아 계신 분이 선택하게 되면 죽은 자 위에서 예수님의 나가 확장되는 영토가 하나님 쪽에서 마련하게 됩니다.
만약에 우리 진자교회가 부흥되어 사람들이 많아서 예배당을 새로 교회 모습으로 지을 때 기존의 건물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헐어버리죠. 그건 교회 모습이 아니니까. 예쁜 고딕양식이 아니니까 전부 헐어버리잖아요. 주께서 하는 작업이 이거에요. 말씀으로 나를 헐어버릴 때 네가 네 자신에 대해 아까워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고마운 줄 알아야지.
아이고, 내가 내 인생 이만큼 끌어오기에 얼마나 힘들었는데 얼마나 내가 나한테 수고를 많이 했는데 아까워서 못 버리겠다. 이런 경우는 생산되지 않게 하는 거예요. 철저하게 주님의 안목으로 저를 헐어버릴 수 있도록 해주세요, 하고 자길 맡겨버리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부모는 나를 버리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다윗 아버지 이름이 이새거든요. 이새와 사이좋다, 안 좋다 그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다윗이 어떻게 구원받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주께서 나를 어떻게 활용하느냐 그 문제에 대해서 시편 27에 나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렇게 알았으면, 아아 필수코스가 있구나, 그게 뭐냐 하면 기존의 나의 죽음이 필수코스입니다. 반드시 거쳐야 되죠. 죽음이라는 것이 기존의 내가 여기 살아 있고 죽는 것의 의미, 그리고 언약에 의해서 죽음의 의미, 이게 같은 수가 없지요. 내가 죽을 때는 내가 아까워하지요.
기존의 죽음은 다 아는 거구요. 목숨 끊어지는 거죠. 여기에 언약적 죽음은 시편 27편 4절에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이렇게 돼있어요. 여호와의 집에서 이탈하는 것, 이걸 죽음이라 합니다. 여호와의 집에서 이탈하면 찬양이 안 돼요. 찬양이 나오지 않는 자리는 죽음의 자리에요. 그래서 다윗이 하는 전쟁은 자기 구원을 위한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집을 어떻게 나타나게 하는 전쟁에 다윗이 선택된 겁니다. 그것과 대조되는 사람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울 왕이죠.
사울 왕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 있어서 하나님의 집이 돼야 된다는 이 사명을 부여받았음에도 사울은 이스라엘을 자기 소유화시킨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은 자기 목적이 있으니까 사무엘상 16장에 의해서 사울을 어떻게 했습니까? 사울을 버렸지요. 사울을 버렸다는 말은 그전에 하나님께서 사울을 선택한 적이 있다 뜻이에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언약은 두 개의 절차를 필히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은 버림이 무엇인지 안 버려짐이 무엇인지를 언약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이 사이에 경계선이 성립되겠지요. 사울은 본인중심이에요. 본인중심에서 본인이 육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영이 오지 않았으니까 육이라는 의식도 없지요. 영이 와야 되니까요. 사울은 본인이 본인을 선택한 거예요. 때려죽여도 자기의 야망을 자기의 포부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버려도 자기는 자기를 안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그런데 언약에 의해서 사울을 통해서는 버림을 설명해주고, 다윗을 통해서는 안 버림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언약이 언약대로 나타나려면 버림받은 자와 짝을 이뤄서 그렇지 않고 안 버려진 자가 등장하게 되겠지요. 자, 그렇다면 다윗은 본인이 본인을 버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다윗도 인간이에요. 자기 자신을 버릴 수 없지요. 언약에서는 버림받음과 하나님께서 받아주심이 두 가지 내용이 다 있는 겁니다. 안 버려지고 그냥 받아주시는. 신약에서는 이걸 가지고 뭐냐? 예수님의 죽음이고, 이것이 뭐냐? 예수님의 부활이 돼요.
그래서 모든 언약 안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플러스 부활의 요소가 같이 담겨있는 겁니다. 이 죽음과 부활의 요소 절차를 누가 하느냐 하면 언약적으로 오신 나,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나의 자리에 가요. 이 나는 그냥 나가 아니고 시편 27편을 따라서 생긴 나가 돼요. 그래서 시편 27편 다 같이 봅시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왜? 유일하게 하나님이 시편을 통해서 미리 이야기한 예언을 그걸 그대로 현실화시키는 분은 주께서 따로 한 몸을 준비해서 투입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빼놓고 다른 몸들은 시편 27편의 나에 해당이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되지요. 그들은 뭐냐? 버림받아야 돼요.
새로운 몸이 등장함으로 기존의 몸은 시편 27편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버림받아야 돼요. 사울보고 욕하면 안 돼요. 사울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라니까요. 인간은 태어나면서 모친에 부모로부터 같은 한 통속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사울의 본성을 그대로 죽을 때까지 유지해나갑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전부에요. 하나님이든 예수든 중요한 나에게 뭔가 해줘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왜? 나니까. 딴 이유가 필요 없어요. 나니까 나는 내가 지키겠다는데 거기서 무슨 이유가 필요해요. 우리는 일치를 원하지 생산을 원하지 않습니다. 새로 만들어지는 걸 원하지 않아요. 기존의 내가 괜찮아지기를 구원받기를 원해요.
그 인간을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죽여 버립니다. 성전을 통해서 기존의 인간들을 죽이고 거기서 죽은 자리에서 새로운 성전, 다시 하나님께서 받아주는 새로운 사람으로 생산하는 그 작업을 다윗과 그리고 다윗 주변의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걸 시편 27편처럼 진행해나가는 겁니다. 어떻게 진행해 가는지 그거는 10분 쉬고 합시다.
20211108b 부산강의 : [시편]43(27:10)-십자가 소리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나와 무관한 세계에 대해서 시편 27편 13절에 뭐라고 돼 있느냐? 나와 무관한 세계를 산 자의 세계에요. 이걸 고대로 하면 산 자의 땅. 유일하게 산 자의 땅에 연결되는 것은 오직 언약대로 다 이루시는 나를 대신해서 오시는 나, 그분에게만 해당되는 거예요. 물론 다윗도 해당 안 돼요. 왜냐하면 다윗은 죽었으니까. 다윗이 메시아입니까? 아니지요. 그럼 다윗도 해당 안 돼요.
산 자의 땅은 모든 인간에게 감추어졌다. 감추었다는 말은 열심히 예수 믿으면 찾을 수 있다가 아니라 찾으면 찾을수록 점점 더 깊이 감추어져가는 거예요. 그래서 산 자의 땅,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산 자의 땅이라고 제시했어요. 상당히 희망적인 단어 하나 등장했습니다. 문제는 이거는 그림의 떡이란 말이죠. 왜냐하면 산 자의 땅에 가려면 여러 가지 조건들이 나열돼 있습니다.
산 자의 땅이라는 그 단어가 13절에 나오잖아요. 그러면 1절부터 12절까지 고요하게 지나갑니까? 여기서 뭐가 있느냐? 전쟁이 있지요.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전쟁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27편 3절에 나오죠. 전쟁이 있어야 돼요. 그런데 인간들이 하는 전쟁은 자기 생존 전쟁 외에는 없어요. 현재 살아 있는 내가 과연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그 전쟁을 하는 게 아니고 무조건 나는 살아야 돼, 일방적인 이 전쟁을 고집스런 전쟁을 벌인 거예요.
나를 문제시하는 전쟁은 안 하고 나를 지키는 전쟁만 한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메시아가 이 땅에 왔을 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유대백성들이 본디오 빌라도까지 합쳐서 그들은 예수님을 상대로 무슨 전쟁을 했습니까? 나의 것을 지키는 전쟁을 한 거예요. 예수님을 공격자로 파악하고 나의 무대를 공격하는 예수님을 적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귀신의 대장이라 했지요. 그 귀신의 대장이라 한 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만 이야기한 게 아니고 다른 사람도 거기에 충분히 동의한 겁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예수님을 발견하려면 예수님이 나의 세계를 파괴시키는 그러한 적으로 간주할 수 있어줘야 우리자신이 폐쇄적인가를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에 대한 공격성향을 우리가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태가 필요해요.
어제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마르다가 예수님에 대들었잖아요. 그것도 울면서 대들었다고. “우리 오빠 왜 건드렸느냐.” 그게 공격성향이에요. 남의 오빠가 아니에요. 우리 오빠에요. 같은 부모로부터 태어난 헤어질 수 없는 남매에요. 그러니까 마르다, 마리아는 부모를 떠났습니까, 안 떠났습니까? 부모를 안 떠났어요. 부모가 자기 뿌리니까 육이 뿌리니까 자기는 그걸 정상으로 봤어요. 왜? 주위의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사니까. 자기가 어떤 특이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봄철에 들에 나가면 이것 보일 겁니다. 민들레 홀씨. 민들레 홀씨에서 뭐가 나오느냐? 특이성이 폭발합니다. 홀씨가 막 날리지요. 하나하나가 특이성이에요. 왜냐하면 산 자의 땅에서 터져 나온 특이성은 죽음의 땅에서는 특이하게 느껴지니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이 땅에서는. 남들이 못 알아듣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데 내가 못 알아듣는 거예요. 내가 주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
언제 알아듣느냐 하면 나에게 일체 모든 희망이 날아갈 그때 알아들어요. “참 내가 아무 성과 없는 것에 평생을 몸을 담았구나. 주님의 원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못된 주의 원수다.” 그것을 아는 경우에 비로소 내가 죽음의 땅에서 살아보려고 부질없는 짓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요.
특이성이 나오는데 특이성의 예를 하나 들면 쉬운 예니까요. 두산과 LG가 드디어 가을야구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 포스트시즌 준플레이오프를 한 거예요. 지금 5회에 들어가서 점수가 아슬아슬한데 거기 미친 사람 등장해서 태극기 흔들고 운동장에 나서면 어떻게 됩니까? 경기장이 스톱이 되지요. 그러면 야구라는 의미가 그 사람 등장으로 난동이죠. 난입해서 아아 대한민국 태극기 흔들면 술 먹은 인간이 분명히 그럴 거란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 기존의 모든 잘 진행되는 흐름을 한 순간에 무의미로 무산시키잖아요. 그 짧은 순간이지만. 정리요원들이 따라가고 도망가고 야구 치우라고 돌아다니는 그게 특이성이라고요. 훼방이죠, 훼방. 주님이 내 인생에 개입해서 잘 나가는 내 인생을 훼방한다면 주님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죽일까요, 안 그러면 그걸 허용할까요? “누구야. 내 곱게 가는 인생을 누가 훼방질해.” 마 잡을 거예요.
그 정도로 죽음의 땅의 생리는 강렬합니다. 생존의지는 강렬해요. 아까 첫째 시간에 물은 것 있지요. 먹고 마시고 시집하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뭐냐? 밖에 소나기 오는가? 소나기 오는 그것도 안 중요해요. 왜냐? 마찬가지로 레벨이 같은 레벨이에요. 먹고 마시는 것이 나 잘되기 위해서, 소나기 올 때 우산 쓸까 말까? 우산 가져왔다. 이것도 누구 잘되기 위해서? 목적이 나 잘되는 같은 평지에 속해요.
그것을 먹고 마시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뭐라 했습니까? 선택이거든요. 선택이란 것은 뭘 또 의미하느냐 하면 선택하신 분 따로, 나는 선택받는 자로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라는 이 삶의 공간은 내 공간이 아니고 선택하신 분이 선택의 의미를 생산하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나한테 그냥 제공된 거예요. 내 인생이 없고 나를 위한 일은 존재하지 않아요. 선택하신 분이 일방적으로 선택에 딱 맞춰서 나로 하여금 천구백 몇 년도에 태어나게 해서 어느 동네에서 살게 해서 그렇게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겁니다. 선택하신 분이.
다윗의 고백이 이 시편 27편에서 바로 그 고백이에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몰아붙였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내용에선 다윗은 몰라요. 그냥 일방적으로 받은 걸 적은 거니까.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이게 다윗이 상상해서 지금 작가 심정에서 시나리오 쓴 게 아니에요.
다윗이 아무리 글 솜씨가 좋아도 이걸 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다윗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시편 27편을 쓴 거예요. 다윗 본인이 쓴 게 아니고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쓴 거예요. 베드로전서 1장 10,11절 말씀처럼 선지자 속에 이미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가 있어요. 그리스도의 영이 예언이란 계시를 남긴 겁니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께 다뤄진 거예요. 자기가 주장한 게 아니고 하나님께 다뤄진 겁니다. 그 작업을 신약 때 성도도 똑같이 그대로 체험합니다. 이거는 나의 일이 아니야. 아침에 눈을 뜨면 매일같이 느껴야 될 일은 뭐냐? “이것은 나의 일이 아니야.” 어제 뉴스에 보니까 제한속도 시속 50킬로 구간을 어떤 사람이 113킬로로 달렸어요. 차 박았지요. 그 사람이 만약에 성도라면 뭐라 합니까? “이거는 나의 일이 아니야.”
그래서 울산강의에서 두 번째 시간에 그랬지요. “사과하지 말라.” 사과 있거든 개 줘버려요. 개 주고 사진 찍으면 돼요. 사과하지 말라. 내가 사과할 자격이 없어요. 사람이 사과했다고 해서 그 일을 또 안 한다는 보장이 없거든요. 치매 걸려 보세요. 하루일과 종일 주위사람한테 사과할 일만 해요. 저지레만 하는 거예요.
이거는 노인도 그렇지만 어린애가 똥 싼다고 부모한테 사과하면 그건 어린애가 아닙니다. “어머님, 죄송합니다. 제가 이제 3개월 됐는데 똥을 쌌습니다. 죄송합니다.” 이거는 요물이에요. 사람이 아니에요. 뭐야 이거? 왜 갑자기 어른 됐어. 왜 그래. 절차도 무시하고. 어린애면 어린애다워야지 갑자기 사과하고 이러면 부모가 부모 안 같아, 남남 같아요. 부부간에도 사과하지 마세요. 이건 부부가 아니에요. 그건 동업자에요. 미안해하는 것도 한두 번 해야 진심이 담겨있지 자주 하게 되면 이건 상투적이라는 걸 대번 눈치 챕니다.
다윗이 경험한 것은 육과 영의 경계선에서 필히 여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전쟁이 발생돼야 된다는 것을 다윗은 몸소 자기 인생이 아니고 주님이 만들어낸 인생 가운데 전쟁을 치러야 했어요. 전쟁 가운데 있을 때 다윗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왜 나만 가지고 그래?” 왜 주님은 저한테 고난을 주십니까? 시편 22편에서 했지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왜 나만 가지고 그래요. 그거는 언약을 위해서 선택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거는 십자가 달릴 때 예수님께서 다윗이 시편 22편에서 한 그대로 체험하지요. 주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이 버림받는 것, 지금 다른 사람은 본인을 안 버려요.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특이성을 보여줘야 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를 버릴 생각이 0도 없어요. 지금껏 나를 지키기 위해서 살아왔다는 여기서 갑자기 방향을 바꿔서 버리다니, 이건 말도 안 되지요.
교회 다니고 하나님 믿는 것, 왜 그렇습니까, 의도가 뭡니까? 나를 안 버리기 위해서 믿는 거예요. 내가 지금보다 잘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망하기 위해서 교회 가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말씀과 위배되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의 미래를 본인이 장만하는 거예요. 자기 미래를. 왜냐? 내가 나를 선택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나 다윗은 그런 경우가 아니고 외부에서 개입했어요. 그 특이성이 하늘의 특이성이 언약이라는 민들레 홀씨를 통해서 특이성이 언약이라는 홀씨를 통해서 터져 나왔습니다. 그 언약의 실체가 누구겠어요, 신약에 오게 되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인간이 겪는, 인간과 예수님과 구분해봅시다. 인간은 자기를 지킴이에요.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마음으로도 이것이 나 지키는데 실익이 있을까, 유리할까, 도움이 될까, 보상이 될까, 만회가 될까? 여기서 한시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은.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과 너무 달랐어요. 나를 어떻게 하면 버릴 수 있습니까?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특이성을 보여준 겁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제자들 보고 너희들이 나를 따라와? 따라올 수 있다고? 그전에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죽어야 된다 하니까 베드로가 나서서 용기를 내지요. “우리들이 있는데 예수님이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켜드리겠습니다.” 할 때 예수님이 베드로 보고 갑자기 호칭이 달라집니다. “사탄아,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한다.”
이 말은 사탄은 지금 누구 편에 있단 말이에요?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 편에 사탄은 조정을 받고 있는 거예요. 어떤 인간도 이 조정에서 자력으로 사탄의 위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면 이 사탄의 존재유무는 인간의 이성으로선 누구도 밝혀낸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딱 예수님께서 작동을 활동을 하니까 비로소 등장하는 게 바로 사탄이 등장하는 겁니다.
어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어요. 성도가 있는 것은 사단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 성도가 되었다고요. 성도가 구원받기 위해 확인된 게 아니고 이 땅에 사탄이 활동하고 작동하고 있다는 것, 통치하고 있다는 걸 밝혀내기 위해서 성도가 된 거예요. 그러면 인간의 입장에서 사탄의 일과 예수님의 일이 어떻게 대조가 되느냐를 자기 몸을 통해서 파악이 되는 겁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의 일을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라고 하시면서 그 뒤에 하신 말씀이 뭐냐? 누구든지 니가 나를 따라 와? 따라 오고 싶어? 그렇다면 내가 조건 걸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그 다음에 뭐라고 돼 있습니까? 뭐를 지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십자가를 지면 여기서 뭐가 날아가느냐 하면 자기가 날아가요.
자기 십자가 진 것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자기 자신이 날아가 버린다고요. 왜냐하면 버림받아야 되기 때문에. 기어이 버림받지 않으려고 하는 내가 십자가 지는 순간 나는 버림받아 마땅함으로 전환되면서 내 생각을 소멸시켜버려야 돼요. 내 자체가.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능력으로 이게 가능하지 않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지요. 이 말씀도 율법적인 말씀이에요. 그러면 이 말씀대로 제대로 따라 온 제자들이 누굽니까? 없지요. 없으니까 나의 주인공은 나가 아닌 거예요. 말씀의 주인공도 내가 아닌 거예요. 말씀이 주인공은 따로 계시고 그분이 나를 새롭게 생산해줘야 되는 겁니다.
자, 지금 우리가 둘째 시간에 하는 것은 전쟁했지요. 전쟁 없이는 뭐가 안 된다? 전쟁 없이는 언약이 안 이뤄져요. 전쟁 좋아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전쟁을 일으켜요. 이게 시편 27편에 나오니까요.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한다. 3절에 전쟁이 일어났지요. 전쟁이 일어나면서 여기서 등장하는 게 뭐냐 하면 적이 등장합니다.
적은 어떠냐 하면 아까 죽음 이야기할 때 했는데 적은 뭐냐 하면 4절에 여호와의 집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이 적이에요. 하나님께서 적이냐, 동지냐를 구분하는 그 특이성을 성전으로 이미 마련했어요. 성전으로 돼 있고 5절에는 그걸 장막이라고 했고 그 뒤에는 초막이라고 돼 있어요. 계속 나와요. 장막, 초막. 오늘 강의 잘 들었는지 확인해봅시다.
장막, 초막, 성전, 전쟁, 적 이 모든 개념이 인간에게서 나온 겁니까, 언약에서 나온 겁니까? 언약에서 나온 거예요. 인간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게 전부에요. 내게 이런 게 필요하지 않아요. 나는 그냥 조용한 게 중요하고 내 몸만 편하고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살면 끝이에요. 이런 내 모습이 하나님의 언약의 적이 된다는 것은 우리는 상상도 못했어요. 다만 하나님은 내가 설계한 내 행복을 위해서 후원해주고 도와주고 보태주고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다시 보겠습니다. 나라는 인간은 나한테 뭐가 유리한지, 불리한지 이것만 본능적으로 깨달을 뿐이에요. 내 생존에 유리한 거 불리한 것, 내 건강에 유리한 거 불리한 것, 내 가정의 행복에 유리한 거 불리한 것 이것만 생각할 뿐이에요. 그리고 유리한 것 불리한 것 해서 여기서 뭐냐? 의미를 찾아내는데 그 의미는 누구를 위한 의미입니까? 나를 위한 의미에요.
자기 십자가 같은 건 하나님의 아이디어지 내 아이디어가 아니에요. 우리는 이 의미를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고난을 생각하고 고생 많이 했음, 이걸 하지만 고난과 고생 많이 해도 이건 어디까지나 누구 잘되기 위해서? 나 잘되기 위해서 고생과 고난을 생각하는 겁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매사에 나를 집어넣으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나 우리는 타고난 게 육이기 때문에 매사에 나를 집어넣습니다. 매사에 나를 집어넣기 때문에 이건 다윗도 마찬가지고요. 집어넣기 때문에 여기가 대조적으로 매사에 나를 무시하는 식으로 일을 벌이지요. 주님께서 언약적 일을 벌입니다. 그래서 전쟁이라든지 성전, 적이란 이런 모든 개념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여기 어떤 생산이 필요하고 전환이 필요한 거예요. 바꾸시는 거예요.
육에서 영으로 할 때는 전환될 때 여기서 뭐가 일어난다? 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에는 반드시 누가 따릅니까? 적이 따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기 다윗 경우에는 적이 누굽니까? 사울이 적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사울을 이긴 적이 있습니까? 이긴 적이 없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공격했지요.
그래서 사울을 옛 나로 보고 다윗을 새로운 나로 보면 옛 나는 육적인 나는 날마다 뭘 공격합니까? 주께서 준비해놓은 새로운 나를 끊임없이 핍박하고 다그치고 그걸 공격하지요. 뭐라고 공격하느냐 하면 정신 차려라. 네가 지금 돈도 밥도 아무것도 안 되는 그 일에 성경 읽는다고 돈 되나? 왜 쓸데없는 일을 여태껏 하느냐고 누가? 내가 나를 계속해서 지적하고 조롱하는 거예요.
“너 기도해서 얻은 것 뭐가 있는데?” 강력한 적이 누구에요? 남이 아니에요. 북한의 김정은이 아닙니다. 강력한 적은 내가 강력한 적이에요. 마치 욥기에서 욥이 욥의 적인 것처럼. 하나님 저 의로운데 저를 치십니까? 강력한 적이에요. 욥의 고백이 오늘날 우리의 매 일상의 고백이 되고 말았어요.
“정말 이렇게 나오기에요. 주님이 뭔데 우리 오빠를 치십니까?” 주님과 마르다, 마리아 하고 얼마나 사이좋았어요. 오실 때 되면 마르다는 맛있는 잡채에 탕수육, 고추튀김 해주고 마리아는 싸가지 없이 주님 발 앞에 앉아서 말씀만 듣고 언니는 땀 뻘뻘 흘리면서 부엌에서 대접하고. 하지만 주님은 대접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고 할 때는 어떤 희망이 있어요. 우리 가정은 이제 된 거예요.
우리 가정 살았어, 라고 했는데 오빠가 죽었을 때 마리아는 오빠의 종류를 몰랐던 거예요. 죽은 오빠가 나흘 만에 사는 오빠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한 거예요. 이것은 마리아 본인이 현재 있는 마리아만 생각했지 내가 죽고 난 뒤에 내가 새로 부활된다는 생각은 없었던 거예요. 왜냐? 기존의 나만 자꾸 고집하고 죽어도 다시 사는 나를 생각 못한 겁니다. 그거는 성령이 와야 돼요.
미장원에 갔는데 머리가 좀 마음에 안 들었어요. 미장원 불질러버릴까, 라고 너무 화내지 마세요. 왜냐하면 머리모양 괜찮은 나를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 일부러 솜씨 없는 미장원에 가게 하신 거예요. 왜냐하면 마지막 때 되면 우리는 해같이 빛납니다. 머리 손질할 필요 없어요. 여러분, 태양을 손질합니까? 태양 어느 부분을 손질해요. 온 몸이 번쩍번쩍한 데요.
요한계시록 1장에 예수님 모습 보세요. 온 몸이 해같이 빛나는데 거기다가 머리 손질해드릴게요,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더 이상 나에게 손댈 필요가 없는 주께서 친히 생산한 나는 그 정도에요. 해와 같이 빛나는 정도에요, 그게. 얼마나 우리가 기존에 있는 세속적입니까?
사울, 다윗 싸울 때 다윗은 사울을 충분히 이해해요. 비록 버림받았지만. 자기는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니까 화날 수밖에 없지요. 시기, 질투, 미움 이것 다 어디서 나온 거예요? 바로 주께서 익히 옛사람이죠. 우리는 그 옛사람을 나라는 이유 때문에 내 것이니까 우호적이었고 긍정해줬어요. “내 성질 더럽다, 왜?” 이런 식으로 우호적이었어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옛사람을 통해서 새사람 되기 위해서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그 전쟁이 얼마나 치열한 전쟁인지를 제가 요한복음 6장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에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 이야기 나오지요. 인간에게는 나가 있으면 나 주위에 어떤 필드가 있는데 어떤 장이 형성돼 있어요.
다른 인간과의 진동수가 같아집니다. 그러니까 같은 사람이 돼버리면 유유상종이 돼버려요. 서른 살 넘어서 직장 생활하는 사람도 같은 예비군 되어 한 3박4일 있으면 똑같은 인간돼요. 이걸 동조현상이라 해요. 갑자기 사고방식 생각이 똑같이 돼버려요. 같은 육이 있기 때문에. 어떤 특이성이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고유세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예수님의 존재의미를 자신들의 고유세계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들의 배고프다. 극히 육신적이죠. 부정할 수 없습니다. 나는 주의 말씀이 중요하지 배 안 고파. 이런 것 없어요. 보리건빵이라도 먹어야 돼. 일단 먹어야 돼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고유세계로 내려가면 여기서 인간의 자율성도 박살납니다. 그냥 육신이 당기는 대로 살아야 돼요.
어떤 사람이 미워진다. 나는 미워하면 안 돼. 나는 성령의 열매가 있기 때문에 미워하지 말고 사랑해야 돼.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항상 주의 일은 우리가 억지로라도 사랑하고 싶잖아요. 그러면 아직까지 멀었구나. 더 미워지게 하는 거예요. 이걸 조롱의 깊이, 나라는 것이 깊이를 더해감으로 말미암아 이래도 네가 육신이 아니야, 라는 것은 깊이 더 파고 들어가는 전개되는 일이 필요해요.
끊임없이 파고 들어가요. 끊임없이. 나중에 딸가닥하고 악마의 가슴팍에 도달되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끊임없이 파고들어가요. 내가 예수 믿는 것이 구라였다는 것을 파악할 때까지 끊임없이 파고 들어가요. 본모습은 자기뿐인데 교회 오십 년 다녔기 때문에 살아온 세월이 그럴싸한 신앙인인 것처럼 조작된 것을 전부 다 주께선 상황을 통해서 깊이 있게 채굴합니다. 파고들어가요.
그러면 여기서 나의 자율성이란 존재하지 않지요. 그럼 내가 뭐 한다가 아니라 육신이 스스로 자기 본능을 드러내게 하는 거예요. 만약에 교회 교인들이 열 명 있는데 교회에 어떤 어려움이 왔다. 그래서 교회 더 이상 못한다고 할 때 설교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교회에 어려움이 왔지 여러분 자신한테 어려움 오지 않았잖아요. 그럼 여기서 교회를 그만두면 돼요.
왜? 처음 교회가 있을 때부터 교회가 아니었었어요. 교회가 아니었음을. 개인이 운영한 거예요. 아무도 교회를 최우선적으로 생각한 적 없어요. 전부 다 각자 자기 노림수 때문에 온 거예요. 그런데 주께서 교회 안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본래의 자기 모습을 들춰내는 이 사랑, 이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라는 것은 하나의 놀이단체에요. 또는 오징어 게임하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그것 하는 곳, 지 잘난 맛에 살아가는 전부 다 이런 동네란 말이죠.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실 때 그 민낯 또는 날 것, 이것은 주님만 아셔요. 그러니까 본인이 본인의 본능이 뭔지를 자기가 자기 속까지 파고 들어갈 능력이 없어서 자기는 그럴싸한 위장으로만 덮었을 뿐이지 그 위장에 덮여있는 진짜 날 것, 진짜 나는 어떤 존재인지 본인은 모르는 거예요. 모를 때 주님께서는 상황을 통해서 파고 들어갑니다. 우물 파듯이.
파고 들어가면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사라지는 지점이 나와요. 내가 사라지고 남는 것은 그야말로 사도 바울이 성경대로 이야기한 것은, 너는 육이다. 나는 나가 아니라 너는 그냥 육이야. 육은 육을 내가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욥기가 그 이야기에요. 욥이 얼마나 착했습니까. 자식들 죄 지을까봐 미리 하고 과부와 고아들 구제하고 착한 일은 온 동네 구장질해서 오지랖 넓게 다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오는 것은 마지막 남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의롭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의로운 나에게 조치를 잘못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주님 실수했습니다. 지금 사람 제대로 안 바라보고 행정처리가 잘못됐습니다.
주님께선 그때까지 기다린 거예요. 왜? 그게 생산할 수 있는 터전이 되기 때문에. 새사람 만들 수 있는 터전은 오직 주님의 은혜만 담겨있어야 되지 나도 얼추 노력했습니다가 담겨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끝까지 파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뭐냐? 구약에는 욥이고, 신약에는 십자가에요.
사울이란 사람이 언제 주님 만났습니까? 착한 일할 때 주님 만났습니까, 뭐 할 때 주님 만났습니까? 주님을 핍박하는 현장에서 주님을 만난 거예요. 주님을 핍박하는 현장. 우리는 주님을 핍박 안 했다 하지만 아니에요. 우리는 무심코 살아가지만 핍박이 돼요. 사울과 똑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구원에는 절차가 있어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주의 일에 원수가 되는 그 지점까지 알게 만듭니다. 그게 십자가에요.
사마리아 여인은 언제 주님을 만났느냐 하면 우물에 물 뜰 때 만난 게 아니고 그 물 뜰 때가 다섯 번째 남자와 헤어지고 난 뒤에 여섯 번째 남자 사귀 때 주님 만났어요. 그러니까 사마리아 여인이 자기의 본색을 감추고 주님과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물 뜨는 이야기를 했지요. 물 뜨는 이야기에 주께선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여섯 번째 남자 사귄다. 그걸 뭐로 보느냐 하면 존재의 결핍, 또는 존재이 목마름이죠. 나의 욕망의 목마름이에요.
그런데 그 사마리아 여인이 남자라는 육에 대한 욕구, 그걸 본인이 키웠습니까, 그걸 본인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냈습니까? 어떻습니까? 아니지요. 욕구 위에 나라는 것을 그냥 걸친 거예요. 그러니까 남자 육십 명이든 칠십 명이든 이거는 책임이 된다, 안 된다? 책임 안 되는 거예요.
문제는 사마리아 여인이 자기가 남자 사귀는 이걸 가지고 약간의 양심껏 해서 하나님께 예배드려서 자기 죄를 그냥 무마시키려는 자기만의 시도를 한 것이 그게 잘못인 거예요. 어느 산에 예배드리면 됩니까, 이래 나온 거예요. 예배드리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 가식은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어느 교회 다니면 됩니까, 구원받습니까? 이건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예요.
주께선 할 수 있는 것을 안 받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드러내시고 인간이 예상도 못한 할 수 없는 것, 참 그 이야기 중요하다. 야곱은 어떤 경우라도 자기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것은 상상한 적이 없어요. 이거는 하나님이 찾아와서 개입해야 이스라엘 이름이 생기는 거예요. 이 이름은 야곱 이름 속에 없는 이름이에요. 야곱은 하나님 만나고 나는 뭐했다? 나는 죽었다 했지요. 나의 죽었다가 이게 육이거든요. 죽었다가 돼야 육과 영의 경계선이 야곱을 통해서 이동되고 있는 겁니다. 운반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27편 같은 경우에는 다윗으로 하여금 다윗이 이동해 도착지점을 보여주는 겁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시편 27편의 내용에 들어가게 하는 거예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할 때 다윗이 빛이 아니라는 사실을 언제 드러나느냐 하면 신약성경에 와야 이게 나타나요. 예수님이 빛이라는 사실을. 그전에 다윗에게 먼저 이 사실을 이야기해주죠.
다윗은 살아가면서 다윗의 적과, 다윗의 적이라고 했는데 이동합니다. 뭐냐? 장차오실 나 말고, 이게 중요해요. 장차오실 나 말고 어떤 분으로 이동하는 겁니다. 어떤 분의 적이 되는 거예요. 다윗은 장막을 만들고 성전을 만들 그러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성전을 만들 능력도 없으면서 나는 하나님 편이란 말 하지마세요. 십자가 질 수 없는 인간이 나는 하나님의 적이란 말 할 자격 없어요. 그냥 생산라인에 끌려들어간 거예요.
요한복음 6장 해봅시다. 표정들 보니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모습인데 그냥 해볼게요. 자, 배고프지. 주님께서 시작합니다. 배고프니까 말씀보다도 배고픔이 우선된 거예요. 배고프니까 먼저 제자들에게 남자만 오천 명인데 먹을 것을 주라고 했어요. 오천 명 다 못 그리고 대충 동그라미만 그릴게요.
예수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지요. 이 말씀 안에 이 상황도 여기다 포함시켜버린 거예요. 배고픈 상황을 말씀 속에 포함시킨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이 오천 명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너희들 제자들 가운데서 이게 나오느냐를 예수님께서 따져 묻는 거예요. 너희 배고픔에 대해서 너희 쪽에서 해결해봐라. 해결됩니까, 안 됩니까? 해결 안 돼요.
그래서 어린아이 도시락 하나,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 이거는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있음 가운데 제일 바닥 치는 없음과 있음의 경계선상이 펴있다는 것, 있음과 없음을 경계선 안에는 아예 없음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경계선으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제시한 거예요.
그러면 이것을 제시했다는 말은 빌립이 제시할 때 우리는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없다? 없다고 손들었지요. 주님께서는 이 문제를 제시했어요. 배불리 먹이기 이런 숙제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인간 쪽에서는 이걸 달성할 재주와 능력이 없지요. “배불리 먹여라.” 이게 말씀이니까 그 다음에 여기서, “우리는 능력이 없나이다.” 지금 이게 같이 가는 거예요. 주의 모든 말씀은 그걸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같이 포함해서 말씀을 주신 거예요.
사람들은 자기가 있으면 누구로부터 혜택이 오잖아요. 혜택이 올 때 그들로 하여금 없다는 취지를 계속 유지해야 될 필요가 있거든요. 그런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날 사랑해서 줬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없다가 사라질까요, 없다가 있다가 될까요? 역시 나는 이 땅에 가치가 있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주님께서 임금 삼으시죠. 벌써 이게 범죄입니다. 임금 삼는다는 것은 자기들이 자진해서 뭐가 됐다? 나는 그 임금의 백성이고 싶어라, 에요. 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왜? 육이니까. 그래서 주께서는 너희들이 날 따라온 이유는 먹고 배부른 것이다.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옛날에 구약을 볼 때에 만나에서 그리스도를 못 끄집어내고 하늘에서 그냥 떡, 떡에서부터 떡으로 그냥 배불리 먹는 것, 이런 분만 오시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그 차원에서만 계속 가고 있는 거예요. 네가 날 따라오는 것은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너희들이 깨어지지 않고 지금 나를 따라고 있다. 나는 내가 깨어지기 위해서 가는데 너희는 멀쩡한 채 따르고 있다.
그래서 주께서 하는 말씀이 진짜 영생은 너희들이 말한 오병이어도 아니고 만나도 아니고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뭐가 없습니까? 생명이 없다. 이것은 뭐냐 하면 바로 주께서 언약의 적, 전쟁의 차원을 이야기해요. 어떤 차원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가를 주님께서는 보여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4절 봅시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그 다음에 무슨 말 나옵니까?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자, “아름다움이란 내가 소실될 때나 가능하다.” 아름다움은 나의 평가, 나의 판단 자체가 다 날아갔을 때 주어지는 거예요. 있음 그대로가 좋은 것 있잖아요.
그럼 나는 뭐냐?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 될 때 우리의 남은 인생은 아름다움의 연발이고 아름다움의 연속입니다. 남편이 술 먹고 아내를 때릴 때 그 때리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어요. “여기 때려줘, 요기 때려줘.” “이게 미쳤나?” “여기 때려줘.” 아름다움은 나의 조건이 섞이면 안 돼요. 그러면 성전의 아름다움이 안 돼요. 아름다움은 피 흘림 그 자체, 예수님의 살과 피 그 자체가 아름다우려면 내가 방해요소가 되지 않아야 되죠.
그러면 주께서 아름다움이 나에게 손질하지요. 손을 대는 거예요. 어떤 조건이 아름답다고 말하지 마라. 그냥 아름다운 거예요. 구약이 아름다운 것의 대표적인 것은 바로 아가에 나오죠. 아가서에서 아름답다고 하면 사랑이 뭐보다 더 깊나 하면 사랑은 바로 죽음보다 깊기 때문에 이걸 비교하기 위해서 사랑은 죽음을 경유해서 튀어나와야 사랑입니다.
아까 야곱이 하나님 만날 때 자기가 죽었잖아요. 자기의 장래에 늙어죽는 그 죽음을 앞당겨버리면 나의 고유성이 날아가는 것. 내 고유성 날아가면 내 선택, 나의 과거, 기억 그게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쓰레기가 되는 거죠. 지금 나는 어떻게 살았느냐가 아니라 지금 나는 어떤 혜택을 입고 있느냐, 그게 중요한 거예요.
“나는 남편 있어 좋습니다.” 남편 있어 좋고 그게 아니라 예수님의 살과 피가 주는 그 아름다운 은혜 속에서 지금 주어진 상황이 그 살과 피, 십자가를 증명해주고 있단 말이죠. 내 남편이 어떻고 내 아내가 어떻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아내, 남편, 자식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발견하도록 그렇게 조치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아내와 남편은 뭐냐? 하나의 언약적 요소가 되죠.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적 요소, 주님이 선택해서 마련한 주님의 상황이 되는 겁니다.
자, 6절 봅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찬송하기 위해서는 무엇의 존재를 확인했습니까? 나의 원수의 존재를 확인했지요. 그러니까 이건 다윗이 아니고 다윗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지요. 그래야 장막이 만들어지고 하나님의 집이 만들어지니까. 다윗은 성전을 만들지를 못했어요. 허락도 안 했어요.
솔로몬이 만들었잖아요. 솔로몬이 만든 성전 불났는데요? 그러니까 계속 유보되는 거예요. 언제까지? 오실 때까지. 장차 예수님 오실 때까지 유보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때에 자기 인생으로 끝난 게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누굴 보기를 원했습니까? 예수님 보기를 원했지요. 예수님 보고 뭐했다 했습니까? 오늘 본문 6절처럼 기뻐했어요.
아브라함이 왜 기뻐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뭘 보고 기뻐했습니까? 언약의 당사자가 아브라함 내가 아니고 나를 껍데기로 사용했다는 것이죠. 내게 온 그 이삭 있잖아요. 이삭은 모형이고 실제는 뭐냐? 예수님께서 이삭 같은 모습으로 자기 시대에 찾아온 거예요. 정리합시다.
미리 죽는다는 것, 이것은 자기의 고유성이 파괴된다는 것. 파괴되기 위해서 지금의 상황이 딱 들어맞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이 상황은 나를 위한 상황, 내 행복을 위한 상황이 아니고 주께서 생산하는 현장, 생산현장으로서 딱 알맞은 상황을 이렇게 주었으니까 이 상황이 아름답고 찬송의 이유가 됩니다. 내 적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주님의 적 밖에 없어요. 나도 적 못지않잖아요.
자, 8절에 봅시다.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이 말은 언약 안에 나 말고 다른 인격이 살아 움직인다. 다윗만 얼굴을 갖고 있는 게 아니고 나 말고 언약과 관련된 다른 인물, 다른 얼굴을 갖고 있는 분이 있다. 그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인데 여호와 하나님이 이름을 가질 때는 얼굴을 가지는 거예요. 자신의 이름이 인간화되면 거기서 얼굴이라고 표현되는 겁니다.
내 안에 다른 얼굴이 있다는 말은 어떤 분이 나를 자기 집으로 사용해서 활약하고 있고 활동하고 있고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요. 그분이 얼굴을 이제 얼굴로 보고 싶다. 그게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이제는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볼 것이고. 사도 바울의 소원은 주를 만나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그 세계가 무슨 세계냐 하면 바로 아까 13절에 그 세계가 무슨 세계라 했습니까? 무슨 땅이라 했지요? (산 자의 땅) 유일하게 영원히 생명의 땅은 바로 내가 아니고 너도 아니고 우리에게 언약으로 찾아오셔서 나를 개 무시해주신 그분만이 영원한 영생의 땅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14절에 보면, “너는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결국 이 이야기는 다윗 본인의 이야기인 것 같은데 본인의 이야기가 아니고 여호와의 이야기입니다. 그럼 다윗은 뭐냐? 그 여호와로 인하여 선택된 사람이에요. 마지막으로 당부합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보다 더 중요하고 더 토대적이고 근원적인 건 뭐냐? 선택입니다. 십자가로 선택했다는 것, 이제는 네 인생을 위한 인생은 없고 십자가의 의를 드러내는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선택받은 것, 그것이 바로 열두 제자고 성령 받은 모든 성도가 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기도하겠어요.
하나님 아버지, 세상 모든 것이 주께 자기 중심되라고 만들어진 세상인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나를 위한 세상인 줄 그렇게 오해하며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내 안에 주님 계셔서 끊임없이 네 세상이 아니고 나를 위한 세상인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