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악의 온전함

아빠와 함께 2021. 10. 13. 07:44

20211011a 부산강의 : [시편]42(26:2)-악의 온전함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26편,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그렇게 시작하지요.

성경에 나와 있는 시편에 나와 있는 ‘나’란 것은 다윗의 시로 돼있습니다만 성경의 인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이 세상에 없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다윗이라는 사람이 있더라도 다윗 뒤에 이렇게 숨어 계시는 분이 있어요. 숨어 계시는 분이 다윗을 역사 표면에 밀어내는 거예요. 밀어내게 되면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나왔던 그 내용은 다윗이 아니고 다윗을 뒤에 조종하신 분의 자기 정체를 다윗을 통해서 드러내는 겁니다.

다윗이란 역사적 실존적 인물 속에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분이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을 밀어내면서 여기서 무엇을 유발시키느냐 하면 다툼, 또는 전쟁, 심판 이런 것은 다 괴리, 괴리라는 것은 벌어지는 거예요. 인간세계와 하나님이 원하는 세계가 벌어져있다, 간격 져있다, 좁힐 수 없다,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세계가 상존한다, 같이 있다 이 사실을 드러내는 거예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분이 이 세상에 속한 다윗을 통해서 바깥으로 이 세상의 인물로 나타나게 되면 그 의도는 뭐냐? 다툼과 전쟁과 심판과 저주고 괴리현상, 벌어지는 현상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그 분이 뭐냐 하면 여기서 숨어 계시는 분이에요. 숨어 있다. 인간에 노출되지 않는다.


그러면 성경이니까 지금 우리가 하는 게 시편 26편이잖아요. 시편 26편뿐만 아니고 모든 성경이 다 그래요.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사도 요한이 어떤 편지를 받게 되는데 이 편지가 일곱 개로 봉인돼있어요. 일곱 개로 봉인돼있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자물쇠를 일곱 개로 채워져 있는 거예요. 한두 개 같으면 용접기로 끊을 수 있을 텐데 자물쇠 일곱 개는 도저히 그 내막을 풀어낼 수가 없는 겁니다.

편지 내용은 감추어져 있고 그것은 봉인돼있고 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사도 요한이 엉엉 웁니다. 이 세상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편지 내용을 몰라서 그렇고, 첫째는 편지 내용을 모른다. 두 번째, 무서운 것은 그 편지가 내용대로 도착한다는 거예요, 이 땅에. 편지가 모르면 그냥 편지 준 하늘나라에 돌아가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보내진 편지는 반드시 여기 도착을 한다는 거예요. 도착은 하는데 내용도 모르고 도착해놓으면 마지막에 멸망. 그러니까 이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사도 요한이 편지 내용이 울었다는 것은, 사도 요한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지금 궁금한 게 아니에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더 궁금한 거예요. 사도 요한이 울었다. 이것은 뭐냐 하면 단절, 끊어짐. 이 지상에서 얻어지는 인간의 모든 지혜와 편지 안의 내용과 끊어져있다. 연결이 안 돼요. 봉인된 자물쇠로 채워져 있으니까요. 인간의 모든 온갖 지혜를 다 동원해도 그 내용에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지만 성경 전체가 다 그래요. 또 한 가지 성경에 나오는 예를 들면, 요한복음 8장 21절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 죽겠고” 너희 바리새인, 유대인들이 나, 나가 누굽니까? 예수님을 만만하게 보고 같은 시대에 같은 인물로 보고 나를 쉽게 파악이 가능하다, 라고 찾다가는 중간에 죄 가운데 완전히 함몰되어 죽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인간세계에 속한 자 사이에서 괴리현상, 어떤 계곡이 있고 건널 수 없는 골짜기가 있다는 거예요. 이 말은 예수님은 어느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과 동일하냐 하면 인간세계에 속하지 않는 분으로서 이 땅에 등장한 겁니다. 근데 이 계곡을 그냥 계곡이라 하지 않고 뭐라고 보냐 하면 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면 이 죄는 인간세계 전체가 어디에 지금 함몰돼있다? 주님을 알 수 없도록 작동하고 있는 어떤 위력, 세력 속에 인간세계가 놓여있는 거예요.

이게 요한복음 15장도 마찬가지인데요. 요한복음 15장 22절에도 이렇게 있습니다. 너희들끼리 있을 때는 너희들이 아무 문제없다고 여겼다. 왜? 모두가 그렇고 그런 다 아는 사이이고 인간이란 뻔하니까 아는 사이인데 내가 너희에게 오지 않았더라면 아무 문제없었다. 그러나 내가 너희 속에 합류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은 비로소 죄가 되었다는 거예요. 이게 요한복음 15장 22절이에요. 그런 말씀 있습니까, 하지 마세요. 그런 말씀 있어요.

마태복음 10장은 여러분 잘 아는 말씀인데 예를 들어볼게요. 마태복음 10장에서 열두 제자를 보내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11절, 12절에 보면, 너희가 어떤 집에 가서 평안하기를 빌라, 평안이 복음이거든요. 복음을 전할 때에 합당치 않거든 군말하지 않고 돌아서서 먼지를 떨어버려라. 이건 뭐냐 하면 너희는 복음의 세계로부터 먼지 털듯이 떨어진 대상이다, 라는 티를 꼭 내야 된다는 겁니다. 열두 제자에게.

열두 제자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속한 세계와 인간세계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리는 역할을 전도자가 하는 거예요. 사람들 꼬여서 부흥시키는 게 일이 아니고 그냥 단절, 갭을 분명히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그러냐? 인간세계가 뭐가 문제냐 하면, 인간세계는 어디서부터 출발하는가? 창세기 2장, 3장에서 출발하거든요.

창세기 2장, 3장에서 악마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인간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어요. 이렇게 해서 인간은 독립적 존재로 살게 됩니다. 독립적 존재를 알기 쉽게 하면 ‘나를 위해서’에요.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살게 된 거예요. 그때부터. 나를 위해서 살게 되면 그 다음부터 나를 위해서 사는 게 뭔가를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데 그 뒤에 창세기 2장, 3장 뒤에 나오는 게 창세기 4장이죠.

창세기 4장에 보면 누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 가인이 나와요. 가인이 뭐냐 하면 ‘나를 위해서’에요. 나를 위하여. 근데 나를 위한 이것이 인간세계에선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세계에서 자기를 규정하고 자기를 정립하는 것은 사람 대 사람의 만남에서 정립이 돼요. 만나보면 전부 다 각자, 각자도생, 각자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만 모였단 말이죠.

질문을 하나 던질게요. 나를 위하여 복음을 믿겠다. 또 나의 구원을 복음을 믿겠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어느 쪽입니까? 가인 쪽입니까, 아벨 쪽입니까? 이게 가인 쪽이죠. 이 교회는 너무나 신앙이 잘됐는지 훈련이 잘됐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내 구원을 위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나를 위해서 예수를 믿겠다는 이것은 전부 다 이거는 악한 쪽에 속하는 거예요.

왜? 나를 위해서가 성경 공부한다고 이게 깨지질 않아요. 바다는 깨져도 인간의 나를 위해서는 깨지질 않습니다. 홍해 보면서 기적이다. 그걸 기적이라고 한 사람들 다 죽었어요. 기적을 해도 제대로 기적을 알아야지. 자연현상이 달라지고 물 위를 걷는다고 기적이 아니에요. 기적은 뭐냐 하면 ‘나를 위해서’에서 다시 ‘주를 위해서’ 주를 위해서라고 말을 해도 되고, 그걸 달리 하겠습니다.

나를 위하지 않는 쪽으로 변해야 돼요. 주를 위해서는 개나 소나 다 이야기해요. 교회 가면. 그게 아니고 나를 위하지 않는 주, 나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는 주, 주님.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내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 그런 주님이 왜 그런 활동을 해야 되는가? 어떤 식으로라도 나를 위해서라고 되돌아오지 않도록 주께서 마음이 있는 우리 자신을 주님의 최종적인 기적의 장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돈 10억 벌었다고 갑자기 주를 위해서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나를 버린다고 백날 도 닦아봐야 그건 불교신자지 기독교신자가 아니에요.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버려봤자 남는 게 있어야지. 남는 건 역시 나를 버린 나, 도로 또 나, 버렸던 내가 언제 돌아왔습니까? 이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림을 하나 그리겠어요. 두 개를 그리는데 두 개를 그릴 때 이 세상이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세상1이 하나 있고, 여기 세상2가 하나 있어요. 그러나 세상2에 인간들이 살고, 이건 각자 사람들이 자기를 바라보면서 자기를 정립합니다. 만남이 나를 정립해요. 그래서 형제가 있는 애들과 혼자 있는 애가 다르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비교할 수 있는 다른 형제가 있으면 내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이 되는데 혼자 살게 되면 부모가 해달라는 데로 다 해줘버리면 자기가 재벌도 아닌데 재벌2세인 줄 착각한다니까요. 자기 정립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사람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을 정립하는데 정립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타인 흉내 내기. 타인을 모방하고 타인을 흉내 냄으로써 그게 곧 얼추 나답다고 그동안 꾸준히 세월이 가고 나이를 먹어도 마찬가지에요. 전부 다 새로운 것을 만남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자기를 그냥 변신하고 수용해나갈 뿐이지 나를 위해서는 변함이 없이 꾸준하게 가는 거예요. 나 안에서만 단절이 없어요. 죽을 때까지 단절이 없어요. 나 안에서만.

뭐 고생했다, 어려웠다 하지만 그래도 가느다란 선을 이어졌잖아요. 사우디 가서 죽을 고생했다. 사우디 가서 죽을 고생했지만 살아 있잖아요. 고생은 시껍했지만 살아 있잖아요. 그러니까 어느 경우라도 나를 위해서가 완전히 작살나는 그런 지점, 그걸 불연속성이라 하는데 그런 지점은 이게 없는 겁니다.

불연속성을 제가 수학적으로 표현하겠는데 여러분들이 어릴 때 수학시간에 공부했던 것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f(x)=x+1의 함수는 그래프를 그리면 여기 x고 y축일 때 0이 되거든요. 그러면 그래프 선이 이렇게 돼요. 왜냐하면 여기 x가 0일 때 y는 1이 되고, x가 1이 될 때 y는 2가 된다고요. 그런데 이 함수의 특징은 뭐냐 하면 여기 x가 어떤 숫자, 천이 되던 만이 되던 간에 여기가 끊어짐이 없어요. 계속 이어지는 거예요. 이걸 수학에서 연속성을 유지한다.

그런데 다른 함수, G(x)= 

이 그래프를 그려보는 거예요. 이 그래프가 복잡하게 보이지요. 그런데 여기 x²-1을 풀이하면, G(x)=이 돼서 분모, 분자의 (x-1)을 지우면 똑같이 되는 거예요. 그럼 그래프가 똑같이 돼야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쭉 가게 되면 여기 x가 1이 되는 곳에 y가 2가 되면서 이 지점에서 이게 불연속성이 돼요. 이 밑의 그래프는 불연속성이 된다고요.

똑같이 아까처럼 약분하게 되면 똑같이 x+1 되는데 왜 이 그래프는 불연속성이 되는가? 그것은 뭐냐 하면 1에다 집어넣으면 이게 뭐냐? 0이 돼버려요. 이 된다고요. x-1에서 x에 1 집어넣으면 0되잖아요. 이렇게 될 경우에 이게 왜 불연속적이냐 하면 =? 이 값이 무엇이냐 하는 거예요.

수학에서 은 뭐냐 하면 0에다가 무엇을 곱해야 1이 되느냐는 이야기에요. 이건 말이 안 되지요. 이걸 불능이라 해요. 은 부정이라 하는데 어떤 수를 곱해도 0이 되는 것은 이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해서 부정하는데 이건 불능이에요. 불능이 불연속성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다윗을 밀어붙이면서 하나님께선 연속적인 것, 연속이란 나를 위함, 이거는 어떤 기적이라도 이건 연속적이에요. 죽는 순간에도 나는 잘 살았다, 멋졌다, 나는 최선을 다했노라, 이렇게. 묘비에도 그걸 써놨어요. 참 멋진 인생이었다. Beautiful my life, 브라보. 이런 것 있잖아요. 끝까지 연속성을 유지해요.

난 교회도 다니고 교회 목사가 되어 복음도 전하고. 무슨 시답지 않는 소릴 하느냐 하면 결국 전부 다 나를 위함이에요. 이렇게 살았으니까 나에게 생명의 면류관,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본인이 끊어진 것도 없는데 무슨 자길 위해서 생명……. 그 사람은 창세기 3장 이후에 악마의 사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악마는 죄거든요. 죄의 권세에서 못 벗어난 채 구원은 또 얻고 싶은 거예요. 왜? 교회 가면 구원받은 사람 많다하니까 그걸 모방해서. 교회 나와서 만나는 사람마다 나 저 사람처럼 될래가 돼버리면 이 자아가 정립이 돼버린다니까. 그게 마치 나인 것처럼, 나도 그처럼 얼추 같이 가는 것처럼 본인이 그렇게 자기를 위장하고 조장해버린다고요. 조장해버리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는 도대체가 달라질 수가 없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면 이 불연속을 어떻게 하는가? 그림을 두 개 아까 그렸지요. 세상1이 있고 세상2가 있는데 인간은 세상1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상2만 인정하지요. 여기서 두 점을 해서 삼각형을 해버리면 이게 뭐냐 하면 시작점이 되고 이게 끝점이 되면서 방향이 이렇게 바뀌어요. 그럼 이걸 끝까지 내리면 삼각형을 키우면 여기 밑바닥이 이게 최종점이 됩니다. 그러면 이 꼭짓점에서 밑바닥까지 최종점으로 삼각형이 내려오면서 이게 성도의 인생 여정이 됩니다.

성도라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성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가 아닌 나가 존재해야 된다는 말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렇지요. 나를 위하지 않는 그런 멋진 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나가 바로 앞의 말을 부정해버리는 거예요.

나를 위하지 않는 내가 왜 또 지 걱정을 슬금슬금 계산하느냐 말이죠. 내가 있지 않으면 나를 잊어버려야지요. “나를 위하지 않는 존재는 멋진 나가 나됐으면 좋겠습니다.” 그걸 왜 노리냐 말이죠. 앞뒤가 안 맞게.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이게 말이 안 되는 것이, 주의 영광이라 하는 주만 나를 대체해서 들어갔기 때문에 주의 영광은 주님이 알아서 할 문제지 내가 거기서 주의 영광에 가담한 나는 따로 존재할 이유가 없어요.

전부 다 어디서 들은 게 있어서 들은 것으로 자기를 속이는 데 바빠요. 전부 다 자기를 조장한다고요. 성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없는 인물이 나중에 등장해요. 그러면 이 삼각형의 특징이 뭐냐 하면 둘 사이를 이쪽은 뭐냐? 나를 위하지 않는 세상, 천국이죠. 이쪽은 나를 위한 세상, 아담의 후손들입니다. 나를 위한 세상은 주님께서 오셔야 그들이 죄인인 것을 드러내듯이 주님께서 여기서 이 세상에다 뭔가 쑤시고 들어와 버린 거예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희생이라고 합니다. 희생.

오늘 본문 봅시다. 여기 다윗의 시라고 돼 있잖아요. 여기 내용은 나는 온전하고, 나는 악하지 않는다고 돼 있어요.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4,5절)

이 시편에 나오는 주인공은 자기만은 악하지 않다고 돼 있잖아요. 이걸 누가 지었다고요? 다윗이 지었다고 했지요. 사무엘하 11장 26절에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우리아의 처가 그 남편 우리아의 죽었음을 듣고 호곡하니라 그 장사를 마치매 다윗이 보내어 저를 궁으로 데려 오니 저가 그 처가 되어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의 소위가” 하는 행위가, 그 다음에 뭐라고 돼있어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악하다고 돼있어요.

누가 개입했어요? 여호와가 개입한 다윗은 악해야만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다윗은 인간들 세계, 악한 세계에서 이쪽 세계로 넘어올 수 없어야 돼요. 주님의 세계, 나를 위하지 않는 세계가 등장함으로써 이쪽 세계는 비로소 뭐냐? 연속적인 세상이 아니고 불연속적인 세상이라는 것이 노출되는 겁니다. 그게 들통 나버리는 거예요. 이 세상은 어디 포위된 거예요.

여러분 잘 알다시피 방주, 방주를 만들 때 방주의 의미에서 지옥은 뭐냐? 방주가 떠나고 난 뒤에 그 나머지 모든 것이 바로 지옥이 되는 거예요. 방주 만들라는 하나님 언약의 개입이 없었으면 이 세상은 지옥이 아니에요. 그렇고 그런 세상, 다들 그렇게 사는 세상, 다들 각자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뭐가 나쁜데? 각자 어느 신을 믿던 그건 니 자유고 나는 내 자유고 간섭하지 말고 각자 자기 길 가자.

그것이 상식화된 세계고 그 논리 외에는 다른 논리를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세상이 바로 방주 이전의 세계였어요. 그런데 여기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하니까 방주가 등장하니까 졸지에 정상적이라고 여겼던 이 세상, 그리고 천년만년 갈 것 같은 이 세상에 졸지에 지옥이 돼버린 거예요. 홍수에 전부 다 잠겨버린 겁니다.

그러면 방주의 안의 세계는 어떤 세계냐? 바로 나를 위하지 않는 세계고요, 나를 위하지 않는 세계를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나를 위하지 않는 세계는 바로 내가 할 게 없는 세계였어요. 왜냐하면 내가 뭔가 한다는 것은 반드시 나를 위해서가 동반해야 되기 때문에. 이 세계, 인간세계는 나를 위해서 애썼기 때문에 실적과 업적을 얼추 건졌던 세계가 인간세계에요.

나를 위해서 뭔가 꼼지락했더니만 내가 원했던 결과가 나왔던 세계가 나를 위한 세계에요. 그게 뭐냐? 나의 연속성이에요. 역시 나는 안 죽었어. 안 죽었다고. 역시 나는 가치 있어. 내가 왜 죽어? 그것을 각자 전부 다 주장하는 세계에요. 이 세계 외에는 없습니다. 너, 교회 나가? 나도 교회 나가. 너, 복음 알아? 나도 복음 알아. 안 죽었어, 나. 나도 복음 믿는다고, 안다고. 안 죽었다고.

이 세계가 뭐냐 하면 지옥세계에요. 저주받은 세계입니다. 그래서 여기는 할 게 많아요. 기도도 하고 전도도 하고 되게 할 게 많아요. 그러나 여기는 나를 위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내가 할 게 없어요. 없는데 우리는 본성이 나를 위해서 살던 본성이기 때문에 꾸역꾸역 뭘 해요. 이 땅에서. 이럴 때 마주침이 뭐냐 하면 바로 나는 단절되기 싫고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단절을 하고자 하시고 여기에 희생이 들어가는데 창세기 4장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아벨이란 인물이 들어가는 거예요.

아벨은 남들 보기에 뭘 한 것처럼 보이지요. 제사를 드렸잖아요. 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벨 한 그 행위가 무슨 행위냐 하면 행위를 했던 그 아벨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아벨은 자기를 위해서 한 행위가 아니고 나는 주님 나라에 단절돼야 마땅함을 보여주는 행위를 하나님께서 아벨을 통해서 밀어붙인 거예요.

아벨 배후에 계신 분이 아벨에게 일어난 현상과 동질의 똑같은 일을 하시는 분이 아벨을 앞장세워서 숨어있는 분으로써 나타나신 거예요. 역사 속에. 나는 죽으러 왔다는 거예요. 내가 죽지 아니하면 이 세상은 다른 세계에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알 수 없는 거예요.

y=x+1에서 단절이 일어나버립니다. 그럼 이렇게 밑에서 쳐오는 이 단절, x가 1되는 지점, 여기서 밑에는 올라와있고 위에서는 의도적으로 이렇게 오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계속 살려두신 이유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두시는 이유가 열심히 하면 건너올 수가 있다는 게 아니라 이 단절의 지점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용하신 거예요. 이 단절의 지점, 끊어진 지점을.

이게 기적입니다. 끊어진 지점을 어떻게 건너와서 기적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사는 내가 주의 나라에 끊어졌음을 아는 그 자체가 이미 나를 위해서가 소멸된 상태에요. 소멸되고 소멸된 채 멍청하게 돼버리면 또 나를 위하지 않는 나가 또 성립되니까 소멸된 것을 이 삼각형에다 집어넣어버려요. 그러면 내게 없던 새로운 인간이 등장합니다. 누구냐? 성도가 돼버려요. 내가 성도라는 낯선 존재가 되고 말아요.

성도의 여정은 주님이 했던 여정을 그대로 답습하게 돼있어요. 내려가는 겁니다. 성도의 여정, 성도의 갈 길은 뭐냐 하면 이 둘 사이를 주님의 희생에 참여해서 늘 벌어지게 하는 그 경계선상을 지나가는 그러한 세월, 이게 성도의 세월입니다. 어떻게 신나지 않습니까? 바짓가랑이를 벌어지게 하는 자크 역할. 자크 쭉 내리면 신나요. 하나로 여겼던 것이 쭉 갈라지죠.

하나의 바다가 갈라지잖아요. 그 가운데 우리가 지나간다? 이스라엘이 지나가는 거예요. 홍해가 갈라지는 이유는 단지 하나에요. 이스라엘을 통과하기 위해서. 이 세상 밑에 숨어 계신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앞장세워서 밀어붙여서 배후에서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표현케 하신 거예요.

자, 그렇다면 다윗의 시니까 다윗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가? 일단은 사무엘하 11장 27절 말씀처럼 다윗은 악합니다. 제가 악하다 한 게 아니고 성경에 나오니까요. 다윗은 악합니다. 악한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오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자기는 연속성을 주장했어요. 자기는 알고 있어요. 자기는 알고 있는데 우리야 장군에게 미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임신한 아이가 죽고 난 뒤에 그 모친 되는 밧세바에 대해서 남자로서 책임성 있는 행동을 보이고 싶어 해요.

누구처럼 암논처럼 다말을, 암논이라는 다윗이 낳은 첫 번째 아들이 배다른 자기 누이동생 다말을 그렇게 연모하고 사모했잖아요. 도대체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시름시름 아파요. 짝사랑도 그런 짝사랑이 없습니다. 짝사랑해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어떤 땐 화가 나요. “니가 뭔데 너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느냐. 뭐냐, 네 존재가? 니 존재 때문에 왜 내가 잠을 못 이뤄?” 그리워 미치는 거예요.

그렇게 다말을 그리워하면서 암논은 자기가 균열돼야 된다는 사실을 다말을 사랑하는 것조차, “나는 당신 없이는, 나는 당신 때문에 삽니다.” 백날 무슨 이야기해도 자기 자신을 그조차도 나를 위함이라는 것은 한시도 사라지지 않았어요. 어떤 여인을 사모하고 어떤 남자를 사랑해도 그 바탕에는 뭐냐? 그것조차도 나를 위함이에요.

암논을 다말을 좋아할 때는 저 여자만 주신다면 어떤 죄도 감수하겠습니다, 라는 임재범의 <고해>란 노래 가사처럼 말이죠. 그대만 주신다면 제가 어떤 죄도 감수하겠습니다. 그게 사나이 중에 사나이인양 이렇게 하는데, 그러나 성경에서는 암논을 통해서 다말을 하고 난 뒤에는 가차 없이 전에 사모했던 그 이상으로 다말을 바퀴벌레보다 더 심하게, “흉측하게 어디 달라붙어가지고. 저리 가. 넌 일생에 도움이 안 돼. 내가 미쳤지. 어떻게 너 같은 걸 보고 반했지?” 하고 떼어냄을 극복했지요.

암논과 다말, 이 두 사람 모두 다 누구 몸에서 나오느냐 하면 바로 다윗의 몸에서 나왔죠. 다윗은 외부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했지요. 그런데 그 사랑이란 단어가 자기가 보기엔 하나님 말씀대로 잘 된다고 생각했지만 무엇을 놓쳐버렸느냐 하면 내 몸이 어떤 몸인지는 본인도 몰라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용하실 때 철저하게 사용합니다. cubit이란 게 있거든요. 큐빗이 뭐냐 하면 치수 재는 거예요. 치수 잴 때 하나의 룰, 다시 말해서 ‘자’에요. 손가락부터 팔꿈치까지를 1큐빗이라 해요. 뭐 로마에서는 43cm, 또 52cm, 여러 가지 있는데 쉽게 말해서 그냥 평균해서 50cm 보면 돼요. 여기서 다시 손가락 네 개, 이걸 palm. 그 팜을 4분의 1로 해서 digit. 이런 식으로 치수를 재거든요.

인간이 세상을 측정하는 자 노릇을 한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인간은 세상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탐구하고 측정할 때 무엇을 동원하는 거예요? 자기의 신체를 동원하는 겁니다. 자기의 신체가 뭐냐 하면 이게 표준 자가 돼요. 근데 표준 자는 절대로 문제 있으면 되겠다, 안 되겠다? 될 수가 없지요. 이게 왔다 갔다 하면 안 되지요. 그래서 다윗은 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말고 내가 가장 신뢰하고 가장 믿음직한 것은 나 외에는 없는 거예요. 모든 인간에게.

주님의 마음 하지만 내 마음이 주님의 마음보다 더 정확하고 제일 신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인간의 타고난 아담의 죄성입니다. 모든 인간의 죄성이에요. 믿을 놈은 나밖에 없는 거예요. 지금 암논이 다말을 사랑할 때 저 여인만 주신다면 난 아무래도 괜찮다, 내 인생 어떻게 망가지고 깨져도 괜찮다 할 때는 다말을 차지하기 이전이에요.

참 여러분들의 이것 하나만 알면 오늘 강의는 끝이에요. 물론 약장수도 만날 그런 소리하지만. 방주의 특징은 이게 목적지가 없습니다. 목적지가 없고 내 원대로 방향을 조정할 수가 없어요. 다시 말해서 나를 부정시키는 공간이 방주라는 공간이에요. 여러분들이 예수 안에 산다, 또는 성령 안 산다는 더 이상 내 의도, 내 목적, 내 방향은 전부 다 거부됩니다. 내 뜻이 거부돼요. 내 뜻이 이 안에서.

주는 대로 처먹으라하는 데 차마 여기서 설교시간에 못하고 그냥 주는 대로 먹어, 사는 대로 살아. 십년을 살던 이십년을 살던 사는 대로 살아버려. 네가 주제넘게, 만약에 내가 목적과 방형을 정해버리면 나를 위함이 돼요. 그래서 방주는 그냥 목적이 어디로 가는지 공간은 있는데 이 공간이 시간이 얼마나 흘러야 되는지는 주도권이 이미 방주를 만드신 하나님께 일임돼있어요. 철저하게 너를 위함이 여기서 제거가 되는 겁니다.

암논이 다말을 자기가 목적을 갖고 있었어요. 잠자리를 같이 해서 동침을 하겠다. 그러면 뭐가 되느냐 하면 소유가 돼요. 나를 위함이 이게 실제가 되려면, 표현을 영어로 하면 reality가 되는데 실제가 되려면 끌어 모아야 될 소유물들이 옆에 있어줘야 돼요. 개뿔도 아무것도 없는 게 나는 나다 하면 누가 안 알아주거든요.

어릴 때 딱지 놀이했거든요. 딱지 놀이할 때 우선 문방구에서 돈 주고 사야 돼요. 딱지를 펼쳐서 “너는 뭐고? 대령이가? 나는 장군이다. 줘.” 뺏는 거예요. 남의 것을 뺏는 그것이 어릴 때부터 어린아이부터 인간의 본성에 맞습니다. 너라는 인간이 내 딱지 게임에 참여한 것은 내가 456억을 얻기 위해서 내 것을 내 주변에 나를 위한 것들로 차곡차곡 채워질 때 이게 벌써 나의 정당성, 나의 존재는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재료들의 풍부해지는 겁니다.

암논은 자기밖에 모르고 암논은 내게 없는 게 저 여자한테 있는 거예요. 그게 아름다움이에요. 그래서 여자를 다말을 차지하고 보니까 이게 기존에 자기가 끌어 모은 것과 이게 방해가 된다, 조화가 안 된다, 어울리지 않는다 할 때는 후딱 내보내야 기존의 것이라도 유지해서 나를 위해서 연속성을 지속시킬 수가 있는 겁니다.

어떤 분이 어제 식사하면서 그런 말했거든요. 남자가 뭡니까? 창세기 3장에 여자는 남자를 사모하게 돼있지만 절대로 남자는 여자를 사모하지 않습니다. 소유하고 다루고자 하지요. 마치 여자한테 다 준 것처럼 위장하면서. 남자는 여자를 사모하지 않습니다. 갖고 놀지요. 사모하지 않지요. 사모하는 것은 여자가 미쳐서 사모하는 거예요. 이건 저 보고 욕하지 마세요. 창세기 3장 보고 이야기하세요.

여자는 남자를 사모하고 남자는 여자를 다스린다는 말은 줬다, 뺏었다, 놨다, 쥐었다 조종 대상이에요. 목걸이 사주고 프라다니 좋아하는 것 해주고 좋아하면 할수록 자기로 함부로 대하고 함부로 부릴 수 있는 대상으로 이게 전환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이 굉장히 나쁘게 들리겠지만 가장 중심 되는 안에 뭐냐? 나를 위하여가 여기 포진돼있습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나를 위하여’를 버린 적이 없어요.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남자에게 사모하지만 사모하는 목적이 나를 위하여 여자 자신을 위해서지요. 늙은 남자 뭐 좋다고 사귀겠어요. 저게 계속 돈이 나오느냐, 빼먹을 게 나오느냐. 강의 전에 했잖아요. 잘 나가는 남자 옆에 여자는 망하고 있다고요.

자신에게 어떤 단절이 있어줘야 된다는 그러한 기회를 계속 놓치고 있는 겁니다. 남들 보기에 이 세상에서는 더 잘나고 있습니다. 목적지가 없고 방향을 전부다 delete삭제시켜놨어요. 그러면 인간은 우왕좌왕하는 거예요. 도대체 내가 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어떤 끌어 모으기, 소유하기, 실적 얻음 이것이 이게 절망적이 돼버리는 거예요. 낭패에요. 더 이상 옛날 나를 위해서 살던 게 차단되고 마는 거예요.

나단 선지가 왔을 때 다윗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합니다. “당신은 악합니다.” 악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선지자가 와서 악하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다윗이 그때 성신을 요새 성령을 받아서 내가 악한 것이 아니라 내가 평생 속해왔던 세상 자체가 악하고 나는 악한 데서 출생했다는 사실을 외부인물,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말을 하는 선지자가 왔을 때 비로소 이게 간파가 돼버린 거예요. 눈치 챈 거예요.

그동안 나를 위해서 살았다는 이 자체가 내가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 세상 자체가 나는 나를 위해서 살도록 그렇게 조작했구나, 그걸 강요했구나, 거기에 나는 휩싸였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그 나단 선지자 앞에서 다윗은 결코 죄인의 모습이 아니에요. 죄인의 모습이 아니고 만세를 부르는 모습이에요.

더 이상 나를 위해서라는 도대체 끊어지지 않는 연속성이 있는 나로부터 나를 끄집어내준 친구에게 감사합니다. “아이고, 이 밧세바야. 진짜 밧세바 고마워. 그때 목욕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어. 난 영원히 지옥 갈 뻔했어.” 그때 상황을 오늘 제목으로 삼겠습니다. 이게 성경에 나오는 거거든요.

열왕기상 22장 34절에 나오는 말씀, 그걸 오늘 제목으로 하겠습니다. “우연히” 이게 아합 왕이 지 살려고 갑옷을 바꿔 입었어요. 아람 나라와 전쟁할 때. 이게 뭐냐? 나를 위해서, 에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행동부터 아담의 후손들은 무조건 나를 위해서부터 시작하면 해석이 다 돼요. 보통 사람은 그걸 생각 안 하는데 성도는 그것으로 보는 거예요. 나를 위해서 보다가 어떻게 나를 위하지 않는 것으로 바뀌었느냐? 그 절차가 성도만이 코스를 밟거든요.

나를 위해서 갑옷을 바꿨어요. 어떤 이등병한테 한 거예요. 그걸 가케무샤, 그림자 무사라 해요. 갑옷의 주인공도 아닌데 왕을 살리기 위해서 장군이 그 옷을 입고 죽은 사람이 우리 동네에 있어요. 신숭겸이라고. 왕건이 살리기 위해서 갑옷 입었다가 진짜 죽어 버렸어요. 신숭겸이 충신이라 해서 지묘동 근처에다 뭐 세우고 했는데.

그때 아람 나라가 와보니까 아합 왕인 줄 알고 보니까 왕이 아닌 거예요. “어, 아니네?” 그걸 보고 아합 왕은 그때 갑옷 안 바꿨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다행스럽다고 했는데 그때 나온 단어가 뭐냐 하면 우연이가 불렀던 우연히,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저거 죽이라가 아니라 그냥 활을 쐈어요.

이 세상은 불연속 속에 있는 주님의 우연적인 사태로 만들어진 세계가 이 세상입니다. 밥 먹는 것, 내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우연의, 우연의 연속, 단절과 단절의 연속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불연속적으로 계속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우연히 당신을 만났고 우연히 당신과 헤어졌고. 모든 게 우연이에요.

우리는 그런데 뭐라고 해석하느냐 하면 자기를 위해서 살던 그 본성 때문에 모든 것을 우연을 가지고 억지로 원인과 결과로 연결시키는 거예요. 당신을 만난 것은 당신이 예뻐서 그렇다니. 그 동네 예쁜이는 그밖에 없는가, 다른 데 많이 있는데. 전부 다 우연이에요. 우리는 우연한 존재에요.

그걸 야고보서 4장에서 안개 같은. 안개의 특징은 있다가 없어지는 것, 있음에다 마음 두고 살지 말라는 뜻이에요. 있음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고 살아라. 없음이 있음을 공격한다고 생각하고 심판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야 돼요. 그러니까 내가 있음을 지키려고 하지 말고 없음에다 내 몸을 맡겨버려야 돼요. 안개 같은 존재니까.

이걸 다른 성경에서는 ‘마침’이라고 돼있어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사무엘상 17장 20절에 소년 다윗이 형에게 도시락 주러 갔다가 마침 그때에 골리앗이 고래고래 고함지르는 걸 봤어요. 우연히, 마침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10분 쉬는 것도 주의 개입이에요.

 

20211011b 부산강의 : [시편]42(26:2)-악의 온전함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다말은 필히 버림받아야 돼요. 개인적으로 굉장히 서글프지요. 이게 우연히 또는 마침 그때에 이걸 보편화시켜버리면 인간세계가 돼버려요. 다말이 암논이라는 배다른 오빠를 좋아한 적이 없어요. 폭력이거든요. 강간이란 말이죠. 없는데 다말은 나름대로의 자기 연속성이 있어요. 내가 좋아하는 남자 만나서 행복한 가정하겠다는 자기 연속성, 그게 나를 위한 인간으로서 그러한 포부나 기대나 희망 있는데 그 희망은 어디서 가져오는가?

바로 본인이 살고 있는 인간세계에서 나 저런 남자와 살아보고 싶어. 나는 저렇게 인생을 여성으로서 저런 가정생활이 소원이겠어. 나름대로 뭔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난데없이 자기가 좋아하지도 않는 암논이 침입한 거죠. 이 침입을 다말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겠어요? 다말은 착하고 암논은 악하다고 하면 안 돼요.

지금 다윗이 하나님의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깨달은 것은 뭐냐? 바로 큰 나를 위해서 살아가면서 생겼던 판단- 선과 악, 정의와 불의, 공정과 불공정 이 모든 것이 다 깨져버린 거예요. 나는 그 속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밧세바 남편 우리아 보세요. 우리아가 죽는 이유는 뭐냐? 여호와께 충성해서 그래요.

언약궤가 암몬과의 전쟁에서 전쟁터가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는 거예요. 그걸 생각하게 되면 사적인 그야말로 나를 위해서 사적으로 아내와 휴가 즐기고, 그런 여유가 없어요. 하나님의 지시가 우선이고 내가 얼마나 행복하냐는 그건 나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기에 너무나도 우리아가 충실했습니다. 인간세계에서 보면 바보등신 같아요. 바보등신 같이 미쳐도 여호와께 그렇게 미쳤냐.

주님께서는 우리아 장군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 인간세계에선 착해 보이지요. 착한 우리아를 기어이 죽이십니다. 심지어 화살이 날아올 때 이 세상 만물을 주관하시 모든 에너지를 주관하시는 주께서 우리아 장군에게 화살이 날아와도 우리아 장군 곁에 떨어지게 하고 우리아 장군한테는 안 맞도록 해야 되는데 정통으로 마치 하나님께서 죽어라 인간아, 이게 네 역할이야 하는 것처럼 그냥 우리아 장군 전사하도록 기획하시고 철저하게 프로그램화시킨 거예요.

하나님께 충성한 자의 모습으로 다윗 왕의 농락에 의해서 다윗과 상사 요압의 정치적인 꼼수에 의해서 기어이 죽어버리도록 우리아 장군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 이게 우리아 장군의 개인적인 신상의 연속성에 있어서 유리하냐, 불리하냐를 우린 막 따지고 싶은 거예요. 불쌍하다 우리아, 안 됐다 우리아 뭐 이렇게 우리가 기념회를 세우자 하는데 막상 가해자 다윗은 신이 났어요. 그쪽 세계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서.

이 뻔뻔함, 이건 하늘을 찌르는 뻔뻔함이에요. 간음죄에다 살인죄까지 지어놓고 자기는 제대로 된 이스라엘 왕이라고 우기는 이 뻔뻔함, 어떻게 감당해야 돼요? 어떻게 인간세계에서 해석해야 됩니까? 그게 단절성 때문에, 끊어짐.

인간의 해석은 전부 다 나에 유리함,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어쨌든 간에 나를 위한 그러한 방향성과 목적성을 가지고 모든 사물을 내가 보고 싶은 대로 해석한 거예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성경에 숨어있는 주인공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아니고 성경을 들여다보고 관찰하고 있는 내가 유리한 쪽으로 성경을 그런 식으로 해석해버린 겁니다.

그림 다시 그려보겠습니다. 인간세계가 1이고 숨어있는 세계가 2라면 1도 아니고 2도 아니고 제3의 영역이 제3의 공간이 만들어져요. 그래서 1의 세계에서는 종교가 어떠냐 하면 나 죽어서 천국 갈래. 천국 갈래, 지옥은 안 갈래 하잖아요. 그러나 막상 이쪽 세계에서 주님의 세계로 오게 되면 천국도 중요치 않고 지옥도 중요하지 않고 주님의 희생의 나라가 중요한 거예요. 주님의 희생하심을 위해서 나는 이 땅에 우연히 태어났다. 몇 년, 몇 월, 몇 시에 우연히 태어난 거예요.

여러분 주민등록 다 갖고 있지요. 저는 유월되면 제 생일 알까 싶어 너무 걱정하고 있어요. 혹시 또 내 생일 알아채서 남방 하나 줄까 싶어서. 그런데 페이스 북에 보면 다 나와 있는데. 생일 축하합니다. 아무개 씨. 이렇게 할 때 어떤 사람은 천구백 몇 년 칠월에 태어나겠지요. 이 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이 땅에 차이가 없는 이유는 어차피 목적은 뭐냐? 있음에서 없음으로 소실되기 때문에 둘 사이에 태어난 그런 경쟁이라는 것은 아무 의미 없어요.

지금 육십 대 주부들은 아주 억울해합니다. 자기는 낀 세대에 속했다고.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시어머니가 며느리 생일상 차려주는데 한 상을 차려줘서 각종 온갖 해물로 차린 사진을 찍었어요. 나 며느리에게 이렇게 충성을 다한다. 며느리는 얻어먹기만 하는 거예요. 이 세대가 육십 대 세대에요.

이건 누가 누구한테 생일상 차렸는지 분간이 안 돼요. 며느리님 삐치면 안 돼요. 가정이 안 돼요. 다 며느님 위주로. 굉장히 억울하거든요. 하지만 그 시대가 어떤 시댄지 모든 시대는 바로 없음으로 소실돼야 될 그냥 우연히 태어난 거예요. 서로가 우연히 태어난 거예요. 거기에는 진실이란 건 없습니다. 희생된 분의 희생의 여정은 희생의 씨앗으로부터 그 여정을 밟아나가는 거죠. 이 인생이 뭐냐 하면 바로 다윗의 인생이에요.

두 번째 시간에서 여러분들은 이것만 알면 돼요. 다윗은 반드시 악한 체험을 해야 된다는 것 그래야 이 코스를 밟을 수 있어요. 다윗뿐만 아니고 저와 여러분, 에브리바디 성도라면 죽을 때까지 무슨 체험을 해야 되느냐 하면 악한 체험을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악한 체험을 해야 돼요. 어떤 선한 것도 내게는 나올 수 없음을 절감, 절감하면서 매일같이 살아가야 돼요. 그리고 그걸 이런 악한 체험을 하게 해주신 주님에게 고맙고 감사의 마음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강의는 뭐냐? 어떻게 동행과 감사가 병행될 수 있는가? 여기에 관한 이야기에요. 시편 26편이. 어떻게 동행함과 감사가 이어져 나올 수 있나? 그냥 동행해버리면 감사가 나오는 게 아니고 나의 철저함과 나의 온전함과 나의 완전함이 튀어나와버려요. 이건 백 프로 사탄의 시험입니다. 시편 26편에 봐라.

시편 26편에 뭐라 돼있어요? 이것 눈 있는 사람은 다 압니다. 글 아는 사람들.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이걸 보는 사람은 자기의 목표가 되고 말았어요. 방주 안에는 목표가 없고 목적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없는데 시편 26편에,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이 대목 딱 나오는 순간부터, “아하 우리 딸애가 이번에 성적이 내려간 이유가 내가 그동안 세상에 너무 나쁜 짓을 많이 했구나.”

그렇다면 애 성적을 높이는 방법은 내가 세상에 나가거나 교회에 나가서 희생봉사하고 충성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구나, 라고 생각한 거예요. 출발점이 뭐냐 하면 우연이 아니고 필연을 노리고 오는 겁니다. 나한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성경은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지 감안을 하는 거예요. 완전히 이건 유대교가 바리새인들이 했던 그 행세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겁니다. 제3의 영역은 없어요.

무엇이 온전하냐? 이 말 처음 들어보면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모를 거예요. 내가 악함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이 조건의 완전함에 내가 행하였사오니. 너무 간 것 아닙니까, 혹시? 너무 심하게 이야기한 것 아닙니까? 그러면 사람을 열댓 명 죽여야 되고 곤란해요. 내 악함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그 조건과 요건의 온전함 속에서 나는 행하였사오니.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그래야 동행이 뭐로 이어집니까? 감사로 이어져요. 고마움으로 감사로 이어져요. 감사라 하는 것은 누구 대상이 있는 거예요. 지한테 감사하는 것은 말도 안 되지요. 감사하는 것은 저를 나에게서 빼내주신 분에 대한 감사, 그분의 안목과 그분의 시선으로서 나를 보게 하신 것에 감사에요.

언젠가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성령 받았다는 것은 주님의 콘택트렌즈, 주님의 눈동자와 딱 붙어있는 렌즈를 끼고 세상을 다시 보자. 그럼 뭐가 보이느냐? 세상 안에 희생, 십자가가 보이지요. 희생하신 분의 여정이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 볼 수 있다는 것은 1이 아니고 2가 아니고 제3의 희생하신 분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다윗은 자기가 죄 속에서 태어나서 죄 속에서 살고 있다는 이 온전함 체험, 요건을 충족시켜주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충족케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사무엘하 마지막 24장에 보게 되면 다윗이 밧세바와의 관계, 그리고 완전히 엉망진창이 된 다윗의 가문, 그 끝부분에 인구 조사하는 대목이 나올 거예요. 그 인구조사를 할 때 역대상에 보면 인구조사를 누가 시켜서 하느냐 하면 이게 악마가 시켜서 해요. 사탄이 다윗으로 하여금 격동케 해서, 또는 사탄이 이스라엘을 격동케 해서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조사를 시키는 겁니다.

인구조사를 시킬 때 다윗은 인구조사에서 빠져나올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몸이 자기 몸이 아니고 주께서 다루는 재료가 되기 때문에 나도 뭔가 하고 싶은 것은 멈출 수가 없어요. 스톱! 스탑을 시키는 것은 인간은 연속성을 계속 나가기 때문에 한 번 연속성은 가속도, 뉴턴의 관성의 법칙이 있거든요. 한 번 치면 멈출 때까지 계속 간다는 거예요. 인간이 연속성이거든요. 계속 가기 때문에 스탑은 내 소관이 아닙니다. 중간에 누가 스탑을 해줘야 돼요.

내가 연속적으로 살다가 멈췄다하는 그런 나를 좋아하고 그걸 반길 것이 아니고 스탑을 할 때 스탑하는 그 기제, 메커니즘, 방식이 뭐냐 하면 제가 주일 낮 설교에 했잖아요. 이게 바로 제사 직이에요. 누가 희생을 해서 제사를 하게 되는 거예요. 제사가 내 인생을, 막 가는 인생을 막아준 겁니다. 제사는 뭐가 필요하냐? 희생물이 필요해요.

희생물 되시는 그분이 전에 내가 차지했던 내 자리를 차고 들어오신 거예요. 이게 주인공 바꿔치기가 일어난 겁니다. 희생하신 십자가 지신 주님이 이제는 전에 내가 있던 주인공 자리를 차고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 성도가 없는 거예요. 성도는 새로운 세계에서 원이 겹쳐지는 거예요.

예수님이 주인공이고 그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받은 우리가 이쪽 세상, 인간 세상에 하나에 이쪽 세상 사람인 것처럼, 마치 그것인 것처럼, 마치 이 세상 사람인 것처럼 충실하게 사셔야 돼요. 도 닦지 말고, 할렐루야 기도원에 가지 마시고. 지독하게 이 세상 속에 사는 것처럼 살면서 이게 악하고 자기를 위해서 사는 내 모습을 도대체 인생을 몇 년 살아야 다 닳아서 없어지는가, 그런 것을 우리가 기대 못해요. 왜? 육신이 있는 한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것은 나를 위해서예요.

이 몸이 주께서 사용하는 효용을 아끼지 마시고 돌아가실 때까지 마음껏 악의 온전함 코스에 거기에 온전하게 충실해주기 바랍니다. 내가 부탁할 사항이 아니고 다들 그렇게 살고 있어요.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밖에 모른다고요. 남의 나라 코로나 되던 우리나라만 잘 되면 그만이고. 전부 다 나 중심이에요. 서울이야 몇 백 명 되든 말든 부산만 안 오면 되고. 전부 다 내 중심이라, 내 중심.

남의 집 내려가도 우리 아파트 값 올라가면 그만이고요. 남의 자식 어떻게 되든지 간에 내 자식 안 아프고 공부 잘하면 되고. 전부 다 내 중심이에요. 여기에 충실해주세요, 라고 부탁하는 내 입이 나빠. 할 수 있는 게 우리가 하는 재주가 나를 위해서 사는 재주밖에 없는데 뭐 다른 재주가 있겠어요. 그 재주를 주께서 이용하신다니까요. 네 재주를 마음껏 펴내놔 봐라.

그렇게 해서 중간에 삼각형 코스를 밟아가면서 이쪽 세계와 천국과 지옥이 어떻게 양분되어 가는가를 이걸 보면서 너는 나에게 뭐하라? 감사하라. 이 양분된 제3의 지점을 오늘 본문에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제단이라고 합니다. 어디 나오느냐 하면,  6절에,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이걸 다른 번역엔 ‘제단’이라고 돼있어요.

주의 단을 어슬렁거리는 거예요, 지금. 주의 단을 거닐 수 있는 거예요.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악은 악대로 저지르면서 다윗은 말하기를 나는 무슨 죄다? 무죄하다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자기를 위한 겁니까? 철저하게 나를 위하지 않는 규정이라는 것, 하나님의 해석이란 사실을 마음껏 지금 다윗을 통해서 발현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온전함이에요. 제단에 거닐 수 있는 인간이 등장한다?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인간세계엔 존재하지 않는다고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세계는 온전하고 완전한 인간은 없어요. 없는데 다윗은 말하기를 여기 있잖아, 하고 자기를 내세우는 거예요. 여기 누구냐 하면, 악에 찌든 내가 있잖아.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첫째 시간에 방주 이야기했지요. 지금부터 좀 어려운데요. 방주가 그 의미가 확장이 됩니다. 방주 의미가 확장이 될 때 방주가 방주다운 것은 거기에 정결한 짐승이 있었기 때문이고 정결한 짐승을 위에서 누가 쳐다보느냐 하면 무지개가 바로 직결해서 쳐다보고 있습니다. 정결한 이 말은, 무지개가 쳐다보고 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해서 여기 정결한 피 있잖아요. 피가 하늘에 표현되면 무지개가 되는 거예요.

무지개가 피를 바라보고 있다는 말은, 피가 이 지상에 인간세계에 없는 새로운 의미를 발휘하고 있다는 것은 무지개고 무지개를 보여주는 겁니다. 무지개는 막이에요. 이 세상을 둘러친 궁창 같은 막이에요. 창조 때 없던 언약이 개입되면서 새로 생긴 새로운 제2의 창조라 할 수 있어요. 그 창조를 하나님이 물로써 심판하는 것을 막아주는 겁니다.

막아줄 때 근거가 뭐냐? 지상에 정결한 피가 흘렸기 때문에 너희들은 지금 계절이 주어졌고 너희들은 저주가 막혀져있다는, 저주가 유보돼있다는 겁니다. 이걸 노아언약이라 하는데 노아언약의 특징은 악인이나 선인이나 거기에 대해서 일체 묻지 않고 뭘 준다?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김정은도 살 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악인, 선인, 이슬람이고 유대교 관계없이 전부 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이 법칙은 인간세계에 나오는 법칙이 아니고 인간세계는 나쁜 짓하면 벌 받아야 돼요. 그러나 언약의 법칙, 무지개 법칙은 선인이고 악인을 묻지를 않는 거예요. 선과 악, 선악체제 자체를 묻지를 않는 겁니다. 제가 설교 시간에 그런 이야기했지만 신세는 주님한테 신세를 져요. 햇빛과 공기, 목숨 전부 다 신세를 지면서 차가 굴렀는데 차사고 난 지점에 마침 5분 후에 지나가서 아무 일 없다는 이런 식으로 해놓고, 주님은 발걸음을 세신다 했어요.

신세는 주님한테 져놓고 늘 인상 그리면서 있는 인상이 가관이라.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도대체 인간이 하는 갈망은 끝이 없어라. 계속 주면 그것 말고 이것, 저것 말고 이것. 그건 있는 거고 더 주셔야 되죠. 인간의 욕망을 한도 끝도 없이 늘 인상 찌푸리고 있어요. 왜 나는 저 사람에 있는 게 나한테는 없는가, 이런 식으로. 신세는 지고 있으면서.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은 이렇게 돼요. 교회 다니면서 무슨 생각으로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뭐가 불만인데요? 공기 줬다고 불만입니까, 햇빛 줘서 불만이에요? 어젯밤 자고 오늘 아침에 이 땅에 태어나게 해줘서 그게 그렇게 그게 불만이에요? 예수님 죽이고 싶어요? “어제 죽어서 천당 가고 싶었는데 오늘 왜 살립니까?” 그게 그렇게 불만이에요?

방주 안에, 노아언약이거든요. 노아 그 다음에 언약이거든요. 노아언약이니까 노아 지워버리고 언약의 원칙이 온전해요. 완전하고 온전하잖아요. 여기서 노아 다음에 아브라함을 붙이든 이삭을 붙이든 야곱을 붙이든 오늘 시편 26편에서 누굴 붙입니까? 다윗을 붙이든 언약의 원칙은 이거는 이미 확고하고 완전합니다.

언약의 원칙은 뭐냐? 악함으로써 내가 은혜를 준다. 중요한 것은 뭐냐? 요건, 조건은 너 아니고 흠 없는 제물의 피 흘림에 근거해서 이렇게 은혜를 준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에서 이삭과 야곱 이 사람들과 보통 사람이 다른 점이 뭐냐?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삭을 통해서, 다윗을 통해서 둘로 프리즘으로 갈라져요. 천국과 지옥으로.

그러면 언약을 모르는 다른 사람은 뭐냐? 그냥 인간세계 그게 전부에요. 과학의 세계 그게 전부입니다. 인간 뭐 그렇고 그렇지. 끝났어요. 인간은 어떻게 죽는지 그건 알 필요 없고 살아 있을 때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느냐, 얼마나 출세하느냐가 중요하지 죽고 난 뒤에는 종교문제지 그거는 시급한 다급한 오늘 내 문제는 아니다. 오늘 손님 만나서 한 건수 올리는 게 중요하지 지옥이 뭐 중요하겠어요.

사람이 만약에 휴대폰을 가지고 예배 참석하잖아요. 코로나 부산에 몇 명 왔습니다. 그것 듣고 예배시간에 뛰어나가고 그런 일은 없어요. “아이고, 지겹다, 지겨워, 정말.” 하지요. 그런데 “누구 부모 되십니까? 애가 교통사고 났는데……” 이러면 지금 예배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휴대폰 열고 그 내용을 진의를 파악하고 후딱 성경책 들고(성경책 놔두고 다니는 사람도 많지만) 다시 보따리 싸고 그날 예배는 끝났어요.

애가 아프다든지, “주차하신 차번호 주인 맞습니까? 제가 박았습니다.” 이런 거나 후딱 나가버려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이 십자가를 알고 복음을 알아도 이건 내가 안다는 주님의 우연이 용납이 안 돼요. 안다가 돼버리면 온전한 게 아니에요. 이게 우연으로 완전히 산산조각 내버려야 돼요.

구원받는 내가 매일같이 산산조각 나버려야 돼요. 나는 굳게 믿습니다. 확실하게 믿습니다. 하는 것은 하나님 믿는 게 아니고 하나님 믿는 나를 믿는 거예요. 그 나는 완전히 파쇄 돼야 돼요. 종이 파쇄기 알지요. 날마다 이게 깨어져야 돼요. 깨어져야 다시 나 위함이 아니고 주님 위함으로 바뀌어 지는 겁니다. 그런 사건들 주께서 프로그램화해서 다 준비해놨어요.

이 말은 뭐냐? 예배 참석하는 것이, 내가 결정해서 오늘 난 어떤 예배 참석한다는 결심해서 예배 참석하는 것이 아니고 예배를 참석을 못할 만큼 다른 사태가 주께서 안 일으켰기 때문에 지금 그 시간을 예배당에서 보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배 참석하는 게 우연이에요. 나의 결심의 결과가 아니고. 할 일이 없어 예배해요. 그렇게 시급한 일이 없기 때문에 예배 참석하고 있는 겁니다. 결정의 순위가 내가 결정할 수 없어요, 인간은.

회사 상사가 직원들 회식하면서 아주 짠돌이 상사가 이야기합니다. 오늘 점심 내가 낸다. 짬뽕, 짜장면 둘 중에 하나만 해라. 그런데 그보다 더 높은 사장님 오셔서 탕수육 추가 됩니다, 할 때 전부 다 탕수육으로 다 가버리는 거예요. 제3의 요소를 제공한다는 것은 뭐가 넓어지느냐 하면 가치의 범주,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해야 되겠다. 가치의 범주를 주께서 넓혀주는 겁니다.

초등학교, 갖고 놀지 않았지. 유치원 애들, 유치원도 3학년 되면 어르신네라는 표현을 해요. 곧 졸업반이에요. 유치원 신입이 구슬치기한다든지 딱지 놀이할 때 그들의 재산은 뭐냐? 그들의 재산은 딱지고 구슬이에요. 제가 몇 번 이야기해서 지겹지요. 다이소 가면 천 원 주고 사는 것, 오백 그램에. 그들의 범주의 가치는 이거에요. 구슬이고 딱지에요.

이런 여자, 이런 남자아이들이 나이 오십이 넘으면 뭐가 가치냐 하면 부동산, 아파트, 땅이 이게 가치가 범주가 확대돼버립니다. 철없는 이십대, 삼십대는 뭐냐? 차에요. 빨리 돈 벌어서 차 바꾸려고 이것 하다가 가치가 점점 더 늘어나는 거예요. 역시 나이 칠십 되면 부동산만한 것 없다. 부동산이 최고다. 집, 이십 년 되면 날아가서 소용없어요. 역시 뭐냐? 토지, 땅이 최고다. 돈 벌어 무조건 땅 사놔야 돼. 맹지든 길이 있든 없든 간에. 맹지는 누구한테 갖다 주게 되면 개발해서 화천대윤가 뭔가 수천 억 되기 때문에 하여튼 그런 건 나중 문제고 무조건 부동산.

인간은 가치의 범주가 전체를, 전에 그런 강의했는데 다시 해보면, 전체 가치가 뭐냐 하면 이십대, 삼십대 점점 세상을 알면서 그들은 가치의 범주를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돈이 인생에 전부라는 것을 그거는 이론이 아니고 몸소 실감하게 돼요. 교인들의 헌금할 때도 처음에는 순진무구해서(순진하지도 않지만) 헌금하는 줄 알지만 나중에 한 5년만 되도 헌금은 어떤 경우냐 하면 내가 헌금했을 때 그 헌금의 액수 이상으로 주께서 되돌려줄 경우에만 헌금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안 그러면 헌금은 그냥 낭비하는 거니까요. 나한테 손해 보는 거잖아요. 표정들이 왜 그래요.

그걸 헌금 통박이라 하는데 이걸 했을 때 나한테 손해 보지 않을 다시 채워준다는 보장이 있을 경우에만 투자하듯이, 30배, 60배, 백배 투자하듯이 그냥 해보고 안 하면 이게 낭비가 돼버리는 거예요. 빙신바보 같이 나만 손해인 거예요. 왜? 인간은 만남에서 자기를 규정하거든요. 교인들 아무도 헌금 안 하는데 내가 미쳤다고 헌금해. 교인은 만남이잖아요. “얼마 벌었어요?” “없던데.” “그럼 나도 안 해.”

돈인데 나중에 더 영특해지면 돈이 인간을 잡아먹는 게 아니고 자본이 결정한다는 거예요. 돈과 자본을 구분하게 됩니다. 자본에는 이게 희망이 있지만 돈은 쓰고 버리는 거예요. 돈은 교환용이지만 희망은 자본은 저축용이에요. 저장용이에요. 그러면 나는 죽더라도 내가 모은 자본 안에는 나는 영원히 살아 있는 겁니다.

자식들한테 제사 지내자하지 말고 자식들에게 남겨줄 때 자식들은 내가 남긴 유산 속에서 아버지는 훌륭하셨어, 아버지는 멋진 아버지였다. 그래서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그냥 만나는 게 아니고 옆에 보따리들이 다 있어요. 형님, 할 때 그냥 형님이 옆에 돈 줄 형님, 아버지는 돈 있는 아버지가 아버지에요. 자식도 돈 있는 자식만이 자식이 되고, 목사도 내 돈 벌어주는 목사가 목사고요, 교인들도 돈 없는 교인은 교인이 아니에요. 돈 있는 돈 낼 수 있는 교인이 교인입니다.

이게 가치가 뭐냐? 돈의 가치, 자본의 가치인데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이걸 하나님과 견주어버리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너희들이 태생이 돈을 결국은 하나님, 예수님 백날 불러 봐도 나를 위해서 내가 원하는 것은 돈 벌어서 달라고, 돈 벌기 힘드니까 힘든 나를, 내가 목적이 있다 했어요. 방주 안에는 목적이 없는데 목적이 있지요. 목적은 뭐냐? 나를 살리는 방식에 협조해주시면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 식으로 나가는 겁니다.

그걸 왜 다윗 때 이야기하느냐? 다윗이란 이 사람 옆에 모든 신하들, 자식들 많지요. 이들이 다윗과 단절돼있어요. 이들은 뭘 원하느냐? 다윗이 가진 걸 원해요. 이게 권력입니다. 권세입니다. 다윗은 이미 알아버렸어요. 바로 권세와 권력, 금력, 재력 이 모든 것이 바로 이게 연속성을 추구하는 죄의 세계란 것을 다윗은 알았어요.

다윗은 알았는데 다윗 주변에 있는 신하들, 요압이라든지 신하들은 그걸 모르고 있어요. 전에 다윗은 어디 있었는가? 밧세바 만나기 전에는, 밧세바가 정말 잔 다르크에요. 밧세바 만나기전에 다윗은 자기가 이쪽 세계, 다시 말해서 현재 신하들이 추구하는 권력세계에 있었던 겁니다. 자기가 거기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왕이라고 여겼던 거예요, 왕. 자기가 왕이라고 여겼던 이 왕, 한자 王 알지요. 누가 손바닥에 쓴 왕.

왕이라고 여겼던 이것이 죄 짓고 난 뒤에는 뭐냐? 제대로 여호와가 왕이라는 조건을 아울러서 내가 전에 세상에 있거나 지금 주님한테 있거나 모든 것을 왕이 왕답게 드러나기 위해서 프로그램화 확정된 상황이라는 것을 느긋한 마음으로 그걸 알아버린 거예요. 까불어라. 내가 옛날에 좋아했던 것 마음대로 해.

나는 뭐냐? 다윗언약 속에 다윗이 되는 겁니다. 다윗언약 속의 주인공은 희생자고 이것은 바로 다윗 본인을 살리기 위해서 누가 죽입니까? 우리아 장군을 죽이죠. 우리아 장군과 그의 아들, 우리아 장군의 아내의 아들이니까 우리아 장군의 아들이죠. 여자의 아들은 남편의 아들이 돼요. 그러면 비록 관계는 다윗과 관계했지만 아내가 밧세바가 우리아의 아내기 때문에 우리아의 억울한 죽음에 의한 아들이 억울하게 다윗 앞에서 죽습니다.

이 점을 좀 더 규명해봅시다. 아직 어린아이가 있는데 어린아이가 죽었습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데 ⓑ다윗의 아들이 죽었어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이걸 연결시킬 때는 반드시 다윗 자신을 주께서 끌고 가는 거예요. 바로 죄인의 괴수, 죄인의 자리로 끌고 가야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같은 연계돼있음을 자기가 파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날마다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게 해요. 문제는 십자가가 이게 이천 년 전 사건이 되어 지금 안 보인다는 거예요. 목걸이는 맨날 차 다닐 때마다 목걸이 십자가 있는데 십자가 사건의 의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떤 설교에서 이걸 이렇게 했습니다. 형태와 또는 형식과 내용이 이게 달라요. 다른데 이게 그냥 다르다고 하면 안 되고 별개의 것, 합하지 못하고 두 쪽으로 나눠진 거예요.

그래서 천주교는 형식을 강조하잖아요. 지금은 감리교도 마찬가지고. 감리교도 무당 다 됐어요, 목사들이. 복장도 이상하게 로만칼라 비슷하게 입고. 왜 그런 짓을 하냐 하면 교단에서 연금을 줘요. 역시 뭡니까? 인간은 돈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럼 연금 안 받는다고 착한 사람이냐? 그냥 주는 것과 내가 끌어 모은 것과 그거나 그것이나 똑같지요. 누가 주는 것과 내가 돈에 미쳐서 사는 것과 그게 그거지 뭐. 역시 돈 때문에 사는 건 똑같은 거지요.

형식과 내용에서 별개의 것인데 천주교가 성만찬하면서 이 떡은, 그리고 이 잔은 예수님의 살이요 그것은 예수님의 피라고 형식을 함으로써 거기서 자동적으로 내용을 끄집어내는 것을 종교의 제도로 만들었습니다. 이게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이걸 화체설이라 하는데 어떤 예수님의 몸이 化, 변한다. 體가 예수님의 몸이 변해서 실제로 임재한다, 화체설이라 하는 거예요. 루터교도 마찬가지고 개혁주의도 마찬가지고 전부 다 마찬가지에요.

이게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떡이 살이 되고, 포도주 잔이 피가 된다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이걸 따지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걸 믿으라, 하는 거예요. 믿으라하거든요. 인간의 믿음은 다 믿을만해서 믿기 때문에 믿음이 아니고 이건 지식이에요.

떡과 살, 잔과 피, 네 가지 모두 다 이게 사물입니다. 사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두 번째 시간 어려우니까 참아내셔야 돼요. 인간은 자기를 대상화할 때 대상화란 말을 쉽게 하겠습니다. 세상에서 나는 저런 사람이 부러운데 나는 저런 사람이 되고 싶어, 라고 꿈꾸는 것 그럴 때 되게 되면 나라는 것은 이건 보이지 않고요.

나는 뭐가 상상 되느냐 하면 괜찮아 보이는 내가 저게 나라고 되고 대상화될 때 이게 사물화 되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내가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 라고 할 때 이미 그는 내가 하나의 대상을 삼을 때 이건 반드시 사물이 되고 나는 그 자체를 하나의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이걸 일치시키는 겁니다.

가만히 표정 보니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것 같은데, 인간이 주변을 다 살피잖아요. 살필 때 아담이 창세기 2장에서 이름을 짓지요. 그 이름 속에는 뭐가 되느냐 하면 내가 이름 지었다가 포함이 돼있어요. 따라서 비록 멍멍이, 송아지, 뻐꾸기 이름이 있더라도 그 송아지가 음매 지가 지은 게 아니에요. 뻐꾸기가 지가 뻐꾸기라고 지은 게 아니에요. 종속되는 겁니다.

이름 지은 분이 너는 내게 속한 사물이 되기 위해서 이름을 짓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뒤에 내 이름이 없어진 이유가 거기 있어요. 주의 이름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굳이 내 이름을 가질 이유가 없다니까요. 그래서 기도할 때 무슨 이름으로 기도합니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종속되었다는 걸 기도를 통해서 확인하는 거예요.

뭐 유튜브 보고 복음 알고 난 뒤에 맨날 질문이 기도 안 해도 됩니까, 해도 됩니까, 이런 질문인데 기도라는 것은 혼자 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저를 사용해 달라는 거예요, 계속해서. 그러면 기도 안 하면 사용 안 하나? 기도를 하나 안 하나 간에 이것이 기도는 감사로 나오기 때문에 이게 원인을 제공하는 게 아니고 결과에 대해서 그걸 확인 차 기도하는 거예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이게 뭐냐 하면 그 안의 기도내용이 위에 있는 예수님이 하강해서 돌아가는 절차를 이야기하거든요.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할 때 그 아버지는 예수님만 부를 수 있는 아버지지 우리 아버지는 아니에요.

그러나 그걸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시면서 그게 나의 아버지가 뭐로 바뀌느냐? 우리 아버지로 바뀐다고요. 그들에게만 예수님이 내려오셔서 하신 공로, 일대기가 계속해서 유효하게 효과를 내는 관계가 성도의 관계에요. 주기도문하면서 내 소원을 들어주는 게 아니고 주기도문을 하면서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것이 나한테 어떠한 결과를 남기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게 주기도문이에요.

이걸 했는데 이게 함축해서 이야기해버리면 어려운데 시간 가더라도 이건 봅시다. 에베소서 3장 봅시다. 항상 나를 위해서가 집어넣어버리면 성경해석이 엉터리에요. 에베소서 3장 14절, 제가 읽어볼게요.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다음에 뭡니까? 기도하지요.

기도내용이 뭐냐 하면 다 긴 것 지나가고요. 18절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거잖아요. 이 기도내용과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주기도문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봐야 돼요.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사도에요. 사도기 때문에 예수님의 주기도문의 결과가 사도 바울을 낳았고 사도 바울이 하는 그 기도는 예수님의 주기도문의 연장이에요. 연속입니다. 새로운 세계의 연속이에요. 불연속이 아니고 연속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기도문의 내용은 누가 이뤘습니까? 예수님이 다 이루었지요.

아버지하고 아들 관계는 창세전의 관계에요. 창세전의 관계가 온전해요. 그게 설계도니까. 그 온전함이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일하심으로써 그 온전함이 연속성을 유지를 해서 지상에도 온전해져버린 거예요. 그 온전함을 사도 바울은 기도를 통해서 얼마나 온전하면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가 얼마나 온전한지 저들로 에베소 교인들로 알게 하옵소서. 이게 기도에요.

그래서 기도는 언제 기도가 되느냐 하면 나를 위해서가 잠시 중단이 될 때 기도가 돼버려요. 나를 위해서 하는 그거는 주문 외우는 거고 하나의 염불이고요. 나를 위해서가 중단이 되는 계기가 왔을 때 주님이여 내가 딸이 아프지만 그러나 딸이 아픈 이걸 통해서 다시 말해서 내 딸이 아니고 주님의 딸인 것을 깨닫는 순간 아프게 하신 주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깨닫게 하옵소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걸 쉽게 말해서 주님의 때리기입니다. 주님이 때려줘야 나의 연속성이 끊어져요. 근데 때려주셔야 되는데 우리는 뭐냐 하면, ①도와주소서, ②때려주소서. 어느 쪽입니까? ‘도와주소서’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날 위해서 사니까요. 또 이 조건에서 이 요건에서 우리가 변하지 말라 했지요.

‘도와주소서’에서 뭐로 바뀝니까? ‘때려주소서’로 바뀔 때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 희생에 대한 감사가 나오고 그 감사의 자리에서 희생된 자리가 뭐냐? 이게 제단, 아까 6절에 어느 집에 어슬렁거린다? 이미 온전하게 우리는 주님의 완전한 주의 집에 어떤 자로? 죄 있는 자가 아니라 무죄한 자로 어슬렁거릴 수 있기 때문에 주의 집에 어슬렁거리기 때문에 바깥쪽에 뭐가 보여요? 세상의 악한 것들, 불법의 집회가 다 보이는 거예요.

여기 26편 3절에 보게 되면,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그 다음에 뭐 나오지요? 동행하지 않는 사람. 그 다음에 “행악자의 집회” 여호와의 증인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뿐만 아니고. 9절에 봅시다.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결국 이건 뭐냐 하면 내가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다윗의 고백을 빙자해서 숨어 계신 분, 누구? 예수님의 자기 고백을 미리 앞당겨서 다윗을 마이크로 사용해서 구약 때 언약된 자 이름을 통해서 미리 발설하고 있는, 예수님이 그 시대에 미리 발언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무죄한 자와 함께 있지 않고, 이게 뭐냐?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거예요. 예수님의 행적을 말합니다.

아까 제목을 뭐라고 한다고 하고 잊어버렸어요. 가치의 범주. 그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의 가치가 이제는 폭이 커진 거예요. 왜? 넓이와 높이가 커진 거예요. 커져서 죄 많은 나를 사용해주시는 이유가 이제는 무죄한 상태에 개입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희생이 십자가가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데 나를 사용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주인공이 되게 되면 나는 뭐냐? 주인공 앞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으니까 나는 이 땅에 뭐가 돼요? 하나의 사물이 되지요. 하나의 물체가 되지요. 노골적으로 기계가 돼요. 기계가 되니까 죽이든 살리든 볶든 뭐하든 간에 사물이고 기계니까 사물, 기계는 처음부터 죽은 자에요. 죽은 자를 생명이 나오도록 사용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거기서 이의가 없어야 돼요. 볶아먹고 삶아먹고 뭘 하든지 간에 그저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만 그리스도의 향기만 드러내면 그만이다 이 말이죠. 신약에 와서.

그런 현상이 우리에게 계속 일어나는 이유가, 아까 악인들이 있는 그 세계와 온전한 세계를 계속 이렇게 그 괴리를 분류시키고 벌어지게 하는데 전에 죄인이었던 우리를 활용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이르러 우리가 누구의 증인된다? 바로 나의 증인이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 되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사용해주시는 거예요.

매일같이 느껴지는 그 체험, 그 체험이 이제는 소소한 시시한 그런 일들에 더 이상 심각할 필요 없어요. 의사가, “아이고, 젊은 나이에 6개월 사시면 많이 사는 겁니다.” 그러면 온 교회 와서 통성기도하고 이렇게 하지요. 시시한 이야기. 나의 부속품이 처음부터 부속품인 사물, 물체가 이게 처음부터 죽었는데 죽는다고 새삼스럽게 무슨 심각한 일이고 중요한 일입니까.

5분만 더 살게 아니 두 달만 살게 하시면 주를 위해서 바치겠습니다. 그따위 그런 생각 마시고요 그동안 살려준 것만 해도 쓸 가치도 없는 걸 많이 써먹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식으로 고백하면서 부르실 때 가져가야 돼요. 만약에 진짜 잘못하게 되면 히스기야처럼 살려줘 버리면 지옥에서 고생 더 하는 수가 있습니다. 제대 받아놨는데 갑자기 북한에서 간첩 내려와서 제대 6개월 연기되고 혼자 손해 본다고요. 쓸데없는 생각마세요. 가치를 천국에서 내려다보는 그런 입장에서 살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란 말이 하나의 지식으로 다가오지 않고 우리가 그 삶을 체험을 하고 있는 중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고 세상 보는 눈이 주님 보는 거로 볼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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