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133강 마태복음28장19절(율법완성)20210726b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 이야기한 것 다시 한 번 중요한 것 해드리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이것이 그냥 계시는 게 아니고 누가 만들었느냐를 표현적으로 그렇게 결합이 돼야 온전한 의미가 되는데 온전한 의미를 얻고자하는 이유가 뭐냐? 그런 것까지 알아채는 내가 온전하다고 자부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뭐냐 하면 이거에요. 거세에요. 절단이에요, 절단. 잘라버리는 겁니다. 뭘 자르느냐 하면 하늘과 땅은 거세됐다. 땅이 잘려진 거예요. 절단된 거예요. 끊어진 겁니다. 왜 끊어졌느냐 하면 연결자가 하늘에서 보냈다는 말은 끊어진 상태라는 뜻이에요. 연결자가 없으면 계속 끊어져있고 끊어졌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연결자가 등장한 겁니다.
그럼 연결자 오기 전까지는 중보자 오기 전까지는 인간들은 하나님을 안 끊어졌다고 본 거예요. 무슨 이런 환상, 착각이 있습니까. 그래서 거세, 잘라짐은 바로 환상을 낳는다. 그 환상을 낳는 거예요. 그 환상이 바로 정신세계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말고 정신세계를 인간세계에서 꽃피우고 있지요.
정신세계라 하는 것은 바로 눈에 보이는 사물, 물건, 물질 말고 나머지 전부. 사랑, 믿음, 소망부터해서 영원, 자유, 이런 물건으로 구체화될 수 없는 사물과 일대일 대응할 수 없는 모든 것은 정신세계에 속하는 겁니다. 의미, 이런 것. 집에 돈이 있는데 막 자살하지요. 그 이유가 뭡니까? 사는 의미가 없어서 죽겠다는 거예요. 명예, 체면, 전부 다 정신세계에요.
정신세계를 저는 정신세계로 표현하지만 좀 성경적으로 이야기하면 이게 바로 영적세계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영적세계에요. 옛날 고대에서는 너무 영적세계였어요. 번개 쳐도 신이 노한다 했는데 과학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인간의 물질세계는 점점 범위가 넓어져가고 있고 정신세계는 점점 더 쫓겨 가고 있지요.
코로나 터졌을 때 요한계시록에 의해서 이거는 천사가 와서 작살내는 걸로 이해했잖아요. 코로나 터진 것 말고 옛날에 전염병은. 페스트 병 16세기 유럽에서. 지금에 코로나에 대해서 하나님의 저주고 계시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최근에는 나타났지요. 코로나와 재림날짜와 이런 게 뉴스에, 재림날짜가 가까이 왔다, 이런 식으로 해서 코로나를 이용하는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영적세계는 시간이 정체돼있다고 보면 돼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게 별로 시간요소가 깊이 관여 안 되고 있어요. 지금은 사랑하지만 내일 쯤 사랑할게. 이게 안 되잖아요. 사랑한다고 하면 내일 가서 사랑해야지 사랑한다고 미리 지금은 사랑하지만 내일 쯤 사랑해줄게, 이런 게 성립이 안 되잖아요.
사랑이란 건 정신세계, 영적세계는 모든 것이 시간이 정체돼있어요. 시간이 늘어 터졌다. 시간이 늘어 터진 거예요. 특히 한 식구들끼리 있을 때는 시간이 잘 안 가요. 그런데 직장 가서 바르게 세상에 모르는 제삼자들과 있는 세계에 딱 들어가게 되면 시간이 촉박 되지요. 빨리빨리 그 다음 손님, 굉장히 촉박 되지요.
그러나 같은 식구, 아버지와 있다 하면 늘어 터져요. 아이와 자식과 있으면 그 애와 아버지는 그 모습이 계속 유지된다는. 시간이란 변화가 없으면 시간도 못 느낍니다. 세상은 굉장히 바쁘게 돌아가고 있고 가정이란 평온하니까 시간이 별로 안 가지요. 영적세계, 정신적 세계라 하는 것은 시간이 늘어 터진 거예요. 그래서 천국과 지옥의 특징은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없는 걸 영원이라 합니다.
뭐 지옥 가서 한 5년 쯤 복역하면 나아지겠지, 이런 게 없어요. 오늘의 지옥 불은 내일 되도 마찬가지 지옥 불이에요. 아니 내일 자체가 없어요. 모레도 없고 한 달도 없고. 그 상태로 그냥 가는 거예요. 어떤 상태? 제거된 상태, 거세된 상태, 잘린 상태, 영생으로부터 배척받은 상태로.
그러니 지옥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 보고 할 수 있는 최고의 욕설을 하신 거예요. “지옥이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욕, 저주를 하신 거예요. 지옥 있다. 그리고 못 나온다. 영원히 갇힌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욕 얻어먹는 대상입니다. 그래서 욕을 먹는다 하면 인간으로서 대책이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 섬겼잖아요, 이런 식으로 커버 나서려고 하지요. 막으려고 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한 하나님은 준비된 게 있어요. “내가 보낸 하나님을 네가 죽였잖아. 단절되어 있잖아. 단절 돼놓고 무슨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있다고?” 어디 그런 가짜 뉴스가 있느냐 말이죠. 함께 있는 게 아니지요. 쫓아냈지요. 하나님을 버렸잖아요. 인간들이 합세해서,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누구 주도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인간을 버렸잖아요.
인간이 하나님을 버렸으면 이제는 하나님한테 있는 영생은 인간에겐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잖아요. 분명해졌잖아요. 그러면 인간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간다 해도 인간세계에선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내일 또 내일, 내일 또 내일이 되던 아무 더 나아지겠지, 희망이 있겠지, 소망이 있겠지. 희망, 소망 자체가 거세된 세계에서는 그게 아무 의미 없어요.
자알 될 거야. 잘 되지 않습니다. 쨍하고 해 뜰 날. 해 떠도 소용없어요. 나중에 해가 없어질 거니까요. 뜰 것도 없어. 해도 저버리고 달도 하늘에서 별도 다 떨어지는데 빌 데도 없어요. 별 하나에 내 이름, 그것도 없어요. 우르르 다 떨어져서 없어요.
그래서 오늘 마태복음 28장을 보면서 그 점을 먼저 염두에 두셔야 됩니다. 뭘 염두에 두느냐? 거세, 잘라버리는 것. 거세란 말은 멀쩡한데 잘라버렸다는 거예요. 자른 거예요. 같은 말이 절단돼있다. 이렇게 그 연결이 끊어져있어요. 하나님 계신 곳과 인간세계가 끊어져있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자, 요한복음 3장 12절을 누가 찾아 읽어보세요.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자, 땅과 하늘이 땅과 하늘은 유일하게 예수님에게만 연결돼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늘과 땅은 유일하게 예수님에게만 연결돼있어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땅에 와서 땅의 일을 하면 땅의 일일까요, 하늘의 일일까요? 하늘의 일이 되는 거예요. 왜? 유일하게 연결돼있으니까요. 그럼 예수님 빼놓고는 하나님의 일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연결된 겁니다.
냇가에 있는 송사리가 인가의 신체에 대해서 평생, 송사리의 평생이 몇 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평생 구경 못했는데 내가 냇가에 발을 담그면 그때가 송사리가 유일하게 인체에 대해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겁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묻지요. 송사리야. 이게 하늘의 일인가, 땅의 일인가 묻는 겁니다.
그 발에 대해서 우리 동네 발이 아니네. 우리 송사리 떼가 아니네. 이건 인간의 몸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그건 정말 하늘의 일과 접하게 되는데 예수님 당시 인간들은 예수님 보고 하늘의 일로 생각하지 않고 뭐냐 하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네, 이렇게 된 거예요. 땅의 일로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 보고 땅의 일로 생각한 거예요.
자,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한테는 뭐가 안 되느냐 하면 이 거세가 의문점이고, 절단되는 것, 끊어지는 절단이 그들에게는 안 받아들이는 거죠. 하늘과 땅의 절단을 안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면서 다 이루었다는 이야기를 왜 하셨을까? 예수님의 행적을 보시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했잖아요.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 보면 십자가 다음에 부활이 있고, 그 다음에 승천이 있고, 그 다음에 재림이 있고, 승천까지는 됐으니까 이런 일들은 아직까지 남아있는 걸로 보여요. 땅에 있는 사람에게는. 예수님한테는 재림이 아직 안 됐기 때문에 다 이루었다는 말이 잘못된 표현이 아닌가?
아직 재림은 남아있고 나머지는 다 이루었다하든지 아니면 부활, 승천은 남아있다 이렇게 해야 되는데 십자가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는 말이 뒤에 있는 부활, 승천, 재림까지 포함시켜서 다 이루었다는 말이 되는 이유가 뭐냐? 주께서 십자가 질 때 1단계는 넘어갔구나,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할 때 그 다 이루었다함에 어떻게 재림이 포함되느냐 말이죠. 인간들 보기엔 시간적으로 남아있는데.
승천뿐만 아니고 뭐가 있느냐 하면 재림 그 사이에 성령 주심도 포함돼있지요. 부활, 그 다음에 승천, 그 다음에 승천돼야 성령을 주시니까 승천, 성령을 주심, 그 다음에 재림. 이런 요소가 아직 남아있는데 십자가에 달랑 돌아가셔놓고 이것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느냐? 그 내력을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이 율법 따라 죽으셨기 때문에, 율법 따로 죽으셨다. 율법이니까 이건 뭐냐? 법이죠. 다른 말로 하면 규칙입니다. 하나님의 규칙 따라 율법에 따라 죽으신 거예요. 그러면 그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이 자기가 안다고 생각한 겁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혈통이기 때문에 아브라함 자손이기 때문에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자부했지요. 그래서 자기들은 유일하게 이 세상에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런 주장을 할 때 근거가 뭐냐 하면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자기는 택한 백성 맞다, 라고 지금 주장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은 율법 안에 뭐를 못 찾아냈느냐 하면 율법이 하나님과 인간세계를 거세하고 잘라낸다는 그 내용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감히 생각을 못한 거예요.
선악과 따먹을 때 정녕 죽으리라 했잖아요. 아담에 속한 인간은 다 죽어야 될 이유가 있어요. 죽어야 되는데 우리가 죽어 마땅한데 하나님께선 율법을 보내셔서 율법을 통해서 우리를 살렸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살았다 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가 죽었다는 생각과 짝을 이루어서 살았다고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죽었다는 말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면 그들이 살았다고 희망 갖는 그것도 제대로 살았다는 그 내용이 아니겠지요. 그렇지요. 말하는 내가 더 어렵게 이야기하네. 목숨 끊어진 게 인간은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건 좀 설명해야 되겠는데요. 목숨 끊어진 것이 죽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보질 않아요. 율법을 성취하지 못하면 죽은 거예요. 이게 율법의 취지입니다. 율법의 내용대로 살지 못하면 죽은 거란 말이죠.
그리고 신명기 28장에 보면 죽은 정도가 아니에요. 뭡니까? 저주받은 거예요. 죽는다는 것은 저주받은 현상의 하나일 뿐이에요. 율법대로. 다시 말해서 율법은 뭐냐 하면 거룩한 거거든요. 어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는가. 거룩한 이 거룩을 인간의 신체가 다 감당할 수 있습니까, 버텨낼 수 있어요? 못 버텨내지요.
만약에 어느 복음적인 가정이 있는데 애가 또 백 점 맞아왔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또 백 점 맞았구나. 엄마한테 얼마나 칭찬받을까 했는데 엄마가 굉장히 아이한테 닦달내고 하는 거예요. 가만히 들어보니까, “니가 백 점 맞는다고 해서 율법을 감당할 수 있어? 니가 영어도 백 점, 수학도 백 점, 사회도 자연도 백 점인데 이 백 점이 백 점 맞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테스트,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냐 이 말이야?” 이렇게 닦달내고 나무라는 엄마는 있을 수도 있어요.
온전한 의, 온전한 거룩은 율법을 준수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을 주신 이유가 이미 거세되었음을 이미 끊어져있음을 확인 차 율법을 준 거예요. 율법을 줘야 인간은 어떤 노력을 다해도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는 겁니다. 확실하게 가져갈 수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율법을 준 것은 이 율법을 통해서 복된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 율법을 줬다고 보는 거예요. 하나의 참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율법을 줬다. 그렇게 되면 안 지킬 사람이 없다면 율법을 준 의미가 취지가 실패로 끝나요. 하나님의 취지가 실패로 끝나지 않느냐.
예수님께서는 마치 이와 같은 거예요. 야구에서 공 던지는 사람을 투수라 하지요. 공 받는 사람을 포수라 하잖아요. 이걸 한 번 생각해보세요. 투수가 공을 힘차게 던져놓고 그 던진 공보다 더 빨리 가서 포수자리에 앉아서 자기가 던진 공을 자기가 받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스트라이크. 그게 다 이룬 거예요.
재림이 남아 있다가 아니라 누가 율법을 박았느냐? 누가, 어떤 인물이 율법의 완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언약, 계약자가 예수님 외에는 다른 사람은 계약자가 될 수 없어요. 예수님 말고 다른 사람의 명의로 다른 사람 도장 찍어서 성사되는 그런 계약은 주께서 다 찢어버립니다. 예수님이 도장 찍어야 돼요. 예수님 소유권이 돼야 된다고요.
그런데 십자가를 하면서 다 이루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여러분 잘 아시겠지만 제가 답변하겠습니다. 율법이 성사되면 의롭지요. 율법이 성사되면 의롭다 할 때에 그 의로운 증거가 뭐냐 하면 한 자로 이거에요.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에요.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보지만 한꺼번에 줄여서 살과 피를 합쳐서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장에 보면 피로 맺은 언약이라 돼있지요. 피로 세운 언약, 계약서, 피로 세운 계약이에요. 누구 피? 내 피와 내 살로 말미암지 않고는, 새 언약은 내 살과 내 피로 이뤄진다고 예수님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모든 율법의 초점이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심으로써 이미 다 이루었다가 되게 되면 그러면 예수님이 하신 일 빼놓고 나머지 일은 가차 없이 쓰레기 취급해서 버리시는 것이 그 다음 합당한 조치가 되겠지요. 안 버리시면 그건 합당한 조치가 아닙니다. 예수님 하신 것 빼놓고 다 버리는 거예요.
여기 수박 있는데 이것 계속 먹고 있으면 안 되지요. 버려야 되겠지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잘라낼 것은 잘라내신다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그것이 수긍이 되는 사람이 십자가를 믿는 사람입니다. “야, 신난다. 내가 그토록 지키려고 한 내가 잘려야 되는구나.” 그걸 반가는 거예요. 자아 구원이 아니고 자아 잘림이 돼요. 내가 잘려나가는 거예요.
몸통 가면 되는데 뒤는 잘라내야 되지요. 엄마 나갔다? 엄마 나갈 때 애는 따라 나가는 것, 그건 아직도 엄마가 자기 한 몸이라 생각하는데 그런데 봐줄 수 있지만 다 커서 엄마 가는데 엄마 찾아가면 이건 잘라내야지요. 자아 잘림을 사도 바울에서 예수님이나 다른 사도는 자기 부인이라 하지요.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자르고 날 따르라.
그동안 네가 너한테 충실했잖아. 네 자존심과 체면과 네 의미에 네가 완전히 종노릇했다. 네가 너한테 매여 살았다는 거예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오십을 살아도 칠십을 살아도 항상 생각은 무슨 생각밖에 안 해요? 나 살릴 생각밖에 안 했잖아요. 그걸 잘라내야 되는 겁니다. 참 이게 속 시원한 거예요. 더 이상 나한테 농락당하지 않아야 돼요. 나의 위신과 나의 의미에 농락당하지 않는 것.
여기에 마귀가 발악을 합니다. 네가 얼마나 귀한데, 네가 이만큼 되기까지 얼마나 노력하고 수고하고 애쓰고 비굴한 짓, 아양 다 떨어가면서 이만큼이라도 살림 이루고 이만큼이라고 살만큼 산 것은 네가 고생한 네가 노력하고 힘든 대가잖아. 그걸 어떻게 다 버리느냐고. 마귀가 교회 목사를 통해서 그렇게 외치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이런 노래 불러가면서 지킬 수 있는 것은 너를 지키는 것은 너밖에 없어. 너의 믿음으로 지키고 너의 사랑으로 지키고 너의 기도로 지키면 주께서 너를 지켜주시리라. 시편에 나오는 말 있잖아요. 그게 다 예수님 보고 하는 이야기인데. 십자가는 그게 너 보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나 보고 이야기한 거라는 거예요. 신약에 와서.
구약성경에 있는 주께서 친히 지키신다는 말은 나부터 하는 이야기고 이스라엘은 예수님부터 새로 시작되는 것이 이스라엘이에요. 기존의 이스라엘은 무효! 전부 다 무효, 콜드게임, 끝났어요. 5회 말 10:0으로 이기고 있는 비 확 와서 5회 말까지 모든 게임 말소, 다 말소하는 거예요. 말소라는 게 히브리서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계약은 말소하는 것이다. 주님과 계약 맺기 위해서 인간과 맺은 모든 계약은 말소가 되는 거예요. 옛 언약을 폐기처분되는 겁니다. 나 너와 상대 안 한다는, 하나님은 우리와 상대 안 해요. 주님과 상대해요.
자, 다시 정리해봅시다. 율법은 누가 이뤘다? 예수님이 이뤘다. 이루신 방식은 뭐냐? 피다. 예수님의 죽음, 살과 피를 통해서 모든 율법을 다 이룬 겁니다. 고점을 좀 더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착하지요. 하나님은 착하지요. 착한 사람과 착한 사람 계약하는데 거기서 피가 나올 일이 없지요. 그렇잖아요. 훌륭한 사람과 훌륭한 사람이 계약하는데 갑자기 피하고 뭐 자해하고 이럴 필요 없지 않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계약했는데 왜 피가 등장하느냐? 그것은 율법 안에 취지가 있어요. 무슨 취지냐 하면 바로 절단하는 취지가 있어요. 율법 안에는 거룩하지 않은 것을 전부 다 내쫓는 기능이 있어요. 율법을 건강원이라는 게 있지요. 건강원이 뭐하는 뎁니까? 약 다려주고 짜주는 곳이죠. 율법을 건강원 압력솥에 집어넣었어요. 나중에 나오는 게 뭐냐 하면 피만 질질 나와요. 피 안에 농축돼있는 거예요. 피로 다 이루었으니까.
그러면 율법의 모든 조항, 깔때기라 합시다. 율법을 다 담아요. 십일조 하고 남자는 여자 옷을 입지 말고 채소를 하고 오징어 먹지 말고 돼지고기 먹지 말고 하는 그런 것 있잖아요. 하여튼 모든 걸 다 집어넣어요. 안식일 지키고 이걸 다 집어넣어요. 다 집어넣으면 다른 인간은 못 지키고 예수님만 지킬 수 있거든요. 예수님만 계약자거든요.
예수님께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기서 다 이루었다의 증거로 피가 되어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율법이 피가 되어 나왔다면 피를 확장시킨다. 피를 다시 한 번 확장시키면 여기 있는 율법적 취지도 피를 중심으로 다 확장되겠지요. 모든 율법은 거룩하지 않은 , 속된 것을 제거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제거하는 기능이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이게 최종기준이 되어서 터져 나왔다면 그 모든 것 속에서 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뭐가 되느냐 하면 저주받은 자가 돼요. 더러운 자가 되고. 피의 기능 속에.
히브리서 전반기에선 그걸 뭐라고 설명하느냐 하면 왜 율법의 완성이 피로 나올 수밖에 없는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걸 속죄제물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해요. 속죄제물이 되려면, 이런 게 어려워요. 진짜 어려운데 너무 어려우니까 글로 써봅시다. 예수님은 착하다. 그래서 의롭다. 이거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공식이에요. 이 공식은 하늘나라에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선악에서는 이게 납득이 되는데 하늘나라엔 통하지 않습니다.
뭐냐 하면 예수님은 대신 속죄제물이 되셨다. 그래서 의롭다. 이런 공식이 의로움의 공식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율법을 지켰다 한 의미가 예수님이 우리가 보기에 착하고 바르게 살았다고 율법 지킨 게 아니란 말이죠. 이건 우리네 잘못된 편견입니다. 예수님 술 드신 것 아시지요. 잠언에 보면 술 먹지 말라 했거든요. 포도주 먹지 말라. 포도주 드셨어요.
예수님의 행적들을 보게 되면 그 당시 안식일 지킬 때 예수님 안식을 안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게 안식일 안 지킨 게 율법을 안식일 지킨 게 돼요. 그건 뭐냐 하면 속죄가 성립되려면 속죄가 뭡니까? 죄가 있다는 거예요. 죄에 대해서 의롭게 한다고 속죄되는 게 아니고 그 죄에 대해서 담당해야 대신 속죄가 돼야 그게 의가 나오는 거예요. 이거는 죄야, 나쁜 거야, 지적한다고 의가 아니다 이 말이에요.
우리네 율법에 대한 상식이 완전히 거덜 나야 됩니다. 완전히 다 바꿔야 돼요, 사실은. 하나님도 좋고 인간도 좋고 이런 논리는 예수님 나라에 하늘나라에 그런 논리는 없어요. 인간은 묻지도 않고 무조건 악해야 돼요. 무조건 나는 악해야 돼요. 나는 ▭다. 뭐다? 나는 악하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합니다, 땡큐, 이게 돼야 돼요. 나는 무조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악해야 돼요. 이걸 견지해야 유지해야 됩니다.
이걸 유지하는 방법은 간단하죠. 예수님이 속죄제물 완성했잖아요. 속죄제물 해볼까, 한 번 노력해볼까, 가 아니라 이미 끝났어요. 속죄제물, 죄 씻는 것은 끝나버렸어요. 끝났다는 걸 뭐로 아느냐? 십자가의 피로 끝나버렸어요. 끝났다는 이게 복음입니다. 끝났어요. 더 이상 추가될 계약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피는 믿되 기도하라, 피는 믿되 헌금하라, 이런 게 남아있지 않아. 피는 믿되 대면예배 드리라, 이런 것 없어요. 피로 끝나버렸어요.
피로 끝나버리고 나머지 확대가 뭐냐 하면 모든 말씀과 상황을 통해서 ‘나는 악하다’에 거기에 동의하라 이 말이에요. 아까 수박 잡쉈지요. 세상에 그런 악한 짓을. ‘나는 악하다’에 동의하고 감사하라 이 말입니다. 그럴 때 누가 빛나요? 속죄제물, 율법을 다 이루었다가 빛이 난다니까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나가 되는 거예요. 주인이 바뀌는 거예요. 나였던 것이 나가 아니고 주님 앞에 너가 될 수 있는 것. 그 방법을 주께선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내가 있음에 내가 되려고 한 거예요. 그동안 이스라엘이 그래서 실패한 거예요. 이방인도 마찬가지고.
아까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영원히 나 되고 싶은 절대적인 나를 포기 못하는 겁니다. 그 절대적인 절대를 내가 아니고 주님이 가져가는 거예요. 속죄 제물만이 절대적인 이제는 나가 되고 영원히 계심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는 십자가에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벌써 나 아닌 분이 살잖아요. 타자, 남, 타자가 내 안에 살잖아요.
타자가 사니까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나는 항상 악한 자가 되는 그 즐거움, 그러니까 주님의 속죄 제물 의롭지요. 속죄 제물이 의니까 의를 위해서 나는 악함으로 이렇게 떨어지지 않아야 돼요. 나의 악함이 돌아다니면 이건 나쁜 놈이고, 악함을 또 자랑하면 안 되고 속죄 제물과 결부된 악함, 이게 뭐냐 하면 계약이 하나님의 언약이 돌아다님, 하나님의 언약체로서 계속 돌아다니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그 다음부터 십자가 지시고 난 뒤에 십자가 다 이루었다 했는데 다 이루었으면 끝났는데 남은 일이 뭐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피의 속죄 제물에 대해서 피의 취지가 드디어 확산됩니다. 왜냐하면 아까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의 계약은 깔때기로 모아놓고 전 우주로 확산되지요. 확산될 때 여기에서 피에 반대되는 말, 율법은 잘라낼 자를 잘라낸다면 율법이 완성되는 예수님의 피도 잘라내는 기준으로 작용이 되겠지요. 잘라낼 때 어떤 것들이 잘라내는지를 여기서 보는 겁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28장 11절 봅시다. “여자들이 갈제 파수꾼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라고 돼있어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이 가짜 뉴스가 되도록 돈으로 매수당해서 이거는 죽은 게 아니고 시체를 훔쳐갔습니다, 라고 거짓 뉴스를 퍼뜨리게 한 거예요. 그러면 이러한 일이 십자가 이후에 일어났잖아요. 인간들 보기에. 그러면 그들의 무엇을 겁내는 겁니까? 제가 질문할게요. 예수님의 피를 겁내는 거예요, 부활을 겁내는 거예요? 어느 쪽입니까,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부활이죠. 그래서 부활을 믿는 자가 지옥 가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부활을 믿는 자가 지옥 가는 이유가 이들과 사고방식이 똑같아요. 죽었다가 살아나지 아니하면 나는 안 믿겠다는 거예요. 도마처럼. 주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걸 믿는 게 아니고 우리는 뭘 믿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3장 1절처럼 십자가를 믿어야 돼요. 예수님의 피를 믿어야 되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은 고 레벨이 어떤 레벨이냐 하면 인간들이 하는 수준과 똑같은 수준이에요. “봤데. 예수님 살아났데.”
그런데 주님께서 분명히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했잖아요. 이제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게 되면 누가 아직도 유의미 하냐, 의미가 있느냐 하면 내가 눈으로 봤다. 이 눈동자, 나의 눈동자, 니 눈동자 말고 내 눈동자에 어떤 아직도 가치가 작동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내가 봤어. 간증집회하면서 내가 봤어. 내가 주님이 키 훤칠하니 생긴 것 봤어.” “어떻게 생겼는데?” “완전히 제임스 딘 같이 잘 생겼어.”
여전히 예수님 봤다, 라고 하는 그런 나의 체험을 내가 믿게 돼요. 그러면 이거는 거세가 안 된 거예요. 절단이 안 된 겁니다. 십자가 피를 믿는 것은 어떤 경우라고 인간이 볼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 방식이에요. 구원받는 방식은, 성령은 부활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 이야기해요. 왜? 어떤 인간의 모든 체험도 거세해버리니까, 잘라버리니까. 네 눈, 코, 입 전부 다 그 기능이 구원받는데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래야 오직 성령만이 자기 사람을 건져낼 수 있기 때문에, 성령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요한일서를 보겠습니다. 요한일서 4장 12, 13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맞지요. 하나님 본 사람 없지요.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해놓고 13절,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이렇게 돼있지요.
성령 봤습니까? 제가 이 말을 인용한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우리 안에 서로 느끼고 있는 어떤 체험 같은 것이 있으면 그거는 우리가 하나님 백성 맞다, 라고 이야기한다면 그러면 그 체험이 진짜 온전한 하나님이 인정한 체험인지 허가가 난 체험인지 마귀가 집어넣은 체험인지를 어떻게 아느냐? 누구 체험이 표준모델이냐, 라는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어떤 교회가 있는데 교인이 한 오십 명 되는데 어떤 사람이 목사님 교회에 누가 믿음이 좋습니까, 라고 목사한테 물으면 목사가 갑자기 자가기 믿음 좋다, 안 좋다 하는 기준자로서 나설 수밖에 없지요. 나설 수밖에 없을 때 목사와 믿음이 다른 사람을 믿음이 좋다고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일단 0순위는 나고, 내가 성령 받았고, 내가 믿음 대빵이고, 표준인물은 나고, 내가 믿음 있다 해야 그 사람 믿음 있다, 라는 절차를 계속해서 이어져나갈 게 분명하지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삼서에 나와요. 요한삼서에 보면 어떤 인물이 나오느냐 하면 꼭 스승이 되고자 하는 자들이 있어요. 그 교회에 스승이 되고자. 요한삼서 1장 9절, 저희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이름이 디오드레베, 이름 듣기도 싫다. 듣기도 싫어요, 보기도 싫어요, 이름이.
꼭 으뜸이 돼야 게임에서 자기가 승자가 되니까 이게 사람에게 쾌감을 주잖아요. 산에도 높은 산에 가야 동네 뒷산 가고 올라갔다 하는 건 아니잖아요. 적어도 히말라야 8000미터 급 14좌 등정 정도 해야 동상에 손가락 다 날아가야 산 좀 탄다, 이야기할 수 있듯이 사람이 어느 집단이든 어느 모임이든 최고가 되고 싶어 서로들 환장을 했어요. 어느 집단도 그래요.
서예하면 서예도사, 동양화의 도사, 당구 치면 당구의 도사, 낚시하면 낚시의 도사, 바다낚시에 나가면 도사, 개 키우면 개 대통령 있지요. 아이 키우면 오은영 교수, 사자머리 교수 있지요. 어떤 분야든 간에 도사들 많아요. 랩 대회 보세요. 랩 하면 도사들 있고요. 노래 대회 나가면 수천 명 모입니다. 임 영웅이 최고 아닙니까. 일등이란 욕망 이런 게 악마한테 다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왜 묻습니까, 왜 물어요? 내가 어떻다는 것을 늘 뭘 통해서 동의 받는다? 사회 나가서 타인들의 확인절차를 거쳐서 받는다. 바로 이렇게 되게 되면 확인해주는 사람 멀쩡히 있어야 되고 확인받는 내가 있어야 되고, 이 자체가 거세당하지 않은 거예요. 이게 바로 잘려야 될 것, 이걸 절단시키기 위해서 십자가 피를 흘린 겁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은 표준을 준 적이 없어요. 왜냐? 네가 네 신체와 육신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감당할 수 있겠어, 그 거룩을 버텨낼 수 있겠어? 예수님 십자가 진 것 흉내 낼 수 있어요. 아야, 아야 하면서 못 박아서 십자가 질질 끌고 할 수는 있습니다. 필리핀에선 매년 하거든요. 필리핀도 하고 스페인도 하고 남미에 가면 줄줄이 천주교 분위기 가면 이런 것 많이 해요. 고난 받는다고 칠레, 페루 다 그런 짓합니다.
심지어 <미나리>라는 윤여정이 상 받은 영화에 보면 어떤 신앙심이 아주 신실한 사람이 기존 교회는 더럽다고 안 가고 일요일에 뭐하느냐 하면 십자가 지고 그 먼 길을 차 안 타고 끌고 가는 그 장면 나와요. 40년 전에 미국남부의 종교적인 풍토를 그렇게 보여주는 겁니다. 흉내 낸다고 구원되는 것 없습니다. 모방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그럼 거기에 대해서 뭐냐 하면 19절 봅시다. 오늘로서 마태복음 끝내겠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돼있지요.
바로 여기에 대해서 반대되는 쪽이 뭐냐 하면 아까 봤던 그들이 돈을 주고 예수님이 부활을 안 하고 시체를 제자들이 훔쳤다는 그쪽이에요. 그러니까 시체를 제자들이 훔쳤든 돈을 주고 군병들이 빼돌렸다는 소문이 있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뭐만 유효합니까? 인간으로서 모방할 수 없고 재편할 수 없는 것, 그것도 그때 한 번 있었던 그 일, 뭡니까?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 그걸로 계약 쪽 났어요. 계약 끝났어요. 쪽 나는 게 아니고 계약 완성됐습니다. 계약 끝났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세상 끝 날까지 그 피와 대비가 되고 대적이 되는 피를 반대하는 요소들이 이 세상 끝날 때까지 많아지겠습니까, 사그라지겠습니까? 더욱 더 융성하겠지요. 교회를 통해서, 아니 교회 바깥을 통해서. 성령 받지 않은 자들이 그걸 성령 받은 걸 대체하기 위해서 어떤 것들을 계속 끄집어내겠지요.
그 이야기가 바로 갈라디아서에 나옵니다. 로마서에 나옵니다. 인간은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사도 바울은 바로 딱 핵심적인 것, 오직 행함이 아니고 오직 믿음인데 그 믿음이 인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서 믿음이 나온다. 예수님에서 나온 그 믿음만이 우리를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이 이야기했거든요. 그 말은 인간세계에선 하나마나입니다. 왜?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내가 주인이 아니고 ‘나는 악하다’를 통해서 나를 근원적으로 악하게 하신 분과 결속되게 성령께서 작용하죠. 성령께선 오직 십자가 피 흘린 이유가 속죄, 죄를 씻어주는 죄가 있는 곳에(하나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잖아요) 피가 있음으로써 그래서 계약이 성사되기 위해서 필요한 죄, 그 죄로 우리는 그 역할을 맡아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바로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겁니다. 언제까지? 이 세상에 자기 역할이 마감될 그때까지 주께서 하셨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그 이야기를 할 때 세상의 모든 권세를 다 붙들고 하시는 겁니다. 모든 권세를 주었으니까. 이로서 마태복음 끝났는데 끝난 입장에서 마태복음 1장을 다시 봅시다. 보기 전에 아까 중요한 것을 다시 말씀드리면 부활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설을 푸는 것은 계약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뭐 봤다니 뭐 해 같이 빛난다니 아무 의미 없어요.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은 자기는 부활을 자랑한 게 아니고 뭘 자랑했습니까? 십자가를 자랑한 거예요. 부활을 자랑한 게 아니에요. 삼층천에 올라갔어도 부활을 자랑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을 만나도 만난 걸 자랑한 게 아닙니다. 십자가를 자랑한 거예요. 만약에 부활을 자랑하면 자기 체험을 자랑한 거기 때문에 이거는 자기가 악한 게 아니잖아요. 갑자기 부활을 체험한 괜찮은 사람 됐잖아요. 그러면 계약과 결속이 안 되지요. 자기 자신에 의미를 줘버리면 이거는 거세돼야 되는 당사자니까요.
마태복음 1장을 봅시다. 마태복음 1장에 이렇게 시작했어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세계라 하는 것은 그의 족보란 뜻이에요. 결국 마태복음 1장에서 언급하는 것은 실제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거예요. 마지막에 보니까 예수님이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는 형식으로 우리와 함께 있는데 1장 1절에 보니까 처음부터 안 보이는 분으로 오신 게 아니고 인간의 모습으로 보이는 분으로 인간 자체로 오셨는데 끝에 보니까 안 보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에 오류가 있고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은 보이는 분으로 해서 보이지 않게 됐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어디를 문제 삼아야 돼요? 보이는 나에게 문제 삼아야 될 이유가 마태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마태복음 내내 그 말씀을 통해서 이래서 나에게 문제가 있구나. 나라는 정신세계와 육체에 문제가 있구나. 그걸 가지고 마태복음 1장부터 다시 보시면 내가 죽어 마땅한 죄인인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태복음을 보면서 실제로 하나님이 다녀갔음을 새롭게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 때문에 다녀갔는지는 바로 하나님의 계약을 이루기 위해서 다녀갔고 그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다 이루었음을 이제는 기쁜 소식으로 복음으로 우리 내내 간직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