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32 - 허세와 십자가
21,07,1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니고데와 예수님 !!
오늘은 교재 128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니고데모가 나오는데, 이 니고데모는 '다시 태어난다' 라는 말을 생전 처음 들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다시 태어난다' 라는 것을 달리 말라면 "너는 이미 죽었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런데 죽었으면 외부에서 살려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요 3: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요 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 여호와 하나님과 내통하는 에스겔 !!
에스겔서 37장에 보면 해골 무더기가 나오는데, 그러면 이것을 그대로 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해골은 그냥 해골이란 말이죠. 그러면 땅에 묻어주던지 해야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놀랍게도 이스라엘의 군대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뇌피셜로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는 것이죠.
에스겔서 37장에서는 이 해골 무더기가 곧 사람인데, 우리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해골 무더기가 살아있는 이스라엘의 군대가 된다는 것은 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해골 무더기는 그냥 해골 무더기인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고, 또한 현실이란 말이죠. 그런데 그 해골을 두고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해골 무더기가 무엇인가가 개입하면서, 그게 바로 '여호와 하나님' 인데, 그 하나님이 인자라고 불리는 에스겔을 데리고 이 골짜기로 가신다는 말이죠. 이 에스겔은 보통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데, 그런데 그 사람들과 에스겔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에스겔은 누구와 내통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통하고 있는데, 즉 서로 사귐이 있다는 겁니다.
(겔 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겔 37: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겔 37: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 성령 안에서의 사귐 !!
그런데 이 에스겔서의 내용을 사도바울의 편지에 적용을 시키면, 그 편지에서 "우리가 성령 안에서 서로 사귄다" 라고 하는데, 그 사귐이란 것이 구약에서 이런 엄청난 결과는 낳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성경말씀을 너무나도 건성으로 보기 때문에, 그냥 "같은 인간들끼리 사귀겠지" 라고 여기고 말지, 하나님과 사귄다는 것이 이런 엄청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여기 에스겔서의 경우에, 하나님과 사귐이 결국 무엇인고 하니,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인데, 그것을 에스겔서 37장에서 보여준다는 말이죠. 해골 무더기가 있고, 그 중간에 여호와 하나님, 즉 인자를 집어넣으니 거기서 이스라엘 군대가 나왔다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보고 "이 해골이 살겠느냐?" 라고 하시는데, 달리 말하면 "이미 죽어있는 것이 살겠느냐?" 라는 것인데, 이것이 요한복음 3장에 나온다는 것이죠. 거기 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니고네모를 보고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인데, 간단하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사람은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인데, 여기에 누가 개입을 하신다는 겁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이 에스겔서의 경우에는 인자라로 불리는 에스겔이 그 자리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인자라는 호칭이 신약의 마지막 때에 누구에게 적용을 시킵니까? 예수님이 자기 자신에게 적용을 시킨다는 말이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보이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있는 여기에 사람들에게 오게 되면,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이 된다는 말이죠.
* 백신을 맞은 해골 !!
지금 이 이야기가 결코 어렵지가 않은데, 그렇지요? 쉽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이 쉬운 것이 되려고 하면, 우리가 아무리 건강진단을 받고 백신을 맞고 하더라도, 그야말로 해골 무더기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해골 무더기가 백신을 맞았다는 것이죠(ㅋㅋ).
이것을 받아드릴 수 있는 안목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가 예수님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와 성도가 아닌 자들의 차이점인데, 그래서 성도라고 한다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주께서 하실 일이 있잖아요? 그것을 그대로 하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내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이 아니고, "주님이 에스겔에게 하신 것처럼 저에게도 하실 일이 있잖아요? 저를 해골로 만들어놓고 이스라엘로 만드는, 그것을 유일하게 하실 수가 있는 분이 예수님이잖아요. 그 일을 그대로 하세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신약에서 말하는 '성령 안에서의 사귐' 이라는 것이죠.
* 인간은 타인으로 연결이 된다 !!
방금 이야기한 것을 무지무지하게 어렵게 이야기를 하면, "인간은 매개이며, 이 매개 안에는 타인이 있다. 그리고 그 타인으로 서로 연결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매개, 혹은 매개체인데, 여기서 '매개' 라는 것은 연결한다는 것이고, 그런 매개체 안에 타인이, 즉 남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옛날에 한옥을 지을 때 보면 못을 치지 않는데, 그러면 목재와 목재 사이를 어떻게 연결을 합니까? 서로 홈을 파서 연결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연결이 되려고 하면 공통적인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타인이고, 이것을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 혹은 예수님의 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까, 우리는 이 요한복음 3장 3절에서 8절의 말씀을 봐도, 여기서 우리는 "나 개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는 말이죠. 그것은 성경전체를 봐도 마찬가지인데, "내가 죽으면 어떻게 천국에 갑니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 집단으로서의 '이스라엘' !!
그런데 방금 제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연결이라고 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해골 무더기 중에서 어떤 특정한 인간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이 해골 무더기 전체가 '이스라엘' 이라는 집단, 즉 군대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 라고 하는 것, 다른 말로 '자아' 라고 하는데, 이 자아는 굉장히 위험하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아는 '자아 절대성'으로 치닫는다는 겁니다. 이게 악마의 영향 때문인데, 자기가 최고의 존재인 줄로 착각을 한다는 말이죠. 어릴 때부터 그러한데, 이것은 숨길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인간 속에는 타인이 있는데, 구원을 받으려고 하면 이 타인이 예수님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현재의 범죄한 모든 인간은 그 타인이 악마와 연결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악마가 인간을 유혹해서 선악과를 따먹도록 했는데,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절대자, 즉 신이 될 수 있다고 여기게 되었는데, 악마가 그렇게 만들어놓았다는 것이죠.
* 내가 왜 감사해야 합니까?
예를 들어서, 엄마가 고생고생을 해가면서 아이를 키우는데, 그런데 그 아이에게 누군가가 묻기를, "엄마가 너를 키운다고 힘이 많이 드는데, 너는 그 엄마에게 감사하지 않을래?" 라고 하니, 그 아이가 뭐라고 합니까? "내가 왜 감사해야 합니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이것은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가르쳐준 것이 아닌데, 선생님들이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자기 내부에 괴물이 있어서, 그 괴물이 가르쳤다는 겁니다. 괴물이 자아를 통해서 "너는 이렇게 살아야한다" 라고 하는데, 즉 감사가 없이 살라고 한다는 말이죠.
여러분이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면 감사가 나오는데, 그런데 그 감사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감사가 곧 공포로 전환이 되는데, 즉 "안 되면 어떻게 하지?" 라고 한다는 말이죠. 조금 전까지도 "주님, 감사합니다. 범사에 감사합니다" 라고 해놓고, 그런데 교회를 나와서 집으로 가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오면 뭐라고 합니까? "우산이 없는데, 어떻게 하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ㅋㅋ).
그렇게 하다가 또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주시면, 그 공포가 무엇으로 바뀝니까? 감사로 바뀌는데, 그러다가 얼마가지 않아서 "드디어 4단계란다. 어떻게 하지?" 라고 하면서 그것이 공포로 또 바뀐다는 말이죠. 즉 예수님으로 인해서 감사가 주어지던 것이, 악마로 인해서 공포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 타인은 나에게 두려움을 준다 !!
그래서 "내 속에 있는 악마라는 타인은 나에게 두려움을 준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어떻게 합니까? 그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 한다는 겁니다. 물론 악마의 권세 아래에서 말이죠. 모든 노력을 더 한다는 것이죠.
이것을 또 이렇게 어렵게 표현할 수 있는데, "인간은 유신론에서 무신론이 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 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유신론은 신이 있다고 하는 이론인데, 이런 유신론에서 신이 없다고 하는 무신론자가 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한다는 겁니다.
* 무신론자 !!
이 무신론은 어떤 것인고 하니, "나에게는 진리와 정의감과 선을 위한 노력과 의지와 열성과 같은 것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그 선으로 혼자 살래" 라고 한다는 겁니다. 신은 최고의 선이고 정의로움인데, 그것을 자기도 이제 선악과를 따먹고 알았다는 말이죠. 즉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것인데, 그래서 선으로 질주해나가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무신론자가 되기 위해서 분투노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동안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배웠는데, 그러니 하나님이 자기의 라이벌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라이벌이 있어야 살아갈 맛이 나는데, 그러니 하나님에게 한 수 배워서 하나님을 닮아가고자 한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무신론자라는 겁니다.
특히 교회에 오래 동안 다닌 사람들이 목사에게 들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제는 성령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야 한다" 라는 것인데, 사람들이 거기에 호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자기 혼자 살고 싶었는데, 혼자 살더라도 하나님이 자기를 무시하지 않을 모든 정보를 성경에서 찾아내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아하, 이렇게 사는 것이 곧 신앙인이구나. 이렇게 사는 것이 곧 하나님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구나" 라고 하면서, 그 모든 정보를 다 자기에게 적용을 시키게 되면, 그러면 자기가 굳이 주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에게 있는 악마의 품성과 성경에서 뽑아낸 것을 결합시키게 되면, 자기는 이제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가 하는 것이 이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절대적인 선이라고 여기게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범죄한 인간의 본성이 딱 떨어진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신론자의 특징인데, 즉 "내가 신이기 때문에 내가 옳다" 라는 겁니다. 하늘에 태양이 둘이 될 수가 없는데, 그러니 자기도 섬기고 주님도 섬기던 그 분열된 의식이 이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하나님에게 무엇이 정의로움이고 선함인지, 그 지식만 배워서 자기에게 장착을 시키게 되면, 자기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가면, 하나님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 인간은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
그것이 바로 악마가 우리 인간에게 심어준 것인데, 그런데 이런 것들이 어떤 환경에서 조성된다는 겁니까?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이것은 감사가 전혀 아닌데, 감사는 그냥 "주님,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스스로 자기를 독립시키려고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죠.
왜 독립을 하려고 합니까? 독립을 하겠다는 것은 곧 무섭다는 것인데, 즉 자기를 지킨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기에 겁이 난다는 겁니다. 자기 가치를 자기가 지키지 못해서 겁이 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에게 있어서 고상하고 좋아 보이는 것들은 다 베껴와서 자기 것으로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 노력을 인간들은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무신론' 이라는 말이죠. 즉 "나도 알만큼 안다" 라는 겁니다.
* 하나님을 믿음으로 무신론자가 될 수 있는 방법 !!
다시 요한복음 3장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니고데모가 알았던 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을 믿음으로 무신론자가 될 수 있는 방법, 바로 그것이란 말이죠.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빼먹을 것이 있다는 겁니다.
신은 대단하신 분인데, 자기에게 필요한 것들은 모두 다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신의 율법과 말씀 속에서 뽑아낼 것은 모두 다 뽑아낸다는 겁니다. 그러니 신 앞에서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신 앞에서 자기를 더 위대하게 만드는 방법으로서 신을 믿는다는 말이죠. 그게 유대사회였는데, 예수님을 죽였던 사회라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의 환경과 전혀 다르지 않는데, 못난 자가 되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니고, 지금보다 더 잘난 자가 되기 위해서 교회에 다닌다는 말이죠. 즉 "너는 이런 것을 모르지? 나는 이것까지 안다" 라고 하면서, 그런 자랑거리를, 하나님 앞에서도 자랑할 수 있는 자랑거리를 원해서 교회에 다닌다는 겁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보면, 이미 자기는 죽은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라는 겁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게 아니고, 이미 죽은 자로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겁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주님을 바라볼 때, 비로소 자기 죽음을 !!
그래서 교재 129페이지에 보면, "죄 용서는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강도가 구원을 받은 것을 봄으로써 아는 겁니다" 라고 되어있는데, 즉 주님을 바라볼 때 비로소 자기가 죽어있음을 알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죄라는 것은 일방적인 용서를 받는 시점에서 처음으로 경험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상식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죄를 알아서 "이것을 어디서 처리하지? 동구청에 가서 할까?" 라고 하는데, 과태료가 나오면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과태료가 좋은 것이 아닌데, 그러니 자기가 죄를 지었으면 그것을 처리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선하니까 말이죠. 그러니 그 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죄를 갖다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집이 깨끗하려면 쓰레기를 잘 버려야 하듯이 말이죠.
그렇게 '나' 라는 것은 원래 깨끗해야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기의 죄는 마치 쓰레기를 버리듯이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목사가 십자가의 피로 깨끗해진다고 하니, 자기 죄를 거기 십자가에 버린다는 말이죠. 그래야 자기가 깨끗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뭐라고 했습니까? 무신론자인데, 그야말로 온갖 좋은 것들은 다 배웠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죄 용서를 받을 때 비로소 애초부터 모든 것들이, 즉 용서를 받겠다고 하는 것조차도 죄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죄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부터 말미암아 나에게로 돌아오겠다" 라는, 그 의지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곧 죄라는 겁니다. 주님을 자꾸만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자기를 포기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굳이 에스겔서 37장을 다시 이야기할 필요가 없지 싶은데, 우리는 매개체인데, 즉 자기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연결하기 위해서 있다는 겁니다. 자기 속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다른 사람 속에서 하시는 예수님의 일을, 그렇게 서로 서로 연결하기 위해서 있다는 말이죠. 즉 해골 덩어리인 우리가 만나서 이스라엘의 군대가 되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 그리스도의 몸 !!
다시 설명을 해드리면, 인간은 매개인데, 여기서 매개의 역할은 연결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무엇을 연결합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서로 연결하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안에 있는 타자인 주님과 상대방 속에 있는 타자인 주님을 서로 연결하게 될 때, 그게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게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에는 개인구원이 없는데, "나만 살겠다" 라고 하는 게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결국 자아가 문제라는 겁니다. "나만 살겠다" 라고 하니 마귀가 겁을 주고 협박을 한다는 것이죠. 제가 어느 강의에서 "악마가 우리에게 으름장을 놓는다" 라고 했는데, 항상 우리에게 으름장을 놓는다는 겁니다.
악마가 우리 속에서 으름장을 놓아서, "네가 자칫 잘못하면 망하는 수가 있다. 죽는 수가 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것은 달리 말하면 무슨 의미입니까? "나는 지금 망하고 있는 않은 형편이고, 죽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악마가 자꾸만 각인을 시킨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살아야지, 살아야지" 라고 하는데, 그래서 오늘날 악마의 모습을 적절하게 잘 보여주는 것이 '보이스 피싱'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다들 한 번씩 경험을 해보았지 싶은데, 그들에게 전화가 올 때 어떤 식으로 옵니까? 협박성으로 온다는 말이죠. 그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까, "당신이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망한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악마가 하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이미 망해서 시체가 된 자에게, 다시 망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 차원에서 한국교회의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보라는 겁니다. 설교를 하면서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그게 과연 보이스 피싱과 차이가 나느냐는 말이죠.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이것을 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라고 했을 때, 그때 성도들의 입에서는 "아멘" 이란 소리가 터져 나오는데, 그런데 이게 아멘을 할 내용이냐는 겁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주일성수를 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그렇게 순종하지 않아서 망한 자식들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라고 하는데, 자식까지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인간에게는 자식이 자기 영광이기 때문에, 자식 이야기가 나오면 그냥 넘어간다는 겁니다. "내 자식 내놓았습니다" 라고 해도, 자식 이야기가 나오면 호들갑을 떤다는 것이죠.
그런데 보이스 피싱을 주된 테마가 무엇인고 하니, "당신 자식이 교통사고를 냈는데 합의금이 필요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자식을 집어넣어서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보이스 피싱을 우리가 감추고 싶어하는 것을 얼마나 잘 캐내는지 모르는데, 우리가 상상도 하기 싫은 것들을 말이죠. 우리의 본심을 보이스 피싱이 다 이야기를 해준다는 겁니다.
* 살 궁리를 하지 말라 !!
다시 요한복음 3장으로 돌아가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네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라고 하신 것은, 이것은 중요해서 큰 글씨로 쓰겠는데, "이 건방진 인간아, 살 궁리를 하지 말라"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살 궁리를 하면서 보는데, 그렇지요? 그러니 벌써 성경해석이 엉터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네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 라는 것은, "너는 지금 네가 어떤 인간인지, 그 형편을 전혀 모르고 있다" 라는 겁니다.
설교를 듣고 "살 궁리를 했는데 드디어 살았다" 라고 느끼면 '아멘' 이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데, 하지만 그 아멘은 매우 위험한 아멘이라는 말이죠. 진짜 아멘은 "내가 살 궁리를 했는데 살았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하, 내 속에 예수님이라는 타인이 들어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하게 된다는 겁니다.
* 주님과의 사귐 속에서 !!
그렇게 자기는 혼자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주님과의 사귐 속에서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때의 아멘은 그야말로 찬미의 아멘이라는 것이죠. '고맙습니다' 라는 의로서 말이죠. 원래 아멘은 '그렇습니다' 라는 의미이지만, 거기에 감사가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그런 아멘을 하고도 10초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공포에 휩싸이지만 말이죠.
그래서 성경은 "지금 예수님이 살아계셔서 이런 이런 활동을 하십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성경은 네가 아니고 나에게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 안에 예수님이라는 타인이 들어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알아듣는다는 겁니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런데 여기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고 뭐라고 합니까?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니고데모는 누구 이야기를 합니까? 자기가 어떻게 하면 잘 될 수 있는지, 즉 자기 살 궁리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책망조로 말씀을 하시는데,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이것은 니고데모가 아니라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보면 되는데, 즉 "너는 어떻게 그렇게 설교를 듣고 복음을 들어도 네 생각밖에 하지 못하느냐?"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살 궁리만 하고 있는데, 이미 죽은 자가 그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죠.
* 너는 이미 죽었어 !!
예수님의 그 모든 말씀은 우리를 무조건 죽었다고 여기고 하시는 말씀인데, 사실은 죽었지만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죽었는데, 그 죽은 자를 주님의 능력으로 어떻게 살려내시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해석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말씀을 보면서 "나는 이미 죽었다" 라고 하면서 들어가야지, "내가 어떻게 하면 살지?" 라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병원에 가면 심장이 뛰는 것을 확인하는 기계가 있는데, 파동이 뛰지 않고 멈추면 의사가 사망선고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게 뛰고 있다고 여기지만 주님은 멈추었다고 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은 그 멈추어진 심장을 뛰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자기가 뛰는 게 아니라, 자기 안에 예수님이라는 타인이 들어와서 남의 생명, 즉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뛴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악마는 견딜 수가 없는데, 악마가 죽여놓은 인간은 예수님이 살려내신다는 것, 이것은 악마의 모든 계획을 망가뜨리는 것인데, 이것을 악마는 참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악마는 인간을 달래는 쪽으로 가는데, "너는 살아야지" 라고 하면서 말이죠. 즉 "하나님에게 많이 배워서, 그 실력으로 너는 살아야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느 정도 잘못인고 하니까, 누워있는 사람이 다리미처럼 생긴 심장 제세동기를 들고 퍽퍽 눌려서 심장을 다시 뛰게 할 수 있습니까? 심장마비에 걸린 사람이 움직일 수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은 주님이 하신 것인데, 그래서 깨어나면 주님을 자랑해야지 자기를 자랑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열심히 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자랑해야 하는데, 그것이 갈라디아서 6장 14절 말씀이라는 것이죠.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참 쉽다는 겁니다. 성경말씀이 자기 속에 예수님이 들어있는 사람은 전혀 어렵지 않다는 말이죠. 딱 하나만 받아들이면 되는데, 즉 "나는 죽었다" 라는 겁니다. 그런 죽은 자에게는 살려고 하는 의지조차도 죄가 된다는 말이죠. 죽은 자는 죽어있으면 되는데, 살 의지를 가질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 예수님의 활동성 !!
그런데 이것을 언제 아는고 하니, 교재 128페이지에 나오듯이 자기가 이미 죄 용서를 받은 시점에서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의 용서하심, 즉 예수님의 피만 자랑하게 된다는 말이죠. 자기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다 십자가 덕분인데, 죽은 자의 파동이 뛰는 것은 예수님의 활동성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내가 뛴다" 라는 것을 제로로 만들고, 즉 죽은 자로 만들고, 여기에 성령이 임하면 성령에 의해서 뛰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전에는 "나는 나의 것이다" 라고 했는데, 이제는 "나는 주님의 것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죽은 자를 살리셨는데, 예수님의 자기 희생으로 말이죠. 그것을 요한복음 3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보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다시 말해서, "인간이 악마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은 육인데, 이 육은 그만 육으로 빠지고, 십자가로 온 영만이 천국으로 간다" 라는 겁니다. 육은 지옥으로 빠지고, 영으로부터 온 것은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말이죠. 그리고 바로 이 시점에 인자고 죽고 들려야 한다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이 일을 하셨다는 겁니다. 인간은 할 수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유대사회에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무신론자로서 취급을 받았는데, 즉 신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들이 믿는 여호와가 그들에게는 없으니 신이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 귀신이 들린 자라고 했는데, 그것이 성경에 여러 군데에 나온다는 겁니다.
(요 7: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다시 말해서, "당신은 무신론자다" 라는 것인데, 요즘 같으면 "당신은 영지주의자다" 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말이죠(ㅋㅋ). "우리가 무엇을 해야지" 라고 하면 괜찮고, 그것이 아니고 "성령이 하십니다" 라고 하면 영지주의자라고 해버린다는 겁니다.
이제 교재 129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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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 용서를 해버리니 중풍병자도 놀랬고, 친구들도 놀랬고, 또 주변 사람들이 다 놀랬습니다. "주여, 이것은 우리가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는데, 절대로 자기들이 요구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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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9: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마 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마 9: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마 9: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마 9: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마 9: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 죄 용서 !!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와서 지붕을 뚫고 들어가는데, 그렇게 힘들게 힘들게 주님에게 접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 용서를 받으려고 그렇게 했습니까? 그게 아니면 중풍병이 나으려고 그렇게 했습니까? 중풍병이 나으려고 그렇게 했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지금 심장은 뛰고 있는데 어디가 문제인고 하니,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몸이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 것만 고치게 되면, 심장에 뛰는 것에 부합이 되는 건강한 신체를 가진다는 것인데, 그게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이 예수님에게 기대한 것이란 말이죠.
다시 말해서, 우리는 "나는 아직도 살아있는데, 다만 그 일부가 고장이 났습니다. 그것을 고쳐주세요" 라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에게 요구하는 것이, "다른 것은 손대지 마시고 이것만 고쳐주세요. 그러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인데, 중풍병자와 친구들이 그런 마음가짐으로 예수님에게 왔다는 겁니다.
이게 그들의 요구사항인데, 그런데 주님은 그 요구를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고, '죄 용서'를 해주신다는 말이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그가 죄 용서를 받은 시점에 준해서, "네가 중풍병이 걸린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고, 그런 일이 수 없이 많이 일어나도 너는 할 말이 없는 존재다" 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이 중풍병을 고쳐달라고 한다는 것은, 그것은 아직 자기 죄를 전혀 몰라서 그렇다는 말이죠. 예수님에게 요구할 필요가 없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인데, 정말로 주님이 그에게 줄 수가 있는 것은 병을 고쳐주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 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만약에 그가 죄 용서를 구했으면 받을 수 있을까요? 전혀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이 만든 죄는 죄가 아니라는 것이죠. 인간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이것은 죄이고, 이것은 죄가 아니다" 라고, 자기가 구분을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장단에 전혀 말려들지 않고, 아예 근원적으로 죄 용서를 해주신다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는 이미 자기가 죽은 자임을 알게 되고 말이죠.
* 창세기 내부에 흐르는 원리를 !!
이제 교재 130페이지를 보겠는데, 그 제목이 '6강, 아벨 제사에서 노아 언약까지' 라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이제 진도가 겨우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아벨 제사에 이르렀는데, 그런데 나중에 보면 다 끝나있다는 말이죠. 그것은 원리가 그 안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핫도그 안에 들어있는 소시지와도 같은데, 그 소시지를 우리가 살펴보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창세기를 보면서 명심해주어야 하는 것은, 여기에 무슨 사건들이 있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창세기가 어떤 양상으로 흐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요한복음 1장 15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즉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라고 되어있다는 말이죠. 우리라고 하면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먼저 태어나신 분이다" 라고 할 텐데, 그런데 세례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선 이유는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요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그러면 여기서 '앞선다' 라는 것과 '먼저 계신다' 라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이냐는 것인데, 세례요한이 분명히 그것을 구분하고 있다는 말이죠. 차이점이 없다고 한다면 굳이 반복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바로 그 점을 알기 위해서 교재 131페이지를 보자는 것이죠.
* 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
예수님이 12제자를 뽑았는데, 그런데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라고 하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저주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베드로의 말이 맞는데, 처음으로 베드로는 자기 속에 들어있는 말을 제대로 했다는 것이죠.
(막 14:71)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막 14: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이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는데,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솔직한 표현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나' 라는 것이 수시로 다르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어제 다르고, 또 오늘 다르고, 그렇게 다르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한 말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오늘이 되면 모른다는 말이죠. 그래서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자기 육신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겉으로 말을 해왔었는데, 그것을 누구에게 했습니까? 타인에게 했다는 말이죠. 자기가 남들에게 하는데, 말이란 것이 원래 그렇다는 겁니다. 심지어 여기에 예수님도 포함이 되는데, 베드로는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과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왔다는 것이죠. 육신을 자기 방식으로 지키기 위해서, 자기가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언어라는 것을 계속해서 사용해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보니 진짜 자아, 즉 진짜 자기 말을 해본 적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진짜 자기 말을 누가 하게 하는고 하니, 주님께서 닭을 준비하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닭은 일종의 알람시계인데, 베드로 자신의 능력으로는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모두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죠. 물론 우리도 당연히 그러하고 말이죠.
* 닭인가? 베드로인가?
여기서 닭을 베드로가 준비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준비하신 것인데, 그러니 주님과 닭은 직통관계라는 겁니다. 나중에 성령을 받으면 닭이 베드로가 되는데, 물론 실제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와 사도들이 닭의 기능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직통관계라는 겁니다.
물론 닭은 멋도 모르고 울었는데, 닭이 결코 머리가 좋은 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베드로가 3번째로 예수님을 부인할 때였다는 겁니다. 그러니 닭이 울기 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 부인해야 한다는 말이죠. 주님은 다 계획이 있었다는 것이죠(ㅋㅋ).
베드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음 속에 있는 진실된 말을 하게 되었는데, 즉 "나는 이 분을 모릅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즉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필히 예수님과 결별해야 합니다" 라는 것을 처음으로 내뱉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으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 이미 너는 악마의 밥이다 !!
그래서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 이전에, "악마가 호시탐탐 너희들을 노리고 있다" 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악마는 사람들보다 세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가 개입되지 않으면 12제자고 뭐고 간에 악마의 손에 다 넘어가게 되는데, 그러니 먼저 악마의 손에 넘어가는 체험을 해야한다는 것이죠. 베드로는 비롯한 12제자들이 말이죠.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주님의 말씀이 빈 말이 아닌데, "악마가 너를 노리고 있다" 라는 것은, 머리에 뿔이 달리고 눈이 찢어진 악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있는 타자로서의 악마인데, 즉 "이미 너는 악마의 밥이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도 체험을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 주님의 우리의 소원을 들어줄 의사가 없어 !!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라고 했는데, 여기서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떤 효과를 낳는고 하니,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들어줄 의사가 없다고 하는 예수님의 뜻을 내가 대신해서 전한다"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무엇을 요구하든지 그것을 일체 들어줄 의사가 없다" 라고 하는, 그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은 "나도 신이 되겠다" 라고, 그렇게 악마에게 유혹을 받아서 나선 존재들이라는 말이죠. 자기가 신이면 다른 신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즉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 두 개가 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의 자체적인 능력으로 얼마든지 착하고 정의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인데,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말이죠. 그 정도로 자기는 잘났다는 것인데,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일종의 자기 증명이라는 할 수 있다는 말이죠.
* 떡이나 먹고 지옥에나 가라 !!
그래서 신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빌지만, 주님께서는 이미 그 출처가 이미 더럽기 때문에 전혀 받아주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어있으면도 살아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는 주시되, 우리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기도응답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떡이 먹고 싶어서 떡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그래서 누군가가 떡을 가지고 왔다면 우리는 울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미운 놈에게 떡을 하나 더 주기에 말이죠(ㅋㅋ). 떡이나 먹고 지옥에나 가라는 것인데, 부자는 지옥에 가서 기도를 했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동생들이 있는데, 어떻게 좀 해보려고 말이죠.
인간은 죽어야 마땅한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리 소원을 빌고 해도 하늘나라의 떡인 예수님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매일같이 책망하는데, 엉뚱한 것을 가지고 기도하지 말라고 말이죠. 그래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로 데리고 간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이미 죽은 존재인데 왜 자꾸만 따로 자기 것을 챙기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 베드로의 실패가 곧 성공 !!
우리가 "주님은 주님이고, 이것은 내 것입니다" 라고 하면, 주님은 그것을 와해시켜 버린다는 말이죠. 성도는 망해도 망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 것이 망하는 것 자체가 곧 주님의 승리에 합류가 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받아들이는 순간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경우에는, 그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하는 것이 곧 성공인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씩이나 모른다고 하면서 부인하면서 닭이 울고 하는 절차, 그것이 곧 베드로의 경우에는 성공의 길로 접어든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니고데모를 봐도 인간은 육임을 알 수 있는데,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면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라고 하면서 자기 생각만 한다는 겁니다. 자기는 백 번이라도 다시 태어나서 천국에 가고 싶다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육이라고 하시는데, 그런 육으로는 안 된다는 겁니다.
* 십자가에서 새로 다시 !!
그래서 십자가에서 새로 시작해야 하는데, 그런 한국교회는 그게 아니고 자기 자신을 십자가로 끌어 앉아버린다는 말이죠.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즉 자기는 죽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서 십자가라는 지식을 얻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데, 들은 것은 있어서 말이죠. 그러면서 온갖 미사여구는 다 가져다 붙인다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기는 부정을 당하고 새로 시작해야 하는데, "나는 십자가 지식을 많이 들어서 알고 있다. 고마해라"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게 아니고 십자가에서 새로 시작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자기는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 된다는 겁니다. 피를 값 주고 산 주님의 것,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피가 중요합니까? 우리가 중요합니까? 피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10장을 보겠는데, 29절입니다.
(히 10: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 십자가는 지옥에 갈 근거도 돼 !!
그러니 십자가가 구원의 근거도 되지만, 심판을 통해서 지옥에 갈 근거가 되는 것도 역시 십자가라는 말이죠. 그러니 교회에는 당연히 십자가만 증거하면 되는데, "당신의 소원을 들어드립니다"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교회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래서 10년 동안 복음을 전한 목사라고 해도, 그 다음 주에 복음이 나오지 않으면 용납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가짜인데, 목사가 지식으로 십자가를 전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성령으로 전해야 하는데, 그러면 책망이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 그렇게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교회가 부흥이 되었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성령이 아니고 악령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교인들은 악령의 소리인지 성령의 소리인지 분간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래서 바깥에 나가서 "우리교회는 50주년이 되었습니다. 부흥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얼마나 악마적인지 모르는데, 두 세 명이 모였다고 해서 지옥으로 내치는 주님이 아니라는 것이죠. 물론 복음도 전하지 않았는데도 두 세 명이 되는 교회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죠(ㅋㅋ).
베드로가 닭 울음소리라는 직통계시를 만났을 때, 비로소 자기 안에 있는 타자는 자기의 관리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이전에는 자기가 예수님을 믿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가 구원을 받는 것이 자기 일이 아닌 주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즉 주와 객이 바뀌었다는 겁니다. 자기가 주님의 대상이 되는데, 그래서 자기가 주님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것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주님에게 기도해서 무엇을 얻어내려고 하는 수작을 부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분은 "그렇게 설교하면 한국교회에 성도가 얼마나 남겠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것을 우리가 관심을 둘 바가 아니라는 말이죠. 주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에 택한 자가 두 명이라고 하면, 그 두 명만 건지고 나머지는 탈락시키는 것이 합당하다는 말이죠. 천만 명에서 두 명이 되니 좀 섭섭할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사람들의 숫자와 천국은 무관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은 코로나의 시대가 아니고 영적전쟁의 시대인데, 코로나 바이러스도 주님 손에 달려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델타 바이러스든 감마 바이러스든 간에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하는 것은 영적인 것인데, 지금 우리는 그런 영적인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 아벨의 제사 !!
다시 교재 131페이지를 보겠는데, 여기 아벨의 제사가 나온다는 겁니다.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이 제사를 드렸는데, 그렇게 아벨이 제사를 드릴 때 양을 잡고 기름을 구분해서 드렸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아벨의 제사는 마감이 아니고 시작인데, 왜냐하면 이 제사의 마감은 아벨이 죽은 일이 되어야 마감이 된다는 겁니다.
사실은 예수님이 죽어야 마감이 되는데, 왜냐하면 아벨 속에는 예수님이 들어있다는 것이죠. 베드로 속에 주님이 들어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 아벨의 죽음이 "예수님이 장차 죽게 된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물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벨은 매개물인데, 물론 우리도 역시 매개물이라는 말이죠. 예수님의 약속을 전달하는 전달체, 혹은 연결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매개체, 연결체, 전달체, 이것이 모두 같은 의미인데, 그래서 "만약 내가 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은 혹시나 저 사람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그렇게 연결하는 역할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연결을 시도할 때는 그것이 자기의 살았음이 아니라 죽음인데, 마치 아벨처럼 말이죠. 그래서 "내가 아니고 주님이 하게 하셨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즉 자기를 주님 앞에 죽은 자로 내세우는 것이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모습이 된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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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벨의 살인을 위한 살인자 가인은 당장 죽어서 안 됩니다. 그는 아벨 제사의 외곽을 장식하도록 번식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가인의 후예가 건설한 것이 도시국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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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벨의 외곽을 장식하는 가인 !!
여기에 보면 "외곽을 장식한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것이 바로 가인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과연 가인일까요? 아닌데, 가인 속에 악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악은 악대로 이 세상에서 팽창하고 번창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악이 그렇게 번창해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환경이 형성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벨의 노선이 계속해서 죽고 죽고 죽는데, 그러면서 그 아벨의 사회적 정치적 환경은 누가 차지해야 하는고 하니, 가인의 세계가 차지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가인의 세계가 아벨의 죽음을 모시고 다니는 셈이 된다는 말이죠. 그 가인의 세계가 요한계시록까지,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인의 후예가 제일 먼저 한 것이 도시를 만드는 것인데, 이렇게 도시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이 매개체이니 그 안에 악마가 들어있는데, 그래서 악마와 악마가 결합이 되면 스스로 무신론자가 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게 아니고 믿는데, 그렇게 믿고 하나님의 뜻을 이용하되, 하나님을 믿는 최소의 결과는 자기가 신이 되는 것이란 말이죠.
자기가 더 위대해지는 것인데, 그렇게 위대해진다는 것은 힘을 모을 대로 더 모으는 것인데, 그럴 때 인간은 입가에서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는 겁니다. "주식이 올랐습니다" 라고 하면 웃음이 저절로 생긴다는 말이죠. "야, 내 결정이 이렇게 성공작이 될 줄이야. 역시 나는 마이더스의 손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주님이 보시기에는 마이너스의 손이지만 말이죠(ㅋㅋ).
제가 어느 강의에서인가 그런 이야기를 했지 싶은데, "자기가 걸어온 그 모든 것에 의해서, 그것이 자기를 한꺼번에 질식을 시키고 몰락을 시키는 환경이 된다" 라고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그 무게를 자기가 도저히 어떻게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 꼰대 이야기 !!
꼰대와 같은 이야기를 잠시 해보면, 제가 결혼할 때는 방 한 칸에 좋아하는 사람만 있으면 되었다는 겁니다. 그 정도만 되어도 결혼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헌 아파트도 안 되고 새 아파트에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부모들도 새 아파트를 한 채 주어야 부모노릇을 다 한 것처럼 여긴다는 말이죠. 그래서 "3억을 줄 테니 나머지는 너희들이 대출을 받아서 하든지 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꼰대의 입장에서 보면, 도대체가 왜 그런 짓을 하느냐는 말이죠. 요즘은 젊은이들은 결혼해도 아이도 잘 낳지 않는데, 그러면 두 명이 살 면적만 있으면 된다는 겁니다. 30평이 아니라 13평만 해도 충분한데, 더 넓으면 청소하기도 힘들고 여러 가지로 불편한 것이 다 많다는 것이죠.
젊은 사람들은 이런 지혜를 모르는데, 왜냐하면 부모가 자식에 대한 교육에 대해서 손을 놓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터넷과 친구들에게서 교육을 받는데, 하지만 그것은 허풍이고 허세인데, 즉 힘의 집결이라는 말이죠. 돈을 모아서 차부터 먼저 바꿀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여자는 살림을 잘 살면 되는데, 그런데 요즘은 여자가 수입이 더 많아야 한다는 말이죠. 부모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가 없는데, 말을 듣지 않는다고 그냥 내놓았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천하에 자기 자식보다 귀한 자식은 없다는 말이죠. 내놓았다고 하면서도 자기 자식이 자기의 자랑거리라는 겁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라고 하는데, 그런데 실상은 십자가가 아닌 자식을 자랑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게 가인의 세계인데, 이런 가인의 세계에서 허풍과 허세를 눈으로 목격하고 배워서, 그것이 자기에게 스며들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교재 132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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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인의 도시에서 힘이 없는 자는 처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는 '좋은 힘'과 '나쁜 힘'을 가릴 처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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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은 힘, 그 자체로 이미 '굿' !!
힘을 가지면 이미 그것으로 좋은 것인데, 그래서 살아남은 자가 곧 승자이며 정의이며 진리이며 구원이고 메시야라는 말이죠. 반면에 패배한 자는 이 땅에서 저주받은 자이고 심판을 받은 자이고 징벌을 받은 자라는 겁니다. 즉 죄인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의와 진리는 자본이고, 곧 돈의 소유에 달려있다는 겁니다. 교회도 그러한데, 돈이 많은 교회가 참된 교회라는 말이죠. 돈의 권세가 죽음의 권세를 이긴다는 것이죠. 그래서 돈이 있는 곳이 천국이고, 교인들은 부자가 되는 것이 진정한 구원의 증표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가 하나님이 살아계신 교회라는 말이죠.
성경에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말라고 해도, 그런 말을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돈을 많이 내는 자가 성령을 받은 성도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악마에 속한 자들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그들에게 복음이란 "돈의 힘이 곧 진리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헌금을 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방해하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을 누가 한다는 겁니까? 이게 중요한데, 하나님에게 허락을 받았던 악마의 후예들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 모든 주장이 이미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오직 십자가만이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기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아벨의 죽음, 즉 주님의 그 억울한 죽음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한다는 겁니다. 그 주님의 피가 우리 안에 타인으로서 들어오면, 우리는 그 주님, 그리고 주님의 형제들과 서로 연결점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라는 말이죠.
* 거침없이 죽을 수 있는 사람 !!
방금 제가 교재 132페이지와 133페이지를 거의 읽다시피 했는데, 그러니 과연 이 책이 팔리겠습니까? 그 어떤 긍정적인 요소도 없다는 겁니다. '코로나 시대에 살아남은 방법' 이라고 하면 팔리겠지만 말이죠. 우리는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인하여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러니 주님이 성령을 주신 것은 거침없이 죽을 수 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인데, 죽는 것이 전혀 두렵고 부끄럽지 않는 자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을 주셨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교회는 죽음의 권세를 이긴 자들의 집합인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다" 라고 하는 주님의 약속이라는 겁니다. 그 증표가 교회이고 말이죠.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래서 모든 강의가 어떻게 진행이 됩니까? "우리는 이렇게 우리 안에 계신 분으로 인해서 나 자신을 이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 생각을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삶이 되었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남들이 보기에 자기가 얼마나 멋지고 근사한지, 그런 것은 전혀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이제 교재 133페이지를 보겠는데, 이것만 더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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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 가인의 세계로 하여금 자기 사명에 충실케 하시는 이유는, 아벨의 제사에서 생산이 되어야할 것, 곧 '하늘로 상달되는 핏소리'가 생산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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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10)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 허풍과 허세로 부풀어진 이 세상 !!
하나님께서 가인의 세계를 번성케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될수록 아벨의 죽음, 즉 아벨의 제사와는 이 세상이 반대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그 제사에 근접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이 아니고서야 아벨의 죽음에 관심을 가질 수 없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풍성하고 번영하는 이 세상에서, 인간들끼리 서로에게 찬란한 미래를 약속하는 이 세상에서, 그 어느 누가 아벨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겠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허풍과 허세로 부풀게 하신다는 것이죠.
요즘 젊은 아이들이 여기에 그만 푹 빠지고 말았는데, 물론 나이가 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만 말이죠. 차를 바꾸고 집을 바꾸고 새로운 제품이 나오면 환장을 하고, 그리고 틈만 나면 외국으로 배낭여행을 떠나려고 하고, 그야말로 모두가 다들 난리라는 겁니다.
* 어느 노총각을 비애 !!
어떤 사람이 나이가 42살인데, 다니는 직장도 꽤 괜찮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사람이 선을 무려 300번 이상을 보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보살을 찾아가서 왜 여자들이 자기를 만나자마자 다들 바로 도망을 가버리는지,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는 말이죠. 이게 TV에 나온 것인데, 선녀보살인 서장훈을 찾아왔다는 겁니다(ㅋㅋ).
옛날에는 시집을 사람도 보지 않고 그냥 보냈는데, 물론 그때가 좋다는 것은 아니고 말이죠. 여자도 인격이 있는데, 너무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아무튼 이 세상이 허세와 허풍으로 점점 더 부풀어지고 있다는 말이죠. 이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는데, 왜냐하면 십자가와 멀어지기에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셨는데, 육은 육으로 가기 때문에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 세상은 예수님의 그 말씀마저도 아스라이 메아리치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고맙게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꾸짖어주시는데, 그러니 우리는 늘 감사하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구조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오직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주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니 이제 주님과의 사귐을 통해서 날마다 주님이 주신 새로운 생명이 저희들 속에서 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1,8,03 오전 10시에 마침.
나의 핏소리가 아닌, 아벨의 핏소리가 들리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