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무너짐

아빠와 함께 2021. 7. 16. 17:57

강남-누가복음 6장 49절 (무너짐) 210706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6장 46절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이 비슷한 이야기가 마태복음 7장에 보면 거기에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부딪치매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무너지고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안 무너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이 말씀을 생각할 때 이 한 가지만 생각하게 되면 이 말씀이 쉽게 풀려요. 뭘 하느냐 하면은 성도는 다시 태어납니다. 성도는 다시 태어난 자 맞지요? 여기서 이건 아니에요. ‘내가 다시 태어난다’ 이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냐 하면은 니고데모의 발상이고 니고데모의 한계입니다. 내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성도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요소에서 다시 태어나는 거에요. 내가 괜찮은 내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요소, 주님의 요소를 합류한 채 주님의 요건이 합류한 채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주님의 요소는 뭐냐? 이게 예수님의 말씀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인데 이 말씀을 이렇게 늘여보겠어요. 최후의 말씀입니다. ‘최후의 말씀’. 말씀은 말씀인데 최후의 말씀이다. 왜 그러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그 다음에 끝났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모든 스케줄은 끝나버렸어요. 완성이 된 겁니다. 이 말은 끝났다는 말은 기쁜 말인데요. 더는 추가할게 없다. 더 보탤게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오셔서 세상 끝났다고 선언을 해버리거든요. 세상이 끝났으니까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요소가 있느냐 없느냐로 모든 판정은 다 종료되어 버립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것은 주님 보시기에 “저리가. 나는 더 이상 너희들 바치는 것은 싫어” 그런 것은 다 인정하지 않고 다 내보내거든요. 그게 끝이에요. 인간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끝났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예수님 오심으로 드디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아담의 후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정체가 그 한계가 이제 끝이 난 겁니다.


그럼 새로 시작한다는 말은 오신 예수님부터 새로 시작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더 추가할게 없지요. 그리고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예수님의 요소를 가지고 다시 태어나니까 이게 뭐냐 하면은 천국의 백성으로 인정받는 겁니다. 인간성이 훌륭한 게 아니고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주님의 요소가 들어 있어요.


주님의 요소. 주님의 요소라고 하는 것은 마지막 최후에 말씀이 남긴 요소가 그냥 옛날 모세 언약 같으면 우리 코앞에 와서 stop이 되지만 새 언약은 우리의 몸이 있는데 이 죄 된 몸이 있는데 말씀이 여기서 stop이 되는 게 아니고 말씀이 이 안에 들어와 버려요. 이게 새 언약이에요. 못 들어오고 주춤하는 것은 옛 언약이고 확 이 안에 들어와 버리는 겁니다. 들어와 버리는 거에요.


이게 물론 제가 지어낸 이야기지만 이게 무슨 원리냐 하면은 함께하는 원리라고 합니다. 함께 원리 하나 예를 들게 되면 3나누기 6 + 3 = 3과1/2 돼요. 맞잖아요? 맞지요? 그런데 괄호를 해버리면. 3나누기 (6+3). 괄호부터 먼저 계산을 합니다. 이건 1/3이 되지요. 이 괄호 있잖아요. 괄호.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은 대신하심입니다. ‘대신’.


주께서 십자가로 홀로 십자가 안에다가 십자가를 확장시킵니다. 자신의 의로움에다가 자신의 말씀을 집어넣기 위해서 자신의 확장된 완성된 말씀 안에 이 말씀의 요소가 들어있는 사람은 말씀이 들어있다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함께’가 되는 거에요. 로마서 6장에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세례, ‘세례’.


함께 하는 세례의 예가 뭐냐 하면은 바로 세례 요한이 했던 물세례에요. 물세례. 지금 물 뿌리지만 세례 요한 때 어떻게 했습니까? 세례요한이 요단강 물에 들어가고 들어와 들어와. 그 유명한 말 드루와. 너 거기 서 있지 말고 들어와. 어디? 세례 주는 이 당사자 나한테 들어와. 들어오라고. 이게 물세례에요. 내가 물 안에 있고 너는 물속에 내가 있는 내 안에 합류하라는 거에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요단강 세례 받을 때 하늘에서 열리면서 누가 오느냐 하면은 성령이 오셨잖아요. 그럼 예수님 계신 곳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성령이 함께 있거든요. 들어와. 들어와. 예수님 있는 곳에 들어와. 아무도 갈 사람 없지요. 아직까지 성령이 오지 않았으니까. 성령이 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더 이상 예수님 하신 것 외에 더 이상 보탤 게 없다는 걸 아는 게 성령을 받은 사람이에요.


아담의 요소가 각 사람마다 다 있는데요.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이겁니다. 나이. 우리가 오늘 성경 보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인간에게 나이가 있다는 것. 이것은 아담의 요소가 있다는 거에요. 나이가 있다는 말은 곧 죽는다는 뜻이에요. 연세가 있다는 말은 어차피 곧 돌아가신다. 죽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나이가 있다는 것.


그러면 영생한 사람의 특징은 뭐냐? “내 나이가 어때서”. 이게 영생이거든요. 나이를 묻지 마세요. 그래서 어떤 분이 아주 고민 가운데 물었어요. 목사님 목사님 설교는 어른들한테는 잘 이해되는데 어린아이들한테도 목사님 설교를 어떻게 이해시킵니까 라고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해요. 애기 있는 엄마들은. 그럴 때 모든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그들에게는 죽음이 무서워요. 죽음이 무섭습니다. 죽음이 무서운데 그 죽음에 직면했다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점이에요.


따라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이야기만 하시면 돼요. 나이가 3살이든 4살이든. 어린아이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없어지는 것. 엄마가 없어지는 것을 죽음으로 느낍니다. 엄마가 장에 간다든지 엄마가 다른 방에 간다든지. 엄마가 화장실에 가면 애가 울기 시작해요. 왜 우는지 뭔가 괄호 있잖아요. 괄호. 함께. 6+3 이것부터 계산해야 돼요. 함께 있는 자가 없을 때. 함께 있으면 어린아이는 생명을 느끼고 함께 없으면 홀로 있으면 죽음을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아담의 그러한 본성과 그리고 예수님한테도 네가 나 믿어라가 아니라가 믿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너 내 지식을 알아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너 홀로 혼자 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28장 끝에 나와 있잖아요. “세상 끝날까지 혼자 두지 않겠다”


너에게 일어나는 일은 괄호를 생각해보면 자꾸 인간들은 내가 3이라면 내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 내가 잘해서 복 받은 일, 자꾸 3만 생각하는데 일어나는 모든 일은 주님에 의해서 주님의 요소를 확인하라고 일어난 일로 생각 못하느냐 이걸 우리에게 되묻지요.


주님, 함께 계신 분 때문에 그 분을 겨냥해서 일어난 일인데 우리는 오해하기를 나 겨냥해서 일어난 일로 하는 거에요. 그래서 오늘의 보면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고 말지요? 그리고 같은 뜻으로 바위 위에 지은 집은 또는 여기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안 무너지지요? 그러면 무너진다. 그 다음에 안 무너진다 이것을 우리보고 이야기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이 무너진다 안 무너진다를 몽땅 다 예수님 본인이 가져가요. 오늘 강의 끝났습니다.


내 말 듣지 않으면 무너진다의 그 무너짐을 예수님 자신의 것으로 가져가요. 그러면 예수님은 말씀하고 “내 말 들었지? 나 간다” 하고 구름타고 올라갔습니까? 아니지요? 말씀 던져 놓고 그 다음에 곧장 어디로 가십니까? 죽으러 가시잖아요. 무너지러 간다고요. ‘무너짐’. 죄도 없으면서 죄 있는 육신을 갖고 있는 인간은 이 꼴나고 이 짝 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로 가잖아요.


무너진다 안 무너진다. 안 무너짐은 부활이죠? 부활 십자가잖아요. 저주 받았으니까. 이 저주를 예수님한테 이걸 가져가는 거에요. 그럼 예수님한테 가져가면 모든 인간은 안 무너짐에 해당되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왜냐 하면은 안 무너질려면 무너짐을 예수님이 가져갔기 때문에 안 무너짐은 무너진다 그 이후에 나타날 때 안 무너짐이에요.


무너진다를 극복한 힘에 의해서 안 무너지는 거에요. 안 무너지는 것은 말씀 완성했기 때문에 다 이루었기 때문에 안 무너지는 것이고 무너지는 것은 오늘 본문에 보면 말씀 안 지켰기 때문에 무너지는 거에요. 그러면 주님께서 부활해서 안 무너졌잖아요. 결국 안 무너졌잖아요. 주님 혼자만 즐기기 위해서 안 무너졌습니까? 주님 자신만이 구원받기 위해서 안 무너졌습니까?


여기 괄호 있잖아요 괄호. 우리가 다시 태어나는 것은 예수님의 요소로서 다시 태어나는 거에요. 예수님의 요소로서. 그럼 결국 이 말은 뭐냐? 마지막 때에 오심으로 끝났다는 말은 지금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게 매일같이 무너지고 있는 중입니다.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나이 드셨으니까 서서히 무너지고 있어요. 지금. 저도 마찬가지고. 70을 바라보는 나도 무너지고 있고. 제일 연세가 작으신 분도. 모든 건 무너지는 거에요.


이 본문 말씀을 듣고 이 본문 말씀을 이미 성령 받은 사람 같으면 아 주께서 이 무너지는 절차를 겪어야 안 무너짐이 비로소 나에게 실효성이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이 말씀도 무너지는 말씀도 복음에 해당된다는 사실. 기쁜 소식이에요. 여러분들이 무너진다고 하니까 굉장히 기분 나쁘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여러분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이.


저 초등학교 다닐 때 어른 세계에서 궁금한 점이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 하나가 뭐가 신기했느냐 하면은 그 학교 마치고 난 뒤에 학생들 다 가고 난 뒤에 밤 되잖아요. 밤 되면 그 복도에 학생들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뭐냐 하면은 복도에 누가 사느냐 하면은 귀신들이 나타내요. 여고괴담. 괴담들이 나타납니다. 그걸 전제로 했을 때에 제가 굉장히 존경스러웠던 것은 학교 소사입니다. 소사 할아버지.


도대체 우리는 다 무서워서 밤중에 옛날 학교 밤중에 걷기 힘들어요. 왜냐하면 나무로 지었기 때문에 걸어가면 저그적 저그적 온 천지에 전부 다 삐걱거리는 소리 때문에 삐걱거리죠. 유리창은 KCC로 안 해가지고 창문 흔들리는 소리 나지요. 그런데 그 소사 할아버지는 새벽 3시고 2시건 간에 용감해요. 갈 때. 왜 소사 할아버지는 귀신을 안 무서워하는가에요.


정답을 알아요? 어릴 때는 굉장히 궁금했던 거에요. 어린애들은 다 무서워하는데 소사 할아버지는 소사가 무슨 뜻인지 알아요? 계약직 직원입니다. 허드렛 일하는 직원. 그 소사 할아버지는 무섭지 않은 이유가 본인이 귀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본인이 살만큼 살았어 이제는. 다 인생 다 겪었어요. 무서워 할 나이가 아닙니다.


그 소사 할아버지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귀신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고 뭘 무서워하느냐? 돈, 돈을 무서워하지요. 이거 짤리면 우리 손자 용돈 없다. 연금도 변변치 않은데 이거 없으면 우리 아내한테 잔소리 들으니까 안 된다. 버텨야 된다. 그러니까 인생 살게 되면 삐걱거리는 그런 소리가 여고괴담이 무서운 게 아니고 통장에 돈 없는 게 무서워요. 그것보다 더 무서운 귀신 없습니다.


그 정도로 인간이 갖고 있는 요소는, 인간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요소가 아니고 바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요소로서 가득 차 있어요. 이런 요소가 있으면서 오늘 본문 말씀 “주여 주여 하지 마라 내 말대로 행하라” 이렇게 하니까 인간들은 여기서 이제 뭘 하느냐 하면은 억지로 말씀을 지키는 거에요. 왜냐? 안 무너질려고 내가.


다시 무너지는 나를 양 어깨에 메고 말씀을 지켜가지고 으쌰으쌰 해서 주저앉은 나를 들어볼려고 이렇게 하는데 인간이 평생 동안 할 수 있는 것은 안 무너지는 게 아니고 그냥 보수공사에요. 땜질. 고친데 또 고치고. 고쳐놨는데 무너지고. 무너진데 또 고치고. 이거 하나 해결하면 또 생기고 이거 땜질하면 이거 또 생기고 이래놓고 성화했다고. 인간은 무너져야 돼요.


왜냐 하면은 아담의 그 원초적 흔적이 범죄해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말씀에 위반될 수밖에 없는 그 인간의 요소가 인간의 육신에 그대로 박혀버립니다. 제가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이야기한 대표적인 게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아담의 요소가 인간 속에 박혀서 인간으로 하여금 안 무너질래야 안 무너질 수 없게 만드는 아담의 흔적들이 이미 태어나서 박혀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예가 뭐냐? 성경에서 말하는 해산의 고통.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사람이 애 낳는 거 이상하지 않습니까? 언젠가 수요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하늘에 불덩어리 있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욥기에 나오거든요. 욥기에. 하나님이 욥에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욥아 하늘에 별 떠있는 거 신기하다고 생각해 본적 없냐? 인간은 자기 부축해서 무너진 자기를 일으킬려고 거기에만 신경 썼을 뿐이지 하늘에 불덩이 있는 거 하늘에 불이 왜 있어요? 하늘에 불 왜 있습니까?


제가 누구한테 물었는데 시원한 답변을 못 들었어요. 하늘에 불이 왜 있습니까? 굳이. 하늘에 불덩어리 태양이죠. 별이잖아요. 태양이 왜 하늘에 떠 있는 이유에 대해서 혹시 아시는 분 있으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유 몰라요. 욥도 몰랐습니다. 욥이 언제 하늘에 별이 떠있고 달이 떠있는 이유를 알았느냐 하면은 본인이 무너질 때에요. 본인이 무너질 때.


다시 말해서 ‘나’라는 존재는 처음 하나님의 스케줄, 프로젝트, 계획과 이게 죽이 안 맞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저 달과 별은 나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내가 저 별과 달과 같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달과 별을 해석했고 과학적으로 따졌던 거에요. 따질 주제도 못되면서. 따질 쨉도 못되면서. 달이 어떠니 별이 어떠니 로켓트는 어떠니 이렇게 따지는 거에요.


딱 여기서 보면 나중에 하나님이 욥에게 찾아오는데요. 오늘날 성도에게는 성령이 우리에게 찾아오잖아요. 성령이 오고 난 뒤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방법이 뭐냐? 성령이 오고 난 뒤에 말씀을 지키는 방법은 제가 한 아이디어를 내볼 테니까 여러분 한번 지켜보세요.


구름이 있습니다. 구름이 이렇게 있는데 구름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비가 오죠. 구름에서 비가 내려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제 아이디어에 의하면 여러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를 안 맞는 방법은 우산 그런 거 쓰지 마시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비를 안 맞는 방법은 뭡니까? 안 맞는 방법은 비가 떨어지기 전에 빨리 여기서 빨리 빠져나오면 되지요?


비가 떨어질 때 떨어지는 속도를, 속도가 뭐냐 하면은 이걸 가지고 중력 가속도라고 합니다. 9.8m/s². 1초에 1초되면 9.8m 내려오고 2초되면 19.6m 내려와요. 물방울 하나가. 이거 떨어지기 전에 빨리 싹 지나가면 되지요. 신약에 와서 성도가 말씀 지키는 방법은 저주스러운 이 세계에서 이것을 내가 멀쩡하게 서서 수직으로 서서 지킬 생각하지 말고 엎드려서 지나가면 되는 거에요. 엎드려서 지나가면 돼요. 이게.


지나가게 되면 여기서 함께 괄호라고 했으니까 함께 있는 주님이 위에서 오는 저주를 전부 다 커버해주시는 겁니다. 어째서 그렇느냐 하면은 이미 예수님께서 이미 한차례 다녀가셨잖아요. 다녀가셔가지고 어떤 비결을 배우셨느냐 하면은 죄 많은 세상에서 죄 짓지 않는 방법을 비결을 주님이 알고 있어요.


주님이 알고 있으니까 아까 괄호, 수학에서 괄호라고 하는 것은 뭐부터 먼저 푼다고요? 3나누기 (6+3) 이면 괄호 안부터 먼저하고 답이 1/3 나온다고 했지요. 이 괄호 주님과 함께 계실 때에 주님께서 이미 오셔가지고 죄 된 경험을 다 경험하시고 가실 때에 자기 백성과 함께 이 저주 받은 것을 다녀가게 하신 거에요. 다시 묶어서 가게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는 정죄함이 없다는 거에요. 그리스도 안에는 정죄함이 없는 거에요. 이 저주가 도달하지 않는 겁니다. 모든 말씀의 저주가 도달하지 않아요. 그 이유가 갈 때 멀쩡하게 서서 가지 말고 기어가라고 했지요. 이 말이 뭐냐 하면은 이건 경상도 말인데 혹시 여러분들이 경상도 사람은 알아들을 지 모르겠지만 서울 사람들은 알아듣기 힘들어요.


“수구리”. 수구리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경상도 안 살았어요? 수구리. 고개 숙여. 이미 무너진 채로 살아라. 무너진 채로. 안 무너질려고 자기를 부축하지 말고. 일곱번 넘어지면 여덟 번째 일어나야지 그러지 말고 여덟 번 일어서도 또 넘어져요. 아예 납작 엎드려서 살아가는 거에요. 범사에 감사하는 겁니다. 범사에. 모든 일에 감사하는 거에요. 작은 일에도. 그 작은 일 하나도 나를 위해 준 게 아니고 예수님의 요소와 관련 돼서 함께 해서 주신 거에요.


그러면 수구리가 되게 되면 농구나 축구할 때 이걸 자세를 낮춘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세를 낮춘다. 농구할 때 서장훈한테 물어보세요. 자세를 낮춰서 하는 거에요. 자세를 낮추면 뭐가 보이느냐 하면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그 광경이 보입니다. 매트릭스 영화의 장면이 뭐냐 하면은 숫자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겁니다. 우르르 내려와요 전부 다. 숫자가. 마구 내려오죠.


여러분들이 007 영화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007 영화에 보게 되면 한바탕 007이 위기에서 벗어나고 멋있게 나오고 난 뒤에 음악이 나오면서 눈꺼풀이 어떻게 돼요? 눈꺼풀이? 007이 권총을 쏘게 되면 보고 있는 보고 있는 시선이 통에 맞은 모양이라. 그래서 핏물을 머금고 눈이 내려가면서 007 숫자가 딱 뜨면서 그 다음부터는 음악 나오고 이런 장면 나오잖아요. 눈꺼풀이 내려앉는 거에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내려앉고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신구약입니다. 가정도 내려앉고 사회도 내려앉고 국가도 내려앉고 주변의 모든 것도 내려앉아요. 국가, 바다에서 올라오는 네 짐승이 차례차례로 다 무너집니다. 다니엘 2장에 나오는 금 신상에 결국은 조그마한 돌멩이 하나에 얻어 맞아가지고 신상이 자세가 흐트러져가지고 진흙과 철로 되어있던 마지막 그 발 놓는 지점이 태산에 맞아서 와장창 무너지면서 거기에 뭐가 생기느냐 하면은 때렸던 돌멩이가 태산을 이루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되어있지요.


그 하나님 나라가 될려면 필히 뭐가 되야 돼요? 모든 것은 매트릭스 영화에 나오는 첫 장면처럼 숫자들이 전부 다 위에서 아래로 주루룩 다 떨어져야 됩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이것이 지극히 당연한 거에요. 지극히. 이스라엘도 무너지고요 구약에. 가정도 무너지고요 교회도 무너집니다. 특히 엘리사 엘리야 같은 경우에 엘리사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 자체가 무너질 때 곱게 안 무너집니다.


아랍 나라가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포위했을 때 먹을게 없어가지고 “오늘은 네 아기 내놔라. 내일은 내 아기 잡자.” 그래서 약속대로 아줌마가 자기 아들 잡아먹었는데 그 다음날 되니까 약속대로 안하고 자기 아들 안 내놓겠다는 거에요. 그게 소송 내용이 되가지고 임금님한테 호소를 합니다. 애 안 내놓는데 강제로 애 좀 뺏어가지고 우리 양식되게 해달라고 고소, 소송을 걸고 있습니다. 비참하지요. 처참하지요.


그런데 그것이 아까 소사 이야기했듯이 이게 귀신 다 되면 그것조차도 그걸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귀신 되어버리면. 이 세상에 다 무너지니까 무너지는 게 당연하고 마땅하니까. 그리고 무너진다는 그 이유가 나이 자체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요소로써 매일 나이를 먹으니까 당연히 무너지는 거죠.


특히 신약성경에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무너지는 것을 뭐로서 무너지느냐 하면은 여기서부터 성경이 어렵게 되기 시작하는데 장막집이 무너진다는 겁니다. 사람이 집을 건축하는 이유가 안 무너질려고 건축하잖아요. 안 무너질려고. 자, 여러분들이 머리 좋으니까 제가 문장을 연결해볼께요. 집. 안 무너질려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집을 짓습니다.


그런데 안 무너진다는 것은 그 안에 자아를 고이 지켜낼려고 하기 때문이죠. 집이 문제가 아니고 그 안에 살고 있는 내가 안 다치게 할려고 집을 짓습니다. 그런데 장막집이 무너져버리면 자아도 같이 무너지지요. 그런데 성경에서 고린도후서 5장에서 장막집을 우리의 뭘로 보느냐? 우리의 육신으로 봐요. 이 말은 무너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거에요. 무너지는 것이.


그러니까 무너지는 것을 통해서 뭘 보느냐 하면은 안 무너지는 집. 안 무너지는 집 있는데 지금부터 좀 어렵습니다. 안 무너지는 집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성전이라고 하는 거에요. ‘성전’. 안 무너지는 집. 그러니까 히브리서 11장에서 안 무너지는 집을 뭐냐 하면은 하늘에 있는 본향이라고 해요. ‘본향’.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지만 영원한 집이 있는데 그것은 안 무너지는 집이라는 거에요.


그러면 뭐가 어려우냐? 이 땅에 와서 안 무너지는 성전은 이 땅에서 성전은 누구냐 하면은 성전은 구약에서 보면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성전이라고 해요. 집 지어놨다고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 떠나지 않을 경우 성전입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이 집으로 돼있는 것은 구약이에요. 솔로몬까지. 솔로몬, 스가랴까지.


그런데 집이 벽돌이 아니고 이것이 인격 인물로 바뀌어요. 그걸 가지고 베드로전서 2장에서 뭘로 됐느냐 하면은 예수님을 가지고 건축자들의 버려진 돌이고 예수님이 에베소서 2장에서는 버려진 돌부터 시작하는 거에요. 무너지는 세상에서 필요 없다고 그냥 쓰레기에 갖다버린 돌이 유일하게 안 무너지는 집이에요 그게.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됩니다. 내 몸이 귀합니까? 주의 몸이 귀합니까 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묻는 거 같아요. 무너질 네 집이 귀하냐? 안 무너질 주님의 몸이 중하냐 우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대시는 거에요 그냥. 성경을 통해서.


그러면 여기서 더 어려운 게 뭐냐 하면은 그러면 주님이 성전이라면 그러면 성전은 어디 있느냐? 성전은 이 땅에 주님으로 다 이루었잖아요. 성전은 땅에서 만들어져서 하늘로 올라가는 겁니다. 여러분 교회 다녔으면 적어도 주기도문 정도는 외우지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땅에서 이루어지지요.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야기하기를 땅에서 일어난 일도 모르면서 어디서 자꾸 하늘만 살피고 있느냐. 하늘에서 뭐 상상력을 동원해 동원하지 마 상상하지 마 땅에서 벌어졌어. 땅에서 일이 벌여졌다고. 땅에서. 땅에서 이미 인간들이 주님을 버렸잖아요.


예수님을 이 땅의 사람들이 유대사회가 예수님을 버리고 헬라인 된 빌라도도 예수님을 버리고 그래서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버렸는데 그렇게 버린 이유가 문명을 유지하고자 한 거에요. 문명. 세계 4대 문명이라고 하잖아요. 좀 더 공부한 사람은 25대 문명이에요. 25대 문명. 유명하지 않은 것까지 다 합쳐서.


고고학자들이 밥 먹고 살려고 국경 없는 의사회처럼 온 나라를 파헤쳐요. 왜? 뭐 나오면 연수비 그 다음부터 계속 나오니까요. 하는 일이 중국이고 이란이고 공산주의고 필요 없어요. 아프리카도 다 파헤쳐버려요. 문명이 계속 나와요. 문명이. 끝없이. 나오는 문명보다 안 망한 문명이 없어요. 그 파헤쳐가지고 뭘 연구하느냐 하면은 처음의 국가는 어떻게 발생했는가 그걸 연구하는 겁니다. 처음의 국가는 어떻게 발생했는가?


과연 처음부터 계급이 있었는가? 처음부터 지도자층이 있었는가? 그걸 조사하는 겁니다. 처음부터 부계사회였는가? 모계사회였는가? 평등사회였는가? 그걸 계속 조사하는 거에요. 신화부터해서 고고학적 발굴해가지고 빙하시대 이후에 문명은 어떻게 나갔느냐. 인디언들은 어떻게 건너갔느냐? 그때 아직까지 땅이 붙어있어 가지고 건너기 좋았다. 뉴질랜드는 어떻게 갈 수 있는냐? 배 타고 가지, 헤엄쳐서 갈까요?


그런 것들을 계속해서 모으는 이유가 어떻게 하면 우리 현재에 있는 문명을 유지 보존할 수 있는 어떤 대책이 나오지 않겠느냐. 이러다가는 다 죽는다. 이러다가 다 죽는다. 온난화 때문에 다 죽는다. 탄소증가 해가지고 탄소 온도가 2도만 올라가도 빙하 녹아가지고 도쿄부터 해가지고 상하이 다 물에 잠긴다고 난리인데 원래 다 이미 무너졌습니다. 지금 무너지고 있어요. 무너지는 게 당연합니다.


그 아까 주님과 함께 간다 했잖아요. 주님과 함께. 여러분 유치원 애들 운동회할 때 한번 보세요. 어떤 프로그램이냐 하면은 7살 아래 엄마 손 잡고 달리기하는 거 보세요. 아무리 모진 엄마라고 할지라도 애 넘어지는데 애 두고 자기 혼자 달리는 엄마는 없습니다. 정 바쁘면 애 안고 달리지요. 공책 두 권 탈려고. 요새는 더 주겠지만 공책 두 권 탈려고 달립니다. 함께 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저주의 빗방울 떨어지는데 주님께서는 그 비법을 알아요. 빗방울 요래 요래 빗겨가는 건 아니고요. 그냥 그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질주하는 겁니다. 뭐를 보면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하염없이 세웠다 하면 무너지고 세웠다 하면 무너지고. 이번 대통령은 잘할까? 하면 또 실망이고. 국회의원 뽑았다 하면 마찬가지고 모든 것은 그냥 생리 자체가 무너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하고 느끼게 하는 거에요. 모든 게.


그런데 그 가운데서 무너지지 않는 것, 그것은 바로 땅에서 뭔가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왜? 주기도문에 보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 땅에서도 그냥 이루어지기 때문에. 땅에서 일어난 일을 그대로 올라갑니다. 땅에서 일어난 일을. 그 예수님이 바로 성전이고 예수님의 성전이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 되는 겁니다. 그게 경로거든요. 땅에서 하늘로.


경로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 경로를 우리가 그 경로를 따라갈려면 주님이 찾아왔던 들어왔던 이 세상이 주님이 경험한 만큼이나 무너짐을 우리도 같이 성도이기 때문에 괄호이기 때문에 괄호. 주님이 당했던 무너짐을 우리도 같이 공유해야 돼요. 이 땅에서. 지금 자아의 무너짐은 지금 제가 이야기 안 하고 있어요.


주님의 무너짐은 어떻게 무너지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일부러 시비걸어서 얻어맞는 게 아니고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말씀 관계입니다. 그 말씀이 오늘 누가복음 6장 46절에서 49절까지 나와 있잖아요. 여러 가지 나와 있지만 오늘 이 부분하기 때문에 앞에도 많이 있습니다. 형제의 눈의 티를 보고 그런 것도 다 포함돼요. 그 말씀에 의해서 말씀을 가지고 이 땅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죄의 세계에 왔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세상은 뭐냐 하면은 자신의 운명을 고수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퇴출시켰잖아요. 문명은 여기서 알아야 돼요. 왜 인간은 이 문명을 유지할려고 합니까? 왜 자기 가정을 지키려고 하고 자기 교회를 지키려고 하고 왜 국가를 지키려고 그렇게 합니까? 그 안에 누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 안에 신이 있어요. 신. 하나님이 있습니다.


인간이 믿는 하나님은 나를 안 무너트리는 그런 하나님을 인간은 믿고 있었어요. 섬기고 있습니다. 나를 안 무너뜨리는 하나님. 그게 하나님 그게 신이에요. 자기 자신이 했던 모든 성과와 모든 지혜와 총 결집되어 있는 것이 이게 모여 모여서 그게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인간의 문명을 이루는 겁니다. 문명하니까 좀 딱딱하니까 다른 말로 옮길께요. 두 가지로 할께요. 문명의 요소는 이겁니다. ‘연대감과 유대감’. 연대감과 유대감이에요.


유대감은 약간 정서적인 면이 강하지요. 유대. 연대감은 뭐냐 하면은 상당히 실용적이에요. 당신하고 나하고 같이 동업하면 얼마나 이익을 얻을 것이다. 연대감. 특히 전쟁을 벌리면 이 연대감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이것은 상식에 속하니까 알아두시면 됩니다. 대구강의에서 언급을 했는데 최초의 돈이 나오는 것이 언제냐 하면은 구석기에서 신석기 중간에 돈이 나오는데 어떻게 나오느냐? 물물교환으로 나옵니다.


물물교환의 특징은 사물, 물체, 상품 그것에 균등을 맞추기 위해서 인간의 가치를 잠시 보류하는 거에요. 예를 들었습니다만은 안동의 쌀하고 태백의 고등어하고 할 때 아이고 아저씨 인물 잘 생겼다 고등어 한 마리 더 줄게 이런 거 없어요. 그 쌀의 양과 고등어의 양을 수치로 계량적으로 교환이 가능한 숫자로 조절하지요.


얼마나 인간성이 좋으냐 인물이 좋으냐 키가 크냐 그런 요소는 다 빠지는 거에요. 상당히 객관적이죠. 객관적. 분명히 세 마리 준다고 했는데 두 마리 주면 물물교환 성사 안 되지요. 교역이 성사 안돼요. 교역이. 교역을 위해서 숫자가 동원되는 겁니다. 숫자 다루는 관리자 공무원이 등장하는 거에요. 저쪽의 법과 이 쪽의 법을 맞춰야 교역이 되니까요.


우리 법에는 고등어 세 마리다. 우리 법은 네 마리다 이런 거 안되거든요. 협상과 타협을 해서 교역을 해야지. 그 교역의 물물교환이 뭘로 바뀌느냐 하면은 너무 귀찮으니까 이 물물교환 수단을 바꾸자 그래서 나온 것이 뭐냐 하면은 바로 돈이에요. 돈. ‘돈’. 여러분 돈과 화폐가 약간 틀립니다. 여기까지 여러분들이 알 필요가 없고요. 돈은 교환하는 수단을 돈이라고 하고 화폐는 장래의 신용을 위해서 미리 많이 찍어 놓는 것이 화폐고. 그거나 그거나 똑같지만 뭐.


지금은 돈 앞에서 돈 있는 인간끼리 연대감과 유대감이 돼요. 유대감, 연대감이라고 하는 것은 돈의 양 가지고 측정이 된다고요. 양 가지고. 이것은 야고보서 1장에 보면 야고보서 당시에도 마찬가지에요. 가난한 자가 오니까 나 몰라라. 부자가 오니까 아이고 앞자리에 앉으세요. 그렇게 교회에서 모신다고 하잖아요. 교회가 그걸 알기 때문에 부자들 일부러 뒷자리에 모시지요. 말씀 지킨다고. 안 무너질려고. 그거나 그거나 똑같지요. 뒷자리 가면 겸손해집니까? 겸손한 그게 교만인데요.


누가복음 9장 62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 돌아보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 이게 제가 아까 달리라고 할 때 방향성을 두고 한 말이에요. 방향성. 5년을 살고 10년을 살고 50년을 살면 50년 살기 전에 몰랐던 새로운 무너질 거리를 50년 때 만나게 됩니다. 이게 인생이에요. 52년째 살아가면 52년째, 52년 안 살았으면 이것도 아! 무너지네 몰랐다. 하는 것을 52년째 만납니다.


그래서 뒤돌아볼 게 없어야 돼요. 계속 앞에 가면 앞에 그러니까 세상이 예수님을 싫어했잖아요. 예수님이 싫어하는 것, 예수님을 필요 없다고 하는 요소들이 자꾸 인생을 살면 살수록 괄호니까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자기 체험을 우리 체험으로 그걸 반복시키는 식으로 성도를 쟁기를 잡고 앞으로 앞으로 달리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오늘 동영상 강의 할 때 그런 이야기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받는다고 구원의 길로 갔는데 막상 나서보니까 망하는 길이였어요. 왜? 대책이 없으니까. 아무 대책이 없어요. 앞에는 바다 있고 뒤에는 따라오고. 아무 대책이 없게 하는 거에요.


이거는 뭐냐 하면은 바로 이 세상 무너지는 것이 아담의 체제거든요. 나를 무너지지 않게 하는 그 하나님을 이 인간 문명은 그걸 믿고 인간 문명 안 무너지게 하는 그 요소 가운데서 소위 성도라는 자도 여기 포함되어 있는 거에요. 여기 성도에게만 특별 과외로 그 자아가, 가슴이 덜컹거리는 그 무너짐을 매일같이 52년, 53년 계속해서 겪게 하는 거에요. 계속해서. 무너지는 즐거움이 있게 만들어요. 무너지는 즐거움이 있게 만듭니다. ‘무너지는 즐거움’.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 그러니까 우리가 무너졌다 안 무너졌다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은 우리 주변에서 우리 주님께서 괄호에 같이 있으니까 네가 한번 봐라 이 말이죠. 말씀을 복음을 지키다가 복음 버리고 도망가는 사람을 봐라 이 말이죠. 그 사람이 부도 안 나도 그 사람이 공부를 잘해도 상관없이 이제 주님 필요 없어. 난 주님 없어도 살아. 그게 바로 무너짐이라는 것을 이미 성도로 하여금 그걸 체험케 하는 거에요.


예수님이 필요 없는 것. 예수님이라는 성전이 필요 없는 식으로 세상적으로 나가는 그런 무너진 사례들을 네가 나이 들면서 네가 하나 하나 네가 체험하라 이 말입니다. 돈 있으면 됐지. 꼭 교회 다녀야 돼? 라고 생각하는 것. 내가 이 만큼 존경받으면 됐지 뭐 꼭 주님 계속 의지해야 돼?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에요.


그 무너짐의 요소가 아담의 요소고 아담이 왜 이렇게 세상적으로 범죄하고 난 뒤에 왜 세상적으로 나가게 됐느냐 하면은 전에는 뭐가 탐이 나느냐 하면은 선악과가 탐이 났었어요. 처음에. 여러분 알려줄게요. 선악과만 탐이 났는데 그 다음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선악과 따먹은 내가 탐이 난 거에요. 선악 지식을 아는 내가 탐이 난 거에요. 내가 나한테 홀린 겁니다. 그 때부터.


그래서 항상 메이크업해요. 인간은 패션부터 해서 메이크업해가지고 자기 자신이 홀릴 만한 객관화 대상자로 만드는데 치중을 하는 겁니다. 따라서 거기에 뭐가 붙느냐? 신이 붙어요. 하나님이여 나를 무너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금식하고 기도하옵나이다. 이게 바로 교회잖아요. 이게 교회 아닙니까?


그런데 숨길 수 없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해산의 고통. 아까 하늘의 해 이야기하다 이제 돌아왔다. 자, 하늘의 해가 왜 떴는지 모르지요?? 그런데 여자가 아이를 낳는 이유를 알아요? 그거는 생물학자도 몰라요. 과학은요 어떻게 해서 어떻게 이런 과정은 이야기하지만 근원적인 의미와 이유를 과학자는 모릅니다.


왜 남자가 낳아야지 왜 여자가 낳는지 답변해봐라. 몰라. 그것까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것까지 모르지요. 아기 낳는데 왜 아파? 안 아파도 되는데 왜 아파? 모르지요. 다만 되어진 결과를 가지고 해석한다고 급급하지 모르는 거에요. 여자가 해산의 고통이 있는 이유는 궁금해요? 500원 안 받겠습니다.


이유는 존재 자체가 이미 무너져버린 존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원래 그 인간이 아니다. 원래. 하나님 원한 그 인간이 아니에요. 무너진 증거를 갖기 위해서 한 것이고 남자가 이마에 땀을 흘려서 일을 해서 가정을 먹여 살려야 될 그것은 이미 무너져야 될 대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음 시간 무너지기 위해서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6장 49절 (무너짐) 210706b-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모든 말씀은 주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주님으로 끝내십니다. 그래서 주 안에 함께 있으면 ‘말씀 안 지켰다’가 성립이 안 됩니다. 말씀 다 지킨 게 돼요. 함께 계신 분 때문에. 다만 우리가 뭐를 경험을 못하느냐 하면은 아직도 우리가 이 세상 살아야 될 이유가 죄로 인하여 인간이 이렇게 무너져야 되는 체험을 아직도 남아있어요. 그 체험이.


그러나 그 체험을 겁내지 마세요. 이미 우리는 구조조정해서 남은 자로 이미 명단에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잔류 쪽. 잔류. 이미 주님과 함께 있기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뭐가 보이느냐 하면은 세상이 전부가 무너진다는 그 안목을 비로소 발생하게 되는 거에요. 사람이 자기가 이미 무너졌으면 더 이상 자기에 대해서 기대나 미련을 갖지를 않습니다. 이걸 가지고 자유라고 이야기해요. ‘자유’.


죄로부터의 자유라고 할 때에 그 자유가 시작되는 근거가 뭐냐 하면은 ‘너 죽었잖아’ 부터 시작하는 거에요. 어차피 너는 죄에 대해서 죽었잖아. 죽었는데 새삼스럽게 나는 죄 지을까 말까 죄 지을까 말까 이미 죄는 우리를 이미 함락했어요. 이미 점령을 했어요 육신을.


스데반 집사가 죽었잖아요. 왜 죽었는지 알아요? 죄 지어서 죽었어요. 그런데 스데반 집사가 살아났지요. 왜 살아났는지 아시죠? 주님의 요소가, 주님의 요소라고 말했지만 이게 실제로는 주님의 요소가 아니고 뭐냐?? 사건의 요소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사건의 반대말이 존재거든요. 이미 우리의 존재는 후패해야 돼요. 이것은 썩어져야 돼요. 무너져야 돼요.


예수 믿는다고 애 낳을 때 안 아프고 이런 거 없어요. 예수 믿는다고 취직 잘 되고 이런 거 없습니다. 예수 잘 믿고 곡괭이질 하는데 땀이 한 방울도 안 나오더라 이런 건 없어요. 예수 믿는데 코로나 안 걸리더라 이런 건 없어요. 코로나까지 갈 것도 없어요. 예수 믿으니까 모기 안 물리던가요? 모기가 윙~ 날라와가지고 ‘어! 예수 믿으니까 물지 말자.’ 아닙니다. 모기는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기 때문에.


존재에 대한 관심은 자칫하면 이건 홀립니다. 유혹에 말려들어요. 홀린다. 존재. 왜냐 하면은 자꾸 비교하거든요. 내 존재와 타인의 존재와 자꾸 비교한다고요. 나와 너를 자꾸 비교하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나’가 이게 아직도 나에게 어떤 가능성이나 희망을 갖는 게 이게 문제가 된다고 보시는 거에요. 이 ‘나’가.


문제가 된다고 보셔서 주님이 다 이루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성취를 위해서 이 ‘나’를 이 세상에다가 남겨둡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예수님을 핍박했던 세상이거든요. 악마가 설치는 세상 아닙니까. 그 악마가 설치는 곳에 우리 ‘나’를 여기에다가 넘겨버립니다. 넘겨버리면서 이미 구원이 된 상태에서 우리의 생명이 하늘에 있는 상태에서 무너짐을 실제로 체험하라는 거에요. 그래놓고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이걸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랑’. 다른 말로 ‘용서’죠.


사랑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은 증오에요. 미움. 같은 말이 미움이죠. 용서와 증오를 한번 연결시켜 봅시다. 여러분 용서는 단 한번만 하면 돼요. 누구를 용서할 때. 그러나 증오는 한번 증오해서 성이 안차요. 계속해서 미워해야 돼요. 돌아서서 미워하고 일곱 번 미워하고 돌아서서 한 번 더 미워하고. 그래도 성이 안차.


그러면 누가 괴롭느냐 하면은 증오하는 본인이 바보 같아요. 본인이 저 인간 살아 있는 동안에 본인이 못 살겠어. 미워 죽겠어! 미워 죽는 거에요. 그래서 그 미움을 교회 와서 빡시게 기도하고 또 회개하면서 신부한테 고해성사 해가지고 바꿀려고 사랑으로 용서해줄려고 하는데 이 제대로 자기가 안 무너진 상태에서 용서가 되어버리면 증오할 때마다 용서를 해야지. 용서를 일흔번 씩 일곱 번해도 성이 또 안 차.


그러니까 용서도 가짜고 진짜는 나의 건재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나에게서 무너져야 될 증오의 대상이 이렇게 꼭 필요한 거에요. 인간에게는. 그래야 이 자아가 숨을 쉬겠어. 너는 내가 저주한대로 무너져 쫌! 플리즈, 제발 내가 저주한데로 쫌 돼. 왜? 그래야 내가 숨을 좀 쉬게. 모든 인간은 이 본성 외에 다른 본성 있습니까?


상대방이 망함으로서 어떤 내가 사는 재미를 느끼는 반대를 얻고자 하는 그 심보. 그게 바로 자아 조작이에요. 자기 자신을 조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나를 지킬려고 하는 그것이 같은 인간들끼리만 그 영향력이 미칠거라고 생각했지요? 아니에요. 예수님이 섞여버렸어요.


그래서 여자가 애기 낳는 것도 신기하지만 가장 신기한 일은 하나님이 인간 속에 섞여 들어왔다는 것이 가장 신기해요. 왜 섞여 들어왔을까요? 우리가 내뱉어지는 이 증오 나 하나 선악과 따먹고 나 하나 멀쩡하고 건재하고 너는 나한테 꿇어줘. 제발 쫌 나보다 못나게 좀 살아줘. 내가 좀 살게. 라는 그 대상자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거기에 같이 섞여 들어 있었거든요.


모든 사람이 아까 이야기했지요. 모든 문명은 연대감이죠. 친화력. 연대감. 대구강의에서 용어를 설명해 드리면 인간이 원하는 것은 공유의 가치체제. 모두가 공감할 수 있고 모두 다 선호하는 그러한 공동의 세계를 사람들은 추진했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추진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은 풍요의 땅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그래요. 풍요의 땅에 대한 그리움. 엘리시움. 이상향. 유토피아. 이게 모든 인간의 기억 속에 여운으로 남았어요. 여운.


여운이라고 하는 것은 다 끝났는데 미묘한 파장이 남아있는 것 . 나 너 용서해. 하지만. 추신. 제발 좀 추신 붙이지 마. 이게 인간은 끝을 내지를 못해요. 이게 풍요의 땅에 대한 천국에 대한 낙원에 대한 여운이 내 기억 속에 안에 하나의 토대를 잡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런 관점에서 성도로 하여금 이 세상에다가 하나님께서 남겨둡니다. 남겨둬 버리면 이 세상 전체가 전부 다 동일한 토대를 갖고 있어요. 동일한 토대. 똑같은 토대인데 이것은 감추어져서 안 나타나요. 안 나타나고 그 대신 여기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은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는데 사건의 다양함, 다양성이 나타나요. 사람마다 개성이 있고 다 다르니까 다 다르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건을 가지고 파고 들어가면 모든 인간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살아가요. 모든 인간은. 뿌리가. 똑같습니다.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날 좀 건드리지 말아라. 다른 건 다 참아도 나를 무시하는 것은 내가 못 참는다. 정 나를 무시하면 나 자살할거야. 자살해서 자살하는 방법으로 너에게 복수할거야. 인간의 마지막 내밀 카드는 그런 카드는 다 갖고 있어요. 내가 너 앞에 죽을게. 공군부대 김 중사. 내가 죽어서라도 너 복수할거야. 공군 그거 뭐 죽을 일입니까. 사표내고 나오면 되지.


도대체 가룟 유다가 왜 자살했지요? 가룟 유다가 자살한 거요. 이유는 딱 한가지 밖에 없어요. 괄호가 없어요. 괄호가. 사탄은 타인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개하고 살았지 사람하고는 안 살아요. 자취해도 혼자 자취해요. ‘함께’가 성립이 안 됩니다. 인간은. 사탄은. 왜냐하면 사탄 자체가 혼자 살려고 일 벌렸거든요. 전쟁을 벌인 거에요.


그 정신을 아담이 그대로 받아서 아까 했지요 아담은 처음에는 선악 지식이 탐이 났는데 그 다음부터는 선악 지식을 아는 유일한 존재로써 자기가 탐이 나는 거에요. 남들이 나를 무시해도 절대로 나는 나를 무시할 수가 없어요. 그동안 내가 사는 목적이 뭐였는데. 다 내가 의미있다 그걸 증명할려고 살았잖아요. 증명할려고. 내가 안 무너질려고 살은 거에요. 안 무너질려고.


그런데 주님께서 오셔서 이제 그 수고 그만 해도 된다는 겁니다. 넉넉하게 무너지라는 거에요. 넉넉하게. 왜? 내가 다녀갔으니까. 학교 다닐 때 소풍가는 게 즐겁지요? 소풍가는 게 즐거운데 어떤 애가 가정 형편상 소풍을 못 갔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초등학교가 경주에 소풍간다고 했는데 애가 가정 형편이 어려워가지고 경주에 못 갔습니다. 못 가가지고 엄마 경주에 못 갔어 이렇게 하니까 나중에 엄마 동생 외삼촌이 내가 돈 줄게 너 혼자 갔다 와라.


자기 혼자 가는 게 무슨 소풍입니까. 인간은 내가 이거라고 이야기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남을 경유를 해야 돼요.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네가 좀 후원해주고 옹호 좀 해달라는 거에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유명한 사자성어로 인정투쟁. 투쟁을 하는데 남한테 가치 있는 인간으로 인정 받기 위한 투쟁. 이게 마지막 남는 거에요. ‘인정투쟁’.


나 다운 것. 나 하는 일에 대해서 남들이 인정해주는 것. 내가 인정하는 건 인정 안돼요. 꼭 남을 거쳐야 돼요. 나 어때? 나 어때? 백설공주에 나오는 그 계모처럼. 자기가 이쁘면 되는데 꼭 거울한테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이쁘냐? 아니면 거울 바꾸든지 할 모양인지. 거울이 쫄아가지고 제일 예쁩니다 하지만 여운이 남지요.


그러나 이 나라 바깥에는 전 왕비의 딸이 하나 있는데 공주가 더 이쁩니다. 그런 이야기부터 했을 때에 그 왕비는 비로소 자기 할 일이 생긴 거에요. 그 공주를 찾아서 목을 졸르더라도 자기가 더 이쁘다는 것을 그 상대를 경유해야 남들이 하는 것은 싫고 걔가 제일 마지막 심사위원이에요. 남들 시시한 인간들이 예쁩니다 아부하는 건 싫어. 걔가, 걔가 나 보고 예쁘다고 해야 돼.


인간은 목 조른 걔가 누구냐 하면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줘야 돼. 하나님이. 이 못 되먹은 인간들. 선악과 따먹었으면 이건 악마의 운명에 합세하는 겁니다. 무너지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이 무너짐에 대해서 구약을 통해서 한번 생각을 해봐야 돼요. 여러분 구약을 보실 때 이 관점으로 보시면 얼추 구약이 풀립니다.


뭐냐 하면은 이스라엘의 몰락. 이스라엘의 몰락이에요. 몰락하라고 이스라엘 만든 겁니다. 몰락하라고. 몰락하는데 이스라엘이 왜 몰락하느냐 하면은 이게 안 무너질려고 하기 때문에 몰락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그냥 대하지 않고 이래이래서 나는 안 무너질 만 하지요? 그렇지요? 하고 자기 자신이 안 무너지는 것을 전제로 깔고 이걸 말씀의 목표인 냥 여기고, 그리고 성경말씀을 보는 거에요.


어떻게 요령 부려가지고 저주를 적게 받을까? 하나님의 징벌을 적게 받을까. 교회 갈 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면 중요한 계약 건이 있는데 어떻게 헌금을 얼마 내고 찬양연습을 보통 30분전에 오는데 1시간 전에 와가지고 가운 다 정리하고 하면, 그 다음 주에 시험이 있다든지 뭐 있어. 중요한 계약 건이 있어. 애가 수능 치던지 뭐 있어. 자기가 운전면허 시험이 있던지 뭐가 있어. 잘 보여야 줄 거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그래도 양심이 있다면 당신도 양심이 있다면 양심과 양심끼리 우리 배팅합시다.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준다면서요. 성경에 그런 거 없어요. 성경에 무슨 참는 자가 복이 있어요. 참는 자는 독이 있지요. 참는 자는 독이 있지요. 참는 자는 독이 있지 참는 자는 복이 오는 게 아닙니다. 왜 참아요. 왜. 뭘 노리고 참아요. 참겠다는 그 의도가 수상해요.


예레미야 선지자는요 복음이 뭔지 알아요? 포로 잡혀가라. 그냥 하지 말고 잡혀가. 그냥 이 나라, 너를 포기해. 다시 말해서 너 자신을 포기하는 이것이 이게 말씀이라는 거에요. 말씀 자체가. 말씀은 아담에서 태어난 인간과 이게 결코 지킬 수 없는 거고 어울리지 않는 겁니다. 어울리지 않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라는 거에요. 말씀 하나 못 지킨다는 것을. 왜 그걸 못해. 그 간단한 걸.


하여튼 영화에 마동석입니까. 마동석 영화에 제일 답답한 것은 마동석이 떴을 때는 피하면 돼요. 괜히 뭐 하나 들고 깝쭉거리다 꼭 맞아요. 마동석 등치 한번 보세요. 알아서 기고 도망하면 마동석이 그냥 살려준다고요 깡패들을. 사실은 인간 속에 있는 악마가 그렇게 끝까지 그래도 고집 있다 버티다가 더 맞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무너지는 거에요. 이스라엘 몰락하는 거에요. 뭐냐 하면은 이스라엘 속에 유다 자손이 있어요. 유다 자손 속에 아브라함 시대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제일 위에 튀김옷 있고 그 층에 아주 두꺼운 층에 밀가루 있고 제일 맛있는 소시지는 제일 안에 있어요. 소시지. 핫도그. 가끔 케챂 바르지요?


지금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준 것은요 보조용이에요. 보조용. 율법 이전에 440년 전에 갈라디아서 3장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이 있으면 아브라함은 껍데기죠. 이 안에 씨를 준 거에요.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준 겁니다. 이 자손이 계약 당사자지 아브라함은 계약 당사자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나이가 있어요. 무너져야 돼요.


계약 당사자는 “내가 아닙니다”를 증거하라고 잠시 이 땅에 태어난 거에요. “하나님은 내 이름하고 계약 안 했어요” 라는 말을 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겁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씨가 죽어가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죽어가는 씨를 통해서 이걸 관통합니다.


넘겨주고 넘겨주고 넘겨주고 할 때에 이 아브라함에게 의지하는 사람은 이삭을 의지해야 되고 이삭 의지하는 사람은 야곱을 의지해야 되고 야곱을 의지하는 사람은 요셉을 의지해야 되고. 요셉을 의지하는 사람은 새로 등장한 모세 의지해야 되고. 그러니까 언약이라는 것은 일방적으로 어떤 방향성을 지향해요. 지향성. 어떤 방향성을 갖고 있는데 인간들은 자아가 있기 때문에 자꾸 그 현장에서 자기를 건재하게 유지, 자꾸 유지할려는 데 급급해요.


주위에 자기 좋아하는 사람 해가지고 나 어떻게 생각해? 나 어떻게 생각해? 그놈의 인기가 문제다. 그놈의 인기가 문제. 7살 6살 딸보고 또는 4살 자식보고 이렇게 엄마가 외출하면서 딸 보고 어때? 엄마 예뻐? 그건 충분히 돼요. 그런데 엄마가 84살 먹어서 이뻐? 이뻐? 하면 엄마 요양병원 보내야 되겠다. 아직도 자기가 소녀인줄 아직도 안 무너졌구나. 껍데기는 다 무너졌는데 속에는 아직도 자아가 여전하구나.


그 자아를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세상에 가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남한테 당신은 훌륭합니다라는 인정받을 생각하지 말고 사람 빼놓고 주님으로부터 하늘로부터 말씀 너는 앞에서 나는 이 말씀 앞에 무너지는 쪽입니다 인정하란 말이죠. 그러면 이미 구원받은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무너질 수가 있어요. 무너져도 괜찮아요.


무너지면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사건, 감사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나와요. 남들 보기에는 감사할게 아닌데 자꾸 감사가 실없이 자꾸 감사가 나와요. 실없이 농담만 나오지 마시고. 실없는 감사가 자꾸 튀어나와요. 감사가. 인간이 자아가 이렇게 살게 되면 여러 가지 골라먹는 재미에 빠져요. 나 저 인생처럼 살겠다. 저 인생처럼 살겠다.


사람의 다양성에 현혹되어 가지고 내가 저 사람을 인생의 모델로 삼거든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이 모든 다양성은 따지고 보면 전부 다 단일성이에요. 어딜 가도 남의 인생 부럽지요? 그 인생 5일만 살아봐요. 못 삽니다. 못 살아요. 그 집에 못 살아요. 옛날에 예능프로 있었어요. 아빠 바꾸기 엄마 바꾸기. 자식들 환장했어요. 부모 바꾸기가 장난이 아닙니다. 살아 온 과거와 역사, 그 역사라는 것이 만만치 않아요.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던 역사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속에 아브라함 씨가 있고 그 아브라함 씨가 이것 좀 복잡한데요. 아브라함 씨가 토대는 동일한데 나중에 12가지로 퍼져요. 12가지로 퍼진다고요. 퍼지는데 이 토대의 12가지니까 전부 색깔마다 다 다르잖아요. 색깔은 다른데 여기서 뭘 찾느냐 하면은 원초적 색깔을 찾아요. 원초적 색깔. 처음 색깔.


빛이 프리즘을 통해서 7가지로 비치는 것처럼 이 12안에 원초적인 것을 여기 집어넣은 거에요. 집어넣는데 그걸 어떻게 찾아냈느냐 하면은 인간들끼리는 못 찾아내요. 어떻게 찾느냐 하면은 무너진 자로 찾아내요. 다른 형제들로 인하여 무너진 자를 찾는 겁니다. 첫 번째 무너진 자가 누구냐 하면은 요셉이에요. 그래서 일단 주도권은 요셉에게 갑니다.


그런데 두 번째 무너진 자가 누구냐 하면은 유다에요. 유다. 유다입니다. 첫 번째 요셉지파 무너졌기 때문에 복을 받아요. 무너졌기 때문에 복을 받아요. 이렇게 어긋나게 해서 복을 받아서 요셉지파가 한 지파가 아니고 므낫세, 에브라임 두 지파가 됩니다. 두 지파. 두 지파가 되면서 12지파에 속하지 못하고 빠져 나온 지파가 있으니 그게 바로 레위지파에요.


레위지파는 뭐가 없느냐? 아브라함의 복이 없어요. 복이 없습니다. 복이 없는데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게 땅이 없어요. 레위지파만의 땅이 없어요. 다른 지파는 땅이 있습니다. 인디언의 이름이 아주 요상하거든요. 인디언의 이름이. 주먹 쥐고 일어서 그런 이름도 있는데 제가 아는 인디언 이름 가운데서 진짜 의미 있는 이름이 있어요.


뭐냐 하면은 보이는 그림자. 작은 거인이라는 인디언 영화에 보면 이 이름이 나와요. 보이는 그림자. 이게 세상 같으면 보이는 실체 이렇게 해야 앞뒤가 딱 맞아요. 보이는 실체. 보이는 그림자란 말은 그림자만 보인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실체는 안보이죠. 레위지파가 이런 입장이에요. 레위지파가.


왜냐하면 레위지파는 약속의 입장에서 땅 있으니까 땅 개발해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 맨날 무엇과 붙어사느냐 하면은 죽음과 죽음 사건과 가까이에 가는 겁니다. 죽음 사건과. 레위지파가 숫자가 모든 각 지파의 1:1 성인으로 대응되어 있어요. 따라서 모든 12지파 안에 무엇이 다 삽입되어 있다? 레위지파의 요소가 삽입되어 있는 구조로서 레위지파를 따로 돌리고 나머지 12지파를 한 겁니다.


처음에 요셉지파가 형제들한테 버림받았지만 나중에 총리 되가지고 장자 역할 해가지고 장자는 재산을 곱으로 받거든요. 그래서 두 지파가 12지파에 포함되어 버립니다. 13지파 되니까 하나는 튕겨져 나오고 레위지파. 그 다음에 요셉지파가 이렇게 나오고 난 뒤에 그 다음 무슨 지파가 바뀌느냐.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는 히브리서 7장 이야기입니다. 멜기세덱 이야기. 그때 나오는 이야기에요.


그 다음에 유다지파로 바뀌어 버려요. 유다지파로. 그래서 12지파를 축복을 할 때 모세가 신명기 마지막 축복을 할 때에 유난히 부각이 되는 딱 두 지파가 뭐냐? 요셉 지파와 유다지파에요. 유다지파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이게 나와요. 왕이 나옵니다. 왕. 왕 구체적인 것은 수련회에서 들으시고요. 왕이 나옵니다.


자, 왕이 뭐냐? 기존의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신과 무너지지 않은 인간의 대표자로서 인간 세계에는 왕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여호와의 왕은 뭐냐 하면은 보이는 그림자로 나타나는 거에요. 보이는 그림자로 나타나는 것은 이것은 뭐냐 하면은 원초적인 실체는 따로 있기 때문에 이 그림자는 항상 이렇게 보면 돼요. 항상 껍데기. 항상 껍데기로 가는 거에요.


그래서 유다지파에 속한 자가 다윗 후에 왕들이 있는데 왕들의 특징이 한 왕이 오래가지를 않아요. 이게 계속해서 정권 바뀝니다. 남쪽 유다나라에서 왕이 계속 바뀌어요. 왕이. 왕이 바뀌는데 그 역할을 누가 하느냐 하면은 중간 중간에 바로 엘리사, 엘리야가 거기 개입합니다. 엘리사, 엘리야.


그 선지자는 기본이고요 그 뒤에 나오는 그 다음부터는 선지자들이 굉장히 등장해가지고 항상 누구에 대해서 지적하느냐 하면은 그 왕 자체에 대해서 문제 삼습니다. 왕이여 말씀대로 살았습니까를 물어요. 왕이여. 왕이여 말씀대로 살았습니까? 그러면 말씀대로 못 살았다 지적할 때 왜 말씀대로 못 살았습니까? 이스라엘을 안 무너뜨리기 위해서 그들은 모든 눈에 보이는 인간적인 노력을 다 한 거에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것처럼 빨리 빨리 달리고 있으면 언약 따라 가야 되는데 언약은 선지자에게 주어져 있거든요. 그런데 선지자는 그냥 선지자가 아니라 무너질 것을 붙들고 있는 그것을 전제로 해서 그 다음에 선지자가 파고들어 가는 겁니다. 선지자가.


지금 여러분들이 잘 이해가 안 된다고 신호를 막 보내는데 이스라엘이 광야에 갑니다. 광야에. 그럼 주변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여러 가지 이방나라의 왕국이 있어요. 왕국이 있는데 이스라엘엔 왕이 없어요. 왕이 없는데 이방 나라 선지자 발람이 뭐라고 예언하느냐 하면은 그들 가운데 왕이 있다는 겁니다. 왕인데 어떤 왕이냐 하면은 ‘긍휼히 여기는 왕’이라는 거에요.


긍휼이라는 말은 사전에 뭐냐 하면은 죄를 지었다는 거에요. 죄를 지었는데 죄보다 더 뭐가 우세하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우세한 특수한 민족이 이스라엘이라는 거에요. 이것은 외부에서 발람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축복했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뭐가 없느냐 하면은 이 사실을 모르고 나중에 이스라엘이 무너져요.


뭐냐 하면은 이방신을 섬김으로서 무너진다고요. 모압의 이방신을. 성경 읽으면서 여러분 이상하지 않던가요? 발람은 분명히 그들 가운데 왕이 있다. 그들은 은혜를 받았다. 누가 함부로 대하리요. 이렇게 한다면 그 이야기 들은 이스라엘은 우리는 완벽하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완벽한데 완벽하지 않아요. 민수기 들어가면 내부적으로 폭발이 일어나버립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이스라엘을 알려면 외부에서 뭐가 주어지느냐 하면은 계속해서 계시와 말씀과 언약이 주어져야 되는 거에요. 아시겠지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성도를 봅시다. 성도가 많이 알아요. 많이 알았지요. 성경보고 은혜 받고 많이 알지요. 성경 보는 이유가 뭡니까? 안 무너질려고. 안 무너질려고.


그런데 성경은 모든 말씀은요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를 증거하기 위해서 말씀이 있는 거에요. 어떤 말씀을 보면 아 주님이 다 이루었구나 이렇게 보면 되는데 지금 내가 남한테 인정받아야 하듯이 이제는 하늘로부터 지금 안 무너지는 내가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싶은 거에요. 너는 참 내 백성이다. 좋은 구절 한 두 개가 아니지요. 사랑하는 나의 종아. 여기 있나이다. 모든 좋은 걸로 폼은 다 내는데.


정답은 그러한 반발 그러한 우리의 오해를 반드시 경유해야 된다는 거에요. 정답은 나의 무너짐을 경유해야 돼요. 경유해야 됩니다. 따라서 누가복음 6장에 보면 6장 46절에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하지요.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주여 주여” 하잖아요. 그 다음에 어찌 행치 아니하느냐. 우리가 행할 수가 없지요. 우리가 행할 능력이 없지요.


그 다음 결과가 뭡니까? 결과가. 무너짐이 어떻다? 심하지요. 무너져야지요. 무너져야지요. 여기 기분 나쁜 일이 뭐가 있습니까? 내 것이라고 달라붙은 게 무너져야 현재 있는 손수건 하나도 누구 것이다? 주님의 것이 되지요. 손수건이고 칫솔이고 전부 다 주님의 것이 돼요. 주님의 것. 안경부터 해서 다 주님의 것이 되는 거에요.


소소한 것이 다 감사가 되지요. 감사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나의 무너짐을 경유, 성도는 모든 것이 다 시시하다. 성도한테는 모든 것이 다 시시하다. 에이 무너져버려라. 죽어버리지 뭐. 모든 것이 다 시시해요. 모든 것이. 교회고 뭐고 다 시시해요. 왜? 그걸 경유해야 돼요. 그래야 감사함이 나오기 때문에. 뭔가 제발 심각하지 마세요. 심각할 것은 우리한테 없습니다.


우리는 장난 외에는 농담이나 장난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그게 우리의 재주에요. 우리가 이 자아라는 게 어디에 가도 그 자아가 그 값을 하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잘 되가지고 행복하게 살게 되면 절대 행복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행복하지 않으면 미국 가서도 행복하지 않고 캐나다 가서도 행복하지 않아요. 내가 거기에 늘 있기 때문에.


그래서 행복한 것은 장소를 옮긴다고 덜 행복한 게 아니고 내 자신이 성경 이 말씀을 보면서 이 말씀이 나의 무너짐을 경유하기 위해 주신 말씀인 줄을 받아 들여야 돼요. 말씀. 그 다음에 나가봅시다. 무너짐을 구체적으로 뭐를 무너진다고 이야기하는가? 어떤 사람이 한 달 수입이 2천만원 되다가 1970만원되면 아이고 이번 달 무너졌어. 이게 무너진 걸까요? 무엇이 무너지지 않는가. 시편 84편.


자, 시편 84편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지금 여기서 하나님께서 본인을 어디에 두느냐 하면은 괄호에 두지요. 3절에 보면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지금 하나님은 보이는 그림자입니다. 보이는 그림자. 그럼 나는 뭐냐? 보이는 그림자도 아니지요.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냥 보이는 인간이죠.


여기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데 뭐가 보이느냐 하면은 주의 제단이 보이지요. 거기서 뭐가 보입니까?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했지요. 자, 참새와 제비와 이 성도가 서로 같은 장소에 삽니다. 그런데 참새가 굉장히 행복해 보이고 제비도 굉장히 행복해 보여요. 왜냐 하면은 보금자리를 얻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성도가 무엇 때문에 감사하면은 말씀에 의하면 “네가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무너진다” 할 때에 그 말씀이 나를 경유해서 stop 된 게 아니고 나를 경유해서 성전을 만들어내거든요. 그러면 나는 무너진 채로 어디를 가느냐 하면은 무너진 채로 참새가 되고 제비가 되어서 어디를 가느냐. 나를 거쳐 갔던 그 말씀, 언약, 하나님의 약속이 완성 상태에 놓이는 그 과정에 우리가 끌려들어간 거에요.


그러면 전에는 뭐냐 하면은 전에는 나로 인하여 내가 만족했고 나로 인하여 나는 자랑거리를 얻었다고 스스로 자신을 보고 매료되어서 기뻐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은 그 뒤에 참새 제비도 나오지만 특히 여기 10절에 보면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 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아파트 가서 살래 아파트 경비원 할래? 이런 식이죠. 아파트에 당첨 되서 사는 것보다도 나는 경비원 좋다 이런 식이에요.


그렇다면 여기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신약에 오게 되면 여기 뭐가 되느냐 하면은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의 천 날보다 할 때 그 다른 곳이 어디냐 이 말이죠. 말씀에 의하면 그 다른 곳은 바로 예수님 빼놓고 모든 곳이 다 다른 곳 되는 겁니다. 주님이 중심이다. 천국에 주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주님 계신 곳이 천국이다. 주님이 계신 곳이.


그래서 주와 함께 있다면 이 곳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관계없이 하늘나라 되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으로써 하나의 그리스도의 참새가 되고 그리스도의 애완견이 되고 그리스도의 제비가 될지언정 저는 세상의 어떠한 대궐 궁정보다 더 이것을 더 사모하나이다. 이거에요. 이게 될려면 이 말씀 시편 84편 될려면 오늘 이것을 가렸던 내가 어떻게 됩니까? 내가 무너져야 되겠지요.


자, 정의 내려봅시다. 무너짐이란 뭐냐? 큰 게 보이는 게 무너지는 거에요. 아낌없이 무너질 수 있는 것. 그까이꺼 아낌없이 무너질 수 있는 것. 더 고귀한 가치, 절대적 가치, 궁극적인 가치가 가치 안에 둘러싸여 있다면 까짓것 2천만원 벌다가 1250만원 버는 것 참을 수 있습니다 우리. 20만원은 곤란하고. 참을 수 있습니다. 집 3채 있는데 한 채 팔고 두 채로 참을 수 있습니다. 집에 차가 3대 있는데 페라리 팔고 벤츠 탈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기가 견딜 수 있는 한도만큼 주께서는 더 큰 가치를 위해서 우리를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고 있어요.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살면서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고 있습니다. 그걸 뭐 한꺼번에 한다고 아이 보고 너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생명이 오는데 이 장난감이 뭐냐! 장난감 다 버려! 이건 너무 과격하고 주께서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것을 갉아먹어서 나로 하여금 무너짐이라는 것이 이렇게 행복하다는 거에요.


안 무너져서 이게 불행한 거에요. 안 무너져서. 나만은 고생을 안해야 된다는 그 말도 안 되는 고집. 그렇게 하나님께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쓸데없는 고집, 그걸 기도하면서 바라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를 더욱더 힘들게 한 겁니다. 어려운 이야기인데 이사야에 보면 소하고 사자가 같이 한 들판에 뒹굴면서 놀지요. 천국의 모양새를 그렇게 하지요.


천국이 왜 그렇게 서로 사이좋은 모양새가 된 거냐 하면은 자기 자신을 안 보기 때문에 그래요. 서로가 다 무너진 입장인데 같이 무너진 입장에서 누구 욕하고 난 너 미워할 거야! 그럴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지요.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그 사람하고 토대적으로 똑같은 토대를 갖고 있는 내가 나를 미워하는 모순에 빠져버려요.


나가 죽어. 너 같은 남편 나가 죽어. 그 남편 누가 골랐는데? 본인이 골랐잖아요. 그 남편을 고른 내가 나보고 나가 죽어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소리거든요. 그러니까 자기가 사람을 증오하고 미워하는 것은 본인이 아직도 안 무너져서 그렇고 안 무너지니까 굉장히 세상 사는 게 심각해요. 심각하니 시시하지 않게 되면 심각하게 되면 이거 병 들립니다. 이거 스트레스 받아요. 스트레스 받는다고요.


실수해서 돈 만원 낸다는 것이 택시타서 5만원 냈다. 4만원 차이 납니다. 급해서 오만원짜리 후딱 냈다 이 말이죠. 있다면 이게 400원 잃어버리면 얼마 안 가요. 4만원 날려버리면 이게 오래 간다고요. why me? 주여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이런다고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주님은 목숨을 잃었잖아요. 목숨을. 목숨을 잃은 것은 시시한 일이고 내 4만원은 심각한 일이 된 거에요.


그래서 나중에 모든 인간들은 주님께서 진짜 중요하고 진짜 진지한 것은 이미 정해져있어요.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아니하면” 여기서 생명은 없어요. 생명은 영생은 이 땅에서 누군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죽는 거기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이것만 진지하고 이것만 소중하고 심각한 일이에요. 이것으로 인하여 구조조정이 다 결정이 되는 거에요. 왜냐하면 그 안에 모든 말씀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한번 정리하겠습니다. 모든 무너짐과 그리고 멀쩡함은 전부 다 일단 어디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다 가져옵니다. 모든 말씀을 주님이 다 가져옵니다. 누가복음 6장을 보면서 41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이거 들보, 티 결정을 누가 합니까? 우리 주님이 하잖아요. 주님이. 우리가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할려고 막, 자 대고 몇 센치가 들보니, 이러지 마세요. 주님이 하실 뿐이에요. 다만 주님이 해 놓고 그 다음에 우리의 나이만큼 40대는 50대는 그냥 갈수록 이게 들보구나 이게 티구나 나중에 좀 더 나이 들면 내가 들보라는 것이 그게 전부가 아니구나 또 남아있는 들보가 있었구나. 남아있는 티가 있었구나. 나이 70되면 아직도 들보, 티가 있구나. 그걸 알아가는 거에요.


이미 합격되고 난 뒤에 우리로 하여금 틀린 문제를 보게 하는 거에요. 합격되고 난 뒤에 틀린 문제를. 그거 누가 못합니까. 넉넉하게 해야지요. 그걸 막 심각하게 스트레스 받아서 할 필요 없잖아요. 야 돈 4만원 여기에 내가 목숨 걸었구나. 내 자존심이 4만원치 밖에 안돼. 이래가지고 무슨 사업을 한다고 40억 사업하는 사람이 4만원가지고 벌벌 떨고 쫌생이 쫌생이.


이게 45세라면 나중에 70살쯤 되게 되면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70살쯤 되면 치매 걸리면 집에 쌀 없다고 산에 가서 돌아가실려고 고집 부려요. 우리 가까이 제 측근의 이야기. 집에 쌀 없으면 자식보고 사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자존심이 있어가지고 그래도 내 걱정하지 마라. 너희만 잘 살면 돼. 그게 최고다 하신 말씀이 있어가지고 그 잘난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서 쌀 떨어진걸 가지고 그런 식으로 돌아가실려고 시위를 하신 거에요. 아휴.


그러니까 자식들이 부모님 말을 잘 들어야 돼요. 얘야 바쁜데 내려오지 말라. 할 때 그 톤을 잘 들어야 돼요. 안 오기만 해봐라 이런 톤인지 돈만 보내라는 그런 톤인지 아니면 하루 자고갈려면 오지 말라는 톤인지 잘 들어봐야 돼요. 와가지고 한 달 있을 생각하지 말고 이런 톤인지. 이게 모든 인간마다 주께서 무너지는 강도가 다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의사가 통하지 않습니다. 남이 나 같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토대는 동일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주께서 못난이끼리 만나게 해가지고 서로 무너지게 하고 깨어지게 하는 이게 바로 부부입니다. 이게 부부에요. 이게 자식이고 이게 교우들이에요. 서로 무너지는 것. 저는 십자가 알고 난 뒤에 천하의 죄인입니다. 따라서 주께서 어떤 요구를 한다 할지라도 저는 오히려 감사할 뿐입니다.


그 말 절대로 믿지 마세요. 김정은 말 믿더라도.. 북한의 김정은이 말도 절대 믿지 마세요. 머리가 잘 안 나온 것 같은데. 그 다음부터 그걸 못 합니다. 머리가 잘 안 나왔다고, 이거 내 얼마나 중요한데.. 도저히 이거는 참을 수가 없어요. 죽어버려라. 차라리 지옥에나 가라. 오, 내가 이런 말을. 여기 45절에 봅시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인간들아 지옥에나 가라” 이 말입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이 말씀을 하실 분은 주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충분히 무너집시다. 넉넉하게 무너집시다. 감사함 속에서 무너집시다. 그 무너짐 가운데서 나도 시시하고 세상도 시시하고 아무것도 우리에게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다 이루셨다 하시고 그냥 이루시면 될 걸 성령 보내셔서 자기 스스로 우리를 합류시키니 감사합니다. 주와 함께 있다 보니 우리는 전혀 말씀 지킬 수 없었고 홀로 대신하여 다 이루심으로 우리에게 사랑이 일괄적으로 왔음을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가 살아 가면서 아직도 철이 나지 않고 아직도 모자랄 때에 주께서 세상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면서 세상에 어떤 위험한 세상임을 저희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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