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이해와 오해(텅빈 무대)

아빠와 함께 2021. 6. 3. 16:39

동영상 속에 한 아기가 표정으로 말을 한다. 중간중간 손으로 지시를 하며 소리를 낸다. "어~어~어~..." 신기한 일은 아기를 화면으로 관찰하고 있는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 아기의 보호자는 용하게도 척척 아기가 원하는 것을 준다. 보호자와 아기 사이에 무엇이 있기에 이들은 서로 통하고 있는 것일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랑, 무엇을 주어도 그것이 자기가 원한 것이라고 무조건 받을 수 있는 사랑, 개떡같이 말했는데 자신조차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데 화답이 찰떡같이 오는 사랑, 무엇을 주었고 무엇을 받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왔는지 근원만 중요한 이 특이한 사랑 안에서 이해 못 함도, 오해도 성립되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축복과 저주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라고 오해를 했다.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말씀하셨기에 그는 그 말씀을 이해한 것이지 자신을 의식한 오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것을 굳게 믿고 그렇게 쭉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나의 이해가 하나님 편에서 오해가 된다는 것을 낌새조차 느낄 수 없다. 그런데 예상 못한 사랑이 죽음에서 나오는 생명처럼 찾아왔을 때,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 사랑을 직접 죽여야 하는 지시를 받을 때, 그제야 아브라함은 자신이 배제된 죽음의 바탕에서 오직 언약이 지시와 합하여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복과 저주의 근원이 자신이 아닌 것을 알게 된다. '너는 아니고 네 안에 미지의 타인'이 나 라는 육을 뚫고 사건으로 나올 때 아브라함의 운명은 주님의 이야기로 바뀐다. 창세 전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독생자의 운명이 그의 내부에서 매일 처음인 듯 시작된다.

이삭도 야곱도 그리고 성경에 언약의 동선상에 인물들이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오해의 기존 노선을 따라가다가 주님의 이해로 짠 새판으로 노선변경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내가 아는 사랑이 부정되고 진짜 사랑이 부각한다. 어린양이 피를 흘리는 죽음이 담긴 그날밤이 안에 삽입되었을 때 그들은 광야라는 낯선 판 위에서 그제야 보게 된다. 애굽과 광야가 구분되어있는 층과 그 차이를. 그리고 나 라는 자체가 '나는 이런이런 사람이다'라고 규정 할 수 없게 만드는 증거가 심어지고 표출되는 광야 자체가 된다. 생명과 죽음이 저주와 축복이 동일한 몸에서 나오고 그런 결과를 유발하시는 분의 출처로의 '나'라는 도구가 된다.

현장에서 검거된 간음한 여인이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채 이제 곧 돌에 맞아 죽을 장소로 끌려가며 이런 오해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자기만 살겠다고 나를 버리고 간 이 나쁜 인간. 그 남자를 믿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은 내가 어리석었다. 내 인생 이렇게 개죽음으로 끝나는구나'라고.

그녀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랑 앞에 패대기쳐질 때, 그 자리로 오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다고 그 자리를 떠나는 것도, 어느 것도 그 여자의 통제권 안에 있지 않음을 알게 되는 사건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인자 앞에서만 가능하다.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하는 자들이 없느냐?" "주여, 없나이다" 정죄하는 자들도 그녀와 간음한 남자도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여자도 없는 텅 빈 무대만 있다. 예수님의 운명을 그려낼 무대 위에 사람이라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주님의 연출로 셋팅된 소품들 그들의 역할만 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더이상 죄를 짓지 말라"라고 하시며 이미 죽은 자임을 알게 된 마당에 죄를 짓지 않는 노력이나 방법이 그 여자에게 필요치 않음을 다시 한번 당부하신다. 사람이 죽으면 모든 구멍을 통해 배설물과 분비물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듯 이미 시체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자아를 관리하던 시스템이 멈추며 미처 몰랐던 온갖 죄들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나온다.

그러나 여전히 육이 있기에 자신이 의식될 때마다 죄를 짓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자신에게 관여하고 손대는 죄를 지으며 가만히 있지 못하고 흘러나오는 출구를 막고자 안간힘을 쓴다. 있지도 않은 허깨비같은 자아인 것을 아는 것이, 그 자아를 조작하는 것이 마귀임을 아는 것이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떻게든 더러움이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막고 싶은 욕망을, 죄에 죄를 더하는 짓을 뿌리칠 수 없는 그래서 마귀에게 무조건 항복하려는 배신자가 바로 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주님의 말씀 때문에 죄를 짓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키려고 죄를 짓지 않음이 들통난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의 지시가 나에게 지키라고 주신 말씀이 아닌 것을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리돌림 당하면서 여전히 독자적이고 싶은 나와 대비되는 낯선 나를 통해 배우게 된다. 정죄하지 않는다는 약속이 삽입된 자들을 한 시도 홀로 두지 아니하시고 죄의 출구를 막고자 하는 자아를 적을 동원해서라도 마스크 벗기듯 벗겨버리시고 천방지축 뛰놀며 잠재된 죄가 왕성히 발육해서 사망에 이르도록 주께서 도우시니 그저 시체로 널브러져 부활의 능력이 만들어내는 차이에 몸을 맡길 뿐이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배신으로 나는 죽음에 넘겨지고 예수님의 용서의 귀함만 살려지고 넘치도록.

다윗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죄라고 판단 받을 필요가 없는, 무엇을 해도 죄가 성립되지 않는 왕의 역할로 주께서 부여한 임무를 충실히 했고 오직 이스라엘의 참 왕이신 하나님이 죄라 하면 죄이고 죄인이라 하면 죄인이 되는 말씀 앞에 어떤 변명도 저항도 없이 엎드렸다. 그곳에 그 당시 다른 왕들이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면 다윗 왕은 분명 제정신이 아닌 자이다. 사람 대 사람의 눈을 통해 해석될 수 있는 한계는 감히 국가의 법과 동등한 왕에게 일개 백성이 죄를 운운하는 것이 어불성설이고 아무리 봐도 너무나 평범한 사람같은 선지자가 얼마나 괘씸하고 분했을까.

내가 아무리 십자가 앞에 나는 세리고 창기이며 거지라는 고백을 한들 그것이 자의식에서 만들어진 오해인 것을 주님은 사태를 일으켜 친절하게 털어주신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자이고 죽은 시체같은 자라 지킬 나조차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없어도 만들어지는 죄된 근성, 받아 소유하고자 하고 거지인데 거지라는 말에 발끈하는 거지같은 근성이 있음을 발각당하게 하신다.

잃을 게 없다고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없음 그 자체를 의로 삼는 교만을 거덜내시는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에 탐복한다. 내가 살아있다는 의식이 있는 한 털어도 털어도 끊임없이 자기 해석이 나오기에 어느새 죽었음이 살았음이 되고 폭 없는 선이 면적이 되어 주님을 가리는 먼지가 낄 때마다 털이개같은 난관을 보내시어 탈탈 털어내 주시니 대략난감 한들 어찌 기쁘지 아니하고 고맙지 않을 수 있을까.

분명 내 의도에서는 내 입에서는 '멍멍'하는 개소리만 나오는데 주의 오른손의 능력이 헛소리를 기어코 '그나라 의'로 바꾸신다. 개판같은 육을 애초부터 내 생각, 내 마음이 성립되지 않는 태고의 혼돈 상태로 만드시며 성령의 운행과 활동만이 일어나는 새판으로 창조하신다. 어느 과정 하나 인간의 공로를 끼워 넣을 건덕지가 없고 도리어 내가 개입되는 모든 것이 주님 일에 훼방 거리뿐이다.

누군가의 오해로 실망하고 짜증이 난다는 것은 내가 십자가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거저 주신 죄사함의 자리를 떠나 그분의 사랑을 잊을 때 끊임없이 올라오는 마귀의 기자회견이고 무거운 짐이며 자기의의 사슬이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먹는 거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는 말씀을 또는 복음을 수십 번 되뇌인들 주님으로부터 돌아오는 답변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라는 말씀뿐이다.

주님이 내 육체를 향해 떡을 내밀며 "받아먹으라"라고 할 때 떡 주는 주님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 몇사발 들이키며 나에게 주신 내 것 인냥 받는다. 그 떡의 종착점이 나일 거라는 오해를 하며 떡을 운반해서 가야 할 목적지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정해져 있음을 생각지 못하는 이 육 덩어리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나에게 충실하면서 살면 그만이고 타인이 나의 이름을 부를 때 언제든 나 라는 자아를 의식하며 마중 나갈 수밖에 없는 자로 살면 그뿐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런 한계에 갇힌 것을 알게 되었고 진리를 훼방하는 이 더러운 본질을 들통 내고 박살 내시는 방법으로 주의 복음이 전파되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시는 이 기적은 뭘까.

나에게 부여된 역할을 의식하며 세상을 산다 한들 어디까지나 나로 돌아오는 내 운명이지 내가 타인의 운명을 담아 나르는 기구인 것을 어찌 받아들일까. 이미 특수한 죽음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은 스스로 알 길은 없고 외부의 적이 너 죽자 나 죽자 달려 들어줄 때 난감함 속에 벌어진 틈에서 주님의 해석이 개입되면서 그제야 자신이 결코 이기지 못하는 골리앗같은 적을 내부에서 만난다.

갑자기 내부에서 골리앗의 소리가 들린다. "너는 나를 대적하기 위해 유치원 아이에게나 읽어주는 이런 동화같은 글을 들고 나왔느냐? 내가 베이비로 보이냐? 이건 순진한 거야, 무식한 거야?"라는 공격에 본의 아니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라고 말하고 싶은데 너무 본의여서 얼른 멈추려고 하는데 주책맞게 손가락이 계속 움직인다. 이기고 지는 그런 것은 잘 모르겠고 확실한 건 언약의 기능은 나를 수시로 제거하시며 주님의 이야기만 오롯이 나타나도록 쉬지 않고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무엇을 해도 오해가 없는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을 지식으로 배울 때와 그냥 사랑이 찾아올 때의 차이를 구별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배우는 것은 내 것이고 소유 의식이 강렬하게 일어나지만 요청하지 않은 사랑이 난데없이 침입하면 그것이 분명히 내 것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기에 감히 갖고자 하는 생각 자체가 불가능하며 사랑에 사로잡혀 그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초집중하기에 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내 생각 더 나아가 내 시간이 멈춘 듯이 되기에 사랑의 출처가 말하지 않다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무슨 말인지 상관을 할 내가 없다.

단순히 자신의 착각이나 일방적 추즉이 아닐까 의심이 생겨야 당연한데 그 사랑과 내 몸이 별개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살과 살이 붙어있는 것을 굳이 의식할 필요 없듯이 일체감 외에 어떤 형태도 인식이 안 되기에 옳고 그름이나 이익과 손해 또는 기분이 좋으냐 나쁘냐 하는 개념이 날아간다. 동일한 심장의 울림을 느끼며 나인지 상대인지 구분이 필요 없는 온전한 하나 됨이고 빈틈이 없는 밀착됨 이기에 잡음이 생길 수 없는 고요함 중에 일어나는 지진같은 떨림이다.

인간이 스스로 살을 벗겨내듯 자아를 벗을 수도 없고 주님의 몸에 스스로 가서 붙는 살이 되는 것 또한 불가능이다. 그저 주님이 자기 살들을 찾으시는 작업에 말려 증거로써 비치고 사라지고 나타나고 소멸되고를 반복하며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차이를 만들어 낼뿐이다. 소유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깎이고 벗겨지면서 드러나는 사랑으로 기뻐하고 사랑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 사랑만 남겨지는 그 자체로 감사하게 되니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기에 결국 그것이 보이지 않기에 세상은 반드시 오해한다. 미쳤다고.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당연하고 합당한 것으로 여겨지는지 그래서 어떤 상황도 결국 고마움으로 마감되게 하시는지는 하나님만 아시는 비밀이다.

이근호 

시체같은 우리 몸에 제대로 살아 있는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마치 썩은 사과의 표면과 내부에 사과벌레가 여기저기 구멍을 내면서 마음껏 올라왔다고 파고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진작에 자신에게서 손 놓고 살면 될 것을! 진작에 작렬하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면 될 것을!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본격적으로 터잡고 사십니다."(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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