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한마디

오늘도 되새기며!

아빠와 함께 2021. 8. 5. 11:34

인간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는 인간이 인간만 쳐다보기 때문이다.즉 율법은 안중에 없다.

사람들이 자신의 잔인성을 다 털어 놓을 때 율법이 완성된다. 율법에 구애받지 않고 본성대로 활개를 치면서 그들이 인간의 잔인함이 구성해내는 최고 목표지로 달려가고 질주한다. 그것이 바로 국가이다.

왕은 죽음에서도 소환된다. 이것이 메시야적이다.

골리앗이 죽은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년 다윗이 힘이 있어서 진 것이 아니다.

어린 아이의 특징은 나는 나를 지킨다는 원칙이 없다. 

딱 하나만 받아들이면 되는데, 즉 "나는 죽었다" 

 십자가만 증거

목사가 지식으로 십자가를 전하면 안 된다. 성령으로 전해야 하는데, 그러면 책망이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 그렇게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교회가 부흥이 되었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성령이 아니고 악령이다.

닭 울음소리라는 직통계시

자기가 구원을 받는 것이 자기 일이 아닌 주님의 일

아벨은 매개물인데, 물론 우리도 역시 매개물이라는 말이죠. 예수님의 약속을 전달하는 전달체, 혹은 연결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매개체, 연결체, 전달체, 이것이 모두 같은 의미

 "만약 내가 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은 혹시나 저 사람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그렇게 연결하는 역할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자기를 주님 앞에 죽은 자로 내세우는 것이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모습이 된다

아벨의 살인을 위한 살인자 가인은 당장 죽어서 안 됩니다. 그는 아벨 제사의 외곽을 장식하도록 번식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가인의 후예가 건설한 것이 도시국가입니다.

허풍이고 허세인데, 즉 힘의 집결

주님이 성령을 주신 것은 거침없이 죽을 수 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인데, 죽는 것이 전혀 두렵고 부끄럽지 않는 자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을 주셨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교회는 죽음의 권세를 이긴 자들의 집합인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다" 라고 하는 주님의 약속이라는 겁니다. 그 증표가 교회이고 말이죠.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래서 모든 강의가 어떻게 진행이 됩니까? "우리는 이렇게 우리 안에 계신 분으로 인해서 나 자신을 이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 생각을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삶이 되었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남들이 보기에 자기가 얼마나 멋지고 근사한지, 그런 것은 전혀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세계를 번성케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될수록 아벨의 죽음, 즉 아벨의 제사와는 이 세상이 반대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그 제사에 근접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이 아니고서야 아벨의 죽음에 관심을 가질 수 없게 되어있다는 말이죠.풍성하고 번영하는 이 세상에서, 인간들끼리 서로에게 찬란한 미래를 약속하는 이 세상에서, 그 어느 누가 아벨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겠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허풍과 허세로 부풀게 하신다는 것이죠.

예수님의 기도 빼놓고서는 그 누구의 기도도 하나님 아버지에게 상달되지 못합니다.예수님의 기도의 확장은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당부와 더불어 오직 예수님께서 선택해놓으신 그들에게만 효과적으로 전달됩니다.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곧 ‘죽은 자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는 소위 ‘살았다고 여기는 자들의 기도’는 주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뭘해도 자신의 이름으로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비록 신의 이름으로 기도를 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의도가 탑재되어 마련이며 그것도 가장 근원적입니다. 인간 행위의 바닥에는 ‘나를 위함’은 빠짐없이 깔려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4에 보면,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 성도에게 ‘주의 이름’이 찾아들게 하십니다. ‘주의 이름’은 사람들에게 뭇매 맞아 죽으신 그분입니다. 즉 ‘이미 죽은 자’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자신이 이미 죽은 자, 곧 생명에게 삼킴을 받는 자가 되어 더는 자신을 위한 기도가 성립되지가 않습니다. 자기는 이미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염려하지 않음에도 과연 기도가 나올 수 있을까요? 이는 인간들의 모든 기도가 염려의 산물이라는 겁니다. 그 염려는 바로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와 관련있으며 이런 것들은 지옥갈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라는 겁니다. 도대체 염려가 없는 나올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마태복음 6:7-8에 보면, 역시 이방인들의 기도 취지를 먼저 말씀하십니다. “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다 아시기에’ 인간들이 필요한 것을 기도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방인들이 자기 걱정이 되어서 기도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왜 시작이 되는 겁니까? 구약 이스라엘에서 기도의 시작은 제사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에게 합당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필히 율법의 들이댐이 선행됩니다.
율법으로 봤을 때, 죄라고 인식이 되면, 이때부터 죄인은 더는 자신의 생존이나 자신의 필요를 위한 기도는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미 저주받을 죄인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애굽 권세를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럴 때, 유월절의 양의 피로 인하여 그들은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제사란 바로 이 유월절의 희생이 ‘하나님의 자기 희생’이고 그 지속임을 말해줍니다. 즉 어느 누구도 타인의 도움이나 힘이 필요치 않다는 말입니다. 오직 희생제물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희생의 위력에 대해서 감사만 이스라엘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도 나중에 이스라엘에게는 억울한 자들이 나타납니다. 고와와 과부입니다. 이들은 빼앗김과 상실의 흔적을 지닌 자들입니다. 바로 이 상실을 근거로 해서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 불의한 자들이 파정됩니다. 누가복음 18:6-8에 보면, “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이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인간들로부터 당했다는 소식입니다. 이 소식에 참여된 자들은 그리스도의 비밀로 인해 예수님과 같은 체험을 당하게 됩니다. 바로 이 체험 위에서 기도하는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나타내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복음으로 인한 원통입니다.

주님에 대한 핍박은 바로 우리들의 육과 주님의 마주침에서 나타납니다. 이점을 체험하면서 진정 억울한 분은 주님임을 알고 감사하는 것이 성령으로서의 기도함입니다. 

인간이 신앙인 되기 위한 확률은 0퍼센트에요. 인간은 신앙인 될 수가 없어요.이미 신앙의 대상이 자기 자신인데, 자기 자신 잘되는 게 신앙의 내용으로 엉덩이 차지하고 있는데 그게 무슨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달하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까? 

성도가 이 땅에 사는 것은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큰 죽음, 주님의 속죄의 큰 죽음 안에 내가 죽어 있다는 사실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하루하루 숨 쉬고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나의 죽음을 전제로 하지 않고 내뱉는 모든 것들이 악하고 음란한 죄에요.

내가 시발점이 아니고 예수님의 행하신 그 말씀이 시작점이 되어서 우리 안에 넝쿨째 들어온다면 바로 우리 안이 성령이 거하는 예수님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②성전이 되면 우리는 움직이는 말씀이 되어 버려요.우리가 무엇이 되든지 그 안에서 우리가 행하지 않았고 네 안에 계신 예수님이 이런 일을 유발했다고 예수님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③이것을 가지고 에베소서 2장에서는 그걸 지혜, 바로 하나님의 십자가의 진리라고 하는 겁니다. 진리는 내가 예상 못 한 것으로 쑥 들어와 버려요. 쑥 들어와서 내가 뭘 얻겠다가 아니라

④우리를 죽여놓고 본격적으로 우리를 죽이신 주님께서 죽은 우리 안을 자기의 영역으로 자기의 세계로 사용해 버리면

⑤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을 해도 자유입니다.

더이상 율법이나 윤리적 도덕적 죄책감에 시달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버티는 것은 아직도 자기 의가 남아있다는 증거예요. 아직도 잘난 면이 있기에 뭔가 버티는 겁니다. 주님의 말씀이 처음에 우리 속에 들어가면 이거 지켜내겠다고 얼마나 악을 쓰면서 덤벼드는데 시작점이 자기 의로 되어있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열둘을 선택하시고 어디를 보내느냐 하면, 이방길로 안 보내요. 이스라엘로 꽉 차 있는, 열두 지파로 꽉 지배 되어 있는 그 이스라엘 땅으로만 가거라. 12가 구성되어 있고 12가 지속 되고 있는 그 자리에 새로운 12가 거기서 시비를 걸어라, 그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 시작했다고.

인간은 자기 인생이 좋다 나쁘다를 선택할 권한 조차가 태어날 때 지니고 있지 않다는 거예요.“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인간은 자기 운명을 선택할 권한이 없이 태어났다 그 말입니다. 인간이 태어난 것은 오직 예수님의 선택과 동반해서 예수님의 선택이 선택답게 부각되기 위해서 인간이 동반해서 태어나는 그것이 전부에요. 그게 끝이에요. 내게 유리한 선택은 없습니다. 내가 천국 가는 선택은 없어요. 내가 구원받는 선택은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없어요. 그런 생각을 한다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되는 인간들입니다. 가룟유다 같은 인간들이에요.

우리들의 선택을 악마의 선택으로 더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그 작업이 예수님의 선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아야 되었던 겁니다.

제자들은 십자가를 전하고 예수님 복음을 전함으로서 자기는 좋은 편에 서 있다고 생각을 한 거예요. 우리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다는 그런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 주님 최고야, 우리 주님 댓방 최고야, 이제는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이젠 안 망해, 이러고 복음을 신나게 전한 겁니다. 마치 자동적으로 자기가 주님과 한패인 것처럼 여겼던 거예요.

열두 제자 모두 다, 모두 다예요. 복음 전하는 자가 복음에 잘린다는 생각을 감히 못한 겁니다. 복음을 전하는 기능을 했다고 해서 그게 하나님의 확실하게 선택되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선택할 때 제자들은 뭘 몰랐느냐? 야곱의 아들이 열두 명이거든요. 야곱의 이름이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야곱이에요.

그것은 자기 되먹임이에요. 인간의 모든 문명은 현실을 모델화 시키는데 그 모델의 주인공은 내가 살기 위한 모델이에요. 내가 정당화되기 위해서 내 선택은 옳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모델화시키는 겁니다. 자기변명이지요 뭐. 끊임없이.

인간은 주어진 상황을 나의 선택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용도로 끌어모읍니다. 비겁한 변명이지만 하여튼 무조건 다 끌어모아요. 따라서 출발을 가룟유다부터 출발한다면 어느 인간도 하나님의 선택받아 구원받을 자격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이해하는 이스라엘은 바로 유대 사회가 생각한 이스라엘 그게 최종적이고 그것이 옳다는 식으로 마감이 돼요.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한테 죽었는가? 바로 이스라엘한테 죽었어요. 이스라엘한테 죽음으로 이스라엘이 예수님에게 와서야 비로소 두 종류의 이스라엘이 있다는 것이 비로소 밝혀지지요. 한 종류는 기존의 유대 사회고 다른 종류는 없어요. 예수님 빼놓고는 없습니다. 열두 제자가 다 도망갔기 때문에 없어요.

날마다 배신할 수밖에 없는 우리 육신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십자가의 증인 천국 백성 만드는 하나님의 솜씨를 목숨 바쳐서 증거 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