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
2021년 8월 1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4:2-3
(4: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4: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신약에서의 기도의 시작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입니다. 인간들이 해내는 모든 기도와 차이나는 기도입니다. 인간들은 신에게 기도를 바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서민들 층에서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기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 빼놓고서는 그 누구의 기도도 하나님 아버지에게 상달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확장은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당부와 더불어 오직 예수님께서 선택해놓으신 그들에게만 효과적으로 전달됩니다.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곧 ‘죽은 자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는 소위 ‘살았다고 여기는 자들의 기도’는 주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의 과오로 인해 인간들은 뭘해도 자신의 이름으로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비록 신의 이름으로 기도를 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의도가 탑재되기 마련이며 그것도 가장 근원적입니다. 인간 행위의 바닥에는 ‘나를 위함’은 빠짐없이 깔려 있습니다. 겟세마네 예수님의 기도에 초청된 세 제자들은 사실상 기도할 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남이 모르는 기도 내용을 붙들고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죽되, 제대로 죽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죽기 위해 기도하신 겁니다. 반면에 인간들은 본인이 본인을 살리는 방식으로 동원되는 것이 기도입니다. 간절히, 혹은 열심히라는 부사들이 다 자기를 위한 수단입니다.
기도없이는 응답도 없다는 원칙에 매여있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는 응답부터 먼저 주시고 이게 왜 ‘응답’이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누가 이 기도를 하셨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고린도후서 5:4에 보면,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죽을 것이 삼켜지는 생명’, 이 생명에서 나온 기도가 아니면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기도해서 죽어가는 자기 자신을 살려내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인간 속에는 진정한 하나님이 안 계신 이유입니다. 인간이 신앙인이 될 확률은 0%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살리는 신을 하나님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 성도에게 ‘주의 이름’이 찾아들게 하십니다. ‘주의 이름’은 사람들에게 뭇매 맞아 죽으신 그분입니다. 즉 ‘이미 죽은 자’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자신이 이미 죽은 자, 곧 생명에게 삼킴을 받는 자가 되어 더는 자신을 위한 기도가 성립되지가 않습니다. 자기는 이미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이름으로 기도에 응답해서 인간의 육을 떼내어 그 육이 이 땅에서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 지를 보게 하십니다. 고린도후서 5:8에서 사도 바울에 일어난 현상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즉 사도는 자신의 생명이 하늘에 있습니다.
그리고 난 뒤, 남겨진 자신의 육을 보게 됩니다. 도대체 인간의 육에서 뭐가 나오기에 뭐든지 죄가 되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그것은 육의 기도가 주님의 기도를 방해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6:34에 보면,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염려하지 않음에도 과연 기도가 나올 수 있을까요? 이는 인간들의 모든 기도가 염려의 산물이라는 겁니다. 그 염려는 바로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와 관련있으며 이런 것들은 지옥갈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라는 겁니다. 도대체 염려가 없는 나올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마태복음 6:7-8에 보면, 역시 이방인들의 기도 취지를 먼저 말씀하십니다. “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다 아시기에’ 인간들이 필요한 것을 기도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방인들이 자기 걱정이 되어서 기도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왜 시작이 되는 겁니까? 구약 이스라엘에서 기도의 시작은 제사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에게 합당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필히 율법의 들이댐이 선행됩니다.
율법으로 봤을 때, 죄라고 인식이 되면, 이때부터 죄인은 더는 자신의 생존이나 자신의 필요를 위한 기도는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미 저주받을 죄인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애굽 권세를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럴 때, 유월절의 양의 피로 인하여 그들은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제사란 바로 이 유월절의 희생이 ‘하나님의 자기 희생’이고 그 지속임을 말해줍니다. 즉 어느 누구도 타인의 도움이나 힘이 필요치 않다는 말입니다. 오직 희생제물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희생의 위력에 대해서 감사만 이스라엘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도 나중에 이스라엘에게는 억울한 자들이 나타납니다. 고와와 과부입니다. 이들은 빼앗김과 상실의 흔적을 지닌 자들입니다. 바로 이 상실을 근거로 해서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 불의한 자들이 파정됩니다. 누가복음 18:6-8에 보면, “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이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인간들로부터 당했다는 소식입니다. 이 소식에 참여된 자들은 그리스도의 비밀로 인해 예수님과 같은 체험을 당하게 됩니다. 바로 이 체험 위에서 기도하는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나타내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복음으로 인한 원통입니다.
주님에 대한 핍박은 바로 우리들의 육과 주님의 마주침에서 나타납니다. 이점을 체험하면서 진정 억울한 분은 주님임을 알고 감사하는 것이 성령으로서의 기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자신의 일하심의 성과를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기도로 허락하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9강-골 4장 2-3절(주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210801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4장 2-3절입니다.
골로새서 4:2-3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사도바울이 말하는 기도는 감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감사라는 말은 고맙다는 거지요. 기도할 때 내용이 첫마디부터 끝까지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고맙습니다, 라는 내용을 연결, 연결시켜야 된다는 겁니다. 시킨 그것이 무엇에 유용하냐 하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기도를 통해서 전달하는 매체가 된다.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기도가 되려면 그리스도의 비밀의 혜택을 입은 자만 이 기도를 할 수 있어요. 그리스도의 비밀, 그러니까 하나님 믿어가지고는 안되고 하나님을 안다고 해서는 알 수 없는 그 비밀, 하나님 말고 그리스도를 알아야 알 수 있는 비밀, 그 비밀에서만 나오는 기도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증거 하는 매개체로서 유효하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그리스도의 비밀은 하나님의 존재하심, 뭐 그런 것 가지고는 안되고 그리스도의 비밀은 뭐냐? 고린도후서 5장 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이런 말씀이 나와요. 그리스도의 비밀이 뭐냐 하면,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었다.
그러면, 죽을 것이 삼킨 바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비밀이라면,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에게 새롭게 주어진 것이라면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죽을 것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죽을 것에 해당 되는 자들이 그동안 얼마나 살려달라고 기도를 많이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기도가 기도를 방해해요. 기도원의 통성기도 같은데 보세요. 매미 우는 소리에요. 우르르르, 하고 쏟아지는, 그러다 보면 나중에 물리적으로 동조 현상이 일어나서 내가 기도하려는데 옆 사람이 더 큰 소리로 기도하니 그걸 따라가요. 저건 내 코스가 아닌데……. 엉뚱한 기도를 하고 있는 겁니다.
진짜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위한 기도가 아직 생명에 삼킨 바 되지 못한 자들의 그 기도 그것도 간절한 기도에 훼방을 받고 있습니다. 핍박을 받고 있어요. 기도 같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간절하고 간곡히, 애통, 온갖 것 동원해서 다 하는데 그 간절한 모습은 어떤 모습이냐 하면, 아직까지 생명에 죽음이 삼킨 바 되지 못한 그러한 한계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거예요. 몸부림치고 있는 겁니다.
인도의 힌두교가 신이 3억 3천만이 있어요. 힌두교의 신이 3억 3천만 개에요. 일본에도 신이 1억이 넘어요. 그들이 신에게 다가가는 접촉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기도입니다. 인도에서 남편 잃은 과부들은 살길이 없기 때문에 힌두교 사원에서 기도를 하루 종일 합니다. 기도의 품을 파는 거지요. 하루 종일 기도하게 되면 60원 줍니다. 60원이면 양파 두 개 줘요. 밥 주고 양파 두 개 주고. 하루 종일 힌두교 신에게 기도하는 그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기도,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달하는 이 기도라 하는 것, 기도는 인간이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게 불가능한 거예요. 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으면 불가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경에 기도가 있다. 그래서 내가 하는 그 기도 그게 기도인양 오해를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의 시조 아담은 이미 하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아담의 생각이 같을 리가 없지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떠났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원하는 그 기도를 아담부터 해서 아담의 후손들은 어느 누구도 해내지를 못해요.
쉽게 말해서 인간에게는 하나님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나’고 기도를 해도 나 우선, 나를 위주로 해서 나 잘되라고 나 살려달라고 신에게 기도하는 것, 그것은 안 가르쳐 줘도 잘해요. 심지어 난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애들도 기도하라고 하면 두 손 모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엄마가 맛있는 것 줄까 싶어서 간절히 기도하지요.
기도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간절히 해요. 조상의 시조를 닮았어요. 그 시조 아담에게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그 자손 대대로 하나님이 없어요. 우선순위가 아닙니다. 멀쩡한 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분명히 합니다. 인간이 신앙인 되기 위한 확률은 0퍼센트에요. 인간은 신앙인 될 수가 없어요.
이미 신앙의 대상이 자기 자신인데, 자기 자신 잘되는 게 신앙의 내용으로 엉덩이 차지하고 있는데 그게 무슨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달하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까? 나 잘났다, 의 비밀을 전달하지요. 나 이만큼 기도 잘하고, 이만큼 헌금 잘하고, 이만큼 하나님께 충성하고 봉사하고, 그것 지금 전달하기 바빠요. 나 지금 이런 인간인 것을 당신들이 좀 알아달라는 거예요. 세상에서 하는 행세를 교회 와서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기도원에서 그대로 하고 있어요.
기도가 기도를 방해하는 거예요. “입 좀 다물지. 그런 기도 좀 하지 말고 좀 다물지.” 다물지를 못해요. 기도 안 하면 벌 받을까 싶어서 얼굴이 시퍼렇게 돼요. 주님께서 이야기했어요. 너희들은 이제 네 이름으로 기도하지 말고 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그렇게 했는데 주의 이름이 무슨 이름이냐 하면 죽은 자에요. 죽은 자, 주님은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은 자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거예요. 이 말은, 네가 같이 죽지 아니하면 주님의,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달하는 매체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죽은 자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네 기도를 내가 압수해서 마지막에 붙는 네 이름이 아니고, 기도는 네가 했지만 내 이름으로 하기 때문에 내가 그 기도를 받아준다면 그 내용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가 왜, 이 하나님이, 하나님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는지.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비밀이에요. 왜 인간들치고 단 한 명도 하나님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는가, 그걸 공개적으로 까발리는 기도, 이 세상에 신앙인은 영 퍼센트, 단 한 명도 신앙인이 없다는 것을 까발리는 기도, 그 기도가 그리스도의 비밀이 기도에요. 그러니까 인간으로서는 기도가 불가능한 겁니다. 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우리 장모님이 돌아가셔서 토요일에 장례 끝냈습니다. 여기서 장모라 함은 제 처의 어머니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98세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장모님의 따님들이 어머니 몸이 쇠하니까 목욕을 시키려고 하면 인간의 본성이 부끄럽다고 완강하게 버티시는 거예요. 옷을 안 벗기려고. 이게 뭐냐 하면, 자기 의입니다.
98세 아니라 99세, 백 세가 되어도 자기 의를, 인간은 이걸 버릴 재간 재주가 없어요. 이게 시조가 길을 잘못 들여놔서 그래요. 우리 시조 아담이. 교회를 50년, 60년, 백 년이라도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이지요.
옷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원래 인간의 육신밖에 없는데 그 육신을 주께서 관리하시고요. 그 육신에다 무엇을 사람들은 입히느냐 하면, 옷을 입고 다니거든요. 그러면 그 옷은 뭐냐 하면, 내가 그동안 이 땅에서 일구어낸 그 실적과 업적과 성과들입니다.
인간의 육신은 이미 죽도록 흙이 되어 있는데 그 흙이 된 그 모습이 부끄럽다 그 말이지요. 실컷 살았는데 흙이 되었다. 이건 뭐예요? ‘내가 왜 살지?’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 이유를 만들어내는 게 뭐냐 하면, 나는 바람 부는 시장통에서 장사해서 애 셋 다 키우고……, 이런 것들이 자기에게 실적과 업적으로 되어서 잊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가 입은 옷이에요. 옷 안에 있는 육신은 주님에 의해서 이미 결정 난 겁니다. “너는 흙이니 제발 흙으로 좀 돌아가라. please, 제발 너는 그냥 태어날 때부터 죽은 몸 흙덩이를 갖고 있어.” 그런데 그게 부끄러우니까, 부끄럽다는 그것은 아담이 제일 먼저 느낀 감정이잖아요, 범죄하고 나서 부끄러운 것, 부끄러우니까 그걸 커버를 해 줘야 된다는 겁니다.
그 커버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나는 어느 대학 나왔고, 어느 회사의 장이고, 공기업 다니고, 대기업 다닌다느니, 결혼은 누구와 했고……, 그 모든 것이요, 그걸 하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땀을 뺐는지 아느냐, 땀을 뺐다는 거지요. 인간의 모든 역사와 글씨는요 땀으로 쓰는 거예요. 땀으로! 올림픽의 메달도 땀으로 한 거예요. 은메달 금메달 전부 땀으로 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땀방울이 핏방울 되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땀이 아니고 피에요. 모든 성경은 예수님이 피로 쓰신 거예요. 땀이 아니고. 기도를 하려면 피로 기도할 수 있어야 돼요. 피로! 땀은 살고자 하는데 흘리는 겁니다. 죽으라고 땀 흘리지 않잖아요.
‘나 그 금메달 안 딸래. 그러면 설렁설렁하면 돼요. 땀을 흘린다는 것은 악착같이 내가 기대한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나를 나의 육신 말고 나의 옷을 금메달 붙인 옷으로 바꾸기 위해서 남들 보기에 나 이정도야,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것을 삶의 목표로 잡고 그걸 달성하기 위해서 악착같이 땀을 흘리면서 내가 수고한 것만큼의 결과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겁니다. ‘노력은 쓰다. 그러나 열매는 달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런 식으로 땀은 자기를 살리고자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피는요, 주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맞춤 죽음이 되기 위해서 주님께서 기도한 거예요. 제대로 죽자는 거예요. 죽는 게 목표인데 그냥 어설프게 자살하지 말고 제대로 말씀대로 죽자는 겁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이 흘린 피고, 그걸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에게 이름이 있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라 그 말입니다.
그래야 네 잘남을 전도하는 매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비밀을, 십자가의 비밀을 전달하는 기도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살려고 기도하지 말고, ‘주여, 어떻게 하면 제대로 죽을 수 있습니까’를 기도하라 그 말이지요. 이미 죽어버린 자에 동승 하고자 기도하는 기도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거예요.
그동안 여러분이 기도하면서 2십 5만 5천 4백여섯 번 기도하면서 얼마나 잘못되게 주의 이름을 갖다 붙였습니까? 주의 이름 빨리 붙여줘야 사람들이 ‘저래야 기도가 끝나는구나. 진즉 붙이지 주의 이름. 어서 붙여야 휴~ 기도 끝났다.’ 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제야 편히 쉴 수 있기 때문에 막 갖다 주의 이름 붙이는데 그렇게 기도 많이 하면서 주문처럼 갖다 붙였던 주의 이름, 그 주의 이름은 죽은 자만이 하나님께서 받아준다는 거예요.
살아 있는 인간은 신앙인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안 받아줘요. 그리고 신앙인 될 수 있는 가능성과 여건은 전혀 없습니다. 전무한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주의 이름이 담긴 비밀이 있잖아요. 오늘 본문에 그리스도의 비밀, 그리스도의 비밀 안에 뭐가 담겨 있느냐 하면, 겟세마네 기도 달성의 비밀이 담겨 있어요.
겟세마네 기도에서 땀이 피가 되면서 피를 향하여 갑니다. 그 피가 제대로 율법과 합치되는 피가 된다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 피는 예수님 자신이 택하기로 된 이스라엘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정확하게 꽂혀서 전달되게 되어 있어요. 택배도 이런 택배 없어요.
정확하게, 그 피가 정확하게 자기 백성만을 골라서 찾아가게 되어 있어요. 찾아가서 그자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되느냐 하면, 사망이 생명에 삼킴이 되도록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주님의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뭐가 되느냐 하면, 생명에 삼킴이 되지 못한 사망의 권세에 놓인 자가 되어버려요.
기도를 하든, 헌금을 하든, 전도를 하든, 예배참석을 하든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예배하면서 자기 자랑 나오지요. 기도하면서 자기 자랑 나오지요. 기도하면서 옆 사람과 배틀 나오지요. 헌금하면서 배틀하지요. 십일조 하면서 ‘아, 저 5만 원짜리 봐라. 더 해야겠다.’ 배틀하지요. 봉사하면서 배틀하지요. 꽃꽂이 누가 해놓으니까 치워버리고 자기가 한 것으로 바꿔 놓지요.
이게 옷이거든요. 자기가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 뭔가 한 겹 두 겹 걸쳐야 돼요. 종교적인 이름으로, 직분으로 걸쳐야 됩니다. 기도로, 기도 응답받았다는 그 횡설수설, 말도 안 되는 간증으로 걸쳐야 되는 거예요.
그러나 그런 것들을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홀로 기도하셔서 네가 하는 기도를 일체 완전히 결재서류에 못 올리게 만들어요. 그리고 기도를 뭘 로 바꾸는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내 모든 것을 잃어버릴 때 더는 내 기도에서 나를 위한 기도가 나올 수가 없지요.
왜? 자기는 이미 죽어서 잃어버린 자니까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가 나올 수가 없지요. 자기 교회 부흥을 위해서는 기도가 나올 수가 없는 겁니다. 왜? ‘나 어느 교회 다니지?’ 잃어버렸어요.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있어야 자기 교회 부흥을 위해서 기도를 하지요. 아무것도 없는데, 잃어버렸는데.
여러분이 성경을 보면서 대충 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죽어서 천당 가려고 악착같이 성경 보잖아요. 그런데 여기 마태복음 6장 34절에 보게 되면, 마태복음 자체에서 우리 인간이 보기에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성경을 보게 되면 어떤 모순 같은 것이 나타나요.
마태복음 6장 34절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내일 일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일 일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는데 기도가 웬 말입니까? 이것은 모순되지 않아요? 염려할 것이 없는데 그러면 기도할 게 없어지잖아요.
기도 왜 합니까? 걱정이 되어서 하잖아요, 걱정이 되어서. 염려가 되어서. ‘주여, 내 애가 고3인데 수능 잘 치게 하옵소서.’ 이게 지금 염려잖아요, 염려. ‘지금 내 암이 전이가 되어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퍼지고 있는데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 천하의 하나님, 이 병에서 낳아서 하나님 살아계신 것이 만방에 전파되게 하옵소서.’ 지금 자기 몸 아픈 것이 염려된다는 거예요.
성경 말씀에 염려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 염려가 어디서 나오는가? 이방인들에게서 나오는데 31, 32절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이방인들의 특징,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는 그것은 지옥 가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거리다, 그 말이지요.
그 지옥 가는 사람들, 이방인들이나 하는 그 염려를 도대체 천국 간다고 하면서 그게 나온다는 이것은 뭡니까? 이것은 사기입니다. 교회 자체가 사기고 교인 자체가 사기고요. 전부 다 거짓말쟁이들이에요. 사기지요 이것은. 성경 말씀을 완전히 개무시하는 거잖아요.
염려하지 말라 했는데 기도는 왜 해요? 기도하는 것 안 들으려 해도 고함을 지르니까 들릴 수밖에 없지요. 가만 들어보게 되면 전부 다 처음부터 끝까지 염려에요 염려. “이번 장례식 잘 치르게 하옵소서.” 그 장례 잘 안 치르면 뭘 어쩔건데요? 안 치르면 뭘 어쩔 거야. 하나님이 비 오게 하시면 뭘 어쩌겠다는 거예요? 장의차 잘 오게 해달라고 장의차 펑크 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는데 뭘 어쩔 거예요?
제가 설교 처음에 했지요. 주님의 이 사도바울의 기도는 감사와 감사, 고맙소, 고맙소, 고맙소, 가 이어져야 된다고요. 무슨 염려가 끼어들 틈이 없어요. 그다음에 모순이 또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7절에 보게 되면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이방인들의 기도를 본받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도를 이야기하면서 이방인들은 어떻게 기도하는가 하는 것을 되새겨서 자기 제자들에게 지금 주입시키고 있는 거예요. “이방인들 기도 이렇게 하거든. 그러니까 너희들은 그 이방인들의 기도와 요만큼도 일치점이 없어야 돼. 알았지?”라고 주님께서 지금 신신당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방인들 기도가 뭐냐? 마태복음 6장 8절에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아버지께서 아신다 그 말이에요. 이방인들의 기도가 뭐냐 하면,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얻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기도하기 전에는 응답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는 뭐냐 하면, 이미 응답받고 왜 내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기도의 응답인지를 그다음부터 새기는 게 기도에요. ‘주님, 이게 왜 고마움이 됩니까? 내가 암에 걸리는 것이 왜 이렇게 고마운 것이 돼요?’ 제가 지금 암 걸렸다는 것은 아니고요.
왜 모든 일이, 내 아들 성적 내려가는 이것이 왜 고마운 일이 되고, 내 사업이 부도나는 이것이 왜 고마운 일이 되는지, 뭔가 착오에 대한 수정이 필요한 기도, 내가 인생을 잘못 보고 있다는 착오, 내가 이방인처럼 세상을 보면서도 교회 5십 년 6십 년 다니면서도 천당 간다고 착각하는 이 착각에 대한 수정, 이게 기도에요 이게.
남한테 안 지려고, 인생 살만큼 살았다고 남에게 으스대려고 하는 그런 자아 지키기 위한, 나의 옷을 지키기 위한, 나를 지키기 위한, 자기 의를 지키기 위한 그런 기도가 이게 없어지지 않을까요? 이게 어떻게 없어질까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당부합니다만 인간에게 있어서 기도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인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고 시조 자체가, 아담 자체가 완전히 망가진 영성을, 망가진 영혼을 우리에게 줬던 겁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외면하면 안 돼요.
따지고 보게 되면 지금 우리의 인생 사는 게 성경에서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했잖아요. 우리 인생 사는 것을 따져보세요. 이게 생명입니까? 참 같잖아서 말이 안 나와요. 지금 더운데 마스크 쓰고 앉아 있는 이것이 생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무슨 이런 생명이 다 있어요? 못 죽어서 환장한 이게 생명입니까? 성경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했잖아요. 그 생명 어디 있습니까?
어떤 분이 저에게 유-튜브를 통해서 댓글로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간증을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답변했지요. 사망에서 사망으로 옮기면 간증이 됩니다. 왜 기도는 주의 이름, 죽은 자의 기도를 해놓고 그 기도의 내용은 자기를 살리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기도를 해야 살지,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놓고 자기가 좀 미안하거든요. 미안하니까 또 대도, 대도라 하면 나는 큰 도둑놈 그것밖에는 기억에 없는데 대도(代禱) 대신 기도해주는 것, 중보기도가 있답니다. 성경에도 없는데 그런 개념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정말 사기 중의 사기지요.
뭐냐 하면, “나 같은 늙은 것은 죽어야 돼.” 마치 믿음 같아 보여요. 자칫 착각하면. 그런데 “나는 죽어도 괜찮지만 자식들을 위해서 새벽 제단 지켜야 된다고. 자식들을 위해서. 손녀 손자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나 잘하세요. 너나 잘하라고 너나. 남 걱정하지 말고.” 성경이 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할 수 있는 재주는 기도밖에 없거든요.
제가 또 이야기해 드릴까요? 인도의 신이 3억 3천이라고요. 일본의 신이 1억이 넘는다고요. 그들은 뭐합니까? 기도해요. 대만 보세요. 전부 다 향 피우고 기도합니다. 인간치고 기도 못하는 인간 한 명도 없어요. 그래서 엉터리에요. 할 수 있기 때문에 불가능한 기도가 아닌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러면 주께서 하는 기도는 도대체 시작점이 어디인가? 이 시작점을 찾아야 됩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말씀에 입각한 기도기 때문에 그 시작점을 찾아야 돼요. 그 시작점은 이스라엘에게 있습니다. 이스라엘민족은 특수임무를 띤 민족이에요.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을 개라고 여길만한 위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특별한 임무, 인간으로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을 차단하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중심으로 구성된 민족이 이스라엘이에요. 다른 민족은 아담 시조의 혈통으로 구성된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없는 데서 생긴 거예요.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기도도 없는 데서 나오는 거지요. 그 이스라엘의 기도의 내용이 뭐냐? 제사장의 제사 드리는 현장에서만 유효하고 효과 있는 기도에요. 제사장이 제사 드릴 때 응답이 될 때, 하나님께서 불을 받을 때, 제물을 받을 때나 가능한 기도가 이스라엘의 기도입니다. 다른 기도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기도의 제사를 언제 받는가? 그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서 그들이 죄인인 것이 드러날 때 제사가 성립돼요. 점점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비밀에 서서히 접근하는 느낌이 들지요. 아하, 내가 여기 살아 있는 이유는, 이미 죽은 자지만 계속 살려주는 이유는 도대체 나라는 이 육이라는 게 어떤 점에서, 어떤 속성 때문에, 어떤 요소 때문에 예수님을 핍박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어야 하는가를 이제는 죽을 때까지 찾아보는 체험이 바로 성도의 남은 인생입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여호와를 아주 열심히 믿던 사람이거든요. 그 여호와를 열심히 믿던 사람, 하나님을 열심히 믿던 그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의 사망이 생명에 삼킨 바 된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이단으로 취급해서 잡아 족치려고 찾아다닐 때에 그때 갑자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그게 사도행전 9장 4절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거 뭐 앞도 뒤도 없이 그냥 훅 치고 들어오는 것이 뭐냐 하면, 네가 나를 핍박했다는 거예요. 언제? 어떻게? 뭐 보여야 핍박을 하지요. 보이지도 않는 분인데요. 예수라는 분은 이미 돌아가셨잖아요. 하나님은 멀쩡하게 살아 있잖아요.
어떻게 핍박해요? 핍박이 어떻게 가능한가? 네가 나를 핍박했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주님과 주님이 구원해낼 성도의 첫 번째 미팅이에요. 처음 만남은 이 만남이에요. 너는 나를 핍박하는 자고 나는 너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 그런 관계로서 첫 만남이 이루어진 겁니다. 핍박입니다.
무심코 한 행동이, 내가 하는 기도가 핍박하는 기도였어요. 내가 하는 헌금이, 내가 하는 예배참석이 다 핍박이었습니다. 내가 하는 전도가, 내가 하는 선교헌금이 다 주님에 대한 핍박이었어요. 나의 착함과 선함과 의로움이 모두 주님에 대한 핍박이었습니다. 그 자체로 핍박이었어요.
이게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겁니다. 이게 바로 새로움이에요. 내가 죄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새로움.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내가 생각했던 선악체제에서의 죄,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것은 죄가 아니었던 겁니다. 윤리 도덕으로 내가 악함을 버리고 선을 행하겠다는 그 자체가 악이었어요. 그 자체가 악이었습니다. 그 자체가 죄였습니다.
살아보겠다고 땀을 흘리는 그 자체가 죄였어요. 그러면 죄를 알았으면 죄 안 지어야 되지 않느냐. 죄 말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재주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사실에 대해서 고맙게 여기고 감사하는 거예요. 전에는 내가 내 행동을 조절해서 ‘이것은 나쁜 것이니 안 하고 이것은 고아원 도와주는 것이니까 착한 일 이것은 적극 해 나가야지.’ 이렇게 내 선에서 내 행동을 조절하면서 이렇게 해서 선과 악을 골라냈던 나가 그 자체가 핍박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 그다음부터는 내가 내 행동을 조절할 가치도 안 되는 대상이라는 것, 내가 나를 다룰 대상 조차도 안 되는 거예요.
이것은 내 육이 미친 겁니다. 광주 어떤 집사님이 오랫동안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자기 관찰에 의하면, 그저 관찰 객관적인 통계가 아니고 그냥 관찰에 의하면, 교사의 10퍼센트는 즉각 정신병원에 가야 될 사람이고 교사의 80퍼센트는 정신병자들이랍니다.
그래서 내가 “10퍼센트가 아직 남아 있네” 했어요. 10퍼센트라도 남아 있으니 천만다행이라고. 사실은 100퍼센트 인간은 정신병자에요. 백 퍼센트입니다. 그걸 아셔야 돼요. 우리 자신이 정신병자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핍박해도 모를 정도로 정신병자에요.
시조를 잘못 만나서 그래요, 시조를. 여러분 탓 아닙니다. 조상 노선이 잘못됐어요. 그 계열이 아담 계열이거든요.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이 핍박이라는 것을 통해서, 핍박이라는 말씀을 예수님이 던질 때 사도바울은 자기 육 자체가 미쳤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다음에 나올 태도는 여러분이 상식적으로 잘 알 거예요. 육신 자체를 못 고치고 이것은 관리 대상이 안 된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간단하지요 뭐. 굳이 제가 꼭 이야기를 해야 되겠습니까? 간단하다 해도 어려운 문제지만. 그게 뭐냐 하면, 육을 포기하면 되지요.
그게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옵니다. 5장 6-8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차라리 이 몸을 자기에게서 떼 내버리는 거예요. 이 미친 몸을 떼 내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어디서 사는가? 그 미친 몸을 떼 낸 미친 몸이 나이 98세, 99세, 백 세까지, 이 중에는 102살까지 사는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는데, 그렇게 살면서 그 육이 무슨 짓을 하는지, 이미 우리 생명이 하늘에 있는 입장에서, 우리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입장에서 관찰하는 거예요.
내가 남은 세월 동안 요양병원에서, 직장에서 무슨 미친 짓을 해서 주님을 핍박하는 짓거리가 나의 떼 낸 육에서 어떤 식으로 뿜어져 나오는지를 그것을 보시면서 고맙소, 라는 말을 해야 돼요.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해야 돼요. ‘내가 저런 육을 건지겠다고 쓸데없이 교회에서 목사 말 고분고분 순종했구나. 이런 미친 짓을 하다니.’
십일조 안 하면 저주받는 줄로 알고, 기도 안 하면 온 가족이 저주받는 줄로 아는 이 근원적 육신, 주님 생각보다 내 생각 먼저 하고 내 살 궁리부터 먼저 했던 이 더러운 짓, 이거 관찰하세요. 관찰해야 됩니다. 왜? 그래야 고맙소, 가 나오니까. 꼭 김호중 불러야 되겠습니까? 고맙소, 가 나오는 거예요. 뭘 해도 고마운 거예요. 저런 더러운 짓을 하면서도 구원이 되었다니, 세상에 이런! 구원된 것이 미쳤어요, 구원된 것이. ‘주여, 이럴 수는 없습니다.’
그동안 인간은 세상에 쫄았어요. 쫄아 살았습니다. 뭐 람다 변이니 델타에다가 코로나 바이러스 하나 움직이니까 벌벌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벌벌 떤다는 것은 아직까지 안 잘라냈다는 거예요. 이 육을. 잘라 내야되는데. 그 떨어져 나간 간암 덩어리, 내 세포, 그것은 이미 구원에서 제거된 거거든요. 그것에 아직도 애착을 갖고 미련을 갖고 있어요. 사도바울은 지금 로켓 분리하듯이 캡슐하고 몸통하고 분리된 상태에요. 사도바울은 이미.
캐나다 이민 간 사람들이 제발 이민 오지 말라고 유-튜브 영상으로 많이들 이야기하거든요. 캐나다 가니까 할 일거리는 없는데 가만 있어도 월 6백이 나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걸 보고 저게 영생일까? 그게 영생이에요? 그게 이방인의 염려 아닙니까? 그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는 것 아니에요?
그래서 염려로 답답하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간절하게 목사부터 먼저 나와서 새벽 제단 쌓으면서 주여, 쭈여, 부르짓는 것 이거 미친 짓 아니에요? 이것 반칙 아닙니까? 사기거든요 이거. 이것은 가짜 티 내는 겁니다. 나 신앙인 아닙니다, 이방인입니다, 하고 티 내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기도는 그게 아닙니다. 이미 너희는 죽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기도가 바로 제사 되는 그 현장에서 기도가 이루어집니다. 솔로몬 성전 짓고 제사할 때 기도가 응답되었잖아요. 하나님께서 불로서 영광중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응답하는 그 자리가 뭐냐 하면, 주의 이름이 있는 자리에요. 주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주의 이름이란 애굽에서 자기 백성을 빼낼 때 값없이 빼낸 것이 아니고 값을 치르고 빼냈다는 겁니다. 그 값이 뭐냐? 유월절 어린양이에요.
유월절 어린양으로 값을 치르고 빼낼 정도로 자력으로는 애굽의 권세를 인간은 벗어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해요. 육의 두려움에서 못 벗어난다고요. 자기 육이 그렇게 괴롭고 한평생 힘들다는 거예요. 원래 트레이닝복은 땀에 젖게 되어 있어요. 땀나라고, 땀에 젖으라고 트레이닝복 입듯이 우리 육은 트레이닝복입니다.
이 세상 육을 준 것은 “실컷 네 육을 한번 굴려봐라. 얻는 대가는 전혀 없을 거야.” 쥐어짜 봐야 땀밖에 더 나옵니까? 피가 나오는 게 아니라 땀이 나와요. 이게 주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지혜입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주와 함께 동행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않을 때 그들에게는 무엇이 압박을 해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징계가 주어지거든요. 하나님의 징계가 주어지니까 이것은 자기가 포부한 것, 자기가 기대한 것, 자기가 목적한 바가 자꾸 틀어지니까 거기서 원망이 나와 버린 거예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주님께서는 자기 죽음을 위해서 자기 백성이라고 떡하니 애굽에서 구원을 했는데 그들은 자기 기대와 뜻대로 안 된다고 하나님을 원망해버렸다는 말이지요. 주님의 뜻은 너는 원래 죽어야 돼, 이 뜻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하기를, 왜 멀쩡한 나를 죽이십니까, 이렇게 하니까 사고가, 이 뜻이 안 맞는 거예요. 맞지 않는 거예요.
맞지 않는 인간들을 주께서는 기어이 건져내겠다고 여기다가 뭘 집어넣느냐 하면, 제사를 집어 넣어버린 겁니다.
그 제사를 집어넣을 때 제사 집어넣는 거기에 무엇이 동원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져요. 율법이 주어지니까 주께서는 딱 들이대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레벨은 율법대로 다 지키는 것이다. 율법, 십계명이라 보면 돼요. 율법대로 다 지키는 것이다. 그 마지막 계명이 탐내지 말라. “그 율법대로 다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네가 율법대로 못 지켰잖아. 지켰어?” “지켰습니다.” “그래? 가만있어 봐. 더 줄게.” 율법 지키겠다고 하니까 율법이 더 쏟아지는 거예요.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 했지?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 내가 죽이라 했잖아.” 주님께서 자기가 스스로 죽은 몸으로서 이스라엘과 같이 합세해서 이동하는데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뭘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이미 우리는 죽은 몸인데 죽은 예수님 덕분에, 주의 이름 덕분에, 구약은 주의 이름이니까, 그 주의 이름 덕분에 살았다, 를 계속 유지하려면 뭐가 들통나야 되느냐 하면, 도대체 우리의 육이라는 것이 왜 우리가 노력해서 영생 못 었는가, 그 점이 노출 되어야 돼요.
그걸 어떻게 노출 시키는가? 율법을 가지고 우리를 쏴대니까 우리는 나는 복음 안다, 나는 십자가 안다, 나는 알 만큼 안다, 했는데 막상 내 것 조금 손상되고, 잃어버리고, 보이스피싱 당하는 일이 벌어지니까 갑자기 여기서 ‘소용없어. 다 소용없어.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고 교회 헌금해도 소용없어.’ 이러면서 하여튼 발악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안식일에 나무하면 죽여라. 민수기에 그 율법이 나와 있어요. 그러면 안식일에 가게 문 열 일이 없는 공직에 있는 사람은 안식일에 가게 문 여는 사람보고 ‘저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어겼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죽여 버려야 돼.’ 이런 식으로 자기가 정의롭다는 티를 내지요.
그런데 안식일에 나무하고 안식일에 가게 문 연 사람이 자기 아들이라면 어떻게 하렵니까? 싹 빼버려요. ‘뭐 그럴 수도 있지. 우리가 신인가? 천사도 아니고 인간인데.’ 하고 휙 넘어가 버려요. ‘그 대신 교회에 착한 일 많이 하고 봉사 많이 하고 헌금 많이 내주면 될 것이 아닌가.’ 흥정하는 거예요, 지금? 거래하자는 겁니까? 협상하자는 거예요? 이거 뭐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원래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올 때 전부다 하나님 보시기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였어요. ‘고엘’이라 하는 것이 있거든요. 고엘이란 후견자, 내가 안 도와주면 진짜 도움받을 곳이 없는 경우, 이렇다는 말이지요. 주님께서 친히 불쌍하디 불쌍한 너히들을 내가 불쌍히 여겨서 내 백성 만들었다. 그 불쌍히 여겼다, 그 원칙을 견지하고 유지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시편 기도를 보게 되면 68편 5, 6절의 경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이게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이 고아와 과부인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살 궁리, 상속, 기업이라 해서 터를 줬거든요.
터를 줬는데 사람의 본성, 육의 본성이 어디 갑니까? 그다음부터는 고아와 과부와 어려운 사람들을 강제로 강탈하는 사람들, 계급이 발생하고 잘난 자들이 생겨서 어려운 사람들을 빼먹는 일이 이스라엘 내에 퍼진 거예요. 그러면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만들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 하나님께서 일부러 만들었어요.
일부러 남편이 있는데 남편 일찍 사별하게 만들어서 과부 되게 하고, 부모가 계셨는데 전쟁터나 혹 사고 나서 다 죽게 만들고, 하나님께서 일부러 사고를 일으켜서 고아와 과부를 만드신 거예요. 왜? 상실, 잃어버림이 그게 바로 주님께서 오실 때 가져온 천국의 요소입니다.
상실되고 잃어버릴 때 여기서 원통과 분통이 발생 되지요. 그 원한, 예수님에 의해서 박살 난 내 인생, 그 내 인생을 비웃는 다른 사람, 여기서 구체적인 기도가 시작점이 되는 거예요. 기도는 내 것을 상실할 때가 아니라 주님의 것이 상실될 때 거기서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어떤 과부가 그 원한을 풀어달라고 합니다. 6절에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여기 재판관 앞에 ‘불의한’이 있어요. 잘못된 재판관, 그 잘못된 재판관은 퇴근 시간 6시 되었다고 내 업무시간 지났으니 더이상 안해 주겠다. 이걸 불의하다고 본 거예요. 왜 불의하냐 하면, 그 과부의 원통함에 동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의한 것으로 치는 겁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간청하니까 7, 8절에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망을 생명이,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 삼켜버려요. 삼켜버리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우리의 육은 이제는 새로움에서 떼 나가야 되는 입장이에요. 사망의 육, 우리의 육이라는 것은 그 안에 뭐가 흐르는가? 시간 요소가 흐르거든요. 시간 요소, 그것은 항상 현재가 되면 전부 과거가 돼요.
따라서 주님의 성령이 임하게 되면 한마디로 말해서 전부 과거를 잊으라, 그 말이지요. 현재가 될 때 현재에서 과거가 재배열, 그러니까 현재가 과거를 다시 재조정해요. 과거에 있던 과거라도 현재에 와서 그 과거를 재편집하는 속성이 인간에게 있다는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항상 인간은 그 과거에서 미흡한 것, 모자란 것을 현재에서 기도를 해서 미래에는 그 모자람을 보충하기 위해서 기도를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뭐냐? 과거를 잊어버려야 돼요. 과거를 잊어버려야 기도내용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나를 위한 기도가 성립이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노래 있잖아요. “하지 못할 그 말~” 그 말이 뭐냐? “우리 서로 사랑했는데~” 하지 못할 그 말 우리 서로 사랑했는데. 이 ‘사랑했는데’가 과거로 되어 있습니다. 돌이켜 보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했다는 그것이 과거에요. 그러나 성령 안에서는 과거를 잊어버려야 돼요. 왜냐하면 현재는 모든 것이 사랑이 아니고 새로움입니다.
사랑을 버리세요. 사랑을 버리고 모든 것은 새로움으로 받아들여야 돼요. 사랑도 구닥다리 사랑 과거의 지난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신혼 초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더랬어요. 애 낳고 난 뒤에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어요. 과거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새로 사랑하자, 가 아닙니다. 새로 사랑은 없어요. 그냥 새로움이에요. 모든 것은 새로움이에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다 의미가 없어요. 의미가 없고 늘 새로움입니다. 그냥 감사하고 그냥 고마운 거예요. 육신을 통해서 내 과거가 얼마나 주님을 핍박하고 내 위주로 세상만사가 뜻대로 안 된다고 해서 순간순간 속으로 주님을 싫어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아이고 더워 죽겠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37도 더위를 보낸 주에 대한 간접적 공격입니다. “에어컨 너무 틀어서 추워 죽겠다. 감기 걸리겠다. 왜 우리교회는 에어컨 온도를 너무 낮추는가?” 이것은 낮추게 한 주님에 대한 핍박입니다. 입만 떼면, 육신이 갖고 있는 입만 떼면 행동 하나하나 모든 것, 그것은 과거에 준해서 살아갑니다.
이거 새로움 아닙니다. 구닥다리에요. 이것은 쓰레기입니다. 그것은 가짜임을 티 내는 거예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의 죄를 적실하게 체험케 해서, 내 육이 하는 그 미친 짓을 그대로 체험하게 하셔서 이렇게 스스로 구원될 수 없는 우리를 예수님의 죽으심이 이걸 인수인계 해서, 예수님의 피를 발라서 인수인계 해서 그 죽은자의 이름으로 살게 해서, 예수님에게는 어떤 새로운 용서가 나오고, 더 깊이 있는 주님의 사랑, 내 사랑 말고 주님의 사랑이 더 깊이 있게 나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에베소서 3장에서 하는 그 기도의 내용입니다.
그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에베소서 3장 15-19절에 보면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는 거예요.
누가복음 11장 9, 10절에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라고 하면서 11-13절에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절대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주시지 않습니다. 성령, 예수님이 죽었던 그 심정, 겟세마네 심정, 땀이 핏방울 되는 그 심정, “이 인간은 내가 죽어야 삽니다. 주여, 사망이 있는 인간을 내가 죽어야 내 생명에 삼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여.” 그 마음을, 주께서 성령을 담아서 우리에게 택배로 꼭 집어서 그 성령을 받을 자에게만, 영생 줄 자에게만 주시는 이 작업에 우리가 고맙소, 라는 말 외에 다른 할 말이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죄짓게 하옵소서. 죄 아닌 것도 죄인 것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그 현장에서 고맙고 감사하고 ‘아, 이게 몰랐던 주님의 새로움이구나.’ 새로움이 주는 그 생명을 어디에도 만끽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