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이중 존재

아빠와 함께 2021. 8. 16. 10:44

이중 존재

2021년 8월 15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4:7

(4:7)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

(4:8) 내가 저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낸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4:9)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저희가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4: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4:12)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4:13)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

(4:14)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4: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4:16)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4:17)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4:18)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므로서 이 세상말고 따로 다른 세계가 만들어졌습니다. 문제는 그 세계에 둘어갈 수 있는 자가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요, 그 세계에 들어갈 능력자도 아무도 없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 하나님 나라의 입성의 결정권이 인간에게 있지 않다는 말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명단들은 세상 사람보기에 일반인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모두 이중(二重)존재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부활에 나라에 이미 들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천국을 간곡하게 원해서가 아니라 모두 다 살아계신 예수님의 초청에 의해서 들어간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는 이런 식으로 나타납니다. 즉 성도들은 자신이 주인공이 아님을 압니다. ‘주체는 대상체가 같이 일어난다’는 원리대로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대상체라면 그 주인공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분이 됩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이 땅에 나서서 불행한 삶으로 마감했습니다.

즉 이 세상은 그분을 용납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그분이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방식으로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속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증거가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띄는 그들의 육신과 육체는 실은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성도된 자만이 아는 비밀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영에 이끌려서 세상의 본질의 끝까지 접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조상, 아담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선악과 과실을 따먹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들이 직면해야 될 자기들 존재와 세상의 막장은 바로 “정녕 죽으리라”입니다. 숨 끊어질 정도가 아닙니다. “정녕 저주의 자리로 골인”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밝히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은 그 예수님의 자리가 바로 모든 인간들이 가야될 코스입니다.

그 증거로서 모든 인간은 흙이 됩니다. 마치 손에 담으면 합쳐지지 못하고 와르르 뿔뿔히 뿌려지는 모래알처럼 말입니다. 이런 인간을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는 대상체로 뽑으신 겁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그러니까 성도의 생명은 이미 주님께서 따로 빼돌려놓으셨습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30 이러한 이중성에 대해서 처음에 베드로도 알지를 못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이 사실을 몰라도 상관없이 결국에서는 베드로는 구원이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2:31-34에 보면,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베드로가 감히 상대하지 못할 악마가 베드로를 목표로 노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주님께서 아시고 주님께서 베드로를 위해 기도를 하시고 계셨다는 겁니다. 이는 베드로가 배신을 하던 어떻게 하던 베드로의 주님에 대한 헌신보다 주님의 선택이 더 우세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성도는 더는 자기 인생에 대해서 구애받을 필요가 없고 엮매일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세속적으로 너무 깊숙이 들어가서 살아도 돼나?”할 정도로 성도가 놓인다 할지라도 세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치는 나의 노력보다 주님의 선택이 더 우세함을 이 남은 세속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이렇게 나타나게 하신 것에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누어주신 것이 있었습니다.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나뉨을 받은 것은 복음입니다. 복음을 전달하고 또 전달한 겁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복음의 가족’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들에서 ‘복음으로 낳은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 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 2:11/딤전 1:2/딤후 2:1)

이 부모-자식의 관계는 세상의 혈육적인 부모-자식과의 관계와 다릅니다. 세상적인 부모-자식 관게에서는 혈육적인 반복성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복음의 가족 속에서는 ‘혈육적인 반복, 그 이상 것’이 나옵니다. 그 예가 사무엘하 18:33에 나옵니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여기서 다윗은 압살롬을 계속 추적해 오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이르킨 그 마음이나 의도는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알기 전에 자기 모습으로 그대로 닮은 겁니다. 반복된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 부정(不正)적인 것이고 죄악된 본성입니다. 

즉 다윗은 압살롬을 보면서, 자신이 참으로 죽어야 되는 것을, 자기와 빼다박은 아들이 먼저 자신의 부정성으로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통곡합니다. 곧 자신에 대한 애도입니다. 이는 다윗이나 오늘날 성도의 이중성 가운데, 자신의 육신 자체에서 나오는 죄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대신, 먼저 죽으심을 발견하는 심정과 같은 겁니다.

바로 이 십자가 복음으로 연결된 자들이 한 그리스도 몸의 지체요 천국의 새로운 가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이 지옥과 통하고 있음을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1강-골 4장 7-18(이중 존재)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4장 7-18절입니다.

골로새서 4:7-18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군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 내가 저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낸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저희가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여기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인물들에 대한 소개는 주보 요약에 보면 죽 소개해 놓았습니다.

【골로새서 4장 7절에서 18절까지는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두기고는 에베소와 골로새 교회에 사도의 편지를 전한 사람입니다. 아리스다고라는 사람은 데살로니가 사람입니다. 바울의 복음 때문에 덩달아 밉상을 받아 옥에 갇힌 사람입니다.

바나바의 조카 마가가 나옵니다. 마가복음을 쓴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 오순절 성령 강림했던 장소가 이 사람의 다락방이었습니다. 유스도라는 사람도 나옵니다. 이 사람은 고린도에서 전도자에게 숙식을 제공한 사람입니다. 에바브로라는 사람도 나옵니다. 에베소에서 사도 바울이 설교를 할 때 듣고 골로새로 가서 교회를 세운 사람입니다.

아킵보도 나옵니다. 이 사람은 빌레몬의 아들입니다.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 있는 성도들에게 사도가 안부를 전합니다. 이 지역은 골로새에서 80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의사 누가’도 나옵니다. 누가복음의 저자입니다. 꾸준히 바울의 전도에 협조하고 동참한 사람입니다. 아리스다고와 누가는 끝까지 바울과 함께 하면서 사도 바울이 순교 당할 때도 함께 했습니다.

이들에게 사도가 안부를 묻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즉 모두들 같은 처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6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 말씀 때문에 이 땅에 오셔서 고난받으시는 예수님처럼, ‘말씀만 버리면 아무 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복음의 말씀을 못 버리는 자들입니다.

요한복음 15:18-19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그리스도의 종은 이 지구상, 어디 가서 사나, 누구를 만나나 이 삶의 원칙이 작용하는 자들입니다. 본인의 잘못도 아닙니다. 본인들의 우수함도 아닙니다. 그냥 이 원칙이 그대로 살아 있어야 하기에 사는 자들입니다.】

이 모든 사람은 결국은 흩어질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그냥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손에 잡히는 인간 형태를 가진 모래집합체라고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은 이 세상에서 다 훅, 시간 되면 다 시간 속에 날아가 버려요.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여기 등장하는 이 인물들이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왜 이 거룩한 성경책에 기록을 하고 돌아가면서 주님 오실 때까지 대대로 읽으라고 한 그 이유가 뭐냐? 이들의 세상 사람과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이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들은 주인공이 예수님이 주인공이고 이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새로 생긴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면 ‘두기고’라는 사람이 있는데 두 종류의 두기고가 있고 그다음에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있다면 오네시모도 흩어지는 이미지 같은 흙덩어리 오네시모도 있는 반면에 주안에 있는 오네시모 따로 있고요.

10절에 나오는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 아리스다고도 두 종류가 있고 바나바도 두 종류가 있고 11절의 유스도도 두 종류가 있고요. 12절의 에바브라도 두 종류도 있고 13절의 라오디게아 교인들도 마찬가지고 14절에 누가도 두 종류의 누가가 있고요. 그 뒤에 17절에 나오는 아킵보도 두 종류가 있고 18절에 나오는 바울도 두 종류의 바울이 있는 거예요. 하나는 사울이고 하나는 바울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사람이 두 종류로 나뉘었다면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달랑 한 종류, 달랑 그것만 쥐고 그렇게 사시는 겁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뭘로 자기를 나타냈느냐 하면, 부활하고 난 뒤에 부활체로, 부활의 육신, 부활체로 나타냈어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도마가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신을 그 부활체를 만졌어요.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요 20:27) 해서 만졌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부활의 세계를 알려줄 때 예수님은 자기의 부활된 모습을 그 당시 제자들끼리 있는 곳에 은밀하게 다가가서 만져 봐라, 해놓고는 홀연히 그 현장에서 떠나버려요.

마치 실종된 상태처럼, 없는 것이 아니고 계시는데 사람들이 찾으려면 안 보이는 곳에 계시는 거예요. 예수님 본인이 벌써 이 세상에 출현하는 방식이 죽고 난 뒤에 살아 있는 그 부활의 능력과 그리고 자신의 부활의 실재적인 육체와 결합이 된 채 나타나셨다면 지금 예수님 세계, 하늘나라지요, 하늘나라에 속한 인물들을 어떻게 만들었느냐?

두 종류로 만들어서 지금 있는 그들의 육체를 가지고 “주님이 부활했다” 또는 예를 들어 “아킵보나 두기고야. 너는 이미 살았어” 그 살았어, 를 증거 하는 증거물로 지금 남아 있는 그들의 육신을 하나님께서는 지켜주는 거예요.

왜 그러냐? 옛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어디로 가느냐 하면, 광야로 갔어요. 광야로 그들을 집어넣은 것은 다 죽으라는 이야기입니다. 농사지을 땅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광야에 온 그들은 실제로 다 죽기는 죽었어요. 다 죽으라는 이야기인데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은, 어차피 아담의 몸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흙이니까 이미지에 불과한 거예요.

따라서 광야에 들어온 이스라엘은 죽을 때 죽더라도 사는 법을 광야에서 배우고 죽고, 저 애굽에 남아 있는 애굽사람들은 아담에 속해서 같이 죽는데 죽는 이유도 모르고 지옥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 광야라는 이곳이 지옥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금 전까지도 애굽에서 살다 왔기 때문에 지옥 같은 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죽으라고 넣어준 환경을 가지고 떡 달라, 물 달라, 자꾸 사는 법을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에서 기도해서 사는 법, 그런 이야기하고 똑같은 거예요.

본인이 두 종류라는 사실을 모르는 겁니다. 두 종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기서 갈렙과 여호수아밖에 없었어요. 내가 사는 게 이 땅에 태어난 목적이 아니고 내가 생각도 못했던 새로운 환경, 그것을 새하늘과 새땅 또는 약속의 땅이라 합니다, 약속의 땅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화살표로 사용하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하나의 화살표에요. 저쪽에 가면 천국이 있는데, 할 때 스톱! 그게 화살표에요. (이정표 같은 품새로) “저쪽에 천국 있어요.” 이 땅에서, 갈렙과 여호수아처럼 더러운 이 세상에서 살면서 화살표로 사용해서 “저쪽으로 가면 약속의 땅 있어요.”라고 한 사람은, 갈렙과 여호수아는, 내가 이 광야에서 어떻게 밥 먹고 사는가, 그것이 우선 과제가 아니고 방향타 역할을 하라고 믿음으로 주께서 줘서 그들은 과연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저는 그걸 ‘계시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표현하고 싶은데,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계시, 부활의 세계가 엄연히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들을 각자 두 종류로 만든 거예요. 이들은 현재 다 죽었어요, 죽더라도 성경에 이렇게 남아 있잖아요. 성경에 이렇게 남아 있다고요.

예수님이 자기가 죽었지만 예수님의 그 부활체는 남아 있어서 제자들이 쳐다봤잖아요. 그런데 그 제자들은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그것을 몰라서 자기 몸 하나, 몸뚱이 하나, 이게 다인 줄 알았어요. 이게 날아가면 나는 끝이다,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누가복음 22장 31-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이미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베드로 이름이 시몬입니다. “보라 사단이(악마가) 밀 까부르듯 하려고……” 골라낸다는 겁니다. ‘저것은 내 밥이다. 저것은 내가 노리고 들어간다.’ 이렇게 밀 중에서 자기가 먹을만한 밀을 골라서 노리듯이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렇게 사탄이 너를 찾았지만, 청구했지만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래가 어떻게 되는가를 익히 알고 있어요. 그런데 베드로는 그걸 모르고 이 몸뚱이 하나 가지고 주님 따라가서 한번 천당 가볼까, 하는 식으로 베드로 자기가 이중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그냥 하나라고 생각해서 뭐라고 하느냐?

33절에“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하니까 34절에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어떻게 배신하는 것까지 다 아시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선택의 우세입니다. 인간들이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이미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다 알고 있어요. 오늘 본문의 명단에 나오는 사람들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선택의 우세, ‘내가……’ 쉽게 가겠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 이거 바뀌어야 돼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게 더 우세합니다.

그걸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내가 주님을 위해서 기도한다.’ 아니에요. 주님이 널 위해서 기도해요. 내가 예배드린다. 아니! 모든 예배, 선교, 전도, 하여튼 우리 일상에 대해서, 네 일상에 대해서 네가 얽매이지 말라는 거예요. 평생을 인간이 바보짓 하고 있는 이유가 자기 인생에 얽매여서 바보짓하고 있는 거예요. 고민 걱정하고 있고요.

전부 다 이미지에 불과하거든요. 주님께서 베드로로 하여금 또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들, 골로새서 본문에 나오는 이런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어디로 몰고 가시느냐 하면, 성령께서 그들의 한계를 미리 접하게 만들어요. 그 한계가 성경 말씀대로입니다.

뭐냐? 네가 정녕 죽으리라. 이미 인간은 정녕 죽으리라, 를 실효성 있게 그게 제대로 된 현실인 것을, 그것을 증명하는 용도로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어요. 네가 정녕 죽으리라. 그 죽음이 목숨 끊어지는 정도가 아니에요. 지옥입니다. 네가 정녕 죽으리라.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나이가 70, 80 되어도 몰라요.

그런데 어떻게 했느냐? 주님께서 그 한도, 그 경계선까지 자기 자신을 우리 대신, 택한 백성 대신 밀어붙입니다. 이 땅에서. 마지막에 인간이 도달한 곳은 뭐냐 하면, 아버지의 저주가 있는 곳, 그러니까 지옥이에요. 주님께서 지옥까지 가신 겁니다. 가시고, 가셔서 그 지옥에서 주님은 언약이 있기 때문에, 약속 때문에 죽음에서 소환된 겁니다.

수련회 때 이야기한 그 다윗처럼 살인죄, 간음죄 다 했지만 그 죽을죄에서 생명으로 소환되잖아요. 그게 약속의 위력인 겁니다. 약속의 위력, 언약의 위력. 언약적으로 할 때 우리는 어떤 짓을 할지를 알아요. 그러나 우리가 어떤 짓을 내어도 그것은, 우리는 뭘 못 이기느냐 하면, 너는 정녕 지옥 가리라, 너는 정녕 죽으리라, 를 우리의 행함으로 이걸 극복할 수가 없어요. 그걸 미리 주께서 아십니다.

“사탄이 너보다 더 세. 베드로야, 사탄이 너를 노렸어. 너는 내 기도 없으면 안 돼. 네가 무슨 결심을 하고 주님이 죽는 데까지도 따라가겠습니다,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네 진면목을 보여주마. 네가 오늘 밤에 나를 배신할 것이다”

배신해도 괜찮아요. 배신해도 괜찮다고요. 왜? 주님의 선택이 배신보다 더 세니까. 베드로의 배신보다 주님의 선택이 더 세니까요. 주님의 기도와 지켜주심이 더 세니까요. 정녕 죽으리라. 이 사실을 여기 명단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알았는가? 바로 십자가 복음에서 그걸 알게 된 겁니다. 아, 인생 다 안 살아도 갈 때까지, 끝까지 가본 거예요.

그리고 그 지옥, 이 세상 지옥 경계선을 터치한 거예요. ‘아,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야, 이거구나.’ 이 세상은 주님이 먼저 보여줬고 그다음에 사도들과 복음 전하는 사람들도 같이 느낀 것은 이 세상은 곧바로 지옥과 통하고 있다는 사실, 이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 거예요.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잖아요. 이것은 뭐냐? 지옥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왜? 지옥과 통하니까요. 그대로 가다가는. 거기에 해당 되는 사람이 마태복음 19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9장, 찾을 필요도 없어요. 다 아는 이야기, 부자 청년 이야기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의 수리를 맡긴 거예요. “주님, 이미 나름대로 완벽에 완벽을 기했지만 주님은 능력이 있으니까 좀 더 개선하고 완벽하게 고치면 영생 얻을 수 있지 않습니까?” 하고 수리를 맡긴 겁니다.

마치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 와서 맡기듯이요. 주님은 수리를 안 받아주십니다. 이게 고칠 문제가 아니에요. 교인들이 그걸 알아야 돼요. 여러분은 교인이 아니고 성도니까. 내가 엄청난 말을 했네요. 교인들이 주님 앞에 나와도 이게 수리가 안 돼요. 폐기대상이지 수리대상이 아닌 거예요.

찬스가 하나 더 남아 있거든요. 이게 골로새서 3장에 나오잖아요. 이미 우리의 생명은 따로 빼돌렸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부활의 세계안에 이미 들어와 있기 때문에. 성령으로 이미 부활의 세계에 들어와 있거든요.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2,3)

제가 누누이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누누이 이야기했어요. 에베소서 2장 5, 6절에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미 완료된 상황이에요. 완료된 현실입니다.

창 자국과 못 자국이 있는 그 예수님의 신체성이, 예수님의 부활의 세계, 영생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라면 오늘날 성도가 또 여러분 자신이 만져보는 이 모든 육신은, 바로 우리 목숨은, 우리 생명은 이미 부활의 세계에 빼돌려졌다는 것을 증거하는 용도로 너의 남은 육신을 사용하라, 그 말이에요. 이게 어렵습니까? 이게 어려운 이유는 이미지 때문에 그래요. 이미지 때문에. 과거에 매여 살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전에 살던 동네에 가봤거든요.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 시민극장이라고 있었어요. 시민극장, 없어진 것은 오래 됐고요. 문 닫고 나서 얼마 안 돼 제가 가본 적이 있어요. 추석이나 명절 전후에 시민극장에서 특선영화 <춘향전> 한다 하면 정원도 상관없어요.

정원을 완전히 무시하고요, 백 명 들어갈 곳에 500명 집어넣고, 200명 들어갈 곳에 천명 집어넣어요. 여러분, 다 경험했잖아요. 그렇게 집어넣어도 다들 불평 없어요. 영화가 너무 재미있으니까요. 신영균 나오고 북한에 납치되었다 돌아온 배후 최은희도 나오고요. 이런 배우들 나온다 하면 사람들이 매료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시민극장 문 닫은 뒤에 가보니까 습기 차고 곰팡이 냄새가 나는 거예요. 꼭 우리 교회 같아요. 그때 그 환상, 그 이미지를 찾으러 갔는데 그 이미자가 없어요. 왜냐? 지금 나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의 내가 살기 때문에 과거의 그 아련한 추억을 찾고자 해도 그것이 과거의 그때 그 일이 아니고 지금 내가 그리워하는 환상일 뿐인 겁니다.

그게 이미지에요. 인간은 이미지에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성경의 현실을 내 육신의 과거의 이미지로 전부 다 완전히 얼룩지게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지난 금요일인가? 오 세복이라는 가수가 죽었어요. 이 사람이 누군지 잘 모르실 것인데 <긴 머리 소녀> <밤 배> 부른 가수에요.

둘이서 불렀는데 나머지 한 사람은 이두진이고 그 사람은 살아 있고요, 죽은 사람이 오 세복입니다. 그 듀엣의 이름이 ‘둘 다섯’입니다. 이(2), 그리고 오(5), 그렇게 해서 ‘둘 다섯’ 다섯이 오 세복이거든요. 그 사람(향년 67세)이 나보다 나이가 적은데 죽고 난 뒤에 그 사람이 부른 노래 <긴머리 소녀>를 들어봤어요.

70년대에 부른 그때 환상이 떠오르는데 그러나 그 환상은 그때 그 당시 내가 그 시절로 돌아가서 느꼈던 그때 그 환상 아니에요. 지금 내가 조작한 거예요. 과거라는 것을 조작해서 지금 살아 있는 내가 과거에 그랬었었지, 하고 위장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과거로 돌아가도 그때 그 과거에 돈 벌고 취직할 생각이나 하지 다른 생각은 없지요. ‘참 그때가 좋았다.’ 그때 한번 살아보지요. 좋았는지. ‘아, 고등학교 때 나 참 예뻤는데.’ 그때로 가보지요. 시험 준비한다고 바빴지 그때는 자기가 예쁜줄도 몰라요. 화장할 줄도 몰라요. 그저 중간고사 그런 것 신경 쓰는 거예요.

그때그때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자기 이미지에 자기가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그 이미지 중 하나가 뭐냐 하면, 지금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내가 좀 재미있게 살기 위해서 과거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내가 조작을 하는데 이런 습성, 습관이, 지금 내 죄악된 습관이 내 몸에서 미래까지 적용을 합니다.

어떻게 적용을 하느냐? ‘내가 죽으면 천국 가겠지.’ 그것은 엉터리입니다. 그것은 본인이 본인한테 속아 넘어간 거예요. 내가 죽으면 천국 가는 게 아니에요. 지금 내가 여기 있으니까 내가 내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거예요. 마치 과거를 조작하듯이 미래도 그렇게 조작하는 겁니다.

이걸 어렵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주체는 대상과 동시에 일어난다는 뜻이에요. 주체는, 예수님은 그 대상, 예수님을 증거 할 대상, 우리 자신을 죄인 된 모습으로 동시에 일으키는 거예요. 잘 이해가 안 되시지요. 세상 사람들은 내가 주체고 내가 대상이에요.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자기한테 없어요.

그런데 성도는, 여기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내가 누구의 대상이에요. 예수님이 이미 일하고 있는 그 대상으로 등장했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 바로 명단에 있는 사람들은 더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5장 이야기하려는데 또 이야기하려니까 잔소리처럼 느껴질까 이야기를 못 하겠어요. 15절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분명히 나와 있거든요.

여기 명단에 나오는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혼자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 살다 죽으면 천당 가겠지, 그게 아니고 이미 그 사람이 몇 년을 살든 어디에 있든 관계없이 그 자리에 예수님이 여기 계시다는 것을 증거 하는 증거물로서 자신의 남은 신체가 활동하고 있는 겁니다.

이 말을 이해 못하면 이 말은 이해하겠지요. 여러분, 마음껏 세속적으로 더 사시라는 뜻이에요. 더 망가지고 더 무너져야 된다, 그 말입니다. 우리가 세속적으로. 이렇게 세속적이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왜냐? 그래야 나를 내 손에 맡기지 않고 내 운명은 다른 분이 쥐고 계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침마다 운동하면서 본게 있습니다. 비 온 뒤에 날파리도 많지만 거미줄이 그렇게 많아요. 그걸 보게 되면 참 안타까워요. 물론 인간이 아니고 동물이지만 안타깝다고요. 뭐가 안타까우냐 하면, 거미줄을 밤새 쳐놓았는데 장사가 안돼요. 내가 아무리 봐도 벌레 하나 달랑 걸려 있어서 손님이 겨우 한 사람밖에 없어요. 저래도 사나, 싶을 정도에요.

그런데 그 거미줄을 보면서 내가 느낀 점은, ‘참, 저거 하나 쳐놓고 하루 종일 기다리는데 도대체 거미가 뭘 믿는 것인가?’ 내가 ‘저렇게 장사도 안 되는데……’ 하고 걱정을 하게 되면 거미가 뭐라고 하겠어요? “내비도! 이래 살다 죽을래. 그냥 내비도.” 왜? 자기는 누구의 하나의 대상이기 때문에. 누구의 대상체기 때문에. “주께서 이렇게 손님 하나밖에 안 오게 하는데 내가 뭐 어떡하라고!”

그래서 이 골로새서 끝에 나오는 이 사람들이 그렇게 중요한 사람들이에요. 여기 등장하는 이 사람들을 한꺼번에 묘사하는 대목이 에베소서 4장 11, 12절에 나옵니다. 주님께서 올라가서 사람들에게 뭘 나눠줬어요. 성령을 나눠줬습니다. 성령을 나눠주게 되면 그들은 이제 복음을 위해서 사는데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문제는 이 그리스도 몸이 안 보인다는 거예요. 교회를 세우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미 부활인데 이 부활은 인간의 육신 가지고는 보이지 않아요. 마치 실종상태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주께서 보이지 않지만 골로새서 4장 7절부터 18절까지 오늘 본문 길게 읽었잖아요. 여기 등장인물들 많잖아요. 이 사람들 어디서 생겼습니까?

주께서 그렇게 만든 겁니다. 뭐 하는 자로? 복음 전하는 자로. 복음 전하는 자는 본인이 본인보고 놀라야 돼요. ‘내가 미쳤지. 지금 돈 벌어야 하는 이 시간에 내가 뭐 하고 있지? 내가 왜 복음을 생각해? 돈도 안 되는 것을. 돈도 안 되는 것을 왜 생각하지?’ 본인이 본인 보고 놀라야 됩니다. 갈렙과 여호수아와 마찬가지에요. 자기 몸이 죽어가면 죽어가는 본인 몸을 살리는 그것이 급선무 아닙니까.

교회 나가니까 교회 안 나가는 가족들이 늘 잔소리 하고 불평하는 이유가, 그 시간에 돈이나 벌지, 그거잖아요. 돈 벌어야 살지, 그거 아닙니까? 그 사람들이 뭘 모르냐 하면, 인간이 ‘이중’이라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흙으로 돌아가 죽을 수밖에 없는 그 몸이 전부인 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성도는 하나 더 있거든요. 이미 생명을 빼돌린 사람이 있다고요.

어린애들 보면 아주 간사하기 짝이 없을 때가 있어요. 어린애보고 냉장고에 있는 아이스케이크 먹지 마라, 하고 나중에 식탁 테이블을 보니 아이스케이크 작대기가 세 개나 놓여 있어요. 그래서 엄마가 혼내지요. “내가 먹지 말라 했지!” 하니까 애가 하는 말이 “안 먹었어요. 나 먹은 적 없어요.” 하고 시치미 떼는 거예요.

아이 말이 맞아요. 왜냐하면 아이스케이크 속에 있던 작대기만 있지 아이스케이크는 이미 자기 뱃속에 들어가서 다 녹고 없습니다. 그러나 애는 ‘보이는 것 가지고 이야기합시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런데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 것을 가지고 지적하는 거예요. 꼭 엄마는 주님 같아요.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는 말이지요.

그게 믿음이거든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요. 주님은, “너 지금의 네 몸 그렇게 살래?” 하고 꾸짖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선에서, 그런 세계에서 바라보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성령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든 거예요. “안 먹었습니다.” “이 작대기는 뭔데?” “이게 왜 여기 있지?”

여러분도 회사에서 회식할 때 주의 해야 돼요. 회식 끝나고서 포장마차로 오뎅 먹으러 갑니다. 그때 얍삽한 어떤 사람은 자기가 먹은 오뎅 꽂았던 작대기를 옆 사람에게 슬쩍 밀어두는 사람이 있어요. 자기가 다섯 개 먹었는데 두 개 옆 사람 자리에 슬쩍 밀어놓고 세 개만 먹은 것으로 하는 것. 자칫하면 회식 끝나고 의절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서 이 세상에 자기 백성을 남겨둔 이유는, 이 세상에서 바로 지옥을 증거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유가 뭐냐 하면, 이 세상이 힘을 합해서 구원자, 심판자를 쫓아냈잖아요. 쫓아냈다는 거기에, 이 세상에는 누가 안 계시다? 누가 계실 맘이 전혀 없다? 구원자, 주님이 계실 마음이 전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겁니다. 아이고, 뭐 하나님 없이도 우리끼리 살지, 이런 식이에요. 여러분, 통조림 뚜껑은 한번 열었다 하면 이것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으면 돌이킬 수가 없는 거예요. 그냥 가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이렇게 이중적 사람으로 만들어냈을까? 여기 에 대해서 빌립보서 2장 22절을 보겠습니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여기에 디모데를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가 복음으로 낳은 자식이라고 보는 거예요.

디모데후서 2장 1절에도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디모데전서도 마찬가지에요. 1장 2절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그러니까 보통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육체의 이어짐으로 자식이다. 이게 지옥 같은 이 세상에서의 상식이지요.

사도바울은 결혼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아들이 있다. 그 아들은 뭐냐? 어떻게 연결된 아들이냐? 복음으로 연결된 아들이에요. 오늘 본문 명단에 나오는 이 모든 사람들,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냐? 바로 사도바울이 전도해서 생긴 같은 패밀리, 가족 같은 사람들입니다.

사도바울이, 주님께서 지옥의 힘과 치열하게 싸우게 하셔서 주님의 그 열매로 나타난 가족, 패밀리를 여기 오늘 명단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명단에 있는 사람들은 나 잘났다, 기도 많이 했더니……, 이런 식으로 되면 안되고 치열하게 싸우신 분을 생각을 해줘야 돼요.

그 경우가 이번 여름수련회에서 했던 사무엘하에 보면 나오는데 사무엘하가 다 어려웠어요. 참 어려웠습니다. 중구난방 연결도 안 되고 특히 다윗이라는 사람이 이랬다저랬다 일관성이 하나도 없어서 읽는 사람으로서 참 어려운데 그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자기 아들 압살롬에 대한 지극한 아버지의 부성애입니다.

그 당시 현지에 있었던 요압이라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참모총장, 국방부장관격인 요압도 다윗의 행동, 아버지의 부성애에 대해서 도저히 납득을 못했어요. 그 당시 같은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납득을 못한다는 말은, 지금 우리가 뭘 납득을 못하느냐 하면,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나는 복음으로 너를 아들 삼았다’라는 것도 납득을 못하는 셈이 되어버려요. 자칫하면. ‘뭐 예수 믿으니까 아들이라 했겠지’ 그렇게 설렁설렁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아버지가 결혼해서 자식을 갖게 되면 그게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그것은 하나의 이미지에요. 그것은 허풍이라는 말이지요. 이미지라는 말은, 더 쉽게 하면 그림자라는 뜻입니다. 달 밝은 밤중에 나뭇가지가 바람에 휘날리면 그 그림자가 커튼에 어른거리지요.

그림자라는 말은 뭐냐 하면, 형체는 있어 보이는데 그 커튼을 한번 만져보세요. 그게 나뭇가지인지 커튼 원단인지. 그게 그냥 커튼 원단이지요. 우리는 모습은 사람 모습인데 이게 흙덩어리입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그냥 60조 개의 세포고 더 들여다보면 에너지장, 에너지의 필드에요. 전자와 원자핵 사이에 있는 에너지 파동에 불과하다는 말이지요.

아무것도 없어요. 공허한 거예요, 그냥. 따라서 성경에서, 부활의 세계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가짜 말고, 허풍 말고, 아무것도 아닌 허위 말고 진짜배기,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 육신적인 아버지 말고.

그래서 사무엘하 18장 3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지금 이게 무슨 대목이냐 하면, 압살롬이 아버지에게 대들었지요. 원래 젊은 사람은 자기가 산 만큼만 세상을 알기 때문에 아버지가 어떻게 고생했는지 그런 것은 모르고요, 자기 욕망에 이끌려서 아버지도 정치하는데 나도 정치할 수 있다, 해서 건방지게 정치에 뛰어든 겁니다.

그렇게 정치판에 뛰어들어서 ‘아버지에게 가지 말고 나에게 오시면 여러분의 모든 일상의 문제를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4년 동안이나 민심을 중간에 인터셉트, 가로채기 한 거예요. 대권에 도전하는 준비를 4년 동안 참을성 있게 한 겁니다. 그래서 힘을 끌어모은 거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걸 생각해야 돼요.

힘이라 하는 것은 내 시간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여력이 힘이에요. 내 일상의 빈자리를. 그러니까 기존의 인간은 바빠서도 할 일이 없고요, 퇴직해서도 할 일이 없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에게는 새로운 장소가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사는 게 힘들어요.

그런데 부활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새로운 장소를 만든 게 부활이에요. 이것은 내가 안 채워도 되는 것, 주께서 다 꽉꽉 채워주는 그 공간, 이 세상에 살면서 전혀 없던 공간, 그 숭고한 공간, 그 숭고한 공간에 우리는 그저 곧 시체가 되어야 할 몸뚱이로 거기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 숭고한 공간을 현재 우리는 묘사할 수가 있고 표현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 숭고한,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있는 부활의 세계, 부활의 공간, 그게 없으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죽을 인간이다’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이미 주께서 만든 새로운 공간,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사람들이 사는 새로운 공간, 그 공간에서는 이미 나는 죽었던 대상체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그 철딱서니 없는 압살롬은 자기 인생이라는 그 시간을 그냥 이대로 허비할 수 없다, 뭐라도 채워야 된다, 해서 ‘뭘 채우느냐? 권력을 채우자’ 아까도 말했지만 권력이란 뭐냐 하면, 내가 남겨둔 여러 가지 시간의 빈자리를 나에게만 의미 있게 채울 수 있는 그 여력이 바로 힘이라는 것, 권세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돈이잖아요. 놀러 가고 싶어도 돈 없으면 놀러 못갑니다.

시간을 재미있게 채울 수 있으려면 비용이 들잖아요. 그 비용은 사전에 모아놔야 됩니다. 젊을 때는 이야기하지요. “일하자. 나중에 나이 들면 놀자.” 그렇게 이야기하고요, 나이 많은 사람들은 “이 철딱서니 없는 것들아. 젊을 때 놀아야지 나이 들면 못 노나니. 인간아!”

나이 들어 어디를 갑니까, 몸 자체가 불편한데요. 여러분, 자기 몸을, 자기가 그 무게를 끌어보세요. 힘듭니다. 전에는 가뿐하게 움직이던 것을 나중에 나이가 좀 들면 자기 몸을 자기가 메고, 똥배는 왜 그렇게 부른지, 자기 몸을 잡아당기는데 그게 잘 안 당겨진다고요. 어디에 가도 아이고오오오오오~, 1층 계단에서 2층으로 접어들면서 아이고오오오오오~. ‘아파트 살아야지 빌라에서 못 살겠다.’

그런데 아파트에 살면 관리비 많이 나오는데? 그것도 여력, 시간 때울 여력이 또 날아가잖아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왜 일을 하느냐? 할 일이 없어서 일을 해요. 농사짓는 사람이 왜 일을 하느냐 하면, 여기 농사짓는 분이 계셔서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는데, 농사짓는 이유가 다른 할 일이 없어서 농사짓는 겁니다. 맞으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 아니면 할 일이 없어요. 가끔은 색소폰 불고요. 할 일이 없다니까요. 내 시간을 내가 못 메우는 거예요. 뻥뻥, 펑크가 나요. 복음 듣는 것도 한두 시간이지 나중에는 복음 듣다가 자버리고요. 압살롬이, 자기는 무슨 대단한 영웅적인 나라를 구하는 일을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 압살롬을 누가 추적하는가? 다윗이 그냥 지켜보면서 추적을 해요. ‘압살롬 저게 어떻게 되는가 보자. 저게 옛날 내가 잘 나가던 그 시절하고 똑같은데……’ 이 말은 뭐냐 하면 압살롬하고 다윗은 아들과 아버지 사이거든요. 그래서 세상 상식은 뭐냐? 아들은 아버지를 반복한다고 되어 있어요. 반복, 되풀이한다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나 나중에 압살롬을 보면서 다윗이 발견한 것은 뭐냐 하면,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추가적인 요소가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다윗이 죽기 전에 압살롬의 죽음이 다윗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앞당겨서 대신 보여준 거예요. 그래서 압살롬 죽고 난 뒤에 다윗은 자기한테 애도합니다. 이게 33절에 나옵니다.

압살롬이 까불다가 죽었어요.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해서 죽습니다. 반란군과의 전쟁에서 아버지 다윗이 내 아들만큼은 살려라, 할 때에 요압은 머리를 굴립니다. ‘아무리 왕의 명령이라도 좀 합리적이어야지. 당신 아들이 살면 살수록 애꿎은 백성들, 다 자기 집에서는 귀한 아들이고 남편인데 그 백성들 군사들이 죽어 나가는 것은 생각 안 하고 당신 아들만 챙깁니까? 이것은 누가 봐도 비이성적이다. 질질 끌 일이 아니다.’

전쟁 중에 압살롬의 머리가 나뭇가지에 걸려서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군사들이 들은 소리는 있어서 총사령관 요압에게 보고합니다. “지금 압살롬이 자기 머리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습니다. 지금 죽여야 전쟁이 끝날 것 같은데 다윗임금이 신신당부하기를 죽이지 말라고 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할 때 “비켜라, 비켜!” 하고 창 세 개를 가지고 한 개도 아니고 세 개를 가지고 일거에 그만 보란 듯이 압살롬을 죽여버렸습니다.

왜? 공무원이니까. 공무원은 전쟁을 끝내야 될 자기의 책무에 충실했기 때문에. 전쟁을 끝내야지요. 자기 부하들이 죽어 나가는데요. 그리고 상대방 적의 군사들도 죽어 나가잖아요. 다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잖아요. 아무리 임금이지만 무리수를 두면 안 된다는 생각을 요압은 갖고 있는 거예요. 요압이 하나님의 원수지만 생각하는 하나하나가 틀린 말이 하나도 없고 틀린 행동이 하나도 없어요. 다 옳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원수에요.

추가적인 요소가 없어요.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요소만 내뱉고 생각 못하는 요소는 못 내놔요. 왜? 내놓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래요. 성도는 불가능함으로 구원받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잖아요. 부부가 재미있게 살려면 불가능과 불가능이 만나야지 하나는 가능을 유지하고 하나는 불가능을 유지하면 그것은 뭐 힘들지요.

그래서 요압이라는 사람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 다윗은 지금 요압 내가 생각하는 것을 익히 다 알고 있어요. 왕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다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은 뭐 앞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내 아들을 살려내라고 하는 그 이유를 요압은 당최 모르겠다는 겁니다.

불신자는 신자가 추가적으로 갖고 있는 그 주님의 요소를 몰라요.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는 그 행동과 일과 말씀을 몰라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등장인물들도 몰랐었는데 성령이 와서 알았습니다. 그러면 알았다는 그 안 것은 뭘 알았는데?

그게 바로 압살롬을 보고 있는 다윗을 통해서 이렇게 합니다. 사무엘하 18장 33절에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이 말은, 압살롬의 그 젊은 날에 끝나버린 모든 인생을 자기 아들로 보지 않고 아직 죽지 않은 다윗 자신이 내가 죽어야 될 이유를 먼저 보여줬다는 겁니다.

압살롬 네 모습이 어디서 튀어나왔는가? 다윗에게서 튀어나왔거든요. 다윗 자신의 자식이에요. 나에게서 나온 부정적인 요소기 때문에 다윗은 압살롬을 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세속에 물든 나를 내가 잊으면 안 돼요. 왜? 저것 때문에 예수님 돌아가셨기 때문에. 내가 죽어야 된다. 말로? 아니지요.

살아가면서, 여러분이 70, 80, 90, 에라 더 썼다 백 살, 살아가시면서 내가 왜 죽어야 되는지를 아셔야 되고, 여러분의 씨를 퍼트린 자식들을 보면서 다윗이 압살롬을 보는 것처럼 여러분 자식들을 그런 관점에서 보세요. “애 봐줄까?” 이런 것 좀 하지 말고 “집 사줄까?” 이런 것 좀 하지 말고요.

네가 현재 복음 모르고, 교회 안 나오고 뭔가 ‘내 시간을 멋있게 채우겠습니다. 아버지 보란 듯이 내가 성공하겠습니다.’ 이따위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그것, ‘잘 먹고 잘살고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게 바로 ‘예수님이 죽어야 될 이유를, 내 속에 있는 요소를 네가 반복해서 보여주는구나.’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추가적인 것을 성령을 통해서 알게 해주신 거예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식들에게 그 이야기 해줘야지요. 세속에 물드시되 여러분 교 회도 세속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안 잊었지요? 교회 나오셔야 돼요. 교회라는 세속생활을 하셔야 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아이스케이크를 먹든 뭘 먹든 얼마나 남의 눈치 보며 살아가며, 얼마나 나 잘난 맛에 살아가는지를, 상대방이 내 모습이고 내가 상대방 모습인 것을, 자기의 그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될 그것에 여러분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감사가 되고 고마움이 되고 주께 영광이 되는 이유는, 다른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 아버지, 그것은 다른 요소 부활의 요소가 이미 우리 생명을 주와 함께 확정 지었으니까 내가 내 일을, 인생을 관리하는 것보다 주님의 선택이, 악마까지 이겼던 그 주님의 선택이 현재 우리한테 이렇게 우세라는 것을 마음껏 여러분 살아 계실 동안 증거 증거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제대로 알게 하여 주옵소서. 남들같이 비슷하게 살지 말게 해주시고,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충분히 납득하게 해주시고 납득하면서도 그들이 모르는 것을 따로 챙겨주신 주께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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