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자식
2021년 7월 18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3:20-21
(3: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3: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자아성을 유지한 채 부모가 되려고 하고 자아성을 유지한 채 자식이 되어버리면, 그렇게 서로에게 원하는 것도 많고 바라는 것도 많은 법입니다. 육의 세계에서 아무리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식을 사랑해도 그것으로서, 자아가 지닌 근원적인 절대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자아는, 항상 본래의 자기성으로 늘 되돌아오려고 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떼 버려도 기어이 자기 자신만큼은 최종적으로 ‘의미 있다’를 건져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부모에게 순종하고 자식을 사랑해도 근원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묶여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육적 세계에서의 진리란, “내 편하기!” 그것으로 끝입니다.
주변이 자기 뜻대로 돌아갈 때면, 기분을 내면서 헌신합니다. 하지만 자기 기대가 무너지면 가차 없는 “부질없다”는 말을 남기면서 모든 것을 정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정리해도 정리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식’입니다. 자식이라는 존재는 마치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현듯 부딪치는 그런 존재입니다.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도 없고, 잊혀도 잊을 수가 없는 것이 자식이라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인간 본인에게 의미를 두기 때문에 그 의미가 자식까지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둘 말은 거죽을 펴보세요. 그 거죽을 자아라고 보고 그 펴진 그 거죽의 끝 자락에 자식이 있습니다.
즉 자식의 ‘나의 연장(延長)’입니다. ‘나의 연속체’입니다. 자식은 남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에게 부모의 자아성을 강요하게 됩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말합니다. “너는 이 부모에게 자랑스러운 자식이 되어라” 하지만 자식은 다음과 같이 반문합니다. “나는 나 나름대로 삶이 있습니다. 더 이상 압력을 행사하지 마세요”
이 모든 틀어짐의 원인은 바로 자아성과 끊어지지 않는 채 ‘부모’, ‘자식’이라는 의미를 떠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미의 출처는 악마가 유통시킨 ‘신(神)’ 개념에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그런데 그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믿고 난 뒤 이런 고백을 합니다.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나를 붙잡아 준 것은 하나님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가짜 하나님이라면 어떡하실 겁니까? 즉 ‘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은 실은 거짓된 하나님입니다.
진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유일한 인간을 위한 구원’입니다. ‘구원받을 자가 없다’라는 말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을 위한 구원에 참여된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의 구원 시작은 어디까지나 자기 의미로부터 시작됩니다. 진짜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보편적 구원의식과 만나면서 살해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에게 자신들에게 하자(잘못)이 있다는 것을 생각을 못합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23:27-28에 보면,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을 알기 위해서 인간들의 처음자리부터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왜 자신의 신앙과 눈물과 노력에 의미를 두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기에게 들이닥친 삶의 고통을 해결해서 여전히 자기만의 의미를 지켜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아버지와 자식과 무관한 시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편없는 여인에게 잉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본질에 대해서 히브리서 7:3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극히 이 세상에서의 자식과 부모 관계과 대비시키는 식으로 ‘하나님의 아들 노선’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악마가 가짜 하나님을 인간들에게 주입시켜 그들의 존재 의미를 그 하나님과 결부시켜 유지케 한다는 점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전혀 이런 인간들의 취지에 맞지 않는 다른 아들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4-6)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남편없는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했을까요?
그것은 육적인 부모가 아닌 자식을 생산하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 22:2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이 세상의 모든 자들이 생각하기를, ‘누군가가 나를 위해 속죄제물을 되어주어야 내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생각의 범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셔야 된다’는 생각을 빗나가게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도리어 속죄제물을 너 안에서 해결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더 이상 네 자신에 대해서 미련두지 말고 의미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너는 네 자신을 믿고 지킬 수 있는 위인이 아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가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일의 파트너로서 하나님 자신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있지도 않는 자식을 낳게 하시고, 그 자식을 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 직접 잡게 하시므로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성취하신 ‘약속-성취’ 연결고리에 아무 것도 한 게 없게 하십니다.
즉 아브라함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은 결코 아브라함 자신은 자기에 관해 아무 것도 믿을 게 없음이 곧 ‘믿음의 조상’에 합당한 그 믿음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의미가 강탈당하고 삭제당한 기쁨만이 주고 받는 관계가 곧 신앙의 부모와 자식 사이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끝까지 자식이나 부모 안에서 모든 의미가 주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제거되었음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7강-골 3장 20-21절(부모와 자식)210718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3장 20-21절입니다.
골로새서 3:20-21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찌니 낙심할까 함이라.”
부모하고 자녀 둘 다 주 안에서 엮일 때는 주 바깥에 있는 세상 사람들의 부모 자식 사이에 어떠한 다른 점이 있는가를 지금 사도바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 안에 있다, 너는 주 밖에 있어, 그것을 판정을 내릴 때에 이렇게 내리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누가 주 안에 있고 누가 주 밖에 있는지 우리 따져볼까?’ ‘따져봐’ ‘너한테 자녀가 있지?’ ‘있어’ ‘자녀가 복음 때문에 너에게 따진다. ★왜 부모는 그 복음을 온전하게 나에게 제대로 전달 안 합니까, 막 따지는 그런 자녀가 있어?’ ‘없어’ 그러면 주밖에 있는 겁니다. ‘그러면 주 밖에 있는 것 맞네.’
‘너 부모가 되어서 자식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자식이 아버지, 그만하이소, 지겹습니다, 많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들리던가? 그러면 주 밖에 있네.’ 주 안에 있는 자는, 주 안에 있는 부모와 자식 사이는 어떤 거냐 하면, 자식은 어떻게든 부모로부터 복음을 전달 받으려고 애를 써요. ‘아버지만 천당 가면 안 되잖아’ 그거예요. ‘엄마만 천당 가면 안 되잖아. 나도 좀 갑시다.’ 이렇게 나올 때 그것은 자식이 주 안에 있지요. 부모도 그렇고.
그리고 부모가 자식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자식이 그걸 순종하는 거예요. 순종을 하니까 부모 말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부모가 전달해준 그 복음에 대해서 순종할 때 ‘아, 이것은 자식이 나를 가르치는구나.’ 자식이라는 존재가 ‘아버지, 나이 많은 어르신 행세하지 말고, 꼰대 행세하지 말고 제대로 복음 아는 자 되세요.’라고 자식이 아버지한테 윽박제안을 할 수 있는, 아버지의 아버지다움, 주 안의 아버지가 이런 모습이어야 되는 것을 자식을 통해서 부모를 가르치는 경우가 발생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주 안에 있는 가정이에요.
이걸 간추려 보면 이렇습니다. 그러면 주 밖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주 밖에 있는 사람은 부모도 없고 자식도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처음부터 우리는 나밖에 없기 때문에 내가 부모 노릇은 하지만 부모 된 적은 없고 자식 노릇은 하지만 자식 된 적은 없어요.
나는 나 바깥에서 주 안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오늘 본문에 해당 되는 그 부모가 부모가 되고 그 자식이 자식이 되는 거예요. 기존의 부모 자식관은 주 안과 전혀 상관없는, 짐승이 새끼 낳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육신이 육신을, 그냥 DNA전달 매체로 육신이 사용된 것뿐입니다.
인간의 모든 것은 압축해 보면 생물학적으로 DNA 그 안에 다 들어 있거든요. 부모 양쪽의 DNA를 자식한테 그냥 준 것 그것은 뭐 해줬으니까 내 몸은 내 몸이 아니고 딴 몸이 된 거예요. 내 몸 따로 있고 자식은 따로 있으면서 내가 자식이었던 시절에 했던 그 행세를 그대로 자식이 부모 탓을 하면서 자기 위주로 사는 겁니다.
나를 버리지 않는 채 자식 권리 다 찾으려 하고 나라는 것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 채 자식에 대해서 부모 노릇 다 하려고 덤벼드는 것 이것은 오늘 본문과 상관없는 육적인 것, 육신적입니다. 둘둘 말은 거죽을 펴보세요. 둘둘 만 거죽을 펼쳐보면, 바로 나라는 것을 펼쳐보면 나의 연장이 육신적으로 자식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 자식의 모습은 나의 연속성이에요. 내가 퍼진 겁니다. 밀가루 반죽 밀어버리면 퍼지잖아요. 그 자식의 모습이 내 모습이에요. 그리고 내가 나에게 늘 종속되는 것처럼 나는 그 자식에게 종속되는 겁니다. 이게 참 상당히 중요하면서도 인간에서는 자식은 나의 고통의 산물 나의 범죄의 산물로서 자식이 생산되고 태어난 겁니다. 고통에서 고통으로 계속 이어지는 거지요.
그래서 인간은 그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 불교나 또는 다른 종교에서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억지로 생각해서 고통에서 면제되려고 합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정말 인생을 공부하고 도를 닦아보니 정말 자식도 소용없고 나도 소용없고 아무것도 소용없다. 우리는 이러고 싶어요. 인생이 너무 힘들 때는.
사랑도 부질없고 미움도 부질없고 청산은 나로 말없이 살라 하나 훨훨, 이렇게 살라고 하네, 사랑도 부질없고 자식도 부질없다. 우리는 이렇고 싶어요.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 캄캄한 허공에서 아무것도 없는데 뭔가 탁 부딪혀요. 부딪혀 보니 그게 자식이라.
이 자식이라는 것은 나는 그냥 아무것도 부질없다, 하고 모든 것 다 털어버리고 살고 싶은데 이것은 내 원대로 안되고 와서 부딪혀요. 부딪혀서 너 누구야, 하니까 자식인데요. 야 이것 참,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나를 아무것도 아니게 가만두지를 않고 자식 부모 관계를 강제로 엮어버립니다.
나 이제 할 것 다 해줬다, 이제 장가가고 시집갔으면 나에게 자꾸 기대지 마라, 라고 아무리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 자식과 부모 사이를 떼놓지 않습니다. 책임을 져도 A/S도 이것은 2년 3년이 아니에요. 죽을 때까지 끝까지 책임지게 만들어요. 아주 고상한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일타쌍피’ 자식 하나 낳았는데 엄마 아빠 둘 다 코피가 팍, 쌍방코피, 자식이 조금만 공부 못하고 잘못돼도 쌍방과실, 쌍방책임.
누구 닮아서 이렇게 애먹이느냐. 자식이라는, 누가 봐도 내 육신이 아니기에 제삼자임에도 불구하고 제삼자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억지로 나의 한계를 지워버리고 제한 지워버려요. 네 속성은 뭐냐? 모든 게 귀찮고 부질없고 나는 혼자 있는 게 제일 편하다, 라고 하고 싶지롱!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식으로 하여금 그러한 기대를 하지 못하게 강제조치에 들어가 버립니다. 그냥 혼자 살고 싶어. 너는 너대로 살고 나에게 연락도 하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새벽 네 시에 전화 오게 되면 안 그래도 사는 게 고민되는데 코피가 팍!
이거 왜 자식 일이 내 일로 이어지면서 절대 끊어지지 않는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절대로 인간은 범죄한 고통에서 네가 네 멋대로 탈출 못하게 자식이라는 족쇄를 채워버린 거예요. 그러면 자식을 내 맘대로 다루면 되지 않느냐. 자식은 절대로 부모 맘대로 다뤄지지 않습니다. 그럼 남이잖아. 남도 아니에요. 남도 아니면서 들러붙어서 내 맘대로 할 수도 없어요.
이걸 아주 어려운 말로 ‘사이 관계’ 어떤 둘 사이인데 아예 모르는 사이 같으면 뚝 떨어지면 되는데 하나, 둘, 숫자로 1과 2로 계속 밀어붙이지 않고 1과 1을 하나로 연결 시켜 놔버렸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렇게 만들어놓고 여기서 떨어지고 싶어도 못 떨어지게 만들어놓고 그다음에 ‘대립관계’ 또는 결합관계, 전달관계 이런 관계로 몰아붙이니까 내가 나의 행복이 내 몸 하나 잘 추스른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아, 처음부터 내 인생이라는 것이 내 맘대로 될 인생이 아니구나. 자식이 없을 때는 이제는 나 혼자 살고 싶은데 자식이 생기고 난 뒤에는 또 다른 나 내가 부정할 수 없는 나의 연장산물, 생산물로서 어떤 사람은 서울에 가 있고 어떤 사람은 대구에 가 있고 어떤 사람은 같이 살고, 그 나라는 일거수일투족, 그것이 나가 아니면서 그 하는 모든 행동에 대해서 내가 신경 안 쓸 수가 없는 거예요.
살아 있으면 살아 있어서 골치 아프고, 죽으면 더 골치 아프고. 내가 먼저 죽어야지 네가 뭔데 내 허락도 없이 먼저 죽느냐, 하는 식으로 또 영원히 한이 되어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런 영화가 있습니다. 이 지구가 망하게 되어 있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노아방주같은 것을 선진국들이 주도해서 만들었어요.
회원들만, 멤버쉽을 갖고 있는 사람들만 탈 수 있는 배입니다. 혜성이 곧 충돌한다고 하고 시간이 얼마 없는 채로 막 배를 향해서 사람들 다 달려가고 있는데 달려가다 보니까 자식을 두고 왔어요. 최후의 배 마지막 구조선을 타야 되는데 오는 방향으로 다시 뒤돌아서 달리니까 자기에게 모든 사람이 부딪히는 거예요.
남들이 “아줌마, 뭐해요! 빨리 배 타야지.” 하는데 자기는 탈수가 없어요. 자기의 늘어진, 자기의 꼬리 같은 자식이 아직 안 타고 있으니까, 자식 잃어버렸으니까 자식을 마저 찾아야 내가 구원을 받아도 기쁨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자기의 손가락 발가락 같아요. 자기 손가락 발가락 자르고 배를 탈 수가 없어요. 그 자식은 지금 바깥에서 놀고 있는데요. 엄마의 행동에 대해서 이해가 안 된다는 거예요. 엄마의 인생관과 내 인생관이 다르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순종하라는 말을 했어요. 순종하라는 말은 인생 길게 산 사람에게 짧게 산 사람이 순종해라 그 말이지요. 네가 인생을 모르잖아. 젊은 사람이 늙은 사람보고 뭐라 하는데 이런 말이 있어요. “너 늙어 봤어? 나 젊어 봤어. 늙어 보지도 않은 게, 젊음밖에 모르는 게 어딜 늙은것에게 순종을 안 해?” 순종을 강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순종했다고 해서 어른이 모든 것을 아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젊은 자식한테는 무엇이 아직도 남아 있느냐 하면, 생명에 대한 소망, 인간의 근원적인 의미, 이런 것들에 대해서 아직도 추구하고 있는 현상을 자식들이 특히 어린 자식들이 보이고 있어요. 미성년자 자식들. “아버지, 어떻게 하면 영원히 살 수 있습니까?” 하는 그런 질문, 그것은 부모로 하여금 다시 자기 입장과 처지를 새삼스럽게 정리하게 만들어요.
“내가 죽으면 유산 다 네가 가져가라.” 그러면 자식들이 이야기하지요. “아빠 엄마,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인생의 의미는 뭡니까, 그런 것을 이야기해줘야지요.” 그러면 부모가 이야기하지요. “그것은 내가 네 나이만한 때 관심을 좀 가졌는데 살다 보니 천국이고 지옥이고 다 부질없고 소용없고 그저 밥 잘 먹고 살면 된다. 죽었다가 살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말고 그저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그게 최고다.”
그럴 때 자식이 여기 본문대로 분노하는 거예요. 부모한테 실망하는 거예요. 인생을 오래 살았다 해놓고 부모는 아무 해답도 없이 그동안 인생 살아 왔어요. “그만한 세월 살면서 나보다 더 오래 살았으면 해답에 더 많이 가까워져야지 인생 허무하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프지 말고나 살아라. 이게 해답입니까? 그게 오래 사는 사람으로서 이제 인생을 막 출발해서 사는 사람에게 기껏 해줄 이야기가 그것밖에 없습니까? 그저 돈 이야기밖에 없어요, 부모님?” 이렇게 나오면 그것 발 오늘 본문에 자녀들로 하여금 낙담케 하는 거예요. 실망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떤 글에서 소개했습니다만 <도덕발달론>이라는 책이 있어요. 인간은 어떻게 도덕적으로 발달하느냐, 종교적으로 어떻게 발달하고 증가하느냐, 그걸 알아야 목사들이 어린애들의 입장을 이해해서 그들에게 먹힐 수 있는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그런 이론 같은데요.
여러분이 그걸 아셔야 돼요. 복음을 알게 되면 그런 인간들의, 사람에게 먹히는 설교라는 수작들이 다 엉터리라는 것을 아셔야 돼요. 왜냐하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나를 붙잡아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뿐이다, 라는 이것은요, 안 가르쳐 줘도 유치원애들도 기도하라면 기도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심점이 되고 내 인생을 잡아줄 중심이 된다는 것은 심지어 절에 가고, 심지어 교회 안 다니는 사람도 하나님 신의 존재는 다 알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1절에 있듯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있어요.
하나님이 나를 붙잡아준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처음부터 가짜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여기서 ‘주 안’이라는 말은 바뀔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인간이 태어나면서 타고난, 하나님이 내 중심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옳다라는 생각 자체가 이게 악마가 집어넣어준 생각이라고 바뀌어줄 때 그 사람은 주 안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자기를 위한 구원을 제공하는 하나님이거든요. 나의 구원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하나님은 애초부터 없는 하나님이에요. 십자가 지신 하나님한테는 그게 없어요. 그것은 이 땅의 악마의 세계에서 유통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너 구원 챙겨줄 때 챙겨가거라, 그런 거요.
누군가 너를 위해서 속죄제물이 될 때는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런 이야기가 교회에서 흔하게 나오지만 그게 마귀가 가르쳐준, 마귀가 인간을 설득하도록 가르쳐준 가짜 복음입니다.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부모가 주 안에서의 부모는요, 나한테 문제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나로부터 벗어난 부모가 돼야 돼요.
그렇지 않고 나를 위한 하나님 또는 나부터 챙기고 부모가 되어버리면 그 자식은 부모 소유물이 되어버립니다. 너는 왜 우리 집안의 자랑스러운 자식이 되지 못하느냐. 이런 식으로 막 자식들을 다그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자식들은 처음에는 말 못 하다가 공부 좀 하고 난 뒤에 “내가 부모 비위 맞추려고 이 땅에 태어난 줄 아세요, 부모님?” 이렇게 나오면 여러분 어떻게 하려고요. 그 감당을 어떻게 하려고요?
맨날 “부모가 너 키워줄 때 얼마나 고생한 줄 아느냐? 비바람 부는 데 시장에서 ……” 자식이 듣다가 답답해 가지고 “고마 됐심더. 그것도 한두 번이지 마이 묵었습니다. 고만 하이소.” 경상도 방언 아주 유효적절하지요. 그러면 부모가 “이노무 자식봐라. 이노무 자식봐라? 내가 그렇게 이야기해도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이 부모 고생도 모르고 자기 덕으로 산지 알고 있다. 아이고, 내가 죽어야 돼, 내가 죽어야 돼.” 자식이 있다가 “또, 또, 또, 예상된 시나리오 나온다.”
나를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부모 노릇 하겠다는 것은 자식이 자기의 의미와 가치를 보충해주는 보충물로 여기고 있는 겁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을 단도직입적으로 하면 이겁니다. 오늘 설교 다 잊어도 이거 하나 잊지 마세요. 그건 뭐냐 하면, 나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그곳에 악마가 있어요. 인간은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부모 되었다, 자식 되었다, 의미 없습니다. 그런 의미는 육적에서 나오는 의미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는 의미입니다.
부모 되어서 지옥 간 사람 한둘이 아니고 자식 되어서 지옥 간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나를 벗어나서 성경 안에서의 부모가 되어야 돼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온통 부모는 부모권리 주장하고 자식은 자식 권리 주장합니다. “부모가 되어서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어린 자식들은요 뭐든지 자기 인생이 잘 되면 다 자기 탓이고 조금이라도 자기 인생이 안되면 다 부모 탓이에요.
나 키울 때 부모 바람피웠잖아요, 노름했잖아요, 술 먹고 우리 엄마 팼잖아요, 여기서 어디서 아버지 노릇 한다고 다 늙어서는, 날 받아달라고, 어디서 그런, 그만 가소, 나는 댁같은 아버지 없습니다, 나는 아버지 없이 컸습니다, 이제 귀찮아 죽겠다. 그때 인간이 기껏 할 수 있는 게 뭐냐? 너 나 배척하면 나 한맺힌데이, 부모 버리고 잘 되는 자식 못봤데이. 협박도 아니고 공갈도 아니고,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게 실제로 이 세상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기초를 잡고 있어요. 누가 계속 나에게 의미를 부여해줘요. 소위 영적 세계, 종교적 세계의 영화, <랑종>이라는 영화가 개봉되었습니다. 무당 팔자 이야기에요. 태국 무당, 멀리도 갔어. 한국무당 이야기는 다 했으니 이제 태국 무당 이야기, 자식에 대한 집착이 악귀를 불러온다는 이야기입니다.
무당 안 하겠다고 배척하니까 악귀가 자식한테 들러붙어서 자식이 아프니까 그제야 엄마가 손들고 내가 무당 될 게, 해도 때는 이미 늦어서 딸이 지독한 악귀들린 자가 되었다는데 여기서 부모가 할 수 있는 게 뭐냐? 부모가 자식 대신 신에게 자비를 구하는 거예요.
이 일, 부모가 자식 대신 신에게 자비를 구하는 이것이 랑종이라는 태국 무당이야기에 나온다면 오늘날 한국교회가 금요철야기도할 때 그 기도 내용이 뭐예요? 바로 이겁니다. 나의 연장선이 자식이 예수 안 믿고 복음 모르고 있으니까 금요일에 밤 커피 석 잔 마시고 와서 “신이여, 철없는 자식 보지 말고 내가 자식 대신 희생할 테니 날 봐서라도 자식 천당 보내 주세요.”라는 이 기도 하고 있잖아요.
그래놓고 부모 노릇 다 했다고, 할 바 다했다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물을 수가 있어요. “왜 네 가정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아야 되는가? 사랑 받아야 되는 이유를 내놔봐라.” 그러면 기도하는 사람이 “모릅니다.” 몰라요. “왜 세상이 너와 네 자식 편이 되어야 된다고 근거를 대봐라.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물어보면 “몰라요.”
인간은 모르는 세계에 갇혀 있는 거예요. 근원적으로 십자가는, 주 안에는, 십자가 지신 주님 입장에서는 본인을 미워하라 했거든요. 그런데 인간들은 본인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원망하고 있어요. 계속 자기 자신을 닦달 냅니다. 좀 제대로 잘 살아보란 말이야.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닦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잊어버려 너를.” 너를 잊어버리라고요. 왜냐하면 너는 이미 피값으로 죄에서 주님으로 팔려갔거든요. 주 안으로 팔려간 거예요. 전에는 내가 내게 소속되었었는데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이제는 내가 내 소유가 아니고 주님의 피 소유 주님 소유에요.
고린도전서 6장 20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리고 히브리서 9장 14절.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나의 구원이 아니고 나의 행복이 안고 나의 건강이 아닙니다. 네가 어떻게 하든 간에 너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게 만들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섬기게 만드는데 내가 내 안에 그냥 있어 버리면 이게 섬김이 안돼요.
왜냐하면 내가 나 되기 위해서 근원적으로 마귀 쪽에서 계속 나한테 내가 살아가야 될, 내가 행복해야 될 의미와 이유를 계속해서 제공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죽더라도 너는 살아야 돼. 나는 구조선 못 타더라도 너와 네 자식은 구조선 타야지. 남들은 지옥 가도 너는 천당 가야지.’ 계속해서 나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뭐 최선을 다해야지.’ 최선이 됩니까? 안되는데요.
그래서 <랑종>이라는 그 영화의 끝 장면이 굉장히 감명 깊게 들렸어요. 그 자식이 밍이라는 여자앤데 그 애가 악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헤매고 있을 때 그 무당이 그제야 자기 본심을 이야기해요. “확실한 것은 자식이 여기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것은 확실치 않다.”
이게 오늘날 천만 교회 교인들이 마지막에 진짜 남들에게나 스스로에게 고백하고 싶은 그 고백이 뭐냐 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이 너와 함께 있다, 주가 너를 지킨다고 백날 세뇌받듯이 계속해서 그 문장을 외우고 또 외웠지만 그 모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피 용서가 코앞에, 눈앞에 보이는 자식 하나보다도 못하다 그 말입니다. 그것보다도 불확실한 거예요. 눈에 보이는 자식이 보이지 눈에 안 보이는 예수가 어디 보입니까?
진짜 쌍방코피 나야 돼요. 코로나 사태 때문에 인도네시아 같은 경우에 심각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특파원이 인터뷰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형편없는 처지를 이야기했습니다. “돌아봐야 될 아이가 있는데 일자리가 없어요.” 우리의 속마음을 이보다 더 절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돌봐야 될 아이가 있는데 일자리가 없어요.” 이것보다 더 생생한 현실이 또 있을까요? 하나님, 예수님, 십자가 피, 그거 무슨 의미가 있어요? 돌봐야 될 아이가 있는데 지금 일자리가 없는데요. 아이가 있는데.
나는 그냥 굶어 죽을 요량이 되어 있어요. 그러나 저 아이는 무슨 죄가 있느냐 그 말입니다. 아이가 나의 연장이에요. 나의 미래고 나의 희망이에요. 자식이. 죽고 싶어도 못 죽어요. 내 자식이 있는 이상은.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신 것은 고통, 네가 근원적인 죄에서 나온 고통을 평생토록 네가 한번 느껴봐라. 자식 없을 때는 훨훨훨, 사랑도 부질없다고 노래 불러 가면서 다 부질없다, 나 혼자 산속에 들어가서 살다가 굶어 죽으면 되지, 하는데 그러면 자식은요?
자기는 죽으면 좋은데, 자살하면 편하고 좋은데 자식은 그러면 어떻게 할건데요? 누가 자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냥 허접하게 대충 나를 믿어라, 그런 이야기 하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에요. 철저하게 우리가 미처 캐치하지 못한, 캐내지 못한 근원적인 것을 쑤시고 들어오는 겁니다.
누가복음 23장 27, 28절에 예수님이 이런 말씀 했습니다. 어떤 아줌마들이 예수님 십자가 지러 간다고 불쌍하다고 막 눈물 흘리면서 “아이고, 안됐다. 착한 사람인데.” 이렇게 하니까 하시는 말씀이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가슴을 치면서 우는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었어요. 진심이었겠지요. 그 진심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매정하게 이야기한 겁니다.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쉽게 말해서 “네 자식에 대해서 극복하고 난 뒤에 내가 누군지 알아라. 자기 자식도 극복 못하면서 나를 위해서 동정의 눈물을 흘린다고? 나는 그런 눈물 필요 없다.” 눈물 흘리지 말고 네가 어디에 매여 사는가를 한번 보라는 말이지요. 너는 너 자신에 매여 살면서 교회 몇십 년 다니면서 예수 믿었다고요? 그거 다 남들에게는 통하지만 주님한테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말하는 이 부모와 자식 관계는 어디서 나오는가? 이것은 멜기세덱에서 나와요. 갑자기 어려워지지요. 멜기세덱, 성경에도 히브리서 6장에서 멜기세덱 이야기하면서 5장에서 이것은 어렵다고 하지요.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 못 먹는 자에게는 이 멜기세덱 이야기가 어렵게 들린다고 했어요.
6, 7장에서 멜기세덱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데 무엇이 어려운가 하면, 그 멜기세덱이라는 분은 7장 3절에 보면, 이 땅에 아비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서 하나님의 아들 같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게 왜 어려우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자식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야 돼요. 거기서부터 새로운 부모 새로운 자식의 관계가 새로 출발 되는 겁니다. 기존의 육적인 부모 자식은, 그 최초 자리를 주께서는 그걸 받아주지를 않아요.
왜? 최초 자리는 악마로부터 의미를 받는 자리에요. ‘너 태어났나? 생일 의미 있거든. 계속해서 살아 있어. 그러면 그것은 의미 있는 거야.’ 계속 살아 있기 때문에 악마와 결탁된 의미를 부여해서 나라는 것을 버리고도 못 버리고 싶은 그 시작을 주님께서 싹 밀어버리고 출발을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나는 이 땅에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자식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시작점이라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에서 6절에 보게 되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새로운 아버지가 발생 됩니다. 나의 아버지가 아니고 ‘우리 아버지’라고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아버지가 새로 발생 되면서 아버지를 부르면서 비로소 나로부터 나올 수 없는 새로운 자녀로서 우리가 주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여러분이 볼 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다시 말해서 성령을 받으면 아들이 되어서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고 되어 있지요. 그런데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은 왜 갈라디아서 4장에서 성령 받아서 아들이 된다는 그 대목을 내가 말씀드리지 않고 앞에 있는 대목, 율법으로 태어났다는 그 이야기, 결혼하지 않은 여자로부터 태어난 그 이야기를 왜 저는 강조하고 싶으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 되는 이것이 인간의 육으로서는, 나로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능치가 않아요. 가능하지 않은 이유가 율법에 속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이게 상당히 어렵습니다. 어려운데 성경에서는 이 어려운 대목을 이렇게 우리에게 안내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1, 2절에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게 의미가 있다면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통해서 나를 위해서 속죄제물을 준비해야 되는 하나님, 그게 내가 생각할 수 있고 내가 납득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여기 의미 있다면.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줄 때는 언약 안에는 우리가 상상도 못한 낯선 하나님이 거기서 지시를 내려버려요. 너를 위한 속죄제물을 하나님이 너한테 바치지 말고 네 안에서 네가 너를 위한 속제제물을 네가 마련하라는 거예요. 네 안에서. 죽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삭이 그냥 이삭이 아니고 사랑하는 이삭이에요. 아버지가 사랑하는 이삭입니다. 이미 이삭과 아브라함은 이미 가족관계고 아브라함은 그 이삭을 어떤 경우라도 버릴 수가 없어요.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데 그 사랑하는 아들이 못나고 못난 이 아버지, 나를 위해서 뭐가 된다? 희생제물이 되어야 될 운명이라는 거예요.
남이 나 자신을 죽이는 것 그것도 못 참는데 멀쩡한 자식 그것도 내가 미워하는 자식이 아니고 사랑하는 자식, 그 자식이 잘된다면 내가 알아서 내가 죽고 싶은 그 정도로 내가 사랑하는 자식, 나는 죽어도 좋으니까 내 자식만 잘됐으면 좋겠다, 하는 그 자식인데 그런 나 가 문제가 있는 나라는 거예요.
나는 자식을 사랑한다는 그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순수한 사랑 자체가 이게 죄라고 어느 경우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거예요. 이 얼마나, 십자가 복음이요, 이게 상상을 초월하는 거예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고 인간의 예상을 초월하는 거예요.
내가 자식 봐서라도 아버지가 바르게 살아야지. 금요철야기도회에 가서 “하나님이여, 제가 혹시 잘못한 일 있어서 자식에게 누 끼치지 않게 하옵소서.” 이것은 욥기에 나오거든요. 욥이 그런 기도 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이여, 제가 잘못해서 자식의 앞길을 막는 그런 짓은 안 나오게 나라도 자식을 대신해서 바르게 살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면 주님께서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지금 아브라함은 자식을 바치라는 그것이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뒤집어버린다는 거예요. 뒤집어버릴 때 차고 들어오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그것이 바로 히브리서의 그 어렵다는 그 멜기세덱 이야기입니다.
지금부터 그 어렵다고 하는 이야기를 히브리서 6장 13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체 어느 정도로 어려운 지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히브리서 6장 13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렇게 시작해서 그다음에 16-18절에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지금 전혀 현대 일상고 전혀 상관없는 이 이야기가 죽 나오면서 우리 에게 주목을 끄는 단어가 뭐냐 맹세라는 거예요. 맹세라는 것은 뭐냐 아무것도 맹세할 필요도 없는 그 지경에다 주님께서 자기 자신을 자기의 파트너로 삼으신 거예요. 자기가 자기보고 맹세하는 거예요.
두 가지 맹세를 합니다. 하나는 뭐냐? 내가 약속을 해줬다는 것과 두 번째는, 내가 그 약속을 실제로 실행하는 사람을 내가 보낸다는 그 맹세의 확정, “이 두 가지가 거짓말할 수 없도록 이 역사 속에 아브라함에게 내가 나타났잖아.” 그런 이야기에요.
설명하니 더 어렵지요. 설명하니까 더 어려운 거예요. 그러면 더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인간들 너희들이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네가 잘하든 개판 짓을 하든 이런 것은 나는 모르겠고 네가 잘했든 못했든 그런 것은 나에게 갖고 오지 마라.” 모르겠고, 쫙 밀어버려요. 화날 때 테이블 위를 쫙 밀어버리잖아요, <펜트하우스에>서 성질나면 천 수진이가 확 밀어버린다고요.
확 비워놓고 거기에 아브라함을 택해서 있지도 않은 자식 이삭을 낳아버려요. 이삭을 낳고 하는 말이 봐, 그게 바로 내 약속대로 네가 예측 못한 맹세가 나의 약속이기 때문에 스스로 그 약속에 대해서 내가 보증해서, 여기 보증이라는 말이 나와요, 내가 보증해서 맹세를 지켜나간다는 것이 확정 났잖아, 라고 확실하게 줘버린 거예요.
그 맹세에 행여나 아브라함의 자기 존재의 의미가 낄까 싶어서 아브라함을 완전히 자식 못 낳는 가정으로 만들어버렸어요. 태가 죽어 버렸어요. “자식 있냐?” “없습니다.” 없습니다, 가 아니라 “못 낳습니다.”지요. “자식 낳을 수 있어?” “못 낳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자식 있는 아버지야?” “아닙니다.” “그렇다면 내가 약속할게. 억수로 자식이 많은 사람 되게 할게.”
그 이야기할 때 아브라함의 부모는 일타쌍피, 코피가 좍 났지요. 둘 다 ‘이건 미친 짓이야.’ 웃어버렸어요. 천사 앞에 안 들키는 식으로. ‘농담도 너무 과합니다.’ 웃어버렸어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주겠다는 소리에 웃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아브라함은 뭐냐?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겁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전혀 믿지 않았음을, 그걸 나의 기초로 삼는 거예요. 나의 존재의 시작은 “나는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였습니다.”가 영원히 천국 갈 때까지, 천국 가서도 따라붙는 나의 존재의 기초입니다. ‘아, 이게 믿지 말아야 될 일이구나.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그 이야기를 믿지 말아야 되는구나.’
누구든지 믿는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는 그 말을 믿지 말아야 되는 거예요. 그 믿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 믿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 줘야 될 그것이 주안에 있는 부모의 할 일입니다. 쉽게 말해서 ‘네가 복음 안 받아들이는 것 내가 충분히 이해한다. 왜? 네가 딱 나거든! 바로 네 모습이 내 모습이었다.’
그리고 난 뒤에 그 자식의 정형이 뭐냐? 멜기세덱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아들 같다. 이 멜기세덱의 노선 계열이 예수님 계열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테이블 확 치워 버리고요. 그 자리에 아무것도, 자식이 없는 자리에 와버렸습니다. 오게 되면 예수님은 어떤 모습이냐? 뭘 계속 채우는 것이 아니고 계속 잃어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예수님 주변이 뭘로 둘러싸여 있느냐 하면, 나름 의미있다고, 나라는 인간은 의미 있다고 여기는 자들, 군중들이 예수님을 둘러싸서 구경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가신 것은 잃어버림인데 그들은 ‘저 예수한테 뭘 얻을꼬?’ 열두 제자가 대표적이지요. 뭘 얻을꼬. 또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한테 뭘 챙길 수 있느냐, 챙기는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인간들은 자기 존재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한테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이여, 언제쯤 되면 내가 으스대고 자랑할 거리를 저에게 줄 거예요? 신이시여, 내가 나 이렇다 하고 자랑할 수 있는 그 자랑거리 좀 주옵소서.”
맨날 그 얻을 것만 쳐다보고 있어요. 참, 교회라는 게요, 그래요. 신학교 동기생들 지금 그 사람들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는데 신학교 때 어느 교수도 그걸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이 이야기를 어느 교수도 한 적이 없습니다.
“목회할래, 복음 알래? 둘 중 하나만 해라.” 그 이야기를 해준 교수가 없었습니다. “목회할래, 복음 알래?” 목회를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목회를 하면 목회자 본인에게 의미가 발생 돼요. ‘아, 나 주의 종인 모양이다. 아, 나를 통해서 주의 복음을 전하는 모양이다.’ 이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이것은요, 내가 부정할 수 없는 엉뚱한 노선의 맹세와 약속을 내가 구심점이 되어서 따로 만들어버렸어요. 악마가 좋아할 일이지요. 의미 없는데 자꾸 나는 내 의미를 내가 존재하는 의미를 갖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바로 목회하는 목사가 가장 악마적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요. 가장 악마적이에요. 그러면 교회에 악마가 목사만 있는 게 아니지요. 장로도 있고 집사도 있고 평신도도 있잖아요. 장로도 마찬가지입니다. 3, 4대째 부모부터 헌금해서 예배당 섬기고 봉사했는데 싸가지도 없는 요새 교인들, 헌금도 안 하고 내가 헌금한 것 다 뜯어먹고 있고 남에게 농락당하는 것 같아요.
기분 되게 더러워서 봉사도 안 하고 희생도 안 하고 이게 뭐야, 나만 희생하고 장로 하나 걸쳐놓고 욕만 하고, 자기들은 하나도 손도 안 대고……, 투덜투덜, 이게 오늘날 장로들이에요. 그러면 집사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야 되겠지요. 집사는 교회 와서 뭐하느냐?
왜 같이 교회 다니는데 저 집사는 하는 일마다 족족 잘 풀리고, 잘 풀리는 집 있잖아요, 나는 같이 교회 다니는데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고, 늘 꼬이고……, 그것 살피면서 교회 오는 겁니다. 그러면 평신도는? 언제 내가 발 빼도 나의 신상에 아무 일이 없을까, 그 시기 조절하는 게 평신도입니다. 언제 교회 발 빼도 신상에 아무 문제가 없는 그 시점을 찾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을 나를 지켜주는 하나님으로 생각한 거예요. 내 의미와 가치 내 귀중함을 지켜주는 하나님, 그게 바로 <랑종> 태국 무당, 그게 교회입니다. 지금 어떤 사람은 한 달째 수련회 열리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호텔 밥이 그렇게 맛있답니다. 그거 먹고 싶어서.
물론 어른은 아니고요. 이태라는 아이인데요. 호텔 음식이 맛있는 이유가 첫째는, 남이 해주기 때문에 맛있고요. 두 번째는 MSG가 많이 들어가서 맛있고요. 세 번째는, 여럿이 먹어서 맛있고요, 네 번째는 설거지 안 해서 맛있는 거예요.
나는 밥 먹을 권한이 있고 자격이 있다는 의미를 요리사가, 셰프가 채워주니까 그때가 기다려지는 겁니다. 세상은 내 편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이유가 뭔데요? 몰라요. 모르면서 부모 노릇하고 모르면서 자식 노릇 하려고 하잖아요. 이 땅에 자식 같은 자식 없고요, 부모 같은 부모는 없습니다. 전부 다 범죄자들이에요. 자기의미를 못 벗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해서 고통스러워요.
그래 나 나 혼자 살래, 아무리 해도 생전 전화 안 하는 애가 전화하게 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요. 아버지 집 좀 담보 잡히면 안 됩니까, 이렇게 할 때는 벌써 ‘이게 인생 잘못 엮였구나. 큰일 났다.’ 자식 기분 안 나쁘게 무슨 좋은 소리를 해서 네 원대로는 안 해주지만 사랑은 한단다, 그렇게 구차한 변명을 채울 수 있는가, 그거 궁리하고 있는 거예요.
마태복음 8장 22절 말씀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전에 읽었지만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 치른다 하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복음 없는 아버지, 복음 없는 자식, 그들은 각자 자기 잘남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바로 그 모습이 내가 십자가의 성령 받기 전의 그 모습을 그들이 지금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내가 저런 사람이었다. 내가 딱 저런 사람이었다. 마태복음 23장 그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엄하게 이야기했습니다. 15절에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이게 소위 교회 좀 다녔다는 우리, 우리 자신에게 질책하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십자가 지기 전에 주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성령을 받은 후의 우리, 바로 우리의 진짜 모습은 바로 아무 의미도 없는데 자꾸 마귀의 엉뚱한 소리 들어 가지고 내가 뭐 의미 있는 줄로 생각하는 것, 나의 믿음 소망 사랑이 하나님 앞에 뭐 보탬이 되고 도움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마땅히 지옥 가야 될 나 자신의 모습인 것을 보면서 얼마나 내가, 진짜 악마지요, 놈이지요, 그놈한테 단단히 속았는지 그것을 두고두고 여러분이 주께 감사해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 안에서’라는 말이 굉장히 간단한 단어지만 사실은 투명판 위에 저쪽과 이쪽, 뻔히 보이면서 저쪽에서도 넘어올 수 없고 이쪽에서도 넘어갈 수가 없는 그러한 일찍 시작된 그 심판 그게 바로 십자가에요.
십자가란 자기를 미워하는 거예요. 자기를 원망하지 마세요. 자기에게 희망 두지도 마세요. 그냥 아, 주님이 미워할 만 하구나. 내가, 그 육신을 우리가 갖고 있으면서 우리가 예수님의 진짜 아버지에 대한 피용서의 고마움을 날마다, 그 주께서 주신 맹세, 확정된 맹세, 주님은 빈틈없이 약속을 지키시는 분, 그것을 우리를 통해서 터져 나오도록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조상들이 나오는데 20, 21절에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할 때 이 지팡이가 뭐냐 하면, “얘들아, 너희 눈에 나는 어떻게 보이느냐? 야곱은 죽었어. 주께서 나를 주의 이름 이스라엘 되게 하셨다는 것, 우리는 이 이야기를 여러분 자식들에게 또는 부모에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주님 앞에 속일 수 없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근본적으로 내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그 자체를 문제 삼게 해 주옵소서.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을 성령께서 주셔서 예수님의 맹세가 이제 확정되었고 실제로 성취되었음을 우리를 통해서 증거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