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우리의 신랑

아빠와 함께 2021. 7. 11. 20:46

우리의 신랑

2021년 7월 11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3:18-19

(3: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3: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창세기 3장에서 인류의 조상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당장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당장 죽이지 않고 ‘약속을 드러내는 기능자’로서 활용하십니다. 그 약속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창 3:16)

여성에게 주신 약속의 기능 안에 벌써 남성이 관여되어 있습니다. 남성없이 여성만이 따로 여성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여성의‘복종 당함’의 기능을 위해서 ‘복종하는 기능자’로서 남성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남성이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이 복종자로 등장한다는 데 있습니다.

즉 남성은 여성을 복종하는 자로서 제 기능을 다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야 하는 자’ 곧 ‘여성을 위해 희생해야만 하는 자’의 기능으로서 ‘약속’에 개입하게 됩니다. 여성이 잉태하게 되는 ‘여자의 후손’을 보호하기 위해 남성의 희생이 동원되는 겁니다. 이러한 부부를 통해 약속의 실제성은 ‘주 밖’에 사는 일반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주 안’에 들어온 자들만의 기능입니다. 남자로 죽고 약속을 위한 남편으로 태어나고, 여자로 죽고 약속을 위한 아내로 태어나는 겁니다. 이는 곧 ‘나는 죽고’가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즉 부부생활이란 ‘나’를 죽이는 위한 생활입니다. 부부생활 뿐만 아니라 모든 인생이 다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러합니다. 아담을 죽이고 아담과 중첩되어 있는 주님을 살리시는 겁니다. 여자를 죽이고 ‘하와’ 곧 ‘생명’을 살리는 겁니다. 이 세상은 이미 선악지식체계로 움직이기에 아무리 행복한 부부생활을 해도 지옥불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생명나무로 통하는 방식은 하나님의 약속노선으로 갈아타는 겁니다.

즉 ‘노선 변경’이 있어야 합니다. 이 ‘노선’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마중나와 주셔야 들어갈 수 있는 노선입니다. 이 노선이 바로 ‘계약노선’입니다. 기존의 인간들의 계약은 인간들의 각자 ‘나’중심으로 운용되는 계약입니다. 곧 인간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계약만을 고려합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4:26에 보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소식과 오늘날 TV방송에서 연일 외치는, “코로나를 이겨냅시다”라는 구호 중에서 어느 말이 우리 자신을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말이겠습니까? 사람들은 ‘남편다워라, 아내다워라’라고 외부에서 압력이 들어오면, 남편이고 아내이고 다 벗어버리고 그저 ‘나’로 살고 싶어합니다.

즉 처음 결혼하기 전에 사귈 때는 서로의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것을 ‘절대적 사랑’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인간이 죽어봐야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 안’의 세계입니다. 사랑한다고 여기고 결혼하고 난 뒤, 비로소 인간은 사랑의 거품이 빠진 본격적으로 부부가 됩니다.

즉 아내가 남편에서 복종하는 척하지만 실은 남편에게 아내에 대해 복종하도록 유도하는 위한 복종이며,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도 이것은 진정한 희생적인 사랑이 아니라 사랑받은 만큼 되돌려받기를 강요하는 사랑이요 생색내는 사랑일 뿐입니다. 구약에서는 이처럼 사랑으로 시작했지만 부부로 나아가지 못하고 소실된 한 때의 사랑을 여러 군데에서 소개합니다.

사사 삼손이 블레셋 여인이 들릴라를 사랑하는 것도 그 예가 됩니다. 그리고 사무엘하 13:15에서, 암논이라는 배다른 오빠가 자신의 배다른 누이동생 다말을 미치도록 사랑하던 그 사랑이 결국 비극으로 끝난 경우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 곧 저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반면에 ‘사랑’이라는 감정과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부부가 된 경우도 있습니다. 있습니다. 유다의 이방 며느리인 다말이 그러하고, 룻이라는 여인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에스더라는 여인도 그 당시 죽음의 위기로 몰린 유대인을 살려낸 여인이었습니다. 이는 곧 에스더는 ‘많은 유대인의 번식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계약노선이 주님에 의해서 자기 백성에게 밀려옵니다. 마치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경우처럼 말입니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은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에 의해서 주선되었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계약노선의 참여는 더 이상 ‘나의 구원’을 용납하지 않는 노선입니다.

주님 안에는 주님께서 친히 ‘복종’을 아시고, ‘사랑’을 아시는 그 축에 같이 물려들어가는 상황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죄로 없으시면서 죄인이 되셨기에 아버지에게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본인이 구원자이시기에 ‘사랑’을 아시되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로서 ‘주 안’에서는 ‘나’는 오직 주님 차지입니다. 곧 기존의 인간 계약에서는 항상 중심이 인간들의 각자의 자아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계약은 타협과 양보와 협상으로 이루어집니다. 부부생활이라는 것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지만 새로운 계약 안에서는 중심축은 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대해서 소개하면서 마태복음 25장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남편 하나에 처녀가 열명이라는 겁니다. 이는 주님이 ‘나의 신랑’아니라 ‘우리의 신랑’이 되는 겁니다. 주기도문에서 나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이로서 생명나무가 있는 곳에서는 개인적인 구원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몸’의 구원만 있을 뿐입니다. 육신은 옛 몸이요 거기서 일어나는 사랑도 옛 몸에서 일어나서 그것을 결혼제도를 통해서 유지시켜 보려고 하지만, 세상의 형식과 제도는 주님이 주신 사랑을 온전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주 안에서의 부부’란 천국을 위해 육신적 부부의 틀을 벗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온전한 주님의 신부로서 늘 확인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참으로 위험한 존재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6강-골 3장 18-19절(우리의 신랑)210711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3장 18-19절입니다.

골로새서 3:18-19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여기 ‘남편’과 ‘아내’라는 말이 나오지요. 당연히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상대해서는 다시 선악체제 바깥으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생명나무로 가지를 못해요. 생명나무가 있는 곳은 사람이 없는 곳이고 하나님과 함께 있고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곳에는 생명나무가 없고 그런 겁니다.

사람하고 백날 잘 사귀고 사람에게 복종하고 사람을 사랑해 봤자 그것은 선악과 지식, 하나님께서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던 그 상황에서 벗어나지를 못해요. 한평생 선악 으로, 하나님께 원치 않는 선악사고 방식으로 살았다면 이제는 생명나무쪽으로 가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간들이 맨날 누구만 상대하느냐 하면, 인간들만 상대하는 거예요. 사람들만! 똑같은 입장인데. 그래서 성경에서,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라고 하는데 남편도 인간 아내도 인간, 남편한테 잘해주니 뭐할 거고 아내 사랑해주니 뭐하겠어요? 맨 선악체제 안에 있는데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핵심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이는 주 안에서”라는 말이 나와요. 그런데 이것은 선악체제에서 벗어난 상태 선악체제에서 벗어나서, 주님이니까 생명나무거든요, 생명나무와 함께 있는 분과 함께 하라 그 말입니다. 생명나무와 함께 있는 분과 상대하는데 그분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그분 안에 아내의 요소가 들어 있고 남편의 요소가 들어 있는 거예요.

복종하라는 말은 주님께서 죄인으로 오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죄인의 입장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엇이 복종인가를 체험하신 겁니다. 이 땅에서. 그리고 사랑하라, 하는 것은 주님께서 구원자 입장에서 왔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불쌍히 여겨서 사랑하는 경우에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 예수님이 그걸 사랑으로 규정하셔서 실시하셨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 성도가 되었으면 사람하고 상대해야 별 소용 없고요, 주님과 늘 교제하고 상대하면서 살아가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과 교제하는데 주님이 보여야 말이지요. 주님이 손에 만져지는 것도 아니고요. 주님께서 지금 어떠한 기능을 하고 계시는가, 그 점을 알아야 되는데 처음에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께 정녕 죽으리라,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정녕 죽으리라.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실제로 보면 아담과 하와가 안 죽고 계속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기능을 부여해요. 새로운 직능을 부여하는데 여자는 아내가 되어야 되고 남자는 남편이 되어야 돼요. 남자로 죽고 남편이 되고 여자로 죽고 아내가 되는 기능을 하나님께서 부여하셨습니다.

그 기능이 어디와 연결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을 예언하는 그 약속과 연결되면서 아내는, 여자는 아내의 기능 속에서 구원을 찾고, 생명나무를 찾고 남자는 남자의 기능을 포기하고 남편이 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 속에 스며들어 있는 생명나무의 요소를 접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게 되면 남편과 아내가 그냥 만나서 부부생활 하면서 상대하는 것이 사람 상대가 아니에요. 이 말씀은 둘 다 주안에 있다는 조건 하에 이 말씀을 주는 겁니다. 남편도 주안에 아내도 주 안에 둘 다 주안에 있어야 돼요. 그러면 만약에 아내는 주 안에 있는데 남편은 주 밖에 있다. 그럴 경우에 어떻게 하느냐?

그런 경우에 고린도전서 7장 15절에 사도바울의 이야기 해놨습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이혼해 버려라 그냥, 나 복음 아는 너하고 살기 싫다 하거든 갈라서라, 거기에 대해서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이 말은 생명이라는 것, 복음의 생명은 이 죄악된 인간세계에서 형성된 제도와 형식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 복음을 담아낼 수가 없어요. 세상적인 어떤 제도와 형식, 어떤 결혼제도나 형식이 온전히 복음이라는 것, 생명나무의 약속을 다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릇이 찢어져 버려요. 그릇이 넘쳐나 버립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7장 15절, 꼭 기억하세요. 안 믿는쪽이 갈라서려 하거든 뭐 미련 없이 갈라서버려라. 주 안에서 혼자 사는 게 낫다 그 말이거든요. 고린도전서 7장 15절, 복음 같지요. 그런데 28절에 보면 더 복음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금 아무도 동조 안 하고 있는 느낌이 드는데요.

27절에 보면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아내가 복음을 모르고 남편이 복음을 아는데 아내가 “복음 아는 너하고 살기 싫다. 나가!” 해서 그냥 갈라섰습니다. 갈라섰을 때 갈라섬에 대해서 복음 아는 남편은 거기에 대해 미련 갖지 말고 아싸리하게 빠이빠이 하라는 말이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결혼이라는 그 제도가 복음을 담기에 충분치 않은 거예요. 그러면 복음 버리고 주님 버리고 결혼생활 계속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물으신다면 결혼생활 하는 것은 좋아요. 행복하게 사는 것은 좋은데 문제는 지옥에 간다는 거예요. 문제는 그 선악체제 가지고 지옥 간다는 거예요.

어떤 분이 저에게 카톡으로 그런 질문을 했어요. 착하게 살지 마세요, 그 한마디 툭 던졌는데 그 뒷말이 궁금했던 모양이지요. “목사님 착하게 살지 말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라고 질문하기에 답변을 이렇게 해드렸어요.

사람이 착하게 산다 하는 것은 이미 선악체제에 본인이 놓여 있는 거예요. 무엇이 착하고 악하냐 하는 것을 늘 검토하면서 나는 악한 쪽이 아니고 선한 쪽으로 살겠다 하고 다짐을 하면서 착해야 돼, 착하게 살자, 착하게 살자,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선악체제 밑에는 뭐냐? 불바다 있어요. 왜냐하면 선악과를 아는 것 자체가 심판의 저주기 때문에 선악체제 밑에 불바다가 있다고요. 그러면 착하게 살겠다는 것은 그냥 불바다 가겠다는 겁니다. 지옥 가겠다는 것밖에 안 되거든요.

그런데 착하게 살지 말라, 함으로써 착하게 사는 것이 뭐가 문제냐, 하고 딱 들여다 보니까 거기에 지옥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그 저주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피의 용서, 피의 용서가, 착하게 살고자 하는 이 육신의 올라오는 모든 것을 그때그때마다 주께서 처리를 해주시는 겁니다.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그 죄와 피가 만나서 계속 용서가 돼요.

그러면 착하게 살지 말라, 를 다른 말로 하게 되면 모든 일에 감사하자는 뜻이에요. 감사가 빠지고 난 뒤에 악하게 살자, 그렇게 나오면 안 되고 착하게 살지 말자, 는 말은 고마운 일이 내 신상에 지금 벌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용서하시는, 주님의 살아계신 용서하시는 기능이 지금 내 이 현장에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면 아, 착하게 살지 말아야 될 이유가 그게 우리가 선악체제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할 때 결혼자체라는 것이 꼭 필요 없다면 결혼 자체가 죄가 될 수 있잖아, 라는 질문을 사도바울에게, 이 편지를 받은 고린도교인들이나 오늘날 우리가 질문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장가가고 시집가는 그것이 죄입니까, 라고 할 때 28절에 보니까 “그러나 장가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라고 되어 있어요. 장가가는 것이 죄짓는 것이 아니오, 라고 하는 거예요.

누구 결혼식을 하는데 축하 화환을 보냈다 칩시다. 그 밑에 누가 보냈다고 쓰잖아요. 누가 보냈다고 쓰지 말고 고린도전서 7장 28절을 쓰는 겁니다. 장가가는데 장가가는 게 굳이 죄짓는 것은 아니니까 정신 바짝 차려라, 이런 글을 쓴다 합시다. 이게 지금 축하하는 겁니까, 이게 지금 공포분위기 조성하는 거예요?

장가가는 것이 죄짓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이게 축하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복음 때문에 헤어지는 것이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 그 말이에요. 왜냐? 세상 안목은, 세상의 선악체제는 생명체제를 감당 못하기 때문에. 생명을 몰라요 생명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근원적으로 우리의 존재의 바탕자체를 부정하는 말씀이에요. 오늘 본문 말씀이. 아내는 복종하라, 남편은 사랑하라, 이 말씀은 복종과 사랑은 우리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왜 없느냐? 인간에게서는 이게 나올 수 없는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에게 복종하는 것도 상대방의 복종을 이끌어 내기 위한 수단으로 복종을 해요. 내가 너에게 복종했으니 너는 가만 있으면 안 되지, 이런 거요.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도 타인에게 사랑을 강요하는 겁니다.

아내가 간만에 맛있는 것, 고추튀김 해주게 되면 남편이 갑자기 공포를 느껴요. 안 하는 짓을 왜 하나, 무슨 일을 저질렀나, 백화점에서 비싼 것을 쇼핑했나, 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나, 왜 안 하는 짓을 하고 있을까…….

그러니까 사랑은 상대방에게 공포감을 줍니다. 이거 받고 뭘 더 해달라는 말인지. 인간들의 과정이 육신이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7장을 보면 인간이 혼인할 때 욕정, 감정, 사랑이라 하지요, 사랑이라는 욕정과 애정심 감정으로 혼인한다는 말이지요. 혼인한다는 그것이 창세기 3장에 명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원칙을 그대로 하나님께서 실재화 시키는 거예요.

인간들의 육신은 육신대로 남녀가 서로 욕정에 불타올라 사랑한다, 하고 사랑의 결실을 맺자는 것이 부부가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부부라는 것은 사랑의 거품이 빠질 때 제대로 부부가 되는 거예요. 사랑할 때는 부부가 뭔지도 몰라요. 사랑의 시효가 이제는 끝났어요. 시큰둥해 이제는.

그래서 사랑할 때는 사람이 계속 견줘봅니다. 이 남자가 나의 평생을 맡길 수 있는 남자인지 계속 견주어보고 테스트해보고. 요새는 남자도 그래요. 내가 이 여자하고 살게 되면 생활비를 계속 공급해 줄 수 있는 여자인지 계속해서 테스트를 해보거든요.

연애할 때는요, 될 수 있는 대로 상대방에게 실수를 안 하려고 해요. 연애하는 상태에서는. 사귀는 상태, 만나고 있는 상태에서는 실수를 안 하려고 해요. 그런데 결혼을 하게 되면 어떻게 달라지느냐 하면, 비난 안 받으려고 해요. ‘방귀 뀌는 것 참아라. 부부지간에.’ 이런 것. 사귈 때는 자기 철저함과 완벽함으로 주도권을 쥐려고 하다가 부부가 되고 난 뒤에는 ‘내가 이제 무슨 짓을 해도 눈 좀 감아줘. 모든 것을 용납해줘.’ 이런 식이에요.

그런데 그런 아내를 사랑해요? 그런 남편에 복종해요? 있을 수가 없지요. 결혼함으로써 이미 사랑은 끝났어요.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의도적으로. 사랑할 때는 상대방이 너무 좋아서 미치지요. 모든 것을 다 갖다 바치지요. 천 번이고 다시 태어나도 또 이런 사랑 없습니다, 하고 주접을 떨지요. 그러다가 결혼하고 난 뒤에는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 아시네요. 딱 나오잖아요. 불안한 눈빛, 전쟁 같은 사랑이라.

이게 뭐 고장 난 형광등 같아요. 연인처럼 때로는 남남처럼 계속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왜 그러냐 하면요, 창세기 3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선악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가 죽어야 되는데 아담을 죽이고 남편으로 태어나게 하고요, 이브를 여자를 죽여서 하와, 생명으로 아내로 태어나게 하시는 거예요.

그 절차를 우리가 이 땅에서 육신을 가지고 아담에 일어난 사건을 하나님께서 반복시키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맛보게 하시는 겁니다. 결혼을 하고 난 뒤에 왜 부부생활에 대해서 희망이 없느냐 하면, 남자는 남편 될 생각이 없고 계속 나가 되고 싶은 것이고 여자는 아내 될 생각이 없고 나가 되고 싶은 거예요.

해주고 해줘도 나중에는 “시가집에 몇 번이나 가야 돼?” 하고 아내가 남편에게 반박을 하는 이유가 나는 아내 역할을 이제 힘에 부쳐서 더 이상 못하겠다는 거예요. 나를 잃어가면서 더 이상 아내 노릇을 하기 싫고 남편이 나를 잃어가면서 남편 노릇 하기 싫다는 거예요.

‘그냥 동업자로 살자. 남편 놀이 아내 놀이 부부생활 놀이 이제 그만하자. 많이 했다. 많이 묵었다. 수십 년 했으면 되었지 아직까지 내가 아내(남편)로 보이냐? 남편 노릇 하려거든 돈 벌어오든지 돈 없으면 남편 노릇 하지 말든지.’

세상이라 하는 것은 이처럼 나를 죽이지 아니하게 되면 여전히 내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한 처음의 그 약속 약속의 기능에 참여하지 못하고 내가 유지된 채 그냥 지옥으로 가는 거지요. 갈 수밖에 없어요. 결혼하나 안 하나, 이혼 하나 안 하나 그것은 지옥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뭘 하느냐? 노선변경을 시도하십니다. 이 노선변경은 아담으로 살았던, 지옥으로 갔던, 선악과 노선을 유지했던 견지했던 그 노선에서 생명나무로 가는 노선으로 노선변경이 일어납니다. 그 노선변경을 시도하는 표준모델이 뭐냐 하면, 예수님 본인이에요. 예수님 안에 아내 들어 있고 예수님 안에 남편 들어 있는 거예요.

그것은 예수님이 바로 구원자고 예수님만이 복종이 무엇인가를 본인만이 알고 있어요. 그게 바로 ‘주 안에서’에요. 그러면 어떻게 노선 변경 하는가? 로터리샤프트라 해서 돌아가는 축이 있거든요. 예수님 안이 축이라면 그 축에 참여가 됩니다. 성도가.

여자는 아내로서 참여가 되고요. 결혼하나 안 하나 마찬가지에요. 남자는 남편으로서 이 축에, 예수님 축에 관여가 돼요. 관여가 된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복종이라는 것, 여자니까 아내 역할, 복종하는 역할, 남자기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는 사랑의 역할이 그 축에 의해서 돌아가요.

회전축 안에서 물려서 같이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정신없습니다. 거기서 주 안에 들어오면서 무엇을 상실해야 되느냐 하면, 나를 상실해야 돼요. 나라는 것을 상실해야 됩니다. 나를 상실해서 뭐로 바뀌느냐? 이게 ‘우리’로 바뀌어요. 성경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고요, 성경에서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존재하는데 우리라 하는 것은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너만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같이 있는 거예요.

주님을 나의 신랑이라 말하지 마세요. 우리의 신랑이에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요. 나의 아버지가 아니고. 나의 아버지는 예수님만 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나의 아버지지만 신약에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요. 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나는 주님의 기능으로 바뀌면서 나를 상실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아담은 아담 혼자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하와와 더불어서 구원받고요. 하와는 혼자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아담과 더불어서 구원받고요. 손가락 혼자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발가락 하고 엮여서 구원받고요. 귀는 눈하고 같이 구원받고요. 그리스도 몸 안에 있는 사람은 몸의 지체와 더불어 구원받는 겁니다. 홀로 구원받는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집단구원이고 단체구원이에요. 그 머리가 예수님이고요. 그래서 처음 설교시간에 사람하고 상대하지 말라고 했지요. 주님께서 한가운데 있는 거예요. 주님 한가운데 있고 놀이동산 회전하는 목마처럼 중심축이 있고 거기에 매달려서 회전하는 겁니다. 커플들이 매달려서 돌아가면서 막 소리 지르고 하지요. 롯데월드 있잖아요.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와 몸과 팔로서 같이 움직이는 겁니다.

“나는 어떻게 합니까?” 나 자체가 없는데 나는 어떻게 한다는 자체가 없어요. 나의 자리는 주님이 전부를 차지하고 거기 매달려서 사는 사람들을 우리라 합니다. 내가 소멸해야 우리가 되는 거예요. 노선변경을 시도하면서 주님께서는 주 안에서 나를 버리고 주님 쪽으로 가게 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오십이 되어야 보이는 것이 있고 육십이 되어야 보이는 것이 있고 칠십이 되어야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의 경우에 뭐냐? 네가 죽어야 보이는 이야기에요. 칠십이 아니고 팔십도 아니고 죽고 난 뒤에 보이는 것이 뭐냐?

“아내 된 자는 남편에게 복종하라. 남편이 남편으로 보이냐? 주님이다. 아내가 아내로 보이냐? 주님이다.” 네가 사람을 상대하라는 말이 아니고 주님을 상대하고 주님과 같은 축에 매여서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을 네가 소급해서 회고적으로 네가 그걸 파악해라 그 말이지요.

처음 20대에 아무것도 모르고 스물아홉 살에 결혼할 때 ‘너는 어떤 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했다고 생각했지? 아니야.’ 주님께서 소개한 사람이에요. 주님께서 소개한 남편입니다. 결혼이 전부가 아니고 그 결혼, 부부생활 속에서 나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이게 생명나무를 훼방하고 방해하고 있다는 그 나를 결혼을 통해서 깨닫고 또 헤어지면서 깨닫고 홀로 살면서 그걸 깨달으라 그 말입니다.

제 말이 아니고 이게 예수님 말씀이거든요. 누가복음 14장 26절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여기 처자가 나와요. 아내가 나온다고요. 아내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를 갈 수가 없습니다. 이게 지옥으로 가는 우리 형편입니다.

집단결혼이에요. 개인 내 아내가 아닙니다. 천국 가면 우리 아내고 우리 남편, 이렇게 되는 거예요. 물론 천국에서는 시집도 장가도 아니 가지만. 마태복음 25장 1절에 천국에 대해서 소개할 때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신랑은 하나인데 처자가 열 명이에요. 일부다처제인가요? 그런 뜻이 아니고 천국은 이 땅의 신랑 같은 신랑감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자 그게 바로 천국 쪽으로 마음 방향을 돌린자라 그 말입니다.

이 땅에서 결혼하는 사람들 그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은게 그거예요. 당신의 중심은 있습니까? 당신의 중심이 있습니까? 인간들은 내가 중심이지, 하고 자아를 내놓는다고요. 자아를 내놓으면 안 되고 천국을 내놓아야 되고 생명나무를 내놓아야 되고 주님을 내놓아야 돼요. 주님이 내 중심이에요. 주님이 제 중심이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준 것은 내 안에 예루살렘입니다.

내 안의 예루살렘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이미 알려준 바 있어요. 예루살렘은 바로 제사하는 곳이며 제사하는 곳은 모든 것을 주고 모든 것을 얻는 곳이에요. 헌집다오 새집줄게. 이거거든요 두껍아, 두껍아, 복종은 그 모든 것을 내주고 사랑은 그 모든 것을 다 받는 거예요. 준 것을 받는 것이 아니고 주지도 않은 엄청난 것을 천국 영생을 몽땅 받는게 바로 사랑입니다.

그걸 남편이 줍니까? 주님이 주십니까? 주님이 주시니까 주시는 분을 사랑해야지요. 그러니까 주님이 나의 신랑이 아니고 우리의 신랑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너와 나는 우리에 같이 속해 있는 사람이에요. 그게 천국의 부부생활이에요.

신랑은 하나 그리고 나머지 몽땅 다 신부. 그거 괜찮은 결혼 아니겠습니까? 이 땅에서 사적으로 결혼해 봤잖아요. 그러면 천국 가서는 이 땅에서 못해본 결혼도 괜찮을 건데요. 한 여자와 짜증 내지 말고 또는 한 남자와 짜증내지 말고 그 때는 우리 모두가 우리의 같은 신랑을 모시고 있잖아요.

그 기능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에게 이름을 부여합니다. 아담에게는 아담이라 하고 그 아담은 잘리는 아담이에요. 아담은 중첩되어 있어요. 그 아담 뒤에 예수님이라는 아담이, 신랑이 기다리고 있어요. 여자의 이름은 기존의 아담에 더이상 매이지 말라고 여자의 이름은 하와, 생명이라 했어요. 생명의 신부가 되는 거예요.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서 너는 여성이 되어라, 그 말이에요. 여성에서 멈추지 말고 아내가 되어라, 그 말이지요.

그 이야기가 마태복음 19장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19장 12절에서 하나님이 맺어준 부부는 헤어질 수가 없다고 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그러니까 신랑의 표준이 고자라는 겁니다. 성기능을 가진 자가 신랑이 아니고 성기능이 상실된 결핍된 자 그것이 신랑이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의 자식은 한 명도 없으니까요. 주님은 결혼한 적이 없어요. 예수님은 결혼한 적이 없습니다.

혹시 결혼한 적 있다는 소식 있다면 전해주세요. 사도바울도 결혼한 적이 없어요. 사도바울이나 예수님은 국가 인구정책에 전혀 보탬이 안된 거예요. 국력신장에 도움이 안 돼요. 아이 많이 나았다고 정력이나 자랑하고 있고 그게 무슨 별꼴이에요?

내가 신랑이라는 이유 때문에 천국을 못갈 수가 있고요, 내가 아내로서 참 착실한 아내라는 것 때문에 생명나무 참여하지 못할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자기의 갖고 있는 육적인 능력과 자질에 대해서 계속 미련을 갖고 있습니다.

그게 나거든요. 나는 안 넣어줘요. 나라는 인식자체를 천국에서는 받아주지 않습니다. 나에서 우리가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9장 26절에 정말 중요한 말씀 나오지요.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다. 이게 사랑을 할 때나 부부가 되었을 때나 이 정신을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부부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백날 해도 사람은 안돼요. 사람은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왜냐? 행복할 권리나 권한도 없고 자격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구약의 많은 대목에서 사랑은 했는데 결혼에 실패한 사례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부부가 되었는데 부부가 실패한 사례도 많이 나오고요. 예를 들면 사사기 16장 1절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러니까 삼손은 꼴에 남자거든요. 남자니까 20대, 30대, 40대를 막론하고 남자는 그저 이쁜 것만 있으면 뿅 가요. 그리고 에스더도 마찬가지고요. 아하수에로 왕이 에스더가 유대인이냐 종교가 뭐냐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이유가 그때 미스 바사대회 나가서 진 받았거든요. 1등 했다고요.

여자로서 1등은 아름다움이 1등이고 남자의 1등은 권력을 누가 많이 갖는가가 1등입니다. 1등과 1등끼리 부부가 된다는 것이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있는 부부됨의 조건입니다. “능력도 안 되는 것이 내 아들 넘봐?” 얼마나 <사랑과 전쟁>에서 그렇게 합니까? “근본도 없는 것이 임신만 하면 다냐? 이 돈 가지고 미국으로 떠나라.” 이런 이야기 많이 나오지요. 1등은 1등끼리 붙어야 돼요. 그래야 격이 맞으니까.

처음에 에스더 자기의 미모가 사적으로 내 행복을 위해서 쓰일 줄 알았지요. 그러나 에스더의 미모는 나가 있으면 안 돼요 나의 행복을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행복인데 그 우리가 어느 쪽의 우리냐? 생명나무 쪽으로 가는 우리, 바로 유대인들을 학살하고자 하는 하만의 계략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에스더가 갖고 있는 주님 주신 그 미모를 들이대는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에스더는 하나님의 생명의 자녀를 번식했다. 그냥 육적인 자식을 번식한 것이 아니고 생명의 자녀를 번식한 겁니다. 그게 바로 아내의 기능이에요. 약속 안에 들어 있는 기능이에요. 인간의 약속, 인간의 계약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여러분들이 길 가다 보면 거미줄 많이 쳐 있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거미줄 대충 무시하고 부수면서 가버리잖아요. 거미는 나름대로, 거미가 땀 흘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땀을 뻘뻘 흘리면서 거미줄 쳐놓았는데 인간이 무심코 지나가면서 그걸 다 부숴버리는 거예요.

나라는 존재는 이 땅에서 타인의 존재를 훼방하는 존재요, 타인은 내가 설립한 나의 영역을 훼손하는 그런 관계에요. 그래서 인간은 대충 흥정하고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얻을 것은 얻고 하지요. 그게 인간세계에서 통하는 계약이라는 겁니다.

인간사회에서 감당할 수 있는 부부생활이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얻어낼 것은 얻어내는 그냥 인간적인 계약 상태입니다. 동업자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이혼하고 난 뒤에 양육비 안주거든 고소해야 돼요. 무슨 그런 동업자가 있어요. 돈 줘야지요. 애 키우는데. 뭐 사랑한다고? 사랑해서 돈 달라고 합니까? 애 키우는데 필요한 돈 달라는데 그거 안주니까 경제범으로 그건 고소감이에요.

이 세상은 모두 다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애를 쓰는 거예요. 나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내가 정당해야 되고 정당하려면 선과 악의 체제를 붙잡고 그 안에 파묻혀 살아가야 돼요. ‘나는 옳다. 나는 옳으니까 반드시 이런 권리가 보장돼야 돼. 나는 옳다.’

그러나 주님의 계약은 그 계약이 아닙니다. 주님의 계약은 나를 배제하는 계약이에요. 나를 제거해 버려야 돼요. 삼손이 자기 보기에 예쁜 여자 블레셋 여자에게 갈 때 자기 마음에 든 여자에요. 이것은 자기가 부정당하지 않는 어떤 계약을 생각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요새 TV 틀면 온종일 쏟아지는 뉴스가 뭡니까? “코로나 번창하니 백신 맞으세요. 감염자 1300명대로 올라갔습니다.” 외국은 어떻고 뭐 그런 이야기잖아요. 그 뉴스 하고, 아까 제가 봤던 누가복음 14장 26절 거기 다시 읽어볼게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자, 이 두 가지 소식 가운데 어느 것이 나를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소식입니까? 성경말씀이지요. 백신 맞으세요, 코로나 조심하세요, 이것은 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원하는게 살고 싶은 거잖아, 이렇게 하면 삽니다, 라고 자꾸 사는 쪽으로 사는 쪽으로 가지요.

그러나 누가복음 14장 26절은 뭐냐 하면, 근원적으로 이미 우리는 하늘나라의 생명과 무관한 존재라는 것을 성경이 우리한테 제대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타협 없습니다. 협상 없습니다. 인간하고 계약 안 합니다. 그냥 계약은 아버지와 주님이 한 그 계약 그대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사람들은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결혼을 해도……, 결혼한 사람들의 모든 문제를 제 나름대로 볼 때 부부가 결혼이 왜 이렇게 전쟁터가 되느냐 하면 ,관람자가 되고 싶은 거예요. 행복한 조건 만들어주면 내가 숟가락 하나 얹을게,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참여자가 아니고 관람자에요. 아내가 남편 대우 해주면 남편은 슬그머니 숟가락 하나 얹듯이 그런 식으로 참여하려는 겁니다.

막상 참여가 되면 그 다음부터는 게임을 하는 거예요. 줄다리기합니다. 누가 더 세냐,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가 안 죽으니까 세상적인 지옥 가는 계약만 생각하고 관람자고 게임 벌여서 자기가 실패자가 아니고 승리자가 되려고 하고 그런 식으로 처녀총각 때부터 만나서 만날 때부터 게임이에요.

만날 때부터 게임으로 시작해서 결혼해도 승부가 안 끝났어요. 부부생활 하면서 게임은 죽을 때까지 계속하고 있어요. 나이 구십 될 때까지. 왜 그러냐 하면 그 만남을 내가 선택해서 만나기 때문에. 삼손같이 내가 선택해서 만나서 그래요. 내가 선택해서 만났지만 부부가 되지 못했습니다. 구약성경이 일부러 그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만날 때는 어떻게 만나야 되느냐 하면,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만나는 그 법칙이 나와 있어요.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고넬료가 욥바에 있는 베드로라는 사람을 언제 알았겠어요? 몰랐어요. 그런데 천사가 와서 “누구와 누가 만나라. 고넬료야, 너는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만나라.”고 천사가 개입을 한 겁니다. 만남이라 하는 것은 주님이 주선해야 되고 주님이 강제로 만나게 해주셔야 되지 인간이 선택한 만남은 항상 실패로 끝납니다.

내가 만났기 때문에 사랑을 해서 부부가 되어도 본인들 양쪽이 수습이 안 돼요. 좋았던 그때의 하나됨이 불가능해요. 가능이 안된다니까요. 이혼하고 난 뒤에는 “혹시 이 사람 아십니까?” 하면 상대방이 “왜? 만나고 싶어요?” “아니요. 피하고 싶어요.”

그것은 인간이 육신이 있는 한 자기의 만남에 대해서 잊어야지, 잊어야지, 하지만 수습이 안 돼요. 잊어야지 하는 순간 잊지를 못해요. 왜? 자기 자신이 누구한테도 패배하기 싫고 ‘내가 찼으면 찼지 차이기는 싫다. 차이기는 죽기보다 싫다.’ 하는 게임에 자기가 주도권을 쥐려고 하는 그 본성, 이런 육신이 결혼 하나 안 하나 같이 사나 안 사나 아무 상관없어요. 그게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래서 구약에서는 결혼에 실패한 사례를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이, 결혼이 안되는 경우도 있고요. 결혼해서 깨지는 경우도 있고요. 사무엘하 13장 15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이번 여름수련회에서 사무엘하 합니다. 자세한 것을 알고 싶으면 그 때 참석하면 됩니다.

“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배다른 자기 여동생을 너무 사랑해서 스토커에요. 정신적으로 너무 집착하니까 암논 본인이 시들시들 아픈 거예요.

그래서 요나답이라는 친구, 배다른 형제기도 하고 그래요, 그 친구가 와서 방법을 이야기해줘요. 네가 다말이라는 배다른 여동생을 사랑하니까 그 여동생과 단독으로만 만날 수 있는 상황을 네가 만들면 된다. 상대방은 또 여자고 너는 힘이 세잖아. 네가 타오르는 욕정을 주체못하면 네가 시름시름 앓아 누우니 안 되겠다 하면서 그런 상황은 다윗의 지시가 있어야 되니까 다윗한테 부탁합니다.

그 여동생 다말은 아무것도 모르고 밀가루 반죽을 해서 과자 만들고 암논에게 갑니다. 먹기 전에 다른 사람들은 다 내보내고 그 다음에 다말을 자기 침실에 들어오라고 해서 다말이 자기가 만든 과자를 가지고 들어오니까 먹여 달라고 해놓고 먹여주려고 할 때에 손목잡고 동침해 버렸어요.

그렇게 하고 난 뒤에 15절에 “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 인간의 마음을, 감정을 인간의 이성으로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왜? 인간의 몸은 인간의 육신은 본인이 만든게 아니기 때문에. 이 말은 사람을 상대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사람이 뭐 믿을 게 있어요?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은 천사의 주선입니다. 그리고 구원받는 것도 성령의 주선이에요. 인간은 나를 죽자 하고 믿는데 내가 나를 믿을 게 못 됩니다.

전쟁 같은 사랑이에요. 왜? 나는 위험하니까요. 내가 위험해요. 내가 나한테 가장 위험한 존재에요. 누굴 사랑한다고 하지 마세요. 거짓말입니다. 누구에게 복종했다고 하지 마세요. 상대방의 복종을 이끌어 내기 위한 하나의 수완이에요. 요령이고 트릭이에요. 내가 나서서 되는 일 하나도 없습니다. 이미 선악체제가 있기 때문에. 자기 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 다음에 사무엘하 3장을 다 이야기하면 복잡하니까 간단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사울가는 이미 몰락하고 그 아들 이스보셋이 정권 잡겠다고 나왔을 때 다윗도 가만 있지 않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압력을 넣으니까 아브넬이라는 사울계통의 군대장관이 귀순하기로 했을 때 “그냥 오지 말고 내가 전에 결혼했던 미갈을 나에게 데리고 오라.” 그래야 이스라엘 전체가 진짜 차기 왕은 다윗 맞구나, 라고 백성들의 호응이 있을 것이라고 해서 그렇게 요청을 했어요.

그런데 그때 이미 미갈은 다른 남자하고 결혼을 해서 살고 있었어요. 사무엘하 3장 15, 16절에 보면 “이스보셋이 보내어 그 남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취하매 그 남편이 저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 왔더니 아브넬이 저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

여기서 바후림은 예루살렘 근처 길목에 있어요. 자기 마누라를 국가권력체에 의해서 빼앗긴 겁니다. 지금 멀쩡히 살고 있는데 다윗이 남의 아내를 달라고 한 거지요. 옛날에 자기 아내였건 말건 지금은 남의 아내잖아요. 멀쩡하게 남편이 있어요.

그런데 군대장관이 다윗에게 귀순하면서 조건이 다윗의 전처 미갈을 데려오라 한 것이니까 귀순할 때의 자기 정치적입자를 계산해서 미갈의 남편보고 “가라! 돌아가!” 그 남편이 찔찔 울면서 “여보, 여보, 임아, 날 버리고 가지 마오.” 그런데 권력이 가라 가, 하니까 가버렸어요. 결혼해도 소용이 없어요.

다윗은 아비가일경우도 유부녀를 빼앗아서 자기 아내로 삼은 사람이에요. 이런 것은 결혼이라는 조건 자체가 생명을 충분히 다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다 아시는 이야기할게요. 룻은 모압나라에 이민 온 나오미의 두 아들 중 둘째 아들과 혼인을 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남편을 죽였습니다. 죽고 난 뒤에 시어미 나오미가 미안해서 “이제 너희도 팔자 고쳐야지. 우리가 잘못 선택해서 약속의 땅 버렸는데 너도 가거라. 아직 젊으니 팔자 더럽다 여기고 그냥 가버려.” 이렇게 하니까 룻은 “아닙니다. 어머니 나라에 가겠습니다.” 했다는 말이지요.

그 룻이 번식을 해요 아기를 낳는데 그 후손에서 다윗이 나옵니다.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룻이에요. 장차 이스라엘 왕을 탄생시킨 겁니다. 이것은 사랑이고 뭐고 그런 관계 아니에요. 하나님의 계약에 의한 겁니다. 하나님의 잉태치 못한 자가 잉태한 자보다 더 많이 잉태한 자를 제치고 잉태치 못한 자만이 갈 수 있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번식하는 아내의 기능을 하나님의 성도를 통해서 실시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약안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을 오늘날 신약에 적용시키면 뭐냐? 모든 성도가 주님의 신부로서 이 땅의 천국 백성을 주님에 의해서 잉태하는 그러한 기능 속에 놓여 있는 겁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이야기는 뭐냐? 주 안에 있는 아내 주안에 있는 남편에게만 하는 이야기에요.

따라서 사적인 우리 가정 행복하자, 싸우지 말고, 이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겁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고 하시면서 같은 축에 있는 이미 복종의 의미를 아는 주님과 같은 축에 맞물려 있는 우리는 육신적으로 내가 계속 살아 있거든요.

왜냐하면 우리육신이 하나의 단서기 때문에. 지옥갈 뻔 했다는 그걸 보여주는 단서가 우리 육신의 모습입니다. 나 중심의 사고방식이에요. 이것이 주 안에서, 성령에 의해서 계속해서 복종하라, 가 될 수 없는 육신과 복종하라, 를 요구하는 주님의 명령 사이에서 있는 나도 주님 안에서 갈아엎어 버리는 거예요. “네가 원래 나가 없어. 우리야. 나가 우리가 된 거야.”

그러나 우리는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우리가 되었다가 돌아서면 나가 되고, 또 주께서 우리되게 했다가 돌아서면 또 나가 되고, 이게 평생 육신이 남아 있는 한 계속 되는 거예요. 남편한테 복종해야 되는데 복종하고 난 뒤에 ‘나는 복종했는데 너는 나한테 해준거 뭐 있는데? 더 이상 복종하기 싫어.’ 이런 자기중심으로 또 낌새가 드러나는데 그런 자아를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그건 단서니까.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다는 단서가 자신의 복종 되지 않음을 확인하면 할수록 고마움과 감사가 계속해서 나오는 거예요. 성도 간에 너와 나 사이, 아내와 남편 사이는 죽음을 매개로 해서 계속해서 같이 살아야 돼요. 죽음을 매개로.

아내가 남편에게 “나는 당신의 육신적인 아내로서 나는 죽었다. 나는 영적인 복음안에서 아내기 때문에 당신에게 복종한다.” 그 소리 듣고 남편이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면 안 되고 “나는 당신 앞에 육적인 남편은 죽었어. 나 같은 것이 당신에게 대접받는데 당신은 나에게 과분한 여자야. 나는 그렇게 죄인이야.”라고 그렇게 하다가도 좀 조금 양말 왜 뒤집어서 안 놓나, 그 말 듣고는 다 깨집니다.

‘너 나에게 해준 것 뭐 있나? 사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것도 사랑이냐? 결혼하기 전까지는 나에게 다 해준다 해놓고 이것도 생색내는 거야?’ 이런 식으로 하지요. 그것은 왜 그러냐? 각자 나는 위험하니까. 위험해요.

잦은 실수와 잦은 이별 그래도 항상 거기 있으니까. 주님이. 주안에 있으니까 잦은 실수와 잦은 이별에도 우리는 늘 주님께 감사할 것밖에 없는 그 기능, 아내 기능, 어설퍼도 남편 기능, 어설프더라도 그 어설픔 중에서 주께서 이 남편과 용서와 그리고 복종을 이 주님 안에 있는 계약안에서 이미 완성이 되었다는 것을 누누이 날마다 느끼시기 바랍니다.그래서 나의 구원이 아니고 피의 구원, 주님의 구원을 우리의 기능을 통해서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없는 상태에서 나의 구원이 따로 있을 수 없고, 있다면 우리의 구원밖에 없는데 왜 나의 구원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고 왜 나의 행복은 용납하지 않는지 생명나무와 관련해서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만 신랑으로 여기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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