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개
2021년 8월 8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4:4-6
(4:4)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4:5)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비밀의 비밀성이 와해되면 안됩니다. 인간들의 기대와 소망에 부응해서도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와 인간의 세계가 별개라는 점이 유지되어야지만 비밀이 비밀답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비밀이 이 땅에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20:27-29에 보면,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통해서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십니다. 철저하게 예수님을 탐색하겠다는 도마는 직접 자기 손가락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창에 찔린 그 당사자임을 확인하겠다고 나섭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의 손가락이 자신의 부활의 신체에 접촉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인간의 신체성은 예수님의 부활체와 접속이 가능한 바가 되었습니다. 단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신체로서 교류가 가능해진 겁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제부터 주님의 일은 ‘보지 않는 세계의’등장으로 진행하시는 겁니다.
이럴 때, 비빌이 비밀답게 전개되는 겁니다. 이 ‘보이지 않는 세계’의 활동은, 인간이 자신을 바라볼 때, 보이는 대상이라는 생각하는 점에서 큰 훼방요소를 인간세계에 안기는 바가 됩니다. 즉 인간 세계는 보이는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서 보이는데까지만 나아갑니다. 더는 못나아갑니다.
이렇게 되니 ‘그리스도의 비밀’은 여전히 인간 세계에 ‘비밀답게’ 작동하는 바가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백성들을 어떻게 활용하시는 겁니까? 그들의 자아성을 보이는 신체에 두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부활에 두는 새로운 자아성을 만들어내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본격적으로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보이는 세계에 비밀을 나타내시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세계는 보이는 인간쪽으로 포착되거나 붙잡아 둘 수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일종의 실종되시는 겁니다. 따라서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 부활의 세계이기에 이 세계의 일을 하는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보이지 않는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즉 주님은 자기 백성들을 ‘그리스도 비밀’을 알리시는 매개로 사용하여 ‘보이는 세계’의 관점에서 평가할 만한 것이 없게 만들어버리십니다. ‘보이는 세계’에서는 ‘보이는 자신의 신체’가 출발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보이는 신체’로 인하여 인간은 본인을 본인에게 마지막 남은 가치로 여기게 됩니다.
부활의 세계가 우선인지 아니면 눈에 보이는 자기 자신이 우선적인지 경쟁하게 만들어버리십니다. 그래야 비밀이 비밀답게 견지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올림픽 릴레이 경기에서 달리는 선수보다 바통이 중요한 이치와 같습니다. 아무리 빨리 결승선을 통과해도 바통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이 무효가 됩니다.
자기 자신보다 더 중요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달하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매개라는 것은 마치 공기와 같아서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공기가 있어야 상대방의 소리가 공기의 파장을 통해서 우리 귀까지 들어올 수가 있는 겁니다. 이처럼 성도는 있어도 없는 존재, 혹은 삭제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을 ‘소금’에 비유했습니다. 소금은 무기물입니다. 그러나 손님들은 무기물을 요리의 주된 요소로 먹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소금은 분명 음식 속에 들어가 있지만 요리를 끝낸 접시에서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다같이 골고루 녹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소금은 초라하고 보잘 것 없이 시시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마감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자신의 비밀을 지상에 남긴 바로 그 방식입니다. 눈에 보이는 요소가 미미하지만 그로 인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생이 택한 자들 속에 전달되게 됩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구약 때, 이런 예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었습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입니다. “불량자 두 사람을 그의 앞에 마주 앉히고 그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라 하였더라”(왕상 21:10) 나봇이 소유한 포도원으로 인해 나봇 본인이 살해당한 사건입니다.
옆에 살던 아합왕과 이세벨 부부가 나봇의 포도원이 탐이 나서 뺐을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나봇은 그 포도원이 자기 소유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소유임을 분명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율법의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정신이란, 아무 것도 아닌 자들에게 율법을 제공하고 그 제공된 율법으로 보호를 받는 식으로 하늘과 계약이 된 내용입니다.
이 계약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모든 땅은 하나님 소유이고 이 사실을 인정하는 조건 하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민족으로 등장한 겁니다. 하지만 분에 못이긴 이세벨은 남편을 꼬드겨서 기이어 나봇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차지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서 복수를 약속했습니다.
이것은 나봇의 복수가 아님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점을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율법 사건에 말려서 희생되었다고 해서 그 희생자 본인의 자존심과 가치를 회복시켜주시는 식으로 복수가 진행되는 것이 아닌 겁니다. 형에게 맞아 죽은 아벨은, 형에서 찾아든 하나님의 복수도 이미 아벨은 죽었기 때문을 들을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성도는 있으나 마나 하는 존재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결코 ‘자기를 위해 사는 자’기 되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나는 복수의 장면도 성도는 볼 권한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복수는 하나님이 율법차원에서 하나님에 대한 복수로 마감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비밀은 훼손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의 나의 솜씨보다 부활의 세계에서의 우리 자신의 기능에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0강-골 4장 4-6절(매개)210808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4장 4-6절입니다.
골로새서 4:4-6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사도바울은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비밀에 대해서 관심이 있습니다. 비밀, 그리스도라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 영원토록 비밀이어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그 말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지만 그 예수님이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비밀스러운 존재였습니다.
이 비밀스러움을 유지하는 것을 견지하자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비밀이었다면 오늘날 성도 성도라는 사람도 이 땅에서 비밀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 그게 마땅합니다. 그래서 이 비밀을 유지해줘야 오늘 본문에 나오는 5절의 ‘외인’이라는 그 개념이 성립이 돼요.
외인이라는 것은 불신자를 말합니다. 비밀 속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면 되겠습니다. 성도란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비밀을 비밀 되게 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불신자를 불신자로서 알아보는 안목을 지닌 자 이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게 능력이기도 하고요. 비밀을 비밀답게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야 되지 자기 위주로 산다고 비밀이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사 가운데 삼손이 있는데 자기 딴에 비밀이 있었어요. 힘의 출처는 본인만 알고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이 힘의 출처다. 그것은 본인만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구약의 때이기 때문에 인간의 그 나약함, 육적인 한계를 드러내서 여자 뭐 한 세 명 만나고 하더니만 홀라당 그 비밀을 몽땅 여자한테 주고 그 다음에 그 여자한테 찍혀가지고 자기가 눈알 뽑히고 목숨까지 달아난 경우가 있습니다.
이 말은 ‘삼손아, 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야. 네 속의 비밀이 너보다 더 중요해.’ 그런 것을 바로 사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성도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비밀, 이것은 황송스럽게도 쑥 들어온 거예요. 우리 안에 쑥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그 비밀이 오기 전까지는 너나 나나, 세상 사람이나 교회 다니나 안 다니나 똑같이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나보다 더 최후의 것은 없다. 그런 식으로 살아간 거지요. 비밀이 오기 전까지는.
이걸 간단하게 말해서는 이렇습니다. 나 자신이 마지막이다. 나 자신, 이 몸 하나 있는 게 마지막 남아 있는 것이다. 비장한 각오로 살아가지요, 인간은. 왜? 내가 마지막이니까요. 이름 지을 때 김 모, 이 모, 지을 것이 아니고 솔직하게 지으세요. 내 마지막, 김 마지막, 최 마지막, 박 마지막, 내가 마지막이에요. 마지막 의미에요. 나 없으면 모든 의미가 없다면 나 없으면 하나님이고 예수고 그것도 의미가 같이 없어지는 것, 그런 식으로 우리는 하나님마저 나에게 길들여지는 식으로 교회 다니면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나 하나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 나 좀 지켜 주소.’ 그런 식으로 교회 다닌 거지요.
나 하나, 내가 마지막이니까, 주님이 마지막이 아니고 내가 마지막이니까. “마지막에 주님이 있고 나 있는데 누구 선택할래?” 나는 나를 선택하게 되어 있어요. 왜? 내가 마지막이니까. 마지막에 내가 잃어버릴 그 시점에 오면 나를 지키기 위해서 주님마저 아낌없이 버리지요. 인간이 자기에 대해서 안다, 내가 세상을, 뭘 보고 있다, 내가 이 정도로 세상 안다, 하는 것은 자신이 좌초하는 마지막 직전까지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그걸 넘어버리면 내가 좌초하거든요. 내가 무너지거든요. 그러니까 무너지기 직전까지 어쨌든간에 나를 붙들어야 된다고요. 어쨌든간에. 이것이 아주 절실하게 표현된 노래가 있어요. 초반부터 유행가 하나 깔고 가실 게요. 현철이도 부르고 나훈아가 불렀던 <청춘을 돌려다오> 무대 바닥을 손바닥으로 치면서 “청춘을 돌려다오~” 이거 절규 아닙니까? 온 천지가 다 무너져요. 나이들면 전립선부터, 어깨, 기억력 다 무너져요.
인간의 지난날은 죽은 시간의 지층들을 쌓아놓은 거예요. 차곡차곡 다 사라질 것들을 계속해서 기억 속에, 기억창고에 쌓아두고 있었던 겁니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 하면, 내가 마지막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거울 앞에 비추인 내 모습, 거울 앞에 비추인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내가 건질 마지막 임무 같은 어떤 미션 임파서블, 내가 나에게 충실한 이것이 마지막 남은 임무 같아요. 인생은 그런 것 같아요. 나에 대해 충실하기 끝.
그래서 이것은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비밀, 그따위 것, 그따위 것은 필요치 않아요. 나를 살려줄 때만 우리는 슬쩍 비밀이라고 간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우리의 본성을 향하여 강하게 이야기합니다. “너의 임무는 비밀을 비밀 되게 하라.”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알 수 없는 것을 사람의 능력으로 알 수 없게 유지를 해줘라, 그걸 알려주려고 애쓰지 마라, 이 비밀의 열쇠를 풀려고 하지 마라, 그겁니다.
식구 가운데 자기만 성령 받아서 자기만 예수 믿었을 때에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내 식구니까, 내가 사랑하는 자식이고 아내고 남편이기 때문에, 우리 부모기 때문에 저들도 같이 예수 믿고 천당 가면 얼마나 좋겠노, 라는 순수한 인간의 정에 못 이겨서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 좋은 것 나만 누리면 안되지, 라고 애를 쓸 때 인간은 거기에 뭘 가미하게 되느냐? 비밀을 비밀로 유지를 못하고 거기에 인간들이 이렇게 하면 이런 좋은 점이 있단다, 라고 사람들의 육적인 이익되는 것을 거기에 섞어버려요.
섞어버리게 되면 성령 받은 본인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했는데 듣는 사람은 이렇게 오해를 합니다. ‘아, 예수님의 복음을 들으면 그렇잖아도 내가 나를 지키려고 나를 귀한 존재로 봤는데 거기다가 복음까지 추가해 버리면 나는 더욱더 괜찮은 존재로 탈바꿈하게 되는 멋진 기회를 갖게 되는구나. 야, 좋으신 하나님’ 이런 식으로 곡해를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그 비밀로 인하여 돌아가셨거든요. 십자가에 죽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렇게 훌륭한 주님을 사람들이 죽일 리가 있겠어? 그 당시 사람들이 너무 성질이 못돼서 그렇지. 제대로 예수님을 알면 누가 죽이겠어?’라고 일방적인 선악 체제에서나 통하는 상식이나 교양에서 통하는 그런 예수라고 곡해를 하고 오해를 하게 되는 거예요. 이 비밀은 흐지부지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비밀 유지하는 방법을 제자들에게 알려줬어요. 그게 요한복음 20장에 나옵니다. 20장 27절에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아,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도마의 존재를 묵살시키고 박살냅니다. 그냥 눈이 있잖아요. “도마야, 네 눈에 누가 보이느냐?” “예수님이 보입니다.” “나 이렇게 부활했다.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잖아.” 충분히 이럴 수도 있는 문제에요. 눈에 보이는대로 보이는게 다야, 라고 할 수도 있는데 주님께서는 인간의 눈의 한계를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보는 것이 전부니까요.
인간이 전부라고 여겼던 그 보는 것이 너를 어떻게 속아 넘기고 있느냐, 너를 어떻게 비밀로부터 차단 시키느냐를 알려주기 위해서 손을 가지고 주님께서 자기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하십니다. 보는 것 말고 손을 직접 넣어서 만져 봐라, 해서 넣어봤습니다. 순간 도마의 육신과 예수님의 부활의 육신이 결합이 되었어요. 연결이 되고 말았습니다. 둘 중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의 매체 매개가 되는 겁니다.
매개라는 말이 참 어려워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소리를 내도 매개가 없으면 그 소 리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아요. 공기가 매개가 되어서 소리는 공기의 파동에 의해서 인간의 귀청을 두드려서 그것이 두뇌에서 해석하게 되어 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때 그 공기,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 그게 바로 매개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주님의 매개가 되려면 성도 본인이 보고 있는 나를 빼놓고 보이지 않는 매개로서의 나로 새롭게 만들어지고 생겨나야 돼요. 이 말이 너무 어려워서 설교 진도 나가기를 주저하게 됩니다. 거울에 비추인 나 말고 주님의 비밀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의 나가 새롭게 생성되어야 된다 그 말입니다.
그 새로운 나는 어디서 생성되는가? 눈에, 거울 앞에 비추인 나를 죽은 자, 죽은시체로 간주해주시는 능력에 의해서만 눈에 보이는 나 말고 따로 존재하는 나가 새로 생성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해야 될 일이었어요. “어, 예수님 부활했네. 보이네.” 보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늘 보이게 하지 않고 예수님은 실종상태에 돌입해버려요. 죽었는데 죽었다는 분이 나타났어요. 나타났으면 제자들 입장에서는 늘 보였으면 좋겠어요.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항상 보였던 것처럼 그렇게 눈에 보였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부활하고 난 뒤에 그 상황은 어떤 상황이냐 하면, 봤지, 딱 세 번 보여주고 끝내버렸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여러번 보여준 경우도 있지만.
사도바울에게도 보여줬지만 종잡을 수가 없어요. 이것은 늘 보이면 늘 거기 있다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두 눈 가지고 보고 있는 이 세상 자체가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로 그게 환상이고 망상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보고 있으니까 망상이라는 거지요.
“보고 있는 세상 속에 네가 보이지?” 그러니까 너도 망상 중의 하나라는 겁니다. “네가 죽은 자인데 네가 거울 앞에 꺼떡거리고 지금 말하고 그런다고 해서 네가 산자라고 생각하는 그게 네 인식의 한계야.” 그게 네가 알고 있는 전부라 그 말이지요. 그게 바로 불신자에요. 그게 불신자라고요. 교회 나와도 불신자 못되어서 환장을 했어요. 그러니까 불신자를 너무 부러워해요.
헐한 아파트 사서 비싼 값에 넘겨서 5억 남겼다 하면 그게 그렇게도 부럽고요. 결혼한 아들 집 못 사줘서 환장했고요. 불신자들의 사고방식은 그거예요. 있으니까 있음이, 마지막 있음이니까 나라는 이 있음이 죽기 전에 내 자식한테 집 한 채 사줘야 부모로서 노릇 잘했다는 그 자존심 하나 챙기고 싶은 거예요. 아직까지 안 죽었으니까, 있으니까.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없다고 이야기해요. 그 있는 것은 오히려 그 망상을 더 유지시키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비밀을 훼방하는 겁니다. ‘나는 마지막이다. 마지막이니 멋있게 보내야지’ 이러거든요. 어떤 코미디가 있어요. 사형수인데 집행관이 “이제 사형당하기 전에 마지막 소원 하나 들어줄 게. 죄지어서 사형 당하는 입장에서 마지막 소원을 들어줄 게. 뭘 하고 싶으냐?”
사형수가 하는 말이 “커피 한잔 먹고 싶어요.” 그래서 따뜻한 커피 한 잔 시켜 줬거든요. 그런데 1 시간 20분이 지나도 커피를 마시지를 않아요. “왜 안 먹는가?” “커피가 식어야 먹지요.” 이게 뭐냐 하면, 죽기 싫은 거예요. 계속 시간만 지연하는 거예요. 꼭 인간사 같아요. 벌써 죽는 게 확정되었거든요. 인간은 죽는 게 확정되었어요. 육이기 때문에.
확정되었는데 ‘에이, 마지막인데, 마지막 생인데 거하게 해야지. 마지막인데 제대로 해야지.’ 총각으로 마지막인데 총각파티 열 듯이, 군대 가면 맛있는 것 못 먹고 놀지도 못하니까 나이트클럽에 가듯이, 맨날 마지막이래, 맨날 마지막. 식구하고 놀러 가는 것도 마지막, 맨날 마지막이래.
우리 마지막 아닙니다. 없어요. 소실 되었어요. 주님 보시기에. 왜냐하면 비밀이 들어 있지 않은 자는 있어도 없음으로 간주되는 겁니다. 인간은 이걸 수용을 못하기 때문에 주님 쪽에서 부활 세계를 만들어버렸어요. 이번 수련회에 율법 세계가 나오듯이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부활 세계를 이야기해요.
부활 세계는요, 주님께서 보여줄까, 이런 식으로 보여줄 때만 나타나고 안 그러면 실종상태에요. 살아계셨는데 어디 있는지를 몰라요. 그래서 비밀다워요. 우리가 우리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이 비밀답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허망한 망상 세계에 놓여 있기에 그런 겁니다. 그리스도의 비밀과 상관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나는 여기 항상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여기 있으니까 그저 있는 것이 아니고 이가 아프다든지, 갑자기 암이 걸렸다든지, 머리가 아프다든지, 머리가 빠진다든지, 자식이 애를 먹인다든지, 있으니까 줄줄이 파생되어 나가는 여러 가지 고민과 걱정거리가 늘어지는 거예요. 기본적으로 근본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우리가 파악을 못하고 있습니다. 불신자에요 불신자. 여기 5절에 나오는 외인들.
그래서 예수님이 하는 말이 요한복음 20장 28절에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니까 29절에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이 말씀은 이제부터 예수님께서 활동을 하실 때 보지 못하는 식으로 활동한다는 것을 미리 제자들에게 알려준 거예요. 보는 세계에 대해서 네가 이제는 미련을 두지 말라는 거예요. 보이는 세계, 올림픽 메달 몇 개 땄나, 다음 대선에 누가 되느냐, 이 보이는 세계에 미련 두지 말라는거예요.
그 보이는 세계에 계속 애착과 미련을 갖고 있게 만든 요인이 누구냐 하면, 본인, 우리 당사자예요. 나는 나를 지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바울이 “기도해라. 그리스도의 비밀을 지켜야 돼. 너를 지키면 안 돼. 왜? 너는 매개자니까.” 매개자, 공기가 눈에 안 보이잖아요. 말씀하고 통하지요. 보이지 않는 것이 중간에 걸쳐 있기 때문에 소리가 들리듯이 그리스도의 비밀은 성도를 통해서 계속 나타나게 하는 이것이 부활체계, 새로운 부활세계, 주께서 만드신 부활의 세계, 그리고 그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올림픽을 통해서 우리가 교훈 얻을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4백 미터 릴레이. 부지런히 선수들이 총알같이 달리지요. 백 미터씩 잘라서 달리지요. 그런데 그 주인공은 바통 자체가 주인공이에요.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라 바통이 주인공이에요. 바통 놓치면 먼저 가도 소용없어요. 바통 어디 있냐 물으면 “중간에 떨어졌어요.” 게임 오버, 끝났어요. 그것은 탈락이에요.
부활의 세계는 그리스도의 비밀이, 그리스도존재가 그게 바통이에요. 그것 없으면 하늘나라하고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뭐가 중요한지 뭐가 안 중요한지 분간 안 돼요? 분간 언제까지 못할 거예요. 정말 분간 안 할 겁니까? 비밀을 비밀답게 유지하기 위해서 주께서 당부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어보세요. “네가 보고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자가 복되도다. 이제부터 모든 일은 이제 보지 않는 식으로 밀어 붙일거야. 왜? 그래야 비밀이 비밀 답게 되기 때문에.”
불신자들은 대략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식구들을 꾀어서 교회 와야 되는데 이 식구들이 불신자라. 자기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자기 이익이 되는 눈에 보이는 그 성과를 자기에게 달라는 거예요. 그거 주면 교회 다닐 게. 이런 겁니다. 기도해서 병이 나았네, 기도해서 취직 잘되고, 기도해서 배우자 잘 만나면 아, 하나님 살아계시는구나, 하고 그때 교회 나가겠다는 거예요. 자꾸 보이는 것을 달라는 거예요. 보이는 어떤 결과, 성과물, 그게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그걸 노리고 기도하고요.
그렇게 되니까 주님의 십자가 부활의 복음이 먹히지를 않잖아요. 안 먹히면 제대로 전한 줄로 알면 되는데 잘 안 먹혔다고 누가 불안하고 초조하냐 하면, 내가 믿음이 없냐, 하고 쓸데없이 자기반성에 나서요. 부활이라는 것이 참, 부활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소위 신자라고 여기는 사람에게도 심리적 큰 압박감이 되는 겁니다. 이 부활이라는 게!
부활이라는 것은 바로 사람들에게 있지도 않은 자거든요. 인간세계에는 없어요. 부활 되었으니까 없는 세계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나는 아직은 여기 있습니다. 아직은 여기 있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여기 있다는 나의 입장에서 어느 것이 우선이냐 하면, 있지도 않은 세계가 우선이 될 수가 없어요. 항상 여기 있는 나부터 우선이 되는 겁니다.
이왕 어려운 것 좀 더 어렵게 하겠습니다. 할 수밖에 없어요. 쉽게 할 수가 없어요. 열왕기상 21장에 나봇이라는 사람이 자기 포도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포도원을 잘 가꿨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나봇은 이 포도원을 자기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유산으로 상속분으로 본 거예요. 소유권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있는 겁니다.
이게 율법적으로 맞는 이야기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을 차지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용사가 되셔서 홀로 싸워서 그 땅을 다 차지하게 하셨어요. 이것은 그리스도의 비밀이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뭐했냐? 들러니냐? 그들은 하나의 매개자였습니다. 매개자, 매개, 또 나오지요.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인간을 매개자로 사용해서 인간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를 형성한 것, 그것이 율법의 세계고 그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불신자, 이방민족과 다른 방식의 사고를 했어야 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이 모든 땅에는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법이 살아 있다는 것, 이것을 늘 느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아스팔트 막 포장해서 아직 선도 긋기 전의 상태를 보신 적이 있지요. 막 깔아놓은 아스팔트는 새까맣고 거기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을 보신 적 있지요. 다 아시면서.
그 아스팔트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듯이 내가 딛고 선 여기에서 율법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법이. 그 법이 어떤 법이냐? 거룩한 법이에요. 그러면 그 전쟁을 누구하고 했는가? 거룩한 하나님이 더럽기 짝이 없는 인간 세상, 세속적인 인간 세상을 향하여 승리했다는 그 결과물로 생긴 그 땅을 이스라엘사람 앞앞에 나눠준 거예요. 그게 상속분이라, 기업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을 했어요. 이 땅은 하나님께서 홀로, 주님께서 홀로,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홀로 하나님의 율법을 이루어서 거룩을 거룩되게 해서 이 땅을 거룩한 땅으로 만들었다, 라는 그러한 생각이 있는 사람에게는 내가 너를 이 땅에 보호해 줄게. 그게 약속이라는 겁니다. 구약의 언약이라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은, ‘아이고 뭐 챙겨주시는데 그걸 못 믿을까. 일단 챙기고 보자.’ 하고 “예, 얼마든지 하나님 땅으로 제가 생각하겠습니다.” 자신만만하게 그 땅을 접수했지요. 그 땅 중의 하나가 나봇의 포도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우선적으로 내가 살아 있다, 하는 그 순간 내가 제일 중요한 순간, 이제 그 땅은 하나님의 땅이 아니고, 은혜로 준 땅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평생토록 노력해서 얻은 내 것이라고, 내 아파트, 내 자식 키우는 것, 내 부동산, 내 은행 잔고, 전부 다 이것은 내가 노력해서 내가 애써서 세상에서 더럽게 살면서 지저분하게 살면서 얻어낸 나의 노력이라고 자기에게 다 넘겨서 인수해버렸어요.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봇에게 모독적인 말을 합니다. 나봇 옆집에 누가 살았느냐 하면, 아합왕이 살았어요. 왕이 나봇에게 무슨 모독적인 말을 했느냐? 제가 이렇게 말을 해도 이게 과연 모독적인 말인지 잘 구분도 안 되겠지만 모독적인 말을 했어요. “지금 그 땅 시세보다 돈 많이많이 쳐 줄 테니까 왕인 나에게 팔아라.”
이것이 세상 사람한테는 전혀 모독적인 것이 아니고 찬스가 온 거예요. ‘옆집에 왕이 살아서 갑자기 내가 횡재하는 수가 생겼네.’ 이렇게 좋아할 것인데 나봇한테는 이게 치명적인 모독이에요. 이게 내 것 같으면 내가 팔아넘길 수가 있는데 이게 내 것이 아니에요. 죽은 나의 생명을, 죽은 나의 목숨을 살게 하신 그 증거가 바로 이 포도원이에요.
비록 사람들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지 않는 그 약속에 의해서 시체 같은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생명을 얻은 거예요. 이것은 내 새 생명에 대한 모독입니다. 나봇이 이야기했지요. “이것은 내것 같으면 파는데 내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못팝니다.”라고 나가니까 아합왕이 상당히 당황했어요.
‘왕을 쪼다로 보는구나.’ 이런 식으로 여겨서 당황하니까 그 마누라 이세벨, 이방 여자거든요, 이세벨이 “당신이 왕으로서 가오가 있지 왕이 되어서 그 땅 하나 안판다고 해서 그렇게 당황합니까? 이대로 가만 있으면 세상이 당신 왕으로 안 봐요. 우습게 본다고요. 이참에 왕이 얼마나 무섭다는 본때를 보여야 합니다.” 해서 나봇이 왕을 모함했다 해서 나봇을 돌로 쳐죽이게 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대목, 돌로 쳐 죽였다는 이 대목이 아니에요. 엘리야를 통해서 이세벨이 나중에 어떻게 죽는다는 사실이 열왕기상 21장 19절에 나옵니다. “너는 저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하셨다 하고 또 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하라.” 그것이 열왕기하 9장 34-37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후가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가로되 가서 이 저주 받은 계집을 찾아 장사하라 저는 왕의 딸이니라 하매 가서 장사하려 한즉 그 두골과 발과 손바닥 외에는 찾지 못한지라 돌아와서 고한대 예후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그 종 디셉 사람 엘리야로 말씀하신바라 이르시기를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고기를 먹을찌라 그 시체가 이스르엘 토지에서 거름 같이 밭 면에 있으리니 이것이 이세벨이라고 가리켜 말하지 못하게 되리라 하셨느니라.”
두골과 발과 손바닥 외에는 이세벨의 시체를 찾지 못했습니다. 나봇의 보호자 하나님의 참혹한 복수가 일어난 거예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 아니에요. 그 복수를 하실 때 피해 입은 나봇 당사자는 이미 죽었다는 사실, 그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당하기는 나봇이 당했는데 이미 나봇이 죽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나봇의 원수를 갚아 준 거예요.
그 때 나봇은 얻는 게 뭡니까? 아무것도 얻는 게 없어요. 아벨이 형에게 죽었잖아요.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복수를 가인에게 찾아와서 하셨습니다. “네가 왜 억울한 피를 흘리게 했느냐? 그 핏소리가 하늘까지 도달했다. 너는 이제 고생해라.” 했을 때 거기에 정작 피해 입은 당사자 아벨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해요.
왜? 이미 죽었으니까. 시원한 복수극, 시원한 장면, 나 건드리면 이렇게 되는 것 알았지, 그런 시원한 장면을 당사자 아벨은 못 봤어요. 볼 수가 없어요. 이미 죽어버렸어요. 그리고 나봇도 이미 죽어 버렸어요. 신나는 복수극을 관람할 수가 없습니다. 이 점이 바로 부활의 세계입니다.
부활의 세계는, 나 건드리면 죽인다, 는 죽는다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도 부활의 세계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십자가를 거치지 않으면 부활의 세계에 들어올 수가 없기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마지막이라고요? 그 마지막을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같이 처리해 버렸어요.
“이제는 네가 마지막이라는 소리를 두 번 다시 하지 마. 나는 네 육신을 시체로 처리하겠다.쓰레기로 처리하겠다. 중요한 것은 그 쓰레기 같은 눈에 보이는 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야. 너는 그 십자가의 죽고 남아 있는 육신 가지고 뭔가 전달해야 될 기능과 임무와 사명이 있”어요. 쓰레기 같은 이 육신을 가지고 뭔가 전해야 돼요. 매개자 역할을 해야 된다고요.
그게 그리스도의 비밀이라는 거예요. 사도는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는 지금 그리스도의 비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죽여라. 나를, 날 죽여라. 나는 소원이 죽는 거다. 됐냐?” 이런 식이에요.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잘되는가가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오고, 그리스도의 비밀이 나오는 것, 십자가 비밀이 나오는 게 그게 주께서 나를 이미 건져냈다는 증거 아닙니까?
다른 증거 뭐 있어요? 믿습니다, 가 증거 아니에요. 기도했더니만 땅 샀다. 그게 증거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2장 4, 5절에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사도바울은 이 능력이라는 말을 하면서 고린도전서 2장에서 뭐부터 이야기하느냐 하면 바로 2장 2절을 먼저 언급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사도바울은 자신의 육을 주님의 십자가에서 어떻게 벌써 처리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나의 육신, 얼마 안 가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육신을 주님께서 미리 앞당겨서 십자가와 더불어서 함께 죽게 한 이유를 알았어요. 그게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세계, 부활의 세계로 주님께서 일단 사도바울을 거기에 이동시킨 겁니다.
불신자의 특징은 뭐냐? 새로운 진짜 자기로 이동하는 이동공간이 없다는 게 불신자의 특징입니다. 사나 죽으나 눈에 보이는 내 몸뚱아리가 전부에요. 이거 없어지면 끝나는 거예요. 내가 마지막이니까. 그래서 죽든 살든 막 이걸 붙들어야 돼요. 어떤 수를 쓰든지 나를 붙들어야 돼요. 기도하든지, 교회 와서 헌금을 하든지, 집사 직분을 맡든지, 예수를 믿든지, 나를 안 버리는 조치로서 예수 믿고자 하는게 불신자에요.
그러나 신자는 뭐냐 하면, 주께서 허락도 없이 나를 이미 버렸기 때문에 주의 능력이 뭐냐? “내가 어떻게 하면 나를 주께서 버리는 것으로 확인시킬 수 있습니까?” 이게 말의 능력입니다. “나는 이미 버렸습니다.” 그걸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소금이라고 표현한 거예요. 소금은 뭐냐? 이런 뜻입니다. 소금은 초라하다, 미미하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어떤 유기체 속에 들어가서 무기물로 사라져 버려라. 이게 소금이에요. 사라져 버려라.
오늘 본문 골로새서 4장 6절에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seasoned with salt,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말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에서 나오고요. 존재는 말로 통해서 그 존재를 확인하게 되어 있어요.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은 내가 이런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 말, 이야기할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은혜 가운데 소금으로 고르게 함과 같다. 소금으로 고르게 한다는 말은, 이걸 다른 번역에서는 소금으로 맛을 내라, 그렇게 했는데 그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고르게 한다는 말은 실제로 사도바울이 요리하는 비유를 든 취지를 살려 줘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요리 레시피 하나 가져왔어요. 냉동 낙지 1킬로짜리 먹기 좋도록 자릅니다. 해동하는 데는 밀가루나 굵은 소금을 뿌리면 깨끗해집니다. 살짝 얼어 있는 것을 가위로 자르고 양파, 당근, 대파, 홍초, 미나리, 깻잎을 넣습니다.
그다음 팬을 달굽니다. 지금 뭐 하고 있느냐 하면, 낙지볶음 하고 있습니다. 데치는데 물 조금 나오는 것은 괜찮습니다. 맛술 조금 넣고, 다음에 낙지 꼬리 부분 잘라주고, 고춧가루 한 스푼 넣고, 고추장은 쓰지 않습니다. 그다음 진간장 석 잔, 식용유 한잔, 물엿 석 잔, 설탕 한 스푼, 후추 일곱 번 뿌리고, 마늘 1과 2분지 1, 생강 1스푼, 굴소스 약간 넣어 자글자글 볶아 줍니다.
낙지는 야채 부터 볶아줍니다. 오징어는 야채를 나중에 볶지만 낙지는 야채부터 먼저 볶습니다. 그렇게 야채를 먼저 숨죽여서 볶아주고 낙지를 넣고 참기름을 넣습니다. 참기름을 넣게 되면 낙지가 쫀득해지면서 윤기가 나면 먹으면 됩니다.
자, 이 요리를 하면서 소금은 어디로 갔습니까? 소금이 눈에 보이지를 않지요. 왜? 골고루 녹아졌으니까. 주님은 우리를 보고 너는 소금이 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너는 빛과 소금이라. 아무것도 아닌 존재, 대단치 않은 존재, 미미한 존재, 주님이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성령의 능력이라는 겁니다. 말을 할 때 이 능력으로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어떤 말을 할 때 남을 가르칠 생각하지 말고, 어떤 성과 내려 하지 말고, 복음 전해서 저 사람 예수 믿어서 몇 명 전도했다, 그 따위 소리 하지 말고요. 사도바울이 말한 것은, 그냥 하나의 요리에서 너는 어느 대목이냐? 소금 대목이 너에게 딱 적절하다는 거예요. 소금이 딱 적절해요. 그 대목에서.
그 소금이라는 것, 흔하디흔한 거거든요. 물론 돈 주고 사려면 비싸지만. 이게 초라한 겁니다.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눈에 보이는 것들은 다 더럽기 때문에 거룩한 주님 보시기에 인간은 더럽고 다 추잡해요. 소금 될 가치도 없어요. 초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초라함을 유지해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유지하는 오직 유일한 방법 그것밖에 없어요.
내가 초라한 모습을 견지하는 거예요. 처음처럼. 꼭 소주 이름 같아요. 처음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태어났다가 두 시간 살다가 죽어도 그만인 것처럼 우리는 무기물입니다. 우리는 유기물이 아니고 무기물이에요. 소금이에요. 내 감정 내세울 이유도 없고 내 자존심 내세울 권한도 없습니다. 내가 천당 갈 이유도 없어요.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누구 소관이냐? 그리스도 비밀의 소관입니다. 구원 문제에서 누구, 내 가족, 동생, 내 자식, 부모……,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거 내 소관아니에요. 내 소관아닙니다. 주께서 택한 백성 놓치지 않습니다. 실패 없습니다. 괜히 내가 나서서 걱정하지 마세요.
이왕이면 같이 예수 믿는 것이 좋지 않으냐? 이왕이면 같이 믿으면 좋지요. 그런데 같이 예수 믿어서 짝짝꿍 되었다. 뭘 원합니까? 덜 심심하거든요. 덜 심심한 것은 초라한 것이 아니지요. 외롭지 않은 것은 초라한 것이 아닙니다. 홀로 복음 알아서 홀로 심하게 외롭더라도 그것도 우리한테는 오감한(지나칠 정도라고 느낄 만큼 고맙다.)겁니다. 복음에 비하면.
더 외로워도 괜찮아요. 외로워도 슬퍼도~, 캔디는 달리잖아요. 메달 따지도 못했지만 하여간 씩씩하잖아요. 씩씩하게 달리잖아요. 매개니까,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그 말 이전에 4장 5절에 봅시다. “외인을 향하여는 지혜로 세월을 아끼라”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시간낭비하지 마라. 불신자한테 시간낭비 하지 말라는 겁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6절, 이런 것은 액자로 만들어서 아파트 현관 중앙에 걸만 합니다. 자식 사진만 걸지 말고 이런 것 걸어야 되는데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이 말은 뭐냐? 구원 문제, 구원의 소관은 매개인 네가 나설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네가 나대지 말라는 겁니다. 네가 나설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가 초라하고 아무것도 아닌 소금에 불과한데 왜 우리가 그렇게 급합니까? 저 사람은 꼭 내가 전도해서 구원해야 돼, 그런 고집은요, 그것은 불신자 고집이에요
전도하는 목적으로 결혼하는 사람도 있어요. 오직 전도할 목적으로. 미국에서 교육사업으로 돈 많이 벌었다는데 세 번째 결혼했는데 늙어빠진 개그맨하고 결혼했어요. 이런 말하기도 곤란합니다만 왜 했느냐? 전도하기 위해서. 전도하기 위해서 청춘을 바쳤어요. 아, 이거, 이거는요, 자기가 소금 아니에요. 자기 자존심이 살아 있는 겁니다.
주님의 이름을 빙자한 내 자존심, 나 이정도야, 이 정도 믿음있어, 그것 내세우는 자존심, 이거 소금 아닙니다. 이것은 흉내 낸 거예요. 참, 오늘 말씀 들으니 정말 복음 같지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러나 끊임없이 우리가 살아야 될 것은, 바로 인간인 내가 거울 보면 숨 쉬며 느껴지는 나이고, 또 땀 비질비질 나오는 나는 여전히 있잖아요.
이 있음을 어떻게 부정합니까 배고프면 밥 먹여 줘야 되지요, 피곤하면 누워 자야 돼요. 이게 있는데 이 있는 덩치를 어떻게 해요? 분명히 있는 것을 없다고 한다고요? 내가 미친 것 아니에요? 말도 안되잖아요. 처리해야 되지 않습니까? 이 있는 게 배고프니까 돈을 벌어야지요. 돈 버니까 힘이 들지요. 내가 힘들지요. 내가 힘드니까 보상받기를 원하는 거예요.
“열심히 일한 자여! 떠나라. 제주도로.” 그래서 제주도에 사람들이 다 모이는 거예요. 옛날 이런 연극이 있었어요. 여자가 나이 50에 바다를 보았다는 거예요. 50 될 때까지 가부장 가정에서 자식만 키우고 남편만 봉양하다가 ‘나도 이제 이짓 그만한다. 나도 자식 남편 위한다고 나를 위한 삶이 없었다. 나를 위한 삶이.’ 그러나 49과 50의 차이점이 뭔데요 그 차이가 없어요.
그들은 시간 낭비한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위한 삶이었기 때문에. 모든 평생을 아무리 길게 길게 끌어가도 딱 하나, 나를 위한 삶이었어요.
말씀은 바로 그걸 지적하는 거예요. 쓰레기 같은 우리가 처리 못하는 이 덩치, 분명히 땀 비질비질 나는 이 덩치, 어떻게 할까요? 주께서, 말씀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찾아와서 우리로 하여금 매개자 역할 하게 하기 위해서 ⓐ먼저 말씀으로 우리를 지적해요. 우리의 죄를.
그 지적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바로 네가 시간 속에서 계속해서 환상적인 미래의 이미지를 자꾸 그리고 있다는 것을 지적해요. ‘이렇게 하면, 내일 되면, 어떻게 되는데요? 이렇게 하면 한 달 뒤에 어떻게 되는데요?’ 계속 미래에 대해서 미련과 아쉬움을 못 버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한다, 하는 이런 것도 복음을 전할 때 다 노림수가 있었던 겁니다.
고린도전서 4장 19-21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가지고 매일같이 찾아오는 거예요. 네가 하나님 믿고 복음 안다, 하지만 그것은 말뿐이라는 거예요. 하늘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그 능력이 뭐냐? 네가 없는 식으로 살아가는, 소금처럼 있으나 마나 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그 능력,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은 나를 위함이 아니고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내게 주어졌다는 사실, 지난날 그렇게 고생하고 회사에서 그렇게 욕얻어먹고 돈벌이한 것, 그 상황마저도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매개자로 그 공장에서 막일하라고 투입시킨 거예요.
어떤 것 하나 주의 일에서 빠져나간 적이 없어요. 거기서 나간 적이 없어요. 다 주의 비밀 아래서 살아온 겁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자꾸만 잊어버려요. 부활의 세계가 생각나지 않고 내가 주인공이 된 세계가 이게 진짜 현실이라고 자꾸 느껴져요. 왜냐하면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어항 같은 세상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착각하게 만들고 그런 식으로 살게 하거든요.
아까 한 것 다시 말씀드립니다. 나봇이 포도원 팔라고 하는 그 이야기가 나봇에게는 왜 모독적인 말로 들리는가를 여러분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들 보기에 이 포도원이, 내가 땀 흘리며 수고한 이 포도원이 너희들 보기에 나 잘되라고 하는 내 것이라고 보이지? 그게 나한테는 모독이다.” 그 말이지요. “이 불신자들아, 너희들에게 시간을 때워? 시간이 아깝다. 세월이 아깝다.”라고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 사람이 불신자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는 접근해야 되고 말을 해 봐야 되지요. 그런데 불신자라고 확실히 느껴지게 되면 더이상 시간 낭비할 필요 없습니다. 시간이라는 것, 세월을 아끼라는 이 뜻은 뭐냐? 시간이 우리를 잡아먹거든요.
크로노스라는 신화에 보면 ‘고야’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에 크로노스가 아버지인데 아버지가 어떤 예언의 말, 자식이 당신의 권력을 부술 것입니다, 그 예언을 듣고서 자식들을 다 자기가 삼켜버려요. 고야라는 사람이 마지막에 자기 집에 칩거해서 그린 그림이 뭐냐 하면,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크로노스, 또 크로누스라고도 하는데 자기 자식을 뜯어먹는 거예요.
마치 오리같은 것을 머리채 뜯어먹는 그런 그림이에요. 이게 시간은 모든 것을 삼킨다는 겁니다. 인간세계에서도 그정도 지혜는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다 소멸한다는 그정도는 있지만 해답이 없어요.답이 없다고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주님의 부활의 세계가 이미 있어요. 대부분의 사람은 안 믿지요. 보이지 않으니까. 안 믿지만 사도바울이 말한 것은, 내가 말하는 것은 사람의 지혜가 아니고 성령의 능력이 함께 있다고 했어요. 성령의 능력이 함께 있으면 이것은 바로 십자가를 거쳐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부활의 세계에 들어오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이걸 영의 사람이라 하는 거예요. 영의 사람은 자기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매개물이에요. ‘나 잘남과 내가 이렇게 뛰어나고 이렇게 고생 많이 했다. 동정 좀 해줘.’ 나 자신의 가치를 전하는 매개가 아니라 난데없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하는 거예요. 그걸 실어나르는 릴레이 선수같은 존재가 바로 성도입니다. 바통이 중요해요. 말을 해도 툭 치면 복음이 나와 줘야 돼요. 그리스도 비밀이 나와줘야 됩니다.
그걸 알려면 왜 도대체 눈에 보이는 나, 마지막에 내가 지키고 싶은 그 나는 도대체 뭐냐, 이것도 같이 충실하게 알아야 돼요. 이것은 이미 잘 알지요. 그런 식으로 줄곧 살아왔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알아요. 알지만 이 권력과 욕망을 아무리 해도 이게 항상 사달이 나고 조금만 지나버리면 결핍을 느끼고 목말라요.
뭘 해도, 채워도 채워도 목마른 그 우물가 여인처럼 자꾸 뭔가 퍼 나르는데 이게 ⓐ해답이 없어요. 그런데 성도는 알아요. 아, 육을 지금까지 살려준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해답이 없으니까 해답 없는 그 쓰레기 같은 것을 가지고 왜 해답이 없느냐, 누가 해답이 없게 하셨느냐?
주님의 십자가가, 부활이 이제는 그만, 네가 너에게 그만 시달리라고, 네가 너에게 안 시달리는 그것이 바로 능력이라고, ⓑ이미 해답이 너에게 있다고, 바통처럼 너에게 이미 있음을 알려주는 기쁨을 은혜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피곤한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조금 참읍시다. 얼마 안 가서 우리는 주의 곁에 갑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지금 한, 50년만 참으시고, 또 40년만 참으시고, 그렇게 참으시면 백 살 넘습니다. 그렇게 되면 더 살고 싶어도 주께서 데려가 주시는 그 은혜, 그 때까지 그 바통 하나 놓치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는 게 정답이고 사는 게 해답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악마의 사주를 받은 불신자의 세계인 것을 저희가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자존심을 위해서 뭔가 복수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아예 하나님께서 복수할 거리조차 남기지 않는 그 고마움, 이제는 소금으로 이 세상에 녹아드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