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박
2021년 6월 27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3:15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사도 바울이 ‘평강’을 말하기 전에 이미 모든 인간들은 나름대로 ‘평강’, 혹은 ‘평화’을 추구해 보고 있습니다. 본능적입니다. 편하게 살고 싶은 겁니다. 그 누구로부터도 괴롭힘을 당하고 싶지 않는 겁니다. 특히 ‘평강’이란 감정적인 면이기에, 세상의 물질로부터도 초연해서 평강에 이를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인간들은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로부터 벗어나서 살아가는 것도 ‘평강’을 소지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간에 인간이 ‘평강’을 소지할 자격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보면, ‘평강’이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될 경우에만 주어지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 따로 산다든지, 홀로 사는 것을 통해서 평강을 획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이 아니라 그것은 저주의 양상입니다. 인간의 자기 관리에 불과합니다. ‘이래나 저래나 평화롭게 살면 그만이 아니냐’고 반항해보지만 문제는 하나님의 계약의 실제한다는 겁니다.
하늘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계약을 주시는 그 실현을 위하여 이 땅에 그분이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 계약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죄인과 함께 죽고, 죄인과 함께 살아라”입니다. 따라서 이 계약성사를 인간은 죄인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죄인이란 곧 ‘저주받을 죄인’을 말합니다.
결코 ‘평강’을 가질 권한이 없는 그런 존재로서의 죄인입니다. 그냥 자기 죄값으로 그냥 저주받아 죽어야 합니다. 바로 그런 죄인과 함께 하라는 것이 계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마 9:13)
예수님께서는 계약의 실무자이십니다. 사무적으로 처리합니다. 감정적이지 않습니다. 계약의 단호함을 그 어떤 경우에도 적용시키십니다. 이 계약 성취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친히 죄인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되니 자연적으로 예수님에게는 이 땅의 생활에서 지옥체험과 저주체험과 죄인이 당할 체험을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 예수님이 당하셨던 그 체험에 들어서게 된 자들이 바로 ‘계약 조건’에 부합되는 성도입니다. 이런 자만이 죽어도 다시 삽니다. 계약 내용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평강이란 결코 홀로 살면 안되고, 주님과 더불어 살면서 주님이 당했던 그 체험을 겪게 된다는 겁니다.
그 예가 사도행전 7:59-60과 8:1에 나옵니다. 그 차이점을 눈 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두 사람이 나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볼 때에, 스데반 집사는 홀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가 볼 때에, 사울이라는 사람은 저주 안에서 홀로 사는 사람임이 분명히 보고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더불어 있습니다. 이것이 ‘평강’입니다.
내가 만들어나가는 평강이 아니라 주님이 온전히 이룬 그 영생의 공간의 적용이 지상에서는 이런 지옥체험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마태복음 17장에서 세 명의 제자는 예수님과 더불어 변화산에 올라갑니다. 3+1로 여겼던 무리가 예수님께서 해같이 변화되고 난 뒤에는 3:3이 되었습니다.
즉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계약이 계약대로 되는 겁니다. 계약의 내용은 죄인들이 의인 한 분과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과 한 몸이 되지 못하는 죄인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를 독박 쓰는 겁니다. 이처럼 자기 백성을 홀로 놔두지 않고 죽이기 위해 찾아주시는 것이 복입니다.
누가복음 1:28에서,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을 임신한 엘리사벳이, 예수님을 임신한 마리아에게 문안 인사하는 대목입니다. 지금 마리아는 처녀입니다. 그런데 임신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즉 마링다는 지금 불가능을 임신한 겁니다. 이것이 세상 평판에 어떤 식으로 작용할 것인가는 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바로 그것은 복이요 그것이 평강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평강이란 이 세대에서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언약의 세계를 반영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이 세상이, 둘로 나뉘어지는 겁니다.
골로새서 3: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즉 진짜 나는 하나님께서 따로 이미 천국 안에서 챙겨놓으셨고 껍데기만 남은 가짜 나를 이 세상에 남겨두셨다는 겁니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근본 출처가 어디인가를 아는 기간이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약은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 구원될 자를 뽑아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원수, 악마의 자식 맞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원수’가 어떤 성경인지는 이미 우리 자신이 천국에 적을 두고서 남은 육신의 때를 통해서 절실하게 경험케 하게 하십니다.
왜 그래야 하며는 바로 계약의 완정, 즉 십자가의 공로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의 파도는 날마다 성도로 하여금 자신의 것을 없애고, 성도가 품고 있는 불가능한 계약 내용만 나타나게 해주십니다. 따라서 성도의 남은 인생의 취미는 ‘지옥체험’입니다. ‘망하는 체험’입니다.
이 체험 안에서 진정 성도가 감사할 것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이 죄인을 품어주신 예수님의 노력과 찾아주심에 감사하는 겁니다. 평강은 소유용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 자신이 이미 완성된 주님의 평강에 진입해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요나나 베드로처럼 홀로 살면 아니됩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 1:3)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를 자책하거나 자신을 우쭐대거나 그 어떤 경우라도 홀로 내버려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4강-골 3장 15절(독박)2106127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3장 15절입니다.
골로새서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성경에서 ‘평강’이라고 나왔을 때 이것이 구원이라는 것을 어떻게 대체하느냐? 갑자기 그 관련성에 대해서 뭔가 요구받게 됩니다. 평강이라 하는 것은 상당히 감정적인 요소입니다. 기분을 그냥 느끼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정서적인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 감정과 그리고 정서, 기분,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느 정도 우리 노력으로 그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라고 할 때 평강, 다른 말로는 평안함, 정서적인 안정감,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자기 마음이 굉장히 괜찮았을 때 기분 좋았을 때를 상상하게 되지요.
그리고 그것을 ‘그리스도의 평안’이라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상당히 간단한 문제고 늘 기분이 업되어서 살아가게 되면 이것이 주의 뜻을 이루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평강은 오늘 15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예수님과 한 몸으로 부르심을 입은 상태에서만 주어지는 평강입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그리스도 몸 따로 있고 내 몸 따로 있는 평강이 아니고 그리스도 몸과 내가 하나가 될 때 주어지는 평강이라면 그 평강은 딴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몸으로 오셔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고 들은 것 그리고 체험하신 그 체험에 같이 있을 때나 나올 수 있는 평강, 그 평강을 말합니다.
내 평강 따로, 평강이라는 것을 내 소지용으로서 따로 챙길 수가 없어요.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와 한 몸인 것이 증명되지 않습니다. 나타나지 않아요. 그리스도와 한 몸 되었을 때나 나올 수 있는 평강이라면 이것은 예수님께서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했던 그 체험과 동일한 체험을 할 때나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 평강이라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사도행전 7장 60절에 보게 되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사도행전 7장 56절부터 60절에 보면 스데반집사님이 돌에 맞는 장면, 돌에 맞아서 돌아가시는 장면 나옵니다. 59절에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돌로 쳐요. 고통을 줄이려고 전기의자에 앉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돌로 쳐요.
아프라고 치는 겁니다.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보기에 이게 굉장히 평강해 보이십니까? 굉장히 편안해 보이십니까? 돌에 맞은 거예요 돌에. 의식 못하도록 마취주사 맞고 자는 잠에 죽는 게 아니고 돌에 맞으면서 하는 말이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하는 겁니다.
스데반집사의 이 모습을 보고 누가 “아 나도 좀 저렇게 해줬으면 좋겠다. 돌로 좀 쳐줬으면 좋겠다. 나는 저 평강을 평소에 원했었어.” 이렇게 나옵니까? 다들 부러워해요, 이 사실을. 우리는 조용하게 살다가 그냥 조용하게 죽고 싶어요. 돌에 맞는 것도 아파서 싫어요. 살짝 째져도 환장하는 사람이 돌에 맞는 것 그걸 하나님의 평강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고요, 그다음에 나오는 게 8장이거든요. 8장 1절에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사도바울 되기 전의 사울이 갖고 있던 그 평강이 뭐냐? 그리고 지금 스데반 집사가 보여주는 이 평강과 어떤 차이가 나는가?
이 차이를 모르게 되면 골로새서 3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몸이 한 몸되면서 주어지는 평강에 대해서 우리는 전혀 모르게 되고 낯설게 되는 거예요. 인간은 근본적으로 평강을, 평화지요, 마음의 평화, 이걸 소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는 평화를 소지하는 것이 아니고 평화에 진입해요. 그 평화라는 영토 영역에 만들어지는 평화라는 영역에 들어가 있으니까 심지어 자기한테 돌로 치는 그 사람을 향하여 도리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끝까지 죽어가면서 기어이 한마디 하는 게 그겁니다.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저들의 죄’라고 했어요. 저들의 죄, 이게 얼마나 중요한 말이에요. 스데반 집사님은 그리스도의 한 몸이기 그리스도의 평안 가운데 그가 놓여 있습니다. 죽기 전에도 평소에도 놓여 있어요. 평소에 그리스도와 한몸에 있는 평안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이 사람이 이 세상 사람을 볼 때, 세상을 볼 때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 하면 죄, 이걸로 봐요.
저들의 죄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들이 나를 돌로 쳐서 죄가 아니라 그들은 내가 속해 있는 이 평안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한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그 자체가 저주인 겁니다. 심판이고. 그 점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다음에 나오는 8장 1절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지금 스데반 집사님은요, 지금 평안한 가운데 죽는 것도 아니에요.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지금 주무시러 간 거예요. 여러분, 집의 어른이 방에 주무시러 갈 때 ‘갔어. 오늘로 돌아가셨구나.’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평안히 주무세요.” 그렇게 하잖아요. “하루 종일 수고하셨으니까 밤에라도 좀 쉬셔야지요. 아이고, 참 다행입니다. 부러워라. 잠이 그렇게 온다니 부럽습니다.” 이렇게 부러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데 지금 사울은 그런 마음이 없어요.
‘아이고, 인간 말 한번 잘못해서 공개적으로 돌에 맞아서 처참하게 살 조각이 튀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죽는구나. 아이고, 나는 저렇게 안 돼야지. 나는 저렇게 되면 안 되지. 어디서 함부로 말을 그렇게 해? 저렇게 죽는 것이 마땅해.’라는 생각, 이 생각이 스데반 집사, 예수님 몸과 한 몸된 그 영역 안에서 볼 때는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평안 하려는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그걸 저는 이 한 몸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이렇게 설명 드리고 싶습니다. 한 몸은 하나님의 계약된 것이다. 하나님의 계약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한테 받아서, 다른 사람은 몰라요, 예수님만 알고 받아서 이 땅에 내려온 것이 있어요.
그게 계약, 언약인데 아버지한테 어떤 것을 받았느냐 하면, 죄인과 함께 죽고 죄인과 함께 살아라, 라는 조건 하에 계약을 받았습니다. 죄인과 함께 죽고 죄인과 함께 살아라. 이게 계약입니다. 그 계약이 계약대로 되려면 거기에 죄인이 죽는다는 것은 기정사실화 되어야 되고요.
뭐가 기정사실화 되지 않느냐 하면, 그 죽은 죄값으로 마땅히 죽어야 되고 마땅히 지옥 가야 될 죄인이 그리스도와 함께, 같이 부활된다는 이 조건은 비계약속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그것은 생판 ‘무슨 소리야? 그런 일도 있었어?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런 조건을 제시했어? 하나님이?’ 아 이것은요, 이것은 아빠 찬스, 엄마 찬스가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 찬스에요. 주님카드입니다. 계약카드에요.
계약 속에 인간이 죄에서 죽는 것은 당연한 거고요. 그것은 뭐 따질 것도 없이 당연한 거고, 그 죄인이 누구와 함께 했더니만 이게 부활이 되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 천국 간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거 처음 듣지요. 이거 처음 들어야 돼요. 이 이야기 처음 들어야 됩니다.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여야 돼요.
왜냐하면 비계약적, 다시 말해서 사울이 사도 되기 전에 갖고 있었던 그 세계에서의 평화라는 것, 평강이라는 것은 느낌적인 것, 느낌 문제이기 때문에 기분 문제에요. 감정 문제입니다. 비계약적인 평강은 개인이 그 평안함을 소지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마이애미 해변가 아파트 무너졌잖아요. 몇 명이 죽었는지 모르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사는 집, 팔공 보성 1차 무너졌습니까? 안 무너졌지요. 마이애미 아파트 무너져서 기분이 막 나쁘고 그런 것이 있어요? 안 나쁘지요. 내 아파트는 멀쩡하니까. 1층에 사는 사람들 주의해야 돼요. 12층부터 팬케이크처럼 다 눌러버릴 수가 있으니까. 하여튼 기분 안 나빠요. 왜냐하면 내 평안은 내가 알아서 챙기니까. 나는 평안을 소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울이 사도 되기 전에 예수님 만나기 전의 평안은 뭐냐 하면, 이 평온한 평화로운 기분은 내가 만들기 나름이라는 겁니다. 내가 내 기분의 밸런스를 평소에 내가 기술적으로 조정하게 되면 나는 내 평온은 알아서 형성시킬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기분 따라 사는 것인데 그 기분이 뭐냐?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사람은 내가 기분 좋으라고 살아가거든요.
그래서 요즘 젊은 애들이 돈만 벌면 집 살 생각 안 하고 차 바꿀 생각 한다고요. 차 바꿔서 고급 차 타고 돌아다니면서 순간적인 기분, 기쁨, 그게 평화입니다. 평강이에요. 그것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자, 비언약세계, 기분세계에서는 이것부터 알아야 돼요. 평강이 뭐냐 하면, 자기 눈에 뵈는 게 없을 때가 평강상태에요. 왜 높은 산에 올라가는가?
산에 가서 야호, 하고 불러봐야 ‘산 밑에 있는 너희들은 내 야호, 소리나 들어라. 내가 소리 지를 테니 일방적으로 내 야호, 소리나 들어’라는 그런 자기가 최고 자리에, 최정상 자리에 놓여 있다는 그 기분을 만끽하고 싶은 겁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직장에서 상사한테 치이니까요. 그렇게 내가 남에게 지시 명령하는 것은, 가지려고 하는 고만고만한 이 평강 마저도 이 사회가 작살 내거든요.
여기서 나오는 이 분노를 해소해야 되지 않습니까?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산에 가서 야호, 하고 내려와야지요. 잠시나마 나의 평강을 회복해야지요. 코로나 때문에 밖에 잘 못 나다니다가 그다음에 약간이나마 코로나 거리 두기 좀 해제되었다 싶으면 제일 먼저 가는 곳이 어디냐 하면, 백화점 가서 이쪽 손에 다섯 개 나머지 손에 다섯 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뭐 그런 거요, 그런 것 흉내 내면서 쇼핑으로 확 푸는 겁니다.
평강이란 뭐냐? 비언약세계, 비계약세계에서, 하나님의 계약이 없는 이 저주받은 죄만 가득한 이 세상에서의 평강은 뭐냐 하면, 오직 나만이 나에게 지시를 내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내가 나한테 지시 내리는 상태. 남자들이 군대 갔을 때, 민간인들은, 여자들, 군대 안간 국민들은 잘 몰라요, 군에서 잠자리나 먹을 것 잘 해주고 괴롭히지 말고 군대생활 잘 하도록 국방부에서 복지 잘 해줘라, 하는데 막상 군에 간 사람은요, 복지가 나빠서 군대생활이 나쁜 게 아니에요.
집에 가고 싶어요! 무조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집에 가고 싶어요. 군대 갔다 온 사람들 다 아시지요. 좀 더 잘해주고 특식 나온다고 해서 좋아하고 그런 것 없어요. 특식이고 뭐가 특식 말고 집에 보내주세요. 왜? 남이 나를 명령하기 때문에 그래요. 남이 나를 명령하기 때문에. 누가 나에게 명령하는 것이요, 기분상 더러워집니다. 기분 더럽다, 되고요. 내 감정적으로 평안이 안 돼요. 평강이 오지를 않아요.
결국 평강이란 뭐냐? 내가 주인의식을 유지하는 게 평강상태에요. 주인의식을 유지하는 것, 그걸 다른 말로 하면 홀로 살고 싶은 겁니다. 내가 최고 높은 자리에서 남들 내려다보면서, 내려다보는 그 최정점의 자리에 가서 내가 홀로 살고 있다는 이 의식이 있을 때만 우리는 제대로 된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누가 내 위에 있으면 평강스럽지가 않아요. 아파트 위층에서 층간소음이 있으면 우리가 평강하지를 못합니다. 위에서 담배 피우면 평온하지를 못해요. 그래서 회사 들어간 사람 빨리 나오고 싶고 더럽다고 사표 내고 치킨집 한다는데 치킨집은 아무나 합니까? 아무도 날 좀 명령 안 했으면 좋겠고 잔소리 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이미 인간은 이처럼 나름대로의 자기의 평강을, 기분 밸런스를 얻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 상태입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가 갖고 있는 평강은 어떤 평강이냐 하면, 홀로 느끼는 평강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느끼는 평강을 스데반 집사는 이런 식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저들은 저들이 죄 속에서 못 벗어나니 주여 저들을 용서해달라, 철딱서니 없는 것을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내용은 뭐냐 하면, 홀로 있는 평강을 가차 없이 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으로서 주어지는 상상도 못할 새로운 평강 속에 놓이는 것, 이것이 진짜……, 본문에 감사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제대로 된 영원한 감사가 된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평강은 뭐냐 하면, 계약에 의한 평강이에요. 계약에 의한 평강은 예수님이 이 땅에 죄인으로 오셔서 이 땅에서 처음으로 했던 그 지옥체험이 있어요. 죄 없으시지만 죄 있는 몸으로 오셨기 때문에 죄를 가진 인간들의 몸이 이 세상에서 어떤 수모를 당하고 어떤 고통을 받는가를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체험을 하신 거예요. 그게 지옥체험입니다.
그 지옥체험을 그대로 하게 하신 거예요. 스데반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지옥체험을 하면서 느껴지는, 올라오는 그 평강, 그 평강을 지금 사도바울은 감사하라, 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하는 사도바울이 밉지요. 안 밉습니까?
사람이 자기 수완껏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할 때는 안 미워요. 그런데 사람의 능력으로, 수완으로 될 수 없는 이야기를 떡하니 여기에 써놓고 홀로 살지 말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이런 평강을 얻습니다, 할 때 이것은 우리가 닭 쫓던 개꼴이 되어버려요.
‘뭐야? 나는 내 나름대로의 평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데 그것 아니라 그 말이지? 그것은 죄라 그 말이지?’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이 말은 닭 쫓던 개꼴로 만드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지금 인간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내세우는 겁니다.
그 비슷한 이야기가 누가복음 1장 28절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28절에 보면 마리아도 임신했고 엘리사벳도 임신했던 그 순간입니다. 26,27절 먼저 보면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다음에 엘리사벳이 이야기합니다.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여기 평안이 나와요.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사도바울의 모든 편지에는 은혜와 평강이 같이 나옵니다. 은혜가 있을찌어다. 다른 말로 평강이 있을찌어다. 지금 누가복음 1장 28절에도 마리아보고 하는 말이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했어요.
그 평안을 받았던 여자의 형편이 어떤 형편이냐 하면, 지금 시집도 안 갔는데 임신한 상태에요. 이게 과연 평안한 상태일까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복 받은 자여. 이게 복입니까? 남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처녀가 임신으로 배가 불러오니 숨길 수가 없는 거예요. 이 말은, 지금 마리아는 지금 불가능을 임신한 거예요.
그 불가능을 임신한 것을 두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게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고 이게 복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가 이게 하나님의 계약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계약이라 할 때는 굉장히 사무적입니다. 실무적으로 사무적이에요. 계약서대로 하기 때문에 사무적이에요. 계약서대로 하기 때문에.
복을 받았다는 말은, 다른 말로 은혜를 받았다는 말은, 다른 말로 평강을 받았다는 말은 내 안에 불가능성이 점점 더 불러온다는 거예요. 저도 좀 배가 불러오는데, 이게 불가능성 때문인지 안 그러면 탄수화물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안이 불가능성으로 임신이 되어서 나중에 터질 거예요. 이 불가능성이 터져버릴 지경이에요.
어떤 불가능성이냐 하면, 네가 내가 체험한 지옥체험을 이제는 누릴 자격을 하나님의 계약에 의해서 네가 부여받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평강을 네가 소지한 것이 아니고 네가 평강 안에 들어오게 되면 그것은 사무적인 계약에 의해서 형성된 그 공간인데 그 공간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다녀갔던 그 체험이 평강으로, 평강상태로 전환된 환경이거든요.
이게 참 어렵지요. 어렵거든 더 어려운 이야기 골로새서 3장 3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이 말은 뭐냐 하면, 너는 하늘에 이미 도착했고, 하늘나라에 이미 거기 네가 있고 네가 이 땅에 육신으로 사는 이것은 아바타, 이것은 가짜라는 말이지요. 가짜니까 실컷 망하는 체험을 하라는 말입니다. 실컷 지옥체험을 하라는 말입니다.
“평강같은 소리 하고 있네. 평강이 아닌 처절하게 평강하고 거리가 먼 그런 체험을 이미 네가 천국에 와 있는 입장에서 할 수 있잖아, 그걸. 그것도 느긋하게 웃으면서.” ‘웃으면서’ 는 좀 곤란하겠다만. 다시 말씀드릴게요. 지금 이 한 몸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무적으로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일임했어요. 네가 계약을 이뤄라. 그 계약이 뭐냐 하면, 죄인과 함께 죽고 죄인과 함께 살아라, 하는 것이 계약의 내용이에요.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를 죄인으로 부를 때 우리를 뭐로 만드느냐 하면 ‘죄인과 함께 죽고’라는 계약조건에 의해서 우리를 죽은 자로 만들어버립니다. 죽은 자로 만들 때 만드는 방법이 뭐냐? 예수님이 받은 저주를 우리에게 퍼붓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졸지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저주받은 자가 되는 겁니다.
아까 젊은 사람이 돈 벌면 차부터 바꾼다고 했지요. 그때 신나지요. 모든 직장생활, 야근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차 바꾸면 몇 개월 기분 업돼서 신나고 세상 살맛 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계약과 위배 된다는 거예요.
창세기 3장 17-19절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죽는다 그 말이거든요.
그러면 이것이 하나님의 계약이라면 지금 인간들은……, 악마에 의해서 계약과 다른 것을 비계약이라 하잖아요, 계약이 아닌 비계약적으로 나만 순간순간 편하고 나만 즐거우면 오케이, 괜찮아, 라는 이런 식으로 자기 기분을, 밸런스를 조절해 나가는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참, 군대 생활 더럽지요. 하지만 그 군대 생활을 이겨내는 것은 뭐냐 하면, 언젠가는 제대할 날이 반드시 온다는 거예요. 어떤 중사는 제대하기 전에 자살하고 말았지만. 희망이 있잖아요. 희망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버텨내는 거예요. 이 어려운 일만 지나면 나에게 평강이 온다는 겁니다. 평안이 온다는 거예요.
누구 평안? 내 평안. 누가 소지한 것? 내가 소지한 것. 신이시여 도와주소서. 교회 와서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 우리 가정에 평강을 주시옵소서.” “뭐하려고? 평강 줘서 뭐할건데요?” “내가 즐겁기 위해서.” “네가 즐거워서 뭐할건데요?” 그것은 계약이 아닙니다. 계약 바깥이에요. 계약에 그런 것이 없어요.
계약은 홀로 사는 게 계약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약을 성도에게 제시하는 이유는 혼자 살지 말라는 거예요. 혼자 살지 말라. 하나님의 그 무서운 저주를 혼자 독박 쓰지 말라 그 말이에요. 오늘 제목은 독박입니다. 백날 고생해도 저주받고 지옥가는 거 그걸 왜 혼자 담당해요? 주님 카드 왜 안 쓰고? 주님 찬스 써야 될 것 아닙니까! 혼자 저주를 받고 있어요, 혼자! 아무 대책도 해결책도 없이.
‘언젠가 내가 잘~ 될 거야.’ 맨날 뭘 잘돼. 죄에서 죄로 가버리는데. 인간은 살아가면서 본인 바깥에 뭐가 형성되느냐 하면, 자신의 관계망으로 계속 형성돼 가요. 그 관계망이라는 것은 내가 아는 사람, 내가 애써서 모은 귀한 물건, 백화점에서 산 것들, 내가 산 아파트, 이런 것들로, 사물과 인간들로 관계망을 형성합니다.
그게 나의 평강을 제공하는 현실로서 그렇게 우리는 그걸 지키고 싶은 거예요. 이 자식은 내 새끼고, 이 남편은 내 남편이고, 내 아내고, 내 가정이고, 내 관계망, 나를 위한 내 평안을 위해서 그걸 유지하고 지키고 싶은 거예요. 왜냐하면 속속들이 나의 영향력이 행사되게 되어 있거든요.
나의 영향력, 이것은 이태리에서 샀고……, 이런 나의 영향력, 그 나의 영향력 안에서 나는 최고가 되고 존재의 가치를 내가 찾게 되고 그럴 때 나는 최고의 자리, 우리 집안 식구들 안에서는 내가 대장질 하는 데서 오는 어떤 평화로움과 승리감, 성취감, 이런 것을 마약처럼 맛을 보고자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자기 세계 안에 갇혀 있지요. 자기 세계 안에.
그러나 이러한 평강은 얼마 가지를 못합니다. 왜? 오랜만에 친구 만나서 자기 살아온 것 생각해 보니까 내 산 것은 구질구질하게 살았거든요. 인간들의 평강은요, 이 세상 비교대상이 있어요. 자기 딴에는 최고지만 막상 현실에 나오면 내가 평강하다는 것, 내가 최고라는 것을 남이 알아주지를 않아요. 거기서 실망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자기 백성에게 구조조정을 해요.
정리해고를 시켜버립니다. 정리해고시키는 그 작업과 동시에 하나님의 계약을 통해서 천국에 대한 정리해고 또는 계약 파기를 해버리지요. 마태복음 13장에 그런 말씀 나옵니다. 13장 47-50절에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주님께서 해변가에 앉아서 주님께서 언약이라는 그물을 던져요. 그물을 던져놓고 그다음에 언약으로 끌려온 중에서 골라내는 겁니다.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골라내는 것, 이게 뭐냐하면, 계약 파기에요. 이스라엘 자손들, 아브라함 자손들이 계약 파기당한 사람들이에요. 정리해고, 그 회사에서 나가라 그 말이지요. 굉장히 사무적이에요 주님은.
여러분 생각해 봅시다. 회사 경영자가 있는데 어질고 착하고 성품 인품이 좋다. 그런데, 어질고 착하고 참 존경스럽고 회사 가는 게 그분 만난다는 생각만 하면 절로 일하고 싶다, 했는데 그 어질고 착한 그 경영자가 계약서 들고 와서 “당신 계약 완료되었습니다. 당신 2년짜리 오늘로 끝났으니 나가세요.” 할 때 그 어질고 존경스럽고 인품 좋은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아무짝도 소용이 없지요.
왜냐? 아주 사무적이고 실무적으로 일하기 때문에. 아무 냉정하게 계약서를 내밉니다. 주님께서 딱 내민 계약서가 뭐냐 하면, 너는 이 땅에서 많은 체험 지옥체험을 했느냐, 가 그 계약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요, 주님이 이 땅에서 지옥체험 하셨잖아요. 그러면 계약조건 자체가 주님과 우리가 한 몸일 경우에만 영생을 얻고 천국 가는 것이 계약조건이에요. 나보고 따지지 마세요. 저도 사무적이 되려고 안 해도 사무적이에요.
믿음 좋습니다, 왜 그렇게도 착한가, 그런 기분상의, 그런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인생 사는 것 자체가 실수에요. 아까 교독문 읽을 때 제가 실수했잖아요. 앞으로 점점 나이 들면서 더할 거예요. 어쩌라고. 사는 것 자체가 실수인데. 사는 것 자체가 죄인입니다. 죄인이면 당연히 망해야지요. 망하라고 인생 태어나게 했는데 그걸 안 망하겠다고 버티고 거기서 평강을 얻겠다? 이것은 그 자체가 죄입니다.
사도행전 8장 1절에서 사도바울 되기 전 사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스데반집사보고 하는 말이 “스데반 집사가 죽는 게 마땅하다는 거예요. 그러니 이 스데반 집사가 얼마나 계약적 형태를 보여주고 있습니까? 인간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가장 평화롭지 못한 상태, 평화와 가장 거리가 먼 것, 죽는 것도 아니고 돌에 맞아 죽는 것, 그것을 사울이 현장에서 목격하게 만들어요.
그것을 아예 주도했지요. 옷을 지켰으니까. 주도해놓고 저 스데반은 죽는게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런 고백을 통해서 이 사울이라는 사람은 천국 못갑니다. 왜? 죄 안에 갇혀 있으니까. 자기가 뭐 얼마나 똑똑한지 모르겠지만 똑똑해도 소용없어요. 그냥 지옥 가야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변화산 이야기가 나오는데 변화산 이야기에 예수님하고 야곱하고 요한하고 베드로하고 네 명이 올라가거든요. 분명히 네 명이 올라갑니다. 잘 들으세요. 분명히 네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변화산에 올라가서 이 한 명되신 예수님과 세 명이 분리가 돼요.분리가 되면서 예수님 얼굴은 해같이 빛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세 명 대 한 명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한테 누가 있었느냐 하면, 엘리야도 있었고 모세도 함께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평소에 제자들이 예수님 볼 때에 예수님만 봤지 예수님 안에 엘리야 들어 있고 모세 들어 있다는 것을 생각도 못했잖아요.
지금 사람들이 스데반 집사를 죽일 때 또는 저와 여러분을 죽일 때 스데반 집사한테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 그들 눈으로 보입니까? 안보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평강이 없는 거예요.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이 보게 되면 그들은 죄와 함께, 악마와 함께 있는 거예요. 그게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은 평강이 없는 거예요.
감사가 될 리가 없지요, 감사가! 제가 오늘 설교에서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 어차피 우리는 천국 가면 여러분이 천국 가서 “지옥 보고 싶어요. 지옥 한번 구경해보고 오는 건데……” 그렇게 후회하지 마시고 감사할 것은, 이미 우리는 가짜, 껍데기밖에 없는 우리가 이미 천국에 온 입장에서 후회하지 않도록 원 없이 이 땅에서 망하는 게 뭔가를, 지옥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우리 몸으로 체험해 주시는 겁니다.
믿었던 남편에게 배신당하고, 아내한테 배신당하고, 자식한테 실망해서 망했어, 망했어, 망했어, 망했어, 망했어, 이걸 매일같이 해주는 그 즐거움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아파트 무너지는 것 남의 이야기 아닙니다. 망대 무너져서 18명 죽었잖아요. 남의 이야기 아닙니다. 너희들도 내 세계 모르면 안 망해도 지옥 가, 망해도 지옥 가지만 안 망해서 지옥 가.
지옥 가는 것은 마찬가지에요. 왜? 혼자 사니까, 독박하니까, 모든 죄의 저주를 독박하고 있으니까요. 주님카드를 쓰지를 못한 거예요. 주님카드를 쓴 예가 누가복음 16장에 나옵니다. 불의한 청지기인데 거기에 누가복음 16장 8, 9절에 보게 되면 그 전에 회계 직원이 횡령을 했지요. 장부 조작을 했어요. 주인한테 그거 들켰거든요.
8절에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옳지 않아요. 틀려먹었어요. 이것은 죄에요. 범죄입니다.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앞에 있는 범죄와 뒤에 있는 지혜롭다가, 이게 매치가 안 돼요. 연결이 안 돼요, 연결이! 이 세상에서는요.
어떻게 죄를 지은 게 지혜롭냐, 그 말이지요. 사람들은 뭐라 하겠어요? 이 청지기보고 지옥이나 가라, 이렇게 했을 거예요. 횡령했으니까. 그러면 청지기를 통해서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뭐냐? “네가 지옥이나 가라.” 네가 천국이 뭐고 지옥이 뭔지를, 인간들은 비계약안에 있기 때문에, 계약을 모르기 때문에. 전혀 몰라요. 자, 비계약은 뭐냐? 잘하든 못하든 혼자 사는 것은 지옥이고요, 잘하든 못하든 간에 주와 함께 있는 것은 천국이고 계약 안 입니다.끝!
혼자 살지 마세요. 혼자, 무쏘의 뿔로 혼자 가지 마세요. 그것은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혼자 오토바이 타고 빠라빠라빠라, 이것 좀 하지 말라 그 말입니다. 그것은 나 혼자의 평강이에요. 나 혼자의 평강. 그래서 8절에 보면 “칭찬하였으니” 범죄 해놓고 칭찬받았다 그 말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그러니까 이 세대에 갇혀 있는 인간은 천국의 세대를 완전히 반대가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언약, 계약, 언약이 구체화, 결정된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세상이 둘로 쪼개진 거예요. 쪼개져서 서로가 공통점이 없어요.
왜냐? 대척관계에 있어요. 이쪽은 십자가에 죽이고, 이쪽은 십자가로 탈출했고. 그러니까 계약을 두고서 서로 다른 속성과 다른 성질이 통하는, 세대가 서로 완전히 대칭이 되고 차이 나는, 이 세대를 우리를 통해서 보여주라는 겁니다. 성령 받은 우리를 통해서.
그걸 미리 보여주는 사람이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 집사였고, 그리고 그것이 사도행전 7장 60절이었고, 그리고 이어져 나오는 사도행전 8장 1절에서는 사울은 무엇의 대표자냐? 이 저주받은 세대가 성령 받은 사람을 어떻게 어떤 관점으로 보고 있느냐를 보여주는 거지요.
스데반 집사가 죽는 그것은 마땅한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사울이라는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에 속하지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불가능을 사도바울 본인이 전혀 생각도 못했어요. 바라바가 자기가 풀려난다는 것도 그렇고요.
사형수, 그 살인강도가 풀려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는데 어떻게 사무적으로 일이 처리되다 보니까 그냥 집에 가라, 해서 그냥 구원받았어요. 이게 계약입니다. 계약은 이런 거예요. 계약은 내 의지 내 기대가 투입되지 않는 게 계약이에요. 내가 나를 더 이상 지시할 이유가 없는 공간, 영토가 계약이고 그게 이미 생명의 나라에요. 천국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싫어했으니까 사울처럼 내가 죽여버린 예수님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그 계약에 대해서 내가 관여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게, 더 보탤 것이 없어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하고 계약을 안 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하고 계약 안 했습니다. 내 이름은 내 이름이잖아요. 주님 이름하고 계약했지 내 이름하고 왜 계약을 합니까? 내 이름하고 계약을 안 해요. 잘해라, 훌륭하게 살아, 이런 것 없어요. 그저 감사해라, 고마운 줄 알아라, 이것들아. 이게 끝이에요. 그냥 평화를 누려라. 그거에요.
그 당시 이 세대에 속한 사람이 불의한 청지기를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이고, 이 지옥 갈 인간, 쳐죽일 인간.” 이렇게 하겠지요. “네가 십자가를 알아? 네가 게 맛을 알아?” 그 말이에요. “네가 십자가 맛을 알아? 십자가 계약을 알기는 알아?”
사람들은 몰라요. 사람은 기분에 업돼서 기분 좋으면 찬양하다가 기분 다운되면 자기 평안 찾아가는 거예요. 처음에 복음 안다고 길길이 뛸 때 우리 십자가 마을이 경험 한두 번 했습니까? 뭐 충성 봉사하고 헌금 다 할 때 이미 우리 교회 노털들은 안 믿습니다. 언제까지 가는가 보자. 기분이 업돼서 “목사님, 저 구원된 것 같아요.” 예정론 들이밉니다. 예정론은 계약이 아닙니다. 예정론은 느낌 같은 느낌이에요. 네 기분상 그런 거예요.
내가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 날이 가면 갈수록 나는 없어지고 계약이 내 안에서 살아나야 돼요. 왜? 계약을 임신했으니까, 불가능성을 임신했으니까. 나는 없어지고 나 없어지면 나의 평강도 없어지지요. 나는 없어지고 계약은 살아나고. 다시 말씀합니다만 주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아버지가 나는 너하고 계약 안 했다. 아들하고 계약했다.
예수님이 실무자입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데 내가 온 것은 아버지 뜻을 행하려 함이라고. 요한복음 6장 38, 39절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하나님 나라를 아버지께 다 바쳐버려요. 22-24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계약대로 했습니다. 아버지!” 하고 다 바치는 거예요. 그 계약대로 한 근거가 뭐냐? 이 사울이라는 사람이 나중에 성령 받아서, 주님 만나서 오늘 본문처럼 평안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평화를 알아요. 이제는 내가, 이 죽은 내가, 나만 죽은 게 아니고 죽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서 죽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말해서 계약과 함께 내가 죽은 자 노릇을, 이 땅에서 마지막 남은 노릇을 하게 하시는 거예요.
왜 죽었는지 다시 말해서 성령 받고 난 뒤에 나의 출처를 돌아보게 하는 겁니다. ‘아, 내가 불의한 청지기고 내가 바로 탕자였구나. 내가 평강을 얻는다는 자체가 욕심이었구나. 악마의 지시였구나.’ 그걸 아는 겁니다.
요한복음 20장에 참 유명한 구절 나옵니다. 제자들이 평강을 잃어버렸어요. 예수님과 함께 있다가 예수님 잡히고 난 뒤에 나 어떻게 사나, 우리 어떻게 사나, 그거 회의한다고 모였는지 하여튼 모여서 문 꽉 닫고 있었어요.
그렇게 모였을 때에 여기 세 번씩이나 주님께서 평강을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 20장 19, 20절에 보면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여기에 평강이 있을찌어다. 너희들이 이 땅에서 망해 죽는 것은 계약의 내용에 포함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 받은 계약이 뭐냐 하면, 죄인들과 함께 죽고 그 죽은 죄인들 살리는 것이 계약의 내용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죄인들이 와서 죽는 것이 계약작업에 포함이 되어 있다는 이 평안, 온전함, 최종성을 너희들은 누려라 그 말입니다.
내 의지와 내 의사를 나한테 자꾸 지시하지 말고, 내가 나한테 명령하지 마시고요. 지금 계약이 내 안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가, 어떻게 이게 표출되고 있는가, 그것만 생각하면 돼요. 우리는 뭘 해도 실수에요. 뭘 해도 성과를 기대하지 마세요. 지옥 갈 인간 같으면 제발 지옥답게 살아야 합니다. 지옥 갈 사람답게.
여기 평강이라는 말 세 번씩 했는데 로마서 5장 10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같으면 원수답게 살아야 됩니다. 마귀의 자식이거든요. 마귀의 자식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짓을 했느냐, 하는 그것을 남아 있는 우리의 껍데기로서 보여주는 그 숙제 하시고 가세요.
제가 어떤 분과 대화하는 가운데 이런 예를 들었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지옥체험 하고 죄 체험한 그것이 한 몸이기 우리 체험이 되었는데, 스데반집사님처럼 그렇게 되었는데 이걸 제가 이렇게 표현했어요.
고등어가 있는데 살아 있는 통통한 고등어, 보기에는 예쁘지만 그냥 못 먹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고등어를 손질해서 집에 와서 쪼개요. 쪼개서 내부 다 드러내고 숯불에다 시커멓게 지글지글 태워보세요. 냄새부터 좋고요. 얼마나 맛있게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뭘 맛있게 잡숫느냐 하면, 내가 홀로 살아 있는 통통한 고등어가 아니고 내부 딱 쪼개서 다 드러냅니다. 알 것 모를 것 다 드러내서 시커멓게 태우는 거예요. 이 세상 죄, 이놈의 이 죄 봐, 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맛있게 드시는 양식인 줄 몰라요.
오늘 저녁에는 고등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시커멓게,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게 얼마나 주님 보기에 맛있는지 몰라요. 왜? 자기 자랑할 것이 없거든요. 다 태웠으니까 죄밖에 내놓을 것이 없으니까. 시커먼 것, 너무 타서 지금 할 말이 없어요. 누가 태웠어.
베드로도 실수한 게 뭐냐? 홀로 살려고 했고요. 특별히 구약의 요나 1장 3절에 보면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도망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 없는 곳에 혼자 살고 싶은 겁니다. 이게 악마의 자식, 하나님의 원수의 특징이고 공통점이에요. 그 모습을 이미 성령 받고 구원받은 사람은, 여러분들이 평생 사는 동안에 짧은 인생이지만 한번 제대로 한번 보여주세요. 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지저분한지를 제대로 한번 보여주세요. 명령입니다, 정말!
이게 바로 악마의 자식의 모습이다, 한 번 보여주세요. Please, 보여주세요. 물론 백 두 살, 저 뒤에 보이는 분은 백여섯 살까지. 아직 한 5십 년은 남았어요. 사는 동안에 ‘아, 이게 바로 혼자 삶의 끝장을 보여주는구나. 이게 혼자 삶의 끝장이에요. 저주받은 삶의 끝장.
나만의 평강과 평화를 추구하는 지저분한, 인간의 지저분한 모습 보여주는 역할을 맡은 것에 대해서 주님께 찬양하고 감사합시다. 그래서 나의 출처를 더 깊이 살아가면서 백 살까지, 너무 많다, 살아가면서 더 깊이깊이 파고 들어가서 ‘아,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내가 나만 이렇게 지저분하게 나만 이기적으로 챙기는구나.’ 그걸 지독하게 느끼면서 그 지옥체험을 옛날이야기로, 과거지사로, 꿈같은 것으로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의 공통된 취미, “What’s your habit?” 하잖아요. 당신의 취미가 무엇입니까, 할 때는 딱 정해졌어요. 지난 시간에 유언 가르쳐 드렸잖아요. 오늘 취미 가르쳐 드립니다. “당신의 취미가 무엇입니까?” 지옥체험.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옥체험, 저주가 무엇인지, 망한다는 게 무엇인지, 부도가 무엇인지, 가정파탄이 뭐고 몸 아픈 것이 무엇인지, 암이 무엇인지, 세상이 기피하고 있는 모든 저주받은 저주체험에, 주님의 그 계약된 체험에 참여시킨 그것이 바로 천국 백성의 계약안에 들어 있던 증거로 이미 되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저희들 남은 인생이 망하면서 내가 이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것을 혹독하게 아는 가운데서 주님 찬스가, 십자가가 얼마나 감사한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