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죄와 용서

아빠와 함께 2021. 6. 21. 08:28

죄와 용서 

2021년 6월 20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3:13-14

(3: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새사람이 된 처지에서 생각하는 용서는 옛사람이 된 입장에서의 용서와 전혀 다릅니다. 이미 인간은 어떤 식으로도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태어난 인간은 새사람이 아니라 옛사람입니다. 옛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떤 식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새사람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래봤자 그 방식마저 옛사람입니다. 즉 죄인이 죄를 연발식으로 더 짓는 짓밖에 안됩니다. 인간은 이 땅에서 분투노력하는 것이 구원을 성사시킬 수 없는 이유는, ‘이 일은 내가 하고 있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이 일하고 있음을 자기가 알고 있으면, 필히 여기서 ‘자기만의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구성한 현실은, 자기 딴에 악하고 추한 것들을 제거하고 난 다움의 추진한 일이라서 문제될 게 없다고 여기게 됩니다. 이러한 자의식으로 나름대로 자기 현실을 꾸려나가는 마당에, 주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사람들은 이 말씀에 입각해서 타인을 용서하고자 시도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용서는 하면할수록 자신의 세계는 더욱 의롭다고 자부하는 의식으로 공고히됩니다. 즉 남을 용서하면할수록 자신을 더욱 의롭다고 여기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상대에게 복수하는 바가 될 것입니다.

그 어느 인간이든 자신의 인생이 자신의 현 욕망을 충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 미흡된 욕망은 복수와 보복으로 채우게 됩니다. 이 복수의 방법은 상대보다 자신이 더 착한 사람으로 확인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자신에게 해를 입혔다고 여기는 상대에게 과감하고 쿨하게 용서를 하므로서 상대보다 더 높은 인품을 가진 자아가 되었다는 것으로 상대에게 안 지려고 하는 겁니다.

문제는 인간들은 자기만의 세계를 따로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구성을 위해 끊임없이 기대하고 희망하고 노력하고 시도하고 계획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기대감이 곧 죄입니다. 주님께서 생각하시는 용서란 바로 이 죄를 겨냥한 겁니다. 달라 말씀드려서, 인간의 죄는 주님을 통해서 일어난 일을 경유해야 하는 겁니다.

그 주님의 하시는 일이 얼마나 인간의 예상을 넘어서는 이질적인 것인가가 누가복음 24:5에 나와 있습니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천사 둘이 다꾸하는 장면입니다.

왜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는 겁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들이 살아 있다고 자부하고 자신의 살아 있음을 포함해서 산 자들의 세게를 따로 형성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죽은 자에게 해당된다고 그들은 자부했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여자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그 의도 자체가 천사로부터 책망받을 일이라는 생각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여인들은 자신도 모르는 채 ‘죄가 지배하는 세계’의 일환이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용서란 바로 이런 죄를 겨냥하시는 겁니다. 사람이 길을 걸으면서 “나는 길을 걷는다”는 의식 자체도 죄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의의가 누락된 채, 자신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가 죽어봐야 죽음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주님과 치열한 싸움을 매순간 벌립니다. 인간들은 주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것들은 더럽지만 이것은 안 더럽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렇게 대꾸하십니다. “네가 율법을 알아? 율법을 집어넣어줘? 안 더러운 것이 어딨어! 다 더러워” 이 말을 듣고 인간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다 더럽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주님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뭐? 다 더럽다고? 내가 보기에 다 깨끗하다. 더럽게 보는 네 마음이 오히려 추하고 더럽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개입되는 그 현실을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세상적으로 이해되는 용서는 인간들의 자기만의 현실을 깨끗하게 가져가겠다는 의도가 담겼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그 인간은 자신의 모든 것을 새로운 공간에게 넘겨줍니다. 이 넘겨받은 공간은 더러운 것이 전혀 없이 모든 것이 깨끗하고 예수님의 죄사함의 효과가 생생하게 작렬하는 공간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손길과 솜씨를 모독하거나 무시할 권한은 인간에게 없는 겁니다.

①인간들은 보이는 것에 의미를 둡니다. 눈에 보이는 책상, 걸상, 옷, 자동차 모든 것이 인위적입니다. 그 전부를 나를 위한 것들로 이해하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자기를 위한 환경과 현실마련은 모든 말씀을 단순히 지식으로 처리합니다. 그러한 예가 마태복음 18:21-22에 베드로를 통해서 나타나 있습니다.

“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왜 인간은 70×7번씩이나 용서해도 구원이 될 수 없을까요? 그 자체가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현실’을 따로 구축하므로서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외부자들에게 복수를 감행한다는 데 있습니다. 결코 자신을 패배자로 만들기 싫은 겁니다. ③그러나 성도라면 다음과 같은 유언을 해야 합니다. “나는 모든 일에 패배자였다. 그래서 신난다!”

왜냐하면 성도가 속한 공간은 그 어떤 경우라도 인간이 끼어들 여지가 없을 정도로 주님에게 친히 개입하시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공간에서 성도는 반복적으로 새로움을 경험합니다. 새로움이란 잃어버림이 선행하면서 발생하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유지하려는 것은 결코 여기에서 새로움이란 나오지 않습니다.

④세상에서의 용서는 “GO!”입니다. “가 버려!”입니다. 여기서 “네와 내가 찢어지자”입니다. “내가 너에게 아무런 문제 삼지 않을테니 너는 네 길길, 나는 내 갈길 가자”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용서는 곧 용납입니다. “COME!”입니다. 오라는 겁니다. “네가 없이는 내가 구성되지 않는다”는 원칙입니다. 성도의 인생에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에 성도가 끼어들게 된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쓰레기 같은 우리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3강-골 3장 13-14절(죄와 용서)2106120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3장 13-24절입니다.

골로새서 3:13-14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골로새서 3장에 들어와서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6절, 7절, 8절, 9절, 10절에 보게 되면 특히 9, 10절에 보면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런 말씀을 죽 하면서 오늘 본문에 용서를 구체화하라고 되어 있는데 무엇이 달라졌는가, 또 달라졌다는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옛사람과 새사람의 변화에 있어서 달라진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넘겨주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 넘겨주는 거지요. 주님께 넘겨 가게 되면 새사람이고 자기가 꾹 쥐고 있으면 그것은 아직도 옛사람이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내게 일어나는 모든 올라오는 이 죄는 내 쪽에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이미 새사람 영역으로 넘어왔기 때문에 그걸 알게 된 거예요. ‘아,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것을 해결해보려고, 새사람 되어보려고 애를 썼구나.’ 그렇다고 하면 주님은 공연히 있는 분이 되거든요. 주님은 옆에 그냥 서 계신 것이 아니고 뭔가 넘겨받는 쪽으로 준비하고 있다, 그 말이지요.

오늘 본문에서도 “내가 너희를 용서했잖아.” 내가 너희를 용납했다 이 말이거든요. 내가 너희를 받아줬는데 따라서 너희들도 서로의 고유의 것을 갖고 있지 말고 다들 내게 넘겨라, 그 말이지요. 너희들 선에서 해결하지 말고 내게 넘겨라, 그 말입니다.

특히 용서란 말이 나왔을 때 옛사람, 아직까지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의 용서새사람, 모든 것을 주께 넘겨준 입장에서의 용서확연하게 다릅니다.

먼저 옛사람, 세상 사람들, 주님을 모르고 성령 받지 않고 십자가의 의미도 모르는 상태에서 용서라 하는 이것은 그 사람을 넘겨받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그냥 보내는 거예요. 영어로 하면 “GO, 가라, 내가 너 하는 것 신경 안 쓸 테니까 그냥 가세요.” 비 오는 날 우산 쓰고 가다가 부딪쳤을 때 “그냥 가세요. 그냥 용서해 줄께요.”

용서란 말은 그냥 네 갈 길 가라는 뜻이에요. 내 일에 끼어들지 말고. 그냥 가버리세요. 난 당신하고 상대하기 싫다. 이게 용서에요.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흔히 인사치레할 때 “나의 결례를 용서해주옵소서.” 이 말은 분석 좀 해보면 ‘너는 네 갈 길 가고 나는 나 하고 싶은 대로 내 갈 길 간다.’ 그런 뜻이에요. 각자 자기 갈 길 갑시다, 하는 뜻이에요.

성경에서 말하는 넘겨받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주보에도 나와 있습니다. 용서라는 것은 성경에서 반드시 죄와 관련되어서 그렇습니다.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골로새서 3장 5, 6절 보면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이게 뭐냐? 이게 죄거든요. 이런 죄를 이야기했을 때에 옛사람 그러니까 새사람 되지 못한 사람은 이렇게 죄를 지적하면 이 죄를 자기 쪽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겁니다. 나는 이제 죄가 뭔지 알았기 때문에 이 죄를 나의 선행으로 바꿔 보겠다. 이게 바로 옛사람들의 특징이에요.

그런 식으로 되면 그다음에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내가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라는 말을 줄줄 외우듯이 하는데 그 말은 그 사람을 용납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가버려. 나 인간성 좋은 티 좀 내자. 너는 나한테 해를 입혔지만 주님이 나를 용서했기 때문에 당신이 나에게 해 입힌 것 나 신경 안 쓸게. 그냥 가세요. 새사람 되었으니 폼 좀 내야지.’

이런 것을 가지고 우리는 이 본문이 자기 스스로 성취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전혀 구원받은 사람 아니에요. 주의 백성의 자세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죄가 뭐냐를 잘 몰라서 그래요. 죄가 뭐냐를. 제가 성경 구절 하나 가지고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5장 24절,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여자들이 무덤에 찾아갔거든요. 거기에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 천사지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자들이 예수님 시신이 어떻게 되었는가 싶어서 확인하러 갔는데 그 천사 둘이 예수님 찾는 여자에게 이렇게 합니다.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오늘날 현상적으로 이게 죄냐 죄 아니냐의 기준이 되어 버렸어요.

어떻게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이 의미의 범위를 넓혀버리면 세상 모든 인간들은 다 죽은 자라는 거지요. 너를 포함해서. 우리가 다 죽은 자에요. 죽은 자가 스스로 노력해서 나를 예수님처럼 산자로 바꿔 보겠다고 온갖 시도를 다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죄입니다.

세상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제가 정리를 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죄라는 것은 내가 하고 있다는 의식을 파악하는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아주 쉬운 예를 들면, 길을 걷고 있을 때 나는 길을 걷고 있다. 나는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 거기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간단합니다. 지옥이나 가거라.

내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내가 의식하는 것, 이런 것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간단해요. 지옥으로나 꺼져라. 우리는 “내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아는 것을 어떻게 그걸 죄라고 규정을 하겠습니까? 그걸 시비 걸면 죄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요.” 핵심적으로 말해서요 죄를 안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태가 나를 경유해서 내 입으로 토해내지 않으면 그게 죄가 되어버려요.

예수님께 일어난 사태 다시 말해서 죽은 분 이 죽은 예수님이 살아나 버렸어요. 그전까지는, 예수님이 살아나기 전까지는 누가 살았느냐 하면, 우리 인간들이 인간들만 살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짐승하고 식물 동물 빼놓고. 이 땅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처럼 살아 있을 때 살아 있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분명히 확연하게 정해졌어요. 인간처럼 있으면 이것은 살아 있는 것이고 그리고 예수님처럼 죽어버리면 그것은 죽은 자고. 이 기준에 어떤 하자가 없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천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떻게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졸지에 이쪽에 있는 것 인간 쪽에 있는 것은 전부 다 예수님의 부활에 입각해서 전부다 죽은 자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죽은 자이면서도 살아 있다고 우기는 인간들이 하는 평소의 뽄새(본새) 그들의 하나하나의 삶의 태도가 뭐냐? 나는 무엇인가 하고 있다는 의식이에요.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나는 무엇인가 하고 있다.

지금 막 설교 적고 있는 분도 있는데 그걸 의식하면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성경에서 용서라 하는 것은 더러운 죄를 겨냥하는 거예요. 제가 질문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돈 없는 죄와 예수 안 믿는 죄 중에 어느 것이 여러분을 침체하게 만듭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돈 없는 내 신세와 예수 안 믿는 신세 중 어느 것이 나에게 위기처럼 느껴지고 다급하고 절박하게 느껴지느냐는 말이지요.

돈 없는 죄 가난하다는 이 창피스러움, 이것은 인간이 평소에 일생을 나를 의식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돈 없는 것을 내가 견딜 수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라는 타인이 죽든 말든 나하고는 관계없고 그것은 나중 문제고요, 내가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느냐, 이 말은 나는 돈 없으면 미쳐버리겠다는 그러한 숨길 수 없는 본성이 나오는 것과 견주어볼 때 나는 끊임없이 예수 없는 삶을 그대로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 다 들통이 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용서라는 말을 했거든요. 지금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만 용서라 하는 것은 죄가 선행하고 있고 그 죄를 없애주는 것이 용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용서를 언급하는 순간 우리는 죄를 짓고 있으며 그리고 그 죄, 그 죄에서 주님의 용서가 없으면 그 죄에서 나 스스로 용서받을 수 없는 입장에 있다 그 말이지요.

그렇다면 용서해주는 주님의 입장에서 볼 때, 천국의 안목에서 볼 때 우리는 추접고 더러운 거예요. 우리는 지금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지만 하늘나라에서는 뭐냐? 깨끗하냐 추저우냐, 그걸 문제 삼는 거예요. 이런 안목이 없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을 제켜 버리면 이런 안목이 없어요.

평소에 우리 삶 속에서 늘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항상 본성적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우선적으로 나오는 것은 사느냐 죽느냐, 다시 말해서 돈이 통장에 얼마나 있느냐, 돈이 없느냐, 그게 중요한 문제에요.

그러나 주님이 오는 순간 네가 얼마나 추접고 더러운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네가 아느냐고 묻는 겁니다. 더러운 존재가 더러운 계획을 계속 내뱉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는 뭐라고 우기느냐 하면, 내 딴에 더러움을 자체적으로 제거한 후라서 안 더럽다고 여긴 것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의식이 계속 속에서 올라오는 거예요.

더럽고 안 더럽고는 내가 알아서 이미 가려내서 더러운 짓은 다 빼놓았으니까, 더럽지 않고 깨끗한 것만 골라서 하니까 깨끗한 것만 가지고 내 인생을 내가 계획하고 추진하고 스케줄 짜고 기대하고 소망하겠다는 그러한 의식이 촉발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인생을 추진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뭘 얻겠다는 것인가? 살아 있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살아보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천사 둘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죽은 건데요? 그것은 죽은자가 하는 행동인데요? 인간은 마치 공 던지고 노는 아이 같아요. 공중에 공 던지고 다시 그 공 받고, 공 던지고 다시 받고.

아침에 눈 떠서 계획 잡고 저녁에 그 계획 받고, 다음날 계획 잡아 던지고 다시 그 계획 받고. 뭔가 늘 기대하고 희구하는 것 추구하는 것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어떻게 인간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인간이 그 자체가 죄인데요. 예수님 하신 일이 파고 들어가지도 않는데요. 내가 하는 일은 내가 떠맡겠다고 하는데요.

넘겨주는 것이 없어요. 그러면서 성경에서 용서가 나오니까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날 용서하신 것 같이 내가 남을 용서해주면 나에게 복이 오겠지. 이런 식으로 계산하는 겁니다. “용서해줄 게 그냥 가세요. 당신이 돈이 없어서 10만 원 빌린 것 못 갚는데 아, 그냥 가라고! 궁하다고? 용서해줄 게.” 용서는 되는데 용납이 안 돼요. ‘Go’는 되는데 ‘Come’이 안된다고요.

오늘 본문에 용납 나오잖아요. 용납, 용납은 ‘COME’이에요. 네가 내 안에 없으면 내가 구성되지 않는다는 이게 용납이고 세상에서 말하는 용서란 뭐냐? “그냥 가. 그냥 가라고. 너하고 얽힌 것도 후회스럽다. 그냥 가.” 이것은 용서고요. 용서하면 할수록 자기가 착해져요. 착해지고 훌륭해진다고요. 용서하면 할수록.

부자가 왜 착한 줄 알아요? 돈이 안 궁하니까 어지간하면 봐주니까 돈의 힘으로 용서가 돼요.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이 왜 악바리인 줄 알아요? 돈의 힘으로 해결할 것이 없으니까, 악착같이 한 푼이라도 시비 걸어서 받아내야 되니까 악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 논리로 하면 부자가 천당 가는 거예요.

어떤 며느리가 시어머니 시아버지 앞에 편지를 써놓고 집을 나갑니다. “아버님 어머님 전상서. 손자 둘 맡기고 제가 떠나게 되었습니다. 부디 저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용서란 말이 뒤에 붙어요. 그때 그 시아버지 시어머니 답장은 간단하지요. 지옥이나 가라.

이게 왜 그러냐 하면, 돈 없고 힘없고 그런 나에게 네가 낳은 자식을 나에게 떠맡겨서 내 인생 꼬이는 그것이 짜증스러워서가 아니라 복음적으로 봐서는 뭐냐? “며느리야, 네가 계획이 있다는 그 자체가 죄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게 지옥이나 가라.” 그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용서라는 말을 얼마나 잘못되게 설명하는지 몰라요. 이 용서를 우리가 완전히 왜곡되게 설명하는 겁니다. 예수님 십자가 부활의 의미를 안 집어넣고 용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들에 있어서 모든 보이는 것들 거기다가 의미 두면 안 됩니다. 우리의 계획 우리의 모든 시도는 눈에 보이는 것부터 시작하거든요.

책상, 걸상, 옷, 자동차……, 다 인위적입니다. 이것 가지고 뭐하려고요? 자기 나름대로 계획 세우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용서라는 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용납입니다, 용납. 용납이라 하는 것은 아까도 말했지만 모든 현실 자체는요, 인간이 끼어들 현실은 없다고 느껴질 때 우리가 있을 곳은 내가 따로 추구하고 따로 계획 세우고 기대하는 그 공간이 아니고 이미 주님께서 끊임없이 모든 것을 세세하게 만들어낸 그 공간 안에 이미 들어와 버리면 그다음부터는 내가 따로 계획 잡을 것도 신경 쓸 것도 전혀 남지 않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가 누구하고, 다른 인간하고 상대할 필요도 없이 되는 데서 오는 그 홀가분함, 그 웃음, 실성한 웃음 아닙니다, 너무 좋아서 웃는 웃음이에요. 내가 사람하고 상대할 필요도 없고 내가 현실에 계획 만들 이유도 없고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끊임없이 만들어준, 흔들어주고 만들어준 그 환경 속에 내가 주님에 의해서 넘겨졌으니까요. 주님으로부터 용납이 된 거예요.

어느 세계에, 주님의 세계에 용납이 된 겁니다. 들어갈 수 없는, 제대로 된 3자의 세계 속에 거기서 산다면 이제는 나의 모든 계획 같은 것은 날마다 거기서 주님이 살아 있음으로서 알아서 박살 내주거든요. 다 무산시켜 줘요. 나로 하여금 내가 잃어버린 자가 되게 하는 거예요. 잃어버린 자가 된다면 매일같이 나에게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주님이 손댄 새로움이 거기서 나옵니다. 그 새로움으로 인하여 우리가 신나지요.

잘 이해가 안 되시는 것 같은데 이해가 안 되면 제가 여러분에게 유언을, 제 유언 말고 유언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모두의 유언, 성도라면 오직 이 유언 외에는 다른 유언 하지 마세요. 유언 시작됩니다. “나는 지난 모든 일에 루저(loser, 실패자)였습니다. 그래서 신납니다.” 이것 말고 다른 유언은 필요 없어요. “내가 한평생 살아온 모든 것은 손대는 것마다 모든 것은 실패였습니다. 패배였습니다. 그래서 신납니다. 끝! 나 죽습니다.”

왜? 성공할 이유가 없어요. 성공할 이유가 없다고요. 왜? 이것은 내가 꾸려나가는 다른 현실이거든요. 내가 꾸려나가는 현실 말고 다른 현실이에요. 생소한 현실입니다. 제가 지금 성경의 용서를 이야기하기 전에 이렇게 뜸을 들이는 이유가 있어요. 성경에 있는 모든 복음적 내용을 다 포함시켜서 용서가 되어야 되지 자기 잘난 체 한다고 용서하는 그것 의미 없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자기 잘난 체 하면서 용서를 언급하는 사람들이 나와요. 21절에“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구구단에 5 곱하기 7이 있지요. 5×7=35 그래서 뭐? 그래서 뭐? 5×7=35. 숫자는 아무 의미 없어요. 7×7=49 그게 뭐? 아 무 의미 없어요.

의미를 추구할 때는 반드시 예수님이 하시고자 한, 또 하신 일이 그 숫자에 담길 때만 의미가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 70×7, 490번 용서하라고 하지요. “490이라는 그 숫자, 베드로 너 알고 있지?” 베드로가 그 정도는 알지요. “그것 알고 있지? 490번 용서라는 말을 네가 무슨 뜻인지 그 숫자는 이해하지만 490번이라는 용서를 네가 이해하겠어?”라는 쪽으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가, 너는 490번을 용서하라고 할 때 네가 490번 용서한다면 너는 여전히 지옥이나 가라, 그 의미에요. 지금 베드로는 계획이 있습니다. 어떤 계획이냐 하면, 어떻게 내가 남을 용서해서 주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느냐. 자기 계획을 안 넘겨주고 그대로 쥐고 있다고요.

마태복음 6장 14, 15절 말씀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기 전에 주기도문이라 해서 이걸 집어넣었어요. 이걸 딱 듣는 순간 인간들은 베드로처럼 드디어 계획이 잡힙니다. ‘내가 누굴 용서한다면 그걸로 천국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 베드로가 결국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잘 아시지요.

예수님께서 490번 용서하라, 하는 이 말씀은 용서라는 말을 듣고 용서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벌써 그것은 죄의 세계에서 못 빠져 나온 모양새가 되는 겁니다. 주님 보시기에 더러운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는 용서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 용서의 의미를 캐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이 확연히 이해되리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주님하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인간들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첫 번째, 저것은 또는 저것들은 더럽지만 이것은 안 더럽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인간은 늘 이렇게 생각해요. 저것은 더러운 것이고 이것은 안 더러운 것이고. 더러운 것과 안 더러운 것을 구분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주님은 율법을 개입해 버립니다. 다 더럽다. 다 더럽다. 안 더러운 것이 없어요. “네가 율법을 알아? 율법에 한 번 비춰 봐? 네가 안 더러운 것이 있다고? 어디서 함부로 그렇게 경솔한 생각을 해? 네가 한 행동에서 안 더러운 것이 있을 줄 알아?” 다 더러운 거예요. 탐심 자체가 더러운 거예요. 골로새서 3장 아까 봤지요. 탐심은 우상숭배라고요. 다 더러운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그 소리 듣고 하는 말이 뭐냐? “저것도 더럽고 이것도 더럽고 다 더럽습니다.” 하니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다 더럽다고? 아니야. 하나도 안 더러워. 더러운 것이 하나도 없어.” 이것은 뭐냐? 복음이 개입되었을 때, 죄 사함이 개입되었을 때입니다. 이래도 틀렸고 저래도 틀렸고. 그러니까 네가 입에서 토해낸 자체가 널 다독거려 보려고 어떤 그런 수작 자체가 더러운 거예요.

성경에 더러운 것은 없어요. 복음 안에서. 더럽다 생각하는 그 자체가 더러운 거예요. 거울 보고 자기 모습이 더럽다는 생각 자체가 더러운 거예요. 간음이고 살인이고 그게 더럽다 하는 그 자체가 더러운 거예요. 우리는 그걸 더럽다 할 권한과 자격도 없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속해 있는 환경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적용되는 새로운 공간에 들어왔기 때문에 더러운 것은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왜냐? 워낙 우리가 있던 그 자리가 더럽기 때문에. 우리가 있던 자리가 왜 더러우냐 하면, 이것은 틀렸고 이것은 맞고, 이것은 추접고 이것은 깨끗하고. 자꾸 내가 주인공으로 개입되어서 내가 내 단도리 하려고, 눈만 뜨면 하는 짓거리가 내가 나 단도리 하는 거예요.

‘나 어때? 나 이 정도 하면 천국 갈만한 자격 돼 있어? 이 정도 하면 혹시 지금 주님 오시더라도 나 부활 되겠어?’ 자꾸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복음을 전하라 하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 전하는 거예요. 신앙생활 안 해도 나오는 복음은요, 그걸 지식이라고 합니다. 지식의 나쁜 점은 지식을 동원해서 새로운 자기만의 현실을 따로 구성을 해요. 자기만의 현실, 자기가 만든 공간이 따로 있다고요. 자기만의 현실.

그러니까 변화가 안 일어나는 거예요. 루저, 패배자에서 승리자가 되고 싶은 겁니다. 여전히. 흔히 우리가 하는 말에도 그런 것이 있는데요. 아내가 복음을 알고 남편이 복음을 모른다 칩시다. 남편이 무심코 이야기해요. “여보, 쓰레기 어디에 비웁니까?” 무심코 한 이야기입니다. “쓰레기를 어디에 비웁니까?” 복음을 아는 아내가 하는 말이 복음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쓰레기를 쓰레기라고 분류하는 것을 보니까 당신만의 환경과 당신 바깥의 환경을 따로 지금 분류하고 있구나. 네가 쓰레기인 것을 몰라?” 남편은 그냥 평소대로 여보, 이 쓰레기 어디에 비우면 되느냐, 고 물은 거예요. 그냥 밖에 내놓을까, 안 그러면 나중에 버려야 될까 하는데 그걸 시비를 걸어서 “너 자체가 쓰레기야. 그런데 네가 쓰레기를 쓰레기라고 입에 담을 수가 있느냐? 너도 포함된 쓰레기여야 되는데 버리려면 너부터 버려라. 너도 같이 버려버려라.”

쓰레기를 버린다는 말은 이쪽에는 쓰레기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어떤 전제가 있어요. 우리 아파트 내에는 쓰레기가 없어야 되고 쓰레기는 밖에 둬서 쓰레기 차가 와서 가져간다는 이 말은 구획하는 것, 구분되는 거지요. 내 쪽은 쓰레기가 없는 깨끗한 곳, 저쪽은 쓰레기로 더러워도 괜찮은 곳.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담배 피우고서 담배꽁초 버리잖아요. 그런 구분 자체, 그런 구분이 된 사람에게 “너는 남을 용서하라. 남을 용서하면 너도 용서해줄 게.” 이렇게 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남 용서한 것 그거 계산하고 있을 거예요. 그것 계산해서 지금 497번째, 498번째, 한 번만 더 하면 예수님이 이야기한 그 바 경계선을 넘어선다. 490번, 그러면 드디어 합격이에요. 그게 용서입니까? 안 되지요.

내가 내게 신경 쓰는 것 자체가 이게 바로 저주입니다. 그 저주를 주께서 용서하셨어요. 앞뒤를 한번 연결시켜 보세요. 이게 어려운 연결인데요. 내가 나에게 신경 쓰는 자체가 저주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걸 용서했다? 그 말은, 그 정답은 뭐냐? 예수님은 “네가 심판하고 싶은 것을 내가 다 해줄 테니까 너는 남을 심판하지 마.” 그런 뜻이거든요.

복음이라는 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피인데 피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심판하는, 저주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게 피에요. 또 하나는 죄사함을 주는 기능이 피입니다. 따라서 이미 주님이 넘겨받은 주의 백성에게 일어나는 모든 저주와 심판은 누가 대신 심판해 주시는가 하면, 예수님이 나 대신 다 심판을 해줘요.

그러니까 나보고 너 자아 됨, 너 자신이 근사하고 너 자신을 안 다치게 해서 네가 남에게 심판한다고 나대지 말라. 그런 뜻이에요. 네가 안 나대도 되는 그런 환경 속에 네가 들어왔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너는 남을 용서하지 말라, 그 말이에요. 왜냐? 사람이 누굴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보복이요 심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는 나한테 해롭게 했지만 나는 워낙 착해서 나는 그것을 제대로 갚지 않고 나는 인간성 하나 끝내주기 때문에 너를 용서해줄 게. 이게 우회적인 보복이고 복수입니다. 이게 복수에요. 성경 말씀을 다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니까요. 어떤 사람이 내 오른뺨을 때리면 경찰에 고소하면 될 것을 가지고 그 자리에서 왼뺨을 대니까 왼뺨만 더 아프게 맞는 거예요.

“이게 어디서! 개기나?” 이래서 더 맞아요. 더 맞는다고요. 가만 있으면 말로 해서 좋게 헤어질 사이거든요.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예, 우리 아부지 놉니다.” 그러면 될 건데 “조폭입니더.” 그러니까 선생님이 손목시계 풀러요. 시계 풀고, ‘오늘 한번 맞아봐라. 어데 선생님한테 그 따위로 굴어.’ 하고 학생(유오성)을 마구 때려버리지요. “좋겠다, 좋겠어. 너그 아버지 조폭이라 좋겠다, 좋겠어, 좋겠어” 하고 마구 밟습니다. <친구>란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반 친구들이 “즈그 아부지 진짜 조폭 맞는데요.” "야 이제 수업하자"

이 세상에 내가 승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 힘으로 복수하는 능력을 가질 때 승자의 의식이 있어요. 따라서 내가 학교 때 얻어 맞았으면 어떻게 복수하느냐 하면, ‘내가 나중에 너보다 돈 많이 벌어서 한 달 수입이 많아서 너에게 복수할 거야.’ 그때 인간은 비로소 승자라는 의식이 발생 되는 겁니다. 승자라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상대할 때 거기서 승자가 생기고 패자가 생긴다고요.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눈에 보이는 사람만 상대한다고요. 사람만 상대해서 저것은 내 것이고 이것은 네 것이니 손 안 댈게. 안녕하세요, こんばんは(곰방와, 안녕하세요), How are you?(안녕하세요?) 인사를 한다는 것은 뭐냐? ‘내가 먼저 너한테 공격하지 않을 테니까, 나 가만 있을 테니 너도 공격하지 마.’ 그런 뜻이거든요.

내가 너를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인근 아파트에서 방송을 하니까 소음 때문에 용서가 안 됩니다. 갑자기 패자가 된 느낌이 들어요. 인간은 항상 자기 계획 자기 기대가 있기 때문에 그런 기대와 계획은 어떤 의도가 있고 그 의도는 절대로 남에게 지지 않는다는 자기 본래의 의도를 달성하기 위해서 계획을 잡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패가 되면 짜증 나잖아요.

그러면 그걸 찾아내지요. ‘누구야? 누가 내 계획을 짓밟았어? 너 가만두지 않을래.’ 가만두지 않는 방법은 고소하는 것도 되지만 상대방보다 더 잘산다든지 상대방보다 애가 착하다든지 공부를 더 잘한다든지, 이런 것으로 상대적 보복심리로 해야 우리가 만족하거든요. 그러니까 아직까지 성경에서의 용서는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이제 들어가 봅시다. 새로운 현실 속에서는 내가 복수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세계에 우리가 들어가는 거예요. 복수는 피해자가 복수하지 내가 복수하는 게 아닙니다. 나도 똑같은 쓰레기인데 뭘 복수를 해요. 복수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더 이상 상대할 필요도 없다는 데서 오는 이 홀가분함이 너무 좋은 거예요. 정말 웃음이 절로 날 정도입니다. 성도 안에 주어진 모든 것은 은혜요 선물이기 때문에.

인간이 끼어들 현실은 더 이상 없습니다. 살고 죽고 이것은 내 뜻이 아니에요. 여러분, 성도는, 아까 유언 이야기 했지만 평소에 꼭 연세 많은 분만 하지 말고 젊었더라도 항상 캐리어 저 윗목에다 놓으세요. 늘 그렇게 사시면서 ‘내가 더러워서 다시 이 세상 안 온다.’ 그런 기분으로 그렇게 사셔야 돼요. 더러워서.

왜냐하면 이 세상만 더러운 것이 아니고 그 세상에서 살았던 나도 같이 더럽기 때문에. 내가 계획하고 나에게서 내뿜는 모든 어떤 스케줄 자체가 추접고 더러워요, 정말. 어떤 핑계를 대도 나는 쓰레기임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자, 그러면 주님께서는 이 용서를 어떻게 실행에 옮기느냐? 그게 룻기에 나옵니다.

룻기에 보면 거기에 어떤 의미에서 용서와 용납이 두 개 다 나오는데요. 아주 미묘한 심리까지 시어머니가 두 며느리를 놓고 간파를 했어요. 룻기 1장 14절입니다. 그 앞 10절부터 죽 있는데 시간관계상 다 생략하고요. 이스라엘에 있던 엘리멜렉이라는 한 가족이 흉년이 들자 지금의 요르단 모압지방으로 이민을 갔어요.

그쪽에는 아직까지 농사가 좀 된다는 소문을 듣고 이민을 갔어요. 거기서 하나님께서 남편을 죽이고 그다음에 아들 둘 있었는데 아들 둘 다 죽였어요. 아들은 결혼하기 전에 죽인 것이 아니고 결혼하고 난 뒤에 그러니까 며느리가 둘 생기고 난 뒤에, 결혼만 하고 자식이 없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가장 엘리멜렉 죽이고 아들 둘 다 죽였습니다.

자, 남아 있는 것은 여자들만 달랑 남아 있어요. 나오미라는 시어머니와 오르바라는 큰 며느리와 주인공 되는 룻이라는 둘째 며느리 이 셋만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성경에서 용서와 용납 이것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타나게 하시는가? 우선 ‘GO’와 ‘COME’을 구분해요. ‘가라’와 ‘받아들임’을 구분합니다.

나오미가 미안스러워서 또 며느리 볼 낯이 없어서 이렇게 자기 인생을 해석합니다. “여호와의 땅을 버렸더니, 즉 하나님이 주신 이 땅을 내가 사적으로 살고자 이 땅을 버렸더니 하나님께 내 남편과 자식 둘을 다 죽여버렸다. 이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치시는 것이다. 그런데 나를 치는 것은 좋은데 너희들 보기에 미안하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 살리기 위해서 우리 집 남자들 다 죽인 것은 좋은데 너희는 뭐냐? 다른 신을 섬기는 너희들은 대체 무엇이냐?” 이 말이지요.

그래서 “너희들은 내 인생에 잘못 끼어들어 꼬여서 너희들 인생까지 조지는 것은 내가 미안해서 못 보겠다. 그냥 시집와서 그 집 귀신 된다는 그런 생각은 하지 마라. 쿨하게 내가 용서해줄 테니 그냥 가거라. GO! 그냥 가라.” 그러니까 14절에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오르바는 시어머니와 인사하고 가버렸어요. “그래, 너 아직 젊으니까 네 팔자 고쳐야지.” 갔어요. 그런데 둘째 며느리 룻은 안 가요. 안가면서 룻이 시어머니한테 이야기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 시아버지 죽여버리고 내 남편 죽여버리고 우리 아주버님 죽인 것은 다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GO’가 아니고 ‘COME’, 내 안에 들어오라는 그런 신호로 보겠다는 거예요.

룻이 생각하기는, 그동안 이방 민족에서 나를 위한 하나님을 섬겼는데 이제는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찾아온 하나님이에요. 내 안에 들어온 거예요. 아주 쉽게 말해서 내 인생에 주님이 나타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생애에 나를 집어넣은 거예요. 내 인생에 주님 찾아온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인생에, 주님의 생애에, 십자가 부활로 천국과 연결 되어 있는 그 생애에 나를 집어넣은 절호의 찬스가 자기에게 왔다는 겁니다. 이게 룻의 발상이에요.

완전히 자기 기대, 자기 계획, 자기 스케줄, 완전히 쓰레기처럼 그냥 버려버린 거예요. 나를 위한 내 인생 계획은 아예 이런 것은 없는 거예요. 그리고 하는 말이 “나보고 가라고 강권하지 마세요. ‘GO’라고 이야기하지 말고 ‘COME’ 오라고 이야기 하세요.”

16,17절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어머니에게 작용한다면 그 어머니 계신 곳이 하나님이 함께 계신 곳이기 때문에 내가 그 찬스를, 이게 유명한 엄마 찬스 아닙니까, 그 찬스를 버릴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됩니다. 이게, 이게 바로 용납이라는 거예요. ‘GO’가 아니고 ‘COME’이에요.

“내 안에 들어와”예요. “이리 들어와.” 영국의 유명한 가수, Engelbert Humperdinck 라는 가수의 라는 노래가 있어요. “Please release me, let me go~” 세상에서 말하는 용서라는 것은 그냥 내가 나답게 되는 거예요. 얽매이지 않는 것, “Please release me, let me go” 나를 풀어줘서 나를 그냥 가게 해줘.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용서는 뭐냐? Let me love again, 다시 나로 하여금 사랑하게 해달라. 사랑이라 하는 것은 세상적으로 말하면 용서도 내가 하고 사랑도 내가 하는 것이 세상적인 것이지만 성경에서는 나 홀로 있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갑자기 어떤 공간이 덮치니까 ‘내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나를 쓰시려고 하시는구나.’ 주님 본인의 결정에 이 쓰레기같은 나를 거기에 집어넣어가지고 쓰시려고 하는 거예요.

쓰레기 이야기 나왔습니다만 어제 아침에 있었던 마법 같은 일이 있어서 제가 아주 새로움을 느끼고 신기함을 느꼈는데요. 주민자치 단체에서 쓰레기 분리수거 하는 녹색망을 나눠준 게 있어요. 쓰레기망(網), 그 쓰레기망에 쓰레기 담아서 버리면서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도 쓰레기인데 왜 우리를 사용하느냐? 우리도 쓰레기인데 우리를 쓰레기망으로 투명하게 사용하신다. 평소에 그거 보면서 늘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뭐가 마법같은 일이었느냐? 쓰레기를 금요일에 내놓고 토요일에 그 망을 수거하거든요. 분리수거망에서 쓰레기만 가져가고 그 망(網)을 그 자리에 놔두는데 아무리 봐도 우리 집 망이 없어요. 망이 다 똑같이 생겼기 때문에 망마다 이름을 써놓는데 아무리 봐도 우리 이름이 없는 거예요.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 또 없어졌어요.

그래서 화가 나서 용서가 안 되는 거예요. ‘죽어버려라. 지옥이나 가라. 어딜 남의 망을.’ 내 계획에 차질이 일어난 거예요. 우리 집은 망이 있어야 된다는 계획에 차질이 일어나 가지고 뭔가 하나님께서 현실적으로 자극을 주니까 복음이 어떠니, 나는 모든 것을 배우고 주님 안에 있다, 백날 해도 그것은 한순간에 지식으로 확 드러나고 나의 현실이라는 것이 다시 재구성 되었어요. 나의 현실이.

‘아, 어떻게 하지? 동사무소에 가면 다시 준다 했으니 거기서 다시 얻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운동 다녀와서 아내에게 물었지요. 망을 잃어버렸다, 하니까 아내가 하는 말이 망 찾았다, 하는 거예요. 여기서 저는 혼란이 일어났어요. 분명히 망 하나하나 손으로 다 헤아리면서 우리 망이 있나 찾았는데 우리 망은 분명히 없었어요.

분명히 없었기 때문에 망을 잃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저는 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천하에 주님이 와도 망은 없는 거예요. 주님이 와도, 하나님이 와도 망이 없어요. 왜? 내가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내가 보는 것, 내가 보는 것만 나는 받아들이거든요. 내가 보는 것, 여자 셋이 가서 예수님 시신을 봐야 돼요. 예수님이 무덤에 있는지 없는지 봐야 돼요.

왜냐? 그 장소가 내가 있던 현실의 연장이기 때문에 그게 만약에 틀어지게 되면 내현실 자체가 이게 혼란이 일어나요. 내가 구축한 현실 자체가 반칙이 되어버리거든요. 나는 나를 나답게 하기 위해서 이 현실은 내가 다지고 다진 현실, 이것은 절대 진리처럼 나한테 줘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내가 안정되게 살 수가 있어요.

분명히 망이 없는데 있다는 거예요. 그 뒤엣 말을 듣고 싶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나는 내가 옳고 싶었어요. 망은 분명히 거기 그 현장에 없었어요. 두 번 가봤어요. 두 번 다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이게 옳은 거예요. 망이 없어야 돼요. 없어야 기존의 내 현실이, 구축된 체계가 안 무너져요. 그런데 아내가 망이 있다는 거예요.

아무리 논리를 따져봐도 있다와 없다, 없다와 있다의 논리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우리가 망 이름을 쓸 때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 망도 있기 때문에 어머니 이름으로 적어놨는데 그쪽 동에서 자기 동의 망들을 따로 다 가져가 버렸던 거예요. 그래서 제 아내가 그쪽에 가서 찾아온 거예요.

이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뭐냐? ‘아, 이게 바로 새로움이다.’ 내 현실을 내가 안정되게 굳히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 노력을 주님께서 틀어지게 만들어 가지고 네가 만든 그 현실 자체 바깥에서 주님께서 너를 용납했다는 사실, 주님이 용납했다는 사실을 늘 새롭게 알려주기 위해서는, 여전히 우리는 내가 잘돼야 만사가 잘된 것이라는 이 기존의 절대적 나 위주의 세계를 주께서 계속 활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쓰레기로서. 쓰레기로서!

내가 죽어야 될 이유를 또다시 발견하는 거예요. 내가 살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뭔가 일이 안 돼야 되는데 잘 될 때는 뭔가 의심해야 되고요. 일이 잘 안 될 때는 안되는 것을 당연시 해야 돼요. 이게 뭐냐 하면, 내가 기대한 만큼 되는 게 절대로 아니기 때문에.

내가 여기 계속 살아야 될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 주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더 살아야 되고 내가 더 승자가 되어야 된다는 것은 성경 말씀에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아, 이말 이해 되어야 되는데…….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더 살아야 되고 내가 이 땅에서 패자가 아니고 승자가 되어야 될 이유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 내용이 안 나와요.

안 나오는데, 지금 내가 살아 있고 성경에 그 내용이 안 나오는데 내가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말은 이것은 바로 우리를 통해서 주님께서 용납을 했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용납을 했다는 그 용서의 피의 위력을 또 다시 우리에게 계속해서 선물로 주고 있다는 그 현상을 우리가 늘 새삼 다시 깨달으라고 우리로 하여금 얼추 잘되는 인생, 고요한 인생, 아무 문제 없는 인생을 끌고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실은 뭐냐? 진실은 바로 사랑의 진실, 오늘 본문에 맨다, 묶는다고 했는데 그 묶는다, 하는 사랑의 진실은 열왕기하 2장에 나옵니다. 이것은 찾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할 테니까요. 14절에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여기에 엘리야와 엘리사가 나옵니다. 엘리사 엘리야는 둘이 묶여 있어요. 엘리야가 옷 벗어서 요단강 물을 헤치니까,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엘리사도 스승님이 버렸던 그 옷을 거두어서 물을 헤치니까 홍해처럼 물이 갈라졌습니다. 따라서 이게 한 묶음이에요. 오늘 본문에 있는 대로 사랑으로 묶여진 거예요. 사랑의 끈으로 묶여진 거예요.

묶였는데 엘리야는 공중에 있고 엘리사는 땅에서 한 묶음 되어서 움직인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전에 봤던 골로새서 3장의, 네 생명은 하늘에 주님한테 있고 너는 이 땅에서 죽은 자로서 움직인다. 쓰레기로서 움직이는 거예요. 골로새서 구조가 사랑으로 묶어라, 해서 같은 인간들끼리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위와 아래가 사랑의 연으로 묶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사람을 상대하지 마시고 주께서 사람을 붙여주실 겁니다. 같은 집사로서, 같은 성도로서. 안 그러면 불신자를, 꼴 보기 싫은 불신자, 자꾸 돈 갖다 주는 불신자 있잖아요. 나로 하여금 돈 벌고 밥 먹고 살게 해주는 불신자들, 매일같이 만나고 연락 오고 전화 오고, 거래처에서 연락 오고, 계속해서 오는 거예요.

주께서 현실을 꾸려나가시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한테 당부합니다. “네 인생에 대해서 네가 복수에 나서지 말아라. 심판은 내게 있다. 네가 복수하지 마라.” 네가 네 인생에 복수할 잽이 되느냐 말이지요. “네가 뭐 잘났다고 남을 복수해?” 너는 내 인생 힘들게 했다, 그렇게 보복하고 복수하지 말라는 거예요.

누가복음 10장 29절에 보게 되면 세상이 얼마나 건방 떨면서 살아가는지의 모습의 단어가 나와요.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아, 여기서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옳게 보이려고. 이 모습이 얼마나 평소의 우리 모습인지. 인간은 자기가 옳게 되는 것을, 자기가 나서서 모든 것이 ‘COME’은 ‘COME’이 되고 ‘GO’는 ‘GO’로 되는 자기를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신명기에서는 이미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주의를 요했습니다. 신명기 18장 14절에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지 아니하시느니라.” 용납하지 않습니다. 10절에 보면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여기에 용납이라는 말이 나와요. ‘COME’, 받아들이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무당이나 점쟁이나 받아들이지 말라는 말이 뭐라고 해석이 되느냐 하면, 너를 위하여 유리하다고 하는 모든 것은 너의 스케줄과 계획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여기 나오는 무당이나 박수, 요술하는 자, 점치는 자들, 이들은 오늘날로 치면 교회 목사들이지요.

목사들이 하는 짓은 뭡니까? 항상 긍정적인 희망을 주는 자들 아닙니까? 그게 바로 무당하고 똑같은 것 아닙니까? “당신을 위해서 하나님은 계십니다.” 이게 무당들이 하는 짓이잖아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주의 종이 아니에요. 그런 무당들 욕하기 전에 본인들은 교회 왜 나왔습니까? 바뀌려고 나왔지요. 뭐가 바뀝니까? 내 인생 내가 쥐고 있다가 그걸 넘겨줘라, 이 말이지요.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어떻게 해보려 하지 말고 지금 살아 계시고 나름대로의 어떤 다른 현실 주님만의 현실을 만들어 나가시는 그 현실 속에 자기를 넘겨줘야 되지요. 그리고 넘겨받았으면 그 새로운 현실과 나 위주의 현실이 얼마나 일상생활 가운데 부딪힌다는 사실을, 매일같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 입으로 고백해야 돼요. “우리는 오늘도 주님 앞에 얻어터져야 마땅합니다.” 이런 것.

끝으로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솔로몬이 성전 짓고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열왕기상 8장 27절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우리가, 감히 피조물이 어떻게 하나님을 용납합니까? 우리가 우리한테 ‘주님 믿으면 네 미래가 풀리고, 천국 가고, 예수 믿으면 내가 죽어서 천당 간다.’ 이런 식으로 계획 짜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 속에 용납이 안 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납했기 때문에 예수의 피를 나타내기 위해서, 용서하는 죄사함의 피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받아줬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앞에 들어올 수 있게 용납된 것이지 우리가 예수님을 이용할 생각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용납할 수 없는 인간인데 주께서 용납했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 죄사함을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내셨습니까? 그냥 나 잘난 맛에 살도록 그냥 왜 방치를 안 하셨습니까? 주께서 찾아왔다는 이 증거가 일상의 삶을 통해서 치열하게, 내가 주인공 되어서 무엇이 더럽고 깨끗하다고 구분하는 이 쓰레기 같은 안목하나님이여, 날마다 지적하면서 예수의 피용서만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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