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선택의 내막

아빠와 함께 2021. 6. 14. 03:20

선택의 내막 

2021년 6월 13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3:12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오랫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탐구해 왔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방식이 자기 선택적 의식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즉 ‘내가 나를 선택하는 것을 놓치지 않는 그 범쥐’ 내에서 하나님의 선택은 이루어질 것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을 맞이하는 바로 그 곳에 ‘내가 나를 선택하는 작용’ 있음을 감안하지 못한 겁니다.

아담의 후손으로서 인류는 아담에서부터 벌써 ‘자기 선택’에 의해서 살아왔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자기 선택이 빠진 대목이 없습니다. 그 결과, 유대 사회는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진 민족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사회에서 예수님께서는 환영받지 못하고 살해되어야 했습니다.

즉 진정한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들의 ‘선택행위’를 비켜나가신 겁니다. 여기서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선택이 충돌이 일어납니다. 인간의 선택은 관할지역을 만들어냅니다. 그 영역에는 온통 자기 선택으로만 가득찹니다. 신혼 부부의 살림집에서 넓게는 한 국가에 이르도록 이런 속성은 퍼져있습니다.

인간 선택의 특징은 ‘자기 되먹임’입니다. 입력해서 얻어진 출력값을 다시 입력값에 집어넣을 때, 인간들이 미리 예상못한 새로운 결과들이 진실로서 대우받으면서 반기게 됩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의 지식에서 나온 결과를 다시 자기 지식으로 집어넣어 전보다 더 세련되고 깊이있는 진리를 만들어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존재 자체를 문제삼습니다. 즉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인간에게 더 좋을뻔한 사태’를 이끌어내는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를 예를 들겠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 26:24)

여기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더 좋을 뻔 한 정도’로 인간들을 처참한 궁지로 몰아넣게 되는 진실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6:53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인간에게 생명, 곧 영생이니 천국이니 생명이니 하는 것을 철저하게 가로막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들이 그동안 들었던 신학적 교양이나 지식들을 끌어모은다고 해서 생명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용쓰고 애쓰고 생명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의 그 어떤 노력에도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을 수 없습니다. 인간들의 예수님에 대해 태도는 살해의지 뿐입니다. 곧 인간들의 선택은 하나님의 선택을 배척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12명의 제자를 선택합니다. 이 선택을 시작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십니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 이는 기존의 이스라엘을 소위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으로 처주지를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즉 기존의 이스라엘로 인해 ‘잃어버린 자’들이 나오고 그 ‘잃어버린 자’들이 진짜 이스라엘입니다. 그 원인은 바로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이 주어지는 원리에 담겨 있습니다. 야곱이 천사와 대결하면서 야곱의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종류의 이스라엘을 생각하셨습니다.

그것은‘기존의 이스라엘로부터 배척받는 이스라엘’의 등장을 의미합니다. 그분이 바로 새로운 12지파를 구성할 권리를 지니신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에 의해서 선택받은 자들은, 기존의 인간선택으로부터 비난과 핍박을 받는 자들이 됩니다. 기존의 12지파 공동체라는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자기를 선택한 단체인 것을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야 그들이 참된 이스라엘이 아님이 드러납니다. 그들 중, 누구라도 ‘자신은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어야 영생얻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2제자들을 통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구성하는데 있어, ‘인간의 선택’과 전혀 다른 ‘하나님의 선택’이 등장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5장에서 어느 귀신들 딸을 가진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그 제안을 거절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마 15:24)

여기서 여인은 다음과 같이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양’을 표현해 냅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즉 기존의 이스라엘로 인하여 개취급받는 바로 그들 속에 진정 ‘잃어버림’이 성립된다는 겁니다.  즉 기존의 이스라엘로 인하여 사람취급 못받고 배척받는 그들이야 말로 진정‘잃어버림’의 의미를 합당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은 자신의 처지를 그냥 ‘개’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관련지어진 ‘개’로서 보기 때문입니다. 즉 진정한 이스라엘은 이처럼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부터 ‘잃어버림’을 당한 자로 규정받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택하신 12제자 몽땅 다 예수님 자신을 배신토록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선택으로 인하여 잃어버림이 되는 상황을 그들로 통해서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그 대표되는 두 사람이 가룟 유다와 베드로입니다. 둘 다 예수님을 배신했지만 가룟 유다는 끝까지 자기 선택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에게는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물로 여기시면서 되찾아내십니다.

여기서 바로 ‘잃어버림’의 취지가 살아나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므로서 인간들의 자기 솜씨의 되먹임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기 몸의 되먹임인 살과 피를 계속 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오로지 예수님의 몸의 증인이 되는 제대로 된 이스라엘이 되게 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사 43:10)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이 갈수록 나의 선택으로 인한 예수님의 흘리신 피만 부각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2강-골 3장 12절(선택의 내막)210613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3장 12절입니다.

골로새서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하나님의 택하신 자’라는 이 단어는 이사야 43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이야기를 강조했는데요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망하기로 예정된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파쇄되어 버렸어요. 뿔뿔이 다 헤어졌습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없어요. 이스라엘 나라가 있었어요. 있었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고 하나님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해체 시켜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이 있다. 그다음에 이스라엘이 없다, 에서 나타나는 것은 단 하나, 시작하신 분도 여호와 하나님, 없는 것을 만드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 그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행하심 그것만 부각이 되는 겁니다. 이사야 43장 1절에 보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 말씀, 회사 부도났던 사람이 교회 처음 왔을 때 이 말씀만큼 위로되는 말씀이 없어요. 너는 내 것이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하시는 말씀이거든요. 예언 자체가 실현된 지점이 망하고 난 뒤에 이 말씀이 적용되는 거예요.

망함으로써 나라는 것, 내가 기대하고 목표했던 것이 망함으로써 여호와의 생각과 우리 생각이 달라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여호와를 안다든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 아는 내가 안다고 우긴 내가 몰랐구나, 내가 잘못 알았구나, 라고 깨닫게 되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는 겁니다.

너는 나의 증인이 되어라, 라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살아서 훌륭하게 되어서 나의 증인 되어라, 라는 것이 아니라 네가 망함으로써 비로소 안 망할 때 몰랐던 그 여호와가 그게 가짜였다는 사실, 내가 망해야 비로소 여호와를 알게 되기 때문에 이러나저러나 여호와의 증인 된다는 그 사실이 내 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고귀한 자산인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구약의 이스라엘의 운명, 망하고 그다음에 망하게 하신 분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이스라엘 증인이 되게 하는 이 절차는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도 예외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만만하신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보고 열심히 망하지 말고 제대로 하나님 아들 하라고 부추긴 쪽은 광야에서 악마였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사람들에게 죽는다고 이야기할 때 그때 베드로가 나서서 적극 말렸습니다. 우리가 안 망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할 때 예수님이 베드로보고 하는 말씀이 사탄아, 그게 바로 사탄의 생각이에요. 그게 바로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현재 인간 나라의 통솔자 통치자의 의식이 바로 너희들 안 망하게 해줄 게, 이게 악마의 생각인 겁니다.

교회에 교인들 왔을 때 목사가 교인들보고 장담하기를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 왔으면 안망하게 해줄게요, 그거 악마를 당회장으로 모신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의 증인이 될 수 없어요.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리원칙에서 이탈하는 겁니다. “안 망하려고 오셨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당신의 증인입니다. 당신의 잘남의 증인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제는 망할 수 있는 자유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설교해야 되겠지요.

도망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도리어 죄가 어디 있는지 그 죄 속에 들어가는 것이 자유라는 겁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아무리 꿈꿔도 실천에 옮길 수가 없어요. 나쁜 사람과 멀어짐으로써 상대적으로 자기가 잘남의 보람을 얻겠다는 것이 세상살이잖아요.

그래서 누가복음 18장에 바리새인이 세리보고 하는 유명한 말이 나와요.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 감사하는 이유가, 저 죄수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주님께서는 땡, 탈락이다. 그게 천국의 탈락이에요.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왜 사람들이 예수님이 메시아인 줄 못 알아보는지 의아해합니다. 기적 베풀어줘, 물 위 걷게 해줘, 그다음에 오병이어로 떡 줘, 죽은 사람 살려줘, 귀신 나가게 해줘, 귀한 말씀 골라서 해줘, 뭐가 부족해서, 뭐가 아쉬워서 같이 참여했던 열두 제자들이 결국은 예수님 버리고 다 도망갔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느냐? 예수님 주변에, 예수님 측근에 있던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우리는 아주 의아해 합니다. ‘그것 참 고약한 일일세. 도대체 납득이 안되네.’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보고 이야기합니다. “네가 납득이 안돼, 네가!” 그들보고 욕하는 네가 너를 지금 모르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모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우리가 매일같이 선택한다는 겁니다. 아담이 그랬었어요. 아담이 선악과 따먹지 말라 할 때 아담은 선악과 따먹는 쪽으로 선택했습니다. 물론 뒤에서 뱀이, 악마가 부추겼지요. “네가 좋은 미래를 놔두고 왜 바보같이 그걸 안 따먹어? 네가 그걸 따먹는 날에는 그 순간부터 불행 끝 행복 시작이다. 너는 이제 신이 되는 거야.”

신이라는 것은 어떤 지식만 확보하면 신이 될 수 있는데 그 지식이 무슨 지식이냐? 선과 악을 분별하는 지식이라고 악마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거예요. 악마는 이미 알고 있어요. 천사니까. 선과 악을. 그런데 인간은 모르니까 따먹는 순간에는, 하나님이 하는 일이 선과 악을 분별하는 거니까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 끌려다니지 말고 네가 선과 악을 판정하는 재판장, 네가 최종 선택자, 결정자가 되면 된다는 겁니다.

알고, 선택하고, 그리고 신이 되고. 이 원칙 이게 얼마나 유혹적이고 매력적입니까? 내가 하는 내 의미를 내가 결정한다는 거예요. 내가 누구냐, 내가 어떻게 살 거냐, 하는 그것은 내 손안에 담기도록, 그걸 관할이라 하는데 인간이 선택을 해버리면 내 관할지역이 생겨버립니다. 내 관할지역이.

물론 그 관할지역이 크게는 국가가 될 수도 있지만 작게는 강아지하고 사는 자기 방 하나가 자기관할지가 되겠지요. 크게는 비빔밥 고명을 부수지 않고 다 고명을 살리는 식으로 그런 식으로 한 나라의 다를 지배하는 자기 관할지로 삼을 수가 있을 겁니다. 그 관할지에 흐르는, 차지하는 원칙은 내가 선택했다는 겁니다. 내가 선택한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12절에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바로 이사야 43장에서 이야기했던 너는 택하신 족속이고 민족이다, 그걸 그대로 신약에 와서 완성된 입장에서 적용하고 있습니다.

택함이라 할 때 예수님께서 또는 사도바울이 굳이 내가 너희를 택했다고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이사야 43장에 보면 이스라엘을 택했다, 그걸로 우려먹어도 충분하지 않느냐? 왜 새삼스럽게 나는 너희를 택한 자라고 언급을 하시는 이유가 뭐냐? 그 중간에 무슨 사건이 있었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는 겁니다.

그 중간에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죽을 때 예수님이 누구한테 죽었느냐 하면, 바로 구약의 이사야 43장을 철석같이 믿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이다, 그 민족에게 메시아가 살해를 당했습니다.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이 선택이라는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이라 할 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했다 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문제 삼지 않고 자기를 문제 삼지 않고 다만 선택했다는, 선택이 없었는데 선택을 약속했다는 그 약속하나 붙들면 이것은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된다, 라고 그들은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붙들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걸 믿음이라 하지요, 그걸 믿고 그러면 하나님의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된다는 그것이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하면, 아담의 자기 선택성의 연속에서 나온 거예요. 그 바탕에서 나온 거예요.

인류의 조상 아담은 선택했어요. 그 선택을 해서 관할지가 생겨버렸습니다. 내가 살아갈 삶의 터전은 쉬지 않고 선택, 선택, 선택, 내가 한 선택의 연속으로서 마련된 것이다. 따라서 내 앞에 메시아가 오든 말씀이 온다면 나는 그것을 선택하게 되면 내 선택에 의해서 그 말씀은 내 안의 현실이 된다. 달리 그 외에는 생각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요.

그런데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십자가 사건이 이루어지는 그 절차 가운데서 주께서 인간의 선택과는 전혀 차별 나는 다른 선택을 따로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선택했습니다. 지금 유대민족 이스라엘 자체가 열두 지파에요. 이미 선택한 것이 있어요. 그 전에 구약성경에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한 것이 있다고요. 열두 지파라는 것이 있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그 열두 지파를, 주님께서 오셔서 그들을 그대로 몽땅 데리고 가면 되잖아요. 열두 지파니까, 이스라엘 지파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새삼스럽게 그 열두 지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묻지 않고 열두 제자를 따로 뽑아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시작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전에 있던 열두 지파는 뭐고 예수님은 무슨 취지에서 열둘을 따로 뽑았느냐? 그 취지는 뭐냐 그 말이지요. 이게 분명히 같지 않아요. 같지 않으니까 따로 뽑은 거예요. 그리고 말씀하기를 내가 너희를 선택했다고 한 거예요. 이미 이스라엘은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선택을 받았는데 이미 선택받은 민족이 하나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그 전체 이스라엘이 영원한 이스라엘로 꾸준히 가도 누가 이의 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요 자기가 이스라엘 된 것을 선택으로 여기고, 이방 민족은 선택 안 했으니까 자기들을 선택한 것으로 여기고 아무 생각 없이 그게 정상인 줄 알고 그냥 간 거예요.

그 선택, 하나님이 자기 민족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 그들은 어느 누구도 거기에 대해서 이의 걸고 이게 아닌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해 준 것을 고맙게 여기고 감사하게 여겼습니다. 이스라엘 자체에 문제 있다는 생각을 어느 누구도 감히 한 사람이 없어요.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열둘을 선택하시고 어디를 보내느냐 하면, 이방길로 안 보내요. 이스라엘로 꽉 차 있는, 열두 지파로 꽉 지배 되어 있는 그 이스라엘 땅으로만 가거라. 12가 구성되어 있고 12가 지속 되고 있는 그 자리에 새로운 12가 거기서 시비를 걸어라, 그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 시작했다고.

마태복음 10장 5, 6절에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그렇게 해서 기존의 이스라엘을 무슨 이스라엘로 보느냐 하면, 잃어버린 양으로 봐요. 잃어버린 양.

전부 다가 잃어버린 게 아니고 잃어버린 양이 포함되어 있는, 잃어버리게 만든 수상한 이스라엘로 보는 거예요.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을 잃어버리게끔 조성되어있는 나쁜 이스라엘, 가짜 이스라엘, 지옥 갈 이스라엘로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이스라엘 지파를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는 여호와로부터 선택되었다는 거예요. 이사야에 나오지요. 또 출애굽기에 나오지요. 이스라엘 역사 전체가 선택되었다는 말이 한두 번 나오는 게 아닙니다. 분명히 이것은 확언하건데, 확실하건데 우리는 선택되었다는 거예요.

여기서 선택의 개념이 둘로 나눠질 판이에요. 예수님의 선택이 선택이냐, 아니면 기존의 이스라엘선택이 선택이냐? 어느 선택이 진짜 하나님이 원했던 선택이냐? 결국 끝에 가면 어느 것이 진실된 선택인지 드러나겠지요. 특히나 예수님께서 그 이스라엘 안에 잃어버린 양이 있다고 말함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진짜 하나님의 이스라엘 양을 잃어버리게끔 생산하는 더러운 이스라엘로 간주해버려요.

너희들이 아는 이스라엘은 오히려 하나님의 진짜 양을 잃어버린 양으로 취급받게끔 그렇게 정신적으로 조성되어 있는 엉터리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열둘을 택하여 보내는데 그 열둘 안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사탄이 들어 있어요. 악마가 들어 있어요.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요, 열두 명을 택했던 열두 제자가 진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과 절차를 경유해야 됩니다. 어떤 절차, 선택은 어떤 절차와 과정을 낳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진짜 선택되었느냐 안 되었느냐, 하는 것은 그 선택된 과정속에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택하시고 열두 제자가 몽땅 다 예수님을 배신했고 그 배신한 가운데서 둘로 나뉩니다. 주님이 되찾아오는 제자와 주님이 되찾지 않는 제자로 둘로 나뉘어져요. 따라서 예수님의 선택은 이 세상에 나타날 때 두 가지 선택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찾지 않는 선택과 내가 찾는 선택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오늘날 선택에는 오늘날 성도에게 성령을 통해서 어떤 일을 반복하느냐 하면, 내가 택함을 받지 못하는 나와 하나님 앞에 되찾음을 받는 나가 둘 다 내 안에 둘 다 들어 있는 그 기능이 살아 있는 식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는 겁니다. 무척 어려운 이야기인데 벌써 아멘이 나오네요. 이게 엄청 어려운 이야기에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마태복음 26장 24절을 보겠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이 말씀이 얼마나 어려운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할 때 이 기록 속에 가룟유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룟유다가 기록된 대로 예수님을 팔아넘겨야 돼요.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기능을 그대로 발휘하게 되면 거기에 두 종류의 사람이 나타나는데 태어나서 좋아해야 될 사람이 등장하고요 태어나지 않았으면 오히려 더 좋을 뻔 한 사람도 동시에 태어난다는 거예요. 지금까지는 어려운 축에도 들지 않습니다. 뭐가 어려우냐 하면, 차라리 태어나지도 않은 것이 좋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 안 좋다, 를 판정하려면 필히 그 사람이 태어나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미 태어난 이후에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 라는 말을 굳이 들어야 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이러나저러나 좋을 뻔 한 일이 있을 리가 없어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고 나쁘고 따질 태어난 인간조차도 없기 때문에 태어난 줄도 모르게 되고요.

그러나 일단 태어난 사람보고 하는 말이 너는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다, 하는 것은 이것은 태어나서 어떤 결과가 왔든 이것은 안 좋은 나가 되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본인에게 어쩌라고? 어쩌라고! 그러면 이 말씀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은 자기 인생이 좋다 나쁘다를 선택할 권한 조차가 태어날 때 지니고 있지 않다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 운명을 선택할 권한이 없이 태어났다 그 말입니다. 인간이 태어난 것은 오직 예수님의 선택과 동반해서 예수님의 선택이 선택답게 부각되기 위해서 인간이 동반해서 태어나는 그것이 전부에요. 그게 끝이에요. 내게 유리한 선택은 없습니다. 내가 천국 가는 선택은 없어요. 내가 구원받는 선택은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없어요. 그런 생각을 한다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되는 인간들입니다. 가룟유다 같은 인간들이에요.

지금 교회에서 사람들이 자꾸 구원받아라, 이렇게 하니까 구원을 너무 평범한 것으로 얼추 가능한 것으로 여기는데 요한복음 6장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57절에 보면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여러분 잘 알다시피 53절에 보면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생명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로 불가능하냐 하면, 다른 사람, 타인의 살과 피를 마셔야 생명을 얻게 돼요. 교회 와서 믿고 자시고 성경공부하고, 이래 가지고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타인의 살을 먹고 타인의 피를 마셔야 돼요.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가당치 않은 겁니다. 불가능한 거예요. 사람의 선택이라 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해야 선택대상이 됩니다. 그리되면 길가는 사람 죽여서 그 살과 피 빨아먹으면 됩니까? 사슴 피 빨아먹습니까? 살 도려내서 인육을 먹어야 생명을 얻는다면 도대체 그 사람이 어느 사람이며 칼 쥐고 달려들어서 그 사람의 살과 피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것보다 더더구나 인간의 선택에 대해서 의심이 드는 것은, 과연 하나님께서 생명 주시기 위해서 그 정도까지, 난관과 처참함을 유발하는 그런 짓까지 시켰겠는가? 그게 의심이 되는 거예요. 설마 그렇게까지 해야 생명 얻을 정도로 그 정도로 난감하게 인간들을 만들 필요가 있었겠는가? 사랑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고 자꾸 우리 자체가 의심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아담의 선택을 너무 얕잡아 봐서 그래요. 아담의 선택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우리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인간 세상사 전부가 선택의 연속입니다. 여러분이 과학이라든지 학문 철학, 이 모든 학문은 자연현상을 모델링하는 거예요. 모델링할 때 아담의 선택으로 그대로 인간이 필요한 것과 필요없는 것을 계속해서 선택합니다.

어떤 것을 선택할 때는 나중에 인류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선택한다. 이런 근거가 있어줘야 학문으로 인정받아요. 인간에게 도움 되지 않는 것, 외계인한테 도움 되는 것 그런 것은 선택할 필요 없지요. 그래서 인간의 선택으로 인하여 무엇이 자꾸 제껴지느냐 하면, 내 살과 피를 네가 마셔야 네가 천국 간다 하는 그 사실이 자꾸 제껴져요.

그것은 엄청나게 참혹한 일이잖아요. 인간의 그 착한 양심과 착한 근성에 너무나 위배되는 이야기라고요. 남의 살을 뜯어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은 야만인도 그런 짓을 함부로 안 해요. 큰 축제 때나 하지 함부로 안 하거든요. 그것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온 사람들을 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 갓, 하고 제식훈련 하듯이 뒤로 돌아 갓, 하고 다 돌려보내는 겁니다. 돌려 보내버리는 거예요.

뭔가 주님한테 기대 걸어서 온 사람들은 다 돌려보내는 거예요. 왜냐하면 너희들은 너의 선택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인간이 학문을 연구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의 과학 문명이라 하는 것은 끊임없이 선택하고 그 선택이 누적된 겁니다.

어떻게 누적하는가? 인간은 자기가 선택하고 선택한 결과를 가지고 다시 처음으로 되먹임, 피드백이라 하지요, input, 집어넣어서 생긴 결과물을, 입력해서 출력물이 나온 그것을 되먹임해서 그것으로 다시 예상 못한 새로운 출력을 야기하는 것, 인공지능도 그렇게 만들었어요. 심화학습 시키는 거예요. 결과를 다시 원재료로 해서 또다시 끄집어내면 예상 못한 새로운 것이 나온다는 겁니다.

은행에 돈 예금해서 이자 받는 복리라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이자율이 백퍼센트라 합시다. 돈 백만 원이 1년 뒤에 2백만 원 되거든요. 어떤 수학자가 계산해 봤어요. 1년 후에 백 퍼센트 이자 받아서 2백만 원 되는 것보다 내가 투자한 돈을 최대로 끌어내는 방법은 없을까?

옳지 1년에 백 퍼센트니까 6개월은 50 프로. 1년에 백만 원 넣어서 6개월 뒤에는 150만 원. 그 150만 원을 다시 50 프로 이자로 계산하니까 6개월 뒤에는 225만 원 나와요. 25만 원 이익 봤어요. 수학자가 거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이걸 더 끊어보자. 1년을 두 번으로 나눴는데 이걸 네 번으로 나누면 어떻게 될까? 네 번이 아니라 무한대로 나누면 어떻게 될까?

무한대로 나누면 그 이자율이 2.71828……, 이런 식으로 나와요. 그게 자연지수 ‘e’라고 표기하는 거예요. exponential, 기하급수라고 나오는데 수학에서 ‘e’ 라는 자연상수가 거기서 나온 겁니다. 그게 뭐냐? 되먹임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 내 선택을 다시 나에게 선택하는 거예요. 어디에다가? 내 몸에다가, 내 육신에다가, 내가 알고 있는 지식에다가.

성경 알고 십자가 복음 알았다. 그다음에 신학을 어떻게 하느냐? 신학은 아는 십자가 복음에다가 다시 성경 가지고 또 십자가 복음 엮어보는 거예요. 되먹임해 보는 거예요. 신학이 신학을 낳고 철학이 철학을 낳고. 백날 해봐야 2.71828…… 밖에 안돼요. 자기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역사는, 역사는 흐른다~, 흘러가서 인공지능까지 만들어낸 겁니다. 끝까지 자기선택을 포기를 못하게 되어 있어요.

열두 제자가 예수님하고 권능을 행할 때에 놀라운 사실은 그 속에 가룟유다가 예수님의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냈다는 거예요. 가룟유다가, 열두 제자 모두 다 주님의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줄곧 활동을 함께 했어요. 그러나 그 열두 제자 모두 다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데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모두 다 배신했어요.

그들은 주님이 하신 일을 시키는 대로 열두 제자답게, 새로운 이스라엘답게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서 했는데 하면 할수록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선택을 악마의 선택으로 더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그 작업이 예수님의 선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아야 되었던 겁니다.

구약 요나 같은 경우에 니느웨 성에 요나가 심판을 선포했잖아요. 심판을 선포할 때 의외의 결과가 나타났어요.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요나는 40일 동안 해야 할 것을 사흘 만에 툭 던져놓았어요. 40일 만에 멸망한다 해놓고 멸망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요나는 그냥 무심코 던진 그 말을 듣는 니느웨 사람들은 아주 진지하게 찐, 찐, 찐 진짜로 들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니느웨 사람들이 세상이 끝났을 때 내가 지금 지니고 있는 지식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세상 끝날 때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심판받았다는 그 모습을 금식이라는 모습으로 다 드러낸 거예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심판의 소식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심판의 소식을 전하는 그 인간 자체가 문제라는 거예요.

십자가를 전하는 그 인간 자체가 이게 땡 탈락이 되는 거예요. 제자들은 십자가를 전하고 예수님 복음을 전함으로서 자기는 좋은 편에 서 있다고 생각을 한 거예요. 우리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다는 그런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 주님 최고야, 우리 주님 댓방 최고야, 이제는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이젠 안 망해, 이러고 복음을 신나게 전한 겁니다. 마치 자동적으로 자기가 주님과 한패인 것처럼 여겼던 거예요.

열두 제자 모두 다, 모두 다예요. 복음 전하는 자가 복음에 잘린다는 생각을 감히 못한 겁니다. 복음을 전하는 기능을 했다고 해서 그게 하나님의 확실하게 선택되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선택할 때 제자들은 뭘 몰랐느냐? 야곱의 아들이 열두 명이거든요. 야곱의 이름이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야곱이에요.

그러면 이름이 두 종류에서 나온 그 자식을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만드는데 있어서는 두 종류의 타입이 등장해요. 하나는 야곱적인 타입의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적 타입의 열두 지파가 따로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름이 두 개니까. 이름이 두 개라는 말은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두 종류의 하나님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이 이 세상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래적으로 두신을 만들기를 원했던 거예요.

이 하나님이 사탄을 선택하신 거예요. 그중 하나는 사탄이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요한복음 6장 70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 열둘을 택한 것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택한 자들중에 누가 포함되어 있느냐? 마귀가 포함되어 있어요. 하나는 마귀니라.

예수님은 마귀를 택한 거예요. 하나님의 선택은 마귀의 택함과 그 마귀의 마귀 짓을 하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이 세상은 아담의 선택에 의해서 아무리 인간들이 노력을 해도 자기 생각에다 자기 생각을 더 보태는 것 밖에 못해요. ‘더 하기’ 밖에 못한다고요.

어느 인간도 생각하면 생각하고, 연구하면 연구하고, 성경 공부하면 성경공부 할수록 자기가 점점 더 나아진다는 의식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요. 더 망한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자기가 안 망하는 사람이 되어버리면 그중에서 인간선택에서 뭘 놓치느냐 하면, 열두 제자 몽땅 다 배신했다는 그 사실을 인간들은 자기선택 속에서 포함 안 시킵니다. 그걸 빼버립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차라리 네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태어나게 하시잖아요. 다시 말해서 태어났다는 그 자체가 그걸 긍정적으로 좋게 보지 말라 그 말입니다. 인간은 태어났냐? 그러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된다는것에서부터 새로 출발해야 된다는 거예요.

왜? 인간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도리어 나은지를 그것은 가룟유다부터 새로 시작하자.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 사건부터 새로 시작하자는 뜻이에요. 가룟유다가 없으면 십자가 사건이 터지지 않습니다. 가룟유다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어요. 주도적인 역할을 한 가룟유다는 그 주도적인 역할을 하라고 예수님께서 일부러 선택한 존재입니다.

주님이 자기 존재를 위해서 내가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전혀 다른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은 가룟유다를 선택했고 가룟유다로 하여금 예수님 자기를 팔아먹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신 겁니다. 그 가룟유다의 시작은요 모든 인류의 시작이에요. 아담의 시작입니다. 가룟유다가 귀신을 쫓아냈다니까요. 가룟유다는 예수님 열두 제자잖아요.

이 말은, 어느 다른 제자가 ‘저 가룟유다는 수상해. 저건 우리와 같이 하지 못해.’라고 눈치챈 열두 제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인간이 그 인간인데 뭘 눈치채요. 어떤 인간도 가룟유다가 배신 때린다는 것은 가룟유다가 배신하고 난 뒤에 알았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저와 여러분 중에 아무도 모르도록 일하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선택이에요.

주님의 선택 알아서, 그걸 이용해서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작자들은 그것은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사람이에요. 차라리. 가룟유다지요. 가룟유다를 빼놓고 무슨 십자가를 언급합니까?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생명, 천국, 구원은요, 예수님의 살을 먹어야 되고 예수님의 피를 마셔야 돼요. 뭐 지식 하나 대충 알아 가지고 그것 알아서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이건 엄청난 겁니다. 이건 불가능한 이건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에요. 남의 살을 먹고 남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요. 아는 재주 가지고 아는 요령, 지식 가지고 신학 배운 것 가지고 이래 맞추고 저렇게 맞추고 해 봐야 그것은 자기 되먹임이에요. 인간의 모든 문명은 현실을 모델화 시키는데 그 모델의 주인공은 내가 살기 위한 모델이에요. 내가 정당화되기 위해서 내 선택은 옳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모델화시키는 겁니다. 자기변명이지요 뭐. 끊임없이.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아무리 인간이 객관적이라 해도 일단 버스를 타면 버스 편이 되고 택시 편이 안 돼요. 버스하고 택시하고 차 사고 났을 때. 자기가 탄 버스 편이 된다고요. 백신도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맞으면 아스트라제네카가 무조건 좋아야 돼요. 다른 백신, 모더나 백신은 안돼. 왜? 내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맞았기 때문에.

인간은 주어진 상황을 나의 선택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용도로 끌어모읍니다. 비겁한 변명이지만 하여튼 무조건 다 끌어모아요. 따라서 출발을 가룟유다부터 출발한다면 어느 인간도 하나님의 선택받아 구원받을 자격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이해하는 이스라엘은 바로 유대 사회가 생각한 이스라엘 그게 최종적이고 그것이 옳다는 식으로 마감이 돼요.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한테 죽었는가? 바로 이스라엘한테 죽었어요. 이스라엘한테 죽음으로 이스라엘이 예수님에게 와서야 비로소 두 종류의 이스라엘이 있다는 것이 비로소 밝혀지지요. 한 종류는 기존의 유대 사회고 다른 종류는 없어요. 예수님 빼놓고는 없습니다. 열두 제자가 다 도망갔기 때문에 없어요.

뭐가 남아 있느냐? 12라는 숫자만 남아 있습니다. 11도 아니고 10도 아니고 13도 아니에요. 딱 12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오순절 날 빨리 빠져 있는 숫자 하나 마저 채우는 겁니다. 꼭 12이어야 돼요.

왜냐하면 12라는 것은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면서 두 개의 이름을 가진, 그 두 개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 두 이름 사이에서 이쪽 야곱 쪽 이름과 이스라엘 쪽 이름이 어떻게 대척 관계에 있었고 서로 합할 수 없는 관계인 것을 그 자식들 열두 명을 가지고 이제는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펼쳐 보여주는 거예요.

그 열두지파가 하나님 메시아마저 어떻게 죽이는가를 한번 보라는 말이지요. 따라서 야곱은 절대로 이스라엘이 될 수가 없어요. 야곱은 야곱 다워야 됩니다. 기록된 대로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되는 것이 옳았다 그 말이에요.

제 설교를 정리하자면 인간에게는 좋은 경우는 허락되지 않는다. 어떤 인간세계에 좋은 경우는 아예 생각들을 하지 마세요. 나지 않았다면 좋을 뻔 했을 때 태어났다면 이제 좋은 것은 끝났습니다. 없습니다. 좋은 것은 없어요.

그게 가룟유다를 통해서 이야기하신 거예요.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이 택했다는 말은 생뚱맞은 겁니다. 선택 이해 자체가 이미 잘못되었다는 것을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미 다 드러났는데 그래서 다 거덜 났는데요. 그래서 우리는 이제 선택 자체도 겁나요. 선택 믿는 것도 지옥 가기 위해서 믿는 것밖에 안되거든요. 인간의 자기선택은요.

그런데 본문에서 선택을 언급한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그것은 바탕이 성도한테는 두 가지 다가 있었던 거예요. 성도한테는 성령이 와서 뭐가 있느냐 하면, 가룟유다 잃어버리고 열두 제자 다 배신했는데 그 배신한 가운데서 주님이 열한 명에게 찾아왔어요. 되찾아가는 거예요.

주님으로 하여금 새로운 해석이 주어지는데 뭐냐 하면, 너희들은 나를 선택했다. 하지만 나는 너희들의 선택을 개무시해 버리고 내가 너를 어떤 차원에서 선택했느냐 하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차원에서 나는 너를 선택했다는 겁니다.

네가 메시아를 제대로 알아봐서 네가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잃어버린 것 여기 있었네, 하고 주님이 이스라엘을 만드신 본인이 되어 가지고 잃어버린 양을 주워가듯이 찾아온 거예요. 찾아와서 그들이 새로운 이스라엘을 형성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찾아왔음, 내가 구원되었음, 말고 찾아왔음이 유지되려면 나는 찾기 전의 모습, 찾아지지 않은 그 자아와 찾아진 자아, 그 두 개가 우리 안에 동시에 다 박혀 있어야 돼요.

그래야 왔다 갔다 하는 그 유동성이, 주님의 활동이 계속 살아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교회 처음 나올 때 자기가 베드로인 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성령이 오게 되면 베드로가 되는 것이 아니고 갈수록 가룟유다임을 알게 됩니다. 야, 복음 전하고 귀신 쫓아내고 헌금하고 다 했는데 결국은 자꾸 의심이 드는 것이 내가 헛짓 했다, 그동안 내가 교회 50년 다닌 것이 신앙생활 한 것이 헛짓 아닌가, 헛짓한 것 같은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신학교 가서 목사 되고 개척교회 열 곳 해도 이거 다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짓 한 것 같은데요, 라는 생각을 성령에 의해서 부추김을 늘 받아줘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자기 되먹임이 되어버립니다. 나 괜찮다. 괜찮은 데다 또 괜찮은 말씀 들어왔다. 더욱더 괜찮다. 괜찮은 데다 또 들어왔으니까 이것은 이자의 이자를 낳아서 복리이자가 된다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매일같이 가룟유다부터 출발해서 베드로 되게 하시면서 그곳에 주님께서 늘 들락거리면서 찾아주시는 것이 있어요. 이름을 찾아주시는데 그게 마태복음 15장 13절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진짜 하나님이 심은 것만 내가 찾고 나머지는 가라지로 다 뽑아낸다, 라고 하시면서 그러면 이 세상 바닥은 어떻게 되느냐? 바로 가라지가 있겠지요. 그다음에 22절에 보면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면서 자꾸 보채지요. 2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한다, 라고 했을 때에 딸이 귀신들린 이 엄마는 ‘아, 안 되겠네. 주님이 배짱 튕기는데 내가 고집해도 소용없다. 가자, 가자. 예수님은 이스라엘만 챙긴데.’라고 갈 수도 있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무엇에 관심을 두느냐 하면, 잃어버린 양이라는 데다 관심을 둬요.

24-28절까지 보면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한 절차가 있을 때만 잃어버린 양이라는 결과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선택이 빠져버리면 그것은 잃어버린 양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선택이 계속 유효하게 펄떡이면서 우리 안에 살아 있어야 됩니다. 끊임없이. 그 선택은 주님 맘대로기 때문에 우리가 그 선택을 나가지 말라고 붙잡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주님의 선택이 항상 있는 사람의 특징은 항상 그 본인이 가룟유다 선으로 되돌아가는 희한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가룟유다 선으로 되돌아가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내 존재 자체에 문제 있다는 겁니다. 내 존재 자체에. 내 존재 자체에 문제 있기 때문에 우리는 뭘 생각하느냐 하면, 어떻게 내가 남의 살점을 뜯어먹고 어떻게 남의 피를 먹어야 내가 영생 얻습니까? ‘영생 끝났어, 끝났어. 이건 안 되는 거야.’라는 것이 나의 선택이에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기껏 가졌던 그 사고방식의 한계가 그게 전부였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 네가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 해놓고 그다음에 인간의 몸이 인간에게 되먹임 하지 않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25-28절에 보면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이니까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은 우리 몸에 되먹임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몸을 되먹임하면서 뜯어주고 마시게 하고 제공하는 그 선택을 예수님 자신이 본인이 실제로 우리 안에다 늘 해주신다 그 말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살을 먹으라, 내 피를 마시라, 주님이 자신의 몸을 반복해서, 끊임없이 반복해서 자기 성도에게 주시는 거예요.

내 선택으로 주님을 빼내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계속 주시는 겁니다. 어떤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가룟유다의 요소와 그리고 베드로의 몸, 다시 찾아와서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살과 떡을 먹은 몸 그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으며 어떤 식별된 것일까,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선택이 이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날마다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먹으라. 걱정하지 말고 먹어라. 마셔라. 이것이 바로 생명이다.” 주의 몸에서 주어진 거예요. 그 몸이 무슨 몸이냐? 부활의 몸이에요. 그 몸이 바로 성령의 몸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으라는 말은 그 안에 예수님의 살과 피가 다 들어 있는 거예요. 성령께서 이야기하십니다. 주님이 선택하신 이야기에요.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라고. 피 구경도 못했는데 우리를 그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미 내 몸은 내 몸이 아니고 주님의 자기선택이 늘 반복해서 작동하는, 이것이 계속 발생되는 그 몸으로 이미 태어난 우리 몸을 충분히 주님이 친히 활용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거예요. 그렇게 선택하고 난 뒤에……, 오늘 본문 12절을 봅시다. 그렇게 택하시고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 다음에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가 남들과의 관계에서 여지없이 그것이 계속 나오게 하는 겁니다.

이 성도의 교제, 온유와 자비와 겸손과 온유,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는 버려져도 되는 몸인데 주께서 찾아오셔서 자신의 십자가 증인 되라고 택하신 자, ‘나의 증인’이거든요, 나의 종, 택하신 증인 되라고 주님께서 죄사함 언약의 피를 우리에게 흘렸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십자가에 흘리신 그 피가 바로 그 피흘림을 증거하는 증인을 생산하게 하는 피도 된다. 그 피를 근거로 해서 자기선택, 우리 선택은 말도 안 되지만 주님의 선택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십자가 자랑하는 식으로만 일하도록 그렇게 자기 백성을 몰아세웠다. 그래서 ‘열한 제자 + 한 제자’ 열두 제자가 끝까지, 사도행전 보세요, 주님의 십자가만 증거된 겁니다.

끝으로 사도행전 두 구절 읽고 끝내겠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하나님의 선택된 자에게만 성령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9절에서 10절, 고린도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인데.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그래서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전도했는데 이 성 중에 내 백성, 주님의 백성은 주님이 알아서 선택해놓은 백성이 있기 때문에. 그걸 어떻게 압니까? 오직 십자가 복음만 전하는 거예요. 내 살과 내 피를 먹어라. 못 알아들어? 나가리! 끝났어. 이렇게 되지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던 영생을 주께서 친히 살과 피를 주심으로서 구원이 되었음을 감사합니다. 이 작업을 위해서 베드로마저 주님을 배신했다는 것을 명심해서 날마다 배신할 수밖에 없는 우리 육신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십자가의 증인 천국 백성 만드는 하나님의 솜씨를 목숨 바쳐서 증거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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