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6장 27절 (말씀의 입체성) 210608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6장 27절 나온 말씀부터 하겠습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그렇게 되어 있지요. 원수를 사랑하라고 되어 있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이것부터 우리가 명심을 해야 됩니다. 크게 쓸게요. 여기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돼요. 세상은 전혀 달라지는 게 없습니다. 세상은.
복음을 전하고 뭐 기독교가 100% 되도 해도 집단면역 안 생깁니다. 그냥 세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신자가 이걸 명심을 해줘야 돼요. 예수님 전해가지고 사회가 개혁되고 그런 철딱서니 없는 너무나 세상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그런 환상을 꾸어선 안돼요. 세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냥 고요하고 정돈되어 있습니다.
호들갑을 떠는 것은 신자들이 호들갑을 떨지 다른 세상 사람들은 옛적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해나 달이나 별이나 세상 그냥 그대로 있다는 거에요.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은 신자보고 이야기합니다. 너도 눈이 있고 코가 있으면 한번 봐라. 종말의 낌새가 있더냐? 낌새고 뭐고 아무 낌새도 없어요.
약간의 변동이 있어도 인간의 능력과 지혜로서 극복을 해왔습니다. 인류 역사는. 순수한 종교단체가 괜히 들쑤셔가지고 자기 교단 한번 키워볼라고 교회에 사람 하나 꼬셔볼라고 그렇게 종말적 의식을 위기의식을 조장하지요.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내가 안 달라져요. 예수를 믿든 뭘 믿든 내 자체가 달라지지가 않습니다.
천지개벽나도 난 안 달라져요. 맛있는 거 좋아하고 돈 좋아하고 이게 어디 갑니까. 그거 타고난 건데.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이게 어디 가요? 나는 내가 가진 것을 추어도 못 버리는 겁쟁이. 나는 가진 것을 결코 내놓지 않는 겁쟁이에요 우리는. 그런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해서 선뜻 내놓고 내가 나를 기대하지 마세요. 나는 안 달라집니다. 달라질 수가 없어요.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데 우리한테는 원수를 만들지 않습니다. 원수 만들면 우리가 스트레스 받아서 안돼요. 알아서 적당선에서 타협하고 협살하는 걸로 모든 해결을 지웁니다. 그 유명한 노래 있잖아요. 조율 한번 해주세요. 꼭 불러야 돼요? 조율 한번 해주세요. 한경애가 불렀던가? 신이시여 하늘이여 조율 한번 해주세요.
세상 그냥 조율하기 나름이에요. 극단적으로 자기 주장만 넣지 말고 좋은 게 좋은 거에요. 좋은 게 좋은 거. 나중에 둘 다 다쳐요. 소송 걸고 하지 말고. 소송은 기독교 신자가 좋아하지 세상은 소송 안 좋아합니다. 대한변호사 되가지고 알아서 중간에 갈등은 다 해소시키는 그것이 삶의 지혜로 알고 있어요.
원수의 의미는 뭐냐 하면은 원수라는 이 개념 자체가 모든 걸 극단으로 몰아가요. 극단으로 몰아가요. 적대적 대치관계. 골이 깊은 갈등구조. 이럴 때 원수. 더 심하게 말하면 왠수. 이 왠수야 하잖아요. 이 왠수. 원수는 내가 다쳐요. 나의 고유한 일상이 다친다니까요.
그 원수를 왜 우리가 그냥 우리 곁에 둘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좋은 게 좋지요. 원수 둬가지고 나에게 돌아올 이익이 뭔데요? 아무 이익 없잖아.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경을 볼 때 우리는 고유하게 살고 싶고 불편하지 않게 살고 싶은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따라서 우리한테는 원수가 없습니다. 있더라도 일시적 원수는 있어요. 일시적으로 불편한 관계있지만 우리는 빨리 평화를 원하고 그러한 갈등 구조가 해소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원수를 부각시켜 버립니다. 너희에게는 원수가 있느니라.
너희에게 원수가 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 자주 나오느냐 하면은 중국 영화의 무림의 고수, 아버지가 도장깨기에 당해가지고 아버지 죽고 난 뒤에 구사일생 살아가지고 깊은 산속에 가서 무예를 연마하는 고수. 나중에 나이 한 20살쯤 되가지고 그때 불러서 이제는 더 이상 가르칠게 없다. 이 산을 떠나라. 실은 너희 아버지는 이런 원수한테 이소룡한테 당해가지고 죽었다.
그 때 원수가 나오는 거에요. 너는 운명적이야. 네가 사랑하는 여인이 있더라도 헤어져라. 그것보다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중차대한 사명이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너희 아버지를 죽인 부모를 죽인 원수를 갚고 난 뒤에 사랑하는 사람 만나든 뭘 하든 해라. 그래가지고 산에서 내려와가지고 만두집에 가서 만두 먹다가 한바탕 벌어지잖아요. 갈등구조가 해소되는 거죠.
왜 성도한테는 성도가 요구하지도 않은 원수가 왜 있어야 됩니까? 이것 성경에 원칙 중에 하나인데 깊은 성경 전체의 맥을 뚫는 원칙인데 미리 한번 적어보겠어요. 천사하고 성도하고 둘 다 일방적인 주님의 지시를 따르게 되어 있어요. 천사하고 성도하고.
물론 좋은 천사 나쁜 천사 따로 있는데. 악마 말고 천사 따로 있는데 천사는 고난이 없고 성도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게 차이점이에요. ‘고난’, 이게 있기 때문에 천사가 오히려 성도에게 절을 해야 돼요. 이 고난이 바로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예수님이죠.
성경을 보실 때에 예수 믿고 행복하게 살 생각하지 마세요. 없던 고난이 내가 요구하지 않은 고난이 우리에게 난데없이 쑥 들어오는 거에요. 욥기처럼. 욥처럼. 쑥 들어오는 겁니다. 뺄래야 뺄 수가 없어요. 세상 같으면요. 심청전처럼 고난이 오게 되면 그들의 고난은 나중에 장래에 성공하기 위한 절차로 들어가는 거에요.
고난 자체가 아니라 성공을 위해서 잠시 힘들게 사는 그 기간이 고난이에요. 그러나 성도는 그게 아니고 고난의 후손입니다. 고난밖에 나가면 안돼요. 고난이 해소되면 안돼요. 고난이 주가 되고 나는 고난의 하나의 객체가 되는 겁니다. 주도권은 고난이 쥐고 있고 나는 객체가 되는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팔자와 운명을 답습하는 겁니다. 성도는.
따라서 우리가 원하지 않은 원수가 왠수가 생기는 겁니다. 우리는 원수를 원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 원수라고 들이댔을 때에 우리가 궁금한 게 뭐냐? 주님이여 원수가 뭡니까? 원수가 누구입니까? 뭐가 우리의 원수에요? 이렇게 궁금하겠지요. 이게 성경에서는 이걸 누가 원수라고 하지 않고 상당히 난해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도 15장에 보면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요. 우리 같으면 악마? 뭐 그런 쪽으로 뿔 달린 귀신? 얼굴을 녹색이고 복장하는 꼬라지는 아무거나 걸치고 주로 습기찬 데 이렇게 해가지고 습기찬 데 기어나오는 것들. 공동묘지 근처에 있으면서 그런 것들 원수라고 하잖아요.
귀신아 물러가라 하면서 마늘 막 던지고 팥 던지고 하는 거 있잖아요. 오멘이라는 그 영화에 보면. 물길 잡는 거 해가지고 이렇게 돌아가면 이상하니 축축하니 습기 차가지고 귀신 나오고. 성경에선 그렇게 되어있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원수를 명확하게 되어있어요.
고린도전서 15장 보게 되면 15장 26절 누가 한번 크게 읽어볼까요?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여기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사망이다.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원수 그 사망의 아가리에 네가 내 택한 백성이 물려있다는 겁니다. 물어도 꽉 물었어요. 빼지를 못해요.
사망이 원수가 됨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오시는 이유가 그 원수의 아가리에서, 아가리가 욕 아닙니다. 아가리라는 큰 고기를 말해요. 아가리에서 몸부림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우리를 쏙 빼게 하시는 거에요. 더 쉽게 말해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왜냐? 악마는 보이지 않으니까. 악마가 키가 몇센치에요? 혈액형이 뭐에요?
악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물이기 때문에 악마의 세상의 세력을 잡은 자에서 우리가 빠질 수가 없어요. 우리를 꽉 물었던 그게 우리의 운명이고 팔자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의 운명, 팔자가 결국 죽음이라는 그 강력한 힘, 에너지에서 갇혀있습니다. 못 빠져나옵니다.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어떤 행동, 어디를 가서 어디 이민을 가서 어떤 행동을 하든간에 죽기를 무서워하는 그 공포심에서 면제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인간이 하는 생각과 행동은 하나하나가 손끝이 떨립니다. 굳이 치매 안 걸려도 벌벌 떨어요. 내가 이 일을 결정을 하게 될 때 나한테 이익이 올까? 손해가 올까?
자, 이익은 뭐냐? 사망의 공포로부터 좀 느슨해질까? 그럼 손해가 뭐냐? 사망이 가까이 접근했네. 안 그래도 곧 죽겠다 하는 이걸 손해라고 하는 거에요. 그게 손해라고 하는 거에요. 전세금 뛰면 손해 뭐 해주잖아요. 성경에서는 이 사망이 어디서 오느냐 하면은 바로 죄에서 오게 되면 사망이 죄에서 오거든요. 사망이 죄에서 온단 말이죠.
인간은 사망 아구에서 못 빠져나오는 거에요. 이 말은 인간은 죄에서 못 빠져나오고. 죄라는 것은 선과 악을 아는 지식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인간은 거기서 몸부림치는 거죠. 죽는 공포 속에서 될 수 있으면 죽는 쪽에서 사는 쪽으로 빠져나올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이야기하면 원수는 우리의 삶의 처지 또는 환경 그 자체에요. 그 자체. 그래서 미리 말씀드립니다만은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을 때는 바로 우리 자신이 주님의 이미 원수로 그 원수라는 환경 속에 일원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까발리시는 거에요.
쉽게 말해서 네 원수가 네가 네 원수다. 네가 네 원수야. 그러니까 원수에서 빠져나올려면 네가 너하고 결별을 해야 돼. 빠이빠이 잘 있어 안녕. 나야 안녕. 자기하고 헤어져야 돼요. 자기하고 헤어진다는 말은 꼬리 떼고 구원받는다는 뜻입니다. 나를 떼고 나 아닌 나, 나 아닌 나 가 구원을 받는 거에요.
이 말은 다시 말해서 나는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에 아예 구원받겠다는 생각 자체가 그게 원수에서 나왔기 때문에 주님의 원수에게서 나온 희망사항이기 때문에 내가 구원받겠다는 내 구원 자체로부터 내가 탈출을 해야 돼요. 세상에서 탈출이 아니고 내가 세상에서 탈출 받겠다는 그 생각 자체로부터 우리가 탈출이 돼야 됩니다. 그러니까 어느 인간이 구원에 성사가 될 수 있겠어요.
성경에 그런 예가 많은데요. 마리아가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을 잉태했지요. 마리아가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잉태할 때 예수님은 마리아로부터 태어난 게 아니고 어디서 태어났느냐 하면은 마리아에서 성령으로 와가지고 예수님이 태어날 때 예수님은 마리아에서 태어난 게 아니고 마리아의 세계에서 태어난 거에요. 마리아의 세계에서.
예수님께서 다시 찾아오실 때 예수님이 마리아에서 태어나고 예수님이 하늘나라 가셨습니까? 아니지요. 본격적으로 일을 할 때 마리아에게만 찾아갔습니까? 아니지요. 마리아가 포함된 마리아를 살게 만든 마리아가 존재하게 만든 이 세계 전체에 대해서 예수님은 찾아가시는 거에요. 따라서 마리아 아니더라도 구원이 돼요. 마리아 아니더라도.
이것은 마리아에게 성령 와서 예수님을 구원했기 때문에 구원은 어디까지나 마리아와 예수님의 둘 사이의 관계라고 생각하시면 그것은 그 해석이 잘못된 해석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도 찾아가지만 베드로에게도 찾아가고 12제자에게도 찾아가고 오늘날 성도에게도 찾아오지요. 그러면 이 마리아의 세계는 뭘로 확장되느냐? 오늘날 우리들의 세계로 이미 확장되는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누구든지 그 안에서 누가 나오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서 나오실 때에 이 예수님의 이름이 바로 새로운 자아가 되는 거에요. 꼬리 떼고 구원되는 자아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우리 구원이 아니고 누구 구원이냐 하면은 예수님 본인이 들어갔다 빠져나오는 그게 구원이에요.
예수님의 이름이 죄 속에 들어왔다가 아무도 탈출에 성공하지 못한 예수님이 홀로 빠져나올 때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주의 이름의 구원이에요. 주의 이름의 구원이에요. 주의 이름의 구원이 주의 이름으로 구원으로 바뀌어지는 겁니다. 그럴 때 어떻게 바뀌느냐? 주님의 고난에 같이 동참되고 주님의 죽으심에 동참된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거에요. 예수님의 이름의 확장. 그 확장은 새로운 세계, 영토에요.
그 영토가 죽음의 영토에서 죽음의 아가리에 먹힌 그 영토에서 예수님의 영토로 바뀌는 겁니다. 나의 구원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온 아이디어냐 하면은 이 저주받은 세계에서나 인간들이 납득이 되는 그러한 구원론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원수들이 지어낸 아이디어가 뭐냐 하면은 구원받는다에요. ‘구원받는다’.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치고 죽어서 천당 안 가고 지옥 갈 사람 손들어보세요. 아무도 없어요. 자기가 하는 행세는 다 뒷전이고 그래서 죽어서는 좋은데 가야하지 않습니까. 보험 들어놨어요? 삼성보험입니까? 왜 좋은데 가야 됩니까? 그냥 가고 싶네요. 왜 가야 돼요? 그냥 가고 싶데요. 왜 가고 싶습니까? 물으면 이 세상에 죽음의 저주가 너무 강렬해요. 그건 네 소원이고. 그거는 어디까지나 죽음의 세계에서 길들여진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원수가 된 인간 존재에서 기껏 품을 수 있는 나중의 희망사항, 기대고 희망사항이에요. 종교적 희망이죠. 소원입니다. 우리의 소원.
그 소원이 소원되게 나타날 수 있도록 에너지로 밀어붙이는 자는 누굽니까? 악마지요. 왜? 쓸데없는 희망은 악마가 맘껏 허용을 하니까. 빌어라.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 악마는 오직 예수 이름으로 이야기해요. 예수 이름으로. 예수 믿으면 복 받고 구원받고 뭐 받고 어떻고 어떻고 온갖 다양한 교리와 체험들을 내세워가지고 교단들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됩니까? 이렇게 하면 되는 거에요. 레시피를 다해. 레시피를 다 한다고요. 만두 삶을 때는 몇도에 삶고 마지막에는 꼭 잊지 말고 조미료 확 쳐라. 맛이 없을 리가 없지요. 레시피 다 나와 있으니까 레시피대로 하면 되니까. 그 레시피 주인공은 뭡니까? 나야 나. 자기 자신이죠. 자기 자신. 그게 바로 하나님의 원수의 세계, 마리아의 세계죠. 마리아의 놀던 그 세계죠. 그 세계에서 기대하는 겁니다.
성령이 와서 마리아가 임신한다는 것은 마리아가 미리 예측 못한 거에요. 그 마리아 세계가 어떤 세계냐 하면은 말씀을 지키고 말씀대로 어릴 때부터 다 교육 받아서 말씀을 지켰던 그 유대사회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그 말씀에 뭐가 빠졌느냐 하면은 그 말씀과 함께 장차 인격화되신 분의 그 분 위주로 말씀이 되었다는 그 사실을 그 유대사회는 주님이 오기 전이니까 전혀 거기서 아는 바가 전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강의에서 원수라는 이 개념, 이 모든 개념을 알기 위해서 뭘 하나 공작시간 뭘 하나 만들어 봤어요. 12cm, 높이 7cm짜리 투명 판 가지고 스카치테이프하고 칼하고 가위 가지고 오려 가지고 면이 사면체인데 딱 세워놓는 이것 한번 만들어봤습니다. 이게 어디에 필요 하느냐 하면은 이걸 설명해드릴게요.
사면체 있어요. 이것은 홀로그램을 이것 가지고 비치면 홀로그램이 여기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휴대폰 위에다가 이걸 딱 놓게 되면 휴대폰에 나오는 그 영상이 홀로그램 입체 영상으로 공중에 허공에 뜨게 되어 있어요. 물론 모든 게 되는 건 아니고 그 유튜브에 홀로그램 현상 영상 치면 네 가지의 그림이 움직이는 게 나올 거에요.
그 네 가지의 그림이 여기에 투명판에 반사가 되면서 입체로 등장하는 거에요. 홀로그램 현상이라고 쳐보시면 나옵니다. 그림이 나와요. 이렇게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이 지표면, 인간 세계 자체가 표면적이거든요. 표면적. 땅에 속한. 지표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까 그 말씀이 어디 떨어지느냐 하면은 지표면에 전부 다 여기에 달라붙어있어요. 인간들의 죽음의 세계, 원수의 세계에 말씀들이 다 달라붙어있어요.
달라붙어있으니까 여기서 인간들은 선악체계를 갖춘 여기에다가 말씀을 선악체계 자체가 이미 죄인데 죄의 구조인데요. 죄의 구조에 성경말씀 오니까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원수 된 표상들이 나오는 거에요. 선악 해석하는 그 잣대, 해석하는 그 기준 자체가 죄가 된단 말이죠. 나를 선한 인간으로 어떻게 하면 전환될까를 의도를 가지고 성경말씀을 보기 때문에 시작부터가 나는 선악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어떤 성경말씀해도 결국 자기에 대한 변명과 구실만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 있죠. “누구든지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은 최고 레벨에 도달한 바리새인도 땡 탈락이다 이 말입니다. 바리새인 탈락하고 사두개인 탈락하고 서기관 탈락하면 어떤 인간도 다 탈락이라는 뜻이에요. 전부 다 표면적 존재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보느냐? 표면적 존재에 있지 않고 말씀 자체가 인격이 되게 되면 여기에 성경 말씀이 예수님 인격이 되어서 여기 공중에 붕 떠 있는 거에요. 붕 떠 있으니까 그들이 평소에 그 이웃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 모든 그들이 이해한 것과 선악체제, 선악시스템 그 구조에 달라붙은 그 해석과 말씀, 율법 출제자.
여러분 시험 출제자가 알겠어요? 시험 치는 사람이 알겠어요? 정답을. 본인 문제 출제자가 알게 아니겠습니까. 출제자 자신이 완성이 되어서 온 그 사이에는 여기서 뭐냐 하면은 손에 잡히지를 않아요. 이 정답이. 붕 떠서. 잡히지를 않아요. 이것을 이미 성경에서는 이미 이것을 구약 성경에 이러한 그 홀로그램이 나와요.
신명기 11장 29절, 신명기 27장 12절, 여호수아 8장33절인데. 아무거나 봐도 되는데 그중에서 신명기 27장 12절에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지표면에 서는 거에요. 그리심 산에 서고. 그 다음에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에발 산 쪽은 어떤 쪽이냐 하면은 본처가 아닌 그러니까 라헬이 아닌 레아 쪽이나 종의 지파와 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대충은 그래요. 저쪽 축복 산에는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레아도 포함되어 있고 6:6으로 분리한다는데 딱 해놓고 뭘 하느냐 하면은 그 다음부터 지표면이 아니고 공중을 향하여 말씀을 던져버립니다.
그러면 아멘은 어디서 모이느냐? 공중에서 모이지요. 왜냐하면 그들은 역할은 뭐냐 하면은 이런 자에게는 축복을 받습니다라고 그리심 산에 있는 그 지파가 상대방 저쪽 산에 날려버려요. 저쪽 산 공중을 향해 날려버린다고. 산이 두 개 나란히 이렇게 계곡이 되어있거든요. 이 지점을 향하여 축복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이 쪽에서는 뭐냐 하면은 저주를 이야기해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백성들이 어떻게 하면 백성들이 축복받아야 돼. 이 백성들은 저주받아야 해 하는 이것은 모든 것은 뭐냐 하면은 본인의 소관이 아니고 이쪽 소관이에요. 축복과 저주는 여기에 한 데 아멘으로 모이는 아멘으로 형성되어 있는 제3의 영역에서 축복과 저주를 일방적으로 정해버리는 겁니다. 이것은.
왜냐 하면은 말씀 출제자가 말씀을 결정할 권한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축복과 저주를 결정할 권한이 없어요. 왜냐 하면은 모순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의 인간이 축복과 저주를 같은 인간 안에 같이 형성이 되는 것은요 축복과 저주가 너무나 이질적으로 대조가 되는 거에요. 너는 축복도 받고 저주도 받아라 이런 건 인간한테는 안 된다는 거에요.
너는 축복이면 축복 쪽이고 지옥 갈라면 지옥 가고 너는 천당 가면 천국 가는 거에요. 둘 다 양다리 걸쳐서 다리 찢어지겠다 이런 거 없어요. 확실하게 한쪽에 속하는데 그쪽은 인간이 자기가 요청하거나 본인이 고대하거나 희망하거나 기대하거나 전혀 상관없어요. 어느 인간이 지옥을 기대하겠어요. 어느 인간이. 좋은 건 다 할려고 하겠지요.
왜? 인간은 자기를 좋게 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좋게 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인간은 저주받을 짓입니다. 왜냐 하면은 자기의 원천을 말씀의 완성되신 예수님부터 만나가지고 새로 결정해야지 왜 본인이 결정합니까? 내 운명을 왜 내가 결정해요? 성경에 나온 개념은 우리가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주님이 결정해서 우리에게 그냥 제공하는 거에요. 이게 원수야. 이게 복이야. 이게 저주라고 하는 거야. 너는 입 다물어 가만히 주는 대로 받아. 이렇게 되는 거에요 성경은.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경 해석하실 때 요한복음 5장 38절에 보면 이건 다 같이 한번 찾아봐야 돼요. 37절부터 38절까지. 요한복음 5장 37절 38절.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38절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그 말씀이 그들의 자기 지표면에 자기 몸에 딱 붙어있는 거에요. 자기 몸에다가. 그러니까 무조건 자기 위주에요. 잘 될 거야. 맨날 자기 희망과 말씀이 같다고 착각들을 하고 있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는데 천사는 뭐가 없고? 고난이 없고 택한 백성은 고난이 있지요. 그런데 어느 인간이 자진해서 고난을 요청할 수는 없습니다.
요청하더라도 빨리 해소되고 영광이 이르기를 원하겠지요. 고생 뒤에 낙이 온다고. 주여, 고생을 주시옵소서 이러고 있다고요. 그거는 꼼수에요. 왜냐 하면은 주님의 말씀은 이렇게 주님의 영광이 들어와버리면 뭐를 잊어야 되느냐 하면은 지표면에 서있는 이 계곡에 서있는 나는 이제는 잊어야 돼. 이걸.
그런데 구원론은 인간을 못 잊게 만들어요. 소위 기독교의 교리라는 구원론이. 구원받고 난 뒤에 자기 잊었습니까? 아니죠. 더 집착이죠. 아주 야무져요 그때부터는. 집착하면서도 은근히 화가 나요. 뭐라고 화가 나느냐 하면은 주님 죄 사함 해주는 건 고마운데요. 그걸 빌미로 자꾸 나를 찾아오면 내가 스토커가 찾아오면 괴롭지요.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거 못하잖아요.
고맙다 해 드릴께요. 십일조 가져가세요. 가져가는데 나머지 돈에는 손대지 마세요. 이건 스토커도 아니고 뭐 쪼금 고맙게 해줬다고 그 다음부터는 살림 다 들고 갈 참인가 이건. 은근히 부화가 나는 거에요. 부화가. 주님한테 고맙다 해줬잖아요. 찬양 해줬잖아요. 찬송가 한번 불러 볼까요? 잘 불러요. 찾아오지 마세요 이제는. 지겹다, 이제는. 주님도.
그게 원수야. 그게 네 자아상이야. 그게 원수에요 그게. 여러분 일가친척 가운데 친구 가운데 여러분한테 잘해주는 사람 고맙지요? 고맙지만 계속 들이대게 되면 나중에는 죽여버리고 싶어요. 이건 뭐 한번 혜택 입었다고 말이야 언제까지 울궈 먹을라고. 다 빼가라. 간, 쓸개 다 빼가라.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세상 안 바뀐다고 했지요. 세상 안 바뀌는 이유가 내가 안 바뀌어요. 인간은 자기가 결정한 것, 내가 결정한 것이 변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결정하냐? 나의 본성은 뭐냐? 그것이 알고 싶다. 그걸 알려주마. 나는 내가 다치기 싫어요.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영원한. 나는 내가 다치기 싫어요. 다치기 싫다. 싫어요. 내가 다치기 싫어요.
애가 되든 40이 되든 50이 되든 70이 되든 한결같아요. 한결같애. 내가 이렇게 안변하는데 세상이 변할 리가 있습니까? 다만 이런 걸 꼬깃꼬깃 감췄지요. 인간 내부에. 감춘 거에요. 기도 별로 하지도 않다가 갑자기 기도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다칠까봐 겁나서 하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지옥가고 천국가는 것을 하나님이여 아이디어만 주시고 결정은 제가 하겠습니다. 왜? 평소에 내가 안 다치는 식으로 그런 식으로 나는 선택해 왔고 결정해 온 그 행세를 나는 때려죽어도 못 버리겠습니다 이러거든요. 그럼 주님께서 버리지 마. 네가 지금 개과천선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 버리지 말아야 된단 말이죠.
왜? 버리지 않아야 주께서 원수라는 것이 계속 그 개념 속에 우리가 놓여 있어야 돼요. 원수이기 때문에 주께서 가위 가지고 떼어내는 거에요. 고칠 생각하지 말고 주께서 문경 말대로 정지칼. 부엌칼, 잘 드는 독일칼 있잖아요. 정지칼. 슥슥 갈아서. 고치지마 내가 잘라줄게. 네가 사망인데 너한테 암세포처럼 달라붙었어. 내가 떼 낼게. 내가 떼 내는 거에요.
왜? 사망을 이기신 분은 주님의 성령밖에 없어요. 주님밖에 없는데 자기가 떼어낼려고 하니 떼어집니까. 착각만하지. 스스로 아주 연출을 해. 연출을. 신앙도 없으면서 신앙 있는 척. 연기만 늘었어 연기만. 성도는요 내가 신자 아닌 것을 알아가면서 신자가 되어 가는 거에요. 갈수록 나는 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덜렁거리는, 주여 빨리 잘라주세요.
불신앙을 잘라달라고 누구한테 요청합니까? 이 일은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인 것을 알기 때문에 덜렁거리는 나의 일을 떼 내고자 하는 거에요. 이걸 잘라내는 거에요. 속이 시원하게. 덜렁덜렁 무겁지도 않아요? 무겁잖아요. 떼 내어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망한 거에요. 이스라엘 망해주는 게 이스라엘 복입니다.
다니엘 세 친구가 이스라엘 망하고 난 뒤에 계시 받았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망해야 비로소 계시가 눈에 들어옵니다. 아직도 자기한테 희망이 있으면요 이 성경 말씀이 안 들어와요. 네가 “원수를 사랑하라” 할 때 이 말은 우리 보고 뭘 하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의 자기 경로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원수 같은 너에게, 주님이 원수라고 규정하고 일단은 규정하고 원수에게 두 번째 주님이 다가가서 세 번째 원수를 사랑하는, 주님의 사랑하는 사랑으로 이 원수로부터 이별하게 만드는 거에요. 잘라내버리는 거에요. 내가 나를 원수로 보는 게 아니고 주께서 원수를 보는 그 본다는 그 자체가 이미 구원받은 거에요 그거는.
주님이 나를 원수로 본다는 것은 슥삭슥삭 정지칼, 부엌칼 가는 게 귀에 들리는 거에요. 슥삭슥삭. 네 입으로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좀 나대지 말고 가만 있어. 내가 잘라줄 테니까. 잘라줄 때 암세포 떨어져나갈 때 이미 암에서 나온 사람은 자기 몸에서 나온 암세포 보고 반갑다 친구야. 이게 암이구나. 자기 자신을 이미 과거 존재로 볼 수 있는 여유. 그게 자유 아닙니까?! 자기 자신을 과거로 보는 거에요.
지독하게 내가 구원받을려고 애썼던 모든 짓거리를 보는 겁니다. 말씀을 지표면에서. 나 구원 용도로써 해석해왔던 모든 신학과 신학체제, 성경 말씀, 세미나 쫓아다니는 것, 그 모든 그 들으면서도 자기 마음가짐이 오늘 이거 듣고 천당 가야지 하는 자기에 대한 집착과 집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거든요. 이렇게 붕 뜰 줄 몰랐지요.
계곡에 사면의 공중에 아멘으로 화답할 줄 몰랐습니다. 이쪽 계곡에서는 그리심 산에서는 축복이 미사일처럼 나와요. 축복이 튕겨 나오고 이쪽 에발 산에서는 저주가 팍 튕겨 나와요.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궤는 어디 있느냐? 두 개가 아니거든요. 하나밖에 없거든요. 축복 산에 있겠습니까? 저주 산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언약궤는?
질문하는 실례를 범해서 죄송합니다. 빨리 답하겠습니다. 저주 산에 이 에발 산에 법궤가 있어요. 에발 산에. 다시 말해서 여기서 올라오는 이 저주가 여기서 어디서 만나느냐? 아멘으로 합이 되어버리면 축복 기능 다시 말해서 축복 절차와 저주 절차가 오로지 주님, 예수님에게만 이게 일치된다는 것. 그분이 축복할 권한도 있고 그 분이 저주할 권한은 오직 이 세상에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5장에 나와요.
요한복음 5장 한번 봅시다. 5장 21절에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에요. 원수에 대해서 원수를 사랑하고 안하고는 누구의 소관입니까? 말씀출제자 예수님 자기 소관이에요. 말씀이 축복과 저주를 누구를 축복주고 누구를 저주 주는 권한은 유일하게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일단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모든 것을 말씀으로 다가가서 그 인간 개개인에게 감정이 있는 게 아니고 인간이 속해 있는 그 세계 자체, 인간 세계 자체가 뭐 너 잘났다 나 잘났다 할 것도 없어요. 뭐 자체가 사망의 세계에요. 그 차제가. 악마가 지배한 세계고 죄의 세계, 유령이 득실거리는 사회에요. 우리보고 빠져나오라고 해도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주님께서 빠져나와서 빠져나왔다는 통보를 해야 그 다음부터 우리가 빠져나온 걸 알 수밖에 없어요. 이 세계에 주님께서는 들어오신 거에요. 절차가 뭐냐? 저주받는 과정을 거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저주받았어요. 갈라디아서 3장에 십자가 나오지요.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저주받은 거에요.
예수님께서 저주받았다 하지마세요. 예수님이 속했던 예수님이 일시적으로나마 왔던 이 세계 자체가 전부가 예수님 저주로 말미암아 저주받았음이 확정된 거에요. 그걸 고린도후서 5장에서는 뭐냐 하면은 “한사람이 죽음으로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 모든 인간이 죽은 것이다. 그래서 산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대신 죽었다가 사신 분을 위해서 살았다”
그래서 제가 오후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당신은 누구 밑에서 일하는가? 당신은 누굴 위해서 삽니까? 라는 질문이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한테는 정확하게 그런 사례가 나오지요.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백부장은요 대장 밑에서 사는 거 아닙니다. 주님 밑에서 살아요. 그 대대장 중대장 취직한 것도 주님께서 취직하게 하신 거고.
오늘 저녁에 냉면 먹은 것도 주께서 하게 하신 거고. 사리 하나 더 시켰잖아요. 주께서 시켜주신 거에요 그게. 죽고 싶은데 못 죽게, 사리 하나 더 시켜주신 거에요. 네 맘대로 죽나? 내 마음이다. 너는 더 살아야 돼. 더 살아야 돼요. 할 수 없어 이거는. 왜? 나는 주님 밑에서 살기 때문에 살라면 더 살아야 돼. 나를 위해서 사는 게 아닙니다. 말씀을 위해서. 주님이 어떤 경로로 왔고 어떤 경로로 탈출했고 어떤 경로로 또 찾아왔는가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그래서 방금 이야기한걸 그림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나’가 아닙니다. ‘나’가 아니고 ‘나의 세계’입니다. 나와 남은 둘 다 똑같아요. 뭐 더 뛰어난 거 없어요. 우리는 거기서 배웠고 그들의 시선과 눈치 보면서 지금까지 살아왔고 그게 자아상이 되는 겁니다. identity, 우리 정체성이 된 거에요. 남들 눈치 보고 살아가는 거에요. 남들 기대에 부응 못하면 자살할 정도로 그 정도로 우리는 남의 눈치 보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의식하면서.
나의 세계가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말씀의 세계로 가요. 이게 뭐냐 하면은 바로 ‘거듭남’입니다. 지표면에서 놀던 인간이 주님 계시는 공중으로 홀로그램처럼 3차원 영상처럼 붕 떴어요. 우리는 땅에서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어디에 있다? 하늘에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주님 안에 십자가 안에 성령 안에 있다 이 말이거든요.
누가복음 17장 20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지표면적으로 이야기해요. 질문을 해요. 예수님 하늘나라 어디에 있습니까? 네비 찍으면 어디 나옵니까? 그런 뜻이거든요. 네비 찍으면 어디 나옵니까? 양재 7번 출구에서 어디 있습니까 물으니까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하늘나라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제시해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among 너희 안에 있는 거에요.
아까 계곡 있죠. 지표면 안에 있는 거에요. 성령받기 전에 아무도 못 알아 듣습니다. 너희 안에 있는 겁니다. 너희 안에 있어서 우리에게 영향력을 주지요. 나의 세계에서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고 그 다음에 말씀의 세계에서 그 다음에 원수 사랑을 하면서 나의 세계에다가 우리를 파견하는 형식을 줍니다. 그때 우리는 나의 세계에서 올라올 때 이미 우리는 죽었지만 우리의 껍데기는 남아있어요. 우리의 육신은 남아있잖아요.
이 육신에다가 주님의 성령이 육신에다가 자기 자리라고 사용해버려요. 나의 세계일 때는 허둥대면서 개코도 모르면서 말씀지켰다 하다가 이미 주님의 말씀의 세계에 와버리면 이거는 ‘다 이루었다’가 되어버려요. 다 이룬 상태에서 육신을 가지고 이제는 예수님의 이런 절차를 밟았다. 저주받고 다시 갔다는 것.
그래서 우리의 원수는 사망과 죄, 마귀 그게 원수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용도로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겁니다. 이 작업 때문에 우리가 있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의 몸은 우리 것이 아니고 누구 것이냐 하면은 소유가 소유권이 이미 넘어갔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에 나오지요. “이미 값을 주고 산 것이 되었으니 네 몸은 너의 것이 아니니라” 너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성도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날마다 주님의 지시를 받는 겁니다. 이 이야기하니까 어떤 분이 질문하기를 주님의 지시가 어떻게 옵니까 라고 하는데 주님의 지시는 회고적으로 알게 되어있어요. 회고적으로. 그때는 모르는데 나중에 뒤돌아서서 보게 되게 되면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새로움이 나와요. 감사가 나온다고요.
우리의 지표면의 인생은요 쉬운 예로 내가 먹었던 짜장면은 그 맛이 그 맛이라 생각하는데 주님의 거듭난 사람의 그 맛이 그 맛이라는 우리의 옛 사람 속에 주님의 성령이 와버리면 이 짜장면이 이런 맛이었었어?! 이렇게 새로움이 오게 되면 그것은 뭐냐? 감사로 이어지게 되어있어요. 모든 일에 감사로. 냉면이 이 맛이었어? 이런 맛이었어?
그러니까 이 새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뭐를 끊어버리느냐 하면은 나의 예상과 기대를 끊어버리도록 하는 겁니다. 어떻게? 점심을 안 먹는다든지. 점심 때 튀김 맛없는 것을 먹었을 때. 배부를 때는 전혀 맛있지도 않은 냉면이 오늘따라 배고플 때는 사리 하나 추가요. 날마다 감사가 나올 수 있도록. 감사가 나올 수 있도록.
주사 맞을 때 따끔하고 아프지요. 그래서 미리 예상을 해요. 주사 아픈 거는 그거 다 아플 거야. 주사 놓는 순간에 마치 누가 전화로 소식을 전해가지고 아들이 이번에 과학고 합격했습니다. 그래?! 하는 순간 이게 없어져버렸어. 안 아파. 이게 안 아파버려요. 아플 거야. 많이 아플 거야. 참아야 돼. 이건 과거에 내가 아는 기억 속에 있는 내가 예상하는 거에요.
대비해야 돼. 대비해야 되는데 아프더라도 나는 목사한테 들었어. 어떤 경우에서라도 감사하라고 했으니까 주사 맞더라도 감사해야 돼. 엉터리 감사에요. 자기가 조작한 감사에요. 그런데 난데없이 전혀 별개의 사태가 일어났을 때 뒤돌아보니까 방금 뭐 찔렀어요? 오늘따라 왜 이리 안 아프지?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감사가 나오는 거에요.
부부싸움 할 때도 마찬가지에요. 네가 화장실에서 앉아서 안하고 서서 싸느냐 이런 걸로 싸우다가 따르릉 전화와가지고 장인어른 돌아가셨답니다. 장인어른 돌아가지고 난 뒤에 변기 그거는 별 큰 문제가 안 되어버렸어요. 시시한 문제가 된 거죠. 주님께서는 바로 십자가와 연관시켜서 우리의 일상을 다 시시하게 만드는 그러한 일들을 줘서 우리로 하여금 감사케 하는 그런 쪽으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6장 27절 (말씀의 입체성) 210608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원수를 우리가 무슨 수로 찾을 수 있느냐? 못 찾지요. 같은 편이기 때문에. 그래서 원수를 찾는 게 아니고 나타나는 거에요. 성도에게 나타나는 겁니다. 예상 못하게. 나타나는데 그 원수가 나타나면서 원수에 대해서 머리 부분이 이미 날라 갔다는 점을 감안합시다.
이게 그 뱀의 후손할 때 최고 절대자의 머리를 쳐버려요. 머리 부분을 쳐버립니다. 이 이야기가 최고 존재의 머리를 베어버린다. 절대자 또는 최고 존재의 머리를 베어버리는데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은 이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스라엘의 원수와 하나님의 원수가 자꾸 이게 삐걱거리면서 동일하지 않은 방식으로 나타나요.
아말렉의 아각 왕 있잖아요. 사무엘상에서. 그럴 때 그 사울은 그 왕을 살려주잖아요. 살려주죠. 그런데 그 머리를 누가 치느냐 하면은 머리는 사무엘이 머리를 쳐버려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메시아가 하는 일이 최고 존재의 머리를 베어버리는 것이 그게 일관된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모든 인간은 너는 머리가 아니라는 거에요. 너는 머리가 따로 있고 그 머리에 대해서 협박, 공갈 당하고 빼도 박도 못하고 그 머리 부분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그 처량한 존재였음을 알려주는 거에요. 끝까지. 머리 부분을 베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이 뭐냐 하면은 이스라엘 자체가 생각하는 원수는 이스라엘 자신의 살고자 하는 것, 이스라엘 자신을 스스로 지키고자 하는 그런데서 오는 원수라면 하나님의 원수는 이방 민족의 머리, 우두머리. 우두머리 하니까 뉴욕 근처에 있는 아울렛 있는데 우두머리 있어요. 관계없는 겁니다. 한국 사람 많이 가는데. 우두머리를 이걸 제거해버려요.
그러니까 인간으로 하여금 더 이상 너를 협박하거나 공갈할 수 있는 그 원천, 그 출처를 없애 버립니다. 다윗과 그 블레셋의 전쟁에서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에서 블레셋이 졌던 이유가 그들의 왕이 죽었어요. 골리앗이 죽잖아요. 모가지 날라갔다고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님께 기도하거나 할 때 내 소원 들어달라고 그런 철없는 기도하지 마세요. 더 이상 누구도 너에게 협박, 공갈, 지시 명령할 그러한 네 머리 되는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네가 주눅들 필요가 전혀 없는 거에요. 이 악마가 머리가 달아났는데 그 악마가 평소에 인간 세계에서 했던 것을 이스라엘 역사, 이스라엘 긴긴 역사를 통해서 악마가 인간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를 이스라엘 역사가 시범적으로 다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더 극단적으로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다 그런 짓을 했지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뭘 했느냐? 율법을 잠잘 때도 율법을 쥐고 자요. 지금도 유대인들 마찬가지에요. 율법대로 산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신명기에 보면 나오듯이 율법에 이렇게 이마에 네모난 이런 거 끈을 묶어가지고요 폼도 안나요. 폼도 안 나는데 팔목에 칭칭 감고 신명기대로 지표면적으로 해석하는 거에요. 지표면.
땅에 있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살려볼려고 애를 쓰는 자체가 이미 악마한테 농락당하고 있는 모습이에요. 그것을 누가 잘라 머리를 잘르려고 하면 율법 자체를 잘라버리는 거에요. 율법 자체를 잘라버리는 거에요. 율법적으로 더 이상 지시하거나 명령할 대상이 없어요.
왜냐하면 성도는 성도에 의하면 십자가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곧 뭐냐 하면은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요 죄에 대해서 죽은 자에요. 죄에 대해서 죽은 자는 실제로 연극해보면 실감나요. 내가 만약에 율법이다. 어떤 인간이 있다. 내가 율법이라면 율법이 발로 툭 차요. 인간아 율법. 차보니 시체에요.
율법아 네가 발길질한 게 어디 있느냐?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 말이죠. 죽은 자가 내 배 째라 되는 거에요. 율법에 죽었기 때문에 율법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더 이상 죄에 대해서는 나한테는 묻지를 마,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이것이 혼자 있을 때는 이 논리가 말도 안 되는 논리지만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분이 누굽니까? 주님이잖아요. 주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원수를 척결해 나갑니다. 원수를 찝어내서 그 원수를 어떻게 이기느냐를 보여줘요. 하나님의 원수를.
그러면 원수를 알기 위해서는 같은 원수와 같은 존재에 속한 이스라엘, 육체적 이스라엘을 주님께서는 아주 멋지게 활용하지요. 적들과 붙게 만듭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벌벌 떨면서 패배했다고 징징대면서 주여 우리가 또 졌습니다 하고 하지요.
그런 경우가 바로 뭐냐 하면은 사사들이 많던 시대에 여러분들이 좀 복잡하더라도 좀 참아내시기 바랍니다. 이제 복잡한 게 많이 나와요. 사사들이 있던 그 시대에 진정한 사사는 뭐냐 하면은 사람이 아니고 이게 사사에요. 언약궤가 사사가 되는 겁니다. 언약궤가 이스라엘 원수를 쳐부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원수를 쳐부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원수와 하나님의 원수가 어떻게 차이 나는지 똑똑히 들어 이스라엘아.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추궁하는 식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은 사무엘상 4장에 보면 블레셋하고 전쟁하기 전에 무려 4천명이나 작살나지요. 이스라엘이 4장에서 사천명 죽어요. 사천명 정도가 아니네요. 삼만명 죽었어요. 삼만명. 4장 10절에 보면.
삼만명 죽고 그 전에 4장 2절에 보면 그전에 벌써 사천명 죽었어요. 사천명 죽으니까 드디어 이스라엘이 숨겨놓은 비장의 필살기가 나온 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은 원자폭탄 보다 더 세게 나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쳐부수는데 이만한 무기는 이 세상에 없다. 자신만만하고 자부했던. 이스라엘이 다 믿는 구석이 있었어요.
아무리 당해도 마지막 최후의 무기. 그야말로 에이스. 포카 안치니까 모르죠? 에이스 하나 내면 게임 오버 끝나는. 그 언약궤, 그 언약궤를 들이댔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궤 들이대니까 죽은 자 사천명인데 언약궤 들이대고 삼만명 죽었습니다. 삼만명 죽었어요.
어?! 무슨 이런 일이 있어요. 교회가 코로나 때문에 어렵다. 온 교회가 기도하자. 역시 마지막 에이스 카드는 우리 주님밖에 없어. 주님밖에 없어 했는데 교인들 더 없네. 지금 어디서 사단난거에요? 뭐가 문제입니까? 주님의 적과 자기 적을 혼동해버리는 거에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지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아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이죠.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는다는 말은 자기는 저 이방인과 다를 바 없이 진작에 망할 수밖에 없는 그 똑같은 인간들, 애굽이나 저 똑같은 인간들. 그 인간들을 통해서 주님의 일방적인 축복을 해주시는 분이라는 사실.
이건 주님의 자의적인 누구의 의견 참고로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결정한 그 결정체가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을 끄집어내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원수를 하나님의 원수와 어떤 차이 나게 하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 사사가 아니고 언약궤 자체가 사사가 되가지고 여러분 아시다시피 언약궤가 혼자 돌아다니면서 어떻게 했는가?
사무엘상 5장 6장 하면서 적들의 머리를 베어버립니다. 그게 뭐냐? 다곤 신이죠. 다곤 신. 언약궤는 곱게 안치만 했어요. 안치하는 것도 자기 손으로 그 언약궤를 들어다가 적들의 손으로 놨어요. 적들의 손으로. 그러니까 뭐 전도한다고 할 필요 없어요. 전도가 불신자들이 알아서 전도해요. 불신자들이. 불신자들이 딱 갖다놓으니까 그 다음날 되니까 그 대장, 그 원수의 대장 다곤신이 완전히 모가지 날라갔어요.
왜냐 하면은 여호와를 누가 이기느냐? 다곤신이 이긴다고 보거든요. 게임 안 끝났는데 게임 끝난 줄 알았어요. 언약궤를 수갑 채워라. 포로 잡혔다고 생각하고 포로로 사용해가지고 언약궤가 여호와 포로로 생각해가지고 딱 포로 안치소에 둔 겁니다.
그날밤 cctv에 의하면 새벽 2시45분에 아무도 손대지 않았는데 다곤신이 엉망이 되었고 다곤신을 믿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쳐들어왔을 때보다도 곱게 언약궤 하나만 있을 뿐인데 그 하나만 있을 뿐인데 그들은 패배를 선언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미신을 총 동원해서 제발 우리 곁에서 떠나시기를 원합니다. 데가볼리의 주민들처럼. 돼지 몇 마리 좀 잃었다고 해가지고 제발 주님 대리점 우리 동네에서 그냥 내보내는 거에요. 이게 바로 우리가 자청하지 않은 고난입니다.
성도의 고난은 자기가 순교하겠다고 나대는 게 고난이 아니고요. 아프가니스탄 뭐 어려운 파키스탄 가가지고 아골 골짜기에 복음 들고 나가겠습니다. 쫌! 쫌! 나대지 마세요. 가만히 있어도 내가 속한 그 편안한 교회가 아골 골짜기에요 그냥. 내가 있는 곳에 바로 그곳이 블레셋이에요. 그 전체가 오직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 믿는 예수 믿겠다는 그 동네가 블레셋 동네에요.
마치 옛날에 우리가 했던 것처럼. 똑같은 행세를 하고 있는 동네가 교회 아닙니까. 그들에게 물어요. 당신은 누구 밑에서 일합니까? 그럼 솔직하게 답변한다면 주님이 내 밑에서 일합니다. 이럴 거에요. 주님은 내 밑에서 일합니다. 주님은 내 시다바리입니다. 왜? 나는 내 것 다치기 싫으니까. 이스라엘은 그런 식으로 생각한 거에요.
뭐라고 생각했느냐 하면은 하나님 이 나라는 주님의 것이잖아요. 주님의 것이 다치면 누구 손해입니까? 주님 손해지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거 이 나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지켜주시옵소서. 하나님도 아니야.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지금 애국가를 부르고 있어요. 교회마다. 이 교회는 주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꼭 하는 행세가 구약에 이스라엘 했던 망한 역사를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구약 해석한다고 아이고 참. 두 번째 강의에서 중요한 게 사무엘상 3장 1절입니다. 아까 허공에 3D 뜨는거 그거 생각해보세요. 3장 1절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지표면에는 제사장도 있고 선지자 있고 사사들도 있는데 공중에는 아무것도 뜨지를 않았어요. 공중에 누가 떴는가? 지금 어린 사무엘만 보였어요. 자,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이제부터 진짜 어려워요. 두 번째 강의에 어려운 것 시작됩니다. 자, 계곡 다시 이야기할게요.
그리심 산 여기서 이 골짜기는 평면입니다. 지표면이에요. 여기는 어떤 인간들의 삶의 원칙이 있고 특히 원칙보다 어떤 목표가 있고 목적이 있어요. 목표가 있고 목적이 있다고요. 이걸 맬서스라는 인구론에 나오는 수식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n세대의 개체수가 Xn라면 n+1세대 개체는 X(n+1) 개체가 되는 거에요. 그 증가율이 A라면 X(n+1)=AXn이 됩니다. 개체수가. 어렵지 않은데 이거 쓰면 그만 해라 이런게 막 떠오르죠. 수학이라는게 원래 그래요. 수학이라는 것은 말이 아니라 기호이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알아듣는 문자 가지고 암호 붙여가지고 이야기하는 것. 그게 유식해 보이니까. 이걸 말로하면 길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여기 보세요.
이게 바로 지표면에서 인간들이 하는 계획이고 목적이에요. 기생충에서 유명한 대사 있지요. 아버지가 아들보고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이 계획이 바로 지표면에 나오는 거에요. 지표면. 이걸 지수적이다 또는 이걸 주기적이다 할 수 있는데 여기만 뜨면 이게 뭘로 바뀌느냐? 혼돈과 혼란으로 바뀝니다. 예상 밖으로 바뀌어요. 비주기성이다. 비주기성.
인구와 식량을 대비해서 인구가 늘어나는 것이 식량이 늘어나는 것보다 더하기 때문에 나중에 망한다. 인류는 식량 없어서 망한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뭘 모르느냐 하면은 혼돈이라는 것을 몰라요. 비주기성이라는 것을 몰라요.
나중에 학자들이 연구를 해보니까 X(n+1) 세대는 AXn이 아니라 AXN1-BXn, A라는 변수와 B라는 새로운 변수가 둘 다 들어가서 혼돈 또는 카오스 그러한 식으로 비주기성으로 된다는 것을 나중에 통계 내가지고 하는 거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은 여기에 이스라엘이 여기 있잖아요. 구약이니까. 뭐가 어려우냐 하면은 이게 어려운 게 아니고요. 이스라엘이 이게 지표면 될 때에 이스라엘의 원수를 뭘로 바꾸느냐 하면은 이스라엘의 원수를 하나님의 원수로 바꾸기 위해서 여기 어떤 절차가 필요하느냐 하면은 이스라엘의 원수를 척결하기를 바라는 이 자체를 이스라엘 원수에다가 되먹임해버리는 거에요.
너도 원수와 한통속이라는 것을 되먹임해서 하나님의 원수에 이스라엘 원수를 포함시켜버리는 방법을 사용해요. 구약에서. 그게 뭐냐 하면은 이 갈라짐이죠. 갈라짐. 이스라엘이 둘로 분리되는 거에요. 현재 사무엘상 1장에서 지금 제사장이 누굽니까? 엘리 제사장 있지요? 멀쩡한 엘리 제사장 있다고요. 있는데 여기 누가 들어옵니까?
엘리라는 제사장의 여기 당회장 있잖아요. 여기 누가 들어옵니까? 사무엘이라는 부교역자가 들어오는 거에요. 교회 난리 났다. 부교역자가 설교 너무 잘해. 교인들이 갈라지기 시작했어요. 당회장은 주일날 설교하고 부교역자는 구역예배 때 설교해요. 구역예배 숫자가 더 많아. 당회에 종용히, 조용히도 아니고 종용히 불러가지고 “오늘부로 계약 끝났다. 나가라.”
나가라면 나가야지 또 뭐 섭섭합니다 목사님. 저번 교회 200 줬는데 버리고 150 줘도 여기 왔는데 쓸데없는 소리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본인이 하나님의 원수인 것을 자각하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 아 내가 복음 전한다는 이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로 이미 전환되었구나.
하나님 복음만 전했습니다라는 이것이 복음만 전한다는 이것이 어느새 괄호가 되가지고 확장된 자아상이 된 겁니다. 모든 인간은 점잖지요. 점잖고 착해요. 안 건드리면. 그리고 내가 만나기 원치 않는 사람이 오기 전까지는 모든 인간은 착합니다. 착한데 내가 초정하지 않고 원하지 않은 사람이 오게 되면 세 가지 현상이 일어나요. 비슷한데.
첫 번째 역겹다 두 번째 구역질난다 세 번째 토하고 싶다. 바로 그 순간이 숨겨놓은 자아가 튀어나오는 거에요. 나는 자아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원치 않는 인간을 만났을 때에 자극 받으니까 순간적으로 자아가 결정체로 나타납니다. 결정체 알지요? 딱딱한 것. 요지부동. 딱 등장한 겁니다.
주께서 이방 민족을 자꾸 이스라엘에게 보내는 이유가 이스라엘은 자꾸 착각하고 있는 거에요. 하나님은 우리 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줬다. 과거를 봐라. 출애굽 봐라. 도와줬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지금 그런 소리하는 자체가 네가 원수야. 몰랐어? 그럼 보내줄게. 보내니까 적들을 보내주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 자체가 이스라엘 자체가 바로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인 것이 드러났죠. 그게 3장 1절에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이렇고 그 다음에 여러분 아시다시피 세 번 부르지요. 3장 21절을 한번 봅시다.
3장 21절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나타나시는 거에요. 바로 이게 나타난다는 말은 그들이 아무리 체제를 갖추고 제사장으로 정기적으로 율법을 가르치고 해봐야 어디까지나 다 과거지사입니다. 다 과거에 해먹었던 것.
나름대로의 어떤 지수적이고 주기적이고 예상이 되는 나름대로의 나는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는 그 예상. 그 예상 그것만 믿고 그냥 버티기에 나갔던 그런 모습이죠. 아까 이야기한 것은 뭐가 없냐 하면은 새로움이 없는 거에요. 아무 새로움이 없는 거에요. 사무엘 8장 1절 봅시다. 지금까지는 별로 어려운 거 없는데 어려운 게 하나 등장했어요.
사무엘 8장 1절에 보면 “사무엘이 늙어서 아들을 사사로 삼을려고 했는데 삼으니” 3절에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더 이상 이스라엘에 있어서는요 아들, 사람 이것 대단한 위인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 하면은 누가 사사냐 하면은 이미 언약궤가 사사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못난 것 잘난 것 소용없어요.
이 말은 점점 어떤 다른 말씀의 인격체로 다가가고 있다는 겁니다. 너 말고 내가 지정한 어떤 사람. 무조건 너는 아니야. 너 말고 너는 이미 뭘 해도 소용없어. 언약궤와 결합되는 그 무엇은 하나님이 따로 준비해놨어요. 그러니까 공중에 공중에 떠있지요. 안쪽이 다 이스라엘이라면 이스라엘은 자기밖에 모르는데 공중에 뭔가 3차원이 있잖아요. 이 3차원이 언약궤죠.
언약궤가 뭐냐? 아카시아 나무상자에요. 뭐가 어렵느냐 하면은 이게 물질이라는 거에요. 물질이 주께서 일하는 사사의 기능을 한다는 이 결합이 인간의 머리에서 나올 수가 없다는 거에요. 물질이. 여러분 이거 이해됩니까? 레위기 17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레위기 17장 피는 곧 생명이다 17장 11절 “피는 곧 생명이다”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피는 사물이에요 사물. 헤모그로빈이 있는 적혈구에서 생성된 거에요. 피. RH+,-. A형 B형 그게 피 아닙니까. 피가 생명이라면 이 지표면에 있는 인간은 어떻게 하겠어요? 피 찍어바르는 거에요. 이게 사물로서 이해해서 피 찍어발라놓고 이 피가 우리를 살린다. 그거는 영적이라고 하지 않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신비적이라고 하죠. 신비적. 신비는 이단이에요.
신비적은 이단이고 신비적은 영지주의라고 해요. 성령 한다고 영지주의 아니고 육신으로 안 되니까 정성해서 신비까지 보태겠다는 것. 이렇게 해서 사람들 혹 하게 해서 교단 한번 키워보자. 이게 신비적이잖아요. 신비는 소용없어요. 신비는 그건 거짓 예언자들이 하는 짓이에요.
신비는 뭐가 필요 없느냐 하면은 자기 부인이 필요 없어요. 오히려 자기 부인이 아니고 자기 긍정을 극단화시키는 것이 신비입니다. 나 체험했다. 끝. 자기가 허경영입니까? 공중부양했어요? 언제 허경영이 자기를 부인했어요? 나는 쓰레기입니다. 언제 이렇게 했어요? 안 그렇지요? 으쌰 으쌰 하니까 다음 뭐 차기 대통령 감 나온다 이 말이죠.
우리 나라에 북한의 김정은부터 해가지고 북한은 뭐냐 하면은 사회주위, 종교체제에요. 종교체제. 문선명부터 종교집단 했던 신천지부터 해가지고 안상홍부터 해서. 안상홍은 뭐냐? 어머니 하나님이 있다는 거에요. 기가 차서. 아빠 엄마는요 육신에게만 해당되지. 암컷 수컷은 육신에게만 해당돼요. 하나님에게는 해당이 안 됩니다.
아버지라는 개념에 두가지 개념이 있거든요.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기 때문에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고 남자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게 얼마나 지표면 적이에요. 이게. 인간 자체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에 사물로 보는 겁니다. 사물로 보니까 뭔가 성경에서 사물이 등장하니까 언약궤 자체도 원자폭탄 되는 줄 알고 생각하지요.
그러면 언약궤 들고 가서 몇 명 죽었으니까 와 너무 신비롭다. 그거는요 감사가 아니고 공포에요. 그건 공포입니다. 언약궤 조심하면 구원받습니까? 언약궤 안 들어다보면 구원받습니까? 언약궤 안 들겠다는 그 심보 자체도 내가 할 수 있는 식으로 나를 지켜보겠다는 자기 생각뿐이에요. 결코 자기 부인이 아니라니까요. 자기 부정도 아니고 자기 부인이 아니에요.
그냥 요령부리는 거에요. 고난 받을까요? 주님께서는요 쫌! 제발. 고만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할게. 어디 노래 가사에도 나와요.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 남진 노래구나. ‘둥지를 틀어.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 둥지르르 틀어 내 마음에’ 우리가 안 나대도 자식도 애를 먹이고 집의 강아지도 애를 먹여요. 가만 있어도 조용한 날이 없어요.
계속 파도가 철썩 철썩 거리면서 새로운 과제가 밀려옵니다. 네 원수라고 내 원수 다르다고 이스라엘 다루는 식으로 계속 다뤄주는 거에요. 이미 어느새 네가 네 위주로 변했다는 것. 나는 불편한 것 싫어요 이런 식으로 변하는 거에요.
피는 곧 생명이다라는 말은 이거는 모든 인간의 사물 거기에 더하기 사물의 어떤 신비로운 기운이 있고 기가 있다. 기는 동양철학에서 많이 이야기해요. 맹자, 노자, 공자. 기 이야기 많이 하거든요. 기 있잖아요. 기. 도올 김용옥이 하는 기. 이건 물질로 설명 안 되는 것을 그 물질의 해석범주를 확장해서 영, 기. 또는 물리학에서 에너지 이런 걸로 포함시켜서 하는 거에요.
이걸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해석하는데 그런 뜻이 아니고 피라는 것은 피는 곧 생명이라는 이 말은 바로 해석 자체가 유월절 어린양의 해석 자체가 네 쪽에서는 아무리 해도 이해가 안 되고 피 자체가 살아있다는 말은 이 말씀이 점차 어딜 향하느냐 하면은 인격화로 되 가는 거에요. 인격화로. 피 자체가.
말씀의 인격화가 그 말씀이 들어있고 그 말씀이 바깥에 나올 때 뭘로 나타난다? 피 흘림으로 나오고 이 피 흘림이 바로 구약의 유월절의 그 원칙에 따라서 피 흘림이 있으면 뭐가 성립된다? 죄 사함이 일어난다. 이 이퀄 등식이 이 공식에 대해서 인간의 어떤 믿음, 사랑, 소망 도 다 거부돼야 되는 거에요.
피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피가 피 속에 참여케 하는 거에요. 뭘로? 하나님의 원수로서. 피를 믿어서 구원받겠다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가 하는 짓거리군요 할 때 그게 바로 주님이 선물로 준 믿음이에요 그게.
아 내가 피를 믿는 게 아니고 피 속에 피를 증거하기 위해서 주님이 나 쓰레기 같은 육신에다가 주님 오셔서 인격이 되게 하셨구나. 피를 찍어바르는 게 아니고 움직이는 피가 되게 만들었구나. 나를. 움직이는 피. 그건 그 안에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지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가짜로 오래 살면 진짜 되는 줄 알고 있어요. 나중에 본인도 헛갈려. 한 오십년 믿다보면 진짜 신앙인줄 알아요. 그러나 가짜는 본인이 알아요. 술 담배 없이 맨 정신으로 못 살겠다. 술, 담배 하는 이유가 사람들이 도저히 이 세상 맨 정신으로 못살겠다. 그 이유가 뭐냐? 새로움이 안 나와요. 새로움이.
새로움은 내가 깨지고 박살날 때마다 새로움이 나와요. 그 말은 주님이라는 새로움은 누가 방해했어요? 나의 육신적인 옛 성품이 계속 그걸 훼방하고 방해한 겁니다. 그 역사가 무슨 역사냐? 바로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내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농락당했어요.
과거에 써먹었던 하나님의 치료 방법이 몇 년 지나지 않아서 효과 없어요. 효과가 없어요. 왜냐하면 새로움 때문에 그래요. 새로움 때문에. 전에 율법 지켜가지고 그 다음에 또 못 써먹어요. 한번 써먹으면 그걸로 폐기처분됩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은 영원히 주님이 새로움을 제공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스스로 옛것 긁어모아가지고 구원되는 법은 하나님이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피로 구원받는다고 매일같이 유월절 피를 흘렸잖아요. 백날 해보세요. 전에 네가 알았던 너는 그 너는 이미 새로운 너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준비한 나는 새로운 사건을 통해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어떤 의미인지를 새롭게 달라진 너를 통해서 새롭게 증거되게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을 끌어가시는 방식입니다.
자, 이 방식은 이렇게 신약에 와서 요약됩니다. 부활의 개체는 지상의 개체가 아니다. 부활의 육신은 지상의 육신이 아닌 겁니다. 어! 저 육신 내 건데. 없어요. 그것은 이 지상의 영광은 영광으로 끝나버립니다. 끝나고 땅에 속한 형상은 더 이상 하늘에서 안 받아줘요. 수술한 건 수술한 거지만 안 받습니다. 수술해서 괜찮게 된 우리의 쌍커풀 그리고 심어지 우리 남자다 여자다 안 받습니다. 그건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그 시효가 끝났어요.
아담에서 흙이 되야 되기 때문에 죽은 것은 다 죽은 것으로 넘어가요. 죽은 것들은 죽은 것으로 끝나버려요. 새로움입니다. 하늘에 속한 형상은 예수님이 먼저 시범적으로 보여줬습니다. 부활의 몸이에요. 부활의 몸. 부활의 몸은 어떤 지상의 육신의 몸과 공통성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부활의 개체는 다른 개체입니다. 개체가 달라요. 다른 개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사도 바울의 소원이 뭡니까? 다른 개체이기 때문에 우리의 그 안에는 주님이 계신데 이 개체가 주님의 몸이 아니고 아담의 몸 흙에 속한 몸이 하늘에 속한 주님과 있으니까 우리의 육신이 얼마나 끈적거리고 더울 때 땀나고 거추장스럽겠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사적인 소원이 뭐냐 하면은 빨리 이 냄새나는 옷, 노동자의 옷을 빨리 벗어버리겠다는 거에요.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지요. 사도 바울이 그걸 뭘로 표현했습니까? 한 자로 뭘로 표현했습니까? 옷이에요. 여러분 옷 벗는게 그렇게 고통스러워요? 막 옷 벗고 죽을 지경입니까? 옷 벗는데. 홀딱 벗으면 되잖아요. 이게 뭐에요? 가볍게. 우리 자신을 육신을 가볍게 봐야 돼요. 가볍게. 벗으면 벗지 뭐.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걸 죽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해요. 세상에서는. 이 옷을 왜 벗어야 되느냐 하면은 말씀의 완성은 하늘에 속한 형상과 결합되는 것이 말씀의 그 질적으로 이게 어울려요. 말씀의 완성은 주님의 말씀의 완성이기 때문에 주님의 그 사랑에는 사랑 값을 하면 해같이 빛나는 영광스러운 그것과 이게 맞아요 이게. 딱 어울린다고요 이게.
어울리는데 무엇이 안 어울리냐 하면은 우리의 육신 썩어가는 육신은 어울리지를 않아요. 그래서 날마다 우리 육신 자체가 배설물이 나온다는 말은 우리 몸 자체가 배설물이다 이 말이에요. 우리 몸 자체가. 우리 몸 자체가 배설물인거에요. 거추장스러운 거에요.
그러면 주께서 우리를 지금 당장 죽이지 왜 안 죽이십니까? 지금 목적이 우리 편하라고 있는게 아니고요 우리가 이 육신을 갖고 있으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우리는 벗고 싶어도 못 벗고 더 살아야 돼요. 계속 억지로 더 살아요. 벌써 살았다 죽었다 하는데 계속 더 살아요. 6개월 지나도 계속 더 살아요. 앞으로 15년 동안 날마다 죽는다 하면서 15년 더 갈 수 있어요.
가면서 우리가 고백하는 것은 바로 주님 내가 원수입니다 라는 고백. 내가 원수라고 해줘야 원수를 사랑하라가 말씀의 완성의 형태로서 우리에게 발산이 되는 겁니다. 튀어나오는 거에요. 발산 이야기는 제가 울산강의에서 소개했지요. ‘발산’. 포인트 지점에서 양의 발산과 음의 발산. 영의 발산 이야기했습니다.
이 발산이라는 말은 방향을 가진 에너지가 우리 몸을 포인트로 잡을 때 쉴 새 없이 계속 나온다는 뜻이에요.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방향성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 방향성과 더불어서 에너지를 갖고 있어요. 그걸 수학 언어로 벡터라고 해요. 방향성이 없으면 스칼라 양, 절대 양이에요. 시간과 공간이 없어지는 순간. 그러니까 방향성이 없으면 시간과 공간을 같이 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방향성을 지니고 하루하루 삶이 우리가 생각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끄는대로 어디로 자꾸 움직여요 우리가. 자꾸 움직인다고요. 오늘 네가 오후 3시부터 4시까지 낮잠 자라 라는 그런 움직임이 있다고요. 낮잠 자는 움직임. 낮잠 자는 움직임. 주께서 일하시니 한시도 우리가 쉴 수가 없어요. 낮잠 자는 것도 주의 일이고 놀러가는 것도 주의 일이고 어느 한순간도 주의 일이 아닌 게 하나도 없어요.
이걸 신앙이 없는 사람은 못 믿기 때문에 자기가 일을 만들어. 자기가 나름대로의 방향성을 가지고 계획을 만드니까 그거는 자기 잘남을 위해서 나오는 에너지고 자기 인간 일이고 주의 일이니까 이게 내 내부에서 충돌이 일어나니까 스트레스 안 받을 수가 없지요.
여러분 새들이 자유롭지요. 창궐을 날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비올 때 그들이 어디가 있어요? 막 돌아 다닙니까? 처마 밑에 있지요. 새들도 비올 때는 처마 밑에 딱 가지요. 시편 84편에 보면 모든 것이 완성이 될 때 한옥 기와로 된, 성경에는 한옥 기와는 없지만 처마 밑에 거기 한곳에 다 모입니다. 그게 성전에 한곳에 다 모입니다.
그래서 그 성전에 모일 때에 그 오늘 본문 누가복음 6장 돌아가 봅시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제가 연극 삼아 말씀드릴게요.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성도가 모였습니다. 모이면서 무슨 이야기를 내고 있느냐 하면은 새로운 이야기를 내놔요. 새로운 이야기.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이것은 아담에 속한 인간의 정체성, 자아성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이야기에요.
30절에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라는 이 말씀이 성전에 모인 그들에게 새롭게 이것이 ‘이런 일을 주께서 우리에게 행하셨구나’ 또는 ‘이 일을 하시는 주님께서 이 일이 벌어지는 현장에 우리를 데리고 시범적으로 오셨구나’ 라고 성전에 모이면서 이 이야기가 되는 거에요. 그래서 누가복음 6장입니다 이게. 말씀이.
우리 입에서 이 이야기가 나오면서 주께서 이런 식으로 우리를 몰아세우고 몰고 갔다는 겁니다. 주께서 이렇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 거에요. 31절에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라는 일의 결과가 그 작품이 바로 너고 그게 바로 나다 라는 겁니다. 이 말씀을 누가 성취했습니까? 이 말씀을 누가 성취했습니까?
사물이 말씀이 되고 이 말씀이 완성된 것을 위하여 사물, 인간의 인체, 육체, 신체, 육신이 말씀의 완성 위해서 들이붙기 시작합니다. 붙으면서 이게 뭐냐 하면은 피로써 구원이라는 히브리서에 나오는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으리라” 했지요. 피 흘림이 있어야 사함이 있다는 그 관계 주님 몸에서 완성했던 그 관계를 우리를 통해서 보여주는 거에요.
“원수를 사랑하라”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 그러면 이걸 그대로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우리 자신은 여기 있었다. 우리 자신은 지표면에서 나를 위한 말씀으로 해석했지요. 그러면 나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것은 전부 다 뭐가 되느냐 하면은 원수가 되겠지요. 그럼 그 원수의 자리에 누가 오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오셨다 이 말이죠.
예수님을 대할 때에 우리는 예수님께 어떻게 반발하느냐 하면은 아까 반발하는 거 이야기했지요.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한 건 좋지만 나의 것이 훼손되는 것은 내가 욕먹지 않습니다 라고 반발심, 자동적으로 반발과 반항이 나오는 거에요.
말씀대로 살 테니까 제발 나를 귀찮게 하지 말고 괴롭히지 말아주세요. 나의 공로가 나의 자존감도 있잖아요. 내가 살아온 보람도 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내가 주님의 시다바리입니까? 그럼 나의 것은 어디 있습니까? 라고 절로 반발이 유발되게 되어있어요. 주님을 마치 필요치 않는 존재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그 요소가 우리에게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걸 극복하시고 우리를 사랑한 거에요. 그러면 성도가 그 원수라는 개념 앞에서 자동적으로 뭐가 되느냐 하면은 자기를 부인하겠지요. 원수라는 그 개념만 부인하는 게 아니고 예수 십자가 앞에서 한꺼번에 우리는 자기를 부인합니다. 부인하고 세부적으로 뭐가 주어집니까? 세부적으로 말씀이 주어지지요.
피에서 다 이루었다 파생되어 있는 말씀 하나 하나가 우리는 회고적으로 이미 구원받았으면 나는 주님의 원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자각할 때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내가 잃어버렸던 새로움이 나와요. 새로움은 우리는 감사로 나옵니다.
아 내가 참 내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는 그런 존재가 아님을 알 때 나 자신을 새롭게 보는 거에요. 잘나서 새롭게 보는 게 아니고 이정도로 쓰레기였어. 그래서 성전에 모인 같은 성도들끼리 이렇게 하지요. 나만 쓰레기인가? 너는 쓰레기 아니었어? 어디서 네가 나 흉보고 지적질이야.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이야. 내가 뭘 하든 너나 잘하세요. 너나 잘하세요.
그거 할 때 인상 찌푸리면 불신자고, 감사하면 신자고. 어느 누구도 남을 평하지 마시고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평하지 마세요. 이미 결정 난 것은 우리는 원수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주께서 증명하실 거에요. 32절에 봅시다.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이게 뭐냐 하면은 이미 우리가 너희가 사랑하는 자만 사랑한다 라는 것이 이미 우리는 굳어졌어요. 자꾸 핑계대지 말고 저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비겁한 변명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변명할 필요 없어요. 딱 지적한대로 이 뺨 치면 저 뺨도 때려 치는 것이 우리라니까요.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는 자가 우리에요.
원수를 미워하는 게 우리라니까요. 원수를 미워해야지 원수를 사랑하면 죽도 밥도 안 되고 아니지요. 우리 모습을 이렇게 새삼스럽게 구원이 합격이 된 상태에서도 우리 모습을 다시 보게 함으로서 주님이 주신 새로운 완성에 가치를 우리를 통해서 빛나게 하시는 겁니다. 진짜 어려운 거 하나도 없는데 계속 봅시다.
33절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도 그렇게 하느니라” 그 죄인 바로 우리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지요. 잘 해주는 사람만 잘 해주는 것. 잘 해주는 사람한테만 잘 해주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 자신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항상 자기 가치를 지키는 거에요.
아들 키워서 5년 동안 키워줬다. 그런데 애 낳고 도망친 여자 와가지고 내 아이 달라고 소송 걸었다. 아무도 안 보는구나. 마인이라는 드라마 안 보신 모양입니다. 그런 드라마 있어요. 그 얼마나 때려죽이고 싶겠어요. 내 자식인데 지가 낳아줬다고 이제 와서 내 아이 내놔라. 그런 일들이 여러분 돌아가실 때가지 비일비재 계속 생길 겁니다. 역겹고 구역질나고 토할 겁니다. 하지만 그때 새로움이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순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내 안에서 새로움이 나오는데 우리는 새로움을 바깥에서 찾았습니다. 나는 응당 잘 안다고 여겼는데 정작 점점 모르고 있는 것이 나 자신이 얼마나 죄가 중첩되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었는데 감사하게도 주께서 우리의 죄를 알려주시니 이 새로움을 통해서 주께 찬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