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6장 20절 (종말의 위엄) 210518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6장 20절부터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 가난한 자가 있어요. 가난한 자가 있고 이건 사람이죠. 그런데 주님은 무엇과 연관시키느냐 하면은 하나님과 인간 세계에요.
나라는 일부러 작게 쓰겠습니다. 나라가 사람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제가 크게 쓴 거에요. 지금 글씨 쓰는데 신경을 많이 써요. 왜냐하면 우리 교회 어떤 분은 글자 안 보인다고 TV를 85인치를 사가지고 글자 볼려고 샀다는 내가 그 소리 듣고 글자를 차분하게 써야겠다 생각 들었어요.
가난한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거에요. 하나님 나라 이것은 사람의 나라가 아닙니다. 사람의 나라가 아니죠. 그래서 여기는 사람이 들어올 수 없어요.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에 사람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슨 뜻이냐 하면은 가난한 자는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없어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가난한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데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가 하나님 나라가 너의 것임이요” 라고 이렇게 했단 말이죠. 들어갈 사람이 없는데 예수님은 있다고 얘기했잖아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예수님 자신에게 있어요. 예수님 자신이 제가 주일날 설교에 이야기했지요. 포지션은 그 인물과 동시에 등장한다고 했잖아요.
예수님 자신이 뭐냐 하면은 이것이 바로 종말입니다. 메시아는 세상 끝에 와요. 세상 끝날에 와요. 세상 끝날에. 세상 끝이 종말입니다. 그래서 종말을 이렇게 선으로 그으면 창세로부터 세상이 쭉 왔잖아요. 올 때 이게 있음, 있음, 있음, 있음, 있음으로 계속 이어져옵니다. 있음으로 계속 이어져와가지고 종말 되게 되면 이게 한꺼번에 있음이 뭘로 바뀌느냐 하면은 없음으로 바뀌어요. 한꺼번에 있음이 없음으로 바뀝니다.
보통 세상에서도 종말할 때 핵전쟁을 이야기할 때 근처에서 이 양재 이 동네에서 만약에 핵폭탄이 여기 한복판에 떨어졌다고 한다면 순간적으로 모든 것 다 날라가잖아요. 그러면 순간적으로 조금 전까지 있음은 뭐로 없어져요? 있음은 뭐가 된다? 없음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종말은.
저쪽에서 핵전쟁 쏘고 있는데 이 쪽에서 긴 칼 들고 덤벼라하면 되겠습니까? 안되겠습니까? 말도 안돼지요. 사무라이가 긴 칼 들고 핵폭탄아 오라 하면 면상에 쏴버리면 칼도 다 녹아요. 무려 3000도가 넘는 온도로 쏘아대기 때문에 칼이 녹아버립니다. 없어요. 핵폭탄 핵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핵만 있어요. 잘 들으셔야 돼요. 첫 번째 나오는 어려운겁니다.
핵만 있고 거기에 핵이 떨어진 잔해만 있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없어요. 이게 종말입니다. 이 땅에는 예수님만 있고 다른 말로 해서 혹은 예수님의 말씀만 있고 또는 약속만 있고 다른 말로 하면 새 언약만 있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결론이 뭐냐? 가난한 사람은 없습니다. 가난하다라는 사람이라는 말씀은 있는데 정작 가난한 사람은 없어요.
왜냐하면 종말의 원칙은 모든 인간은 있음이 아니고 없어져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있음은 없어져야 한다는 그 원칙에 준해서 종말이 되게 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있다는 것은 예수님과 그 말씀밖에 없어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머리 좋은 사람들은 생각하겠지요. 그럼 천국은 누가 가느냐? 예수님의 말씀이 새로운 가난한 자를 만들어내는 거죠. 이게 바로 하나님 언약의 원리입니다. 없는데 가난한 자를 만들어요.
그래서 이 종말 때 내가 여기 있는데 핵폭탄 날라와버리면 그 방사능 폭풍 앞에서 나는 어떻게 됩니까? 없어지지요. 없어지는 거에요. 없어지고 내가 있던 자리에 핵폭탄의 뭐가 있습니까? 여기 핵방사능만 있겠지요. 이것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겁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종말의 메시아가 내 안에 들어와서 사는 거에요. 종말에는 메시아만 있어요. 다른 사람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 말 듣고 천당갈려고 있는 재산 다 팔고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서 있는 재산 다 팔고 가난한 사람 돼서 천국갈려고 시도한 사람 있었습니다. 성이 톨씨에요. 톨스토이. 그런데 워낙 재산이 많아서 가난한 사람 줬는데 지금 톨스토이의 기념관에 가면 땅이 수십만개. 워낙 귀족이라서. 줘도 줘도 아직 남아있는 게 그 정도에요. 대부호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약시대를 종말로 보는 거에요. 종말로. 그러면 여기에 이방민족 있고 필리핀 레바논 다른 이방민족 있지 않느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없으면 다른 나라는 애초부터 없는 나라로 취급합니다. 죽은 나라로 취급하는 거죠. 왜 그러느냐면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이스라엘 통해서 자기를 계시하기 때문에. 나타내거든요. 언약 없던 나라가 언약에 의해 생겨났으면 그 언약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기 담깁니다.
그러면 언약의 나라 안에서 말씀은 어떻게 자기의 본 모습을 드러내는가.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마저도 말씀을 갖고 있던 이스라엘마저도 말씀의 능력을 감당할 수가 없었어요. 이스라엘도 인간이니까 감당할 수 없어서 그들은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세계 최초로 멸망하는 나라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멸망했다는 것은 다른 나라는 말할 것도 없이 멸망되는 거에요.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대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담의 후손치고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이스라엘 통해서 증명하는 거에요.
이스라엘 마지막에 보게 되면 이스라엘 마지막에 나라 망했잖아요. 망했는데 거기 선지자들 있지요. 다니엘과 세 친구. 말라기. 이런 사람들. 스가랴, 미가. 다 망하고 난 뒤거든요. 그런 분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은 어떤 이스라엘이냐 하면은 육적인 이스라엘이 아니고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아들에 의해서 새로 생긴 나라에요. 한번 적어볼까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남자는 모르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고 아들의 스펙트럼, 아들의 확장이 아들의 나라가 돼요. 아들의 확장이 아들의 나라. 아들의 나라를 가지고 무슨 나라라고 하느냐. 여기에 나오죠. 아들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15절에.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겼다.
그러면 아들의 나라말고 이 세상 모든 나라는 무슨 나라가 되느냐 하면은 흑암의 나라가 돼요. 흑암의 나라. 흑암의 나라가 돼요. 흑암의 권세에 있던 너희들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된 겁니다. 어떤 나라에 살다가 그 나라가 도저히 맘에 안 맞아서 다른 나라 가는걸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 세상에서는 이걸 가지고 망명이라고 하지요.
‘망명’. 이 망명에는 뭐가 필요하느냐 하면은 브로커가 필요해요. 망명 브로커. 망명 받는 나라는 심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거기 정보국도 끼어들고 외교부도 끼어드는데 망명했다는 이 뉘앙스를 보세요. 망명이라는 것은 기존 나라에서 못 살겠다. 나 저 나라에 가고 싶다 해서 망명하잖아요. 구약에서는 구원을 망명으로 이해해야 될 대목들이 나옵니다.
그 대목이 뭐냐 하면은 그 대목에 망명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바로 직업부터 나와요. 기생. 뒤에 이름나옵니다. 기생 라합. 기생 라합한테 우리가 다음과 같은 질문이 성립됩니다. 당신은 무슨 연유로 조국을 배신하십니까 라는 질문이 성립이 돼요. 당신의 조국이다 이 말이죠. 당신은 무엇 때문에 조국을 배신합니까?
왜 적군의 스파이를 왜 숨겨줘서 그로 인하여 당신의 조국이 왜 망해버렸습니까. 왜 망하는데 일조했습니까. 기여했습니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습니까? 거기에 대한 누가 혹시 저 대신 답변해보세요. 기생 라합 대신. 여기서 기생 라합은 뭐라고 답변하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세 자로 이야기하겠습니다.
기생 라합의 입장에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으니까. 먹구름이에요. 먹구름. 먹구름의 위엄을 아십니까? 소풍갔는데 저기서부터 먹구름 와보세요. 애들 도시락 챙겨가지고 빨리 차에 옮겨 타고 빨리 그 자리를 피해야죠. 안 그러면 흠뻑 다 젖잖아요. 먹구름의 위엄. 위력. 한국이니까 먹구름 정도지 미국 같으면 허리케인. 집이고 뭐고 다 날라갑니다. 그 종말이죠 종말.
종말하면 늘 생각나는 게 있어요. MBC드라마 아들과 딸에 나오는 제일 막내 종말이. 종말이. 그 먹구름이 몰려오는데 어느 바보가 그걸 보고. 허리케인이 조국이고 뭐고 여리고 성 다 몰살될 판에 종말이 오는데 먹구름이 오는데 조국이고 뭐고 망명이 급하죠. 망명하는데 브로커가 누구였습니까? 정탐꾼. 정탐꾼 숨겨줬잖아요. 정탐꾼을. 이 브로커 역할을 지금 누가해야 되느냐? 여러분이 해야 돼요. 여러분이. 브로커 역할해야 돼요. 브로커 역할.
지금 왜 우리가 오늘 본문 누가복음 6장 20절합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할 때 왜 사람들은 이 말을 못 알아듣느냐 하면은 가난한 자 존재가 있음, 존재가 있잖아요. 가난한 자가 있고 가난해? 이리와 이리와 천국 보내줄게. 지금 그렇게 하나님께서 구원하는 줄 알고 있는 거에요.
가난한 자는 없어요 이 땅에. 가난한 자는 없다고요. 가난한 자는 누가 만드느냐? 주님이 가난하다고 규정할 때만 가난한 거에요. 제가 한번 적어볼게요. 가난한 자는 없습니다. 가난한 자는 없어요. 그 다음에 21절에 “주린 자”. 주린 자는 역시 없어요. 그 다음에 “우는 자”. 우는 자 없습니다.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는 없습니다. 없는데 뭐가 있느냐 하면은 하나님 나라에 갈 사람은 있어요.
배불러야 하는 자는 있습니다. 웃어야 될 자는 있습니다. 그래서 종말에 웃어야 될 자, 배불러야 될 자, 이런 자는 종말에 없던 자가 예수님에 의해서 이런 자가 새로 생겨나야 돼요. 그러면 이런 하나님 나라가 생겨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이 웃어야 될 자를 이 세상에서는 우는 자로 만들어 버리죠. 그리고 배불러야 할 자를 주린 자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하늘나라 갈 사람을 가난한 자로 만들어버려요.
그렇다면 이 웃어야 할 자가 생긴다면 이쪽이 원인이 되가지고 우는 자가 결과적으로 생겨나는 거에요. 운다고 해서 웃는게 아니에요. 운다고 해서 가는 게 아니고 웃어야 될 자가 이 땅에서는 우는 겁니다. 왜? 이 땅에서는 예수님께서 그 다음에 22절, 예수님께서 어떤 호칭을 쓰느냐 하면은 여기에 사람의 아들로 오는 시기가 있었어요. 사람의 아들. 사람의 아들을 두자로 뭐지요? “인자”지요.
사람의 아들로 왔을 때는 이 우는 자와 주린 자와 가난한 자는 예수님이 느꼈던 체험과 공통체험을 해줘야 그 사람이야 말로 예수님의 나라에 합세될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이 되는 겁니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은 뭐냐 하면은 이렇게 보면 돼요. 고난 받는 예수님을 가지고 예수님을 사람의 아들로 이야기합니다. ‘고난 받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고난 받지 말아야 될 영광을 받아야 될 분이 이 땅에 와서는 뭐냐? 고난 받는 주님이 되시기 때문에 그것을 이 땅에서 예수님의 호칭이 뭐냐? 인자라고 하는 겁니다. ‘인자’. 사람의 아들로 하는 거에요. 이 호칭은 다니엘에서 나왔고. 다니엘이 고생한 것. 에스겔이 고생한 것에서 나온 거에요.
제가 지금 처음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처음부터 항상 시작하는 전제가 뭐였습니까? 없다는 거에요. 종말이기 때문에 종말은 해충제처럼 모든 걸 다 없애버려요. 없애버리고 그 현장에 말씀만 남겨요. 하나님의 약속만 남기는 겁니다. 누구든지 이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정녕 저주를 받으리라. 이 약속대로 살아서 살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에요. 싹쓸이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이 작업, 없는 자를 있게 하는 이 작업은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이사야 7장에 처녀가 잉태하여. 다시 한번 볼게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아들에 확장되어서 아들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 그게 바로 아들의 나라에 들어갈 백성들이에요. 백성. 백성들이죠. 전에 설교시간에 그런 예를 들은 기억이 나는데요. 미국에 보면 크리스마스 선물할 때 백화점 선물할 때 입구는 좁은데 출구는 넓어가지고 선물이 쏟아지는 그런 삽화를 본 적이 있어요.
예수님은 하나인데 거기에서 많은 자식들이 형제들이 여기서 줄줄이 쏟아지는 겁니다. 그게 히브리서 2장에 있어요. 맏이는 하나인데 형제들이 많이 나오는 것처럼 새로 시작하는 거에요. 새로. 새로 시작한다는 말은 애초부터 있었다? 없었다? 없었는데 예수님만 이 땅에 출몰하신 거에요. 메시아가 출몰하심으로 말미암아 없던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백성이 되어질 사람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이게 종말에나 일어날 현상이에요. 일단 종말은 전부 다 없어요. 없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종말의 획기적이고 전면적인 없음에 대해서 악마는 뭐라고 대처하느냐 하면은 여기 보세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지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 거에요. 아들이 있다 할 때 어떤 아들이라는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그 뒤에 나오는 필연적인 것은 뭡니까? 거기에 잉태할 자질과 능력을 가진 어미가 있는 것은 필연이다.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아들이 있다는 말은 그 아들을 잉태할 자질, 능력이 있는 여자가 있다는 사실 이게 필연적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여자가 아기를 낳을려면 동침한 남자가 있다는 것도 필연적이죠. 그 필연적인 것을 주께서 없애버리는 겁니다. 이거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이죠. 더 알기 쉽게 말씀드려서 악마는 인간이 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거에요. 악마는.
그런데 이 악마를 주님께서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종말의 심판을 하는 겁니다. 뭘 심판하느냐 하면은 바로 이것을 심판하는 거에요. 인간은 악마와 들러붙어가지고 인간이 가능한 것만 가능하다고 여기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거든요. 이걸 제거해버리는 거에요. 이걸. 제거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은 처녀가 아기를 낳아버려요.
남자도 없이 처녀가 아기를 낳아버리는 거에요. 처녀가 아기를 낳는 것과 같은 뜻이 뭐냐 하면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과 같은 거에요. 성령이 뭘 지워버리느냐? 육을 지워버리는 거에요. 누가 요한복음 1장 한번 읽어보세요. 1장 13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뭔가 붙어 있는 말이 있지요. ~~는 아니고죠. ~~는 아니고의 ~~에 뭐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자질과 능력은 그런 식으로서는 하늘나라 들어갈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에요.
그런 사람 하나님이 넣어주지 않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킨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의인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못 들어간다고 섭섭해하지 마세요. 시험도 못 치는 게 어디 합격을 바랍니까. 시험도 못 치는 게. 실력도 안 되는데 뭐 어떻게 들어가요. 못 들어가죠.
자, 천국을 예를 들어서 국수집이라고 합시다. 국수집. 쉬운 예로 국수집이라고 합시다. 여기에 있는데 국수집이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고등학교 나왔는데 고생고생 하다가 누구 어떤 식당에서 허드렛일 하다가 국수집 차렸다.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별로 당연히 그럴 수 있겠다. 그렇게 되겠지요.
그런데 국수집을 차렸는데 사장님이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하면은 서울대학 나왔어요. 그럼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것도 서울 법대 나왔어. 요새 서울 법대 국수 만드는 것 가르쳐줍니까? 아니죠. 좀 아깝다. 인재 아깝다 그렇게 되겠지요. 수능 399점이 아깝다 그렇게 되겠지요.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바로 악마는 능력에 어울리는 대우를 받아야 된다는 것. 이게 악마의 세계의 특징입니다.
지금부터 악마의 세계의 특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악마의 세계가. 여러분들이 조금 힘들고 지루하더라도 여러분들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악마의 세계 흘러가는 방법은 이 두 자로 결정납니다. ‘비례’. 악마의 세계는 비례에요. 방금 국수집 얘기했지요. 고등학교 나왔느냐 서울대 나왔느냐 둘 다 있음이에요. 있지만 있음을 그냥 가만 놔두지를 않아요. 서울대학 나와서 하느냐. 제가 들은 소식은 치과대학 나와서 김밥 장사. 뭐 가능성 있습니까? 김밥도 솜씨가 있어야지. 어떤 남자분인데. 그것도 서울대 치대 나와서.
비례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있음 대 있음의 비례에요. 이것은 비례라는 것은 이게 무슨 세계냐 하면은 이게 악마의 세계에요. 지금까지 강의한 걸로 하면 이게 뭐냐 하면은 멸망당해야 될 세계. 멸망당해야 될 세계.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종말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갖고 있던 자질과 솜씨가 전혀 발휘될 필요가 없는 그런 사건이 종말 사건이에요. 뭐 믿음이 있네 없네 그런 거 다 치우고.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질과 능력, 쌓아놓은 그런 재주가 아무 짝도 소용없게 된 것. 그러한 사건이 종말입니다. 그냥 예수만 믿어. 이걸로 끝나는 거에요. 그냥 예수님이 심판주로 오신 것을 믿어. 이게 종말이거든요. 주께서 양쪽에 핵폭탄 들고 온 것은 믿어. 그 앞에서 칼 들고 설치지 말고. 덤벼라! 이런 객기부리지 말고.
악마의 세계는 이야기하면 여러분 쉽게 이해되는 것이 우리가 평소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적절하게 합당하게 내 능력껏 살면 된다. 이게 비례인데. 비례에서 두 종류가 있어요. 정지된 상태의 비례와 그 다음에 운동 또는 다른 말로 변화. 변화 상태의 비례. 정지된 상태의 비례 이것을 하는 겁니다.
아까 국수집을 예를 들면 국수집에 어떤 사람이 주인인데 두 국수집이 있는데. 국수집A .국수집B가 있는데 한사람은 고등학교 나오고 한사람은 서울대학 나왔더라. 할 때 지금은 정지된 거죠. 그런데 나중에 역시 서울대는 달라. 국수집을 너무 개발 잘해가지고 체인점이 200개야. 그런데 고등학교 나온 집은 망했어. 이럴 때 우리는 납득을 해요 그걸. 역시 서울대는 국수집을 해도 진짜 똑똑하게 하는구나. 납득이 된다고요. 정지된 것.
제가 왜 이 말씀을 하느냐 하면은 여기 한번 보세요. 오늘 본문. 가난한 자는 어디 간다? 가난한 자는 하늘나라가 누구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할 때 사람들은 그 다음부터 하늘나라를 목적으로 하기 위해서 하늘나라 내가 여기 있음이 되기 위해서 지금 뭐가 있다고 합니까? 내가 어디 있음에 도전하느냐 하면 가난한 자만 될 수 있다면 주님은 같은 입으로 두 말 안하니까 가난한 자 하늘나라 간다 하니까 가난하게 되면 천당 갈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것처럼 느껴지는 거에요.
그러면 여기에서 이게 비례죠 비례. 이게 비례에요. 가난한 자가 하늘나라 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지금 자기의 능력과 가난한 자 능력 사이에 뭘 한다? 비교를 해서 비례를 하는 거에요. 비례를 하게 되면 여기 인간의 마음 속에 뭐를 그리느냐 하면은 그래프를 그려요. 그래프를. 그래프를 한번 그려보겠습니다.
이런 그래프를 그린다면 이 그래프는 곡선으로 이렇게 되어 있지요. 곡선으로. 이런 그래프도 있고 또 다른 그래프는 뭐냐? 직선으로 된 그래프도 있을 거에요. 그런데 인생사라고 하는 것은 직선으로 동일한 변화률로 이렇게 가지 않아요. 기분 좋을 때 나 가난하게 될 내가 왜 이 짓하냐 의심해가지고 에이 일단 돈 벌고 보자 하다가 아니야 그럼 천국을 놓치잖아 역시 또 가난한 자로 가야 돼. 해가지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단 말이죠.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 변화에다가 뭘 주느냐 하면은 플러스알파를 주고 싶은 거에요. 가면 갈수록 점점 더 하나님이 요구하는 가난한 사람 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겁니다. 모든 노력을. 왜? 어디 갈려요? 천국 갈려고. 이게 무슨 나라? 이 비례 나라가 무슨 나라? 악마의 나라. 그리고 천국은 처녀가 잉태한 거에요. 아예 불가능이에요.
주님은 악마가 가능한 것을 전부 다 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해버려요. 인간이 하지 못하는 것을. 그 인간이 하지 못하는 것에 뭐도 포함되어 있어야 됩니까? 가난한 자 되기도 이것은 인간이 못하는 가난한 자가 되는 거에요. 인간이 할 수가 없는 것. 인간이 할 수 없는데 어떻게 가난한 자 될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22절에 나오지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한다” 했잖아요. 주님께서 이야기한 이 가난한 자는 최초의 가난한 자가 누구냐 하면은 사람이 아니에요. 제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 본인, 인자 자체가 이 땅에 고난 받는 인자 자체가 최초의 가난한 자에요. 그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보고 이야기한 거에요.
자기 보고 가난한 자라고 이야기한 거에요. 자기 보고 주린 자라고 이야기하고 자기 보고 가난한 자라고 이야기하고 자기 보고 이 땅에 우는 자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습니다. 독일에 가면 이런 속담이 있어요. 독일에. 오리가 꽥꽥 운다고 오리처럼 울고 뒤뚱뒤뚱 오리처럼 걸으면 그게 오리냐? 그런 속담이 있습니다. 오리처럼 울고 오리처럼 걸으면 그게 오리냐? 라는 속담이 있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은 예수님처럼 가난하게 살고 예수님처럼 남을 돕고 바르고 착하게 살면 그게 신자냐? 같은 말이에요. 정답은 오리알을 낳아줘야 해요. 잉태치 못함. 오리알을 낳아줘야 오리에요. 겉모습 폼낸다고 신자 아닙니다. 지금부터 제가 너무 어려워서 주저하는데 어려워도 여러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제가 한번 하겠습니다. 자, 어떻게 변화에 알파를 주느냐. 이 세상 사람들이. 비례에 의해서 된다고 했지요.
비례에서 수직으로 될 때 최소 수평 변화와 최소, 작은 수직 변화율을 해가지고 비례를 끄집어내요. 갈수록 점점 더 내가 하나님이 원하는 착한 사람 될 수 있다는 그런 성화론 있잖아요. 이런 식으로 한다고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보면 돼요.
이게 뭐냐 하면은 x 나왔으니까 2차 방정식이 되죠. 올라갈 때 이 a지점에서 b지점 내려갈 때 이 지점에서 h 라면 하나가 더 들어간 거에요. h만큼 더 들어가면 들어간 변화들이 있을 거에요. 그걸 h로 나누어 버리면 여기에 얼마나 변화되고 더 나아졌는가를 알 수가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2차방정식에 있어서의 그 변화율이라고 하는 것은 이게 무한대로 줄어버리면, 이 변화율을, 곡선을 뭐로 표현할 수 있느냐 곡선을 직선으로 변화가 되는 거에요. 수학에서. 미분이라는 겁니다. 제가 설명을 드릴게요.
인간의 마음은 아무리 세상을 인생을 살아도 인간의 마음은 이걸 뭐로 정리하느냐 하면은 지금보다 어제보다 지금의 내가 나은 존재고 내일 되면 지금보다 더 낫게 됐다는 이렇게 발전하는 일차 직선적 사고방식을 인간은 악마로부터 물려받은 거에요.
종말이 아닙니다. 갈수록 꼴아박는 게 아니고 갈수록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진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이게 성화론에요. ‘성화론’. 수학에서 미분으로 나오잖아요. 이게 도함수라고. 기울기 나오거든요. 변화율. 이게 비례에요. 어제 존재했잖아요. 어제 내가 있음과 내일 있음 사이를 비례하는 거에요. 그런데 제가 종말에는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종말에는 그 먹구름의 위엄 때문에 모든 있는 것은 모조리 다 날라가버리고 그 현장에 뭐만 남는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예언과 예수님의 말씀만 남는 거에요.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오직 말씀만, 말씀대로 못 지킴에 대한 대가. 죽어 마땅함만 남는 거에요. 그냥 잿더미된 것들만 남아있어요. 잿더미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이 최초의 말씀 완성자가 되셔가지고 없는데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그 원칙에 준해서 없는데서 자신이 최초의 가난한 자, 최초의 주린 자, 최초의 우는 자가 되가지고 자기의 그 말씀대로 그대로 적용시켜버립니다.
그러면 아까 제가 한 공식. 천국에서 웃는 자는 인자의 나라 인자가 다녀가신 이 세상에서는 무슨 자라고 했습니까? 우는 자. 천국에서 배부른 자는 이 땅에서 무슨 자? 주린 자. 천국에서 하늘나라 가는 자는 이 땅에서 어떤 자? 가난한 자. 가난한 것은 바로 하늘나라에서 최초의 인물인 예수님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예수님을 두고.
여기에 무슨 1차 방정식, 2차 방적식이 뭐가 필요합니까. 필요 없는 거죠. 이것을 예수님은 이 방식을 수학적으로 하면 이걸 절대값이라고 합니다. 절대값. 절대값은 미분계수가 성립되지 않는다. 끊어져있다 이 말이에요. 끊어져있다.
y=┃x┃ 여기서 한없이 올라가도 한없이 내려가도 연결이 안돼요. 끊어져 있어요. 이게 달리 이야기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제가 그린 그래프인데요.
곡선이 와서 내려가지요? 전과 후가 다 같이 존재하잖아요. 종말이라는 건 이게 없어요. 이건 없는 거에요. 방정식이 성립이 안 되는 거에요. 있음의 세계에서 악마의 세계에서 통하는 이 수학적 방적식이 주의 말씀에는 이게 해당이 안 되는 겁니다. 종말 이전과 종말 이후에서 이 전에 있는 인간은 없어요.
그런데 종말 이후에 있는 인간은 앞에 있어요. 앞에 있다고요. 종말 이후에 있는 인간은 있어요. 그것도 잠깐 있지요. 잠깐. 이분이 누구십니까? 최초의 이분이. 예수님이죠. 십자가 이후 부활시켰죠. 부활세계에 계신 분이 이 땅에서 죽고 부활했잖아요. 최초로. 그러니까 예수님을 보고 뭐냐 하면은 첫 번째 부활. 첫 번째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이 쪽에 자기 백성이 예수님이 가야 생겨나는 거에요. 이게.
그러니까 곡선 넘어가는 것을 변곡점이라고 하는데 변곡점 이후에 뭐가 또 있는게 아니고 성경에서는 변곡점 이후에 인간은 없어요. 없다고요. 없어요. 백날 더 가난, 나는 더 낮아져야해, 더 겸손해야 해. 더 죄인되야 해. 백날 노력해도 이런 노력은 다 무용지물, 다 없어요.
뭘 시도해도 주께서는 안 받습니다. 뭘 시도해도. 어떤 시도를 해도 율법의 의를 할 만한 예수님처럼 다 지킬 위인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예수 믿는 자기 자신을 믿는 그런 꼼수가 주님 앞에 통할 수 있습니까?
다시 합니다. 악마의 세계의 모든 법칙은 뭐라고요? 비례. 있음과 있음 사이를 비교하는 거에요. 비례. 비교. 모든 판단 다 어디서 나옵니까? 모든 판단, 비교 다 어디서 나와요? 있음과 있음. 나는 너보다 낫다. 이게 무슨 뜻이냐? 둘 다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없는 분이 오신 거에요. 처녀가 잉태한 거에요.
없었던 분이 왔기 때문에 인간의 있음과 있음 사이에는 나의 가능성이 쎄냐 너의 가능성이 쎄냐 나는 고등학교 나왔다. 나는 서울대 나왔다. 누가 잘 되나 국수집 해서 한번 보자. 둘 다 있음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느 대학 나왔습니까? 예수님의 본래 고향이 어디입니까? 이 땅에 있어요? 없어요? 예수님은 하늘에서 왔단 말이죠. 하늘에서.
하늘에서 오는데 언제 오셨습니까? 종말 이전에 왔습니까? 이후에 왔습니까? 예수님 자신이 종말이기 때문에 종말 때 왔지요. 그러면 앞에서 존재한다는 사람은 아무도 존재할 수가 없지요. 제자들이 주님 저 주님 때문에 살았습니다. 주님 제자입니다 라고 자꾸 있는 척 하는데 기어이 십자가라는 변곡점을 통해서 그 제자들로 하여금 없는 자로 다 만들었잖아요.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없어요. 목자 앞에 양들이 없어요. 양 만들기는 목자 없이 새로 시작하는 겁니다. 성령을 주셔가지고. 없는 양을 성령을 받은 자만 양이 될 때, 그 때 받은 양들이 역시 나를 찾아와야 돼 이런 식이 아니지요. 왜 제가 양입니까?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 이야기하고 첫째시간 마치겠습니다.
자, 없는 가난한 자를 어떻게 만드는가. 이거는 약간의 우스갯소리지만 그 비율이 100:1입니다. 우스갯소리입니다. 웃으세요.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누가복음 15장. 양이 한 마리 있는데 어떤 양이냐 하면은 99마리 양은 그대로 있지요.
이 양에는 무슨 요소가 없느냐 하면은 잃어버림이 없어요. 잃음이라는 요소는 양이 잃어버렸다는 게 아니라 그 양 안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을 잃어버린 아버지에 의해서 잃어버린 그 정보가 들어있는 양이 잃어버린 양이에요.
그래서 가난한 자라고 하는 것은 그 가난한 자가 가난하다는 뜻이 아니고 그 안에 가난한 예수님이 부활 이후에 얼마나 하늘나라의 주인공 되었는가 그 과정과 절차 경로를 담고 있는 자가 가난한 자에요. 그 경로를 담고 있는 자가. 내 안에 주님은 가난하게 오셔서 이렇게 영광스럽게 되었다는 그 경로를 품고 있는 자가. 그걸 품고 있는 자가 가난한 자에요. 그걸 품고 있는 자가 주린 자고 그걸 품고 있는 자가 우는 자에요.
이 비슷한 이야기가 마태복음 5장에 나오지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임이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의 위로를 받을 것이다” 이게 전부 다 누구 이야기냐 하면은 예수님의 심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에요. 유일하게 율법을 지키신 분이 율법 못 지키는 세상에 와서 설움 받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누가복음 6장에 나오지요. 6장 22절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뭐가 있다? “복이 있다”. 복이 있을려면 항상 우리 안에 어떤 요소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은 “인자로 인하여”가 담겨있는 사람은 그 자체로 이미 복을 받아요.
왜냐하면 예수님을 미워하는 이 세상이 예수님이 들어있는 그 사람을 동일하게 미워하고 욕하기 때문입니다. 욕 들을만한 짓을 한 게 아니고 나쁜 짓을 한 게 아니고요. 그냥. 세상이 세상답기 위해서 악마가 악마답기 위해서 욕을 하는 거에요. 왜 우리는 다 가능성, 가능성, 가능성인데 왜 너는 뭐 때문에 불가능성, 불가능성, 불가능성 주장하느냐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에서.
이렇게 기도해서 복 받았고 이렇게 헌금해서 복 받았다고 전도해서 하늘나라 확장되었다고 이렇게 목회 성공했다고 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끄집어냈는데 한 달란트 두 달란트 이야기하면서. 너는 왜 불가능만 이야기하느냐 말이죠.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소이다. 나는 무익한 종일뿐입니다. 왜 그렇게 기어들어가는 소리만 짜고 우는 소리만 하고.
우리 집은 가난하도소이다. 땅이 25만평인데 그거 안 팔려서 애를 먹고 우리 집에 경비원이 7명인데 7명 요새 월급을 못줘가지고 월급을 300만원 주다가 200만원으로 줄였습니다. 이 정도로 가난합니다. 우리 집에 에스컬레이터 3대 있는데 고장나가지고 못 고칩니다. 이런 식으로 짜는 소리, 우는 소리를 하는 거에요. 이런 식으로.
차를 바꿨는데 벤츠가 맘에 안 든다 해가지고 딴 걸로 바꿨는데 기름값이 더 들어가지고 지금 내가 짜증나 죽겠다. 이 정도로 가난한 거에요. 항상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의 점철, 불가능이 연속되어 있어요. 불가능이. 어느 한구석도 가능한 게 없어요. 굳이 예수님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주께서 그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자, 악마의 나라에서 비례라고 했지요. 그 비례를 아까 그래프로 했는데 이번에는 면적으로 하겠습니다.
면적이 있을 때 이 한 면을 L이라고 하고, 정사각형이라고 합시다. 이 면적은 L² 이 면적이 돼요.
그렇다면 사람들은 인간의 욕망이 이걸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조금씩 키워요. 이 키우는 것을 면적의 도함수라고 합니다. 미분이 여기서 나와요. 어떻게 하느냐? 면적을 이렇게 해가지고 이걸 이렇게 키웁니다. 이 변이 L이라면 세세한, 작은 면적을 늘렸으니까 델타L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쪽도 늘여야겠죠, 여기도 늘리면 이 늘어난 것은 뭐냐 하면은 면적을 D라고 하면 늘어난 걸 h라 하면 D+h-D하면 h가 나오겠죠. 요걸 구하는 거에요. 요거는 델타L 곱하기 L, 이게 두 개니까 앞에 두 개 집어넣으면, 이것도 하나 남네, 이거.. 델타L²
이것을 최소화시킬 때 그 변화는 뭐냐? 이 늘어난 만큼 2L로 나온다, 이런 법칙이 있는데,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하루 일과 아침에 눈만 뜨면 델타L 이걸 생각합니다. 하루 눈만 뜨면.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 이게 사는 보람이에요. 이게 세상 사는 사람 보람입니다. 그럼 이런 보람 안 살고 다른 세상 보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 있습니까? 그건 10분 후에.
10분 쉬고 합시다.
강남-누가복음 6장 20절 (종말의 위엄) 210518b-이근호 목사
예수님께서 여기에 22절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당하고 욕 얻어먹음을 당하는 이유가 내가 원하는 것을 예수님이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상대가 있다는 것은 내게 필요할 때 상대라고 말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한테는 내게 필요한 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사람들이 줄 수 있는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느냐.
이유가 뭐냐 하면은 율법의 도적질이라는 것은, 도적질이란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타인에게 빼내는 게 이게 도적질이에요. 도적질이나 살인이나 간음이나 거짓말이나 다 나쁜 것은 무엇이 확고해지느냐 하면은 셀프, 나 자신이 갈수록 면적이 넓어지는 거에요. 아까 그 D라는 면적에서 Dh만큼 늘어나잖아요. Dh+h만큼. 소량 크든 말든 늘어난단 말이에요.
여기에 에너지가 투입되는데 그 에너지가 어디서 얻습니까? 바로 자기 주변에서 얻는 거에요. 그러면 이 사람이 에너지 얻기 위해서 교회 와서 기도한다. 그러면 기도는 곧 뭐가 된다? 기도는 뭐가 되겠어요? 기도가 뭐에요? 도적질이죠. 왜? 내 면적 키우는데 급급하기 때문에. 내 것이 잘되기 때문에.
종말은 이것을 없애버릴려고 하는데 이걸 키울려고 한단 말이죠. 이게 도적질이에요. 내 몸집을 키우는데 당신은 얼만큼 나한테 보탬이 되겠느냐? 당신이 원하는 것 제공해줄테니까 그것보다 더 많이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는 거에요. 이러한 도적질, 주님이 도적질하실 분은 아니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이 방법을 반대로 쓰시겠지요.
자, 이제 뭐가 궁금 하느냐 하면은 이게 인간들이 평소에 하는 생활이 이런 거에요. 눈만 뜨면. 애가 공부 7등하게 되면 5등으로 땡겨야 되고 5등하면 2등으로 땡겨야 되고 그러니까 지혜로운 아이는 7등하면 6등 해야 되지 2등하면 안돼요. 다음에 1등하라고 닦달해가지고 안돼요. 요령껏 석차를 조절해야지요. 그 정도 되면 천재지요.
이것이 인간들의 방법이고 악마의 방법이라면 주님이 쓰시는 방법은 뭐냐? 주님이 쓰시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강력한 자석이에요. 버티지 못할 정도로 빨아 당깁니다. 그래서 종말은 강한 시간이다. 강한 시간. 모든 시간이 거기 다 빨려 들어가요.
의존 강의할 때 고스트 바스터 했지요? 고스트 바스터란 노래 있잖아요. 청소기 가지고 귀신 빨아 당기는 것. 그거 하듯이 쫙 빨아 당겨버립니다. 저항할 수가 없어요. 막 빨아 당기니까 옷이 이렇게 가요. 종말의 그 블랙홀 쪽으로 모든 게 거기에 빠져 들어간다고요. 거기에 빠져 들어가요. 그거 안 빠져들려고 발버둥 치고 버텨도 주님의 그 강력한 자장, 자석의 그 필드, 자장에 의해서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는 거에요.
이게 바로 제자들이죠. 이게 제자들이고 이게 바로 사도들이죠. 이게 사도들이고 제자들이에요. 그리고 제자들이 하는 말이 “이번 일은 내가 안했어” 이래요. “내가 안했어. 이번 일은 내가 안했다고” 이거는 주께서 능력주시는 자가 했지 이건 내가 안했다. 맨날 이래요.
네가 얻어맞고 강도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이렇게 배고픔을 당하고 그런 요소에도 복음을 전했다. 네가 했지? 아니요. 주께서 능력주신 자로 주께서 하셨어. 이런 믿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 이런 고백이 막 나오는 거에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이제는 너의 증거는 끝났어. 너 잘났다는 끝났어요. 강력하게 빨아 당기는 주님의 일하심만 그 몸을 휘감고 있는 겁니다. 휘감고 쫙 당겨버립니다. 모든 시간이 거기 빨려 들어가지요. 그렇다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서양의 동화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여러분 잘 아는 겁니다.
그게 뭐 여러 가지의 버전이 있지만 한 가지 중에 이야기한다면 어떤 집에 신기한 암탉이 있는데 늘 아침에 가면 황금계란을 낳아요. 황금계란. 마치 일용할 양식처럼. 또는 만나처럼. 매일같이 황금계란을 낳는데 예를 들어서 그 주일 앞두고는 황금계란을 3개 낳는다든지 그런 식으로 줬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간들이 있음과 있음으로 비교하고 비례하기 때문에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은 그 닭 안에 분명히 황금덩어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에요. 그래서 확인해보기 위해서 그 닭을 잡았습니다. 죽었어요. 이야기 끝이 났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제가 왜 거론하느냐 하면은 성도는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쪼개보면 다른 사람하고 똑같아요. 똑같은데 똑같기 때문에 주의 말씀이 자장 걸려가지고 형성하다 보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말씀이 말씀대로 자체적으로 실행해버리는 겁니다. 성취를 해버리는 거에요. 완성을 해버리는 거에요.
그게 날마다 감사의 계란을 낳는 거에요. 성도가. 남 보기에 뭐 별로 감사할 것도 아닌데 소소한 것 세세한 것도 다 감사해. 범사에 감사. 감사의 계란이 막 나오는 거에요. 매일같이 나오는 거에요. 심지어 예수 이름으로 핍박을 받고 악하다고 할지라도 22절 끝에 봅시다. 너희에게 뭐가 있다? “복이 있도다” 복이란 계란을 낳는 거에요. 복이란 계란을.
복이란 계란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미완료가 아니고 자체가 완성이에요. 내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완성되는 겁니다. 23절에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선지자들이 기뻐하고 좋아했을 때에 사람들은 선지자의 기쁨을 보고 선지자 노릇 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과연 선지자가 기뻐했는지도 우리가 좀 의심스럽고. 목 베임을 당해서 기쁜지. 그러나 우리는 선지자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경험한 것을 그 가능성을 넘어서는 불가능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마치 평범한 닭이 황금계란을 낳는 것처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왜 감사하냐? 그럼 성도는 왜 감사하냐? 여러분들 노인네들이 아침에 운동할 때 동네 보면, 보면 여기도 있던데요. 흔들흔들하고 빙빙 도는 거 있지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 흔들흔들하는 기계가 올라탄 사람보다 강합니까? 약합니까? 강하지요. 강하기 때문에 의지해서 운동이 되는 거에요. 기계가 약하면 같이 넘어지잖아요.
그러니까 성도라 하는 것은 주님의 완성된 것, 완료된 것, 확고한 것, 분명한 것, 강력한 죽음에 승리했다는 명백한 그 강함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성도에요. 성도라고요. 거기 올라타서 이렇게 운동해도 괜찮고 주님 목 붙들고 흔들어도 괜찮고 이 세상에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떤 짓을 해도 주님의 죄 사해주는 그 확고함과 든든함. 그거는 변동이 없습니다. 왜냐하면은 나하고 계약 맺은 게 아니기 때문에.
자, 이제부터 어렵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운동기구하고 계약을 맺은 거에요. 운동하는 나하고 맺은 게 아니고. 거기서 까불든 말든 개미가 붙든 관계없고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확고하게 고정된 완료되어 버린. 처음이 곧 나중이고 이미 확정 나버린 그것과 하나님께서는 계약을 성사시킨 겁니다. 계약서에.
그래서 계약서의 싸인에 누구 이름이 있느냐 하면은 예수의 이름으로 싸인되어 있어요. 예수 이름으로 그 증서가 있어야 구원받는 거에요. 우리 이름은 소용없어요. 거기에 비해서 여기 24절 봅시다. 여기 복과 반대말이 뭐라고 되어 있어요? 복 있는 사람 반대말이. “화 있을진저” 저주 있으리라. 화, 쉽게 말해서 저주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이걸 좀 설명해 드리겠어요. 여기 종말에서 예수님이 등장했습니다. 여기는 황무하죠. 인간같은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종말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이 세상에 이스라엘과 함께 있던 여호와의 이름께서 이스라엘에서 튀어나와버린 거에요.
이스라엘에서 차버리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존에 있던 모든 줄줄이 따라오던 언약과 약속을 여호와 이름이 다 맡아버려요. 다 담당해버립니다. 그러면서 장차 인간 세계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계신 거에요. 약속에 의해서 들어갈 준비를 하십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주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주의 이름.
약속대로 주님이 오시면 이스라엘은 새로 만들어진다 그 약속을 믿었던 겁니다. 주의 이름에 의하면 여기 안에 뭐가 포함되느냐? 여기 새로운 이스라엘이 포함되는 겁니다. 기존의 이스라엘, 혈육적 이스라엘과 교체가 되는 거에요. 그 여호와의 이름이 여기 유대민족 안에 들어오신 겁니다. 들어올 때 언약대로 약속대로 들어오신 겁니다.
들어오시게 될 때 그러면 이거는 하나의 심판주로 오시기 때문에 이쪽은 뭐냐 하면은 멸망의 대상이죠. 멸망의 대상이란 말이죠. 그런데 멸망의 대상의 이들은 벌써 이스라엘을 통해서 언약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쪽에 있는 자들은 비록 가난해도 지옥 갑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가 스스로 위로해야 되잖아요. 스스로 위로하고 스스로 부요하다고 우기고 스스로 개뿔도 없으면서 웃고, 그러니까 이게 저주가 된다는 거에요. 이게 저주란 말이죠. 주님께서 유발시킨 거에요. 유발시킨 거. 주님께서 우리가 평소에 인간들이 실상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다 까발리는 겁니다. 뭐하기, 척하기, 뭐한 척하기. 돈도 개뿔도 없으면서 힘도 없으면서 강한 척하고.
저주 있을지어다 너희 부요한 자여. 여기 부자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부자이고 싶어하는 자. 또는 없으면서도 나름 부자라고 스스로 위로하는 자. 이게 뭐냐? 자체적으로 자기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심리적 조정에 나서는 겁니다. 그래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야. 이 정도로 감사하지. 굉장히 신앙인 같애. 자체적으로 조절 가능한 것을 조절하는 거에요. 중들처럼 말이죠.
여러분들 중들이 머리를 깎는다 하잖아요. 머리를 깎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고요 머리를 못 기르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고 생각하세요. 결과적으로 같은 말이지만 이게 심리적으로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머리 길고 싶어 환장하는데 아 또 깎아야 되나? 이거는 머리 억지로 깎는 것이고. 이거는 머리를 안 기르는 조건 하에 자기는 중으로서 밥벌이가 돼요.
문신을 못 지워서 문신을 갖고 있는 게 아니고 문신 지워질까봐 염려하면서 문신하는 거에요. 인간은. 이게 저주받은 인간의 원리입니다. 인간은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부자의 욕망은 더 커지게 되어 있어요.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같은 인간인데 왜 나는 팔자가 이 모양이냐. 집에다가 잘 풀리는 집 화장지 이만하게 사 놔도 갈수록 일이 풀리는 일이 없네. 안 풀리는 정도가 아니고 뭘 해도 안 풀려요. 집에 창고에 보면 휴지 이만큼 사놨거든. 잘 풀리는 집이라고. 해도 안 풀려.
우리 집안이 잘 됐으면 하는 욕망은 갈수록 점점 더, 더 커지는 겁니다. 이걸 인간이 감당을 못해요. 그 욕망을, 그 결핍을 그 목마름을 버텨낼 수가 없습니다. 버텨낼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더 어떻게 합니까? 위장하고 위선으로 살 수밖에 없지요. 내가 예수 믿어서 참는다 이런 식으로. 너 참는 거하고 예수 믿는 거하고 무슨 관계인데. 핵폭탄 터트렸는데 뭐 거기서 새삼스럽게 폼 내고 척하고 그런 게 있어요.
바로 이 세상에는 악마가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다 하지요. 그래서 성도가 뭐냐 하면은 악마가 할 수 없는 것을 성도는 해냅니다. 이거는 인간이 가난한 게 아니에요. 그럼 뭐냐 하면은 제가 대구강의 때 했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무너지는 시스템을 갖고 오잖아요. 성도는 한 달 수입이 2천이고 집이 세 채라도 자기를 가난하다고 볼 수 있는 것. 이것 성도만이 할 수 있는 그러한 특징입니다. 이건 사람의 능력으로 안돼요. 물론 한 달 수업 2억보다 되게 가난하잖아요.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 속에 예수님이 가난하게 했다는 그 말씀이 작용하게 되면 아무리 떵떵거리면서 잘 먹고 잘 살고 차가 여러 대 있어도 자기 자신을 가난한 자로 인식하는 그런 놀라운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것을 세 자로 이야기하면 이걸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거푸집. 형틀을 뽑아내서 상품을 반복해서 찍어내기 위해서 거푸집 있잖아요. ‘거푸집’.
인간의 죄인 됨을 인간은 악마로 살았고 나 밖에 모른다는 것을 거푸집으로 사용해가지고 거기에다가 주님의 예수의 피와 희생을 거기에다가 찍어내는 겁니다. 그걸 찍어내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피를 할 때 제가 오전인가 오후강의 때 그런 이야기했는데 오후강의 때 그런 이야기했어요. 피라고 했을 때 이 개념만 알고 있으면 돼요.
깨어짐이에요. ‘깨어짐’. 쨍그랑. 뭔가 그릇이 좋은 그릇이 쨍그랑 깨어지듯이 깨어짐을 거푸집으로 이용해서 깨어짐을 품고 있는 사람, 품고 있는 사람이 이게 바로 성도입니다. 주님이 깨어졌다는 거에요. 주님이 깨어졌다. 이 땅에서. 인간들을 위하여. 이 죄인들을 위하여. 주님께서 욕 얻어먹고 미움을 당했다 이 말입니다. 주님이 사람 대우 못 받았다 이 말이에요.
사람 대우 못 받은 그 분을 나의 구주로 주인으로 모신 거에요. 그것도 거푸집, 나의 거푸집을 사용해서 찍어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재산이 얼마냐 얼마나 착했느냐 얼마나 훌륭하냐가 아무상관 없는 이야기에요. 그리스도를 모시느냐 모시지 않느냐 그 차이뿐이에요. 그런데 그리스도가 거푸집이 되지 못하고 거푸집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25절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웃는 것이 죄입니까? 라고 묻지 말고 무조건 이것은 무조건 주님께서 없는 사람을 주님이 안 계신 사람을 무조건 애통하도록 그렇게 만드신 거에요. 물론 율법적으로 죄인이니까 그렇게 하지요. 그 다음에 26절 봅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자, 선지자들의 특징을 이야기할 때 26절 선지자들은 어떤 사람이냐? 거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지 못하는 사람. 칭찬을 받지 못하는 사람.
왜? 납득이 안 되니까. 납득이. 납득이 알지요? 납득이. 건축학개론에 나오는 납득이 있지요. 납득이 안 되니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 쪽 세계, 하늘나라하고 땅하고 대화가 됩니까? 하나는 불가능이고 하나는 가능인데요. 하나는 존재고 하나는 비존재인데요. 대화가 안 되지요. 대화가 안 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가 없고 대우를 받을 수가 없어요. 우리 과라는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무슨 뜻인지 여러분 아시겠지요? 선지자들은 자기 말을 못해요. 자기가 가능한 말을 못하고 불가능한 내용만 담아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도록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선지자에게 성령이 왔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성신이 왔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들께 문제. 오늘 강의 들었으니까 문제 냅니다. 이상하게 문제에 약해.
문제1. 성경에 마태복음 5장에 “너희는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라. 너희 선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는 이 말씀과 방금했던 누가복음 6장 26절에 선지자의 말씀과 어떻게 일치 시킬 수 있습니까? 이게 문제. 첫 번째 문제. 마태복음 5장에 나오지요? 빛과 소금이 되어라. 너희 선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라.
그 말을 사람들이 아까 비교 또는 비례, 존재, 있음을 전제로 해서 해버리면 아까 우리 아까 첫째 시간에 봤던 면적 늘리기 있지요. 다시 이야기할까요? 안 해도 되지요? 면적. 지금은 내가 56만큼 착한데 내일되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서 57, 모레 되면 58 이렇게 되게 되면 그래프가 어떻게 됩니까? 일차곡선 이렇게 올라가겠지요. 이렇게 올라가는 것.
이렇게 포물선 그려서 더 올라가는 것. 이걸 염두해두겠지요. 인간 마음속에 더 놓은 곳을 향하여 천당을 기대하지요. 그런데 성도의 그래프는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곡선인데 뒤에는 없어요. 이제는 내가 죽었기 때문에 내 안에 누가 삽니까? 그리스도가 사시는 세상이죠. 대화가 안 되지요.
자, 이 말씀 듣고 빛과 소금이 되게 되면 지금 나의 선함이 56인데 내일되면 57, 더 착하면 58, 점점 더 100, 200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을 56때 가질 수 있지요. 그러니까 빛과 소금이 돼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영광을 돌린다 하는 그 말씀을 왜 주셨습니까? 주신 이유가 뭡니까? 문제 제가 냈어요 지금. 후딱 답변할게요.
성도는요 분명히 알 이야기했지요? 황금 알. 성도는 그냥 초라하고 모자란 존재 정도가 아니라 거기서 낯선 것이 나와요. 낯선 것이. 그 낯선 것이 뭐냐 하면은 빛과 소금의 역할이 이게 튀어나오네요. 그럴 재주도 없고 능력도 없으면서. 그럴 때 누가 화들짝 놀랍니까? 남들이 놀라는 게 아니고 본인이, 본인이 놀래버리는 거에요. 본인이. 내가 미쳤어 미쳤어. 내가 왜 이래.
나는 결단코 이런 인간이 아니야. 내가 빛과 소금 이거는 말도 안돼. 나는 돈 외에는 사랑한 게 없어. 돈이 최고야. 이게 우리 모습이잖아요. 목사님은 안 그렇겠다만은. 성경 말씀이 원인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요. 죄인으로 만들고 죄인이기 때문에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기 때문에 귀하게 보시는 겁니다.
죄인으로 만들고 “죄인이지?” “예.” “그럼 이런 거 나오는 거 네 솜씨 아니지?” “예.” 이게 또 나오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귀한 존재에요. 귀한 존재인데 어느 정도로 귀한 존재이냐 하면은 정말 보잘 것 없기 때문에 귀한 존재에요. 무가치하고 보잘 것 없고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기 때문에 귀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 병원에 어린 아이가 거의 1살 좀 더 된 아이가 병원에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나 엄마가 걱정을 많이 한 거죠. 하얀 가운 입은 사람만 보면 기겁하고 질겁을 하고 이래가지고 이거 또 어떻게 달래가지고 네가 주사 맞으면 맛있는 거 해줄게 이렇게 달랠 것이냐 고민하고 있는데 병원에 딱 갔는데 의사 선생님 봐도 아이가 울지를 않아요.
주사 맞자. 주사 맞아도 살짝 찡그리고 울지를 않는 거에요. 너무 기특해가지고 “ 얘 다른 애들 다 울고 하는데 너 어떻게 이렇게 주사 맞아도 안 우느냐?” “엄마 나 죄인이거든.” 그런 이야기는 없을 거에요. 엄마의 사랑을 못잊어 하든지 엄마의 기도 못잊어 하든지. 또 누구처럼 아주 시근 있는 아이 같으면 엄마도 고생하는데 나 이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해야지. 감수해야지. 그런 시근 있는 애들이 있어요. 있겠지만.
바로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된다고 하는 것은 조건이 뭐냐 하면은 말씀에 입각해서 우리는 어떤 말씀도 못 지키는 그야말로 도적질만 하고 살인만 하는 그런 나쁜 인간. 남의 것을 뺏고 이용하고 아까 면적 나오지만 이 면적을 점점 더 키워서 남한테 내세울 거 있는 사람. 남한테 내 놓을게 있는 어떤 건전함이라든지 또는 위세라든지 능력이라든지 내가 이 정도 되는 인간이야 라고 그것을 기대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마지막 때에 십자가 앞에서 이미 한꺼번에 내 안에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내 안에 죄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게 주님의 거저 주신 선물로 이해하는 거에요. 그리고 그것을 본인의 체질로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본인의 능력으로 본인이 할 수 있는 자기의 가능성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고 본인이 놀래는 거에요. “주여 내가 이런 인간이 아님을 주께서 아시잖아요 주여.” 고마워할 줄 알지요.
마태복음 11장 잠시 보겠습니다. 11장 25절.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감사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걸 있는 자들에게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누구란 말입니까? 그 뒤에 어린아이랑 대비되니까 어른들이에요. 어른들에게 똑똑하고 알고 사회 경험 있다는 어른들에게 숨기시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얻어먹는 주는대로만 사는 어린아이에게만 나타나심을 감사합니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은 누구 뜻이다? 아버지의 뜻이다.
그럼 어른들은 지옥가고 어린이들만 천당 간다는 그런 뜻입니까? 그런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는 전부 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면은 뻔뻔스럽게 얻어먹는 거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어린아이 같은 심정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 심정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이 말씀, 마태복음 25장에 이 말씀을 죄인을 통해서 실현시키는 결과물로 성도가 생기는 거에요.
모든 것은 성경 말씀이 결과물을 말려도 안돼. 반드시 이게 나오게 되어 있는데 하필 그 나오는 그 대상자가 누구다? 성령 받은 우리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하고는 대화가 안 되지요. 대화가 안 되니까 미움 받는 거에요. 뭐 통해야지요. 자, 그럼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가? 세상 사람들의 심보, 의식 딱 이겁니다.
사회가 나를 안 받아주면 나는 어떡해. 나는 어떡해. 사회, 다른 말로 주변. 주변의 타인. 사회가 나를 안 받아주면 나는 어떻게 살아? 어떻게 살아. 이걸 달리 이야기할까요? 나와 대화되는 사람이 없으면 나는 어떻게? 죽어야지. 나와 대화되는 사람이 없으면 나는 어떻게 살아? 집에 돈도 있고 집도 있고 있는데 차도 있는데 친구가 한 명도 없다. 안 놀아줘. 그럼 나는 어떻게 살지요? 이게 바로 세상 사람들이 걱정을 하고 있는 거에요.
걱정을 하니까 마귀가 그들의 걱정을 부응해서 도와주는 겁니다. 그래 네가 절대로 딴 생각하면 안돼. 지금 네 친구 있고 사회가 너 받아줄 때 너 여기서 빠져나가면 안돼. 이게 최고의 행복이야. 네가 추구해야 될 목표가 바로 가장 좋은 것은 다 여기에 있는 거야 하고 거기서 딴 소리, 딴 생각 말고 딴 목적 말고 거기에 딱 모이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회 있잖아요. 이 사회. 이 사회가 뭐냐 하면은 의미의 바탕이 없습니다. 뿌리가 붕 떴어요. 붕 떠있는 거에요. 사회라는 게. 뭔가 속았어요 우리가. 마귀한테 속고 있어요. 뿌리는 없어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했지만 사다리 타기하는데 이미 꽝으로 결정났어요. 쭉쭉쭉 타고 내려오는데 꽝이야. 안 통해 꽝인데 꽝이라도 그건 나중 문제고 지금 우선 내가 필요한 내 친구나 대화가 되는 나를 인정해주는 나를 인정해주는 사회가 있다면 나는 숨 쉴만하다. 여기에 몰두하겠다. 이걸로 끝나버리는 거에요. 이 사회가.
제가 왜 이런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실 때 얼마나 외롭게 살았느냐를 한번 생각해보자는 거에요. 십자가 고난만 생각하지 마시고 평소에 말 통하지도 않는 인간하고 제자로 불러다가 맨날 오해만 하는 제자들 붙들고 같이 살았다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드냐 이 말이죠. 그 힘든 체험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 성도에게 그대로 반복시키고 재현시키는 겁니다.
어떤 때는 원망이 일어나는 거에요. 왜 원망이 일어나느냐 하면은 죄 용서는 누가 했습니까? 주님이 했잖아요. 주님이 죄 용서했는데 세상은 나보고 죄 있다 하니까 환장하네. 정작 심판하시고 재판을 하시는 재판장이 우리보고 죄 없다 하시는데.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게 하셔 버렸는데 정작 주변사람들이 너 그래서 지옥 간다. 그렇게 나쁜 짓해서 지옥 간다. 이러고 있으니 이건 아닌데 아무리 성령 받아도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데. 참 뭔가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지요.
우리 교회 어떤 분이 오신지 한 1년 되었는데 그 분이 우리 교회 오시면서 고민거리가 있었어요. 목사님들이 설교를 하는데 자기는 성경에 비춰서 모순되는지 확인을 해봤거든요. 확인을 해보니까 이게 성경에 다른 모순되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이 분이 너무 순진해서 물었어요.
목사님 성경에 이런 말씀 나오는데 지금 목사님 설교하고는 이게 안 맞네요. 그 때부터 목사가 그 사람을 왕따시키고 모든 교인들도 저 사람 이상한 사람 들어왔다. 이래가지고 완전히 그 사회가 안 받아주는 거에요. 그 사회에서 안 받아주는 거에요. 답변을 해야 되는데 답변은 안 해놓고 왕따시키는 것이 답변이 되는 거에요. 왕따시키는 것이.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은 그동안 마귀가 그렇게 해가지고 기 안 죽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 분은 기죽고 안 죽고가 문제가 아니고 관심사가 뭐냐 하면은 진리가 무엇인가? 진짜 복음이 무엇인가? 성경의 내용이 모순되지 않는 이것이 무엇인가 그게 궁금하기 때문에 사회가 나를 욕하든 말든 그건 신경도 없어요. 진짜 성경이 말하는 의미가 무엇이냐?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고난을 받은 그 깨어짐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성도. 예수님의 피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성도에요. 나 때문에 이렇게 깨어졌다는 사실. 나 용서할려고 이렇게 죽었다는 사실, 그 사실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 갑자기 노래 가사가 생각이 나네. 꽃보다 아름답다 뭐. 청바지 입고 기타 치는 사람.
하여튼 성도는 본인의 잘남이 아니고 나 못남인데 피 때문에 용서했어요. 왜 피 때문이냐? 성경대로 하면 메시야가 유월절 어린양으로 본인이 날 가지고 본인 할 일을 증명해버린 거에요. 나를 가지고. 아무것도 아닌 나를 가지고. 메시야는 이렇다. 이런 일을 하러 왔다. 이걸 증명해버린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했을 때에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웃었잖아요. 그런데 그 세상과 똑같은 세상에 우리가 안 떠나고 여기에 있는 겁니다. 떠나지 않고 있는 거에요. 그게 마태복음 11장 아까 본 거기 봅시다. 11장 16절부터 보면 제가 읽겠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지혜’, 예수님 본인은 이 세상에 지혜 없다는 것을 본인이 유일한 지혜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 지혜 없다는 세계 속에서 증명한다 이 말입니다. 이게 오늘날 우리 성도가 갖고 있을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제 정리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오늘 잊지 말라고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면적입니다. D라는 면적에서 D+h. 조금이라도 내 면적을 넓히고 싶은 것. 이것 매일 일상 아닙니까? 일상. 여러분 면적이 늘어나는 것이 좋습니까? 깎여가지고 너덜너덜 걸레가 다 되가지고 이만큼 파먹어가지고 이거 모양 꼬라지 보세요. 갑자기 점선 부분이 생각날까요? 안 날까요? 점선 부분이. 생각나지요?
여기에 빡씨게 기도해서 만회해달라고 기도하겠습니까? 안하겠습니까? 하지요? 그때는 점쟁이같은 교회 찾아가지요. 주여 만회해주옵소서. 그동안 잘못한 것 십일조 안낸 거 다 낼 테니까. 만회해달라 이 짓하고 있지요. 이게 바로 있음. 있음이니까 제가 면적으로 생각한 거에요. 면적으로. 있으니까. 이것 반드시 면적 기억해야 되고요.
두 번째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의미입니다. ‘약속의 의미’, ‘언약의 의미’ 이것이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움직이는 의미로 만드는 거에요. 움직이는 의미로. 찰리 채플린이 만든 영화가 있어요. 그 영화가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가지고 찰리 채플린이 오늘 유명한 소프라노 연주회 티켓이 있어가지고 가기로 약속되어 있는데 아침에 뭔가 잘못해가지고 여기에 호루라기를 목에 삼켜버렸어요.
호루라기가 잘 빠지지 않으니까 움직이는 호루라기 된 거에요. 소프라노 연주회가니까 소프라노가 랄랄랄라랄랄랄랄라 하니까 여기 목에서 뽀로록 소리가 나온 거에요. 그러니까 눈치 막 주겠지요. 그러나 찰리 채플린이 본인도 어쩔 수가 없어. 예수님의 의미가 호루라기처럼 박혀 있으니까 행함으로 구원받는 건 아닌데 이미 죄의 용서받았는데 이건 아닌데. 자꾸 딸꾹.
이건 뭐 분위기 파악도 안 되고 눈치 줘도 안 되고 자꾸 나오는 거에요. 목사님 이 말씀이 그 말씀 아니잖아요. 이게 왜 자꾸 나오느냐 하면은 주님의 일방적 의미가 박혀버렸어요. 박혀버렸다고요. 그러면 주위 사람들이 연주회장 주위 사람들이 욕하겠지요. 욕 얻어먹었잖아요. 오늘 본문 그 점에서 한번 읽어 보세요. 딱 찰리 채플린이에요.
내가 하늘나라 갈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고 복 받았대, 우끼지요? 그 다음에 주리고 울고. 우는 것 자체가 복 받았대요. 그 다음에 인자로 인하여 예수님으로 인하여 미움 받고 멀리함을 당하고 욕함을 당하고 그때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방금 읽었던 23절 이 대목이 마태복음 5장 소위 팔복. 팔복이란 말 안 좋아해요. 복이 어떻게 8가지가 될 수 있겠어요. 복이. 하나지 무슨 복이 8가지가 있겠습니까. 팔복이라고 하니까 팔복인줄 아는데 그 대목도 나오지만 마태복음 9장에 봐도 비슷한 대목도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은 기쁨이라는 것은 신랑과 함께 있을 때 결혼식은 기쁨이고 그런 결혼식이 슬픔의 비탄에 잠길 때는 신랑이 신랑 잃어버릴 때 슬픔에 잠기지요. 그럼 99마리 양중에서 한 마리 양의 특징이 뭡니까? 목자를 잃어버린 거에요. 목자를 잃어버리니까 자기는 자기 옆에 어떤 빈자리가 있겠지요? 여기 아까 D라는 면적에서 재산 날라갔다고 아까워서 하는 게 아니고 여기에 뭐가 없었다? 예수님이 없어서 애통하는 자가 바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에요.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고 나는 들러리고 진짜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보고싶어요. 이렇게 될 때 이런 모습이 바로 예수님께서 유발시킨 의도적으로 유발시킨 그 모습이에요. 신랑과 함께 있을 때 기뻐한다. 이게 혼인잔치의 기쁨이라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총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의미란 언약에 의해서, 약속에 의해서 함께 있을 자리 형식으로 오는 겁니다. 의미란. 따라서 의미는 자리이기 때문에 내 소유용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자리, 주와 함께 있는 자리, 소망이라는 자리, 주와 함께 있는 자리, 사랑이라는 자리, 주와 함께 있는 자리. 신랑과 함께 있는 자리, 혼인잔치를 이루는 자리.
이런 자리에 함께 있는 자리이지요. 나 여기 있어서 소유용이 아니에요. 따라서 이 자리는 의미를 위해서 언약적 의미를 위해서 나를 부인하게 만듭니다. 내가 그 자리의 주인공이 아니게 하시는 기능을 계속해서 발휘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23절에 봐도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기뻐하고 뛰놀라는 것은 22절에 “인자로 인하여” 예수님에 의하여 기뻐하고 뛰노는 겁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지요.
여러분들한테 한번 물어봅시다. 여러분들이 어떤 죄수가 있고 죄수한테 어떤 사람이 국선 변호사로 변호를 해줬는데 나중에 그 죄수가 유죄로 재판에서 죄 있는 것으로 판정이 난다면 변호사가 감옥에 갑니까? 죄수가 감옥에 갑니까? 물어보는 내가 나쁘다. 아무리 변호해도 죄수가 가게 되어 있지요.
예수님은 우리의 변호사 정도가 아니에요. 우리의 죄수입니다. 우리를 대신한 죄수에요. 그래서 십자가 의미가 그거에요. 깨어졌다는 의미가 나는 멀쩡한데 내가 모르는 죄를 위하여 주님이 깨어졌잖아요. 그래서 이제는 누가 누구를 변호해야 돼요? 주님이 우리를 변호해야 돼요. 주님이. 감옥에 저주받은 주님이니까요.
그게 함께 있다고 해서 맞물려 있는 걸로 생각하지 말고 함께 있다는 것은 뭐냐 하면은 바로 주님이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일처리를 알아서 자기 싸인해 가지고 전부 다 알아서 일을 다 끝내버렸어요. 그래서 그 자장, 그 폭풍, 그 힘, 그 허리케인. 야 너 죄 용서받았어 라는 그 힘이 나의 철없음과 나의 시근 없음과 어설픔을 전부 다 휘감고 하늘나라로 빨아 당기는 이야기가 오늘 이야기입니다.
네가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왜? 너는 가난한 자니까. 너 재산이 수십억 있다. 그거 없다고 여겨라. 자식 공부 잘해? 없다고 여겨. 너의 지식? 없다고 여겨. 그냥 가난한 자. 나처럼. 하늘나라 영광이지만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자 됐던 것처럼 가난하게 만들어 가지고 우리를 하늘나라 집어넣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하지 않은 우리를 잘난 체하는 우리를 아예 일방적으로 가난한 자로 만들었던 겁니다.
그럼 그 이야기가 약속 있다는데 약속 어디 있습니까? 구약에 어디 있습니까? 바로 출애굽이죠. 출애굽에 이스라엘 전체가 가난한 자, 거지떼들이었어요. 거지떼들. 고아와 과부들이에요. 아무도 그들에게 주인공이 없어요. 친히 하나님이 주인공된 것처럼 오늘날 성도에게도 친히 우리 주님이 우리를 고아와 과부, 친히 목자가 되셔가지고 우리를 천국으로 이끄신다는 내용. 이것을 종말이 되서 메시야를 통해서 우리에게 실현시켰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다 이루시고 다 해놓으신 그 과정과 절차가 몰랐는데 말씀을 통해서 우리 안까지 들어오니 감사합니다. 주께서 얼마나 낮아지셨다가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고 그 주님에게만 매여서 관심 두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