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사람의 원리
2021년 6월 6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3:11
(3: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우리는 사회의 형성을 당연히 할 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구성을 정당한 것으로 여깁니다. 여기에는 ‘어쨌든 죽지 않고 버텨야 한다. 버텨내는 것이 나에게 진리다’라는 정신이 깔려 있습니다. 사회 형성은 이런 식입니다. 인간들의 관심사란 토지와 기후와 자연환경과 관련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생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토양과 기후에 맞게 사람들은 적응해보려고 합니다. 대자연의 변덕스러움이 인간 생존에 방해요소가 됩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타인과 협력하는 것이 자기 생존에 유리하다는 점을 점차 체득하게 됩니다. 확정된 진리처럼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그 지역의 관습이 되고 전통이 됩니다. 집단의 결속력이 다져지면 이러한 전통은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되고 법이 됩니다. 곧 ‘의로운 견해’로서 그 집단 구성원의 정신을 본질을 구성하게 됩니다.
이런 인간들의 본성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할 것없이 세계 만방의 공동의 성향입니다. 문제는 사도 바울이 ‘새 사람’을 거론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새 사람’은 이런 자기 입장 중심의 ‘기준 정하기’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겁니다. 즉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역사나 관습을 내용으로 아군과 적을 정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새 사람’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말은, 새 사람이 되는 요소 안에서 이런 기준들의 철폐가 담겨 있습니다. 새 사람은 기존의 인간세계에서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 사람의 기준점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바로 그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 뿐이십니다.
새 사람이란 하늘나라에 인정하는 요소가 들어가 있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비자VISA발급은 여행갈 나라에서 그 사람을 우리나라에 와도 좋다고 허가하는 제도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죽어서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지옥같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이미 천국에서 허가가 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럴려면 그 사람에게 하늘의 요소가 있어야 하고 그 하늘의 요소는 기준의 자기 기준의 분류는 일체 무너져야 합니다. 사람이 새사람이 되었다는 인식은 ‘지금에 와서 과거는 없어져야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조건 하에 현재를 새롭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이미 없어진 과거를 기준이 아니라 지금의 새로움으로 과거의 나가 죽어 마땅한 나’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렇다면 매일 산다는 것은 매일 죽어왔다는 말이 됩니다. 이 새로운 작업을 위해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인종과 문화를 가마솥에 집어넣어 사정없이 다리고 다리듯이 그 경계선들을 허무십니다. 걸쭉한 농축액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걸쭉한 농축액이 바로 죄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 의하면, ‘인간 자체가 흙’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사정봐주지 않는 율법의 냉정함과 냉혹함이 작렬합니다. 모든 분류기준을 다 녹일 정도로 참혹하게 저주하는 힘이 율법에서 나옵니다.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 단지 흙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처참하게 인간들의 모든 생각과 뜻과 구분지움을 짓밟아 버리십니다. 이로서 세상은 모두 한 통속으로, 마치 레미콘 속처럼 반죽되어 쉬지 않고 돌아갑니다.
따라서 여기에 그 어떤 ‘새로움’이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레미콘 반죽 속으로 같이 뛰어드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율법을 완성토록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심판작업을 그대로 다 받아들여서 저주의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서 와서 ‘피’를 흘리고 죽으셨다는 말은 그만큼 율법은 봐주는 것없이 엄중했다는 말입니다.
이로서 세상은 사흘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같이 저주 아래, 심판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흘 째 되는날, 그 율법의 두꺼운 저주벽을 뚫고 어떤 분이 죽음에서 살아나났습니다. 오직 그분에게만 일어난 일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없습니다.
이로서 그분만이 최초로 ‘새 사람’입니다. 그분 말고 이 세상은 아무도 새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새 사람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의 모든 가능성은 죄와 저주로 방향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은 과거를 못버리고, 과거에 자신이 해봤던 식으로 현재와 미래를 예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하늘나라의 허가를 받아낼 수가 없습니다. 인간 세계에서 측정하는 모든 것들은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1m짜리 자를 가지고 테이블을 재는 것은 테이블의 절대적 길이가 아니라 1m짜리 줄 자와 테이블 사이의 길이일 뿐입니다. 즉 인간 세계는 비교하는 가운데 진리를 규명하려고 합니다.
즉 인간 세상에서 결코 자신의 주도적 판단을 안 버리려하고 못 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신의 영(성령)을 선택한 자에게 제공하게 되면, 그 선택받은 자는 결코 자기 힘으로 주님의 약속을 지키거나 위반할 능력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새 사람 만드는 과정은 인간의 그 어떤 가능성을 경유하지 않고 불가능으로만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즉 ‘죄 사함’이라는 예수님의 고유 기능은 인간쪽에서 위반할 수 없는 이유는, ‘죄 사함’해주시는 기능자 이후에 ‘죄 사함’입게 될 자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옛 사람은 자신이 새사람될 목표가 있기에 도중에 죽게 되면 되게 억울하다는 의식을 갖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작업은 하늘나라에서 인정해주는 ‘불가능성’이 아니라 같은 인간들에게 인정이 되는 ‘가능성’이 끝까지 발휘하게 됩니다. 자연스레 이것은 ‘옛 사람’에게서 나온 ‘옛 사람’의 속성이기에 하늘나라로부터 거부당하게 됩니다.
반면 성도는 늘 반복되는 새로움으로 인해 과거는 늘 이미 죽어버렸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도피처, 피난처는 이런 식으로 조성이 됩니다. 성도로서 이 세상에 계속 머물고 있는 이유는, 대피공간, 성령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대피소를 평생 찾아해매는 자들을 목격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에베소서 2:1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율법의 완성인 자신의 피로 인해서 영원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을 분류하십니다. 왜냐하면 유일하게 분류할 자격을 지닌 분이시니 그러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과거에 미련두지 말고 날마다 주님이 주시는 새로움 안에서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1강-골 3장 11절(새사람의 원리)210606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3장 11절입니다.
골로새서 3: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여기 나오는 리스트 항목들은 새사람, 하나님이 새로 창조하신 자가 되게 되면 이러한 차별성, 분별성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헬라인과 유대인이나”라고 되어 있는데 그것은 인간들 자기들의 분류시스템에 의하면 유대인 같으면 유대인 빼놓고는 전부 다 이단이지요. 유대인 빼놓고는 다 하나님에게 선택받지 못했기 때문에 지옥 간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헬라인 입장에서는 헬라인들은 세상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철학이 있기 때문에, 지식이 있기 때문에 우리 헬라인 빼놓고는 다 무식한 사람이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할례당이라 하는 것은 유대인 가운데서도 할례당/무할례당 논쟁이 또 있게 되지요.
할례당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문신처럼 자기 몸에 새김으로서 구원이 확정되었다고 여기는 당, 이게 할례당입니다. 국민의 당이나 민주당 그런 비슷한 것 아니에요. 할례당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실효성 있게 되려면 아예 우리 몸에다 할례를 해버리면 그걸로 우리는 구원에 안심이 된다고 여기는 그러한 집단이 할례당이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무할례당이라 하는 것은, 그러면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면 구원받지 못하느냐, 할례받지 않더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 하는 당, 그게 무할례당이에요. 사람들이 자기중심으로 분류하는 그것이 다 다르다는 말이지요. 그다음에 야인 야만인을 이야기합니다. 그다음에 스구디아인이 나오는데 요새 말로 하면 ‘스키타이인’인데 스키타이인이 어디 있느냐 하면, 흑해와 카스피해 그 사이에 러시아 남부의 그 지방 사람들입니다.
구약에 보면 이걸 ‘마’ 또는 ‘마곡’지역이라 하는데 이 스키타이인이 헬라인들 입장에서 또는 유대인들입장에서는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유목민이니까 맨날 양이나 키운다고, 공부 못했다고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놀리던 그 사람들을 야만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의 그루지아나 아제르바이젠 그 지역에 있는 스구디아, 스키타이 사람, 말 타고 돌아다니면서 고함만 질러대는 그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그 당시 지식인인 헬라인 입장에서는 굉장히 무시를 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이러한 사람들의 인간 분류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러한 분류체계는 무효다. 그것은 다 지나간 것이다. 왜냐하면 새롭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 입장에서 새롭게 창조된다는 것은 이런 분류체제를 끄집어냈던 그 모든 바탕 자체가 다 무효가 되는 거예요.
나는 유대인이다, 유대인 아니다. 할례당이다, 할례당 아니다. 이런 분류, 배웠다 못 배웠다. 그 뒤에 나오는 것은 뭐냐? 나는 종이다, 자유자다. 노예다, 노예 아니다, 나는 주인이다, 하는 그런 분류를 야기 시키기는 그런 토대, 토대 자체를 무효화시키지 않으면 새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새사람이라는 것은 이러한 인간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그 체제 자체를 하나님께서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이에요. 그러면 이럴 경우에는 사도바울은 어떻게 새사람이 되느냐? 그것은 이러한 분류를 그냥 걸쭉한 농축액으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약을 달인다 하지요. 다 집어넣는 거예요. 이런 분류체계를 가마솥에 다 집어넣는 겁니다.
다 집어넣고 단순히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바닥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바닥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그 바닥이 뭐냐? 이런 터무니없는 분류체계가 나오는 그 자체가 바로 죄가 된다는 겁니다. 죄는 무슨 뜻으로 하느냐 하면, 하늘나라에서 거절하는 분류체제에요. 그 기준 자체가.
하나님께서 안 받아주면 그것은 불합격이 되는 겁니다. 한국에서 여권 하나 구입해서 자기 사진 하나 붙여놓고 비자 도장까지 다 가짜로 찍었다 합시다. 그런데 그 비자가 있는 여권 가지고 다른 나라에 쑥 들어갔을 때 그 나라의 공항에서 세관원이 거부해버린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 비자입니다, 하고 거절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자기가 여권을 만들고 사진까지 예쁘게 찍었는데 가로 3센티 세로 5센티 규격으로 찍어서 붙여도 그 나라에서 비자를 거부하면 들어가지를 못하는 거지요. 그래서 아무리 교회 오래 다녀도 하늘나라 비자가 안 나와 버리면 하늘나라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하늘나라에서 허락한 사람을 가지고 새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새 사람이란 한마디로 뭐냐 하면, 하늘나라의 요소가 이미 그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을 가지고 새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안 듣는 척 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다시 합니다. 하늘나라 요소가 그 사람 속에 이미, 이미 들어 있는 거예요. 비자를 받는다는 말은요, 나중에 우리나라 오면 비자 줄게, 가 아니라 네 나라 있더라도, 우리나라 아직 들어오기 전이라도 우리나라 들어오면 내가 언제든지 받아줄게, 라고 가야 될 그 나라의 권한으로 그 나라에 있을 때 허락을 하는 게 비자거든요.
당신은 우리나라에 들어와도 괜찮습니다, 받아주겠습니다, 하는 승인이 주어진 거예요. 그게 제공된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이 지옥 같은 세상에 살면서 하늘나라에서 승인받은 그 비자 같은 요소가, 하늘나라 요소가 이미 여기에 우리에게 있어야 돼요.
그것이 바로 새사람인데 새사람은……, 지금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하늘나라 요소가 그 사람에게 들어 있는 것, 그렇다면 그 사람의 모든 태도와 행동을 통해서 바로 땅의 요소와 다른 하늘나라 요소가 말할 때 툭툭 튀어나오고 행동할 때 이게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양다리 걸친 거예요. 하늘나라와 땅의 나라에 양다리를 다 걸쳤기 때문에 그 양다리 안 걸친 사람은 어떤 소리를 해도 땅의 것만 나와요. 그런데 하늘에 있는 사람은 땅에 있는 사람 보기에 안 해도 될 짓을 하고 있어요. 여자분들이 시간 남아돌 때 뭘 하느냐 하면, 옷 사지는 않지만 옷 쇼핑점 많이 들여다봐요.
왜냐하면 이미 몸매는 회복 불가능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은 그 몸을 가리는 옷만 구입하면 되거든요. 인간은 불가능한 것은 못하고 가능한 것만 한다고요. 그런데 성경 같은 것은 이 바쁜 시기에 성경 볼 이유가 없지요. 그런데 이 바쁜 시기에 성경에 관심이 있고 성경을 본다는 것은 이것은 본인이 말릴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것은 하늘나라 요소가 이 땅에 아무짝도 소용없는 성경 보기, 이것은 이 땅에서는 소용없는 거잖아요. 하늘나라 요소가 걷잡을 수 없어요. 이것은 말릴 수가 없어요. 말씀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이것은 예전의 자기 자신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전의 자기 자신의 모습이 아니니까 이걸 가지고 새사람이라, new-made에요. 새사람 새로운 사람이 된 거예요.
새로운 사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미 없어진 과거가 기준이 아니라 지금에 와서 과거는 없어져야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조건 하에 지금의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달리 말해서 ‘이미 없어진 과거가 기준이 아니라 지금의 새로움으로 과거의 나가 죽어 마땅한 나’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이미 너는 죽었다는 말이 이게 맞는 말이 되는 겁니다. 왜? 새로움이 있기 때문에 과거는 죽은 자가 되어도 속 시원하지요. 상관없으니까. 지금까지의 과거는 없어져야 마땅하다는 조건 하에 지금을 새롭게 이해하는 사람. 문장이 어렵지요. 지금에 와서 과거는 없어져야 마땅하다. 과거는 없어져야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조건 하에 지금을 새롭게, 지금 자신을 예상도 못한 새로움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새사람이에요.
그러면 과거는 뭐냐 하면, 과거에 은근히 나중에 내가 이런 사람 되었으면 좋겠다는 사적인 기대나 희망 같은 것이 있겠지요. 그것은 죽어 마땅한 사고방식으로 지금에 와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지금에 와서. 어제의 내가 오늘은 이렇게 되었으면 하고 생각하는 그것을 오늘의 새로움 때문에 과거가 박살 난 겁니다.
나 오늘 되면 이렇게 할 거야, 라는 그 생각이 그것은 오늘의 새로움에 미치지 못한 어제의 이야기기 때문에 어제는 오늘에 비해서 그것은 죽어 마땅한 거예요. 어제의 철딱서니 없는 그것은 죽어 마땅해. 그래서 새로움이라 하는 것은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거예요.
한번 새로워 가지고 그걸로 계속 우려먹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새로워지는 겁니다. 일주일 전에 있던 기준, 두 달 전 2년 전에 있던 그 기준, 지금은 아무 소용없어요. 두 달 전에 있던 기준은 그 기준에 의해서 자기를 분류했거든요. ‘나는 복음을 안다. 너는 복음 모르지.’ 이렇게 했다고요.
그때는 새사람인 것 같은데 오늘 와서 보니까 그 과거에 지나간 일이라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과거의 나는 죽어 마땅하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아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오늘 살려주신 겁니다. ‘내가 내일 되면 새사람 되어야지.’ 기대하지 마세요. 그것은 내일 살아 있게 하시는 주님의 소관이지 내 소관이 아니라 그 말이지요.
‘나는 내일 되면 새사람 될 거야.’ 이것은 죽어 마땅한 생각이에요. 왜냐하면 새로움이라 하는 것은 새로운 기준이기 때문에 기존의 내 기준은 통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늘 새로움의 반복이에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옛사람의 특징은 뭐냐? 자꾸 자기 입장으로 분류하는 거예요. ‘나는 거듭났는데 너 거듭나지 않았잖아.’ 분류하는 것이 옛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그게 옛사람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은 오늘 돼야 어제가 옛사람이라는 것을 비로소 아는 거예요. 오늘 돼야 과거는 죽어 마땅함을 아는 거예요. 과거가 아까우면 안 됩니다. 과거가 아까워 버리면 미래까지 내가 주인공 되어서 내가 이끌려고 시도하거든요.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살려줬다는 것은 내가 어제부터 살려고 애를 썼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현재 내가 너를 살렸다는 그 새로움을 부과하기 위해서 과거라는 것은 바로 죽어 마땅한 것이라는 인식을 오늘에야 비로소 주신 거예요. 말하는 내가 나쁘다, 정말. 무슨 말인지도 모를 말을 하고 있으니.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신앙 내 소망 내 사랑이라는 것은 그것은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새로움이라는 것은 내 것이 아닌 게 나올 때 새로움이에요. 내 것이 아닐 때.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새롭게 만들고 있는데, 만들고 있는데! 만들고 있는데! 주께서 나에게 일하고 있는데 왜 내가 구원받으려고 애를 쓸 이유가 있습니까? 그것은 옛사람들이나 하는 행세라 그 말이지요.
사람이 참 기억 때문에 과거를 포기 못해요. 여러분도 저도 어렸지만 과거에 어릴 때 늘 어른이 되면 뭘 하겠다는 생각이 있었을 거예요. 어릴 때는요 기존에 어른 되는 모델이 어른들밖에 없어요. 어른들 말하는 것도 그렇게 웃기고 어른들 말하는 것도 그렇게 유식하고. 그래서 어릴 때 어른들의 세계가 동경의 대상이 돼요. 모델이 되고.
어릴 때 소원 중의 하나가 스탠드바에 가서 다리가 안 닿을 정도로 높은 의자에 앉는 거예요. 조명은 어두침침한데 알록달록 색깔의 술병들이 죽 놓인 그 앞에서 술한 잔 먹는 것. 거기는 어른들만 들어갈 수 있고 애들은 못 들어가거든요. 그 앞에 바텐더는 손님도 없고 할 일이 없어서 맨날 빈 유리잔만 헝겊으로 닦고 있는 그 모습 있잖아요. 그 모습 알아요?
저는 어른이 되었어도 한 번도 스탠드바에 가본 적은 없어요. 없는데 어릴 때는 그 모습을 생각한 거예요. 나도 어른이 되어서 들어갈 곳 못 들어갈 곳 없이 다 들어갈 수 있는 어른이 빨리 되었으면 좋겠다. 그게 동경의 세계입니다. 그게 어릴 때의 모습이 있었던 나름대로의 새로움이에요. 어릴 때 꿈꾸던.
이것은 예상이 되는 거예요. 지금 내가 안 죽고 내일도 안 죽고 모레도 안 죽고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안 죽을 그 때에 나는 스탠드바에 가서 다리도 안 닿는 높다란 그 의자에 앉아서 바텐더와 수다 떠는 그것을 하겠다. 이것은 계속해서 새로움이 없고 그냥 과거의 연장이고 연속이에요.
그게 무슨 하늘나라 요소입니까? 그것은 하늘나라 요소 아니에요. 그거 하늘나라 비자 안 나옵니다. 그것은 나 중심의 하나의 분류체계에요. ‘너 어른 돼서 그런 고급술집에 가 봤냐? 안 가봤어? 그러면 너는 스키타이인이야. 너는 무식한 거야.’ 이건 성공 못한 사람이에요. 분류기준이, 내가 분류기준의 주인공이 되기 때문에. 내가 계속 분류하고 있다면 이미 그것은 새사람이 아니고 옛사람에 속하는 겁니다.
세상에 있는 과학도 마찬가지예요. 천문학에서는 우주가 팽창한다는 겁니다. 우주가 팽창한다. 우주가 팽창한다는 그 말을 허블이라는 사람이 이야기했는데 팽창한다는 그 말이 맞는 말이냐? 우주가 팽창한다고 하지 말고 모든 원자와 분자가 수축한다는 말을 하면 안 되겠느냐? 그 발상을 한번 해보는 거예요.
이 세상의 뭘 측정하고 잰다는 것은요?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그 재는 ‘자’하고 그 재고자 하는 것과의 상대적인 크기를 비교하는 거예요. 제가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만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고 비교하는 거예요.
아픈 사람이 있다 하는 것은 건강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비교에서 나오는 차이를 가지고 아프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세상에서 살아 있다/죽어 있다, 하는 것은 죽은 사람, 현재 공동묘지에 있는 사람하고 산사람하고 비교하니까 저건 죽었고 나는 살았다는 거예요. 그 기준 자체가 옛사람 기준이고 그 기준 자체를 하늘나라에서 일체 안받아줍니다.
교회 5십 년 백 년 다녀도 소용없어요. 아직 그 기준이 있으면. 1미터짜리 자를 가지고 테이블을 잰다 할 때 테이블의 크기와 1미터라는 자 자체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밖에 안 돼요. 그것 비교한다고 천국에서 비자 나옵니까? 절대적이 아니고 상대적인데요. 현대물리학에서는 그 자를 아주 정교하게 만들었는데 그걸 ‘플랑크 길이’라고 합니다. ‘1.62×10–35m’ 이게 플랑크 길이에요.
아주 짧지요. 이게 물리적으로 의미가 있는 최소의 길이에요. 여기서 ½ 플랑크 길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게 최소단위에요. 빅뱅 우주가 폭발할 때를 계산할 때 그걸 사용하고 또 플랑크 시간이라는 게 있는데 그 플랑크 길이가 빛이 양자 시간 동안 진행하는 길이인데 플랑크 시간이란 물리적으로 의미 있는 가장 짧은 시간을 플랑크 시간이라고 합니다. 우주 역사에서 의미를 가지는 가장 빠른 시점을 나타냅니다. 플랑크 시간인 ‘5.39×10–44초.
아주 순간적인 그걸 절대적 잣대로 여겨서 세상 모든 학문을 시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우주가 팽창하는 것이 아니고 지구의 인간과 우주 사이에 그 거리가 팽창하는 거예요.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진리와 인간 사이가. 천당 가려고, 말씀 지키려고 백날 해봐도 이것은 ‘지켰다, 안 지켰다’는 그 분류를 누가 하느냐? 본인이 하거든요. 그 본인이 하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반성이라고 합니다. 회개라고 하는 거예요.
본인이 회개하고 본인이 반성해서 본인이 천당 가려고 하는 거예요. 개과천선 되었다고 우기면서. 이것은 하늘나라 비자 안 나옵니다. 자기가 교회 놀이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신앙놀이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헬라인, 유대인, 할례당, 무할례당, 야인, 스구디아인, 종이나 자유자, 전부 다 인간들의 그 분류를 한꺼번에 넣어버렸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이런 겁니다.
레미콘 차 있지요. 가만있어도 빙빙 돌아가는 그 레미콘 차 있잖아요. 둥그런 통 그 속에 이 세상은 나와 너 할 것 없이 이 세상이 같이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걸 한통속에 담아버리고 그걸 증발시켜요. 농축액을 만드는 겁니다. 만들 때 거기에 들어가는 요소가 뭐냐?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그걸 알려줬어요. 그게 뭐냐? 율법입니다.
율법에 집어넣으면 죄 아닌 게 없어요. 걸쭉한 죄가 나와요. 너 잘났다 나 잘났다 할 것도 없어요. 몽땅 모든 인간이 걸쭉한 죄의 액체의 일부에요. 죄와 죄끼리 뭐가 잘났고 못난 게 있습니까? 유대인/헬라인, 그런 구분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구분하는 측량기준 자체, 척도 자체를 녹여버립니다. 물리학이고 생물학이고 다 철학이고 다 녹아버려요. 어느 것 하나 죄 아닌 게 없는 거예요.
마태복음 10장 28절에 보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은 죽이는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코로나 바이러스에요.
코로나 바이러스가 네 몸은 죽여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죽이는,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다시 말해서 측량기준, 새사람이라는 모델, 네가 어릴 때 했던 어른의 세계, 동경했던 그것, 아무데나 들어갈 수 있는 어른이 빨리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떤 의미에서는 유년시절에 대한 회귀로 돌아오는 거예요.
한 번도 인간은 자기가 달라 본 적이 없어요. 새사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새사람 된 적이 없어요. 어른이 되고 난 뒤에는 과거에 자기가 했던 것은 가능, 그리고 어릴 때 꿈은 불가능, 불가능은 못하니까 나이 60, 70 되어가지고는 어릴 때 했던 것 그거 계속 또 되풀이하면서 옛날에는 했는데……, 했는데……, 계속 되풀이하는 거예요. 가능한 게 그런 것밖에 없어요.
제가 어릴 때는 애들이 못가는 데를 가보는 게 소원이겠지만 나중에 막상 어른이 되면 또 갑자기 소원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번화가 모퉁이에 5층짜리 빌딩 하나 사 가지고 세받아 먹는 거예요. 자기는 편안하게 골프 치고 놀고, 따박따박 세 나오고, 꽂아둔 빌딩은 가만있어도 수십억짜리 빌딩이 되니까. 그런 수십억짜리 빌딩 가지고 놀고먹었으면 좋겠다. 그게 유년시절로의 회귀입니다. 자기 옛사람의 분류체계에서 못 벗어났어요.
나는 부자 편에 서고 싶다는 그 분류체제에서 못 벗어났습니다. 여러분이 24시간 일주일 내내 생각하는 것이 뭡니까? 여러분이 예상하고 희망하는 가능한 거예요. 안 그러면 불가능한 거예요? 제가 맞춰볼까요? 전부 다 가능한 거예요. 전부 다 가능한 겁니다.
불가능은 말씀 속에 있어요. 하늘나라 비자는 불가능 속에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지금까지 해왔던 그 가능성 그 가능성은 주님께서 하늘나라에서 거절합니다. 거부해요. 왜 가능이 계속 누적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중심의 분류체제로 세상을 보는 그 안목 외에는 다른 안목이 없어요. 과거가 예상한 미래의 모습을 보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불가능을 이야기하는데 그 불가능 중 하나가 뭐냐 하면,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이것은 뭐 흙 되고 싶어서 태어난 인간은 없잖아요. 이게 불가능이거든요. 말씀은 전부 다 불가능이에요. 흙이나 흙으로 돌아가라.
다시 말해서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거대한 레미콘, 이것은 네가 원치 않지만 레미콘 안에서 태어났고 레미콘 안에서 죽는데 너나 나나 분류체계, 잘났다 못났다 할 것 없이 그 안에 들어 있는 모든 인간들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는 그것이 하나님의 원칙이다. 그러니까 제발 바닥에서 새로 출발 항상 새로움은 바닥에서 말씀의 자리에서 새로 시작하는 겁니다.
흙이 된 이유가 뭡니까, 물으면 “너는 죄인이기 때문에 마땅히 흙 되는데 이의 걸지 마라, 시비 걸지 마라. 그거 가지고 나에게 달려 들지 마. 흙이니 흙 되거든, 네가 죽거든 당연히 죽은 걸로 여기지 거기에 원망하고 불평 늘어놓지 마라.” 그것은 다른 이질적인 요소거든요. 불평한다는 것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 끝. 뭐 더 할 말 있어? 너 할 말 없어야 돼.”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준 것은 전부 다 흙이 된 인간을 흙으로 돌아가야 될 그 당위성, 그렇게 조치하시는 하나님의 정당성을 율법에 담았습니다. “제발 좀 쫌 죽어 도!” 그 말입니다. 쫌! please~!, 제발 좀 죽어줘. 살 생각하지 말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더 살 생각 하지 말고 제발 좀 죽어줘.
죽이는데 어떻게 죽이는가? 그냥 죄인으로 취급해서 죽여버리니까 율법이 주는 그 저주의 참혹함과 잔인함 이것은 사람의 말로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이 주는 그 잔인함. 구약에 나오는 전쟁 보세요. 젖먹이 아이까지 다 죽여버립니다. 여자고 남자고 노인이고 젖먹이 아이고 진 쪽은 다 노예로 팔려가고 살아 있는 것은 다 죽여버리는 겁니다.
그게 얼마나 잔인해요? 사람들 보기에는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고 생각하지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레미콘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확정된 레미콘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제가 어제 뉴스도 잘 안 보는데 봤어요. 구미의 20대 아줌마가 있는데 29개월 된 애를 키우기 싫다고 새로 만난 남자하고 재미있게 살려고 애가 귀찮으니까 애를 그냥 굶겨 죽이기로 작심하고 굶겨 죽였어요. 징역 25년형 받았어요. 애한테 처음에는 부스러기 좀 주다가 그것도 나중에는 안 주고 죽든 말든 모르겠다, 네 운명은 네가 알아서 해라, 나는 즐기련다, 하고 죽여버렸어요.
그게 자기 애도 아니고 사실은 자기 동생이었어요. 엄마가 낳은 애를 키우다가 그랬다는 구미 살인사건 있잖아요. 그래서 온 국민의 분노를 샀지요. 징역 25년도 모자란다고 사형에 처하라고 데모를 하고 그랬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법에는 형평성이라는 게 있습니다. 도대체 그 여자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징역 25년입니까?
그렇게 어린애를 잔인하게 죽인 게 25년이라면 도대체 우리 자신은 하나님 보시기에 뭐 그렇게 심한 죄를 범했다고 그렇게 영원히……, 25년이 아닙니다, 2만 5천 년도 아니고 영원토록 지옥 불에, 구더기도 타지 않는다는 지옥 불에 집어넣는 그 죄가 뭡니까? 죄의 형벌의 평형성을 생각해 보세요.
그 정도가 25년이라면 영원한 지옥 불에 간다면 우리는 우리가 미처 모르는 극악무도한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감 잡아야지요. 그게 바로 율법이고 그게 바로 말씀이에요.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너 죄지으면 벌 받는다. 그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마태복음 10장 28절 다시 말씀드리겠는데요. 네가 죄지으면 벌 받는다, 가 아니라 “너는 태어날 때부터 몸을 가졌지? 몸을 가진 것부터 너는 지옥에 가야 돼. 그 이유도 너는 따져도 몰라.” 그것은 주님이 찾아와야 압니다. 그것은 성령이 찾아와야 알아요.
왜 우리가 어린애들 학대 안 했는데도 불구하고 죽고서부터 본격적으로 영원한 지옥형벌을, 그것도 사면 당하는 일이라도 있으면 희망이라도 있지, 그것이 아니고 ‘영원히’에요 영원히, 무기에요 무기, 기한도 없어요, 영원히 지옥 불에 갈 만큼 내가 그렇게 죄를 많이 지었어.
이것은 우리 옛사람의 기준에서는 도저히 연결이 안 됩니다. 연결점이 없어요. 내가 살아서 학교에서 보고 듣고 배웠던 모든 학문을 총동원해도 내가 지옥에서 영원한 저주의 형벌을 받아야 될 그 이유를 찾아내지를 못한다니까요.
그것은 이유가 뭐냐? 아까 이야기했지요. 1미터의 자로 1미터의 테이블을 측정할 때 그것은 크기를 측정하는 것이지 1미터의 자라고 해서 1미터 자가 절대가 아닌 것처럼 우리의 과거 우리가 이 땅에서 알고 있던 세상을 보는 기준은 절대로 절대적인 자가 될 수가 없어요.
절대적인 자는 이 땅에 따로 오셔야 됩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예수님 십자가가, 율법이 인간에게 가하는 그 잔인함과 참혹함을 예수님이 절대적인 자로서 우리에게 십자가라는 사건을 가지고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흙으로 난 인간아, 인간이냐? 가라 좀, 쫌! 죽어 도, 제발!” 우리는 늘 반복해서 죽어야 된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새사람 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알 수 있는 거예요.
지금까지 설교 어려웠을 거예요. 그러면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죄사함의 약속이라는 것, 율법이고 말씀에 나오는 겁니다. 죄사함의 약속은 인간 쪽에서 그것을 지킬 수도 없고 위반할 수도 없어요. 거부할 수도 없는 이유가 죄사함 이후에 죄사함 받을 인간을 등장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로 용서받는다는 것은 어느 위인도 십자가로 용서받는 위인은 없어요.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겁니다. 이 세상에 진짜 새사람,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에 진짜 신앙인은 예수님뿐이에요. 예수님뿐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진짜 절대적인 ‘자’에요. 룰(rule)이예요, 룰. 분류체계의 유일한 기준이에요. 최초의 새사람이에요. 왜? 최초로 부활했으니까.
그것도 모르고 교인들끼리 너하고 나하고 누가 누가 잘났나, 누가 누가 못났나? 여러분, 새로운 것 안 나오거든 만나지 마세요. 사귀지 마세요. 새로움이 안 나오거든. 제가 아는 사람 가운데서 오랫동안 알아온 사람이 있는데 광주에 어떤 분이 계신데요. 어떤 집사님이 계신데요. 그 사람이 참 독특한 점이 있어요. 그 점을 굉장히 좋아하는데요.
그 사람은 사람들보고 쫌, 제발 나 아는 체 하지 마라. “아이고, 집사님 아니십니까?” 제발 아는 체하지 말라고. 주변에서는 그러지요. 사회성이 부족하다 하는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사회라는 게 뭡니까? 연대성이거든요, 연대성. 그 사회에 대해서 주보에 보면 나옵니다.
제목이 <인종과 문화>라고 되어 있고 세 번째 줄에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생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생존이거든요. 생존해야 되니까 그 토양과 기후에 맞게 사람들은 적응해보려고 합니다. “대자연의 변덕스러움이 인간 생존에 방해요소가 됩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타인과 협력하는 것이 자기 생존에 유리하다는 점을 점차 체득하게 됩니다.”
타인과 협력하는데 이미 그 목적은 정해져 있어요. 나는 살아남아야 되겠다는 것.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에서 나는 무조건 사는 쪽이에요.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은 묻습니다. “어떤 사람으로 사는데? 어떤 사람?” “그냥 내가 산다니까요?” “아니 어떤 사람으로 사는데?” “그냥 내가 산다니까요.” “하늘나라 비자 안 나오는데? 하늘나라에서 거부하는데?”
여기 나오지요. “여기에서 사람들은 타인과 협력하는 것이 자기 생존에 유리하다는 점을 점차 체득하게 됩니다. 확정된 진리처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이게 누적이 되면 나 이런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방식 아니면 나는 거부하겠다. 그다음에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그 확정된 진리가 “이것이 그 지역의 관습이 되고 전통이 됩니다. 집단의 결속력이 다져지면 이러한 전통은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되고 법이 됩니다.”
그다음에 중요한 것 그것이 “곧 ‘의로운 견해’로서 그 시대에 통용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회입니다. 사회성 없어도 괜찮아요. 사회가 뭔지 알아야 됩니다. 우리끼리 뜻 모아서 같이 삽시다. 뜻을 모으는데 그 뜻을 모으는 정점 마지막 목적이 뭐냐 살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새사람이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사람이 줄기차게 일하시기 때문에 일할 때마다 새사람을 새롭게 제공 받고 공급받아요. 따라서 하루가 오늘 되면 어제까지가 우리는 죽어 마땅한 겁니다. 과거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과거가 날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속 시원한 일입니까? 그러니까 과거일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사과하지 마세요. 지나간 것은 ~ 지나간 거예요. 의미가 없어요.
다만 과거는 마땅히 죽어 마땅하다는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지금 주님이 손대서 나를 새사람 만들 때나 과거는 다 쓰잘데기없이 가위로 끊어 잘라야 될 긴긴 꼬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금에 와서 아는 거예요. 내일 되면 또 딴소리 해요. 새로움의 반복입니다. 새로움의 반복이에요.
그래서 성도가 성도를 만나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늘 새로움이 나오는 그것을 서로가 서로를 보고 반기는 겁니다. 그 새로움이 뭡니까? 나 어제 죽었다. 어제까지의 나는 죽었다. 오늘이라는 것이 나의 날이 아니고 주께서 새로 주신 날이야. 새로 살게 숨 쉬게 하시는 날이 오늘이야, 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쪽에서 “그렇게 불가능한 것이?” “그러면 당신은” “나도 오늘이 새로운 날이야.” “그렇게 불가능한 것이?” 둘이 아주 코미디를 하네. 그런 불가능함. 하늘 요소는 이 땅에서 불가능입니다. 말로 어떻게 설명할 수 없어요. 어떻게 자기 힘으로 자기 공들여온 과거를 잘라냅니까? 이것은 나를 죽이는 건데. 그것은 정말 인간의 노력으로 할 수가 없지요.
사람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기준점으로 살아가는 것 그 재미로 살아가는데 그 기준점은 타인과 자기보다 못한 상대적인 크기와 상대적인 거리감이 멀어지면서 독보적으로 온다는 자기의 절대적이라는 그 감각 그 보람으로 살아가거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기존에 있는 것을 다 시커먼 죄로 농축시켜서 죄로 만들어요. 기존의 모든 것을 죄로 만들게 되면 그러면 새로움으로 만들려면 어떤 새로운 기준이 있는가? 그것이 에베소서 2장에 보면 나옵니다. 거기 보면 주님께서 새로운 분류를 해서 둘로 나눠버려요. 11절에서 16절까지 꽤 깁니다.
그 긴 성경 말씀 읽을 때 제가 정말 여러분에게 사과, 사과하지 말라고 했는데 사과드립니다. 귀찮게 해서 사과드립니다만 좀 참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과거에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인간들이 어떻게 오해했는가를 언급하기 위해서 이방인 그리고 할례당이라는 단어를 끄집어낸 거예요. 이스라엘은 그것 가지고 오해한 겁니다. 우리는 할례행했으니까 택한 백성이다. 우리는 이방인 아니니까 천국갈거야, 라고 오해했던 것을 먼저 언급하고요.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것은 이방인 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옛날에는 이스라엘이 자기가 판단 기준이 되어서 유대인이 판단기준이 되어서 우리는 천당 가고 너희는 지옥 간다고 했던 그 이스라엘 그리고 유대인,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딱 둘로 나눴다 그 말이지요.
그 둘로 나눈 그 둘에 대한 체제, 구조를 주님께서 어떻게 완성을 시키는가? 그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 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이 말은 뭐냐 하면, 율법이 주어지고 율법이 절대적 기준으로 주어지게 되면 이 세상은 둘로 나눠진다. 하나는 이스라엘이라고 칭하는 사람과 또 하나는 이스라엘 되지 못한, 지옥 가도록 운명 지워진 이방인들 둘로 나눠지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에 의해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으로 구분 지어질 때에 그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자신인 줄 알았던 거예요.
지금 율법이 완성단계도 아닌데, 완성을 향하여 중간과정에 불과한데 성급하게 김칫국을 다 마신 거예요. 그들은 안다고 여긴 거예요. 율법의 완성이 뭔지 율법의 내막이 뭔지 안다는 거예요. 성급하게. 자기는 구원받은 쪽에 속하기 때문에 신난다는 겁니다. 이방인에게 전도하고 유대인처럼 할례받으라고 막 전도했다 그 말이지요.
어떻습니까? 율법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문제 있지요. 그 율법에 대한 이해가 오늘날 성도라 하면서 성경 보는 그 관점이나 다를 것이 뭐 있어요? 다 똑같지요. 전부 다 자기 입장이지요. 자기 천당 가려고, 자기 구원받으려고 성경 본 거예요. 그래서 교회 나온 겁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러면 안 되거든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게 쉬운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안 믿고 있는 거예요. 아무 말 잔치 아니에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믿기 때문에 여호와를 모르고 있는 거예요. 믿는다는 말은 자기의 가능성을, 옛사람의 가능성을 발휘한 겁니다. 여호와 믿어서 나중에 죽어서 천당 가야지. 이것은 옛사람에 속한 거예요. 자기 기준이에요. 인간의 가능성,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겁니다.
불가능함이 나와야 돼요, 불가능함.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불가능함이에요. 불가능함이라는 것은 일체 나의 가능함을 하늘나라에서 그걸 거부하는 거예요. 비자 안 나오는 겁니다. 네가 어떻게 죄사함 받았고 어떻게 천국까지 오게 되었느냐? “몰라요. 그것은 내 소관 아니에요, 주님!” 왜 이 말을 진즉 못합니까? 왜 그 말을 진즉에 못해요?
“어제 너 친구 만나서 짜장면 맛있게 먹었는데 어떻게 그걸 맛있게 먹을 수 있었어?” “그거 제 소관 아니에요. 저는 맛있게 먹을 능력이 없어요, 주님. 먹어도 헉헉대는데 주께서 왜 짜장면 시켜 먹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거 먹어봐야 흙 되고 안 먹어도 흙 되는데 나 자체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데 주께서 짜장면 한 그릇 먹게 함으로서 그 안에서 짜장면의 새로움을 허락하신 거예요. 너무 과도한 해석인가 모르겠습니다.
짜장면을 하나 먹더라도 주의 은혜의 새로움을 맛보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짬뽕 달라고 했는데 짜장면이 나왔으니까 이것은 내 뜻이 아닙니다. 하여튼 하나님이 하는 모든 새로움이라 하는 것은 일체 내 가능성을 발로 짓밟는 거예요. 왜? 인간의 가능성은 율법의 잔혹함을 이겨 낼 수가 없어요. 내가 착하고 내 윤리 도덕은 하나님의 주신 율법에 비하면 그것은 전부 다 지옥 갈 더러운 것들이에요. 백날 착해 봐야. 그래서 지옥 가는 사람은 착한 사람만 가요.
왜냐하면 다 핑계가 있어요. 사회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느니. 나름대로 다 착해요. 그래서 지옥 가는 거예요. “교회 가서 복음 들으려고 했는데 내가 사는 곳에서 265킬로 내에 교회가 없어서 그래서 지옥에 왔습니다. 복음 못 들어서 그렇습니다.” 전부 다 핑계 대는 겁니다.
성도는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핑계가 아니고 오히려 의아해하지요. 내가 믿음이 없고 나의 모든 것은 율법에 의하면 지옥 가도 마땅함, 그러한 나라는 사실을 내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나의 과거가 아니고 새로움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에베소서에 보면 새사람을 만드는데 방법이 뭐냐? 율법을 집어넣어서 율법을 농축해 버려요. 그러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피가 나와요. 아주 친절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율법을 녹여버렸다는 말이지요. 그 율법안에 누가 들어왔는가? 레미콘 안에 예수님이 들어왔잖아요.
그러면 다 같이, 예수님이고 누구건 간에 다 같이 율법의 저주를 받아요. 지옥의 형벌을 받아요. 다 농축된 거예요. 거기서 3일 동안 다 잠잠했어요. 3일 동안. 아무도 튀어나올 수 없어요. 하나님의 율법은 율법대로 선해야 되고, 율법대로 하나님의 마땅한 징벌을 가해야 되고 저주 내리는 것이 주의 뜻이기 때문에 누구도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3일 뒤에 무덤이 열리면서 톡 하고 한 분이 튀어 나와버렸어요. 이거 첨 듣지요? 부활 십자가 이야기 그렇게 백날 해도 하니 뭐합니까? 안 믿는데. 지금 안 믿는 것 맞아요. 믿는 자는 예수님 밖에 없다고요. 그러니까 예수님만이 톡 튀어나와 가지고 예수님만 튀어나온 그 안에 율법의 완성이 들어 있으니까 그 안에 죄사함의 작용 기능이 들어 있어요.
예수님은 자신의 죄사함의 기능의 본때와 자존심과 권위를 위해서 죄사함 받을 사람을 성령을 통해서 찾아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에베소서에서 이야기한 바로 새사람입니다. 그 일이 어제가 끝이 아니고 매일같이 반복되는 겁니다. 새사람의 반복이에요.
왜? 주께서 반복해서 일하기 때문에. 지금도 주께서 일하기 때문에 짜장면 하나를 시켜도 주께서 시켜준 거예요. 반복이에요 그게. 살 이유 없습니다. 우리가 사적인 목적이나 의도는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것은 사회적인 연대감인데요. 그것은 주님의 것이 아니고 인간의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교회에서 만들어낸 가짜 비자들이에요.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예수 십자가 피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문제는 안 믿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게 알기는 아는데 믿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여전히 나의 옛사람을 믿기 때문에, 내가 잘돼야 모든 것이 잘된다는 그것을 믿기 때문에 거기에 믿음이 나오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나는 나만 믿는다는 그것이 바로 걸쭉한 죄라는 사실을 아는 이게 내 힘으로는 불가능해요. 이걸 아는 것, 내가 50년 동안 신앙생활 한 이것이 죄라는 사실을 아는 게 이게 나의 가능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불가능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사람 입장에서 예수님처럼 레미콘 안에서 같이 돌아갑니다. 돌아가는데 참 힘들지만 성도로서의 사는 보람, 즐거움, 재미, 날마다 새사람 되는 그 재미, 과거가 잘리는, 매일같이 새사람되는 그 나름대로의 행복은 있어요. 어떤 기쁨이 있느냐 하면, 피난처에 온 사람 입장에서는요, 피난처에 오려고 애쓰고 허둥지둥 대는 그 모습을 보는 그 구경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이미 피난처에 도착한 입장에서, 주님의 불가능에 도달한 입장에서 기독교 교회나 신학이나 아니면 세상 나름대로의 천당 가려고 애쓰는 그 부질없는 몰골을 보고 있는 즐거움, ‘아이고, 쓸데없는 저 짓 한다. 다 옛날에 내가 했던 건데.’
그 사람들은,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구원받았다, 자기가 잣대에요. 자기가 기준이에요. 내가 구원받았다, 너는 구원 못 받았다. 자기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고 있어요. 얼마나 안 믿었으면 그거라도 믿어야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이미 도피처 피난처에 온 사람은 기쁘고요, 그다음에 안타깝지요. 식구들, 가족들, 교회 안 다니는 시어머니 시아버지 볼 때 안타깝지요.
“야야, 그저 남편한테 잘해주래이. 남편 건강해야 네가 잘되는기라.” 이런 식으로 그들이 하는 것은 옛사람이 하는, 전부 다 과대광고에요. 과대광고, 허풍이에요. 건강식품에 보면 과대광고가 있는데요. 쏘팔코싸놀이라는 과대광고에 보면 오줌을 누는데 변기가 깨졌어요. 나 이거 왜 신고 안 들어가는지 모르겠어요. 1개월 치 무료로 줍니다. 오줌을 죽 누는데 변기가 와장창 깨졌어요. 중년 남자의 고민 전립선을 보강하라.
세상은 전부 다 허세고 허풍이고 과대광고에요. 안타깝지요. 천국 흉내 내는 것 보면, 그 꼬라지 보면 참 우스워요, 우스워요. 묻고 싶어요. 네가 내놓는 새로움은 뭐냐? 새로움은 없어요. 아는 지식을 그저 우려먹고 하는데. 저는 셰프, 참 성실하고 착한 주방장 모습을 어디서 찾느냐 하면, 요리를 예쁘게 하는 거기서 찾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 손님 다 가고 파장할 때 바지는 청바지 입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앞치마 입고 소매 걷고 음식쓰레기 봉투 어깨에 메어서 내다 버릴 때 굉장히 그게 위대해 보였어요
저게 주방장이다. 모자 하나 덮어쓰고 쓰레기 버릴 때. 성도의 위대함은 여러분이 아낌없이 여러분 자신을 쓰레기봉투에 담아서 버리시고 흙이 되도록 버려주시는 그 작업은 이미 죄사함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걸 여러분이 감당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부질없고 쓸데없는 짓 많이 했습니다. 노심초사 조심스럽게 인생을 사는 것이 행여나 주님한테 채택되는 기회가 아닌가 어리석은 행동, 생각, 그것이 계속 옛사람 속에서 살아 있었습니다. 주여, 믿는 자는 주님밖에 없는데 부활의 능력이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사함 받는 대상이 되었음을 알려줄 때 이제 주님만 자랑하고 아무것도 내세우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