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인격 가로채기

아빠와 함께 2021. 5. 31. 11:22

인격 가로채기 

2021년 5월 30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3:7-10

(3: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3: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3: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옛사람과 새사람을 판단하는 그 판자 자체가 거짓된 영토에서 나온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이러한 하나님의 취지는 바뀌신 적이 없습니다.

생명나무가 없는 곳으로 인간이 내쫓김을 당하므로서 인간 세계는 더 이상 진리는 없고 오로지 거짓 뿐입니다. 여기서 ‘거짓’이라는 것은 인간이 개인적 성향으로 거짓말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다 거짓이라는 말입니다. 말이나 행동이나 태도 전부가 거짓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 자체가 거짓된 영역에서 출생했기 때문입니다. 진리유입이 꽉 막힌 공간 안에서 통용되는 모든 것들이 다 거짓입니다. 거짓된 하나님, 거짓된 구원자, 거짓된 심판관 등등 어느 것 하나 거짓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오늘 본문에 통해서 ‘성도는 이미 천국 생활을 시작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살아서 가기에 성도는 무엇이 지옥으로 추락하는 생활인지 무엇이 천국으로 향하는 천국인지를 알아보는 자입니다. 두 개의 경험 속에 놓여 있는 자입니다. 여기에 비해 세상 사람들은, 진리에서 절단된 상황에 있기에 그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지옥으로 이끄는 거짓된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떻게 해서 지옥도 알고 천국도 아는 것일까요? 성도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자신의 안목이 거짓된 것임을 압니다. 즉 자신의 새사람됨을 자신이 판단한 옛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알아차리는 겁니까? 그것은 곧 예수님과 비교하는 겁니다.

예수님 그분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 사람’입니다. 따라서 새 사람이란 ‘죽음을 이긴 사람’을 말합니다. 죽음을 이긴다는 것을 달리 말해서 자신의 건강유무와 재산유무를 개의치 않는 자가 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죽음을 이기지도 못하면서 죽음을 이긴 척하는 사람을 끊임없이 내부에서 ‘자기 의’가 펄럭이면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됩니다.

아무리 뉘치고 반성해도 새 사람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끝까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뉘우칠 의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 뉘우칠 능력이 인간에게는 애초에 없었던 겁니다. 아무리 반성하고 회개해도 여전히 자기는 그런 자아에 대한 집착은 지독합니다.

여기서 모든 인류는 최대의 난제에 마주치게 됩니다. 즉 불신자들은 생각합니다. “나의 행동에 내가 책임질 범위는 어디까지냐? 어디까지 책임져야 여전히 나는 의인으로 죽을 수 있느냐?”를 알지 못합니다. 티벳 불교에서의 저승은 인간에게 책임을 묻는 곳입니다. 각가지 고문수단을 가지고 전생에 한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묻게 됩니다.

천상지옥, 박피지옥, 발설지옥, 화탕지옥, 대애(맷돌과 방아)지옥, 검수지옥, 거해지옥, 중합지옥, 한빙지옥, 흑암지옥 등등 마련해놓고 냉혹한 처벌을 천왕들이 내린답니다. 이는 자기 신체적 고통이 사전에 그 사람의 죄짓는 것을 예방할 것이라는 아이디어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고통을 당해서 ‘누구를 사랑할 수 ’는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 착함이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뉘우침과 반성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겁니다. 사랑이란 자신의 이익을 근거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경에서는 자신의 거짓됨을 들추어내어주신 고마움이요 사랑이요 감사입니다.

주님께서는 거짓과 거짓으로 연결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이 지니고 있는 거짓과 거짓 사이에 진실로 개입하셔서 그 거짓을 진실에 연결시켜버립니다. 이렇게 되려면 예수님 자신이 죄인이어야 하고 의인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죄인됨’이란 ‘죄인으로 취급받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원칙에 의해서 성도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어떻게 해서 내가 책임질 것이 하나도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가? 어떻게 해서 내가 한 그 모든 일이 어떻게 주님께서 하신 일이 되어버렸는가?”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찬미하고 찬탄합니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자기 백성에게 개입하시는 것은 성도의 모든 인생을 거들내기 위함입니다.

‘인격 가로채기’를 하시는 겁니다. 주님이 압수해 가시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의 인격은 예수님께서 차지해서 걷잡을 수없이 터져나오는 의로 가득차게 됩니다. 죄를 찾고자 해서 찾아볼 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하나님께 이런 조치를 하실 권한이 있음이 다음의 성경 구절에 나옵니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신 32:39)

즉 성도는 압니다. 바다 속에 놓여진 자가 끊임없이 자기쪽으로 파도가 쉴새없이 들이닥치는 것처럼 쉴새없이 주님께서 일을 만들어내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미 성도의 인격은 주님으로부터 탈취당했기에 그의 육신은 이제 죽을 날만 남아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쓰시기 위해 소모되는 일만 있습니다.

주님은 무슨 일에 자기 백성을 쓰실까요? 그것은 옛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오늘날 성도에게 그대로 주입시키십니다. 즉 오로지 말씀의 살아 있음을 위하여 죽은 성도의 육신을 활용하시는 겁니다. 그런 분들이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이요 야곱이요 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은 그들 안에 복과 저주의 기준점이 들어 있습니다.

저주란 인간의 옛사람, 곧 힘을 중시하고 오로지 힘으로 자기 생존의 기반을 다지는데 평생을 다 허비하는 자들의 모습을 육신의 본성으로 보여주게 됩니다. 또한 복의 근거로서 성도 안으로 생명의 말씀이 들어오게 됩니다. 복과 저주가 오로지 예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결정되었음을 증거한다는 사실이 성도를 통해서 터져나옵니다.

따라서 성도가 이 거짓된 세상을 살아가는 요령은 바로 이 세상을 위하여 거짓을 외치는 겁니다. 기생라합이 그러하고 아브라함이 그러하고 야곱이 그러했습니다. 거짓된 세상에서의 진실은 오로지 그들 귀에 거짓으로 들리는 복음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심판하실 심판주 예수님을 살해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리로 가득차 있기에 그해서 이 세상은 거짓된 세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힘이 찾는 이 세상과 반대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0강-골 3장 7-10절(인격가로채기)210530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3장 7-10절입니다.

골로새서 3:7-10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죽어서 천국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을 때부터 벌써 천국 생활이 개시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천국 생활을 살아 있을 때 하게 되면 죽었을 때의 그것과 어떤 차이가 나느냐 하면, 지옥이 뭐고 천국이 뭐냐를 극렬하게 둘 다 체험하면서, 다 알고 있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무엇이 지옥이고 무엇이 천국인지를 성도만이 알고 있어요.

그러나 성도가 아닌 사람은, 불신자들은 자기가 사는 이 모든 세상이 지옥인 것도 모르고, 자기의 삶이 지옥으로 가고 있고 벌써 지옥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을 모르면서 불신자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불신자들이 교회에 가득하다는 것, 교회에 가득하면서 자기가 교회 생활하는 것이 이게 지옥 가는 짓이라는 것을 모르면서 천국을 동경하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교회에, 성당에 들어와서까지 그런 일들이 일어나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성경에 나오는 옛사람과 새사람을 구분할 때 자신이 판단하는 자기의 과거와 자신이 판단하는 현재의 자기 모습을 비교하기 때문에 그런 사달이 나고 그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새 사람과 옛사람의 비교는요, 나의 과거 생활과 나의 개과천선했다는 지금의 생활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하고 비교하는 거예요. 너무나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걸 뭐로 바꾸느냐 하면, 자기가 보기에 옛날에 참 허술하게 살았던, 자기가 보기에도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던, 시건 없던 그 시절과 지금의 생활이 현격한 차이가 난다고 해서 자기를 새사람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그것은 새사람 된 것이 아니고 철이 난 거지요.

새사람이라는 것,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새사람이라는 것은 죽음을 이긴 거예요. 누구처럼, 예수님처럼 죽음을 이기는 겁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보는 안목을 그대로 자기가 갖고 있는 겁니다. 죽음을 이겼다는 말은 뭐냐? 돈 없음을 이기는 것이고 몸 아픈 것을 이기는 거예요. 그게 무슨 대수냐 그 말입니다. 몸 아프고 돈 없는 게.

왜냐하면 예수님 마음이 그 마음이었습니다. “너 아프냐? 너 지옥 가. 너 돈 없으면 지옥 가는 거야.” 예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가르쳤습니까?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던가요? 돈 없던 자가 예수 믿고 부자 되고 몸 아픈 자가 예수 믿고 건강하게 되면 그것이 새사람이라고 누가 그런 거짓말을 하던가요?

교회에서 그렇게 하잖아요, 교회에서. 고객관리 한다고 그런 식으로 하잖아요. 새사람이라 하는 것은 만약에 주께서 당장 우리를 죽인다면 우후~ 신이 나가지고 ‘아, 이제 제대하는구나. 아, 참 신난다. 즐겁다. 속히 떠나고 싶었는데 이제야 그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때가 이때니이까.’ 정말 환호성을 올리면서 반가워해요. 이게 사도바울의 소원이었습니다.

나한테는 기쁜 소식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죽어 마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이미 시작된 천국입니다. 지옥에서 발을 뺄 수 있는 그 날이 온다는 거예요. 지옥에서 발을 뺄 그 날이 온다. 따라서 우리가 새사람이라면 잡스러운 것들 세상에서 문제 거리도 안 되고 상담 거리도 안 되는 그 잡스러운 것들 그런 것들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내가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남들이 날 욕하겠지, 하는 그런 것들은요, 죽음을 이기지도 못하면서, 죽음을 이긴 척 하면서 나올 수 있는 자기 의가 아직도 있어서 거기서 나오는 흙먼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풀풀 막 일어나요. 쓸데없는 걱정거리 같은 것이.

물론 성도라고 해서 안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성도라도 일어나요. 그러나 성도는 아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상에 두 가지의 체험을 다 한다고요. 지옥 체험이 어떤 것이냐? 그리고 체험 정도가 아니고 왜 지옥의 고통을 느끼느냐, 그 원인까지 알아요.

바로 지옥의 삶의 특징은 성경에서 분명히 확정을 지은 사실도 거부하고 내가 나를 구원하겠다는 이 고통, 이 고통보다 더 지독한 고통은 없습니다. 내가 나를 구원되는 인간으로, 내가 나를 그렇게 만들어내겠다는 그 고통, 그 집착 이런 생각이 당연한 줄 알고 있어요.

그래서 교회에서 구원론이 그렇게 인기가 높은 겁니다. 구원론이! 파도 구원파가 있잖아요. 그러나 창세기 3장에, 여러분, 성경 뭘 봤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면 창세기 3장 24절에 분명히 이렇게 나와 있어요.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오지 말라 그 말입니다. 오지 말라! “주님, 접니다.” 하니까 주님이 우리보고 “너 오지 마. 오지 마.” 이게 창세기 3장 24절이에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그 입 다물라. 오지 마, 아예” 이게 하나님의 확정된 뜻이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는 것은 뭐냐? 오지 말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떠나면서 당부한 것이 뭐냐? “너는 오지 마. 너는 못 와. 네가 올 수 없는 곳이야 천국은. 그것 너 몰랐어? 그동안 나에게 뭘 배웠나? 네가 지금 오해하고 있는 거야.” 베드로가 그리고 열두 제자가 다 예수님을 오해한 것은 뭐냐?

예수님을 내가 가까이 최측근으로서 사니까 뭔가 천국에 대해서, 그 당시 유대 나라가 하늘나라 오기를 고대했으니까, 하늘나라 가는데 특혜 입었다, 우리가 맨 처음 하늘나라 갈 것이다, 그런 식으로 오해를 하면서 예수님 말씀 들었던 거예요. 못 온다는 이야기로 해석을 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마찬가지예요. 사람들이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교회 와서 성경을 보고, Q.T 하면서 자꾸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 회개합니다, 반성합니다, 뉘우칩니다, 자꾸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하고자 하는데 인간은 뉘우칠 수가 없습니다. 뉘우치고 싶은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뉘우치고 싶은 능력이 없어요. 그 능력이 아예 박탈되어 있습니다. 회개의 능력이 박탈되어 있어요. 회개고 반성이고 그것은 지옥 생활이 더 가중되는 겁니다.

제가 지난 금요일에 어딜 갔느냐 하면, 티베트박물관에 가 봤어요. 티베트는 아예 불교가 국가종교에요. 지금 영토가 없지만 그래서 망명 생활하고 있지만 나라 전체가 불교도로서 만들어진 나라에요. 그 티베트불교의 정신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전남 보성군 문덕면 천봉산의 대원사 입구에 그 박물관이 있는데 거기에 불교의 전통적인 진수를 다 진열해 놨어요.

그 지하실에 내려갔는데 사람이 거의 안 찾아가서 습기 때문에 곰팡이 냄새가 확 풍깁니다. 그 입구에 저승체험 하세요, 라고 해놨는데 그 이야기 안 해도 그 지하가 저승체험 하는 것 같았어요. 거기에 보니까 사람이 저승을 가면 염라대왕한테 가면 그런 심판을 받는다고 되어 있어요. ‘철상지옥’이라는 데를 가는데 거기는 강간, 강도, 음행한 사람, 남을 비방하고 업신 여긴 사람은 쇠붙이가 나온 철상에다 벌거벗은 몸을 눕혀서 고통을 받게 하는 것.

그다음에 ‘박피지옥’이라 하는데 자식을 학대한다든지, 외도를 한다든지,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은 박피, 피부를 아예 벗기는 고통의 지옥. 그다음에 ‘발설지옥’은 혀를 뽑아버리는 지옥인데 어른한테 사기를 치고, 동물을 학대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발설지옥, 혀를 뽑아버린다는 것.

그다음에 ‘화탕지옥’이라 해서 뜨거운 탕에 집어넣는 겁니다. 도둑질하고, 불효하고, 불쌍한 사람 그냥 방치하고 지나가는 사람은 화탕지옥, 불 속에 집어넣는 고통의 지옥에 보낸다. 그다음에 ‘대애지옥’이라 하는 것은 맷돌과 방아를 대애라 해요. 살생하고 폭행하고 이런 자는 송곳이 있는 쇠절구에 넣어서 위에서 죄수를 찧는 지옥.

그다음에 ‘금수지옥’ 목을 따는 금수지옥은 폭력, 모함, 불효, 시기하는 사람은 금수지옥에 집어넣고요. ‘거해지옥’이라 하는 것은 남을 속인 자, 그리고 음행하는 자, 방화, 즉 불 지른자, 남의 재물 탐한 자, 이것은 톱으로 썰고 맷돌 사이에 집어넣어서 갈아버리는 지옥 거해지옥.

그다음에 ‘중합지옥’이라 하는 것은 불효하고, 주색잡기하고, 음란하고, 남의 가정 파탄 내는 것, 이것은 무거운 돌판 속에 집어넣어서 짓눌러 버리는 고통. 그다음에 ‘한빙지옥’ 이것은 아주 차가운 곳에 집어넣는 것. 가정파괴, 음행한 사람은 차가운 곳에서 벌벌 떨게 만드는 지옥. 그다음에 ‘흑암지옥’은 음행과 시기와 질투와 불효한 사람은 캄캄한 곳에서 고통받는다는 거예요. 이걸 그림으로 다 보여줬어요.

끝나고 난 뒤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뭐냐? 애굽의 열 가지 재앙이었습니다. 이 세상이 바로 지옥인 거예요. 이 세상 삶 자체가. 이걸 보면서 성경에서 애굽의 열 가지 재앙은요, 강도 강간 음행 이것 아니에요. 다른 신을, 여호와를 모르면 이런 저주를 받는 거예요.

그게 뭐냐? 창세기 3장 24절이에요. 생명나무 못 따먹으면 이 세상 자체가 저주가 있는 이 지옥에서 평생을 고통받고 영원히 마귀와 함께 고통받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열 가지 재앙을 여기서 보는구나.’ 그러면 티베트불교를 비롯해서 인간들이 왜 이런 아이디어를 자꾸 끄집어내느냐? 마귀가 그런 것을 끄집어내겠지요.

왜 끄집어내느냐? 그것은 공포가 어떤 사람들을 회개하고 반성케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회개하고 반성하는 그게 문제에요 그게. 성경에서는 회개하고 반성하는 그 의미가요, 나 불편한 것 싫어요. 아픈 것 못 참아요. 아픈 것이 너무나 참혹하기에 다시는 이런 나쁜 짓 안 하겠습니다, 라고 해봤자 도로 어디로 돌아서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를 건사하고 지키는 것으로 밖에는 안 돌아와요.

성경에서 말하는 그 지옥을 알려 드릴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 돌아섬이 어떤 것인지를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사랑입니다. 감사고 고마움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고 누구에 대해서 고마워하는 것이고 누구를 사랑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러한 압박감, 심리적인 고통과 공갈 협박, 미래의 네 모습이 이렇게 처참하다고 아무리 가해봤자 자기 단도리, 내 몸 내가 지키겠다는 자기에 대한 집착만 더 강화될 뿐입니다. 이게 유독 불교만 그런 게 아니에요. 이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불교에 보면 강간, 음행, 강도, 비방, 많은데 이슬람에 보게 되면 가관이에요 가관.

코란, 현지어로는 꾸란이라 하는데 꾸란 24장 31절에 보면 “믿는 여성은 그들의 시선을 낮추며……” 즉 믿는 여성은 눈을 똑바로 뜨고 가지 말고 눈을 낮춰서 뜨고 길을 가며 “……순결을 지키며 밖으로 드러나는 외관이 어떤 유혹이라는 것도 보여서는 안 된다.” 여성은 유혹받을만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슬람 여성들은 몸에다 뭘 덮어씌우는데 ‘니캅’이라는 것은 눈 주위만 노출 시키고 나머지는 다 가리는 것이 니캅. ‘히잡’이라는 것은 얼굴만 내놓고 머리하고 목을 둘러싸는 것을 히잡. 인도네시아같은 경우입니다. ‘부르카’라는 것은 푸른색으로 온몸을 다 뒤덮는 것.

그런데 앞이 안 보이면 어떻게 하느냐? 안 보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눈은 그물망으로 처리. 이게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여성이 착용하는 것. ‘차도르’라 하는 것은 검정색으로 여성을 뒤덮어서 아예 걸어 다니는 숯덩이처럼 만들어서 거리에 다니는 거예요. 이건 이란의 차도르고.

또 ‘알아미라’라 하는 것은 잘 못 들어본 것인데 히잡은 쓰고 가슴이 유혹대상이라 뭘 덧대기를 하라는 거예요. 남자들이 바보인지 여러분, 가리면 충동이 증강된다는 심리적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지요. 이게 여성이 더워서 죽든 말든 간에 남성이 죄를 짓지 않도록, 다시 말해서 남성으로 하여금 열 가지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여성은 좀 양보하면 안 되나, 그런 식이에요. 그러지 말고 차라리 여성을 다 죽이면 돼요. 여성을 다 죽이면 되잖아요.

열 가지의 지옥 철상지옥, 박피지옥, 발설지옥, 화탕지옥, 대애지옥, 금수지옥, 거해지옥, 중합지옥, 한빙지옥, 흑암지옥, 이 지어낸 이야기 이 모든 지옥에 안 가려면요, 모든 사람이 나를 죄짓게 만드는 동기를 제공하기 때문에 다 죽여버리면 되는 거예요. 자기만 살면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다른 신입니다. 악마가 지어낸 신이에요. 우상이에요.

우상의 특징은 뭐냐?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해서 신이 존재하는 것을 우상이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서는 그걸 탐심이라 하고, 그걸 우상 곧 우상숭배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집에 와서 생각해 봤어요. 만약에 이렇게 심판하는 염라대왕이 인간세계에서 살아서 돌아다니면 벌써 죽었어요. 어디서 협박 공갈질이야, 해서 벌써 죽었어요. 그분이 누구냐? 예수님이십니다.

심판주가 죽었어요, 심판주가! 그러니까 십자가를 증거해야 될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십자가를 증거해야 될 이유가, 너는 모르지만 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너는 이 지옥의 환경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는 거예요.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요소들, 그 요소들이 이미 네 안에 스며들어와 있다는 것을 네가 지금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지옥 가면서 지옥 가는 이유를 모르듯이 그렇게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내뱉는 모든 말은 거짓말 아닌 말이 없어요. 인간은 거짓말 외에는 해본 적이 없는 게 인간입니다. 거짓말만 하게 돼요. 왜냐하면 꾸며서 하게 되는 거짓말 말고 실제로 이 삶에서 통용되는 모든 나와 너 또 나와 나 사이에 속으로 이야기하는 것까지 전부 다 이 세상이 생명나무가 없는 추방된 영토기 때문에 추방된 영토자체가 거짓된 영토에요.

거짓말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이미 그 땅에 신인 악마에 의해서 길들여진 자에요. 우리는 살면서 자기 자신을 그런 안목으로 거짓된 영토 거짓된 영역에 살면서 그 안목이 옳은 줄 알고 자기자신의 의로움과 올바름을 지탱하고 유지하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그 자체가 거짓이에요.

그래서 회개하는 것도 거짓이고 반성하는 것도 거짓이에요. 그 반성과 회개는 과거의 나와 더 철났다고 자부하는 지금의 나와 비교하면서 성경에 나오는 단어 새사람을 자기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적용시키는 겁니다.

그게 바로 통일교에서 말하는 회복론이고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잘 모르지요. 그냥 신학이라 하면 돼요. 간단히 말해서 한국교회에 통용되는 신학, 이 신학에서 인간의 성화론이라는 게 그겁니다. 과거의 나와 비교해서 좀 더 나아진 면을 찾아서 이것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닮겠다는 겁니다.

청교도 알지요. 청교도적 생활, 경건 생활, 독일에서 나온 경건주의, 개혁주의신학, 여러분이 안 들어봤습니까? 많이 들어봤을 거예요. 목사 입에서 경건하라, 주의 뜻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안 들어봤습니까 경건은 어떻게 합니까? 경건의 참고자료가 뭡니까?

과거에 술 먹고 담배 피던 자기를 버리고 술 끊고 담배 끊어서 이제 새사람 되었다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그 새사람 되었다고 우기는 그 핵심에 자기의식이 있는데요? 자기가 안 죽었잖아요. 내가 살아 있는 한 내가 어떤 발광을 해도 그것은 거짓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인간을 상대하는 것은 거짓된 나와 거짓된 나를 만나는 거예요. 찬송가에 그런 것이 있잖아요. “사랑하는~, 어깨동무하고 everybody, 아멘 합시다, 사랑하는 집사님들! 서로 손잡으시고 할렐루야로 인사하세요.” 이것은 거짓된 인간과 거짓된 인간이 서로 할렐루야 인사하세요, 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리고 지금의 나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과거의 나를 나름대로 평가하는데 새로운 나도 거짓이고 과거의 나도 거짓이고. 새사람이라고 우기는 그 거짓이 옛사람이라고 단정 짓는 그 거짓을 함부로 평가하면서 내 인간성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우기는 이러한 객기는 또 뭐예요?

그게 바로 자기의잖아요. 왜 그런 짓 합니까? 그거는 무서워서 하는 거예요. 왜 무서운데? 지옥갈까봐 무서워서. 벌써 지옥에 와 있는데. 지옥에서 출발했고 탄생했어요. “Happy birthday to you~”노래 부르잖아요. 6월이 되면 또 누구 생일도 또 오고요. 이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닌데. 하여간 누구 할 것 없이 각자 여러분 생일이 있지요.

겨울에 태어난 사람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겨울에 태어난~” 보세요. “지옥에 태어난~” 그걸 “겨울에 태어난~” 그렇게 노래를 부르잖아요.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새사람이라는 것은 우리의 과거와 비교하는 게 아니고 거짓밖에 나오지 않는 그 거짓됨 그것에 대해서 모든 거짓된 세상에 거짓된 사람이 거짓되다고 평가내린 그 거짓된 그분이 우리의 인격을 성령을 통해서 가로채기를 하는 거예요. 나와 나 사이에 들어오시는 겁니다.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틈이 있어야 빛이 들어온다고 했거든요. 나와 나 사이에 벌어지게 만들고 그사이에 거짓되다고 간주 된 그 주님이 오시는 거예요. 거짓된 세상에서 예수님의 진실은 어떤 말도 거짓될 수밖에 없어요. 진짜 그 본심은.

따라서 인간들은 예수를 뭐로 바꾸는가? 가짜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성령으로 다 바꿔놓은 거예요. 이용해 먹으려고, 내가 괜찮은 나로 새사람 되어서 천국 가려고. 그러한 노림수를 가지고 진짜 복음은 오히려 우리한테 죽임을 당한 그분이거든요.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아담은 모두 한통속이에요. 별난 인간 없어요. 네 생각하고 내 생각하고 똑같아요. “감히 누가 나를 심판해?” 그래서 죽은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 자체가 거짓되다 하는 이것이 인류 최대의 난제입니다. 난해한 문제에요. 그 난해한 문제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난해한 문제냐 하면, ‘어떻게 내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 그 결과를 내가 다 어떻게 책임질 수 있느냐? 너무 짐이 무겁다.’ 불신자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 그 결과를 어떻게 내가 다 짊어질 수 있는가. 하나라도 뭔가 꼬투리 잡히면 이것은 내가 하는 행동이 아니고 내 사촌 팔촌 이 하는 행동인데 “너도 네 사촌이나 팔촌하고 같은 DNA 퍼센트로 되어 있잖아.” 이래가지고 나한테 책임이 돌아온다면 그 책임 져야 되지요.

그걸 어떻게 책임집니까? “너는 25년 전에 국민학교 다닐 때 5학년 2반 그때 백 원 빼앗아 갔잖아.” 그걸 25년 후에 어떻게 내가 책임져야 되겠어요? “그래. 그 돈 백 원 이자까지 쳐서 줄게.” 하면 그쪽에서 “난 돈이 문제가 아니야. 그때 맘이 상해서 인생 어긋났는데 그 어긋난 인생 다 책임져라.”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겠어요?

그러나 그쪽에서는 말이 되는 거예요. “너 의대 다니던 내 아들 한강 변에서 술 먹고 있을 때 같이 술 먹었잖아. 책임져라.” 이게 말이 돼요? 이게 말이 되는 겁니까? 그걸 어떻게 책임집니까? 술 먹어서는 안 된다고 아버지가 그런 잔소리도 안 한 그 책임은 모르고 친구가 술 먹여서 강에 떠밀어서 죽일 수도 있다는 그 가능성을 왜 끄집어냅니까?

도대체 인간은 책임질 것 안 질 것을 자기가 일방적으로 재단해서 자기의를 기어이 끄집어내려는 거예요. 자기 잘났다는 거예요. 이 잘난 것 하나님께서 나중에 심판할 때 좀 안 봐주겠나 싶어서. 그 자체가 공포입니다. 그런데 신자는 어떻게 이 문제를 푸느냐 하면, “어떻게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내가 한 게 아니고 주님이 하셨습니까!” 이렇게 외쳐버려요.

“어떻게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거짓된 행동이고 주님 보시기에 율법 어느 것 하나 지키지 못한 저주받을 행동인데 어떻게 이 행동이 내가 한 행동이 아니고 주님이 하는 행위가 되고 맙니까! 놀라워라.” 이게 신자거든요. 이게 새사람입니다. 왜 내가 책임질 일이 내게서 없어졌습니까, 하는 이야기에요.

충격 아닙니까? 기절들 안 하는 것 보니 내가 거짓말 하고 있는 거예요? “주여, 왜 내게 돌아올 책임이 없는 겁니까? 세상적으로 책임질 일이 한두가지가 아닐텐데, 죄사함이 있어 가지고, 왜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까?” 이렇게 하면 “네 인격을 내가 가로채서 내 인격으로 전환시켰잖아.”

다시 말해서 주님은 두 가지의 인격 역할을 한 거예요. 죄인의 역할도 하셨고 의인이 역할도 하셔서 한 몸 인격이 죄인과 의인 역할을 다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죄인이 책임질 게 남아 있지 않지요.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보고 의인이라 하는 것도 내가 행한 의가 아니고……, 주님이 죄씻음 정도가 아닙니다.

죄 지은 곳에 은혜가 넘치듯이 의가 더욱더 물 넘치듯이 넘치고 넘쳐서 감당못할 정도로 의인이에요. 약간 플러스 의인이 아니고 감당못할 정도로 의인입니다. 죄를 찾아내려고 손가락으로 후벼봐도 찾아낼 수 없을 정도로 의인이에요. 로마서 5장에서. 그분의 인격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분의 인격이.

죄는 제대로 처리했기 때문에 무죄상태가 되는 게 아닙니다. “이제는 새사람 되었으니 앞으로 하는 일은 네가 책임져라. 내가 죄 용서했으니까 네가 앞으로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네가 죄용서 받은 값 제대로 못 하면 지옥 가고 잘하면 천국 간다.” 이게 아니라 그 말이지요.

이런 기독교 교파 많아요. 많은 게 아니고 전부라고 할 수 있지요. “예수 믿어놓고 죄씻음 받았다고 까불대면서 교회 십일조도 안 하고 주일성수 안 하는 것은 지옥이나 가거라. 지옥 가라고까지 하는 것은 너무 심했나? 그러면 천국 가는데 상급 하나도 없이 가거라. 팬티 바람으로 부끄러운 구원이나 받아라, 인간아.” 이게 저주일까?

그거하고, 아까 말한 열 가지 지옥들, 철상지옥, 박피지옥……, 그런 것과 차이점이 뭡니까? 인간의 공포심을 자극한다는 것, 인간의 공포심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중하고 목사하고 차이점이 뭐가 있어요? 똑같아요. 다 똑같다니까요 이게.

샤워할 때 물을 뿌리잖아요. 그럴 때 몸을 바르는 물이라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샤워기를 입에 넣어 보세요. 가만 보자 이물은 먹는 물일까, 생각되겠지요. 주님께서는 성경말씀, 교리, 신학, 복음적 내용을 피부에, 건강에 좋으니 바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목구멍 속으로 우리 속까지 집어넣기 위한 생명의 말씀이에요.

그걸 어떻게 하느냐? 성도는 두 가지 체험을 다 해요. 다 하기 때문에 자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타고났기 때문에 내 육신을 칼로 도려낸다고 자아가 잘려나가는 것이 아니에요. 오른팔 잘라낸다고 왼팔로 죄 안 짓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는 그걸 아셔요.

네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건 염라대왕이지요. 우리 몸을 죽이는 자는 염라대왕이에요. 그걸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이 천국에 가는 것을 기뻐하라고 했다고요.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 몸을 지금 죽은 몸으로 단정을 해요. 죽은 몸으로 단정을 하게 되면 신명기 32장 39절을 주께서 적용시킬 수가 있습니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자 없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아까 잡스러운 것들 자체가 거짓되다 했지요.

왜냐하면 죽음을 이기지도 못하면서 이긴 척해서는 안 될 이유가, 이미 살리고 죽이고 가난하고 부하고 뜯고 씹고 먹고 마시는 이 모든 것,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것, 비가 오고 비가 안 오고 하는 이 모든 일을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사건을 계속 우리에게 송곳 꽂듯이 우리에게 사건을 꽂아주는 거예요.

가만있어도 계속 사건이 밀려오는 거예요. 이해 안 되십니까? 끊임없이 바닷가에 가면 바다가 가만있지 않고 파도가 밀려오듯이 매일같이 주께서 일궈내시고 의미를 가진 사건이 파도가 되어서 우리의 몸을 찾아오는 겁니다. 성도는 그렇게 알아요.

그래서 내가 놀고 싶어도 못 놀고 오늘 밭일 그만할까 해도 그만할 수가 없어요. 아차 파종해야지, 또 생각이 나게 해요. 그 생각조차 모든 것이 파도치듯이 밀려오는 겁니다. ‘아 심심한데 뭐 할 일 없나?’ 그러면 주께서 ‘아 오줌 마려운데 오줌 누러 가야겠다.’ 하는 이 모든 떠오르는 생각까지 전부 다 주께서 일방적으로 하시는 이유가 더 이상 내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주께서 조성해 가는 겁니다.

뭘 조성하는데? 살리고 죽이고, 부자 되고 가난하게 되고, 아프고 낫게 하는 것이 네가 처리할 네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미 우리를 죽여놓고, 죽여놓고 그냥 사는 게 아니고 죽여놓고 주님이 살아나는 것, 주님의 말씀이 살아나는 거예요. 전에 있던 내가 살아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인격이 내 안에서 살아나는 그 작업을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겁니다.

베드로가 그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인간은 평생 육신으로 이 거짓된 세상에서 태어나 가지고 시간이 쫓아오고 죽음이 당기고 매일매일의 삶이 나 하나 간수하기도 겁나요. 정말 겁납니다. 이제 뭐 집안에 일 없지, 싶으면 큰딸이 와서 “엄마 돈 있나?” 그래서 빛내서 돈 해주고 이제는 별일 없겠지, 하면 둘째 아들이 와서 “엄마 해외 연수 가야 되는데 돈 좀.”

자식이 엄마, 아빠, 할 때는 항상 돈 이야기지요. 다른 말로 오늘 본문대로 하면 거짓된 것이 거짓된 것 외에는 내놓을 것이 없어요. 무엇이 거짓이냐? 내가 생존하려는 것이 거짓인 거예요. 내가 생존하기 위해서 내가 있다는 거예요. 이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요? “엄마, 내 행동은 내가 책임질 게.” “너 책임 못 져.” 내 행동은 내가 책임질게, 하는 그것이 바로 악마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버렸어요. 그래서 악마가 들어가는 그 불 세계에 같이 딸려 들어가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동행하시는 주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면 새사람은 뭐냐? 이스라엘 정체성이 지금 나의 정체성이 된 것, 그게 말씀 위주로 말씀을 드러내기 위해서 여호와의 말씀, 여호와의 하나님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선택된 민족, 그것을 가지고 교회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교회라고 이야기하고 그 둘 사이에서는 우리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찾는 것은 뭐냐?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어떻게 하느냐? 우리 자아를 놔두고 자아를 그 표면을 벗겨버려요. 그냥 벗기는 것이 아니고 일단 사랑을 주고 벗깁니다. 그 사랑이 뭐냐? 유월절의 피지요.

쉽게 말해서 우리한테 피 발라 놓고 우리 자체를 껍데기를 벗겨버리지요. 우리의 표면, 자아 표면을 벗겨버리면 그 안에 나에게 가려서 몰랐던 주님의 도와주심이, 살게 해주심이 나오는 거예요. 아까 불렀던 찬송가 307장, 조금 전에 불렀잖아요.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농사하지 않으며 곡식 모아 곳간 안에 들인 것이 없어도 세상 주관하는 주님 새를 먹여주시니 너희 먹을 것을 위해 근심할 것 무어냐~”라는 이 마태복음 6장의 말씀이 이게 우리 안에 성령이 있는 사람은 들어 있는데 이게 어디에 가려져 있느냐 하면, 나는 살아야 돼, 나는 남에게 안 져야 돼, 나는 인간답게 되어야 돼, 나는 남에게 우세 안 당해야 돼, 이렇게 표면이 꽉 눌려 있거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피를 바르고 피 바른 그 부위를 뜯어 내버려요. 뜯어내니까 공중 나는 새를 보라~ 그런 찬송의 가사가 튀어나와요. 마태복음 6장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우리 안에는 말씀으로 된 부속품이 들어 있는데 이 피부가 어떤 피부냐 하면, 이 피부가 마귀가 입혀준 자아라는 역사를 가진 피부가 내 온몸을 평생을 덮고 있는 거예요.

나는 기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자 이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옛사람이 뭐냐를 알아야 돼요. 옛사람이 뭐냐? 성경에 보면 옛사람의 특징은 강하다, 가 특징이에요. 강한 것 힘을 자랑질 하는 게 옛사람이에요. 저는 안 그런데, 하지 마세요. 성경 자체가 그래요. 가인이 그랬고 가인의 후예가 그랬습니다.

창세기 4장 23, 24절에 보면 가인의 7대손 라멕이 무엇을 자랑질 하는가를 보세요.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나 건드리지 마라. 왜? 나는 강하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여러 종교 가운데서 힌두교라는 종교가 있어요. 인도의 힌두교. 거기는 다신교라 해서 신들이 굉장히 많아요. 중국에 있는 인격화된 신이라든지 성경에서는 그걸 우상이라 하지요. 그 신의 특징이 있는데 그 특징이 강하다는 거예요. 강한 것을 어떻게 표현했느냐? 시바신이라는 게 있는데 그 신은 눈동자가 세 개예요. 다 본다는 그 말입니다.

보통 절 지을 때 문을 세 개 짓습니다. 일주문, 다음에 천왕문, 그다음에 불이문, 이렇게 짓는데 일주문이라는 것은 마음을 하나로 한다는 것이고, 불이문은 2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일주문과 불이문 사이에 천왕문이 있는데 거기에 4대 천왕이 있어요. 여러분, 수학여행 갔을 때 괴물같이 생긴 덩치 큰 것 봤지요. 강호동처럼 덩치 커다란 것.

그 특징이 뭐냐? 눈을 부라리고 있지요. 힘이 있다, 강하다 그 말입니다. 중국 순나라의 어떤 부인은 눈동자가 두 개라고 하고요. 그리고 힌두교 신들의 특징을 보면 팔이 네 개예요. 서양의 그리핀이라는 신화적 동물이 있어요. 몸통은 사자인데 얼굴은 독수리 날개도 독수리 날개를 갖고 있습니다.

신기한 게 다니엘 7장 4절에 그 짐승이 나와 있습니다. 바다에서 짐승이 나오는데 그 특징은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첫째, 둘째, 셋째, 넷째 짐승이 다니엘 7장에 계속 나옵니다.

이 말은 뭐냐? 첫째 짐승보다 둘째 짐승이 힘이 세서 이겼고, 둘째 짐승보다 힘이 센 셋째 짐승이 이겼고, 넷째 짐승은 첫째 둘째 셋째 짐승보다 힘이 세다. 결국 그 힘이 센 짐승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마지막 때다. 이게 다니엘 7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예언의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특징은, 다시 말해서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육신, 나라는 이름을 붙인 육신, 멀쩡하게 나 위주로 살아가는 근거가 되고 토대가 되는 이 육신, 아프면 아프고 안 아프면 안 아픈 이 육신, 이 육신의 특징은 에너지를 모으는 거예요. 힘을 모으는 겁니다. 경제적 힘, 육체적 힘, 권력의 힘, 쪽수의 힘, 숫자 많은 그 힘.

거기서 나온 정신 그게 과학정신이에요. 철학정신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아무리 고상하고 훌륭하십니다, 옷 잘 어울리십니다, 해도 결국 뭐냐 하면, ‘한번 붙어볼까? 누가 예쁜지 한번 붙어 봐?’ 만났다 하면 ‘붙어봐?’ 만났다 하면 누가 누가 잘났나 시비 거는 것, 평생 그 짓 하다 세월 다 가는 겁니다.

인생이라는 게 여러분, 부모가 그랬고 내가 그랬고 여러분 형제가 그랬고 여러분 자식들이 그런 거예요. 여러분 자식들이 남에게 꿀릴까 싶어서 노심초사 잠도 못 자고 있잖아요. 힘 강한 것, 숫자 많은 것, 쪽수 많은 것, 그것이 하나님께 복 받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성당에서 그렇게 가르쳐요. 모든 종교가 다 마찬가지고요.

저건 마귀야, 하고 여러분 그런 생각 해본 적이 있습니까? 매년 4월 되면 목사가 수행원 대동해서, 통역관까지는 필요 없지만 하얀 저고리 까만 한복 치마 입은 여전도사도 대동하고 구역장과 직업 없는 사람들 데려다가 대심방 죽 하잖아요.

그럴 때 목사가 신명기 28장 딱 펼칩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아니면 잠언서 3장 펼쳐서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읽고 이 가정에 이런 축복이 있을지어다, 할 때 “너는 마귀야!”라고 해본 적이 있습니까? “네가 바로 마귀야. 네가 탈 한 번 벗어봐. 네 속에 마귀 있어.”

네가 왜 그 짓 하는데? 교회 키우려고 하는 거예요. 교회 왜 키우는데? 교회를 키워야 자기가 주의 사자인 것을 본인이 확인하고 증명하고 싶다는 거예요. 내가 주의 사자고 주의 목자라는 것을 본인이 자기 정체성을 증명하고 싶어서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이슬람 남자가 나는 천국 간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자보고 히잡 쓰라고 하는 그것과 똑같은 거예요. “너는 내 유혹거리야. 사탄아 물러가라.” 그런 식으로 그러면 여자는 죽여버리지 왜 살려둡니까? 내 몸 챙기면 된다는 겁니다. 그것 챙겨서 뭐할건데요? 자기 몸 챙겨서 뭐할건데요?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사사기 7장 2, 3절 보게 되면 미디안 13만 5천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기드온이 대항하려고 군대를 모집합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고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명이요 남은 자가 일만명이었더라.”

그러니까 떠나간 사람이 2만 2천 명이니까 3만 2천 명이 온 거예요. 그런데 3만 2천 명을 보고 주님께서 “더 모아라. 더 끌어모아서 쪽수를 채워라.” 하지 않고 “내 힘으로 적들을 쫒아냈다, 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네 적이야.”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내 적이 되는거야. 내 적이 안 되려면 조금이라도 내 힘으로 인생 이만큼 살아왔다는 것을 다 삭제해버려라.” 하는 거지요.

그게 아까 이야기한 나라는 표면에 예수님의 피, 하나님의 의인 되게 하는 피만 묻히고 나머지는 다 껍질을 뜯어내는 거예요. “너라는 옛사람은 힘으로 지탱하는 이게 바로 옛사람이야. 힘을 끌어모아서 그 힘으로 천국 가고 힘으로 복 받으려는 그 짓이 바로 옛사람이야.”라고 뜯어내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3백 명, 이미 죽은 자에요. 3백 명은 스스로 있다고 볼 수 없어요. 없는 거예요. 없는 존재, 유령 같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거울 앞에 비추는 내가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그러니 이런 말씀이 있는 교인들마저 다 내보내지요.

이렇게 정리합시다. 거짓된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처럼 거짓말을 합시다. 거짓은 거짓이 개입되어야 그게 진실이에요. 기생 라합이 거짓말했잖아요.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죽였잖아요. 야곱은 거짓말했잖아요. 이 거짓된 세상에서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입에서 거짓말만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거짓말로 들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만 할 수밖에 없어요. 다시 말해서 지금 내가 하는 것은 내 안의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이게 남들 보기에 얼마나 거짓말로 느끼겠습니까 마태복음 10장 20절의 말씀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이것은 네가 아니고 네 안의 성령께서 하신 것이다.

이게 얼마나 거짓말이겠어요? 누가 믿겠어요? 왜 우리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 우리는 하나의 샘터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뭐가? 저주와 축복이 나오는 샘터, 아브라함처럼 야곱처럼 이삭처럼. 신약에서는 우리는 내가 사마리아 여인처럼 하나의 샘물이 나오는 샘터가 되게 하는 거예요. 샘물의 뚜껑이 떨어져 나가야 돼요. 뚜껑이 뭐냐? 자아라는 뚜껑, 나는 이미 죽었다, 하고 그 뚜껑이 떨어져 나가는 거예요.

칠성 사이다처럼 팍! 하고 떨어져 나가면 탄산수 확 올라오는 것처럼 나라는 뚜껑, 나는 이미 죽었어, 하는 순간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천국, 어떻게 해도 나만 사랑 되지 때려죽여도 주님이 사랑 되지 않는 자 지옥, 그렇게 판정 나는 겁니다.

끝으로 성경 말씀 읽어드리면서 마치겠습니다. 사도바울은, 성령 받은 사도바울은 기도할 때 교인들을 향하여 뭘 기도했는가? 에베소서 3장에 사도바울의 기도가 나옵니다. 18, 19절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빈터가 되고 그 안에 주님의 사랑, 어화둥둥 내 사랑, 이리 보아도 내 사랑 저리 보아도 내 사랑, 아장아장 이리로 걸어오라, 뒤태를 보자 우째 그리 사랑스러운지, 주님의 사랑 나의 존재로 훼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사람 보기에 거짓말 외에는 나올 것이 없음을 도리어 찬미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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