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6장 9절 (시작점) 210420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6장 6절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안식일 날 안식일을 두고 예수님과 바리새인이 대결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인간으로 보지요. ‘인간’. 예수님을 바리새인은 뭐로 보느냐 하면은 역시 인간으로 보는 겁니다. 그럴 때 인간에게는 자기 인간의 본인의 의견이 있고 예수님에게도 예수님의 의견이 있다라고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의견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 6장 5절에 보면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러니까 이거는 안식일이니까 율법입니다. 율법이 인격화된 거에요.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니까 움직이는 인물화된 율법, 이것은 바리새인들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거에요.
법이 있으면 내가 그걸 지키는 대상이 되겠지요. 법은. 우리나라 헌법은 국민들이 지키면 되잖아요. 판사가 그 헌법에 준해서 재판하는거고요. 그런데 우리나라에 김헌법이라는 사람이 등장했다. 김헌법. 법 자체가 그 사람의 인물화 되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지킬 필요가 없어요. 본인이 법이거든요. 본인이 살아있는 법, 움직이는 법이 된단 말이죠.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당신의 의견은 어떤가 이렇게 딱 지켜봤다 했잖아요. 오늘 아까 읽었던 본문에 안식일에 우리는 이렇게 지키는데 예수라는 그 인간은 어떻게 지키는가 봤잖아요. 결국은 율법이 인격화 되고 안식일이 인격화 되게 되면 뭐가 없느냐 하면은 인간에게는 안식일이 없는 거에요.
인간은 관심 갖지 말아야 될 것에 관심을 가진 게 바리새인들의 이게 잘못된 거에요. 인간이 왜 법에 관심이 있지요? 누구 좋으라고? 뭐 때문에? 뭐 때문에 관심 있지요? 대구도 마찬가지고 서울도 마찬가지고 지금은 계도기간이지만 큰 도로에서는 시속 50, 그리고 작은 도로에서는 시속 30 한다. 그걸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법이라고 하지요. 법. 그 법을 준 것은 지켜라. 시속 100으로 하지 말고 70 하지 말고 큰 길에 시속 50km 한 거죠.
그러면 인간들은 인간들 자신을 위해서 법을 만들잖아요. 법이 있지요. 법을 지키게 되면 누가 그 의인이 되고 잘난 사람이 되느냐 하면은 법 지키는 사람이 되겠지요. 법 지키는 사람, 법 위반하는 사람.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가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뭐를 자꾸 요청하느냐 하면은 자꾸 법을 요청하는 거에요. 법을. 법을 요청해가지고 나 괜찮은 사람이고 법대로 살았기 때문에 나는 너한테 지적받을 대상이 아니라고 스스로 자기를 옳다고 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 따르는 제자들의 운명은 이들 바리새인 운명과 달라요. 한번 적어 볼게요. 중요한 것은 빨간 것으로 적습니다. 성도란 자기설득을 반대하는 자에요. 성도란 ‘자기설득을 반대하는 자’. 이것은 하나의 광기입니다. 이것은 자기설득이니까 달리 이야기해서 성도란 자기증명을 초과하는 존재에요. ‘자기증명을 초과하는 존재’.
하나님께서 법을 주신 것은 너는 법 같은 것 신경 쓰지 말라고 법을 준거에요. 법은 예수님이 알아서 할 거니까 너는 안식일이 언제고 뭐 십일조가 먼저고 그런 것은 네가 신경 뚝! 신경 쓰지 마. 신경 쓰지 말란 말이죠. 신경 쓰지 마세요.
아버지 어머니가 사업한다고 둘이 골머리 앉아가지고 원가 계산을 어떻게 하고 이렇게 할 때 세 살 네 살 먹은 애가 잠 안자고 10시 넘어서 엄마 아빠 회의하는데 옆에 와가지고 엄마 김치 국산 빼고 중국산 수입해가지고 그렇게 합시다 한다면 그 부모가 그 아이한테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 저리 가 잠이나 자 끼어들지 말고. 여기 네가 낄 자리가 아닌데 왜 껴.
법은 인격화 될 때 완성되는 거에요. 네가 법을 지키는 사람은 법에 관심 둘 필요 없어요. 법을 지킬려는 사람은 애초부터 법은 그 사람과 괴리되라고 단절되라고 주신 법이에요. 아까운 성경공부 시간에 동영상 길게는 안할게요. 짧게만 할게요. 2분 되는데 한번 들어보시고 여러분들이 더 듣고 싶은 표정을 지으시면 더 틀겠습니다.
(동영상: 하나님 새해에도 날마나 큐티할래요. 말씀이신 예수님과 매일매일 함께 하고 싶어요.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큐티하게 해주심도 기도하게 해주심도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사모님도 성령의 충만함이 임하시게 해주셔서 감사하고 목사님 사모님 아프시지 않으시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 우리 교회가 정말 이미 공산주의 나라로 됐는데 하나님이 되지 않도록 역사해주시옵소서. 막아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 나라 우리 교회가 정말 위험 가운데 있는데 하나님이 그 중에서도 지켜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그만할게요. 아까운 성경시간에 나중에 트럼프 이야기까지 나와요. 트럼프. 트럼프가 위험에 처해있다고 나오는데 지금 한국이 공산주의가 됐는데. 지금 애가 몇 살 됐겠어요? 한 5살쯤 됐는데 지금 교회 목사님 기도한 걸 그대로 흉내내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이 동영상을 보고 이름 지었어요. 기도 영재. 기도 영재급이에요. 이 아이가. 지금 시간 아까워서 다 안틀었거든요.
지금 이 어린애가 하는 것이 어린 아이기 때문에 참 그 내용도 모르고 철딱서니 없다 하는데 바리새인들은 뭐에요? 안식일을 지키니 안 지키니. 너나 잘하세요. 너나. 왜 법에 대해서 관심을 합니까? 왜 법에 관심을 두더냐 이 말이죠. 그것은 뭐를 예측하느냐 하면은 법을 지켰던 안식일을 지킨 ‘나’가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이라고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알고 있는 겁니다.
법을 지킨, 십일조나 안식을 법을 지킨 그 모습이 그 인격이 하나님이 법을 줄 때부터 원했던 그러한 인물상을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하고 그들은 법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던 거에요. 아까 어린 아이 기도한 것 봤지요? 한국이 공산중의 사회가 되가지고 지켜주시옵소서!!! 이렇게 하잖아요. 결국은 이건 뭐냐 하면은 오늘 강의 가운데 첫 번째 진짜 중요한 게 등장하는 시점이 되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시작점을 모르고 있는 거에요. 시작점을 모르고 그냥 경과 또는 과정에 인간이 뛰어드는 겁니다. 시작점, 율법이 어디로부터 시작되고 어디로 마감되는지 전혀 몰라요. 시작점을 놓치고 있으면서 끝점을 가겠다는 거에요. 율법의 완성된 끝점을 한번 가겠다는 겁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줄타기 할 때 줄을 쳐다보는 것하고 줄 위에 처음부터 starting point부터 끝까지 줄을 타는 것하고 그것을 관람하는 것하고 다르겠지요. 나도 줄을 한번 타봤으면 좋겠다고 기대하고 이렇게 하면 아마 나는 줄 타는 사람 될 거라고 예측하고. 이 예측이라는 것이 이게 얼마나 악마적이에요. 예측한다는 것.
인생이 어떤 사람이 여러분보고 참 요새 사는 게 힘들다 고민거리가 있다라고 이야기하시거든요. 딴소리 다 듣지 말고요 하나만 해석하면 돼요. 너 지금 예측하고 있다. 예측한다는 것은 시작점을 본인의 기대를 starting point로 잡는 거에요. 본인이. 나 지금 이런데 너무 이렇게 내가 뭘 하게 되면 안식일을 지키면 어떤 내가 기대하는 그 예측, 율법의 예측은 딱 두 가지 거든요. 하나는 축복 계열로 빠지느냐 저주 계열로 빠지느냐. 딱 율법은 두 가지잖아요.
그 저주 받은 상태와 복 받는 상태를 인간은 미리 예측하는 거에요. 왜 예측하느냐? 예측해서 자기 행위를 조절할라고 하는 겁니다. 조정하는 것. 조절하는 것. 내가 지금 나쁜 짓하면 나중에 저주 받기 때문에 저주 안 받을려면 적당히 너무 악하지 말고 착한 일도 섞어 넣어가며 해야겠다라고 미리 예측을 생각하면서 지금 자기 행동 조절에 들어가는 거에요.
그러면 항상 시작점이 어떻게 됩니까? 시작점은 본인이에요. 본인이고 그 주어진 결과도 율법이라는 것을 터치하고 율법을 접촉해서 그 얻어낸 모든 성과는 누가 가져간다? 몽땅? 율법 지킨 내가 가져가는 거에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자기가 율법 지켜서 안식일 지켜서 복을 얻어냈다면 그 혜택은 누구 덕분입니까? start도 자기죠. 자기 예측도 자기가 했지요. 그럼 모든 혜택자,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모든 혜택자는 누가 됩니까? 본인이죠.
그렇다면 성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이 원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은 혜택준 자에게 고마워하고 혜택준 자만을 자랑하고 그 분에의 증인이 되는 것. 이게 하나님이 찾는 사람이에요. 성경을 통해서. 주님이 주신 혜택을 생각하게 되면 내 자랑으로 돌아설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주님이 주신 혜택을 생각하게 되면 내 자랑할 게 없지요.
그럼 모든 영광은 누가 받아야 합당합니까? 주님이 받아야 합당하지요. 이게 성경적인데 이게 어려운 겁니까? 이게 굉장히 어려운 논리에요? 성경 어려운 논리가 아니지요? 누구한테만 어렵지 않느냐 하면은 혜택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한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겁니다. 혜택주신 분에게 고맙다고 그 분의 이름을 영광 돌리며 내 자랑하지 않고 그 분만 자랑하는 것. 참 쉬워요. 정말 쉬워요.
교회 목회하는 목사님이 설교하면서 여러분들은 하루하루 주님의 도움 받고 삽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도와주는 분은 주님이 여러분을 도와줍니다. 구원받는 것부터 해서 하루 일과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나한테 감사하지 말고 우리가 감사할 분은 따로 있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 인생을 살면서 해야 될 할 일이 내게 있다는 것, 내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인생을 편하고 기쁘게 만듭니까.
그렇게 설교하게 되면 사람들은 성령 받은 사람들은 기분 좋아할 거에요. 아 정말 그냥 나는 지금껏 나 잘 되기만 예측하면서 살아왔는데 이 예측한다는 것이 결국 나 과시할려고 하는 짓거리에 불과하구나라고 생각할 거에요. 보통 조그마한 개척 교회에서는 다들 감사하고 있어요. 그러나 역사가 오래된, 역사 나옵니다. 역사가 오늘 강의와 관련되어 있어요.
역사가 오래된 교회, 아주 색깔도 이렇게 좀 낡은 것 같으면서 고딕체 벽돌 건물 있잖아요. 옛날 30,40년 전에 부흥회해서 지은 교회들 보세요. 딱 태가 나지요. 태가 난다고요. 가끔 담쟁이 막 올라가 있고. 거기 가보면 냄새 자체가 오래된 냄새나는 그 교회. 거기에 누가 있겠어요? 거기에는 2대째 3대째 누가 있겠습니까? 장로아들의 장로하고 또 장로하는 그 장로들이 있겠지요. 목사님이 와서 그런 이야기하게 되면 거기에 처음 신자들은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겠지요.
그런데 그 장로들은 뭐냐 하면은 이것 생각해요. 목사님이 그렇게 설교해가지고 이 교회는 누가 키울 건데? 이 소는 누가 키울 거야? 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해서 어느 세월에 이 예배당 언제 숫자 다 채울 건데 라고 이야기하겠지요. 역사와 전통 오래된 터줏대감 같은 장로들은. 교회 부흥 왜 신경 씁니까? 그런 식으로 설교하고 그런 식으로 기도하니까 아까 어린 아이 봤지요. 주시옵소서 하는 것 봤지요?
제가 시간 아까워서 못 들려주는데 그게 감사하는 모습입니까? 떼를 쓰는 모습이에요? 이게 감사하는 모습입니까? 편한 모습이에요? 주~~~시옵소서가 이게 편한 모습이에요? 이게? 그냥 주신 혜택에 대해서 저 같은 것 딱 신경 안 써도 돼요. 나 같은 건 신경 딱히 안 쓰셔도 된다는 그런 편안함이에요? 안 그러면 이건 딱 뜯어내고자 하는 강렬함이에요? 어느 쪽입니까? 어린 아이 기도가. 우리나라 공산주의 되면 되는 거지 할 수 없지 뭐. 어쩌라고.
그 오래된 장로들은 본인을 설득하고 싶은 거에요. 본인이. 이 설득이라는 말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하루하루 살면서 내가 나를 증명하고 싶은 거에요. 아까 뭐라고 그랬습니까? 자기 증명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 초과하는 것. 자기 증명을 뛰어 넘어야 돼요. 자기 증명? 그딴 거 왜 필요한데? 내 증명을 왜 필요해? 이렇게 되야 되잖아요. 이렇게.
내가 고마워할 자에게 고마워하면서 남은 인생 보내면 되잖아요. 편하게. 교인 수 몇 명이에요?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헌금 얼마 나옵니까? 신경 쓰지 말고. 내 인생 자랑질할려고 이 땅에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고맙습니다. 아이고 아무것도 아닌데 이런 혜택까지 주니 영생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이렇게 살면 안 되겠어요?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이게?
왜 자기 증명할려고 해요. 자기 증명. 나 이렇게 괜찮은 존재라고 왜 그걸 왜 증명해야 됩니까? 그게 한 두 사람이 아니에요. 그게 바리새인 집단이에요. 우리는 안식일을 이렇게 지켰다. 지켰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율법 지킨 사람으로서 우리는 의인이 될 거라고 나는 증명하고 싶어. 뭘로? 안식일을 우리가 계속 이 수준을 유지하면서 지켜나가기 때문에 우리 유대 민족은 하나님께서 언젠가 약속하신 메시야를 보내실 거야. 왜? 워낙 착하니까. 워낙 의로운 민족이니까.
오늘 예수님께 신랄하고 예수님께 고소하려는 이 바리새인 이 집단이나 역사가 꽤나 오래 됐다는 그 한국교회 교인들의 모습이나 별반 다를 점이 없지요. 그러니까 성경 말씀이라는 것은요. 성경 말씀은 이렇게 원어 끄집어내고 해석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이 성경 말씀대로 지금 우리 한국사회 전 세계 지구의 모든 것이 성경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어요. 그 갈등과 그 대립이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전체가 대립이에요. 갈등입니다. 투쟁이고 싸움 전쟁터에요. 워낙 여러분들이 성품이 온화해가지고 싸우기 싫어해서 기껏 싸워봐야 주차문제 때문에. 주차문제 빼놓고 별로 싸울 거 없지요. 주님께서 하시는 내가 다 이루었기 때문에 네가 네 안에서 너와 너 자신의 갈등을 일으킬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거에요. 예수님 내가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여러분 아시겠지요? 아시면 끝. 아시면 틀린 겁니다.
제가 한번 써볼게요. 이게 무슨 말인지 한번 보세요. 기도는 양이 있고 질이 있다. 기도의 양은 바깥(외곽)에 있고 기도의 질은 내부에 타인에게 있다. 이게 무슨 말이게요? 이 아이 동영상 한 번 더 틀고 싶지만 참습니다. 봤으니까. 아까 아이가 기도 빡시게 했지요? 주여!! 믿씁니다!! 아이가 기도 2분 45초 했어요. 동영상 다 안 틀었지만. 한 30초만 틀었지만. 2분 45초라고요. 우리 교회 남자 집사님 기도보다 더 길어요.
바깥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얼마나 간절하게 보이고 얼마나 길게 하고 오래하고 그것도 힘주어 기도하는지를 바깥에서 다 보이지요? 그게 바로 허례의식 양입니다. 양. 분량, 양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면 그러면 질적으로 충실한 기도는 내 기도 내부에서 이루어지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하겠지요. 내부는 남이에요. 남이 들어와 있어요. 주님이 들어가 있어요. 주님이.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항상 예수님 말씀처럼 바깥쪽에 얼마나 고상하고 거룩하고 기도다운 기도를 하고 있는지를 외향적으로 외부적으로 보이는 식으로만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기도뿐만 아니고 모든 율법, 안식일을 지키는 것 모든 말씀 지키는 것이 행위는 항상 바깥에서 나갈 때는 그것은 질로 간주되는 게 아니고 양으로 간주되는 거에요.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은 내가 행할 수 있도록 율법을 지키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행할 수 있도록. 표정들이 좀 이상하네. 무슨 소리야 하는 표정인데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은 법이라는 것을 지키게 되게 되면 법이 살아나는 게 아니고 그걸 지킨 사람의 행함이 드러난단 말이죠. 바깥으로. 우와 저걸 지켰어? 저걸 준수했단 말인가? 안식일에 가게 문을 닫고 교회 나왔단 말인가? 이게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이게.
그렇다면 아까 강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뭐를 요청한다? 법을 요청하지요. 모든 인간은. 자식이 자기 방에 들어가서 공부를 한다. 공부를 할 때 엄마가 문을 확 열었어요. 야 너 뭐하고 있었어? 또 게임했지? 하면 아이가 아니야 공부했어. 공부했다는 거에요. 공부했다는 거에요.
자, 게임하는 것은 나쁜 짓이 되고 공부하는 것은 좋은 짓이 되지요. 그러면 나쁜 일 좋은 일 다 잘라내 보세요. 뭐가 남아요? 이게 남아요. 나는 뭔가를 행할 수 있는 존재, 이게 남아요. 나는 뭔가를 행할 수 있는 존재. 더 어렵게 이야기해서 인간은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존재. 인간은 뭐라도 행할 수 있는 존재. 의미 있는 것을 행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을 본인이 증명하는 식으로 계속 행함, 행함, 행동, 행동에 나서게 되는 그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게 인간이에요.
안식일 율법 주니까 좋다고 지키는 거에요. 좋다고. 그런데 밑에 봅시다. 기도를 할 때에 질적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이게 중요한데요. 내부에 안에서 내가 성령으로 기도합니다. 아까 주여 믿습니다. 성령으로 기도합니다. 이게 성령으로 기도하는 겁니까? 아니지요. 바깥의 뭐냐 하면은 타인이 들어와버려요. 타인이 들어와버리면 진짜 제대로 된 질적인 기도를 할 수 있는 분은 타인이 들어온 순간 나는 아니다가 되는 거에요. 나는 바깥에 나타나는 허풍선이 되버려요. ‘허풍선’.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려요. 이게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기도의 질적인 기도는 누가 한다? 성령이 하는 거에요. 성령이 어디 안에까지 들어와? 성도 안까지 들어와서 성령이 기도하는 거에요. 이게 질적인 거에요. 그러면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는 바깥으로 빠지잖아요. 바깥으로 빠지겠지요. 우리는 외향적으로 우리의 기도했다를 기억하니까요.
항상 인간은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거에요. 그런데 성도란 뭡니까? 성도는 자기증명을 초과하지요. 자기증명을 초과한다는 말은 나는 이렇다가 성도한테는 이거는 치워버리는 거에요. 네가 어떻다가 아니라 네 안에 계시는 분 이야기해보란 말이죠. 네 안에 너의 타인으로 계신 분이 어떤 타인으로 있느냐를 지금 하나님께서는 요청하는 거에요.
그러면 아까 제가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내 안에 계신 분은 나한테 혜택을 주신 분이에요. 도움을 주신 분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자기 행함을 자랑할 수가 없지요. 자기 행함을 자랑할 수 없는 거에요. 자, 중요한 것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들아 네가 왜 건방스럽게 법에 관심을 왜 갖느냐 하는 거에요. 법에 대해서.
법에 관심 안 가질려고 해도 관심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평소에 내 잘남을 내가 타인에게 알리고 싶고 증명하고 싶고 내부적으로 나는 내가 잘났다는 것을 내가 설득하고 싶은 거에요. 그런데 성도는 뭐라고 했습니까? 성도란 자기설득을 어떻게 한다고요? 자기설득을 반대하는 거에요. 반대. 희한한 인간이에요. 진짜 이상한 인간이에요. 자기설득을 반대하는 거에요.
나는 이렇게 해서 나는 신자 맞다라는 그 설득을 내가 혐오하는 겁니다. “미친 인간아 이상한 소리하지 마라.” 안 그러면 “마귀야 너 가만히 있어.” “너는 이래서 성도 맞잖아.” “가만 있어. 가만 있으라니까. 언제 그렇다 하더냐.”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법에 관심을 두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가 법에 시작점이 우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시작점을 놓쳐버리면 전부 다 이게 엉터리가 됩니다. 시작점을 놓쳐버리면.
그러면 안식일을 왜 줬는가? 제가 호박을 하나 그려볼게요. 호박. 호박이 있단 말이죠. 호박을 자르지 않고 호박죽을 끓이고 싶다 할 때는 어떻게 하느냐 여기 못으로 하든지 뭘로 하든지 여기 구멍을 딱 내야 돼요. 구멍을 딱 내는 거에요. 구멍을 내고 강력한 흡입력 가진 가스 빨대 꽂아가지고 속을 뽑아내야겠지요. 옛날 이집트 미이라 할 때에 코로 모든 두뇌 세포를 전부 다 뽑아낸다고 하거든요. 뽑아내지요.
그러면 이 호박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호박은 매개체가 되는 거에요. 매개체. 율법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다룹니다. 예수님께서 구멍을 뚫고 들어와버려요. 그럼 뭐가 되느냐 하면은 스며든다에요. 그리고 구멍 뚫고 예수님 빠져나가고 난 뒤에 자기 백성을 빼내어버리면 이건 뭐가 되느냐 빠져나옴이 되지요. ‘빠져나옴’. 그러면 호박은 껍데기만 남지요. 이게 율법이에요. 이게 율법.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죠. 구멍을 뚫고 들어온 거에요. 예수님만 율법을 다룰 수 있으니까.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옷을 입고 들어온 거에요. 들어와가지고 여기서 자기 백성을 죄 있는 백성을 의롭다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가지고 여기 구멍을 통해서 자기도 빠져나오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성령을 보내서 이 안에서 자기 백성을 뽑아내는 거에요. 그게 어디 있느냐 하면은 여기 있어요.
그게 누가복음 6장 6절에 보면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사람 있었지요. 그럼 호박 안에 들었지요. 그다음에 10절에 보면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저가 어떻게 되었어요? 멀쩡하게 되었잖아요. 뽑아낸 거에요. 타인에 의해서 우리는 누구 입장이냐 하면은 손 마른 자의 입장, 환자 입장이 되자 이 말이죠.
지금 병자의 입장에서는 병이 낫느냐 안 낫느냐가 중요하겠지요. 그러나 바리새인 입장은 어떻게 됩니까? 안식일 지키냐 안 지키느냐가 중요하겠지요. 주님 보시기에 둘 다 문제가 있어요. 왜냐 하면은 안식일에 신경을 쓰지 말아야 될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의 주인도 아니면서 자기들이 안식일을 지킨다는 엉뚱한 이야기하고 있지요.
그리고 환자는 관심사가 뭐냐 하면은 내 몸이 건강하냐 계속 아프냐 지금 관심사가 거기에 있지요. 둘 다 거기에 있다고요. 그러니까 아픈 사람은 평소에 뭘 예측하겠습니까? 내 몸이 낫기를 예측하고 바리새인들은 뭘 예측하느냐 하면은 내가 안식일을 지켜서 하나님 보시기에 날 무시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참 의롭다고 할 그걸 예측하는 거에요. 둘 다. 백날 예측하면 뭐합니까? 호박 안에 들어있는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호박 안에 있는 사람을 어느 쪽에? 율법의 완성, 안식일의 완성 쪽으로 뽑아내어버리는 거에요. 그럼 이 사람은 혜택을 입었지요? 누구의 혜택을 입었습니까? 주님의 혜택을 입었지요. 주님의 혜택을 입은 이 사람한테 더 이상 내 몸이 건강하냐 안 건강하냐 이것은 문제 거리가 안 되는 거에요.
그리고 이미 그 병 나은 사람에게 안식일을 바리새인들이 본인에게 요구하는 것. 야 어이 병자야 너 안식일 지켰어? 안 지켰어? 를 거기에 대해서 물을 때 추궁할 때 그 병이 나은 사람한테는 그 안식을 신경 씁니까? 신경 안 씁니까? 더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니까요. 이 유사한 이야기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여러분 잘 아시는 요한복음 5장 베데스다 못가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제가 이야기 안 해도 다 아실 거에요. 38년 된 병자.
이 38년 된 병자의 관심사가 뭐냐 하면은 자꾸 자기를 예측하는 거에요. 이 물이 흔들릴 때 제일 선착순 1번으로 뛰어들면 더 이상 이 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기가 더 이상 병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걸 자꾸 예측하는 거에요. 관심사가 누구한테 있습니까? 자기한테 있지요. 자기가 왜 병을 나을려고 합니까? 나는 병든 것이 나한테 적합지 않고 멀쩡한 모습이 나한테 적합하다고 자기 증명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베데스다가 자비의 연못이거든요. 자비의 못이거든요. 호수거든요. 신의 자비를 자기에게 기대를 하는 거에요. 예측하는 거에요. 자기는 움직이지를 못하니까 어떻게 나를 처음에 가가지고 낫게 해달라고 요청했지요. 그동안 38년 된 병자가 왜 1번 타자, 첫째로 못 들어갔는지 알아요? 이거는 제가 지어낸 거니까 그냥 농담으로 아세요. 그게 뭐냐 하면은 39년 된 병자가 있기 때문에. 그냥 개그입니다.
어쨌든 간에 이 사람은 첫 번째로 못 들어갔어요. 그래서 여기서 38년 동안 있는 거에요. 그냥. 원래 회사나 공무원해서 승진해야 되는데 뒤에 온 사람이 앞에 승진해 보세요. 검사들 대부분 뭐 합니까? 사표 딱 던지지요. 변호사하면 되니까 사표 내지요. 기분 나쁘다 이거지요.
그런데 나중에 그 사람에게 관심사는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내가 병 나을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뭐냐? 저 호수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호수에는 법이 있어요. 그게 무슨 법이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만 먼저 들어간 자만 천사의 혜택을 입고 병이 낫고 그 외에는 없는 거에요. 천사가 그 사람에게 혜택주고 천사는 이제 더 나눠줄 그게 없어요.
마치 산불 났을 때 헬리콥터 날아와 가지고 물 찔끔 버리는 게 아니고 한꺼번에 확 버리고 가자 할 때 여기!! 물 다 쏟아서 없어 하는 것처럼 천사가 와서 자비의 혜택을 한꺼번에 다 주고 가버리는 거에요. 그러니까 병든 자가 몸이 아픈 것도 병들었지만 어떤 규칙이라든지 원칙을 계속해서 놓지를 못하는 거에요.
왜냐 하면은 원칙과 규칙은 인간에게 무엇과 결부되어 있는가? 자꾸 오늘 중요한 것 많이 합니다. 이 법이라는 것, 규칙이라는 것, 원칙은 무엇과 결부되어 있느냐 하면은 인간이 행할 수 있다, 인간의 행함과 결부되어 있어요. 인간의 행함과. 인간이 행하지 못할 것을 주님이 주실 리는 없다는 거에요. 인간이 행하지 못할 것을.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는 것은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나는 어떤 법이 와도 행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율법으로 자기를 증명하고 율법으로 자기 이런 능력 있음을 설득하려는 그 법 안에 갇혀 있는 거에요. 그 법 안에. 법은 바깥에서 오지만 이미 그 내부에 법적인 그 시스템이 체제가 이미 거기에 들어있었던 겁니다. 그 체제가 뭐냐 하면은 내가 내가 얼마나 얼마나 훌륭한지를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 것을 나를 증명해줄 어떤 법이 있는 거에요.
그 체제 누가 만들었겠어요? 독자적으로 독보적으로 특이하게 다른 피조물과 달리 나는 독자적으로 살 권한이 있다는 그 맘은 누구 맘이에요? 마귀의 마음이죠. 마귀가 왜 마귀입니까? 천사면서도 마귀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가 뭡니까? 독자적인 것 때문에 그래요.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니고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독자적, 어떤 것을 해도 의미가 자기가 start고 자기가 마감이 되는 거에요. 자기가 시작이고 곧 끝이 되는 거에요.
그런데 성도는 제가 말하는 것은 인간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성도는, 인간은 어떻습니까? 마귀와 똑같이 내가 중요하고 마지막도 내가 중요하다가 인간이잖아요. 그러면 성도는 혜택을 입었잖아요. 그럼 시작도 주님이고 끝도 주님이고. 나는 호박이고. 주께서 주님이 혜택을 줬다는 것을 증명할려면 내가 있어야 되겠네. 혜택을 입은 자가 있어야 되지요.
그래서 요한복음 5장에서 베데스다 이 못가에 있는 병자의 소원은 병 낫는 것이었지만 주님은 그 사람을 뭘로 이용했습니까?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으로서 전환시켜놨어요. 이게 지금도 한결같은 주님의 성령이 오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너의 예측 그거 접어라. 네가 예측한데로 네가 되는 게 아니다. 네가 예측할 권한도 없고 예측할 그러한 입장도 되지 않는다 이 말이죠. 예측을 해도 예수님 내가 하지 네가 하는 게 아니다.
이쯤에서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만은 아까 제가 질적인 기도 안에 우리 안에 누가 들어있다고 했습니까? 나 아닌 타인이 들어오는 거에요. 바로 이 베데스다 못가에 예수님의 자기 인생이 결합된 겁니다.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또는 안식일을 이뤘다고. 안식이란 율법의 인격화. 예수님의 인격화에요. 베데스다 못가라 하는 것이 움직일 때, 여기 동할 때라고 되어있거든요. 5장에 보면 움직일 때 천사가 와서 먼저 한사람에게 혜택을 줬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 자신이 물결로 된 베데스다 못이 아니라 움직이는 베데스다 못, 베데스다 인격체 된 인물이죠. 그것도 첫 번째만 하는 것이 아니고 늘 우리에게 혜택을 주는 거에요. 안식일과 베데스다 못가의 결합은 안식일 + 베데스다는 = 예수님. 요한복음에서 그렇게 설명하고 있지요. 오늘 누가복음이니까 누가복음에서는 뭐냐 하면은 바로 손 마른사람 + 안식일 = 예수님이 되겠지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9절에 나와 있지요. 안식일을 예수님이라고 그 안식일 자리에다가 예수님을 넣어보세요. 예수님은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이 둘 다를 하시는 기준이 되시는 겁니다. 그래서 움직이는 예수님은 움직이는 안식일이니까.
안식일이 세상을 뚫고 들어와서 예수님이 스며들어와서 여기 있는 병자를 바깥의 안식일의 혜택,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켰다는 혜택, 의롭다는 혜택을 손 마른 사람을 낫게 함으로서 보여줬듯이 이것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것이 예수님의 인생의 경로가 되겠지요. 경로. 스며들어와서 뽑아내시는 것. 자기 사람 데리고 나가시는 것. 혜택이 무슨 혜택? 그게 바로 혜택 아닙니까. 그게 혜택이거든요.
그래서 성도라고 하는 것은 누가 찾아와서 혜택 줬고 그 분이 나의 손을 잡고 “나가자 이곳에서.” “어디로 말입니까?” 저주가 없는, 생명이니까. 안식일은 생명을 멸하는 것. 이거 한번 보세요.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이렇게 했지요. 아까 후딱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은 생명을 멸할 권한도 있고 생명을 주실 권한도 있지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여기서 뭘 뽑아내야 되느냐 하면은 율법을 지키고 율법에 그냥 머물러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은 멸망의 대상이다 이렇게 보면 돼요. 그것도 앞에다가 멸망의 대상이니까 여기에 부사 하나 붙입시다. ‘참혹한’. 참혹한 멸망의 대상. 참혹한. 주님이 찾아오시지 않은 사람은 참혹한 멸망의 대상이에요.
왜 참혹한 심판을 받아야 되느냐 하면은 본인을 지금도 햇빛과 공기 혜택을 주고 있는 분에게 합당한 감사와 영광을 못 돌리니까 그것은 참혹한 혜택을 입어놓고도 입을 싹 닦았으니까 그건 참혹한 징벌 받아 마땅하지요. 그렇잖아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고개 끄덕였잖아요. 그렇죠?
그렇다면 자식을 동정하지 마세요. 자식을 동정하는 것은 나를 동정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 동정하지 마세요. 혜택 주신 사람을 죽인 사람들이에요. 이 땅에 생명 주시러 오신 분을 죽인 사람들이에요. 왜 쓸데없이 인간미에 도취되어 가지고 뭐 동정하고 왜 그래요? 아까 기도 한번 쉬는 시간에 한번 들어볼까요? 뭐라고 기도하는지.
자, 이제 여러분들은 실력이 있기 때문에 아! 10분 쉬어야 되겠습니다. 10분 쉬겠습니다.
강남-누가복음 6장 9절 (시작점) 210420b-이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 첫 번째보다 약간 조금 더 난해한 이야기를 해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과 예수님이 차이 중에 하나가 바리새인은 시작점이 ‘자기’라고 했지요. 자기라고 하는 것을 좀 이렇게 그냥 보편적으로 표현하겠습니다. 이걸 유한이라고 해요 ‘유한’. 한계가 있다. 유한적이다. 유한적. 유한적으로 시작해서 무한으로 나갈려는 게 있어요 인간은.
그러면 여기서 조금 차츰차츰 계단 올라가듯이 나아지겠지요. 계단 올라가듯이. 이건 제가 일방적인 것이 아니고 모든 삶이 다 그래요. 하여튼 어떤 행동을 반복하게 되면 그 분야에서 습득이 되고 기술이 습득이 되고 더 발전했다는 느낌을 줘요. 발전을 했다는 느낌을 받게 되게 되면 보다 더 발전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어떤 무한이라는 개념을 의식하면서 나갈 수밖에 없는 거에요.
이걸 수학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한계서수이라고 합니다. ‘한계서수’. 한계서수라고 하는 것은 순서를 정하는 거에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순서를 정해요. 그냥 1,2,3,4는 기수라 하고 서수는 첫 번째 두 번째 이건 서수 연결시키는 겁니다. 서수. 서수 줄을 세우는 거에요. 은행에서 뽑을 때 번호표 뽑듯이 순서를 정하는 겁니다.
이것을 한계서수 순서를 가지고 알파라 하고 무한을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은 알파는 귀속되었다. 한계서수의 그 집합을 빼서 그 알파라고 집합론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이 말은 서수들의 집합의 나의 이 작은 이 서수는 여기 포함되었다라고 하는 겁니다. ‘포함되었다’.
이렇게 수학적으로 이렇게 표현하는 이걸 가지고 사람들은 일반 사람들은 그 뭐 그렇게 고상한 척하면서 그걸 이렇게 쉬운 말로 하지 문자로 표현하느냐라고 하는데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은 실제로 이런 게 있어요. 인간이 앞으로 맞닥뜨릴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 모든 경우의 수가 무한한 경우의 수를 만나요. 무한한 경우의 수를 만난다고요.
성적에서 30등하다가 29등 하다가 나중에 5등하다가 3등으로 마감될 때 이게 한계서수거든요. 공부를 아주 잘해도 1등은 못하고 되는 거에요. 그것도 촌에서 자기 반에서. 자기 반에서 3등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서울에 공부 잘하는데 가면 몇 등 하겠어요? 전국 석차는 몇 등 하겠어요. 2645등하겠지요. 그렇죠?
그러면 자기 촌에서 동네에서는 3등하다가 여기는 어떻게 됩니까? 여기가 더 크지요. 이 숫자가 더 크잖아요. 그게 귀속된다 이 말입니다. ‘귀속된다’. 그래서 이 사람이 나는 공부는 안 되겠어. 나는 그림을 그려야 되겠어. 그림 그리다 보니까 자기 읍내에서는 꽤나 그림을 잘 그려가지고 맨날 상장이 도배를 하듯 붙여놨어요. 그런데 어느 봄날에 전국 학생 실기사생대회 들어갔는데 예선탈락이다.
무한에 접근할 수 있는 이유가 한 가지가 아니고 인간이 맞이할 수 있는 무한의 경우가 있는 거에요. 무한의 경우가 있다 이 말이죠. 자기뿐만 아니고 자기 자식이라든지 딸이나 아들이 당하는 경우도 자기가 당하는 경우고. 그래서 이걸 하나로 퉁 치자 이 말이죠.
뭐냐 하면은 어떤 자기의 그 더 나아질려는 무한으로 나아질려는 모든 서수는 전체 서수보다 항상 모자라다. 작다 이 말입니다. 그런 뜻이에요. 앞으로 어떤 경우도. 앞으로 이 사람이 나중에 그림 안 그리고 낚시하러 가면 그 낚시 가가지고 나는 이번에 25cm잡았다 이러고 자랑질하고 있는데 서울에 이덕화는 40cm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인간은 어떤 무한에 직면했을 때 두려움을 느끼고 그 무한을 돌파하기 위해서 어떤 시도도 다 합니다. 무엇이든지 물어보살. 이 보살이거든요. 보살. 서장훈이 여장하고 나오는 보살. 프로그램이 있어요. 무엇이든지 물어보살. 이수근하고 둘이 앉아가지고 하는 보살 흉내내면서 말 탁탁 까면서 60 밑으로는 다 말 깐다고 하면서 상담하는 거에요.
이 말이 결국 제가 말하고 싶은 이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은 이겁니다. 상담가 예수님을 기대하는 거에요. 상담가. 내 인생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완전 부채도사. 예수를 부채도사로 보는 거에요. 잘되겠다!! 숭구리당당 숭당당 해가지고. 그러니까 모든 것을 그 무한이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나왔다는 말이에요? 이 이야기가. 항상 유한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에요.
그런데 주님의 뜻은 뭐냐 하면은 이겁니다. 이 말이 어려운데요. 유한은 무한의 특수한 사례.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사실은 주님이 자신이 하고자 한 일을 위하여 특수하게 벌어진 거에요. 이 특수한 사례다라는 이말, 이 말도 어렵지요? 더 쉽게 할려면 더 확실하게 할려면 특수한 사례 같은 말은 제한 당한 사례. 이게 더 정확합니다.
네 인생은 그렇게 살아야 돼. 누군가에 의해서 타인에 의해서 내가 그렇게 살도록 제한당한 거에요. 프레임이 짜여진 거에요. 너는 그렇게 살면 안돼. 사업하지 마세요. 사업하면 안돼. 물건 팔려고 하면 물건 안 팔리죠? 집사님 물건 못 팔지요? 사업하지 마세요. 이렇게 사는 것이 특수한 주님의 제한시킨 사례에요.
이게 바로 혜택입니다. 너는 그 짓하면 안돼. 그런 것은 다른 사람이 해. 너는 내가 보기에 적합한 인생 살아야 돼. 내가 보기에. 딱 적절한 인생 살아야 돼. 이렇게 되면 유한한 인간은 자기 인생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자기 인생을 해석할 권한이 없으면 자기가 예측할 권한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벌써 그 점을 아시고 기도할 때 제대로 된 질적으로 제대로 된 기도를 하셨지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이 나를 제한하여 주시옵소서. 심지어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잔을 이 죽음의 저주의 잔을 마시는 것조차도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바로 최초로 성령 받은 예수님에게만 나올 수 있는 겁니다. 성령 안 받으면 성령 없이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아까 α=S(α) 이러한 경우를 우리는 매일같이 만난다는 겁니다 이런 경우를.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된 것을 이것은 원칙이다. 이게 진리다라고 본 거에요.
그런데 주님의 특수한 사례는 여기에 제한당한 사례라는 취지로 다가올 때 사람들은 이걸 뭘로 보느냐 하면은 이렇게 자기 뜻이 고집되어 있으니까 이걸 뭘로 보느냐 하면은 우연으로 보는 거에요. 우연. 우연으로 보는 거에요.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 이렇게 살아야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고 반대말이 뭡니까? 필연이죠. ‘필연’.
그러면 오늘 본문같은 성경 해석할 때 우리는 우연으로 성경 해석해야 돼요? 필연으로 성경 해석해야 됩니까? 필연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돼요. 그 예수님께서 그 안식일에 적절하게 손 마른 사람이 그때 그 타이밍 맞춰서 거기 있어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미리 잠자러 집에 가면 안돼요. 딱 그 타이밍에 손 마른 자가 있어야 돼요. 적절하게.
그러면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마법이 시간이 됐어요?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어떻게 돼요? 적절한 거에요. 이것은 뭐냐? 유한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시작점을 무한으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무한으로부터. 이 우연이라는 말을 우연이라는 말을 했잖아요.
사람들은 자기가 구원받은 것은 우연이다. 왜냐하면 자기 필연은 따로 있으니까. 내 뜻이 필연이니까. 내 예측이 있고 내 예측에 내 기대 내 희망 소망 이게 필연이에요. 인간은. 필히 그렇게 되고 싶어 해요. 인간은 쉬지 않고 유한에서 어디고 간다고 했습니까 아까? 쉬지 않고 어디로 가요? 이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늘 더 나은 나, 더 멋진 나, 지금 보다 더 내가 기대에 부응하는 만족하는 그런한 세계, 무한을 향하여 계속 가는 거에요.
그런데 이것이 아까 뭡니까? 한계. 서사인데 순서인데 아까 앞에 뭐가 붙어있다? 한계가 있는 거에요. 한계가. 이게 한계가 있는 거에요. 여기에 어제 한 대구 강의는 얹는다면 유한에서 무한으로 가는 이유가 이것은 뭐냐 하면은 나를 의미 있게 취급하는 거에요. 의미라는 것은 어디서 나느냐 하면은 필연적일 때 의미가 나와요. 필연적일 때. 그러나 여기서는 뭐로 봅니까? 이것을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그냥 뭐로 봐요? 하나의 우연한 일로 보는 거에요.
그렇게 되게 되면 그렇다면 우연한 일로 보기 때문에 예수님의 필연은 인간에게 무시당하게 되는 겁니다. 거부당하게 되는 거에요. 지금의 너의 형편은 내가 보기에 합력하여 합당한 네 모습이다 하면 인간은 “싫어요! 그럼 나의 가치는? 나의 의미는? 나의 포부는? 어릴 때부터 갖고 있는 나의 희망은? 어디서 찾아요?”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자, 그다음 또 진도 나가봅시다. 이러한 반발, 이걸 가지고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앞뒤가 안 맞다. 흔히 쓰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한번 따져 보세요. 앞과 뒤가 안 맞으면 이것은 한 물체가 아니고 분명히 두 개의 물체가 따로 노는 거에요. 두 개의 물체가 따로 노는 거죠. 앞뒤가 안 맞으니까.
자, 어떻게 안 맞는지를 이제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앞뒤가 안 맞을 때. 그럼 앞은 뭐고 뒤는 뭐냐. 앞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안 그러면 인간을 생각해도 뭘 해도 앞뒤가 안 맞으니까 관계없습니다. 앞을 인간으로 봅시다. 인간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하고 이게 안 맞아요. 왜 안 맞느냐 하면은 인간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은 몸이냐 영혼이냐를 생각합니다. 인간들의 생각은.
여기서 나온 게 뭐냐 하면은 신학이 나왔어요. 신학 중에 특히 구원론이 나와요. 몸과 영혼. 몸에서 빠져나온 영혼이 천국 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항상 몸과 영혼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뒤가 뭐가 되겠어요? 하나님이 되시겠지요. 이걸 뭘로 보느냐 하면은 역사와 묵시로 봐요. 역사와 묵시. 역사, 시간을 초월한 것. 주님의 관점은 이걸 봅니다.
역사라 하는 것은 주일날 설교한 것처럼 나만의 스토리, 나만의 소설. 인간들의 생각은 몸과 영혼을 생각해요. 내 몸은 어떻게 되는가? 내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몸과 영혼. 여기 오늘 본문에 손 마른 자 있지요. 손 마른 자가 있을 때 환자 본인도 그렇고 바리새인도 그렇고 전부 다 관심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병자가 과연 이 몸이 낫겠느냐 안 낫겠느냐 이렇게 보지요. 예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환자가 병이 낫겠느냐 안 낫겠느냐 이렇게 보는 겁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인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환자가 병 나았다 안 나았다 하는 이것이 전부 다 역사에 속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안식일마다 쫓아다니면서 아픈 사람 고쳐주는 것 그거 할라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까? 아니지요. 네 몸이나 건강해라. 예수님께서 뭐 의사면허증도 없으면서 의사할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아니지요. 예수님은 죽을려고 오셨어요. 이 몸과 영혼이라는 이 관심사 자체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인간이 앞뒤가 안 맞는 이유는 자기 몸과 영혼, 영혼이란 마음을 이야기한단 말이죠. ‘마음’. 인간은 그 정도는 알거든요. 죽고 나면 이 몸은 꼼짝도 못하고 영혼만은 건져야지. 몸은 이미 포기했지만 몸은 늙어서 포기했지만 죽어서는 영혼이 빠져나오면 영혼이라도 천국 가야지라는 인간들이 간절한 노림수 있잖아요. 기어이 자기 자신을 못 버린다고요.
결국은 몸의 역사, 그 다음은 뭐의 역사? 자기 영혼의 역사가 있는 거에요. 아까 기도한 어린아이가 나중에 할머니 되겠지요. 그러면서도 그 어린애가 자기에 대해서 미련을 못 버리는 것은 몸은 비록 늙어 죽더라도 무엇은 남아있다고 보는 겁니까? 내가 어릴 때 기도했던 기도의 기도빨은 남아있다는 영혼은 남아있다는 거죠. 영혼은 오래 가거든요. 백반한번 백반두번 백반세번 영혼은 오래가요. 밧데리 오래 가잖아요. 에너지가. 몸은 이렇게 몇십년하면 없어지고.
그러니까 인간은 기어이 자기 속에서 불멸적인 요소를 포기를 못하고 있는 거에요. 불멸적인 요소를.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전체 아까 말한 전체 모든 α=S(α) 안에 이 전체 모든 무한을 뭘로 보느냐 하면은 이게 바로 인류가 관심 가지고 있는 역사로 보는 겁니다. 역사. ‘역사’.
몸과 영혼에는 무슨 요소가 없습니까? 여기는 자기가 동영상 유투브할 때 했지만 인간은 자기를 뭐로 본다고 했지요? 자기를 이 세상의 뭐로 본다고 했습니까? 중심으로 본다고 했지요. 인간은 자기를 중심으로 보지요. 인간에게 뭐가 없다고 했어요? 자기가 중심에 있기 때문에 따로 방향이 없는 거에요. 내가 이미 ‘나’이기 때문에 굳이 시간 요소가 개입되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주께서 이 모든 걸 역설을 할 때에 이 모든 역사 안에다가 뭐를 집어넣느냐. 모든 인간들의 분투, 노력을 다 집어넣는 거에요. 모든 인간의 역사. 나 역사, 너 역사, 국가 역사, 교회 역사, 모든 역사, 이스라엘 역사, 유대 역사를 다 집어넣는 거에요.
무한=묵시입니다. 시간을 초월합니다. 유한은 시간 안에 있다고 보는 거에요. 유한은 시간 안에. 시간 안에 있으니까 이거는 뭐냐? 미완료되고 미완성이 되는 거에요. still-one-more. 아무리 자기가 노력해도 아직도 하나는 더. 아직도 하나는 더. 거기에 대해서 묵시는 뭐냐? already ‘이미’. 이거는 뭡니까? still ‘아직’.
‘이미’가 ‘아직’을 완전히 박살내버리는 겁니다. 완전히 의미를 삭제시켜버리는 거에요. 백날 까불어도 너는 역사 안에 있잖아. 나는 무한이야 ‘무한’. 역사를 끝냈어. 너는 의미가 없다고 이런 뜻이에요. 너는 의미가 없는 거에요.
자, 누가 민수기 16장 한번 찾아봅시다. 16장 30절에서 31절.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이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물을 삼켜 산 채로 스올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지금 이 이야기가 고라 이야기거든요. 고라. 고라 자손이 반란을 일으켰지요. 모세 왜 너 집만 대장질하고 왜 우리를 이렇게 우리는 대장 못하게 만드느냐 하는 겁니다. 그럴 때 누가 나섰느냐 하면은 묵시적인 존재, 이런 유한들의 이야기 속에 누가 개입하느냐? 무한이 개입해버려요. 무한이 개입할 때 그 결과가 뭐였습니까? 뭐가 갈라졌다? 뭐가 갈라졌습니까?
31절에 땅이 갈라졌지요. 35절에 보세요. 여호와께로부터 뭐가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명을 소멸했습니까? 불이 나왔지요. 땅이 갈라져서 음부의 완전히 조폭이다. 완전히 묻어버려요. 그 인간들을 묻어 버리고 또 불이 나와서 250명이 죽었어요. 향로에서 불이 나와서. 도대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에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한 하나님이에요. 자기 자신이 어떠한 분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일하는 분이지 어떤 일도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과 무관한 일은 일으켜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괜히 본인 인생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본인 인생 걱정할 권한도 자격도 그런 의미도 없어요 우리는. 까라면 까야지 말이 많아요. 왜 쓸데없이 우리가 우리 자신 단도리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지킬려고 합니까. 그럴 자격도 안 되는데. 누가 함부로 그런 자격 있으라 했어요. 없는데.
다시 누가복음 6장 돌아가 봅시다. 누가복음 6장.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죠. 아까 강의한걸 다시 되새겨보겠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죠. 그렇죠? 그러면 이미 율법은 인격화되었죠. 말씀이 육신이 된 거에요. 그러면 이제 남아있는 율법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모든 율법이 예수님으로 응축이 되어버렸는데 무슨 율법이 있습니까? 율법이 없죠. 이미 예수님이 독점을 했잖아요.
그 다음에 율법의 완성에 의해서 살게 할 자는 살게 하고 멸한다 했으니까. 아까 무참한, 비참한 것 봤지요? 비참하게 죽이는 그 권한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율법의 완성자에게 있어요. 율법의 인격화된 그 분에게 있다고요. 그 분이 자기 결정에 의해서 했다 이 말입니다. 그게 주님 보시기에 그게 우연일까요 필연일까요. 그건 필연적인 거에요. ‘필연적인 것’.
그런데 인간은 자기 자신의 뜻을 반드시 이루어야 될 필연을 보거든요. 주시옵소서!!! 아까 했잖아요. 주시옵소서!!! 이게 무슨 뜻입니까? 진짜 그 일 안 이뤄주면 하나님께서 트럼프 대통령 안 돌봐주면 나 예수 안 믿을 참이야. 아까 그런 기세를 보게 되면. 공산화되는 거 빨리 없애고 유투브 예배 참석 안 해도 안 보면 그 아이 말에 의하면 유투브 예배 안 본 사람은 전부 다 벼락맞을 거 같은 그런 간절함이 있단 말이죠. 그런 간절함.
문제는 그런 권한을 누가 줬어요? 준 적 있어요? 없어요? 준 적이 없다고요. 모든 율법은 모든 권한을 예수님에게만 모이도록 했지, 예수님 빼놓고 그 누구에게 준 적이 없어요. 너희들은 율법에 관심 가져라. 율법에 신경써라라고 그렇게 하지를 않았다 이 말입니다. 어제 대구강의에서 핵심적인 성경말씀이 뭐냐 하면은 이거였잖아요. 이거.
율법 외의 한 의. ‘율법 외’. 율법 말고 율법 외. 율법은 화목제물로 예수님이 다 이루었고 율법 외의 한 의. 혜택. 아까 말했지만 혜택. 자, 유한이라고 했지요. 성도는 여기에 대입시키면 성도는 유한, 무한에 예수님 대입시키면 성도는 예수님의 특수한 뭐가 된다? 특수한 사례가 되는 거에요. 특수한 사례. 예수님으로부터 혜택을 입은 사례가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더 이상 자기를 증명할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성도가 주의할 것은 자기 설득에 대해서 자기가 뿅 하고 가고 이러면 안돼요. 자기 설득에 대해서 반대를 해야 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도대체 내가 나 잘났다를 증명해서 어디에 써먹을 겁니까? 그게.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어요? 나한테 있잖아요.
유한이 마치 무엇을 흉내 내느냐 하면은 아주 무한에 도달되지도 않고 미흡함에도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벌써 성급하게 무한의 행세를 해요. 흉내를 낸다고요. 무한은 따로 있는데. 주님은 따로 있는데. 오늘 이야기가 그 이야기에요.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전부 다 이게 뭐냐? 누구 권한이냐 하면은 예수님의 일방적인 예수님의 자기 표현입니다. 자기 권한이에요.
예수님께서 자기 권한 할 때에 율법을 줬거든요. 율법을 주니까 사람들이 마귀에 속했기 때문에 인간들이 율법을 미끼를 물은 거에요. 바보같이. 저 율법이 나의 잘남을 증명해 줄 것이다. 꽉 물은 거에요. 기도하라면 기도하고 헌금하라면 헌금하고 예배 참석하라면 예배 참석하고 시키는대로 다 하는 거에요. 그것이 뭐로 이어집니까? 나는 역시 구원돼야 될 필연적 존재야 라는 것을 자기 스스로 설득하고 싶은 거에요.
그러니 앞뒤가 이게 안 맞는 겁니다. 그 앞뒤가 안 맞다는 증거가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을 믿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복음으로 들이대는 이유가 너희는 백날해도 주님의 뜻과 네 뜻이 앞뒤가 안 맞다는 것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근거가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죽였잖아. 너희가 죽였잖아. 혜택주신 분 죽였잖아.
요한이 한계서수를 통해서 계속 무한으로 나아갈 때 여기 무수한 무한들이 있지요. 어떤 의미에서? 내 쪽에서 유한이지만 나는 보잘 것 없는 인간이지만 신을 향하겠다고 의지를 갖고 있는 이상은 해야 될 숙제가 너무 많은 거에요. 모든 일의 완벽과 모든 일의 철저, 모든 일에 실수가 없어야 돼요. 모든 일에.
나는 오늘 여기 와서 복음 잘 들었다 하고 얼마나 뿌듯하겠어요. 하다가 차 빼다가 옆에 차 그랜저 긁었다. 이게 뭐에요? 나 왜 이리 어설퍼. 갑자기 완벽하다가 어설퍼 되지요. 다음에 어떻게 하겠어요? 성경 말씀도 참석하고 차도 제대로 뺄 수 있는 보다 완벽한 인간을 추구하겠지요. 이 얼마나 많은 무한을 만나겠습니까? 만날 때마다 인간은 동원하는 게 뭐냐?
나의 행함의 철저함, 그게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에요. 오늘날 교인들이에요. 나의 행함, 나의 철저함. 나의 믿습니다. 뭘? 나의 행함의 철저함을. 그래서 로마서에서 구원은 행함이 아니고 믿음이라고 하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이해해요? 나의 믿음은 어떤 믿음? 오류가 없고 철저한 믿음. 치매가 걸려도 믿는 것만 남아 있는 그러할 정도로 철저한. 세상이 네 맘대로 되는 게 아니지만. 철저하게.
지금 아까 기도 영재 봤지요. 2분 46초 동안 하면서 믿습니다 주시옵소서 했지요. 만약에 그걸 이 동영상을 보고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애가 그걸 보고 너도 행할 거 같으면 나도 행할 수 있다 해가지고 더 쌍시옷이 많이 들어가고 이거는 2분 45초가 아니라 7분 60초 한다면 누가 무한의 승자가 됩니까? 얘가 더 무한적이죠. 더 철저하죠. 용어 자체도 더 목사님 같고.
기도의 영재 또는 바이올린 영재라 하면 그 영재의 세계는 전부 다 무한을 추구하는 올챙이들의 우글거림이에요. 전부 다. 올챙이들의 우글거림이에요. 거기에 대한 주제 영화가 소울이라는 만화 영화. 픽사 영화. ‘소울’ 영화 봤습니까? 그 영화. 재즈를 즐기고 싶다가 하수구에 빠져가지고 유령들 세계 죽음의 세계에 빠진 사람 이야기, 그 이야기에요. 인간들은 희망을 가져야 된다 뭐 이런 이야기.
이 세상은 전부 다 어느 방면이든 간에 거기 도사들 있고요 있어요. 있으면 그 사이를 포기하겠습니까? 따라붙을려고 자기 행함을 내놓겠습니까? 자기 행함을 내놓잖아요. 어떤 권투장에 누가 권투 너무 잘해. 나이는 같은데 취취~~ 권투하는데 너무 잘해. 그러면 목사님은 나 포기할래 합니까? 네가 잘하는지 한번 붙어볼까? 올라와라 한번 붙어보자.
바둑도 마찬가지에요. 낚시도 마찬가지고 골프도 마찬가지고 어느 분야에서 심지어 백신세계까지. 어느 나라는 백신 다 맞았다는데 우리 나라는. 모든 나라는 뭡니까? 무한경쟁. 악마의 지옥의 모습. 그 자체 무한경쟁. 무한경쟁. 오직 그것뿐이잖아요. 오직 그것 뿐. 무한경쟁.
회사 그냥 일한다고 월급 그냥 주는 게 아닙니다. 회사 적합한 사람 뽑았잖아요. 어디로 내보냅니까? 무한경쟁. 무한경쟁. 그래서 사원 입장에서 제일 소망하는 것은 열심히 기도해서 응답받는 것은 제발 우리 회사 근처에 동업하는 회사 안 오기를. 경쟁업체가 우리 회사 근처에 안 오기를 간절히 믿습니다 하고 기도하는 거에요. 경쟁 없으면 회사 거저먹기입니다. 거저먹기에요.
모든 교회가 교인수가 3명. 이건 목회 하는 게 신나. 나라에서 모든 목사에게 월급 골고루 250만원 다 주고 교인수는 신경 쓰지 않고 3명만 되면 된다고 한다면 목사님은 어떻게 합니까? 만세를 부르지요. 만세 부르지요. 왜? 경쟁이 없으니까.
그래서 지금 바리새인은 예수님 보고 뭐라고 합니까? 손잡고 우리 경쟁 마당에 나서자고 잡아 당기는 거에요. 어차피 시작은 유한으로부터 시작해서 무한으로 나가니까 당신은 잡아당기는 거에요. 주님께서 “손 안 놓냐? 이 손 안 놔? 이거 죽여버릴까? 불에 태워 죽일까? 땅에 파 묻어버릴까? 어떻게 해볼까.”
바로 모든 인간은 자기가 얼마나 처참한 참혹한 지경에 있는 것을 상상도 못합니다. 이제 아까 묵시의 만남이라고 했지요. 이걸 말을 좀 바꾸겠습니다. 역사와 묵시의 만남 해도 맞고요. 골로새서 3장에 의하면 맞아요. 그 다음에 역사와 무엇의 만남이냐 하면은 언약의 만남이에요.
그러면 언약은 아까 손 마른 사람을 낫게 했지요. 창조입니다. ‘창조’. 병을 낫게 하신 게 아니고 창조한 거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이 사람 입장에서는 병이 나은 거지만 병을 고쳐준 주님은 창조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창조주에요. 이런 게 설명하기가 참 어려운데 보통 창조라 하는 것은 없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나와야 창조잖아요.
그러나 성령을 줘가지고 육의 세계에 있는 사람을 예수 믿는 영의 사람으로 바꾸는 것을 영의 세계에는 없는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게 창조에 해당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에 해당돼요. 성도는 피조물이에요. 새로운 피조물이지 개과천선한 사람 아닙니다. 단절되어 있어요.
그러면 창조가 언제부터 시작됐냐는 말은 그럼 역사는 뭡니까? 이건 이렇게 되지요. 파괴죠. 이거는 파괴되죠. 파괴되는 겁니다. 역사가 계속해서 유한에서 무한으로 나아가면서 이게 무한의 세계죠. 무한의 세계인데 이 유한에서 무한으로 갈 때 이러한 생각을 가질 때 이 사람들이 인간들이 놓친 게 있어요. 뭘 놓쳤느냐 하면은 공백, 빈자리 이걸 놓쳐버린 거에요.
너무 많이 갖기를 소원하기 때문에 아예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요. 경쟁이 너무 심하다 보면.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공백은 감산. 감산이라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마이너스에요 마이너스. 이 언약은 우리 성도로 하여금 플러스를 주는 게 아니에요. 플러스는 어디서 줍니까? 역사에서 플러스를 하지요. 역사에서 플러스를 하는데 보다 더 낫게, 보다 더 많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아까 기도할 때 양의 기도는 어떻게 한다 했습니까? 양은 바깥에 나오지요. 바깥에 내 행함이 행함에 대한 거기에 대한 성과를 살피는 것이 양적이에요. 그러나 언약은 창조이기 때문에 빼기를 해요. 그런데 빼면 뺄수록 뭐가 드러나느냐 하면은 혜택이, 나에 대한 혜택이 점점 더 늘어나요.
예를 들어서 내가 지금 시력이 0.7이다. 그런데 옆에 장님이 지나가요. 장님이 지나가도록 주께서 조치해버리면 장님의 시력이 뭡니까? 제로지요. 그럼 나는 0.7이잖아요. 주님이 장님이 지나가게 해서 그 주님의 뜻을 알게 되면 나는 0.7에서 어디로 마이너스가 됩니까? 시력이 제로가 되는 거에요. 제로가.
손 마른 사람, 손 마른 사람이 주님에 의해서 안식일에 낫게 했다면 멀쩡한 사람은 안식일에 그럼 뭘 보여줬어요? 아무 것도 못 보여준 게 되잖아요. 그렇지요?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못 보여줬잖아요. 그래서 안식일은 나를 파괴하는 날이에요 그래서. 나는 파괴당하는 그 혜택을 입는 날이에요. 감사하죠.
나는 역사에 속해서 까불락거렸던 그런 인간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옥갈 수밖에 없었습니다를 안식일을 통해서 알라고 주께서 안식일을 주신 거거든요. 지금은 안식일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안식일이 인격화됐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찾아왔다는 것은 안식일이 찾아온 거에요. 안식일이 찾아왔다는 것은 네가 손 마른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네가. 네가 죽어도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이러한 구조, 역사냐 언약이냐, 언약이냐 역사냐 구조에서 너는 호박 안에 들었던 사람이에요. 호박. 율법의 저주 안에 들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 그것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 예수님이고 그걸 우리에게 증거하는 영이 바로 예수님의 영이 되지요. 예수님의 영이 누구지요? 이거 쉽다. 예수님의 영이 누구지요? 성령.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성령이 오지 않으면 영원토록 죄 사함이 없다. 성령의 죄 사함이 없으면 영원히 죄 사함이 없다. 오는 세대에 네가 처참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기본적인 이 뜻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마세요. 자기 자신을 동정한다는 것은 어디서 동정이 일어나느냐 하면은 이렇게 한계서수에서 이렇게 힘들게 자기 인생을 올라왔잖아요. 20대 30대 40대. 어디서 동정을 하느냐 하면은 과거로 가요. 잠시 과거를 회상해 보면 과거 내가 20대에 내가 기대했던 만약 지금 여러분이 50대라면 20대에 50대를 그리워했던 그 그리움을 잠시 회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옛날 가요나 옛날 팝송이나 옛날 외국노래나 듣게 되게 되면 그 노래만 기억되는 게 아니에요. 노래가 들려졌던 그 언덕길 밑부터 해가지고 음악감상실부터 해가지고 옛날 좀 놀았던 그 때 명동, 대구에서는 동성로 이렇게 뭣도 모르게 괜히 깃 세우고 눈 왔다하면 다 기어나올 때. 눈 왔다 하면 다 기어나와가지고 쇼윈도 보고 저 모습이 괴물이야 명동콜링에 나온 가사처럼 말이죠.
그렇게 눈발 내릴 때는 왠지 휙휙 우리 한번 놀아볼까 헛짓하고 그때 그 시절에 취직만 해도 감사했던 사람이에요. 그때 시절로 돌아가면. 결혼은 그것은 너무 과분한 혜택이고. 취직만 해도 사람 구실했다고 자랑하고 싶은 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은 그게 서수가 아니고 그게 한계서수에요. 20대에 갖고 있는 콤파스로 그렸던 자기 중심이니까 20에 그렸던 자기 인생의 원이에요 원. 원.
물론 여러분같이 어린 아이같이 아직도 순수한 사람에게는 20대보다 더 낮은 인생의 목표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은 괜히 빈 말입니다. 그럴 순 없어요. 주님께서 요구 하는 것은 먹을 것 입을 걸로 족한 줄 알라. 아 도대체 우리는 어디까지 내려가야 돼요. 도대체. 먹는 거 입는 걸로 족한 줄 안다면 교통사고 나서 깁스하고 병원에 입원해도 괜찮잖아요. 왜? 병원에서 의료보험 되가지고 먹을 거 입을 거 나오잖아요. 환자복 나오잖아요. 어느 정도 낮아져야 돼요. 도대체가.
그러니까 계산을 카운트를 나의 유한으로부터 해가지고 한계서수를 1,2,3,4, 나부터 출발점해가지고 starting point 잡지 마라 이 말이죠. 위에서 내려오는 거에요. 위에서. 혜택을 주신 거에요. 혜택을. 그런 하나님의 같은 분이지만 그 영광을 버리고 이 천한 나까지 찾아온 거에요. 뭐할라고? 우리 구원할라고? 아니에요.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서. 자기가 베데스다 못이라는 것. 내가 자비의 연못이라는 사실을.
그 앞에서 “누가 나를 데려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방식 아니야. 이제는 연못 풍덩 들어 가는 방식이 아니야.” “예?” “너한테 방식을 준 적이 없어.” 예수 믿는 것도 법이 되어버려요. 그러니까 성령이 왜 있습니까? 성령에 속한 사람은 어디에 속하지 않는다? 법에 속하지 않는다 이 말 아닙니까. 로마서 8장에서. 아 이 얼마나 중요한 말인데.
성령에 속하지 않고 법에 속한 사람 같으면요 그 종인데 승진해서 회사 이사 될려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성령이 와버리면 거기에 대리든 신입사원이든 인턴이든 아들이에요. 그거는. 같은 패밀리라고. 누구 패밀리? 주님의 패밀리인 것을 소급해서 확인시켜 주는 게 성령입니다. 너는 처음부터 내 아들이었어. 하늘나라 내 거야.
아들이라면 이제 율법의 종이 된다? 안 된다? 이제는 율법의 종이 아니야. 아들이야. 이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어. 아버지라고 불러봐 불러봐 불러봐. 아버지 그렇게 기도하는 것처럼 부르지 말고. 아버지라고 부르면 반드시 아들의 영을 받아야 되거든요. 그러면 아버지라고 부르면 예수님이 아버지를 불렀던 그 시선과 안목과 부르짖음이 있게 돼요.
예수님의 자리는 아버지를 부를 때 어디서 불렀습니까? 바로 십자가에서. 역사의 한복판에서 불렀지요. ‘역사의 한복판’. 이 무한 경쟁의 한복판에서 예수님을 불렀다고. 지리산에 기도원에 들어가서 부른 게 아니고. 삶의 한복판. 무려 일을 4가지 하는 거 있잖아요. 아침 6시에 출근해가지고 밤 10시에 들어오는 그 삶의 한복판에서 아버지를 불렀단 말이죠.
물론 괴로워서 불렀겠지만. 일을 4가지나 하는데 안 괴로울 수 있겠어요. “쫌 살려주이소.” 정말 하소연하겠지요. 그럼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딱 맞다. 너에게. 네 처지에 딱 맞다. 네 처지에 딱 맞는 거야. 내가 할당한 자리야. 배석이 바로 그 자리야. 예수님은 너보다 고생 더 했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안식일에 안식일 지키라고 한 게 아니고 거기에 누굴 배치했느냐 하면은 손 마른 자를 배치한 거에요. 손 마른 자를. 그리고 여기 지금 누가복음 보고 있지만 마태복음 12장 잠시 한번 볼까요? 거기 보고 마치겠습니다. 12장에 보면 안식일 나오지요. 거기에 손 마른 사람 고치지요.
12장 11절 보세요.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라고 했지요. 바리새인들의 뜻은 이겁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안식일 날 양을 구할 일이 없도록 아예 안식일 날 양이 안 빠지도록 했을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게 바리새인이에요. 그러나 양이 안 빠져버리면 안식일의 의미가 날라가요.
안식일은 인간이 손 댈 문제가 아니에요. 인간이 지켜서 자기를 유한에서 무한으로 빠져나오는 자기 행함으로 빠져나오는 날이 안식일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빠져있음을 처참한 지경에 빠져있음을 또 다시 확인하는 날이 안식일이에요. 호박 속에 갇혀있음을. 그래서 양 이야기한 겁니다. 그래서 손 마른 사람 이야기한 거에요. 혜택을 입었다. 감사한다. 예 알고 있는 말이죠.
그러나 혜택을 어느 정도 혜택은 내가 이 무한경쟁 속에 주께서 적절하게 나를 집어넣을 때 야 남한테 안 질려고 역사고 묵시고 그건 다 무시하고 내 몸 하나나 추스르고 내 몸 하나 밥이나 먹고 살고 내 자신이나 잘 먹고 잘 살란다 그렇게 몸부림 칠 때 역사 묵시라는 그 위에서 내려오는 그 취지는 날라가버리고 나만 살면 되지 뭐. 나만 행복하면 되지.
우리 아프지 말고 행복합시다. 아버지는 비록 택시 드라이버라도. 마포대교 건너가는 아버지한테 한 것처럼.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게 얼마나 단촐하게 우리 인생 이렇게 살아요를 얼마나 적절하게 표현합니까. 행복하자 그 다음에 아프지 말고. 돈 많아도 아프면 소용없잖아요.
자기 몸과 영혼, 종교, 신학, 구원론 이거 다 처참한 지경에서 몸부림쳐서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겠다 하는 지옥의 잘라낸 지옥을 두 쪽으로 잘라낸 드러난 뭡니까? 감춰진 지옥을 두 쪽으로 잘라내면 단면 나오지요. 지옥의 단면입니다. 주님은 그 지옥 속에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에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세상 속에 두게 하심을 도리어 감사합니다. 마치 잘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주님의 거저 주신 혜택이 없었으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날마다 더 깊이 깊이 자각하는 가운데서 그저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