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6장 5절 (안식과 안심) 210406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내 자신을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취하겠다는 의도 자체가 이게 비율법적이고 이게 교만입니다. 보통 이걸 안일함이라고 하지요. ‘안일함’. 자체적으로 일관성 있으면 됐지 뭐. 나 잘되면 됐지 뭐. 뭐 필요해. 그러면 자기 잘남에 근거한 거에요. 자기 믿음을 증거하고 자기 신앙을 증거하고 자기 사랑을 증거하고 자기 잘남을 증거한다고요.
예수님은 하나의 구색이 되어버리죠. 최종목표가 나 이렇게 구원에 성공했다. 성공사례가 돼요. 보통 세상 처세술 책들 보면 어떤 식으로 인간은 자기의 꿈을 이루었느냐 그런 식 책들 많지 않습니까. 그걸 무슨 책이라고 하느냐 하면은 자기 개발서라고 해요. 자기 개발서. 내가 나를 촉구해서 나를 이런 인간으로 하겠다는 그 책. 그런 책들이 많이 팔리지요.
어떻게 공부해가지고 음악도 하고 미술 또 잘하고 수학도 잘하고 나중에 법대 들어가가지고 미국 변호사 되고. 그 여자 변호사가 책 냈어요. 공부는 이렇게 해야 된다는 식으로. 서세원 딸. 책을 냈다고요. 뭐든지 인간은 희망적이어야 한다는 말처럼 얼마나 이게 악마적인지 몰라요 이게. 뭘 근거로? 네 자신이 뭘 근거로 나는 희망이어야 한다는 것은 근거가 뭐냐 이 말이죠.
예수님께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율법을 의도적으로 위배하는 모습을 보이는 뜻이 그 인간 안에 이게 안 들어있다면 복음이 안 들어있는 사람이거든요. 칩이 들어와야 되는데 예수님이 하신 그 일의 칩이 들어와야 되는데 그냥 코스프레만 하는 거에요. 예수님이 하신 일 흉내내기만 하는 거에요. 안 다칠려고 하고 조심스럽게 살려고 하고 자기에게 납득이 되는 것만 하고 일관성만 유지하고.
그걸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해되기 때문에 신자 아닌 거에요. 이해되기 때문에. 그럼 이해 안 되야 되느냐? 바보 등신 되야 되느냐? 그게 아니고 이해되기 때문에 신자 아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지시, 주님의 지시입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이게 정답이에요. 주님의 지시가 있어야 돼요.
주님의 지시는 항상 예상 밖이거든요. 내가 생각한 것 네가 어느 정도 생각하는 것 다 아시고 내리는 지시 내린다고요. 그러면 내가 아는 걸 지시 내려버리면 주님도 내 일관성 속에 포로가 되어버리잖아요. 내가 따로 감시카메라가 필요치 않는 삶이 신자의 삶이에요. 내가 나를 감시하는 CCTV가 나한테는 달려있지 않아야 돼요. 저쪽에 하나만 있으면 돼요. 내가 나를 감시할 필요 없다고요. 우리가 얼마나 자기 자신을 닦달냅니까. 똑바로 살아야지. 행동 똑바로, 왜 그런 행동했어? 이런 식으로 말이죠.
사람이 아무리 바로 살아도 5년 전에 알고 있었던 동창생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요. 아무리 바르게 살아도. 열심히 돈 벌어서 연예인 활동해도 형을 무슨 짓을 했는지 내 돈 100억을 가져갈지는 그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겠지만 맞는다 치고 젊음과 청춘을 바친 그 돈을 가져간다 이 말은 엄마는 좋게 좋게 하라고.
이게 전부 다 이 세상에 얽혀있는 겁니다. 혼자 독야청청하고 싶어도 주위에서 나를 가만두지 않아요. 심지어 옆에 있는 강아지도 나를 귀찮게 해요. 강아지가. 이미 키운 거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인간은 자꾸 자기 안정적 조치를 취할려고 하면 할수록 대수롭지 않은 것까지 스트레스의 항목에 리스트에 포함이 되어버려요.
그런데 아주 큰 기쁨이 있어버리면 길에 가다가 새똥에 맞은 것도 그냥 웃고 지나갈 수 있는데 하는 일이 내 뜻대로 안되고 실망스럽게 되게 되면 새똥 이마저도 나를 화나게 만들어버린다고요. 얼마나 민감한지 인간들이. 자기가 자기 관리, 자기 조치하는데 얼마나 평생을 예민한 감각을 발달시켜왔는지요. 참 기가 찰 일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삽시다. 내가 나를 설명하지 말고 그냥 포기합시다. 내가 나를 설명하지 맙시다. 그러면 설명하지 않으면 어떻게 사는가. 주님의 지시에 따르면 돼요. 두 시간 뒤에 뭐 할까요? 내일은 뭐할까요? 지금 여기서 뭐할까요? 주님의 지시를 받는 겁니다. 그럼 주님의 지시를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커플링이라는 말이 있어요. 커플링 둘이 반지 같이 끼는 것. 그거는 일반 문화적 개념이고 과학적 개념에 커플링이라는 게 있습니다. 같이 호응하는 거에요. 짝이 되어서 호응하는 것. 주어진 환경에 생물체가 호응하는걸 커플링이라고 합니다. 몸 바깥의 신체 밖에 있는 그러한 환경변화에 따라서 이게 자연적으로 신체가 호응해서 적응하게 되는걸 커플링이라고 하거든요.
이 제자들 있잖아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 제자들 그냥 주님이 시켜서 벼 이삭 따먹었습니까? 아니지요. 그냥 자기는 주님의 지시 받고 벼 이삭 따먹었습니까? 아니지요. 그냥 자기는 배고파서 그냥 따먹었어요.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소급해서 추후에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그걸 어떤 바리새인이 왔을 때 그걸 뭘로? 그걸 커플링으로 본거에요. 제자들은 나의 안식일의 주인 됨을 호응하기 위해서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의 지시를 따른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이게 아니고 지금 뭘 할까요? 뭘 할까요? 지금 시험 치는데 3번은 몇 번입니까? 이게 주님의 지시 받는 게 아니고 나한테 일어난 어떤 일도 주님의 저절로 부풀어 오르는 그 하나님의 일관된 주님 나라의 일관된 그 다수의 저를 넣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면서 감사해야죠. 하나님이 이루는 이 다수, 비일관적 다수에 저희들을 끼어 넣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심지어 내 뜻까지 하나님께서 묵살해주시면서. 그렇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이거는 쉬운 말이에요. 이거는 흔히 하는 말이에요. 뭔가 비어있어야 채워진다는 말 있잖아요. 이거는 흔히 많이 쓰는 말이에요. 비어있어야 채워진다고요. 어떤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그것은 나로 꽉 차 있는 이 현장을 주님의 지시가 또는 커플링이 왕창 삽으로 막 드러내는 겁니다. 그중에 네가 하고 싶어서 일어난 일은 그 현장에 아무것도 없었다로 삽으로 푹 떠서 드러내어버립니다. 그럼 뒤돌아보게 되면 그것은 뭐냐? 내 자리는 아무것도 없지요. 빈자리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이 노래를 아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여러분들 이 가수 이름도 모를 거에요. 장재남이란 가수 이름 들어본 적 있어요? 들어본 적 없지요? 장재남. 여자 아니고 남자입니다. 이 사람이 불렀던 노래 제목이 ‘빈 의자’라는 노래가 있어요. 서 있는 사람은 오시오. 서 있는 사람은 오시오. 여기는 빈 의자.
주님의 지시는 딴 게 아니에요. 멀쩡하게 나의 일관성 있는 것을 주님께서는 그걸 빈 의자로 사용하시는 거에요. ‘빈 의자’. 타인보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주께서 그냥 게워내게 하는 거에요. 전부 다 토해내게 하는 거에요. 네가 살아온 일평생을 내가 보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짓이라는 것.
네가 포기하던 포기 안하던 상관없이 나는 너에 대해서 일말의 희망 같은 것은 애시 당초 나는 포기했다. 그 포기된 장소. 나는 너의 행함을 안 받기로 확정된 장소를 일생 가운데서 하나의 빈 구멍으로 계속 만들어낼 때, 아 주님의 지시가 나의 일관성보다 더 쎄구나. 더 우선되는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게 될 것입니다.
자, 이제부터 첫째 시간보다 더 어려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지 여러분들이 해석하지 말라고 했는데 일단 해석해야 돼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수많은 개체가 모여 평균을 이루니 평균은 없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평균은 그냥 평균일 뿐이에요. 통계학에서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이렇게 그래프를 그릴 때 제일 빈도가 많은 것이 가운데 볼록하게 튀어 나왔잖아요. 평균을 내잖아요.
그런데 이 평균에 해당되는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왜? 평균에 해당될려면 개인이 대표해서 평균되는 게 아닙니다. 다 모아서 그 양을 숫자로 나눌 때 평균됩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점이 모였는데 평균은 없어요. 평균은 없잖아요. 없는데 모여 보면 평균 유지되도록 움직여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보이지 않는 분이 자기 백성을 평균적 성도로 만들고 있는 겁니다. 내가 나를 성도되게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율법을 스스로 부풀게 하듯이 말씀을 스스로 성취해나가시는 그것에 대해서는 어떤 누구도 내가 표준입니다라고 손들고 나설 수 인간이 없는 방식으로 한다. 없는 방식으로. 제자들이 안식일 날 밀 따먹었다고 지금 잘한 짓한 게 아니에요. 제자들이 안식일의 주인이 아니에요. 주인은 따로 있는 겁니다. 주인이 내리시는 일방적인 그 해석에 의해서 이것은 제자들은 쌩뚱맞게 그 해석에 일치되는 커플링이 되는 호응자가 되고만 거에요.
절대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해석해서 구원받은 게 아닙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해석한 그 결과가 뭐였습니까? 나 저 사람 모른다 이게 해석의 결과에요. 자기 딴에는 해석했는데 같이 함께 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 이렇게 해가지고 자진해서 갈라섰잖아요. 도망갔잖아요. 벗은 몸으로 도망가고 이랬다고요. 엄마야 나 살려라 하고 다 도망갔잖아요.
그러니까 주님이 말한 성도라는 그 기준점에 어느 누구도 끼어들 수 있는 그런 요건을 갖춘 사람은 제자들 중에 아무도 없어요. 성도 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가 됐거든요. 그것은 뭐냐 하면은 비어있는 장소, 다시 말해서 안식일을 가지고 안식일은 율법이라고 했지요. 창세기 2장에 있는 안식일이 출애굽기에 가서 율법이 됐지요. 율법의 목표는 이 세상을 저주하는 것이다. 폭탄입니다. 폭탄이에요. 안에 폭발하는 내용이 들어있어요. 안식일로 이 세상을 폭파시켜버렸습니다.
그러면 폭파 자국이 있을거 아닙니까. 폭파된 그 자국에다가 주님의 기준으로 인도함 받는 사람들이 거기서 모이기 시작합니다. 비일관적 다수로서. 비일관적 다수로서. 그들의 특징은 신이 없다는 거에요. 성도의 특징은 신이 없어요. 신은 누구의 주특기입니까?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의 주특기죠. 자기하는 행동의 의미를 부여해줄 수 있는 최고의 최정점에 연결되어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그들은 일관성을 벗어나려고도 하지 않고 못 벗어나요. 내가 있는 이상은 나의 주변에 연결되어 있는 일관성에 더불어 함께 있어요. 그 일관성을 깨는 질문들이 자식들이 엄마한테 이야기해요. 엄마 나 사랑해? 안 사랑해? 이거는 뭐냐? 자기가 자기 일관성을 가지고 엄마 일관성과 맞는가 시험해보는 거에요. 엄마니까 너 사랑하지. 그런데 왜 내 일에 내 뜻대로 안 해주고 왜 나무래. 엄마 신발 숨겨버릴거야. 이런 식으로 반발을 하는 거에요.
엄마 일관성이 말려들지 않겠다는 거에요. 나의 일관성을 고집하겠다는 뜻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일관성의 끝은 어디에 닿아 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께 닿아 있지요. 예수님 누구한테 죽었습니까? 하나님이 존재하는 자들에게 죽은 거에요. 그러면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뭐가 없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없지요. 다만 자기 일관성에 포함되지 않는 자기가 되지요. 자기 일관성에는 항상 자기 자신을 좋게 보지요.
이것은 뭐냐 하면은 의인 되지요. 주님의 지시는 결국 의인을 뭐로 바꿉니까? 죽을 죄인으로 바꾸는 거에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코스로 갔기 때문에. 예수님이 죄 없는 분이지만 마지막 십자가 갈 때 그게 한평생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아버지로부터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버림의 대상이 되었잖아요. 그 버림의 대상, 그 코스가 율법을 완성하고 부풀어서 완성하는 그 코스에요. 다른 코스는 없어요. 율법이 완성된 코스는 저주밖에 없어요.
저주를 사랑해야 됩니다. 주님 가신 길이 그 길이에요. 저주 코스에요. 저주 코스의 하이라이트는 뭡니까?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지요. 그 사람한테는 아버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버지한테 버림받았으니까 아버지가 없지요. 버림받았는데 뭘. 갈라서자. 버림받았잖아요. 아버지가 없는 거죠. 그런데 사흘 만에 부활되었습니다.
근거가 뭐냐 하면은 내가 예수 믿는 근거가 근거가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근거가 되는 거에요. 내가 믿는 믿음이 근거가 아니고 내 믿음은 나의 일관성과 통해요. 일관성 속에 포함이 되기 때문에 그것은 일관성은 안 받습니다. 공백이 되야 되니까. 나의 믿음 소망 다 저주거리에요.
다시 해볼까요. 인간이 갖고 있는 지식은 결국 뭐로 이어진다? 지식은 자기가 스스로 구원하고자 하는 일관성을 이루는 겁니다. 그걸 쥐고 있는 거에요. 다른 건 다 놔도 나는 주님은 못 놓겠습니다. 주님 못 놓아서 못 놓으면 천국 갑니까? 치매 걸리면 주님 다 놔버렸어. 치매 걸리면 다 놔요. 다 놔요. 인간은 뭐를 소지할 그런 역량이 있는 존재자들이 아닙니다.
애들 잘 때 보면 맛있는 것 아껴두기 위해서 잘 때 형한테 안 뺏길려고 꼭 쥐고 잠을 잡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과자는 저 위에 가 있고 자기는 이러고 자고 있고. 형한테 과자는 벌써 다 뺏겼어. 인간의 사랑도 그런 거 아닙니까. 꼭 쥔다는데. 아까 지식 다음에 순서가 뭐였습니까? 지식 다음에 뭐 나온다고요? 소유지요. 이게 문제지요. ‘소유’.
그런데 주님의 방법은 우리로 소유케 하는 게 아니고 CCTV 통제하는 거죠. 통제하는 거에요. 그 결과가 주님의 은혜인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나한테 감사하는 게 아니고 주님께 감사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소유성이 이게 소용없게 만들어버리죠. 어떤 경우라도 우리로 하여금 내 자체의 의가 나오지 않게 조치하는 겁니다. 어떤 경우라도.
율법해석을 우리한테 맡기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해석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예 율법해석을 잘못한 게 아니고 우리 자체가 이미 죄인인 것을 규정하기 위해서 추가적으로 율법에 들어온 걸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돼요.
이게 지식으로 끝난 게 아니고 매일 삶이 주님의 지시인데 그 지시 안에 들은 내용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네가 있지 네가 해석 제대로 하라고 말씀 준 게 아니다. 너는 너 자신에게 매일같이 포기하라. 그걸 요청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뭐가 어렵다는 말입니까? 라고 한다면 바로 안식의 완성 때문에 어렵습니다. ‘안식의 완성’.
자, 공백이죠. 공백은 뭐냐? 빈 공간입니다. 빈 공간을 만드는 거에요. 주께서. 빈 공간에도 있는 게 있어요. 빈 공간에도 있는 것. 그것이 뭐냐 하면 시간입니다. ‘시간’. 그래서 안식일의 시간적 요소가 이 세상 자체를 빈 공간으로 만들어 버려요. 만약에 그냥 빈 공간이 아니고 꽉 차 있는 공간이라면 인간들은 이 공간에서 본인이 살기 위해서 노력을 할 겁니다.
그런데 이게 빈 공간이 되어 버리면 인간은 스스로 자기에게 의미를 주고 내가 이만큼 사는데 내가 기여했다는 그 모든 것을 끄집어 낼 근거가 아무것도 없겠지요. 농사질 데도 없고 물도 없고 양식도 없을 때. 한번 상상해보세요. 물도 없고 양식도 없다. 그러면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은 이거죠. 실험실에 갇힌 쥐가 되겠지요. 그렇죠? 이게 이스라엘의 무슨 시대였습니까? 이게 바로 광야시대였죠.
누가 히브리서 4장 1절 한번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안식일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그 사례를 그러한 경우를 히브리서는 뭐로 찾느냐 하면은 바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찾습니다. 그게 히브리서 3장 16절에 나와요.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자, 하나님을 격노하게 했던 자가 애굽에 있는 사람입니까? 애굽에서 나온 사람입니까? 나왔던 사람은 어떤 희망을 갖고 있지요. 이 광야 때만 잘 견디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거에요. 그들이. 모세도 그렇게 이야기했고. 이 광야 땅만 잘 견디면 보내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광야를 지내면서 자기 자신 애굽에 살던 그 애굽이라는 그 공간에서 자기 자신의 공간과의 시간과의 관련성을 하나도 포기한 적이 없어요. 애굽에서 살던 생활을 계속 할 수 있는 여건을 찾고자 했던 겁니다. 그래서 물 달라 양식 달라 고기 달라 했지요. 왜 물이 없느냐 이렇게 했지요. 그들 일관성 입장에서는 마땅한 거지요.
안식의 땅에 들어갈 때에 안식의 땅이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땅에 들어가야 될 백성은 우리 빼놓고 누가 있겠어요? 우리 빼놓고. 천국 갈 사람 우리 빼놓고 누가 있겠어요. 그들이 스스로 생각한 거에요. 자기들이 생각한 하나님의 일관성은 뭐냐 하면은 애굽에서 빼낼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10가지 재앙, 기적으로 빼냈잖아요. 그 기적값을 하기 위해서라도 빼낸 자를 버릴 리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일관성이었어요. 오늘날 우리들의 일관성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생각을 우리 빼놓고 누가 하겠어요? 우리들이 뜻에 부합됩니다. 그러니까 넣어줘도 누굴 넣어줘야 돼요? 다른 사람 제끼고 우리는 넣어주는 게 그게 마땅합니다 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하나님을 격노하게 하나님의 격노를 유발시킨 일이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불신이라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에요.
그래서 녹취하시는 분은 고생이 되겠지만 할 수 없이 그래프를 하나 그려야 되겠습니다. 확률과 거리에서 그래프를 이렇게 그릴 때 확률과 거리.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바로 양자물리학에서 원자핵이 있고 원자핵 주변에 전자가 있거든요. 전자가 빙빙 도는 게 아니고 확률로 따진단 말이죠. 확률로.
따질 때 이 에너지 레벨의 전자가 배치가 쭉 돼요. S P D이렇게 F G 이런 식으로 쭉 올라가는데 할 때 어떻게 계산하느냐 하면은 거리가 동일하면 거리가 같으면 확률도 같아요. 거리가 같으면 여기서 여기까지 거리가 동일하면 확률은 동일하다 이런 원칙이 있어요.
자, 거리가 같으면 같은 확률도 같아요. 그러면 확률이 같으면 거리가 같습니까? 라는 질문. 확률 같으면 이 거리 있고 이 거리 다 차이 나잖아요. 확률은 같지만. 수준은 같지만 차이 나잖아요. 밑에는 안 되는 거에요. 확률 같다고 거리 같은 게 아니에요.
애굽에서 나왔다고 해서 나온 확률이 있다고 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느냐 이 말입니다. 들어가지를 못해요. 그러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사람은 뭐냐 하면은 약속의 땅에 들어간 사람의 입장에서 뒤돌아보는 거에요. 뒤돌아보게 되게 되면 그것은 주의 은혜로 들어왔다가 되지요. 맞지요? 그러면 이 광야에서 주의 은혜로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의 약속의 땅에 들어갑니까? 못 들어가는 거에요.
하나님 믿는다고 약속의 땅에 다 들어갑니까? 안 들어갑니까? 못 들어가는 겁니다. 왜 소급해서 차후 추후적으로 이야기했느냐 하면은 그 내 생각과 주님 생각에 의해서 내 생각이 삽으로 전부 다 완전히 제거되야 되는 거에요. 그게 십자가가 앞당겨서 광야에 삽입되는 방식이에요. 율법의 완성은 안식일의 완성은 십자가를 경유해야 그게 제대로 율법의 해석이 된다 말이죠.
그런데 십자가에 안식일에 경유되어 버리면 뭐가 되느냐 하면은 구원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고유의 권한이 되어버려요. 내가 요청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그럼 나 예수 안 믿을래. 뭐 낙이 있어야지. 이렇게 하면 이렇게, 네가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해줄게 약속이 있어야지 그렇게 해도 그게 아무 소용없으면 예수를 뭐 때문에 믿는데. 안 믿을래.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 소리 나오겠지요? 그걸 위해서 준비된 게 있어요. 오늘 이왕 어려운거 어려움의 극단으로 갑시다.
창세기 26장. 집에 가서 동영상 다시 한번 봐야 돼요. 틀린 말은 아닌 거 같은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 주일 낮설교 때 이 본문을 언급했는데 창세기 27장 36절 크게 한번 읽어보세요. “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이르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또 이르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라고 에서가 아버지한테 지금 대들고 있는 거에요. 이 대듦에 대해서 우리 모든 보는 인간적이 편에서는 에서의 말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아버지가 됐으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잖아요. 그러면 아버지가 비록 약속을 했더라도 뻔히 이 사건이 주어진 결과 속에 뭐가 삽입되었어요?
야곱의 범죄가 삽입됐단 말이죠. 범죄가. 공적에 대해서 위반한 거에요. 방해죄. 공무 방해죄에 해당돼요. 공무 방해죄. 정당한 공무 집행에 대해서 야곱이 방해를 논겁니다. 문제 출제 잘못했을 때 떨어진 사람 있잖아요. 그럼 나는 어떻게 해요? 둘 다 다 문제 취소하고 그 관계 없이 정답 매겨주지요. 그런 조치가 인간들 안에서는 정당한 거에요.
그런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분명히 거짓말해서 다 가져갔는데 남은 게 하나도 없어요. 하나도 남기지 않겠다는 거에요. 아버지의 그 단호함은. 그럼 에서 입장에서 무엇의 일관성이 깨어져버려요? 나쁘다 하는 것은 아버지가 인정하면서도 그 나쁜 짓을 해서 나온 결과에 대해서 그걸 아버지는 수정할 의사가 하나도 없는 거에요. 그럼 이거는 한 패에요. 지금 아버지가 결과적으로 동생 거짓말을 호응한 셈이 되잖아요. 이게 무슨 아버지입니까 이게. 이게 무슨 희한한 이런 짓이 다 있어요.
에서가 화내는 것은 아버지가 야곱에게 속았다 그게 화나는 게 아니고 왜 내 것이 없습니까. 왜 내 것이 없습니까? 내 것. 나는 왜 저주만 옵니까 이 말이에요. 왜 저주만 옵니까 이 말이거든요. 확률과 거리의 이 모순처럼 양자물리학을 몰라서 그런 거에요. 이게 아버지 이삭이 복이 자기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사태 추이가 본인이 눈이 어두웠잖아요. 본인이 사전에 조정할 수 없어요.
특히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복은 반드시 저주를 동반해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조금이라도 복이 돌아가지 않는 대상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복 받을 자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복 받을려고 나타났다면 복이란 복은 몽땅 한쪽을 다 가져가요. 몰빵하는 겁니다. 한쪽이 다 가져가요. 둘이 협상하고 약간의 콩고물 더 주고 그런 거 없습니다. 몽땅 다 가져갑니다. 몽땅.
몽땅 다 가져가는데 그 복 안에는 무엇이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은 저주 받은 사람의 아쉬움, 저주 받은 사람의 나름대로의 정당성 다시 말해서 나쁜 짓 했더라도 약간의 일말의 동정표라든지 약간의 그래도 부스러기라도 얻을 수 있는 그러한 다 가져가지 말고 약간은 복의 혜택을 입을 수 있는 여지를 주시옵소서 라는 그 생각. 그 인간들의 일관성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면 복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지금 제가 하는 문장을 글로 쓰면 복잡해요. 복잡한 문장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근원적으로 우리 생각 자체가 중립지대에 있는 게 아니고 근원적으로 저주받아도 마땅한 생각을 갖고 있다는 거에요. 야곱은 저주받을 생각을 거짓말로 노골적으로 드러냈잖아요. 노골적으로 드러냈어요. 나는 복 따내고야 말겠다. 복이 뭔지도 몰라요. 야곱도 모르고 에서도 모르지만 나는 복은 내거야. 차지하고 말겠어 라는 그것이 저주 받은 사람에게 나올 수 있는 본질적인 거에요. 자기 밖에 모르니까. 점점 더 미궁에 빠집니다. 논리가.
그런데 형은 나눠달라는 거에요. 나눠주는 게 옳지 않느냐는 거에요. 야곱도 에서도 복에 대해서 둘 다 모르고 있었어요. 출발점은 둘 다 저주받은 겁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소급해서 야곱이 복을 받게 되게 되면 결국은 야곱의 거짓말이 뭐가 돼요? 야곱이 거짓말이 주께서 허락하신 바가 되지요. 야곱의 거짓말이 무엇의 일종이다? 복을 이루는 일종의 순서가 되어버리죠.
그렇다면 이 거짓말은 세상 사람들에게 뭐가 돼야 돼요? 이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뭐가 돼야 됩니까? 거짓말이 돼야 돼요. 왜? 세상 사람들은 지혜를 원하고 지식을 원하기 때문에. 기적을 원하거든요. 헬라인은 기적을 원하고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했지만 구원의 능력은 어디서 나옵니까? 십자가에서 나오잖아요. 이걸 달리하면 야곱 쪽에서 하면 거짓말에서 나온 거에요. 거짓말에서.
거짓말은 진리로 받아줄 수 있겠어요? 인간적인 상식에 의해서 인간적인 본성에 의해서 진리로 받아들이겠어요? 못 받아들이겠어요? 도저히 못 받아들이죠. 도저히 못 받아들이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다움의 은혜에요. 인간이 예상한 은혜는 은혜가 아닙니다. 자기 잘난 체하는 은혜에요. 이걸 광야에 적용시켜봅시다. 광야에.
다시 이야기할게요. 어렵기 때문에. 애굽에서 나왔을 때 누가 나왔느냐? 하나님께서 나오게 했지요. 그러면 여기 약속의 땅이 남아있고 현재 광야에는 누가 통과하고 있습니까? 애굽에서 나온 히브리 민족이 통과하고 있지요. 그러면 히브리 민족 생각에는 우리 민족 말고는 이스라엘 하나님 백성 될 민족이 있다? 없다? 아예 없지요. 그게 하나님께 격노케 된 거에요.
예상을 한다는 겁니다. 예상. 미리 예측을 한다는 게 문제가 되는 거에요. 예측. 모든 인간이 나올 수 있는 목적의식과 예측을 그것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만 그게 바로 죄였다는 것. 그게 살려고 하는 게 죄였다는 것. 살아도 내가 괜찮은 자로 만들어 내서 살겠다는 것이 죄였다는 사실을 이게 성령이 와서 알려주되 십자가 질 때 우리가 한 거 아무 것도 없고 부활할 때 우리 손 안 댔지요. 성령 올 때 성령 달라 할 때 왔습니까? 아니지요.
그럼 성령이 왔다는 말은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소급해서 주는 거에요. 주게 되니까 나에 대한 실상이 훤하게 다 드러나는 겁니다. 아 내가 이렇게 지렁이 같이 나만 챙기고 내 생각만 고집했고 이게 진리인줄 알고 내 안식일 해석이 옳은 해석인줄 알았구나. 6일 일하고 하루 쉬면 6일 일하고 하루 쉬면 그게 안식일 지키는 줄 알았구나.
십자가는 인간의 일관성 속에 없는 사건이에요. 인간이 알아서 하면 십자가 사건 자체가 일어나겠어요? 안 일어나겠어요? 안 일어나요. 십자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인간들은 깜깜이에요. 깜깜이. 깜깜이여야 돼요. 여러분 서울 시장이 허경영이 될 줄 알았어요? 몰랐어요? 나 서울 시장 허경영이 나올 줄 몰랐어요.
서울 시장 허경영이 된다면 공중부양하는 허경영이 된다면 이건 아무도 예상 못하는 허경영 본인도 예상 못했어요. 본인도 예상 못할 거란 말이죠. 허경영보다 더 하찮고 우습게 여기는 자가 누구냐 하면 예수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에요. 왜? 우리의 본성에 안 맞아요. 그걸 우리가 성령 받고 난 뒤에 소급해서 평생토록 그걸 절감하는 일이 남아있는 거에요. 예수 믿는데 왜 내 뜻대로 안 해줍니까? 라고 하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 바로 이 소리, 예수 믿어줬는데 왜 내 뜻대로 안 해줍니까 이 소리가 터져 나오도록 세상에 이게 복이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가 “야곱아.” “예.” “너 나한테 거짓말했지?” “거짓말했습니다.” “거짓말했어? 안했어?” “했어요.” 아버지도 웃고 야곱도 웃고 우는 자 누구 밖에 없습니까? 에서밖에 없어요. “너 복 몽땅 가져갔어? 안 가져갔어?” “거짓말해서 몽땅 가져갔습니다.” “형한테 줄 거 남아있어? 안 남아있어?” “하나도 안 남아있어요.” “이 거짓말쟁이.” “감사합니다.”
그 복 받는데 자기의 행함이 선한 행함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 그걸 야곱을 통해서 보여주고 그걸 야곱은 몽땅 차지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에 없었어요. 일말의 형한테 약간 남겨줬으면 좋겠어요. 양심상. 자기가 거짓말했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은 그게 아니에요. 몽땅 다 가져가요. 몽땅.
그래가지고 나중에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야곱이 “형님 몽땅 다 가져가세요. 이딴 거 몽땅 다 가져가세요.” 형이 안 받아요. 형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 속여서 나한테 올 재산을 원래 200억 재산이 누구한테 가야됩니까? 박수홍한테 가야되는데 형이 그걸 다 가져갔잖아요. 박수홍 말에 의하면. 그러니까 박수홍이 화나는 거에요. 야곱이 그런 인간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인간이에요.
감사 안 할 수 있겠어요? 주께 고마워 안 할 수 있겠습니까? 허경영인데. 인간들이 내가 원하는 지혜와 지식을 제공하지 않아요. 내가 아는 모든 지혜와 지식은 나의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용도로 전부 다 제로가 다 되어서 들어와요. 나의 일관성, 내 잘남의 일관성을 유지하는데. 내 잘남을 내 의를 지켜주는데 모든 게 다 들어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십자가 사건은 거기에 못 들어오지요. 우리는 십자가라는 지식을 얻을 뿐이지 실제로 십자가라는 그 현실 자체가 우리에게 못 들어올 뻔 했는데 성령이 들어오니까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본격적으로 십자가가 이런 것이라고 우리에게 체험케 해주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믿음에 화합하는 거에요. 이제 마지막 남은 어려운 겁니다. 마지막 남은 어려운 거에요.
광야라는 공간을 백성들은 생각했어요. 광야 지나면 약속의 땅에 젖과 꿀이 흐른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 만날 거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안식이라는 이 시간이 뭘 주관했습니까? 이 시간이 안식일 시간이 여기에 애굽 있고 광야 있고 공간적으로 여기에 약속의 땅 있지요. 약속의 땅이 여기 있잖아요. 시간이 개입해버리니까 이 안식의 때가 갈수록 점점 더 멀어지게 된 거에요.
왜냐하면은 네가 율례와 법도를 안 지켰다 이 말이죠. 실제로 광야에서 안식일이 개입된 게 있지요. 뭐냐하면은 만나를 평소에는 만나를 내리되 무슨 날에는 만나를 안 내립니까? 안식일에는 만나를 안 내리지요. 그러니까 이 백성들이 안식이라는 공간을 찾을게 아니고 안식이라는 시간이 갖고 있던 품고 있던 그 의미를 알아야 돼요. 그 의미는 십자가를 경유한 의미입니다. 죽은 인간이 무슨 희망을 가져. 살려도 내가 살려 내가. 내 일방적인 나의 의로 너를 살린다고.
그런데 그 광야의 사람들은 십자가를 경유한 그 모습, 의미를 못 받아들였단 말이죠. 그러면 갈렙과 여호수아는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 갈렙과 여호수아는 자기 실력이 아니지요. 믿음의 화합에서 된 거죠. 그 믿음 어디서 나왔습니까? 미래의 그 십자가의 그 연결점이 여호수아와 갈렙에게 믿음이라고 준 겁니다. 갈렙과 여호수아가요 바보 등신이 아니에요. 약속의 땅에 있는 그 민족이 우리보다 힘 쎈 거 충분히 알아요. 생생하게 알아요. 그리고 우리 실력으로 못 들어가는 것도 누구 못지 않게 충분히 알아요.
그런데 바로 주님 주신 믿음은 못 들어가게 함으로서 비로소 못 들어가게 함으로서 주께서는 못 들어가게 한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는 그것을 주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들어가게 돼요 그게. 내 이름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광야에서 가져야 될 믿음이었단 말이죠. 왜? 만나가 하늘에서 오잖아요.
요한복음 6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떡 달라 할 때에 모세는 광야에서 만나를 주었거니와 모세는 광야에서 만나를 주었다라고 이야기했지요. 내가 주는 것은 모세 만나가 아니라 생명의 떡이라 했습니다. 그들 다 떠나버렸어요. 왜냐하면 떡을 먹고 그들이 몸이 있고 인간이 요구하는 것은 내가 일단은 살아야 된다. 살려면 떡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뭐냐? 너희들이 먹어야 될 것은 네 몸이 필요한 네 일관성이 주장한 떡이 아니라 내 살과 내 피다 이야기할 때 그 소리 듣고 뭐가 됐습니까? 그들은 모두 안식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주님의 말씀의 의미는 “다 이루었다”에서 나와요. “이루어라”가 아니라 “다 이루었다”에서 나와요. 그 이루었다가 이룰려면 나를 주님께서는 부정해버리는 겁니다. 우리의 자리를 드러내버려요.
오늘 제목을 안식과 안심입니다. 오늘 좀 안심됐습니까? ‘안식과 안심’. 안식 안에 안심하라가 들어있다 이 말이죠. 내가 혼자 다 할테니까 너는 변주나 울려라. 너는 나의 소리나 되어라. 외쳐라. 우리가 못한 일을 주께서 하셨다고. 그러면 우리가 왜 못하는지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말씀은 우리가 지킬 때만 실현되는 게 아니고 말씀은 십자가의 주님이 스스로 주님의 십자가 내용을 품고 스스로 부풀어 오르는 거에요. 모든 것이. 그래서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마지막 끝으로 말씀드릴 것은 오늘 다윗 이야기 나오거든요. 다윗 나와요. 여기 누가복음 6장에 보면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죠. 이 점을 다윗은 어떤 존재다?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한다. 다윗은 제사장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지요. 제사장 아닌 자는 먹지 못하는 떡을 누가 먹었어요. 다윗이 먹었지요. 이것은 그들이 아는 일관성을 깨는 겁니다.
먹는 자가 제사장이 될 것이다. 다윗이 제사장이고 왕이에요. 모든 것은 결과적으로 주님은 미리 결과적으로 안식일을 해석한 겁니다. 인간들은 미처 그것을 되 봐야 알지 이런 식으로 기다리고 있고. 성령이 왔다는 것은 다 이루어진 영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다 이루어짐을 증거하기 위해서 찾아오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 말씀을 해석해서 내 것 만들어서 구원받겠다는 이것이 에서가 한 얍삽한 짓이고 저주받을 짓인 것을 이제야 우리가 알았사오니 그저 하나님께 고맙고 감사한 맘으로 주님 말씀에 주님 하신 일에 호응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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