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해
2021년 5월 23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3:5-6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3: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성도에게는 이미 생명은 여기에 없습니다. 딴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살려낼 꺼리도 없고 미련둘 것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무겁게 들리신다면 뭔가 여전히 자아에게 미련두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주님 제발 이 육신을 잘라내어 주시옵소서”가 되지 않는 자에게 오늘 본문은 무겁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 세상에 미련두지 말아야 될 이유는 한결같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 때문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원칙을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이 세상에 적용시키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이 ‘죽으리라’를 유발시키는 경우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목숨 끊어지는 것이 죽음의 다가 아닙니다. 계속해서 이 선악처벌의 원리를 확대시켜 나가게 되면 결국은 “저주받으리라”고 귀결됩니다. 그리고 선과 악의 구별이 인간 세계에서 어떤 석으로 유포되는지도 보게 하십니다. 인간 세계는‘세상’ 따로 ‘나’따로가 되지를 않습니다.
인간의 자아란 모두 세상으로부터 유입된 내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세상은 선과 악을 놓고서 경쟁하고 대결하면서 게임을 벌이고 있습니다. 일종의 놀이입니다. 즉 승부 끝장을 보겠다는 놀이에 모든 분야가 다 빠져들어가 있습니다. 이 놀이에는 규칙이 설정되어 있고 그 규칙이 주는 통솔력에 사람들은 흔쾌히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 세계의 게임의 규칙에 인간들은 자발적으로 응집력을 보입니다. 그리고 그 통솔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승자와 패자가 수시로 나뉘어지는 그 게임의 즐거움에 빠져듭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단순한 관람자이기를 바라지만 세상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고 실제 경기에 임하게 합니다.
그게 더 실감나고 짜릿합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세상을 그냥 바라보는 처지에 있지 않고 그 자신이 ‘세상의 일부’입니다. 세상 따로 나 따로가 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굳이 세상을 향하여 선과 악을 따로 나눈다는 것이 참으로 부질없는 조치입니다. 세상을 보고 나를 보고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 둘 곳없어 하나님께서 나온다고 하지만, 실제로 성경을 달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편과 세상편이 아닙니다. 십자가와 나머지 모든 세상은 맞은편에 다 모여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지신분은 오직 예수님 한분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이 인간 세상에 ‘구원은 없다’가 됩니다. 예시당초 인간은 죽어 마땅하지 결코 ‘살아 마땅한 존재’가 아니었던 겁니다. 이런 세상이해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엄청 쏟아내셨습니다.
마태복음 8:21-22에 보면,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은 죽은 자로 보십니다.
오늘 본문에 봐도, 5-6절에 봐도,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이 하나님의 불이 떨어지게 되어 있는 벌판이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여전히 미련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 자체가 세상의 일부가 되어 망하는 것을 강력하게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즉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육신 자리를 중심으로 보고 세상 읽기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은, ‘나를 계속 세상에 붙여 있기 위한 세상’이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합니다. “나를 떠나보내는 세상으로 이해하라”는 겁니다.
누가복음 9:62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미련두는 것은 그동안 자신이 할 수 있다고 믿는 ‘가능성’으로 매일매일을 지탱해 왔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분야가 다 인간의 가능성을 요구하는 분야입니다.
그런 업종에 종사한다는 것은 전심전력을 다하여 자신의 가능을 총개발하도록 요청받는 현장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살아온 바가 이런 가능성과 가능성읠 연결로 살아왔기에 이것을 한꺼번에 버린다는 것은 자아로서 나무나도 원통하고 분하고 화날 일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은 여전하며 이것이 바로 사리사욕이요 탐심이요 우상숭배입니다.
이런 인간들 중에서 특정 사람들을 천국으로 데려가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일까요? 구원이 없는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는 ‘죄사함의 기능자’로서 오셨습니다. 이 기능의 파트너로서 필요한 인물을 일방적으로 선택해서 차출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십자가 관계 속에서 십자가 사건은 매일같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사건은 그동안 가능성으로 연결된 삶에 불가능성이 튀어나오는 바가 됩니다. 즉 자진해서 자신의 가능성을 절망으로 바뀌는 겁니다. 이 절망을 흔쾌히 받아들여야 더 이상 자신으로부터 시작한 것이 종결되고 예수님으로부터 새로 시작한 바가 되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인간의 약점을 일짝감치 파악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모르는 인간의 약점이란,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당해야 될 대상이라는 겁니다. 악마는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 인간 스스로에게 자기 의로서, 자기 착함으로 버티기를 강요해 왔습니다. 이 가능성 있는 그 결과가 곧 십자가 사건입니다. 성경은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주님의 십자가 앞에다 세웁니다. 그 앞에서 성도는 여지없이 죽은 자였음이 확인됩니다. (계 1:17) 그리고 죽은 예수님으로부터 다시 사는 능력을 부여받게 됩니다. 열왕기하 13:20-21에 보면, “엘리사가 죽으니 그를 장사하였고 해가 바뀌매 모압 도적 떼들이 그 땅에 온지라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도적 떼를 보고 그의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로지 가능성으로만 이 세상에서 패배자가 되지 않으려는 자에게는 부활의 힘이 나타나는 이 불가능한 경우가 발생되는 겁니다. 따라서 매사에 성도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감사합니다. 그동안 놓쳐버린 감사를 모든 일 속에서 찾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거기에 ‘그 나라와 의’가 나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 더 머물고자하는 식으로 생활하지 않게 하옵소서. 나의 희망과 기대에 스스로 낚이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9강-골 3장 5-6절(세상이해)210523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3장 5-6절입니다.
골로새서 3:5-6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둘로 그 구조를 나눴습니다. 위엣것과 아랫것을 나눴습니다. 3장 2절에 보니까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렇게 나눠진 입장에서 우리의 생명은 이미 하늘에 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라 하는 것은 성도를 말하는 겁니다. 성도는 생명이 하늘에 감춰져 있습니다. 그러면 나타난 것은 뭐냐? 땅에 있는 우리의 지체는 여전히 땅에 속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이 땅에 있는 지체를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죽이라, 라고 되어 있어요. 죽이라는 말의 뜻을 알려면 살려주지 말라는 겁니다. 아주 패서 죽여버려라, 그런 뜻이지요. 살려두지 말라. 죽이라는 말보다 더 강력한 말이, 쓸데없는 것들이 덜렁거리면서 네 안에 걸치고 있으니까 그걸 잘라버리는 거지요. 굉장히 사도는 아주 강력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이미 얻었잖아요. 이미 생명을 얻었는데 쓸데없는 것들이 덜렁거리고 쓰레기 같은 것들이 자꾸 붙어 있는 거예요. 죽여라, 잘라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기관차가 있는데 객차가 너무 많이 10량 20량 붙어 있어서 언덕을 못 올라가요. 그러면 대책은 뭐냐? 기관차와 객차 사이를 잘라 버려야지요. 하늘에 갈 것은 하늘로 올려보내야지 땅의 것들 때문에 하늘에 못 올라가는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 말이.
또 다른 예를 들게 되면 배를 항구에 정박시켰는데 무거운 쇳덩이 닻을 내려놨다는 말이지요. 이제 항구를 떠날 때가 되었는데 그놈의 닻 때문에 배가 항구를 떠나지를 못하는 거예요. 닻이 뽑히지를 않았어요. 이 세상에 꽂혀 있는 뭔가 미련 둘 만한 것이 꽂혀 있기 때문에 뺄래야 뺄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의 생명은 하늘로 가자 하는데 우리는 이 땅에서 그렇게 뭐 가진 정이 많아요. 미련이 많아 가지고 이 육신을 빼지를 못해. 그게 뭐냐 하면, 이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욕, 사적인 욕심에 해당되는 거예요. 이게 세상에 대한 엮인 탐심에 해당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절이나 기도원에 가서 가슴을 치면서 부족하나이다, 부족하나이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차 뒤에다 그런 문구 붙여놓고 그러면 되는가? 그래도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이 세상의 일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하고 나하고 안 떨어져요.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 지체, 나라는 육신의 생각, 이 지체의 사리사욕, 탐심, 이 모든 것이 타인과 관련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인간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이 세상은 하나의 인간이 노는 놀이판이에요. 놀이에서 항상 관점은 승자가 되는 것 내가 패자가 아니고 이기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기는 그 놀이에서 발을 빼버리면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비겁한 자로 간주해서 이 게임판에서 발을 못 빼요. 늘 이겨야 되고 지면 안 된다는 것을 자기가 자기를 계속 학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생은 놀이하는 식으로 시간을 다 보내는데요. 우리가 놀이한다, 세상 속에서 게임한다는 것을 언급했지만 ‘무슨 게임을 해? 나는 나대로 살지.’ 하는데 막상 놀이와 게임에 대해서 방해를 놓으면 인간이 화를 낸다고요.
어린 청소년들이 자기 방 걸어 잠그고 게임하고 있는데 엄마가 강제로 문 따고 들어옵니다. 두 시간 들여서 한 게임의 마지막 그 승리의 순간에 플러그 확 빼버리면 그 애 기절합니다. 왜 내 게임판에 엄마가 왜 끼어드느냐는 말이지요. 게임에는 인간들이 모여서 반드시 규칙을 세우고 그 규칙에 대해서 인간들은 본의 아니게 응집력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규칙의 통솔에 대해서 이미 길들여진 거예요.
이 세상에 대해서 인간이 길들여진 겁니다. 세상에서 발을 못빼는 이유는 세상이 말하는 그 게임의 규칙이 어느새 내 자아가 그 규칙의 일부가 되어서 같이 놀아나는 거예요. 공장현장에서 맹렬하게 기계가 돌아가는데 만약 옷의 소매자락이 기계에 끼어 들어가면 본의 아니게 그 기계에 말려들어서 그 기계의 일부가 되는 것처럼 인간세계라 하는 것은 이미 인생 전부가 그 게임판에 말려들었어요. 빼도 박도 못해요.
혼자 도 닦고, 혼자 착하고, 혼자 간음 안 하고, 혼자 욕심 없이 산다고 산속에 들어가서 자연인 되겠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자연인 되었다 해도 장날 되면 업장에 나와서 중국산 약초하고 게임 벌여야 됩니다. “약초값 왜 이렇게 떨어졌습니까?” “중국산이 많이 들어와서 그래요.” 갑자기 게임판에 대한 화가 확 난다는 거예요.
‘나는 순수한데, 나는 혼자서 착하게 살았는데.’ 착하게 산다고 구원되는 것 아니에요. 이 세상에 대해서 나와 타인, 나는 깨끗하고 남은 세상은 더럽다. 그런 식으로 대비시키지 마세요. 그것은 정말 잘못 생각한 것이고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가스펠 송에 이런 것이 있지요. 나를 보고 세상을 보고 사람을 봐도 마음 둘 곳 없다 하는 것이 있지요. 나를 보고 세상을 봐도 마음 둘 곳이 없고 타인을 봐도 남을 봐도 마음 둘 곳이 없는데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 마음을 둬야 된다는 그런 가스펠 송이 있거든요. 그거 가사 잘못됐습니다. 하나님 봐도 마음 둘 곳이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이 세상은 십자가 사건이 터졌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 사건이 없고, 하나님 있고 세상이 있고 타인이 있고 내가 있다면, 하나님도 믿고 나도 믿고 세상도 믿고 친하게 지내면 만사가 잘 돌아간다. 그런 결론에 도달되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 없다면. 그냥 하나님 하늘에 계시고 나 여기 있고 바르게 살고 복 받고, 그렇게 하게 되면 아무 문제 없는데 성경에 보면 십자가 사건이 터져 버렸어요.
십자가 사건이 터져버리면 예수님 빼놓고 다 저쪽에 가요. 예수님 빼놓고 다 세상입니다. 이게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은 세상 게임판에서 모든 인간이 이구동성으로 동의한 그 세상 규칙에 의해서 예수님이 살해된 사건이에요. 교회에서 십자가 사건을 빼버리니까 그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존재가.
‘옛날에는 세상만 보고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 믿고 살아야지.’ 그래도 소용없어요. 그렇게 되면 같은 세상이에요. 우리가 세상 이해를 해야 됩니다. 나 이해하기 전에 세상 이해부터 먼저 해야 돼요. 사람이 답답한 일이 생기고 괴롭힘을 당할 때 항상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 일이 나에게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 이걸 먼저 계산할 수밖에 없어요. 자아가 있는 이상은.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 그런 괴롭힘을 당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내가 어떻게 세상을 이해하느냐를 다시 보게 하는 겁니다. 내가 이익이냐 손해냐가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가? 골로새서 3장 3절에서 5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내가 이해하고 있는가? 내 생명은 이미 하늘에 있다는 것, 그런 세상관으로 보고 있는가를 본인에게 확인시키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가? 나를 지키기 위한 세상이해가 되면 안 돼요. 이 세상에서 나를 지키고자 하는 세상으로 이해하면 안 되고 나를 떠나보내는 세상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떠나보내는. 세상에 대한 미련과 집착 이런 것들로 어느새 우리는 게임판에 이미 길들여졌고 이미 물들었습니다. 이상하게 지면 기분 나쁘고 이상하게 이기면 기분 좋고.
이게 벌써 세상과 나가 한통속이라는 거지요. 그러면 예수님 십자가 지고 난 뒤에는 예수님 혼자 한편이고 나머지기는 전부 다 이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믿는 사람한테 죽었잖아요. 하나님 믿고 안 믿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지금. 이쪽 편은 전부 다 자기 잘났다는 세상뿐이에요.
세상이 돌아가려면 타인도 필요하지만 나도 같이 끼어들어야 세상이 돌아가는 겁니다. 종교라는 것도 마찬가지지요. 세상은 내가 기대하는 나에게 내가 안 지려고 버티고 있는 거예요. 바보예요 바보. 세상에서 안 지려고 내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그 기대를 떡 본인이 설정해놓고 내가 그걸 따라 붙여야 된다고 오기를 부리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나의 희망과 기대에 낚이면 안 됩니다. 그게 사리사욕이고 그게 탐심이에요. 그게 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이 세상의 생리요 속성입니다. 성도의 특징은 도무지 누굴 이길 이유가 없어요. 누구와 경쟁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누가 나의 지체를 괴롭히면 ‘가져 가, 가져가. 쓰레기 가져가.’ 그냥 줘버리세요. ‘나도 잘 안 떨어지는데 잘됐다. 네가 와서 그만 가져가라.’ 그 말이지요. 이 폐기물.
도대체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기에 우리 주님을 죽여서 퇴출시켜야 될 그런 속성인가? 그 세상 이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 이해는 성경을 통해서 어떻게 하는가? 이미 선악을 아는 지식의 열매를 따먹으면 그것은 이미 죽으리라 확정되어 있어요.
선악체제로 돌아가는 세상, 그 선악체제가 창세기 3장으로 마감된 것이 아니고 그다음부터 이 세상에 내려올 때는 그 선악체제 다시 말해서 “……를 하게 되면, 따먹게 되면 죽으리라.” 그것이 점점 더 심화되고 확장이 되게 되면 네가 “……를 하게 되면 죽는다.” 정도가 아닙니다. “네가 ……를 하게 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또 다른 말로 하면 “네가 이런 짓 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 그런 식으로 계속 변형되어 가는 거예요. 이 세상이.
그게 오늘 본문 6절입니다. “이것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그 죽음의 내용이 드디어 그것이 노출되는 겁니다. 그 실상이 그 독성이 퍼지는 거예요. 이걸 누가 아느냐? 예수님 혼자만 알았어요.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의 세상임을, 사람들이 얼마나 거기에 미쳐서 거기에 집착하면서 그것 때문에 인생의 보람을 건다는 것을 주께서 아시고 주께서 말씀하실 때 아주 냉정한 말씀들을 성경구절에서 주님은 쏟아내고 있습니다.
어떤 제자가 예수님 따르고자 할 때 날 따라오너라, 했어요. 그러니까 어떤 제자가 따라가겠습니다, 해놓고는 막 따라가려는 그 시점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제자가 자기의 정당한 사유를 댑니다. “따라가고 싶었는데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야 되기에 못 따라가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예상밖에 답변이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마태복음 8장 21절입니다. 이 말씀을 돈좀 있거든 액자로 해서 집안 거실에 걸어놓으세요.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일괄적으로 세상 모든 인간존재를 죽은 자로 확정지어 버렸습니다. “죽은 자들끼리 노는 그런 의식이 뭐가 중요하냐? 너는 생명이 중요하지.”
죽은자들끼리 보란 듯이 의식을 하는 그것이 뭐가 중요하냐는 말이지요. 내가 왜 왔는데. 이 땅에 예수님이 왜 왔는데요. “그냥 너희는 추상적인 하나님만 쳐다보고 있지? 아니야. 그것은 엉터리 하나님이야. 나, 직접 온 하나님이 너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똑바로 살아라, 가 아닙니다. 네가 속해 있는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와 불심판이 떨어지는 지평, 평지다, 그 말입니다. 종교가 무슨 소용 있어요? 아무 소용없어요. 기독교가 무슨 소용이 있어요? 교회 다닌다. 그것은 놀이예요. 그것은 오락이에요. 하나님 거론하고 바르게 살면 복 받습니다. 이러한 사기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자꾸 발휘해요. 이미 안 되는데.
성경 말씀에 보면 이 세상은 구원은 없습니다. 인간은 구원 없어요. 이미 선악과 체제로 죽음을 확인할 뿐이지. 여기 구원받을 만한 의인이 있네.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구원받을만한 사람이 있으면 선악체제가 무너져요. 이미 선악체제의 그 후손들 같으면 이미 다 저주받고 진노받고 지옥가고 죽어야 마땅한 자들이에요. 어느 누구도 구원이라는 말을 끄집어내지 마세요. 구원이 없는데 뭘 끄집어내요?
구원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과 흥정할 대상이 아니에요. 구원은 흥정할 내용도 아닙니다.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어야 흥정을 하지요. 이렇게 하면 구원해줄게. 그런 것 없어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아무도 없는데 구원자의 시발점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이 되어서 오셔 가지고 그 예수님이 하는 기능이 뭐냐?
죄사하는 기능을 통해서 구원을 해주는 기능자가 와요. 구원은 없는데 구원시켜줄 분이 이 세상에 오는 거예요. 죄사함을 통해서. 그러면 구원되는 자는 어떤 자냐 하면, 파트너에요. 예수님의 기능을 기능답게 활용하기 위해서 초청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구원받을 자격이나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하신 일을 받쳐주기 위해서 같이 호출당한 사람들입니다. 파트너로서. 네가 어느 직장에 다니거나 농사를 짓거나 뭘 하든간에 그 현장에서 예수님만이 죄용서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라고 그 직장을 허락하신 겁니다.
그 직장이 허락되려면 어느 직장이나 어느 교회든 구원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아예 없는데 인간들이 마귀가 구원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성경책 보고 참고해서 천국을 만들어낸다는 그 가짜현상을 네가 목격하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시체, 시신밖에 없어요.
제가 어릴 때 동네에 심심하다 싶으면 터져 나오는 것이 부부싸움이거든요. 오밀조밀한 동네 에 살았으니까. 특히 대구 비산동 그 동네는 세 들어 사는 사람도 많고 5, 60년대 사람들이 밀집해서 살았습니다. 늘 부부싸움이 많았지요. 소리가 다 들려요. 창문으로 내다보면 다 보인다고요.
여자가 남편 옷자락 붙잡고 “네가 어느 여자하고 자고 이제 집에 들어와~!” 하기도 하고요. “죽어, 죽어, 죽어~! 못 살아, 못 살아.” 옛날 여자들은 잘 못 먹어서 그런지 덩치도 작고 왜 그렇게 약해요? 남자가 “이게 왜 그래?” 하고 툭 잡아채니까 툭 떨어지면서 의자 모서리에 부딪혀서 뇌출혈 일으켜서 병원에 실려 가고요.
큰딸이 있다가 “아빠, 나빠!” 하니까 남자는 꼴에 하늘이라고 큰소리치거든요. “이 여편네가 가정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딸년이 아빠한테 대드나?” 하면서 “너도 맞아라. 철썩!” 그다음 날 얼굴 벌겋게 되어서 교복 입고 학교 가고. 죽어, 죽어, 하는데요 이게 새삼스럽게 죽으라고 할 문제가 아니고 벌써 너도 죽었어요. 부부관계든 자식이든 전부 다 시신과 시신의 만남이에요. 뭘 새삼스럽게 죽어요? 이미 죽었는데.
죽은 시신과 시체의 만남은 고체와 고체의 만남입니다. 고체와 고체의 만남에서 정말 힘을 발휘하는 것은 게임이고 놀이고 그 놀이의 규칙은 뭐냐? 돈 버는 것이 승자에요. 사람이 큰소리치는 게 아닙니다. 돈이 큰소리치는 거예요. 세상이 아무리 인정사정없어도 그렇게 냉혹해도 세상이 굴러가는 이유는 거대한 자본력 때문에 그래요. 비트코인? 거대한 자본력이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거예요.
사람의 정이고 초코파이 나누고 어쩌고……, 이게 돈이 있어야 그 사람이 사람 대우받습니다. 시체가 돈 외에는 내놓을 것이 뭐가 있습니까? 시체인데. 인간은 죽었지만 돈은 살아 있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직까지 세상은 매혹의 대상이고 굴러가는 거예요. 왜? 돈이 살아 있다는 그 규칙에 모든 사람이 현혹되어 있기 때문에. 이게 선악과의 확장이 아닙니까?
사람이 죽었다. 이 세상에 미련 두지 말라는 것이 누가복음 9장 62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땅은 아래 있고 하늘은 위에 있잖아요. 땅은 아래 있고 하늘은 위에 있는데 이게 당연한 말이지만 위에 계신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위치가 수직적으로 대비되는 것이 아니고 수평적으로 대비가 돼요.
예수님 가는 곳이 하늘이고 예수님하고 멀어지는 것이 지옥이고,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는 곳이고. 그러한 세상 보기 예수님의 안목입니다. 그 예수님의 안목, 성령이 와야 그 예수님의 안목과 동일한 안목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겁니다. ‘아,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게 되면 이게 바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은 거구나.’
그렇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이 세상은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고, 허깨비인 줄도 모르고 그저 고체 된 육신이 있으니까 육신 이것을 살려보려고 하는데 그 살아보겠다는 게 딴 게 아니에요. 게임판에서 이름깨나 힘깨나 쓰는 그것을 살아 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게임판에서.
인터넷에서 퇴출당하면 그것 죽은 거예요. 게임판에서, 이 세상이라는 게임판에서 남에게 지기 싫어하거든요. 게임판에서, 이 세상에서 어떤 자아가 형성되는가? 이 게임판에서 승자가 되어야 된다는 그런 자아상을 이 게임판에서 듣고 어릴 때부터 배웠으니까 그게 하나의 모델로 표준이 되는 거예요. 저게 나답다고 걸쳐놓고 내가 그 표준에 미흡하냐 안 미흡하냐, 그걸 따라 붙이느냐, 본인이 본인을 그렇게 괴롭힌다고요.
옛날 안기부의 기조실장. 옛날 안기부가 그 위세가 대단했지 않습니까? 특히 군사정권 때. 그 안기부 기조실장하고 검사장, 검사 중에서도 높은 사람인 검사장하고 식사를 하는데 검사장이 앉자마자 안기부 기조실장이 막 반말해가면서 사람 면전에서 모독을 했어요. 그러자 우리나 엘리트라는 검사, 사법고시 합격한 그 검사장이 참을 수가 있습니까?
네가 안기부면 안기부지 날 언제 봤다고 함부로 하느냐, 당신 못 사귈 사람이다, 막 할 때 안기부 기조실장이 나직이 이야기해요. “셋째 애는 잘 있어요?” 그 한마디에 검사장이 확 주저앉아 버립니다. 검사장 가정에 애 둘밖에 없는데 혼외자식이 하나 더 있었던 거예요. 안기부에서 뒷조사 다 한 거지요. 약점을 잡는 자가 이 세상의 승자가 되는 겁니다. 물론 실제 이야기가 아니고 <언더커버>라는 드라마 이야기에요.
악마가 씩 웃는 이유가, 악마는 알아요. 선악을 따먹는 자는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라는 것을 알아요. 아는데 인간들은 악마의 사주를 받아서 그걸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악마가 그 각 인간들 배후의 약점을 잡고 조정하면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네가 선하고 착하고 바르게 살고 의롭게 되어야 너는 천국 갈 수 있다고 교회를 통해서, 세상 윤리 도덕을 통해서 우리한테 양심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세뇌를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의 기존 양심을 갖고 있는 거예요. 만약에 하나님께 벌 받으면 나는 망한다고. 그러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망하면 나한테 손해라고 생각하는데 복음 알면 여러분은 이것도 기본적으로 갖춰야 되는 거에요. 우리 인생은 손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몸이 아파도 손해 본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디모데전서에 의하면 우리는 태어날 때 아무것도 없이 태어났어요. 디모데전서 6장 7절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건강도 재산도 없어요. 손해라는 것은 누가 준 인식이냐 하면, 우리의 약점을 쥔 악마가 계속 약점 잡기 위해서 우리에게 준 어떤 무거운 의식 같은 겁니다. 하, 우리가 똑똑하다고 우기지만 얼마나 속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작품에 보면 아주 명쾌하게 이야기한 작품이 있어요. 인생은 쇠사슬이다. 제가 어릴 때 교과서에 실린 작품입니다. 찰스 디킨스의 1843년 작품인데 <크리스마스 송가>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어요. 거기에 스크루지 영감이 등장해요. 스크루지 영감이 동업자하고 장사하다가 동업자가 죽고 난 뒤에 말리라는 그 동업자가 유령이 되어서 나타나지요.
스크루지 앞에는 붙는 유명한 게 있어요. ‘구두쇠’ 스크루지. 그의 꿈에 자기 모습이 나타나는데 쇠사슬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거예요. 꿈에 망령이 나타납니다. 너의 과거 모습과 현재 모습과 미래모습을 말리라는 동업자의 유령이 알려줍니다. 그날은 크리스마스이브입니다.
스크루지의 착했던 소년 때의 모습, 여동생과 함께 있으면서 거기에는 프레드라는 이름의 조카도 하나 있고요. 그렇게 착했던 과거의 모습을 보여주고요. 그리고 현재의 모습을 보여줘요. 함께 일하는 직원이 있어요. 서기라고 할 수 있지요. 그 서기가 그 추운 사무실에서 벌벌 떨어요. 석탄 한 조각 다 때면 연료가 떨어져요. 박봉에 어렵게 사는 그 서기.
사무실에서는 그렇게 벌벌 떨면서 춥게 일하지만 집에 가면 그나마도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그런 현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죽은 여동생이 낳은 조카가 하나 있는데 그 조카를 삼촌이 되어서 안 도와줬어요. 안 도와줬지만 조카는 그래도 스크루지 영감을 비방하지 않고 좋게 이야기하는 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건 현재의 모습이고요.
세 번째 미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스크루지 본인이 쇠사슬에 묶여서 죽었는데 장례식에 아무도 안 찾아오고 온 동네 사람들이 기뻐하는 거예요. 저 구두쇠 영감이 죽었다고. 그걸 딱 보여주고 네가 어떻게 살래, 하는데 깨어나 보니까 그날이 크리스마스에요.
스크루지 영감은요 메리 크리스마스, 그런 소리도 듣기 싫어하는 영감이에요. 그런데 크리스마스날 아침에 깨어나서는 서기한테는 칠면조 한 마리 보내주고요. 실제로 그 작품에 나오는 직원 같은 분이 의존교회에 참석한 사람이 있어요. 이름은 모르겠지만 만나면 구두쇠 사장 욕하는 사람 있어요. 딱 그 모습이 연상돼요.
그런데 스크루지가 성탄절에 잠에서 깨나서는 직원한테 칠면조 보내주고 조카한테 간만에 찾아가서 위로도 해주고 그런 새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에요. 유명한 구두쇠 스크루지 이야기. 거기서 제 눈에 뜨인 것은 개과천선했다, 인간성 살리자, 그 이야기가 아니라 쇠사슬이에요 쇠사슬. 무거운 쇠사슬.
마태복음 여러분도 잘 아시지요. 11장 28, 29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 세상에 대한 유혹을 억지로 떨치려고 하지 말고 세상 자체를 가볍게 봐야 돼요. 세상 자체를 소소하게 봐야 돼요.
왜? 소소하게 보는 가운데서 놓쳤던 감사가 나오기 때문에. 고마움이 나와요. 어차피 우리는 손해본 적이 없어요. 이 세상에서 손해본 적이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이 육신을 어떻게 떨쳐버리느냐? 어떤 마음가짐으로 해야 땅엣 것을……, 패서 떨쳐버릴 수 있다면 패겠지만 패도 안돼요. 패도 안되고 타인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날 때린다고 해서 내 마음이 깨지지 않아요.
세상 전체가 같이 엮여 있기 때문에 날 친다고 세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주님을 쳐버리면 세상이 저주받아요. 주님과 세상이 엮여 있기 때문에. 심판으로. 그러나 날 친다고 해서 세상은 끄떡없어요. 나 하나 죽어도 세상에 아무 일 없습니다.
에고, 에고,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그래 봐야 얼마 들어왔나, 돈이나 세고 있고 장례식 끝나고 난 뒤에는 아버지 유산 왜 네가 다 가져가나, 싸움이나 하고요. 아버지 돌아가야 아무도 관심도 없어요. 이것을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할 수 없는 것을 해내는가?
주님께서는 일단 인간들이 이 세상의 삶을 분명히 보게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가능성의 세계에요. 어떤 사람은 과학에 종사하고 어떤 사람은 물리학, 생물학, 어떤 사람은 화학, 언어학, 각자 자기 전공 분야에 종사하지만 이 세상 모든 학문을 조사해보면 그것은 무엇으로 하루하루 연결되어 있느냐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한 줄로 세운 겁니다. 쇠사슬처럼 연결된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다.
인간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요. 버스 운전, 내가 할 수 있지요. 내가 할 수 있는 걸로 계속 연결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연결하니까 마귀가 계속 할 수 있는 나를 부추겨줘요. 계속 할 수 있는 것을 부추겨서 내가 할 수 있는 그 연결체, 연합체에 대해서는 내가 돌아서면 아까워서 그걸 못 버려요. 그래서 나를 부정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지금껏 들인 나의 공적이 너무 많아서.
그러나 예수님 입장에 의하면 내가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하는 그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의 진노를 더욱더 가중시키는, 징벌을 가중시키는 하중으로 작용한다는 거예요. 무게감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세상을 버릴 수가 없어요. 왜? 공들인 게 많기 때문에. 이거 아까워서 못 버려요. 이 세상을 지금 떠날 수가 없어요. 아까워서. 이만큼 살아온 것도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데.
어떤 유명한 기념탑이 있는데 한 백여 미터 산 위에 있다. 그걸 보겠다고 올라갔는데 “공사중” 그러면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주님께서는 모든 가능성을 뭐로 바꾸냐 하면, 이것을 절망으로 바꿔버립니다. 네가 절망, 더 이상 나의 나다움이 완전히 와해되고 붕괴되는 그 절망을 네가 선뜻 받아들여야 된다는 거예요. 나의 절망을.
받아들일 때 예수님부터 새로 시작해요. 예수님부터 새롭게 시작할 수가 있는 겁니다. 아직도 희망에 낚이면 안 돼요. 나는 이렇게 될래, 라는 그 희망에 목표와 목적에 매이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기차 타고 가게 되면 이런 장면이 나올 거예요. 기차가 달리는데 옆에 고속도로가 같이 달리는 경우가 있어요.
물론 고속철도는 시속 3백 킬로 가까이 달리기 때문에 게임이 안 되지만 유럽에 가보면 벨기에나 이런데 보면 파리로 가는 고속도로하고 기차하고 나란히 가거든요. 제가 가봤습니다. 장시간 동안 죽 갈 때 기차하고 차하고 나란히 경쟁하는 것을 보는 게 재미나요. 기차도 차도 한 시속 150킬로로 달리니까 얼추 비슷하게 가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교회 나올 때 자기 자신이 세상에 살다가 하나님 믿고 귀순했다고 생각하거든요. 포르투갈에 이민 갔다 생각을 못 하고 그냥 귀순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귀순이 어디서 어디로 이동했느냐 하면, 천국으로 귀순한 것으로 여겼는데 보니까 그게 가짜였습니다.
교회 구원이 있다 하니까, 천국이 있다 하니까 지옥 가는 나를 천국에 보내기 위해서 평소에 하는 행세대로 내가 가능성을 발휘하는 거예요. “목사님, 내가 뭐 해드릴까요, 예수 믿을까요, 피 믿을까요? 예, 믿겠습니다.” 평소에 가능성만 한 줄로 세웠기 때문에 계속 가능성만 하는 거예요. 가능성만 하니까 분명히 나는 세상 사람 아니고 성도다, 나는 성령 받아서 천국이다, 하고 왔는데 그 귀순이 헛방이라. 이게 일종의 튀김옷을 입은 것뿐이에요.
사람들은 모르지요. 나중에 들통납니다. 제가 좀 쉬운 이야기 해 볼게요. 여러분은 안 따라해도 돼요. 오리는 꽥꽥, 안 따라 해도 됩니다. 참새는 짹짹, 돼지는 꿀꿀, 강아지는 멍멍, 성도는 그 나라의 의, 이렇거든요. 분명히 귀순해서 성도라 우기는데 입만 열면 멍멍, 입만 열면 돈 찾는다고 꿀꿀, 입만 열면 꽥꽥, 입만 열면 짹짹, 오늘 설교 주제입니다. 짹짹, 꿀꿀.
가짜에요. 가짜입니다. 결국은 갈림길에서 점점 더 멀어져요. 점점 더 멀어집니다. 대화하는데 대화가 안 돼요. 무슨 소리 하는지 대화가 안 되는 거예요. 자기한테 아직도 희망을 걸고 있어요. 자기의 가능성 외에는 내놓을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오리의 가능성은 꽥꽥, 하는 것밖에 없어요. 분명히 무슨 말을 하는데 듣는 사람은 꽥꽥, 으로 들리는 거예요.
예가 너무 적실합니까? 분명히 강아지가 밥 달라고, 사료 달라고 하는데 주인에게는 멍멍, 멍멍, 밖에는 안 들려요. 말 잘 못하는 애가 뭘 이야기하는데 “어어후어어으……” 말을 못 하니까 어어어, 이러고 있어요. 그 나라 의, 이것은 성령 받지 않으면, 이 세상에 대해서 절망을 기꺼이 감수하지 않는 사람 같으면 나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부터 새로 출발해야 돼요.
그러려면 내가 나와 이별해야 됩니다. 나라고 했던 그 시절은 세상이 나에게 안겨준 거예요. 세상이 만들어준 나예요. 그것과 이별해야 됩니다. 이별하려면 우리가 십자가 앞에 죽은 자가 되어야 되겠지요. 하나님의 방법은 바로 우리를 죽이는 겁니다. 우리 육신을 죽이는 거예요. 늙어 죽는 것 말고 지금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장 17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내가 볼때에 그 발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이게 무슨 세계냐 하면 불가능의 세계입니다. 불가능의 세계에요. 가능의 세계가 아니고 불가능의 세계. 불가능의 세계는 어떤 세계냐 하면, 주님이 일으킨 어떤 사태를 통해서 잠시 내 자아를 잃어버리는 순간이 와요.
그 잃어버리는 순간에 나의 가능성도 같이 날려 보냅니다. 그러니까 내가 없어도 될 정도의 기쁨과 감사가 밀려오는 거예요. 이번 일은 내가 일으킨 사건이 아니라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쉬운 예로 얼마 전에 비 왔잖아요. 비 여러분이 만들었습니까? 여러분이 만들어서 하늘에서 내려보냈습니까? 아주 작은 일, 하늘에서 비 오는 것을 볼 때 저 비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누가 일했느냐?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자의식이 강렬했어요. 자의식이 강렬하니까 뭘 놓쳐버렸는가? 하나님이 평소에 지금도 부지런히 일하고 있다는 그 점을 다 놓치고 만 거예요. 인간의 불가능성을 놓쳐버리고 그저 나의 가능성에 모든 것을 매진한 겁니다 ‘암 걸렸는데 뭐하면 될꼬? 건강검진 한 번 더 받아볼까? 입원해볼까?’ 내가 암에서 낫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는 거예요.
그러면 묻고 싶지요. “집사님, 뭐 손해 봤어요? 암 걸려 죽는데 뭐 손해 봤어요?” 무슨 손해를 봐요? 주님의 죄사함을 증거하기 위해서 파트너로 초청되었는데 뭘 손해 봐요? 이 세상에 안 아프고 죽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동안 우리의 과거, 스크루지의 과거 현재 미래처럼 우리의 과거는 도대체 누가 나에게 이런 자아상을, 이 더러운 자아상을, 죽으면 안 된다는 이 고집스러움을 누가 집어넣었어요? 악마가 집어넣었지요.
약점 잡힌 거예요 약점. 왜? 주의 십자가가 다 이루었다, 그거 증거 못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에 감사하지 못하도록 악마가 뒤에서 공작을 한 겁니다. 불가능성을 이야기해요. 오늘 본문의 내용은. 사도바울은 지금 계속해서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본문 골로새서 3장 5, 6절 보면서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가 없거든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어쩌라고요? 우리가 여기서 빼도 박도 못하는데요. 세상이라는 자체가 따로 있으면 너하고 나 안 놀아, 가 되는데 세상이 돌아가는 부분, 일부로서, 부속품으로서 같이 가담되어 있는 입장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가 어디서 오는가를 봐야지요. 그것은 뭐냐 하면, 여전히 내가 가능성 가지고 유지하고 있으니까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진노가 안 올래야 안 올수가 없어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어떤 가사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다 포기 하지 마~”
이게 계속해서 내가 나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세상이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또 다른 모습에 나 살기 위해 몸부림 치는걸. 나 살기 위해 몸부림 치는 걸~” 성진우가 불렀잖아요. 다 <포기하지 마> 잘못 들으면 닭고기 아줌마 되는데. “다 포기하지 마. 나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걸~”
여기에 대해서 그게 아니야, 라고 이의 거는 사람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에 놓여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를 풀어야 되지 않습니까? 문제는 던졌는데 어떻게 풀리는가?
열왕기하 13장 20절 21절이요. “엘리사가 죽으매……” 엘리사가 죽었습니다. “장사하였더니……” 죽어서 장사했습니다. 우리는 엘리사 이야기가 이것으로 끝인 줄 알고 있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사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해가 바뀌매 모압 적당이 지경을 범한지라.” 모압도당이 침범했다. 모압은 지금의 요르단쯤입니다.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 섰더라.” 우리가 아는 죽은 자는 가능성이 종결된 자를 죽은 자라 해요. 죽은 자에게는 어떤 가능성이 없어요. 우리가 세상 살면서 내 가능성이라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고 여길 때 나오는 가능성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십자가에서 나오는 능력이, 죽은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를 살렸어요. 그 증거가 뭐냐? 내가 죽은 자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 생명 안에서 내가 살아 있다는 감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이 놀라운 불가능성, 나는 아무 가치가 없다고 할 때부터 비로소 나는 행복해지는 이 새로움은 또 뭐예요? 어떻게 설명해야 돼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도움입니다.”라고 하는 순간 매사에 놓쳤던 모든 감사거리가 한꺼번에 일어서서 나에게 달려오는 그 기쁨은 이 현상은 도대체 어떤 현상입니까? 교회 한 50명 목회하다가 나중에…… 실제로 그런 교회 있거든요. 한 50명 목회하다가 복음 알고 한 두 명 남은 교회도 있어요. 복음 전한다고 다 떠나버리고 코로나 핑계 대고 두 명 남은 교회도 있거든요.
그럴 때 그 목사님이 그렇게 기뻐하겠어요? 기뻐하는 경우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뭐냐 하면, ‘예수님이 보는 세상이 바로 이런 세상이었군요.’ 이게 바로 나의 가능성이 아니고, 나의 가능성이 죽고 내가 죽을 때 그 자리에 비로소 엄연히 활동해 오셨던 주님의 활동이 우리에게는 불가능성으로 보이는 거예요.
그 불가능에 우리의 태도는 뭐냐? 아멘, 만 필요해요. 아멘 만. 그게 신명기 27장에 나옵니다. 신명기 27장에 보면 이스라엘을 두 패로 나눠서 한패는 에발산 한패는 그리심산에 세웁니다. 제가 거기 가봤습니다. 에발산과 그리심산. 거기 세우고 거기서 축복과 저주의 말을 선포를 하게 되면 맞은편 쪽에서 아멘을 하는 거예요.
야곱의 종의 계열에 있는 쪽이 저주를 발하면 축복 편에 서 있는 쪽에서 아멘이라 화답하고 야곱의 정실부인 자식 쪽이 축복을 발하면 저쪽에서 아멘이라고 화답하는 거예요. 그 세계가 뭐냐? 불가능성만 가득 찬 세계에요. 성도한테는 아멘, 외에는 필요 없어요. 그러면 툭 건드리면 아멘, 아멘, 그래야 되는가? 아니에요.
모든 삶이 나한테 마땅히, 당연히 그랬었어야 했습니다. 식사 당번 잊을 만했습니다. 아멘, 이게 바로 아멘, 이거든요. “오늘은 식사 없습니다. 컵라면 끓여 먹읍시다.” 할 때에 “아멘! 마땅히 마땅히 주께서 그렇게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세상 읽기.
성도는 이 세상을 내가 더 오래 살려고 읽어서는 안 되고 내가 왜 떠나야 될 곳인지, 왜 우리교회를 떠나야 될 곳인지, 떠나서 다른 데로 이민 가는 그런 것 말고, 내가 왜 죽어서 빨리 떠나야 되는데 지금 주께서 안 죽게 하시는 이유는 더 겪어야 될, 더 깨질 자아가 남아 있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인간의 세상에서 우리는 자꾸 내 이익이냐 내 손해냐를 계산하지 마세요. 이 불편함과 이 괴롭힘을 두고 이익이냐 손해냐 하지 말고 이번 기회에 나는 이 세상에 머물고자 하느냐 아니면 훌쩍 떠나고자 하느냐? 이 더러운 세상 잘 먹고 잘살아라. 그런데 내가 떠나는 것이 내 가능성이 아니고, 내가 어떻게 요리조리 머리 굴리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 세상을 떠났잖아요. 떠나시고 다시 찾아왔어요. 자기 백성을 자기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끝으로 말씀드릴 것은 그렇게 할 때 그러면 성도들의 공통점은 뭐냐? 성도들은 피의 공동체에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칫하면 도 닦는게 돼요. 자기를 부인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피를 주목해야 돼요.
그게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옵니다. 1장 13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런 말을 했어요. “나는 당신을 위해서 십자가 지지 않았습니다. 이 사도는 당신을 위해서 십자가 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나 나나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지신 분이 따로 있습니다.” 달리 이야기해서 성경 말씀은 내게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부지런 떨어서 홀로 피 주시고 그 피를 증거 하라고 지옥 가야 될 우리 가운데서 파트너로 성령으로 뽑아냈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죽은 자인데 우리에게 할 일이 생겼습니다. 우리에게 임무가 생겼습니다. 그 임무가 뭐냐?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의 벌판, 불덩이가 떨어지는 벌판인 것을 여러분은 아시니까 이것 증거하는 그 일을 이미 생명이 하늘에 있는 사람인 고로 악마한테 약점 잡히지 마시고 그냥 주의 주신 상황 속에서 바라보면서 혹시 그 뜻의 의미를 푸는 사람한테 요구하면 가감 없이 복음을 전파하면 되는 겁니다.
마귀가 와서 너 뭐 잘났냐고 흔들어대거든 “나는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죄인이다. 됐냐? 죽어 마땅하다. 됐냐? 뭘 시비를 걸어 뭘? 나 죽고 싶어. 됐어?” 이 사도바울의 소원이 저와 여러분의 소원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그동안 어떻게 봐 왔습니까? 게임판에 말려들었습니다. 안 지는 것이 나의 기분을 흡족하게 만들었습니다. 쉬지 않고 살아가는 그게 나의 오기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귀가 잡은 나의 약점이었습니다.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모든 세상의 죽어 마땅함을 이제야 우리는 깨닫게 해주시고 십자가 앞에서 죽은 자로서 이제는 사명이 살아 있으니까 사명대로 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